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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60 호
단기 4340. 9. 18 (음력 8. 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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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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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대한민국 장애인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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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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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는 경향이 있는데,그 이유는,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우리를 기만한 일이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뮤엘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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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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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대쪽같은 몸가짐
둘째는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다. 배우는 학생은 이미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뜻을 세운 이상 반드시 나쁜 관습을씻어 버리고 한 가지 생각으로 학문을 지향하여 몸가짐과 행동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언제나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차림새는 반드시 서로 공경하는 예의를 갖추며, 걷거나 서거나 할 땐 바르게 행동하고 음식은 반드시 절제 있게 먹는다. 글씨는 똑바로 쓰고 책상은 반드시 가지런하게 놓으며, 공부방은 반드시 깨끗하게 정돈해야 한다. 그리고 늘 경솔하지 않게 걷는다. 손도 게으르게 그냥 두지 않는다. 만일 일이 없어도 단정하게 가다듬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눈동자를 안정되게 놀려 눈을 바르게 뜨고 상대방을 흘겨보거나 삐딱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말할 때와 음식을 먹을 때 외에는 입을 움직이지 않는다. 목소리는 늘 바른 발음을 내야하고 쓸데없이 가래침 뱉는 듯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머리는 바르게, 몸과 직선이 되게 세우며 기울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한다. 호흡은 늘 콧소리를 고르게 내쉬며, 이상한 숨소리를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르게 서라. 어디에 기대지 말아야 하며 자세에는 항상 덕스러운 기상이 있어야 한다. 얼굴빛은 늘 깨끗하고 태만한 기색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르지 않으면 보지말고, 바르지 않으면 듣지 말고, 바르지 않으면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 것이다. '바르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조금이라도 하늘의 뜻과 순리에 위배되는 것을 뜻한다. 안 좋은 예를 들어 말한다면 광대들의 바르지 못한 행색이라든지, 속된 음악소리라든지, 비루하고 외설스럽고 요상한 놀이라든지, 방탕 난잡한 춤과 오락 등은 더욱더 경계하고 끊어야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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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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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4. 사칠 논쟁
6. 논쟁에 대한 종합적 고찰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볼 때 주자학의 리기와 사단칠정을 개념적 차원에서 더욱 정확하게 이해했던 것은 분명 기대승이다. 비록 입설 자체의 완성도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주자학의 기본 명제인 리기의 불가분리성을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단과 칠정의 범주에 대한 분석도 주희의 심성론체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자학 전체를 포괄하는 논리적 구조에 더욱 근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연 누가 주자학의 기본 이념에 충실했는가를 따져 본다면 기대승보다는 이황이 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에서 밝히고자 하는 궁극적 대상은 사물에 내재하는 물리적 법칙이라기보다는 그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필연지리' 곧 '사물당연지리'이다. 곧 일체의 사물을 지배하는 도덕적 표준을 객관적 사물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도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은 리의 작용성을 강조한 이황이었다. 이는 선과 악을 서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의 행위에 대한 자기 반성적 수양을 무엇보다 중시한 이황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황은 사단칠정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이 같은 그의 입장은 칠정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도리어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라고 보고, 칠정보다는 사단을 그리고 악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이들을 각각 리와 기에 부리 소속시킴으로써 사단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현실에서의 선과 악이라는 문제를 주자학 본래의 범주로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에 긴장 관계를 조성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더욱 절실하게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대조적인 입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주자학의 심성론 체계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논쟁이 주자학 이론에 대한 자기 검증이라는 문제 의식을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심성론과 리기론의 결합이 훨씬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성과라 하겠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윤사순, "퇴계철학의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80) 학국철학회, "한국철학연구" (동명사, 1982) 민족과사상연구회, "사단칠정론" (서광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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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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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본뜻 : 조선 시대에 서울을 한성부라 부른 데서, 이 말이 조선 시대에 생긴 말인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서울을 한성으로 부른 기록은 삼국 시대 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은 즉위 13년째인 기원전 6년에 한강 연안을 둘러보고 도읍을 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이듬해 정월에 그곳에 국도를 정하고 그곳을 한성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바뀐 뜻 : 한성이란 지명이 중국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기 쉬우나, 사실은 삼국 시대부터 써 오던 지명이었다. 한성이란 곧 수도 서울을 의미하는 한문 표기다.
"보기글" -옛날 조선 시대의 한성 판윤은 오늘날의 서울 시장에 해당되는 자리다 -한성이 한양이 되고 한양이 서울이 된 것인가?
고맙습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고맙습니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치매 걸린 할아버지와 착한 미혼모,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천사 같은 아이를 한 가족으로 만든 설정부터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감동이 있다. 할아버지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이들은 결국 마을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을 도움받았을 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상대의 행위에서 인정과 선의가 느껴지면 더욱 그렇다. 곧, 고마움은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높여주는 다른 사람의 지원과 연대에 대한 마음의 울림이다. 친밀감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영어 ‘생큐’(Thank you)의 어원이 ‘생각하다’(think)인 것도 이와 통한다. 여기에 더해 ‘고맙다’는 말에는 하나의 차원이 더 있다. 사랑과 공경이 그것이다. 천소영 수원대 국문과 교수는 〈우리말의 속살〉에서, ‘고맙다’의 어원 ‘고마’가 신 또는 신령을 지칭한다고 설명한다. ‘고마’의 형용사형인 ‘고맙다’는 인간 이상의 존재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며, 동사형 ‘고마하다’는 ‘공경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는 것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뿐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더 성숙해지고 주위 사람들까지 변화시킨다. 〈고맙습니다〉의 주인공 가족이 바로 그랬다.
살아가면서 가장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나의 가치를 가장 잘 알고 지원해주는 가족과 동료, 이웃이다. 오늘은 마침 성년의 날(5월 셋째 월요일)이자 부부의 날(5월21일)이다. 어느 누구보다 고마움에 대해 더 생각해 봐야 할 사람들의 날이다. 특히 이제 성인이 된 젊은이들에겐 주위 사람과의 관계를 차분히 돌아보는 날이 되기 바란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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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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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인물로 본 변방의 역사 - 딜라이 라마, 간디, 에바 페론
중국의 침략과 티베트의 저항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러나 티베트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했다.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직후 중국이 침략했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중국은 티베트를 제국주의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평화의 땅을 무력 침공했다. 수백 년 동안 사법 제도와 입법 제도는 물론, 독자적인 군대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독립 국가 티베트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된다. 탱크를 앞세운 강대국 군대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티베트인들의 항쟁은 1959년 라싸의 무장 봉기에서 절정을 이루지만 이내 진압되고 만다. 중국의 침략 이후 1959년까지 무려 20만 명에 이르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항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항쟁에 실패한 달라이 라마는 같은 해 8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1965년에는 티베트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후에도 항쟁은 계속되었고 중국의 무자비한 탄압도 멈추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티베트 승려와 불교 신도들이 처형되었으며 6,000여 곳의 티베트 사원과 문화 시설이 파괴되거나 글자 그대로 돼지 우리로 변했다. 국제 사면위원회는 1959년에서 1979년까지 중국 정부에 의해 살해된 티베트인들이 100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티베트 국민의 투쟁 방법은 두 가지였다. 네팔과 티베트 접경 지역의 무스탕에 근거지를 둔 `평화의 전사`라는 게릴라가 무력 투쟁을 대표하였다. 이들은 대만의 비공식적 지원을 받았고 미국 CIA로부터는 무기를 공수받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국과 대만이 후퇴하자 폭력적 방법은 쇠퇴하고 만다. 티베트를 떠나 인도 북부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적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 티베트인들이 선출한 43명의 의원과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3명의 의원 등 총 46명이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의회가 최고 결정 기관이며, 내각은 8개 부처로 구성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의 대표로서 중국과의 협상과 국제 여론 조성 등을 주로 담당한다. 한 국내 주간지(<시사저널>1996년 7월 31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달라이 라마는 불교의 연기법에 근거해 비폭력 투쟁의 당위성을 설명한 바 있다. 무력의 행사는 보통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절멸시키려는 경향을 띠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이를 분리된 존재로 여기는 시각이다. 이에 반해 달라이 라마는 나와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인연에 얽혀 생성되는 만물은 결국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타자를 해치는 일은 곧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침략자 중국마저도 티베트인들과 공존해야 할 존재이므로, 무력이 아니라 설득과 화해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게 달라이 라마의 생각이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투쟁 전략은 서구 세계에서 특히 환영받아,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비롯해 파리 인권상과 미국의 위런버그 인권상 등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달라이 라마의 유명세 덕에 티베트 불교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티베트 불교 사원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전세계에 600여개가 세워졌고 티베트 불교의 추종자도 전세계에서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한편, 스매싱 펌킨스, 레스 핫 칠리 페퍼스, 푸지스, 오노 요코 등 미국의 대중 음악인들은 1996년 6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부근에서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티베트 해방 기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를 가졌다. 이는 1985년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라이브 에이드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다. 티베트에 대한 호의적인 국제 여론은 결국 뒤집어 보면 중국을 향한 비난이 된다. 중국은 80년대 초 국제적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티베트 불교의 종교 행위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부흥은 곧 티베트의 분리 독립 요구를 낳을 것이 분명하기에 티베트 불교의 탄압은 중국의 대 티베트 정책의 기조가 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티베트에서의 종교 활동은 엄격히 통제되며 사원 재건축과 승려 수도 제한의 대상이다. 국제 연합과 전세계 사회 단체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촉구하였고, 지난 40년간 협상이 이어졌지만 티베트 독립이 이루어질 징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중국의 등소평이나 이붕 총리는 티베트가 독립 요구를 포기한다면 점진적인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측에서 보면 독립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구호이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살아 있는 부처이고 절대적인 지도자이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한 자치구의 책임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포탈라 궁을 세울 때처럼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편이 티베트인들로서는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국과 티베트의 시각에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근본적인 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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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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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7장. 원소발견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초기 과학에서의 발견은 연구를 계획하는 데 이론이고 뭐고 없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은 세렌디피티 또는 적어도 유사 세렌디피티였다. 과학자의 선구자격이던 연금술사는 여러 가지 것(거의 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일을 추구했다. 그들은 이 변환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생각이 미치는 한 온갖 짓을 시도했다. 그들은 결코 성공은 못했을 지언정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치 성공 한 것처럼 납득시키기 위해 전력했다. 연금술사에게 '원소'란 불, 공기, 흙, 및 물이었다. 현재 우리는 '원소'라고 하는 물질의 근원적 형태가 100가지 정도 존재하며, 그것들이 우주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흔해빠진 원소도 있고 희귀한 원소도 있다. 약 16키로미터 정도 깊이까지의 지각은 주로(99.5%) 12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5가지 원소가 91%이상이며, 그것들은 많은 것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산소, 규소, 알루미늄, 철, 칼슘 순으로 되어있다. 만일에 해양과 대기를 포함시킨다면 수소와 질소가 가장 많이 존재하는 원소군에 든다(물에는 수소가 11%, 공기에는 질소가 76% 함유되어 있다). 역사적인 시대 구분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로 각기 도구나 기구를 만드는 데에 사용된 물질에 연관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청동은 동과 주석의 합금(혼합물)이며 때로는 다른 금속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동과 주석은 넓은 지역에서 채취도어 양자를 녹여 합하면 각기 원래의 금속보다도 강한 합금이 된다. 동, 주석, 및 그 합금은 공기나 물에 의해서 부식되지 않으므로 도구, 무기, 식기나 기타 기구류를 만드는 데에 긴요하게 쓰인다. 놋쇠는 동과 아연의 합금이며 수세기 전부터 알려져 있다. 철과 강(스틸, 즉 철과 탄소 및 기타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일은 어려우며 따라서 최근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풍부하고 폭넓게 존재하는 알루미늄은 반응성이 너무 높기 때문에 단독으로 분리된 '원소'상태로는 산출되지 않는다. 동이나 은, 금과 달리 알루미늄은 다른 원소와 쉽게 화합한다. 안정된 금이나 은은 원소상태로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금속에 비해서 그 아름다운 광택이 오래간다. 원소상태로는 산출되기 어려운 원소나 결합상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원소의 발견은, 가장 존재량이 많은 원소인 산소의 경우를 포함하여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산소. 산소(oxygen)의 발견자로는 영국의 조셉 프리스트리와 스웨덴인 칼 빌헬름 셸레 두 사람이 알려져 있다. 셸레가 프리스트리보다 1년 이상 먼저 산소를 발견했다. 그러나 프르스트리가 1774년에 실시한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새로운 '공기'라고 명명을 하며 독특한 성질을 보고할 때까지 셸레는 자기의 실험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리스트리쪽에 더 많은 공로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1733년에 영국 리즈 가까이의 필드헤드에서 태어났다. 엄격한 칼빈교도의 가정에서 자라,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으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뿐 아니라 칼빈교로부터도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프리스트리는 1767년 34세로 리즈의 비국교회파 소속의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윌리엄 피트 내각의 국무대신인 셸 번 백작의 사서인 동시에 문학 동호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리스트리는 빈번하게 런던을 여행했으며 한때 그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을 만나 과학에 대한 관심에 눈을 뜨게 되면서 평생 친구가 되었다. 장난삼아 과학에 손을 댔는데 그 즉시 과학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프리스트리는 훌륭한 관찰력을 갖춘 실험가이기도 했으나 과학적인 소양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실험에서 찾아낸 결론은 기묘한 것이 많았으며 그러다보니 때로는 오류도 있었다. 그는 리즈의 양조장 가까이에 살고 있었으며, 그 작업 특히 발효중인 술의 액면 위에 감도는 기체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이름지은 '공기'가 액체 가까이에 가지고 간 나무조각의 불을 끈다거나 큰 통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기체와 연기의 혼합물이 '감돌면서 지면으로 가라앉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그는 이 기체(이산화탄소)가 보통의 공기보다 무거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집 실험실에서 이 무거운 '공기'를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이것을 녹인 물은 짜릿하고 매우 상쾌한 맛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소다수나 다른 탄산이 들어있는 음료를 맛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소다수의 발명으로 1773년에 영국학사원으로부터 메달을 수상했다.
이 기체에 관한 실험은 그로 하여금 다른 기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이 무렵 그는 직경 30센치미터의 커다란 확대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햇볕의 초점을 모으면 물질을 고온으로 가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공기'즉, 기체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프리스트리의 신기술은 기체를 수은 위에서 응집하는 장치였다. 밀폐된 유리용기 속의 액체수은 표면에 물질을 놓고 확대경으로 그것을 가열하여 기체가 생겼을 때 그것은 물에는 녹아도 수은에는 녹지 않기 때문에 수은 위에서 응집할 수가 있었다. 프리스트리가 이 방법으로 가열한 많은 물질 중에는 그가 '수은의 붉은 재'라 부른 산화수은이 있었다. 이 적색의 고체에 열을 가하자 분해되었으며, 액체 수은 위에 무색의 기체가 만들어졌다. 프리스트리는 이 기체를 촛불로 시험해 보았다. 그가 만든 많은 기체는 대개가 촛불을 껐다. 그가 후에 출판한 '여러 가지 공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이라는 책 속에 이 '공기'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것은 이 공기 속에서 촛불이 매우 격렬한 불꽃으로 타올랐다는 사실이다...시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이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만일 무언가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던 촛불이 눈앞에 없었더라면 그 실험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빨갛게 된 나무조각은 그 속에서 불꽃을 튕기고, ...그리고 매우 빨리 타버렸다...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당시로서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공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의 서문에서 프리스트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이 항의 내용은 나의 저서 중에서 몇 번인가 언급한 그 이상의 진실한 의견이라는 분명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연구를 크게 장려한다는 점에서 몇 번씩 되풀이 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 의견이란 바로 과학연구에서는 면밀한 계획과 미리 생각했던 이치보다도 우리가 우연이라고 하는 것, 즉 철학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미지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의 관찰 덕이 휠씬 크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 장에서 열거한 실험을 시작할 때에는 실험을 통해 이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가정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며, 만일 누군가에게 이 실험에 관해서 듣게 되었더라도 나에게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명백한 사실로 인해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라도 매우 늦게, 망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새로운 '공기'속에 있는 쥐가, 같은 부피의 보통 공기에 있는 쥐보다 두 배나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자신도 이 새로운 '공기'를 들여마시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가 폐로 느낀 바, 그것은 보통 공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어쩐지 한동안 가슴이 가볍고 편한 것 같았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순수한 공기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것을 마실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은 두 마리의 쥐와 나 뿐이었다.'
2개월 후, 프리스트리는 이 결과를 저명한 프랑스의 과학자 라보아제에게 알리고 라보아제는 프리스트리의 일을 되풀이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기체에 관해서 더 연구했다. 그는 이 기체가 새로운 원소라고 인정하여 1778년에 '산소'라는 이름을 재창했다. 산소란 희랍어로 '산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라보아제는 모든 산이 산소를 함유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라보아제는 정밀한 저울을 사용해서 화학반응의 출발물과 생성물의 중량 변화를 측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방법으로 산화수은을 가열하면 산소가 나오면서 무게가 감소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감소량이 바로 기체의 무게라는 것 등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그 반대의 현상인 금속을 공기중에서 가열하면 공기중에서 거두어 들이는 산소의 분량에 해당하는 양만큼 금속의 무게가 증가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의 이와 같은 관찰결과는 그 유명한 '질량(물질)보존의 법칙'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물질은 창조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단지 어떤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뿐이다"(현재 우리는 아인슈타인이나 다른 근대과학자 덕분에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한다는 것도 첨가하도록 이 법칙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리스트리에 의한 산소의 발견은 연소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했으며 '프로지스톤'설을 장사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프리스트리는 죽는 날까지 완고하게 프로지스톤을 지지했었다. 프로지스톤은 연소의 올바른 설명과는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1세기에 걸쳐 과학을 지배했었다. 연소는 산소와 다른 물질과의 화합으로써 신비적인 '프로지스톤'과 프리스트리가 그의 새로운 공기에 이름 지은 '탈프로지스톤 공기'와의 화합이 아니다. 근대과학이 정확한 연소이론과 질량보존의 법칙에서 비롯된다고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프리스트리는 산소와 관련해서 두 가지 더 우연한 관찰을 했다. 그것은 그의 해석의 능력을 넘어 섰으나 적어도 그는 충분히 주의하면서 기록했으므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게 되었다. 확대경으로 산화수은을 가열해서 기체를 만드는 실험 이전에 프리스트리는 연소와 동물의 호흡, 그리고 식물과의 관계를 관찰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촛불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태운 후, 다 써번린 공기중에서 한동안 녹색실물을 기르면 다시 연소된 상태를 보충하여 쥐가 살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즉, 그는 이산화탄소를 취하고 산소를 만들어내는 식물의 호흡을 관찰한 것인데, 이 과정이 이해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두 번째 관찰을 프리스트리는 "나의 예상 외의 모든 발견 중에서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실험에 사용한 병의 벽면에 생긴 '녹색물질'에 햇빛을 쬐면 기체가 발생한다는 관찰이었다. 그는 이 기체가 산화수은을 가열했을 때에 발생했던 기체와 같다는 것을 알았는데 자기가 '광합성'에 의한 산소의 생성을 최초로 관찰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과정은 태양에 의해서 공급되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을 화합시켜서 유기물질(프리스트리의 녹색물질)과 산소를 생성하는 것으로, 이 광합성 없이 생명은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 (해설) 프리스트리는 종교와 정치 양면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설교에서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로도 발표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단히 곤란을 겪었다. 종교상 이단이라는 고발뿐이라면 어떻게든 빠져 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던 것이다. 특히 마국의 독립에 강력하게 동정을 했기 때문에 폭도에 의해서 버밍햄의 그의 교회와 집은 불태워지고 말았다. 프리스트리는 가족을 런던으로 이사 시킨 후 3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결국 1794년에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뉴욕으로 간 그는 클린턴 지사와 다른 고관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신학자, 과학자,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명성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갓 탄생한 식민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니테리언 교회는 성직자의 지위를,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화학교수 직을 그에게 주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대학의 설립에 대해 그에게 상의해 왔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그를 파티에 초대했다. 그는 목사와 교수직을 거절하고 펜실바니아 중부의 개척지 노덤버랜드에서 조용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을 정원생활과 그를 위해 마련된 연구실에서 실험 삼매로 보냈다. 그는 결단코 프론지스톤설이 잘못된 이론이라고 믿지 않았으나 혹시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갖고 있긴 했다. 그는 친구인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1804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라보아제의 빛나는 생애는 유감스럽게도 프리스트리가 미국으로 건너간 같은 해에 파리의 기로틴(단두대)에서 종말을 고했다. 그는 과학자인 동시에 귀족지배계급을 위한 징세 청부인이었기 때문에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한편 프리스트리는 반혁명주의자에게 박해당했으므로 프랑스인도 영국인도 이들 위대한 두 과학자를 생애 절정시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영예를 칭송하게 된 것은 모두 사후의 일이었다. 요오드. 요오드(iodine)는 화학적으로는 염소에 가까운 원소이다. 소독약으로 사용되어 온 옥도정기는 이 요오드를 알콜에 녹인 것이다. 버나드 크르토와는 우연히 이 요오드를 발견하였다. 크르토와는 화학자 교육을 받고 파리의 공과대학에서 수년간 연구했으나 1804년 부친의 뒤를 이어받기로 하고 초석 공장을 파리 가까이에 건설했다. 나폴레옹이 탄약을 만드는 데에 초석(질산칼륨)을 필요로 했으므로 그의 사업은 번성했다. 질산의 칼륨성분은 보통 목탄에서 취하며 질산성분은 식물을 썩혀서 만들었다. 크르토와는 보다 값싼 칼륨원을 찾아 헤메다가 프랑스의 대서양에 밀려 올려진 해조 속에 이것이 함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조의 재에서 칼륨을 추출할 때 사용하는 탱크에는 찌꺼기가 고이므로 이따금 산으로 씻어야 했다. 1811년 어느 날, 탱크를 씻는데 평상시보다 진한 산을 사용했더니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탱크에서 보라색 연기가 나면서 그 연기가 탱크의 차가운 면에 닿아서 검은 금속 광택의 결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매우 진기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좀더 잘 조사하기 위해 이 기묘한 결정을 조금 모았다. 그는 이것이 산소하고는 화합되지 않으나 수소와 인하고는 화합된다는 것과, 암모니아와 결합시 폭발성 화합물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업이 분주했으며 또한 실험설비도 없어서 크르토와는 이 새로운 물질에 관해서 그 이상연구하지 못하고 파리의 공과대학에 있는 두 사람의 친구 데조름과 크레망에게 연구를 인계했다. 두 사람의 연구자는 1813년 12월에 발표된 논문을 통해 해조에서 얻은 흥미로운 새로운 물질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때 우연히 험프리 데이비 경이 파리에 있었으므로 클레망은 이 불가사의한 물질을 데이비에게 조금 주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매우 유명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게이 루삭이 그것을 듣고 어쩌면 중요한 발견을 영국인이 먼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바로 크크토와에게 가서 결정샘플을 얻어갔다. 게이 루삭은 서둘러 연구에 열중한 결과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게 되었고, 희랍어로 보라빛을 뜻하는 이오드(iode)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데이비도 새로운 원소의 발견을 확인하여 이미 그 전에 명명되어 과학적으로 연관이 가까운 염소와 어미를 합해서 요오드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해조 속에 들어있는 요오드의 발견을 이해하는 데는 바닷물이 염화나트륨 이외에 다른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들 속에는 매우 소량이기는 하지만 요오드화나트륨과 요오드화칼륨이 함유되어 있다. 요오드화물의 소금은 생화학적 과정에 의해 해조 속에 농축되어 있기 때문에 해조가 태워지면 더욱 농축된다. 크르토와가 탱크의 세정에 사용했던 산이 옥화물의 소금을 원소상 요오드로 변환시키고 산과의 반응열에 의해 보라빛 증기가 되었으며, 증기가 차가운 표면에 닿자 직접결정이 되어 응축했던 것이다. 1813년 이 새로운 원소의 발견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하게 응용되기도 하였다. 1820년 제네바의 외과의사 장 프랑소와 코인데는 해조에서 채취한 요오드를 갑상선종의 치료에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갑상선종은 음식물 중의 요오드의 결핍에 의해 일어나는 병으로서, 갑상선 호르몬(티록신)의 생합성은 요오드를 필요로 한다. 갑상성 호르몬은 생체 내의 많은 화학반응의 속도를 제어하며, 일반적으로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체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식물 중에 요오드가 결핍되면 다량의 갑상선 호르몬을 만들기 위해 갑상선이 확대되면서 보충하려고 한다. 이 갑상선의 확대를 갑상선종이라고 부른다. 갑상선종은 해안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드문데, 그 이유는 해산물에서 요오드를 충분히 섭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에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갑상선종을 예방하기 위해 보통의 소금(염화나트륨)에 요오드화나트륨을 소량 첨가하는 일은 현재 일반화 되어있다.
헬륨 및 기타 희귀가스. 헬륨이 발견된 곳은 지구상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태양에서다. 이 발견은 인류의 우주비행보다 휠씬 이전인 1868년으로 그것은 우연이었다. 185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화학자 빌헬름 분젠과 물리학자 로버트 키르호프 이 두 사람의 독일 과학자가 분광기라는 광학장치를 발명했다. 이 장치는 원소를 백열로 가열했을 때 발생하는 밝은 선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장치를 사용해서 그들은 주기표의 '나트륨족'의 두 가지 새로운 원소인 세슘(cesium)과 루비듐(rubidium)을 1860년과 1861년에 밝혀냈다.프랑스 무돈에 있는 천체물리학관측소 소장 피에르 옌센은 1868년 8월 18일 인도로 가서 일식을 관측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그해 10월, 런던의 왕립과학대학의 천체물리학 교수 J. 노먼 록카는 특수한 망원경을 사용함으로써 일식 때가 아니더라도 태양 주의에서 빛을 발하는 가스인 스펙트라를 관측하여 이것을 측정, 기록했다. 또한 그는 태양에서 분출되는 막대한 양의 기체 중에서 수소로 보이는 스펙트럼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나트륨의 특징으로 알려진 2개의 황색선도 보였으나 그 이외에 그동안 알려진 어느 원소에도 해당되지 않는 3번째의 황색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스펙트라가 태양을 에워싼 기체중에는 존재하지만 지구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원소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것을 관측한 날인 1868년 10월 20일, 이 발견을 왕립학회에 전했다. 3일 후 와렌 드 라 루는 록카의 발견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보고했다. 한편 옌센은 8월 18일 인도에서 기록한 스펙트라를 연구하여 같은 새로운 황색 선을 발견하여 10월 20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편지로 보고했으나, 록카의 편지가 드 라 루에 의해서 전해진 것보다 불과 몇 분 늦게 전해졌다. 관측은 옌센이 빨랐고 발표는 록카가 빨랐다. 이것 때문에 영예의 선취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천문학자는 서로 선취권을 주장하지 않고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두 사람의 옆얼굴과 이름을 함께 새긴 기념메달을 만들었다. 록카는 맨체스터대학의 화학교수인 프랑크랜드의 도움을 얻어 연구를 계속했다. 새로운 스펙트럼선이 새로운 원소에 속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어서 희랍어로 태양을 뜻하는 헤리오스(helios)에 연유시켜(helium)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지구상에서의 헬륨 탐색이 시작되었으나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한 채 23년이 지났다. 1891년 미국 지질조사소의 W.H. 힐레브랜드는 우라늄 광석을 가열할 때 발생하는 기체의 스펙트럼을 관측했다. 기체는 거의가 질소였으나 스펙트럼 중 몇 개의 선은 질소의 성질이 아니었다. 런던의 윌리엄 렘지 경은 힐레브랜드의 보고서를 읽고 이 미지의 스펙트라선은 그와 레일리 경이 1년 전에 공기 중에서 발견한 진귀한 불활성 기체상인 원소 아르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다른 형의 우라늄 광을 입수하여 힐레브랜드가 했던 것과 같이 처리해 보았더니 예상했던 대로 아르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질소에도 아르곤에도 없는 또다른 황색의 스펙트럼선이 관측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 선이 불활성 기체 크립톤(이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에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것을 아르곤과 관련이 있는 또다른 불활성 기체로 생각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한 스펙트럼 사진의 측정을 부탁하려고 이 기체의 샘플을 록카와 윌리엄 크록스 경에게 보냈더니 두 사람 모두 이 황색선의 파장이 태양 대기 중에 헬륨과 똑같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렘지는 1895년 3월 26일 영국의 학사원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양쪽에 지구상에서의 헬륨 발견에 관해서 편지를 보냈다. 윌리엄 렘지 경은 아르곤과 헬륨(지구상에서)등 기타 희귀가스의 발견으로 19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895년부터 1898년에 걸쳐서 크립톤, 제논, 네온을 발견하여 헬륨의 동족들로 주기율표의 제로족(새로운 정의로는 18족)의 행을 메웠던 것이다.
원소가 원자번호와 순환적(주기적)인 유사성에 의해서 배치되어 있는 주기율표에서 제로족의 행은 희귀한 가스원소에 해당된다. 원소의 주기율표를 고안한 주된 공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인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에게 돌아갔다. 이 전에 제로족의 원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되지 않으며, 결합력 즉, 원자가가 제로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이들 원소도 쉽지는 않지만 다른 원소와 결합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헬륨은 그야말로 '희귀한' 가스였으나 1905년에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세렌디피티의 등장이다. 미국 캔자스 주 덱스터 가까이에 있는 천연가스를 증기발생기의 연료로 쓰기 위해 분출구에 두껑을 덮고 파이프로 운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스는 연소되지 않았다. 캔자스태학의 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그 가스는 주로 질소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약 2%의 헬륨을 함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텍사스 주, 뉴멕시코 주, 유타 주 및 캐나다의 몇 개 주에 있는 많은 분출구에서 산출되는 가스가 소량의 헬륨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재 헬륨의 주요 산출지는 텍사스 주 애머릴로의 가까이에 있다. 헬륨 함량은 약 1.8%로 낮지만 이 지방의 가스량은 매우 많아 세계의 헬륨 주요 공급원으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해설) 금세기 초엽부터 독일은 공기보다 가볍고 단단한 배를 개발하여 이를 설계한 페르디난드 폰 제펠린 백작의 이름을 따서 제펠린이라고 불렀다. 이들 비행선의 부양력은 수소에 의한 것이었다. 이 비행선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정찰과 폭격용으로 사용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상업 승객 수송에 사용되었다. 비행선의 수소 사용은 1936년 미국 뉴저지 주 레이크허스트에 착륙하려던 힌덴부르크호의 대화재로 인해 막을 내렸다. 이 사고는 대기의 전류가방전되어 수소에 점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6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고는 상업 항공 사상 최초의 재난사고였다.
이와 유사한 비행선이 후에 독일에서 설계되어 헬륨으로 운행하도록 개량되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긴장 때문에 헬륨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은 헬륨의 수출을 거절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연식 소형 비행선을 대잠수함용과 연안 순시용으로 사용했으며, 이 부양력은 전부 헬륨에 의한 것이었다. 헬륨의 부양력은 수소의 93%로 다소 약하지만 헬륨자체는 스스로 타거나 연소를 돕지 않으므로 화재의 위험은 전혀 없다. 공기보다 무거운 현대 비행기의 발달로 인해 여객수송용으로서 공기보다 가벼운 탈 것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축구경기장의 공중에 떠있는, TV카메라의 훌륭한 촬영기지로 마련된 연식소형 비행선을 올려다 볼 때마다 태양에서 또 이후에 지구상에서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된 진귀한 원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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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홍귀달의 원혼을 따뜻한 술로 달래 보낸 송질
송질(1454-1520)의 본관은 여산이고 자는 가중이다. 성종 8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상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사화 때 문광공 홍귀달이 사사의 명을 받았다. 이때 송질이 용천역에서 유숙하였는데, 밤에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멀리서 달려와 말하였다.
"가중은 자는가?"
송질이 그 소리를 듣고 홍귀달임을 깨닫고 물었다.
"겸선(홍귀달의 자)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며 홍귀달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하였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날씨는 춥고 시체는 얼었으니, 따뜻한 술이나 한잔 주게"
송질이 곧 술을 따뜻하게 데워서 앞에 놓아두었더니, 훌쩍훌쩍 둘이마시는 소리는 들리나 술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추운 기운이 조금 풀리었으니 매우 고맙네"
이윽고 홍귀달이 작별하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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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국가이다
백년전쟁 (1339-1453) 이후 프랑스에 있어서는 중앙집권화의 경향이 급격히 강해졌으며 16세기 말에 '부르봉' 왕조가 성립하고 18세기 중엽 '루이' 14세가 즉위함에 따라 국왕의 절대적 전제적 권력은 그 절정에 달했다. 즉, 제상 '마자랑'은 왕권에 반항하는 귀족들의 '프론드'의 난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했고 재무상 '크르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에 의하여 부를 축적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었으며 '루이' 14세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도의 전횡를 자행했다. 국무의 처리에 관해서 왕의 전단을 국가의 이름으로 간하는 자가 있자 그는 말했다.
"국가라고? 그건 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왕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무기로써 왕권신수설이라는 것이 안출되기도 했다. 이와같이 신성한 후광에 감싸인 '루이' 14세의 오만과 전횡은 그칠 줄 몰라 무익한 전쟁을 도발하여 국비를 낭비하는 등 훗날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모순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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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손대지 않고 이기는 검법
츠카하라 보쿠텡이라고 하면 무로마치 시대의 명검객으로서, 여러 가지 야담에 그이 활약상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아마 그 때문인지 전해 내려오는 기담도 상당히 많다. 유명한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보쿠텡이 히가시쿠니로 내려가기 위해 교토를 출발하여 비파호의 야바세에서 나룻배를 탔다. 배에는 대략 열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체격도 좋고 눈매도 날카로워 실력이 뛰어날 듯한 무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승부를 겨루어 왔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어서 솜씨가 녹슬 지경이란 말이다."
보쿠텡은 무릎을 껴안고 앉아 주위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 무사는 보쿠텡을 흘깃 보더니 그를 놀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대뜸 빈정거리는 말투로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이봐, 거기 있는 사무라이! 그대도 무사 나부랭이라면 검술 한 수쯤은 터득하고 있겠지? 그대는 어떤 유파인가?" 보쿠텡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몸은 무수승류라네." "뭐라고? 들어보지도 못한 유파로군, 그건 누가 시작한 유파인가?" "무수란 칼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라네. 대저 칼이라는 것은 사람을 베는 흉기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도구지. 그렇다면 무도의 비법은 칼을 빼지 않고 적에게 이기는 것이어야만 하네. 내가 시작한 유파가 바로 무수승류라네." 그러자 그 무사는 벌떡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러면 그대는 칼도 빼지 않고 나와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쿠텡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원하지는 않지만 그대가 굳이 하고 싶다면 상대해 주지." 그 무사는 어깨를 으쓱 이며 고함쳤다. "그렇다면 빨리 육지로 올라가 승부를 경정하자. 이봐 사공, 빨리 배를 육지에 대라." 보쿠텡은 조용히 말했다. "육지는 사람이 많으니, 저기 보이는 섬에서 겨루면 어떻겠나? 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폐가 되겠지만 잠시 입회인이 되어 구경을 한다고 생각하면 괜찮을 걸세." "좋다!"
그 무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배가 섬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기슭에 뛰어내려 칼을 뽑았다. "자, 덤벼라!" 보쿠텡은 허리에 찼던 팔 두 개를 사공에게 맡기더니 사공이 배를 젓던 삿대를 빌렸다. 삿대를 지렛대 삼아 육지로 뛰어내리는가 했는데 뜻밖에도 그 삿대로 강기슭을 힘껏 밀었다. 배는 스르르 기슭을 떠나 강 가운데로 미끄러졌다. 이것을 본 무사는 당황해서 발을 구르며 고함쳤다. "비겁한 놈! 왜 올라와서 승부를 겨루지 않는가?" 보쿠텡은 웃으면서 허리에서 부채를 꺼내 펼치더니 여유 있게 맞고함쳤다. "이미 승부는 끝났네. 다시 한 번 승부를 겨루고 싶으면 여기까지 헤엄쳐서 오게나. 내 무수승류라는 것은 대충 이런 것이네."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었다. 섬에 홀로 남은 무사는 그 웃음에 더욱 발을 구르며 분해했지만 물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다. 정말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실력을 여봐란 듯이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의 역량이나 재능이 남보다 우수하다고 믿고 우쭐거리는 행동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 길에서 '익은 벼'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실로 단순한 존재여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에도 의외로 자신의 재능을 필요 이상으로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누구나 주변에서 그런 사람과 흔하게 마주칠 것이다. 아니,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이야말로 그런 사람일 지도 모른다. 특히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면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솟구치는 모양이어서, 더욱 노골적으로 우쭐거리는 일이 허다하다. 이 일화의 보쿠텡과 같은 입장에 놓인다면 누구나 배를 같이 탄 손님에게 솜씨를 자랑하고 싶기도 할 것이고, 남자가 되어서 상대편이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이상한 아집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보쿠텡은 천하무적의 명검객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터무니없는 생트집을 무수승류로 살짝 비켜 나간 보쿠텡의 행동은 역시 명검객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경지'를 훌륭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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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열네번째 이야기 거짓 나무에게 생긴 일
하루는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빠뜨로니오, 내게서 큰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내 주변에서 수없이 말썽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몇 있소. 그들은 언제나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짓말만 일삼는다오. 그럴듯한 거짓말로 내게 큰 손해를 가져오는가 하면 부하들을 부추겨 내 말에 거역하게 만든다오. 난들 속임수를 쓸 줄 모르겠소?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들보다 훨씬 더한 속임수도 쓸 수 있지만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소. 거짓말은 항상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이런 자들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내게 조언을 좀 해주실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빠뜨로니오는 백작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거짓과 진실이 서로 만났습니다. 어느날, 거짓은 진실에게 자기들 사이에 나무를 한 그루 심으면 과일도 얻고 더운 날엔 그늘에서 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진실은 단순하고 무슨 일이든 좋게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둘 사이에 심은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자 거짓은 진실에게 나무를 반씩 나누어 관리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진실이 동의하자 거짓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가며 뿌리는 나무의 생명이고 본질적인 것이니 나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땅 밑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뿌리를 가지라고 진실을 설득하면서 자기는 이제 겨우 움이 튼 작은 가지들을 갖겠다고 했습니다. 가지는 땅 위에 있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라버리거나 잎을 따버릴 수도 있고, 짐승들이 갉아먹거나 새들이 흔들어댈 수도 있으며, 더위에 말라버리거나 추위에 얼어버릴 수도 있으니 언제나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거짓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안전하다는 것이었지요. 진실은 교활한 구석이 없는 데다가 아무나 쉽게 믿기에 자기 친구인 거짓의 말을 듣고 뿌리 쪽을 택했습니다. 거짓은 자기의 속임수가 제대로 먹혀들어가 진실이 뿌리를 택하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진실은 자기에게 배당된 부분에서 살기 위해 땅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반면 거짓은 위에 남아 땅 위에 사는 것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거짓은 말주변 좋게 속임수를 쓸 줄 알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그에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나무는 곧 성장하기 시작해 굵은 가지 위에 넓은 잎이 무성하게 달려 사람들을 유혹하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나무 그늘로 와서 오랫동안 머물려 꽃을 보고 즐겼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거짓나무의 그늘에 앉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 그늘 밑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거짓은 아첨을 잘하고 아는 것도 많았기 때문에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고, 모두가 그로부터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거짓은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작고 평범한 거짓말을 했고, 좀더 영리한 사람들에게는 약간 복잡한 거짓말을,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복잡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개야, 내가 너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해줄게"라고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거짓말입니다. 거기에 맹세를 하고 담보가 주어질 때, 그 거짓말의 효력은 두 배로 증가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준 뒤, 자기가 약속한 것을 해줄 때가 오면 그때서야 모든 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거짓은 아는 게 많았고, 자기 나무 그늘 아래로 오는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거짓은 어떤 때는 나무의 아름다움으로, 또 어떤 때는 속임수로 사람들을 현혹했지요. 그런 기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거짓의 말은 잘 먹혀들어갔고, 모두가 그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거짓은 이렇게 하루 하루 일이 잘 풀려나갔지만 아무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불행한 진실은 땅 밑에 숨겨진 채 지냈습니다. 아무도 그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아무도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으며, 누구 하나 그것을 찾아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은 자기에게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친구의 충고를 듣고 택한 뿌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쩔 수 없이 뿌리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나무가 아주 훌륭한 가지와 넓은 잎이 있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서로 겨루기라도 하듯 색색의 꽃을 피워냈지만, 진실은 아무것도 먹을 게 없었기 때문에 열매가 맺기 전에 나무의 뿌리들을 다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뿌리가 모두 갉아 먹히고 잘린 거짓의 나무는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단번에 쓰러져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거짓은 큰 상처를 입었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죽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쓰러지면서 생긴 구멍을 통해 숨어 있던 진실이 나왔을 때 땅 위로 올라온 진실은 자기 주변에 거짓과 그를 찾아온 이들이 모두 죽거나 크게 다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거짓에게 배웠던 기술은 그럴 때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루까노르 백작님, 거짓은 큰 가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말과 아부의 꽃은 사람들이 유쾌하고 즐겁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나무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당신 적들이 속임수와 거짓된 지혜를 사용한다면 최대한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속임수를 따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거짓말하는 기술을 이용하여 혜택을 누리는 자들을 시샘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 가지 못할 것이며 끝이 좋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요. 사람들이 그 그늘 밑에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었던 거짓 나무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진실이 비록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진실에 손을 내미시고 더 높이 평가하십시오. 그러면 백작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때문에 행복하게 될 것이며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백작님은 결국 이 세상에서는 많은 부와 육신의 영광을 얻게 되실 것이고, 저승에서는 영혼이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을 얻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진실을 따르고 거짓을 멀리하라.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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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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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7. 신문사진 한 장이 역사를 뒤바꾸기도 했건만
한국 사람들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도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을 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신뢰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진은 시각에 의존하는 매체이다. 사진이 신문이나 잡지에 보도적 기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문자가 갖는 기능보다 훨씬 더 객관적인 신뢰감과 충격적인 반응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독자들이 사진은 있는 사실만을 그대로 전달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언론을 통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진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사진만은 보도통제를 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 독재정치 시절, 그의 정적이었던 김대중씨에 대한 기사는 나가도 사진은 못 싣게 했던 때가 있었고, 1990년대 이전 북한에 대한 기사를 쓸 때도 김일성 주석의 인물사진은 쓰지 못하도록 했었다. 또한 공산국가의 경우, 지도자의 중병설이 돌 때마다 건강을 과시하는 지도자의 사진이 실리곤 해왔는데, 이는 사진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에서 사실보도 혹은 객관적인 보도를 기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 사진기자들은 객관성을 검증받은 가장 강력한 무기인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서 뛰고 있는 셈이다. 실로 역사성이 큰 사건일수록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위력은 그에 정비례하는데, 한국의 현대사에서 한 장의 사진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예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1960년 자유당 정권의 12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게 한 4.19학생의거와, 오늘날의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시발점이 된 1987년 6월항쟁에서의 신문사진을 들 수 있다.
4.19학생의거는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져 마산 앞바다에 버려졌던 고등학생 김주열군의 시신을 찍은 사진이 보도되면서 화산이 폭발하듯 시위가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시키고 자유당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기자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신문사진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여 역사의 고비 때마다 그 사명을 다했는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취재했던 나로서는 그 질문에 자신있는 대답을 할 수 없다. 그 당시 광주항쟁의 진실을 보여주는 사진을 보도할 수 있었다면 분명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장군인에 의해 철저하게 언론이 통제되던 상황에서 광주항쟁에 관한 기사와 사진이 제대로 보도될 수 없었다. 아무리 사진기자가 깨어 있어도, 아무리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어도, 신문에 보도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무용지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뒤, 나는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해 한 권의 사진집으로 엮어 출판하면서 보도는 못하더라도 기자는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놓지는 못했지만 늦게나마 역사의 사실을 단편적으로라도 증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를 피로 물들게 했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서 결국 심판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신문은 가까운 과거를 기록하고 역사는 먼 과거를 기록한다지만 신문기자는 모든 것을 기록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문민정부에 의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된 광주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진행되었다. 그보다 먼저 1979년 10월 26일 철통 같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군사독재가 최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으로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뜻밖의 사건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이 기회에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민주세력 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흔들리고는 있었지만 군사정권의 기득권세력은 군부라는 조직화된 힘을 갖고 있었고, 반면 민주세력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처할 만한 조직화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권력의 공백기였던 10.26 이후 약 6개월간 정치적인 봄은 왔지만 봄바람의 기류는 심상치 않았고, 이를 감지한 대학생들은 날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서울 시내가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5월 들어서 데모는 더 거세졌고 이러한 상황은 신군부측에 사회혼란을 이유로, 모종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5월 17일 밤에 모여 일단 시위를 진정시키는 국면으로 접어들려고 했으나 신군부측에서 선수를 쳤다. 17일 밤에 김대중씨를 비롯한 민주세력을 연행해 갔고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8일 광주의 아침은 밝았다. 광주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김대중씨가 연행되어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전국비상계엄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날까지만 해도 어제와 다름없는 시위였을 뿐, 그 누구도 광주가 피로 물들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19일 최초로 발포사건이 터졌다. 광주가 인구 1백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지만, 아직도 시골의 작은 마을처럼 전통적인 유대감이 끈끈한 도시임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27일 새벽, 1,459명이 부상당하고, 2,335명이 연행되는 광주의 비극이 진행되었다. 광주가 이렇게 포위되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는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기자들은 다 무얼 하고 있었는가?
내가 광주에 내려간 것은 쾌청한 날씨의 일요일이었던 5월 18일 오후였다. 당시 서울 본사에서 취재를 지시한 사진부장도 "광주에 학생시위가 있다고 하니 바람이나 쐴 겸 다녀오라"고 말했을 만큼 전혀 광주항쟁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서울에서의 시위가 더 격렬했기 때문에 광주출장은 가벼운 취재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녁 7시쯤 광주에 도착해 보니 기자의 예감이랄까, 살벌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날은 통행금지와 거리 스케치를 한 후, 새벽녘이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곳곳에 포진한 계엄군과 걷잡을 수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위대와의 공방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러더니 오후부터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됐고, 그럴수록 악착같이 대드는 시위대의 희생이 속출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군은 군대로, 계엄하 언론검열로 인해 광주항쟁에 대한 기사가 전혀 보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기자에 대한 증오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기자들은 달리는 차 속에서 몰래 촬영하거나 건물의 유리창 뒤에서 커튼에 몸을 숨기고 촬영해야만 했다. 심지어 기자들에게는 숙소를 내주지 않아 잠잘 곳도 막연할 정도였다. 그래도 외신기자들은 한국기자들에 비해 대우를 받았다. 왜냐하면 외신에는 보도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기자로서는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취재를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이 현장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아일보는 수백만 독자를 대신한 사진기자로서 나 홀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며 마음을 다져 먹었다. 이미 나는 나 개인이 아닌 것이었다. 특히 21일 새벽부터는 교통뿐 아니라, 시외전화마저 끊겨 통신이 두절되었다. 따라서 각사의 기자들은 서울 본사와 연락이 끊겨 기사를 송고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이 이어지자 하나 둘씩 광주를 떠나기 시작했다. 5월 21일에는 3일간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공수부대가 외곽으로 물러나고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했다. 나는 맞으편 상무관 건물 2층에서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상황을 촬영하다가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몰려 도청 앞으로 끌려나가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총을 들고 도청 정문을 지키던 대학생 수습대원들에게 동아일보 신분증과 프레스카드 등을 내보여 간첩이라는 오해는 풀렸으나 "신문에 보도도 못하면서 사진은 뭣 하러 찍느냐"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 사명감으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광주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며 설득했더니, 사진을 찍다가 흥분한 시민에게 어찌 될지 모르니 카메라를 감추고 다니라는 충고와 함께 풀어주었다. 당시 광주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자신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은 데다 방송에서는 여전히 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으니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이런 불만은 20일과 21일 MBC와 KBS 등 두 방송극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런데 23일자 동아일보에 처음으로 광주에서 송고한 사진이 실리자 시민들은 "역시 동아일보"라며 뜨거운 악수를 청해왔다. 냉랭했던 시민들로 인해 의기소침했던 기분이 가시고 최선을 다하자는 용기가 솟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동아일보는 검열을 받을 때 사진 설명에 '폭도'라는 말을 쓰는 조건으로 사진을 쓰도록 허용받았으나 끝내 폭도라는 설명을 달지 않고 국내 신문 가운데 최초로 광주항쟁에 관한 사진을 용기있게 보도했던 것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전국이 비상계엄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신문들이 사전에 군인들의 까다로운 검열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사진을 검열하면서 게재 불가, 또는 자신들이 유리하고 광주시민들이 폭도로 비치도록 사진의 일부분만을 절단해 쓰라는 등의 요구를 했고, 사진 설명에는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표시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동아일보의 경우는 왜곡된 보도를 하느니 차라리 사진을 게재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어쨌든 광주시민들은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론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 본부에서 23일 커튼을 잘라 도청 출입완장을 지급해주었다. 오랜만에 기자로서의 취재활동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도청 건물 옆 공터에 놓인 시신들과 그 옆에서 오열하는 가족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애타게 서성이는 시민들의 모습 등 차마 카메라를 들이대기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23일과 24일에는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과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도청을 오가며 광주항쟁의 상처를 기록했다. 25일에는 훗날 나와 함께 '광주, 그날'이라는 사진집을 만들게 된 사진부 후배 김녕만 기자가 내려왔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반갑기 그지없었다. 서울 본사에서는 나와 연락이 두절돼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해 애태우다가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지원을 내려보냈으니, 그때의 광주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5일과 26일은 폭풍 전야처럼 기분 나쁜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조만간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된다는 풍문 속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드디어 27일 새벽,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군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작전은 날이 밝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도청 앞에 나와 보니 시체가 즐비했고, 젊은이들이 묶여서 줄줄이 끌려오는 장면이 보였다. 그런 속에서도 일단 취재한 필름을 갖고 빨리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후배인 김 기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오후 1시경 외신취재차에 동승해 서울로 향했다. 악몽 같은 10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끝으로 덧붙일 것은 사진기자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의 광주출장은 바람이나 쐴 겸 2~3일 다녀오는 가벼운 출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지급받은 기재는 물론 36컷짜리 필름 30롤을 비상용으로, 100피트짜리 롤필름 2통을 챙겨갔는데, 출장이 10일로 길어졌을 뿐 아니라 이것이 엄청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필름 걱정만은 덜 수 있었으니까. 사진기자는 언제 어떤 상황에 부딪칠지 모르고 그때 그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을 취재하면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은 언론통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현명치 못한 처사라는 것이다. 언론통제는 곧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을 불러왔고, 사실 유언비어로 인해 광주사태가 확대된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할 수 있었다면 양측이 좀더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했다면 광주시민들이 섬에 갇힌 것처럼 열흘 가까이 외부와 단절된 채 외롭게 투쟁을 전개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군부측 또한 언론보도로 인해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었다면 그런 엄청난 비극을 부르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끝끝내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에 대한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형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둘째,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보도를 할 수 없었던 까닭에 광주시민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또한 사건을 은폐하고 싶어하는 군으로부터도 배척당했지만, 기자는 반드시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 우리 기자들은 '기록용'이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내뱉곤 했다. 아무리 취재해도 신문에 실을 수가 없으니 기록용으로 찍는다며 무력감을 달랬던 것이다. 그러나 보도를 못할지언정 일단 기록은 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14년이 지난 1994년 4월 나는 광주항쟁을 기록한 사진들을 정리해 사진집 '광주, 그날'을 냄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광주항쟁을 기록한 사진집을 남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늦게나마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광주시민들에게 진 빚을 일부나마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셋째, 사진은 진실인가? 사진기자의 본 것만을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기자가 본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제시하는 사진들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총체적 진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수많은 사실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사진기자는 보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사진기자는 사진으로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국현대사의 엄청난 소용돌이였던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하고 나서 느꼈던 것은 반드시 현장을 지켜야하며 반드시 현장을 기록해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기자는 신문에 보도하기 위해 취재를 하고 있지만 또한 더 나아가 역사의 기록자,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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