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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3 호
단기 4340. 8. 31 (음력 7.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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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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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와 함께하는 Working60+ 수기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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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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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란 그 위에서 편히 쉬라고 만든 게 아니라,한쪽 발이 버틸 동안 다른 쪽 발로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만든 발판. / 토마스한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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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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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마음 다스리기
재산이나 영화를 얻고자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말라. 비록 그같은 욕심을 버렸다 할지라도 어떤 일을 쉽게 처리할 것 같으면 그 욕심은 아직 가슴속에 남아 있는 셈이 된다. 가능한 한 욕심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 잘 다스려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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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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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3. 태극 논쟁
3. 태극 논쟁이 한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
한국 주자학의 핵심적 논의가 이황과 이이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같은 논의의 지평을 연 선구자는 서경덕과 이언적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본격적으로 우주론적인 형이상학을 탐구하였으며, 리기론에 대한 주장을 통해 각기 뚜렷이 강조점을 달리함으로써 독자적인 학문을 개척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래서 서경덕이 이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 이언적은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이가 서경덕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 이언적을 비판한 것과 이황이 서경덕을 비판하면서 이언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언적의 철학은 그 뿌리가 주자학이다. 훗날 정조가 이언적의 글에 서문을 붙이면서 주희를 잘 배웠다고 평가하였고, 이언적이 스스로 붙인 '회재'라는 호가 주희의 호인 회암에서 왔다는 사실에서 이언적의 학문이 주자학의 진수를 잘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언적의 주장은 주희를 비롯한 송대 주자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는 송대 주자학자들의 견해를 답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심성론으로 논쟁의 축을 바꿈으로써 주자학의 한국화에 많은 공을 남겼다. 이언적과 조한보의 태극 논쟁은 중국에서 태극에 대한 이해 문제를 놓고 주희와 육구연이 벌였던 이른바 주륙 논쟁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륙 논쟁은 아호사라는 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호 논쟁으로도 불리는데, 논쟁의 핵심 주제가 존재론적 범주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무극'이라는 표현이 필요한 것인가, 극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리와 기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형이상과 형이하가 어떤 연결을 갖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태극 논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주륙 논쟁의 주제들과 같았지만 주륙 논쟁처럼 존재론적 범주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무극과 태극으로 표현되는 '절대'를 어떻게 체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체득이 실천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를 따지는 수양과 실천의 문제로 발전시켜 갔다. 한국 유학사에 남아 있는 최초의 논쟁으로 꼽히는 태극 논쟁이 한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조 주자학 정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 권근과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면서 주자학을 관학화하였다. 이것은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 연장에서 보면 이 논쟁을 통해 이언적은 같은 주자학 범주에 속하기는 하면서도, 주희의 이론에 철저하지 않고 불교와 노장적 견해를 바탕으로 주자학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척해 냄으로써 주자학 내부에 기초를 튼튼하게 세운 셈이다. 이언적의 논쟁 상대였던 조한보의 호는 망기당이었으며 망기당과 논쟁하던 손숙돈의 호는 망재였다. 두 사람의 호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망'자는 "장자"에 나오는 '좌망'을 연상시키며, 실제 두 사람의 주장은 노장적 색채가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좀더 구분한다면 망재 손숙돈의 주장이 육구연의 주장에 가깝고, 망기당 조한보의 주장은 도가와 불교적 요소가 많다고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이황은 이언적을 평가하면서 이 논쟁을 통해 도를 지킨 공이 크다고 말하였다.
둘째, 주자학의 한국적 특성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이 태극 논쟁은 중국의 아호 논쟁과 달리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이해와 실천 문제로 집약되어 들어갔다. 특히 태극을 리로 규정하면서 그 리에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도덕성을 부여한 이언적의 주장은 뒷날 리를 우위에 두고 심성론을 철학의 주축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 이황의 철학에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선조 때 조선에 들어온 명의 사신들이 조선에도 공자, 맹자의 학문을 다룬 심학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에게 이언적의 글을 보여 주었던 사실에서도 잘 나타났다. 이처럼 이 논쟁에는 주자학적 이론의 깊이와 아울러 한국적 전개가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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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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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파
본뜻 : 이 단어는 글자만 보자면 여자의 눈이 가을 물처럼 맑다는 뜻이다. '추파를 보낸다' '추파를 던진다'는 말은 여인이 남정네에게 은근한 정을 나타내는 눈길을 보낸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요즘은 딱히 여자가 남자에게 던지는 눈길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은근한 아첨을 하거나 접근을 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보기글" -북한이 핵문제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동조자를 얻기 위해서 핵개발에 적극적인 중국에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게 사실이야? -아까부터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그 여자의 눈길을 모르는 척 해 버렸다
퇴짜
본뜻 : 조선 시대에는 조정으로 올려 보내는 물건들을 일일이 점고했었다. 이때 물건의 질이 낮아 도저히 위로 올려 보낼 수 없으면 그 물건에 '퇴(퇴할 퇴)'자를 찍거나 써서 다시 물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돌려보낸 물건을 가리켜 퇴짜 놓았다고 했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하거나 마음에 안 들어서 거부당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사람이나 물건에 두루 쓰인다. 물리치는 쪽에서는 '퇴짜 놓다' 물리침을 당하는 쪽에서는 '퇴짜 맞다'고 한다.
"보기글" -이렇게 정교하게 만든 화문석이 왜 퇴짜를 맞았을까? -선보러 나가서 퇴짜 맞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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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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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의 숨은 전쟁 -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
내전 이후의 스페인
켄 로치의 주장대로 원인이 공화파 내의 분열과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이었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공화파는 결국 내전에서 패배한다. 프랑코가 1939년 4월부터 스페인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는 종전 후 여러 탄압 정책을 밀어붙였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악명 높은 독재자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코는 화합의 정치가 아니라 단호한 폭정의 정치를 지향했다. 모든 불순분자를 쓸어 버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수십만 명의 반대파들이 체포.투옥되었고 종전 후 4년 동안에만도 약 3만 7,000명이 처형된다. 그리고 과거의 공화파가 실시한 사회 정책과 법률 제정은 무효화된다. 프랑코는 스페인을 군인, 성직자, 지주 중심의 사회로 회귀시켜 놓은 것이다. 결국 스페인의 현대사는 중대한 고비에서 뒷걸음치고 말았다. 왕정을 뒤엎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실험하던 그간의 모든 노력은 프랑코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프랑코라는 독재자의 지배가 수십 년간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탄압으로 완전한 안정을 구할 수는 없었다. 프랑코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더 심각한 것은 국제 사회가 스페인 고립 정책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를 탄압했으므로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내전과 집권 후 프랑코가 저지른 폭정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을 파문한다. 그러나 스페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이런 고립 상태를 극복하게 된다. 한국 전쟁은 냉전의 산물이자 냉전의 극점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프랑코는 반공이라면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스페인은 유럽 지역의 유력한 자본주의 기지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경제적 교류 금지 조치를 철회했고, 미국 은행은 스페인에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유엔과 교황도 스페인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53년에는 군사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미국에서 막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얻게 된다. 그 후 60년대의 경제 부흥 그리고 70년대의 점진적 민주화 조치가 진행되면서 스페인은 정상적인 국가 형태를 되찾아 간다. 그리고 종신으로 권좌에 있던 프랑코가 1975년 11월 사망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왕에게 권력을 승계했다는 사실이다. 군인 출신 정치가가 국왕에게 권력을 넘기는 일은 대단히 희귀하고 기묘한 형태의 권력 승계였다. 이것은 프랑코의 절대 권력을 예증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스페인 내전의 모든 상처와 잔인성을 상징하는 프랑코가 사망하자,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기억도 흐려진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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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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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남성과 경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
한사람 한사람의 여성의 신변에 일어나는 일 그 결혼생활이나 가정에서 생기는 일은 널리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나에게 이 책을 쓰게 하였다. 우리들 여성이 행복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성끼리의 협력, 유연한 자세 그리고 행동력이 필요한다.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인간으로서 자기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인생의 중심에 자리잡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뒤에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건전한 감각을 갖고 목표로 하는 일에 정열을 쏟으며 독립심을 길러가야 한다. 날이 갈수록 혼미의 도를 더해가고 있는 세상이지만, 노력한다면 여성은 그 안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자기의 인생을 균형잡힌 건전한 것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다. 여성은 그 사회적 정신적인 성장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남성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많은 남성을 소외시키고 있기도 하다. 대립에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수세기에 걸쳐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해 온 폭력적인 수단으로 그들을 이겨낸다 해도 그런 증명은 인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사회학자 애슐리 몽테규는 오래 살아도 젊은 마음 그대로 죽을 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항상 마음을 열고 나이가 들더라도 정신적으로 젊음을 되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모험심을 발휘하라. 성패를 따지지 말고 일단 무슨 일이든지 해보는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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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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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말라"하며 사들인 땅을 되돌려 주게 한 윤석보
윤석보(?-1505)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자임이다.
풍기군수로 있을 적에 아내와 자식들은 풍덕의 시골집에 그대로 살았는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부인 박씨가 대대로 전해 오던 비단옷을 팔아 한 마지기의 땅을 사들였다. 윤석보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사들인 땅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않음으로써 그 임금을 저버리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지금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면서 임금의 녹을 먹고 있는데 전지와 주택을 마련하도록 해서야 되겠소"
부인이 할 수 없이 그 땅을 되돌려 주었다.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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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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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프랑스 혁명을 추진한 지도적 세력으로서 온건한 '지롱드' 당과 급진적 '쟈코뱅' 당이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혁명 초기에는 '지롱드' 당이 우세하여 1792년 '지롱드' 당 내각이 구성되었는데 내무부장관이 된 '로랑'의 아내는 재식을 겸비할뿐더러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그녀의 집 살롱은 '지롱드' 당의 사령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혁명의 진전과 함께 차츰 급진적 경향으로 흐르더니 마침내 1793년 6월 '쟈코뱅' 당은 '지롱드' 당을 의회에서 추출하고 정권을 장악, 정적을 사정없이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로랑' 부인도 '지롱드' 당의 간부들과 함께 체포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윽고 형장에 끌려 온 '로랑' 부인은 형리에게 펜과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내뱉듯이 말했다.
"오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오늘날의 정치가들도 한 번 되새겨 봄직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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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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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금화를 부채로 받는 사람
쥬라쿠다이의 집합장소에 모인 다이묘들이 다테 마사무네를 둘러싸고 황금의 오항을 바라보며 저마다 입에 침이 마르게 격찬했다.
"뿜어내는 빛이 휘황찬란하군," "정말 훌륭합니다."
그것은 마사무네가 자기 금광에서 채굴한 금으로 만든 새 돈이었다.
"좋으시다면 한 개씩 드리겠소. 이곳에서는 금이 썩어날 정도로 많이 나니까요."
마사무네의 말에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그곳에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이며,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나오에 가네츠구가 왔다. 그래서 마사무네는 그에게도 오항 하나를 깨내 보였다.
"어디 한 번 볼까요."
가네츠구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서 그것을 받았다. 마사무네는 자신이 62만 석의 다이묘이고, 나오에의 영지는 6만 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을 존경하여 직접 손으로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오에공. 어려워 말고 손으로 직접 받아보시오."
그러나 가네츠구는 마사무네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주군 가게카츠님의 선봉에 서서 깃발을 잡는데, 그 손에 그렇게 더러운 것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가네츠구는 돈을 부채에 얹은 채 마사무네에게 돌려주었다. 아무리 가네츠구가 청렴결백한 무사라고는 하지만 '깃발을 잡는 손에 그렇게 더러운 것을 잡을 수 없다'고 말하며 오항을 손에 들기 거절했다는 것은 좀 억지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다. 실제로 억지이며 지나친 과장이다. 그런 이유로만 오항을 손에 들기를 거절했다면 그것은 비뚤어진 행위이며, 음습한 그늘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가네츠구가 격분한 까닭은 빛나는 황금 오항에 마음을 빼앗긴 다이묘들이 그것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에 비굴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에 우쭐해서 62만 석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라는 인간이 이곳에는 금이 썩을 정도로 많다며 뻐기는 천박하고 속된 채도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억제하기 어려운 격분을, 억지 이유를 내세워 마사무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표출한 것이다. 그는 끝까지 부드럽게 행동했지만, 그 속에 숨은 굳건한 용기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일화를 볼 때 억지로 이유를 붙이는 듯한 음습한 그늘이 사라지고, 가네츠구의 의연한 용기를 뒷받침하는 격분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황금 앞에서라면 저도 모르게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꼬리치는 자들에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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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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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일곱번째 이야기 자식을 살해할 뻔한 아버지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은 그가 들은 치욕스러운 말에 매우 화가 나서 빠뜨로니오를 불렀다. 빠뜨로니오는 화난 백작을 위로하며, 돈을 주고 조언을 구하려던 한 상인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마을에 직업도 지위도 없고 오직 돈을 받고 조언을 해주며 사는 현자가 있었습니다. 한 상인이 조언을 파는 현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마을로 찾아갔습니다. 상인이 조언을 얻고자 값을 묻자 현자가 대답하기를 조언에 따라서 가격도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자는 상인이 일 마라베디짜리 조언을 부탁하자 다음과 같은 조언을 주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을 초대해서 처음 보는 음식을 대접한다면, 우선 제일 먼저 나오는 요리로 배를 가득 채우십시오."
상인이 그 조언은 중요한 것이 못된다고 하자 현자는 자기가 받은 일 마라베디 역시 마찬가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상인은 두배의 값을 지불하며 조언을 청했고 현자는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습니다.
"당신이 아주 격분하여 분풀이를 하고 싶을 때라도, 정확한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불평하지도 격분하지도 마십시오."
상인은 그와 같은 뻔한 조언을 더 얻으려 했다가는 가지고 있는 돈만 모두 잃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금방 얻은 교훈만이 마음 속 깊이 새기고 돌아왔습니다. 상인은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임신한 자기 부인을 남겨둔 채 배에 올랐습니다. 그 후 상인은 20년간을 그곳에서 장사를 하며 살았습니다. 고향에 남겨진 부인은 아들을 낳았고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직 아들을 위로삼아 사랑하고 심지어는 남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잤답니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고통중에서도 정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한편 상인은 마침내 부자가 되어 금의환향하게 되었고, 예고도 없이 자기 집에 들어가서는 부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래 숨어 엿보았습니다. 해질녘에 아들이 돌아오자, 부인은 아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어디 다녀오시는 거죠?"
상인은 '여보'라는 소리를 듣자 그 자가 새 남편이거나 아니면 남편이라기에 너무 젊으므로 애인쯤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에 두 마라베디를 주고 산, 격분하지 말라는 현자의 조언을 기억해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부인과 아들이 함께 저녁 식사하는 광경을 보자 상인은 또 다시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충고를 기억하여 다시 분을 참았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그들은 함께 잠자리로 갔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다시금 그 조언을 되뇌이며 참았습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부인은 소리없이 흐느끼기만 하더니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아니, 아들아, 상선이 왔다는구나! 네 아버지가 간 곳에서 말이야. 가능하면 아침 일찍 항구로 나가보렴. 혹시 네 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니."
이 말을 듣자 상인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장사하러 떠났었다는 것을 떠올렸고, 부인과 같이 있던 남자는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기가 아들을 죽였더라면 평생을 두고 괴로워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도록 도와준 현자의 조언을 그는 크게 갑사하고 기뻐했답니다.
"백작님, 아무리 말로 분을 해소하면 고통이 줄어들 것 같아도 사건의 진상을 알기 전에는 절대로 화를 내지 마십시오. 진실을 알기까지 조금 참는 것은 아무 해도 없지만 화를 내면 곧 후회를 하게 되는 법이랍니다."
* 진실을 알기 전에 화를 내면 격분하는 만큼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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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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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0. 아직도 굳지 않는 핏자욱
해마다 5월이면 손에 땀이난다. 수많은 주검을 떠오를 때면 나의 안면근육은 작은 경련이 일어난다. 그때 충격이 너무 커서일까. 시간도 17년이 흘렀고 많은 것을 잊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각인된 몇몇 장면은 거북등에 새겨진 상형문자만큼이나 세월을 모른다. 이 글은 그 기억과 취재수첩을 통해 1980년 5월의 광주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내용은 내가 본 것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목격자나 취재원으로부터 들은 것도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사실과 일치한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나는 휘갈겨 쓴 취재수첩을 통해 광주항쟁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고 한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그날의 슬픈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지만 나의 관점은 변함없음을 감히 내세운다. 광주에 낭만과 꿈을 기대하고 갔다가 현대사의 복판에 서게 된 한 젊은 기자의 기록과 의식은 어설플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기사를 쓰는 손은 어린 주검처럼 순수했고, 우리 민족의 슬픈 현대사를 온몸으로 확인했다는 마음만은 지금도 그대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광주에서는 5월 들어 거의 매일 데모가 계속됐다. 5월 2일에는 조선대에서 학생들과 외부청년들이 충돌한 총장 억류사건이 일어났고, 6일에는 신민당 학원문제조사단이 전남대학교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이어 거의 매일 대학생들의 민주화 집회는 이어졌다. 산발적인 대학생 데모는 14일부터는 급격히 규모가 커져 5천 여명의 전남대, 조선대 등 대학생들이 금남로를 지나 도청 앞 광장까지 진출했다. 15일 오후부터는 학생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경찰의 제지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런 학생데모는 16일 절정을 이루었다. 학생, 교수, 시민 들은 금남로 분수대에서 오후 9시 30분까지 '민주화 성회'를 갖고 횃불을 끄기에 역부족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와중에서 계엄군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은 15일 밤이었다. 당시 전남대 학생회관에서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농성 중이었다. 이날 밤 11시 45분쯤 군 트럭 2대가 전남대 동문으로 들어와 정문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당시 취재수첩은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전국 계엄령에 대비한 지형 숙지 훈련이었을 것이다. 16일 야간 집회도 평화적으로 끝나 이날 참석했던 학생, 시민들의 표정은 연일 계속된 민주화 촉구 대회에도 불구, 상당히 밝은 표정이었다. 이날 시위대들은 아무런 충돌 없이 해산했다. 누구도 17일에 있을 군부세력의 민주화 압살야욕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다만 학생들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혹시 휴교령이 내려지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다. 학생들은 월요일(19일)부터 정상수업에 들어가기로 다짐하고 거리 청소도 말끔히 했다.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질서 유지와 외부인의 불온행동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16일 횃불집회에서는 안보가 위태로우면 언제든지 전선에 나갈 것이라는 '군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기도 했다. 이는 민주화 요구를 악용할지 모르는 북한에 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권력에 눈이 먼 신군부는 결국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중앙일보의 광주 주재기자 중 가장 말석이었던 나는 광주시 유동 지사에 나가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날 오후 무심히 밖을 쳐다본 나는 수십 대의 무장군인을 태운 트럭이 지나는 것을 보고 일이 터진 것을 직감했다. 시내 중심가쪽으로 이동을 쫓다가 본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군 트럭은 가면서 대검을 꽂은 M16을 어깨에 걸치고 손에는 보기에도 묵직한 곤봉을 들고 있었다. 2인 1조로 차에서 내린 이들은 근처를 지나던 젊은이들을 불문곡직하고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한 젊은이는 무등경기장 부근 광주교에서 다리 난간에 기댄 채 매를 맞다 못해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모든 시민들이 이 끔찍한 모습을 모두 목격했다. 기자인 나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런 사태가 이날 광주시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은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19일 오후부터 광주 상황은 학생시위가 아닌 시민이 참가하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할아버지들도 손에 각목을 들고 나왔다. 시민들은 '전라도 사람 다 죽는다'하고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19일 광주시내를 공포의 도시로 만들었다. 5월 20일 광주 취재팀이 본사에 송고한 기사의 첫마디는 "사람 사냥이 시작됐다"는 흥분에 찬 내용이었다. 물론 계엄 하에서 나갈 수 없는 표현이었지만 계엄군의 만행을 더 이상 어떻게 나타낼 수 있으랴. 취재수첩에는 이들의 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대검으로 찔러" "여자, 팬티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마구 구타"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져"...
결국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이 광주항쟁을 유발한 셈이다.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은 비무장의 시민을 상대로 한 작전이라기에는 너무 잔혹했다. 20일 오후 금남로의 시민들에 섞여 있던 나는 계엄군의 무자비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들은 시민들이 돌을 던지고 덤벼도 일정거리까지 가까이 오기 전에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총알같이 튀어나와, 달아나는 사람의 머리를 쇠뭉치 같은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맹수가 사냥거리를 낚아채는 것 같았다. 나도 정신없이 달아났다. 금남로의 한 병원에 들어가 보니 머리터진 사람이 즐비했다. 부상의 대부분은 머리가 함몰된 것이다. 계엄군의 이같은 진압작전은 전쟁시 점령지에서 써도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다.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충돌도 이보다 더 처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계엄군의 살육은 결국 대규모 시민봉기를 불러일으켰다. 광주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다. 한 다리 건너면 친구요 친척이요 동문인 곳이다. 옆집 아들의 죽음은 바로 내 자식의 죽음과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부마사태서 효과를 본 계엄군의 초전박살 진압작전은 광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분노를 촉발했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광주시민, 더 나아가 전남도민 모두를 감쌌다. 도저히 대한민국 국군이라고 믿기 어려운 만행은 많은 소문들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믿는다. 공수부대의 이성을 잃은 무자비한 만행은 어떤 유언비어라도 사실로 믿게 만들 만했다. 왜 신군부는 광주에 수천 명의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시민을 적군으로 상대했을까. 공비들과 싸워야 할 공수특전단을 시위 진압에 투입했을 때 일어날 결과를 계엄사는 몰랐단 말인가.
1980년도는 절대권력의 박정희 정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으나 신군부라는 반동세력이 또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던 때다. 국민들은 계엄하에서 시들어가는 민주화에 실망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광주가 아니었더라도 대한민국 어디에선가 유사한 민중항쟁이 일어날 만한 시점이었다. 계엄군의 만행은 잠재해 있던 국민들의 민주하 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과 같다. 여기에 광주지역의 특수성, 박정희 정권시대의 피해 의식 등이 어우러져 광주항쟁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어냈다고 나는 확신한다. 신군부가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한 것은 민주화를 일거에 잘라버리고 제2, 제3의 항쟁에 본때를 보이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재에 항거하고 이웃의 아픔에 눈물짓는 민중의식은 총검 앞에서도 이들을 맨주먹으로 나서게 했다. 항쟁기간 중 중앙일보 취재기자들은 좌담회를 갖고 서로 겪고 본 현장을 정리했다. 다음은 좌담회의 일부 내용.
5월 18일 A기자 : 오전 11시쯤 전남대 앞 독서실까지 올라가 입시 준비 중인 고교생을 계엄군이 구타했습니다. 이유 없이 매맞은 학생들은 독서실 방에서 울고 있더군요. B기자 : 오후 3시 30분쯤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을 던지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습니다. C기자 : 다방에 들어가 피 흐르는 청년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 포승으로 묶은 후 군 트럭에 던지더군요. 애인인 듯한 여자가 학생이 아니라고 울부짖었지만 땅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5월 19일 A기자 : 아침부터 사람사냥에 나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공부중인 학원 강의실에 난입해 곤봉으로 마구 때리더군요. B기자 : 11시 5분쯤 장갑차가 진입했습니다.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학원생을 옷 벗겨 구타했습니다. C기자 : 19일 밤부터 파출소가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임동파출소는 모두 타버렸지요. D기자 : 오후 4시 30분쯤 계림파출소 앞에서 첫 총성이 울렸습니다. 고장난 장갑차에서 발포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총기에 의한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5월 20일 A기자 : 전 언론사 경찰국 출입기자가 모두 모여 간밤의 사상자를 동시에 취재했습니다. 첫 사망자가 확인됐습니다. B기자 : 오후 7시 10분 차량시위가 나타났습니다. 버스를 타고 저지선에 돌입하다 계엄군에 무차별 연행됐습니다. C기자 :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찰 4명, 공수부대 2명도 사망했다고 합니다.
5월 21일 A기자 : 취재기자에 대한 불신이 대단합니다. 기자가 다 뭐냐면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B기자 : 11시쯤 시위대가 몰고 온 장갑차가 금남로에 나타났습니다. 돌을 든 시위대도 보였지요. C기자 : 오후 2시쯤 금남로에서 벽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 시민이 목에 총을 맞고 숨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조준사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D기자 : 건물 위에서 조준사격을 하는 모양입니다. 오후 2시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 도청 일대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5명의 중앙일보 취재팀이 함께 했던 좌담회는 계엄하에서 기사화 되기는 불가능했다. 현장기자들은 민중과 검열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계엄사의 통제를 받던 당시의 언론 보도만 보면 광주는 그야말로 법과 질서가 무너진 미국 LA의 흑인폭동과 다름없다. 당시 신군부는 모든 사태를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아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21일 금남로 앞에서 열린 즉석 집회에서의 한 시민의 발언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나의 취재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폭력은 쓰지 말자. 총칼로 쑤셔도 돌을 던지지 말자." "민주주의는 하나이다. 민주주의 석방하라."
항쟁기간 동안 이어진 민주시민의식은 오늘날 광주사태를 광주민중항쟁으로 전환시킨 힘이다. 사실 왜곡과 은폐를 민주시민의식이 이겨낸 것이다. 22일 광주에 내려온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의 담화 내용을 보면 당시 위정자들이 사실을 얼마나 오도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발표했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 군인에 발포했으나 군은 정부의 명령으로 발포를 못하고 있다. 소수의 불순분자의 무기를 가진 폭도들이 문제다."
22일이면 이미 계엄군의 발포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시점인데 내각의 최고 책임자는 엉뚱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폐는 더욱 광주시민의 분노와 울분을 자아내게 했다. 전남 도청이 시민군에 접수된 이후 처음 나온 광주시 유지들의 요구사항에는 이런 문제가 잘 지적돼 있다.
1. 광주 5.18사태는 계엄공수군의 과잉진압에 의한 자연발생적 시민봉기임을 인정하라. 2. 정부는 5.18사태의 책임을 통감하고 전 시민이 정당히 납득할 수 있는 사과문을 언론을 통해 전달하라. 3. 연행 구속된 인사와 학생을 석방하라. 4. 금번 사태로 인하여 발생된 사상자에 대하여 당국에서 완치시킴은 물론 정당한 보상을 하라. 5. 본 사태가 수습된 후 당국은 절대로 보복을 않는다. 6. 치안 회복시까지 계엄군은 일체 진주 않는다. 7. 광주시민의 정당한 봉기를 폭도로 몰지 않는다. 8. 자극적인 언사는 절대 하지 않고 허위보도를 하지 않는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모는 것과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을 유발시켜 사태의 원인을 호도하려는 책동을 가장 경계했다.
살아 있는 시민의식은 행정조직이 마비됐어도 광주시를 무정부사태로 몰아가지 않았다. 그 당시 광주시 농성동에 하숙하고 있던 나는 밤늦게 걸어서 집에 돌아가곤 했지만 특별히 불안을 느낀 적은 없었다. 병원도 부상자가 넘쳤지만 헌혈로 피는 충분했다는 것을 나의 취재수첩은 보여준다.
5월 24일부터 본격 시작된 수습 노력은 계엄군과 치열한 접전 가운데서도 진행됐다. 24일 오후 2시 15분쯤 백운동에서 헬리콥터가 무차별 사격을 했으며 시 외곽에서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속속 접수되고 있었다. 수습대책위원회 띠를 어깨에 매고 도청 상황실에서 학생인 척하던 나는 당시 도청에 나와 헌신적으로 일하던 많은 이를 보았다. 이들은 시가지를 청소하고 상가를 모두 열자고 호소했다. 공무원, 경찰도 복귀해 근무할 것을 바랐다. 나의 상황실 근무는 서울 말씨를 쓰는 바람에 이틀 만에 탄로나, 24일 오후 3시쯤 기동타격대에 연행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5일 아침에는 청소원 30여 명이 나와 금남로 일대를 깨끗이 청소했다. 24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습을 위한 총기 회수작업도 시작됐다. 대책위원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입으로 인한 희생이었다. 25일 오전 8시쯤 홍남순 변호사 등 15명은 광주시 화정동 4거리로 탱크 진입을 몸으로 막겠다며 계엄군과 거리회담을 가졌다. 계엄군은 한때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24~26일까지 3일간은 희생을 최소화해 사태를 수습하려는 처절한 노력이 계속됐다. 계엄군은 "지금까지는 시민 여러분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진해산과 질서 회복을 기대했으나 폭도들이 폭발물을 가지고 있어 부득이 소탕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전단을 살포했다. 계엄군이 다시 진입하면 엄청난 희생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 때문에 수습위원회는 총기를 회수해 계엄군의 진입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펼쳤다. 일부에서는 도청 앞에 엄청난 TNT가 있다며 계엄군이 진입하면 이를 폭파하겠다는 등 강경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사망자에 대한 장례 절차도 논의했다. 도청에서 수습위원회는 도지사, 부지사 등과 연일 사태의 원만한 해결책을 논의했으나 이들로부터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 이외의 별다른 대안을 들을 수 없었다. 권력 중심이 전두환 등 신군부에 가 있는 상황에서 도지사의 힘은 너무 무력했다.
18일 이후 1주일은 민중의 힘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광주사태를 불순분자들의 난동이 아닌 민주화 운동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 외신기자는 5월 30일까지만 버티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귀띔도 해주었다. 25일 오후 6시를 기해 광주시를 벗어나라는 소문도 돌았다. 도청 안에서 수습대책위는 총기 회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조직을 확대해 사태를 민중의 피해 없이 마무리지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런 수습대책위의 노력에 일부 강경파 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계엄군이 쉽게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불안 속에 26일이 지나갔다. 마침내 27일 새벽 3시 30분 계엄군은 광주시를 기습했다. 5월 30분 라디오 방송에서는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며 경고문 1호를 방송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오지 말고 폭도를 숨기지 말라. 도청과 광주공원은 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이날 총탄세례로 곰보가 된 YWCA 건물 2층에 올라가 보니 소파에 피가 흥건했다. 총을 맞자 동료가 소파에 앉혀준 듯했다. 엄폐물로 이용한 듯 철제 캐비넷은 총알 구멍이 숭숭 뚫혀 있었다. 바닥에는 사체를 끌고 간 듯 검붉은 핏자국이 길게 끌려 있었다.
"이 피는 28일 하오 12시 50분까지 굳지 않았다."
나의 수첩에 쓰여 있는 한 구절이다. 고여 있던 피가 이틀이 지나도 굳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것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5월의 이른 새벽 외롭게 싸우다 죽어간 한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는 분노가 끊어올랐다. 5월 31일 휴교했던 초등학교(국민학교)가 일제히 문을 열었다. 학교를 찾아가 스케치하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았다. 오랜만에 등교하는 2학년 학생에게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 어린이는 이렇게 말했다.
"군인 아저씨가 사람 죽인 이야기요."
그 말에 나는 크게 놀랐다. 나는 그 나이 때에 군인 아저씨와 위문편지를 교환하며 즐거운 추억을 갖지 않았던가. 이 어린 학생의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광주민중항쟁은 발생 이후 오랫동안 왜곡됐기 때문에 아직도 일부에서는 한 지역의 소요사태로만 여긴다. 2년 전까지도 광주만행의 주범들에게 '공소권 없음'이란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신군부의 장기 집권으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많은 시간도 놓쳤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의 정확한 본질과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할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아픔을 치유하고 바른 역사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실규명과 잊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료와 기억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이 역사의 한 장으로 넘어가기에는 아직 멀었다. 흘린 피가 아직 굳지 않았다. 지금은 20대, 30대가 된 이 어린이의 아픔이 사라졌을 때 진정 광주민중항쟁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제 과거의 불행은 잊고 새 출발 하자"는 단순논리다. 적당히 넘긴 과거는 망령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잡아끈다. 오히려 과거에 대한 치열한 추구가 미래를 밝게 한다. 나는 보고도 말을 못하고 알고도 쓰지 못했다. 죽음으로 항거한 젊은이들에게 무슨 할말이 있을 것인가. 제대로 사실을 알리지 못한 기자의 한 사람으로 광주현장의 민주시민에게 사과의 말을 드린다. 17년이 지난 지금 취재수첩은 누렇게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현장기자들의 땀은 오늘도 따뜻하게 숨쉬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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