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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2 호
단기 4340. 8. 30 (음력 7.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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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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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경기도 이야기 수필공모
경기지방공사와 KFM99.9 경기방송이 생활속의 수필을 공모합니다. 살기좋은 경기도! 살아 보고 싶은 『One the Full City 광교명품신도시』에 대한 기대 등 땀흘려 가꿔가고 있는 살아있는 경기도 이야기를 찾습니다.
1. 공모부문 : 수필 2. 공모주제 및 소재
광교 명품신도시에 대한 기대 신도시에서의 생활 우리집마련 에피소드 산업단지 입주업체의 기업경영 수기 살기 좋은 경기도 기타 경기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 타 공모전, 문학지 등에 출품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에 한합니다.
3. 응모자격 : 제한없음
4. 접수 및 당선자 발표 접 수 : 2007/8/17(金) ~ 9/14(金) 당선자 발표 : 9/20경 개별통지, 홈페이지 공지
KFM99.9 경기방송 라디오카페(10:30~12:00)
5. 응모분량 : 200자 원고지 8~10매 또는 A4용지 2~3매 내외 6. 접수방법 : 이메일 또는 우편접수 이 메 일 : privacy@gico.or.kr 우편접수 : (441-836)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곡선복지길4 경기지방공사 고객홍보실 수필공모전 담당자 앞 (※마감일 도착분에 한함)
※ 표지에 성명, 주소, 연락처(집전화번호, 휴대전화번호)표기
※ 문 의 : ☎ 1588-0466(고객과함께 공사쑥쑥~)
7. 시상 및 상금
최우수상(1명) : 200만원 우수상(2명) : 각100만원 장려상(2명) : 각50만원
※ 입상작은 9월 20일 ~ 22일 FM 99.9 경기방송 <라디오카페>를 통해 방송되며,
상금은 소정의 세금공제 후 지급됩니다.
8. 기타사항 응모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으며, 당선발표일부터 저작권은 경기지방공사에 귀속됩니다. 응모작품은 문학지 등에 응모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하며,수상작품을 타 공모전에 응모시 수상을 취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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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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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남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더라도 아무 소리 말고 배울 것. 사노라면 항상 무언가 배우게 마련. 그 대부분은 내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나를깨우치는 것. / 빌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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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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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생활 속의 학문
생각을 멈추지 말라.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에 해야 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서는 낮에 할 일을 챙기며, 잠자리에 들 때에는 하루 일을 반성하고 내일 해야 될 일을 생각하라. 일은 반드시 합당하고 순리에 맞게 처리할 것을 생각하라. 그러기 위해선 글을 읽어야 하니, 글을 읽으면서 잘잘못을 가리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 지혜를 일 속에서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일의 잘잘못을 가리지 않거나, 일은 하지 않고 그저 글만 읽는다면, 그 학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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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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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3. 태극 논쟁
2. 태극 논쟁의 내용과 전개
태극 논쟁의 문제 제기-조한보의 견해에 대한 이언적의 평
태극 논쟁은 좁게 보면 '태극도설'에 대한 해석의 차이인 셈이며, 넓게 보면 주자학적 세계관과 노장 또는 불교적 세계관의 차이인 셈이다. 이언적은 손숙돈과 조한보의 글을 얻어 보고 손숙돈의 주장은 육구연의 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조한보의 설은 주돈이의 설에 근거하면서도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조한보는 '무극이태극'을 해설하여 태극이 바로 무극이라고 하면서 무극과 태극을 유무와 내외로 나눌 수 없다고 보았다. 또 '무극이태극'은 큰 근본이자 통달한 도로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근본만 깨달으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다 갖추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언적은 주돈이가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까닭은 사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형체 없는 존재라는 뜻에서 무극이라고 한 것이며, 또 실제 모든 사물의 뿌리가 된다는 뜻에서 태극이라고 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근본 자리를 둘로 나눌 수는 없지만 채용, 동정, 선후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조한보처럼 본다면 눈금 없는 저울이나 자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극이태극'이란 그 이치가 극히 미묘하여 모든 사물의 변화가 다 여기서 나오지만 실제 형상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이언적은 조한보가 '무극태허'의 본체를 내 마음의 본체로 삼으면 모든 만물이 내게 막힘 없이 쓰일 수 있게 된다고 한 견해에 대해서도,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다리가 없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생각이며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도 사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견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잘못이 나온 까닭은 합쳐 보려고만 하고 나누어 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며, 태극을 태허처럼 이해하여 태허의 본체를 적멸한 존재로 이해하는 바로 그 '멸'자 때문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본체를 적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만 그 본체가 만물 속에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선 선비들이 태극의 본체를 말할 때 '적이감'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첫째 논쟁
이러한 비평에 대한 조한보의 답장과 그에 따른 이언적의 첫 번째 논쟁은 다음과 같다. 이언적의 답신에 따르면 조한보는 태극을 적멸로 보아야 한다는 본체론에 대한 이해와 존양상달 공부를 통해 태극의 본체를 터득한다는 수양론을 말하고 있다. 조한보는 '무극이태극'을 유무로 이해할 때 무라고 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에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유라고 하더라도 정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점점 줄어들어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언적은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를 노자가 무에서 나와 유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나 석가가 말한 공과 같다고 전제하고, 이 이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지만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들 속에 원리로서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극히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 본체를 점점 줄어들어 없어진다고 한 것은 리를 기처럼 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리는 만물이 생겨나기 전에도 있었으며 만물이 다 없어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불멸의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조한보는 본체의 체득을 말하면서 무극의 참세상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고 허령한 본체를 내 마음의 주체로 삼는다고 하면서 존심양성을 통한 형이상학적 공부만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무극태극을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서 노닌 뒤에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형이하학적인 것을 토대로 형이상학으로 가는 하학이상달 공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는 유학의 이론과 불교를 하나로 뒤섞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둘째 논쟁
두 번째 논쟁은 다음과 같다.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무극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주장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표현을 빼 버렸으며, 아울러 본체를 적멸이라고 했던 데서도 멸자를 뺀 답서를 보내 왔다. 그러나 허령한 무극의 본체를 말하면서 허무가 바로 적멸이며 적멸이 바로 허무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한보의 생각에 대해 이언적은 노장이나 불교의 허는 빈 듯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유학의 허는 빈 듯하면서도 있는 것이며, 저들의 적은 고요하면서 마침내 없어지는 것이지만 유학의 적은 고요한 듯하면서도 감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한보가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고 위로 천리에 이른다고 본 것을 불교의 깨달음 이론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을 잘 배우면 저절로 천리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사람의 일이란 형이하학적인 것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치가 천리이므로, 그 일을 배움으로써 그 속에 담긴 이치에 통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언적은 유학에서 강조하는 궁리가 다만 앎의 문제만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논쟁
세 번째 논쟁은 완전히 수양적 측면으로 나아갔다. 이언적의 편지에 따르면 조한보는 여전히 위로 천리에 이르는 공부를 강조하면서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언적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아직 마음이 밖의 사물에 대해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공부로는 좋지만, 그렇다고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되돌아 살피는 실천이 부족하게 되어 일상 생활이 인욕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면서 의로써 밖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성인의 경지에 이르면 의로 밖을 절제하는 것도 불필요해지겠지만, 그렇다고 이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문을 나서지 않고 천리길을 가려는 것이며 걷지 않고 태산에 오르려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두 번째로 조한보가 자신이 적멸이라고 한 까닭은 사람들이 현실이 헛된 환망임을 알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을 부수기 위해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언적은 형체를 떠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형기를 떠나 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공자의 행적 등을 들어 이를 인증하였고,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는 불교의 돈오와 같으므로 잘못을 깨닫고 유학의 설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넷째 논쟁
네 번째 오간 마지막 논쟁은 다음과 같다. 이언적의 편지에 따르면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적멸이란 표현을 빼 버렸고, '상달천리' 아래 '하학인사'를 덧붙였다. 그러나 "나와 모든 것은 같다"고 하면서 경을 주로 삼고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를 통해 본체를 먼저 확립한 후에 하학인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이러한 논리는 그물의 윗줄만을 보고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그물의 눈들을 따지지 않는 것이며, 피부를 빼 놓고 뼈만 가지고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논어", "맹자" 등을 근거로 이것과 저것, 취한 것과 버릴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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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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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호
본뜻 : 교차로나 건널목에 푸른 등이나 기를 달아 통행을 표시하는 교통신호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앞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는 어떤 조짐을 나타내는 말로 쓰고 있다.
"보기글" -논술 고사의 부활로 교양 출판계에 청신호가 켜졌다 -남북 정상회담은 통일로 가는 길의 청신호다
초미
본뜻 : 눈썹에 불이 붙은 것과 같이 매우 다급함을 이르는 말이다.
바뀐 뜻 : 매우 절박하고 숨가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김일성의 죽음 직후 남북 정상회담이 재개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입시생인 동생에겐 K대학이 본고사를 보느냐 안 보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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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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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의 숨은 전쟁 -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
패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스페인 내전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1995년)이 그것인데,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 개봉된 사실은 다행스럽지만 상당히 의외이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감독의 이념적 색채는 둘째치더라도 도무지 상업성이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를 흡인하지는 못했어도 <랜드 앤 프리덤>은 소수의 관객들에게는 뜨거운 경험이었다. 근본적 사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나, 60년 전 사건이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설득하는 켄 로치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우리는 이 영화를 잘못 소화할 위험이 있다. <랜드 앤 프리덤>이 스페인 내전을 세밀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증보판쯤 될 것이라 본다면 부당하다는 것이다. <랜드 앤 프리덤>은 오히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같은 영화가 심어 준 상식을 뒤엎는다. 즉 스페인 내전이 악한 파시스트와 민주 세력 공화파의 쟁투였다고 믿는 이분법적 단견을 문제시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공화파 내의 이질적인 집단들이 서로 격한 갈등을 보였으며 그 내분이 결정적 화를 자초했다.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 데이비드 카는 영국 청년이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페인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 두고 스페인으로 들어선 데이비드는 전직 독일 빵장수, 미국 청년, 선원, 전직 하녀 등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데이비드처럼 아마추어지만 공화정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전사들이다. 간단한 군사 훈련 후에 데이비드는 POUM(Parido Obrero de Unido Marxista,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연합)이라는 정당의 민병대에 들어간다. 이 정당은 앞에서 말한 조지 오웰이 참여했던 조직으로서, 당시 공화파를 구성하고 있던 정치 세력의 하나이며 반스탈린주의가 그 특징이다. 또 다른 특징은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민주주의적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는 사실이다. <랜드 앤 프리덤>의 묘사를 보면 POUM 민병대에는 상명하복의 계급 구조가 없다. 지도자는 일반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되며, 의사 결정도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POUM이 신봉하던 민주주의의 전형은, 영화 속의 민병대가 한 마을을 접수했을 때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 낸 후 POUM 민병대는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켜 회의를 연다. 토지 소유 문제와 마을의 운영 방식이 의제였다. 몇몇 참석자들은 성급한 결정이라고 반대했으나, POUM 민병대와 마을 사람들은 토지 분배와 집단 농장 건설을 즉각 실시할 것이라고 결정한다. 당시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POUM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즉시 현실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에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궤변이며, 주민들의 민주주의적 자치의 경험은 총칼보다 더욱 위력적이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었다. 부상을 입어 마드리드로 후송된 데이비드는 POUM을 떠난다. 앞에서 말한 국제 여단이 데이비드의 새로운 소속 부대였다. POUM 민병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인 블랑카와 그는 마드리드에서 만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 데이비드의 이적이 분란을 낳는다. 블랑카는 스탈린의 지휘를 받는 국제 여단을 혁명 정신을 배반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반대로 데이비드는 POUM이 반파시스트 전선의 분열을 야기하는 세력이라고 맞대응한다. 결국 그들은 싸우고 헤어진다. 간밤의 다정한 기운은 사라지고 사상적 적대감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둘은 사상적 견해의 일치를 이루면서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입장을 바꾼 이는 데이비드였다. 1937년 바르셀로나에서는 공화파 내의 무정부주의 세력 CNT와 국제 여단이 충돌하여 후자가 승리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데,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이 상황 속에 데이비드가 참여하도록 설정한다. 데이비드는 명백한 동지에게 총질하도록 강요하는 국제 여단 지휘부에 불만을 느끼게 된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거리를 걷던 한 시민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데이비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왜 당신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나. 단결하여 파시스트와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위계 질서가 강하고 조직화된 군대인 국제 여단에 환멸을 느낀 데이비드는 POUM 민병대로 되돌아온다. 그들은 보급품도 없이 힘겹게 적과 싸우는데 그들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었다. 공화파 내의 한 세력이자 국제 여단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식 정치 프로그램을 따르는 사회주의 군대가 POUM 민병대의 진지를 찾아온다. 그러고는 총을 겨눈 채 POUM은 프랑코와 내통한 자들의 집단이며 불법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한다. 당연히 POUM 대원들은 저항했고 가벼운 충돌도 일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블랑카가 사회주의 군대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영화 내용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반파시즘 전선의 분열상을 보여 주며, 특히 내부의 적이 혁명을 배신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영화의 악역은 파시스트가 아니다. 비난의 칼날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랜드 앤 프리덤>은 단순한 스페인 내전 영화가 아니다. 과연 POUM의 전략이 옳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고무하는 계기인 것이다. 여기서 그 논쟁에 뛰어들어 켄 로치의 주장에 대해 타당성을 따지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켄 로치의 설명으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또 다른 시각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 사회와는 달리, 서구에서는 <랜드 앤 프리덤>을 둘러싸고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갔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는 스페인 공산당의 전 대표도 끼여 있었다. 한 매체(<Newsday>)에 실린 노인의 주장도 켄 로치를 논박했는데, 여기서는 그 노인의 주장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윌리엄 서스맨은 국제 여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참전 용사이다. 켄 로치의 주장대로라면, 스탈린의 지휘를 따랐던 반혁명 분자이자 공화파의 분열과 패배를 초래한 세력이었던 셈이다. 서스맨은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흥분하여 두 가지 근거에서 영화의 시각을 비판한다. 먼저 그는 왜 영화 속에 나치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가 등장하지 않는지 묻는다. 마치 국제 여단 등이 전쟁을 망친 것으로 그려지는데, 국제 여단은 1년 이상 마드리드를 사수함으로써 프랑코의 승리를 지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강변한다. 백번 양보하여 국제 여단이 공화파 내에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켰다고 해도,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되었음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스맨의 시각에서는 비난의 대상은 당연히 공화정의 민주주의 정신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프랑코여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서스맨은 POUM의 민주주의적 지향을 비판한다. 사회 개혁이라는 것은 단순히 다수가 지지한다고 해서 현실화될 수 없고, 더구나 파시즘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파시스트가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마을에 민주주의를 즉각 실현해야 한다고 믿은 POUM은 허망한 이상론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비조직적인 시민군의 형태를 고집한 POUM의 이상주의가 오히려 전쟁의 성과를 앗아 갔다고 주장한다. 서스맨의 주장이 전적으로 억지는 아니다. POUM은 위계와 집단화를 거부하고 비정규 형태의 시민군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인 프랑코 순대는 완벽한 규율을 지녔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반파시즘 세력을 하나의 위계 조직으로 규합하고 정치적으로 일치된 대오를 꾸리는 일이 필수불가결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조직화가 관료주의 특유의 비민주성을 초래할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규 조직으로 규합하려는 노력을 스탈린주의라고 백안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스페인 내전이 있은 지 반 세기도 훨씬 지난 시점에서 촉발된 논쟁은 뚜렷한 귀결점에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마치 스페인 내전이 별다른 사회적 진보를 성취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만 형상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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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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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남성들은 관대한가
미국의 남성들은 대량생산된 옷을 입고 보통교육을 받았으며, 자기의 몸매가 사람의 눈을 끌거나 지나치게 딱딱하다거나 좀 색다른 것은 매우 실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동작이라든지 몸매가 비슷하게 훈련되어 틀에 박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틀에 박힌 외형의 그 안쪽을 살펴보면 의외로 독립된 생각, 깊은 두뇌와 주의 깊고 보수적이지만 따뜻한 마음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타산적이라고도 보이는 이러한 주의 깊음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 남성의 관대함, 특히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관대함과 모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의 남성은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시간마저 할애하지 않을 정도니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리는 없지만 무엇인가 몸 안에 배어 있는 관대한 마음이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 도가 지나칠 정도로 자기를 희생시켜 버리는 데가 있는 듯하다. 이 관대함을 만들고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선을 베풀려는 단순한 생각만은 아니다. 그와 같은 무아의 사랑에 의한 충격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깊은 사랑을 지닌 남자는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의 9할에 해당하는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의 남성은 다른 나라의 남편이나 아버지에 비하여 가족과 함께 있는 경우가 적다는 사실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여성들 또한 헤어져 있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남성과 같은 냉정함으로 꾹 참고 있다. 제각기 흩어지게 된 생활을 서로 인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우리 나라에서 서로 즐겁게 어울릴 만한 남성과 여성은 그 즐거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함께 즐기기를 원한다면 무언인가 그 방법을 찾아내야 할 텐데, 그와 같은 노력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된다. 내가 오랫동안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미국의 남성은 물질적으로는 자기 가족에 대하여 왜 그렇게 관대한 것일까? 왜 몇 억이나 되는 남성들이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하여, 특히 여성에 대하여 가능한 한 더 많은 사치와 안일을 주기 위해 그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인가? 남성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곧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성에게 그러한 안일과 사치를 주는 것을 남성들은 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성은 실제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남성의 시간과 애정을 얻든지 돈을 잘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의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여성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은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완전한 대답은 물론 없다. 진실한 대답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히 마련된 조금은 미묘한 투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아내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가져다주는 망상이 어떤 것인지 잘 알며, 그 결과를 조사할 수 있다면 사실 그 자체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주기 위해 남성은 자기 시간을 모두 할애하고,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정력을 소모하고 있다. 남성이 이처럼 관대한 원인이 무엇이든지 그 결과로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무아으 관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대상인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한 대상인가? 그것은 바로 가정으로부터 해방되며, 자식을 길러 교육하는 책임에서 빠져나가기 위하여 남성이 지불하고 있는 대상이다. 미국에서 자녀들은 거의 여성의 손으로 양육되고 있다. 남성은 그 옛날 자식을 잉태시킨 책임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지금도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는 어떤 경우라 해도 용서 받을 수 없다. 자기가 낳은 자녀를 기르는 일에는 남성도 여성과 똑같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하면서, 그 대신 가정을 위해서 생활비를 버는 일에 쫓기고 있으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한다. 이렇게 남성이 자녀에 대한 책임에서 빠져나와 있는 것이 미국 문명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남자 중의 남자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나이가 그것을 귀가 아프게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불합리에 놀라고 있다. 이토록 나약하 것이 누구의 죄라고 말하는 것인가? 여자는 혼자 힘으로 자녀를 키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의 가정이 거의 비슷하다. 남자는 없고, 여자 혼자서 원기 왕성하고 반항적이며, 이것 저것 졸라대는 아이들과 씨름하며 가저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가정의 평화를 되찾게 하려고 하루 종일 마음을 쓰고 있다. 만일 아무리 하여도 그것이 되지 않으면 큰소리를 치게 함으로써 아이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잠시 남자들의 손을 빌리지만, 아이들의 버릇을 바로잡을 배짱은 없으며, 자기 자신의 평화와 안락을 얻기 위해서 할 뿐이다. 여자 혼자서 육아서적을 열심히 읽고 생각하며 사춘기의 심리에 대해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도 한다. 아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남자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자들에게 귀찮은 생각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논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이들을 남자의 폭발하는 노여움과 명령으로부터 감싸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아이들의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손쉽고 빠른 해결을 하려고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남자들이 가정 생활의 번거로움에서 면제받고 있는 그 대가로써 지불하는 것이 사치와 안일을 여자에게 주는 희떠움인 것이다. 이처럼 가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남자는 이 관대한 행위에서 만족감을 얻고 있다 자기의 집을 얼마나 사치스럽게, 그리고 훌륭하게 유지하고 있느냐는 남자로서의 성공을 나타내는 척도, 즉 수입의 크기를 의미한다. 은행에 있는 돈은 보이지 않지만, 훌륭한 저택, 고급 승용차, 그리고 털가죽 코트와 다이아몬드, 게다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은 돈을 보기 좋게 진열하는 일이 된다. 이런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마을에 조그만 공장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주차장 광경을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는 가끔 발을 멈추고 주차하고 있는 자동차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은 날마다 자기 자동차로 출근한다. 내 채소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날마다 자기 자동차로 온다. 이것은 광장하고 멋있는 일이다. 나는 중국에서 해가 뜰 무렵 비참한 인간의 행렬이 공장 안으로 기어가듯 들어갔다가, 해가 진 다음에야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몰려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나이 어린 아이가 섞여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우리나라 공장 노동자들의 아이들은 건강에 좋은 마을의 언덕 위에 살고, 산뜻한 학교에 다니며 떠들면서 집에 돌아오며, 삼륜차를 타고, 롤러 스케이트를 지치면서 놀고 있다. 중국의 공장 생활에 비하여 그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다. 나는 미국 사회가 비난받고 있는 지나친 나약함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 나라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충분히 얼굴을 대하고 있지 않으며, 아이들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남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남성은 그 이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 가정과 아이들을 모두 여성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남성은 대단한 것을 잃는다. 부쩍부쩍 자라고 있는 생명의 발전에서 비롯되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좀더 근원적인 무엇인가를 남성들은 잃고 있다. 남성은 생명 그 자체의 근원에 참여하는 것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여자와 함께 살고, 함께 창조한 아이의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과정속에 깊이 스며 있는 것이다. 남자가 자기의 가정속에서가 아니라 다른 남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자기 일속에 살고 있을 때, 그는 자기의 존재의 뿌리를 목졸라 죽이고 있는 셈이 된다. 남자가 한사람의 여자를 알고 또 자신을 그 여자에게 알릴 수가 있다면 그 두 사람은 모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상호의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이를 양육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생애를 참답게 사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현재 여자는 가정속에서 자기 몫뿐만 아니라 남자의 몫까지 해야 되는 상황에 정신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실패로 끝나고 있다. 여자가 실패를 하면 남자는 여자에 대해 조급해지고, 여자는 열등감을 갖게 된다.
사실을 말하면, 미국 여성들은 너무나 쉽게 남자보다 자신들의 지위가 낮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남자라는 것은 평등한 여자보다 열등한 여자와 사는 편이 쉽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그냥 사는 것이다. 미국의 남자는 대부분 이 말을 들으면 생각없이 그냥 웃어넘길 것이 틀림없다. 이 웃음이란 경멸을 나타내는 가장 쉬운 형식이지만. 남자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대수롭지 않게 웃는다. 그러한 태도를 취하도록 양육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알고 있는 단 한사람의 여자, 즉 그의 아내를 통해 여자의 세계 전체를 되는 대로 한탄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대개 관대한 것 같은 웃음을 던질 줄 모르는 여자는 아내로 원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학식이 있고 교양이 높은 지적인 어느 미국 남자가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아내와 마찬가지로 이 사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여자를 골랐다. 꽤 많은 돈을 쓰고 아주 애를 먹은 끝에 이혼한 터였기에 나는 또 잘못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십니까? 그녀는 첫 번째 부인보다 조금 젊고 아름다울 뿐이지 그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도 지금 당장의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밤에 집에 돌아갔을 때 바람직하지 못한 인탤리 여자 따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난 내 머리를 쉬고 싶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고른 여자가 결코 휴식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어리석고 못남에 시달리고 지쳐 결국 자기 자신의 자격지심에 뻗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제명보다도 20년이나 빨리 죽었는데, 그것은 과로 때문이 아니라 신경을 괴롭히는 걱정으로 인해 지쳐 버렸기 때문이다.
살아 남은 두 부인은 소위 충분한 수당을 그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백 살 까지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였다. 두사람 모두 일생동안 단 하루라도 진실하게 일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두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문자 그대로 희생시킨 것이었다. 나는 그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사람을 구할 방법이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나, 뾰죽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불행한 운명을 짊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는 말할 수 있으며 어쨌든 보잘 것 없는 행복밖에는 받지 못할 숙명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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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익살과 풍자로 연산군에게 간언한 표연말
표연말(?-149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소유, 호는 남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7년에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호당에 들어가서 사가독서(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제도)하고 검열이 되었다. 벼슬은 홍문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하루는 강가에 나가 놀다가 배를 타고 용산으로 내려가려 하였는데, 표연말이 노를 붙잡고 간하였다.
"육지로 해서 가면 안전하고 배를 타고 가면 위태로우니, 안전한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로 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사공을 시켜 노를 빼앗게 하니, 표연말이 물속에 뛰어들었다.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건져낸 후 물었다.
"네가 무엇하러 강물에 들어갔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초희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려고 뛰어든 것입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과연 굴원을 보았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그를 만나 보았는데, 굴원이 시를 주었습니다" "무슨 시냐?"
나는 어두운 임금 만나 강물에 빠져 죽었지만 너는 밝은 임금 만나 무슨 일로 왔느냐
익살로 넌지시 간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뒷날 함양의 전사에 물러가 살았는데, 연산군이 군현에 명하여 역마를 주어 불러 올리니, 표연말이 시를 읊었다.
새로 지은 서당의 벽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발굽이 나를 재촉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하네 아이 때엔 벼슬하는 것이 좋다고만 말했는데 늙어 가니 세상살이 어려움을 알겠네 천리 밖의 고향은 천리 밖의 꿈이요 한번의 비바람에 한번의 추위 닥치네 어느 때에 산림 속에 조용히 앉아 푸른 대나무, 오동나무 자세히 살펴보려나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경원에 유배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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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775년 자치독립을 원하는 북미의 영국식민지와 영국 본국 사이의 대립은 마침내 미국 독립전쟁으로 발전할 기세를 보였다. 남부 '버지니아' 식민지도 태도를 결정해야만 했다. 이때 '페트릭 헨리' (1736-1799)는 대의원회의 연설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도리 밖에 없다고 절규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원합니까? 생명은 존귀하고 평화는 감미로운 사슬에 묶인 노예의 신세가 되더라도 이것을 얻고자 합니까? 당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길을 택할지 모르나 나는 외칩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 후 이 말은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이 즐겨 부르는 구호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2월 혁명 때도 쓰여졌다. 1945년 겨울, 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벼락같은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히 일어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구호를 외치며 반탁시위를 벌인 것은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에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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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혼담을 거절한 이유
독특한 화풍으로 메이지 화단에 이채로운 업적을 남긴 데라사키고교는 처음에 의사가 될 생각으로 고향 아키다항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원래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기 때문에 열 여섯 살 때 방향을 전환, 그 고장의 고무로 이사이라고 하는 화가 밑에서 오로지 그밀 공부에 몰두했다. 그림 솜씨는 눈에 띠게 좋아져 스무 살이 될 무렵에는 스승이 이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자 곧 상경하여 동향 출신의 대가 히라후쿠 스이앙의 서생이 되어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 후 하숙 생활을 시작했는데, 생활고가 워낙 심해 어쩔 수 없이 인쇄화의 판목을 뜨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면서 고학을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에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어떤 사람이 당시의 유명한 화가 사타케 에이코의 딸과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혼담을 넣었다. 생활고에 허덕이던 때이니 기꺼이 그 혼담을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고교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모처럼 생각해 주신 배려 감사합니다만 장래 제가 유명해졌을 때 처갓집 덕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때문에 명가에서는 아내를 맞지 않을 생각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고교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것은 과연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이다. 고통에 못 이겨 사람을 배신하고 지조를 팔고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사악한 무리와 어울린 자는 동서 고금의 역사를 통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것이 인간의 취약점이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생활고에 무릎을 꿇은 수많은 사례에서 인간적인 공감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그 연약함을 극복한 불굴의 기개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해 득실에 따라 재단하려는 세태의 큰 흐름 속에서 고교가 보여 준 기개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들다. 오히려 너나 할 것 없이 유리한 조건에 매달리려는 작태가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적신호다. 항상 한 걸음 물러서서 세태를 응시하자. 매사에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우리 몸을 찌를 수도 있는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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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여섯번째 이야기 사나운 신부 길들이기
한번은 루까노르 백작이 심각한 목소리로 빠뜨로니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빠뜨로니오, 내 부하 중 한 명이 자기보다 부유하고 가문도 나은 여자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그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여자라고 소문이 났다는 사실이라오. 과연 부하에게 그 여자와 결혼하라고 해도 괜찮을지 알고 싶으니 이야기를 좀 해주시오." 그러자 빠뜨로니오는 어느 선한 아랍인의 아들이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마을에 선량한 아랍인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청년이었지만 워낙 가난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의욕은 많았지만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껏 풀이 죽어 지냈습니다. 같은 마을에는 그 청년의 아버지보다 훨씬 부자고 세력도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청년의 곧은 성품과는 대조적으로 사납고 모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나운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어느날 그 선량한 청년은 아버지에게, 자신은 물려받을 재산이 없어 평생 초라하고 궁핍하게 살든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야 할 지경이니 차라리 자기가 좋은 혼처를 찾아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맞다며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그 부자를 찾아가 딸을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매우 놀라며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그 딸의 성격을 아는 한 그녀와는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꼭 그녀와 결혼하겠다면서 비록 당장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겠노라며 간청했습니다. 아들의 뜻이 워낙 확고한지라 아버지는 곧장 그 부자 친구를 찾아가 아들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자기 아들이 그의 딸과 결혼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만일 그 결혼을 허락한다면 나는 친구가 아니라 사기꾼일 걸세. 자네 아들이 불행해질 수도 있고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이 되는 게 아닌가. 확신하건대 내 딸과 결혼하게 되면 죽거나 아니면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걸세. 자네 뜻을 저버리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게. 만일 정말로 내 딸을 사랑하여 데려만 가준다면 자네 아들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네."
그러나 청년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기는 하지만 아들이 그 딸과 결혼하기를 무척 원하고 있으니, 자기의 아들을 기쁘게 받아주었으면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윽고 결혼식이 올려졌고 신랑과 신부는 신랑 집으로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랍인들의 관습대로 신혼부부에게 저녁상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부모와 친척들은 신랑이 다음날 심하게 다쳐 있거나 시체로 발견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두 사람을 남겨두고 모두 나갔습니다.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이들은 식탁에 마주앉았습니다. 신부가 한마디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신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개 한 마리를 보고 성을 내며 말했습니다.
"이봐, 이 개놈아, 손 씻을 물 좀 가져와!"
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더니 그는 더욱 화가 나서 손 씻을 물을 가져오라고 다시 소리쳤습니다.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그는 미친 듯이 성을 내더니 식탁에서 일어나서는 칼을 집어들고 개에게 갔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향해 칼을 들이대며 다가오는 것을 본 개는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도 개를 쫓아갔습니다. 그들은 테이블, 식탁, 화로 위를 뛰어다녔고 마침내 젊은이는 개를 잡아 머리와 다리를 잘라 토막을 내면서 테이블보, 식탁할 것 없이 온 집안을 피로 범벅이게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채 화가 가라앉지 않은 젊은이는 피투성이인 채로 식탁으로 돌아왔고 다시 주위를 살피더니 이번에는 고양이를 보고 손 씻을 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본 젊은이는 격분하여 말했습니다.
"아니, 이 응큼스러운 간신 같은 놈아! 내 명령을 듣지 않은 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못 보았어? 만약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너도 똑같은 신세로 만들어버리겠다."
고양이가 물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고양이의 다리를 붙잡아 벽에다 대고 치면서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이번에는 개를 죽였을 때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사납고 성난 모습으로 다시 식탁에 와서는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미쳤거나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신랑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젠 집에 유일하게 남은 말 한 마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게 손을 씻으려 하니 물을 가져오라고 매우 사납게 소리쳤습니다. 당연히 말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죠. 그러자 신랑은 또 말했습니다.
"이봐, 내 집에 네놈만 남았다고 해서 명령을 거역해도 내가 가만히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하나?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네놈뿐 아니라 이 세상 어떤 놈이라도 방금 전 개나 고양이 같이 비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는 걸 명심해!"
말이 자기 말을 듣고도 꼼짝하지 않고 있자 그는 이제까지보다 더 화를 내며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완전히 잘게 토막을 내었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분개해서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그와 같은 결과를 맞게 될 거라고 소리치며 하나밖에 없는 말까지 죽이는 것을 보자, 그가 장난삼아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만일 집에 천 마리의 말과 천 명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명령을 어긴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죽여버리겠다고 맹세를 하면서 신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태로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피로 범벅이 된 칼을 쥔 채 사방을 살피더니 주변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기 부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향해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손 씻을 물을 가져오시오."
부인은 무슨 화를 당할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얼른 일어서서 손 씻을 물을 가지러 달려갔습니다.
"아! 당신이 내 말을 듣다니 신께 감사한다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명령에 불복종한 녀석들과 같은 신세가 될 뻔했지 뭐요."
그런 다음 신랑은 즉시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고 그녀는 신랑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가 난폭한 투로 명령할 때마다 그녀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신부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면서 밤을 보냈고 이윽고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밤에는 내가 너무 화가 났었던 모양이오.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소. 그러니 아침에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도록 신경을 쓰시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도록 하시오."
이윽고 아침이 되어 양가의 부모들이 신혼부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집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분명히 남편이 이미 죽었거나 심하게 다쳤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문 틈을 통해서 집안을 들여다본 그들은 집안에 신부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는 문밖에 부모님들이 오신 것을 알고 그들에게 조용히 가서는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쉿, 조용히들 하세요. 이렇게 떠들다가 그이가 깨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 모두 그 사람 손에 줄초상이 날거라구요."
신부의 말에 깜짝 놀란 그들은 지난밤의 일을 신부에게 모두 전해듣고는, 사나운 신부를 다스리기 위해 신랑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순하고 행복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신부의 아버지도 자기의 부인을 다스려 볼 심산으로 사위가 했던 것처럼 마구 화를 내며 집에 있는 말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인은,
"이봐요, 당신은 너무 늦었어요. 당신이 말 백 마리를 죽인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예요. 그럴려면 좀더 일찍 시작하셨어야죠. 우리는 이제 서로를 너무 잘 알잖아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작님, 만일 당신의 부하가 그 사위와 같이 집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결혼을 허락하시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만두게 하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일 백작님이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하신다면, 당신께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처음부터 알리라. 그렇지 않으면 후에 아무리 알리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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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9. 나의 운명을 바꿔놓은 광주
5.18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도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나자신으로 볼 때도 참으로 운명적 사건이었다. 그해 5월 나는 문화방송(MBC) 취재반장의 자격으로, 김익호, 김용철, 정동영, 전평국 기자와 함께 광주에서 눈물을 흘리며 취재하고 다녔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웃분들 앞에서 역시 눈물을 흘리며 실상을 보고했다. 이때 우리 보고를 듣는 이들도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 이 눈물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포고령 위반(유언비어 날조 유포, 불온문서 작성)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으로 직행했고, 목이 잘렸으며, 그후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했다. 가정이지만, 만일 그때 광주에서의 그 일만 없었다면 나는 지금 순탄한 언론인 생활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MBC 취재진이 광주로 떠난 날은 1980년 5월 20일이었다. 장성에서 고속도로가 막혀 차를 보내고 걸어서 들어가다가 근처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첫 번째 고비를 만났다. 멀리 광주가 벌겋게 불타 오르는 모습을 보며, 또 노한 시민들의 함성을 들으며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몽둥이를 든 청년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알고 보니, 집주인의신고로 달려온 동네 청년들이 우리가 자고 있던 집 주위를 어느새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받고 있는 혐의는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이 통제되고 있던 때라 그후로도 이런 일이 번번했다. 우리가 신분증을 제시하며 기자임을 설득했지만, 이번엔 청년들이 이렇게 나왔다.
"기자면 단 줄 아시오? 기자들이 잘한 게 뭐요? 기자들은 누구편이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청년 하나를 설득해서 이튿날 아침 길잡이 역할을 맡겼다. 우리는 그 청년을 앞세우고 극락강을 건너 아시아자동차 옆으로 광주에 진입했다. 그러나 우리의 행색이 너무 눈에 띄어 또 간첩이란 오해를 받을 것만 같았다. 얼굴은 희지, 옷은 반듯하지, 구두는 깨끗하지, 입에선 표준말은 나오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깔끔한 점퍼가 눈에 띄지 않도록 벗어들고, 머리도 적당히 헝클어뜨린 다음, 큰길로 썩 나서서 지나가는 데모대의 트럭을 향해 점퍼를 흔들었다. 그랬더니 트럭이 우리 앞에 섰다. 우리는 그 트럭에 올라탔다. 먼저 타 있던 데모대들은 우리에게 김밥과 과일을 주었다. 배가 등가죽에 붙어 있던 우리는 그들이 주는 걸 받아 먹어가며, 또 팔을 내뻗고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함께 외치며 전남도청앞으로 갔다. 시내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전신주는 넘어져 있었고, 상점은 부서졌으며, 길가엔 불탄 자동차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거리는 전쟁이 휩쓸고 간 것처럼 초토가 돼 있었다. 이런 가운데를 외국 TV기자들만이 호위를 받으며 판을 치고 다녔다. 우리는 도청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책임자로 보이는 학생을 설득했다. 당시 국내기자로 도청에 들어가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책임자를 설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를 이렇게 설득했다.
"좋다, 당신 말대로 우리는 그 동안 잘못했다. 광주시민, 국민의 입장에서 보도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내 힘으로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내기자가 취재를 못해서 말이 되는가. 외국기자에게만 취재를 허용하고 도와준다면 이것은 사대주의다. 우리가 찍은 필름이 방송되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다음 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달라."
학생들과는 논리가 통했다. 우리는 그 책임자의 배려로 당시 상황을 필름에 담을 수 있게 됐다. 취재 허용뿐만 아니라, 호위차 한 대가 앞에서 사이렌을 불며 취재를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전평국 기자는 숨겨오던 캐논 16mm 카메라를 꺼내 지프 위에 올라타고 금남로 넓은 길을 달려가며 신바람나게 취재했다. 그런데 전 기자는 그날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열심히 취재를 하다가 호위해주던 학생들과는 다른 계파의 사람들에게 잡혀 나무에 묶여 있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물론 카메라도 빼앗겼다. 전 기자의 혐의는 역시 일본 간첩이었다. 그날 이후 사태가 끝난 28일까지 김용철, 정동영 기자는 병원, 외곽지대 등 현장을 중심으로 뛰었고, 나는 도청을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상황을 정리하고 지휘했다. 또 카메라 취재기자들이 현장을 수록한 필름을 전주로 수송하는 일을 내가 맡았다. 나는 현장을 파악하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양순한 사람들이 그토록 격분한 까닭을 파고들수록, 나는 기자라는 신분을 잊을 만큼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공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과잉진압에 대한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조사됐고 알려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려고 한다. 다만 취재중 당시 광주 MBC 서공석 기자(현 광주방송 보도국장)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밝히며 여기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당시는 얼굴이 알려진 현지 기자들의 활동이 아주 부자유스런 때였다.
21일, 광주에 도착해서 보니 전화가 이미 끊겨 있었다. 나는 당시 교통부를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도전화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남로에서 다시 걸어서 광주역으로 갔다. 기사보니 대합실 여기저기에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직원들도 모두 피해버려 역사 안팎이 텅 비어 있었다. 역장실을 찾아가 철도전화를 들었더니 교통부가 기자실이 금방 나왔다. 나는 거기서 그날 취재한 것들을 기자실의 미스 유를 통해 모두 본사로 송고했다. 미스 유는 철도전화와 일반전화 두 대를 들고 내 목소리를 본사로 중계했기 때문에 이때의 내용이 모두 타사기자들에게도 동시에 알려져 각사에 보고됐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본 대로 들은 대로를 빠짐없이 송고했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정보당국이 그때 벌써 나를 찍었다고 했다. 두 번째로, 나는 불탄 MBC에 가서 긴 녹음을 보냈는데, 이게 또 찍혔다고 한다. 서울 본사에서 보내는 라디오 방송이 일단 유선으로 광주 MBC로 왔다가 송신소로 보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불에 타버린 MBC로 가서 담벼락에 그을린 전화선을 찾아냈다. 두 선을 스피커에 연결했더니 서울 MBC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임국희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 선을 다시 자석식 전화에 연결하고 돌려댔다. 한참을 그렇게 하니 서울에서 응답이 왔다. 나는 그 자석식 전화기의 수화기에 대고 보도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광주의 상황을 소상하게 보냈다. 이것이 녹음되는 동안 주조에서 방송하던 직원들은 물론, 광주 소식이 하나도 보도되지 않던 때라, 뉴스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함께 들었단다. 이때도 몇몇은 또 눈시울을 적셨다는 것이다. 이 녹음 테이프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많이 퍼지게 됐고, 기관(?)에게도 흘러들어가 내가 또 찍혔다는 것이다. 광주의 상황이 끝나던 날 새벽, 총소리가 콩볶는 듯하던 거리로 뛰쳐나가 나는 도청 앞 은행나무 아래서 불타고 있는 시체를 목도했다. 그 예쁘장하던 학생대표는 분신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자들과 함께 부대끼던 많은 젊은이들이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끌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앞에서 끌려가던 청년 하나가 5년 뒤 나에게 말했다.
"기자들이 우리 옆에 있을 땐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잡혀갈 때 보니까 군인들 옆에 서 있어요."
그후 나는 방관자일 수밖에 없는 기자의 한계에 대해 여러 차례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언론계를 뛰쳐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는 광주의 증인이고 피해잔데도 광주 얘기만 하라면 솔직히 겁부터난다. 군부독재가 두려워서도 아니다. 또다시 감옥에 잡혀갈까 무서워서도 아니다. 역설 같지만 광주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겁나기 때문이다.
5.18정신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해 5월 군부철권 통치자들의 총부리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의연히 일어난 광주시민들은 조국을 사랑했고, 민주주의를 사랑했고, 광주를 뜨겁게 사랑했다. 광주시민들은 당시 순식간에 무질서가 엄습하자, 도청 앞에 모여 서로 질서를 찾자고 외쳤고, 거리 청소에 나섰으며, 시장 기능이 마비되자 쌀과 채소를 서로 나눠 먹으며 조국 사랑, 광주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그후, 군부통치자와 그 하수인들이 잔머리를 돌려서 그렇게 됐겠지만 '광주'는 안타깝게도 광주시민들만의 광주가 돼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자 광주에 대해 논리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힘들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표적으로 사망자 숫자를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됐다. 숫자를 되도록 불려 말해야 듣는 쪽에서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됐다.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은 대부분 있을 수 있는 숫자들을 증언했는데도, 듣는 이들은 현장에 없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비논리적으로 부풀려진 숫자를 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나처럼 총알이 튀는 속에서 뛰어다니며 현장을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게 되었다. 광주는 사망자 숫자로 평가되는 게 아니다. 3.1독립운동에서, 그리고 동학혁명운동에서 사망자 숫자가 평가의 척도가 되는 게 아니듯이. '광주'의 의의는, 위대한 시민들이 애국심으로 뭉쳐 조국의 민주주의 총칼로 빼앗으려는 자들 앞에 분연히 항거해서, 마침내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지켜낸 데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는 위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날 그 감동적인 현장을 목도한 나는, 소요가 끝나면 나도 위대한 광주시민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정말 가족을 이끌고 광주로 간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광주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TV는 전두환 일당의 형이 확정됐다는 뉴스를 전한다. 지금도 내 녹음기에는 당시 광주에서 울려 퍼지던 총소리와 송신소에 흘러나오던 선무방송이 녹음돼 있다. 금석지감으로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이것은 사법적 응징일 뿐 역사적 심판은 이보다 더욱 냉철할 것이다. 어쨌든 5.18은 이번 일로 역사적으론 한 획을 그을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이번 일을 계기로 '광주'를 광주인(더 넓게,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의 광주에서 전 국민의 광주로, 세계인의 광주로 해방시켜야 한다. 더 이상, 사망자 숫자를 가급적 불려 말하는 사람, 군인들이 더 잔인한 방법으로 총칼을 휘둘렀다고 말하는 사람, 광주시민을 모두 유관순 열사처럼 말하는 사람만이 우리 편이고, 나머지는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광주'가 광주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당시 그토록 갈망했던 언론의 자유를 모든 이에게 마음껏 주어서, 마음대로 말하고, 평가하고 비평하고, 연구하도록 해야 한다. 또 광주를 모든 이들의 광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증오의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슴을 열어 화해해야 하며, 누구든 넓은 가슴에 품어야 한다. 망월동 묘지를 더욱 성역답게 하려면 누구든 자유롭게 참배하고 가신 임들의 넋을 기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아무 거리낌 없이 3.1독립운동을, 동학혁명을, 부마사태를 말한다. 5.18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들려면 배타의 울타리도 풀어야 한다. 혹 누군가가 피해의식이 있다면 이것도 해소해야 한다. 그것은 광주인의 고귀한 희생이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자존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5.18은 분명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오늘을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 한 가지는 꼭 반성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광주에서 어렵게 찍은 16mm 필름을 전주로 가져가느라고 국경 아닌 국경을 몇 차례 넘나들었다. 광주시의 경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그곳 농가에 맡기고, 그곳에서 다시 담양 가는 국도로 오토바이를 타고 얼마만큼 간다. 그때 약삭빠른 사람들이 오토바이로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얻어타고 몇 킬로미터를 가면 이젠 택시가 기다렸다가 전주까지 태워다 준다. 당시 형세가 죽네사네 했는데도 이런 수송 시스템이 생겨나 부산히 돈벌이들을 하고 있었다. 이때 목도한 것인데, 수많은 피난민(?)들이 광주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송정리 쪽으론 기차가 다녔는데, 평복으로 갈아입은 수많은 학생들이 피난을 가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그들 가운덴 지식인과 학생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내 생각엔 이러다가 학생들이 다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광주는 누가 지켰나? 5년 뒤 나는 월간조선 소속으로 광주를 다시 취재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때 많은 지식인들이 솔직하게 1980년 당시 광주를 몰래 빠져나갔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이렇게 고백한 분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은 중간에 다시 돌아와 사태수습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가 어지러울 때 살짝 빠져나갔다가 상황이 끝나고 슬며시 돌아온 사람(특별 먹물) 가운데 광주를 혼자 지킨 양 게거품을 무는 사람은 없는지 한번 살펴볼 일이다.
나는 계엄군이 들이닥친다고 해서 상황이 급박해진 1980년 5월 26, 27일경 도청과 공원, 그리고 시내 요소요소에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자유와 민주를 수호하던 나이 어린 애국자들을 생각한다. 꽃이 되어 날아간 이들은 말이 없다. 산 사람도 무명용사가 되어 말이 없다. 그런데 광주밖에 있던 사람, 광주를 고양이처럼 빠져나간 사람 가운데, 광주를 자기 혼자 지킨 것처럼 큰 목소리로, 또 호전적으로 떠드는 이는 없는가. 그들 속에 혹시 먹물은 없는가. 만약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광주'의 참뜻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5.18을 지역적 사건에서 전국적 사건으로 격상시켜 전 국민의 가슴속에 자리잡게 해야 한다. 5.18을 그날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속에 살아남게 해야 한다. 아니, 5.18을 자유와 민주를 사랑하는 세계 모든 이들의 교훈과 모범이 되도록 세계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과제가 우리들에게 지워져 있다. '광주'를 세계화하자면 구호로만은 안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증오보다는 사랑으로, 배타보다는 이해로 가슴을 열어야 하며, 피해의식과 마찬가지로 우월적 입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노력이 있어야만 아픈 기억 속의 '광주'는 광주라는 조그만 지역에서 벗어나 역사적, 세계적 운동과 사실로 승화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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