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1. 교선 논쟁
3. 고려 불교의 이상-이론과 실천, 그 대립의 극복
고려 시대 불교 통합 운동을 통틀어 말하자면, 첫 번째 단계는 본체와 현상의 일치를 주장하였던 균여의 성상융회와 이에 대비되는 선승들 중심의 선교 일치 운동을 들 수 있고, 두 번째 단계는 교종으로 선종을 흡수하는 의천의 천태종 성립을 들 수 있으며, 세 번째 단계는 선주교종을 주장한 지눌의 '정혜쌍수' 및 '수선결사',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결국은 교종으로 회귀한 요세의 '백련결사' 운동을 들 수 있다. 성상융회라는 말은 화엄 사상의 한 경향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의미로는 본체와 현상의 일치를 나타내며, 내용으로는 현상의 존재를 그대로 인지하려는 상종(법상종, 유종) 계통과 현상의 존재란 독립성, 독자성이 없이 인과 관계에 의존하므로 공이라 보는 성종(법성종, 공종) 계통의 대립을 조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는 중관과 유식의 통합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공종과 유종의 대립에서 최대 논점은 성불의 가능성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불성론에 관한 것이었다. 공종에서는 일체만유가 같은 법성을 가졌고, 따라서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연구하는 학파를 삼론 학파라 한다. 한편 유종,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신유식 학파는 제한적 성불설인 오성종성설을 주장하였다.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는 중생들에게는 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이 불성에 관한 논쟁은 교종을 더욱 현학적이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민중과 유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균여가 이것들을 통합하고자 한 것은 정치적 이유말고도 교종 내의 이론적 통합을 통하여 선종의 공격에 대비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균여는 후삼국 시대부터 분열, 대립하였던 화엄종 내 남, 북악의 갈등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굳게 가지고 있었다.
균여의 성상융회에 대해 당시 선종측의 뚜렷한 대응은 찾기 어렵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선종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다만 광종은 중국에서 선종 계통의 법안종을 받아들여 교종 세력에 대항시키는 이중 정책을 폈는데, 이는 법안종의 선교 일치 주장이 중앙 귀족과 지방 호족 세력을 통합하는 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법안종은 문익에 의해 개창되어 천태 덕소와 영명 연수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확립된 사상 체계이다. 연수는 자신의 저서 "종경록"을 통해 화엄종, 법상종, 천태종 등 제 교학의 장단점을 절충하고 이를 선종의 입장에서 체계화하려고 한 동시에, 또 "만선동귀집"을 지어 선과 염불을 융합시키는 등 종합 불교를 지향하였다. 법안종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우리 나라 선종사에서 차지하는 연수의 영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법안종은 한국 선종의 방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교선 논쟁의 본격적인 시작은 의천이 천태종을 성립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의천은 당시 교종 내의 분립과 선종 계통의 분파를 놓고 '말법시대'로 인식하고, 불교를 교리, 교단 양면에서 일대 개혁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로서 그는 천태종을 개창하게 되는데, 특히 중국 화엄의 5대조인 규봉 종밀의 '교관병수'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의천의 교관병수론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포섭하려 한 교주선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화되고 귀족화된 교종 내의 맹목적인 이론 추종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한편 이론적 측면을 무시하는 선종에 대해서는 옛 선과 지금의 선을 구분하여, 옛 선은 이론에 입각하여 실천을 닦는 습선인 반면 지금의 선은 이론을 도외시하는 말장난의 설선이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천의 교관병수론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론적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화엄의 '삼관오교', "법화경"의 '회삼귀일', 천태학의 '삼제원융'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세계에 대한 시간적 파악법인 연기론과 공간적 파악법인 실상론 등 모든 존재 이론들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삼제(속제, 진제, 중도)원융설은 본체와 현상을 분리시켜 보는 모든 논의에 반대하면서, 본체와 현상의 통일에서 세계의 진면목을 찾으려 하였다. 화엄의 삼관(유와 공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나 모든 현상적 존재가 참다움이 없이 진공임을 아는 진공관, 차별 있는 현상, 즉 사와 평등한 본체, 즉 리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통되는 것임을 아는 리사무애관, 우주간의 온갖 존재들이 서로서로 일체를 포용하고 포섭하는 것임을 아는 사사무애관) 또한 본체와 현상의 통일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통일성' 또는 '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주로 연기설의 인과율에 의존하는 것이 교종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이와 달리 선종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현상계의 인과성을 부정하고, 현상 세계란 단지 우리의 마음이 짐짓 꾸며 낸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본체와 현상이라는 구별 자체를 반대하였다. 이것은 교관병수설의 기초인 삼관설이나 삼제원융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었다. 의천은 "법화경"의 '회삼귀일'설에서 실천적인 기초를 찾았다. 불설에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으로 나누어진 교법은 방편이고, 삼승은 일승에서 나누어 말한 것이므로 일승 밖에 삼승이 없고 삼승 밖에 일승이 없다고 아는 것이 '회삼귀일'의 의미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의천의 교관병수설은 결국 모든 인간이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이었으나, 이론을 중시함으로써 실제로는 대부분의 무지한 중생들을 제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더욱이 본체와 현상을 구분하고 본체 세계만을 중시하여 중생의 실제 삶의 세계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바로 이 세계에서 이상 사회적인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근본 이념과도 배치되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므로 의천의 교선 일치 사상은 천태의 교관 일치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고, 또 그에 의한 교선 대립의 극복은 제2단계의 사상사적 시도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긴 했지만 아직 과도기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교주선종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선주교종으로 전환하여 교선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사람이 지눌이다. 지눌 또한 종밀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보다는 이통현의 "화엄론"에 나타난 선교 일치 사상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지눌은 교선 대립이 순서상 무엇을 먼저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종의 이론 중심적 경향은 지나치게 분석적이어서 본래의 목적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보고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반조한다"는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의천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지눌은 자신의 "진심직설"에서 "선종의 바른 신념은 교종과는 달리 일체의 유위인과를 믿지 않고 단지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믿고자 한다. 천진무구한 자기의 본래 마음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어 열반의 묘체를 각각 원만히 완성하되, 다른 것에서 구할 필요가 없고 처음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신의 본체는 인과를 벗어나 있다"고 하였다. 방법론에서 볼 때도 의천의 분석적 방법을 취했다면, 지눌은 종합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을 취하였다. 지눌의 방법은 분석적 방법에 내재해 있는 이론적 공허함을 극복하고, 이를 실천론의 입장에서 포섭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고 하였다. 이론적 공허함이란 그것이 앞에서 말한 의천의 사상이 특히 불성론과 불국토의 근본 사상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눌은 '간편한' 방법으로 자신의 본래 마음을 직접 돌이켜 아는 이른바 '회광반조'를 들고,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지혜'라고 하였다. 근본지에 의한 반조는 '심즉불'을 돈오(직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깨치고, 그 깨침에 의거하여 점차로 닦아 나간다는 선오후수가 바로 유명한 돈오점수 사사이다. 종파의 입장에서 이상과 같은 지눌의 사상 계통은 매우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선종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종밀이나 이통현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 점이나, 혜능의 북선 계통에 있으면서도 하택 신회의 남선 계통의 영향 또한 강하게 표출되는 등 결코 간단히 정리될 수 없는 사상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가 간화선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또한 임제종의 영향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복잡한 맥락을 종합하여 지눌은 '정혜쌍수'설을 제시하였다. 정은 먼저 깨치는 것을 의미하고, 혜는 교종 계통의 이론을 포함한 일체의 점차적 수행을 의미한다. 정혜쌍수설은 그의 돈오점수설의 구체적 실천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전체적인 경향은 선주교종이었다. 이미 마음을 본체와 작용(현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정과 지혜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혜쌍수설의 요점인데, 지눌은 이것으로 당시 과제였던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지눌의 정혜쌍수설은 의천의 교관병수설이 교종 일방에 치우친 것과 달리 본격적인 의미에서 선교 일치를 주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천의 교관병수설과는 달리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경절문이라는 3문의 실천 체계를 더 가지고 있다. '성적등지문'은 상성성의 교종 이론과 선종의 좌선법을 동시에 지녀야 함을 말하는 것이며, '원돈신해문'은 화엄과 선이 근본에서 둘이 아님을 밝히고 여기에서 주로 회광반조의 의미를 말하여 교선 일치가 하나의 신념의 문제임을 말하는 것인데, 거기에 간화선의 '경정문'을 말함으로써 모든 지해의 장애를 떨쳐 버리기 위해 선문의 화구를 탐구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리하여 지눌의 정혜쌍수설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지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수선결사' 또는 '정혜결사'라는 구체적 실천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 신앙 결사는 대체로 혼탁한 사회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정토 사상과 참법을 바탕으로 불국토 건설을 주창하는 기층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본격적인 불교 대중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수선결사는 선을 표방하는 참선 수행 방법으로서 이 후 혜심에게 계승되었다. 당시 최씨 무신 정권은 이 결사 운동을 적극 지원하여 15국사를 배출하기까지 하였다. 이 후 이 운동은 한국 불교에 선을 정착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단지 참선 수행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한 간화선을 더욱 정밀하게 정리하기도 하였고, 일반 백성의 세속적이 정토 신앙까지도 포용하는 불교관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을 가졌기에 이 결사 운동은 당시 지방 사회의 일반 백성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요새의 백련결사는 이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교종 쪽의 운동이었다. 백련결사 운동은 법화, 정토 사상에 입각한 '염불결사'로서 정토구생을 강조하는 등 주로 참법의 성격이 강하였다. 요세는 지눌의 수선결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실천 위주의 수선결사는 결국 연수가 "선종유심결"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수행상의 제약, 즉 이론적 기반이 없는 실천의 맹목성에서 오는 여러 제약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태의 묘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1216년 전남 강진의 만덕산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다. 요세는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한 실천 방향으로 수참(참회정진법)과 정토를 제시하였다. 지눌과 요세의 신앙 결사 운동은 지눌이 '돈오'와 '정혜'를 강조하는 데 비해, 요세는 '참회'와 '정토'를 강조함으로써 운동의 성격이 더 강하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이 두 운동은 세부적인 면에서 여러 차이가 있음에도 수행과 교화의 일치를 주창한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를 빚게 된 까닭은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생의 근기를 인식하는 데 서로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은 '즉심즉불'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오'와 '정혜쌍수'를 중시하여 결과적으로 그 대상은 여전히 최소한의 지해 정도는 갖고 있는 중생이었다. 그러나 요세가 대상으로 한 근기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길이 없는 가련한 중생이었다. 요세가 참회와 정토를 강조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와 같이 중생의 근기에 대한 이해에서 지눌과 요세는 크게 차이가 났다. 사실 지눌은 자기 마음의 직관을 강조하기 때문에 중생 근기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세는 중생의 지해의 정도 차이가 수행에 분명한 제약이 된다고 보고, 최하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정토 참회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요세의 결사 운동은 지눌의 그것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인 만큼 당연히 지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요세의 결사 운동이 최소한의 지해도 전제하지 않고 염불 중심의 '참회멸죄'와 '정토구생'의 행법에 중점을 둔 결사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와 함께 요세는 그 가능 근거를 "법화경"과 "천태지관"에서 찾음으로서 교종 계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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