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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98 호
단기 4340. 6. 9 (음력 4.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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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16회 전태일문학상 공모
우리 곁에 사람세상으로 늘 살아있는 전태일의 올곧은 정신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자 마련한 전태일문학상이 어느덧 제16회를 맞이하여 작품을 모집합니다.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다시 어린 동심 의 곁으로 돌아오겠다”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영혼에 여러분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십시오. 더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전태일문학상이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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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부문 기록문, 생활글, 시, 소설 등(내용 및 형식에 제한 없음)
마감일 2007년 7월 31일(당일 소인 유효)
심사 발표 2007년 10월 말(홈페이지 공지사항에 발표, 개별통보)
응모 요령 1. 겉봉에 「제16회 전태일문학상 공모 - OO부문」을 적어주십시오.
2. 작품은 3부씩 보내주십시오.
3. 공정한 심사를 위해 작품에는 이름을 적지 마시고 작품 표지에만 이름, 전화번호, 주소, 이메일주소를 적어주십시오.
4. 보내주신 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보내실 곳 우편 접수, 서울 종로구 창신2동 131-106 「전태일기념사업회」 문학상 담당자 앞
문의 전화 02-3672-4138, 이메일 chuntaeil@chuntae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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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모든 사람이 남보다 잘하는 일 한 가지. 자기 글씨를 알아보는 것. / 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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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입 속의 비밀을 삼키는 뜻은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일이다.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이 두 마디 말을 외우고서 실천한다면, 크게는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작게는 한 가정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세상의 재난이나 모진 슬픔, 하늘을 흔들고 땅을 움직이는 일이나 한 집안을 뒤엎는 죄악은 모두가 비밀스러운 것에서 생겨나게 마련이다 사물을 대하고 말을 함에 있어서 그 결과를 깊이 살피도록 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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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1. 주자학
예학의 발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전분야에서 병폐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집권층은 대동법과 호구 조사, 양전을 실시하여 허물어져 가는 봉건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예의 회복을 통해 봉건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시기에 들어서는 주자학의 예학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한편 조선 왕조는 일찍부터 "주자가례"를 보급하는 등 예를 통해 통치 기반의 강화를 꾀해 왔으며,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이 시기에는 예에 관한 학설의 수집과 정리 및 세목화 작업이 주자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결과 이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예학자로는 정구, 김장생, 김집, 정경세, 송준길, 박세채, 이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펴 낸 예학 관계 저술만도 정구의 "오선새예설분류", "예기상례분류", "가례집람보주", "오복몰례집람", "상례비요", 김집의 "의례문해속", 정경세의 "상례참고", "사문록", 박세채의 "남계예설", "육례의집", "삼례의", "범학전편", 이재의 "사례편람"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러한 예학의 흥성은 양란 이후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 기반의 급속한 해체와 예학이 당쟁과 깊이 연관되면서 원래의 목적과 기능은 탈색된 채 당파와 학파간에 극한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를 지탱해 주던 주자학이 이미 그 생명력을 상실해 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선조대를 기점으로 중앙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을 지어 정치력을 행사하다가, 양란을 겪은 후 광해군 때에는 동인 가운데서도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북인이 정권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은 광해군이 인륜의 부정을 저질렀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인조 반정이다. 이 인조 반정의 주역들은 바로 김장생의 제자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 계열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동시에, 정치 노선에서도 광해군의 실리주의 대신 주자학적 이념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명에 대한 대의명분론을 내세운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아울러 이는 어느 정도 민심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인조 반정 후 서인은 광해군을 뒷받침하던 북인을 몰아내고 그 대신 남인과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핵심 세력이 되었다. 서인 세력은 남인을 파트너로 삼아 상호 견제를 유도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관직과 기득권은 이들의 연합 정권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필연적인 귀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효종 사후에 일어난 예학 논쟁과 예송은 이러한 대립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논쟁 초기에는 당색과 무관하게 학문적인 차원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등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학 논쟁은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이 죽자, 인조의 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몇 난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비롯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효종이 집안에서 보면 둘째아들이지만, 나라에서 보면 장자에 해당한다는 데 있었다. 이에 남인인 윤휴와 허목 등은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긴 해도 왕통을 이었기 때문에, 삼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삼년복설을 내세웠고,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비록 왕통은 이었을망정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일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복설을 내세웠다. 그 뒤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인조의 비인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서인은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공복설을 주장하였고, 현종을 위시한 왕실측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복설을 주장하였다.
예란 가족 혈연적인 요소와 사회 신분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 요소들이 충돌할 때는 어는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서로간의 입장에 차이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자학에서는 혈연과 신분이 대립할 경우 어떤 것에 우선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엄격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것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였다. 이러한 예제의 구체적 적용이 예학 논쟁과 예송에서 나타난 서인과 남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보통 서인은 예를 왕실과 사대부간에 차이를 두지 않고 수평적으로 적용하고자 하였던 데 반하여, 남인은 왕실과 사대부의 예를 차별하여 왕실을 중시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인들도 국상과 개인적인 상에서는 국상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보면 왕실과 사대부의 예 적용에 차별을 인정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런 주장 대신에 신분과 혈연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의 예 적용에 따른 차이점을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서인은 혈연적인 요소에 중점을 둔 반면, 남인은 신분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이 중 한 요소에 중점을 두면서 거기에 다른 한 요소를 포섭하고자 하였다. 어쨌거나 이러한 예 적용상의 갈등은 그 당시 사회에 예가 일반화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이 각각 어떤 요소에 중점을 두고 예의 실행을 강조하였든간에, 이들 모두 예의 본질인 리의 강력한 통제를 통해서 현실을 이끌어 가고자 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완전한 이념을 그대로 실현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논쟁 차원을 넘어서 예송에 적극 참여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로부터 비롯된 예송은 그것이 과열되면서 부작용을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론적인 논쟁이 피를 부르는 사태로 이른 것은 명분론적인 이념 논쟁이 빚을 수밖에 없는 폐해라 할 것이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들에게 이성의 마비를 불러왔으며, 결국에 가서는 상호 견제를 통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붕당 정치의 공존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리하여 나타난 것이 서인 단독 정권의 창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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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나락
본뜻 : 산스크리트어 Naraka에서 나온 말로 지옥을 뜻하는 불교 용어다.
바뀐 뜻 : 본뜻 그대로 지옥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구원할 수 없는 마음의 구렁텅이를 가리키는 말로도 널리 쓰인다.
"보기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자네, 그렇게 노름을 좋아하다간 필경 나락을 떨어지고 말 것이네
낙점
본뜻 : 조선 시대에 관리를 임명하는 제도이다. 2품 이상의 대관을 선임할 때 후보자 세 사람을 적어서 왕에게 추천하면, 왕이 그 중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 뽑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경쟁 상대가 여럿 있는 중에 어떤 직책에 임명되거나 당선되는 일 등을 가리킨다.단어의 어감으로 인해 자칫 낙선을 연상하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보기글" -이번 공천에서 누구한테 낙점이 떨어질 것 같은가? -투고된 한 트럭 분의 원고 중에서 낙점을 받기란 가히 하늘의 별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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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꽃을 든 사회 혁명 - 히피
히피 문화의 배경
히피들은 누더기를 걸친 채 집을 떠나 LSD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통한 새로운 영적 체험을 갈구했다. 그리고 기존 산업 사회와는 전혀 다른 논리의 공동체, 즉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버려진 땅을 개척했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기존 사회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거부했는데, 히피 문화에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나 낭패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들에게 기존 사회는 구제할 수 없는 폐기물에 가까웠고, 따라서 차라리 버림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미국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낳은 사회적 조건 중 하나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사이에 자행된 조직적인 살상 행각이다. 우선 여러 정치적 인물의 숱한 죽음이 거론될 수 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다. 미국의 새로운 희망이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청년의 총격으로 댈러스에서 즉사한다. 그리고 이 암살자는 며칠 후 이감 도중에 나이트클럽의 소유주인 잭 루비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하는데, 이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 되었다. 잭 루비는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가 재판정에 서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1964년 미 정부는 워런 보고서를 통해, 케네디의 암살이 그 누구의 지원 없이 이루어진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철저한 경호를 받게 마련인 대통령이 일개 아마추어 암살범이 쏜 총탄에 살해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터무니없는 설명 이후 새로운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어쨌든 대통령의 암살이 대명천지 대로에서 벌어지고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이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경우가 그랬으니 고만고만한 정치적 인물들의 사정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과격 흑인 운동을 지휘하던 맬컴 X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평등은 백인 정부에 호소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무력에 의한 분리 독립을 흑인 운동의 방향으로 제시한 인물이 맬컴 X이다. 집이 폭파되는 등 여러 차례 암살 협박을 넘기다가 결국 1965년 2월21일 한 시위에서 연설하던 중 총격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그리고 1968년에는 평화적인 흑인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마저 암살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죽음뿐아니라 집단적인 죽음도 60년대 말 미국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앞에서 거론된 블랙 팬더의 경우나 65년 로스앤젤레스의 와츠 지역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 과정에서 희생된 34명은 소수의 죽음에 불과했다. 자원 입대했거나 제비뽑기식으로 징병된 미국 젊은이들이 매주 600명씩 베트남에서 죽어 갔다. 베트남 전쟁은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그 실상이 중계된 첫 번째 전쟁이었으니 그 사회적 충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1960년대 말 미국에서는 평범한 시민에서 대통령까지 누구나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미국의 풍경은 분노와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젊은이들로서는 미국의 문명을 근복적으로 부정할 근거를 얻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히피들의 구호인 사랑과 평화를 이해할 수 있고, 왜 그들이 사회에서 이탈하기를 꿈꾸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피들이 도시 문명과 단정한 차림새를 거부하고 누추한 외관과 자급자족 공동체를 동경했던 점에서 또 다른 사회적 배경을 읽어 낼 수 있다. 히피 현상을 일게 한 또 다른 배경은 포디즘의 정착과 그것이 초래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사회 질서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보면 어리숙한 찰리 채플린이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컨베이어 벨트 곁에 서서 자기 앞에 도달한 반제품의 나사를 죄는 일을 하루 종일 반복한다. 이렇게 전체 공정을 세분화하여 부분 공정을 특정 작업자에게 배당하는 생산 방식이 포디즘이다. 작업자로서는 단순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디즘은 생산력을 크게 높여 상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포디즘이 정착되면서 세상에는 자동차와 신발과 옷가지 등이 넘처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행복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런 상황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작업 시간뿐 아니라 여가 시간에도 자본주의 거대 공장의 논리가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힘겨운 작업을 마치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모두 공장에서 만들어진 운동화나 옷가지로 치장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자동차를 몰게 된 것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이용하지 않으면 여가와 휴식이 가능하지도 않은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히피들은 대량 살상을 자행하는 잔인한 문명의 혜택 따위는 거부하려 했다. 미국의 기계문명이 토해 내는 화려한 물건보다는 직접 만들어 낸 조잡한 옷가지가 차라리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편안한 도시 생활은 따스한 농경 공동체로 대체되어야 했던 것이다. 산업 사회의 생산과 소비에서 모두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히피들은 어른들의 눈에는 더럽고 형편없는 차림새를 즐기게 된 것이다.
사회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신좌파라 불리는 흐름이 히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좌파 이론은 이전의 사회 혁명 논리와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의 혁신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 제도의 변화만을 소리 높이 외치는 것만으로는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큰 차이점이다. 그들은 심리학적 혁명을 통해 문화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쇄신하려 했던, 심리학적 혁명 과정에서는 의식보다 무의식의 힘을 신뢰했던 것이다.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그 논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사람은 자라면서 의식을 지니게 되는데 의식이라는 것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모든 개인은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 등으로 의식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개인의 의식에도 부조리와 불합리가 스며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의식으로 사회를 교정하는 일이 가능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개개인의 의식마저도 사회의 부조리에 물들어 있다면 급선무는 의식을 근본적으로 쇄신하는 일이다.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만 사회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의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신좌파의 믿음이었고 그런 사고 방식이 히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히피들은 도덕보다는 자연스러움, 이성적 의지보다는 자유로운 감성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추구했다. 따라서 LSD를 찬양하던 그들의 모습도 이해가 된다. 환각제는 평상시의 의식 상태에서 탈출하는 도구였다. 히피들은 몽환적인 상태에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전혀 상상 못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피들이 엄격한 성 규범을 벗어던진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어른들은 문란한 섹스를 비난했지만, 섹스를 통해 교감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이 저주받을 것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본능적인 즐거움 속에 의식을 교정할 힘이 숨어 있으며, 그 힘은 결국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데 기여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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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2.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약
무조건적인 헌신은 어리석은 여자의 자기도취
우선 결혼하고, 그러고 나서 남편을 변화시키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남편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울퉁불퉁한 산길을 차로 달리는 것처럼 큰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큰 위험이 뒤따를지도 모르는 일을 행할 경우,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한편 잘 되어가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자극과 흥분을 가져온다. 얼마간은 능숙하게 남성을 변화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 계속되기는 어렵다. 남편은 여성의 노력과 희생이 뒷받침되어 그럭저럭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되면, 그 순간에 바로 그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이 범하는 첫 번째 과오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 결혼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를 확인하지 않고 결혼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일이다. 다음으로 커다란 실수는 결혼 전의 상대의 행동이나 자기 표현 방식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의 진정한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일이다. 우선 결혼하고, 그러고 나서 남편을 변화시키는 게임에서 대개 승산이 없는 것은 알코올 중독자, 바람둥이, 도박꾼, 난폭한 사람 등과 결혼한 여자들이다. 그러한 남자가 때로는 자기를 바꾸어 보겠다고 맹세하고 잠시동안 개심해 보이는 일도 있는데, 결국에는 역시 우너래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그런데 아내들은 그런 남편과 헤어지기는커녕 그런 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 사람은 한 사람 몫의 남자도 버젓한 성인도 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는 결점투성이의 사람인 것을 알고 결혼했어요. 본인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한 타인이 그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사랑만으로 병이 치유될 수는 없다. 남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상담자나 사회사업가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하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의 대응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일이 잘못되어도 마음 좋게 고민하는 역할을 사서 해서는 안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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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이개
이개(1417-145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청보, 호는 백옥이다. 세종 18년(1436)에 문과시, 동왕 29년에 중시를 거쳐 직제학으로 있었을 때 병자년 사건(단종 복위 모의)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이개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친구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해야한다" 그러나 이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개는 몸이 허약하여 옷무새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국문을 받을 적에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이개의 숙부 이계전이 수양대군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이개가 늘 경계하였다. 사형을 당할때 이개는 한 수의 시를 썼다.
사직이 안전할 땐 사는 것이 중요하고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영조 4년(172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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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브루터스 너까지도!
'폼페이우스'를 쓰러뜨리고 아시아를 정복한 '시저'의 권세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기회가 엿보이자 그때까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민중들 사이에는 순식간에 반감과 증오의 불길이 일었다. 그 결과 '카시우스'는 사원에서, '브루터스'는 공화제를 수호해야겠다는 애국심에서 '시저'를 습격했다. '시저'는 처음에는 도망치려 했으나 습격자들 가운데 평소에 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터스'가 끼어 있음을 보자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브루터스, 너까지도!" 하고 소리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바로 그의 정적 '폼페이우스'의 동상 아래였다.
믿어온 자가 자기를 배신했을 때, 즉 "믿는 도끼에 발 찍힌다"고 할 때 쓰이는 말. 이 말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로 해서 유명해졌지만 이 문구는 본시 '로마'의 문학자 '스에토니우스' (69-140)의 '12 황제전'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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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진짜 최고의 기수
도쿠가와 요리노부는 마술에 능했다. 높은 토담을 거뜬히 뛰어넘기도 하고 깎아 내린 뜻한 절벽도 단숨에 달려 올라갈 정도였다. 그래서 내심 자신만만해서 일본의 많은 다이묘 가운데서 자신만큼 말을 능란하게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술에 능했다고 하지만 자심만큼은 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우쭐해 했다. 자신이 생기면 생길수록 이것저것 새로운 기술을 생각해 내고, 아슬아슬한 재주를 가신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기와가 날아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 닥쳤다.
"땀 한 번 흘리고 올까?"
요리노부는 시종을 데리고 모래바람이 소용돌이치는 마장으로 갔다. 바람막이 두건을 끄고 풀쩍 애마에 올라탄 요리노부는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신들은 옆의 소나무 숲에서 바람을 피하면서 요리노부의 말 다루는 솜씨를 지켜보았다. 차츰 속력을 높인 말은 이윽고 자욱한 모래먼지가 피어오르는 속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요리노부가 쓰고 있던 두건이 바람에 불려 날아올랐다. 그러나 요리노부는 발걸이를 밟고 일어나더니 상체를 채찍처럼 뒤로 젖혀 날아오른 두건을 재빨리 받아 냈다. 대단한 솜씨였다. 보고있던 가신들도 자기도 모르게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요리노부도 자신의 아슬아슬한 재주에 아주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비었다. 그 일은 마술 사범인 마츠노 소타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소타로는 감탄하기는커녕 고개를 젓고 한마디했다.
"나리의 마술도 아직 멀었군."
이번에는 요리노부가 그 말을 들었다. 소타로의 강직함을 잘 아는 요리노부는 화도 내지 않고 물었다.
"내 마술이 아직 미숙하다고 말했다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들려주게."
소타로는 대답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님의 마술은 도카이도에서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오다와라진때 선봉대로 진군하고 있을 때 계곡 물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곳에는 혼자 겨우 건널 수 있는 허술한 다리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에야스 님은 다리 앞에서 말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하였습니다. 뒤따라온 단파 나기시게, 다니가와 히데가즈, 호리 히데마사 세 다이묘는 도카이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수가 어떻게 저 다리를 건널까, 이건 정말 좋은 구경거리라고 지켜보고 있었다 합니다."
"음 ,아버님께서는 멋지게 건너셨는가?" "물론 건너기는 건너셨습니다. 하지만 말에서 내려 시종인 호위대원의 등에 업혀서 다리를 건너셨습니다. 병졸들은 저분이 도카이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수인가 하고 웃었지만, 세 다이묘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과연 도카이도 제일의 기수이시다라고 극구 칭찬했다 합니다." "......" "아시겠습니까, 나리? 참으로 말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위험한 짓을 사서 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리가 자신만만하게 아슬아슬한 재주를 펼치시는 한 나리의 마술은 아직 미숙하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요리노부는 그 말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내가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는 말에 '근사하다'는 단어가 있다. 멋진 솜씨라는 의미보다는 경망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기야 '근사하다'는 칭찬을 받으면 아이 어른 구별 없이 누구나 솜씨를 과시하고 싶어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쓸데없이 우쭐거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자신감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이 일화는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과시욕은 누구나 많든 적든 감추고 있기 때문에, 이일화는 과시하고 싶은 경망스러운 충동을 감명 깊게 나무라고 있다. 이 일화는 아슬아슬한 재주를 부려 쓸데없이 '근사함'을 과시하고 박수 갈채에 우쭐해 하는 것이 얼마나 미숙한 태도인가를 도카이도 최고의 기수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깊은 맛이 있는 에피소드에 의해서 해명해 준다. 도쿠가와 요리노부도 크게 깨달으며 이에 수긍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자신의 솜씨에 우쭐해 하는 과시욕이 마음 어딘가에 숨어 있으면 그 자체가 이미 미숙함을 말해 준다는 진실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걷는 길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면 화려한 묘기 같은 것을 뽐내서는 안 된다. 이에야스가 결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다리를 건넜듯이 견실함 속에서 길을 찾을 때 앞날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 따위의 특기를 뽐내는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도 견실한 태도를 추호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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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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