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2. 재편기/고려말--양란 이전
1. 주자학
조선 주자학의 발전
2. 조선 주자학의 정립
16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사화는 사림파 유학자들을 다시 향촌으로 내몰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학자들은 불우한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사상사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오히려 발전의 기회였다. 공직에서 자유로워진 학자들은 향촌에 은거하면서 주자학의 근본 문제를 깊이 천착하였고, 자신의 시각으로 주자학을 재구성하여 조선 주자학의 이론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뜻밖의 혜택'을 가장 먼저 입었던 사람은 서경덕과 이언적이었다. 서경덕의 사상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독자적인 것이었다. 리를 중심으로 하여 자연과 사회를 해석할 것이 요구되었던 시기에 그는 기 범주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그와 유사한 경향을 가진 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김시습은 "태극은 음양이고, 음양은 태극이다"라고 하여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서의 태극을 기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경덕의 철학 체계는 그보다도 더욱 일관되고 체계적인 기철학 사상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로 규정하면서 태허를 기로 파악하였으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영원히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이 태허의 움직임에 의해서 생성되는데, 태허의 움직임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기보다 먼저 존재할 수는 없으며, 리라는 것은 단지 기 운동의 일관성 혹은 법칙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서경덕의 사상 체계는 중국의 성리학자 장재와 소옹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가령 "어떻게 운동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 곧 "기틀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는 것은 그의 독창적인 표현인 것이다. 서경덕의 사상이 성리학 연구의 심화에 동반될 수 있는 독자적 사상 체계였다면, 이언적의 사상은 당대의 역사적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사적 업적은 무엇보다도 주자학의 본체 개념인 태극을 정확하게 규정하였다는 데 있다. 곧 그는 조한보와 벌였던 이른바 무극 태극 논쟁을 통해 태극을 도가적으로 해석하는 조한보의 학설에 반대하고, 태극을 "형상은 없지만 만물의 근원으로서 실재하는 리"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리와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의 태극 개념을 올바로 소개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서 양 범주의 긴밀한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는 리가 기에 앞선다고 주장하여 명확하게 리 중심적인 사고를 보여 주었다.
조선 주자학을 정립하는 데에는 위와 같은 사상가들의 노력이 전제가 되었지만, 그것을 더욱 심화시킨 이는 역시 이황과 이이였다. 이들은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초로 주체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조선 주자학의 세계를 본격으로 열어 놓았으며, 이들의 연구 주제는 그대로 조선 주자학파의 연구 주제가 되었다. 특히 이황의 사상은 일본 에도 시대 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그 독보성을 확인받기도 하였다. 이황의 방대한 사상 체계는 궁극적으로 리의 존엄성과 절대성을 확보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 사상 체계는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았던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을 통해 구체화되었는데, 거기에서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에 탄 것이다"라는 리기호발설을 자신의 최종적 견해로 제시하였다. 이 때 사단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순선한 마음이고, 칠정은 선하든 악하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이황의 견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리가 발한다'는 것, 곧 리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단과 칠정을 순선한 것과 선악이 혼재한 것으로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황이 리의 능동성을 긍정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주희는 리를 형이상의 실체, 의미적 존재로서만 인정하여 그것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기라고 하였는데, 이황은 이러한 규정이 불만이었다. 곧 리가 운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은 물건'에 불과하고, 따라서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보기에 리는 절대적인 무엇이어야 했다. 리는 모든 선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는 논리적인 모험을 감내하면서도 리에 능동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모험은 한 마디로 선과 악, 선의 근거와 악의 근거를 엄격히 구별하여 인간의 삶에 털끝 만한 악행도 자리 잡을 수 없도록 하려는 강한 도덕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일 때만 금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구별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이황은 주로 인간의 내면에서 선과 악의 근거를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도덕의 당위성을 더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이황의 철학은 주자학 중에서도 심성론의 분야에 치중하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주자학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즉 조선의 주자학파는 이황의 연구 주제와 관심을 계승하여 그 이론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적어도 심성론의 분야에서는 본래의 주자학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물론 이황이 본체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본체론은 외적 자연에 대한 분석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곧 그의 본체론은 도덕론과 심성론에 기초한 본체론으로서 인간의 구조를 자연의 영역에까지 확대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이황은 존재론의 영역에서도 "리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다", "리가 주인이라면 기는 하인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게 되었다. 리가 선의 근거이고 기가 악의 근거임을 감안한다면, 이황이 왜 이러한 견해를 제시하였는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기는 자연 운동의 물적 근거이고 리는 자연 운동에서 관찰되는 도덕적 이법성이라는, 리기에 관한 본체론적 규정을 생각하면, 이황이 얼마나 배타적으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확보하려고 애썼는지를 알게 된다. 본래의 주자학보다도 더 배타적으로 더 엄격하게 리의 존엄성과 절대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던 것, 그에 따라 사람들에게 '도덕적이어야 함'을 더 강하게 요구하였던 것, 이것도 이황 사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또 조선 주자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도덕적이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이황은 '경'을 제시한다. '경'은 일종의 도덕적 긴장 상태를 가리킨다. 무슨 일을 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어느 경우든 자신의 본성과 일치되는 도덕적 표준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경'이다. 이것은 주자학의 실천 방법론인 '거경궁리'에서 '거경'에 해당된다. 그리고 '거경'을 통한 물질적 욕망의 차단을 중시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황에게서는 '궁리'의 측면이 덜 강조된다. '주희의 자연학'을 구성할 수는 있어도 '이황의 자연학'을 구성하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긴장 상태는 흥미롭게도 이 후 조선 주자학의 긴장, 곧 경직성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이황과 비교해 볼 때 이이는 융통성과 균형 감각을 좀더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이황이 유학의 한 분파인 양명학을 강력하게 배척한데 비해, 이이는 양명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나 도교 사상과 같은 이단 사상에 대해 연구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이가 유학의 본령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이황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사회 통합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유교적 행동 규범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학설은 이황과는 많이 다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황보다 본래의 주자학에 더 투철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였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그는 이황의 비판자였다.
이황이 심성론에 대한 이해를 우주론의 영역까지 확대시켰다고 한다면, 이이는 자연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인간을 파악했다. 그가 보기에 리가 운동하다는 것은 도무지 합당하지 않은 견해였다. 리와 같은 의미적 존재, 형이상학적 원리가 세상을 날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실 리에 대한 주자학의 규정을 보면 리가 운동한다는 이황의 학설은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이이는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존재인 리를 기의 주재자로, 형체도 있고 작용도 있는 존재인 기를 리의 재료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을 기초로 그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직접적인 운동 요인이 되는 기의 작용성과 그 운동을 규범하여 운동의 도덕적 질서를 잃지 않게 하는 리의 주재성이라는 두 기능의 연관을 통하여 일관되게 해석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면 그것이 그대로 이황의 리기호발설에 대한 비판이 된다. 곧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을 타는" 하나의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파악하였다. 자연에 두 가지 운동 형식이 있을 수 없듯이 인간의 마음이 발동하는 데에도 리가 발하고 기가 발하는 두 가지 형식이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황의 리기호발설에 대하여 이이의 이러한 이론을 '기발리승일도설'이라고 한다. 아울러 이이는 인간의 감정을 포괄하면 칠정일 뿐이고 사단이란 칠정중의 순선한 일면만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여, 사단과 칠정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이황의 학설에 반대하였다. 인간의 정서는 하나일 뿐이며, 단지 그것이 사사로운 욕심에 의해 왜곡된 정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반영한 정서인가에 따라 선과 악의 구별이 생겨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이는 인심과 도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데도 반대한다. 도덕에 힘쓰는 마음인가 사리사욕에 힘쓰는 마음인가에 따라 도심과 인심의 구별이 생기지만 인간의 마음은 하나일 뿐이며, 피와 살로 이루어진, 따라서 욕망을 가진 몸 속에 깃든 본성인가 몸 속에 깃들기 이전의 본성인가에 따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으로 구별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본성이 하나임에는 변함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일원적 파악은 선과 악을 그 근원에서부터 구별하여 선의 진지를 배타적으로 구축하려 했던 이황의 사상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기를 리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이이는 기의 독자성을 인정하였다. 그가 보기에 리와 기는 다 함께 세계와 인간을 떠받치는 두 개의 축이었다. 그래서 그는 리와 기를 대등한 관계로 파악하고, 그것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이가 리와 기의 특성을 혼동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리기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주자학의 규정, 곧 "구별되지만 떨어지지 않는다"는 규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 더욱 주목하였고, 그러한 관계를 '리기지묘'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이이는 이황에 비해 기의 위상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이황의 철학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이의 철학을 주기론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서경덕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볼 때 이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그는 결코 기를 위주로 하거나 기를 우위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리의 무형성과 기의 유형성을 대비하여 리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기는 존재하는 곳이 국한된다는 리통기국설을 제시하였고, 서경덕의 기불멸론을 비판하면서 기멸설을 주장하였다. 곧 리는 시공간적으로 무한하고 기는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확대 해석하면 리는 존재하지만 기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도 있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리와 기의 상호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이 자신의 사상 체계와도 모순이 도지만, 어쨌든 이러한 견해에서는 리 우위론의 입장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이는 리와 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본체와 작용, 현실과 원리의 대립을 해소하고 양자를 원만하게 조화시키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이가 이황과는 달리 현실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현실과 원리를 조화시키고자 한 그의 철학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이의 시대에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던 주역들이 제거되어 안정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의 경세 사상이 좀더 풍요로울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여하튼 그는 이론적 탐색에만 그치지 않고 국방력의 강화나 경제의 발전, 사회 정의의 확보를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제시하여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황과 이이의 의해 정립된 조선 주자학은 이 후 이황의 이론을 추종하는 영남 학파, 즉 퇴계 학파와 이이의 이론을 추종하는 기호 학파, 즉 율곡 학파의 논쟁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복잡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선조대를 기점으로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이론은 단지 '산림의 이론'이 아닌 '지배의 이론'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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