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부록
한국 보탑 문제 - 일본 이륙신문 역등. 1917년 6월 4일자 별보
최근에 도착한 외신을 빌면, 미국에서는 한국의 보탑 문제로 떠들썩한 논평을 불러일으켰는데,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의 구로키 대장은 신문기자들의 접근을 일절 사절하였다고 한다. 다음에 그 사실의 진상을 소개한다. 보탑이라면 어느 탑을 말하는가. 문제가 된 보탑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5층탑(10층탑의 잘못된 기록)인데, 높이가 9척 2촌(42척의 잘못된 기록)이고, 기가로 말한다면 수백만 원에 이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6백 년 전의 잘못된 기록)에 중국에서 한국에 기증한 둘 중의 하나인 그 보탑은 한국의 역사적인 보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무지한 한국사람들은 그 탑의 돌가루를 먹으면 어떠한 중병이라도 당장 낫는다고 맹신하며 '약옥탑'이라고 부른다.
문제의 발단
문제가 된 경위를 알아보았더니, 저번의 한국 황태자 책봉의식 때에 우리(일본) 황실에서는 다나카 궁내성장관을 특사로 보낸 바 있는데, 그는 옛날 물건을 애호하는 습관이 있어서 욕심을 참을 수 없었던지 일·한 양국친교 기념물 명목으로 앞에 말한 두 보탑 중의 경기도 풍덕군에 있는 것을 간청하여 얻었다.
가져온 자와 의문점
그 백옥탑을 다나카 궁내성장관에게 기증하였는지, 또는 억지로 일본 황실에 기증하였는지 이미 의문스럽다. 일본과 한국의 친교를 위한 기념물로 한국 황제가 일본 황실에 기증하였다면, 상당한 예절의 격식을 거쳤어야 하는데, 기증문서 하나가 없고 사절 한 명도 없었으며,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일본인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것은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다.
일본에 가져온 과정
다나카 궁내성장관이 백옥탑을 일본에 가져온 과정을 적어 보면, 올해 2월 4일,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후쿠오카현 출신의 곤도라는 자가 헌병들을 데리고 풍덕군에 나타나 보탑을 헐어가겨고 하자 군수 등이 그를 허락하려 하지 않았고, 주민들 중에서도 강력히 항거하려는 사람이 나오자 부득이 약간의 무력을 쓴 뒤에 보탑을 결국 해체하여 인천으로 운반하였다. 3월 15일에는 도쿄의 신바시에 도착했고, 19일에 우에노 공원 안의 재실박물관으로 운송되었다.
보탑의 현재
재실박물관에서는 어떤 명령이 있기 전에는 보탑의 해체포장물들을 엄밀히 보관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친목을 기념한 그 보물도 현재는 박물관 경내의 한 구석에 포장된 채로 보관돼 있으며, 누구도 그 실물을 보는 영광을 갖지 못했는데, 바다 건너 미국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음은 유감스럽운 일이었다.
앞으로의 조치
이 사건에 관하여 당국자는 속히 그 탑이 일본에 오게 된 자초지정을 공개하고, 천황이 본 뒤에는 일반인들도 관람케 하여 한국 정부에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만약에 탑을 가져온 절차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다나카 대신이 불가불책임을 지어 두 나라 황실에 누가 미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옥탑 탈거의 전말 - 1907년 6월 4∼6일자 잡보
풍덕궁 서면 경천리는 개성과의 경계에 있다. 그 마을 뒷골짝에 경천사가 있었으며, 그 절 앞에 12층(정확히는 3층 기단 위로 10층) 옥탑이 서 있었다. 그 탑신에는 12진상(불상 보살상)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으며, 탑의 높이는 10장(100척)이다. 그 한 면에는 (지정 8년 경천 축원 위황제황후태자)의 15자가 새겨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법륜상전) 네 글자가 옆으로 새겨져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중국의 원나라 재상 탈탈이 불탑을 세우기를 원하여 진녕군 강융(?∼1349, 고려 충선 충숙왕 때의 공신)이 원나라의 석공 장인을 데려다가 이 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석재의 품질은 옥 같으면서서도 옥이 아니고, 돌 같으면서도 돌이 아니다. 물 속에 있던 돌이라고도 하며,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단하고 그 색은 연한 푸른빛이니,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공주가 노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절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탑만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목동들이 날마다 건드리고 상처내어 밑의 5층(기단부 2층 포함)은 조각 형상과 글자 획이 많이 손상돼 있다. 그렇더라도 6백 년 전래의 유물로, 국가적으로 참으로 애석한 상태이다. 지난 가을에 일본인 중 다이엔·아유가이·에묘 3인이 나타나서 군수에게 청원하기를, "우리들이 경천사를 중축하고 탑을 보호하겠다" 운운하였다. 그래서, "그런 일은 내무부의 소관이다. 그러니 내무부에 가서 말해보라"고 이르고 돌려보냈더니, 며칠이 안되어 또 와서 청원하기를, "내무부 지시 속에 민가와 무덤들의 피해가 없겠는지 소상히 보고하라 하였으니, 즉시 밝혀 보고하시오" 하기에, 부득이 별로 피해가 없겠다고 즉시 내무부에 보고하였으나, 아직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광무 11년(1907) 2월 21일에 현지 군수가 경천리 마을의 보고를 받아보았더니, 일본인 수십 명이 탑 근처에 몰려와서 천막을 치고 장목과 볏짚 등을 실어다 놓고 탑을 헐려고 한다고 하길래, 당장 경찰관과 군청 서기를 보내어 일본인들의 간계를 들추어 보려고 하였더니 일본인 수십 명이 수상하게 움직이다가 탑을 허는 일을 멈추었다. 그 행위를 따져 물었더니, 칼을 휘두르며 맞서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내무부 경찰 고문의 통역인과 와타나베 타카직로가 탑이 헐린 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하므로, 군수가 말하기를, "사전에 허락한 문서가 접수된 바가 없는데, 마음대로 헐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찌된 짓인가, 즉시 가서 중단시키라"고 하였더니,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유물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관리 한 사람을 데리고 빠른 시간 안에 현장조사를 하고 허는 일은 중단시킨뒤에 와서 말하겠다"고 하기에 군수가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그 고적 유물은 우리나라 지역 기록에 소상히 실려 있어 동양에 알려져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폭력적으로 헐어가려고 한다면 그 사태를 막아야 한는 책임은 군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천리에 달려가 보았더니, 개성 경찰 지서의 경부 안토 도모쿠마가 역시 먼저 조사를 하러 와 있었다. 와타나베 및 안토와 함께 탑이 있는 곳에 가보았더니, 전날 밤 사이에 몰래 다 헐어버려 해체된 탑재들을 짚자리로 묶어 포장한 것이 40여 덩어리였고, 깨져서 버려진 조각들이 또한 적지 않았다. 산골짜기 입구로 줄지어 탑재를 실어가려는 달구지가 넷이나 되어, 군수가 그 주동자를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주동자는 서울에서 오지 않았고 단지 현장 감독자 몇이 와 있다"고 하기에, 다시 와타나베에게 그 내막을 알아봐 달라고 하였더니,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여기 와서 처음 들어보았더니, 일본인 중인 점패가 실제 주동자로서 당국에 진작 청원하였으나 내무부에서 승낙을 피하고 있다.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탑을 헌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승낙문거가 곧 내려오게 할 것이니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군수가 통역인 및 와타나베와 현장 감독자라는 자에게 말하기를, "허가문서가 도착한 다음에 실어감이 마땅하니, 지금 실어가려고 묶어 놓은 탑재들은 우선 다시 풀어놓고 인부들은 돌아가게 하라"라고 했더니, 와타나베가 감독자라는자에게 이르기를, "만일 그래야 한다면, 주동자가 오지 않고 현장 감독자가 전담한 일이니, 오늘 달구지 4대가 공친 손해비는 감독자가 책임지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수가 또 말하기를, "만일 허락문서를 갖고 실어간다면 상대방은 누구인가. 손해금은 주동자와 감독자가 지출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와타나베가 대답을 못하자, 즉시 감독자를 시켜 달구지 위에 실려 있던 여덟 덩어리의 탑재를 풀어서 한 곳에 모아놓고, 인부들도 되돌려보내고 나서 한참 앉아있다가 와타나베 및 안토와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세 관헌이 함께 현장조사와 수송 금지 조치를 취했으니, 마땅히 허락문서가 도착한 후에나 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감독자에게 당연한 그 사유를 알아듣게 하여 다시는 잘못을 거듭하지 않게 함이 어떤가."라고 하자, 와타나베와 안토가 모두 응락하며 감독자에 그렇게 하라 이르고 다시 말하기를, "이처럼 귀국 관인이 감시하고 있는데 감독작 무슨 일을 또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염려할 것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군수가 먼저 일어나 경천리로 돌아가고 서기와 마을의 동장을 시켜 현장에 달려가 다시 동정을 엿보고 보고하라 이르고 관아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서기와 동장이 보고해 오기를, "여러 관헌이 돌아가자 감독자가 다시 당장 탑재를 실어가려고 들면서 말하기를, '만일 실어가지 못하면 손해가 적지 않다. 따라서 불가불 급히 실어가야 한다. 남은 돌들은 앞으로 허락문서를 기다려 가져갈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하기에, 동장이 꾸짖어 말하기를, '비록 한 조각 돌이라도 손대선 안된다. 눈을 속여 실어가려고 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경고하며 절대로 못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수십 명의 불법적인 무리가 칼을 빼들고 우리를 위협하기에 끝까지 항거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어서, 군수가 그 간악함에 분통하면서 다시 동장에게 말하기를, "마을에 있으면서 막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사람을 수십 명 데리고 가서 며칠이라도 교대로 지켜보고 그래도 약속을 어긴다면 즉각 달여와 보고하라" 하고 군수도 즉시 경천리로 가려고 떠났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마을의 보고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새벽에 몰래 남아 있던 탑재석을 달구지 수십 대에 싣고 이미 급하게 떠나버렸으니, 그 과정에서 동민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막으려고 했더니, 일본인 사오십 명이 각기 총검을 들고 시위를 하며 달구지를 좌우에서 호송하는 바람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군수가 즉시 달구지 바퀴 자국을 따라가 보았더니, 이미 개성의 기차 정거장에 이르러 가지런히 쌓아놓고 포장된 덩어리마다 '궁내성에 보내지는 물건'이란 표지가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개성에 있는 일본 관할 기관에 달려가서 경찰관 하기노와 와타나베를 만나 항의하기를, "나 역시 막지 못한 것이 잘못이지만 그것이 운반될 적에 총검이 달구지를 에워싸고 있었으니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막으려고 했더라면 많은 사람이 구타를 당하고 상해를 입는 굴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아키노는, "비록 허가문서 없이 헐어갔더라도 하는 수 없다. 그 탑은 이미 다 운반되었고 현재 기차에 실려 떠나게 된 마당이니 서로 책임을 따져도 소용 없는 일이다. 그대 군수는 이 사실을 귀국 내무부에 보고하면 될 것이다"고 했다.
한국 보탑 문제의 속론 - 1907년 6월 5일자 별보
풍덕군 보탑 사건에 대하여 우리 대한매일신보는 거듭 별론한 바 있지만, 그 사실이 동서 여러 나라에 알려져 미국의 여러 신문에서도 크게 논평되었으며, 일본의 (만조보)와 (이륙신문)이 또한 공평한 해설로 그를 비평하고 있다. 어제 날짜(6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이미 일본의 (이륙신문)의 논평을 특별히 옮겨 소개했지만, 다름아닌 일본인이 쓴 그 사건 논평은 일본의 간악한 짓을 감싸려고 하면서 말한 것이데도 그 정도였으니, 하물며 세계 각국의 객관적 논평은 어떠했겠는가. 무릇 일본인의 강압적인 행위와 교묘한 속임수의 수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들이 위협 또는 유혹으로 한국인 소유의 물건을 크건 작건 가리지 않고 무법적으로 탈취해 간 것이 이루 해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번 옥탑은 6백 여 년이나 된 고적일 뿐아니라 그 정교한 조형미는 과연 미술적 보물이어서 그 가치는 수백만 환으로 계산될 수 있다. 저번에 다나카 자작이 일본 황실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건너왔을 때에 오직 고물을 탐내는 욕심으로 그 옥탑을 가져가고 싶어 했으나 한국 황제폐하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한국 정부의 승낙도 받을 수 없었다. 이른바 고물상인 곤도 사고로라는 자가 헌병들과 철로 역부들을 거느리고 그 탑이 있는 곳에 가서 밤을 세워 탑을 헐어 몰래 실어갔으니, 그 행위를 어찌 도둑질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한국 황제폐하의 허락하심과 한국 정부의 승낙이 없었더라면 정당한 예의의 절차와 명백한 공문이 확실하게 있어야 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지금껏 양국 황실 사이의 정중한 말이 없었으며, 한국 정부가 지시한 문서가 그 군에 보내진 바 없고, 그 지방 관리들이 왜 저항하였으며 마을 주민들이 왜 탑을 지키려고 했고, 일본인 사오십 명이 왜 칼을 휘두르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는가.
그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인의 논평이 비록 교묘한 말과 수식어로 분장하여 천하의 이목을 속이려 한들, 과연 그렇게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서울에서 발간되는 (서울 프레스)가 일본인의 언론기관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번 사건에 이르러서는 (대한매일신보)의 비판적 보도를 받아들여, '일본 이토 후작이 만일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하였고, 다나카 자작은 일개 상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하니, 그 불법행위의 사실을 (서울 프레스)도 숨길 수 없다고 자인한 상태임이 확연하다. 하물며 (만조보)와 (이륙신문)에 격력한 논박과 공평한 해설이 잇따라 실렸고, 미국이 여러 신문의 논평이 또한 그렇게 자자하였으니, 6백여 년 전래의 고적이자 수백만 환 가치의 이 보물을 도둑질해 간 사실이 천하에 폭로되었고, 만세를 두고 그것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일본에 가 있는데 따른 막대한 오명을 어찌 씻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 올바른 조치는 오로지 그 보탑을 한국에 되돌려보내어 기왕의 잘못을 사죄함으로써 양국 황실의 우의를 더욱 돈독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한국에 대하여 상응한 가치의 물품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이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보탑이 일본의 박물관에 있는 것이 영예가 되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으로 무수한 수치가 될 것이니, 일본 당국자는 잘 깨닫고 반성하여 올바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