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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9 호
단기 4340. 5. 15 (음력 03.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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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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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28회 근로자 문화예술제 문학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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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마음의 평화란 생의 갈등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아니라 그 갈등을 이겨내는 능력에서 온다. / 무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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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八章 (노자 - 도덕경 : 제6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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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古之極.
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선용인자위지하, 시위부쟁지덕, 시위용인지력, 시위배천고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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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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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여덟째 장
직역
장수 짓을 잘하는 자는 무력쓰지 않는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노여워 하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맞서지 않는다. 사람을 잘 쓰는 자는 그 아래에서 행한다. 이것을 일컬어 싸우지 않는 덕이라 한다. 이것을 일컬어 사람을 쓰는 힘이라 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필적한다고 한다. 옛부터 지극함이다.
해석
제갈공명은 칼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한 칼에 쓰러질 약졸이다. 그러나 조조의 대군도 그의 머리에 자주 패했다. 장수는 칼을 믿고 싸우는 자가 아니다. 칼을 믿고 싸우는 자는 병사들이 주로 할 일이다. 장수는 머리로 싸운다. 그리고 포카나 고스톱을 처본적이 있는가. 그때 조금 잃었다고 열받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열받고 이성을 잃을 수록 돈을 많이 잃는다. 고수는 자신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과 주먹질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 어쨌든 자신이 한대를 맞아도 손해이다. 외교술과 협상으로 적을 승복시킨다. 무력은 맨 마지막에 억지로 쓸 일이다. 사람이 일을 할때는 그 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일을 잘한다. 그래서 사람을 쓸려거든 그 사람들에게 그일에 대한 주인의식을 불어 넣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자신이 일하는 사람들의 아래에 처하는 것이다. 이런걸 보면 노자는 잔대가도 잘 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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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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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탁월한 전사는 무용을 떨치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이는 노여움을 보이지 않으며, 가장 잘 이기는 이는 적과 함부로 다투지 않으며, 사람을 잘 쓰는 이는 상대방에게 내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남의 힘을 쓰는 방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또한 하늘의 지극한 높은 이법과 일치하는 일이라고 한다.
주
사: 무사, 전사 무: 무용을 발휘하다, 용맹을 과시하다. 무란 남보다 먼저 나아가 적을 무찌르는 것을 의미함. 불여: 정면으로 맞상대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뜻임. 배천지극: 하늘의 지극히 높은 이법과 일치하는 것. 배천고지극의 고자는 후세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하늘의 이법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이상일 것이다. 이것은 도가와 유가의 공통된 이념이요 이상이기도 하다. 역경에는 '역도의 광대함은 천지와 일치하고, 변통은 춘하추동의 교체와 일치하며, 음양의 변화는 해와 달의 교체와 일치하고, 쉽고 간편한 선성은 인간의 지덕과 일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송대 성리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인 주림 계의 태극도설에는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합일하고, 귀신과 그 좋은 일 궂은 일을 합일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천도와 인도를 동일한 성격으로 간주하며 그것의 합치를 이상으로 하는 것은 동양 철학의 특성이기도 하다.
해
싸움을 잘하는 용사는 자신의 용맹을 함부로 과시하지 않는다. 그는 정면에서 적과 맞상대하며 싸우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가 진정으로 싸움 자체를 즐길 생각도 없을 뿐더러 전술상으로도 현명한 방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남에게 자신의 몸을 낮추어 겸양한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결코 남의 힘을 이용해 보겠다는 약삭빠른 처세술에서 나온 태도는 아닌 것이다. 그가 이렇게 처신하는 것은 남의 재능을 아끼고 그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협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주의 문왕은 위수에서 낚시로 소일하던 태공망 여상을 예를 갖추어 모셔 와 주나라를 흥왕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한 바 있다. 또한 촉한의 소열제는 비육 지탄을 삼키고 있을 때 젊은 서생인 제갈양의 초려를 세 번씩이나 방문한 바 있었다. 이에 크게 감격한 공명은 일개 객장으로 늙어 가던 유비를 그의 천하삼분책으로 제왕의 자리에까지 인도한 바 있다. 이것은 그릇이 큰 인물이 인재를 쓰는 참된 의미의 용인술인 것이다. 원래 중국인들의 기략에는 적의 성채를 무력으로 공격하는 것을 하책으로 보고 그 마음을 공략하여 감복케 하는 것을 상책이라고 한다. 남과 다투지 않고 너그러움과 겸손과 자애로써 처신하는 것은 하늘의 지극히 높은 이법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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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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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위조품의 희비극
미술품의 모조와 위작만큼 아마추어 애호가로부터 돈 많은 수집가, 나아가서 전문학자와 미술관·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일도 없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완전무결한 가짜와 위작 미술품들이 세계 각지의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국제 미술사회의 관측이다. 한국에서도 이 가짜 미술품과 위작 문화재들의 윤곽을 어림할 수 없을만큼 범람하고 있고, 또 어디선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물론 고의적인 일확천금의 사기행위이지만 진귀한 역사유물이나 특정 명가의 글씨 혹은 그림(반드시 걸작이 아니라도)을 찾는 돈 많은 수집가나 미술관·박물관의 심리와 요청이 있는 한 근절될 수 없는 자연발생적인 사회악이다. 서울의 고미술상과 수집가 사회에 나돌고 있는 가짜 유물과 위작 미술품은 삼국시대의 토기로부터 불상·고려자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서화와 각종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침범하고 있다. 물론 그 수는 국내의 전체의 진짜 문화재와 미술품에 비길 때 극히 제한도니 범위에 지나지 않지만 끊임없이 여러 사람을 골탕먹이고 있다. 가령 현재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통하고 있거나 말해지고 있는 것 가운데 6∼7할 혹은 그 이상이 가짜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대우너군의 유명한 난초 그림이라고 말해지는 것들 중 9할은 믿을 수가 없다고 단언한 전문가도 있다.한국에서 가짜와 위작 미술품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일제 때부터였다. 이 땅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 수짖ㅂ가와 애호가들이 다투어 진귀하고 유명한 유물과 미술품을 점유하려고 덤비자, 그에 따라 위작자들이 나타나고 무수한 가짜가 나돌게 되었던 것이다. 한 일본인은 1934년에 이런 말을 써 남기고 있다.
"교토의 돈 많은 수집가(골동상)가 평양 부근에서 출토되는 고와에 손을 뻗쳐 그곳 골동상을 통해 상당한 고가로 매점을 착수한 바람에 1930년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약 1년간은 값이 치솟고 물건이 동이 났다. 그러자 낙랑, 고구려 와당의 가짜 전성기가 연출됐다. 옛날에 구운 것과 같은 흙으로 감쪽같이 옛것을 흉내내 만들고, 교묘하게 문양까지 새겨 놓고 구었기 때문에 처음엔 모두 속았다."
진귀한 유물이나 특정 명가의 걸작엔 한정이 있다. 그런 것을 지나치게 탐낼 때 가짜가 등장한다. ㅎ방 후에도 숱한 가짜사건이 골동상과 수집가 사이에 있었으나 그런 일은 당사자들이 서로 감추는 바람에 내막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는 그때마다 금세 소문이 퍼지곤 했다. 불상 같은 금속유물 분야에선 골동상과 수장가 사회에서 상당한 전문가로 통하는 서울의 골동상인 김아무개가 경주 근처에서 쏟아져 나온 희귀한 이형토기에 7∼8백만 원을 투자해서 수백 점을 집중적으로 불법입수한 후, 수집가 이아무개(작고)와 정아무개에게 성공적으로 전매했다가 뒤에 그것들이 모조리 가짜임이 밝혀져 당사자들이 큰 골탕을 먹은 것은 물론 한동안 골동계의 고소거리가 되었던 사건이 1965년께에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또 대구에서 삼국시대의 금관이 둘이나 서울의 골동상가에 나타났다가 5년 전에 위작하여 땅 속에 묻어두었던 치밀한 가짜(?)임이 탄로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수년 전엔 어느 대학박물관에서 가짜 금관을 샀다가 망신을 당한 일도 있다. 전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는 또 미국의 어느 박물관 창고에서도 틀림없는 가짜 신라금관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가짜 유물, 가짜 미술품의 비화는 수없이 많다. 그중엔 정말 진짜를 뺨치는 가짜가 있는가 하면 전문가면 금세 식별할 수 있는 서투른 가짜도 있다. 지난해 봄에 일본에서 온 한 젊은 고문화 연구가가 일본의 어느 재벌 수집가의 최근 입수품이라는 신라시대의 사리장치 사진을 갖고 와서 서울의 전문가에게 검토를 요청했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5년 전에 이미 국내에서 가짜로 점찍힌 송림사 오층전탑 유물의 사리장치(보물 제325호)의 위작이었다. 그후 일본으로 유출되어 진짜 행세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신라 사리장치 위작이 최근 일본의 한 예술잡지의 고미술상 광고에 사진으로 소개되고있었는데(물론 진짜라는 설명으로) 이것은 감은사터의 서쪽 삼층석탑 속에서 나온 유물(보물 제306호)을 모조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나는 근대 이후 백 년 동안에 한국의 문화재가 겪은 수난과 민족적인 보호의 이면적인 비화를 확실한 자료와 기록 그리고 유력한 증언 취재로 엮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느 ㄴ어디까지나 제한된 단면에 불과하다. 완전히 잊혀지고 혹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비화가 몇 십배, 몇 백배도 될 것이다. 그동안 자료와 기록을 찾고도 충분히 다 소개하지 못한 것도 있다. 현재 정부는 약 1,500여 점의 귀중한 유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밖에 전통적인 놀이와 음악·연극·공예기술 등 48종이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또 전국의 중요한 역사유적과 기념물이 그 환경과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가적인 보호가 취해지고 있다. 보존시켜야 할 가치가 있는 옛날의 옷과 민속적인 유물, 기타 시골의 특정구가가 또한 중요민속자료의이름으로 지정돼 있다.
일부 문화재의 국가 지정 및 특별보호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실체의 문화적 영광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민족문화재의 한계가 앞서와 같은 제한된 지정·보호에서 금 그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정부와 전문가들이 생각하고 평가한 대표적인 것의 윤곽에 지나지 않느다. 수천 년 민족사의 구체적인 문화유산인 모든 문화재는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연구 혹은 보존될 가치를 갖고 있다. 그중에는 물론 특히 중요한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참다운 문화재 가운데 버려서 아깝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 앞에서 말한 지정문화재의 수효는 현재 국내에 유존되고 있는 각종 문화재의 1%도 안된다. 전국의 박물관과 국가 소유의 유적.유물 그리고 개인이 갖고 있는 물건을 모두 합친다면 그 수는 수십만 점 이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한말 이후 일본과 그밖의 외국에 유촐되고 혹은 빼앗긴 것이 10만 점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 창조되고 발달한 문화유산이며 동시에 세계 인류문화의 한 지역적인 기념물이자 역사유물들이다. 문화재에 대한 오늘의 인식은 그것을 창조한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범주를 떠나 세계 전체인류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존중·파악되고 있고, 그에 따라 유네스코가 중심이 된 국제적인 보호운동과 보존대책이 강구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역사유물과 미술품의 불법적인 밀수·도난·가짜 제작 등의 사건은 그때마다 세계 주요 국가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을 통해 즉각 범죄정보를 입수하여 범인 체포의 국제수사에 협력하게 돼 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FBI가 전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죽은 후버 FBI 국장은 미술품의 도난·사기·위조 사건을 전담하도록 하는 특별수사관까지 임명했다.
모든 문화재와 역사 기념물의 보호 및 보존운동은 오늘날 국제적인 공동의 문제로 부각돼 있다. 한국에서 문화재보호법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조치이다. 그러나 문화재 범죄사건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그중에서도 국제적인 골칫거리는 밀수 및 유출 음모이다. 문공부가 조사.작성한 자료를 보면, 1)국제공항과 항구 2)외교화물과 유엔군 운송수단 3)국제우편과 소포 4)기타 밀수출(충무·마산 등지를 거점으로 한 작은 화물선과 어선을 이용하는 방법)을 통해 한국의 문화재 불법반출이 끊임없이 기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문공부 조사자료는 이러한 한국문화재의 끊임없는 불법반출 음모의 원인을, '한국 고미술품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 증가' 와 '고미술품의 국가간의 가격차로 인한 계획적인 밀수'로 파악하고 있다. 그 이면엔 물론 국내의 일부 골동상과악당들이 관여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이들의 불법적인 암약은 유적지의 도굴과 매장 및 은닉문화재 절취, 그밖의 범죄행위자와 더불어 민족문화재 보호에 커다란 암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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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시대별로 본 한국 철학
2. 고대의 사상/고조선--삼국 시대
3. 불교
불교의 전래와 발전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라고 한다. 전진의 왕 부견이 순도와 불상, 불경 등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식적인 전래 시기이지만, 이보다 먼저 불교가 이미 고구려에 알려져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승려까지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식적인 기록보다도 먼저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이보다 조금 뒤인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5세기 경부터 변방을 통해 전래되다가 법흥왕 때인 서기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 사건 등을 거치면서 힘들게 공인되었다. 처음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은 확실하게 알기가 쉽지 않다.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중국 불교가 도가의 개념을 이용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였으므로, 그러한 연구 방법을 채용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전래된 불교는 인도 본래의 불교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중국적인 영향을 받은 불교로 보아야겠다. 불교가 전래된 당시의 우리 나라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일반적으로 지방과 부족에 따라 다른 토착적인 여러 종교들이 있는 가운데 보편적인 이념을 내세우는 불교가 들어옴으로 해서 전체적인 이념의 통일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지배 계층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는 종교적인 갈망을 높은 차원에서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했으므로, 빠른 시일 내에 퍼져 나갔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 우리 나라 불교는 부분적으로 인도와 직접 접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중국과 접촉하면서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 불교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고구려에서의 불교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현존하는 문헌이 없어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 전래 초기의 기록으로는 391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여 교를 내려서 불교를 숭상하여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는 기록과, 다름 해에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을 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395년에는 진의 승려 담시가 경, 율 수십 부를 갖고 고구려에 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전래된 지 200여 년 후인 576년에 의연은 전제로 가서 "십지경론", "대지도론", "금강반야론", "보살지지경" 등 매우 중요한 대승 불교 문헌의 저술자와 저술의 동기 및 그 영험 등에 관하여 자세한 것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대승 불교의 중요한 문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경론들에 관한 연구가 고구려에서 본격적으로 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에서 주로 연구된 것은 삼론종 계통의 불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서 삼론종 승려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고 해외에서 활약한 고구려 출신의 승려들 중에 삼론종 계통의 승려가 많기 때문이다. 그 밖에 고구려 불교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해외에서 활약한 승려들이다. 고구려 요동 출신의 승랑이 중국 남조에서 삼론을 개척하여 삼론종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활약한 승려들로는 혜편, 혜자, 승륭, 담징, 혜관, 도등, 도현 등이 있다.
다음으로 백제의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자. 앞에서도 말했듯이 백제에서 불교가 시작된 것은 침류왕 원년인 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왔을 때부터라고 한다. 마라난타 이후 초기의 백제 불교가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고, 성왕 대에 이르러서 불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기록에 나타난다. 성왕 4년(256)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라는 인도 승려와 함께 돌아와서 율을 변역하였다. 이로써 겸익은 백제에서 율종의 선구자가 되었다. 겸익의 활약과 아울러 성왕 시대 이후로는 많은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불교의 특징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계율에 관해서는 매우 정통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도의 율전 원전을 직접 들여와 번역한 정도의 수준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또 백제에서는 불교의 예술적 표현력이 탁월하였다. 신라에서 불교 사상은 어떠했는가? 신라에도 고구려나 외국의 승려들이 일찍부터 들어와 활동하였으나 신라에서 불교가 실질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때부터의 일이다. 신라의 초기 불교는 왕실과 결합하여 발전하였다. 법흥왕과 진흥왕 두 왕이 계속 출가할 정도로 왕실의 불교 신앙은 대단하였다. 이 때 이후 7세기 초반부터는 유학승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원광과 자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원광은 그가 지은 세속오계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를 전파할 뿐 아니라 사회 윤리의 정립을 위해서도 힘썼다. 자장은 계율 사상의 시조로 유명하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에는 "승만경"과 "유마경" 등 재가 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전이 중시되었다. 삼국 시대의 승려들 중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승랑의 사상을 다음에 좀더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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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선보다
본뜻 : 글자 그대로 '먼저 본다'는 뜻이다. 옛날에 혼인하기에 앞서 양가 부모들이 먼저 신랑, 신부될 사람의 인물됨을 살펴보았던 데서 유래한다.
바뀐 뜻 : 지금은 혼인 당사자들끼리 가까운 친척이나 어른의 소개로 상대방을 첫대면 하는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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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야, 어제 선본 거 어떻게 됐니? 사람은 괜찮든? -아유, 아버지도 요새 누가 선보고 결혼해요?
심심파적
본뜻 : 심심하고 한적한 시간을 깨뜨린다(파)는 뜻으로 심심풀이와 같은 말이다.
바뀐 뜻 : 할 일도, 재미 볼 일도 없어서 시간 보내기 위해 하는 짓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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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각은 그저 심심파적으로 시작한 일이지 전문으로 하고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심심파적으로 할 만한 일이 뭐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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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명예로운 고립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의 외교는 세력균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국가가 강대해져 다른 나라를 위협할 경우 약소국가들이 서로 동맹하여 이 강대국에 대항함으로써 전쟁을 막는 것이다. 이 경우 강대국은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어도 절대적인 정복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것이 절대주의 시대 이래 전통이 되다시피 한 유럽의 국제관계였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미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이러한 유럽대륙의 패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해외 식민지뿐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영토가 위협받지 않는 한 유럽대륙의 패권을 빼앗을 생각도 없었고 대륙의 패자가 침략적이지만 않으면 대륙의 국가관계에 그다지 간섭을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정책이 '명예로운 고립' 정책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명예롭게 고립정책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럽 각국이 제국주의적 세계분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도 통일국가를 이룩하여 새로운 강대국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의도를 노골화했다. 이렇게 많은 국가들의 식민지 획득경쟁이 급속도로 어려워지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예로움을 운운하며 태연한 척할 수만 없게 되었다. 이제 명예로운 고립이 아니라 고립의 비애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고립의 비애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다는 열강과 이익의 조정과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영국의 외교상 전환은 영일동맹(1902)으로 시작되었다. 이 영일동맹을 두고 영국의 외무상 랜스다운은 상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순한 전통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 된다. 낡은 토론은 이미 효과가 없다... 진부한 공식이나 낡아빠진 미신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제 명예보다는 고립만이 남게 되었다고 확신한 영국은 자신의 동맹국을 선택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영국은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선택했고 이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서 고립된 독일은 결국 이들에 대항하는 다른 동맹국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영국이 독일보다는 프랑스를 협상국으로 선택했을까? 영국은 독일이 가장 무서운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이후 독일이야말로 영국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나라였다. 따라서 영국으로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 프랑스와 이미 동맹을 맺고 있는 러시아와 자연스럽게 동맹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독일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 세력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 유럽 각국이 서로 동맹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각국은 더욱 치열한 대립을 겪게 되었고 따라서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발생한다면 유럽 각국이 그 문제에 모두 말려들게 되었다. 사라예보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이러한 각국간의 동맹구조 때문이었던 것이다. 19세기에 영국이 '명예로운 고립'을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면, 미국은 먼로주의를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먼로주의란 미국 대통령 먼로(재임 1817-1825)가 1823년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주창한 것으로,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대륙에 간섭하는 것을 배격하고 미국도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새로운 식민지 건설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먼로주의도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에 돌입함으로써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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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신데렐라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로맨스는 진실한 사랑과는 다른 것이지만 자못 관계가 깊은 듯이 보이는 것만은 분명하다. 로맨스란 무엇일까? 가장 알기 쉬운 특징은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든다는 점이다. 상대에 대해서 서로 착각하고 이상화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로맨스는 현실의 세계를 반쯤 잊고, 로맨틱한 기분이나 성적 흥분을 돋우는 정서적 조건, 예를 들면 와인, 꽃, 응시하는 눈과 눈, 달콤한 속삭임, 아련한 불빛, 점차 고조되는 바이올린의 선율 등에 취하는 것이다. 로맨스란 사랑의 가락이며 선물이고 즐거운 사랑의 고백이다. 서로 주고받는 약속, '언젠가는 꼭...'이라는 약속 위에 로맨스는 이루어진다. 로맨틱한 프로포즈를 받은 일이 있는 여성이라면 알겠지만, 그때 당신은 그 성급하고 달콤한 사랑의 말을 사랑받고 있는 증거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로맨스는 그 시점에서는 멋있었다. 그는 멋졌고 분위기도 훌륭했다. 그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런데 '결혼'이라고 하는 행복한 결말이야말로 로맨틱한 막간극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드디어 최종 목표에 도달했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남성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라고 그녀는 믿어 버린다. 결혼만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달성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여성도 사회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도식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여성의 대부분은 아직도 로맨틱한 꿈에 매달리고 있다. 끝이 없는 정열을 요구하고, 용감한 연인에게 구출되기를 바라고, 뜨거운 눈동자와 상냥한 배려가 있는 안온한 인생을 꿈꾼다. '왕자님'에게 자신의 삶을, 왕좌를 기꺼이 내주면서.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교묘하게 '사랑'을 가장한 '로맨스'에 지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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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누런 용이 옆에 누워 자는 꿈을 꾼 박석명
박석명(1370-1406)의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이다. 젊었을 적에 정종과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날밤 꿈에 누런 용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잠을 깨니, 곁에 영안군(뒤에 즉위하여 정종이 됨)이 누워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영안군은 왕위에 즉위하자 더욱 박석명을 총애하였다. 태종 때 익대삼등 공신으로 평양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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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공중정원
신 '바빌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BC562)가 그의 비 '세미라수미'를 위해 만들었다는 정원. 고대 희랍인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들고 있다. 물론 글자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정원이 아니며 높다란 곳에 마련되어 있어 공중정원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건물 맨 꼭대기의 발코니에 만든 일종의 옥상정원이었다. 나무 숲이 드문 지방인데 높다란 건물 위에 울창한 수목의 정원을 만들었으니 당시의 사람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 공중정원의 수목에 물을 주기 위해서 특별히 우물을 파기도 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격파하고 '유다'왕국을 멸하여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강력한 왕조를 이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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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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