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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9 호
단기 4340. 4. 27 (음력 03.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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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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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8회 교단문예상
“문학과 더불어 참교육을 생각합니다”
문학과 함께 하는 창의와 정서의 축제―전국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참교육 정신을 담아낼 제8회 <교단문예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남다른 소명감으로 교육현장을 지키고 있는 중·고등학교 선생님들과 더불어 문학을 통하여 참교육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전국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모집부문 * 교육수기부문 * 산문부문 (소설, 수필, 희곡, 동화, 평론) * 운문부문 (시, 시조, 동시)
▶ 모집기간 : 2007. 5. 14 ~ 6. 15
▶ 응모자격 : 전국 중·고등학교의 현직 교사
▶ 편수·매수 * 교육수기부문 / 산문부문 - 1편 이상 * 운문부문 - 3편 이상
▶ 응 모 처 : (330-714)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산 29번지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사무실428호
▶ 입상자발표 2007년 7월 6일(금) 이전까지 개별통지 및 인터넷 공지
▶ 시상내역 * 당선(각부문별 1명) - 총장상, 상금 (교육수기부문·산문부문 200만원/운문부문 150만원) * 당선작이 없을 경우 가작을 뽑을 수 있으며 상금은 당선의 반액임.
▶ 기타사항 1. 응모작품은 기존에 공표된 적이 없는 순수한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2. 원고 끝장에 반드시 성명, 소속, 주민등록번호, 담당과목, 이메일 주소, 집주소 및 전화번호, 학교주소 및 전화번호, 응모부문 및 응모편수를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3. 응모작품은 가능한 컴퓨터로 작성, A4 용지로 출력하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주최 : 단국대학교 주관 :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문예교육진흥위원회
참조사이트 : http://www.danmoon.net
(330-714)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산 29번지 ☎ 041-550-3770 / Fax 041-550-3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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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두렵거나 당황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결코 모험을 할 수 없다. / 줄리어 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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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八章 (노자 - 도덕경 : 제5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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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귀, 直而不肆, 光而不燿.
기정민민, 기민순순, 기정찰찰, 기민결결, 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 숙지기극, 기무정, 정복위기, 선복위요, 인지미, 기일고구, 시이성인방이불할, 염이불귀, 직이불사, 광이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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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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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여덟째 장
직역
그 정치가 사리에 멍청하고 어두을 수록 그 백성들은 순박해 진다. 그 정치가 살피고 살피면 그 백성들은 이지러지고 이지러진다. 화여, 복이 의지해 있다. 복이여, 화가 업드려 있다. 그 끝을 어찌 알겠는가. 그 바름이란 없다. 바름이 바뀌어 기이함이 되고, 좋음이 바뀌어 요사스러움이 된다. 사람이 미혹한 그날이 오래되었구나. 이런 까닭에 성인은 모나면서도 나누지 않고, 날카로우면서도 상처내지 않고, 곧으면서도 방자하지 않고, 빛나면서도 광휘를 뿌리지 않는다.
해석
정치는 멍청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손익득실을 따지고 정치를 하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그럼 백성들도 서로 다투지 않게된다. 왜,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치가들이 손익계산과 주판을 두드리면서 이것저것 살피면서 이리저리 왔다 같다가한다. 그럼 백성들의 가슴은 탄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정책들을 바꾸어 버린다. 좋은 말로 시류를 탄다는 것이다. 정치가는 이익집단의 뜻에 따라서 정치를 하면 안된다. 소신껏 일을 해야 한다. 정치가는 자신의 소신을 먼저 밝힌다음 유권자에게 표를 구해야 한다. 먼저 표를 얻고 자신의 눈치껏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소신이 유권자와 맞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과 유권자의 뜻이 맞으면 소신껏 정치를 하면된다. 시류를 탈필요가 없다. 시류가 자신의 소신과 어긋나면 유권자들이 자신을 찍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해보겠다고 나서지 마라. 조용히 물러나 있어라. 그럼 그 몸을 보전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류를 타겠다고 계속 자신을 변화시키면 끝내 그 몸을 망칠 것이다. 정치는 초지일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의 길이 자신의 길과 같다면 유권자들이 찍어 줄것이고, 유권자들이 자신을 찍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의 방법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에서 편히 쉴 것이다.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대부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아닌가. 굳이 몸을 망치려 들지 말기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에게 아주 탁월한 탁견이 있어서 시대에 우뚝서고 다른 이론들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백성들을 끌고 가지 않는다. 억지로 자신의 방법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백성들이 따라서 일이 이루어 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알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빛이 나도 광휘를 뿌리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방법만을 제시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방법대로 행동하는 것은 백성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성인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역대의 성인중에 정치를 한사람이 있는가를,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가리켜 왔다. 천하를 떠돌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꽃피도록 했다. 그것이 성인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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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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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그 다스림이 무엇을 한다고 내세우는 일이 없이 혼후하기만 하면 백성들은 순박해지고, 그 다스림이 잘고 까다로우면 백성들은 항상 욕구불만에 빠지게 된다. 화 곁에는 복이 기대어 섰고, 복 속에는 화가 숨어 있다. 아무도 그 종국을 알지 못한다. 그 종국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올바르다는 것이 다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변하고, 착하고 훌륭하다고 하던 것이 다시 악하고 요사스러운 것으로 변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헤매이며 어리둥절하게 된 것은 진실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이 방정하다고 해서 남도 그러기를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이 청렴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남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곧다고 해서 그것으로 남 앞에 멋대로 나서지는 않는다. 진리의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비추려 하지는 않는다.
주
민민: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없는 어둡고 총명하지 않는 상태, 혼후한 분위기. 순순: 순후함. 찰찰: 잘고 까다롭게 살피는 것. 결결: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 이지러진 모양, 욕구불만에 빠진 상태. 방: 방정, 방형, 네모 반듯한 것. 귀: 해치다, 상처를 입히다. 사: 방자한 것, 제멋대로 설치고 나서는 것. 요: 번쩍번쩍 빛나는 것, 광채가 나는 것.
해
그 정치가 무엇을 하겠다고 내세우는 바가 없이 흐릿하고 또 총명함이 없다면, 백성들도 경쟁 의식을 모르고 순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치가 모든 것을 분명하게 살피고 잘고 까다롭게 군다면, 백성들도약삭빠르게 되어 경쟁 의식에 의한 욕구불만도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무사 무위의 정치가 최상의 정치인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순탄한 경우도 있고, 또 역경 속에서 악전고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화와 복은 돌고 도는 순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결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선이니 악이니, 바르다, 바르지 못하다 하는 것은 모두 상대적인 가치판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의 선이 오늘은 악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올바름이 내일에는 부정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의 방형 모서리로 남을 해치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의 청렴결백으로 남을 비난하지 않으며, 자신의 빛나는 지혜를 함부로 과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 장에서는 노자는 그 특유의 냉소주의적이며 역설적인 표현을 구사하여 무사 무위 정치의 우울성을 강조하고 있다. 노자는 사물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것을 도에서 나와서 도에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하나로서의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너무 살피고 따지고 하는 일보다는 도와 일체감을 갖고 무위 무욕의 경지에서 저절로 다스려지도록 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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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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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6장 매장문화재
새롭게 시작한 조사 및 발굴
8.15 해방 후 한국인 조사 연구팀에 의한 최초의 문화재 조사 발굴은 1946년 5월에 경주 노서리의 파괴된 고분에서 실시되었다.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이 지휘하고, 현지에서 경주 분관장이 협력한 시험발굴이었다. 실측은 과거 총독부박물관 때부터 경험이 많은 유일한 전문가인 임천, 그리고 사진 촬영은 이건중이었다. 발굴은 의외의 성과를 거뒀다. 뒤에 '호우총' 으로 명명된 이 고분에서는 뜻밖에도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든 청동합형용기가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굽 밑에 '을묘년구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이라는 명문이 양각돼 있었다. 이 호우는 삼국시대 신라고분의 연대 고찰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추정되었다. 호우총에서는 그 밖에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심칠면' 같은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다. 인접한 또 하나의 고분에서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 한 쌍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그 후 '은령총' 으로 명명되었다. 1947년 5월엔 개성 남쪽의 장단군 진서면 법당방의 고려 벽화고분이 두 번재로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의 조사 발굴팀은 경주 고분 발굴후 국립박물관 연구원으로 들어온 이홍직 김원룡을 중심으로 임첨과 이건중이 이번에도 실특과 모사 그리고 사진을 담당했다. 현지에서는 당시 개성분관원이었던 최순우가 참가했는데, 법당방 벽화고분의 최초의 조사 발견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그해 3월 18일, 지방의 고미술 애호가인 강필운과 함께 고적조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3기의 고려고분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중 가운데 것이 석실내부에 귀중한 벽화를 지니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네 벽에 그려진 벽화의 주제는 관을 쓴 인물 초상이었고, 천장에는 천체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1916년에 역시 개성 남족인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 수락암동의 석실고분에서 발견된 이후 두 번째인 고려 고분벽화의 출현이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당하고 없었다. 마을의 노인들의 증언은 "수십 년 전(한일합방 전 후)에 수명의 일본인 도굴꾼이 총을 메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위협하면서 모두 파 갔다" 는 것이었다. (이홍직, 고려벽화분발굴기, 1954년). 국립박물관 연구관에서 일할 사람들이 짜여지면서 한국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연구 조사 및 발굴 활동이 차차 기틀을 잡게 되었다. 1948년에는 세 번째로 경주 황오리 고분이 조사 발굴 되었다. 이 해엔 또 국립박물관의 첫 고적조사 보고인 (호우총 은령총)이 간행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직국과의 정보교환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5월의 국보특별전 기획 등으로 더욱 틀리 잡히던 국립박물관은 북한 공산군의 불의의 남침으로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의 보호는 모든 박물관 직원에게 부과된 최대의 사명이었다. 다행히 박물관 문화재들은 9·28 수복까지의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무사했고, 그 후 1·4 후퇴를 전후한 5차에 걸친 부산으로의 비밀철수작전으로 성공적인 보호가 이루어졌지만 거기엔 위험이 따랐다. 한국전쟁 중 부산에 임시 건물을 빌려 기능을 재 수습하는 동안에도 국립박물관은 제한된 연구 조사 활동을 수행했다. 1952년 3월엔 경주 금척리의 신라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경주-대구간 도로확장공사로 파괴 노출된 2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 발굴이었다. 다음해 6월과 7월에는 역시 경주 노서리에 위치하는 신라 고분 제 137호와 제 138호가 발굴되었다. 138호분에서는 희귀한 반형토기와 골호 및 뚜껑이 있는 장경호 등이 출토됐다. 국립박물관의 활동은 다시 차근차근 본궤도를 되찾고 있었다. 1955년 11월에는 경주 황오리에서 두 번째 발굴이 시도되었다. 이때의 발굴 책임자는 당시 경주 분관장이었던 진홍섭 교수 였다.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공사중 처음으로 드러난 이 고분에서는 순금 반지와 팔지 마구 무기 기타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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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불교란 무엇인가
5. 한국 불교의 자주적 모색
4세기 경 한반도의 정세는 훨씬 이전부터 고대 국가를 형성했던 대륙의 정치 세력에 억눌리다가 마침내 이를 극복한 몇 개의 정치 세력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새로운 정치 세력들은 이제까지의 부족 연맹체적 국가 형태를 지양하고 지배력이 훨씬 조직적으로 강화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부족 연맹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토착 관념과 그 유제를 효과적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 불교는 이러한 역사적 조건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한국 불교의 주요한 특징은 호국적 성격은 이처럼 불교의 수용부터가 역사적 요청에 부응하여 처음부터 국가적으로 전개된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불교의 국가적 전개는 또한 국가 통합 이념을 제공하기에 앞서 불교 내부의 통합을 선행해야 했다. 중국 불교가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인도 불교의 종적인 다양성을 공시적인 관점에서 통합하여 교판 논리를 근거로 종파적으로 전개한 것이 특징이라면,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교파적 대립을 한 단계 더 지양시켜 하나의 불교를 추구하려고 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한국 불교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흔히 '회통 불교'라고 말한다. 불교 수용 시기의 역사적 기능에서 비롯된 한국 불교의 호국적이고 회통적인 성격은, 그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역사적 사건들의 중요한 원인이자 동시에 그것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작용하는 과정에서 더욱 굳어져 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의 통일 이념이나 고려의 건국 이념 또는 외세에 대응하는 국난 극복의 정신적 구심력 등은 모두 불교가 국가적 차원의 통합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기 바라는 역사적인 요청이었고, 이러한 요청에 한국 불교는 각 시기마다 적절한 이념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독특한 성격을 더 강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국적이고 회통적인 한국 불교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시켜 준 것은 단지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조건들에 주체적으로 응전해 가는 선각자들의 빛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는 데서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신라 시대의 원효와 의상 그리고 원측, 고려 시대의 의천과 지눌, 조선 시대의 휴정(서산대사), 근대의 한용운 등은 한국 불교의 정신적 맥을 이어준 사상가들이었다. 각 시대마다 이들의 역할과 성과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더욱 확대된 통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삼국의 이질성을 아우르는 통일 이념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원효와 의상은 중국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 바탕 위에 한국 실정에 맞는 이론은 구성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 원효의 빛나는 업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불교 사상계의 최대 과제인 중관 학파와 유식 학파의 이론적 대립을 극복할 대안을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선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까지의 국가적 불교를 민중의 구체적 삶에서 구현해 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노력은 불교를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일 뿐 아니라 통일 국가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지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실질적 통일은 지배 권력의 통일이 아니라 민중들 각각이 참다운 삶을 회복하여 상호 교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상의 경우도 그 본질은 원효와 다를 바 없으나 원효보다는 확실히 후기신라 정부의 지배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의상에 의한 한국 화엄종의 개창은 중국 화엄종의 단순한 이식이 아니었다. 그에 전파한 한국 화엄종은 민중적 지향성을 가진 정토론적 화엄종이라는 사실에서 한국 불교의 자신감과 그 자주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중국에서 새로운 학풍으로 불교계를 풍미했던 유식 학파의 경우에도 그곳에 유학하고 있던 원측은 제자를 통해 신라의 유식 학파에 거의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원측의 유식 이론은 이른바 중국의 정통 유식 이론(현장과 규기의 이론)과 달랐다. 그것은 이 이론과 대립하고 있던 중관 학파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중관학적 유식 이론을 모색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원측의 노력은 그 뒤 인도 불교학계의 발전 방향에서 볼 때 선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고,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도 한국 불교의 자주성이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 초기 사상가들의 이 같은 자주성은 고려 시대의 보조국사 지눌에 와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사실 고려 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불교의 과제는 선과 교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였다. 잘 알다시피 고려 건국의 주체 세력은 호족 연합 세력이었고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이념은 선불교였다. 신라 말 호족들은 이미 해체되어 가는 신라 지배 세력의 이념적 근거지였던 교종, 특히 화엄종에 대해서 새로 도입된 선종을 지원하면서 이념적 공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를 건국하자 다분히 해체적 성격을 지닌 선종을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구성하는 논리로 쓰기에는 부족했다. 여기에 고려 지배 세력은 한 사회를 구성하고 체계화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논리로 다시 교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종의 본질이 교종에 대하여 반명제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고려 초기 이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먼저 의천에 의해 시작되었다. 의천은 교종이긴 하지만 그 자체에 선종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천태 사상에 주목하고 교선의 관계를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의천의 이러한 시도는 고려 불교의 근본 과제를 정면에서 극복하려는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이론적 결함이 남아 있었다. 교선의 일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정비와 그에 대한 실천적 검증의 문제야말로 고려 불교의 최대의 과제이자 지눌에게 맡겨진 역사적 사명이었다. 지눌은 소위 '돈오점수설'과 '정혜쌍수설'로 그 해결의 대안을 제시했고, 또 수선사 결사 운동을 통해 그것을 실천적으로 검증했다.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논리적 정합성에서나 선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맥락에서나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논리와 개념을 뛰어넘는 자유 정신의 실제적 체험을 구현한다(이것은 불교 그 자체의 본질이자 선종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는 면에서 지눌의 이론과 그 실천성은 파격적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초기 한국 불교의 위대한 유산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고려 왕조를 극복한다는 면에서 배불 이념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표방하였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시대는 완전한 암흑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불교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실적 압박에 맞서 자기 존립을 유지하는 문제와 주자학의 이념적 공세에 대해 존재 이유를 변호하는 문제로 나타났다. 그러나 비록 지배 권력으로부터는 멀어졌지만 민중의 생활과 그 정서 속에는 이미 끈끈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민중의 생활이 더 피폐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서는 반주자학적이고 또 그 도피처로서 그들은 더욱 친불교적으로 되어 갔다. 어쨌든 배불숭유의 정책적 기조 속에 조선 불교는 점점 더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선 왕조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불교로서는 오히려 자기 존립의 정당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호기가 될 수 있었다. 조선 왕조 최대의 위기였던 임진왜란 때 휴정은 실천적 활동을 통해 역사에 임하는 불교의 역할을 변증했고, 불교 내부적으로는 호국적 전통을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억압적 역사 조건 속에서 불교가 존립할 수 있는 방향과 그 이론적 근거를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였다. 휴정은 억압적 조건 속에 선종이 위주가 된 조선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문하는 몇 개의 방향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즉 특수한 선문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방향, 그때까지 발전된 다른 문파의 선문을 수용하고 종합하려는 방향,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해 염불선으로 나아가는 방향, 교종, 특히 화엄 사상과 결합하려는 방향, 심지어 유학에 대해서도 개방적 태도를 가지는 방향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의 각개 약진에도 불구하고 조선 불교는 대중과 불문이 유리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선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불문 나름대로의 존재 방식마저 해체당하고 말았다. 일제 식민 시대의 조선 불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유효한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말하자면 일본 불교에 종속되어 일본식 불교 전통이 이 땅에 이식되는 데 기여하는 등 일제의 한반도 통치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족적 억압을 은폐시키는 일제의 불교 정책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역설하는 동시에, 봉건 왕조의 틀을 깬 근대적 국가를 꿈꾸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 해방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불교의 근대화 운동에 전념한 선각자들이 한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한용운은 근대 불교로의 지향을 시도한 이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평천창 외, "대승불교개설", 정승석 옮김 (김영사, 1986) 후지타코오타츠 외,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권오민 옮김 (민족사, 1989) 상산웅일 외, "아비달마의 철학", 정호영 옮김 (민족사, 1989) 산웅일 등, "중관사상", 정호영 옮김 (민족사, 1989) 다케무라 마키오, "유식의 구조", 정승석 옮김 (민족사, 1989) E. 후라오봐르너, "원시불교", 박태섭 옮김 (고려원, 1991) 칼루파하나, "불교철학", 최유진 옮김 (천지, 1992) E. 콘즈,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한형조 옮김 (세계사, 1992) 금자대영, "불교교리개론", 고명석 옮김 (불교시대사, 1993) 금강수우, "대승불교총설", 안중철 옮김 (불교시대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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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호래자식(후레자식)
본뜻 : 이 말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홀아버지나 홀어미니 밑에서 자란 보고 배운것이 부족한 '홀의 자식'에서 나왔다는 설과, 예의범절이라곤 도무지 모르는 오랑캐 노비의자식이란 뜻의 호로 자식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속뜻은 둘 다 보고 배운 것 없이 자라 막돼먹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배운 데 없이 제멋대로 자라 교양이나 예의범절이 없는 사람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다. 후대에 와서 음운변화를 일으켜 '후레자식'이라고 많이 쓴다.
"보기글" -아버지한테 반말 짓거리를 하다니 저런 후레자식을 봤나! -요즘은 오히려 부모들이 아이들을 후레자식으로 만든다니까요. 아이들 기를 살려준답시고 오냐오냐 하고 키웠다가는 나중에 후회하기 십상이라니까요.
홀몸
본뜻 : 홀몸은 부모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의 고아이거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홀아비, 홀어미 등이다.
바뀐 뜻 : 이 말처럼 잘못 쓰이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 말을 아직 아이를 배지 않은 몸이라는 뜻의 '홀몸'과 혼동해서 쓰고 있다. 임신한 여자를 보고 흔히 "아이고, 홀몸도 아닌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하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럴 때는 홀몸이 아니라 홑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본래의 뜻 그대로 형제나 배우자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만 한정해서 쓰는 것이 옳다.
"보기글" -일찍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홀몸으로 거친 세파를 헤쳐 오면서도 어디 한 군데 구겨진 데가 없는 맑은 성품을 지닌 그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감탄을 하곤 했다 -자네, 나이가 40 가까이 됐을 터인데 아직도 홀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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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행되지 않는다
지금은 국제회의가 사전에 많은 조정작업을 거친 후 열리기 때문에, 예전에 바하면 여러 면에서 쉽게 그 합의나 결론이 도출되는 편이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을 경우에는 합의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비밀외교가 중심이었던 과거유럽의 국제회의에서는, 쉽사리 합의를 보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첫번째 근대적인 국제회의로 알려져 있는 베스트팔렌조약(1748)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30년전쟁을 종결짓는 이 회의는 전쟁 당사국뿐 아니라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이 아닌 국가에서도 남은 대표를 파견하여, 명실공히 첫 번째 유럽회의라 할 만했다. 그런데 이 회의는 출발부터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기까지 무려 2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 각국이 회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신경전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의석이나 의사절차와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까지도 처음부터 새로 규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정식 문제에 이르는 데 그렇게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잘 진행되지 않았던 회의로는 비인회의(1815)가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비인회의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을 수습하기 위한 회의였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유럽은 나폴레옹의 패배로 다시 평화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유럽의 여러 전제군주들은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모여 화려한 축제를 열고, 승리를 경축하며 유럽의 장래 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이 비인회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Mettemich, 1773-1859)였고, 프랑스 외상 탈레랑, 영국의 카슬리 등도 참여했다. 이들 말고도 비인회의에 직접 관련이 없었던 유럽 각국의 군주와 귀족들까지 대거 참가하여, 비인회의의 화려함은 절정에 달했다. 비인은 우아한 궁전, 날마다 열리는 호화스러운 무도회, 성대한 연회, 그리고 화려한 옷차림의 귀부인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회의는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유럽 각국은 혁명 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데, 말하자면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 시대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데에는 모두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합의는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유럽 영토가 아주 복잡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영토문제를 포함한 세세한 문제에서는 그렇게 쉽게 합의할 수 없었다. 각국 대표들은 막후접촉을 통해 접촉을 계속했지만, 실마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렇듯 각국간의 이해대립으로 회의는 마냥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데도 무도회는 날이 갈수록 성대해졌다. 탈레랑의 말에 따르면, 하루 중 4분의 3이 연회와 춤으로 채워졌다. 회의가 난관에 부딪칠수록 무도회는 더 화려해졌고,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각국의 욕망과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던 한 귀족이 빈정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의는 춤추고 있다. 하지만 회의는 진행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화려한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성과가 없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이러한 춤추는 회의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로 단숨에 바뀌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진격하고 있다는 말이 비인회의에 전해지자, 각국 군주들과 대표들은 공포와 놀라움에 떨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이들 공동의 적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서둘러 회의를 끝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양보하여 곧 합의를 보게 되었고, 힘을 합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키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회의가 춤춘다'는 말은 1931년에 만들어진 동명의 독일영화 때문에 유명해졌다. 이 영화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영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비인왈츠의 리듬에 맞춰 의자들이 흔들거리는 인상깊은 장면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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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전통과 자유의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귀는 교육은 예외의 여성이라는 존재를 없게 하는 일에 우연히도 한몫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다. 뛰어난 재능과 정력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며, 또는 마음에도 없는데 뽑혀 닭의 무리 가운데 한 마리의 학처럼 높은 예술이나 자유직업이나 중역의 지위에 오른 상부층에 나타나는 여자를 말한다. 거기에서는 여자라는 사실이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눈으로 주시당한다. 예외의 여자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여자는 특히 미국적인 사회현상의 하나이다. 중국에는 혼자 돋보이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여성은 제각기 생가하는 대로 일을 하고 있으므로 아무도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옛 중국처럼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장소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던 사회에서는 물론 예외의 여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완전한 데모크라시이 사회에서는 예외의 여자는 예외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평균적으로 여성의 수준이 부쩍 높아졌기 때문이다. 완전한 데모크라시가 되면 여자는 재능에 따라 일을 할 자유를 가지므로, 지금처럼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말은 듣지 않게 된다. 드믈게 지성과 정력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사회가 특별히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녀의 개인적인 행복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행한 일로써 가없은 일이 되고 만다. 남자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펼칠 수 없다면, 그 재능은 그녀에게 초조와 불만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에서는 남자들처럼 그 재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그녀의 시간과 생각을 뺏아간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 않다. 재능 있는 남자는 재능을 키우기 위해 가정이나 아이를 내버려두더라도 생활비만 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재능 있는 여자는 충분한 수입을 번다 하여도 가정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다 해도 그녀의 어깨로부터 이러한 무거운 짐을 치워주는 사람은 없다. 마음속으로부터 가정이나 아이에 대한 생각을 집어던지려고는 될 수 없다. 그녀의 재능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든 간에, 남자는 자기의 능력과 동등하다거나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도록 교육시키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 자유가 누구에겐가 크게 가치가 있든 없든 자신의 자유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자는 재능을 지닐수록 불행한 여자라면, 가정과 아이와 남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가급적 그 재능을 살려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결혼하고, 무엇 때문에 가정과 아이를 갖는 것이냐는 무신경하고 경솔한 물음에 대하여서는, 여자인 이상 여자의 생활을 갖지 않는 한 민족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때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기는 예외의 여자는 남자 같고 냉혹, 무정하며 부드러움을 잃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누가 그녀들을 책할 수 있겠는가? 전통에 맞서 힘껏 정상 가까이에 올라가기까지에는 조소와 비판을 받으며, 결혼이라는 악의에서 나온 경멸을 산더미처럼 뒤집어써야 했을 것이며, 그녀만큼 성공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의 실망과 분노로 구겨짐을 당하기 때문에 혹평을 받는 여자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되지 않으면 사라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정말로 기적적으로 순수한 부드러움에 차 있는 여자로서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별 문제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결코 요구하지 않는 초인적인 일을 왜 여자에게 바라는 것일까? 성공한 대개의 남자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에 교만하고 냉혹하지만, 아무도 그 때문에 남자를 책하지는 않는다. 그 예외의 여자는 단정적이어서 다른 여성에 대하여는 냉담하며 여성 전체의 이익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그녀의 생활도 정력도 모두 자신의 지위를 남자들 사이에서 유지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그녀가 싫으면 거칠게 행동하며, 호의적이라면 감상적으로 겨룬다. 그들은 주위 깊게 그녀를 칭찬하고,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몰래 그녀를 미워하며,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싫으면서도 존경한다. 여자를 집안에 가둬 놓고 나서지 않게 해두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그녀는 산 표본을 보이이게 된다. 그런 그녀에 대해 마르고 밉게 생겼다고 하는 반대의 경우가 많은데, 남자들은 그녀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클레오파트라와 자유의 여신을 하나로 이어 놓고 살무사와 횃불을 반죽한 것과 결혼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녀가 회의장에 들어서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지만, 그녀는 보통의 평범한 사건이나 즐거움에는 기쁨을 발견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고독하며 불안하다. 만일 유머가 있다면 그것은 어색하고 무뚝뚝하며 의도적인 것 같고, 그녀의 쾌활함은 유쾌하게 되려고 정해놓고 노력하는 것이므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싫증이 난다. 그녀는 여성을 향해서라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만일 남성이라면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몇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으스대므로 종종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한다. 두뇌가 명석하고 미인이면서 세력을 휘두르는 그녀는 일종의 괴물이다. 이 예외의 여자를 잘 관찰해 보았더니, 독일의 단순하 소박한 대중이 그렇게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이와 같은 예외의 여자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파시즘의 성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독일은 지난날 혼란의 시대를 겪으면서 그 사이에 많은 예외의 여자를 낳았다. 예외의 여자는 그 사회적 변화 속에서 많이 생겨났고, 그녀들은 요란하게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만일 그녀들이 중국의 성숙한 여성처럼 조용히 침착한 지혜를 가지고 가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독일에서까지도 자유를 죽이지 않고 두는 데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되풀이하거니와 정말로 여자다운 여자는 여자답지 않게 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녀는 그 표정에도, 음악에도 동작에도 여자로서의 것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여자가 중국의 군대에서 낡은 군복을 입은 어깨에 총을 메고 진군하는 것을 나는 이 눈으로 보아왔다. 러시아에서도 그러한 여자가 기관총을 메고 서 있었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도 한 번인가 두 번, 재판소에 선 재판관과 병원에 있는 의사들 사이에서 그런 여자를 본 일이 있다. 그녀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자신을 꽉 쥐고 현명하며 유능하고 어디까지나 여자이며, 마치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나 부엌의 난로 앞에 선 주부처럼 여자다웠다. 그녀는 남자에게도 지지 않았다. 맞서려는 듯한 태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로서 훌륭하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미국의 여성이 가정과 밖에서 어느 사람 이상의 지위에 올라서면, 여성의 특징을 다른 나라 여성보다도 무척 빠르게 눈 깜짝할 사이에 잃고 만다는 것은 사실로, 이것에는 나도 당혹해 하곤 하였다.
미국의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성에 부족하다고 하는 것 외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그녀들이 여자의 소중한 본질을 잃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자다움은 가냘픈 것이어서 증발하지 않도록 온실 같은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보호해 주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에 대하여서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녀들은 여자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전통이 엄격하게 정한 여자만의 따분한 활동 범위에 언제까지라도 몸을 얽어매 두어야만 된다는 것일까? 그러나 어떻게 이런 꼴이 된 것일까?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굳센, 진정으로 여성다운 여자로서의 직감은 그녀의 마음과 몸에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여자의 특질은 수다를 떤다든지, 천박한 장신구라든지,이브가 진 머리라든지, 깃을 단 모자,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등과 같은 막연한 센티멘털한 감정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가사일이나 출산 과정에서만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활동을 하여도 전혀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를 가진 가정의 여자이면서, 참다운 여자다운 여자는 여자다움을 잃을 걱정도 없고, 무엇을 좋아하든지 여자가 아니게 될 수 도 없다. 그녀는 여자인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여자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남자의 흉내를 내려고 해도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여자이며, 생각도 호흡도 살아 있는 것도 여자이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집어던질 수도 없으며, 바꾸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녀일 것 즉 여자이기를 바라며, 여자로서 어디에도 가고 어떤 일도 하며, 여자로서의 내용과 존재에 안심하고 있다. 물론 독일식 예외의 여자는 우리 나라의 예외의 여자보다 더 많이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장애물을 가지고 있었다.여자에 대하여 계속 우월을 지키는 남성이 있으며, 이 장애물은 완고히 버티고 있어서, 이 남성의 결의를 일부 여성들은 지지하기도 했다. 그 만큼의 재능도 없고, 정력도 없고, 여자로서의 자각도 없고, 자유, 해방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여자들은 자유를 얻은 예외의 여자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여자는 자유의 특권을 받았지만, 그 책임은 받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한 여자가 훌륭한 일을 하면 다른 여자들은 모두 그것보다 더 훌륭한 무엇인가를 해 보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자문한다. 이 물음에 대하여 정직한 답을 하는 것보다도 쉬운 일은 예외의 여자를 손가락질 하면서 여자답지 않은 것을 비난하며, 가정도 아이들도 내버려두고 여자의 덕을 돌보지 않는다고 책하는 것이다. 이 여자의 덕이라는 것은 사실 오랫동안 여자들이 대온 핑계였다. 실제로 바깥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쪽이 소위 가정에만 있는 여자들보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밝혀진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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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대동기문 서
오확(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은 무게 천 근을 드는 장사였지만 자신의 몸은 들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물건을 드는 데는 강하고 자신을 드는 데는 약하였던가. 이주의 시력은 가을 털끝은 살필 수 있어도 자신의 눈썹은 볼 수 없었으니 어찌하여 털끝을 보는 데는 밝고 눈썹을 보는 데는 어두웠던가.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이다. 초나라 무당은 남을 위하는 데는 혼령도 불러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재앙도 물리칠 수 없었고, 진나라 의원은 남의 목숨은 살려냈지만 자신의 병은 낫게 하지 못하였다. 어찌하여 남에겐 신비한 효험을 보이면서 자신에겐 보이지 못했을까. 이는 사심에 가리워진 때문이다. 노나라에 살면서 '춘추(노나라의 역사서)'는 읽지 않고'승(진나라의 역사서)'이나 '도올(초나라의 역사서)'을 읽는다거나 송나라에 살면서 장보(송나라 의관)를 착용하지 않고 깃털 모자를 쓴다면,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일까. 아니면 사심에 가리워진 때문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어리석고 미혹되기 짝이 없음을 느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을까?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며 우리 것은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배우기에 급급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사에 대해서는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거침없이 설명하면서 단군, 기자 등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노숙한 선비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상세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어둡고 우리와 가까운 일일수록 더욱 소홀하다. 의로움과 이로움을 가리지 못하여 도척을 순임금으로 잘못 아는가 하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혼동하여 은을 철이라고 우기며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여 주황색을 자주색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아니 이러한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사람의 이름은 알면서 그 사람이 산 시대는 알지 못하는가 하면 그 사건은 알면서 그 사건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며, 성은 알면서 본관을 알지 못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조상에 대한 역사는 캄캄하여 누가 물으면 아예 입도 벌리지 못하고 딴전만 피다가 외국 역사에 대해 말하게 되면 신바람이 나서 바다 건너멀고먼 불모지까지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말하듯 소상하게 설명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병폐인가? 우리들의 의문은 여기서 더욱 심하게 된다. 나의 벗 금천자는 이 땅 대동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늙은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내게 말하기를, 고려 이전의 일은 이미 기록이 정비되어 있으니 두어두고, 조선 태조부터 고종까지 사이에 일어난 기괴한 일들을 기록하여 4권 1책으로 만들어 이름을 '대동기문'으로 했다고 하였다. 또 나도 이 땅 사람이란 이유로 그는 나에게 서문을 쓰도록 하였다. 이 책은 기이한 일을 실은 책이므로 괴이한 이야기도 있고 익살맞은 사실도 실렸으며 야인의 사적도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패사라면 말이 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이 속엔 이름난 공과 큰 업적에 관한 이야기며 뛰어난 충신, 효자 이야기며 숭고한 도학과 빛나는 문학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어찌 단순히 한낱 패사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속엔 아름다운 이야기와 추악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고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가 섞여 있으니 그 가치 판단은 마땅히 독자가 해야 한다. 만약 새것을 좋아하고 우리 것을 소홀히 여기는 자가 곁에 있다가 하하 웃으면서, 이 책이 진부하면 진부했지 기이할 게 무엇이냐고 비웃는다면 아마 자네는 틀림없이 송나라 사람은 송나라 관을 써야 되고 노나라 사람은 노나라 역사를 읽어야 하듯이 이 나라 사람은 이 나라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할 걸세.
을축(1925년)년 죽취일(음력 5월 13일, 대를 심는 날) 번천 김영한이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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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Muse)
'뮤즈'가 시와 음악의 여신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수가 아홉이나 되며 시와 노래 뿐만 아니라 문예, 학문 전반에서 천문, 수학 등 이과 계통의 학문까지 관장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희랍의 원명은 '모우사' (Mousa, 복수는 '모우사이' Mousai), 라틴어에서는 '무사' (Musa, 복수 Musae 영, 불, 독 Muse) '호머'나 '헤시오도스'이 서사시 맨 첫머리에 인용되고 있는데 아마도 시신이니 만치 그 도움을 청한 것인 듯. 그런데 '호머'에서는 한 사람이었으나 '헤시오도스'의 '신통보'에는 아홉으로 늘어났으며 이름도 하나하나 밝혀 놓고 있다. 그러나 각자가 맡은 직분은 분명치 않다. 그녀들이 맡은 일은 학문 전반이었으니 만치 '뮤직' (mousic)도 본래는 널리 '학문, 문화 전반에 관한'의 뜻이었으나 차츰 협의인 '시가, 특히 음악의, 음악에 관한 것'의 뜻으로 쓰여 결국 '음악'이 되고 말았다. 학문 전반에 관한 말로 쓰이는 것은 '뮤점' (Museum 미술관, 박물관)으로서 본래는 '무사에 관한 집, 학예의 집' (Misaoem)의 라틴어 (Musaiem)에서 유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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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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