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58 호
단기 4340. 3. 26 (음력 02.0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
|
문학소식 |
제2회 편운시 백일장
꿈과 사랑의 시축제- 제2회 편운시백일장에서 장차 우리 시단을 이끌어 나갈 새로운 시인을 찾습니다.
날 짜_ 2007년 5월 4일(금)
장 소_ 경기도 안성시 조병화문학관
참가자격_ 미 등단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 누구나
참가방법_ 아래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품2편과 함께 4월 18일(수)까지 우편이나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과거 발표되지 않은 순수창작물을 대상으로 하며 주제는 자유입니다. 예심통과자는 개별통보해 드리며 5월4일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할 자격을 갖습니다. 영예의 수상자에게는 상금과 상패가 수여됩니다.
예심작품 보내실 곳_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2-1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E-mail poetcho@naver.com (문의 02-762-0658) 주 최_ 조병화문학관,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후 원_ 안성시, 한국문학관협회, 경기문협, 안성예총, 안성문협
시상 내역 장원 1명: 상금 50만원 및 상장 차상 1명: 상금 40만원 및 상장 차하 1명: 상금 30만원 및 상장 장려 5명: 상품 및 상장
* 대학 참가자는 해당 학교에 출석 인정 공문을 보내드립니다.
|
|
글터 → 명언 / 격언 |
대체로 인간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너무 선하거나 언제나 선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조지 오웰 (영 작자)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七章 (노자 - 도덕경 : 제47장)
|
不出戶, 知天下, 不窺爽,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불출호, 지천하, 불규유, 견천도. 기출미원, 기지미소. 시이성인, 불행이지. 불견이명, 불위이성.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마흔 일곱째 장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그것에 나가면 멀어지고, 그것을 알수록 적어진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다니지 않아도 알고, 드러내지 않아도 이름이 있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해석
현대에는 컴퓨터가 있어서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집안에서 세계의 일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노자가 이런 컴퓨터의 탄생을 예언한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문이 있다. 그럼 노자가 한 말은 무엇이겠는가. 도대체 그 시대에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안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가. 혹시 노자는 우주인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옛과 지금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슬플때 울고, 기쁠 때 웃고, 괴로울 때 괴로워하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는 것은 매양 같다. 왜 괴로운가. 그 큰 이유는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되면 집밖을 나가지 않아도 세상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근심하고 기뻐하고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세상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세상이 나갈 방향도 알 수 있게 된다. 즉 집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더 쉽다. 그것은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별의 움직임은 괴도가 있다. 이 괴도만 알면 하늘에 오늘 무슨 별자리가 뜰지를 알게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 하늘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창밖을 보지 않아도 오늘 어떤 별이 떳고, 하늘의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의 파악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직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래를 알겠다고 돌아다니면 그 핵심에서 벗어나게되고, 하늘의 별자리를 알겠다고 우주의 별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 더욱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대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거울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아라.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보라. 그의 눈을 삼십분 정도 들여도 보고 있어라. 그럼 무엇인가 볼 수 있을 것이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47.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이법을 알 수 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도 알 수 있으며, 보지 않고도 이름 지울 수 있으며 작위 하지 않고도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주
유: 들창, 창, 창문. 천도: 하늘의 이법, 자연의 원리.
해
성인은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창틈으로 내다보는 일이 없어도 하늘의 이법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만물이 만물로서 그렇게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은 그것의 배후에 스며 있는 자연의 이법 때문이다. 성인은 이 자연의 이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 자연의 이법은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깨우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비한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이름지을 수 있으며, 하지 않고도 모든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원래 지식과 지혜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인간의 관심이 사물의 피상적 겉모습 쪽으로 쏠리면 쏠릴수록 참다운 지혜의 세계와는 담을 쌓게 된다는 것이 노자의 지론이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광개토왕릉비와 일본 스파이
1879년, 그때 이미 대륙 침략이 치밀한 작전 음모에 착수하고 있던 일본 군국주의의 참모본부로부터 특수 임무를 부여받은 12명의 청년장교와 하사관이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를 거쳐 중국 각지에 비밀리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전략적인 정세 정탐, 곧 10여 년 후에 벌어질 청일정쟁을 염두에 둔 첩보행위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스파이였다. 그들은 "군작전상 필요할 모든 지역의 지리·정지를 완벽히 파악해두라" 는 야마가다 육군사령관의 지시·명령을 받고 있었다. 표현상으로는 '어학 연습생으로서의 청국 여행' 이라는 행색을 가장했던 전략적으로 훈련받은 이때의 일본 스파이 장교들 가운데 한·청 국경지역에서 암약하던 사고 가게노부라는 포병 중위가 있었다. 그는 압록강 중류의 만포진 대안에 위치하는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인 통구지방(만주 집안현)의 국내성 유적지에서 거대한 자연석을 세워 만든 높이 약6.3m의 비석 하나를 주목하고 즉시 4면의 비문을 쌍구법으로 떠냈다. 그러나 이때의 스파이 장교의 쌍구란 것은 -최근에 와서야 그 가공할 내막이 과학적 연구로 폭로돼 가고 있지만-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었고, 특히 비문 일부를 일제의 침략주의에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다시 없이 중요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가 일제 군국주의에 의해 악랄하게 유린되던 순간이었다. 왕이 죽은 지 1년 후인 서기 414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돌비석은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광개토왕의 영웅상과 업적을 기념한 것으로 그 비문은 한국의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비문 중에는 신라·가야·백제를 도와 왜군을 무찌른 사실도 있는데, 1884년에 일제 군국주의의 첩자였던 사고 중위가 본국의 참모본부로 가져갔다는 최초의 비문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서기 391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만들었다"로 해석이 가능하게 돼 있었다. 놀라운 음모였다. 일제 참모본부는 사고 중위가 조작해 온 비문을 놓고 한학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옛 문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나오는 "진구고고의 신라 침공 및 야마토 정권의 출병에 따른 가야지역의 '임나일본부'(식민지) 설치" 라는 허상의 전설기록을 확실한 사실로 확정시키는 2단계의 음모에 착수했다. 드디어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에 이르러 일제 참모본부는 재차 '광개토왕릉비' 의 탁본을 정확히 떠 오게 하여 사고 중위가 가져온 비문과 비교 검토한 후, 이미 조작해놓은 부분을 영구히 사실 원문으로 만들어버기리 위해 현지에 기술자를 보내 비면 전체에 석회를 이겨 바르고는 조작한 문구의 글자를 새겨넣어 감쪽같이 위조했다. 그러나 이 석회물질이 세월이 지나고 풍우에 씻기는 동안 부분적으로 부스러지고 혹은 떨어져 나가면서 본시의 비면각자가 아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1910년대 이후 수차에 걸친 탁본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 1930년대에 이름녀 조각의 핵심부인 '내도해'(왜군이 바다를 건너왔다)의 3자는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없다. 결국 그 3자는 원비문엔 없었던 조각된 석회각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일본에서 발표된 교포 사학자 이진희의연구 결론). 앞서와 같은 일제침략 초기의 놀라운 '광개토왕릉비' 일부 비문 조작은 이제 국내와 일본 사학계에서 거의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이미 비문의 일부 조작 사실을 비친 일본인 조사자가 있었다. 1914년에 세키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세히 조사해 보건대, 문자의 간지는 석회로 메워져 있을 뿐 아니라 왕왕 자획을 보태고, 또는 완전히 새로운 석회면에 문자를 새긴 것도 있다. 이같은 보족은 대체로 원자와 잘못이 없는 것 같으나 그렇더라도 절대적으로 믿긴 어렵다. 다소의 오독도 있는 것 같다." |
|
|
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신유학이란 무엇인가
2. 신유학 형성의 시대적 배경
유학은 중국 한대에 관학으로 등장하여 언뜻 보기에는 그 위상이 높아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그 위상과 역할이 많이 약화되어 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춘추전국 시대의 한 시기가 어떤 점에서 유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시기의 유학이 지식과 생활, 행위와 이념을 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도 한당 시대에 이르러서는 많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유학은 점점 지식과 생활의 일부, 특히 기예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범주를 한정시켜 갔고, 행위와 이념의 주체로서 하던 기능과 역할도 가든 종교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교나 불교, 특히 위진 시대 이후 그 세력을 급신장시켜 간 불교에 내주게 된다. 그러므로 한당 시대의 유학은 문화적 유학이라는 면모를 띠며, 그 실천적 측면, 즉 생활과 시대를 장악하던 사상적 유학으로서의 모습은 상실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당 시대가 유학의 암흑기라고 할 수는 없다. 한당 시대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활동했으며, 그들의 학문적 업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기의 유학이 그 장점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불구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학의 본령은 행위와 실천의 영역 속에 놓여 있다. 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장악력이야말로 유학이 갖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한당 시대의 유학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한당 시대의 유학은 지식의 모습을 띨 뿐, 행위와 실천, 생활을 총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상적 유학이라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유학이 생활에 대한 총체적인 장악력을 가지는 시대의 중심 사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송명 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송명 시대가 되면 유학은 지식의 범주로부터 벗어나 행위와 생활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으며 생활과 시대에 대한 장악력도 회복하여, 시대의 중심 사상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송명 시대의 유학은 춘추전국 시대의 유학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특징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송명 시대의 유학은 어떤 점에서는 복고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원시 유학의 부활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송명 시대의 유학과 춘추전국 시대의 유학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말은 아니다. 송명 시대의 유학은 춘추전국 시대의 유학보다는 더 철학화되고 더 체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춘추전국 시대의 유학을 기본 골격으로 하여 불교와 도교의 여러 특징들을 복합해서 새롭게 빚어 낸 사상 형식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것을 신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유학의 형성과 그것이 한 시대의 독점적 사상으로서 위치를 갖추게 되기까지는 여러 전제적 조건들이 확충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유학이 형성되어 한 시대의 주도적 사상으로 부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새로운 계층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다. 시대 의식의 변모라는 것은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새로운 피의 수혈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당 시대로부터 송명 시대로의 이행은 사상적 측면에서 혁명적인 변모를 드러내는 만큼, 그러한 변화를 떠맡은 주체들은 정치적, 사회적 또는 문화적으로 새로운 배경을 갖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진 시대 이래로 중국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여러 번 변모를 거듭하지만, 사회 계층의 차원에서는 그 상층 구조에 별다른 변모 없이 오래도록 흘러 내려왔다. 그러한 역사는 당대 중후기까지 이어져 나갔다. 위진 시대에 형성된 상층의 귀족 집단은 문벌화되고 세족화되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익을 독점하며 당대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이들 문벌 세족은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여 독점한 세력으로서 한당 시대에 문학적 지식을 펼쳤던 주인공들이었으며, 수당 시대 불교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후원자들이었다. 그러나 여러 대를 거듭하면서 독점적으로 상속시켜 나갔던 이러한 계층적 구도는, 당대 중후기에 이르면서 서서히 와해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강성했던 당 왕조는 그 왕조를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방 이민족과 투쟁을 벌여야 했으며, 왕조의 독점적인 권력과 상층 귀족 계층의 배타적인 이익에 저항하는 하층민들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 왕조는 변방에 절도사를 두고, 그 절도사에게 힘을 나누어 주는 분권적 체계를 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절도사들은 임지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점차로 독자적인 힘을 쌓아 소규모의 무인 독점적 권력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을 번진이라고 한다. 절도사들은 초기에는 주로 변방에 임명되었으나, 중기 이후로는 내지에도 임명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안녹산의 난 이후로 더욱 사고되었다. 당의 멸망은 이 절도사 체제로부터 야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층 귀족 세력의 번영을 위해 마련된 이 절도사 체제가 소규모의 무인 국가 체제로 발전되면서 거꾸로 왕조를 허약하게 만들고 상층 귀족 세력의 이익을 침탈하는 위협 요소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무인 독점 체제는 상층 귀족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무인 독점 체제 속에서 상층 귀족 세력이 세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특권이나 이익이 보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층 귀족 세력은 점차적으로 몰락해 갔다 이와 같은 당대 후기의 번진 체계는 결국 당의 멸망을 가져 왔다 이와 함께 외부적으로 변방 세력의 발호 또한 당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번진 체계이든 변방 세력이든 문벌 세족의 특권과 이익을 보호해 주는 데는 아무 관심도 없는 세력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당이 멸망한 후 송이 등장하기까지 50여 년은 실제로는 변방 세력들의 시대였다. 변방 세력들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신흥 왕조를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이 시기의 역사를 주도하였다. 이 50여 년 동안 다섯 왕조가 들어섰다가 사라지는 등 무수한 번진 체계들이 할거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문벌 세족은 완전히 몰락하고, 역사의 무대에는 새 시대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 계층이다. 이 신진 사대부 계층은 당대 중기 이후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 오다가 송대에 들어서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신진 사대부 계층이란 지방에 거주하는 지주 계층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서도 번진 체계에 맞설 필요성 때문에 새로이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 지방의 중소 지주 계층이 이들 세력을 대표한다. 번진 체계의 발호로 정치적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받은 당 왕조는 왕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재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눈을 돌린 곳이 광활하고 비옥한 양자강 유역, 즉 강남 지역이었던 것이다. 집중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양자강 유역은 당대 말기에 이르면 황하 유역을 능가하는 경제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남 지방은 중소 규모의 지주들을 숱하게 배출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은 상층의 문벌 세족들이 몰락한 공백을 메꾸면서 시대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세력은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힘만 가지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확장해야만 했던 만큼 현실적인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세습 권력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이들에게 최상층 권력으로 뛰어들 수 있는 통로가 봉쇄되어 있었다. 최상층 권력은 번진 체계의 절도사들과 이민족 정권의 수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작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할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바로 하층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방의 향시를 통하여 하층 관리로 등장하기도 하고, 번진 체계나 이민족 정권에 진출하여 하급 무관이나 막료 등이 됨으로써 조금씩 자신들의 입지를 확장해 나갔다. 과거 제도는 특히 이들에게 매력있는 것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단숨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식들을 유학적 지식인으로 교육하는 데에 온 열정을 기울였다. 유학적 지식을 습득해서 과거에 통과, 입신하고자 했던 이들 재지 신진 사대부 계층은 송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힘을 결속해 나갔다. 송은 당의 멸망 원인을 절도사 체제에서 찾았고, 그런 까닭에 무력보다는 문치를 표방하였다. 아울러 당의 과거 제도가 지니고 있던 부정적 측면을 보완하여 좀더 공정한 과거 제도의 틀을 갖추었다. 한편 신진 사대부 계층이 유학적 지식을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학습한 유학은 송대 초기 얼마 동안은 신유학적 특징을 갖춘 유학이 아니었다. 이들이 받아들인 것은 한당 시대의 유학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 속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조만간 이들이 선택한 유학도 현실과의 연계 속에서 훨씬 더 기능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띠는 쪽으로 변모될 것임을 암시한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조카
본뜻 : 형제의 아들딸을 일컫는 호칭인 조카라는 말의 어원은 중국의 개자추로부터 시작된다. 개자추는 진나라 문공이 숨어 지낼 때 그에게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면서까지 그를 받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 문공이 개자추를 잊고 그를 부르지 않자 이에 비관한 개자추는 산 속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타 죽었다. 그때서야 후회한 문공이 개자추가 끌어안고 죽은 나무를 베어 그것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는 족하!족하! 하고 애달프게 불렀다. 문공 자신의 사람됨이 개자추의 발아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생겨난 족하라는 호칭은 그 후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천자 족하, 대왕 족하 등으로 임금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가 그 이후에는 임금의 발 아래에서 일을 보는 사관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더 후대에 내려오면서 같은 나이 또래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바뀐 뜻:지금은 형제자매가 낳은 아들딸들을 가리키는 친족 호칭으로 쓰인다.
"보기글" -조카딸의 남편을 조카사위라고 부르던가? -형제가 많으니까 조카는 뭐 말할 것도 없이 많지 어쩌다 명절 같은 때 한꺼번에 모이기라도 하면 미처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니까
줄잡아
본뜻 : '줄여'와 '잡다'가 합쳐진 말이다. 바뀐 뜻 : 실제 표준보다 줄여서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보기글" -글쎄, 오늘 저녁 손님이 줄잡아 100명은 되지 않을까 -그렇게 계산하면 줄잡아도 한 개당 만 원씩은 남겠네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만큼 모순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특히 교육과 도덕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정말이지 이중 인격자로 매도되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그가 "에밀"이라는 유명한 책을 통해 자신의 교육론을 피력했을 때,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그를 비난했다고 한다.
"루소를 좀 보시오. 하녀와 결혼해서 어린애를 낳게 한 작자가 "에밀"을 쓰다니, 그것을 위해 자식을 모두 갖다 버렸나!"
도덕적으로 그는 이러한 지탄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나이 어린 하숙집 식모를 알게 되어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수십 년을 같이 살았으며,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게다가 중년부인이던 와랑 부인을 만나 13년을 같이 지냈다. 또 파리에 나와서는 출세를 위해 귀부인에게 매달렸고, 체스로 출세를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유명한 철학자이자 계몽사상가로 추앙을 받고, 그의 사상은 나중에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혁명에서 공포정치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나 다른 혁명가들이 루소의 사상에 심취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떠한 계기로 그가 이렇게 정반대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가 새 사람이 된 계기는 바로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공모였다. 당시 37세였던 그는 어느 더운 여름날, 검열을 위반하여 감옥에 갇혀 있던 친구 디드로를 면회차 찾아가던 도중에, 우연히 주머니에서 신문지조각을 꺼내 보게 되었다. 그곳에 바로 그 현상공모에 대한 광고물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고 또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그는 이 현상공모에서 입상했는데, 현상공모의 제목은 <기술과 학술의 진보는 도덕의 순화와 타락, 그 어느 쪽에 기여했는가?>였다. 그는 여기에서 기술과 학술이 도덕이나 인생을 부패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완전히 다는 사람이 된 그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사교계에서 물러났다. 그는 고독과 고립 속에서만 나쁜 제도의 타락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참다운 본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루소는 목가적인 장소를 여러 곳 옮겨 다니면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좋은 옷을 내던지고 흰 양말을 신지 않고 칼을 차지 않은 간소한 시민의 복장을 하고 다녔다. 게다가 시계까지도 팔아 버렸는데, 시계야말로 실제로나 상징적으로 근대 기계문명의 기본적 도구였던 셈이다. 그 자신이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에밀"이라는 저서를 썼다. 그 내용은 한 소년이 현존 사회에 의해 타락하지 않고 선량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교육되어야 하는가를 담고 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자연이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마음껏 인간의 본래적인 것을 생각하고 깊이 자기 속에 파묻혀 들어가라. 그리하여 자기 속에서 되살아 나와 참다운 사람이 되어 보자."고 그는 외쳤다. 그는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선하지만 사회에 의해 타락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선량했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해 오히려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교육이란 자연 속에서 성장하도록 놔두는 것이었다.
|
|
|
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그리움의 새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침마다 내 창문 앞에 와서 울고 있는 이름 모를 저 새는 무엇을 저렇게 울고 있는지요.
아벨라르. 당신은 아침 일찍 창 밖에서 울고 있는 새 소리에 가슴 아파 본 적이 있습니까? 가장 밝고 상쾌해야 될 아침,작은 새 한 마리 내 속 깊은 곳에 울음을 옮겨 주고 갑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온 세상은 안개에 휩싸여 있고 그 안개 속에서 밤새 숨 죽이고 있던 새 한 마리. 눈을 뜨자마자 우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 한 마리. 우는 일만이 표현의 전부인 저 새의 시름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요.
아벨라르. 내 가슴에 고이고 고여 때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눈물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고 흘러나오고 맙니다. 그것을 꼭 슬픔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눈물이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또 행복할 때도 흘리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기쁨이, 당신 곁에 앉아 있는 행복이, 당신을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이, 또 미래의 어느날, 홀연히 당신과 헤어져야 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모두 눈물이 되어 흘러 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온 몸과 마음이 따뜻한 물처럼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뜨거워지는 내 가슴의 밑바닥에는 눈물의 샘이 마르지 않고 솟구치고 있습니다. 안개 속을 걸어 새벽마다 나는 산책길에 나섭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거리, 새벽의 찬 공기와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바람 냄새, 눅눅하게 내 머리를 적시는 습기찬 대기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따라오며 울어대는 저 새와 함께, 홀로 걷는 이 새벽 길에서 나 또한 한 마리 시름에 찬 새가 되어 울며 걷습니다. 이 새벽에 왜 당신은 내 곁에 계시지 않은가요. 밤새 깊이 잠들었다가 이른 새벽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옆에 계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조용히 당신을 안고 이제 시작되는 하루를 설계하고, 그 기쁨에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인가 봉사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아벨라르, 당신은 이런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 어느날, 나의 이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지금까지 내 가슴 속에서 슬픔으로 울고 있던 새는 아마 너무도 행복하여 다시 끝없는 울음을, 행복한 눈물을 쏟을 것입니다. 감미롭고 나즈막한 울음을 울며, 그런 자신을 돌아보면서, 당신 옆에서 나는 편안하고 사랑스런 여자가 되어 다소곳하게 머리 숙이고 살 것입니다. 이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새벽마다 울고 가는 저 새처럼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죽음의 골짜기에 가서도 당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울면서 당신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다.
아벨라르. 그러한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면 당신은 필경 내게로 달려와 주시겠지요. 설령 이승에서 내게로 오시지 못한다면 저 세상에서라도 내게로 달려와 주십시오. 당신이 오실 때까지 나는 이 뜨거운 울음을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의 새입니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자고 일어나면 울어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자고 일어나면 울면서 지내노라)
-<청산별곡> 2연
작가도 연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이 고려가요는 슬픔에 차서 날마다 울음으로 보내는 자신의 처지를, 우짖는 새와 견주어 노래 부른 것 같습니다.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울어라 울어라`라도 말한 것은 새의 울음이 마치 자신의 울음과 너무도 흡사하게 느껴져서 탄식하듯 내뱉은 싯구이겠지요. 새의 울음소리조차 서러움으로 받아들인 작가의 심중을 어떤 이는 지배계급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노래로 해석하고 있지만 나는 이 노래를 사랑에 상처입은 사람의 심정을 노래한 애절한 노래로 보고 싶습니다. 이 고려가요 속에서 울던 새는 이즈음 나의 창문 앞으로 날아와 내 가슴을 쪼아대며 아프게 울고 있습니다. 시름과 그리움, 슬픈 소망을 울음으로밖에는 나타낼 줄 모르는 눌변의 사랑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진실로 인민에게 이익이 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한테서 나왔다 하더라도 장차 들어서 본받아야 할 것이다. (박지원)
백의정성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선각자가 있어야 나라의 미래가 보장된다. 어둡고 답답했던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나라의 미래를 향해 등불을 높이 들었던 선각자의 행적을 바로 살피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학문으로서 역사도 인물사적인 연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사의 경우는 활동이 눈부셨던 선각자들의 행적을 애써 외면하고, 알려진 사실에만 매달려 있었던 탓에, 그들 선각자들이 인물사적인 연구마저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지 사관에서도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기에 자주적이고도 진취적인 역사 인식을 정립하지 못한 큰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가령, 흥선대원군의 유아독존적인 아집 때문에 개항에 실패하였다던가 같은 맥락으로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씨와의 끝없는 갈등과 대립으로 정치부재의 현상을 빚어 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런 오류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봉건전제국가가 자력으로 개항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미래를 예견할 줄 아는 선각자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꿈과 고독 그리고 뼈아픈 좌절이 있지 않고서는 근대국가로의 발돋움은 불가능하다.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조선왕조에도 국가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던 선각자가 있었기에 자주적인 개항의지를 불태우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던 개항 2세대가 탄생할 수가 있었다. 이 엄연한 사실이 학문의 방법으로도 정립되어 있지를 않다면 학계의 게으름도, 예술계의 안일함도 함께 질타를 받아서 마땅하다. 그것이 바로 청소년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꿈을 앗아낸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개항사를 소상히 살펴보면 그 사상적인 변천이 두 세대로 이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개화사상의 정상이자 원로격으로 평가되는, 박규수, 그는 실사구시의 거벽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으므로 실학중에서도 할아버지의 북학 사상을 이어받은 두터운 선각자였다. 박규수는 고종 3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양 부민들에 의해 화공으로 격침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와의 우여곡절이 계속될 대 평안감사로 그 현장에 있었다. 조선의 개항사를 이끌었던 박규수의 위치로 보아 그 사실도 우연이랄 수가 없다. 그러나 박규수의 개화사상이 그 자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주장되거나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의 영향하에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과 같은 선각의 젊은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유홍기는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는 가계에 따라 당연히 역관이 되어야 할 운명인데도 스스로 한의의 길로 들어설 만큼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선각자였다. 어려서는 담헌 홍대용의 실학사상에 심취하였고, 그의 영향으로 양명학의 대가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양명학이란 중국 명나라 중기 사람인 양명 왕수인이 이룩한 신유가철학으로 송대에 확립된 정주학과 대립적인 성격이 있어 심학이라고도 불린다.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으로 앎과 행함이 하나이니 이른바 지행합일이 강조된다.
양명학의 성격을 보다 극명하게 설명하자면 맹자의 실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들, 나아가서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청대의 실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탓에 조선에서도 양명학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홍기의 경우는 인식과 실천이 하나라는 의미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홍기가 국제정세에 능통하고 조선의 개화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서 생각할 수가 있었던 것은 미래를 향한 진취적인 사고와 정세를 분석할 수 있는 조직적이고도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였고, 특히 청나라에 자주 출입하는 역관 오경석과 같은 죽마고우와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석학의 대가였던 오경석은 청나라에 다녀올 때마다 수많은 전적들을 가지고 왔다. 유홍기는 그의 주선으로 개항사상에 눈뜰 수 있는 전적들을 섭렵할 수가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격동적인 국제정세를 비록 문자로나마 터득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오경석에 의해 조선의 개화에 눈뜨고 있었던 박규수로서도 그와 마주 앉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노라면 언제나 새로운 사실에 눈뜨고 있다는 희열에 빠지곤 하였다. 후일 고균기념회에서 간행한 "김옥균전"에는 유홍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대치 선생 유홍기의 집은 장교와 광교 사이에 삼각정에 이르는 외나무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지금의 관철정으로 가는 좁은 길이 있는데 대치 선생의 집은 바로 그 좁은 길가에 있다. (중략) 대치 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의를 업으로 삼았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학문으로서의 사학에 조예가 깊어서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했으며, 또 세계 각국의 역사에도 두루 통했다. 변설은 유창하고, 신체는 장대하였으며, 홍안백발, 언제나 활기 찬 행동으로 일관하였다.
유홍기와 오경석의 우애는 그야말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중인계급이면서도 가계가 같은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또 어려서부터 중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지금의 관철동)에서 함께 뛰놀면서 학문을 익히고 견문을 넓혔다. 오경석이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서재를 '천죽재'라고 하자, 유홍기는 이에 뒤질세라 자신의 서재를 '송죽재'라고 할 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지극하였고, 따라서 선의의 경쟁이라는 면에서도 앞뒤를 다투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자, 그러면 "한양유씨세보"를 살펴보자. 내가 에세이 형식의 읽기 쉬운 역사 얘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유홍기의 가족사항을 적은 한자투성이의 "한양유씨세보"를 제시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어서다. 이미 경험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유홍기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그의 생몰이 확실하지 않다는 등 터무니없는 말로 독자를 호도하고, 또 그의 가족사항에 관해서는 아예 거론조차도 하지 않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아는 사람(심지어 학계에서조차)들이 뜻밖으로 많다. 이같이 무책임한 풍조는 마침내 조선 개항사를 주제로 한 이름있는 작가들의 역사소설에도 유홍기의 생몰과 가족사항에 관해서는 당연히 그려 낼 수 없게 하였고, 심지어 개항사에 기여한 인물만을 추려서 엮은 서책에서조차도 그의 '생몰이 확실치 않다'고 적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건 정말로 뉘우치고 고쳐야 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근한 예가 되겠지만, 이웃나라 일본에는 당대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쓴 "용마가 간다"라는 대하소설이 있다. 명치유신의 성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아낌없이 불태웠던 선각의 랑사,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를 추적하는 내용이지만, 료마가 자신의 자매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은 물론 그가 밟았던 전국 각지의 풍물이 현장감 넘치게 그려진 탓으로 자칫 논픽션으로 착각될 정도의 가치 있고, 또 재미있는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라는 걸출한 선각자가 있었고 그의 꿈과 고독으로 점철된 고군분투에 힘입어 마침내 살장연합이라는 개항세력을 이끌어 내게 된다. 막부타도라는 공동의 전선을 펴게 된 살마번과 장주번의 연합은 개항을 외쳐 온 인재의 보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선각의 준재들에 의해 미개했던 일본이 국제정세에 눈뜨게 되었으며, 마침내 개항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일본의 청소년들은 사카모토 료마를 선각의 전형으로 존경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료마에 버금가는 꿈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때문인가, 사카모토 료마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에는 어김없이 그의 동상을 세워서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그의 선각이 얼마나 고독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에게 선각자의 꿈을 심어 주어야 하는 것은 학문적, 교육적 차원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한자투성이의 "한양유씨세보"를 여기에 제시하여 유홍기라는 걸출한 선각자의 가계와 가족사항을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 두고자 하는 것이다. 유홍기는 순조 31년 10월 14일에 역관인 아버지 유익소와 어머니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같은 역관인 최영원의 따님을 지어미로 맞이하여 슬하에 외동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 족보에 적혀진 내용으로 보아서는 유홍기의 가계가 비록 중인이라고 하더라도 반가와 통혼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특히 유홍기의 두 사위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작은 사위 김효철은 신분이 같은 역관출신의 가문에서 맞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큰사위 이승준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승준의 아버지 이인현이 무과에 급제하였다면 비록 서반이라고 할지라도 반가의 가문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백의정승으로 예우 받았던 유홍기의 인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그가 추구하였던 신분제도의 타파에 동조한 가문이 있었음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의원 유홍기의 호는 대치, 사람들은 그의 학덕과 인품을 받들어 백의정승 유대치 선생이라고 불렀다. 금석학의 대가 오경석은 박규수의 연행을 수행할 정도의 이름 있는 역관이었고, 이동인은 봉원사에 승적을 둔 행동파 승려였다. 당시의 신분제도로 본다면 의원, 승려, 역관은 모두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던 중인이었으므로 이들의 개항사상은 조정이나 사대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초기 개항사상은 번져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던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박규수가 평양에서 금의환향하여 예문관 제학과 한성판윤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는 동안 재동에 위치한 그의 집에는 조선의 개항을 이끌어 나갈 나이 어린 귀공자들이 모여들게 된다. 열 다섯 살의 유길준, 열두 살의 금릉위 박영효, 스물 두 살의 김옥균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사대부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준재들이었고 특히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였다. 박규수는 이들 사대부가의 귀공자들을 중인인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 등의 문하로 보내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어 갈 역군으로 다듬고자 하였다. 귀공자들은 비로소 "해국도지", "영환지략", "중국견문록" 등과 같은 새로운 문물이 적힌 서책을 대하게 되면서 보다 넓은 세계로 향한 꿈을 키우게 된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메두사(medusa)의 목
희랍신화에 나오는 괴물. 세계의 서쪽 끝에 '고르곤' (Gorgon) 이라는 괴물 세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머리는 뱀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으며 사람을 한 번 노려보기만 하면 돌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었다. 세 자매 가운데 막내인 '메두사'만이 죽어야 할 사람의 운명을 타고 났으며 나머지 둘은 불사신이었다. 영웅 '펠리우스'는 그 목을 잘라 오라는 명령을 받자 사자의 신 '헤르메스'로부터 날개 달린 구두와 몸을 숨기는 모자를 빌려가지고 갔다. 그리고 세 자매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거울에 그 모습을 비춰 보고 뒷걸음질로 다가가서는 재빨리 '메두사'의 목을 잘라서 싸들고 돌아왔다. '아테네' 신은 그 목을 방패에 붙여 놓았으며 그 방패를 '고르곤'의 방패라고 한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