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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7 호
단기 4340. 3. 24 (음력 02.0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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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힘듭니까?
잘 생각해봐요.
힘듭니까?
살아 생전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 입니까?
잘 생각해봐요.
더 힘든 날 옵니다.
이겨내세요.
울며 이겨내지 마시고
웃으며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아주 다음에
힘든 날 오면 더 활짝 웃으며 이겨낼겁니다.
세월지나면 힘든 날이 웃던 날이 될 겁니다.
잘 생각해봐요. 정말 이더라니까요.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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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2007년 5.18 문학작품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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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별로 의미 없는 일일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 모한다스 K.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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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六章 (노자 - 도덕경 : 제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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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有道, 却走馬以糞,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 常足矣.
천하유도, 각주마이분, 천하무도, 융마생어교, 화막대어불지족, 구막대어욕득, 고지족지족, 상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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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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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여섯째 장
직역
하늘 아래 도가 있으면 달리는 말이 똥을 칠 틈이 있고, 하늘 아래 도가 없으면 교외의 싸움터에서 말이 태어난다. 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큰 화는 없다. 얻고자 하는 욕망처럼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하여 할 때 족함을 알는 것이 항상 족하는 것이다.
해석
하늘 아래에 도가 있어서 싸우기전에 말이 통하면 달리는 말(전투용 말이다.)이 농업 생산에 종사할 수 가 있다. 즉 전쟁 비용을 산업 발전과 편리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아래에 도가 없어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이 싸움터에서 태어난다. 교외라는 말은 성의 외각을 뜻한다. 즉 최전선이다. 말이 싸움터에서 태어나면 잘 살아가겠는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럼 싸움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족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자신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고,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큰 허물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만족할 수 없으면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이 족함을 느껴야 할 때를 알아 그때 족함을 느끼면 항상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럼 자신이 족함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그 배가 차고, 두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잠을 잘 정도면 된다. 그러나 지금 현대에는 편안히 잠을 자기 힘들다. 언제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고, 비행기의 소음은 창문을 두드린다. 이런 세상에 하늘 아래 도가 없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싸움이 일어나면 교외에서 말이 태어날 틈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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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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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 세상에 도가 행하여지면 잘 달리는 말은 농사에 쓰이게 되지만, 이 세상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군마가 도성 밖의 가까운 곳에 우글거리게 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난은 없고 남의 것을 넘보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그러므로 만족함을 아는 만족은 언제나 넉넉한 것이다.
주
각: 물리치다. 분: 거름을 주다, 평화시에는 말이 농사에 쓰이게 됨을 뜻함. 융마: 전쟁에 쓰이는 말, 군마. 화: 해로움, 재앙, 불행, 복의 반대어. 구: 허물, 재앙, 잘못. 막대: ...보다 더 큰...는 없다, 막심으로 된 판본도 있음. 교: 도성, 읍성의 변두리 지역.
해
옛날 도가 천하에 제대로 행하여 질 때에는 침략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날쌔고 빨리 달리는 말도 전쟁에 쓰이지 않으니 농사에 사역되어 민생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천하에 도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않을 때에는 제후들이 서로 공벌약탈을 일삼아 급기야는 암말까지도 전쟁에 징발되어 진중에서 새끼를 낳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불행한 일은 인간이 제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남의 것을 탐낸다는 사실이다. 특히 백성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임금이 남의 나라 영토와 재물을 넘보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불행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군국주의는 남의 나라뿐만이 아니라 제나라 백성에게도 크나큰 재난을 안겨다 준다. 1814년 나폴레옹 군대를 추적하여 파리에 입성한 프러시아의 명장 블뤼히어는 나폴레옹의 화려한 궁전을 보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궁전을 두고 모스크바를 빼앗으려고 한 나폴레옹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이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군사적 영광, 권세욕, 물리적 욕망 등에 탐닉하게 된다. 특별히 유능한 인물일수록 더욱 만족함을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상유지에 만족치 못하는 그들의 정력이 그들을 위대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자의 안목으로 보면 이것 역시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그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장에는 노자의 반전 평화주의뿐만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지족사상도 잘 피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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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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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낙랑고분의 대난굴시대
1970년대 초에 중국 대륙의 호남성 장사시 교외의 한 고분에서 약 2,100년 전의 한나라 문물이 쏟아져 나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이 발견은 1968년에 하북성의 만성에서 발굴된 유승묘(B.C. 2세기말의 서한시대)의 경이로운 금루옥의 등에 이어서 한문화의 전모를 재확인시킨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출토유물은 1909년 이후 북한의 평양 근교 대동군 댜동강면을 중심을 발굴된 낙랑고분에서 나온 것들어었다. 낙랑은 전한의 무제가 B.C. 108년에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의 하나였던관계로 그 옛터의 고분 출토유물은 한문화 것이 중심이었다. 그것들을 일본인 전문가들이 한반도 침략과 더불어 처음으로 조사·발굴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눈부신 유물 내용은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그러자 예외없이 그곳에 나타난 것이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 무법자들이었다. 1909년 10월, 일제의 강청에 따른 한국정부의 위촉으로 두 번째 고적조사를 착수하게 되었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는 다니, 구리야마라는 두 조수를 대동하고 평양에 이르렀다. 그때 그들은 (평양일보)의 일본인 사장이었던 사라카와로부터 대동강 남안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숱하게 군집해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세키노 일행은 일정을 변경하고 즉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아주 오래된 고분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그중의 2기를 골라잡고 내부를 알아보려고 당장 시굴에 들어갔다. 막연한 기대를 갖고 고분의 시굴을 지휘하던 세키노는 전(벽돌)으로 현실을 꾸민 속에 한나라 문화의 거울을 비롯해서 무기며 토기 등이 부장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약 2천 년 전에 아주 놀라운 문화를 누리고 있던 한민족이 이주해 살았던 낙랑시대의 고분 유적지,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한분화의 지하보고, 그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뒤에 가서 밝혀지지만 평양 근교와 황해도 쪽에 걸치는 낙랑고분은 수천 기에 이르고 있었다. 세키노의 조사팀은 다음해 가을에도 2기의 낙랑고분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출토시켰고, 1911년 10월에는 세 번째의 조사발굴이 사리원 근처에서 실시되었다.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과 당토성으로 불리던 곳에서 대방군의 치지로 생각되는 토성이 이때에 발견되었다. 그들은 또 1913년 9월에 가서 진남포 부근과 봉산군의 유적 및 고분을 조사.발굴하여 한대의 와당·복식품·동기·도기·칠기·옥석기·무기 등 풍부한 부장품을 획들했다. 그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출토품들을 모조리 일본으로 실어 갔다. 1912년 4월, 동경제국대학 공학부에서는 건축학과가 마련한 한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다. 제3실의 (조선지부)에 처음으로 진열·공개된 낙랑고분 출토유물이 주목의 초점이었다. 다음은 당시 일본의 고고학 잡지가 소개하고 있는 그때의 전시유물이 내용과 명확한 반출경위이다.
"세키노 조교수와 다니, 구리야마 일행이 조선에서 3회에 걸쳐 가져온 것으로 너무도 풍부하여 일일이 매거하기가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지적하면 낙랑시대의 고분지역인 대동강면 상오리 석암동 발견의 한경, 오주전, 증(시루), 당토성 발견의 전, 봉산군 미산면 오상동 발견의 '사군대방태수장무이' 란 명이 있는 묘전. 안학궁지 발견의 고와, 강동 한왕묘 발견 유물 등이다."
[일제강점기 낙랑고분 발굴 사진]
1912년의 동경제국대학의 공대의 조선 고대유물 전시장에는 낙랑고분과 유적지에서 출토해 반출해 간 유물들 외에도 경북 고령의 대가야 왕궁지와 고분에서 학술조사를 빙자하여 세키노 등이 파 간 기왓장과 토기들, 진주에서 발굴한 고분 부장유물, 경주 부근의 서악동에서 발견했다는 돌베개, 작은 신라 불상 6점, 신라 고와전 500장, 강화에서 도굴된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고려 중엽의 유명한 문신이었던 이공수의 무덤을 도굴해서 꺼낸 석관, 묘지, 동경, 나전공예품 등이 진열돼 있었다. 이 유물들은 지금도 동경대학 공대에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 권1에서 그때의 불법적인 반출유물인 동경, 무기, 팔지, 반지, 오주전, 옹기, 주발, 전(대동강면 석암동의 낙랑고분 출토품) 등 일부를 사진 도판으로 확인할 뿐이다. 이 도판 유물들은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으로 소개될 때 벌써 동경제국대학 공대 소장품이라고 기정사실화시키고 있다. 세키노는 1909년의 고적조사(낙랑고분 기타)가 한국정부의 위촉에 의한 것이었다고 마치 순수한 요청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뒷날의 조사보고서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형식에 불과했다. 그때는 이미 일제세력이 한국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고적조사를 위촉하여 필요하면 마음대로 고분도 파고 유물도 일본으로 실어갈 수 있게 자유를 부여한 것은 소위 통감부의 정략의 하나였다. 그에게 절차상 합법적인 유적 파괴와 유물 약탈 및 불법반출을 허가한 한국정부의 명목상의 부서는 탁지부였다. 그러나 당시 탁지부의 사실상의 실권자는 아라이라는 일본인 차관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경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에게 한국 전역의 사적을 조사케 하자는 입체적인 침략 계획의 하나를 기안한 자가 바로 그 아라이 차관이었다. 다음해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로는 물론 저들 마음대로였다. 세키노가 인솔하는 정식 발굴대가 평양 근교의 대동강 남쪽(대동강면)에서 낙랑고분 10기를 발굴하여 예기치 못했던 굉장한 유물들과 이루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장품들을 출토시킨 것은 1916년 10월의 일이었다. 이때 발굴된 10기의 고분에는 제1호에서 제10호까지 번호가 붙여졌는데 현재 국보 제89호의 '금제교구'(국립중아박물관 소장)는 그때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섬세한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이 교구는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센세이셔널한 발견은 동시에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 는 소문을 낳게 했고, 이어서 무법자들의 도굴행위가 걷잡을 수 없이 성해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대동강면 일대의 낙랑고분을 "지하의 정창원(일본의 유명한 고대 동양미술품 보고)" 이라고 부르며 너도 나도 그 속의 '임자 없는' 보물을 꺼내 가지려고 덤볐다. 한 일본인이 뒷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6년에 세키노 박사 일행이 대동강면의 낙랑고분을 발굴하여 수백점의 귀중한 부장품을 출토시킨 후로 낙랑유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민간에도 퍼져 1922년쯤에는 개성 부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무리들이 낙랑고분에 눈을 돌려 도굴을 일삼더니 1924∼1925년에 이르러서는 최악의 난굴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의 얘기다. 세키노가 낙랑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하던 즈음에 평양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도굴과 약탈은 이미 시작됐었다. 세키노의 조사보고에 그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그는 조사 초기에 이미 야마다라는 평양 거주의 일본인이 수집하고 있던 도굴품들을 보았고, 얼마 후에는 그가 낙랑군지라고 추정한 지점에서 " '낙랑태수장', '정감장인' 같은 글자가 새겨진 귀중한 봉니가 발견(도굴)되었다" 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또 그 무렵에 평양의 복심원 검사장이었던 세키구치란 일본인도 '조선우위' 라고 새겨진 봉니를 토성리에서 입수해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인 무법자와 악질 수집가들이 직간접으로 도굴하고 혹은 뒤에서 조종했던 낙랑고분의 상상을 넘은 대난굴시대는 1923년께부터 4∼5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한 일본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에서 우리는 그때의 놀라운 내막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대난굴시대가 전개되는 바람에 평양(일본인사회)엔 별안간 낙랑열이 전염병처럼 만연되면서 낙랑의 명성을 천하에 울리게 되었다. 그 무렵 당국의 취체는 오늘(1934년 현재)과 같이 엄중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관계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고분에서의 출토품(도굴품)을 일반인에 앞서 다투어가며 점유하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꿈 같은 시대로서, 대정 13∼14년(1924∼1925년)께엔 평양 시민(물론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말)으로서 낙랑고분의 출토품에 1∼2원을 주고 고경 1장이나 토기 항아리 1개쯤 사 갖고 있지 못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있다."
앞의 증언자는 또 계속해서 당시의 구체적인 싱태를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심한 경우는 관립학교이 선생이 백주에 당당하게 수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구분의 봉분 한복판을 위로부터 파들어가서 눈부신 부장품들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일품들이 자연 민간수집가 손에 들었갔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도굴자들이 평양의 수집가에게만 팔다가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어디를 어떤 경로로 연락했는지 경성·교토 방면의 호사가(수집가)들과 줄을 대고는 도굴품 중 일품은 그쪽으로 몰래 빼돌려 평양의 수집가에게서보다 두세 배의 보수를 받았다."(팔전창명, (낙랑과 전설의 평양), 1934년)
일본인 중간상인과 교사자에게 매우 혹은 유혹되었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조선사람은 그들의 불법적인 도굴행위가 경찰에 적발이라도 되는 날엔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호되게 곤욕을 당하곤 했다. 반면 배후의 일본인인 붙잡혀 처벌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실태는 1926년 8월 2일에 열렸던 총독부 고적도사위원회 회의록에 이런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도굴하도록 유인하고, 그 짓을 사주하는 자를 엄벌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직접 발굴한 소민을 처벌해야 한다. 발굴한 소민만 벌함으로써 그 범죄주인 자가 오히려 벌을 면하는 것 같은 사례가 만일 사실이라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방과 중앙(서울)의 권력층 수집가들과 항상 접선하고 있던 악질적인 배후의 일본인 범죄주들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도굴행위와 자금 조달은 1천 수백 기의 낙랑고분에서 부장품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대규모의 유물 약탈이었다. 뒷날의 한 조사보고는 "약 1,400기의 낙랑고분 가운데 도굴을 면한 것은 약 140기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처참한 대난굴시대에 얼마나 많은 귀중한 유물과 국보급 문화재들이 출토돼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쾌한 수수께끼이다. 다만 다편적으로 당시의 몇몇 중요한 도굴품이 기록과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하나는 세키노가 1923년에 소개하고 있는 전한시대의 유물인 '영광 3년명'(B.C 41년)의 동종(동체의 지름은 약 40cm)이다. 당시의 소장자는 평양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도리카이였다. 1922년 10월 중순에 평양 근교의 대동강 건너편인 선교리(낙랑고분 지역)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인부가 출토시킨 것을 공사 감독이었던 하시모토라는 일본인이 가로채 가졌다가 자기 아들이 다니고 있던 평양중학교 교장인 도리카이에게 가져왔다는 경위였다. 그러나 세키노는 그 얘기를 액면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 동종의 발견자인 중국인 인부가 뒤에 또 동종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깨진 거울을 도리카이 교장에게 갖고 왔다고 하여 역시 중학교에 진열하고 있었으나 과연 어느 곳에서 동시에 발견된 것들인지 알 수 없다."(전한 영광의 3년의 동종, 1923년)
B.C. 41년에 주조된 전한시대의 진귀한 보물이었던 '영광 3년명 동종'의 입수 소장자 도리카이는 당시 일본인 자제들만 다니던 평양중학교의 일본인 교장이었다. 이 중학교에는 교장 외에도 낙랑고분의 출토품들을 탐욕스럽게 취득하여 도굴을 조장시킨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기타무라라는 자였다. 그는 한때 평양의 일본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도굴품 장물아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랑고분의 부장품이 바닥이 난 193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계획절으로 수집 혹은 직접 도굴했던 천금의 장물 컬렉션 보따리를 안고 유유히 평양을 떠나갔다.
일본인 가운데 교육자라는 자가 이 판이었다. 그가 바로 야다(팔전창명)가 (낙랑과 전설의 평양)에서 증언하고 있는 구체적인 도굴 일화의 하나인 "백주에 당당하게 인부를 데리고 가서 고분 속의 눈부신 부장품들을 약탈하곤 했던 관립학교 선생", 그 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못된 일본인 교사는 비단 기타무라만이 아니었다. 야다는 또 그의 회고기에서 낙랑고분 대난굴시대의 평양의 일본인 수집가(사실은 장물아비들)였던 도미다, 모로카, 하시도, 나카무라, 오무라, 오노, 나카니시, 오카모도, 야마다, 세키구치 등의 대표적인 명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밖에 1934년 현재 수집품을 몽땅 감추어 갖고 깨꿋이 평양을 떠나버린 자로서 앞의 평양중학교 교사 기타무라와 평양여학교 교장이었던 시라카미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야다는 도 평양고등학교의 교장 얘기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조선인 자제를 수용하는 중학교였으나 교장은 역시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인 교장도 낙랑고분의 한대 유물들이 마구 도굴되어 나올 무렵에 이른바 수집가들 사이에서 자그마치 1만 원이라는 거액을 호가한 '거섭 원년명 화문경' 을 단돈 1원에 입수했다. 그밖에도 그는 B.C. 3세기에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진나라 때의 무기인 과(창)와 한대의 '녹유박산향로', '녹유항아리' 등 고고학적으로 너무나 귀중한 도굴품들을 입수하고 있었다. '거섭 원년'은 서기 5년에 해당된다. 1925년 가을에 후지다 등이 총독부의 발굴·조사 계획에 따라 평양 근교에서 2∼3기의 낙랑고분을 학술적으로 조사·발굴할 때에 연호명이 있는 칠기가 발견되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관계전문가들을 흥분시켰는데, 그중의 하나는 '거섭 3년명'(서기 8년)의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고분에서 화문경 하나도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명문은 없었다. 따라서 평양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입수해 갖고 있던 도굴품 '거섭 원년명'의 화문경은 그만큼 최고의 고고학적 가치를 갖는 유일한 유물이었다. 그 존재가 알려지자 수집가 사이에서 1만 원을 호가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한 평가가 아니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우매하고 가난했던 발견자(현지 주민이 우연히 출토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런 일이 흔히 있었다)는 그런 것을 가져오도록 유인했을 일본인 고등보통학교 교장에게 갖고 가서 단돈 1원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모든 도굴품은 필연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점거되던 시대였다. 세키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작년(1925년) 이후 도굴이 성한 결과, 다수의 무기·동기·도기류가 발견되어 대부분은 평양에 거주하는 일본인 호사가의 손에 들어갔다."
세키노는 그중 중요한 것의 하나로 평양의 아무개가 소유하고 있던 서기 9년명의 칠기 파편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재명칠기의 최신의 것"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당시의 불법적인 도굴품 범람과 뒷거래의 실정을 알려주고 있다.
"토민들의 도굴품으르 일본인 호사가들이 다투어 매수하는 바람에 갈수록 도굴은 장려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평양에 갔을 때 그런 출토유물(도굴품)을 보았는데, 그 수량이 굉장할 뿐 아니라 그중에 진기한 것이 적지 않음에 놀랐다."( (낙랑시대의 고분), 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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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신유학이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송명 시대의 유학을 성리학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한다. 그러한 지칭은 우리 나라의 문화적 정서에서는 어느 정도 합당한 일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서 송명 시대의 유학은 성리학적 맥락 위에서 수용되고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6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 나라의 지식계를 장악한 사상은 성리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전개된 송명 시대 유학이 성리학과 동일시될 수 있다 해서, 그것을 일반화해서 송명 시대 유학은 성리학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1. 송명 시대 유학의 여러 명칭
송명 시대의 유학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면 가장 적절한 용어는 말할 것도 없이 '송명 유학'이 될 것이다. 이 명칭은 '한당 유학'이나 '선진 유학'이라는 말처럼 시대적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송명 시대에 전개된 모든 유학적 실험과 분파를 다 싸안는 개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다만 시대적 제한을 통하여 유학사의 한 부분을 재단해 주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이 시대 유학의 특성을 반영하는 개념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이 시대 유학의 성격을 반영하면서도 이 시대 유학의 모든 분파를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용어는 '신유학'이 될 것이다. 신유학이란 명칭은 이 시대의 유학이 이념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선진 시대나 한당 시대의 유학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특징은 대체로 북송 시대부터 명대까지 그대로 유지되므로, 이는 이 시대의 유학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가장 합당한 것이다. 그러니까 송명 유학이라는 개념과 신유학이라는 개념은 범위를 같이하는 총체적 개념이면서도, 전자는 시대적 문맥 위에 서는 개념이라면 후자는 사상적 문맥 위에 서는 개념이라는 차이를 가질 뿐이다. 이 두 개념이 총체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면 송학이나 명학, 주자학이나 양명학, 도학, 리학, 심학 같은 개념들은 이 두 개념의 범주 속에 드는 부분적 개념이라고 하겠다. 송학이나 명학은 시대적 제한을 갖는 것이므로 그 개념이 한정하는 바가 명료하게 드러나며, 따라서 이 두 개념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을 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자학이나 양명학 역시도 주희의 사상적 경향이나 왕수인의 사상적 특징을 계승한다는 문맥을 담고 있으니만치 그 개념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도학이나 리학, 심학과 같은 그 범주가 명확하지 않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도학이란 이 세 개념 중에서 가장 넓은 외연을 갖는다. 도학은 북송 초기에 나타난 세 가지 유학적 입장 가운데서 호원, 손복, 석개 등으로부터 비롯되어 주희와 왕수인에게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도학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신법 계열이나 촉학 계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도 신법 계열이나 촉학 계열은 남송 이후부터는 미미해지기 때문에, 도학이라는 개념은 송명 유학이나 신유학이라는 개념과 그다지 범주적 차이를 갖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신유학이니 송명 유학이니 하는 개념을 쓸 때에도 북송 초기의 세 선생으로부터 주희와 왕수인까지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을 대상으로 한다. 다만 도학이라는 개념은 도리를 파악해서 몸소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이들 입장의 특성에 중점을 두는 표현일 뿐이다. 그 반면에 리학은 이치를 통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사상적 입장과 연계되는 개념이다. 이는 '이치'라는 개념을 실체적으로 발견해 낸 정이에 의해 구체화되며, 이 후 주희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된다. 그러므로 리학은 정이-주희 계열의 신유학, 즉 정주학 또는 주자학을 가리키는 개념이라 하겠다. 우리가 좁은 의미로 '성리학'이라는 개념을 쓸 때 그 성리학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주자학 또는 리학이라 생각한다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심학은 "내 마음이 곧 이치"라고 보는 사상적 입장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입장은 사실 리학의 "성품이 곧 이치이다"라는 선언을 비판적으로 전제하고 나타난 사상적 경향이었다. 주희 당시 주희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육구연이 이 입장을 선도했으며, 이 후 왕수인에게 이어져 명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러므로 심학이라는 개념은 육구연-왕수인 계열의 사상적 특징과 연계되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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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하다
본뜻 : 옛날에는 타작하는 것을 '바심'이라고 했다. 조를 추수하면 그것을 비벼서 좁쌀을 만들어야 하는데, 조는 좀처럼 비벼지지는 않고 힘만 든다. 그래서 조를 추수하다 보면 생각대로, 마음먹은 만큼 추수가 되지 않으므로 조급해지고 초조해지기 일쑤다.
바뀐 뜻 : 어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질까 염려하여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졸이는 것을 말한다.
"보기글" -야, 온다 그랬으면 오겠지 뭘 그렇게 하루종일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조바심을 하냐? -고게 그렇게 조바심한다고 되는 일이냐? 좀 진득하게 앉아서 기다려라
젬병
본뜻 : 원래는 전병에서 나온 말이다 전병은 부꾸미를 이르는 말로, 찹쌀 가루나 수숫 가루따위를 반죽하여 속에 팥을 넣고 번철에 부친 떡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부꾸미는 부쳐서 잠시만 놔둬도 늘어붙고 까부라져서 떡 모양이 형편없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형편 없어진 부꾸미의 모양에 솜씨를 빗댄 말이 젬병이다.
바뀐 뜻 : 해 놓은 일이나 물건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형편없어진 모양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형편없음을 가리키는 속어로도 쓰인다.
"보기글" -일이 이렇게 되면 이거 아주 젬병인데, 어떻게 하면 좋지? -난 원래 바느질에는 젬병이야 다행히 세탁소가 있으니 망정이지, 옛날 같았으면 벌써 쫓겨났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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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7.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를 위한 투쟁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말도 역시 패트릭 헨리가 한 말이다. 이제 미국은 영국에 대하여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명분을 쥐고 대항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명분만으로는 미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은 식민지인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인지법을 폐지했으나, 그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종목의 세금을 부과해 왔기 때문이다. 인지세 이후 다시 양국 관계를 긴장시킨 것은 차에 대한 세금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1773년 영국 동인도회사 선박에 인디언으로 가장한 시민들이 난입하여 차를 바다에 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는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사건으로 식민지인들은 본국과의 통상을 단절하고 영국상품 거부운동을 일으켰다. 1775년 4월, 마침내 보스턴 근교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함으로써, 미국은 독립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결의안을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진 패트릭 헨리는, 이제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전쟁이 임박한 1775년, 그는 버지니아의회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로 독립전쟁을 옹호했다.
"...지금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문제는 자유를 얻느냐, 노예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하고 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저 북쪽에서 휘몰아쳐 오는 바람이 우리에게 전쟁의 포성을 전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동포들은 이미 전쟁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여기 한가롭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까? 고귀한 생명이나 달콤한 평화를 쇠사슬과 노예의 대가로 얻으려 하십니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택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외칠 것입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정말 자유를 향한 피끓는 호소였다. 이러한 호소가 작용했음인지 사람들은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죽음도 불사한 전쟁을 치른 결과 1783년 미국은 마침내 정식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독립선언서에 들어 있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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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돌에 새겨진 사랑
지난번 친구들과 함께 경기도 금촌에 있는 어느 작은 산엘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시대의 기생 홍랑의 시비 제막식이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홍랑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의 시조 한수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홍랑이 함경도 경성에서 기생으로 있을 당시, 북해 평사로 그곳에 와 있던 최경창과 가까이 사귀었는데,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홍랑은 시조 한 수를 지어, 꺾어 온 버들가지 하나와 함께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시비에 새겨진 홍랑의 시조는 이런 것입니다.
묏버들 갈해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떠나는 임을 위하여 버들 한 가지 잘 가려서 꺾어(갈해 꺾어) 임에게(임의 손대) 보내고, 그 임이 주무시는(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기를 바라는 마음. 혹시 그 버들잎이 비를 맞고 새 잎이 돋아나면 자기를 보듯 생각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보낸 홍랑은, 그 후 최경창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경도 경성에서 서울까지 7주야를 달려왔다는 애기를 그날 거기서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을 무덤을 지키며 수절했으므로, 최경창의 자손들이 홍랑을 최경창의 무덤 옆에 묻어 주었고, 그 후 무려 4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무덤 앞에 홍랑의 시비를 세우고 그 시비 뒷면에는 최경창의 공덕비문을 새겨 주기로 최경창의 후손들이 합의했고, 많은 문인들과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분들의 뜻도 함께 모아 그렇게 시비가 세워진 것입니다. 돌 한 조각의 앞뒷면에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의 비명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내게 준 감동은 너무나 컸습니다. 나는 그날 호젓한 산마루에 앉아 그 시비를 보면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대의 한량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기생이 한 남자를 지아비로 모실 것을 작정하고 일편단심을 보낸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 지아비가 병들었다는 소식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모든 호화로운 생활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7주야를 달려온 그 외골수의 사랑과, 또 그 사랑에 감동하여 한낱 기생의 시신을 벼슬에 올랐던 그 조상의 무덤 옆에 묻어줄 줄 알았던 최경창 후손들의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새기면서, 마치 세상의 온갖 혼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아름답고 순수한 작은 낙원을 발견한 듯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한 물질, 많은 사람들의 찬사, 손에 잡히는 쾌락 같은 것들이, 소박한 한 기생의 그리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퇴락해 버리는 저 지순한 사랑이 몇백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내 앞에 와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아벨라르. 그날 오후 산의 공기는 얼마나 맑고 고요했는지... 전설과도 같은 사랑의 애기가 눈 앞의 돌 위에 새겨져 있고, 현학이나 과장을 전혀 모르는 그곳 촌로들의 소박하고 구수한 입담에 취해 있으면서, 얼마나 간절히 당신이 보고 싶었던지, 당신과 함께 이 작은 산에서 마른 솔가지를 지펴 밥을 짓고 산나물을 캐서 식탁에 올리면서 은둔자처럼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전혀 현실성 없는 꿈을 꾸어 보았습니다.
아벨라르. 당신은 영화 `의사 지바고`의 한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눈이 쌓인 황량한 들의 외딴 집에서 지바고와 라라가 승냥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사랑의 대화를 나누던, 그 아름답고 고독한 영화의 한 장면이, 한 순간 내 눈 앞에 크게 확대되어 왔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승냥이의 울음소리나 온 들을 뒤흔드는 바람소리가 조금도 무섭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이 그 순간 나를 무섭도록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나는 당신과 며칠만이라도 함께 생활하고 싶다는 욕망이 밀물처럼 간절히 일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당신과 함께 생활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다만 며칠뿐인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아무것과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벨라르. 그것은 나의 꿈에 지나지 않는 일이겠지요. 다만 나 혼자 꿈꾸고 설계하며 그리고는 뭉개어 버리는, 허망한 모래성처럼 슬픈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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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
환향녀
적지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최명길은 다시 심양으로 보내 줄 것을 인조에게 청했다. 첫째는 소현 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의 귀환을 서둘러야 하고, 둘째는 조선인 장정들에게 내려진 징병 안의 철폐를 요구해야 하며, 셋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속환을 교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윤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명길은 도성을 떠나기에 앞서 청나라로 잡혀간 인질 중에서 연고자가 없거나, 속환에 필요한 금품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은 2천 5백 냥을 마련하였다. 물론 국고금을 전용한 것이었다. 최명길이 도성을 떠난 것은 9월이었고, 심양에 도착한 것은 동짓달 그믐께였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동관문 밖까지 나와서 몸소 최명길을 맞이하였다. 물론 조선이 자진해서 보낸 첫 사신인데다가 화친하는데 공이 큰 최명길이 정사로 왔기에 그들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과시함일 것이었다. 최명길은 전란의 후유증으로 민심까지 흉흉해진 조선의 사정을 세세히 알리고 앞에서 적은 세 가지 간청을 관대히 처분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홍타이치는 소현 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의 귀국만을 불허한 채 나머지 두 가지는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심양에서 새해를 맞았다. 인조 16년 2월, 최명길은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 내외에게 작별을 고하고 심양을 떠났다. 연고자가 없는 조선 백성 7백여 명과 연고자가 있는 2만 9천여 명에게 속환이 허락되었던 까닭으로 최명길과 함께 귀국하는 사람들은 무려 3만여 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행렬이었다. 최명길의 귀국은 조선 강토를 들뜨게 했다. 영영 돌아올 수 없으리라 여겼던 가족, 친지들이 대거 돌아온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호도 잠깐이었다. 화냥년-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이라 하여 환향녀라 하고 적은 것이 그렇게 읽히고, 그렇게 와전되고 멸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양에서 돌아온 기혼여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대부가에서 돌아온 처첩들을 화냥년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의정 장유까지도 속환되어 돌아온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정유의 딸이 봉림대군의 부인이 아니던가. 이름있는 사대부가에서는 모두 장유와 뜻을 같이 하였다. 여인의 절개가 도덕의 척도로 평가되던 시대, 설사 그것이 전란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더럽혀진 여인들에게는 오직 화냥년이라는 치욕의 굴레가 씌워질 뿐이었다. 버림받은 여인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목을 매고 죽었고, 더러는 목을 매고 죽었고, 더러는 강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길가에는 여인들의 주검이 즐비하였다. 모두가 '화냥년'들의 시신이었다. 최명길은 왕조의 배알을 다시 청했다. 환향녀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전하,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오나, 이는 스스로 음행을 자행한 것이 아니옵고, 극심했던 전란과 적지에 인질이 되었던 만부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신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나라에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인조는 탄식만을 거듭하였고, 최명길은 궁여지책을 진언하였다. 각 고을에 있는 강을 지정하고, 정해진 날에 환향녀들로 하여금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는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인조는 최명길의 진언에 따른 교지를 내렸다.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인조의 수습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냥년으로 음독이 변해 버린 말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지고 있음에랴.
장장 8년 동안이나 인질로 잡혀 있었던 소현 세자는 명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고, 보다 넓은 새로운 세계에 눈뜸으로써 비극의 길을 걷게 된다. 청나라의 섭정왕 다이곤이 오삼계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할 때, 그는 소현 세자에게도 동행을 청했다. 강요나 다름이 없는 청함이라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나, 조선에 다녀온 뒤로 우울해 있었던 소현 세자는 마음도 달랠 겸, 새로운 문물에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다이곤을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나라는 망하고 없어도 문물과 풍속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선과도 다르고, 심양과도 다른 북경의 풍물은 소현 세자의 모든 관심을 끌어당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이 그를 눈뜨게 하였다. 소현 세자가 북경에 머문 것은 기껏해야 70여 일이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7년에 버금가는 변혁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심양에서와는 달리 소현 세자의 행동은 아무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명나라가 이미 멸망하였으므로 청은 더 이상 소현 세자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소현 세자는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중국명)과의 교유는 그의 사상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현 세자는 아담 샬과 자주 만나면서 역법, 천문학,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문물에 거침없이 심취해 들어갔다. 이에 부응하듯 아담 샬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소현 세자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로서는 장차 조선의 임금이 될 소현 세자에게 서양문물의 깨우침과 더불어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 - 앞날을 위해서도 긴요한 포석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리라. 소현 세자는 촌각을 아껴 쓰며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기에 힘썼다. 그 자신에게도 크나큰 포부가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담 샬은 자신이 한역한 "천문역산서"와 여지구, 천주상 등과 같은 진귀한 서책과 물건들을 소현 세자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귀하가 주신 천주상과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그중 몇 권의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 속에서 정신수양과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천문학에 과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한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소현 세자가 아담 샬에게 답례로 보낸 서한이다. 우리는 이 서한을 통해 서구 과학에 대한 소현 제자의 관심과 흥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아담 샬과의 우의도 꽤나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서한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인조 22년 11월 26일, 마침내 소현 제자는 장장 8년 동안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민희빈과 두 아들인 석린과 석견을 대동하고 북경을 떠났다. 그가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인조의 미움을 받지 않고, 또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조선과 서양문물의 교류를 적어도 백년 이상을 앞당겼을 것이지만, 그 절호의 기회가 무산된 것은 조선 왕조사에 있어서도 큰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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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쏘십시오. 영국군 여러분!
겸양은 일종의 미덕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융통성 없는 사교적 예의로 말미암아 오해를 받거나 터무니없는 손해를 보는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745년 5월 11일, '루이' 15세 휘하의 프랑스군은 벨기에의 '톤트노와'에서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에는 네델란드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참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군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영국군 참모 '켐버란드' 공은 병력을 삼각형의 밀집부대로 편성하여 프랑스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군의 근위군진지 앞까지 쇄도해 들어갔다. 양쪽 군대의 거리가 50보 정도로 좁혀지자 쌍방의 장교가 부대 전면에 나와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때 영국군의 장교 '로드헤이'가 모자를 벗어들고 '프랑스 근위군 여러분, 먼저 쏘십시오'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진영에서 '단테로쉬' 백작이 나와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쏘십시오. 영국군 여러분! 우리들 프랑스 사람은 절대로 먼저 쏘지 않습니다!" 영국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사격을 가했으며 프랑스군은 뚱딴지 같은 사양으로 말미암아 대담한 타격을 받았다. 중국의 고사 송양지인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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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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