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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5 호
단기 4340. 2. 15 (음력 12.2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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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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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누군가 말하기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모두 건강한 사람이란 언제 "예스"라고 하고, 언제 "노"라고말하며, 언제 "히야!" 하고 소리질러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 W.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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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四章 (노자 - 도덕경 : 제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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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爭也, 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기자불립 과자불행 자견(현)자불명 자시자불창 자벌자무공 자긍자부장. 기재도야, 왈여식췌행.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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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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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넷째 가름
직역
발돋움을 하고서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공이 없다.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길에 있어서는 찌꺼기 음식이오. 군더더기 행동이다. 물은 아마 그것을 싫어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자는 처하지 아니한다.
해석
발꿈치를 들고 있는 것과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럼 인간이 행하는 부자연스러움을 살펴보자. 물이 왜 드러내고, 옳다고 우기고, 자만하는 것을 싫어하는가. 그것은 사물도 하지 않는 바이다. 사자도 자신이 밀림의 왕이라고 뽐내지 않는다. 그도 한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 물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노자는 뽐내고, 드러내고 자만하는 것은 발꿈치를 들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는 여러분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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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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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발끝을 제껴 디딘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걸으면 오래 걸을 수 없다. 가랑이를 벌리고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오히려 분명히 나타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도리어 공로가 없게 되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도의 차원에서 보면 먹다 남긴 음식이나 남의 집을 방문하다가 거절당한 것처럼 사람들이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이는 이와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주
기: 기와 같음, 발바닥을 땅에 대지 않고 발끝으로 제껴 디디는 것. 과: 양쪽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 여식췌행: 여식은 식사후 먹다 남긴 음식. 췌행은 불필요한 방문, 거절당한 방문, 무의미한 행위 등을 뜻하고 있음. 물: 여기서는 타인, 남을 지칭하고 있음.
해
노자는 이 장에서 인간 본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질적, 정신적 허영심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 하 등의 유익함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자랑하는 것, 으스대는 것 등은 남들이 먼저 외면하게 되며 또 적대감마저 유발하여 적을 만드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도는 여식췌행이라 하여 먹다 남긴 음식이나 거절당한 방문처럼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이와 같이 부자연스럽고 어리석은 행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만심, 허영심 등의 무가치한 것들을 버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참되고 진실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생활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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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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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행방불명된 보리사터의 부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공관 정원에 보물 제351호로 지정돼 있는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있다. 고려 초기의 우아한 석조유물이다. 문공부 발행의 (문화재대관)(보물편) 상권은 이 부도의 원위치에 대하여, "확증은 없으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로 추정되고 있고, 일찍이 원위치를 떠나 서울 시내 남산동 집에 와 있던 것을 현위치로 옮겨온 것"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양평의 보리사터에서 일본인이 반출해 온 것이 분명한 것 같으나 확실한 기록이나 증언이 없어 그저 '석조부도' 라고만 명명돼 있는 이 보물을 이화여대가 입수한 것은 1956년이었다. 총장공관을 새로 짓고 정원을 꾸미게 되었을 때 정원 설계를 맡았던 사람이 남산동 1가의 어느 큰 정원이 있는 집에서 값진 나무들을 팔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니 과거 일제때에 증권으로 치부했던 일본인 닛타가 살았었다는 집이었다. 좋은 나무가 많았고 귀한 식물도 있었다. 이화여대에선 그것들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그때 남산동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놓여 있던 이끼 낀 부도 하나도 묻어 왔다. 이화여대로선 뜻하지 않았던 굉장히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앞의 부도는 총장공관 정원에 옮겨 세워진 후 금세 관계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어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몇몇 전문가는 이 유물이 1911년에 일본인 악당들에 의해 양평에서 서울로 반출된 후 자취를 감추었던 보리사터의 석탑(부도) 같다는 심증을 굳히고 현지조사까지 하였는데. 확증은 못 잡았지만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수십 년 동안 행방불명으로 증발했던 보리사터의 귀중한 유물 하나를 되찾게 된 셈인데, 과거 총독부 조사자료에는 이 부도를 가리킨 것이 분명한 반출경위가 밝혀져 있다. 먼저 1916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당시 조사자는 일본인 전문가 이마니시였다.
"(현재 보리사터에는) 현가탑비의 비신·귀부·이수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그외 현기탑이었을 하나는 마을의 김선호 등의 말을 빌리면 수년 전까지 귀부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는데 일본인이 서울로 운반해 갔다고 한다."
조사자 이미나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단서로 붙이고 있다.
"이미 서울 방면으로 반출된 현기탑을 색출해내어 박물관에서 영구히 보존시키도록 할 것을 간절히 바람."
여기서 현기탑일 거라고 이마니시가 추측한 것은 대경대사 현기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부도를 말하는 것으로, 부도도 탑의 일종이다. 현기는 신라 말엽의 고승으로 경순왕의 스승이었다. 왕건(고려 태조)이 신라를 멸망시킨 후, 현기를 양평 미지산 기슭의 보리사에 가 있게 했었다. 대경대사는 시호. 그래서 보리사에는 그를 기념하는 탑들이 세워졌던 것인데 그후 절은 폐멸하고 탑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마니시는, 이미 반출당한 부도탑은 그 행방을 찾되 현지에 쓰러져 버림받고 있는 탑비라도 서울로 옮겨 오는 것이 좋겠다고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천 년의 옛 비석이 선려하게 유존됨은 경탄할 일임. 국보로서 보존시켜야 함.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보존시키기는 어렵고 서울의 박물관에 옮겨서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람."
그후 총독부는 이마니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현기탑비를 서울로 옮겨 1915년에 경복궁 안에 건립했던 총독부박물관(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호하도록 했다. 현재 경복궁 잔디밭의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제361호의 '대경대사탑비' 가 본래의 절터를 이탈한 경위이다. 한편 1917년 12월에 경기도 경찰부장은 총독부 정보과장 앞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양평 보리사터 석탑(부도탑) 반출 내막의 조사보고를 올리고 있다. 이마니시의 조사 정보와 의견에 따라 총독부가 지시했던 일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에는 이중탑(지금 이화여대에 있는 부도는 얼핏 이층석탑 같은 형태이다)이 있었는데, 절터의 논밭 임자인 함백용·박영범·박돈양 세 사람이 이웃의 상원사로 하여금 그것을 옮겨 가도록 기부했던바, 1909년 7월 어느날 일본인 3명이 상원사를 찾아와서 그 석탑을 비싼 값으로 사겠다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거듭 끈덕지게 요청하였다 함. 그러자 최화송이란 주지가 기증자인 앞의 세 사람과 협의하여 결국 120원을 받고 석탑을 팔아 넷이서 분배해 가졌다 함. 그러나 그들은 그때 석탑을 산 일본인의 주소 성명을 모르고 있었으며, 다만 서울에 살고 있다고만 말하더라고 함. 한데 조사해 보니 그때 석탑을 삼으로써 어디로든지 반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일본인은 본정(지금의 충무로) 2가 18에 살고 있는 다나카와 약초정(지금의 초동)에 사는 다카하시란 고물상이었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그 석탑을 1911년 8월에 명치정(지금의 명동) 2가에 사는 시로로쿠에게 500원을 받고 다시 팔았음. 그렇게 석탑의 소유권을 인수한 시로로쿠는 730여 원의 운반비를 들여 그것을 반출하였고, 현재도 그가 가지고 있음."
이 경찰조사는 양평에서 반출된 보리사터의 부도탑이 1917년 12월엔 당시 서울 명동에 살고 있던 시로로쿠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준다. 이렇게 소재지가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그것을 압수하거나 다시 사들여서 이마니시가 제의한 것처럼 박물관에 넣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부도는 그후 또 다른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아주 행방을 감추었다. 이렇게 완전히 잊혀졌던 것이 45년 후인 1956년에 명동과 바로 이웃인 남산동의 과거의 일본인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인데, 전의 집주인이었던 닛타가 시로로쿠에게서 직접 사들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과거의 닛타의 집에서 나타난 부도가 1911년에 시로로쿠가 사서 가지고 있던 양평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 바로 그것이라는 확증을 잡을 길이 없다는 이유로 오늘날 보물로서의 지정 명칭이 다만 '석조부도' 라고만 돼 있는 것은 이 부도가 일제 아래의 비운에서 아직도 깨끗이 풀려나지 못한 억울한 숙명이다. 문제는 8·15해방 때 닛타가 아무말도 남기지 않고 일본으로 쫓겨감으로써 그의 정원에 숨겨져 있던 부도는 10여 년간 완전히 족보 불명이 돼버렸던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유물은 언젠가는 전문가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산동의 부도가 이화여대로 옮겨진 후 전문가들은 과학적인 연구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평 보리사터의 그 현기탑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동안 족보를 잃었던 부도는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밑의 가장 전형적인 수난과 비운의 문화재인 이 부도에 대하여 장문의 학술논문을 쓴 김화영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현기탑이 서울로 반출된 장소와 이화여대의 부도가 발견된 장소가 동일한 지점은 아니나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은 해방후 명동 부근에서 발견된 유일한 부도인 데다가 각 부의 양식과 조각수법이 고려 초기로 현기탑비와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현기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총) 12·12합집, 고려대사학회,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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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7장 자연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
2.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
여기에서 나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소재로 하여 예술을 구성하는 인간의 두가지 측면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의 글은 예술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잘 설명하여 준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으로 결합되어 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은 "꿈"으로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명정"으로 비유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조용한 질서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꿈틀거리며 광란하는 운동을 나타낸다. 아폴론 신은 형식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단순히 논리적인 차원임에 비하여 디오니소스 신은 유기적인 삶의 힘을 지칭하는 동적인 차원을 타나낸다. 하나의 대상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장미꽃의 색깔과 향기, 형태는 외부적, 형식적인 것으로 아폴론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미꽃의 색깔을 빨갛게 만들며 향기를 내게끔 해주는 힘은 동적인 생명의 힘으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해당한다. 아폴론은 수학적인 정밀함을 소유한 미술적 힘으로서 모든 대상을 형식적으로 나누어보며 대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아폴론은 대상을 하나하나 개별화시키는원리이다. 여기에 비하여 디오니소스는 대상들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내면적 삶의 원리로서 개별화를 파괴시킨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비극의 두 요소이다. 니체는 비극의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를 아폴론적인 것으로 보고 비극의 동적인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그는 아폴론을 미술의 신으로 보며 디오니소스를 음악의 신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니체의 입장을 모든 예술에 확장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된다. 디오니소스는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내면적인 힘이요, 아폴론은 예술의 표상에 해당한다. 니체가 말하는 표상은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세계를 충동적이며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으로 파악할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 표상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예술을 구성하는 내면적의지이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아폴론은 디오니소스의 집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예술에 형식을 부여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예술에 동적인 내용을 부여해 준다. "모든 상징적인 힘들의 이러한 전체적인 모습을 벗기기 위하여 인간은 이미 상징적인 힘으로 자신을 상징적으로 언명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기 표현의 정상에 도달하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 디튀람부스적인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오직 그 자신과 유사한 것에 의하여서만 이해되지 않는가! 원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지 않으며, 실로 그의 아폴론적인 의식이 오직 가면처럼 이 역동적인 세계를 그에게서 은폐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그에게 전율이 뒤섞이는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다." 우리들은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예술을 구성하는 두 요소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구성하는 인간의 의식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는 형식을 부여하는 측면이요, 또 하나는 내용을 부여하는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음악을 들을 경우, 음악 속에 들어있는 체험의 내용은 풍부하건만 형식이부족한 것을 느낄 때가 있으며 그와는 정반대로 형식은 빈틈이 없지만 삶이 체험 내용이 빈곤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형식과 내용이 제대로 조화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그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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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두루뭉수리
본뜻 : 형태가 없이 함부로 뭉쳐진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흔히 알고있는 '두루뭉수리'는 잘못된 말이다.
바뀐 뜻 : 말이나 행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어서 또렷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루뭉술하다'고 쓸 때는 태도나 성격, 일 처리 등이 명확하지 않고 어정쩡한 것을 말한다.
뒤웅스럽다
본뜻 : 생김새가 마치 볼품없는 뒤웅박처럼 미련스럽게 보인다 해서 생긴 말이다.
바뀐 뜻 : 생김새나 모양이 미련스럽다는 뜻으로 쓰인다.
(뒷)바라지
본뜻 : 바라지란 원래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법주 스님을 도와 경전을 독송하고, 시가를 읊는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죽은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인 재에서, 바라지 스님은 법주스님을 도와 목탁을 치고 경전을 읊고 향과 꽃과 차를 올린다. 바라지 스님이 이처럼 자잘하고 수고스러운 일들을 해준다는 데서 '뒷바라지 하다' '옥바라지 하다' 등의 말이 생겨났다.
바뀐 뜻 : 음식이나 옷을 대어 주는 등, 온갖 궂은 일을 도와주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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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4.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소녀여! 나아가 프랑스를 구하라
오늘날은 영국이 유럽대륙과 떨러져 있는 섬나라이지만 중세 때만 해도 영국은 프랑스 땅 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언제든지 영토문제로 충돌할 소지가 있었다. 그 씨앗을 뿌린 것은 11세기 중엽에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된 노르만디의 공작이었다. 중세는 오늘날과 같은 영토국가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때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도 상속이나 왕위계승시에는 분쟁이 발생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장기간 계속된 것이 바로 백년전쟁(1337-1452)이었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는 백년이 더 걸렸지만, 그 기간 내내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이라 명명되었다. 프랑스 영토가 전쟁터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물적, 인적 손실은 막대했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군이 군사력이나 사기면에서 불리했다. 특히 흑색 갑옷을 입고 출전하였기 때문에 '흑태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 가스코뉴를 근거지로 남프랑스 일대를 돌아디니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도 속수무책이었다. 1357년 가스코뉴를 출발하여 르와르계곡까지 진출한 흑태자는 돌아오는 길에 프아티에에서 프랑스군을 만나 크게 격파하고, 국왕 장과 그의 막내 아들 필립을 비롯해서 많은 프랑스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프랑스에서는 에티엔느 마르셀의 농민반란으로 프랑스왕실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백년전쟁의 영웅인 영국의 흑태자가 1376년에 사망하자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1428년에 영국이 프랑스 전체를 지배할 목적으로 남프랑스로 향하다가 오를레앙을 포위함으로써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군은 거듭된 패전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왕태자인 샤를르 주변에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궁정모리배들만이 득실거렸다. 프랑스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다.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것이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였다.
잔은 프랑스 동부 동레미 출신의 순박한 시골처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성인들이 나타나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고 대대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랭스에서 왕태자를 즉위시키라고 자기에게 계시가 내렸다고 주장했다. 잔은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굳게 믿고, 1429년 2월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여 때마침 시농에 체류하고 있던 왕태자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녀는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 있던 왕태자와 프랑스군의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자심감을 불어넣어 주는 데 성공했다. 잔 다르크에 의해 고무된 프랑스군은 사기를 되찾고 영국군에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오를레앙을 탈환하고 불과 수주일 만에 르와르 계곡에서 영국군을 몰아냈다. 그녀는 왕태자를 설득하여 곧바로 랭스로 진격하고 1429년 7월에는 이를 점령하여 랭스의 대주교의 집전하에 샤를르 7세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때 사생아로 낙인 찍혔던 왕태자는 이제 신에 의해 축복받은 정통적인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잔은 그 뒤에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의 포로가 되어 영국군에게 인도되었고, 루앙의 종교재판에서 마녀로 규정되어 화형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샤를르 7세는 잔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처형된 뒤 종교재판을 다시 열어 그녀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 후 20세기에 와서야 잔은 성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은 확실히 프랑스를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한 기적적인 일이었으며 이후 프랑스 애국심의 상징이 된 것도 당연하다. 결국 잔 다르크의 출현이후 프랑스군은 승승장구해서 영국을 유럽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1452년 보르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함으로써 영국의 가스코뉴 지배와 기나긴 백년전쟁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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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아름다운 유언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미국의 모 대학 도서관 로비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거지처럼 초라한 행색에 지린내까지 풍기는 노파가 검정색 비닐백을 들고 우리 앞을 지나갔습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노파가 힘겹게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노파가 어떻게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증이나 교직원증 없이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헤이, 친구! 경비원들, 저 할망구한테 뇌물 먹은 것 아냐? 저런 꼬락서니로 어떻게 여길 들어왔지? 안면이 있는 학생이라도 학생증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말이야.”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뺨에 칼자국까지 있는 친구는 정말 모르냐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헤이, 코리언 멍청이!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이 좋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는군. 저 부인의 남편이 재산을 몽땅 학교측에 기증해서 이 엄청난 도서관을 짓게 했다는 것도 모르다니.... 저 부인은 그래서 죽을때까지 이 도서관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거라고.” “그래? 거 굉장한 사연이군!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도 한심하군그래. 부인이 저렇게 거지 꼴로 지내도록 한푼도 남기지 않고 몽땅 학교에 기증했다니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저 부인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남겨두었는데, 부인은 그것마저 학교에 남겨야 한다면서 저러고 산다더군.” 그 말을 듣자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하고 올라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뭔가 후손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때로는 이기적이고 패권주의를 지향한다고 욕을 듣기도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왜 그런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지금 우리 앞에 육신으로 나타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서 올바른 삶의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공병우 박사는 1906년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95년 3월 7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촌음을 아껴가며 한국인의 혼과 글을 사랑하고, 한글 기계화를 위해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생전에 일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의 부귀영화를 도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갔을 때에야 비로소 미련한 우리들은 그의 참다운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독학으로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된 그가 한글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8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안질을 치료받으러 그를 찾은 후부터였습니다. 그는 이극로 선생을 통해 한글을 사랑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참다운 한국 혼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한글 연구가 독립운동 못지 않게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글 연구에 몰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차에 곧 그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서울대 의학부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일본어로 쓰여진 전공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두 명의 조교에게 원고 정리를 부탁했는데, 능률이 매우 저조하였습니다. 아무리 기록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라도 손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너 시간만 펜을 쥐고 있어도 팔목이 아프고 글씨가 바르지 않게 됩니다. 결국 그는 기계로 그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마침 엉성하긴 했지만 한글 타자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로로 찍어서 세로로 읽어야 하는 그 타자기로는 원하는 효율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공병우는 엉뚱하게도 자신이 직접 제대로 된 타자기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따라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돈 버는 일을 그만두고 연구에 몰두하겠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미쳤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침식을 걸러가며 연구에만 매달린 지 6개월 만에 마침내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 타자기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바람으로 그는 문교부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서너 번의 요청 끝에 간신히 이루어진 면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관은 그가 무슨 돈벌이나 하려는 줄 알고, 타자기를 눈여겨 보지도 않은 채 무시하면서 인격적인 조롱마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만 있을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시간이 빌 때마다 계속해서 한글 타자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한글 타자기의 놀라운 성능을 알아준 곳은 놀랍게도 한국 정부가 아닌 북한 군부였습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동안 의사로서 돈을 많이 벌었고, 노동자의 피를 빨며 호의호식했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공산당이 그의 한글 사랑과 검소한 성격을 알 리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신이 도움의 손길을 주는 법인가 봅니다. 한글 타자기의 놀라운 성능에 반한 정치고위부 고위층의 배려로 그는 기적적으로 처형을 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글 기계화 연구를 계속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휴전협정 문서 정본과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 문서도 공병우 타자기로 정리되었습니다. 특히 한일 기본조약시에는 한국측이 단 몇 시간 만에 공병우 타자기로 서류를 정리해내는 것을 보고, 며칠씩이나 걸려야 하는 일본측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1968년, 상공부가 비과학적인 한글 타자기 네벌식 표준자판 시안을 밀고 나오자, 그는 자신이 개발한 세벌식 타자기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역설하면서 정부와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고집을 부린다며 비난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역설해 나갔습니다. 한 번은 정부측에서 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표창하려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1972년,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까지 당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표창이 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세벌식을 정부가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사재를 털어 한글문화원을 설립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한글 연구와 그 기계화뿐이라는 고집에서였습니다. 한글사용의 효율성을 높이지 않고서는 결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우리 한글에 대한 정부와 식자들의 무관심에 그는 통탄했습니다. 그는 한글 연구에만 미쳤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올바른 지표를 후세들에게 제시해 주는 데에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외에 갔다오면서도 국가에 누가 된다면서 절대로 가족들에게 줄 선물조차 사오지 않았습니다. 1952년에는 미국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친지를 위한 선물 대신 시각 장애인들에게 줄 흰 지팡이 한 보따리를 사와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1957년에는 앰뷸런스를 들여와,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을 직접 운전하여 순회하면서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구두를 벗고 신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뒷부분을 일부러 찌그러뜨려 신었으며, 낮에는 절대로 결혼식 주례를 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작업복 차림이었습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연구에 몰두해야 하는 그에게는 양복 정장 차림이 불편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작성해 두었던 유서에도 그이 철두철미한 합리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절대로 남들에게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신 자신의 장기를 필요한 환자에게 주고, 나머지는 시체 해부학 교실에서 실습용으로 이용토록 하라고 했습니다. 죽으면 생명이 없다고는 하지만, 선뜻 그렇게 하라고 나서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도 말입니다. 만약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화장하거나 혹은 수장하라고 했습니다. 또 매장할 경우에는 공동묘지를 이용하되 죽은 곳에서 1백 킬로미터 밖으로는 운반하지 말 것이며, 시신에 수의도 입히지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싸구려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1개월이 지난 후 친지에게 알리되 매장지는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고, 시신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실습용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빈손으로 간다. 장기를 기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한 평의 묘자리를 쓰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 차라리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얼마나 후손을 사랑했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국회의사당 회의장 안의 회의탁자 위에 놓여진 국회의원들의 한자 명패를 볼 때마다 공병우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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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시인 연산군과 내시들의 얘기
내시의 아내들
우리 나라의 내시들도 고려조 초기까지는 고위관직을 겸할 수가 있었음은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지만, 그러자니 내시들이 자행하는 패해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시는 군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조정의 기밀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 수가 있었고, 각 정파간의 반목과 대립도 정확하게 파악 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각 정파나 문벌의 두령들은 내시를 매수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고, 또 군왕은 자신의 손발과 같은 내시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와 재물을 자주 하사하였다. 내시가 대단한 부를 누리면서 여러 처 . 첩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들에게 위세를 제공해 주었기 대문이었다. 따라서 희대의 명신 서열에 내시가 있고, 희대의 간신 서열에도 내시가 있었기에 당나라는 내시 때문에 흥했고 내시 때문에 망했다는 고사가 있는 것이다. 또 "조선인물고"에도 명신란에 내시가 소개되어 있음을 본다. 고려조 공민왕 때에 막강한 세도를 누리고 있던 최만생이라는 내시는 끝내 공민왕을 침실에서 시해하지를 않았던가. 바로 이 같은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조에서는 내시의 겸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유용하게 쓸 수가 있었다. 내시부의 우두머리를 판내시부사라고 부른다. 관직의 위에 판이 붙으면 판서의 지위와 같은 1품직이고 보면 실제로 장악하는 업무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감으로 불리우는 막중한 지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판내시부사의 밑에 상선이 두 사람이니 모두 종2품이요, 상온과 상다가 각각 한 사람이니 이들은 정3품이다. 이 같은 서열로 종9품까지가 55명이요, 그밖에도 수많은 무품의 내시가 있어 내시부의 정원은 1백 40명으로 되어 있다. 내시들에게 성한 관리들보다 더한 세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명문대가에서 내시에게 다투어 딸을 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더욱 자명해 진다. 내시가 고자와 같이 성행위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귀애하는 딸을 그들에게 출가하게 하는 것은 딸을 팔아서 치부를 하거나 출세길을 터보겠다는 탐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시 사위를 보는 명문가가 늘어나자 연산군은 10년(1504)5월 14일, 의정부에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린다.
내시들이 외간 사람들과 상통하니 궁중의 일이 혹시라도 누설 될 것인데, 더구나 인아(양쪽 사돈가 동서간의 통칭)와 관계가 되는 자임에랴. 지금 내관들이 많이 조정 관원들의 친족들에게 장가를 들어 아내로 삼으니 그 사이에 어찌 인연으로 왕래하여 궁궐 안에 일을 전파함이 없겠는가. 내시의 처족되는 조정관원은 외방으로 내보내어 서울에서 살지 못하게 하되 내관이 죽은 다음에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음을 중외에 효유하라.
이 같은 전지에 따라 조사를 하였더니 내시를 사위로 맞은 사람은 첨지사 조한손 등 무려 32명으로 나타났고, 또 정효창이라는 내시는 왕후의 친족에게 장가를 들었음이 밝혀지자 곤장 1백대를 때려서 귀양을 보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내시들의 비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시들의 처족에 대해서는 이같이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내시 그 자체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어차피 가까이에 두고 부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사대부가 1품의 벼슬에 오르면 그 부모에게도 벼슬을 추증한다. 이와같은 예에 따라 내시들에게도 직첩이 높은 자에게는 그 어버이에게 직첩을 추증하라는 전지가 있는가 하면, 직첩이 높은 내시들이 출입할 때는 길을 인도하는 구종도 쓰게 하였고, 벼슬아치나 사림들이 내시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엄히 치죄하라는 전교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내시의 위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내시와 궁녀들과의 사랑이 발각되어 대궐을 쫓겨난 사례가 있다면 고자가 아닌 가짜 내시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연산군 10년(1504)년 9월 7일 조의 "연산군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교가 등재되어 있다.
환관 이경과 석극산을 전의감 관원을 시켜 그들의 음근을 상고해 보도록 하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기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성한 사랑이 궁궐에 잠입하여 내시 행세를 하고 있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실례로 연산군은 가끔 전체 내시들의 바지를 내리게 하고 공개리에 그들의 하초를 살폈다는 기록 또한 "연산군일기"에 등재되어 있음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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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약이지만 효험은 확실하다
'엘리자베드' 여왕시대의 군인이자 문필가였던 '월터 롤리'는 수려한 용모와 우아한 태도로 해서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새로 맞춘 자기 망토를 흙탕물 위에 깔아서 여왕이 그 위를 밟고 가도록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 그가 이복 형제 '험프리 길버트'와 함께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식민지를 건설하여 '버지니아'라 이름지은 것도 다 여왕의 마음을 사기 위한 일이었다. 이때 감자와 담배를 가져온 것은 문화적으로 특기할 일. 그가 처음으로 자기 서재에서 담배를 피웠을 때 하인이 놀라서 머리 위로 물을 뒤집어 씌웠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에 가서는 여왕의 신임을 잃었고 더욱이 여왕 사후 '제임스'왕으로 부터는 반역죄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20년 동안 갇혀 있기도 했다. 후에 출옥하여 왕의 명령으로 남미 오리노코 강변에 전설적인 황금의 나라(엘 도라도)를 찾으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처형은 '올드 팰리스' 형장에서 집행되었는데, 여러모로 구명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마침내 형장에 서자 사형 집행인이 든 도끼를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독한 약이지만 효험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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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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