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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1 호
단기 4340. 1. 30 (음력 12.12)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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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책을 평가해보자
소금은 맛을 봐야 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미 어려서 맛을 봤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맛을 보지 않아도 소금이 짜다는 것을 압니다. 책 또한 좋은 책인지 아닌지는 맛을 봐야합니다. 펼쳐보지도 않고 맛이 짜네 싱겁네 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책이든이 손에 잡히면 끝까지 읽어보고 판단은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각기달라 책 한권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근래의 요코이야기 파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교과서로 채택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르고 지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도와 지면을 통해 출판사의 입장도 듣고 자세한 내막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개인의 입장도 정리해봅니다. 주의 해야 할 것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나쁘다 또는 좋다 라고 나눈다면 세상엔 가치없는 것들로 넘쳐날 것입니다. 이세상 모든 책이 모든 독자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가려서 읽으면 되고 원하는 책만 읽으면 편할 것이지만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에 두고 있다면 그책을 한 번 사서 읽어 볼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책을 100명이 읽었는데 99명이 참 좋은 책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접고 더불어 좋은 책이라 평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눈을 통해 들어와 뇌로 전달되어 인식하고 평가하며 결정 내일 수 있는 것입니다. 99명이 좋다 한들 내가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즘 악용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싫은 점도 없는데 무조건 저 책은 저질이라는 평가부터 내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이런 오류를 책을 떠나 인간관계, 정치경제 문제에 까지 확대해서 편파된 평을 내리는 것이 습관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오류 저지르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정확한 시력을 기르는 방법역시 책에 있습니다.
필자는 살면서 잠시라도 손에서 책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순정만화가 되었든 월간 잡지가 되었든 늘 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베스트 셀러 말고도 참 좋은 작품인데도 사라져 버리는 멋진 글들을 많이 접해 봤기 때문입니다. 흐름따라 읽는 습관에서 잘 보이지 않아 구석에서 사장될 책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평가에 있어 오류를 범하지 않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출판사 이름이 적힌 마지막장까지 읽는 것입니다. 그 뒤에 책의 요점과 책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멋진 독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바람의 종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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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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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조정래씨가 대하소설 <아리랑>의 100쇄 돌파를 기념해 29일 낮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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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 "작가도 현실 발언해야 한다. 단,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정의로워야 한다."
대하소설 <아리랑> 100쇄를 맞은 소설가 조정래(64)씨가 따끔하게 꼬집었다. 현실 발언을 하되,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엔 철퇴를 가했다. 그는 "정치가는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겠다는 사람"으로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며, 오류투성이인 "정치가와 함께 하는 건 문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일갈했다.
조씨는 또 '민족'이라는 단어를 빼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움직임과 관련해서도 '민족'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씨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논리"라며 "민족이란 문제를 폐기처분하는 건 통일 이후 해도 된다. 폐기하지 맙시다. 폐기해야 한다는 건, 그건 신사대주의"라고 단언했다.
총 12권인 대하소설 <아리랑> 100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29일(월)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1994년 출간한 <아리랑>은 13년 만에 (1권 기준) 100쇄를 찍었다. '쇄'는 출판사가 책을 인쇄할 때마다 찍는 판 숫자. <아리랑>을 출간한 해냄 출판사는 <아리랑>이 총 330만부가 팔렸다고 밝혔다.
<아리랑> 100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조정래씨는 자신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존엄성을 지키려 했고, 나를 태어나게 한 모국에 대한 애정과 민족, 역사에 대해 천착하려 노력했다"며 세 가지를 지키려 애썼다고 토로했다.
조씨는 "<아리랑>을 쓰면서, 독자와 못 만날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어찌 독자가 안 읽겠나 확신이 있었다"며 "작가들이 독자 찾아가려 몸부림치고 끌어당기려 애쓰면 그 열정이 독자한테 전달된다. 그게 문학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대하소설 쓰기는 지긋지긋하고 치 떨리게 힘들어
조정래씨는 또 대하소설을 쓰는 어려움도 털어놨다.
"1만5천매 대하소설 첫 장 쓰려면 20장 30장을 파지 내는데 이틀 걸려 첫 장 썼다. 그게 1만5천 분에 1이다. 내가 언제 이걸 다 쓸까 생각하면, 그 느낌이 터널 속에 들어가는 막막한 느낌이다."
<아리랑>을 쓰는데, 대하소설 쓰기가 지긋지긋하고 하도 치 떨리게 힘들어서 후배에게 넘기려고 한 일화도 털어놨다. 아끼는 후배에게 '한강시대'를 대하소설로 쓰라고 취재방법까지 가르쳐줬는데 안 써서 결국 자기가 썼다며, 그게 <한강>이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로 조씨는 검찰에 고발당했던 일과 몸이 아팠던 일을 꼽았다. <아리랑>을 4분에 3가량 썼을 때인 1994년, 고발당하는 바람에 검찰에 소환 당해 조사 받고 그러느라 글 쓰는 걸 중단당해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또 매일 35매에서 40매를 쓰다 보니, 오른쪽 관절이 아프고 손가락 끝까지 마비돼 고생한 일도 털어놨다.
작가 조정래씨는 또 '위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우리 문학의 현실에 대해, "젊은 작가들 소설이 전부 주인공이 '나'이고 일인칭 소설인 건 문제"라고 꼬집었다. 주인공을 '나'라고 설정하면 전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소설 속 인물이 능동적이 아니라 피동적인 인물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3인칭 소설을 쓰라고 얘기했다"며 "인생을 다면적이고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독자가 감동 받게 하려면 인물이 다양해야 한다. 그런 소설이 어찌 영혼을 흔드는 소설이 되겠냐"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또 "80년대 지났다고 역사시대마저 지나진 않았다. 일본 소설이 인기인 건 일본소설의 감각이 다른 데 대한 호기심으로 일시적 현상"이라며 "한국작가는 자기와 싸워야 하고 또 (핸드폰, 인터넷 같은) 문명의 이기와 싸워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조씨는 결국엔 그 무엇도 문학을 어쩌지 못하고 "그동안 작가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며 "문학은 인간이 언어를 쓰는 한 그 생명은 영원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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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소설 <아리랑>의 100쇄 돌파를 기념해 29일 낮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장 입구에 출판사에서 마련한 100쇄 기념본과 소설가 조정래씨의 사진이 전시돼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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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
| 작가도 현실 발언해야 한다! 하지만?
또 이문열씨가 <호모 엑세쿠탄스>에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소설가들이 현실 정치에 발언하고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조정래씨는 딱 잘라 말했다.
조씨는 "우리 모두에겐 모든 사람이 정치ㆍ경제에 대해 감시ㆍ감독하고 발언할 자유가 있는데, 특히 작가는 대중을 대변하고 감시 감독할 책무가 있다"며 "현실 발언해야 한다. 다만 '얼마나 정의로운가', '객관성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작가가 현실 발언할 때는 작가가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정의로울 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정치가란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겠다는 사람"이라고 후르시초프가 한 말을 인용하며, 정치가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꼬집었다. 따라서 "지식인, 작가는 그들을 감시, 감독해야 한다"고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정치계에 입문하는 것에 대해선 "작가는 인류 스승이고 '산소'라고 한다"며 "정치세력과 함께 하는 게 작가의 소임은 아니다. 정치가와 오류를 같이 범하는 건 문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일갈했다.
한편, 조씨는 앞으로는 대하 소설은 쓰지 않을 생각으로,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읽을 만한 50권짜리 아동물을 집필 중이라며, "손자들에게 지금 같은 나쁜 글을 읽힐 수 없어서"라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
아동물은 국내 15명, 해외 15명 위인 이야기와 전래동화 20권까지 합해서 50권짜리로, 현재 출판사측에 원고를 넘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해 앞으로 만해 한용운, 안중근 등을 다룰 예정이다. 조씨는 앞으로 2, 3년간 이 기획 저술에만 몰두할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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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노동은 사람에게서 세 가지 큰 악 < 권태와 비행과궁핍 > 을 덜어 준다.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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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章 (노자 - 도덕경 : 제10장) |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孀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재영백포일 능무이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생지 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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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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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장
직역
바탕의 기운을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기로 부드러움에 다달아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윽한 거울을 뜨물로 씯어서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깨끗히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쌓여 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하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다스리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해석
영백이라는 것은 靈과 魂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를 이루어 주는 形이다. 이 형의 의미는 덕경 오십일장에서 다루겠다.
도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렇기 위해서는 근원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도-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같이,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 있다. 뜨물은 곡식을 씻은 뿌연 물이다. 이런 물로 거울을 닦으면 때가 더낄 뿐이다. 물을 바꾸어서 닦아야 하지, 닦는 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거울은 무엇이고, 물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도 모른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은 생사의 문제이다. 생사의 문제에 초탈해서 생사가 어찌되건 평정을 이룰 수 있는냐 하는 물음이다. 개인의 문제이다. 그리고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구제한다고 할 때 내가 세상을 구제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고 다시 묻는다. 이것은 관계 속에서 처해야 될 행동이다. 생사에 고요할 수 있고,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을 하면 도가 생긴다. 그렇게 하면 도가 생기고, 덕이 쌓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덕에 대해서 말한다. 덕은 태어나게 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저것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내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에게서 누군가가 무엇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다. 그리고 남에게 그러한 지식이나 앎을 전수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다 배웠으면 떠나게 하라. 그를 지배하고 자신의 학설만을 고집하지 않게 하라. 그는 그 자체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마라.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그윽한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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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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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혼과 백을 하나로 모아 능히 분산되지 않게 한다. 기를 하나로 모아 부드러움을 이루어 젖먹이처럼 되도록 한다. 오염된 것은 없애고 그윽한 경지에서 살펴보아야 능히 하자가 없을 것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치란이 교체되는 때에 남보다 앞서지 않고 유순한 암컷처럼 자연에 순웅할 수 있어야 한다. 햇빛이 사방에 골고루 퍼지듯이 무위로써 세상을 잘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게하고 성장시킨다. 생을 주면서도 이를 소유하지 않으며, 작용케 하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으며, 자라나게 하지만 간섭치 않고 자연에 맡긴다. 이것을 신비한 덕이라 한다.]
주
재영백: 재는 별다른 뜻이 없다. 그러나 '안정시킨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영은 곧 형으로서 의심스럽고 현란하다는 뜻임. 백은 육체에 생명을 주는 정기를 의미함. 하늘에서 받은 정신적 요소를 혼이라 하느데 반하여 땅에서 받은 신체활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백이라 함. 결국 영백은 혼백을 뜻하는 말이다. 재영백의 해석에는 옛날부터 전문가 사이에 이설이 많았음.
척제: 오염된 것을 씻어 없앰. 현람: 깊고 그윽하게 살펴본다. 천문개합: 하늘의 문이 열기고 닫히는 것처럼 태평성대의 난세가 오고가는 것을 의미함. 천문을 인간의 코로 해석하는 이도 있음.(하상공) 이것은 명상에 의하여 신비스러운 경지에 몰입할 때의 호흡조절과 관련된 해석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어딘가 밀교적인 부위기가 감돌고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노자서가 지니고 있는 신비주의적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해석도 나옴직하다고 본다.
현덕: 불가사의한 덕, 그윽하고 오묘한 힘.
해
인간의 혼과 백은 하나가 될 때 심신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한점에 집중시킬 때 기가 흩어지지 않고 도의 품성인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처럼 때묻지 않고 순수한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런 경지에 서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뒤돌아 본다면 아무 잘못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암컷처럼 유순하게 자연의 법칙에 쫓는 것 만으로도 세상은 태평하게 다스려 질 것이다. 그러한 다스림은 신비하고 그윽한 은덕과도 같다. 천지의 신비스러운 덕은 만물을 생성케 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하거나 자신의 공으로 자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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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26 저팬 머니의 심장부: 가부토 초
한국의 여의도 증권가처럼 도쿄 증권거래소 등 주요 금융기관들이 즐비하게 운집해 있는 도쿄 도심의 가부토 초 거리. 이곳을 국제금융인들은 보통 '아시아의 윌 스트리트'라고 부르고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8년 주식시장으로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다. 그후 110여 년이 지난 1994년 5월 말 현재에 이르러 이곳은 외국법인을 포함해 모두 7,182개사의 증권이 상장돼 있는 세계적 금융센터로 발돋움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을 거듭한 가부토 초는 1990년대 들어 1부의 상장 주가총액이 런던 증시를 제치고 뉴욕 증시에 이어 세계 제 2위를 차지했다. 또 1993년 한해 동안에만 이곳에서는 자그마치 86조 8,800억엔어치의 엄청난 주식이 거래됐다. 당시 일본 정계와 재계는 이곳을 아시아 엔화 블럭의 심장부로 삼아 '달러화 대신 엔화를 세계경제권의 기축통화로 만든다'는 거대한 야심을 키우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특히 미국이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한 지난 1985년, 가부토초는 공공연히 '반자아'를 외치며 샴페인은 터뜨렸다. 앞으로 몇 년만 더 몰아붙이면 마지막 라이벌인 뉴욕 증시마저 제치고 20세기 안에 가부토 초가 세계최대 증시가 되는 가능하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음이 그후 입증됐다. 1989년을 정점으로 주가와 땅값이 대폭락하면서 거품경제가 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가부토 초도 동반 침몰하기 시작했다. 버블파열의 충격은 엄청났다. 버블 파원로 도쿄 증시에서만 자그마치 2조5천억 달러의 천문학적 거금이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이뿐이 아니다. 야쿠자와 유명증권사의 야합 사실 등 한심한 전근대성마저 속속 노출됐다. 설상가상으로 상장조건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수수료 등이 살인적으로 높아 도저히 도쿄 증시에서는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국제금융계의 평소 불만에도 폭팔했다. 그 결과 최근 들어서는 1990년 이후 4년 연속 적자결산을 하고 제 2 위 자리를 다시 런던 증시에게 빼앗기는가 하면, 외국 은행 및 증권사들이 도쿄 증시에서 속속 이탈하는 등 가공할 공동화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 대장성 출신의 오바 도모미쓰 국제금융센터 이사장은 가부토 초공동화의 원흉은 살인적 수수료와 인건비 등 높은 비용, 변칙적 금융기법에 대한 엄격한 행정제재, 높은 세금 등 세 가지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한 예로 도쿄 증시에서 2천만 엔 이상의 소득을 올렸을경우 투자자는 법인세와 소득세, 지방세 등 소득의 총 65p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반면 홍콩에서는 16.5p만 내면 되는 점을 꼽으면서, 이런 제약이 계속된다면 가부토 초는 조만간 흉가가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가부토 초의 이같은 몰락세를 틈타 21세기의 아시아 금융센타가 되기를 희망해온 싱가포르와 홍콩, 상아이 등은 앞다퉈 금융시장을 대폭 개방하면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아시아 금융 파워의 무게 중심이 조만간 '엔화'에서 '중국 원화'로 이동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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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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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만물박사 도우미
"연탄 보일러는 이 연통이 중요해요, 할머니, 잘 묶어 고정 시키지 않으면 낭패보기 십상이라니까요," "그려, 그려, 어서하고 들어와서 이 단감이나 한 조각 드시구랴."
감을 깎던 박숙자 할머니는 비록 한평 반이 채 못 되는 집이지만 '이제야 사람 사는 모양이 갖춰진 것 같다'며 입가에 웃음을 며금는다. 유순녀(50세)씨가 가정도우미로 활동한 지 어느새 2년이 넘어서고 있다. 그간 돌봐 온 독거노인만 해도 스무 명 가까이 되고 친척이 없어 자신이 직접 장례를 치러낸 적도 세 번이나 있다. 그가 날마다 찾아가 돌보는 관내 독거노인은 대부분이 관절염, 신경통, 내과질환 등을 앓고 있는데 이틀에 한 번 꼴로 병원에 모시는 일이 유씨의 주된 임무 중 하나다. 하지만 유씨는 병원에 가는 일 말고도 부피가 큰 빨래를 집에 가져와 하거나 김치를 담가다 주는 일, 집안 청소 등 필요한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한다. 보통 여자들이 할 수 없는 일까지 너끈히 해 내니 할머니, 할어버지들은 유씨를 척척박사, 만물박사로 부른다. 이밖에도 유씨는 할머니에게 뜻밖의 사고가 생길 것을 대비해 집집마다 알림장을 만들었다. 이 알림장에는 할머니의 평소 습관이나 지병, 주의사항이 세세히 적혀 있고 유씨의 연락처를 비롯해 먼 친척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다. 유씨의 마음엔 늘 한 가지 계획이 있다. 바로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니들이 편안히 여생을 즐길 수 있는 다세대 주택을 짓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집을 지어 이들과 함께 사록 싶은데 그러자면 제가 복권에라도 당첨돼야겠지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다 함께 잘 사는 세상, 아프거나 불편한 사람이 없는 좋은 세상을 꿈꾸며 한껏 부풀어 오른다.
행동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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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4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4. 감각경험
일상적인 앎 및 그것을 보다 발전시킨 형태는 경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앎은 감각 경험을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장미꽃입니다." "장미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눈으로 보니까 압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상적인 앎이 대체로 감각을 근거로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일상적인 앎의 문제를 체계화시키면 경험론의 입장에 서게 된다. 앎의 문제에 있어서 경험론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진다. 경험론적인 앎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생리적인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무수한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신경 세포들의 자극과 반응과 의해서 이루어진다. 머리와 등에는 중추 신경이 퍼져 있으며 손과 발 및 피부에는 말초 신경이 뻗어 있다. 예컨대 우리들이 바다를 본다고 하자. 바다로부터 반사되는 광선이 우리들 눈에 부딪쳐 망막에 상이 맺어진다. 수많은 신경 세포들은 화학 물질을 분비하고 이 화학 물질에 의해 미소한 전기 작용이 이루어지면서 신경 세포들의 상호 작용과 결과가 형성된다. 망막에 맺어진 바다의 상은 다시 중추 신경에까지 전달되어 중추 신경에서는 "바다"라는 관념을 산출해낸다. 이 설명은 "바다"라는 관념이 생기는 과정을 행동주의 심리학의 견지에서 분석할 때 성립한다. 결국 행동주의 심리학이 경험론을 근거로 나타나는 것임을 안다면 경험론적인 앎의 문제와 행동주의 심리학의 앎의 문제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대상이 장미꽃이라는 것을 안다. 장미꽃은 관념이다. 그러면 경험론의 입장에선 장미꽃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생긴다고 보는가? 경험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성적인 자아가 불변하게 있다든지 또는 직관적인 자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서 있다. 우선 우리들은 어떤 대상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코로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들으며 혀로 맛본다. 오감이 대상과 가장 가까운 것이며 우리들에게는 매우 직접적이고 생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대상을 무엇이라고 딱 집어서 정의하는 단계는 아니다. 지금 막 한 대상을 보거나 만졌을 때 나타나는 상이 바로 인상이기 때문이다. 애인과 황홀경 속에서 지독한 연애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내가 사랑한다던가 어떤가의 생각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직접적인 사랑의 상황에 처하여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고 느낌이 점차로 약하여지면 나는 "지독하게 열렬히 그 여인을 사랑했었다." 고 확실히 정의를 내리게 된다. 수영할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을 잊고 물 속에서 헤엄칠 때 나는 직접적인 상황에서 생생하게 처하여 있으므로, 내가 수영하고 있다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점차로 나의 행동이 희미해지면 "내가 수영하고 있구나" 또는 "내가 헤엄치고 있었구나"라고 분명하게 정의를 내린다.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아본 다음 사물에 대한 인상이 점점 약해지면 나는 "이것은 장미꽃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때의 사물에 대한 생생한 상을 인상이라고 한다면 인상이 약화되어 일정한 개념이 된 "장미꽃"은 관념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인 앎을 지가이라고 할 때 지각은 인상과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상세하게 경험론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앎의 성립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대상이 내 앞에 있다. 나는 그 대상을 보거나 만진다. 이때 대상에 대한 생생한 인상이 생긴다. 이 인상은 아직 어떤 개념으로 말할 수 없다. 이 인상이 점점 약해지면 그 대상에 대한 개념이 생긴다. 그리하여 결국 "장미꽃"이라고 하는 말은 대상을 규정하는 관념이 된다. 경험론에서는 이성이나 정신을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아도 인정할 수 없다. 기껏 자아라고 한다면 관념을 형성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육체가 바로 자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인간의 기초라는 의미에서만 의미 있으며 이성과 정신을 소유한 주체를 자아라고 한다. 그러면 자유라든가 신이라든가 또는 자아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은 감각 경험에서 생길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설명되는가? 이러한 물음은 당연히 나올 만하다. 그러나 감각 경험에서 생긴 관념을 기반으로 하여 간접적으로 연상 작용에 의해서 자유나 신과 같은 추상 관념이 생긴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얇은 관념으로 나타나며 모든 관념은 일상적인 습관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기에 습관에 따라서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를 가지고 제각기 그것을 크다고 그리고 작다고, 아름답다고 그리고 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론적인 입장에서의 앎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상대적이다. 모든 학문의 지식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앎이 성립하는 확고 부동한 근거도 보장되지 않는다. 감각 경험에 의해서 앎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1물질적인 대상과 물질적인 인간의 인식기능을 주장하므로 세계를 유물론의 차원에서 설명하려 하고 #2수학적 개념이나 야심과 같은 인간 본래의 고유한 산물을 부인함으로 인하여 #3상대적인 앎을 인정하게 되어 #4결국에 가서는 앎의 근거를 습관에 돌림으로써 앎의 보편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려 않을 수 없다. 감각 경험을 근거로 하여 앎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은 우리들에게 앎이 생기는 과정을 치밀하게 제공하여준다. 그러나 처음부터 감각만을 전제로 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감각 경험에 의해서 알게 된다는 순환적인 주장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학문과 예술 및 종교를 추구하는 것 역시감각 경험을 기초로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다른 동물이나 식물, 나아가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돌멩이나 쇳조각과 똑같이 본다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이러한 이야기는 컴퓨터가 극도로 세밀해지면 인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차원에서 과연 컴퓨터의 자유, 컴퓨터의 사랑, 컴퓨터의 고민, 컴퓨터의 양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인간이 컴퓨터로 하여금 인간을 흉내내도록 만든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자기 결단과 자기 반성에 의하여 짝을 찾고 새끼 컴퓨터를 자기 사랑에 의해서 출산할 수 있을 것인가? 경험론은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관찰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앎 역시 기계적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존재자들 가운데서 가장 복잡하며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선과 악이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또한 있음과 없음 그리고 있음의 근원 및 참다운 앎과 거짓이 삶의 중대한문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신의 전체를 통하여 대상을 안다. 감각 경험은 인간이 대상을 아는 데 있어서 한 부분을 구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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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게거품
본뜻 : 게는 갑자기 환경이 바뀌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는 입에서 뽀글뽀글 거품을 뿜어내는 생태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흥분하거나 격렬하게 싸울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바뀐 뜻 : 사람들이 피로하거나 흥분했을 때 나오는 거품 같은 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흔히 쓰기로는 궁지에 몰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행동을 '게거품을 물고 덤벼들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고명딸
본뜻 : 고명은 음식의 모양과 맛을 내기 위해서 음식 위에 뿌리는 양념을 가리키는 말로서, 고명딸이라 함은 아들만 있는 집에 고명처럼 맛을 내주는 딸이라는 뜻이다.
바뀐 뜻 : 아들 많은 집의 외딸을 일컫는 말이다. 반대로 딸 많은 집의 외아들은 고명 아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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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복한 우리가 포로가 되었다
로마인은 그리스인에 비한다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사람들이었다. 티베르강 기슭에 작은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한 로마의 역사는 전쟁을 통한 대외팽창의 역사였다. 따라서 여러 민족을 제압하기 위해서 강력한 군대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한 지역과 이민족을 질서있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법과 탁월한 행정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로마인은 일차적으로는 법과 통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정복자인 로마인도 문화적으로는 그들이 정복한 그리스인에 못미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을 로마제국에 통합시키는 과정은 역으로 그리스 문화권의 확대과정을 의미했다. 로마에 대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 중부지방에서 서서히 커가고 있을 때 남부 이탈리아에는 그리스인 식민시들이 저마다 자치를 누리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 타렌툼, 그리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등이 그것이다. 이들 그리스 식민시들을 통해서 로마는 선진 문화인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기원전 272년에 타렌툼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반도내의 그리스 식민시들이 모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오면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가 로마를 본격적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세기 중반에 그리스의 주요 도시인 마케도니아와 코린트가 로마의 직접지배하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로마는 이제 동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로마의 귀족 지식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로마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로마 신화를 보면 곧 알 수 있다. 로마인들은 올림포스의 12신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름만 로마식으로 붙여 불렀다. 예를 들면 제우스는 유피테르, 헤라는 유노, 아테나는 미네르바 등 로마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인과 희극 작가들도 그리스의 작품을 모델로 작품을 남겼다. 호메로스를 본따서 "연대기"를 남긴 엔니우스는 로마의 팽창을 서사시 형태로 애국적으로 찬양했다.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 역시 그리스 희극작품들을 모방한 작품들을 남겼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호메로스'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는 로마 건국을 테마로 한 서사시 "아에네아스"를 남겼다. 철학에서도 로마인들은 헬레니즘 시대에 발전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을 계승하여 생활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조각이나 건축물에서도 나타났다. 그리스의 조각품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로마의 모조품이 남아 있은 경우도 많다. "정복한 우리가 포로"라는 호라티우스(Horatius, BC 65-8)의 말은 로마인과 그리스 문화의 관계를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할 때에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지배 예속관계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민족의 지배에 시달리는 약소국들의 불행은 주권을 상실한 것 못지않게 민족문화의 말살정책에서 당하는 피해이다. 일제의 지배하에서 우리 민족은 그것을 잘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로마와 그리스의 경우에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으니 "문은 무보다 강하다."는 말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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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
전통주
밀감주
재료 - 밀감 500g, 소주 8 컵
만들기
1. 밀감은 잘 익고 싱싱한 것으로 골라 깨끗이 씻어서 마른 거즈로 물기를 닦는다. 2. 손질한 밀감은 껍질째 옆으로 칼집을 넣어 2-3개 정도로 저며서 깨끗한 병에 담고 소주를 부은 다음 밀봉하여 어둡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둔다. 3. 2개월 정도 지나서 연한 주황색을 띠면 고운 체에 걸러 건더기는 건져 내고 다시 밀봉하여 보관한다.
양주나 다른 과일주, 소다수, 콜라 등에 섞어도 풍미가 있다. 밀감은 비타민 C가 주성분이며 구연산, 과당 등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 므로 밀감주를 마시면 식욕부진, 불면증, 동백경화에 좋다고 한다. 특히 다른 과일주보다 미용효과가 커서 여성들에게도 좋다. 밀감의 원산지는 인도지나로 기주밀감, 은주밀감, 홍밀, 감자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밀감정과, 밀감화채, 밀감차, 밀감주와 같은 후식 류에 많이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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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번역을 마치고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 이것은 중국을 강점한 서구 열강이 쌍하이의 황푸(공원 입구에 써붙인 팻말이었다. 19세기 말에 서구인의 눈에는 중국인이 개와 같은 품격으로 보였던 것이다. 중국인은 왜 이런 능멸을 당했으며, 지금의 중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중국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고 지금도 인적, 물적 교류가 가장 많은 이웃으로 다가서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가 극히 피상적이거나 천박한 지식으로 중국을 보았던 것은 근 100년 간의 단절 후에 갑자기, 그것도 봇물처럼 왕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 주위는 온통 중국 이야기로 넘쳐나고 있다. 이렇게 홍수처럼 밀려 오는 중국 소식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중국을 넘나들며 주워 모은 편린들이 중국의 모든 것으로 오도되기도 하고, 천박한구시대적 지식만으로 양자강을 훌고서 중국을 모두 아는 것처럼 떠벌리고 다녀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졸부들의 무분별한 행각에 의해 왜곡된 중국에 관한 정보는 공해에 가까운 해독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최근 10년 간 벌어진 사건만 보아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중국에 대해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89년 천안문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사태의 추이를 예측하는 각 언론사의 전문가 토론에서 정확한 예측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상황종료 후의 모습도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때 역자의 중국친구는 천안문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우리 중국은,수천만 명의 목숨이 날아가고 다시 수천만 명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모욕을 당하는 것과,우리의 국가(國歌)에도 나오듯이,또다시 더럽고 수치스러운 노예가 되는 것만은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강경진압은 너무나 당연한 처사이고 모든 국민은 이를 차츰 긍정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우리는 그들의 이런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중 수교가 발표되고 대만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내려지던 날, 위로차 대만영사관을 방문한 역자는 장장 5시간의 훈계(?)를 받아야했었다. 견문과 교양이 풍부한 영사는, 이미 무슨 사전통보라도 받았는지 원망이나 서운함은 없는 듯했으나 우리 정부의 관계 인사들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서는 심할 정도로 평가절하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한국인은 중국을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위의 두 가지 경험은 중국을 접할 때마다 현실과 뒤섞여 항상 역자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중국의 실체가 도저히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 출판되어 그야말로 중국대륙을 뒤흔들어 놓았다. 도대체 이 책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기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계속 그 후편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끊임없는 토론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이 책을, 센스가 뛰어난 젊은 작가 몇 사람이 2000년 올림픽 중국유치의 실패와 대만해협의 긴장고조 및 WTO 가입좌절등으로 일고 있는 중국인의 반미감정을 시의적절하게 폭발시켜 돈을 번, 완전히 실업적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라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우 편파적이고 객관성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인이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힐 때는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겨 두고 극히 절제된 표현을 써온 지금까지의 관례로 보면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보기 드물게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감정표현은 오히려 지금 중국 지식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어 여과되지 않은 이들의 생각을 살펴보기에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이 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와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인류의 문명은 발생하였지만 오직 중국문명만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기적을 이루었고, 수천 년 동안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이민족은 끊임없이 한족을 정복하였다. 수없이 반복되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내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었다. 기나긴 중국의 역사 속에 잠재된 이러한 신비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대에서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적은 항상 만리장성을 넘어 왔다. 중국인의 비중국에 대한 관심은 항상 만리장성 너머의 대륙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성을 쌓고 그것을 열심히 지켰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매번 쉽게 무너지고 이민족은 끊임없이 잔혹한 침략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오늘까지 우리 남한의 100배나 되는 영토에 전세계 인구의 22퍼센트를 차지하는 대국으로 건재한다.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가장 오래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나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침략세력을 동화시켜 자타의 구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문화적 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쉬운 예로 만주족이 중국을 점령하고 한족 억압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으나 얼마 가지않아 만주족은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들의 혈통이나 언어, 문자까지도 잃어버렸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도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중국의 역사에는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동화 흡수하는 괴력이 있었고 중국은 이힘에 의해 19세기 초까지는 명실상부한 대국이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중국은 곧 천하였고 천하의 밖은 만리장성 너머였다. 수천 년 간 지속된 중국의 만리장성시대는 19세기 초가 되면서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나버린다. 북방의 만궈장성이 아니라 종래 생각하지도 못했던 남쪽의 바다 건너에서도 해양세력이라는 비중국이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수천 년 간 지켜 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온 세력들은 수만 상자의 아편을 들여와 중국인을 병들게 하였고. 이로부터 나라를 구하자는 각성도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전쟁의 패배는 국토를 할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해양세력 앞에 완전히 무릎을 끓고 말았다. 도자기와 나침반. 화약과 종이와 양잠술을 발명하여 세계에 전파시켰던 중국인은. 이것들을 이용하여 이것들을 탈취하려고 쳐들어온 해양세력 앞에, '중화'였고 '천하'였던 자존심을 뭉개야만 했다. 모든 중국인은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였고 개와 동격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장구한 역사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맥없이 넘어져 버리기에는 무거운 체중이었지만 일어서기도 너무 힘든 무게였다. 그러나 중국은 다시 일어섰다. 그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라는 체제로 일어선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나누어 먹기의 방법에 의해 역사상 처음으로, 적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우리와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근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 자세를 가다듬은 중국은 그들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받았던 수모를 그대로 기억하고 절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사회주의 국가가 모두 붕괴하는 역사식 흐름 속에서도 사회주의를 철저히 고수하며 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시장경제는 필연적으로 다시 미국이나 일본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외국의 등장은 이들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도 한몫 하게 되었다.연 13퍼센트라는 무서운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세계무대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모택동이 주장한 '반제국주의, 반패권주의' 이론에 근거해 중국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천명하며 '중국위협론'이 대두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중국의 등장에 위협을 느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창을 지켜보는 중국의 시선은 또 다르다. 즉 미국이나 일본이 전혀 필요없는 중국 견제를 하기 위해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이며, 이는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미국이나 일본이 여전히 패권주의 국가로 남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증거로 보고 있다. 미국은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한 이상 대만문제는 국내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입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의 인권문제가 중국보다 오히려 심각하면서도 중국의 현실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중국의 인권문제를 따지고 든다. 인권문제는 중국을 제재하는 비장의 카드로 사용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걸고 넘어지는데, 이것은 미국의 아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므로 중국은 이에 대해 전쟁을 불사할 각오로 맞대응을 하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WTO 가입문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적극 도와준다고 해놓고서는 뒤에서 중국의 등을 쳐 협상이 번번이 결렬되고 있으며, 지적재산권협상역시 전혀 이치에 닺지 않는 논리를 내.세워 중국으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양보를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초 아편으로 중국을 파멸시킨 그들이, 이제는 그들의 쓰레기문화를 중국에 들여보내 중국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19세기의 치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중국인의 원초적 본능에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또한 이런 분노에는 충분한 역사적 배경이 있어 보인다. 중국인들이 현실적인 문제나 혹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겉으로는 지나치리만큼 친미성향을 띠고 있어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방향을 바꿔 민족의 입장으로 돌아설 때는 무섭게 등을 돌려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얼핏 보기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에 빠진 듯이 보인다. 영어학습 붐은 전중국을 휩쓸고 있고 10만에 가까운 유학생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도 해외로 유학을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있다. 그러나 이들의 해외진출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민족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우리가 중국인의 모습을, 개인적인 영달만을 추구하여 돈에 집착하고 부의 축적을 위해 해외로 몰려 나가며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몰지각한 군상으로 그리고 있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중국은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양세력이 옛날에 주었던 수모를 다시 주려 한다면 이제는 이에 대해 분명히 'No'라고 외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이 책은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중국 국민이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에 쏟아진 호웅이 증명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전세계를 향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한국전과 월남전애서도 패한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중국 인민군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만약 미국이 대만문제에 개입한다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선전포고문까지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은혜도 모르는 소인배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전의가 가득찬 극히 위험스런 선전포고문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온 고통의 원천을 이해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중국은 평화를 지키고 그 동안 받아온 불공평한 대우를 이제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정당한 논리가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전중국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 과감히 'No'라고 외친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무한한 존경심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r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이라는 책을 저술한다면 그 동안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보여 준 미국이나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적'YES'를 매도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서술하여 온 민족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볼 때 중국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것은 역자만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중국은 싫든 좋든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나라이다. 그리고 중국은 이제 가속도가 붙은 열차처럼 세차게 달려 가고 있다. 온 민족이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얻은 공통의식 속에 흐트러짐 없이 정비된 모습으로 달리고있다. 등소평은 평생 동안 전면에 나서 공식적인 최고의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지만 죽을 때까지 실권을 쥐지 않은 최고 실력자로 추앙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범을 보이며 중국인을 감동시키고 떠나갔다. 그가 양성한 인재들은 중국이라는 무거운 열차를 끌고 가기에 충분한 기관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에 국민적인 호응이있는 것은 이 열차의 질주가 결코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이 이러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들이 'No'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도 과연 우리 민족을 위해 과감한 'No'를 외칠 수 있을 것이며, 이들과 같은 과감한 'No'가 우리 민족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는, 이들의 외침에서 중국의 실상을 똑바로 보고 감상적 중국관이나 소인배적 우월감 내지는 졸부근성의 교만을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번역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외국 인명이나 지명에 원어가 표기되지 않아 정확한 원명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던 점이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나 서술에 대해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문맥사이에 자연스럽게 설명을 넣어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였다. 다소 중복된 부분은 삭제하였으며 원서의 뒤에 붙은 부록은 제외시켰다. 과감히 이 책의 출간을 결정한 동방미디어에 심심한 감사를 표하며 행여나 오역이 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3월
저자 및 역자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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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지도자의 자질이 미래를 열고
* 대개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전 시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자취를 살펴보려면 오로지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여야 한다. (세종대왕)
성군 세종
세종대왕 중기에 윤회, 신장, 남수문, 등 당대의 주호들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학덕과 문명을 떨치던 집현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모여 앉으면서 누구라 할 것 없이 두주를 불사하였는데, 이 시 와 경서를 입에 담으면 해가 지는 것을 몰랐고, 재담을 시작하면 낮밤이 바뀌는 줄을 몰랐다 하여 당대의 사람들은 이들을 3주호라고 불렀다. 세종대왕은 이들을 한자리에 부르고 술 때문에 일찍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니, 과음을 삼가기를 간곡히 타이르고 특히 윤회와 신장에게는 한자리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후 윤회와 신장은 세종대왕의 하교를 받들어 어떠한 경우에도 세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으나, 아주 큰 그릇으로 세 잔을 마셨던 탓에 주량은 오히려 전보다 늘어난 셈이었다. 세종대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술을 덜 마시게 한 것이 술을 더 마시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신장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정승 허조는 '술이 신장을 망쳤도다!'라고 한탄하였고, 얼마 뒤 남수문마저도 세상을 버리자, 성군 세종대왕은 술의 해독을 명료하게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계의 윤음을 내리기도 하였다.
술의 해독은 매우 크다.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사람의 위엄과 품위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 봉양하는 일마저 저버리게 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니 그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안을 망치게 만들며, 그 해독이 작으면 성품을 거칠게 하고 생명을 잃게 만든다. 술이 강상을 더럽히고 문란하게 만들어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이루 다 일일이 그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세종대왕의 치세가 가장 훌륭했던 태평성대로 평가되는 것은 정법과 조화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였던 그분의 정치철학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무를 살핌에 있어서 상경(사람이 지켜야 할 변치 않는 법도)과 권도(왕명으로 임기웅변에 응하는 것)를 존중하면 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특히 몸소 정법을 실행해 보이는 것으로 신료들로 하여금 귀감을 삼게 하였다. 그 한 예로 대궐 안에 초가집을 지어 놓고 몸소 거기서 기거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초를 체험하기까지 하였다.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 둔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초도 쓰지 않고 띠로 덮게 하였으니 장식은 모두 친히 명령하여 힘써 검소하게 하였다. 임금은 이때에 와서 정전에 들지 않고 이 별실에서 기거하였다.
세종의 지행함이 여기에 이르자 신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승과 판서들은 연일 지존이 기거하는 초가마당에 꿇어앉아 대전으로 들 것을 간청하였고, 소헌왕후 또한 눈물로 호소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세종장헌대헌왕실록"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성군됨을 끊임없이 확인할 수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갖가지 병마에 시달리면서 다른 왕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초인간적인 업적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이다. 세종대왕은 곁에 앉은 사람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의 만성적인 안질에 시달려야 했고, 옆구리에 난 창과 풍질 때문에 같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으며, 각기가 심하여 보행조차도 자유롭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조갈증(지금의 당뇨병)까지 겹쳐 있었다면 이만저만 병고가 아니었다. 세종대왕은 그런 엄청난 곤경을 헤쳐 나가면서 수많은 과학기기를 발명. 제작하게 하였고, 오늘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정음(한글)까지 창제하였다. 왕실과 조정은 세종대왕의 환후를 염려하여 검은 염소를 다려서 드실 것을 지성으로 청하였으나, 대왕은 검은 염소가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귀한 짐승이라 약으로 써서 멸종케 할 수 없다면서 완곡히 사양하였다. 실로 하늘이 내린 성군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성군 세종대왕이 소망하였던 가장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것일까. "용비어천가"의 첫 대목에 그의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도 좋고 열매도 많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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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넥타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신사의 옷차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그러나 본래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으로 불어로는 크라바트(cravat)라고 한다. 이는 크로아티아인이 와전된 것이라는데 다음과 같은 삽화가 전해지고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일인데, 왕은 베르사이유로 도읍을 옮긴 다음 밤마다 호화로운 사교 파티를 개최하여 국내의 귀족 귀부인 상류계급은 물론 외국의 사신들도 초대했다. 하루는 몇몇 크로아티아인이 목에 가느다란 천을 감고 파티에 참석하게 됐는데, 왕은 그것을 보고 옆에 있는 신하에게 "저건 뭐냐"하고 물었다. 신하는 사람을 두고 묻는 말인줄 알고 "크로아티아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아무튼 왕은 그 가느다란 천이 마음에 들어 다음날부터 자기도 그와 같은 천을 목에 감고 사교계에 나타났다는 것.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흉내를 내어서 목에 천을 둘렀으며 그 후로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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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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