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13 호
단기 4340. 1. 21 (음력 12.03)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 인포메일 제한 용량은 64Kbyte 입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발행지의 하단부분이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경우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발행지원본보기]
|
|
편지 |
|
|
문학소식 |
『시와창작』신인작품상 원고 모집
격월간『詩와 창작』에서는 제 15회 (통권15호 ㅡ 1~2월호) 신인 문학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참신하고 역량 있는 신인 작가지망생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 모집 부문 ◎ 시. 시 조 : 각 5 편 이상 ◎ 소 설 : 200자 원고지 80매 이상 ◎ 수 필 :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2편 ◎ 시 평론 : 200자 원고지 20매-50매 2편 ◎ 아동문학 : 동 시 : 5편 이상 동 화 : 200자 원고지 30장 내외
♠ 규정 ◎ 응모작은 미발표 창작품이어야 함. ◎ 신인상은 詩와 창작에서 장르별로 위촉하는 심사위원들의 엄밀한 토론과 검토를거쳐 심사함 ◎ 당선한 작가는 1회의 당선으로 기성문인의 대우하며 작품활동을 적극 지원함 ◎ 모집기간: 1월 31일에 마감하여 심사함 ◎ 당선작 발표 : 당선자에게 개별 통지하며 작품은 시와창작 및 홈페이지에 발표함 ◎ 응모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보내실 곳 ◎ 152 - 838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5동 28 - 24호 책나무 출판사 『詩와 창작』편집부 문의처 : Tel. (02)835-8255
♠ 응모 요령 ◎ 응모 작품 끝에는 주소·생년월일·전화번호·본명과 간단한 약력을 적어 4용지 또는 원고지에 정서하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겉봉에는 『○○부문 응모작품』이라 명기해 주십시오.) ◎ E-mail로 원고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첨부파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mail 접수: poet22c@naver.com 152 - 838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5동 28 - 24호 ☎ (02) 835- 8255 <문화 마 02856>
종합 문예지 격월간 詩와 창작
|
|
|
글터 → 명언 / 격언 |
낮에는 너무 바빠 근심이 없고, 밤에는 너무 졸려걱정할 겨를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 L.A.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章 (노자 - 도덕경 : 제2장) |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侍, 攻成而不居, 夫惟不居, 是以不去.
천하개지미지위미 소악이 개지선지위선 소부선이 고유무상생 난역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이장
직역
하늘 아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까닭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못생긴 것이다. 모두 착함의 착한 까닭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 주고, 길고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소리는 서로 조화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래서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한다.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을 만들면서도 잔소리하지 않고,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으려 하고, 하면서도 기대하지 않는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 공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아, 머무르지 아니하는 것이 가지 않는 것이다.
해석
아름다움은 절대적인가. 나와 네가 느끼는 미의 기준이 같은가. 책을 덮고 잠시 고민하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시대 의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시대 의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개체에 있어서도 미의 의식은 바뀐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것은 개성이 말살된 것이다. 그리고 변화 의지가 박탈당한 것이다. 고정되어 있는 미는 죽은 것이다. 곧 썩어 갈 것이다. 미녀를 본적이 있는가. 그 미녀가 고정되어 있는가. 변한다. 사람(미인) 자체가 변하고, 나의 의식이 변한다. 그리고 나와 남의 미적 기준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을 아름답다고 하면, 그들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변화하고 싶어도 변화하지 못한다. 자유의 박탈인 것이다. 변화가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미를 미로 느끼면 그것은 이미 추악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노자는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아는 것에 반대를 한다. 착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난 체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절대적으로 착하다고 규정 짖는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위 -이를테면 노인의 짐을 들어 드리는 행동- 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가치의 절대화에 반대한다. 충이 최고의 善인적도 있었다. 임금을 위하여 전장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들, 그들은 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 가치가 절대화되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된다면 그것은 매우 추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된다.
길다는 것은 짧음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길다는 것이다. '길다'라는 자체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과 쉬움도, 높고 낮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하는 것이다.
함이 없는(無爲)의 의미는 매우 반어적이다. 爲라는 것은 행위 의지를 가리킨다. 즉 이미 출발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사람을 그것에 맞추어 나가려고 한다. 이것에는 강제가 따른다. 위는 욕망을 가지고 하는 일이다. 무위라는 것은 집착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로 남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노자는 남을 가르치는 것도 반대를 한다. 말없이 행하는데 다른 사람이 본받을 만하면 그 사람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면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천하에 내것이 있는가.
공치사가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공치사라고 한다. 일 자체가 좋아서 일을 하여야 한다. 남의 보답을 바라고 자신이 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한 것이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것에 머무르지 마라. 머무르게 된다면 자신은 그것에 안주하게 된다. 발전이 없게 된다. 그때 나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새로운 공적을 쌓을 수 없을때 과거의 공적을 내세우게 된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2.
이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것은 추악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착한 것을 착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착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생성케 하며,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모습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가지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과 성은 서로의 존재로써 화음을 이루고 전과 후는 앞이 있으므로 뒤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의도적인 행위 없이 일을 처리하며 무언의 가르침을 베푼다. 만물의 활동을 위하여 그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만물을 육성시키면서도 소유물로 삼지는 않는다. 일을 하고도 뽐내지 않고 공을 세우더라도 자신의 공로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공로라고 자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은 항상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주
이: ~ 할 따름이다, ~일 뿐이다. 음성: 음은 악기의 소리, 성은 육성을 의미함. 불거: 자부, 자만, 자처하지 않는다는 뜻. 불은 부의 차자임. 시이불거: 그 공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뜻임. 거는 없앤다, 내쫓다, 가게 한다, 떠난다의 의미.
해
도의 작용에 의해 유출된 현상의 세계는 일시적이요, 상대적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흔히 현상 세계의 일시적, 상대적 가치판단에 현혹되어 대립과 분쟁을 일삼고 있다. 도의 차원에는 보면 이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변화하는 현상의 근원에 도가 있다. 그 도는 만물을 생성케 하고도 그것을 소유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공을 이루고도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히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인은 무위자연의 도에 의하여 다스림을 베풀고 말없는 가르침으로 모든 일을 지도한다.
'하지 않으면서도 아니하는 일 없다'는 노자의 역설적 표현은 자연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일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도 무위자연의 도가 지니고 있는 공효를 일깨워 주고 있다.
|
|
|
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18 국제신용 심판관: 무디스 투자서비스
미국의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사 소속인 무디스 투자서비스Mody's Investors Services는 외형상 일개 신용평가기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각국 정부 및 기업이 그 어떤 정치권력이나 군사력보다 무디스가 수시로 발표하는 성적표를 가장 두려워할 정도로, 무디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다. 오늘날 무디스를 세계최대 신용기관으로 우뚝 서게 만든 가장 큰 강점은 CIA나 KGB를 능가하는 세계최고의 정보 수집력이다. 전세계 곳곳에 심어놓은 비밀 네트워크를 통해 각종 기밀을 수집하는 무디스의 정보 파악력은 '국제금융계의 최대 기밀'로 일컬어지는 스위스은행들의 준비금 실태까지 정확히 파악해 해마다 이들에 대한 신용평가 점수를 매기고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세계적 권위의 무디스로부터 낮은 신용평가를 받은 기업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끌어다 쓸 때 우수기업보다 높은 추가금리를 부담해야 하는 치명적 불이익을 받는다. 한 예로 한국의 경우, 정치권력과재계의 불협화음이 극에 달했던 1992년, 1993년에 한국 기업의 안정성에 대한 무디스의 낮은 신용평가로 해당 대기업뿐 아니라 모든 한국기업들이 국제금융조달시 특별고금리 따위의 커다란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이에 전세계 기업들은 무디스로부터 높은 평점을 받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맹렬한 로비를 펼치고 있다. 무디스는 단지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뿐 아니라, 매년 11월 초 발표하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각국의 정세와 경제상황 등을 종합해 국가신용등급을 매기기도 한다. 이런 국가신용등급은 곧바로 국제금융계에서 차관 도입조건 또는 도입금리를 결정짓는 주요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무디스는 1994년 연례보고서에서 한국과 관련해 한국은 탁월한 경제성장으로 지난 1990년 4월 획득한 장기부채신용등급 A1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나,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이에 따른 한국으로서의 급속한 통합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디스는 이어 한국은 숙련된 노동력과 높은 저축률 등으로 세계 주요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한국의 평균임금이 계속 오르고 있는 만큼 한국은 이제 국제무대에서 가격보다 첨단기술로 경쟁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무디스에 필적하는 국제적 신용평가기관으로는 미국 언론그룹 맥그로힐사가 취재 과정에 취득한 막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경영하고 있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 S & P가 있을 정도이다.
|
|
|
글터 → 삶속의 글
|
어느 봄날의 기억
그해 뉴욕시의 겨울은 4월이 돼도 추위가 누그러들 줄 몰랐다. 혼자 사는 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인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냈다. 마침내 추위가 가시고 봄이 성큼 다가온 어느날. 나는 지팡이를 들고 산책을 나왔다.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이 한없이 따사로웠다. 조용히 길을 걷고 있는데 이웃사람이 날 불렀다. 그는 내가 가는 곳까지 차로 태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걸었다. 모퉁이에 도착하자 습관대로 걸음을 멈췄다. 파란신호등이 들어올때 사람들과 같이 길을 건너기 위해서였다. 차 소리가 멈춘지 꽤 오래됐는데도 주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봄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강하면서도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쾌활한 분이신 것 같군요. 제가 함께 길을 건너도 될까요?"
그의 정중한 물음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내팔을 가볍게 잡았다. 우리는 함께 천천히 길을 건너면서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씨를 즐길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는 얘기도 했다. 길을 거의 다 건넜을 때쯤 자동차 경적이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분명 신호가 바뀐 모양이었다. 우리는 간신히 길을 건널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쪽으로 돌아서서 감사 인사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실 겁니다. 저 같은 장님을 도와 길을 건너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봄날의 기억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작은 기적들> 中
|
|
|
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3장 논리적인 생각은 왜 필요한가
요한 복음 첫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이 있다. 말씀(로고스)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뜻은 원리, 법칙, 말 등이다. 우리들은 로고스를 논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말이나 글에는 반드시 논리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은행원으로서 20년간 근무했으며 매달 평균으로 치면 70만원의 월급을 받은 셈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월급을 저축한 돈을 50억원 가지고 있다"고 말하거나 또는 어떤 사람이 "나는 공무원으로서 30년간 근무했는데 매달 받은 원급을 평균으로 계산하면 80만원이고 월급을 저축해서 지급 내게 있는 돈이 1백원이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들은 그러한 말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면 누구나 먹고 쓰는데 상당액을 지출하고 나머지를 저축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저축했을 경우의 액수란 그처럼 많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생각을 다루는 학문을 논리학이라고 한다. 논리적 사고는 이론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의 형식을 문제로 삼는다. 더 나아가서 논리학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과 글이라는 사고의 형식과 법칙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므로 아직 언어로 나타나지 않는 느낌이나 직관은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떤 청년이 자신의 경제적인 장래에 대하여 불안하게 느낀다든가 또는 어떤 소녀가 한 청년을 믿음직스러운 인간이라고 직관할 때 그것은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논리적인 생각은 결국 대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더우기 학문들에 있어서 공통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 사고에 관한 체계적인 학문을 일컬어 논리학이라고 한다. 우리가 논리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논리적인 생각을 필요로하는 이유와 유사하므로 근본적으로 말과 글에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기 위하여 논리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학이 모든 생각을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인 생각이란 추리적인 생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추리이다. 논리학의 대상은 논리적 추리이다.
"대추 나무는 단단하다. 이 나무는 대추나무이다. 그러므로 이 나무도 단단하다." 위의 추리에서 논리학은 추리의 정확성을 취급한다. 논리학은 추리의 심리적 과정 또는 절차를 문제로삼지 않는다. 즉 논리학은 우리가 대추 나무를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서 그 자극이 뇌에 어떻게 전해져서 "대추 나무"와 "단단하다"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는 심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정해져 있는 명제의 논리적 추리에 관한 정확성을 문제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가 논리학에 있어서 주의하여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논리학의 대상이란 의미있는 문장이라는 점이다. "아!", "빌어먹을!", "아이고!"등과 같이 느낌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라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처럼 간단한 문장이나 또는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문장과 문장으로 이루어진 명제가 바로 논리적 추리를 구성한다. "부산행 첫 고속버스는 아침 6시에 터미널에서 출발한다. 만일 네가 아침 6시 이전에 터미날에 도착한다면 너는 부산행 첫 고속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12시에 워커힐 커피숍에서 너를 기다리게 한다고 말했다. 제 때 그곳에 가면 너는 그 여자를 만날 것이다."...여기에서 두 가지 간단한 논리적 추리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들이 일상 생활과 학문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은 논리적 추리를 포함하는 명제들로 구성된다. 어떤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낼 경우 그러한 행위를 논리적 추리라고 하며, 옳게 결론이 이끌어졌을 때 논리적으로 정당한 추리라고 하고 옳지 않게 결론이 이끌어졌을 때 논리적으로 정당한 추리라고 하고 옳지 않게 결론이 이끌어졌을 때 부당한 논리적 추리라고 말한다. 논리학에서 다루는 문장은 논리적 문장으로서 그것은 서술적 문장이다. 서술적 문장에서 우리는 그 문장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으므로 이러한 문장을 논리적 문장 또는 서술적 문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술적 문장은 일정한 주장이 있음에 비하여 아무런 주장이 없는 문장도 있으니 의문문과 명령문 및 감탄문이 여기에 해당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의 의문문에서 우리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의문문은 논리적 문장이 아니다. "철학 공부를 열심히 하여라", "오직 돈을 위해서 돈을 벌어라" 등과 같은 명령문에서도 역시 우리는 아무런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 명령문 또한 논리적 문장이 아니다. 명령문도 무엇이 어떻다고 하는 뚜렷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저 여인은 그지없이 아름답구나!", "아, 조국의 운명이여!" 등과 같은 감탄문도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다. 우리들은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을 명제 또는 언명이라고 한다. 논리적 추리는 명제나 언명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제 추리와 추론은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논리적 생각의 절차를 추리라고 한다. 추리가 일단 형식적인 언어로 표현될 때 그것이 바로 추론이다. 예컨대 우리들이 유능한 유도 선수를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는 지난 3년간 여러 국제 대회에서 다른 나라의 모든 우수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한 한 선수이다. 우리들은 이 선수가 장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절차는 추리이다. 그러나 어떤 한 주장이 다른 또 하나의 주장의 근거가 될 경우 그것을 형식화하면 추론이 된다. 그러므로 추론은 두 가지 이상의 명제로 구성된다.
예) 하군은 지난 3년간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였다(전제). 그러므로 하군은 앞으로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다(결론).
추론은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지며 전제는 여러 가지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에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나는 사람이다"는 전제이고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는 결론이다. 특히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라고 하며 "나는 사람이다"를 소전제라고 부른다. 결국 추론이란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 증명의 형식을 취한다. 그러한 증명이 옳게 되었는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이 바로 논리학의 과제이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얼우-'+'는'(성교하다) --> '얼운'...'어른'은 혼인한 사람
'어른', '어린이'라고 해서 '어른'을 '성인'으로 이해하고 있지요? 그런데, 원래 '어른'은 15세기국어(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국어)로는 '얼운'입니다. 이것은 '얼우다'의 어간 '얼우-'에 명사형 접미사 '는'성교하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얼운'은 '혼인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국어의 '어른'은 '혼인한 사람'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라는 말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처음 만든 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이미 옛 문헌에 '어린이와 늙은이'라고 많이 등장합니다. 단지 '어린이'라는 잡지를 처음 만들었을 뿐이지요. '어린이'는 '어린 사람' 즉,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훈민정음에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 - -'라고 쓰이고 있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2.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서양문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그는 어떤 저작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플라톤과 크세노폰 등 그의 제자들의 작품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철학자이기에 앞서 아테네의 한 시민이었다. 아테네는 자신이 그 안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받은 곳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와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는 세 번이나 출전하여 그 용기를 칭송받았다. 그의 애국심이 가장 잘 나타난 말은 바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페르시아전쟁이 끝나 아테네가 막 웅비하려던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시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활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고 늘 사색에 몰두하였다. 그가 가족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내 크산티페로부터 갖은 구박을 다 받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아고라 광장이나 경기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진리에 관해서 가르쳤기 때문에 당시에는 소피스트의 한 사람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소피스트가 아니었다. 소피스트들처럼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치 혹은 사회생활에 성공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말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신적인 것, 그의 내면의 요구를 중시했다.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지 금전이나 지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신을 높이고 덕을 닦는 것이 결국 행복이며 유용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유별난 것이었다. 지식은 각 사람의 내면에 내재해 있어서 누구든지 이를 끌어내면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문답식의 교육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법을 학생들뿐 아니라 논쟁의 상대역들에게까지 사용해 많은 자칭 전문가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말할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자주 적들을 만들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성을 끌어들임으로써 청년들을 타락시켰다. 죄상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멜레토스라는 시민에 의해 고발당했다. 그러나 멜레토스의 배후에는 소크라테스를 없애려는 한 유력자가 있었다. 이때는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끝나고 막 민주정치가 부활하려던 시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때 직업적인 변호인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스스로 배심원들 앞에서 변론했다. 그는 자기야말로 참으로 아테네 청년들을 교육하는 아테네의 양심이라는 것을 진술하고 폴리스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비난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281대 220으로 유죄를 확정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형 대신 형량을 가벼운 것으로 부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벌금형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 제의를 거부했다. 결국 처벌방법을 결정하는 두번째 재판은 첫 번째보다 찬성표가 더 많이 나와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이 결정되었어도 망명할 생각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도망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1개월 남짓한 감옥생활을 후 그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아테네 국가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를 사형으로 몰고간 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3백인 참주정치의 압제를 경험한 이래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치가 부활하고 있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최고정무관인 집정관을 추첨에 의해 선정하는 제도는 무능한 인물을 당선시킬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었다. 게다가 그는 아테네에 해악을 끼친 알키비아데스,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크리티아스, 아테네를 떠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로 망명했던 크세노폰 등 수많은 위험 인물들과 가까이 지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중에게 반민중적, 반민주적 인사였다. 따라서 민주정치가 부활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존재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불경죄로 고소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정치재판이었다. 아테네를 위해서 민중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친 애국자 소크라테스는 조국이 결정한 사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죽음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아테네의 시민으로 남았다. 민주정치를 꽃피웠던 조국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에게 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헤어질 때가 왔노라. 서로가 각자의 길을 가는 거다. 나는 죽음으로, 그대들은 삶으로, 어느 쪽이 나은가는 신만이 아노라."
과연 어느 편이 아테네를 참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
|
|
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67. 오키나와는 독립 왕국이었다.
일본은 근대 국가로 변신한 이래 영토 팽창에 대한 욕구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욕구는 지금도 북방 4개 섬으로 러시아와, 독도로 한국과 분쟁을 낳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으로 남한지역을 그들의 옛땅으로 여기는 생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이 같은 일본인의 영토 욕심에 최초로 희생된 것은 지금은 누구나 일본의 영토임을 의심하지 않는 일본 남부 해상의 군도 오키나와이다. 극동 최대의 미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 불과 100여 년 전인 명치유신 무렵까지는 류큐라는 독립 왕국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의 역사는 미국이 군정을 실시했던 기간 27년을 빼고 나면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기간이다. 류큐 왕국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372년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의 요청에 응해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류큐 왕국은 3개의 정권으로 분열되어 존재하다가 1429년에는 통일 정권이 수립되고 16세기에는 동지나해 일대에 광범한 무역 영역을 갖는 류큐 왕국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 왕국의 주요 무역대상국은 조공 무역을 하는 중국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는 171회를 넘어 2위인 베트남(89회), 10위 조선(30회), 13위 일본(19회)을 훨씬 웃돌고 있다. 당시 명나라는 중국 상인의 해외진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류큐 상인은 유리한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조선과 일본에까지 진출했다. 우리 나라의 부산은 이들의 중요한 무역대장지였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인은 태국에서 동포의 시체를 버리지 않고 소금에 절여 고국으로 데리고 가려는 류큐인을 보고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고 노예매매를 하지 않는다. 전 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동포를 파는 짓은 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번성하던 류큐 왕국은 1609년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는다. 당시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와의 무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류큐를 중개지로 하여 명과의 무역을 재개하려는 속셈으로 사쓰마번의 군사 행동을 방관했다. 1615년 사쓰마의 류큐 침략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진족인 후금에 압박당하고 있던 명나라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후 이를 묵인하게 된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가 등장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청나라는 류큐에 표류민의 송환을 명령한다. 이는 `표류민은 반드시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귀국시킨다`는 막부의 법령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큐 왕은 청의 명령을 따르고 “만약 나가사키에 표류민을 보내면 류큐가 일본에 복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게 된다”며 일본측을 달랬다. 이 같은 이중 조공외교로 류큐는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1872년 일본의 명치 신정부는 류큐 왕국을 일개 번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어 1879년에는 류큐 왕 상소를 강제로 도쿄로 끌어오고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만들어 버렸다. 왕국에서 번으로, 이제는 중앙 정부의 지방 행정구역에 불과한 현으로 전락하여 한때는 동아시아를 주름 잡던 무역왕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본에 편입된 류큐, 즉 오키나와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2차대전이 종국으로 치달을 무렵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해 오키나와에 상륙을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남녀노소 17만 명의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이어 1945년 4월부터 니미츠(C.W. Nimitz)포고에 의하여 미군정이 시작되고 거대한 미공군기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일본 패망 후 1952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도 오키나와는 계속 미국의 영토로 되어 있어 그 후 미일 양국의 현안 문제로 존재해 왔다.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 귀속된 것은 1972년 일이다. 당시 닉슨 미국대통령은 미국의 국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맹국들의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오키나와 반환 교섭이 급진전됐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과 일부 야당은 반환과 함께 미군기지 철폐 또는 축소, 특히 핵기지의 완전 철폐를 요구하여 미국과 일본 양쪽 정부와 충돌했다. 이 때 오키나와내에는 일본과 단절하려는 오키나와독립론이 일어나 신문에는 `류큐 민족의 독립을 절규한다`는 기사가 살리기도 했고 류큐 독립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일본 자민당과 사토 내각은 이들의 주장을 묵살한 채 국회에서 비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1972년 5월 비운의 땅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
글터 → 사회/문화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캄캄한 서양 반짝이는 동양
1. 중국이 NO 라고 한들 어쩌겠는가
'지금은 사람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대이다.' 미국이 독립전쟁중이던 1776년,혁명가인 토마스 은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2백20년이 흐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영혼의 시험에 직면해 있는 시대다. 20세기는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고 새로운 21세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소련과 동구의 거대한 변화는 미국으로 하여금 총 한 발 쏘지 않고 공산주의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믿게 하였다. 미국은 스스로 냉전의 종식자라고 여기고 있으며 또 곧 '영광과 몽상'이라는 도취에 빠져 버렸다. 마침내 미국은 오천 년에 빛나는 문화를 가진 태평양 건너 동방의 거대한 민족이 아직도 공산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은 당연히 중국의 번영을 기원할 생각이 없다. 중국의 경제가 신속히 일어선 것이 미국으로서는 '신화'이다. 미국은 신화를 만들기 좋아하지만 믿지는 않는 나라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미국은. 자기들의 역사가 짧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이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물에 대한 오해는 반드시 판단의 신빙성을 떨어트린다. 미국에게 논리학 강의를 해 주는것은 필자의 능력 밖이다. 설사 논리학자를 초빙한다고 해도 미국에 대해서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미국은 대략 두 가지의 자기 논리를 가지고 있다. 첫째, 미국의 가치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나라에 대해서 간섭한다. '미국의 권익 보호'라는 미명 아래서다.둘째, 미국이 중요시하지 않는 나라는 억압한다. 이는 '지역 균형유지'라는 말로 미화하고 있다. 미국은 스스로 '자유민주국가'를 표방함으로써 자기의 논리를 합리화시키고 있는데, 공리를 따라 추론해 가다보면 그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게된다. 미국 내에서라면 미국이 자기의 논리로 쇼를 하든 마술을 부리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만일 중국인들 앞에서라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중국에 대해 패권주의, 인권주의, 강권정치, 경제제재 등의 수단을 부리고 중국을 제재하려는 무대효과까지 노리려 한다면 미국은 스스로 상상했던 갈채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식상했다.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야유뿐일 것이다. 모든 것을 짓밟아 넘어뜨리는 야유 중에 더욱 짧고도 힘있는 소리가 있다.그것이 바로 'No!'이다. 'No'를 나타내는 한자는 '不[뿌]' 인데, 형태상으로는 화살촉 위에 직선을 그은 모양이다. 이 글자의 음은 폭발하듯이 강력한 발음인 꽈열음 '뿌'이다. 이 음을 발음하기 위해서는 침묵할 때처럼 입술을 오므려야 한다. 중국의 민족혼인 루신은 일찍이, 침묵 속에서 폭발해 버리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不'자는 일단 그 형태가 화살이 어두운 밤의 지평선을 꿰뚫는 것 같아서, 지나친 능멸과 속임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격정과 불만을 나타낸다. 중국어 'No'라고 말한 것은 아편전쟁 때부터였으나, 이제야 쉽게 여길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은 'No'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몽둥이로 맞아도 말 못한다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한 번 더 몽등이 세례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강권과 불의의 세력에게 머리를 숙이는 꼴이 될 것이다. 정말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정의와 공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나중엔 말해 봐야 전혀 의의가 없다.
중국이 'No'라고 한들 어쩌겠는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트 회원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세계 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담판석상에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마이크에서 각종 정치경제 논단에서, 신화사 텔렉스에서 중국은 'No'라고 외쳤고 또 그 정당한 이유를 내놓았다. 앞으로는 더 많은 중국인들이 참고 참았던 'No'라는 말을 통쾌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본다. 정의는 반드시 지지를 얻을 것이며 영원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국제관계 속에서 모든 나라는 평등하다. 각 민족에게는 대대로 형성되어온 문화배경, 가치관, 도덕기준과 생존 및 발전의 노정이 있다. 강대국 아니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나라의 생활방식이나 이데올로기를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더욱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능멸하거나, 다른 나라를 희생시킴으로써 자기 나라의 이익을 얻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냉전의 종식이 곧바로 패권주의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패권주의는 더욱 제 욕심을 채웠다. 미국은 여전히 냉전의 나날들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이미 지나간 시대의 환영을 만들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필름 위에 이야기를 꾸며 담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실세계의 사실을 영화처럼 적당히 꾸며 댈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미국은 가상세계를 좋아하는 나라이다. 이에 너무나 몰입하게 되면 스스로의 허구에 빠지거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우롱당하게 된다. 매카시즘시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예이다. 미국이 비록 유일한 초강대국이긴 하지만, 아직 모든 국제적 사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말한 '민족 발전의 두 가지 추세는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면, 먼저 민족의 생활과 민족 운동에 대해 깨닫고 민족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여 민족 국가를 건립한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각 민족의 상호교류가 더욱 증대되어 민족 간의 틈이 좁혀지면 자본, 일반 경제생활, 정치, 과학 등등의 국제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두 번째이다. 미국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가 날로 다각화되어 가고 있는 요즘, 미국이 'No'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시 눈을 몇 번 더 비벼야 할 것이다. 미국은 '인권외교' 대표를 파견할 때, 그들의 가방에 책 두 권을 꼭 넣어주어야 할 것이다. 한 권은 [세계식민사]요, 다른 한 권은 [중국근대사]이다. 중국에 관한 책은 필요하다면 우리가 공짜로 보내 줄 수도 있다. 그들은 미국을 대표해서 이 책들을 반드시 진지하게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몇몇 사료 (정도는 외워두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옛 말에 ' 역사를 읽으면 환히 보인다'는 말이 있다. 미국은 역사를 많이 읽어야 한다. 외교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길일 것이다. 미국대표는 출발하기 전에 국무성 펜타곤 빌딩의 컴퓨터에서 2차대전 이후, 줄인다 해도 냉전 후부터 지금까지의 무기거래 현황과 판매 추세에 관한 서류를 한 부 복사해야 한다 . 이쯤에서는 아직 출발할 수 없다. 더 해야 할 것이 있다. 미국대표는 내친 김에 미군의 국외 분포 현황도 알아야 한다. 만일 펜타곤 빌딩이 자료 제공의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면, 공교롭게도 여기에 프랑스 통신사(AFP) 기자가 워싱턴에서 보낸 전문이 있으니.다음 내용을 참고로 제공할 수 있다. 펜타곤 빌딩의 최신(1995년 9월 30일 마감) 통계 숫자에 근거하면,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11만 8천1백60명인데 그 중 독일에 7만 3천2백80명이 주둔하고 있고 영국과 이태리에 각각 1만 2천 명이 주둔하고 있다. 아시아주에는 8만 9천 명이 주둔하고 있는데 그 중 일본에 3만 9천1백 명, 한국에 3만 6천 명이 있다. 그 외 1만 3천2백 명은 아시아 해역에 주둔하고 있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9천2백50명이 있는데 그 중에 4천 명은 해상에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구에 3천4백 명이 있는데 그 중 2천7백30명이 해상에 있다. 미국무성의 다른 통계 숫자에 의하면. 미국에는 서반구의 해외 주둔군이 1만 7천1백30명 있는데 그 중 쿠바 관타나모에 5천1백29명이 있고 파나마에 7천7백 명이 있다. 이 정도에서 미국대표는 공항에 나가도 좋다. 이러한 자료가 있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혹은 잠자기 전에 더이상 심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대표가 이것을 진지하게 읽고 생각했다면 틀림없이 진정제를 먹어야 불면증이나 실어증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 대표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인권외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지 걱정할 것이다. 단지 미국을 대표해서 각지에 말을 전하거나 훈시하려 가는 것이라면 이는 헛수고에 그칠 것이다. '인권의 외교'를 그런 식으로 한다면 사람들은 더더욱 위선적인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위선자를 상대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까발려 실체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은 늘 자기 나라를 천당에 비유하며 그곳에는 민주라는 의자가 있을 뿐 아니라 자유의 가락이 있고 또다른 감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꾸며 대길 좋아한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내정을 지탄하거나 간섭하려고 할 때마다 몇 가지를 골라내어 모범 답안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정말 애석한 것은 미국의 천당은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것이다. 미국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국제 헌병 방망이 하나뿐이다. 누군가가 미국을 좀 설득해야 한다. 만약 모조리 똑같은 생각에 물들어 있다면 설득한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상황은 더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위선자더러 자신이 위선자임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미국의 편집증과 교만은 이제 거두어들여야 한다. 'No'라는 말로도 부족해서 계란과 토마토 세례를 더 받겠다는 것인가? 미국은 이란, 쿠바, 이라크. 리비아, 팔레스타인, 북한. 심지어 미국의 우방인 일본의 오끼나와 미군기지 등등에서 얻은 교훈을 쉽게 잊어버리는 건망증환자가 되어 버렸나? 건망증이 아니라면 이는 패권주의와 강권정치가 이미 미국의 불치병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 받은 뒤로 자기네 땅 방방곡곡에 자유의 불씨가 퍼져 있다고 생각해 오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예술품으로서는 매우 아름답고 완벽하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이것을 자기들의 화신(化身)인 양 착각한다면,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위대한 발명가요 유머로 유명한 프랭클린은. 가장 위엄있는 자리에 앉은 가장 위대한 임금이라도 반드시 자신의 엉덩이 위에 앉아야 한다고말한 적이 있다. 미국은 영국 황실의 한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나라이다. 이치대로라면 더더욱 자신의 엉덩이 위에 죽치고 앉아야 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게 '자유'란 '자유를 누르는 것'이며, '민주'란 'No도 YES라 하며 미국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정말 영혼이 시험당하는 시대이다. 만일 미국이 영혼이 있는 나라라면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며, 영혼을 잃어버려 방황하고 있다면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은 거꾸로 세계가 직면한 이 심상치 않은 시대가 될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나라를 세웠으면 역사를 고쳐야지
새나라의 이름
새 서울의 후보지로는 단연 한양이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 한양은 이미 고려조의 문종 22년에 이궁을 짓고 남경이라 했고, 숙종 9년에는 남경의 도심지역에 새 궁궐을 짓기까지 했었다. 같은 고려조의 충렬왕 2년에 한양부로 승격되었고, 공민왕 6년에는 옛 궁을 수리하여 천도하려 하였으며, 우왕 8년에는 잠시나마 천도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두가 '도참설(풍수지리설)'에 한양이 명당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충청도 계룡산이 길지라는 의견이 강력하게 대두되면서 새 도읍지로 유력시되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양주땅 회암사에 머물고 있던 황사 무학 대사와 신료들을 거느리고 몸소 계룡산으로 행차하여 그곳 신도안을 세세히 답사하고 새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새 도읍지의 축성을 구상하면서 계룡산 신도안에 머무는 동안 새해를 맞는다. 그리고 2월 13일에 명나라로 갔던 한상질이 귀국하여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졌음을 고했다. 명나라 황제의 조칙은 이러하였다.
동이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케 하라.
태조 이성계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사신으로 갔던 한상질에게 전지 30결을 내려 준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조는 새 나라의 국호가 '조선'임을 널리 선포하고 계룡산 신도의 역사에 박차를 가했다. 기와를 굽는 사람, 철물을 만들어야 할 대장장이, 목재를 다듬을 목수 등의 공장을 불러들여 공사를 가속화하고 있을 때, 경기좌우도의 도관찰사인 하윤이 계룡산 정도가 잘못되었음을 고했다. 연유는 계룡산이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물이 장생을 피하여 곧 쇠퇴'할 땅이라는 것이었다. 당대의 석학이면서도 도참설에 능했던 하윤의 진언이기도 하였지만, 그가 왕조 창업의 실세인 이방원의 계열임을 감안한다면 무게가 실린 주청이 아닐 수가 없었다. 태조가 이를 흔쾌히 가납하게 되자 계룡산 신도안은 조선왕조의 수도로 정해진 지 불과 10개월여 만에, 그것도 토목 공사가 한참 진행되던 중에 취소되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기사도
여권이 신장하여 '여성상위시대' 운운하는 요즘에 와서는 다분히 퇴색하고 말았지만 기사도를 말할 때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특징은 '여성을 위하고 아껴 주는 일' 즉 '여성에 대한 갤런트리(정중함)'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서양의 봉건사회는 기도드리는 사람(승려), 수호하는 사람(귀족), 경작하는 사람(농부)의 세가지 신분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수호하는 사람이 바로 기사이다. 기사들의 윤리가 곧 '기사도'였으며 충성과 무용을 첫째로 꼽았다. 또한 중세 유럽의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였으니만치 기사도에도 그 정신이 반영되어 기독교를 수호하고 이교도를 멸망시키는 것도 기사들의 의무라 생각했다. 그리고 기사로 서임될 때는 약한 자인 여성을 보호할 것도 맹세했다. 이는 '마리아 숭배'와도 관계가 있으나 기사도의 전성기였던 십자군 시대에 고국에 남아 집을 지키는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했다는 것, 또 원정하는 동안 기사들의 성생활이 부자유스러웠던 데서 여성에 대한 동경심이 높아지고 나아가서 '여성에 대한 캘런트리'를 낳게 했다는 풀이도 있다.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은 신분이 높은 귀족의 부인이었으며, 정신적으로 여성을 존경하고 봉사하는 것이 이상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육체적 관계에까지 발전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서 월터 롤리' (1552-1618)가 마차에서 내리는 '엘리자베드'여왕 앞에 자기 망토를 펴서 흙탕길을 밟지 않게 한 것도 모두 기사도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