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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5 호
4339.12.26 (11.07)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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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는 독서, 음악감상, 그리고 침묵. / 에디스 시트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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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Group I 제2의 신, 글로벌 미디어
"미디어는 이제 제 2 의 신이 됐다." - 토니 슈와르츠
"미디어는 이제 제 2 의 신이 됐다." 세계적 미디어 전문가인 토니 슈와르츠가 얼마전 펴낸 (미디어, 제 2의 신Media, The Second God)이라는 저서에서 멀티미디어 혁명기에 진입한 현대 미디어가 인간의 정치, 교육, 종교, 사회, 광고, 개인생활에 끼칠 영향력을 다각적으로 분석한 뒤 내린 최종결론이다. '제 4 의 권부' 불리던 종전의 파워단계에서 한 단계 더 수직상승해, 이제는 3부 권력 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울트라 파워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제2의 신' 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새 저서 (전쟁과 반전쟁 War &Antiwar)에서 그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현대 고도정보사회에서 미디어는 이제 그 어느 누구도 통제불가능한 절대권력이 됐다. 그런데 미디어라는 이 괴물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는 사업수익만 중시될 뿐 책임감이 없다. 책임감 없는 절대권력, 이것이 바로 현대 미디어의 실체이다." 제2의 신은 그러나 인간이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기존의 '닫힌 사회'를 '열린 사회'로 발전시키는 혁명적 기폭제도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미디어는 인간에게 일방적 정보와 가치만을 전달하던 바보상자였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멀티미디어시대에는 시청자가 미디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양대 특징은 '주문형'과 '개방성'이다. 정보 초고속도로망과 멀티미디어 시스템만 구축되면 시청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메뉴를 골라, 그 정보가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CIA 내부에 있든 간에 그것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같은 새 시대의 개막은 종전의 빈부, 지역, 인종, 신체장애의 장벽을 일거에 허물어 버리는 새로운 정보 민주복지사회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정보공개법으로 상징되는 정보민주화이다. 정치권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은 정보민주화를 꺼린다. 공개하면 시끄러워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철저히 은폐하려 하고, 혼자 알면이득이 되는 정보도 숨긴다. 기업체에서도 마찬가지다. 몇몇 고위층만이 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무기로 자신의 권위와 독점이익을 챙기려 든다. 또 교육계에서는 밀폐된 교단에서 낡은 정보로 획일적이고 교조적인 교육을 행하고 있다. 부패의 근본고리도 바로 정보 밀폐에 있다. 정보사회에서도 '닫힌 구조'가 유지되면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능가하는 정보 초독재자의 가혹한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경고이다. 조지오웰이 "1984"에서 예언한 가공할 정보조작이 현실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보민주화란 정치민주화와 동의어이다. 정수란 물처럼 바람처럼 막힘없이 흘러가야 인류에게 득이 되고 기업이나 국가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는 법이다. 멀티미디어시대의 도래는 다시 없는 기회이자 위기이다. 제2의 신이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이 되도록 하느냐, '초독재자'가 되도록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몫이다.
POWER 001 멀티미디어 황제: 제럴드 M. 레빈
"우리는 당연히 예술가와 언론인을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소비자들을 불러다 줄 테크놀로지에 좀더 친숙해지는 일이다."
1993년 6월 암으로 사망한 전임 회장의 뒤를 이어 타임 위너 커뮤니케이션(TWC)의 회장에 취임한 제럴드 레빈(54)이 가장 먼저 터뜨린 일성이다. 세계최대 멀티미디어 기업인 타임 워너의 총수다운 방향제시이다. 외부와의 접촉을 즐기지 않는 학자풍의 그는 맨해튼가에 위치한 타임 워너 본사의 29층 화장실에 앉아 자신의 선언대로 멀티미디어혁명을 가장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다. 21세기에도 선두자리를 고수하기 위한 야심찬 글로벌전략을 총괄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타임 워너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레빈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레빈의 적극적 제언을 전임 회장인 스티븐 로스가 받아들여, 지난 1989년 시사주간지 (타임)을 발행하는 굴지의 언론사인 타임사와, '배트맨' '보디가드' 'JFK' '말콤 X'등의 히트작을 잇따라 제작한할리우드 제2의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 커뮤니케이션즈가 합병하여 타임 워너라는 세계최대 멀티미디어그룹으로 재탄생했다. 레빈은 당시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미디어와 컴퓨터. 통신이 하나가 되는 멀티미디어시대가 10년 내로 반드시 올 것"이라는 혁명적 예언을 펴면서, 새 시대에 대한 대비로 타임워너의 대합병을 주장해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레빈의 예견대로 현재 타임 워너는 (타임) (피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 20여 종의 잡지 외에 영화, 유선TV, TV프로그램 제작, 레코드, 음악, 서적 등 미디어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문화상품을 왕성히 생산해대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레빈은 또 24시간 뉴스 전문방송 CNN의 주식도 19.4p나 사들였다. 그가 화장이 된 첫해인 1993년 타임 위너의 총매출액은 145억 4천만달러(11조6천억원)에, 경상이익 28억 3천만 달러(2조 2600억원)을 기록해 이 분야 최대기록을 새웠다. 주가도 레빈의 회장 취임 후 1년 동안 30p나 폭등했다. 타임 워너는 이밖에 현재 미국을 위시해 유럽, 아시아, 중남미, 동구권등에 2천만 가구의 유료시청자를 확보해 ABC등 미국 3대방송보다도 많은 이익을 내고 잇는 매머드 위성 유선TV사인 홈 박스오피스(HBO)도 소유하고 있다. 이 유선방송 역시 레빈이 워너브라더스에 갓 입사한 1975년에, 위성과 방송의 결합을 최초로 회사측에 제안함으로써 발족될 수 있었다. HBO 산하의 시내막스는 현재 20세기 폭스사, 콜롬비아 픽쳐스, 트라이 스타 픽쳐 등 헐리우드의 간판 영화제작사들과 장기계약을 맺고, 이들 영화사가 지난 수십년 동안 제작해온 영화프로그램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 취임후 타임 워너의 계열사인 워너 브러더스를 통해 일본, 영국, 독일, 덴마크 등지에 200개가 넘는 자체 대형극장을 직접 짓거나 매입했다. 타임 워너는 1991년 일본의 전자업체인 도시바와 무역상사 이토추에 이들이 10억 달러를 출자하는 조건으로 필름과 유선TV의 주식 12p를 분배했다. 타임워너가 미국 내 비난여론을 무릅쓰고 일본자본을 끌어들인 것은 대대적인 사업확장에 따른 초기의 자금난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현재 이미 100억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는 타임 워너 측은 앞으로 현재의 HBO 유선망을 쌍방향대화가 가능한 멀티미디어망으로 대체하는 데에만 최소한 40억 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합작의 진짜 숨겨진 목적은 고화질TV 및 쌍방향TV 등 미래TV의 하드웨어 부문에 축적된 노하우가 많은 손을 잡음으로써 차세대 멀티미디어부문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데 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쌍방향 전자오락게임 시대를 대비해 닌텐도에 필적하는 일본의 세가와 손을 잡는가 하면. '쥐라기 공원'의 환상적인 3차원 공룡 컴퓨터 그래픽을 만들어낸 미국의 실리콘 그래픽, 미국 내 최대 장거리 전화회사인 AT&T, 지역전화회사인 U.S.웨스턴사 등과 잇따라 연합전선을 결성해 멀티미디어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벽하게 구축해냈다. 타임 워너는 또 미국의 3대방송중 하나인 NBC TV매입도 서두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애플 컴퓨터의 존 스컬리 등이 멀티미디어시대의 황제가 되기를 꿈꾸지만, 타임 워너를 좇아오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호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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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정류장에서 만난 어느 부부
햇볕이 유난히 뜨겁던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일찌감치 집으로 향한 나는 정류장에서 늦게 오는 버스를 원망하고 있었다.
"에구, 젊은 사람들이 안됐군."
옆에서 버스를 함께 기다리던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느릿느릿 걸어오는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 왔어요, 더우시죠?"
갓난아이를 안은 아내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팔을 잡고 더듬거리며 걷는 남편을 버스타기에 가장 좋은 곳에 서게 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남편은 검은 안경에 노란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매우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작은 체구로 힘겹게 아기를 안고 있었다. 남편은 시각 장애인이었고, 아내는 곱사등이었다. 정류장에서 무료하게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이들 부부를 힐금힐금 쳐다 보았고, 내옆의 아주머니는 연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부부는 주위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계속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더워지려나 봐요. 여보, 오늘 하늘은 너무 맑아요."
아내의 밝은 목소리에 남편도 고개를 하늘 쪽으로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잠시 뒤 여러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아내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빠르게 남편의 손을 이끌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른 그녀는 남편을 운전기사의 뒷자리에 앉히고는 급히 내리며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남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하자 아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버스가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었다.
전경숙 님/부산시 연제구 거제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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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3 - 현대철학의 두 거봉: B. 러셀과 N. 화이트헤드 그때 세계에서는 1960년: 아프리카 각국 독립 1967년: EC 발족
내가 1962년 철학교수인 안병욱 선생 등과 함께 런던에 들러 서점에 들어갔을 때였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이 이렇게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것은 러셀이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기도 할 뿐더러, 그의 지성게와 사회적 활동 또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B.러셀(Bertrabd Russell, 1872--1970)은 인문학의 전통을 이어온 옥스퍼드 대학이 아닌 이과계통으로 앞서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었다. 대학에서 라이프니츠 철학을 강의하고 있던 교수가 공무로 당분간 강좌시간을 비우게 되어 러셀에게 그 공석 강의를 맡기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세계적인 철학자로 우뚝 서게끔 한 계기가 되었다. 러셀은 독일 및 독일어에 정통한 편인데다가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 뒤를 감당할 수 있었다. 러셀은 원래 수학자였다. 그래서 N.화이트헤드와 같이 수리철학을 저술애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화이트헤드는 후에 하버드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러셀과 같이 새로운 철학에 협력했던 L. 비트겐슈타인도 후에는 언어철학의 선구자가 되어 지금은 러셀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분석철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러셀은 자기자신이 백 살까지는 살면서 활동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과연 98세까지 더불어 런던에 나타나 핵반대 데모를 벌이기도 했었다. 개인적인 발언에서 토인비와 러셀만큼 당대에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그가 저술한 말년의 에세이집은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핵을 반대한 것은 앞으로 재연되어야 할 세계적인 평화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여져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경고를 하고 있다. 동서 양진영이 수많은 핵폭탄을 만들어 갖고 있으면서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은, 마치 사람이 가득 모여 있는 큰 강당 한가운데 폭탄을 장치해놓고, 누군가가 이 폭탄에 돌이나 담뱃불을 던져 폭발하게 되면 우리 모두는 죽을 테니까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걱정을 한다. 그러다가 얻어낸 묘안이 큰 종이에 '누구든지 돌이나 담뱃불을 던지면 우리 모두는 죽을 테니까 돌이나 담뱃불을 던지지 말 것'라고 쓴 다음 UN이라는 도장을 찍어 그 종이를 붙힌 뒤에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핵에 손을 대고 연쇄적으로 폭발하게 되면 인류는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 자신이 과학자이기 때문에 핵은 지구의 종말과 인류의 멸종을 가져오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의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자극적인 경고가 냉전 도중에 얼마나 필요했었나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도 남는 일이다. 러셀의 철학 자체는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에 소개하지 못하나, 그는 물질세계에 원자가 있어 물질계를 밝혀주듯이 지식의 세계에도 원자에 해당하는 지식의 핵심체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수학적인 법칙을 거쳐 과학성을 띠게 되면 가장 정확하고도 명백한 개념과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뜻은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연구할 근거를 주는 것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그 과제를 언어 자체로 환원시켰고, 화이트헤드는 그런 과학성을 벗어나 다시 형이상학적 철학 본래의 위상을 찾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해 오늘의 철학계를 만들게 된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독창적인 철학자였기 때문에 철학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독자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사상적 분야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컸었다. 러셀과 헤어져 하버드로 온 화이트헤드(N. Whitehead, 1861-1947)는 같은 시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61년 미국 동부철학회에서는 화이트헤드에 관한 부문을 따로 설정해 종합적인 발표회를 가졌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철학사를 통해 가장 어려운 철학을 만들어준 두 철학자가 있는데, 하나는 헤겔이고 다룬 한 사람은 화이트헤드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과정과 실재"라는 대표작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자신이 자연과학과 수학의 대가였고, 늦게 철학으로 전환해 플라톤을 연구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들로서는 관심을 쏟아야 할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러셀이나 화이트헤드 모두가 시대적 흐름을 탄 분석철학에 밀려 산맥이 아닌 홀로 서 있는 거봉 같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도 그런 철학자가 있었다. 사변적인 철학체계를 수립한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이 그런 철학자다. 그의 책도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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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클랙션'(경적)도 상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은 가끔 '클랙션'(경적)을 사용하지요. 이 '클랙션'이라는 말은 이 기계를 만든 제조 회사 Klaxon에서 나온 상표 이름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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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권력자의 종말
통계에 의하면 장수를 누리는 직업으로는 정치가를 꼽는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고 하는 확고한 신념 때문일까? 아니면 권력에 대한 불사신과도 같은 끝없는 집념 때문일까? 그들은 비교적 오래 살았다. 나이 일흔 살 먹기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고 말하며, 평균 수명이 고작 마흔 살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 황희 정승은 90을 살았고, 윤선도는 85세, 송시열은 83세. 허목, 허적도 여든을 넘겼다. 독일의 아데나워는 91세, 이승만 대통령도 91세에 사망하였으며 이들은 재임시에 87세, 86세의 나이로 모두 권좌에서 쫓겨났다. 윈스턴 처칠도 91세로 죽었는데 그 역시도 권고사직으로 80세에 은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83세, 드골 80세, 아이젠하워 79세, 후르시쵸프 77세, 모택동 80세, 등소평 93세, 사라잘은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수자들 중에는 장기 집권자가 또 많았다. 이에 비하면 세습 왕들의 수명은 단명한 편이었다. 쟁취를 위한 신념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기원전 247년, 한고조로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광서제에 이르는 중국왕조 2000여년 사이에는 208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들의 평균 수명은 38세로 나타났다. 그들 중 권력쟁탈자인 정적에 의해 목숨을 잃은 황제가 삼분의 일이나 되었으며 그것도 대부분 남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과의 골육상쟁에 의한 죽음이었다. 왕건이 개국한지 474년에 망한 고려조의 왕가를 살펴보아도 피비린내나는 다툼은 마찬가지였다. 목종과 의종의 시해. 28대 충혜왕 30세 독살, 30대 충정왕 15세 독살. 31대 공민왕 45세 시해. 32대 우왕 25세 시해. 33대 창왕 10세 시해. 34대 마지막 임금 공양왕마저 시해. 조선왕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통계에 의하면 조선왕조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4세로 기록되고 있는데 단명한 이유는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그들은 지엄한 왕손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손발을 거의 쓰지 않았다. 심지어 세수까지 손수 할 필요가 없었다. 극귀의 신분으로 몸을 쓸 일이 적었다. 이러한 절대 운동부족과 과다한 영양 섭취. 게다가 후궁 처첩을 거느리고 자행되던 마구잡이식 보신과 무절제한 성생활. 그것으로 기갈이 소진되었으니 어찌 단명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조 제24대 헌종은 여색을 너무도 가까이 하여 피와 가래를 토하다가 보령 스물 셋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튼튼한 몸을 가진 더꺼머리 총각, 강화도령도 철종으로 즉위하자 술과 여색으로 인해 서른 셋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그런가하면 장수를 누리던 권력 쟁탈자들의 말로는 또 어떠하였을까? 그들의 대부분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채, 알바레스병이나 파킨슨병, 신경매독 등으로 인해 전부 정신병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얄타회담에 참가했던 루주벨트, 처칠, 스탈린은 차례로 알바레스병을 앓아 뇌가 이미 온전치 못했다. 파킨슨병을 앓던 프랑코, 무솔리니, 히틀러도 정신이상자였고 가믈랑과 무솔리니는 신경매독까지 겸하고 있었다. 아디슨병을 앓던 케네디나 혈액병을 앓던 프랑스의 퐁피두 역시 코티죤 복용으로 정신치매의 장해를 겪고 있었다. 레닌과 모택동, 사라잘은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편집병적인 정신질환으로 파면권고 사직을 당한 닉슨. 딱정벌레 라는 별명이 붙었던 후르시쵸프와 영국의 조지3세는 조울증 정신병으로 권좌에서 쫓겨남을 당해야만 했다. 절대권력을 쟁취한 다음 그들의 말로는 더 이상 좋을 게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서 비참하게 사라진 독재자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세스쿠, 이란의 무하마드 팔레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우간다의 이디아민, 포르투갈의 안토니우스 살라자르, 필리핀의 페르디나드 마르코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암살 위협에 쫓겨 정처없는 망명길에 오른 이란의 팔레비왕. 집권 8년만에 조국 우간다를 철저하게 피폐화시킨 이디아민, 그도 1979년 4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20년간 필리핀을 독재해 왔던 마르코스도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에 밀려 국외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희망하던 망명지 싱가포르, 스페인에서도 입국을 거절 당했다. 미국에서도 그가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대의 도둑 이란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았다. 권좌에서 쫓겨난지 4년이 되던 1989년 5월, 하와이의 어느 조그만 병원에서 그는 오욕의 물든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국민경제 파탄혐의와 대학살의 죄목으로 특별재판 끝에 곧바로 사형되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제화공에서 일약 독재자로 변신한 그는 세큐리타테라고 하는 국가안전부를 동원해 반체제 인사에 대한 고문과 살인 및 공포정치를 자행해 왔었다. 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를 거인중의 거인 이라 찬미했으며 화가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지만, 24년간 루마니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그가 하루아침에 사형수로 전락해 부부가 함께 총살을 당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살인마라 할지라도 생사기로의 벼랑 끝에 서서, 애인이던 에바브라운과 함께 동반자살을 한 히틀러라든지 우미인과 항우의 죽음은 때로 묘한 정서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그리고 나치스정권 탄생과 함께 그 정책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요세버 괴벨스. 그는 베를린 함락직전 총통관저에서 가족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을 결행하였는데 한 때 이승만 정권에 편승하여 세도를 부린 이기붕 일가족의 떠들썩한 권총자살 장면이 거기에 겹쳐지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자살이 아니면 타살. 그래서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결코 뛰어 내릴 수 없었던 그들은 권력의 가혹함 때문에 언제까지고 호랑이 등위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 형벌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먹느냐, 먹히느냐로 그들의 운명은 참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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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9. 일본 민간인들의 국제 침략사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넘보고 있다. 1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업인, 문화인 심지어는 기자에 이르기까지 민간인들이 그 앞장을 서고 있다. 1세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 특히 조선 침략에서 이른바 낭인이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1895년 민비시해(을미사변)를 자행한 깡패집단쯤으로 알려진 이 낭인들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맨 앞에 서서 일본정부와 적극적인 유대를 가지면서 정부의 외교정책과 해외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민간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서양의 침략에 선교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낭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낭인들은 명치유신을 일으켰다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사무라이 출신들로 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시아국가들이 서양의 침략과 모욕을 막기 위해 한마음으로 협력해야 함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하여 일본 이외에는 지도자가 될 능력을 소유한 국가가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낭인들은 급진적 보수나 일신의 안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하기 곤란한 일들을 도맡았고 특히 대외침략을 일삼는 군부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결성하여 조선침략의 `선교사` 노릇을 한 우치다료헤이의 활동을 중심으로 낭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료헤이는 대외 팽창주의자들의 모임은 현양사에서 활약하던 사무라이 출신의 낭인이다. 현양사는 명치정부의 대외정책이 미온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동, 노일전쟁을 도발시킨 단체이다. 현양사 활동을 통해 그는 일본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확보하는 것이 선행조건이라고 판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 계기는 1894년 조선에서 터진 동학 운동이었다. 이 때 이미 조선에는 많은 수의 낭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892년 부산에 외교관 출신인 야마자 엔지로를 중심으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조선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그 동안 모아놓은 정보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현양사의 낭인들은 1893년 일본을 지지하던 김옥균이 청나라 땅에서 암살되자 외무대신에게 청나라와의 개전을 요구하며 전쟁 여론을 부추겼다. 이 때 외무대신은 이 요구를 겉으로는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침략주의자인 육군참모총장 가외카미 소로쿠와 이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민간인과 정부의 교묘한 역할분담이 행해진 것이다. 정부와 군부의 내면적인 비호에 고무된 낭인들은 동학혁명을 기회로 행동에 들어갔다. 정부의 개진 결단을 돕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을 질러야 한다는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해 천우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천우협의 격문에서 `시주음락으로 소일하는 한국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뜨려 도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구제`하고 `민씨의 악정을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는 청국을 한반도에서 쫓아낼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천우협은 1894년 6월 하순 부산에 도착한 후 전국에서 석 달 동안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게릴라 활동과 폭력을 감행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 행동대원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내정에 큰 소요를 야기했다. 이들은 의도대로 청일전쟁을 점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전쟁중에는 일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첫 해외활동의 대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료헤이는 한국, 중국에 대한 공작을 구상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의 반환을 협박하는 이른바 삼국간섭이 일어나자 료헤이는 러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온 일본신문들이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고 있을 때 정부 관리도 군부 인사도 아닌,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료헤이는 `먼저 러시아의 내정을 연구하여 복수의 길을 얻기 위해` 단독으로 시베리아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유도 도장을 열어 거점을 마련했다. 여기에도 역시 대륙 낭인들이 이미 진출해 있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의 시가, 요새, 주요 도로들의 지도를 만들고 정보 활동을 하는 군첩보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한국, 중국,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간도에 보내 일대를 조사하게 했다. 이어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일본의 해군무관, 외교관 등의 도움을 받아 가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3년 만에 귀국한 료헤이는 이미 `정치가 부패하고 인륜이 타락한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동아시아 보전이라는 국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호히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리의 여신은 일본 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귀국한 후 그는 순회강연을 통해 러시아와의 개전 여론을 일으키는 한편 흑룡회라는 낭인들의 강력한 조직을 결성, 정부나 군부보다 더욱 호전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흑룡회의 구성원에는 사업가, 변호사, 언론인, 군인, 교사, 유도사범, 승려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중국, 시베리아, 몽고, 동남아시아 등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이 조종할 수 있는 현지의 정치세력을 포섭하는 공작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의 일원이 되어 통역관 또는 첩보원으로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들 단체의 주장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히 이들 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호전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민간인의 은밀한 대외활동, 그리고 이들과 정부와의 교묘한 결합 등 1세기 전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애용한 방법은 지금도 한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기업인, 언론인, 유학생 등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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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2. 짐승에게도 인권이 필요안가
미합중국 정책 당국자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제재'가 그것이다. 제재를 하게 되는 이유도 많아 [미국제재대백과사전]을 편찬한다면 금세기 최대의 방대한 분량이 될 것이다.혹은 '제재학'이라는 학문을 신설하여 전세계의 학자들로 하여금 미국의 제재문화를 연구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재에 대한 이유가 많건 적건 간에 분명한 한 가지는, 그 모든 것은 결코 미국의 뜻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며, 이 점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절대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가 없다. 월남전 이후 미국인들 사이에 팽배한 반전정서와 국제여론은 백악관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 용이하지 않게 된 백악관 당국자들은 '경제제재'라는 또다른 형태의 무기를 채택했다. 그들의 속셈은 분명했다. 대상 국가의 경제를 파탄시키고 민생을 불안하게 하여. 마침내 그들 국가의 국민들이 내전을 일으키거나 정권을 전복하게 해 친미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신식민주의의 실체이다. 미국이 말하는 제재에는 두 가지 수단이 있다. 하나는 경제적 제재이며 다른 하나는 군사적 압력이다. 약소국에 대한 미국의 제재조치는 해마다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 서구 동맹국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민주'와 '인권'은 미국인들이 가장 잘 쓰는 낱말이며 가장 상투적인 제재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은 미국의 경제제재하에 많은 국가의 경제가 도탄에 빠졌고 실업자가 증가했으며 식량 이 고갈되는 등 생존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몇몇 국가에게 인권을 개선하라는 미명하에 스스로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동기는 뻔하다. 서구의 철학에서는 이런 패러독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미국의 발달된 정찰위성이나 특수 정보망은 제재를 당한 국민들이 제재기간 동안 어떻게 생활하는지 꿰뚫고 있을 것이며, 실제 정찰을 하지않더라도 제재를 하기 전에 이미 제재에 대한 효과를 예상할 수도 있을것이다. 자본이 유입될 수 없고, 생산품을 수출할 수 없는 국가의 가장심각한 피해자는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그 나라 국민일 것이다. 여기서 당사자인 미국의 인권상황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1996년4월 1일 캘리포니아 고속도로에서 20여 명의 멕시코인 밀입국자를 태운 화물차가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고, 래디시아 곤잘레스와 그녀의 남자친구 두 명이 백인 경찰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연약한 여자는 다른 수만 명의 멕시코인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활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소위 '자유민주국가' 라고 들었던 미국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인권을 내세우는 부유한 나라인 미국땅을 밟자마자 경찰의 곤봉세례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구타를 당한 후 한 Tv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크게 놀란 아이처럼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인권유린사건에 대해 멕시코 정치협회 주석인 빅토리아 베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경찰이 구타하는 모습이 비디오카메라에 잡혔다는 것뿐입니다.' 미국 경찰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이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1991년 로드니라고 하는 흑인이 백인 경찰 네 명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은 유명한 로스엔젤레스 폭동을 야기시켜 58명의 사망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를 낳게 했었다. 이 사건은 미국인들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누가 미국을 제재할 것인가? 민주와 인권을 내세우는 백악관 정책 당국자들 중에서 이런 일에 책임을 져 사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내에서 외국인에 대한 인권상황이 이러한데,외국에서 미국인들이 요구하는 인권은 어떤가? 최근에 미국인이 일본 감옥에서 불편하게 생활하고 있다며 인권요구를 한 것은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이 세 명의 미국인들은 밀입국 정도가 아닌 12세의 일본 소녀를 강간한 강간범인데도 천연스레 인권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9월 일본 오끼나와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세 명의 미군 병사가 12세의 일본 소녀를 윤간하여 7년형을 받고 일본의 요꼬스까(감옥에 갇혔다. 그곳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동일한 규정이 적용되는 곳이었다.즉 매주 금요일에는 8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의 대가는 매월 37달러이며, 전화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한 인권단체 대표단이 와서 실정을 돌아보고는 곧바로 일본 감옥을 비난했다. 요컨대 요꼬스까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너무 심한 통제를 받아 정신적인 고통 속에 있으므로 최소한의 인권마저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말은 아마도 미국인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이를 지극히 정상적인 요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동양인들이 보기에는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12세 소녀를 강간한 이런 짐승만도 못한 자들을 휴양지나 최고급 호텔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불행을 당한 소녀의 인권은 그처럼 하찮은 것이었던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들은 정말 미국인답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미국인이 타국인을 침해하는 것은 인권침해가 아니고. 세 명의 미군 강간범과 같은 파렴치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타국인이 미국인을 침해하면 인권침해란 말인가? 그래서 결국 미국은 세계 어디에서나 일관되게 인권존중으로 시작했다가도 마침내는 인권탄압으로 끝내는 것이다. 어떤 친구가 다음과 같이 빈정거린 적이 있다. '미국은 그야말로 '제멋대로'식의 국가이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 혹은 저렇게 하겠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을 너는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다 먹어야 하니 너는 젓가락을 들어서는 안 된다등등 자세히 생각해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작태를 많이 보인다. 미국 노릇한다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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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도적과 농부
한 시골 농부가 봄날 아침부터 산기슭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농부가 사는 곳은 워낙 깊은 산골이라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런데 농부가 김을 맨 지 한 식경쯤 되자 어떤 사내 하나가 급히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밭가에 보자기 하나를 떨어뜨렸다.
"여보시오! 보자기를 떨어뜨렸소!"
농부는 얼른 보자기를 주워 들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산모퉁이를 돌아간 뒤였다. 농부는 보자기가 너무 무거워 속에 무엇이 들었냐 하고 슬며시 보자기를 풀어 보았다. 그 속엔 큼직한 금덩어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농부는 깜짝 놀라 다시 보자기를 싸서 처음 있던 자리에다 갖다 놓았다. 하루해는 금방이었다. 어느덧 해는 기울기 시작했다. 서산에 저녁노을이 붉게 깔릴 무렵, 보자기를 떨어뜨렸던 사내가 급히 말을 몰고 나타났다.
"오늘 아침에 내가 여기를 지나면서 보자기에 싼 물건 하나를 떨어뜨린 것 같은데, 혹시 그걸 못 보셨습니까?" "아, 그 보자기요? 저기 밭가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농부는 서슴치 않고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가리켰다. 사내는 말에서 내려 보자기를 끌러 보았다. 금덩어리가 그대로 있었다. 사내는 잃었던 금덩어리를 찾게 된 것이 너무나 고마워 농부에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금덩어리의 반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정색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이 금덩어리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무슨 이유로 당신의 금덩어리를 나누어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시고 제 성의이오니 거두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저로서는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농부는 막무가내였다. 사내가 아무리 금덩어리를 받으라고 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농부에게 말했다.
"실은 저는 도적입니다. 이 금덩어리는 남한테 빼앗아 온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의 물건만을 강탈하면서 살아왔는데, 당신은 내가 준다는 것까지 거절하니 세상에 이렇게 서로 상반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내는 농부의 해어진 옷자락을 잡고 자신의 전과를 뉘우치는 눈물을 흘렸다.
"이 금덩어리를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사내는 금덩어리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평생을 농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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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181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죠셉 모르라는 목사가 세 시간 만에 작곡했다.
카가니니는 왜 다섯 곡밖에 작곡하지 않았나, 더 작곡하여도 자신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귀신도 나와서 춤을 추었다고 할 정도로 테크닉이 뛰어났다 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깊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을 나타내려 한게 아니고 시인 단테를 조각한 것이다.
노벨상 금메달의 실제 가격은 1976년도의 시장가격으로 15,000달러였으나 메달에 포함된 금의 가치는 약 2,000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올림픽 금메달 속에는 겨우 6그램의 순금이 들었을 뿐으로 가치는 110달러 정도이다. 은메달은 66달러, 동메달은 16달러의 가치밖에 없다.
테니스에서 쓰는 Love, 테니스 경기에서 스코어를 말할 때 Zero라든지 Nothing이라는 말대신 ‘Love’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아마 몇세기 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경기자들은 점수판에 Zero를 쓸 때 계란처럼 생긴 'O'를 그린다. 프랑스어로 'O'는 ‘Leuf’로써 그 발음이 마치 Love와 같이 들린다. 이 때부터 영국의 테니스 경기자들도 영점을 Love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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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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