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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88 호
4339.12.18 (10.28)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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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총칼을 든 10만 대군보다 한 장의 신문을 더두려워한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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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5부 왕권과 여권
사련의 종말 -진성 여왕
나라 안은 술렁거렸다. 정강왕이 보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이찬 김준홍을 시중으로 삼고 정사를 다스려 보려 하였으나 그해는 어찌된 셈인지 한재가 심하고 흉년이 들었다. 이듬해(887년) 정월에 왕은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친히 행차하여 청강했으나 나라 안은 계속 흉흉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뿐이랴. 한주 외에는 왕에게 반기를 드는 무리가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거듭된 한재와 심한 흉년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족했다. 흉년의 책임은 하늘이나 시중 이찬(일등 관명)들이 뒤집어쓰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라의 어버이인 왕이 도맡아야 했다. "하늘이시어....... 이몸에게 힘을 주소서, 힘을." 왕은 그런 기도 속에서 병환이 든 것이었다. 5월의 화창한 봄날에 궁성 안은 검은 구름이 끼었다. 시중 김준흥은 중태에 빠진 왕 앞에 무릎은 꿇었다. "모반을 획책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으니 마마께서는 어서 힘을 내소서." 그러나 정강왕은 힘은커녕 오히려 유언을 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나는 병이 심하므로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소." "아니옵니다, 마마." "나는 아다시피 사자가 없는 몸. 허지만 누이동생 만은 천자 명예하고 골상이 장부 같으니 경은 내가 쓰러진 뒤에 만을 세워 왕위에 오르도록 하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7월 5일, 왕은 보위에 오른지 만 일년 만에 허망하게 승하했던 것이다. 정강왕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듣고 백성들은 슬픔에 잠기기보다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 버렸다. 전왕 헌간왕도 7월 5일에 타계하고 말았으니 이 무슨 액운이냐는 것이었다. 20년의 수를 누리는 임금도 많은데 기껏 2년이란 짧은 재위 기간에 대를 이을 자리 하나 없이 돌아가시다니,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는 생각들이었다.
정강왕의 유언대로 왕의 누이동생 만이 제 50대 왕위에 올랐다. 여왕마마, 진성왕이 신라의 주군이 된 것이다. 여왕은 바람둥이였다. 각간 위홍은 여왕의 좋은 밤 친구였다. 위홍이 여왕의 침전에 드러누워 있다시피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주군이 밤낮으로 색정에 젖어서 정사를 게을리하자 변방을 지키는 신라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백제가, 그리고 북쪽에서는 고구려가 허약한 여왕 천하를 자주 침공해 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경선 변방 땅의 수비보다도 궁궐 안의 풍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그 위홍이라는 자는 여왕 전하의 유모하고 무슨 인연이 있다면서........?" "바로 유모의 남편이라는 게야." "그렇다면 여왕마마께서는 유모의 남편을 데리고 산다?" "쉬이! 누가 들으면 목이 달아나네." 여왕의 유모는 부호였다. 부호는 남편인 위홍이 여왕과 내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설마 그러려니 했다. '친딸처럼 젖을 물려 키운 만이 그럴 리야.' 위홍이란 자는 그러니까 나이가 여왕의 아버지 뻘이나 되는 셈이었으나, 까짓거 나이 같은 건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이는 여왕보다 훨씬 많아도 남성적인 정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모양인가. 여왕은 한번 위홍과 인연을 맺은 뒤부터 그를 남편처럼 받들게 되었고, 위홍 자신도 어엿한 남편 행세를 하여 궁중 안에서 세도가 당당했다. 여왕의 신임을 사서 국정을 좌지우지한 사람은 위홍만이 아니었다. 위홍의 아내, 여왕의 유모인 부호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남편을 빼앗긴 몸이 무슨 낙으로 살랴, 기왕지사 지엄하신 여왕의 그늘 밑에서 살게 된 몸, 세도나 당당하게 부려 보구 살리라.' 부호의 그러한 계산은 부호로 하여금 남편인 위홍 못지않은 세도를 궁중에서 부리게끔 하였다. 사람들은 여왕을 가리켜 색에 미친 요상한 여왕이 유모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밤낮으로 해괴망칙한 짓을 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개탄했다. 아무리 여왕이 유혹하더라로 각간까지 지내고 있는 위홍이 여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었다. 요왕과 간신이 애욕에 빠져 있으니 나라가 잘 될 리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왕과 위흥의 관계를 <삼국사기>는 이렇게 저하고 있다.
진성왕 2년(883년) 2월에 소양리에 있는 돌이 저절로 움직여 옮겨 갔다. 왕은 평소에 각각 위홍과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떳떳이 그를 궁내로 불러 일을 보게 하고, 그에게 명하여 대구 화상과 더불어 행가를 모아 수집하게 하고 이를 <삼대목>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진성 여왕과의 사통 뒤에 은근히 향가의 수집자로서 위홍을 내세우고 있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위홍이 <삼대목>을 완성시킬 때까지 대궐 안으로 안방 드나들 듯 출입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기실 진성 여왕이 표면상에 내건 <삼대목집>이란 위홍 무단 출입의 구실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라인은 태어날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부르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노래는 궁중 안에서건 궁중 밖에서건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이 즐기고 있었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취가하여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 --"서동요"
위홍은 향가를 집대성하면서, 여자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노래는 진성 여왕 앞에서 낭송을 했다. 버로 전전 왕인 헌강왕 때에 해동 용왕의 아들 처용이 불렀다는 노래 "처용가"를 낭송할 때에는 성의 노예가 된 위홍과 여왕이 다 함께 공범 의식에서 쾌감을 맛보기도 했던 것이다.
동경 밝은 달 아래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해이고 둘은 누구 해인고 본래 내 해것마는 남에게 빼앗기었으므로 어찌할꼬, --"처용가"
향가를 모으다 이성이 생각나면 위홍은 여왕을 찾는다. 여왕은 언제나 침전에서 위홍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육체의 교섭이 끝나면 별수없이 또 한 번 죄를 저질렀다는 뉘우침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잡힌다. "각간......... 지금 내 뉘우침을 달랠 수 있는 무슨 노래가 없겠소?" "예, 그러하오면 천수대비가를 읊어 보소서........." "천수대비가라는 노래가 어떤 것인데?" 위홍은 그가 수집한 <삼대목> 책장을 넘긴다.
두 무릎을 고초으며 두 손바닥 모으아서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일천수 일천목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덮겠사오면 들도 없는 내오니 하나는 그윽히 고쳐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옵시사 놓아 주실진대 자비여 크도소이다. --"천수대비가"
진성 여왕과 위홍이 궁중 안에서 '향가놀음'에 이어, 시들 줄 모르는 짐승의 '자웅놀이'를 일삼고 있는 사이, 백성들의 인심은 날로 흉흉해갔다. 소양리에 있는 돌, 부동석이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저절로 자리를 옮겨 갔다는 데에 문제는 있었다. 이것은 커다란 이변이었다. 게다가 이 바위(부동석)이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저절로 자리를 옮겨 갔다는 데에 문제는 있었다. 이것은 커다란 이변이었다. 게다가 이 바위(부동석)에는 부동존이라는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쎄 그 불상이 스스로 옮겨 앉은 셈이었으니 나라 안이 조용할 턱이 없었다. "이는 부처님이 망국을 경고하는 계시일 것이다. 여왕과 위홍의 간신 도배가 죄를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하고 만다."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서라벌 장안에 퍼지고, 급기야는 여왕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여왕은 위홍을 불렀다. "무슨 구실이 없겠소? 부동석이 옮겨 앉은 데 대한 구실 말이오." "그 문젠 신에게 맡겨 주소서." 위홍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그대에게 맡겨 달라니, 무슨 묘책이라도 있단 말이오?" "있다마다요, 아무튼 신에게 맡겨 주시면 부동석이구 유동석이구 모두 잘 처리하겠나이다." 위홍은 그 길로 즉시 일관을 불러 매수한 다음 부동석 이동의 점괘풀이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풀도록 명하였다. 그들 위홍과 일관의 음모는 이런 점괘 풀이를 하였다. "부동석이 자리를 움직인 것음 음양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이 부동석은 원래 음것으로서 양석을 사랑하여 함께 있었는데 지귀가 애정을 질투하여 음석을 양석과 떼어 버린 다음 다시는 양석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중력으로 금주했던 것이다." 일관의 풀이는 더 계속된다. "......... 그러나 그 때부터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부동석은 양석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부자연스런 땅귀신의 금주의 중력을 물리치고 양석을 이동한 것이니 결코 불길한 징조가 아니고 세상일이 이처럼 모두 자연의 이치대로 발전할 아주 길한 징조다......." "얼씨구........."
사람들은 비웃었다. 일관의 해석인즉, 부동석을 진성 여왕으로 비유하고 양석을 위홍에다 비긴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왕이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었고, 여왕이 성적이 향락 생활에 젖어 있는 것은 그 역시 자연스러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땅귀신의 질투와 같이 부당한다는 점뢔풀이였다. 천부당 만부당한 풀이였으나 백성들은 속아넘어가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육욕의 놀음에는 권태가 빨랐다. 지고지순한 정신력으로 이록된 사랑이 아니라 찰나적이 육체의 유희에 영원이 있을 턱니 없었다. 여왕은 위홍의 늙은 남성미에 싫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여왕은 젊은 장정이 필요했다. 위홍은 늙었다. 유모의 남편이었으니 아비 뻘이 되는 늙은이였다. 여왕은 중신들에가 소리쳤다. "나에게 궁남(남자 궁인)을 달라!" 남자 왕은 궁녀들을 두는데 여왕이니까 궁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지존의 엄명이라 중신들도 반대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궁남을!" 하는 여왕의 바람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궁중 안 여왕의 침전에는 건장하고 잘생긴 사나이들의 출입이 잦게 되었다. "궁남을........."하는 여왕의 바람의 한 여성의 본능이었다. 아니 이성에의 강렬한 욕망이었다. 욕망은 쉽게 충족되었다. <삼국사기>는 여왕의 욕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남몰래 아름다운 소년 2,3명을 궁중으로 이끌어 들여 음란한 짓을 저지르고, 또한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내맡기니 이로 인하여 영행이 빙자하여지고 뇌화가 공해하고 상벌이 불공평하고 강기가 무너졌다. 이때에 한 무명자가 시정은 비방하는 글을 조정의 큰 길 앞에 걸어 놓았으므로....... 시정을 비방하는 격뭉은 진성여왕과 위홍 부처가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으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남무망국 찰나나제......... 부이사바사................
찰나니제는 여왕을 암시하는 것이었고, 부이는 여왕의 유모 부호와 그녀의 남편 위홍 일당을 지적한 것이었다. 격문을 붙인 범인으로 은자 왕거인이 지목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왕거인은 옥중에서 나라의 운명과 자기의 억울함을 시로써 호소했다. 충신의 피눈물이 애를 태울 듯하나 역적의 권세는 여름에 서리를 내리게 한다 아! 내가 지금 억울하게 죽어 가는데 황천은 무심하게 돌아보지 않는구나 혹은, <삼국사기>에는 왕거인이 옥벽에 이렇게 썼다고 전한다.
간공이 통곡하니 3년 동안 한재가 들고, 촉연이 비분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왔다. 지금 나의 유원한 우수는 고사오 다름이 없는데 황천은 말이 없이 다만 창창할 뿐이로다.
그날 밤 갑자기 천둥이 울고 벼락이 옥문을 부수자 왕은 두려운 나머지 왕거인을 석방시켜 주었다. 진성 여왕과 위홍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대신 여왕과 궁남들의 거리는 가까워 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남과 위홍과의 반목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시기와 질투가 궁남과 위홍 사이에서 마치 불꽃처럼 튀었다. 여자의 시기에는 손톱 자국이 남고 남자와 남자들의 시기에는 칼자국이 남는 것일까. 위홍은 칼을 뽑아 들고 새로운 연적 궁남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각간과 궁남의 싸움이라면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위홍의 승리가 분명하겠지만 노인과 젊은이의 칼부림에는 다릴 기적이 있을 수 없었다. 위홍은 젊은이들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위홍이 죽자 여왕은 궁남들의 힘의 세계와 성의 요지경 속에서 마음껏 성의 쾌락을 즐겼다. 그러나 여왕의 정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끊임없는 성의 유희에 휘말려들던 여왕은 결국 병이 든 것이다. 궁남들을 잠시 멀리하고 죄수들을 사면해 본다. 고승 60명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여 여왕의 쾌차를 빌기도 한다. 이윽고 여왕은 병환이 낫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재가 들어서 나라 안이 영 쑥대밭 꼴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여왕 즉위 2년 사이에 벌어진 것이니, 여왕이 얼마나 음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정사에 게을렀나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영왕 즉위 3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부를 바치지 않아서 나라의 창고가 비어 재정이 궁핍할 때로 궁핍하였다. 이에 왕은 사자를 내보내어 공부를 바치라고 독촉할 지경이었다. 여왕 즉위 5년, 양길과 궁예가 기병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북쪽의 명주(지금의 강릉)를 비롯한 10여 군현이 함락 되었다. 여왕 즉위 6년, 완산(지금의 전주)에서 견훤이 들고일어나 무주(광주)가 그에게 항복하였다. 신라의 머리를 강타하고 허리를 찌르는 소동이 일어나자 여왕은 기진맥진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쳐 본다. 그러나 미처 당나라에 닿기도 전에 사신은 바닷귀신이 되고 만다. "온, 이럴 수가?" 하는 일마다 백성의 원성을 사는 일뿐이었고 연이어 불행한 사태만이 속출하였다. 여왕의 두 귀에 들리느니 변방에서 벌떼처럼 왕왕거리는 궁예와 견훤의 성난 함성이었고, 나라 안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궁예와 견훤은 여왕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아우성들이었다. 그들의 성난 함성은 오 신라 천지에 여울져 갔고, 급기야는 궁성의 높다란 담벼락을 넘어 여왕의 귀에까지 속속들이 흘러 들어왔다. 여왕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위홍과 궁남들을 섬기기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으나, 지금은 남자로 인한 불면의 밤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쇳소리같이 잉잉거리는 백성들의 원성으로 여왕은 그 이상 모르는 체 귀 감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여왕 즉위 8년, 그녀는 별수없이 나라의 기둥이 되는 인물을 백방으로 물색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첫손으로 뽑히는 인물이 거유 최치원이었다. 최치원. 12세 때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 나이 17세 때는 이미 과거에 급제를 해서 신라의 국명을 드높인 사나이. 38세의 젊음. 박식한 서라벌의 천재. "그 최치원을 불러들이도록 하라!" 여왕은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출할 인물은 아무래도 최치원, 그 사람말고는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신 최치원 대령이오." "오! 그대는 오늘부터 나를 도와 이 난세를 바로잡아 보지 않으려오?" "황공하오이다." 최치원은 여왕의 뜻을 쾌락하고 '시무 10여 조'를 작성하여 정사에 반영시켰다. 난세를 사는 백성과 그 난세를 다스리는 위정자의 지킬 바를 명시한 10여 조였으니 요샛말로 하자면 무슨 공약 같은 것이었다.
원래 음탕한 여왕이었고 슬하에 한 점 혈육이 없는 게 흠이었으나 여왕은 서리맞은 국화꽃처럼 꽃의 미소를 잃지 않고 국정에 참여하는 즐거움으로 나날을 보내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어떠냐 싶었다. 여왕은 49대 헌강왕의 서자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그녀는 한 나라의 주군이기 전에 이제 한 나약한 여성이었다. 꽃은 시들어서 이마에 주름살은 물살졌지만, 후사를 걱정하고 나라 안 살림을 걱정하는 여성으로 그녀는 변모해 갔다. 여왕은 그녀가 왕위에 올라 있을 때에 태자비를 맞아서 아이를 낳게 하리라 했다. 나이 30을 넘기지 않은 여왕은 벌써 육신이 벌레 먹은 장미로 변신해 갔다. 여왕 즉위 11년, 여왕은 그녀가 살아온 생애를 뒤돌아본다. 뉘우침과 슬픔이 여왕의 죽음을 형벌처럼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왕은 신록이 물들기 시작한 6월에 병색이 가득한 얼굴로 좌우 중신들에게 말한다. "근년 이래로 백성들은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므로 어진 사람에게 양위하고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겠노라."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2월, 왕위에 오른 지 열한 해 만에 여왕은 야생마처럼 분별없이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문닫고 죽음의 언덕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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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농장은 과연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나 - 이정훈(연세대 박사과정)
요즘 우리는 농장이라는 단어를 보고, 서울사람들은 전원생활을 동경하여 근교에 있는 한두 평 규모의 땅을 빌려 주말에 배추나 오이와 같은 채소를 키우는 주말농장을 떠올리기 쉽다. 아니면 영화 ‘뿌리’에서처럼 흑인 노예들이 백인 감독원에게 매를 맞아가며 목화를 따는 목화농장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농장은 주말농장이나 목화농장이 아니라, 고려 귀족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14세기 고려사회의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농장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당시 농장은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그 정도의 농장이라면, 농장주에게 남들과 다른 특권이 있었을 것임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가졌던 특권과 농장경영의 방식이 어떠하였기에 그런 표현이 남은 것일까?
귀족다운 삶의 권리, 농장 고려사회는 신분제사회이다. 세습되는 신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고, 권리와 의무도 차이가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점은 농장을 조성하고 경영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장은 원래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대토지소유를 말한다. 토지가 없다면 농장이 아니다. 이 시기 농장을 파악하려면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간에 전념하여 토지를 늘렸다고 하자. 이 경우 개간 자체에도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들지만, 개간 후 토지를 경작할 때에도 노동력 동원이 필수적이다. 신분제사회에서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농장주가 국왕이나 국왕의 집안, 귀족관료 및 사원이나 승려에 국한된 것은 당시 사회가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는 이들이 신분적 특권을 활용하여 대토지소유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국가가 보장해 준 이 권리를 우리는 수조권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귀족이 치자로서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국가가 농토의 수확물 가운데 1/10을 거두는 토지세를 수조권자가 대신 걷을 수 있도록 위임해 준 권리를 말한다. 전시과나 녹과전, 과전법은 각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왕실이나 고급관료, 사원, 군인, 기인 등에게 수조권을 분급해 준 제도이다. 이 경우 수조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전주라 하고, 대상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전객이라고 한다. 귀족이 관료 등이 되어 수조권을 분급받으면, 가문의 경제력은 확실히 보장받게 된다. 만약 자신의 토지가 수조지가 되면, 소유지와 수조지가 일치되어 일종의 면조의 특권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토지에 수조지가 설정되면 그 사람의 토지에 영향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문종 때 바뀐 전시과의 지급 규정대로 문하시중이 되어 100결의 토지에 관한 수조권을 받게 되면, 수확량의 10분의1을 획들할 수 있으므로 실제로는 10결의 토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왕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라면 수조권 행사를 통해 토지확보에 나설 수 있고, 토지가 없었던 사람이라도 이를 근거로 새로이 농장을 조성할 기반을 닦게 되는 것이다. 수조권은 토지를 늘이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소유하는 토지에 국가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 수조권을 행사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나는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수조권자가 마음을 고약하게 먹는다면, 내 토지는 졸지에 빼앗길 수도 있다. 수조권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국가가 수조권분급제를 시행했다는 것은 바로 국가의 토지.농민지배력을 수조권자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를 봉건 원리가 관철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농장이란 문무관료나 사원이 자신의 경제 생활을 위해 신분적인 특권을 바탕으로 많은 토지를 모아서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이용한 농업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와 노동력의 확보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상속이나 매입, 고리대, 기진, 개간, 모수사패, 탈점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매입은 땅을 사서 확대하는 방법이었고, 또 주변 농민들에게 고리대로 곡식이나 포를 빌려 주고 갚지 못할 경우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다.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은 젊었을 때 쌍봉사의 주지가 되어 50여 만석의 쌀로 고리대를 하면서 재물을 모았는데, 만일 갚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받아 냈기 때문에 농민들은 국가에 조세조차 납부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기진은 토지를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기증하는 것인데, 왕실이나 귀족관인들은 신앙심이나 개인의 안녕을 위해 사원에 많은 토지를 기진하였다. 공민왕은 부인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운암사에 토지 2, 240결을 기진한 일이 있다. 그리고 간혹 하급관리가 높은 관직을 얻기 위하여 고위관리에게 뇌물로 토지를 바치기도 하였다. 황폐한 토지나 산을 개간하여 토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해지면서 국가에서 수조권 지급이 어려워지자 수조권 대신에 황폐해진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개간하면 자신의 소유지가 된다. 그러면 개간자는 소유자이면서 수조권자가 되어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사패라는 증명서와 함께 지급되었는데, 국가에서는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면에서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일부 농장주는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문서를 위조하여 좋은 토지나 주인이 있는 토지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사패를 받았다고 속여 자신의 토지로 만들었다. 이것을 모수사패라고 하였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국왕마저도 사원이나 권세가처럼 앞을 다투어 모수사패로 토지를 확대하였고, 그 규모도 수백 결에서 큰 것은 수천 결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그 밖에 농장주가 수조권을 행사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거나 문서를 위조하여 자신의 토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국가에 조세를 부담하는 토지가 계속 줄어 들게 된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에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대하기 위해 앞의 여러 방법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방법을 절충하기도 하였다. 매입. 개간으로 토지를 확대한 다음 수조권을 획득하거나, 사패를 받아 개간을 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도 하였다. 또 자신의 소유지가 다른 관리의 수조지로 주어졌을 때 그들에게 일정정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으므로, 그 토지를 자신의 수조지로 지급받아 원래의 토지에 대하여 간섭을 받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농장주는 소유지에 수조권을 받은 방향으로 토지를 확대해 나갔고, 그 위에서 농장을 운영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농장주들에게는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토지 확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동력의 확보였다. 토지를 확보하였다고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있어야만 농장은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비 농민은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거나 새로 매입하기도 하였고, 기증을 받거나 불법적으로 관가의 노비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리대를 이용하여 빚을 갚지 못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양인 농민을 협박하여 노비로 만들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노비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토지탈점과 함께 국가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양인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농장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이들은 여러 종류의 조세를 부담해야 했는데, 그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에 양인 농민들은 자신의 소유지를 팔거나 심한 경우에는 처자식을 노비로 팔아 조세를 납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양인 농민들 중에서는 무거운 조세부담을 피하기 위해 권세가인 농장주의 농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농장의 규모와 분포 농장은 소유 계층만큼 규모도 다양하였다. 얼마 이상의 토지이면 농장이 되고, 그 이하이면 농장이 아니라고 하는 기준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농장의 규모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농장이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거나 군현을 넘나들 정도로 컸다는 기록이 있다. 또 모수사패로 토지를 탈점한 것이 수백 결에서 수천 결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고, 앞서 말한 쌍봉사가 50만석의 쌀로 고리대를 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쌍봉사에 농장의 규모도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장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보면, 국토의 반 이상이 산지로서 평야가 그렇게 많지 않으며, 호남평야나 나주평야를 제외하고 사방을 둘러보아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것은 드물다. 또한 고려시대의 행정단위가 지금의 군이나 읍.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책에 보이는 표현들은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농장의 규모가 작은 경우는 농장주가 거주하는 지방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큰 경우에는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경기.황해도 일대만이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에 걸쳐 분포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통도사는 양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최충헌 집안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농장이 있었다. 또한 장안사는 함열. 인의. 부녕. 행주. 백주. 평산. 안산 등 여러 지역에 농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고려말 이색도 개경 인근. 면주. 이천. 여흥. 덕수. 장단.광주. 광릉촌. 유포. 적제촌. 한산 등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농장주는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사방 경계표시를 하였다. 한 예로 사원에서는 장생표는 세웠는데, 각 소유지의 중앙 혹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방이 사원의 소유지임을 나타냈다. 경상도 일대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통도사는 일부 지역에 12개의 장생표를 세워 자신 소유의 토지임을 표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소유지임을 입증받았다.
농장의 관리와 경영 농장이 규모도 컸고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장주가 직접 경영을 하거나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특히 왕실이나 귀족관료들은 주로 수도인 개경에서 거주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어 자신을 대신해서 조직적으로 농장을 감독하고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농장을 관리하는 곳을 농사나 장사라고 하였다. 농사와 장사는 여러 지역에 있었는데, 그 곳에는 농장 책임자와 함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 살았고, 농장에서 나는 농산물을 저장하기도 하였다. 농장의 총책임자는 주로 장사의 업무를 담당하고 감독하였다는 의미에서 장주 또는 장두라 불렀다. 이들은 주로 농장주의 노비들로, 장사나 농사를 중심으로 농장 내 토지를 관리하고 농장민을 상대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농장주가 권세가인 경우 권력을 믿고 주변의 토지를 강탈하며 인근 농민들에게 강제로 농장 일을 하도록 하였으며 심지어는 쌀이나 포로 고리대를 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염흥방의 노비인 이광은 주인의 권력을 믿고 전 밀직부사였던 조반의 땅을 빼앗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 이들 장주를 통괄하는 상급관리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토지와 노비문서를 관장하고 농장주가 거주하는 곳으로 곡식을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귀족관료들은 가신. 가인이, 국왕의 경우에는 조신. 환관이, 그리고 권력기관의 경우는 전전. 상수등이 이 일을 맡았다. 무인집정자 김준은 여러 곳에 농장을 설치하고 가신인 문성주를 전라도에, 지준을 경상도에 보내 관리하게 하였다. 또 충렬왕은 조신을 각도에 파견하여 공사의 좋은 토지를 선택하고 농민들을 모아 경작하도록 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보허의 예이다. 다음 기록을 살펴 보자.
보허(보우)는 호가 태고인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중국 강남에 가서 석옥화상으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미원장에 가서 친척들을 모아 살았다. 보허가 왕에게 말하여 미원을 현으로 승급시켜서 감무를 두었지만, 일체 지휘는 보허 자신이 하고 감무는 단지 드나들 따름이었다. 밭과 들을 넓게 차지하였으며, 온 들에 말을 놓아 먹이면서 이것을 모두 내승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들이 곡식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감히 쫓아내기 못하였다. 1356년(공민 5)국사인 보허는 양근국에 속해 있던 왕실 장처의 하나인 미원장 소설암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밭과 들을 넓게 차지하여 집안사람들을 모아 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곳은 인구수나 토지의 양이 현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부탁하여 미원장을 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국가에서는 당연히 감무를 파견하였는데, 그조차 보허의 눈치를 보느라고 지방수령으로서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권력과 농장경영은 밀착되어 있었다. 농장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노비들에게는 집안의 허드렛일과 함께 자기의 농장이 있는 곳에 가서 농사를 짓게 하기도 하였다. 노비를 동원한 농장경영은 노비를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하였다. 농장주는 노비농민에게 수확의 반과 함께 노주로서의 권리인 노비 신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토지를 노비농민만으로 경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농장주는 몰락한 양인 농민들과 농장 주변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고 생산물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대를 받기도 하고, 일정 면적의 토지를 경작한 대가로 자신의 소유토지 일부를 떼어 주기도 하였다. 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경우에는 품을 사서 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귀족의 본업과 별업 고려 귀족은 여러 경로를 통해 관료나 승려가 되어,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닦아 온 정치. 사회 사상으로 개경과 지방사회를 이끌어 갔다. 정치. 사회 활동이야말로 이 시기 귀족들이 치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본업이라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도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농장이라고 부르는 고려시대의 대토지소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농장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을 본업에 대한 별업으로 간주하였다. 별업이라고는 하였지만, 실제로 농장 경영이 귀족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제나 그제나 정치나 사회 활동을 원만하게 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 활동과 농장 경영은 귀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요건이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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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아침을 여는 사람들
여기 양동 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주변에 위치한 시장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 세 시까지 근무를 한다. 요즘같이 싸늘한 공기가 피부 깊숙이 파고드는 새벽이면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더욱 짜증스럽다. "아! 도로 중앙까지 나오시지 말래두요!" "여기다 차를 세우시면 어떡합니까!" 오늘 새벽이었다. 아침을 여는 시장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유없는 짜증을 부렸다. 한참 교통 정리를 하다보니 손끝이 시려왔다. '이런 장갑을 두고 왔잖아!' 장갑을 두고 온 나는 어쩔 수 없이 추위를 참고 서 있었다. 그 추위가 나를 더 짜증나게 했다. "수고하시네요. 이거 끼고 하십시오." 지나가던 택시가 내 앞에 스르르 멈추더니 기사 아저씨가 장갑을 내미셨다. 그리고는 택시를 몰고 휑하니 떠나 버리셨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했는데..... 장갑을 끼고 조금은 따뜻해진 나는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교통정리를 했다. 차들에게 진행 신호를 하는 순간이었다. 한 할머니가 갑자기 중앙선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중앙선엔 나와 할머니 둘이서 서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으려는데 할머니께선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셨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저기 시장에 내 물건을 두고 와서요. 미안합니다." 할머니의 공손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졌다. "할머니, 할머니 물건은 꼭 있을 겁니다. 여기 시장 분들은 모두 정직하시니까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아들같은 사람이 참 싹싹하구만."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방긋 웃으셨는데 꼭 어릴 적 내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다시 신호가 바뀌자 할머니는 "총각 수고해"라고 크게 말씀하신 뒤 찻길을 건너 가셨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른 새벽부터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두 내 가족처럼 여겨졌다.
김인수 님/광주시 서구 양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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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4 - 마르크스주의의 탄생: 카를 마르크스(1818--1883) 그때 세계에서는 1876년: 조선, 강화도조약 조인 1881년: 런던에 화력발전소 건설 1882년: 코흐, 결핵균 발견
마르크스 [Marx, Karl Heinrich] 1818. 5. 5 프로이센 라인 트리어~1883. 3. 14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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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의 추종자들은 많이 있었다. 오히려 헤겔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친정부적인 방향을 택하기 이전의 헤겔, 즉 자유로운 종교적 비판을 가하며, 변증법적인 철학과 법철학을 통해 전개시켜온 사회철학에 관심을 쏟았던 때의 헤겔의 제자들이 더 강하게 헤겔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말년의 헤겔에게는 새로운 비판정신과 개혁적인 생명력을 잃고 현정부와 정권에 의도적으로 동조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 정신계에 있어서는 철학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신학이었다. 어떤 교수라도 무신론적이거나 반교회적인 성향이 나타나면 정부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하는 것은 예사로 되어 있었다. 칸트도 한때는 그런 오해를 받았을 정도였고, 말년의 헤겔도 같은 문제로 고민한 일이 있다. 젊었을 때 헤겔의 종교관에는 전통적인 교리와 어긋나는 점이 적지 않게 있었던 때문이다. 헤겔은 결국 자기는 나면서부터 루터 교인이었고 지금도 같은 신앙을 따르고 있다는 신앙고백을 한 후에야 교수자리에 안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초창기의 종교관을 지지하며 개혁의지를 강하게 풍기는 헤겔의 추계자들이 뭉쳐 한 세력을 만들고, 전통적 기독교를 비판하며 정치적 혁신세력을 표방하고 나섬에 따라 정부와 교계는 그 세력과 집단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L. 포이어바흐같은 철학자는 그 때문에 교수직에서 추방당하는 결과까지 빚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난처해지는 사람은 노년기의 헤겔을 지지하는 후계자들의 입장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와 교회에 충실한 헤겔의 뒤를 따르면서 노년기 헤겔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모였다. 그 당시 독일국회의 좌측은 야당이 차지했고, 우측은 여당의 좌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젊은 헤겔 파는 헤겔 좌파로 자처하게 되었고, 헤겔 노인측은 스스로를 우파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좌익이라고 부르는 반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흐름을 우익이라는 명칭으로 대신 하는 계기가 된것이다. 이렇게 되면 헤겔의 철학을 종교나 정치적 색깔 없이 추종하는 세력도 남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헤겔 중도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셋 중 제일 먼저 퇴색해버리는 것은 중도파가 된다. 특수성이 없어진것 때 문이다. 철학사 연구가나 미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개성을 잃게 마련이다. 다음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은 헤겔 우파이다. 세월이 지나 면 새로운 철학으로 남을 것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오히려 남아서 강하게 세력을 확대시켜나간 것은 헤겔 좌파에 속하는 학자들이었다. 그 그룹의 대표적인 사람은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다. 그는 헤겔의 젊었을 때의 종교관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훨씬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를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휴머니즘적 의의를 갖출 때 존재 의미가 있으며, 전톤적인 교리나 교회는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의 "종교의 본질"과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가 없는 사회, 기독교 교리가 인간주의적 방향으로 해소되어야 한다는 과감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에 있어서는 유물론이고, 사상적 방향은 휴머니즘이 되었고,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가난한 계층을 위한 사회개혁을 호소하게 되었다. 많은 소장학자와 사상가들이 포이어바흐의 가치 밑으로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 세력은 하나의 사회적 혁신세력으로 등단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발달을 거듭한 자연과학은 유신론이나 유심론보다는 유물론을 입증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사상 유례가 없는 유물론이 등단하게 된다. 헤겔의 유심론도 지나친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이때 등단한 유물론은 전무후무 한 것이다. 몰례숄 같은 학자는 "광부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그 땀에는 인 이 들어 있다. 그 인을 비료로 삼으면 밀보리가 자란다. 밀보리를 먹으면 그 힘으로 인간은 사고를 하게된다. 그래서 무엇을 먹게 하는가 함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게 되는가 함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인은 사고한다' 는 결론이 나온다" 고 얘기했을 정도다. 이러한 헤겔 좌파의 철학적 결과로 뚜렷이 나타난 것이 k.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그 모든 시대적 여건과 욕구를 정치적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영역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미 철학자이기보다는 사회사상가이며, 레닌이 그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정치철학으로 재해석한 때는 철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바뀌었고, 그것을 정권화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이라는 정당이 탄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는 것은 이 당시의 철학과 사회상황을 잘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85 - "공상"에서 "과학"으로: 마르크스의"자본론"(1867년) 그때 세계에서는- 1867년: 미국,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수 1868년: 쿠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10년 전쟁 시작
사람들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부상했다가 사라진 것은 마르크스 주의, 특히 공산주의의 탄생과 그 소멸이라고 말한다. 70년 동안 세계역사에서가장 광대한 지역에 걸친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별해서보는 것은, 마르크스는 철학과 정 치이념을 제시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공산주의가 정치무대에 등단한 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레닌-스탈린식의 공산주의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것이며, 레닌-모택동의 뒤를 계승하는 사회주의도 자취를 감출것이기 때문에, 누가 보든지 공산주의는 스스로의 한계와 종말을 초래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레닌-스탈린-김일성식의 사회주의가 얼마 가지 못할 것임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모순과 단점을 안고 있었는가? 우리는 그가 주장한 유물사관을 반성해보곤 한다. 마르크스는 세계역사, 즉 경제적 유물사관은 결정지어진 하나의 사회사 과정을 필연적으로 밟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최초에는 모든 사회가 원시공산사회로 발족한다. 공동생산에서 공동 소비를 하는 사회체제가 처음 출발이다. 그러는 동안에 지주가 탄생하고 소작인이 형성되면서 농업사회에서는 자연히 지주와 소작인의 구별이 생기고, 양자 간에 갈등과 모순이 탄생한다. 다시 사회가 산업사회 공업과 더불어 도시생활로 변질되면서는 자본주의 사회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본주의는 소수의 자본주와 절대다수의 근로계층으로 나누어진다. 노사간의 분규와 투쟁은 불가피해진다. 비로소 계급사회로 굳어져버린다. 이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농민과 근로자들이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회주의 사회로의 발전은 불가피해지며, 그 사회주의 이상은 공동생산과 공동소비를 실현시키는 공산사회로 완성된다는 이론이다. 사회구조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절대조건은 경제이며, 경제를 좌우하는 것은 생산수단이다. 모든사회의 밑바탕에는 어떤 생산수단인가 하는 기초, 즉 하층구조가 있고, 그 위에 경제제도가 정착되며, 그 경제제도에 따라 거기에 걸맞는 법률-사회제도가 생기고, 다시 그의에 문화-예술-도덕등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생산수단이 바뀌게 되면 그 위에 자리잡고 있던 상층구조는 모두가 무너지고, 새로운 생산방법에 따르는 새로운 사회 및 문화구조가 형성된다. 생산구조가 기반이기 때문에 다른것들은 그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종교같은 것은 이 생산구조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계급의식에 있어 정신적 약자를 만드는 역할밖에 할 수 없으므로, 종교는 배척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그리고 나타날 수 있는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그 극복의 길은 혁명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계속된 혁명을 정당시하며 혁명은 역사의 필수조건이 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러한 과정을 실천함에 있어 스스로의 모순과 시행착오를 면치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보았으나, 오히려 발전된 자본주의는 복지정책을 통해 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공산주의를 앞지르게 되었다. 생산수단과 경제 일변도의 사회구조관은 경제-정치-문화-도덕-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발전했을 때 더 많은 자유와 보람을 느끼는 민주주의 사회를 창안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계급의 해소가 사회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했으나, 또 다른 정치적계급을 만들었을 뿐, 진정한 계급해소는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 과 인권의 평등을 주장한 자유세계가 자유와 더불어 평등을 구가하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그들은 소외층의 인간 존엄성을 위한다는 인도주의적 목표를 내세웠으나, 공산주의를 정치적으로 구현시키는 과정에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재와 정치범들을 탄생시켰고, 공산정권을 위한 인간 수단화의 죄악스러운 과오를 자행하고야말았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정권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완전히 수단화해버린 대표적인 사회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공산주의는 경쟁세계에서 낙후되어버렸고, 경쟁의 패배는 차지해 두고서라도 정치적 자유, 문화와 정신의 다원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사회로 퇴락해버린 것이다. 이론적인 공산주의의 모순보다도, 그 현실적인 낙후성과 한계성을 자타가 공인하는 위상으로 역사적 퇴락상을 숨길 수가 없게 된 것 이다. 결국 역사는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그 측면적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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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가게'는 널판지로 만든 시렁에 물건을 진열하여 놓고 파는 곳
요즈음은 일상생활품을 어디서 사오나요? 옛날에는 '가게'에 가서 사 왔는데, 요즈음은 '슈퍼'에서 사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가게'라고 하는데, 저의 아들들은 꼭 '수퍼'라고 합니다. 한번은 '슈퍼마켓트' 주인이신 할머니를 수퍼할머니'라고 해서 저는 어느 초능력을 가진 할머니가 계신 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옛날의 '가게'는 물건을 널판지로 만든 시렁 위에 임시로 진열하여 놓고 파는 곳을 말합니다. 요즈음도 가끔 시골에 가면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본래 '가게'(옛날에는 '가개')란 말은 '상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렁, 선반 또는 차양을 뜻하던 것으로 행인이 앉아 쉬게 하던 평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임시로 노점과 같은 것이 생기자 이 '가게'가 점차 상점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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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고월과 소월의 자살 - 이장희 / 김소월
이장희(李章熙) 190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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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金素月] 1902∼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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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금붕어만 그리다 극약을 마셨을까 - 이장희
고월 이장희는 1900년 11월 9일, 대구의 부호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바 있는 이병학의 세 부인 중 첫 번째 부인한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의 경도중학교를 졸업.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12남 9녀),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여 항상 일본인과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받기와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직전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갇혀 하릴없이 금붕어 만을 그리다가 29세를 일기로 극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고월은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뜨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간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하여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
왜 하필 금붕어를 그렇게 많이 그렸을까? 어쩌면 그것은 어항처럼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자방이 커지면 화판이 떨어지듯,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가 흩어지듯이 이렇듯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와 그의 고독과 그의 시가 완전히 합체되었을 뿐이다. 아아 그는 마침내 그 돌아갈 바에 돌아갔을 뿐이다. 나는 다시 무엇을 슬퍼하랴. 그러면 그의 죽음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의 최후의 시였다. 그 최대의 걸작이었다. 김영진은 친구 고월을 추억하며 이런 글을 썼다(1929. 11. 11. 중외일보 기재).
초췌한 얼굴에 초라한 옷차림, 언제나 문학서적을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처마 밑으로만 다녔다고 하는 고월. 그는 스스로 닫힌 공간에 유폐되어 시 말고는 달리 구원이 없었을 것이다. 뼈를 깎듯 시의 일구일자에 매달렸다고 한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시적 직관, 탐미와 우울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우수의 색조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자살하기 4년 전에 그는 달밤 모래 위에서 라는 시를 썼다.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보고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맡는다.
그가 죽기 몇 해 전, 일본의 아꾸다가와(개천)가 자살했을 때 고월은 유서란 것은 이미 현세에 대한 미련을 표시함이 아니냐? 그렇다면 현세에 미련을 가진 자가 무슨 자살의 필요가 있는가? 비록 자살의 용기는 가하나, 그가 남기고 간 일편의 유서는 유감이다. 라고 험절하였다. 그러나 아리시마다께오의 자살에 대해서는 무사기한 천진스러움 이라고 칭찬했다. 평소 그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에 고월은 사진 한 장은 물론이요, 자살에 대한 한 마디 유언도, 반구의 유서도 없이 떠났음은 물론이다.
아내도 모르던 소월의 아편자살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로 귀성군 서산면 평지동에서 한가히 향촌생활을 하던 소월 김정식씨는 지난 12월 24일 오전 8시경, 33세를 마지막으로 별세하였다. 소월은 일찍 배재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영문을 전수하였고 민요의 창작과 연구에 힘을 들였다.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착수 중이었다 한다.
이것은 동아일보 (34. 12. 28일자)에 보도된 그의 죽음을 알리는 관련기사이다. 소월은 1927년, 유일한 지기이던 나도향의 부고를 받고 충격이 컸으며, 또 2년 뒤, 고월 이장희의 자살소식을 들은 뒤 장취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5년 뒤 그도 다량의 아편을 먹고 그들의 뒤를 따랐으니, 요절한 우리나라 천재 시인들의 나이가 너무나도 아깝다.
나도향 24세, 이상 28세, 김유정 29세, 이들은 폐병으로 희생되었고 윤동주 28세, 음독자살한 고월과 소월은 각기 29세와 33세였다. 소월은 옛 스승 김안서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생은 기야요, 사는 귀야라고도 하였고. 사랑은 희망이요, 예술은 영원 이라 한 것도 역시 할 수 없어서 나중에 한 말이지요. 그것도 죄다 참말 쓸데없는 말이지요. 사람은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이 말에는 반대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922년 21세이던 소월은 고향 정주 곽산에 돌아와 마치 시주머니의 끈을 푼 듯 진달래꽃 먼 후일 등 한 해 에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실패와 실생활의 파탄은 그를 타락지경으로 몰아넣었다. 6.25 때 어머니와 3형제를 북에 남겨두고 인민군으로 미군에 귀순, 월남에 성공한 소월의 셋째 아들 김정호씨는 미당 서정주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우리 아버지는 왜놈들 세상에 하나두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게 한이 되어 그걸루 가셨습네다. 우리 어머니 보구두 같이 가 버리자고 제가 생겨나기 전에 조르신 일이 있대요. 어머님은 그래도 살아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지 않겠느냐 말리셨답니다. 그래서 혼자 가 버리신 게지요. 시인이니 그렇기도 했던 게라고 철나멘서 겨우 알게 되긴 했지만 자라면서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댔쉬다. 홍익회에 다니면서 관악구 봉천동 언덕빼기 단칸 셋방에서 살던 김정호씨의 술회였다.
소월의 어머니는 첫 아기를 친정에 가서 해산하였다. 소월의 부친은 부농답게 많은 물자와 음식을 나귀에 싣고 처가를 향해 가던 중 왜인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구타까지 당하여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실성한 아버지, 식민지배하의 암울한 세상, 그가 경영하던 동아지국의 탄압과 운영난, 사업 실패, 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정적 사인은 더 있으리라. 그는 두 딸에 이어 세 아들을 둔 아버지였고,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이었다. 죽기 석 달 전, 곽산의 선영을 찾은 것은 10년 만이었다. 무덤에 성묘하고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그는 아내를 붙들고 앉아 술을 마셨다. 둘은 술에 취한 채 함께 곯아 떨어졌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옆에 누워 있던 남편이 싸늘히 식어 있더라는 것이다.
나야 무식해서 아나요. 또 이야기도 안해 주고요. 마음이 상하고, 아프다면서 술만 마셨답니다. 술만 들면 울기만 했어요. 소월 아내의 증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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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2. 대통령제를 채택할 뻔한 태평천국운동
조선의 동학농민운동, 인도의 세포이 반란과 함께 유럽 자본주의에 대항한 아시아 농민의 대표적인 투쟁 중의 하나인 태평천국운동은 과거 낙방생 홍수전의 기이한 꿈에서 비롯했다. 그 꿈은 자신이 승천하여 금빛 수염의 근엄한 노인에게 진도와 검, 권능을 부여받고 중년 남성의 도움을 받아 천상의 요마를 쫓아내고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광주 거리에서 기독교 안내문을 주워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꿈속의 노인은 여호와, 중년 남성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고 상제회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청조의 더딘 개방정책에 신물을 내고 있던 열강들은 한때 태평천국군을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기독교에 대한 상제회의 이단성과 태평천국군의 공산적 혁명성을 간파하고 청조를 무력 지원했다. 태평천국 지도부는 토지의 균등 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천조전무제도`를 시행하는 등 농민공산주의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조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이 개혁의 주창자는 천왕 홍수전인 조카 홍인간(1822~64)이었다. 그는 최초의 상제교 개종자로서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1852년 이후에는 태평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홍콩으로 피신하여 개선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활동했다. 스웨덴 사람 햄버그와 런던 선교회 회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홍인간은 자연과학, 정치학, 경제학, 외국정세 등을 광범하게 공부했다. 그는 당시 태평천국뿐 아니라 중국 사회전체를 통틀어 서구 문물에 대해 가장 체계적인 지식을 갖춘 최초의 선각자였다. 마침내 그가 광동으로부터 육로를 통해 1859년 태평천국의수도인 남경에 도착하자 홍수전은 그를 최고 행정직위인 군사로 임명했다. 이에 홍인간은 개혁 이론서라 할 <자정신편>을 저술, 본격적인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의 노선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본주의적인 개혁 방안이었고 이전의 태평천국의 평등주의적인 경제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리를 옹호하여 각 생산 부문의 경쟁적 발전, 노동력의 질적 제고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은행, 우편, 새로운 기계 기술의 발명에 대한 전매특허, 철도, 기선, 도로, 광산, 신문, 노비폐지, 고용 노동의 도입 등을 제시했다. 정치 체제에서도 홍인간은 미국식 대통령제 채택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그 밑에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실무를 맡을 것을 구상했다. 하마터면 장발적이라 불리던 농민 반란이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킬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등 외교를 기반으로 한 무역 경쟁을 통해 부국, 강국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개혁 구상은 태평천국의 진압 후에 청조에 의해 추진되는 양무운동이나 같은 시대 일본의 유신세력이 구상했던 근대화 계획과 맞먹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개혁 노선을 확보한 태평천국은 양자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와 서양의 근대적인 기선을 획득하기 위해 상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그들의 형제라고 여기고 있던 서구 열강은 태평천국군이 상해로 입성하려 하자 그 동안의 관망 자세를 버리고 상승군이라는 부대를 조직, 무력 개입에 나섰다. 근대적인 대포 앞에서 태평천국군은 무력했다. 이홍장의 중국군과 영국 장군 고든의 외인부대의 거센반격에 태평천국은 그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천경(지금의 남경)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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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3. 쉽게 노예가 된 우리는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이 제목은 '우리는 아주 쉽게 노예가 되었고 노예가 된 후에도 스스로 매우 고귀하다고 느낀다'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하다는 말은 일반 대중들 위에 구름같이 떠도는 일종의 비애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만난 후 아주 쉽게 발전하였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기대어 살아왔던 우리끼리의 인간사회를 안중에 두지 않고 혹자는 일부러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이에 대한 책임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으며, 혹은 책임을 진다 해도 역시 은연중에 미국의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너희들 세계는 암흑세계로 변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매정하게 스스로를 비웃고 욕할 때,실제로 이 비웃음이 우리의 문명 배경과 꼭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가? 큰 나라의 통이 큰 국민만이 자기를 해부하고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일종의 관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자신을 새롭게 하고자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통이 작은 민족에게서는 이런 측면이 신경질적이거나 일촉즉발의 위기로 나타나게 된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발전된 자'들은 이런 자기 해부의 의의를 하나하나 왜곡시키면서 책임을 회피할 수있는 사상적 무기로 삼으려고 한다. 이것은 유머감의 타락인가? 아니면 인식의 반전인가? 그들은 발전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권세와 이익만을 쫓아 짖어대는 소국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3년 전 내가 대학 1학년일 때는 스스로 노력한 결과로써가 아니라 어떤 부가적 수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표방하는 사람을 매우 싫어하였다. 예를 들면 고급간부 자제들 사이에 끼어들거나 고위층에 선을 놓아 접촉 한다든지 또는 어떤 사상적 지도자의 개인적 에피소드를 많이 알고 떠들어대거나 지하에서 유행하는 음반을 남보다 먼저 구해다가 감상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였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적 선구자가 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남들보다 앞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시대에는 지하 경로가 우리의 식견을 넓혀 주는 중요 수단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보조적이며 결함을 가진 방법일 뿐으로, 이를 통해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상상력이 어떻게 이런 방법에 의해 결부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 민족의 상상력이 어떻게 이런 방법으로 제약을 받을 수있단 말인가? 언젠가 나는 매우 흥분한 상태에서 아내에게 '너는 내게단0에 대해 언급하지 마라. 또 댜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마라. 설사 내가 그들과 사이가 좋을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사상이 최고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영웅이 아니며 영웅이었던 적도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말을 매우 흉폭하게 하였고 아내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매우 슬퍼하였다. 아내는 나를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일반 학우들에 비해 많은 시련을-솔직히 나에게 주어진 대우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겪었으며, 비관과 실의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에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가치관의 고취자이자 옹호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총체적 안목으로 모든 사안들을 바라보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진실되게 무엇인가를 탐구하였고 이런 탐구는 고통을 수반한 것이었다. 고대로부터 근대의 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사람. 나는 이제 이런 나에 대해 반성을 하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세상을 미워하고 불만만 터트리는 단계를 또한번 벗어날 수 있었을까? 아! 미국은 꼭 나를 받아주어야 한다. 내게는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과 상상력이 있고 또 미래에 대한 공평하고 평화적인 품격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원래 목적에 이미 도달한 셈이다.
노예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세상사를 즐거워하는 노예이고 다른 하나는 큰 책임감 아래 전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노예로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노예이다. 사람은 쉽게 자기가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며, 변한 후에는 걸핏하면 '내가 변한 과정은 남과는 달라. 내가 변하게 된 과정에는 눈물을 흘리게 할 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어 라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허튼소리이다.네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80년대 역사가 뒤집어지고 바람이 일기 시작한 때에,나는 매국노 왕징웨이의 편지 몇 통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통함에 깊이 동감하여 이 사람의 감정을 [임안에게 올리는 글[報任]을 쓴 사마천(에 비길 만하 다고 느꼈었다. 이때 나는 왕징웨이와 관련하여 기괴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사실 왕씨는 매우 고통받은 애국자였다. 그는 부관을 거느린 높은 지위에 있었고, 총칭(로慶)에는 개인 방공호까지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수십 년 간 혁명을 위해 노력한 개인적 역사를 돌보지 않고 매국노의 행각을 벌였을까? 나의 이런 소인배적 심리는 네가 왕씨에 대해 재평가하는데 수년의 시간이 걸리게 하였다. 왕씨야말로 정말로 온 산하에 독이 깃든' 것을 눈앞에 두고도 깊은 감상에 젖어 감회를 펼칠 정도이니, 이 얼마나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상고시대에는 도덕으로 다투고, 중세에는 지모로 다투고, 오늘날에는 기력으로 다툰다고 하였는데 그의 기력 또한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던가?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느 매국노가 도덕. 지모, 기력 등 각 방면에 걸쳐 극히 우수한 중국인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적의 진영으로 투항해 간다면 중국은 뛰어난 인재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정치,군사, 종교, 문화교육계나 언론계,실업계,금융계 등등의 수많은 인재들이 '횡화적 건국'의 기치 아래 바글바글 모여 들어 '큰 일을 하는 자는 원망을 듣기 마련'이라는 신념으로 타민족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앞잡이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망치는 사건의 주동자는 종종 각계각층의 우수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이라고 하여 꼭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일반인에 비해 더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고, 빈둥거리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들보다는 투지와 희생정신이 더 뛰어나다. 그들은 또 지조가 있고 기율을 지키며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는 신념도 가지고 있다. 고독 을 마다 않고 스스로 외로운 성현이 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우리는 역사적 안목으로 이들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민족의 전진에 장애가 되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한 원한과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권세와 실리에 빌붙는 정서를 갖게 하였고, 이런 정서로 인해 우리는 대국의 침투를 환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이런 현상을 적절하게 풍자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영국인 가정에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오래된 가재도구들을 내다버렸다. 이 이야기는 복권회사 직원이 찾아와 횡설수설하며 미안하다고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상상을 할 여유를 가지게 되면 원래 있던 사물을 진부한 것이라고 아주 쉽게 버린다. 우리는 오랜 기간 스스로 신성한 반항상태에 놓여 '저자세' 혹은 '반항'에 도취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여 우리 민족문명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생태사관(生態史觀)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정신적인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노예근성을 가진 언론을 '명쾌한 논조'로 여기고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이런 분위기는 상당 기간 온 나라에 만연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뉴욕의 북경인} 중에서 왕치밍이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 의연금을 마련하고 있는 그의 딸에게 '너는 왜 미국인에게서 쓸 데 없고 하찮은 일만 배우니?'라고 욕하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공장이 많아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그래서 매년 전국 규모의 환경보호운동을 벌여야 겨우 대도시 중의 중간 정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올 한 해는 환경운동의 절정기였다. 어느 방송국의 진행자가 '그린피스'조직과 유사한 단체를 발기했는데 많은 사람들로 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혜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초중등학생이 적극 참여하였고 소수의 대학생도 동참하였다. 그들은 많은 공익행사를 벌였고 이것은 시청의 주요업무가 되다시피하였다. 그러나 조직이 산만하고. 상호교류가 가능한 엇비슷한 임의단체가 많기 때문에 말이 많을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이런 착한 아이들의 반짝이는 순수한 신념을 책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들 자기집 뜰이 분위기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누가 좋은 분위기에서 성장하기를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그린피스'의 지원자들이 공업발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과 그들이 표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기만을 쫓아다니는 족속들이란 낙인을 찍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며 불만을 발산한다고 하나, 이런 행위는 외래문화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해 더욱 깊은 인식을 하고 있는 그들의 부모나 형들은 자동차가 뱀을 위해 길을 양보해야 한다는 데대해 절대로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뚜더웨이(杜德偉)는 노래한다. he1p, he1p, he1p 이 지구는 즐거움으로 구해야 한다
이런 이념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 사람들만이 비로소 신명으로 떠받들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대가는 희생일 따름이다. 소련은 수천만에 이르는 부농의 희생으로 국력을 쌓아왔으며 우리들의 생산도 지금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먼저 선반위에 꽃무늬를 새기게 하였다. 누가 이렇게 사치스럽고 쓸 데 없는 호화판의 관념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가? 'he1p, he1p, he1p.' 중국말로하자면 '도와줘요'란 뜻이다.우리는 미국식의 천진함과 미국식의 조잡스러움으로 우리의 심령을 구원받고 싶지는 않다. 미국인들은 '미국이 어느 날 파시스트의 전제국가로 바란다면 그것은틀림없이 국민투표를 통해 얻어낸 결과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중국인이 물질과 정신상의 망국적 노예가 된다면, 이 망국적 노예의 결말은 틀림없이 우리가 지나온 각고의 투쟁과 '진리'에 집착하여 추구한 결과로 얻어진 것일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확실하게 우리의 임무가 나타난 것이다. 미국에 대해 'No'라고 하려면 먼저 자신에 대해 'No'라고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 말은 모두 이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자라나는 혼란을 떨어버리고 땅바닥에 엎어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 'NO'라고 외칠 수 있을까? 우리는 바보같이 두들겨 맞고도 정신적으로는 이겼다고 하는 아큐{阿Q)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우리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우둔하고 공허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동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처한 낙후된 현실에 대한 원한에서 오는 것이며,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달픔에서 오는 것이며. 제3세계 식의 포기심리에서 오는 것이다. 미국이 냉전 후에 최대의 광고효과를 노리고 벌인 쇼는 페르시아만전쟁이다. 패트리어트미사일이 하늘에서 충분한 공연을 해 주었다. 이라크의 대통령수비대가 미국의 융단폭격을 받아 사단 단위로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런 장면은 우리의 노예식 두려움을 심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은, 마치 중년부인이 사교계의 꽃이 된 양 교태를 부리고 아양을 떨며 국제문제의 핵심에서 날뛰어 다음날 신문의 머리 기사에 실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본 우리는 국제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미국에 대해서는 굉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광고의 효용은 우리가 일찍이 보아왔던 것처럼 그렇케 인심을 미혹시킬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미국의 빈번한 외교와 그것의 광고효과 은 암담하게도 비례한다, 레이건은 일찍이 '평화는 힘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설 식의 이익 연결체는 이미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 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의 말과 몸짓 살피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갈수록 심화되어 미국의 우정과 역사까지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국제문제에 한해서는 유일한 초강대국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나토와 동아시아 및 기타 지역의 기지에 병력과 무기를 주둔시켜 놓고 비행과 항해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럽동맹군이나 일본 혹은 기타 동맹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페르시아만에서 연출된 것과 같은 상황은 단 일 분도 지탱되지 못했을 것이다. 클린턴의 방어개념은 마치 전자오락이나 전쟁영화의 장면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능력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런 방어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비교적 적은 인원과 영구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육 .해 .공에서 막강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높은 수준의 무기를 개발하고 능력 있는 군인의 훈련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치 미국의 괴기영화에 등장하는 정론(政論)의 재판 같았다. 미국인이 별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만든 영화한 편을 보자. 실제로는 테헤란 진영을 몰래 습격하여 인질을 구하려는 미국의 군사작전은 완전히 실패였는데 영화에서는 미국 특수부대가 적국의 심장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영웅적으로 인질을 구출해 오고 있다. 미군이 엄청난 군비를 지출하며 진격해 들어간 곳이 실제로는 텅 빈 집이었는데도 람보같은 인물이 세 번 네 번 월남, 캄보디아 등에서 미군 포로를 하나하나 구출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이런 '특수부대' 식의 환상은 미국의 성인에서부터 청소년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독한 우월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그들의 눈에는 두건을 두르고 삿갓을 쓴 민족은, 미국의 기관총과 로켓포 앞에서는 한갓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절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십여 년 전에 이미 어떤 사람이, 일개 공수사단에만 의지하여 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은 지극히 황당하고 가소로운 것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전세계 주요국가의 역사적인 동맹의 결과이며, 미국이 그라나다에 개입한 것과 미국이 파나마를 소탕한 것 등은 근본적으로 일말의 광고 가치조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 역사상 하나의 강대국이 단독으로 전세계를 통치할 수 있던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냉전종결 후 국제정세는 일부 사람이 바라는 논리대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이와는 상반되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맹으로부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또 일본으로부터 아시아 신흥 공업국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하느님의 진리가 내려오고 있는 듯하였다. 국제문제 중에 미국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점과 권력 분배상 미국에게 어떤 교훈을 주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우리는 미국과 맞서 싸운 역사가 가장 긴 국가이다.그러면서도 아메리카합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내지 민속에서 오는 충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대국의 국민이면서도 일본과 같이 공손한 태도로 그런 것들을 학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원래 굳건한 우리의 성품과는 상반되게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자존심까지도 결핍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만약 미국의 강권정책이 우리 중국에서 실패한다면 우리는 온몸으로 그 행운을 받아들이고 기쁨을 자손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영화 {핸들을 놓치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미국으로 먼저 간 남편이 보내온 녹음테이프 하나를 여주인공이 틀었다. 불꽃 같은 욕망을 지닌 가운데서도 매정하고 냉혹한 테이프의 음성은 나에게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사랑하는 당신, (여기까지는 영어로 이야기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 한 이후에....... 사랑하는 당신,우리의 행복을 위해 당신은 꼭 아이 를 낙태시켜야 돼요. 그리고......(대단히 흉폭하게) 당신은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우리가 장차 얻어야 할..... 끝에 나올 말은 보나마나 미국시민권 '그린카드( green card ) '일 것이 다. 이것은 중국을 벗어나려는 급박한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정을 나타낸 것일 뿐 아니라 일반 중국인보다 훨씬 진보되었다는 은밀한 희열을 나타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이런 식의 중국적 정서를 가진 사람 떼문에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보기에는 규율을 잘 지키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 곁에 잠자고 있는 후르시초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호들갑을 떨며 도망갔다 다시 돌아와 선진적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눈초리로 나처럼 국내에 남아 개혁에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나의 심정은 어떠할까. 내 주위에는 다음과 같이 자란 여자아이들이 많다. 이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 매우 영리하여 고집 센 남자아이들에 비해 세심하게 조국을 사랑하고 영웅을 흠모하고 스승과 어른을 존경하였다. 어머니는 이 아이들에게 '아가야, 이리 오너라, 엄마가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가르쳐 주마'라고 하자 사내아이들은 '안 불러요'라며 꽁무니를 빼 버렸었고 여자아이들은 조용히 어머니 옆에 의자를 갖다놓고 다정히 기대어 노래를 배웠다.
친구가 왔네, 좋은 술이 있네, 만약 승냥이와 이리가 온다 해도, 그것을 맞아들이자 사냥하자 -윽 -아아 -총!
어른들은 사내아이에 비해 여자아이가 붙임성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십 년이나 이십 년 후에 주저하지 않고 양놈의 품 안으로 달려가 버리는 것은 이런 '붙임성' 좋은 여자아이들이었고 교육계, 언론계. 경제계, 군사 방면에서 국가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은 그때 '썩은 나무여서 조각도 할 수 없다'고 보았던 사내 녀석들이다. 소련의 어느 범죄심리학자는 '아이들이 보는 동물소설에서 사냥개에 대해 찬양하는 것을 믿지 마시오. 충성스런 사냥개라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소시지냄새를 맡게 하면 주저없이 주인을 물어버리고 그 사람을 따라갑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나는 여기에서 성차별이나 정조관념에 대해 말할 만큼 무료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이전에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유머가 모든 아이들의 몸에 깊이 배어 그것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 위에 둘러쳐진 쇠사슬이 결국 아이들의 상상력을 속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문화의 귀재들이 해방이라는 탈을 쓰고 전국의 취학 혹은 취학전 아동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이질적이고도 별스런 상상의 무덤 속에 빠질 것이다. 아이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좋은 회화는 {성투사(聖鬪士)}라는 만화이고.가장 좋은 음악은 리우더화(의 노래이며.가장 좋은 무도는 마이클 잭슨의 춤이며,가장 좋은 두뇌게임은 {사담을 멸망시키자[라고 알고 있다. 매번 성탄전야가 되면 나는 위에써탕(約瑟棠)에서 스타를 쫓아다니는 오빠부대 떼거리들과 부딪치게 된다. 그들의 미친 듯한 눈및에는 '지겹다, 지겨워, 모든 것이 지겨워 !'라고 외치는 것 같은 무슨 성스러움이라도 어려 있는 듯하였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민주적이고 초연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초원의 집}에 나오는 전형적인 어느 장면, 즉 국회 선거 전의 당내 대표지명대회에서 대회장이 '물고기 팝니다'라고 엉뚱하게 환호하던 소리와 같이, 우리는 열십자를 그리며 군중에 끼어들어 입으로만 크게 외칠 뿐이었다.
푸른 하늘은 저물고 누런 하늘이 일어설 것이다. 때는 갑자년(甲子年)이니,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위에쓰탕 앞은 온통 미친 환호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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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적은 누구인가
"잘 가게. 이제 이곳엔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말게." 교도관이 힘껏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럽시다. 다시 만나더라도 이제 이곳에서는 만나지 말도록 합시다." 그는 옷 보따리를 들고 10 년만에 청송 보호 감호소의 문을 나왔다. 봄 하늘은 맑았다. 멀리 감호소의 산 아래로 가물가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는 천천히 청송 읍내로 가는 들길을 걸었다, 어지러웠다.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맑은 공기를 들이켰으나 여전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갑자기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유를 되찾았다는 기쁨과 해방감을 느낀 것은 잠깐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는 우선 대구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겨우내 혹한을 견뎌 온 보리밭이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내내 보리밭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10 년만에 감옥에서 풀려 나와도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연락할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비감함 때문이었을까. 언 땅을 뚫고 파릇파릇 솟아난 보릿잎들이 바람에 흔들리자 공연히 눈물이 솟았다. 그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빠서 자네 퇴소하는 날 내가 못 가네. 그렇지만 딴 마음은 먹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게. 난 자넬 믿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전활 하게." 그는 서울 삼양동에 있는 정씨를 생각했다. 면회장을 빠져나가면서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툭툭 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결국 서울로 정씨를 찾아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오직 그곳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정씨는 오갈 데 없는 전과자들을 위해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사랑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책임질 보호자가 없을 경우, 형기가 만기되어도 퇴소시키기 않는다는 감호소측의 방침에 따라 그가 퇴소하지 못하고 있자 선뜻 그를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정씨였다. 그는 종교단체의 사람도, 돈이 많아 자선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자신이 전과자였다. 정확하게 전과 몇 범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10여 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온 사람이었다. 그가 출소하자 그의 아내가 선뜻 오갈 데 없는 전과자들을 위해 집을 내놓았다. 그는 대구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 동안 감호소 작업장에서 축구공을 만들어 저축한 돈으로 국밥도 사 먹고 목욕도 하고 소주도 한 잔 했다. 물론 여자를 불러 같이 잠도 한번 자 보았다. 늘 감옥에서 출소하면 꿈꾸었던, 출소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웠다. 그리고 서울 삼양동 '사랑의 집'에서 리어카 행상을 하면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이제 다시는 감옥으로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덤핑용 운동화를 사다가 거리에 내다 팔았다. 돈을 모아 단칸방이라도 하나 얻어 살림도 차리고 여자가 해주는 따뜻한 밥상이라도 한번 받아 보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그를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경원시 해도 그에게는 앞으로의 삶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용기를 내게. 여기에서 실패하면 자네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게. 여기에서도 자네 할 일은 많아. 자넨 그래도 건강한 편이 아닌가. 다른 이들을 좀 보게. 다들 몸이 망가졌어. 마음들도 상처투성이야. 자네가 저들을 돕겠다고 한번 생각해 보게. 저 사람들을 위해 자네가 국도 끊이고 밥도 하고 돈도 번다고 한번 생각해 봐. 그러면 사는 보람도 있을 걸세. 그러다가 누가 아는가. 자네 좋다는 여자가 나설는지. 절대 낙심하지 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게 털어놓고 상의하게. 난 자네 편이네. 자네나 나나 똑같은 신세야." 정씨는 툭하면 그에게 그런 말을 했다. 비도 오고 어디 나갈 데도 없어 술이라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정씨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돼지고기 몇 근을 볶아 술을 권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 정말 그는 이제부터라도 자기의 인생이 좀 제대로 풀려 주기를 바랐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그는 늘 불안정한 삶의 연속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여관 심부름꾼, 구두닦이 등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어떤 때는 잠잘 데가 없어 남대문 시장 골목에서 온기가 남아 연탄재를 껴안고 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는 일마다 실패가 뒤따랐다. 결혼한 지 1 년만에 아내마저도 해산을 하다가 태아와 함께 죽었다. 낙망한 나머지 죽어 버리겠다고 술을 먹고 한강에 뛰어들었으나 누가 그를 건져내었다. 그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인생을 증오했다. 자포자기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을 속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점차 사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가 정씨의 중매로 다시 한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린 것은 출소한 지 2 년 뒤였다. 가끔 '사랑의 집'을 찾아와 빨래와 설거지를 해주곤 하던 이웃 교회 여자였다. 가끔 그에게만 특별히 라면을 끓여 주거나 총각김치를 갖다 줄 때도 있었는데, 정씨가 그녀의 그런 행동을 마음속 깊게 새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웃 교회를 빌려 간단히 동료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는 하나님께 열심히 성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정말 다시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한 여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이대로 그 여자와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다시 결혼한 그 여자마저도 첫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덜렁 아이만 남겨 둔 채. 그는 통곡했다. 절망이라도 말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절망의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동료들이 그를 찾아와 위로했으나 그들의 말은 한낱 넋두리에 불과했다. 정씨와 이웃 교회의 목사가 그를 위해 기도했으나 그들의 기도 소리조차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자신의 인생을 증오했다. 한없이 자신을 미워하고 신을 원망했다. 이젠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대로 인생을 끝내 버려도 더 이상 포기해야 할 인생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누구에게나 평생에 세 번의 좋은 기회가 온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탄스러웠다. 자기의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린 적이 있다면 도대체 그 적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나를 이렇게 만든 적이 누구인지 보여 달라'고 신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커튼 뒤에서 그 적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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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겪는 고통은 햇빛이 있는 곳에서보다 어두운 곳에 있을 때 더 민감하다.
번개가 칠 때 나무 밑에 숨어서는 안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0년 동안 68번이나 번개에 얻어 맞았고 독일 베를린 시의 페추리 교회는 같은 날 두 번이나 번개에 맞아 완전히 타버리고 말았다. 나무의 수액은 전기의 전도체이므로 나무 밑에 서 있는 것은 번개치는 날 수영장 안에 있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이슬은 내리는 것이 아니고 태어난다. 보통 ‘아침에 이슬이 많이 내렸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슬은 내리는 게 아니라 생기는 것이다. 밤에는 온도가 내려가므로 낮 동안 증발된 수분이 이슬로 맺히는 것이다.
안개와 구름, 이 두 단어는 동의어임에 틀림없다. 안개는 지상에 내려와 있는 구름이며, 구름은 하늘에 떠 있는 안개이다.
새가 추락하는 도시, 1992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멕시코시티이다. 지금 인구는 20,000,000명이고 2000년대에는 31,000,000명이 되리라고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도시로 모여드는 인구와, 3,000,000대의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 수만 개의 크고 작은 공장 굴뚝에서 내는 연기가 이 도시를 세계 제일의 공해도시로 만들고 있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공해를 이겨내지 못해 하루에도 수백마리의 새가 추락하는 도시가 바로 멕시코시티이다.
산(山)도 자란다, 100년 전에는 백두산의 높이가 오늘날보다 30센티미터 더 낮았다고 한다.
지는 태양이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 붉다. 왜냐하면 아침보다는 저녁 공기에 먼지가 더 많이 섞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이란 이름은 ‘토끼의 나라’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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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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