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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83 호
4339.12.12 (10.22)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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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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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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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사람이 지나치게 유능해지는 것이 싫다. 그런사람은 대부분 인간미가 없기 때문에. / 펠릭스 프랭크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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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사회/문화/인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대중과 함께 산 무대의 여왕 - 배구자
시대 항일기, 1907-? 활동분야 신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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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극단 송욱제천승 일행 공연!' 시골 담벽에 붙은 극단 선전문을 보고, 한쪽 귀로는 목이 쉰 트럼펫 소리를 들으면서 자그마한 시골 바닥 젊은이들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덴카스라면 시골 바닥에서도 널리 알려진 마술 극단, 몇해 만에 찾아온 덴카스 일행의 마술과 춤과 연극을 보려고 사람들은 벌써부터 극장 주위를 맴돌았다. 극장이 문을 연 첫날부터, 마술과 무용과 노래가 흥겹게 진행되자 시골 사람들은 여전히 가슴을 울렁이면서 어서 다음 프로가 소개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날 황금 프로인 '소공자'에서 주연인 세시 역으로 나온 10대 소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마, 저 초롱초롱한 눈 좀 봐. 겨우 열한두 살이나 될까?" "저 소녀가 오늘밤 연극 주연인가?" "이런 맹추! '소공자'에서 세시로 나오면 주연 배우지 뭐야."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어 간다. 입 다물어." 소녀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내고 있었다. 소녀는 전체 연극 중에서도 어머니를 그리며 유랑하는 대목에 이르자 눈물을 쏟아가며 이야기를 청승맞게 엮어 나갔다. 소녀의 눈물을 보고 관객들도 모두 유랑 소녀의 비극이 자기들 주위에 있는 이야기만 같아 슬피 울었다. 연극이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극장 안을 떠메고 나갈 것처럼 울려 퍼졌다. 배구자의 이름을 부르며 관중들은 천재적인 어린 소녀 연기자에게 환호를 보내었다. '소공자'에서 세시 역을 해내었던 소녀, 그녀가 바로 배구자였다.
1907년 충청남도 대전에서 태어난 배구자가 이렇게 덴카스 일행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소녀 배우로 출발한 것은 순전히 그녀 삼촌의 덕이었다. 배구자가 덴카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녀의 나이 여덟 살도 안된 어린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소문이 나 있던 배정자의 조카딸이었다. 여덟 살 때 소녀 구자는 삼촌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역시 삼촌의 도움으로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나 삼촌이 워낙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배구자의 운명은 그 삼촌에 의하여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덴카스 일행과 친교가 있던 삼촌은 구자에게 학교를 집어치우게 하고 극단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아니, 그 같은 운명은 배구자 쪽에서 마련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린 구자는 덴카스 일행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불렀었고, 유희를 잘할 때마다 칭찬을 받아 오던 터였다. "소질이 있어. 어떻게 키워 볼까?" "소질 정도가 아니라 이건 대성할 수 있는 바탕이 있는 아이야." 덴카스 측의 관심은 마침내 소녀 구자를 극단 단원으로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13세. 그녀는 덴카스 산하 극단인 유라쿠좌의 한 단원이 된다. 무대에 익숙하게 된 구자는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다.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해." 당시 악단의 제1인자로 꼽히던 세키야 도시코가 구자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용기를 내러 세키야를 찾아가 그 문하생이 된다. 천부적인 재질에다 무대를 향한 줄기찬 욕망, 배구자는 출세를 미리 약속받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덴카스 안에서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위치를 구축해 나갔다. 이제 덴카스 측에서도 배구자 없는 극단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되어 그녀는 관객과 극단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마침내 배구자는 덴카스 측으로부터 이름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 노모 가메코. 그녀가 펼쳐 나갈 제 2의 인생이 화려한 인기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구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이른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해의 일이다. 덴카스를 따라간 공동의 여행이었으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전전하는 사이 그녀는 백계 러시아인 아나 파브로바를 만나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다. 무대를 익히고 음악을 배우고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마친 배구자는 그야말로 한 사람의 완벽한 연기자의 수련을 모두 거친 셈이었다. 3년 동안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끝내고 하와이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을 때 덴카스의 인기는 미국인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가운데서도 배구자에게 보내진 박수 갈채는 대단한 것이었다. 덴카스 측에서는 배구자를 그들 극단의 후계자로 꼽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가 날로 높아 갈수록 그녀가 무대를 향한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은 미개지의 땅을 개간하는 개척자의 고난처럼 따르게 마련이었다. 예술이란 천부적인 재질만으로 대성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일본을 거쳐 덴카스가 평양의 해락관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1926년 6월 4일. 새벽녘에 눈을 뜬 덴카스 관계자는 밤 사이에 배구자가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침 일찍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가기로 되었는데 배구자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도망간 게 분명합니다. 배구자 소지품이 보이지 않아요." 덴카스로서는 배구자의 도망으로 당장 내일의 공연이 문제였다. 11년 동안 몸담아 오던 덴카스 측에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간 그녀를 두고 극단측에서는 배신자로 몰아세웠으나, 그녀의 이탈 뒤에 얽힌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덴카스측에서는 일단 평양 경찰서에 의뢰하여 배구자의 행방을 찾도록 부탁하고 미리 짜여진 일정에 맞춰 만주로 떠나갔다. 그 시각에 배구자는 열차편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황주에서 배정자의 마중을 받고 그 길로 서울에 온 배구자는 성북동 배정자의 집에 은신하게 된다. 배정자가 황주까지 마중나갔던 점으로 보거나 그 뒤의 배구자의 움직임으로 보아 배구자가 덴카스를 떠난 것은 뒤에 배정자의 조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기실 배정자는 얼마 뒤 일본인 실업가 이치고리를 만나게 하였고, 그에 따라 배구자의 숙소도 조선 호텔로 옮겨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던 배구자의 인기였으므로, 배구자의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소문은 그만큼 빨리 온 서울 장안에 퍼져 나갔다. 배구자가 일본인 실업가와 만난 뒤 또 이러한 소문도 나돌았다. 배구자는 오래지 않아 신일좌라는 마술 극단을 하나 조직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다른 소문은 배구자와 장래를 약속한 어느 청년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덴카스를 떠났다고도 하였다. 그 같은 소문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듯도 하였다. 본디 덴카스의 남편에게는 전처 소생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과 배구자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소문의 전부였다. 세상 소문이야 어찌 돌아가건 배구자는 성북동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버린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더니 급기야는 1926년 가을, 부모가 있는 김해 산골로 아주 낙향해 버리고 말았다. 김해의 배구자는 이미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음악과, 무용과 기술로 온 사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명성으로 화려한 무대 위의 인생을 보낸 예술가"가 아니었다. 촌부의 차림으로 물을 긷고 살림을 해 나가는 그녀는 아예 무대를 밟아 본 일조차 없는 산골 처녀 그대로였다. 그러나 배구자를 싸고 도는 소문은 시들 줄을 몰랐다. "배구자가 아이를 배었다." 신문은 엉뚱하게도 그 같은 소문을 기사로 실어서 배구자의 해명을 촉구했다. 오늘날의 주간지 기사 같은 특종이 보도되었을 때 세상은 다시 한 번 부글거렸다. 돌연히 모 일간 신문에 그(배구자)가 아이를 배었다는 기사가 크게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었기는 우리는 바라겠다. 배구자가 세류 같은 허리를 나부끼며 나서서 그 기사의 정오를 내기를 바라야 하겠다. 그러나 배구자야! 남산의 불빛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하던 배구자야! 너에게 그럴 만한 용기와 자신이 있겠는가? <매일신문> 기사의 그 같은 횡포는 오늘날에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 만인의 여왕이었던 배구자의 임신설은 그만큼 화제를 모을 만한 일대 사건이어서 신문이 해명을 요구할 정도로 앞장을 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효녀로서 시골스런 치마저고리에 시골 가시내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지 소문대로 부정한 아이를 잉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은둔 생활 2년여. 흥행계에서 배구자를 다시 무대로 끌어내어 한몫 단단히 재미를 보려는 사람들이 배구자의 소재 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무대를 떠났을 무렵, 그러니까 1927년 1월 13일자 <매일신문>에 태백산인이 배구자의 운명을 예언할 정도로 그녀는 아직도 일등 예술가요 만인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배구자 양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덴카스의 유일한 수제자로 연극과 마술을 아울러 잘하는 천재 여배우올시다. 일전 신문 지상에서 보니 죽어도 배우 노릇을 아니하고 부모가 보내는 대로 아무데나 가서 시집살이나 하겠다 하나, 내가 보아서는 역시 배구자 양의 신수는 만인의 흠양을 받을 곳에 길운이 트일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남방의 혹성의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니 밤에는 불빛을 좇아 지나지 않으면 그의 팔자는 거세어질 것이며, 둘째, 그는 나비의 혼령이 사람으로 탄생한 사람이니 날고 뛰고 하지 않으면 그의 몸에는 재앙이 있을 팔자이올시다. 적어도 태백산인의 예언은 여기까지 자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도저히 이 말이 맞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신변에 마성이 세 개가 빛나고 있으니, 이 마성을 치워 버리기 전에는 도저히 신수가 트일 수는 없습니다. ........ 그러하므로 내가 보는 운명 예언을 오직 그 자신의 심리와 태도로써 능히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니 나도 그 마성의 세밀한 정체는 모르나 배씨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여 마성 같은 것을 골라 제멸키를 도모하면 길운이 트일 것이올시다. 그리고 남편을 얻으면 화성을 가진 분이 좋고, 직업은 비료 회사나 운송이 좋겠죠...........
나비의 혼령이 사람으로 탄생할 사람 배구자. 날고 뛰고 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에는 재앙이 있을 팔자라는 배구자. 태백산인의 예언이 맞은 것일까. 배구자는 악극의 개척자 이철의 끈덕진 회유와 설득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이철이 배구자가 장차 미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달려가, "미국으로 떠나신다면 고별 공연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무대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하고 애원한 것이 배구자의 승낙을 얻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928년 4월 21일. 장곡천정 공회당. 백장미사 주최 음악.무용 대회에 참석한 관객은 배구자의 건재함을 다시 확인하였고, '유모레스크', '집시', '앵화', '수부', '인형', '아리랑', '사의 백조'를 춤추는 배구자의 가녀린 율동미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날의 발표회를 시발점으로 배구자의 무대 활동은 재개되었다. 배구자 예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육성하기도 하고, 지방 순회 공연으로 전날의 인기를 바탕 삼아 화려한 무대의 여왕을 꿈꾸지만 그녀의 인기는 차츰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객석에서는 간혹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배구자의 인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그 무렵에 들장한 최승희의 신선한 매력은 배구자가 점유하고 있던 독무대를 조금씩 조금씩 침식해 들어갔다. 이미 홍순언의 아내가 된 배구자는 자기 개인의 인기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을 절감하고 입체적인 대형 무대를 구상하게 된다. 남편의 후원으로 1935년 11월 1일에는 서대문구 충정로에다 동양 극장을 개관한다. 동양 극장이란 이름은 윤백남이 짓고 독견 최상덕이 지배인을 맡아 획기적인 공연을 갖게 되었다. 개관을 이틀 앞둔 날 <매일신보>(1935. 10. 30.) 기사는 그 당시 배구자 악극단의 진용과 동양 극장의 규모를 소개하였는데 이를 보면 알 만하겠다.
신축 낙성 개관 피로........ 11월 1일부터 배구자 악극단의 향토방문 대공연과 대작 영화 동시 봉절을 감행하는 레뷰, 연극, 영화의 3중주적 특별 대흥행은 사계 만도인사의 절대 기대에 봉부할 것을 자신한다. 중요 순서.만국 '멍텅구리 제 2세' 5경, 촌극 '월급날' 1경, 무용극 '급수부' 1경, 그 외 20여 명으로 조직된 소녀 관현악단의 무대 연주(조선국) 수종, 무용(클래식. 재즈. 텁푸)5종, 조선 무용 '아리랑' 창극, 합창, 뮤직 플레이. 객석 600의 회전 무대, 호리촌트 등을 갖춘 국내 유일의 연극 전문 극장은, 그러나 1주일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나서 뜻밖에도 고별 공연을 갖게 되어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배구자 악극단 석별 흥행 주간....... 11월 8일부터 12일까지.' 이 공연을 마치고 그녀는 서울을 벗어나 일본으로 순회 공연을 떠난다. 국내 공연보다는 일본 공연을 주로 하던 배구자는 남편 홍순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질적인 동양 극장의 주인이 되지만, 그 때부터 배구자의 인생과 사업은 급전되어 불과 5년의 세월을 채우지 못하고 극장을 양도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고 만다. 개관 이후 동양 극장은 전속 극단 청춘좌, 희극좌, 동극좌, 호화선 등 화려한 조직으로 장안의 인기를 독점하였었다.
기성 배우로 박제행, 서월영, 심영 등 토월회 출신과 황철, 연구생으로 김승호, 여자 배우로 김선초, 차홍녀, 지경순, 김선영, 신인으로 한은진, 유계선 등이 주축이 된 청춘좌, 변기종, 송해천, 하지만 등의 동극좌, 전경희, 석와불, 손일평, 김원호, 최영순 등의 희극좌, 게다가 전속 작가로 박진, 이서구, 이운방, 송영, 임선규, 김건, 최독견, 김영수 등의 활약은 배구자 내외를 돈방석 위에 올라 앉게 하였다. 지금도 가끔 입에 오르내리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검사와 사형수' 같은 프로가 동양 극장에서 막이 오랐고, '승방 비곡', '국경의 밤' 같은 작품이 모두 동양 극장 무대를 거쳐 소개되었다. 그러나 남편 홍수언이 죽자 배구자는 어찌된 셈인지 1년도 채 안 되어 김해의 미곡상 소사로 출발하여 거부가 된 동양 연료 회사의 김계조에게 재가하더니, 둘째 남편 김계조는 동양 극장을 팔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1939년 8월, 신문에 오르내린 기사로 보면 동양 극장은 36명의 채권자에 빚이 16만 원이라 했다. 8세에 무대를 밟기 시작하여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배구자에게 인기의 하락은 물론 경제적인 파탄이 오는가 했더니 그녀는 홀연히 일본을 떠나 버리고 만다. 배정자의 조카딸로서, 최승희 이전의 당대 제일의 무영가 배구자의 소식은 그 뒤 단편적인 것들만 떠돌뿐 지금은 역사의 장 저쪽으로 아주 사라져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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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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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재상 이자연의 관료생활 - 박재우(서울대 강사)
이자연의 수상 취임 집안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관료 중에서 최상의 지위인 문하시중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재상이 된 지 9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수상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재상이 된 다음에 정기 인사 과정을 밟아 승진한 것이기는 했지만 53세의 나이로 수상에 취임하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개인과 집안의 영광이었다. 아내와 아들 딸 부부로부터 이미 축하 인사를 받았고 소식을 들은 친척과 동료들의 축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음식 장만이나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이 분주하였지만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다. 출세가 이렇게 빨랐던 것은 개인적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가문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한은 중추원부사까지 승진한 고급 관료였고 게다가 고모부가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였다. 그가 1024년(현종 15)에 22세로 과거에 급제한 것은 물론 능력도 있었지만 현종의 왕비에 대한 배려가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고종사촌이 현종의 셋째 왕비가 되어 덕종과 정종을 낳고 또 다른 사촌은 넷째 왕비가 되어 문종을 낳았다. 사실 이자연은 지금 왕인 문종과의 곤계도 매우 각별하였다. 그는 문종의 외가쪽으로 촌수가 높았고 나이는 문종보다 16세나 많았다. 또 문종은 형들인 덕종,정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에 그가 곁에서 성실하게 보필한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래서 문종은 이자연을 매우 신임하였다. 28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문종은 곧 45세의 이자연을 이부상서 창지정사로서 재상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도 빠른 승진을 거듭해서 평장사를 거쳐 마침내 수상인 문하시중이 되었다. 맏딸이 문종의 왕비볼 선택된 지 3년에 또 다시 커다란 경사를 맞이한 것이다.
왕명을 전달하던 중추원 시절 생각해 보면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가 되어 온 친척들의 찬사를 받으며 기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조정의 온갖 중요한 직책을 다 맡아 보고 나이도 벌써 50중반이나 되어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옛날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처음 임명된 곳이 왕이 마시는 술을 빚는 일을 하던 양온서였는데, 출근한 첫날 어찌나 흥분하고 긴장했던지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보내고 말았다. 그 뒤 실록이나 시정기를 편찬하는 사관이나,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관리들의 비행을 감시하는 어사대등 여러 관청에서 근무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중추원 승선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승선은 국왕의 명령을 해당 관청이나 관료에게 전달하고, 또 관청이나 관료들이 아뢰는 문서를 국왕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물론 승선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고 문서의내용에 따라 전달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 밖에 국정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국왕의 자문에 대답하는 측근관료의 기능도 하였다. 국왕을 늘 가까이 모시는 직책이었던 만틈 정치적인 부담도 컸고 또 혜택도 많았다. 이자연이 승선에 올라 국왕을 보필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을 막 넘긴 때였다. 그 나이에 승선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으므로 주위의 부러운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물론 왕실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이자연이 승선이 되였을 때는 덕종이 나이 겨우 16세로 왕위에 오른 다음 해였다. 국왕의 나이가 어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경륜이 길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승선으로서 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였다. 왕명이나 신료의 결재요청 서류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덕종은 이자연에게 종종 자문을 구했고 그 때마다 적절히 대답해야만 했다. 특히 당시는 거란과 화평을 맺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경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어서 신료들 사이에 외교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던 시기였으므로 국왕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업무 자체의 성격상 늘 긴장해야 했고 이틀에 한 번은 숙직을 해야 했으므로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이러한 생활을 1040년(정종 6)까지 근 10년 가까이 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승선은 당시 관료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였고 이 곳에서 능력을 인정받기만 하면 재상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일종의 승진코스였다. 지금의 왕 문종은 덕종, 정종 때 이자연의 활동을 눈여겨보면서 민첩한 업무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자연은 30대를 그렇게 국왕 가까이서 보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행운이었다.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던 이부 시절 중추원이 궁궐 안에 있었던 반면 6부는 광화문 밖에 있었다. 이자연은 잠시 형부에서 근무한 적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이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은 승선으로 활동하던 덕종 때부터였다. 고려의 관직은 겸직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자연도 이부와 중추원 두 곳의 업무를 겸직하였던 것이다. 상서성은 상부의 상서도성과 하부의 6부로 구분되었는데, 상서도성은 주로 중앙관청과 지방관청 사이에서 문서를 전달하는 사무를 담당하였던 반면 6부는 각각 기능에 따라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 등으로 구분되어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던 것은 인사를 담당했던 이부였다. 이부에는 관리들의 인사기록부인 정안이 있어서 평소에는 주로 이것을 정리하였다. 그러다가 정기 또는 임시 인사가 있을 때면 각 관료들의 승진과 탈락을 심사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근무 실적을 평가하는 방식은 중앙관료의 경우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켰는가, 휴가 일수를 초과하지 않았는가, 업무를 공평하게 처리했는가 등을 평가하고, 지방관료의 경우는 농사를 장려하고 있는가,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였는가, 재판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는가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업무는 이부에 소속된 고공사가 담당하였는데, 인사이동이 있을 때 자료를 이부에 제출해서 인사 행정의 근거로 삼았다. 이부는 각 사람의 인사기록부와 고과성적표를 참고해서 승진과 탈락을 심사했던 것이다. 대개 승진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30개월을 근무하면 가능하였고, 서리는 90개월을 근무해야 했다. 관리 인사는 매년 6월과 12월에 각각 한 차례씩 있었다. 대개 전자를 임시 인사, 후자를 정기 인사라고 불렀다. 이부의 모든 관료들이 모여 함께 논의하면서 합의제의 방식으로 인사를 결정하였지만, 워낙 많은 사람을 다루어야 하고 또 인사서류의 양이 많았으므로 자칫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이때만 되면 며칠 동안 퇴근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인사 문서를 국왕에게 아뢰면 국왕이 최종 판단해서 결재하였고 그것에 따라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 밖에 국왕의 특별한 명령이 있거나 공로를 세운 경우에 왕명에 따라 해당 관료에게 수여할 적절한 관직을 심사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자연은 오랜 이부 근무가 자신의 관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수많은 관료들의 인사 기록을 낱낱이 볼 수 있었고 또 인재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뽑아서 어느 관청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커다란 수확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종이 즉위한 뒤에 그는 이부상서로 있으면서 참지정사에 올라 처음 재상이 되었던 만큼 이부 시절이 그의 관직생활에서 중요한 획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원래 고려에서는 대개 상서성의 복야나 6부의 상서가 참지정사를 겸직하면서 재상이 되기 시작하여 중서시랑이나 문하시랑으로 승진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장사를 붙여 상위 재상이 되었고 문하시중이 되면서 최고 관직을 받았다. 지문하성서나 정당문학도 재상이었지만 이들 관직에 임명된 사례는 이자연이 재상이 된 당시까지만 해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재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참지정사, 평장사, 시중이었다. 이자연도 이러한 승진과정을 거쳐 시중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왕을 견제하는 중서문하성 생활 이자연은 수상이 된 다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는 중서문하성에 출근해서 우선 출근기록부인 공좌부에 성명을 하였는데 이것은 뒤에 인사 고과에 참고 자료가 되었다. 원래 관료들은 사시에 출근하여 유시에 퇴근하였는데, 문종 2년부터 해가 길 때는 진시에 출근하고 해가 짧을 때는 종래처럼 사시에 출근하라는 왕명에 따라 업무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한달 내내 쉬지 않고 업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매달 1일, 8일, 15일, 23일은 정기 휴일이었고 그밖에 설날, 입춘, 한식, 입하, 칠석, 입추, 추석, 추분, 연등, 팔관 등 연간 54일 이상을 특별 휴가로 보내었다. 하지만 휴가의 전체 날수가 100일을 넘지는 못했다. 이처럼 휴가가 많았던 반면에 업무에 임해서는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우선 그는 중서문하성에 출근해서 일상 업무를 보아야 했다. 이러한 업무 중의 하나는 국왕의 명령 문서인 제서를 심의하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모든 국정이 원칙적으로 국왕의 명령으로 반포되었고 그것은 문서로 내려졌는데 시행되기 전에 먼저 중서문하성의 심의를 거쳐야 했다. 이자연은 시중이 된 다음에 하루에도 몇 통씩 내려오는 제서를 읽고 그것을 처리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혹시 잘못을 범할 경우에는 탄핵을 받거나 문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035년(정종 1)에 급사중이 되어 몇 년간 제서를 검토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제서의 내용은 이의 없이 처리될 수 있었으므로 조금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제서에 대한 이의 제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왕인 문종이 즉위한 뒤에도 벌써 몇 차례나 중요한 이의 제기가 있었다. 대부분 인사 문제였다. 1057년(문종 11) 정월의 일이었다. 어느 날 이자연이 업무를 보고 있는데, 승선이 왕명을 전달하므로 열어 보았더니 고유를 우습유에 임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관료들 사이에서 상당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탐라(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자연은 문하시랑평장사, 급사중과 함께 이 문제를 의논한 결과 출신 배경상 간관에 임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자연은 그가 간관에 임명될 수 없는 이유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올리면서 재능이 아깝다면 다른 관직을 제수하라고 청하였는데, 왕은 그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따라 주었다. 이처럼 중서문하성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국왕이 자의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권한은 인사 문제만 아니라 왕명으로 내려오는 모든 사안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서문하성에서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자기의 주장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자연이 시중이 된 직후인 문종 9년의 일이었다. 문종이 갑자기 왕명을 내려서 좋은 땅을 선정하여 흥왕사를 창건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굳이 사찰을 건립할 필요가 없고, 또 사찰을 지을 경우에 백성들이 노역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입장에서 반대하였으나 문종은 끝내 따르지 않고 일을 강행하였다. 왕명에 대한 이의 제기는 국왕과 직접 대립하는 것이므로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이었다. 또 중서문하성은 관청이나 관료가 왕에게 아뢴 업무가 결재되어 반포되는 과정에도 관여하였다. 즉 고려의 관청과 관료들은 고유 업무를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받아 시행하였는데, 결재받은 문서가 해당 부서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중서문하성이 심의함으로써 국왕의 일방적인 결정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정 결정을 보좌하는 재상 활동 이자연은 재상의 으뜸인 수상으로서 더욱 중요한 일을 수행하였다. 고려에서는 흔히 재상의 임무를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자연은 때로 중서문하성에 부속된 정사당에서 다른 재상들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고, 시행해야 할 일이 있으면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받아 추진하였다. 문종 10년의 일이었다. 당시 추진되던 흥왕사 창건 사업으로 개경 인근 덕수현의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려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이자연은 다른 재상들과 논의한 끝에 덕수현의 부역을 적어도 1년간은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사실 흥왕사 창건 사업은 문종이 중서문하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일이어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재상들 중에서 문종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수상 이자연이 대표로 이 문제를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종은 뜻밖에 2년간의 부역을 면제하라고 허락하였다. 재상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국왕은 외교, 군사나 인사 문제와 같이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 생기면 언제든지 재상에게 자문을 요구하였다. 이 때 재상은 국왕의 자문을 받아 국정을 논의하면서 확대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문종 12년의 일이었다. 제술과를 10번이나 응시했다가 낙방한 강사후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두고 열린 확대회의에서 논란이 있었다. 시중 이자연의 견해에 동조한 관료들은, 원래 10번 낙방하면 나라에서 관직을 주는 관례에 따라 강사후를 등용해야 하지만, 그의 출신이 잡로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국법에 잡로는 과거에 급제하거나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에만 등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참지정사 김현의 견해에 공감하던 사람들은 10번이나 과거에 응시한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경우에는 대개 국왕이 여러 가지 논의를 참작해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 때 문종은 이자연 등의 견해가 옳다고 하여 수용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재상은 국정을 발의하거나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결정적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으므로 국정 결정 과정에서 국왕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국정 의결은 권력구조상 대부분 행정 업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정치운영에 효율성을 거둘 수 있었다. 참지정사등 일부 재상들이 행정관청의 관료직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6부와 같은 행정관청에 소속된 재상이 해당 관청에서 논의할 범주를 벗어나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정사당에 가서 안건을 제기하고 다른 재상들과 함께 논의할 수 있었다. 또 행정관청에서 아뢴 업무를 국왕이 혼자 결정하지 못할 경우에 해당 관청에 소속된 재상이 자문에 참여함으로써 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부상서 참지정사인 이자연이 이부의 업무인 인사문제를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요구하는 경우 국왕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재상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이 때 이자연은 당연히 참지정사의 자격으로 정사당에서 그 문제를 함께 논의하게 되므로 이부의 입장을 가장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자문회의도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 국왕도 자문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참고함으로써 이부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적절한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정치체제가 매우 뛰어난 효율성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수상의 임무가 마냥 공식적이고 딱딱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국왕이 베푸는 술자리에서 조금은 사적인 형식으로 만나기도 하였다. 이 때는 술잔을 돌리거나 시를 짓는 등 여흥을 즐겼다. 이자연은 다른 재상들과 함께 문종이 베푸는 술자리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흥취를 맛보기도 하였고 또 문종이 직접 따라 주는 술잔을 받기도 하였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자연은 자신이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지내 온 관료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비록 하나가 일찍 죽어 7명이 되었지만 모두 잘 자라준 아들들이 있고 세 딸이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모두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덕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승려가 된 아들 소현이 머물고 있는 절에 찾아가 시주도 하고 아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 고려의 모든 관료들이 이자연과 같은 영화를 누렸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이자연의 출세는 고위 관료 집안에 태어났고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또 딸들이 모두 왕비로 뽑혔던 특수한 사정이 작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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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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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이십 년만에 보내온 소포
"소포요! 도장 가지고 오세요."
우체부 아저씨였다. 도장을 가지고 나오니 꽤 큼지막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주소도 맞고 분명 내 앞으로 온 것은 맞는데 겉에 쓰인 '안춘기'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뜯어 보니 그 속엔 질 좋은 면양말이 어른 것, 아이들 것 해서 가지가지 들어 있었다. '양말? 안춘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혹시나 싶어서 친정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춘기가 네게도 양말을 보냈어? 녀석두, 왜 너 중학교 다닐 때 잠시 우리와 함께 살았잖니."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난 그제서야 안춘기라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춘기는 촌수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아주 먼 친척 되는,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의 조카뻘 되는 사람이었다. 춘기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혼자 춘기를 비롯한 일곱 형제를 키우셨는데 한 입이라도 줄일 요량으로 춘기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양말공장에 취직시켰다. 딱히 있을 만한데가 없던 춘기는 우리 집에서 묵게 되었다. 이른 아침 동갑내기인 춘기와 나는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함께 집을 나섰다. 그 애는 양말공장으로 나는 학교로, 낮에는 양말공장에서 밤에는 무슨 식당에선가 일을 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는 춘기는 우리 집엔 사과 한알 사오는 일이 없었다.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 주어도 어머니는 춘기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것을 늘 미안해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춘기는 양말 꾸러미를 어머니 앞에 내놓았다. 공장에서 흠이 생겨 버려야 할 것들이었는데 딴엔 자식처럼 대해 주는 어머니에 대한 보답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양말이 한짝도 없어서 어머니는 그 양말을 다시 깁고 꿰매야 했다. 그것을 본 춘기가 몹시 미안해 하자 어머니는 "춘기 때문에 온 식구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겠다."하시며 춘기의 어깨를 다독거리셨다. 그 춘기가 소포를 보내 온 것이다. "그래, 그 춘기가 양말공장 사장이 되었다는 구나. 그간 연락도 없다가 이십년 만에 전화를 해서는 네 주소도 묻더라. 그래서 알려 주었는데......"
김희정 님/서울시 노원구 상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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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76 - '창조적 진화'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14) 그때 세계에서는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1907년: 조선,헤이그밀사사건
베르그송 [Bergson, Henri-Louis] 1859. 10. 18 프랑스 파리~1941. 1. 4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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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에 가장 위대했던 과학자가 누구였는가를 묻는다면 아인슈타인을 생각할 것이다. 만일 훌륭한 철학자는 누구였는가를 물으면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은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않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다 유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히틀러의 독재정치를 떠나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고, 베르그송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콜레지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했다. 어떤 이들은 그 대학을 학사원 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수한 대학으로, 그 대학의 교수들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는 연구 중심의 대학이었다. 지금도 그 대학에 가면 베르그송이 강의하던 교실이 있고, 거기에는 작은 베르그송의 흉상이 벽 앞에 놓여져 잇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당시에는 세계철학계의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강의실이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철학을 연결지은 철학자였다. 옛날에는 철학자들이 철학에서 철학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최근의 철학자들은 어떤 과학적 근거를 가져야 객관성이 있는 철학자로 인정받는 것이 보통이다. 러셀이나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는 수학가로 출발하였고, 먼저 말한 딜타이는 심리학을 연구했다 .이에 비하면 베르그송은 생물학을 연구한 편이다. 그래서 그의 학설에는 생물학적인 관점들이 적지 않게 삽입되어 있다. 한때 사람들이 그를 '삶의 철학자'로 불러준 것은 그가 독일적인 삶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을 근거로 한 생명의 현상과 의식구조와 삶의 현실을 취급했고, 그로부터 철학이론을 인출해낸 때문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프랑스인들은 개성과 창조력이 뚜렷한 학설을 창출해 발표하기 때문에, 영국인들과 같은 전통을 이어받는다든지 독일철학자들과 같이 체계화하는 습관이 적은 편이다. 독일인들은 방대한 체계일수록 위대한 학설로 여기며 어려운 개념을 써야 우수한 학자로 인정하려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독창성과 남의 흉내를 내지 않는 창조적 학설을 소중히 여긴다. 베르그송이 바로 그런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전에도 비슷한 학설이 없었고, 그의 후에도 뒤를 계승하는 철학자는 별로 없었다. 베르그송은 우리들에게 이미 고전에 해당하는 두 저서를 남겨주었다. 그 하나는 "창조적 진화"(1907)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둘 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후자는 두세 종류의 번역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독한 책이다. 이제 그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으나, 창조적 진화는 모든 생명계와 인간의 삶은 진화와 변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인간적 삶의 본질은 그 정신적 창조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들의 철학사속에는 데모크리토스 때부터 내려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있다. 유물론자들은 물론, 과학자들중의 대부분이 그런 견해를 지녀왔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것은 생명의 본질도 아니며,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의 구조에도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본질은 생명의 창조적 진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 같은 목적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목적은 주어질 수도 없고 만들어낼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그 중간에서 계속적으로 창조적인 진화를 거듭해가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세계적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송은 닫혀진 사회와 열려진 사회를 문제삼는다. 모든 침체와 반창조성과 악은 폐쇄적이며 닫혀진 사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열린 사회는 언제나 새로운 도덕과 가치를 창조해나갈 수 있고, 그 사회적 진취성과 창조성이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삶을 추진시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도 그렇다. 종교는 교리나 형식에 붙잡혀 정직인 것이 될 때는 역사의 침체성을 초래하며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가 진리로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이내믹한 활력과 창조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가 동적인 힘을 가질 때 그 사회를 발전시키나, 정적인 침체성과 폐쇄성에 빠질 때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런데 철학계에서는 이러한 그의 대작보다도 몇 가지 짧은 논문들에 더 큰 주목을 끈다. 그 논문들은 의식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해주며, 그 과학적 분석에서 시간의 문제와 삶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41년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색다른 보도를 접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죽기 2년 전 영세를 받고 기독교 신자로 귀의했다는 사실을 책임신부가 알려준 것 때문이었다. 베르그송은 자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조용한 삶은 계속하고 싶어 그 업신의 사실을 죽은 후에 발표해주기를 신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그가 "인류의 살 길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서로 위하고 사랑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기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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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거지'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남에게 빌어서 얻어 먹고 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것은 '거지'입니다. 이 '거지'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어떤 책을 보니까,'거지'는 '걷다'(거두어 드린다)의 '걷-'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인 '-이'가 붙어서 '걷이'가 되었는데, 이것이 구개음화되어 '거지'가 되었다고 써 놓았더군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옛날 형태를 모르는 데에서 온 소치입니다.
옛날 문헌을 보면 '거지'는 '거아(아래아 자)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어 '걸자'(빌 걸, 아들 자)의 중국어 발음을 그렇게 써 놓은 것입니다. '걸'에 접미사인 '자'가 연결된 단어입니다. '자'는 중국어의 접미사인데, 우리말에 와서는 두 가지 음으로 읽혔습니다. 하나는 '자'이고 또 하나는 '지'입니다. '판자'는 '판자집'일 때에는 '판자'이지만, '널판지'일 때에는 '판지'로 읽습니다. '주전자, 감자, 사자, 탁자' 등의 '자'는 '자'로 읽지만, '가지(식물의 하나), 간장 종지, 꿀단지' 등의 '자'는 '지'로 읽습니다. 남자와 여자 생식기의 이름인 ''-자'가 붙은 것인데 모두 결국은 한자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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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불행한 가계의 화가 - 로트렉 / 반 고흐
앙리 토루즈 로트렉(1864∼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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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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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센티미터의 단구 로트렉
로트렉은 남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혈족혼인으로 인하여 로트렉은 약한 체질을 유전받게 된다. 너무나 병약하여 학교를 퇴학하고, 열 살부터 어머니의 지도로 공부를 하게 된다. 14세에 자택 응접실 마루에 넘어져 왼쪽다리가 골절되고, 그 이듬해는 산보하다가 도랑에 빠져 또 오른쪽 다리의 대퇴골이 부러졌다. 두 다리의 골절에도 상체는 정상이었으나 하체는 발육이 정지되어 기형적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137센티미터의 난쟁이였다. 육체적 핸디캡을 잊으려고 그는 술을 마셨고 마침내 알코올 중독으로 요절하게 된다. 그는 모델들이나 창녀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그 중에서도 최초의 모델이었던 쉬잔느 발라동은 그의 애인이었다. 미인이던 발라동은 뒷날 화가가 되었으며, 유트릴로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발라동이외에도 여러 창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 무렵 얻은 성병은 그의 단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몽마르트의 카페 물랭루즈, 꽁세르나 카페 샹땅 등은 그의 예술의 고향이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 술집의 분위기, 거기에 펼쳐지는 풍속들, 춤추는 무희, 흥청거리는 카페 한 구석에 앉아,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을 화판에 담고 있었다. 그 자신이 불구자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레슬링하는 그림과 말을 많이 그렸다. 프로 레슬러들이 가진 튼튼한 육체에 대한 열망과 말들이 가진 튼튼하고 긴 다리에 대한 동경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특히 드가를 좋아했는데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소재가 같았다. 카페, 서커스, 경마장, 극장무대, 무희. 약동하는 인물의 포즈나 생생한 생동감을 스냅쇼트적으로 정착시키고 있었다. 그들 둘은 자연과 태양의 세계를 떠나 인공적인 빛의 세계를 택했다. 그들의 관심은 동적, 유기적, 인간적인 것에 있었다. 그러나 드가는 욕실 속의 나부 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여 정확한 관찰자로서 그린 데 반해 로트렉은 애정을 가지고 대상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는대로 그리는 인간미 넘치는 화가라는 차이가 있다. 인상파 화가는 색의 화가 라고도 한다. 로트렉은 선의 화가 였다. 그만큼 소묘에 뛰어난 화가였던 것이다. 그는 앙보와즈가와 물랭가의 매음가를 드나들며 50여 점이나 되는작품에 창녀들을 그렸다. 창가에 있을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던 로트렉에게 창가는 그의 집이자 아뜨리에였던 것이다. 1899년 2월, 그는 물랭가의 한 창가에서 의식을 잃고 만다. 서른 다섯 살 때였다. 그 해 겨울 로트렉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나는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갇혀 있을 바엔 죽어 버리고 말겁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다. 열두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에 자유를 빼앗긴 자는 금방 죽어 버리게 되는 것 이라는 말과 우연히 일치되고 있었다. 파리의 매스컴들은 로트렉의 입원을 방탕, 주벽, 광기 로 풀어 보도했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병실에서 기억을 더듬어 서커스에서 라는 39점의 색연필 소묘연작을 그려나갔다. 몇 개월 뒤, 안정을 되찾아 퇴원했으나 그의 음주벽은 더욱 심해졌고 따라서 건강도 더욱 악화되었다. 나중에는 술로 인해 다리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마비된 다리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화가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손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트렉은 어머니가 계신 말로메로 가서 요양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죽음을 가까이 자각하게 된 로트렉은 그야말로 남은 시간을 아껴가며 그림에만 몰두한다. 8월 20일, 다시 발작이 일어났다. 보드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머니 곁에서 죽기를 바랬다. 1901년 9월 9일, 새벽 2시에 어머니와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고흐가 죽은 나이와 똑같았다. 그는 이렇게 자주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도 난 결코 그림따윈 그리지 않았을 거야.
죽음에서 조차 정다웠던 반 고흐 형제 동시대를 살면서 똑같이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로트렉과 반 고흐. 이 두 화가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걸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네덜란드 태생의 반 고흐는 약 840점의 유화와 수많은 데생을 남겼는데, 이것은 모두 그가 죽기 전 10년 동안에 제작된다. 고흐는 16세 때부터 백부의 화랑에 근무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그가 보리나쥬 탄광지대에서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나서이다. 이것을 그대로 묘사해서 전 인류앞에 고발하려는 의욕에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데생공부를 시작한 것은 27세 때였다. 33세가 되자 그의 신경과민증세가 더해졌다. 동생 테오의 보살핌으로 몽마르트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는 로트렉 등 인상파 화가들과 어룰리면서 음주와 퇴폐적인 생활로 점차 건강을 해치게 된다. 35세, 파리를 떠나 아르르역 근처, 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색을 칠한 이층집을 빌린다. 방안을 온통 해바리기 작품으로 장식해 놓고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폴 고갱을 초대하였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갱과 반 고흐의 화품은 서로 조화될 수 없었다. 고갱을 찌르려고 했던 칼로 고흐는 자기의 귀를 싹둑 잘랐다. 광적인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달 만에 파국을 맞아 고갱은 유럽으로 떠났고 고흐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의 발작이 석 달 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주기성 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발작 주기인 3개월이 다 되기 48시간 전부터 침대 주위에 커튼을 내리고 건강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그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발작 주기가 가까워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걱정할 필요가 없군, 페리롱 의사가 틀렸어. 이렇게 누워 시간을 허비하다니 원, 내일 아침엔 일어나서 작업을 해야겠군. 그러나 그날 밤이었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는 시각, 그는 맨발로 석탄이 저장된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석탄가루를 한움큼 퍼내어 자신의 얼굴에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드니 부인, 사람들이 이제 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나도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전에는 날 불신했지만 이젠, 나도 시커먼 아가리 예요. 이번에는 광부들도 내가 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허락해 줄 겁니다. 사람들은 동이 튼 직후에야 지하실에서 빈센트를 찾아냈다.
1890년 고흐는 자살하기 직전까지 2년 동안 모두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생 레미병원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테오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로트렉이 들이닥쳤다. 6층까지 올라온 탓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그는 여전히 쾌활하였고 여전히 험구였다. 빈센트 악수를 하면서 로트렉이 외쳤다. 지금 층계를 올라오다 장의사를 지나쳤는데, 그 장의사가 당신을 찾고 있던 것이겠소? 아니면 나를 찾고 있던 것이겠소? 그야 로트렉 자넬 찾고 있었던 거지! 장의사가 나한테 별 볼일이 있을리 없거든. 고흐의 대답이었다. 당신한테 자그만한 내기를 걸지요. 장의사의 장부에 당신 이름이 내 이름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에 말이오. 좋아 그런데 뭘 걸지? 카페 아텐에서의 저녁식사와 오페라 관람. 둘이 좀, 섬뜩한 농담을 주고 받지 않았으면 좋겠군. 테오가 보일락말락 미소지으며 말했다.
열한 살이 더 많았던 고흐는 자살함으로써 그날 로트렉의 말이 맞았음을 입증해 보인 셈이 되었다. 테오는 형을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쉐에게 부탁했다. 가쉐는 의사인 동시에 아마추어 화가여서 고흐를 진심으로 환대하였다. 형을 잘 지켜봐 주십시오. 병이 닥칠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저한테 전보를 쳐 주세요, 내가 형과 함께 있어야만이. 물론 자네 형이 미치긴 미쳤지. 하지만 자네가 어떻게 하겠어. 예술가들이란 모두 미친 사람들인 걸. 그게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점이거든. 난 그런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네. 가끔씩 나도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 뛰어난 영혼에는 예외 없이 광기가 섞여 있다 이게 누구의 말인줄 아나? 아리스토텔레스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네.
가쉐와 함께 있는 석달 동안에 고흐는 80여점 이나 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그림은 다만 한 점이 팔렸을 뿐이다.
어젯밤 텔레비젼에서 나는 그의 작품 프로방스의 농부 가 영국의 어느 경매장에서 126억원에 팔렸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런 기회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의 생전에 주어졌던들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결혼하여 아들까지 둔 테오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게 나빴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흐는 자신의 병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칠월에 발작이 닥치면 자신이 뭔가 미친 짓을 저질러 불쌍한 테오로 하여금 더 많은 근심과 더 많은 돈을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간신히 보내 준 50프랑으로 거의 7월 말까지는 지낼 수 있으련만, 그러나 그 뒤엔 어떡한다? 10년이나 형의 뒷바라지를 해온 테오에게서 돈을 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고흐는 잘 알고 있었다. 7월 하순 야외 스케치를 할 때였다. 불붙는 듯한 태양이 머리위를 내려쬐고 있을 때, 돌연 검은 새 떼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어둡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서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고흐는 제작을 계속하였다. 노란 밀밭 위를 날으는 검은 새떼를 그렸다. 1890년 7월 27일. 머리 위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그는 외톨이인 자신의 입장이 그날따라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권총을 옆구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피를 흘리며 몇 시간을 땅 위에 누워 있었다. 주머니엔 동생 테오에게 부쳐질 그러나 채 끝맺지 못한 652번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의사 가쉐가 달려오고 전보를 받은 동생 테오가 마차를 타고 오베르로 질주해 왔다. 고흐는 아직 죽지 못한 채,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아, 테오야. 빈센트가 말했다. 테오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서, 어린아이 안듯 양팔로 형을 껴안았다. 그는 말할 수가 없었다. 가쉐 의사가 오자 테오는 그를 바깥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가쉐는 서글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망이 없네.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가 없어, 너무 쇠약한 상태야. 그 기나긴 낮 동안 테오는 빈센트의 손을 꼭 쥔 채, 줄곧 그의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밤이 내리고 방안에 단 둘만 남게 되자, 형제는 브라반트에서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기 시작했다. 새벽 한 시가 조금 자났을 때, 빈센트가 약간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두 눈을 아주 감아 버렸다. 7월 29일이었다. 테오는 형이 자기에게서 영원히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불과 반 년 후, 오베르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작은 공동묘지,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 옆에 테오도 와서 나란히 묻혔다. 묘지 주위가 온통 해바라기로 둘러 싸였는데 그것은 고흐를 숭배하던 의사 가쉐가 심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무덤에서조차도 정다웠다. 테오의 삶이 그의 형보다 더 우울하였을 것 라고 말한 것은 그도 재발성 우울증으로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누이 빌헬르미나는 거의 40년간을 정신병원에서 지냈고 동생 코넬리우스도 자살을 하였다. 빈센트가 말한대로 그의 이모는 간질병 환자였고, 그 외에도 문중에는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불행한 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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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7. 최초의 흑인 공화국 탄생
근대 사회에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그 과정의 격렬함과 이념의 보편성 때문에 다른 시민 혁명들, 예컨대 영국 혁명, 미국 혁명과 비교된다. 특히 대혁명이 천명한 이념의 하나인 `평등`은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1794년 2월 4일자 법령이 나오기 전에 벌써 혁명의 영향은 대서양을 건너갔다. 1791년 8월 22일 밤 멀리 카리브 해 이이티 섬 북부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당시 아이티 섬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나누어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예제의 사슬에 신음하던 분노한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 인 관리와 농장주의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봉기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프랑스와 도미니크 투생(Francois Dominique Toussaint, 1743-1803)이었다. 투생의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인에게 잡혀 온 노예였다.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투생은 나중에 주인의 마부로 일했다. 하지만 그가 어느 노예들과 다른 점은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혁명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특히 볼테르가 쓴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점이 그를 봉기의 지도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1793년 투생은 다른 봉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 편에 가담했다. 당시 동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식민지 군대가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프랑스 식민지역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투생은 곧 스페인 군대와 그들의 동맹군인 영국군의 주둔은 노예제의 복구를 가져올 것임을 깨닫고 다시 프랑스에 합류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병사는 4,000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힘을 모은 투생의 군대는 영국군을 섬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프랑스 인 관리들도 쫓아냈다. 그리고 1801년 초 그의 군대는 드디어 섬의 동부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산토 도밍고를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흑인들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해 7월 1일 최초로 흑인들이 스스로 제정한 헌법이 세상에 나왔다. 아이티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한 이 헌법은 또한 노예제를 영원히 폐지하며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이티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샤를 르클레르크(Charle Leclerc)가 지휘하는 2만 명의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투생과 그의 군대는 격렬히 저항했고 프랑스 군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정면 공격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르클레르크는 음모를 쓰기로 작정했다. 1802년 초 그는 투생에게 프랑스 군 진영에서 평화적 담판을 하자고 제안했다. 투생은 프랑스 군이 큰 손실을 입고 패배했으므로 진심으로 평화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투생이 프랑스 군의 진지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투생은 1803년 4월 분노 속에 옥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이티 민중을 격분시켜 프랑스 군에 대한 저항은 거세졌다. 그 해 10월 프랑스 군이 점령하고 있던 포르토 프랭스를 해방시켰고 11월 29일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아이티 민중은 투생을 루베르튀르(L'ouverture: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라는 뜻)라고 부르며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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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7. 중국은 굴복하지 않는다
1) 아시아에서 떠나고 싶으면 중국을 제재하라
지금의 미국은, 칼을 뽑아 사방을 살펴 보아도 상대할 적수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은 무의식적으로 늘 적수를 찾아헤매고 있었다. 유럽이나 일본이 미국과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들은 같은 참호에 웅크린 전우이다. 이렇게 되자 경제적으로 급속히 발전하는 중국이 유일하게 미국의 잠재적 적수가 되는 수밖에 없다. 중국인들은 '허똥( 영화 30년에 허시(河西))'이란 말을 자주 한다. 모든 것은 번영과 쇠퇴를 거듭한다는 말이다. 해묵은이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20세기는 미국이 정상까지 도달한 뒤 다시 쇠퇴하기 시작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미국사회가 자랑하는 영광은 사실 국민 1인당 평균 2만 달러의 부채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하나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경제체제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거에 가난하고 낙후되었던 중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력을 가질 정도.로 발전하였다. 현재 중국인의 생활수준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다고 할지라도 미국은 이미 활동하기 시작한 중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고 있다. '제재정책' 이란 말은 본래 모스크바 주재 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외교관 조지 버크난이 미국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나온 것으로 과거 미 .소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도 냉전시대에 정체되 어있는 미국인들로서는, 경제가 발전하고 군사력이 점점 강화 되는 중국이 그들의 경쟁상대가 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각 방면에 걸쳐 중국의 발전을 제재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을 제재하기 위해 미국은 먼저 아시아에 ' 중국위협론'을 퍼트려 동남아 국가들과 연합하여 정치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려 하였다. 동시에 중국의 분열을 조장하여 경제발전의 역량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획책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인들은 '티베트는 하나의 주권국가'라고 부르짖으며 미국 의회에서 티베트에 특사를 파견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60년대 미국의 중앙정보국 특수요월이 티베트 반란분자를 훈련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티베트 지역에 불안을 조장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이는 과거 소련의 수법과 거의 동일하다. 당시 소련은 외몽고의 독립을 부추긴 후 사실상 외몽고를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어버렸고, 이로 인해 중국은 100여 만 km'에 달하는 영토를 잃어버렸다. 대만문제에서도 미국은 오래된 관례를 깨고 리떵후이의 미국방문을 허락하는가 하면,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에 보내기도 하고 '대만의 군사적 보호' 의안을 통과시키기까지 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만독립을 은근히 지지하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미국이 중국을 제재하는 수단으로 경제가 빠질 수 없다.세계무역기구 가입문제이든 최혜국대우문제이든 미국은 사사건건 중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드시 중국은 선진국의 자격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시장개방을 유도하여 중국경제가 범람하는 수입품에 의해 파탄에 빠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중국경제가 혼란 에 빠지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이 그들을 위협할 정도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우려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노리는 경제패권의 지위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골적인 제재정책에 대해 중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솔직히 말해 중국이 현재 가장 절실하게 해야 할 일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어쩌면 미국과의 무역의 필요성은 중국이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스스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민족임을 전세계에 증명해 보였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해 나가기만 한다면 다음 세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현실의 힘은 유한한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의 가입을 잠시 동안은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그 기구 밖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중국 경제발전의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중국은 지금 세계무역기구협상에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 세계무역기구로 하여금 중국의 가입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 후 다시 협상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중국을 제재하려 한다면 중국도 똑같이 미국을 제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중국에 무역제재를 가하는 날은 바로 중국이 미국상품에 대한 제재리스트를 공포하는 날이 될것이다. 미국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우리 역시 중국의 규칙에 의해 일을 처리할 것이다.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중국제재정책을 고수하고, 중국 발전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중국을 적으로 간주한다면 미국은 중국을 잃음과 동시에 아시아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지금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미 예전과 같이 미국에 순종하지는 않는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이 그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저지른 일들을 통해 미국이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고 아무리 떠벌려도 아시아인들은. 미국이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도 미국인의 시체를 운반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불을 지르고 부채질을 한 후 상황이 변하면 도망쳐 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영원히 남아 중국과 공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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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또 한 사람의 동방박사
우리는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가 세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멜키온, 발드사살, 개스터라는 세 사람 외에도 알타반이라는 점성술가가 한 사람 더 있었다. 어느 날, 알타반은 하늘의 별을 보다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았다. 그는 즉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아기 예수에게 드릴 선물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귀한 보물 세 가지를 사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길을 떠났다. 미리 다른 동방박사 세 사람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그는 강도를 만나 겨우 목숨만 건진 한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는 강도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기로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아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 있었다. 알타반은 사내를 들쳐업고 가까운 여관으로 가서 주인을 찾았다. "이 사람은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제 대신 이 사람을 좀 돌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알타반은 여관 주인에게 사내를 부탁하면서 그 대가로 사파이어를 내놓았다. 그러자 강도를 만난 사내가 알타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그리 급히 가시는 길입니까?" "메시아가 탄생한 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사내는 유태인으로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알타반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면서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알타반은 동방박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부지런히 낙타를 몰았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다른 동방박사들은 이미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떠난 뒤였다. 알타반은 하는 수없이 혼자 베들레헴을 찾았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한 신비스러운 아기가 얼마 전에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기가 태어나자 천사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렀으며,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에게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으며, 부모들이 어디론가 아기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 등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알타반은 베들레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가 묵은 집은 어린 아들을 키우며 혼자 사는 한 가난한 과부의 집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한 이웃집 여자가 찾아와 울부짖었다. "헤롯의 군인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지금 헤롯은 읍내에 있는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고 있어요." 알타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과부에게 꼼짝 말고 집안에 있으라고 말하고 문 밖으로 나가 빗장을 질렀다. 그리고 칼을 빼든 군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루비를 내밀며 말했다. "이 집에 손을 대지 않으면 이 루비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집의 주인입니다. 내게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부디 그대로 돌아가 주십시오." 보석이 탐난 군인을 루비를 받고 그대로 돌아갔다. 알타반은 아기 예수에게 드릴 보물을 벌써 두 개나 다른데 써 버렸다는 사실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아직 보물이 하나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으며 다시 메시아를 만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알타반은 그때까지도 아직 만나고 싶은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알타반은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분이 예루살렘에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알타반은 황급히 그곳의 향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에는 그분이 자신을 유대의 왕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알타반은 급히 발길을 골고다로 돌렸다. 일찍이 그분의 별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이야말로 그가 기다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다. 알타반은 보석을 넣어 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이제는 단 하나의 보석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보석을 형리에게 주면 어쩌면 그분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타반이 급히 노예 시장 앞을 지나갈 때였다. 그곳에 한 노예 소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 "저를 구해 주세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제게 순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수치와 죄악에 가득 찬 삶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좀 구해 주세요." 알타반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보물은 이제 그분을 위해 쓰고 싶었으나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알타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당신을 위해 남겨 두었던 마지막 보물은 이제 이 소녀를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알타반은 마지막 하나 남은 보석 에메랄드를 노예 상에게 주고 소녀를 구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온 천지가 캄캄해지고 비바람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알타반은 얼른 가까이 보이는 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 집은 곧 알타반을 덮치면서 무너져 내렸다. 알타반은 그 집에 깔려 죽어 가면서 말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다 주어 버리고, 정작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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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 번 수정하여 300개 정도의 알을 낳는 달팽이는 14,175개나 되는 이를 갖고 있다. 수명은 2년정도이다. 달팽이는 일생 동안 단 한번 교접하는데, 교접 시간은 무려 12시간이나 된다. 달팽이는 겨울에는 잠을 잔다 사막에 사는 어떤 달팽이느 3 - 4년 동안 계속 잠자기도 한다. 달팽이에게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무색 분비물에는 특수한 성분이 있어 날카로운 면도날 위를 기어간다 해도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개똥벌레 전구, 일반 전구는 4%만 빛을 내고 나머지 96%는 열을 낸다. 그러나 개똥벌레는 에너지의 90%이상이 빛이다. 또 이 개똥벌레의 빛은 열을 내지 않고 서늘한 에어콘 역할을 한다. 여섯마리의 큰 개똥벌레가 내는 에너지는 충분히 책을 읽을 만큼 빛을 낸다.
지렁이는 한 몸에 중요한 기관이 여러 개 있어 반으로 잘라도 곧 두마리의 지렁이로 되살아날 수 있다.
진주 조개가 진주 한 알을 만들어내려면 10년 동안 이물질과 싸워 그 아픔을 참아내야 한다.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 거짓말 탐지기 전문가 백스터 박사는 식물의 잎을 바늘로 찌를 때와 불로 태울 때의 반응이 다르고 따뜻한 햇빛을 받을 때와 비를 맞을 때의 반응이 각각 다른 것을 발견하였다.
체리나무의 잎과 장군풀의 잎사귀를 먹는다면 최후의 식사가 될 것이다.
모든 식물은 흙으로부터는 영양을 10% 정도밖에 얻지 못하고 나머지 90%의 영양을 모두 공기 속에서 얻는다.
큰 떡갈나무는 잎사귀를 통해서 하루에 7톤의 물을 배출한다.
쌀의 종류는 약 15,000가지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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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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