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2.07 01:25 【독서편지】: 제 78 호 風磬 조회 수 9,552 추천 수 18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8 호4339.12.07 (10.17)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작년 어느날 공사장에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일당을 위해 일을 나갔었습니다. 노동 일도 잘 생기지 않는 일감이라 반갑게 생각했었죠. 고된 하루였습니다. 그런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시멘트에 온몸이 거지꼴이었죠. 그래서 항상 공사장에서 대충이나마 씻고 집에 오곤 했습니다. 지나치게 지저분하면 어머니가 안쓰러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시장어귀에서 복숭아를 샀습니다. 리어커에서 파는 것 치고는 크고 좋아보였습니다. 전날 저녁 어머니께서 복숭아를 잡숫고 싶다 말씀하셨거든요. 돈이 넉넉치않아 세 개밖에 사질 못했습니다. 시장을 벗어나 집앞 횡단보도를 건너려 서있는데 눈에 익은 노인 한분이 엉거주춤 묘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음걸이로 봐선 뛰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걸음이 위태로와 보였습니다. 초록색 등이 들어와 앞을 달려건너 노인 앞에 급히 서 "어디를 가시오?" 라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 저를 보시더니 밝게 웃으셨습니다.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주름진 손엔 내손에 있는 것과 같은 검정비닐봉지가 있었는데 그안엔 복숭아가 달랑 한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얼마나 잡숫고 싶으셨으면 그것도 돈을 아끼려 달랑 한 개만 사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에 돌아와 서로의 봉지를 털어보니 복숭아가 네 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두개씩 나누어 먹자 말씀하셨지만 저는 복숭아를 먹으면 간지럼증이 있다 말씀드리고 내방에 들어와 옅은 미소로 앉아 전날 멈추었던 글을 다시 이어 썼던 기억이납니다. 언젠가는 복숭아 한상자를 어깨에 메고 집에 들어갈 날이 있지 않을까 미래의 해질녘을 상상해봅니다.- 2006.12.07 - 風磬 - 문학소식 문학의 공간, 기억의 장소 [문학] 계간 『문학수첩』 특집 ‘우리문학의 공간과 장소’ ▲ 계간 『문학수첩』 겨울호 표지 문학은 한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공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 특히 문학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배경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장소’는 지리적, 문화적 기록물로서 가치가 크다. 계간 『문학수첩』은 이번 겨울호 특집에서 이러한 ‘문학의 공간’에 주목하면서 우리문학의 ‘공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박현수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문학의 공간 : 공간과 장소의 시적 변증법」에서 ‘공간’과 ‘장소’에 대한 철학적이고 원론적 탐색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까지 문학에서 있어서 공간의 문제는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공간적 측면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장소적 양상의 나열에 머물러 있었다”며 “문학담론 역시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과 감성적 영역인 장소를 함께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모윤숙의 시 「청춘의 노래」에서 시인이 ‘無形한 空間’이라고 명명한 시구에 대해 “구체적 질료를 벗어난 초월적 성격을 지니는 공간”으로 해석하면서 “이때 ‘형(形)’은 공간에 대한 칸트적 이중성인 감성적 요소와 순수직관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 용어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리학 연구자인 심승희 청주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장소 기억하기’와 ‘장소 만들기’로서의 문학」이라는 글을 통해 그동안 문학연구자들이 연구해온 ‘문학 속의 공간’에서 시점을 이동하여 ‘공간 속의 문학’으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심 교수는 지리학이 의존하고 있는 문학의 가치는 “문학이 장소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장소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이러한 문학을 ‘장소 기억하기’로서의 문학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장소 기억하기’의 문학은 “지역소설 또는 생태소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양귀자의 원미동, 박영한의 우묵배미, 조정래의 벌교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지리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장소 만들기’로서의 문학이 있는데, 이것은 “문학 작품의 텍스트 자체보다 문학 테스트가 가지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우체국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그린 유치환의 시 「행복」을 예로 들면서 “문학은 지역이나 공간을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그 자체가 지역이나 공간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공간의식과 집의 사회학」에서 공간의 변화에 따른 문화사적 변화를 가정의 둥지이면서 그 자체로 외부세계의 규정력에 대한 저항인 ‘집’을 통해 그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집은 우주적 삶의 집약적인 총체였으며, 또한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해와 달을 포함한 온갖 자연이 머물고 가는 열린 공간이었다”면서 농경 공동체에서의 전일적인 집의 존재성을 그린 이재무의 「위대한 식사」와 집에 대한 무한한 그림을 묘사한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일적 삶의 총체로서의 ‘집’의 이미지는 산업사회의 급속한 전개와 더불어 자연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 간에도 단절된 자폐적인 미로의 지형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는 최승호의 「두엄」과 신영배의 「집들의 시간」에서의 ‘집’처럼 “현대사회는 안식과 평화의 집을 절박한 피난과 은신의 장소”로 만들고 있으며, 그래서 “집은 지하실처럼 깊은 자폐적인 공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김화순의 시 「거리는 bAng의 천국이다」에 등장하는 거리로 나온 방들(노래방, 찜질방, 전화방, 대화방, PC방, 소주방 등)은 “집의 공간이 자본주의의 소비 욕망의 침탈에 완전히 해체된 형국”으로 분석했으며, 이러한 일과성의 ‘방’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노숙인들의 쉼터, 서울역은 “어느 순간 지상의 방 한 칸마저도 찬탈해 인간 삶의 근원을 붕괴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의 공포의 정치적 공간이 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한편 이번 특집에서는 문학에 드러난 구체적 장소를 통해 글쓰기의 다양한 양상을 함께 다루고 있다. 차미령 문학평론가는 「파리, 떠도는 자들의 도시」에서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에 나타난 파리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으며, 손유경 문화기획 퍼스웹 기획위원은 「두가지 국경 : 바다와 국가」에서 최근 소설의 공간을 중국으로 확장시킨 김인숙, 천운영, 공선옥, 김연수의 작품을 대상으로 이들의 국경을 넘는 상상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탐색한다. 또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1930년대 경성 공간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박태원의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1930년 경성의 도시 공간적 특징과 관련지어 살피고 있다.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 / 캐서린 햅번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의 사랑법과 일본 유학생의 낭만 - 강명화 1923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강명화의 자살. 내막은 매우 복잡. 가명을 명화라 하야 일시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이 있다하는 평양 태생의 강도천은 경북 재산가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의 애첩이 되야 동경으로, 경성으로 그 남편과 같이 왕래하더니 최근 온양 온천에 그 남편과 함께 가서 유숙하든 중 12일 온천 여관에서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자살할 결심으로 독약을 먹었으므로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회생치 못하고 인하야 절명하얐는데, 시체는 작일 경성으로 운반하야 매장할 터이며 자살한 원인은 장씨의 사정과 기타 복잡한 내막이 있다더라. 신문에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리던 날 오전 10시, 강명화는 그녀의 유언대로 이태원 공동 묘지에 묻혔다. 신문에는 25세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 나이로 그녀는 23세였다.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에 강명호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셈이었다. 1901년(고종 38년) 6월 12일 평양 시외에서 태어난 강명화는 금정에 미친 아버지 강기독의 가산 탕진으로 소녀 시절을 가난과 불운 속에서 지내야 했다. 명화란 그녀의 기명이고 호적상 이름은 도천이었다. 아버지는 금점도 금점이려니와 노름판이다, 색주가다, 온갖 못된자리는 다 찾아다니는 떠돌이요, 건달이었다. 어머니 윤씨 부인이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집안에 잠시 다녀간 일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거든 도천이라구 지어!" 하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도 윤씨 부인은 이름을 도천이라 지었다. 한데 두어 달에 한 차례씩 집을 다녀가는 아버지도 도천이의 성장을 예사로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고것 참 에미는 잘생기지도 안았는데 도천이는 이쁘단 말야!" 그런 말이 아니면,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던데 우리 집 밑천이 되겠는거!" 하고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 윤씨 부인은 남편의 그 같은 부성애가 싫지 않았다. "여보, 우리 도천이를 훌륭하게 키워 봅시다." "암! 평양으로 데리고 나가서 키워 보자고." 남편은 어린 도천이를 데리고 아내 먼저 평양으로 나갔다. 세간을 처분하고 뒤따라 윤씨 부인도 평양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도천이 바로 밑에 남동생 도선이가 있었으나, 윤씨 부인은 맏딸 도천에게 정이 더 가는 터였다. 얼마 뒤 윤씨 부인은 남편과 도천이 먼저 나온 평양집으로 뒤따라 왔다. 그러나 응당 평양집에 있어야 할 남편은 그 집에 있질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적어 준 평양집 주소는 그들 가족이 살 집이 아니라 기생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천이를 데리고 있는 산호주라는 기생에게 물어보았으나, 남편의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 도천이를 내어주오!" 윤씨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무슨 소릴! 제 아비가 몸값 받아간 아이를 내어주다니 당치도 않소!" "뭐예요? 그럼 우리 도천이가 동기가 되었단 말이오?" "우리 도천이, 우리 도천이 하지 마오! 이젠 내 수양따이니까!" 기생 산호주는 매몰차게 따돌리고 대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양모 산호주는 도천이의 이름을 갈아 버렸다. '확실이'. 무엇이 그리고 확실하다는 뜻인가. 확실히 동기는 동기란 뜻인가. 도천이란 아명도 별스러웠지만 확실이란 동기 이름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술 따르고 노래 부르는 나날이 어린 확실이의 세월이었고 보람이어야 했다. 장구치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배우겠다는 부푼 희망이 한 가닥 꿈으로 멀리 사라져 버린 지도 오래였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저주스러운 아버지 강기덕은 이따금 산호주 집에 나타나 기생충처럼 용돈을 뜯어가는 눈치였다. 세월이 흘렀다. 강확실은 한 사람의 여인을 성숙해 갔다. 아름다운 꽃에게는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법인가. 해가 바뀔수록 용모와 마음이 아름다워져 가는 확실이 주변에 평양의 명문 자제들이 벌과 나비처럼 모여들었다. 확실이는 그녀의 꽃을 꺾으려 드는 호색가들에게 다져진 결심이 하나 있었고, 그 결심을 언제나 서슴없이 펼쳐 보이고는 했다. "난 정절을 굳게 지켜 뒷날 멋진 남자와 혼인할 테다." 말하자면 그것이 확실이의 바람이었고 꿈이었으며, 현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확실이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사들인 기생 산호주는 생각이 달랐다. "저것을 빨리 머리 얹어 주고 돈을 두둑하게 긁어 봐야 할 텥데........" 산호주의 생각은 정말이지 '엿장수 마음대로' 확실이를 어디엔가 팔아 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웬걸 처녀 강확실의 지조는 그 아무도 꺾을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동기 생활 몇 년에 그녀는 세상을 알기 시작하였고, 돈을 알게 되었다. 기왕 이 길에 들어섰으니 불쌍한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호강시켜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돈을 벌기에는 평양이 너무 좁다고 판단되어 그녀는 서울(당시 경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동기 강확실의 나이 열아홉 살로 접어든 봄, 그녀는 어머니 윤씨와 남동생 도선을 데리고 서울로 오고 말았다. 양모 산호주가 확실이를 놓지 않으려고 온갖 앙탈을 다 부리고 나왔으나 이제는 성장할 대로 성장한 그녀의 계획을 막을 수더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는 평양 시절의 동기 때를 씻어 버리고 이름을 갈아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 밝을 명, 꽃 화 '밝은 꽃'이 그녀의 제 2의 이름이었다. 강명화란 이름으로 기적에 오른 도천은 이제 한 사람의 직업 여성으로 서울 사회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에는 예쁘고 깜찍한 명함도 들어 있었다. 손님이 그녀의 이름을 물어올 땐 허리춤에 손을 넣어 그 작은 명함을 꺼내 주게끔 되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박혀 있었다. 조선 권번 강명화 경성부 다옥정 165, 전화.강화문 2170 동경 유학생 장병천이 강명화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송별연 자리에서였다. 장병천은 영남 갑부의 외아들이요, 미남 청년에다 그 당시 서울에서 몇 명 안되는 동경 유학생 가운데 대학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 전문 학교가 태반이던 시대에 그의 대학 모표는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1920년에 설립을 본 경일 은행은 그의 아버지 장길상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부잣집 자식이었나 짐작이 가는 일이다. 장병천은 여름 방학을 끝내고 도경으로 들어가기 전 명월관에서 친구들과 송별련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강명화를 처음 대하게 된 것이었다. 십여 명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한 명월관에서 강명화의 인사를 받았을 때 장병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물론 장안의 인기 있는 명기 강명화란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나, 저렇게 아름답고 귀여울 줄이야.....' 짓궂은 친구들은 장병천을 강명화 곁에 앉도록 했다. 술이 거나해졌다. 한 손에는 술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명화의 손을 꼭 잡고 병천은 말했다. "오늘 밤차로 나는 부산을 거쳐 동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떠나고 싶지 않아......" "그래두 떠나셔야죠."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 겨울 방학 때 오시면 만날 수 있잖아요." "겨울 방학까진 너무 길어, 그 안에 다시 만날 순 없을까......." 명화의 손을 쥔 병천의 손은 술기운 탓만도 아닌 듯 열기가 있었다. "나 오늘 밤에 떠나고 싶지 않네." "또 그 말씀. 술이 깨시면 곧 그 말씀은 잊어 버리실 거예요." "무슨 소릴. 내가 취한 줄 알어?" 병천은 손에 든 술잔을 비워 내고 또다시 술을 받았다. "약주가 과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난 선생이 아니구 학생이야." "아이, 대학생이니까 제겐 선생님 격이죠." "그보다 내가 동경에 간다면 명환 나한테 편지하겠어?" "그럼요, 선생님 공부에 방해가 안 된다면야." "아니, 내가 먼저 편지할 테니깐 주소 하나 적어 주게." 명화는 명함을 꺼내어 병천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 기차 출발 시간이 임박했네, 일어서자고." 병천의 친구가 시계를 보더니 먼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강명화와 장병천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했다. 명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병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잣집 외아들이라는 점에 내가 끌린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몇 안 되는 동경의 대학생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쾌남아에 대학 사각모를 쓴 병천의 모습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뻔질나게 찾아오는 한량들 속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머리를 얹고 들어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로 그이는 도쿄에 가서 나에게 편지를 할까. 편지가 오면 답장을 해 주는 게 도릴까. 갑부의 외아들이 한 차례 술을 마시며 귀엣말을 한 걸 가지고 난 철썩같이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밤이 깊어 갔다. 깊어 가는 밤 속에서 그녀는 눈 뜬 정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일까. 사랑은 이렇게 열리고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성숙해 가는 것일까. 정병천을 머리 속에 접어두고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하느라 그녀의 심신은 지쳐 있었다. 그 때 대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인력거 닿는 소리였다. "아씨, 손님이 찾는데요." 방문 밖에서 부리는 아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명화는 짜증이 났다. "아씨, 손님이 보자는 데요!" "없다고 그래!" 취객이 일쑤 밤중에도 찾아오고는 하여 그 때마다 명화는 없다는 말로 따돌리기 예사였다. "만나 뵙구 가시더라도 가시겠다는데요, 아씨." 대문께로 나갔다 들어온 아이가 권하는 소리였다. 명화는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끌고 대문께로 나갔다. "대체 누구야........?" "나, 정병천이오!" "에엣? 아니......" 동경으로 떠난 장병천이 자기 앞에 서 있다니, "어찌된 일이세요?" "명화가 보고 싶어서..... 명화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믿어지지 않아요. 꿈만 같아요." "꿈이 아닐세, 명화. 기차를 타고 가다 용산역에서 내려 버렸소. 명월관과 조선 권번에 전화를 걸어도 명화가 없다고 그러더군. 인력거꾼한테 물어서 가까스로 이 집을 찾았지." "들어오세요......." 그날 밤부처 장병천은 강명화의 집에서 묵었다기보다, 강명화의 사랑 속에 파묻힌 것이다. 동경의 대학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명화의 집에 눌러앉아 있는 걸까. "대학에는 1년간 휴학계를 내고 집에는 무사히 동경에 닿아서 공부하는 것처럼 편지를 내고...." "그렇게 하셔두 되나요?" "명화 곁에 있으려면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지." 정병천의 본가에서는 매월 동경으로 학비를 보냈는데 그 학비는 도로 명화의 집으로 우송되게끔 각본을 짜 놓고 살림은 시작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권번에는 나가지 않고 장병천과 사랑의 밀어만을 속삭이는 명화는 비로소 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오래갈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윤씨 부인이 딸의 생활을 간섭하고 나섰다. 살림을 차릴 게 아니라 부잣집 외아들이니 돈을 뜯어내라는 것이었다. 다음엔 장병천의 본가에서 그만 알아 버렸다. 생활비와 학비가 끊겼고, 무엇보다 살길이 막막했다. 두 사람은 동경으로 뛰었다. 이목이 없는 낯선 고장에 가서 막벌이라도 하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어 보자는 계산에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부잣집 외아들이 막벌이에 수월할 리 없었고, 게다가 동료 유학생들의 질시가 몸에 따가웠다. "이새끼, 기생첩 데리구 살면서 공부를 한다구? 유학생 망신시키지 마 새끼야!" 동료 유학생들의 위협은 매질을 가하는 것보다도 더 아픈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로 발길을 되돌린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장병천이 거부의 외아들이란 점이었다. 장의 집에서는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한옥 한 채를 사 주었다. 종로 6가 32번지. 그러나 그들의 보금자리는 또다시 깨어져 버렸다. 이번에는 명화 아버지 강기덕이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과는 관계없이 명화 아버지와 병천의 본가는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리고, 그들의 사랑도 그 이상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갔다. 명화는 결심했다. "선생님, 나 옥양목 치마 저고리 한 벌 하고 백구두 한 컬레 사주세요." "어디, 떠나게?" "아뇨. 선생님하고 온천에 다녀오구 싶어요." "........" 그들은 나란히 온양으로 떠났다. 1923년 6월 10일, 음력으로 4월 26일이 되는 이날은 명화의 생일이었다. 온천 여관에 투숙한 명화와 병천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 길고 깊은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비가 요란한 여관에서 명화는 미리 준비해 간 약을 먹었다. 6월 12일의 일이었다. 얼마 뒤 장병천도 명화의 뒤를 따랐다. 유학생들과 사회와 그의 본가의 질시를 떠나 병천은 죽어서 명화 곁에 나란히 누울 수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자주와 사대의 사이 -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 : 김기덕(건국대 강사) 황제. 천자. 왕 왕조사회에서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칭호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흔히 ‘왕’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은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 했고, 그 밑에 각지역의 통치자로 봉건제후인 여러 ‘왕’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황제’ 나 ‘천황’ 처럼 ‘왕’ 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대왕’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왕’이라 칭했다. 중국의 경우 원래 군주 칭호는 ‘왕’또는 ‘천자’였다. 왕은 ‘훌륭한 사람’, 천자는 ‘상제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었다. 이후 중국의 최고책임자는 항상 황제라 했고, 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 2천여 년 계속되었다. 흔히 황제는 건설적인 중국의 임금인 삼황과 오제를 한 단어로 줄여서 만든 칭호라고 한다. 그러나 황제의 ‘황’ 은 ‘빛이 난다’ ‘위대하다’ ‘크다’는 뜻이고, ‘제’는 상제 즉 천계에 살면서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최고의 절대신을 뜻한다. 따라서 황제는 ‘빛나는 우주의 주재자’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또는‘천자’대신, 보다 초월적인 절대신의 의미를 갖는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는 자신을 지상에 출현한 상제 그 자체로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의 황제는 원칙적으로 천하에 단 한 명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진시황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 조. 짐등의 각종 용어를 제정하였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중국은 여러 왕조로 이어지며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였다. 중국왕조와 우리 나라의 삼국(고구려. 백제.신라)- 고려- 조선의 왕조는 서로 교류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외형적으로 책봉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책봉은 중국이 황제국의 입장에서 우리를 제후왕으로 봉작해 주는 외교적인 의례행위였다.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중국의 왕조는 송. 요(거란). 금. 원. 명이였다. 고려는 국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 형식상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고려국왕’이라 책봉해 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는 중국이라는 황제국에 제후국으로 신속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단지 외교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였을 뿐 실제적인 구속력은 거의 없었다. 제왕과 왕작의 수여 고려국가는 실제 여러 면에서 황제국체제로 운영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형식적인 국제질서를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하였다. 무엇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은 ‘제왕’의 존재였다. 고려는 가까운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 봉작 즉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작위는 공. 후. 백. 자. 남의 5등작이 있었다. 왕족은 5등작에서 상위의 공작. 후작. 백작3단계까지를 수여해 주었다. 그리고 수여된 작위는 다른 나라와 달리 상속되지 않고 자신의 당대에서 그 혜택이 끝났나. 단 왕족의 경우 작위를 가진 자의 자식(아들 및 사위)에게 사도 혹은 사공의 최고관직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그런데 고려는 공작. 후작. 백작을 수여받은 왕족과 그들의 다음 대(아들 및 사위) 사도. 사공을 수여받은 자를 총칭하여 제왕이라고 했다. 제왕은 본래 왕작을 수여받은 사람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중국은 황제국이어서 실제 왕작이 수여되었는데, 왕작에는 친왕. 사왕. 군왕의 등급이 있었고 이들을 모두 제왕이라 했다. 그러면 고려는 중국처럼 왕으로 봉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제왕이라 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에 항복해 온 신라 경순왕에게 낙랑왕을 봉해주고 일부 왕족에게 대왕을 봉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는 왕작을 직접 수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려는 왕족으로 봉작받은 자와 다음대의 사도. 사공을 총칭하여 제왕이라 함으로써, 실제 왕작은 없었으나 왕작을 수여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냈던 것이다.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제왕’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아울러 ‘친왕’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또 후작을 받은 자를 후왕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봉작제는 황제가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점은 작위와 함께 주어진 식읍에서도 나타난다. 식읍의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식읍의 규모와 형식은 중국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제후국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국내에서는 황제국의 제도와 형식을 취한 이중체제로 운영하였다. 이는 당시의 세계국가인 중국과 가장 근접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염두에 둔 외교적 방안의 하나로 이해된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적 위급성이 적었으므로 중국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따라서 굳이 고려처럼 이중체제를 취하지 않고 바로 천황을 칭하였다. 왕실 용어에 반영된 황제국체재 고려의 국가체제는 황제국체제였으며, 고려의 국왕은 실제로는 황제였다. 이 점은 왕실관계 용어가 황제국이었던 중국과 같았던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국왕의 명령은 성지, 조, 칙, 제라 하였다. 왕위계승자를 태자라하고 국왕의 어머니를 태후라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진시황이 황제칭호를 제정하면서 황제국만이 사용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복장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대등하게 하였다. 한편 국왕을 공식적으로 황제라 부르지 않았고, 왕비 또한 황후라 하지 않고 왕후라하였다. 다른왕실 용어들은 전부 황제국 용어로 하면서, 최고 통치자와 그 부인은 왕과 왕후라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왕과 왕비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쓰고, 역시 황제만이 사용하는 당시 국제적인 연대표기인 연호는 중국연호를 썼다. 그러나 그 외의 왕실 용어는 전부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 묘지명이나 금석문을 보면 돌아가신 왕을 ‘선황’이라고 표현하거나, 당시의 국왕에게‘황제가 만세토록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고려의 백성들은 실제로 고려국왕을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려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칭제건원 즉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한 시도가 두 번 있었다. 제4대 광종은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17대 인종때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과 칭제건원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의킨 묘청은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황제국을 지향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제후국을 인정한 고려의‘이중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명실상부하게 황제국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는 것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종묘의 각 현실에 붙이는 이름이다.고려의‘태조, 혜종, 정종, 광종...’이나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가 다 묘호이다. 묘호는 첫 글자 다음에‘조’나 ‘종’을 붙이는데, 이러한 조나 종의 묘호 또한 사실은 황제의 묘호인 것이다. ‘조’는 창업한 왕이나 공이 큰 왕에게만 붙이고, 보통은 ‘종’이었다.조선시대에는 창업한 왕인 태조(이성계)외에도 ‘조’가 붙는 왕이 일곱명이나 되어 어떤 이유로 ‘조’가 붙었는지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창업한 왕인 태조(왕건)외에는 ‘조’를 붙인 왕은 없었다. 뒤에 설명되겠지만 원 간섭기에 제후국체제가 되면 이러한 황제식 묘호인 ‘조’나 ‘종’은 쓰지 않게 되었다. 각종 제도에 반영된 황제국체제 왕조국가의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종묘와 사직이다. 특히 종묘는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으로, 조상숭배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종묘에서 제사를 모시는 역대 왕들의 수는 황제의 경우 7대조까지 모시는 7묘제, 제후는 5묘제였다. 고려는 성종 때 처음 종묘를 세우면서 5묘를 택하고 있어 제후국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이나,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의종 때 7묘제가 되었다.공민왕 때에는 종묘제도가 다시 정비되는데, 불천지주(영원히 옮기지 않는 신주)와 좌우 각각 2묘씩을 두어 언뜻 보면 5묘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태조만이 아니라 혜종과 현종의 신주도 불천지주였다. 따라서 결국 자연히 7묘제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국체제는 제천 즉 하늘에 대한 제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래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존재는 황제만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왕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는데, 그것을 원구제라 하였다. 원구는 제천을 하기 위한 제단의 모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늘의 형상이 둥근것과 제단을 높게 쌓아 하늘에 가깝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려국왕이 제천한다는 것은 고려왕실이 천명을 받았다는 정치적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며, 하늘의 신인 상제를 대리하여 백성과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위이다. 뒤에 제후국체제를 취한 조선에서는 무례하다 하여 없앴으나, 고려는 일찍부터 원구제를 거행하였다.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중앙정치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의 중앙관제는 당제를 받아들여 황제국체제하의 3성6부체제로 운용되었다. 3성이란 조칙을 작성하는 중서성, 그것을 심의하는 문하성, 그리고 이를 집행하는 상서성을 말한다. 6부는 상서성 밑의 6개 부서로 국가행정의 주무부서였다. 이 외에도 군대가 적과 전투를 하기 위해 출정할 때의 군대편제를 제후국체제의 3군편성이 아닌 황제국체제의 5군편성으로 한 점이나, 수도인 개경을 황도라고도 하고 개경의 내성을 황성이라고 표현한 점등은 다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각종 제도가 실제에 있어서는 다분히 형식적인 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제국인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하여 있으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외교적 측면에서 제후국으로, 국내에서는 실제로 황제국이라는 이중체제로 운영한 고려의 국가체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원 간섭기, 제후국체제로의 변화 고려의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후기에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변하였다. 충렬왕 떼에 원나라는 자기들과 같은 황제국 수준의 제도와 칭호를 무례하다고 하여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원과 유사한 것은 모두 고쳤다. 당연히 3성체제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왕실 용어도 선지를 왕지로 짐을 고로 사를 유로하는 등 여러 칭호를 바꾸었다. 태자도 세자라 하였으며, 묘호 또한 종을 칭하지 않고 충선왕, 충혜왕처럼 제후왕의 묘호로 강등되었다. 더구나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왕의 이름에 ‘충’이라는 글자를 돌림자로 넣었다. 이와 함께 황제의 입장에서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던 봉작제는 폐지되었다. 아울러 봉작에 따른 식읍의 수여 또한 없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원 간섭기에 와서 고려의 체제가 황제국체제에서 제후국체제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원의 지배를 받는 한 제후국체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 간섭기나 조선의 제후국체제를 사대적인 것으로 단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 간섭기 때에도 나름대로 고려왕조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지키려고 줄기찬 노력을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오히려 세계제국인 원의 지배하에서 제후국체제일 망정 독립국가를 유지한 점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의 위상을 제후국체제로 하느냐 고려처럼 실질적인 황제국체제로 유지하는냐는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제후국체제로 정리되었다. 그결과 비록 묘호는 조와 종의 황제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원칙적으로 제추국체제로 운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러한 점은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명분론과 그 연장으로서의 화이론(중국은 황제국‘화’, 주변국가는 제후국‘이’)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제후국체제라 할지라도 역시 현실적인 구속력은 거의 수반되지 않았다. 과거 식민사관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관계 즉 황제국과 제후국관계를 전부 우리 민족의‘사대성’으로 설명하였고, 한국사의 국욕적인 상징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외교관계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중국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이 사라진 지금, 중국이라는 세계제국 바로 옆에서 항상 독립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의 역사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인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로 만든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우리도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당시 내용이 수반되지 않는 명분만의 조치였지만, 왕조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황제국 중국과 제후국 조선의 형식적인 관계마저 부정하고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자 한 것이었다. 실로 우리 역사상 고려시대 광종의 칭제건원 이후 처음 나타난 황제체제의 공직적인 선포였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보이지 않는 충고 중학교 때의 일이다. 새학기 초라서 친구들과도 서먹서먹한 때였는데, 하루는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구멍가게에 갔다가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는 말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먼저 아는 척하기가 쑥스러웠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냥 못 본척 물건을 고르다가 그만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안 보는 틈을 타서 몰래 과자를 주머니에 넣고는 유유히 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해서 그 애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 보았다. 그후에도 두세번 나는 우연히 그 애의 그런 행동을 목격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점점 학교에서 그애와 마주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그 애도 이런 내 태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그 애를 교실 밖으로 살짝 불러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이젠 그런 짓 하지마!" 처음엔 그 애는 움찔 놀라는 듯하더니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 보다가 조용히 교실로 들어갔다. 그 날 이후, 그 애는 내가 쳐다볼 때마다 일부러 나를 피하듯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나는 그 친구와의 어색한 관계로 늘 마음 한구석이 편치않았다.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나고 드디어 졸업식 날이 되었다. 식구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며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만치서 그 애가 꽃다발을 한아름 들고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수줍게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현정아 고마워. 그때 나에게 충고래 주고 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는 훌쩍 뛰어가 버렸다. 순간 내 가슴속으로 그 애가 주고 간 꽃다발의 상큼한 향내가 깊이 밀려 들었다. 강현정 님/경남 진주시 수송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8 - 가장 재미있는 철학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년) 그때 세계에서는 1817년: 영국 리카도,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지음 1823년: 미국 먼로 대통령, 먼로주의를 선언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rthur] 1788.2.22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 ~1860. 9. 21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인기절정의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헤겔을 대단히 싫어하고 학문적으로도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한 철학자가 사강사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헤겔을 떠나 자기의 강의실로 찾아들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헤겔의 인기와 명성에 눌려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떠난 이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대단한 천재성을 지닌 젊은이였다. 괴테가 그의 모친에게 '당신은 천재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칭찬해주었을 정도였다.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본래가 실업가였다. 그것도 대단히 크게 성공한 무역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본래가 실업가였다. 그것도 대단히 크게 성공한 무역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쇼펜하우어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노력했다.그러나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작가였기 때문에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아 작가로서 활약하기를 원했고, 아들 쇼펜하우어는 철학공부를 해 교수가 되려는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쇼펜하우어가 본격적으로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늦은 편이었다. 그도 칸트로부터 시작한 셈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자신도 독창성있는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불태울 수 있었다. 칸트의 철학을 가장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피히테, 셸링, 헤겔이 아닌 자기자신이라고 자부했다. 그것은 칸트를 칸트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정당한 판단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지금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대표적 저서인 동시에 칸트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책 첫머리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말은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을 이어받은 적절한 표현이다. 쇼펜하우어는 "내 책 첫마디만 읽어도 내 책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칸트에게서 인식론과 철학을 받아들인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연구했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하는 이념을 존재의 형상인 동시에 예술적 원상으로 해석해 예술철학적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헤겔이 정신철학을 제창한 데 대해 의지의 철학을 주장하고, 삶과 세계와 우주의 근원은 맹목적인 의지로부터 발원한다고 보아 염세주의 철학을 기초짓는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염세주의 철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없는가를 모색한 그는 인도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해탈의 철학만이 맹목적인 의지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해준다. 서양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인도철학을 자신의 체계속에 도입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예상을 뒤엎소 철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독일의 전통은 영국과 다르다. 영국에서는 교수가 아닌 철학자나 학자들도 교수와 동등하게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대학강단을 차지하지 못한 철학자는 야인에 머문다. 그리고 그들의 저서와 철학이 대학강단에서 강의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저서와 철학은 대학보다도 사회 여러계층의 호응을 받았고, 그 독자들은 오히려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그의 철학에는 피와 생명을 지닌 인생의 과제와 그 해결을 위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의 추종자들은 쇼펜하우어 이외에는 철학이 없으며 다른 책 열 권보다도 쇼펜하우어의 한 권의 책이면 족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지금 우리가 읽어도 그의 저서는 약동하는 생명력이 있고 또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의 대단치 않은 문제들도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진리에 접근케 해 주는 느낌이 든다. 그는 여성을 대단히 천스러울 정도로 비판한다. 사람들은 평생동안 모친과 불화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친에 대한 혐오감이 여성에 대한 증오심으로 발전해 결혼도 하지 않았고 여성기피증에 빠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상당히 수긍이 가기도 한다. 성의 본능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S. 프로이트를 읽기 전에 쇼펜하우어를 읽은 사람은 프로이트의 사상이 새롭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근본의지를 만드는 것은 성적 욕망이며, 그것은 생명보전의 기본조건이라고 본다. 인간 신체 중에 가장 대조적인 두 요소는 대뇌와 생식기라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성의 본능이 단절되면 인류는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철학도 이데(Idee)론에 따르면 확실히 높은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아름다운 나무는 열매를 맺는 일이 없으며 좋은 과수들은 그렇게 못생겼을 수가 없다고 말해 독자들을 웃긴다. 오히려 헤겔이나 셸링보다는 독창성이 있는 철학이론을 재미있게 전개시켜준다. 추종자들이 그를 종교적인 스승으로까지 추앙했던 것도 이유없는 바 아니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깡패'에는 두가지 어원설이 있습니다. 영어를 빌어 온 단어 중에서 우리가 늘 쓰는 것 중에 '깡패'란 말이 있습니다. 폭력을 쓰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지요. '깡패'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어원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해방 뒤에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 오게 되고, 이들의 통조림통인 'can'에다가 한자어인 '통'을 붙인 '깡통'을 거지들이 이용하면서, 이들 못된 짓을 하는 '거지패'들을 '깡패'라고 했다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영어의 'gang' 즉 '깽'을 일본에서 '걍구'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국어에 들어 와서 '패거리'의'패'를 붙여서 이들을 '깡패'라고 하였다는 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후자가 더욱 그럴 듯합니다. 왜냐하면 '깡으로'(억지스럽게)등의 단어가 쓰이기 때문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 토마스 카알라일 토마스 칼라일 (1795~1881) 숭고한 정신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나타난 것은 일체의 의복이며 표상에 불과하다. 표상을 본체인 것처럼 망상할 때 인류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고 역설하며 영국사회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사람이 바로 토마스 카알라일이다. 그는 서른 여섯 살이 되는 어느 여름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며 그것을 후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왜 비겁하게 줄곧 울고 콧물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걷고 있느냐. 덜된 인생아, 네 앞에 놓여진 최악의 경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이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리고 지옥의 고통이나 악마의 고문이 너에게 할 수 있는 전부이겠지, 그런데 너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라. 네가 비록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너는 그래고 자유의 아들이 아니냐. 지옥불이 너를 태워 버리기 전에 너는 네 발을 들어 지옥불을 짓밟아 버릴 수는 없단 말이냐? 무엇이나 올 테면 오너라. 부딪쳐 보자구나. 그것이 지옥이건 악마건 맞서 보자꾸나. 옷의 노예였던 인간이, 옷을 지배하는 인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적어 놓은 것이 그의 <의복철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의 지칭이었다. 카알라일은 몸과 마음을 훌훌 벗어 버린 자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생사와 유무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기를 붙잡게 되었다고 했다. 꺼져라, 거짓 희망의 그림자여, 나는 더 이상 너를 쫓을 생각은 없다. 나는 너를 이제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너희들 굶주린 공포의 유령들이여, 나는 너희와도 인연을 끊겠다. 너희들도 모두 그림자의 거짓이다. 자, 나는 이제부터 좀 쉬어야겠다. 여행에 지치고 삶에 지쳤다.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나는 이제는 자야겠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모두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카알라일을 읽다가 나는 소동파가 문득 생각났다. 왜냐하면 그의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아무 뜻도 없는 것 이라고 한 것이 소동파가 죽음 앞에서 한 이야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2. 유토피아의 원래 뜻 오늘날 이상향을 지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어 오던 것인데 그 동기는 실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우회적인 표출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어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1516년에 쓴 책에서 표현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유토피아(Utopia)>이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리스 어 ou(없다)+topos(곳)+ia(명사어미)에서 나온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유토피아>는 영국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제1부와 이상국 유토피아의 지리, 정치, 종교, 가족제도, 풍속 등을 다룬 제 2부로 나뉘어져있다.이 책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대륙 탐험에 따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다 유토피아 섬에 도착한 선원이 그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2부에서 표류했던 선원이 들려 주는 이상 사회의 유토피아는 재산공유제의 사회였다. 즉 착취 없는 생산과 분배, 쾌적한 노동, 교육의 남녀평등, 행복한 가정 생활, 평화주의, 종교적 관용 등. 모어가 이렇게 재산 공유제 사회를 이상 사회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근대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재산 공유론은 인간의 악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가 본 현실은 어떠한가? 모어가 살고 있던 영국의 현실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해외 식민지 무역이 발전했고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발전한 것이 모직물 공업이었다. 이전까지는 양모를 수입해 쓰던 모직물 공업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원료인 양모가 부족해지자 토지 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민들은 하루 아침에 대대로 살던 토지에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까지 말했다. 모어는 또 프랑스 국왕과 대신들을 예로 들어 정치에서의 책략과 야망을 폭로하고, 나아가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결함의 원인을 사유 재산 제도에서 찾았다. 즉 돈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곳에서 국가의 올바른 번영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여러 국가의 사악함의 원인을 파헤치고 당시의 영국인들, 넓게는 유럽 인들에게 도덕적 반성을 촉구한 저서라 할 것이다.물론 거기에는 이성적인 교화로 인간을 개조하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인문주의자의 이상이 깃들어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1. 미국에 NO라 고 말하는 중 국의 철의 여인 1995년 2월 26일, 베이징의 중심 창안지에(틋安衡)의 우중충한 회색건물 밖에 어깨에 각종 카메라를 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각국 통신사와 방송국의 주재기자들이었다. 불이 환히 밝혀진 중국대외경제무역부 건물에는 중 .미 지적재산권에 대한 협상이 진행중이었다. 쌍방의 협상대표는 묘하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미국측은 변호사 출신이며 말을 아주 조리있게 하는 무역협상 부대표 바셰프스키였으며 중국측은 현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인 우이(콧儀)였다. 밤 11시,두 여성대표는 동시에 협상장을 나와 세계 각국의 기자들 앞에서 쌍방이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협의'에 가조인했음을 발표하였다. 중 .미 양국 간에 20개월에 걸쳐 진행된 지적재산권협상이 드디어 막을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 외국통신사 기자는 기사를 타전하면서 '전세계가 한시름 놓았다'라고 하였다. 중 미 간 지적재산권문제는 80년 이래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1990년 4월 미국이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해 불리하다는 이유로 미국무역법 '슈퍼301조'의 규정에 근거해 중국을 '중점 관찰 대상국'에 넣을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의 지적재산권문제를 대하는 태도도 아주 적극적이었음을 말해 두어야 할 것 같다. 1992년 1월 중 .미 쌍방 대표인 우이와 칼라 힐스는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한 양해각서'에 공동 서명하였다. 이 각서에서 중국은 약속기한 내에 이 문제에 대한 보호작업을 완성하길 원하였고 미국측은 중국에 대한 특별조사를 취소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94년 6월에 미국은 재차 '슈퍼301조'를 들고 나와 중국 정부가 양해각서에 서명한 이후 취해 온 노력은 고려하지 않고 6개월 간 중국에 대해 조사를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번에 미국이 거론한 문제는 컴퓨터와 관련된 레이저디스크의 해적판이었다. 중국의 불법행위가 미국 기업에 매년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반년 동안 중국과 미국 간에는 지적재산권보호문제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협상이 계속되었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 기자회견에서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인 우이는 단호한 어조로 중국 정부를 대표해서 '선진국이 몇십 년 내지 몇백 년의 과정을 거쳐 겨우 완성한 지적재산권보호법을 중국은 단기간에 걸쳐 비교적 완벽한 보호체계를세웠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 정부는 미국측이 제시한 불법 복제 레이저디스크에 대처하기 위한 전문 단속반을 구성해 백만에 이르는 해적판 레이저디스크와 비디오테이프를 몰수하여 불태우고 관련 공장들을 폐쇄시켰다고 하였다. 솔직하게 말해 미국측이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요청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 역시 이 요구를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측 협상대표들이 협상중에 지적재산권보호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을 연이어 추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들의 단독 자본으로 중국에 신문, 출판과 오디오 및 비디오 관련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 같은 것들이다. 비디오 및 오디오 제품의 대외 시장개방문제에 대해서는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지금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또한 미국측이 요구한 국경통관제도와 판권인증제도 및 행정장의 법집행권한 등의 문제는 미국 스스로도 아직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측은 중국의 사법 및 입법 과정에 이르기까지 간섭을 하려고 들어 중국인을 크게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중국에 탐정사무소 설립을 허락하라고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차라리 베이징에 C I A 지부간판을 걸겠다고 설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미국측의 6개월 이내 무역보복 엄포에 직면한 중국의 여장부 우이는 이미 쌍방이 내밀게 될 비장의 카드를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머리가 약간 희끗한 이 '철의 여인'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측에 사납게 경고하였다. '당신들이 보복리스트를 선포하는 날은 바로 우리가 반보복리스트를 공포하는 날이 될 것이오." 1994년 최후의 그날, 미국 무역대표 캔트는 비장의 카드인 대중국 무역보복리스트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중국측도 이에 굴하지 않고 2시간 뒤 대미 무역보복리스트를 공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 일본 통신사의 베이징 주재기자는 아주 감탄한 논조로, '일본이 미국과 무역협상을 할 때는 중국의 우이 여사와 같이 미국에 대해 과감히 'No'라고 말할 인물이 없다'라는 내용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1995년 2월 4일 미국 무역대표 캔트는 대중국 무역보복을 단행한다는 최종 결정을 선포하였고, 이에 맞서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역시 대미 무역보복의 최후 결정을 공포하였다.이 두 리스트를 보면 미국측은 28억 달러였던 대중국 수입액을 1억8천만 달러로 삭감하였으며 중국의 대미 주종 수출품인 운동화, 가방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이가 미국에 제시한 리스트에는 무역 외에도 투자에 관계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는 중국으로부터 공동투자에 의한 자동차 생산공장의 설립허가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때였으므로, 우이가 새로 추가한 항목은 미국의 급소를 정확히 찌른 셈이 되었다. 목록이 공포된 후 캔트는 우이에게 친필서한을 보내 워싱턴에서 이견 조정을 위한 최후 협상을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벌이자고 하였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중국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 우이는 협상을 다시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장소는 워싱턴이 아니라 베이징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 회신하였다. 중 .미 지적재산권 협상은 실무급에서 대표급으로 격상되어 베이징에서 열리기로 결정되었고, 미국 무역협상 부대표 바셰프스키가 베이징까지 날아와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 순쩐위(孫振宇)와 함께 최후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이 내놓은 투자카드가 비로소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국내 대기업들의 계속되는 압박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중국의 입법 및 사법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중국측 역시 일정 수준의 양보를 하였다.미국이 요구한 오디오나 비디오 관련제품과 소프트웨어 및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기 위한 단독 투자는 불허하는 대신 그것들을 합자의 방식으로 완화하여 허가하였다. 이로써 쌍방의 입장 차이를 조금씩 좁힐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25일, 쌍방은 협의문의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30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의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대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협상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25일에 작성하기 시작한 초안은 26일 새벽 3시까지도 겨우 4분의 1 정도 분량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26일 밤 10시가되어서야 이 무역전쟁은 쌍방의 대표가 샴페인을 터트리는 가운데 막을내렸다.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우이와 바셰프스키가 10여 시간을 기다린 기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기자들은 미국에게 감히 'No'라고 말할수 있는 중국의 여인 우이에게 존경과 감탄을 보냈다. 그녀는 어떠한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이익과 존엄을 지키는 중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다. 중국인에게 특별히 해야 할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베트남과 다시 수교하고 하노이에서 대사관 개관식을 거행할 때 국무장관 크리스토퍼가 참석하였다. 국무장관이 이런 행사에 직접 참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과 베트남 국민 간에 깊은 우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하노이의 열대풍경을 즐기려고 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크리스토퍼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미국 참의원 군사위원회 위원인 맥카인이 숨김없이 그 이유를 말하였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패권주의를 제재하여야 하는 공동의 목적이 있다. 경제적으로 활기에 넘치고 안정을 되찾은 베트남이 북방의 강력한 이웃 나라를 제재하려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전에도 이익이 된다'라고 말하여 미국 정치가들의 속셈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다. 중국을 제재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갈수록 분명해 짐에 따라, 지금까지 미국의 비호를 받아왔던 몇몇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하고 있다. 미국은 인권과 가트{ GATT)에의 복귀 및 세계무역기구( WTo ) 가입 등의 문제를 들고 나와 구체적인 행동으로 중국을 제재하기 시작하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미국 정부는 중국이 2000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가트에의 복귀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하였다. 미국은 끝내 그들의 말대로 하고 말았다. 2000 올림픽을 중국이 개최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세계가 주목하던 중국의 세계경제무역기구 가입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때문에 일치된 의견을 얻을 수 없었고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1995년 7월,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책 표지에 '중국제재'라는 제목을 싣고 중국의 경제력이 우려할 정도로 고속성장하고 있다는 장편의 글을 실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쟁의를 마무리하고 공고한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며, 유럽은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방관자적 태도로 바라보면서 어부지리(를 노리던 태도를 버리고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효과적으로 중국을 제재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경고하였다. 영국이 중국제재의 글을 내놓은 이튿날, 미국에서 최대 판매량을 자랑하는 {타임즈}도 유명 칼럼리스트 크로사모의 글을 실었다.그는 비엔나회의를 열어 프랑스제재방안을 만든 것처럼 중국에 대한 통일된 제재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을 제재하자는 주장을 이들 저널이 앞서서 내놓자 {데일리 뉴측} 이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앞다투어 덩달아 보조를 맞추며 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데일리 뉴욕}은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만은 지난 1세기 동안 겨우 40년 정도 중국 정권의 직접통치를 받았을 뿐인데도 국제법상 '하나의 중국'이라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영문 잡지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의 표지에 '부드럽게 나아가라[輕柔地走]'라는 제목으로 실전 글에서는 중국을 제재할 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성립된 자 얼마 안 된 동남아안전회의가 현재 직면한 문제는 미국과 협력하여 중국을 효과적으로 제재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일본의 주간지 {시지카이세쓰(時事解說)}의 맨 앞에 실린 글에서 미국정부는 그들의 정책이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지 절대로 '중국을 제재'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동남아 국가들과 ' 대중국 포위권'을 형성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확실히 중국을 제재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처럼 시끄럽게 추태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비웃음을 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속으로는 내키지 않으면서 마구 떠들어대는 놈들도 있고, 남을 선동하면서도 자신은 방관자인 척하는 놈도 있으며, 험은 남아돌지만 쓸 수 없는 놈도 있고, 부화뇌동하는 무리도 있다. 이처럼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제재론자들이 어떻게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뭉칠 수 있겠는가? 중국으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언행들에 대해 중국 정부는 제재할 것은 제재하고 따질 것은 따지고 반박할 것은 반박하고 무시할 것은 무시해야 한다. 이 문제로 시간을 길게 끌어 우리가 나아갈 길에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 국민들은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중국을 제재하려고 허튼 수작을 부리는 나라의 물건은 사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이들의 작태에 효과적인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한테도 고민이 있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다녀야 하는 일이 늘 고민이었다. 사람들마다 문제없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하느님은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이 항상 사랑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바람일 뿐 에덴 동산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사랑보다 증오를 가지고 살았다. 삶보다는 죽음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화해보다는 분열이, 평화보다는 전쟁이 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고통에 휩싸이는 일이 더 많았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지녔던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가지고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병들어 아픈 사람은 아픈 데를 어루만져 주어야 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자에게는 그 눈물을 닦아주어야만 했으며, 쓸쓸하고 외로워하는 자에게는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달래 주어야 했다. 그리고 분노에 들떠 잠 못 이루는 자가 있으면 새벽이 올 때까지 그와 함께 밤을 지새 주어야만 했다. 하느님은 하루하루가 정말 바쁘기 그지없었다. 아무 불평 불만이 없도록 그 많은 사람들을 골고루 다 찾아다니기에는 하루해가 너무 짧았다. 하느님은 곰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내 대신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찾아갈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하느님은 "맞아, 바로 그거야!"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바로 어머니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한 사람씩 어머니를 갖게 되었다. 글터 → 이글저글 합판은 노벨상의 제창자 앨프렛 노벨이 발명했다.흔들의자는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발명했다.가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발명했다.콘택트 렌즈도 1508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발명했다.인력거는 일본에 선교사로 가 있던 미국 감리교 목사인 조나단 스코비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는 병약한 아내를 위해 이것을 고안했는데, 처음 사용한 것은 1869년 요코하마에서였다.첫 비행기록, 키티호크에서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한 거리는 겨우 12초 동안으로 보잉 747의 날개보다 짧은 거리였다.세계에서 가장 좋은 자동차,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했는데, 역시 벤츠로 꼽힌다. 코들리엡 데임러는 칼 벤츠와 한 나라 사람으로 벤츠가 만들고 있던 내연기관을 나름대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난적이 없었지만 이들의 기업을 이어받은 회사들이 그들 두 사람의 것을 합쳐 지금의 메르세데스 벤츠 회사를 차렸다.마리 퀴리는 라듐을 발견했지만, 자신의 발견한 방사능 때문에 죽었다. 그녀는 방사선으로 죽은 최초의 사람으로 그때에는 그것이 해로운 줄을 모르고 있었다.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차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원리는 반대이다. 원자폭탄은 우라늄 원자를 분해하여 그 에너지를 방출한다.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그러나 수소폭탄은 ‘핵융합’의 원리를 이용한다. 즉, 엄청난 양의 열로 수소원자들이 서로 융합하여 헬륨원자를 형성하고 이 때 생긴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소폭탄의 원자를 융합시킬 수 있는 강한 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자폭탄의 폭발뿐이다. 따라서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을 안에 가지고 있다. 즉 원자폭탄이 먼저 폭발하여 엄청난 양의 열을 내면 이 열에 의해 수소폭판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원자폭탄이 사용되었으나 실제로는 수소폭탄이 가장 강력한 폭탄이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8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65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79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428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454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99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61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93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1,000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34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852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36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603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55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51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76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509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81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66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79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70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48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403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78 호4339.12.07 (10.17)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작년 어느날 공사장에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일당을 위해 일을 나갔었습니다. 노동 일도 잘 생기지 않는 일감이라 반갑게 생각했었죠. 고된 하루였습니다. 그런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시멘트에 온몸이 거지꼴이었죠. 그래서 항상 공사장에서 대충이나마 씻고 집에 오곤 했습니다. 지나치게 지저분하면 어머니가 안쓰러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시장어귀에서 복숭아를 샀습니다. 리어커에서 파는 것 치고는 크고 좋아보였습니다. 전날 저녁 어머니께서 복숭아를 잡숫고 싶다 말씀하셨거든요. 돈이 넉넉치않아 세 개밖에 사질 못했습니다. 시장을 벗어나 집앞 횡단보도를 건너려 서있는데 눈에 익은 노인 한분이 엉거주춤 묘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음걸이로 봐선 뛰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걸음이 위태로와 보였습니다. 초록색 등이 들어와 앞을 달려건너 노인 앞에 급히 서 "어디를 가시오?" 라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 저를 보시더니 밝게 웃으셨습니다.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주름진 손엔 내손에 있는 것과 같은 검정비닐봉지가 있었는데 그안엔 복숭아가 달랑 한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얼마나 잡숫고 싶으셨으면 그것도 돈을 아끼려 달랑 한 개만 사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에 돌아와 서로의 봉지를 털어보니 복숭아가 네 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두개씩 나누어 먹자 말씀하셨지만 저는 복숭아를 먹으면 간지럼증이 있다 말씀드리고 내방에 들어와 옅은 미소로 앉아 전날 멈추었던 글을 다시 이어 썼던 기억이납니다. 언젠가는 복숭아 한상자를 어깨에 메고 집에 들어갈 날이 있지 않을까 미래의 해질녘을 상상해봅니다.- 2006.12.07 - 風磬 - 문학소식 문학의 공간, 기억의 장소 [문학] 계간 『문학수첩』 특집 ‘우리문학의 공간과 장소’ ▲ 계간 『문학수첩』 겨울호 표지 문학은 한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공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 특히 문학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배경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장소’는 지리적, 문화적 기록물로서 가치가 크다. 계간 『문학수첩』은 이번 겨울호 특집에서 이러한 ‘문학의 공간’에 주목하면서 우리문학의 ‘공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박현수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문학의 공간 : 공간과 장소의 시적 변증법」에서 ‘공간’과 ‘장소’에 대한 철학적이고 원론적 탐색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까지 문학에서 있어서 공간의 문제는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공간적 측면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장소적 양상의 나열에 머물러 있었다”며 “문학담론 역시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과 감성적 영역인 장소를 함께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모윤숙의 시 「청춘의 노래」에서 시인이 ‘無形한 空間’이라고 명명한 시구에 대해 “구체적 질료를 벗어난 초월적 성격을 지니는 공간”으로 해석하면서 “이때 ‘형(形)’은 공간에 대한 칸트적 이중성인 감성적 요소와 순수직관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 용어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리학 연구자인 심승희 청주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장소 기억하기’와 ‘장소 만들기’로서의 문학」이라는 글을 통해 그동안 문학연구자들이 연구해온 ‘문학 속의 공간’에서 시점을 이동하여 ‘공간 속의 문학’으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심 교수는 지리학이 의존하고 있는 문학의 가치는 “문학이 장소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장소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이러한 문학을 ‘장소 기억하기’로서의 문학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장소 기억하기’의 문학은 “지역소설 또는 생태소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양귀자의 원미동, 박영한의 우묵배미, 조정래의 벌교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지리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장소 만들기’로서의 문학이 있는데, 이것은 “문학 작품의 텍스트 자체보다 문학 테스트가 가지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우체국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그린 유치환의 시 「행복」을 예로 들면서 “문학은 지역이나 공간을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그 자체가 지역이나 공간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공간의식과 집의 사회학」에서 공간의 변화에 따른 문화사적 변화를 가정의 둥지이면서 그 자체로 외부세계의 규정력에 대한 저항인 ‘집’을 통해 그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집은 우주적 삶의 집약적인 총체였으며, 또한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해와 달을 포함한 온갖 자연이 머물고 가는 열린 공간이었다”면서 농경 공동체에서의 전일적인 집의 존재성을 그린 이재무의 「위대한 식사」와 집에 대한 무한한 그림을 묘사한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일적 삶의 총체로서의 ‘집’의 이미지는 산업사회의 급속한 전개와 더불어 자연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 간에도 단절된 자폐적인 미로의 지형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는 최승호의 「두엄」과 신영배의 「집들의 시간」에서의 ‘집’처럼 “현대사회는 안식과 평화의 집을 절박한 피난과 은신의 장소”로 만들고 있으며, 그래서 “집은 지하실처럼 깊은 자폐적인 공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김화순의 시 「거리는 bAng의 천국이다」에 등장하는 거리로 나온 방들(노래방, 찜질방, 전화방, 대화방, PC방, 소주방 등)은 “집의 공간이 자본주의의 소비 욕망의 침탈에 완전히 해체된 형국”으로 분석했으며, 이러한 일과성의 ‘방’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노숙인들의 쉼터, 서울역은 “어느 순간 지상의 방 한 칸마저도 찬탈해 인간 삶의 근원을 붕괴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의 공포의 정치적 공간이 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한편 이번 특집에서는 문학에 드러난 구체적 장소를 통해 글쓰기의 다양한 양상을 함께 다루고 있다. 차미령 문학평론가는 「파리, 떠도는 자들의 도시」에서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에 나타난 파리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으며, 손유경 문화기획 퍼스웹 기획위원은 「두가지 국경 : 바다와 국가」에서 최근 소설의 공간을 중국으로 확장시킨 김인숙, 천운영, 공선옥, 김연수의 작품을 대상으로 이들의 국경을 넘는 상상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탐색한다. 또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1930년대 경성 공간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박태원의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1930년 경성의 도시 공간적 특징과 관련지어 살피고 있다.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 / 캐서린 햅번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의 사랑법과 일본 유학생의 낭만 - 강명화 1923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강명화의 자살. 내막은 매우 복잡. 가명을 명화라 하야 일시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이 있다하는 평양 태생의 강도천은 경북 재산가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의 애첩이 되야 동경으로, 경성으로 그 남편과 같이 왕래하더니 최근 온양 온천에 그 남편과 함께 가서 유숙하든 중 12일 온천 여관에서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자살할 결심으로 독약을 먹었으므로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회생치 못하고 인하야 절명하얐는데, 시체는 작일 경성으로 운반하야 매장할 터이며 자살한 원인은 장씨의 사정과 기타 복잡한 내막이 있다더라. 신문에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리던 날 오전 10시, 강명화는 그녀의 유언대로 이태원 공동 묘지에 묻혔다. 신문에는 25세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 나이로 그녀는 23세였다.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에 강명호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셈이었다. 1901년(고종 38년) 6월 12일 평양 시외에서 태어난 강명화는 금정에 미친 아버지 강기독의 가산 탕진으로 소녀 시절을 가난과 불운 속에서 지내야 했다. 명화란 그녀의 기명이고 호적상 이름은 도천이었다. 아버지는 금점도 금점이려니와 노름판이다, 색주가다, 온갖 못된자리는 다 찾아다니는 떠돌이요, 건달이었다. 어머니 윤씨 부인이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집안에 잠시 다녀간 일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거든 도천이라구 지어!" 하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도 윤씨 부인은 이름을 도천이라 지었다. 한데 두어 달에 한 차례씩 집을 다녀가는 아버지도 도천이의 성장을 예사로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고것 참 에미는 잘생기지도 안았는데 도천이는 이쁘단 말야!" 그런 말이 아니면,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던데 우리 집 밑천이 되겠는거!" 하고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 윤씨 부인은 남편의 그 같은 부성애가 싫지 않았다. "여보, 우리 도천이를 훌륭하게 키워 봅시다." "암! 평양으로 데리고 나가서 키워 보자고." 남편은 어린 도천이를 데리고 아내 먼저 평양으로 나갔다. 세간을 처분하고 뒤따라 윤씨 부인도 평양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도천이 바로 밑에 남동생 도선이가 있었으나, 윤씨 부인은 맏딸 도천에게 정이 더 가는 터였다. 얼마 뒤 윤씨 부인은 남편과 도천이 먼저 나온 평양집으로 뒤따라 왔다. 그러나 응당 평양집에 있어야 할 남편은 그 집에 있질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적어 준 평양집 주소는 그들 가족이 살 집이 아니라 기생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천이를 데리고 있는 산호주라는 기생에게 물어보았으나, 남편의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 도천이를 내어주오!" 윤씨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무슨 소릴! 제 아비가 몸값 받아간 아이를 내어주다니 당치도 않소!" "뭐예요? 그럼 우리 도천이가 동기가 되었단 말이오?" "우리 도천이, 우리 도천이 하지 마오! 이젠 내 수양따이니까!" 기생 산호주는 매몰차게 따돌리고 대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양모 산호주는 도천이의 이름을 갈아 버렸다. '확실이'. 무엇이 그리고 확실하다는 뜻인가. 확실히 동기는 동기란 뜻인가. 도천이란 아명도 별스러웠지만 확실이란 동기 이름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술 따르고 노래 부르는 나날이 어린 확실이의 세월이었고 보람이어야 했다. 장구치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배우겠다는 부푼 희망이 한 가닥 꿈으로 멀리 사라져 버린 지도 오래였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저주스러운 아버지 강기덕은 이따금 산호주 집에 나타나 기생충처럼 용돈을 뜯어가는 눈치였다. 세월이 흘렀다. 강확실은 한 사람의 여인을 성숙해 갔다. 아름다운 꽃에게는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법인가. 해가 바뀔수록 용모와 마음이 아름다워져 가는 확실이 주변에 평양의 명문 자제들이 벌과 나비처럼 모여들었다. 확실이는 그녀의 꽃을 꺾으려 드는 호색가들에게 다져진 결심이 하나 있었고, 그 결심을 언제나 서슴없이 펼쳐 보이고는 했다. "난 정절을 굳게 지켜 뒷날 멋진 남자와 혼인할 테다." 말하자면 그것이 확실이의 바람이었고 꿈이었으며, 현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확실이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사들인 기생 산호주는 생각이 달랐다. "저것을 빨리 머리 얹어 주고 돈을 두둑하게 긁어 봐야 할 텥데........" 산호주의 생각은 정말이지 '엿장수 마음대로' 확실이를 어디엔가 팔아 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웬걸 처녀 강확실의 지조는 그 아무도 꺾을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동기 생활 몇 년에 그녀는 세상을 알기 시작하였고, 돈을 알게 되었다. 기왕 이 길에 들어섰으니 불쌍한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호강시켜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돈을 벌기에는 평양이 너무 좁다고 판단되어 그녀는 서울(당시 경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동기 강확실의 나이 열아홉 살로 접어든 봄, 그녀는 어머니 윤씨와 남동생 도선을 데리고 서울로 오고 말았다. 양모 산호주가 확실이를 놓지 않으려고 온갖 앙탈을 다 부리고 나왔으나 이제는 성장할 대로 성장한 그녀의 계획을 막을 수더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는 평양 시절의 동기 때를 씻어 버리고 이름을 갈아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 밝을 명, 꽃 화 '밝은 꽃'이 그녀의 제 2의 이름이었다. 강명화란 이름으로 기적에 오른 도천은 이제 한 사람의 직업 여성으로 서울 사회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에는 예쁘고 깜찍한 명함도 들어 있었다. 손님이 그녀의 이름을 물어올 땐 허리춤에 손을 넣어 그 작은 명함을 꺼내 주게끔 되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박혀 있었다. 조선 권번 강명화 경성부 다옥정 165, 전화.강화문 2170 동경 유학생 장병천이 강명화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송별연 자리에서였다. 장병천은 영남 갑부의 외아들이요, 미남 청년에다 그 당시 서울에서 몇 명 안되는 동경 유학생 가운데 대학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 전문 학교가 태반이던 시대에 그의 대학 모표는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1920년에 설립을 본 경일 은행은 그의 아버지 장길상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부잣집 자식이었나 짐작이 가는 일이다. 장병천은 여름 방학을 끝내고 도경으로 들어가기 전 명월관에서 친구들과 송별련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강명화를 처음 대하게 된 것이었다. 십여 명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한 명월관에서 강명화의 인사를 받았을 때 장병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물론 장안의 인기 있는 명기 강명화란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나, 저렇게 아름답고 귀여울 줄이야.....' 짓궂은 친구들은 장병천을 강명화 곁에 앉도록 했다. 술이 거나해졌다. 한 손에는 술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명화의 손을 꼭 잡고 병천은 말했다. "오늘 밤차로 나는 부산을 거쳐 동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떠나고 싶지 않아......" "그래두 떠나셔야죠."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 겨울 방학 때 오시면 만날 수 있잖아요." "겨울 방학까진 너무 길어, 그 안에 다시 만날 순 없을까......." 명화의 손을 쥔 병천의 손은 술기운 탓만도 아닌 듯 열기가 있었다. "나 오늘 밤에 떠나고 싶지 않네." "또 그 말씀. 술이 깨시면 곧 그 말씀은 잊어 버리실 거예요." "무슨 소릴. 내가 취한 줄 알어?" 병천은 손에 든 술잔을 비워 내고 또다시 술을 받았다. "약주가 과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난 선생이 아니구 학생이야." "아이, 대학생이니까 제겐 선생님 격이죠." "그보다 내가 동경에 간다면 명환 나한테 편지하겠어?" "그럼요, 선생님 공부에 방해가 안 된다면야." "아니, 내가 먼저 편지할 테니깐 주소 하나 적어 주게." 명화는 명함을 꺼내어 병천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 기차 출발 시간이 임박했네, 일어서자고." 병천의 친구가 시계를 보더니 먼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강명화와 장병천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했다. 명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병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잣집 외아들이라는 점에 내가 끌린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몇 안 되는 동경의 대학생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쾌남아에 대학 사각모를 쓴 병천의 모습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뻔질나게 찾아오는 한량들 속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머리를 얹고 들어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로 그이는 도쿄에 가서 나에게 편지를 할까. 편지가 오면 답장을 해 주는 게 도릴까. 갑부의 외아들이 한 차례 술을 마시며 귀엣말을 한 걸 가지고 난 철썩같이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밤이 깊어 갔다. 깊어 가는 밤 속에서 그녀는 눈 뜬 정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일까. 사랑은 이렇게 열리고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성숙해 가는 것일까. 정병천을 머리 속에 접어두고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하느라 그녀의 심신은 지쳐 있었다. 그 때 대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인력거 닿는 소리였다. "아씨, 손님이 찾는데요." 방문 밖에서 부리는 아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명화는 짜증이 났다. "아씨, 손님이 보자는 데요!" "없다고 그래!" 취객이 일쑤 밤중에도 찾아오고는 하여 그 때마다 명화는 없다는 말로 따돌리기 예사였다. "만나 뵙구 가시더라도 가시겠다는데요, 아씨." 대문께로 나갔다 들어온 아이가 권하는 소리였다. 명화는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끌고 대문께로 나갔다. "대체 누구야........?" "나, 정병천이오!" "에엣? 아니......" 동경으로 떠난 장병천이 자기 앞에 서 있다니, "어찌된 일이세요?" "명화가 보고 싶어서..... 명화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믿어지지 않아요. 꿈만 같아요." "꿈이 아닐세, 명화. 기차를 타고 가다 용산역에서 내려 버렸소. 명월관과 조선 권번에 전화를 걸어도 명화가 없다고 그러더군. 인력거꾼한테 물어서 가까스로 이 집을 찾았지." "들어오세요......." 그날 밤부처 장병천은 강명화의 집에서 묵었다기보다, 강명화의 사랑 속에 파묻힌 것이다. 동경의 대학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명화의 집에 눌러앉아 있는 걸까. "대학에는 1년간 휴학계를 내고 집에는 무사히 동경에 닿아서 공부하는 것처럼 편지를 내고...." "그렇게 하셔두 되나요?" "명화 곁에 있으려면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지." 정병천의 본가에서는 매월 동경으로 학비를 보냈는데 그 학비는 도로 명화의 집으로 우송되게끔 각본을 짜 놓고 살림은 시작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권번에는 나가지 않고 장병천과 사랑의 밀어만을 속삭이는 명화는 비로소 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오래갈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윤씨 부인이 딸의 생활을 간섭하고 나섰다. 살림을 차릴 게 아니라 부잣집 외아들이니 돈을 뜯어내라는 것이었다. 다음엔 장병천의 본가에서 그만 알아 버렸다. 생활비와 학비가 끊겼고, 무엇보다 살길이 막막했다. 두 사람은 동경으로 뛰었다. 이목이 없는 낯선 고장에 가서 막벌이라도 하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어 보자는 계산에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부잣집 외아들이 막벌이에 수월할 리 없었고, 게다가 동료 유학생들의 질시가 몸에 따가웠다. "이새끼, 기생첩 데리구 살면서 공부를 한다구? 유학생 망신시키지 마 새끼야!" 동료 유학생들의 위협은 매질을 가하는 것보다도 더 아픈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로 발길을 되돌린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장병천이 거부의 외아들이란 점이었다. 장의 집에서는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한옥 한 채를 사 주었다. 종로 6가 32번지. 그러나 그들의 보금자리는 또다시 깨어져 버렸다. 이번에는 명화 아버지 강기덕이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과는 관계없이 명화 아버지와 병천의 본가는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리고, 그들의 사랑도 그 이상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갔다. 명화는 결심했다. "선생님, 나 옥양목 치마 저고리 한 벌 하고 백구두 한 컬레 사주세요." "어디, 떠나게?" "아뇨. 선생님하고 온천에 다녀오구 싶어요." "........" 그들은 나란히 온양으로 떠났다. 1923년 6월 10일, 음력으로 4월 26일이 되는 이날은 명화의 생일이었다. 온천 여관에 투숙한 명화와 병천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 길고 깊은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비가 요란한 여관에서 명화는 미리 준비해 간 약을 먹었다. 6월 12일의 일이었다. 얼마 뒤 장병천도 명화의 뒤를 따랐다. 유학생들과 사회와 그의 본가의 질시를 떠나 병천은 죽어서 명화 곁에 나란히 누울 수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자주와 사대의 사이 -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 : 김기덕(건국대 강사) 황제. 천자. 왕 왕조사회에서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칭호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흔히 ‘왕’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은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 했고, 그 밑에 각지역의 통치자로 봉건제후인 여러 ‘왕’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황제’ 나 ‘천황’ 처럼 ‘왕’ 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대왕’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왕’이라 칭했다. 중국의 경우 원래 군주 칭호는 ‘왕’또는 ‘천자’였다. 왕은 ‘훌륭한 사람’, 천자는 ‘상제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었다. 이후 중국의 최고책임자는 항상 황제라 했고, 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 2천여 년 계속되었다. 흔히 황제는 건설적인 중국의 임금인 삼황과 오제를 한 단어로 줄여서 만든 칭호라고 한다. 그러나 황제의 ‘황’ 은 ‘빛이 난다’ ‘위대하다’ ‘크다’는 뜻이고, ‘제’는 상제 즉 천계에 살면서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최고의 절대신을 뜻한다. 따라서 황제는 ‘빛나는 우주의 주재자’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또는‘천자’대신, 보다 초월적인 절대신의 의미를 갖는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는 자신을 지상에 출현한 상제 그 자체로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의 황제는 원칙적으로 천하에 단 한 명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진시황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 조. 짐등의 각종 용어를 제정하였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중국은 여러 왕조로 이어지며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였다. 중국왕조와 우리 나라의 삼국(고구려. 백제.신라)- 고려- 조선의 왕조는 서로 교류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외형적으로 책봉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책봉은 중국이 황제국의 입장에서 우리를 제후왕으로 봉작해 주는 외교적인 의례행위였다.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중국의 왕조는 송. 요(거란). 금. 원. 명이였다. 고려는 국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 형식상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고려국왕’이라 책봉해 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는 중국이라는 황제국에 제후국으로 신속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단지 외교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였을 뿐 실제적인 구속력은 거의 없었다. 제왕과 왕작의 수여 고려국가는 실제 여러 면에서 황제국체제로 운영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형식적인 국제질서를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하였다. 무엇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은 ‘제왕’의 존재였다. 고려는 가까운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 봉작 즉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작위는 공. 후. 백. 자. 남의 5등작이 있었다. 왕족은 5등작에서 상위의 공작. 후작. 백작3단계까지를 수여해 주었다. 그리고 수여된 작위는 다른 나라와 달리 상속되지 않고 자신의 당대에서 그 혜택이 끝났나. 단 왕족의 경우 작위를 가진 자의 자식(아들 및 사위)에게 사도 혹은 사공의 최고관직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그런데 고려는 공작. 후작. 백작을 수여받은 왕족과 그들의 다음 대(아들 및 사위) 사도. 사공을 수여받은 자를 총칭하여 제왕이라고 했다. 제왕은 본래 왕작을 수여받은 사람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중국은 황제국이어서 실제 왕작이 수여되었는데, 왕작에는 친왕. 사왕. 군왕의 등급이 있었고 이들을 모두 제왕이라 했다. 그러면 고려는 중국처럼 왕으로 봉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제왕이라 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에 항복해 온 신라 경순왕에게 낙랑왕을 봉해주고 일부 왕족에게 대왕을 봉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는 왕작을 직접 수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려는 왕족으로 봉작받은 자와 다음대의 사도. 사공을 총칭하여 제왕이라 함으로써, 실제 왕작은 없었으나 왕작을 수여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냈던 것이다.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제왕’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아울러 ‘친왕’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또 후작을 받은 자를 후왕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봉작제는 황제가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점은 작위와 함께 주어진 식읍에서도 나타난다. 식읍의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식읍의 규모와 형식은 중국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제후국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국내에서는 황제국의 제도와 형식을 취한 이중체제로 운영하였다. 이는 당시의 세계국가인 중국과 가장 근접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염두에 둔 외교적 방안의 하나로 이해된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적 위급성이 적었으므로 중국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따라서 굳이 고려처럼 이중체제를 취하지 않고 바로 천황을 칭하였다. 왕실 용어에 반영된 황제국체재 고려의 국가체제는 황제국체제였으며, 고려의 국왕은 실제로는 황제였다. 이 점은 왕실관계 용어가 황제국이었던 중국과 같았던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국왕의 명령은 성지, 조, 칙, 제라 하였다. 왕위계승자를 태자라하고 국왕의 어머니를 태후라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진시황이 황제칭호를 제정하면서 황제국만이 사용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복장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대등하게 하였다. 한편 국왕을 공식적으로 황제라 부르지 않았고, 왕비 또한 황후라 하지 않고 왕후라하였다. 다른왕실 용어들은 전부 황제국 용어로 하면서, 최고 통치자와 그 부인은 왕과 왕후라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왕과 왕비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쓰고, 역시 황제만이 사용하는 당시 국제적인 연대표기인 연호는 중국연호를 썼다. 그러나 그 외의 왕실 용어는 전부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 묘지명이나 금석문을 보면 돌아가신 왕을 ‘선황’이라고 표현하거나, 당시의 국왕에게‘황제가 만세토록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고려의 백성들은 실제로 고려국왕을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려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칭제건원 즉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한 시도가 두 번 있었다. 제4대 광종은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17대 인종때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과 칭제건원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의킨 묘청은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황제국을 지향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제후국을 인정한 고려의‘이중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명실상부하게 황제국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는 것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종묘의 각 현실에 붙이는 이름이다.고려의‘태조, 혜종, 정종, 광종...’이나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가 다 묘호이다. 묘호는 첫 글자 다음에‘조’나 ‘종’을 붙이는데, 이러한 조나 종의 묘호 또한 사실은 황제의 묘호인 것이다. ‘조’는 창업한 왕이나 공이 큰 왕에게만 붙이고, 보통은 ‘종’이었다.조선시대에는 창업한 왕인 태조(이성계)외에도 ‘조’가 붙는 왕이 일곱명이나 되어 어떤 이유로 ‘조’가 붙었는지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창업한 왕인 태조(왕건)외에는 ‘조’를 붙인 왕은 없었다. 뒤에 설명되겠지만 원 간섭기에 제후국체제가 되면 이러한 황제식 묘호인 ‘조’나 ‘종’은 쓰지 않게 되었다. 각종 제도에 반영된 황제국체제 왕조국가의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종묘와 사직이다. 특히 종묘는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으로, 조상숭배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종묘에서 제사를 모시는 역대 왕들의 수는 황제의 경우 7대조까지 모시는 7묘제, 제후는 5묘제였다. 고려는 성종 때 처음 종묘를 세우면서 5묘를 택하고 있어 제후국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이나,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의종 때 7묘제가 되었다.공민왕 때에는 종묘제도가 다시 정비되는데, 불천지주(영원히 옮기지 않는 신주)와 좌우 각각 2묘씩을 두어 언뜻 보면 5묘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태조만이 아니라 혜종과 현종의 신주도 불천지주였다. 따라서 결국 자연히 7묘제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국체제는 제천 즉 하늘에 대한 제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래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존재는 황제만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왕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는데, 그것을 원구제라 하였다. 원구는 제천을 하기 위한 제단의 모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늘의 형상이 둥근것과 제단을 높게 쌓아 하늘에 가깝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려국왕이 제천한다는 것은 고려왕실이 천명을 받았다는 정치적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며, 하늘의 신인 상제를 대리하여 백성과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위이다. 뒤에 제후국체제를 취한 조선에서는 무례하다 하여 없앴으나, 고려는 일찍부터 원구제를 거행하였다.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중앙정치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의 중앙관제는 당제를 받아들여 황제국체제하의 3성6부체제로 운용되었다. 3성이란 조칙을 작성하는 중서성, 그것을 심의하는 문하성, 그리고 이를 집행하는 상서성을 말한다. 6부는 상서성 밑의 6개 부서로 국가행정의 주무부서였다. 이 외에도 군대가 적과 전투를 하기 위해 출정할 때의 군대편제를 제후국체제의 3군편성이 아닌 황제국체제의 5군편성으로 한 점이나, 수도인 개경을 황도라고도 하고 개경의 내성을 황성이라고 표현한 점등은 다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각종 제도가 실제에 있어서는 다분히 형식적인 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제국인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하여 있으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외교적 측면에서 제후국으로, 국내에서는 실제로 황제국이라는 이중체제로 운영한 고려의 국가체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원 간섭기, 제후국체제로의 변화 고려의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후기에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변하였다. 충렬왕 떼에 원나라는 자기들과 같은 황제국 수준의 제도와 칭호를 무례하다고 하여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원과 유사한 것은 모두 고쳤다. 당연히 3성체제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왕실 용어도 선지를 왕지로 짐을 고로 사를 유로하는 등 여러 칭호를 바꾸었다. 태자도 세자라 하였으며, 묘호 또한 종을 칭하지 않고 충선왕, 충혜왕처럼 제후왕의 묘호로 강등되었다. 더구나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왕의 이름에 ‘충’이라는 글자를 돌림자로 넣었다. 이와 함께 황제의 입장에서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던 봉작제는 폐지되었다. 아울러 봉작에 따른 식읍의 수여 또한 없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원 간섭기에 와서 고려의 체제가 황제국체제에서 제후국체제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원의 지배를 받는 한 제후국체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 간섭기나 조선의 제후국체제를 사대적인 것으로 단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 간섭기 때에도 나름대로 고려왕조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지키려고 줄기찬 노력을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오히려 세계제국인 원의 지배하에서 제후국체제일 망정 독립국가를 유지한 점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의 위상을 제후국체제로 하느냐 고려처럼 실질적인 황제국체제로 유지하는냐는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제후국체제로 정리되었다. 그결과 비록 묘호는 조와 종의 황제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원칙적으로 제추국체제로 운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러한 점은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명분론과 그 연장으로서의 화이론(중국은 황제국‘화’, 주변국가는 제후국‘이’)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제후국체제라 할지라도 역시 현실적인 구속력은 거의 수반되지 않았다. 과거 식민사관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관계 즉 황제국과 제후국관계를 전부 우리 민족의‘사대성’으로 설명하였고, 한국사의 국욕적인 상징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외교관계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중국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이 사라진 지금, 중국이라는 세계제국 바로 옆에서 항상 독립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의 역사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인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로 만든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우리도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당시 내용이 수반되지 않는 명분만의 조치였지만, 왕조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황제국 중국과 제후국 조선의 형식적인 관계마저 부정하고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자 한 것이었다. 실로 우리 역사상 고려시대 광종의 칭제건원 이후 처음 나타난 황제체제의 공직적인 선포였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보이지 않는 충고 중학교 때의 일이다. 새학기 초라서 친구들과도 서먹서먹한 때였는데, 하루는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구멍가게에 갔다가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는 말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먼저 아는 척하기가 쑥스러웠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냥 못 본척 물건을 고르다가 그만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안 보는 틈을 타서 몰래 과자를 주머니에 넣고는 유유히 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해서 그 애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 보았다. 그후에도 두세번 나는 우연히 그 애의 그런 행동을 목격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점점 학교에서 그애와 마주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그 애도 이런 내 태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그 애를 교실 밖으로 살짝 불러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이젠 그런 짓 하지마!" 처음엔 그 애는 움찔 놀라는 듯하더니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 보다가 조용히 교실로 들어갔다. 그 날 이후, 그 애는 내가 쳐다볼 때마다 일부러 나를 피하듯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나는 그 친구와의 어색한 관계로 늘 마음 한구석이 편치않았다.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나고 드디어 졸업식 날이 되었다. 식구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며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만치서 그 애가 꽃다발을 한아름 들고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수줍게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현정아 고마워. 그때 나에게 충고래 주고 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는 훌쩍 뛰어가 버렸다. 순간 내 가슴속으로 그 애가 주고 간 꽃다발의 상큼한 향내가 깊이 밀려 들었다. 강현정 님/경남 진주시 수송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8 - 가장 재미있는 철학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년) 그때 세계에서는 1817년: 영국 리카도,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지음 1823년: 미국 먼로 대통령, 먼로주의를 선언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rthur] 1788.2.22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 ~1860. 9. 21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인기절정의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헤겔을 대단히 싫어하고 학문적으로도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한 철학자가 사강사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헤겔을 떠나 자기의 강의실로 찾아들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헤겔의 인기와 명성에 눌려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떠난 이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대단한 천재성을 지닌 젊은이였다. 괴테가 그의 모친에게 '당신은 천재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칭찬해주었을 정도였다.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본래가 실업가였다. 그것도 대단히 크게 성공한 무역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본래가 실업가였다. 그것도 대단히 크게 성공한 무역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쇼펜하우어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노력했다.그러나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작가였기 때문에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아 작가로서 활약하기를 원했고, 아들 쇼펜하우어는 철학공부를 해 교수가 되려는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쇼펜하우어가 본격적으로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늦은 편이었다. 그도 칸트로부터 시작한 셈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자신도 독창성있는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불태울 수 있었다. 칸트의 철학을 가장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피히테, 셸링, 헤겔이 아닌 자기자신이라고 자부했다. 그것은 칸트를 칸트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정당한 판단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지금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대표적 저서인 동시에 칸트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책 첫머리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말은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을 이어받은 적절한 표현이다. 쇼펜하우어는 "내 책 첫마디만 읽어도 내 책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칸트에게서 인식론과 철학을 받아들인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연구했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하는 이념을 존재의 형상인 동시에 예술적 원상으로 해석해 예술철학적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헤겔이 정신철학을 제창한 데 대해 의지의 철학을 주장하고, 삶과 세계와 우주의 근원은 맹목적인 의지로부터 발원한다고 보아 염세주의 철학을 기초짓는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염세주의 철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없는가를 모색한 그는 인도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해탈의 철학만이 맹목적인 의지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해준다. 서양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인도철학을 자신의 체계속에 도입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예상을 뒤엎소 철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독일의 전통은 영국과 다르다. 영국에서는 교수가 아닌 철학자나 학자들도 교수와 동등하게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대학강단을 차지하지 못한 철학자는 야인에 머문다. 그리고 그들의 저서와 철학이 대학강단에서 강의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저서와 철학은 대학보다도 사회 여러계층의 호응을 받았고, 그 독자들은 오히려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그의 철학에는 피와 생명을 지닌 인생의 과제와 그 해결을 위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의 추종자들은 쇼펜하우어 이외에는 철학이 없으며 다른 책 열 권보다도 쇼펜하우어의 한 권의 책이면 족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지금 우리가 읽어도 그의 저서는 약동하는 생명력이 있고 또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의 대단치 않은 문제들도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진리에 접근케 해 주는 느낌이 든다. 그는 여성을 대단히 천스러울 정도로 비판한다. 사람들은 평생동안 모친과 불화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친에 대한 혐오감이 여성에 대한 증오심으로 발전해 결혼도 하지 않았고 여성기피증에 빠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상당히 수긍이 가기도 한다. 성의 본능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S. 프로이트를 읽기 전에 쇼펜하우어를 읽은 사람은 프로이트의 사상이 새롭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근본의지를 만드는 것은 성적 욕망이며, 그것은 생명보전의 기본조건이라고 본다. 인간 신체 중에 가장 대조적인 두 요소는 대뇌와 생식기라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성의 본능이 단절되면 인류는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철학도 이데(Idee)론에 따르면 확실히 높은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아름다운 나무는 열매를 맺는 일이 없으며 좋은 과수들은 그렇게 못생겼을 수가 없다고 말해 독자들을 웃긴다. 오히려 헤겔이나 셸링보다는 독창성이 있는 철학이론을 재미있게 전개시켜준다. 추종자들이 그를 종교적인 스승으로까지 추앙했던 것도 이유없는 바 아니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깡패'에는 두가지 어원설이 있습니다. 영어를 빌어 온 단어 중에서 우리가 늘 쓰는 것 중에 '깡패'란 말이 있습니다. 폭력을 쓰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지요. '깡패'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어원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해방 뒤에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 오게 되고, 이들의 통조림통인 'can'에다가 한자어인 '통'을 붙인 '깡통'을 거지들이 이용하면서, 이들 못된 짓을 하는 '거지패'들을 '깡패'라고 했다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영어의 'gang' 즉 '깽'을 일본에서 '걍구'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국어에 들어 와서 '패거리'의'패'를 붙여서 이들을 '깡패'라고 하였다는 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후자가 더욱 그럴 듯합니다. 왜냐하면 '깡으로'(억지스럽게)등의 단어가 쓰이기 때문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 토마스 카알라일 토마스 칼라일 (1795~1881) 숭고한 정신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나타난 것은 일체의 의복이며 표상에 불과하다. 표상을 본체인 것처럼 망상할 때 인류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고 역설하며 영국사회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사람이 바로 토마스 카알라일이다. 그는 서른 여섯 살이 되는 어느 여름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며 그것을 후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왜 비겁하게 줄곧 울고 콧물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걷고 있느냐. 덜된 인생아, 네 앞에 놓여진 최악의 경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이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리고 지옥의 고통이나 악마의 고문이 너에게 할 수 있는 전부이겠지, 그런데 너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라. 네가 비록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너는 그래고 자유의 아들이 아니냐. 지옥불이 너를 태워 버리기 전에 너는 네 발을 들어 지옥불을 짓밟아 버릴 수는 없단 말이냐? 무엇이나 올 테면 오너라. 부딪쳐 보자구나. 그것이 지옥이건 악마건 맞서 보자꾸나. 옷의 노예였던 인간이, 옷을 지배하는 인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적어 놓은 것이 그의 <의복철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의 지칭이었다. 카알라일은 몸과 마음을 훌훌 벗어 버린 자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생사와 유무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기를 붙잡게 되었다고 했다. 꺼져라, 거짓 희망의 그림자여, 나는 더 이상 너를 쫓을 생각은 없다. 나는 너를 이제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너희들 굶주린 공포의 유령들이여, 나는 너희와도 인연을 끊겠다. 너희들도 모두 그림자의 거짓이다. 자, 나는 이제부터 좀 쉬어야겠다. 여행에 지치고 삶에 지쳤다.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나는 이제는 자야겠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모두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카알라일을 읽다가 나는 소동파가 문득 생각났다. 왜냐하면 그의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아무 뜻도 없는 것 이라고 한 것이 소동파가 죽음 앞에서 한 이야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2. 유토피아의 원래 뜻 오늘날 이상향을 지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어 오던 것인데 그 동기는 실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우회적인 표출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어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1516년에 쓴 책에서 표현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유토피아(Utopia)>이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리스 어 ou(없다)+topos(곳)+ia(명사어미)에서 나온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유토피아>는 영국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제1부와 이상국 유토피아의 지리, 정치, 종교, 가족제도, 풍속 등을 다룬 제 2부로 나뉘어져있다.이 책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대륙 탐험에 따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다 유토피아 섬에 도착한 선원이 그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2부에서 표류했던 선원이 들려 주는 이상 사회의 유토피아는 재산공유제의 사회였다. 즉 착취 없는 생산과 분배, 쾌적한 노동, 교육의 남녀평등, 행복한 가정 생활, 평화주의, 종교적 관용 등. 모어가 이렇게 재산 공유제 사회를 이상 사회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근대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재산 공유론은 인간의 악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가 본 현실은 어떠한가? 모어가 살고 있던 영국의 현실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해외 식민지 무역이 발전했고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발전한 것이 모직물 공업이었다. 이전까지는 양모를 수입해 쓰던 모직물 공업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원료인 양모가 부족해지자 토지 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민들은 하루 아침에 대대로 살던 토지에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까지 말했다. 모어는 또 프랑스 국왕과 대신들을 예로 들어 정치에서의 책략과 야망을 폭로하고, 나아가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결함의 원인을 사유 재산 제도에서 찾았다. 즉 돈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곳에서 국가의 올바른 번영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여러 국가의 사악함의 원인을 파헤치고 당시의 영국인들, 넓게는 유럽 인들에게 도덕적 반성을 촉구한 저서라 할 것이다.물론 거기에는 이성적인 교화로 인간을 개조하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인문주의자의 이상이 깃들어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1. 미국에 NO라 고 말하는 중 국의 철의 여인 1995년 2월 26일, 베이징의 중심 창안지에(틋安衡)의 우중충한 회색건물 밖에 어깨에 각종 카메라를 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각국 통신사와 방송국의 주재기자들이었다. 불이 환히 밝혀진 중국대외경제무역부 건물에는 중 .미 지적재산권에 대한 협상이 진행중이었다. 쌍방의 협상대표는 묘하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미국측은 변호사 출신이며 말을 아주 조리있게 하는 무역협상 부대표 바셰프스키였으며 중국측은 현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인 우이(콧儀)였다. 밤 11시,두 여성대표는 동시에 협상장을 나와 세계 각국의 기자들 앞에서 쌍방이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협의'에 가조인했음을 발표하였다. 중 .미 양국 간에 20개월에 걸쳐 진행된 지적재산권협상이 드디어 막을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 외국통신사 기자는 기사를 타전하면서 '전세계가 한시름 놓았다'라고 하였다. 중 미 간 지적재산권문제는 80년 이래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1990년 4월 미국이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해 불리하다는 이유로 미국무역법 '슈퍼301조'의 규정에 근거해 중국을 '중점 관찰 대상국'에 넣을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의 지적재산권문제를 대하는 태도도 아주 적극적이었음을 말해 두어야 할 것 같다. 1992년 1월 중 .미 쌍방 대표인 우이와 칼라 힐스는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한 양해각서'에 공동 서명하였다. 이 각서에서 중국은 약속기한 내에 이 문제에 대한 보호작업을 완성하길 원하였고 미국측은 중국에 대한 특별조사를 취소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94년 6월에 미국은 재차 '슈퍼301조'를 들고 나와 중국 정부가 양해각서에 서명한 이후 취해 온 노력은 고려하지 않고 6개월 간 중국에 대해 조사를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번에 미국이 거론한 문제는 컴퓨터와 관련된 레이저디스크의 해적판이었다. 중국의 불법행위가 미국 기업에 매년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반년 동안 중국과 미국 간에는 지적재산권보호문제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협상이 계속되었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 기자회견에서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인 우이는 단호한 어조로 중국 정부를 대표해서 '선진국이 몇십 년 내지 몇백 년의 과정을 거쳐 겨우 완성한 지적재산권보호법을 중국은 단기간에 걸쳐 비교적 완벽한 보호체계를세웠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 정부는 미국측이 제시한 불법 복제 레이저디스크에 대처하기 위한 전문 단속반을 구성해 백만에 이르는 해적판 레이저디스크와 비디오테이프를 몰수하여 불태우고 관련 공장들을 폐쇄시켰다고 하였다. 솔직하게 말해 미국측이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요청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 역시 이 요구를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측 협상대표들이 협상중에 지적재산권보호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을 연이어 추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들의 단독 자본으로 중국에 신문, 출판과 오디오 및 비디오 관련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 같은 것들이다. 비디오 및 오디오 제품의 대외 시장개방문제에 대해서는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지금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또한 미국측이 요구한 국경통관제도와 판권인증제도 및 행정장의 법집행권한 등의 문제는 미국 스스로도 아직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측은 중국의 사법 및 입법 과정에 이르기까지 간섭을 하려고 들어 중국인을 크게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중국에 탐정사무소 설립을 허락하라고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차라리 베이징에 C I A 지부간판을 걸겠다고 설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미국측의 6개월 이내 무역보복 엄포에 직면한 중국의 여장부 우이는 이미 쌍방이 내밀게 될 비장의 카드를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머리가 약간 희끗한 이 '철의 여인'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측에 사납게 경고하였다. '당신들이 보복리스트를 선포하는 날은 바로 우리가 반보복리스트를 공포하는 날이 될 것이오." 1994년 최후의 그날, 미국 무역대표 캔트는 비장의 카드인 대중국 무역보복리스트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중국측도 이에 굴하지 않고 2시간 뒤 대미 무역보복리스트를 공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 일본 통신사의 베이징 주재기자는 아주 감탄한 논조로, '일본이 미국과 무역협상을 할 때는 중국의 우이 여사와 같이 미국에 대해 과감히 'No'라고 말할 인물이 없다'라는 내용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1995년 2월 4일 미국 무역대표 캔트는 대중국 무역보복을 단행한다는 최종 결정을 선포하였고, 이에 맞서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역시 대미 무역보복의 최후 결정을 공포하였다.이 두 리스트를 보면 미국측은 28억 달러였던 대중국 수입액을 1억8천만 달러로 삭감하였으며 중국의 대미 주종 수출품인 운동화, 가방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이가 미국에 제시한 리스트에는 무역 외에도 투자에 관계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는 중국으로부터 공동투자에 의한 자동차 생산공장의 설립허가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때였으므로, 우이가 새로 추가한 항목은 미국의 급소를 정확히 찌른 셈이 되었다. 목록이 공포된 후 캔트는 우이에게 친필서한을 보내 워싱턴에서 이견 조정을 위한 최후 협상을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벌이자고 하였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중국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 우이는 협상을 다시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장소는 워싱턴이 아니라 베이징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 회신하였다. 중 .미 지적재산권 협상은 실무급에서 대표급으로 격상되어 베이징에서 열리기로 결정되었고, 미국 무역협상 부대표 바셰프스키가 베이징까지 날아와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 순쩐위(孫振宇)와 함께 최후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이 내놓은 투자카드가 비로소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국내 대기업들의 계속되는 압박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중국의 입법 및 사법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중국측 역시 일정 수준의 양보를 하였다.미국이 요구한 오디오나 비디오 관련제품과 소프트웨어 및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기 위한 단독 투자는 불허하는 대신 그것들을 합자의 방식으로 완화하여 허가하였다. 이로써 쌍방의 입장 차이를 조금씩 좁힐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25일, 쌍방은 협의문의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30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의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대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협상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25일에 작성하기 시작한 초안은 26일 새벽 3시까지도 겨우 4분의 1 정도 분량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26일 밤 10시가되어서야 이 무역전쟁은 쌍방의 대표가 샴페인을 터트리는 가운데 막을내렸다.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우이와 바셰프스키가 10여 시간을 기다린 기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기자들은 미국에게 감히 'No'라고 말할수 있는 중국의 여인 우이에게 존경과 감탄을 보냈다. 그녀는 어떠한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이익과 존엄을 지키는 중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다. 중국인에게 특별히 해야 할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베트남과 다시 수교하고 하노이에서 대사관 개관식을 거행할 때 국무장관 크리스토퍼가 참석하였다. 국무장관이 이런 행사에 직접 참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과 베트남 국민 간에 깊은 우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하노이의 열대풍경을 즐기려고 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크리스토퍼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미국 참의원 군사위원회 위원인 맥카인이 숨김없이 그 이유를 말하였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패권주의를 제재하여야 하는 공동의 목적이 있다. 경제적으로 활기에 넘치고 안정을 되찾은 베트남이 북방의 강력한 이웃 나라를 제재하려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전에도 이익이 된다'라고 말하여 미국 정치가들의 속셈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다. 중국을 제재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갈수록 분명해 짐에 따라, 지금까지 미국의 비호를 받아왔던 몇몇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하고 있다. 미국은 인권과 가트{ GATT)에의 복귀 및 세계무역기구( WTo ) 가입 등의 문제를 들고 나와 구체적인 행동으로 중국을 제재하기 시작하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미국 정부는 중국이 2000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가트에의 복귀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하였다. 미국은 끝내 그들의 말대로 하고 말았다. 2000 올림픽을 중국이 개최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세계가 주목하던 중국의 세계경제무역기구 가입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때문에 일치된 의견을 얻을 수 없었고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1995년 7월,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책 표지에 '중국제재'라는 제목을 싣고 중국의 경제력이 우려할 정도로 고속성장하고 있다는 장편의 글을 실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쟁의를 마무리하고 공고한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며, 유럽은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방관자적 태도로 바라보면서 어부지리(를 노리던 태도를 버리고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효과적으로 중국을 제재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경고하였다. 영국이 중국제재의 글을 내놓은 이튿날, 미국에서 최대 판매량을 자랑하는 {타임즈}도 유명 칼럼리스트 크로사모의 글을 실었다.그는 비엔나회의를 열어 프랑스제재방안을 만든 것처럼 중국에 대한 통일된 제재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을 제재하자는 주장을 이들 저널이 앞서서 내놓자 {데일리 뉴측} 이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앞다투어 덩달아 보조를 맞추며 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데일리 뉴욕}은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만은 지난 1세기 동안 겨우 40년 정도 중국 정권의 직접통치를 받았을 뿐인데도 국제법상 '하나의 중국'이라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영문 잡지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의 표지에 '부드럽게 나아가라[輕柔地走]'라는 제목으로 실전 글에서는 중국을 제재할 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성립된 자 얼마 안 된 동남아안전회의가 현재 직면한 문제는 미국과 협력하여 중국을 효과적으로 제재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일본의 주간지 {시지카이세쓰(時事解說)}의 맨 앞에 실린 글에서 미국정부는 그들의 정책이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지 절대로 '중국을 제재'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동남아 국가들과 ' 대중국 포위권'을 형성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확실히 중국을 제재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처럼 시끄럽게 추태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비웃음을 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속으로는 내키지 않으면서 마구 떠들어대는 놈들도 있고, 남을 선동하면서도 자신은 방관자인 척하는 놈도 있으며, 험은 남아돌지만 쓸 수 없는 놈도 있고, 부화뇌동하는 무리도 있다. 이처럼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제재론자들이 어떻게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뭉칠 수 있겠는가? 중국으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언행들에 대해 중국 정부는 제재할 것은 제재하고 따질 것은 따지고 반박할 것은 반박하고 무시할 것은 무시해야 한다. 이 문제로 시간을 길게 끌어 우리가 나아갈 길에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 국민들은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중국을 제재하려고 허튼 수작을 부리는 나라의 물건은 사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이들의 작태에 효과적인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한테도 고민이 있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다녀야 하는 일이 늘 고민이었다. 사람들마다 문제없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하느님은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이 항상 사랑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바람일 뿐 에덴 동산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사랑보다 증오를 가지고 살았다. 삶보다는 죽음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화해보다는 분열이, 평화보다는 전쟁이 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고통에 휩싸이는 일이 더 많았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지녔던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가지고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병들어 아픈 사람은 아픈 데를 어루만져 주어야 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자에게는 그 눈물을 닦아주어야만 했으며, 쓸쓸하고 외로워하는 자에게는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달래 주어야 했다. 그리고 분노에 들떠 잠 못 이루는 자가 있으면 새벽이 올 때까지 그와 함께 밤을 지새 주어야만 했다. 하느님은 하루하루가 정말 바쁘기 그지없었다. 아무 불평 불만이 없도록 그 많은 사람들을 골고루 다 찾아다니기에는 하루해가 너무 짧았다. 하느님은 곰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내 대신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찾아갈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하느님은 "맞아, 바로 그거야!"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바로 어머니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한 사람씩 어머니를 갖게 되었다. 글터 → 이글저글 합판은 노벨상의 제창자 앨프렛 노벨이 발명했다.흔들의자는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발명했다.가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발명했다.콘택트 렌즈도 1508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발명했다.인력거는 일본에 선교사로 가 있던 미국 감리교 목사인 조나단 스코비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는 병약한 아내를 위해 이것을 고안했는데, 처음 사용한 것은 1869년 요코하마에서였다.첫 비행기록, 키티호크에서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한 거리는 겨우 12초 동안으로 보잉 747의 날개보다 짧은 거리였다.세계에서 가장 좋은 자동차,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했는데, 역시 벤츠로 꼽힌다. 코들리엡 데임러는 칼 벤츠와 한 나라 사람으로 벤츠가 만들고 있던 내연기관을 나름대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난적이 없었지만 이들의 기업을 이어받은 회사들이 그들 두 사람의 것을 합쳐 지금의 메르세데스 벤츠 회사를 차렸다.마리 퀴리는 라듐을 발견했지만, 자신의 발견한 방사능 때문에 죽었다. 그녀는 방사선으로 죽은 최초의 사람으로 그때에는 그것이 해로운 줄을 모르고 있었다.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차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원리는 반대이다. 원자폭탄은 우라늄 원자를 분해하여 그 에너지를 방출한다.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그러나 수소폭탄은 ‘핵융합’의 원리를 이용한다. 즉, 엄청난 양의 열로 수소원자들이 서로 융합하여 헬륨원자를 형성하고 이 때 생긴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소폭탄의 원자를 융합시킬 수 있는 강한 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자폭탄의 폭발뿐이다. 따라서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을 안에 가지고 있다. 즉 원자폭탄이 먼저 폭발하여 엄청난 양의 열을 내면 이 열에 의해 수소폭판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원자폭탄이 사용되었으나 실제로는 수소폭탄이 가장 강력한 폭탄이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