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9 01:35 【독서편지】: 제 72 호 風磬 조회 수 8,096 추천 수 15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2 호4339.11.29 (10.0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꽃을 받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당신이 아직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동안에는. / 리너 혼 (미 흑인가수)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벽골제 공사에 던져진 여심 - 단야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김제 태수는 토목기술자인 원덕랑과 자신의 딸 단야를 맺어주기 위해 원덕랑의 약혼녀를 용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안 단야는 아버지의 살인을 막고 원덕랑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다. 이러한 단야의 효심과 희생정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단야각과 단야루를 세웠으며 영정도 모시게 되었다. 단야각 단야루 단야로 단야연못 출처 : http://rice.egimje.net/kor/byeokgolje/danya/cbc.jsp?page_code=CBC--001 신라 제 38대 원성왕 때다. 김제 벽골제 방축은 낡고 헐어서 보수가 불가피했다.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가는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둑이 허물어진다는 중론이었다. 나라에서는 벽골제의 개축 공사를 위해 인근 7개 주민들을 역사에 동원하기로 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신라 3대 저수지로 꼽혀 오고 있는 벽골제는 기실 의림지나 수산제보다도 그 규모가 크기로 소문나 있었다. 옛날 마한 시절에는 벽비리국이 자리했던 김제땅. 백제 시대 벽골군으로 불리던 김제는 벼의 고을이라는 뜻으로 도향의 중심부를 이루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안장천팔백보"라 했듯이,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수리 저수지가 있는 김제땅은 일찍이 벽골제로 인하여 "도작 문화의 요림지이며 미곡의 본고장"이라는 위치를 굳혀 왔다. 몽리 면적 1만여 정보에 달하는 그 벽골제 둑이 허물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니 진정 큰일 날 일이다. 전주 도독부에서는 이 사실을 급히 조정에 알려 보수해 줄 것을 간청했다. "전하, 벽골제는 멀리 우리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기 이전부터 김제 만경 평야를 기름지게 적셔 오던 생명의 젖줄기였습니다. 하오나 지금 도작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김제 벽골제 둑은 위태로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는 것이옵니다. 깊이 통촉하소서, 전하. 벽골제는 그 역사가 오래고 방축이 노후해서 지금 주민들의 기름진 논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벽골제의 둑이 허물어지는 날, 김제 만경 평야에 목숨을 맡기고 땅을 일궈 오던 수만의 백성들은 갈길을 알지 못하고 수마에 할퀼 것이 자명한 일이오니, 청컨대 저하께옵서는 서라벌의 명망 높은 토목 기사를 보내시어 군량과 진상미의 고장 김제 만경 평야를 길이길이 보존하시옵소서." 전주 도독부의 보고를 받은 원성왕은 급히 예작부에 하명해서 사례 벼슬아치 원덕량을 불러들였다. 젊은 토목 기사 원덕이 대하에 무릎을 꿇자 왕은 근엄한 목소리로, "그대는 이번에 김제 벽골제 중수에 총책을 맡고 떠나라."하고 명했다. "어리석고 재주 없는 소신이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옵니다, 전하." "김제 태수 유품이 그대를 도울 것이요, 서라벌의 천신이 또한 그대 일을 도울 것이니 과히 염려말고 내일이라도 현지로 떠나도록 하라." 추상 같은 어명이요 지엄한 분부라 국록을 먹고 사는 원덕으로서는 감히 거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원덕은 왕명을 거역하고 싶었다. 이번 한 번만은 나라고 무엇이고 모두 팽개치고 사랑하는 월내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국사를 떨쳐 버리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원덕은 정혼자인 월내의 집으로 말을 달렸다. "아, 오셨군요, 원덕랑." "우리들의 잔칫날이......." 미처 원덕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월내의 상기된 얼굴은 벌서 잔칫날의 즐거움 속에 젖어 있었다. "우리들의 잔칫날. 그래요, 앞으로 닷새밖에 남지 않았어요, 원덕랑." "닷새......" "그렇다니까요. 원덕랑도 기쁘지 않으세요? 몇 년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들의 날이에요. 원덕랑이 나라의 큼직큼직한 토목 공사에 참여하느라 우리는 기껏 택일을 해 놓고서도 잔치를 두세 번씩 연기해 오지 않았던가요?" 순간 월내의 곱다란 얼굴에 기다림으로 응결진 우수가 깃든다. 이번만은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혼례를 연기할 수 없다는 각오가 그러한 표정 속에 굳어 있었다. "원덕랑........." 원덕은 대답을 않고 멍하니 밤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원덕랑........." 월내의 목소리가 두 번째 귀에 울렸을 때 그는 이 어리고 나약한 낭자에게 슬픔을 안겨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원덕랑. 나라에 또 무슨 급한 토목 공사가 생겼나요?" 월내는 직감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원덕의 입에서는 그래서야 한숨 섞인 말이 흘러 나왔다. "혼례를 며칠 앞두고 또 이 무슨 액운이오. 우리들의 혼사가 내 직업으로 인하여 이렇듯 두세 번씩 연기될 줄 알았더라면 내 일찍 이 토목 기술을 배우지 않았을 것을......." "어디로 떠나시게 되었는데요, 원덕랑." "벽골제로, 둑을 쌓으러 떠나라는 어명을 받았소." 월내는 놀라지 않았다. "언제 완공이 될까요, 벽골제 둑은?" "글쎄, 해동이 되는 대로 시작을 하면 늦어도 여름 장마 전에는 끝낼 수 있을 거요." "여름 장마........" 여름이라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지금이 정월이니까 꼬박 반 년은 기다려야 한다. "반년 뒤면 틀림없이 완공이 될까요?" "일을 시작해 보지도 않고 어찌 완공 날짜를 미리 알 수 있겠소. 허나 그대 월내 낭자가 이 몸의 귀환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깊이 새기고 떠나리다." 그런 말을 남기고 원덕은 떠났다. 오늘날의 김제읍에서 부안 가도를 따라 약 6킬로미터쯤가다 보면 부안면 포교리에 이르고 이곳에서 남쪽 명금산 북단까지 엇비슷하게 둑이 뻗어 있는데, 이 둑이 곧 벽골제 제방이다. 원덕이 김제 고을에 닿은 것은 월내와 작별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그는 김제에 닿자마자 태수 유품의 집에 머물면서 공사를 서둘렀다. 벽골제 제방 수축 공사에 동원된 7개 주 고을 사람들은 왕명을 받들고 특파된 원덕의 말을 따라 힘겨운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매사는 원덕의 생각대로 되어 주지를 않았다. 노령 산맥의 무악산과 상도산을 비롯, 크고 작은 연봉이 흘러내리는 물을 저류시켰다가 김제 만경 평야로 흘러내려 보내는 일이 곧 벽골제의 역사였으나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지금의 숫용에게 낭자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용이 살고 있는 곳은 연포천의 용소말고도 또 한 군데가 있었다. 원평천의 백룡이 바로 그 용이었다. 이른바 쌍룡추라 하여 오늘날에도 신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용소에 낭자 하나를 바치는 일은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원덕은 일단 공사가 시작되자 용소에 바칠 낭자 문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태수 유품을 조용히 만났다. "태수 어른, 기어이 낭자를 용소에 바쳐야 하나요?" "바쳐야 하구말구, 역사를 하는 도중에 낭자를 용소에 바치지 않으면 청룡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네." 늙은 태수는 그것이 당연한 처사라는 듯이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대답했다. "만일........ 만일 말입니다. 용소에다 낭자를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거지요?" "무슨 소린가, 원덕랑........ 청룡의 노여움이 자네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전 아직....." "큰일날 소리! 청룡의 노여움을 사는 날엔 방죽이 터져! 벽골제 둑이 완공되기도 전에 물난리를 치러야 한다, 이런 말일세." 도무지 모를 소리였다. 어찌하여 용소에다 낭자를 바치지 않으면 청룡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벽골제 둑이 허물어진다는 것인지 원덕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벽골제 수축 공사의 총책이라면 한 사람의 산 여자, 그것도 출가하지 않은 아리따운 낭자 하나를 물속에 집어 넣는 일에도 모든 책임을 저야 했다. 총책 원덕은 그러나 낭자를 용소에 바치는 일에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아니됩니다, 태수어른. 이 원덕이 벽골제 수축 공사의 총책을 맡고 있는 한 죄없는 낭자를 물속에 처넣어 죽일 수는 없소!" 원덕의 하루하루는 오로지 벽골제 수축 공사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내어졌다. 이따금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와의 해후는 다만 벽골제 둑이 완공되는 날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원덕의 벽골제에 쏟는 열성은 그만큼 절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소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싶자 이번에는 또 다른 장애가 그의 작업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태수 유품의 딸 단야의 접근이었다. 원덕이 처음 태수의 집에 행장을 풀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청혼자가 있는 그도 단야의 미모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야 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태수의 무남독녀로서 단야 낭자의 성장은 지극히 평탄하고 총애받는 사랑 속에서 자라 온 터이다. 외간 남자와 별로 접촉할 사이도 없이 다만 양주의 사랑과 관심, 바람을 타지 않은 온실 속의 꽃과도 같이 무풍 지대에서 꿈을 먹고 자라 온 순박한 소녀였다. 하지만 온실 속의 꽃은 젊고 귀골스런 원덕의 등장으로 내면에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토목 기술자가 온다기에 처음에 단야는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었다. 저수지 둑이나 감독하고 성곽이나 쌓는, 이를테면 돌처럼 무뚝뚝하고 메마른 남자가 자기 집에서 머물게 되겠거니, 그런 정도의 상상밖에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서라벌에서 온 토목 기술자가 자기 집에다 행장을 풀던 첫날 단야는 설레이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토목 기술자가 아니라 저분은 서라벌의 왕족일지도 모른다. 왕족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귀태를 가질 수 있을까?' 단야와 월내를 두고 문득 그 여성스런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던 원덕도 마음이 설레었다. '미모로 볼진대 오히려 월내보다 단야 쪽이 앞서는 것 같구나. 만일 내 일찍이 서라벌에 월내라는 정혼자를 두고 오지 않았다면 태수 어른을 졸라 저 아름다운 단야 낭자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그 마음의 설레임도 잠시, 원덕은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를 버릴 수 없다고 단정했다. 자기로 인해서 두세 번씩 혼례를 미뤄온 월내가 아닌가. 벽골제 수축 공사가 끝나는 대로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와 혼례를 치르기로 굳게 약속한 사이가 아닌가. 말하자면 혼례만 치르지 않았다뿐이지 월내는 이미 자기의 아내나 다름없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주다니 천벌을 받을 일이라 생각했다. 원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가뜩이나 신세를 지고 있는 태수 유품의 집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1월도 가고 어느 새 2월. 그 짧은 초봄의 하루하루가 미리 계획된 작업량을 채우느라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을 거듭해 갔다. 요 며칠 사이 원덕은 태수의 집을 아주 나오다시피해서 현장 생활을 하며 인부들을 독려했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할 때는 그렇게 의욕에 차 있던 인부들이 날이 갈수록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아 원덕은 적이 걱정되었다. 작업 능률도 오르지 않았고, 인근 7개 주 백성들의 사기도 그만큼 떨어져 갔다. 봄철을 맞이한 농민들은 저마다 못자리판을 서둘러야 했는데 벽골제 저수지 물이 제대로 공급될는지 그게 걱정이어서 선뜻 씨앗을 담그는 농가가 드물었다. 일이 이쯤 되자 둑 쌓기에 동원된 인부들은 저마다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거야 바루 용소에 가시나를 하나 갖다 바쳐야 일이 척척 맞아 떨어져 것인디, 가시나를 안 바쳐서 공사가 늦어지능기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응께로 낭자를 구해다 용님헌티 바치라고히여." "내 고장 농사는 내가 더 아는디 지까짓게 뭘 안다고 가시나를 안 바칠라고 허는지 소갈머리를 모르겄다닝께..." "책임을 지라고 히여, 책임을...... 농사 못 짓고 일년 농사 피롱하면 지가 쌀 됨이나 대줄랑가? 체......" 원덕은 그 같은 불평을 듣고 더 주저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낭자 하나를 용소에다 바치지 않으면 인부들은 연장을 챙겨 가지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릴 태세였다. '어쩐다......?' 밤이 되자 원덕은 막사에 누워서 또 그 '낭자 제물'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그의 착찹한 생각을 씻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그는 응당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 낭자의 얼굴이라도 떠올리면서 향수를 달래어 옳았으나 어찌 된 셈인지 월내의 모습은 윤곽도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단야......" 월내 대신 원덕의 입에서 한숨처럼 이름이 튀어나왔다. "단야!" 그 비를 온통 심장 속까지 맞고 단야는 원덕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원덕랑, 원덕랑!" "단야, 어인 일이오...... 태수 어른께서 이 몸을 오라 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버님이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 몸이 원덕랑 일이 궁금해서 빗속을 달려왔을 뿐입니다. 허물이 된다면 꾸짖어 주십시오." 원덕은 그 말에 속으로 부르짖었다. '허물은 아니오, 허물은 아니오! 내 진정 단야 낭자를 보고 싶었소. 월내가 아닌 그대 몸을 가까이 모시고 싶었소.' "원덕랑, 여기까지 달려온 이 몸을 나무라지 않으신다면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개 있는데 들어주시겠는지요?" 단야의 비에 젖은 두 눈이 크게 빛을 발했다. 어쩌면 단야는 벌써 크고 빛나는 두 눈에 빗물이 아닌 눈물을 담고 있는지도 몰랐다. "말하지 마시오. 단야 낭자! 말하지 않아도 이 몸은 이미 낭자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말하지 아니하면 나라가 죽습니다." "나라가 죽다니오?" 원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지금 단야의 은근한 사랑의 고백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야는 두 사람 사이의 더욱 절박한 용소 문제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용소...... 용소......" "그렇습니다. 용소에는 낭자가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성은 아버님 태수의 오랜 숙원입니다. 용소의 용이 노하지 않고 벽골제 아래 그 너른 김제 만경 들에 잘 익은 벼이삭이 출렁거리게 될 때 이 고을은 태평 성대를 노래합니다. 그대 원덕랑은 벽골제 중수의 총책을 맡으신 어른이라 이 고장의 태평 성대를 바라시겠지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벽골제 공사가 질척거리게 된 것이 용소의 숫용을 노하게 만든 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한 용을 달래기 위하여 낭자를 바치자는 소리가 이 고을 전체의 외침이었다는 것을 단야 낭자는 설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태수가 찬성하고 고을 백성들이 한결같이 원하고 있는 제물을 어찌하여 원덕랑 혼자서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따지러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덕은 단야의 사랑 뒤에 병풍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애향심을 읽고 있었다. 고을을 사랑하는 힘은 곧 개인의 사랑을 초월하여 애국의 바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야가 가장 필요로 하는 원덕의 사랑은 제것으로 차지하지 못한 채, 그녀는 7개 주 고을 백성의 대변자가 되고 있었다. 적어도 벽골제 수축 공사 총책임자 원덕랑 앞에서 단야는 그런 신분 밖에 되지 않았다. 단야는 그것이 슬펐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7개 주 고을 백성들의 바람을 원덕랑에게 전달하는 기회에 그녀의 사랑도 함께 전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원덕랑, 내일이라두 곧 낭자를 구하여 숫용의 노여움을 풀게 하세요. 그리하여 벽골제 공사를 완공하신 뒤 서라벌로 돌아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월내 낭자와 화촉을 밝히세요......" "뭐 월내 낭자라구요?" 원덕은 놀랐다. '알고 있었구나, 단야는 내가 서라벌의 월내를 두고 떠나온 몸이라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했구나, 갸륵한 사람.' "단야...... 단야......" 새삼스럽게 단야의 단심이 가슴에 젖어 오자 원덕은 지극한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원덕이 단야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고 팔을 내뻗었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막사에서 빠져 나가고 없었다. "단야! 단야!"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 단야를 부르는 원덕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주저않고 마는데 단야는 아무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틑날 비가 개인 뒤 단야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용소 가에다 신발을 벗어 놓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용의 제물이 되고 만 것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정치의 격동 속에서 왕의 업적은 아내와 후손의 수에 비례한다. - 김기덕(건국대 강사) 왕의 후손은 많을수록 좋다? 남편 한명에 부인 한명(일부일처제)이 원칙인 오늘날 입장에서 본다면, 예전의 왕들은 많은 아내를 두었다는 점에서 우선 특이한 존재다. 물론 전근대에는 왕뿐만이 아니라 일반인 특히 귀족들도 다처가 가능했다.그러나 귀족의 다처는 본부인(처)외에 첩 한명을 두는 정도가 일반적이었으나, 왕은 여러 명 심지어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은 왜 일부다처였을까? 왕은 절대권력자이므로 그만큼 많은 여자를 아내로 두는것은 당연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복적인 이유는 왕의 경우 대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겼을 경우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 하는 점은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커다란 문제였다. 신라시대에는 여자쪽으로 왕위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왕위는 항상 남자쪽으로만 계승되었다. 이 경우 왕위가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사실상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일종의 ‘스페어 타이어’격이었다. 본 타이어가 펑크나지 않는다면 스페어타이어는 없어도 된다. 마찬가지로 장남이 제대로만 자라서 오래 산다면 나머지 아들이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남이 일찍 죽거나, 능력이 현저하게 모자라거나 혹은 그에게서 다시 대를 이을 아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가의 보존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왕의 후손이 많음에 따라 불필요한 왕위경쟁이나, 혹은 왕족파워의 형성 등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일반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일단 왕실은 번성하여 후계가 안정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라말 진골왕족의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고려왕조는 처음부터 왕족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다. 왕족들에게는 공작,후작,백작 등 명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경제적 대우를 해 주는 대신, 관직을 갖고 실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고려초부터 시행되었던 왕족들의 사환(벼슬살이)금지는 이처럼 신라말 역사적 교훈의 소산이었고, 이는 원칙적으로 다음 왕조인 조선시대 끝까지 관철되었다. 다음의 표는 고려시대 왕의 부인과 자녀의 수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부인과 자녀의 수가 단연 많은 왕으로는 제1대 태조, 제8대 현종, 제11대 문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왕의 가족관계는 몇가지 점에서 조선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먼저 왕의 부인의 경우 조선은 정비와 후궁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정비는 한 명이며, 죽거나 폐비되었을 경우 다시 간택되었다. 정비와 후궁의 차별은 그 소생자녀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원 간섭기 때에는 원나라 출신 왕비가 정비였고, 나머지 고려인 왕비는 후궁이었다. 그 이전에는 왕비의 호칭이 왕후.비.궁주.부인.궁인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 중 명칭상으로는 왕후가 정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후가 한 명이 아닌 경우도 있었으며, 천인 출신의 궁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왕비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물론 어느 왕 때나 제1왕비 즉 정비로 인정되는 왕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 왕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되는 왕비나 종묘에 왕과 같이 모셔지는 왕비는 원칙적으로 1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왕비들 사이에는 조선시대처럼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여러 왕비들의 소생자녀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저이 소생의 아들을 군, 딸을 옹주라 하여 명칭에서도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대우도 달랐다. 또한 그들의 배우자나 후손들도 다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고려시대 왕비의 경우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크지 않았던 것이나 그들의 소생자녀들 또한 차별이 없었던 점은, 고려시대가 처첩의 구분이나 적서의 구분에 있어 조선시대와는 매우 달랐음을 말해준다. 태조 아내 스물 아홉의 다양한 삶, 갖가지 사연들 왕실의 후손이 많을수록 좋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조의 아내는 29명이나 되었을까? 태조 왕건은 본래 궁예의 밑에서 수상을 맡고 있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부인은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두 명뿐이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전국의 유력 호족의 딸과 지속적으로 혼인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른 태조의 지방호족 포섭책이었다. 태조 즉위년(918)직후의 고려 정치상황은 상당히 불안하여, 태조를 반대하는 반란이 6개월여동안 수차에 걸쳐 일어났다. 이같은 상황에서 태조는 자신의 지원세력을 광범하게 확대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호족의 딸을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이른바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는 이와 같은 지방세력가와의 혼인을 통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의 아내 29명중 거의 대부분인 25명의 혼인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가 12명으로 양도에 집중되어 있고, 다음이 경상도 그리고 기타 충청. 강원. 전라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태조의 혼인이 일종의 혼인정책의 일환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태조의 아내들의 삶은 각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그 자녀들이 모두 수도인 개경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다. 태조의 제1왕비였던 신혜왕후 유씨는 호족의 딸답게 대단히 뱃심이 세었던 것 같다. 궁예 말년에 신하들이 태조의 집에 와서 쿠데타를 권유하자 태조는 자꾸 거절했다. 이에 몰래 엿듣고 있던 왕후는 뛰쳐 나오며 ‘궁예의 폭정은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손수 갑옷을 가져다 남편에게 입혀 주었고,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앞세우고 나감으로써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918년 42세의 나이에 즉위한 태조는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당시 아들로는 장화왕후 소생의 무(뒤의 혜종)가 유일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뒤 곧 일곱 살 난 무를 후계자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후계자 책봉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보다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결국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의 주청으로 921년(태조 4) 무는 열살의 나이에 후계자로 책봉되었다. 태조가 뜻을 세운지 3년 뒤에나 책봉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처음에 왕후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피임방법을 취하여 정액을 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는 그것을 흡입하여 드디어 임신해서 혜종을 낳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탓으로 혜종의 얼굴에는 돗자리무늬가 있었으며 세상에서는 혜종을 ‘주름살임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화왕후 오씨의 출신지인 나주지역은 사실상 왕건보다는 견훤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후삼국 정립기에 서남해안 일대 전라도의 호족세력들은 왕건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에 보면 차령 이남 지역은 반역의 땅이니 그 곳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지역갈등의 근원으로까지 얘기되고 있는데, 정작 태조는 차령 이남의 인물도 많이 기용하였고 나주 여인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훈요십조>가 위작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나주는 고려정부와 항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거란족의 침입으로 제8대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할때 전주절도사가 마중 나와 전주로 가기를 청했으나 굳이 나주를 피난처로 정한 점, 뒤에 담양 일대를 기반으로 무신정권 말기에 전라도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1236-1237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평정하고자 파견된 김경손이 나주는 어향(왕의 고향)이므로 반란군에 동조하지 말 것을 강조한 점, 또한 삼별초 항쟁기에 전라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나주의 호장세력은 끝까지 삼별초에 대항한 점 등은 고려를 개창한 태조의 처향이자 뒤를 이은 혜종의 탄생지로서 나주의 친고려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조의 혼인은 다분히 정략적인 것이었으므로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대서원부인 김씨와 소서원부인 김씨는 다 황해도 서흥지역 호족 김행파의 딸인데, 태조가 평양에 가는 길에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 자매와 하룻밤씩 잤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행차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제1왕비인 신혜왕후도 태조를 모신 뒤 한참 동안 소식이 끊어져 여승이 되었다가 뒤에 태조가 다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성씨나 가계도 알 수 없는 서전원부인이나, 성씨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는 숙목부인. 월화원부인. 소광주원부인 등도 하룻밤의 정략인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 29명의 왕비들의 아들이 대부분 태자 칭호를 띠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총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 7명을 제외한 18명중 11명이 태자를 칭하고 있으며 나머지 7명은 군을 칭하고 있다. 태자는 왕위계승권자를 의미한다. 이미 신라시기에 태자제조가 운용되었으므로 고려 태조가 태자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태조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위계승권자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호족과의 혼인정책이 추진되던 고려초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즉 각 지역 출신 왕비들은 자신의 아들도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그 결과 이 때부터 태자는 단지 왕자칭호의 하나로 일반화되었고, 왕의 정식 후계자는 따로 ‘정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뒤에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제4대 광종 16년(965)에 아들 주(뒤의 경종)를 ‘태자’로 책봉한 이후 일반왕자들의 태자칭호가 사라졌다. 이 때부터는 ‘태자’의 호칭이 명실상부한 왕위계승권자를 뜻하게 되었다. 고려 전기 국왕 혼인의 추이 태조의 혼인정책은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호족세력의 힘이 상존하는 한 비록 태조만큼 다수를 대상으로 혼인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방식은 계승되었다. 고려 제2대 혜종은 4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중 궁인 신분인 제4비는 별개로 하더라도 나머지 3명 전부가 군사력을 지닌 지방호족 출신의 딸이었다. 역시 태조의 아들로 제3대 왕인 정종은 3명의 부인이 있었다. 2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로 후백제 지역의 호족세력을 무마할 필요성에서 혼인관계가 이루어졌으며, 1명은 청주호족 김긍률의 딸로 역시 정략혼인의 일환이었다. 태조의 아들인 제4대 광종은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복여동생과 조카(혜종의 딸)였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 이전 신라왕실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혼인형태였는데, 고려 초창기의 일시적인 과도기를 거쳐 광종의 혼인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국왕의 근친혼은 광종 이후 원 간섭기 이전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제4대 광종에서 제7대 목종까지는 총 11명의 왕비 중 8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었다. 그런데 다음 제8대 현종은 총 1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중 3명의 궁인은 별개로 하더라도 10명 중 3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고 7명이 이성혼이었다. 근친혼이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당대 유력가문 및 공신들의 딸과 폭넓은 이성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전기 국왕혼인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호족의 협조하에 국가를 이끌어가야 할 시기에는 호족과의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1대 태조~3대 정종). 다음으로 왕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4대 광종~7대 목종). 이후에는 오히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왕실혼인을 개방하였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였다(8대 현종 이후). 한편 근친혼을 하였던 왕비들은 그 성을 칭함에 있어 독특하였다. 그들은 실제 왕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근친혼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 성 즉 외성을 칭했던 것이다(대목왕후황보씨의 사례). 그것은 근친혼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 외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고려의 사회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첩된 근친혼으로 인해 때로는 부모 모두 왕씨인 왕비도 있었다. 이 때는 어머니의 외성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외성, 즉 친할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대명궁부인 유씨의 사례). 태조의 아내는 29명이었고 그 자손이 많았으나, 4대 광종 때 왕권강화 과정과 7대 목종 때 정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도태되었다. 따라서 고려왕실은 실제 현종 때에서 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1대 문종은 5명의 부인에게서 13명의 왕자와 7명의 공주를 두어 왕실을 확실하게 번성시켰다. 이후 왕실의 주된 가닥은 전부 문종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태조의 아내가 29명에 자녀가 35명, 현종의 아내가 13명에 자녀가 13명, 문종의 아내가 5명에 자녀가 20명인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겠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대체로 전근대사회 국왕의 경우, 할 일 많고 실제 뛰어난 업적을 수행한 임금들은 아내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국왕의 업적은 대체로 아내와 자식의 수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가장 값진 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해 가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엄마가 쓰러지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다 어느 큰 병원에서 '뇌지주막하출혈'이라는 병명으로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다. 그때는 내가 직장 생활에 겨우 적응하여 안정을 찾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렵게 한 달간 휴직계룰 내고 모든일을 뒤로 한 채 엄마의 병간호를 했다. 엄마는 두 번이나 수술을 받으셨기 때문에 한 달만에 퇴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다 못해 내가 일년 동안 쓸수 있는 연차와 월차를 미리 당겨서 다 썼다. 그러다 보니 한 달 보름동안 회사에는 서류가 쌓일 대로 쌓이고 일 처리는 늦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쉽게 낫지 않으셨다. 엄마를 간호하려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가족중에 엄마를 간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 둘까? 하지만 엄청난 병원비는 누가 다 감당하고.....' 속상한 마음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 미숙이가 병문안을 왔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답답해서 미숙이에게 푸념을 늘어 놓았다. 그런데 이틀 뒤에 미숙이가 다시 병원에 왔다. "미숙아, 웬일이니? 회사는 어떡하구....." "그냥 일하기 싫어서 일주일 휴가냈다. 어머니 병간호나 할란다. 너는 회사에 가 봐라." 직장 생활하면서 휴가를 낸다는 것이, 그것도 갑자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숙이는 일하기 싫어서 왔다고 하지만 나 때문에 일부러 휴가를 낸 것이다. 그것도 아무리 친구의 엄마라지만 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힘든 간호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미숙이의 손을 잡고 한 참동안 울었다. 엄마는 미숙이의 그런 정성 때문인지 건강한 모습으로 무사히 퇴원하셨다. 엄마는 지금도 미숙이 얘기를 하신다. "미숙이한테 잘해 주거라. 그런 친구 정말 보기 힘들어." 나도 안다. 미숙이 같은 친구가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신순영 님/경남 양산시 신기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2 - '독일국민에게 고함': 피히테(1762-1814) 그때 세계에서는 1796년: 영국 제너, 종두법 발견 1803년: 영국의 돌턴, 원자론을 설명 삼성문화재단에서 삼성문고를 발간했을 때 그 첫째 권으로 나온 것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었다. 이 책은 아직도 그만큼 우리의 관심을 끄는 책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때 피히테는 유명한 철학자이면서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있었다. 당시의 독일 지성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전 독일을 유린하고 수도인 베를린까지 점령당하게 되는 것을 보았을 때, 조국의 운명과 장례를 위해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애국적인 강연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과 뜻있는 지식층 국민들이 그 강연을 경청했던 것이다.그 당시 유럽대륙에서는 프랑스가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었다. 프랑스 문화가 물밀듯이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는 프랑스 정신이 미래를 이끌어갈 횃불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러시아 귀족들은 앞을 다투어 프랑스에 유학했고, 그들은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생활의 자랑스러운 언어로 자긍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인물들도 프랑스를 점령한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 비슷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괴테도 나폴레옹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애독자였기 때문에 바이마르에 침입해 들어왔을 때 서로 기대감을 갖고 만난 일이 있었다. 베토벤도 나폴레옹에게 바치기 위해 '영웅 심포니'를 작곡했다가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실망해, 한 영웅을 회상하는 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헤겔은 예나 시를 무혈점령하고 군대사열을 하는 말 위의 나폴레옹을 보고, 후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경의를 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했고 프러시아 황제의 정권을 옹호하고 있던 피히테는 앞으로의 독일을 위해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족교육을 통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고, 치욕스러운 프랑스의 점령같은 수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조국건설의 의무를 호소했던 것이다. 피히테는 신학과 종교계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정열과 야심을 지닌 대학생이었다. (후일에 그의 아들 소.피히테가 그 뜻을 계승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가 뜻하지 않은 기회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아프게는 하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 쾌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곧 서재에 틀어박혀 5-6주간 동안에 한 저작을 끝냈다. "계시의 철학"으로 알려진 글이다. 그 원고를 갖고 칸트를 찾아가 보였을 때 칸트는 뜻밖의 후계자를 얻은 기쁨으로 그 책의 출판을 종용했다. 사람들은 그 책이 이름을 바꾸어 내놓은 칸트 자신의 저서일 것으로 오인할 정도로 피히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피히테는 일약 저명한 철학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칸트의 후광을 업고 출발한 피히테가 "전 지식학의 체계"라는 자신의 철학으로 발전시켰을 때는 칸트의 강한 부정적인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칸트는 나를 인용할 가치도 없는 철학이라고 학문적 단절을 선언했고, 피히테는 칸트가 자기의 철학을 이해하기에는 모자라는 노인이라고 결별을 고했다. 칸트는 자기의 철학은 그것으로 완결되었기 때문에 수정이나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공언했다. 그러나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은 논리학으로 출발로 하나 하나의 시론일 뿐, 그것 은 좀 더 높은 철학에서 완성되어야 하며 자신이 그 완성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느 편이 옳은가? 칸트를 따르는 사람은 칸트로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위치에서 본다면 피히테는 지나치거나 불필요한 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입장을 따른 사람은 피히테의 체계는 칸트를 극복했고 완성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철학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칸트의 철학은 피히테와 관계없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평가는 올바른 것이다. 피히테를 역사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한 부호가 어린 피히테의 영리함을 보고 신학자로 키우려는 배려에서 학업을 뒷받침한데서 출발했다. 첫번째 운명의 손길이었다. 칸트를 만난 것이 그의 두번째 운명이었다면, 그의 죽음 또한 마지막 운명의 결과였다. 피히테의 부인은 피히테보다 5-6년이나 연장이었고 페스탈로치와 함께 교육학을 전공했다. 1814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되고 있었다. 자선사업에 힘을 쏟고 있던 피히테의 부인이 그 병을 남편에게 전염시키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콜레라는 인구의 몇분의 1씩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피히테는 57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사꾸라'는 일본어...말고기를 뜻합니다 우리가 늘 쓰던, 그리고 지금도 쓰고 있는 일본어 '사꾸라'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사꾸라'는 일본의 국화 '사쿠라'를 연상하게 하지요. "그 사람 사꾸라야"처럼 이 '사꾸라'는 흔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사꾸라'는 '벚꽃'인 '사쿠라'가 아닙니다. '사꾸라'는 역시 일본어인데, sakura, 즉 말고기를 뜻합니다. 일본에서 쇠고기로 속여 말고기를 파는 데서 온것으로 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생사의 이치를 탐구한 사람들 - 서화담 / 소강절 생사는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 서화담 서경덕은 조선조 성종 20년 송도의 화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성의 동문 밖 화담 위에 서사정이란 초막을 짓고 단좌묵상하면서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니 사람들이 그를 화담 선생이라 불렀다. 어머니 한씨는 공자의 묘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타고난 총명으로 어릴 때부터 그는 탐구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그가 어릴 때 나물을 뜯으러 가서 매일 빈바구니로 늦게 돌아오자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나물을 뜯다가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제는 두 치쯤 날아올랐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아오랐습니다. 새의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하늘 천 자를 벽에 붙여놓고 문을 잠그고 한없이 글자를 바라보며 그 이치를 생각하였다. 14세때 향촌 서당에서 기삼백 편을 수학하다가 막혀 버리자 집에 돌아와 보름 동안을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스스로 해득하였다고 한다.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앎을 얻게 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함에 있다) 장에 이르자 기쁨의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운 것은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 사람이 되어서 우주의 진리, 그를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이며 선비가 되어서 그를 격구치 못하고야 글을 읽어 무엇하랴? 분발하면서 며칠씩 잠을 자지 않기로 하고 조금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 졌으며 나이 40에 벌써 60노인처럼 보였다. 당년에 그를 만나보았으면 10년 동안 읽은 글보다 나을 것을! 퇴계는 그를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서화담은 자질이 상지에 가까워서 시골에서 일어나 스스로 공부할 줄 알았고 소옹(소강절)의 역학에 더욱 깊어서 황극경세의 수를 산출한 것이 하나도 틀림이 없으니 기특하도다. 복희의 역학방법을 아는 이는 아조의 이 한사람뿐이었다. 상촌 신흠이 그의 문집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해 놓았다. 화담은 공자가 주공을 사무치게 그리듯, 소강절을 몹시도 사모하였다. 화담은 <귀신생사론>에서 생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이천은 사와 생, 사람(생)과 귀신(사)은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 했으니 이것으로써 다 말한 것이다. 나도 사와 생, 인과 귀란 다만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어 흩어짐은 형체만 흩어질 뿐이요, 담일 청허한 기운의 뭉침은 끝까지 흩어지지 아니 하느니 흩어진다 해도 태허담일한 안에 있어 그와 동일한 기이다. (생략) 눈앞에 사라져 버림을 보지만 그 나머지 기운이야 마침내 흩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다 없어진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화담은 생사를 촛불에 비유하여 촛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는 우주 안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 그대로 있다고 하였다. 화담이 떠나던 날은 늦더위가 한창인 7월이었다. 화담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화담 못가로 옮겨 달라고 하여, 그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돌아온 후 임종에 이르렀다. 명종 원년. 세수는 58세였다. 그날은 마침 천계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 날이었다. 소강절 소강절은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이름은 옹, 자는 요부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에게 도가의 도서선천성수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이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다. 소강절은 <황극경세서>에서 우주의 생성과정을 숫자로 파악해 놓았다. 이에 화담은 소옹의 도서나 상수에 관한 이론들을 해설하였고, 이러한 화담의 기수학은 토정에게로 이어졌다. 살펴보면 소강절과 서화담, 이 두 사람의 생애는 물론, 죽을 때의 모습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다, 도학자답게 안심입명의 태도를 취하면서 마지막 한 말까지도 그들은 비슷하였다. 집안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그들의 선대는 비록 덕망은 높았으나 모두 벼슬없이 가난한 살림을 살았으므로 둘은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비바람이나 겨우 가리는 초당에서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면서도 두 사람 모두 진리 탐구에 몰두했으며, 세상의 명리나 벼슬따위에는 둘 다 초연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리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들은 여행을 하였는데 소강절은 황하 유역, 한수 유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둘러보았고, 화담은 속리산, 지리산, 금강산 등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특히 그들의 학문은 궁리를 통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득해 들어가는 공부의 방법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던 것이다. 우주의 원리를 궁리하는 것에 그들은 다같이 일생을 바쳤다. 향년 66세, 소강절은 죽음에 임하여 삶과 죽음이란 모두 보통있는 일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임종을 앞둔 화담 또한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니 심경은 평안하기만 하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6. <동방 견문록>을 기록한 사람은 따로 있다 15~16세기의 지리상의 발견을 촉발한 것 중의 하나가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 견문록>이다.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동방, 특히 지팡구(일본을 가리킴)라는 황금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유럽 사람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 <동방 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 있을 때 만들어지게 된다. 1271년 17세의 마르코 폴로는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동방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동방과 교역하고 있던 상인이었는데 그들은 5년 전 몽고의 쿠빌라이 칸(1215~94)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부탁받았다. 즉 로마 교황에게 말하여 기독교의 교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살마 100명과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무덤에 켜 있는 램프의 기름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코의 아버지와 숙부는 기름은 가지고 갔지만 기독교의 교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 때 쿠빌라이 칸의 눈에 띈 것이 마르코 폴로였다. 그는 긴 여행으로 벌써 20세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칸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마르코 폴로는 이후 장장 17년 동안 궁정에서 일하면서 귀중한 체험을 얻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매우 유능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왔다. 원나라 왕조의 왕녀 코카친이 17세가 되던 해 일 한국의 아르군 칸에게 시집 가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 여행에 마르코 폴로 일행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마치고 나서 고향 베네치아에 잠시 들렀다 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1290년 말 마침내 마르코 폴로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에 도착하고 보니 쿠빌라이 칸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어 굳이 원나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동방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도리어 그는 허풍쟁이로 몰리곤 했다. 그러던 중 베네치아와 이웃 도시인 제네바가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 때 참가한 마르코 폴로는 포로가 되었다. 어둡고 습기찬 감옥 생활의 유일한 낙은 서로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 체험은 그를 감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행히도 당시 감옥에는 루스티케로라는 작가가 갇혀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루스티케로의 손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동방 견문록>에서 마르코 폴로는 허풍쟁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무수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는 우선 수도 칸발리크(지금의 북경)의 도시 계획에 놀랐던 것 같다.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잘 정비되어 있고 도로도 상당히 넓었다고 한다. 또한 수도와 지방을 잇는 교통망의 발달도 그를 놀라게 했다. 거기에 지폐(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지폐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의 유통, 연료로 석탄을 사용하는 것 등에서 중국 여성의 예의바름까지 그가 중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외국인이라면 당연히 흥미를 가질 만한 일이 <동방 견문록>에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그 외에 여성의 전족의 관습, 중국의 연중 행사, 한자의 구조 등에 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도 역시 외국인이었다. 특히 그는 중국어와 한문을 알지 못했다 (그는 몽고 어와 페르시아 어에는 능통했는데 당시 원제국 안에서 이 두 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여행에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중국 고유의 풍습, 문물을 깊게 이해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 이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 밖에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유럽 인들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9. 불타는 헐리우드 정치적으로 기세둥등하고 난폭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대하게 제작, 포장되어 나오는 할리우드영화는 소위 '미국문화'를 대표하면서 세계 각 지역을 침범하고 있다. 극도의 폭력장면과 성범죄로 가득찬 할리우드영화는 사람들의 감성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으며 그 결과 많은 국가의 영화 산업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 그들의 전통문화 현대문명을 참혹 하게 목조르고 있다. 1) {킬러}와 '어린이 보호' 이전의 할리우드영화가 인성의 선량함과 박애, 자유,평등을 선양하여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색정, 폭력, 범죄 등 소위 사회문제와 반항 등으로 가득찬 지금의 할리우드영화는 사람들의 말초신경에 강한 자극을 주어 방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어 인간을 포악하게 만들고 심성을 황폐하게 하고 있다. 1995년 가을, 나는 사회조사를 하기 위해 중국 서부의 비교적 낙후된 지역인 닝샤(寧夏)에 간 적이 있다. 인환(銀川) 시의 사람들은 홍콩영화나 국산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할리우드영화를 좋아하고 있었다. 당시 {트루라이즈} {스피드} 등 할리우드 대작들이 상영되는 극장은 관객들로 만원을 이루었으나 나는 이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레이저디스크 영화관에도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는 것이다. 당시는 중 . 미 간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란이 한창 격렬하게 진행되는 중이어서 래이저디스크 방영은 아직 단속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필자는 친구의 초청으로 {킬러}라는 미국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사회문제를 전문적으로 찍어 미국인을 떨게 만드는 그 유명한 올리버 스톤이었다. '이십 세기 폭력경전'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이 황당하면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밑바닥생활을 하는 어느 청년이 애인의 아버지가 애인을 성희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분을 못 이겨 애인과 함께 그 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동안 그에게 있어 유일한 낙은 바로 살인이었다.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너무나 공허하여 살인을 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존재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살인을 할수록 유명해졌고 점점사람들의 숭배를 받기 시작했다. NBA 농구를 방영하는 TV에 game'이라고 고함치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살인마들을 두고 '?라고 외쳐댔다. 경찰들도 '그들 둘을 잡으면 하루 아침에 유명해지겠군'하며 정신나간 듯이 말하였다. 그들이 잡힌 후 미국인들은 뭔가를 갑자기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리에는 그들을 지지하는 플래카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초상화가 거리 곳곳과 숭배자들의 옷 위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출세욕이 강한 한방송국 기자는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 감옥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시각에 전 미국인들은 Tv 앞에 몰려들었고, 주인공들은 마치 대통령선거연설을 하듯이 군중을 선동하였으며 이에 사람들은 차를 부수고 상점을 불태우는 등 마치 모든 것이 완전히 미쳐 버린 듯했다. 미국은 순식간에 폭력의 현장으로 변해 버렸다. 살인마들은 이 기회를 틈타 기자를 협박하고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인을 경험한 사람들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기자는 갑자기 카메라첸즈를 자신에게 대고 소리켰다. '난 참을 수 없어. 나도 저들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어.' 그리고 그는 살인마들을 도와 도망칠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살인마들은 숲속에서 그들 손에 죽고 싶어하는 기자를 죽여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숭배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영화는 몽타주기법과 흑백과 컬러의 혼용, MTv의 수법들을 대거 동원하여 시각적으로 아주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관람이 끝나자 나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어때? 살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그날 밤 이 말이 생각나 나는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이 영화는 미국에 만연된 폭력범죄의 사회문제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사회에 경종을 울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문화배경을 가진 다른 국민들이 과연 영화에 내포된 뜻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경제가 쇠락의 길을 걷고 폭력, 성범죄, 동성애. 마약 등 복잡한 사회문제에 얽혀 인성이 사라져가는 미국이 다른 나라 국민을 계도할 수 있을까? 고층빌딩의 숲속에서 횡행하는 돈, 살인, 성범죄등으로 가득찬 미국영화가 중국 소년들의 판단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과 같이 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도 필자의 능력을 초월한 것 같다, 상업적 이익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는 할리우드는 이와 같은 영화를점점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 강렬한 시각적 충격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할리우드의 이런 영화들이 미국의 범죄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의 범죄의식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은 더욱 많은 폭력과 범죄에 시달리고 있다. 어쩌면 황색피부를 가진 소년은 이런 영화를 보고 뛰쳐 나와 길가의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고 흡족해 하면서 재빠르게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한 친구가 나의 이런 근심을 비웃으면서 할리우드에는 이런 영화만 있는 게 아니야.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포레스트 검프}등과 같은 영화들이 할리우드 영화세계에서 예술적 중심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있지'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거기에서 나오는 대다수의 영화는 어떤 종류인가?매년 제작되는 몇 천 편의 영화 중 정말 사랑이 넘쳐흐르는 따뜻한 영화, 인간의 선량한 인성을 그린 아름다운 영화는 대체 몇 편이나 되지?'라고 반문하였다. 작년에 수입된 10편의 대작 중 7편이 할리우드영화였다. 그 중 만화영화 {라이온 킹}과 {포레스트 검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폭력,살인, 강도 등을 주내용으로 한 액션영화였다. 이와 같이 개인 영웅?주의를 내세우는 영화들은 흥행수입을 올리기 위해 대량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잔혹한 살인과 대형 폭발장면 등을 연출해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이 영화로 인해 범죄의 충동을 느낄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청소년들도 이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 가득찬, 인간과 인간 사이에 깊이 박힌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고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루쉰(홀迅)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들을 구제합시다.' 2) '불타는 할리우드'-프랑스인들의 분노 할리우드는 어떻게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갈수록 많은 돈을 투자하여 제작하고 또 세계 각지에 보급하여 거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할리우드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보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할리우드영화가 계속해서 살인과 성범죄장면 등을... 할리우드 스타들의 수입에서 대강 짐작 할 수 있다.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연수입은 대략 2천3백만 달러였고 브루스 윌리스는 {다이하드} 한 편의 출연료로 1천5백만달러를 받았다.실베스타 스텔론은 {저지드레드}한 편에서 1천3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고, 데미 무어는 {스트립티즈}에서 1천9백만 달러를 받았다. {늑대와 춤을}으로 유명해진 케빈 코스트너는 이혼할 때 전처에게 1억 달러가 넘는 위자료를 주었다. 이를 볼 때 세계 각지의 스타들이 할리우드로 벌때처럼 몰려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그에 비해 중국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에는 관객이 가뭄에 콩나듯이 있었다. 우리들이 10편의 할리우드 대작을 수입해 즐겁게 주머니돈을 털어 영화관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지구의 다른 쪽 프랑스에서는 항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관세와 무역에 관한 협정을 논하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테이블에서 프랑스인들은 미국을 힐책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가 상업적 이익에 혈안이 되어 무책임한 선동적 수법으로 '문화침략'을 감행하여 프랑스 영화산업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 본국에서도 항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프랑스 및 유럽의 영화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한 배우 제랄드 드 데빠르디유가 직접불을 붙여 거의 백 편에 달하는 할리우드영화 팜플렛을 불태웠다. 물론 그 영화들은 대부분 폭력, 색정, 살인, 마약으로 얼룩진 상업영화였다. 여기에 참가한 한 영화인은 '이는 프랑스와 유럽만의 분노가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시위는 소리없이 느린 속도로 질서를 지키면서도 비장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프랑스대사관에 근무하는 친구였다. 프랑스인은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지만 평소 국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번에 보여준 그들의 자존심은 그 친구로서도 정말 놀라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몇 년 전에 프랑스는 모든 거리에 붙은 영어표지판을 없애 프랑스어의 존엄성을 지키기로 한 나라가 아닌가. 우수한 전통문화를 가진 프랑스가 세계문명에 공헌한 바는 확실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영화는 신문화운동 이후로 낭만, 소박, 박애. 자유. 평등 등의 예술적 소재로 인간성을 계발하고 우수한 문명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영화를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더욱 많은 인간 내면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세계 영화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양질의 예술영화 제작으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은 공리주의와 향락주의로 얼룩진 할리우드영화가 폭력과 색정이라는 저속한 수법으로 영화시장을 점거한 데 대해 통탄하고 있다. 그들은 할리우드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 추구하는 영화를 제작하여 자국 영화산업이 취약해진 데대해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불태운 것은 그들의 신념이었다.그들의 신념이 표방한 것은 영화예술의 존엄이자 프랑스의 존엄이며, 유럽의 존엄이자 문화의 존엄이었다. 그것은 또 인간성의 존엄인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금붕어의 죽음 서울 영희네 집 어항 속에 세 마리의 금붕어가 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이름은 붉은 붕어이고, 나머지 한 마리의 이름은 검은툭눈금붕어였다. 붉은 붕어는 마음이 곱고 서로 형제처럼 잘 지냈으나, 검은툭눈금붕어는 마음이 사납고 욕심이 많아 툭하면 붉은붕어를 못 살게 굴었다. 붉은붕어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검은툭눈붕어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으며, 검은툭눈금붕어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이 좁은 어항에서 혼자 좀 넓고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붉은 붕어 한 마리가 뭘 잘못 먹었는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헤엄을 치다가 수초 사이에 꼬리가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물레방아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이 누워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그만 붉은 붕어 한 마리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수면 위로 배를 뒤집고 떠 있더니 어느새 어항 밑으로 깊게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한 마리 남은 붉은 붕어의 슬픔은 컸다. 좁은 어항 안에서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더니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검은툭눈금붕어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하느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생각에 시종 마음이 즐거웠다. 영희 엄마가 죽은 붉은 붕어를 땅에 묻어 주려고 어항에서 꺼내갈 때는 살며시 돌아서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나머지 한 마리 남은 붉은 붕어마저 하루빨리 죽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보다 많은 먹이를 먹을 수 있고, 보다 맑은 신선한 물과 공기를 마음껏 혼자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머지 한 마리 붉은 붕어 죽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도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잘 지냈다. 검은툭눈금붕어는 속이 상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밤낮 머리를 싸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으나 적당한 때에 기회를 봐서 붉은 붕어 죽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검은툭눈금붕어는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 기회는 왔다. 영희네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모두 영희 이모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는 바로 그날 붉은 붕어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물론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그는 승리감에 취해 하루 종일 노래를 불렀다. 먹이도, 물론 혼자 다 먹고 마셨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흘쯤 지나자 어항의 물이 차차 탁해지기 시작했다. 죽은 붉은 붕어 몸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검은툭눈금붕어는 갈수록 숨쉬기가 곤란해져 갔다. 영희네 식구들이 1주일만에 부산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금붕어 두 마리가 다 함께 죽어 있었다. 집을 비우기 전에 물을 갈아주고 먹이도 알맞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글터 → 이글저글 즐거운 고통의 부르짖음, 암코양이가 수코양이와 교미할 때 내는 소리는 쾌락의 소리가 아니라 고통의 소리이다. 수코양이의 음경이 암코양이의 질에서 빠져나올 때 수코양이가 가진 바늘같은 가시 때문에 암코양이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이 고통이 배란의 원동력이 된다고 한다.바람 피우는 동물들, 곰, 영락새, 침팬지, 샌드 파이퍼 등일부다처제 동물들, 꿩, 산양, 야생마, 굴뚝새, 큰 사슴, 물개 등일처다부제 새들, 남미산 메추라기, 타스마니안 헨즈 등일부일처제 동물들, 제비, 오리, 여우, 독수리, 늑대, 백조 등사하라 사막에서도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사막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들이 있어 모래를 파내면 민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낙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외투를 입고 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자유자재로 몸의 색깔을 바꿀 수 있다. 더욱 신기하게도 목의 각 부분도 동시에 다른 색깔로 바꿀 수 있다. 있는 곳의 색깔에 따라 그대로 바꾸기 때문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농어(sea bass)라는 물고기는 새끼 때는 모두 암컷이지만 5년뒤에은 반 정도가 수컷으로 변한다.돌고래는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를 갖고 있다. 돌고래는 상어를 코로 떠 받아 죽일 수 있고, 꼬치고기를 입으로 한 번 물어 뜯어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돌고래는 결코 인간을 해치지는 않는다.문어 수컷의 생식기는 오른쪽 세 번째 발에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5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08Nov by 風文 2024/11/08 by 風文 Views 419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06Nov by 風文 2024/11/06 by 風文 Views 348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04Nov by 風文 2024/11/04 by 風文 Views 373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02Nov by 風文 2024/11/02 by 風文 Views 384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8Oct by 風文 2024/10/28 by 風文 Views 343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5Oct by 風文 2024/10/25 by 風文 Views 548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4Oct by 風文 2024/10/24 by 風文 Views 32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3Oct by 風文 2024/10/23 by 風文 Views 940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2Oct by 風文 2024/10/22 by 風文 Views 801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1Oct by 風文 2024/10/21 by 風文 Views 793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18Oct by 風文 2024/10/18 by 風文 Views 802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17Oct by 風文 2024/10/17 by 風文 Views 513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16Oct by 風文 2024/10/16 by 風文 Views 504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15Oct by 風文 2024/10/15 by 風文 Views 607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14Oct by 風文 2024/10/14 by 風文 Views 406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13Oct by 風文 2024/10/13 by 風文 Views 435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12Oct by 風文 2024/10/12 by 風文 Views 456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10Oct by 風文 2024/10/10 by 風文 Views 404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09Oct by 風文 2024/10/09 by 風文 Views 353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08Oct by 風文 2024/10/08 by 風文 Views 33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07Oct by 風文 2024/10/07 by 風文 Views 304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06Oct by 風文 2024/10/06 by 風文 Views 364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72 호4339.11.29 (10.0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꽃을 받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당신이 아직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동안에는. / 리너 혼 (미 흑인가수)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벽골제 공사에 던져진 여심 - 단야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김제 태수는 토목기술자인 원덕랑과 자신의 딸 단야를 맺어주기 위해 원덕랑의 약혼녀를 용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안 단야는 아버지의 살인을 막고 원덕랑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다. 이러한 단야의 효심과 희생정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단야각과 단야루를 세웠으며 영정도 모시게 되었다. 단야각 단야루 단야로 단야연못 출처 : http://rice.egimje.net/kor/byeokgolje/danya/cbc.jsp?page_code=CBC--001 신라 제 38대 원성왕 때다. 김제 벽골제 방축은 낡고 헐어서 보수가 불가피했다.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가는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둑이 허물어진다는 중론이었다. 나라에서는 벽골제의 개축 공사를 위해 인근 7개 주민들을 역사에 동원하기로 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신라 3대 저수지로 꼽혀 오고 있는 벽골제는 기실 의림지나 수산제보다도 그 규모가 크기로 소문나 있었다. 옛날 마한 시절에는 벽비리국이 자리했던 김제땅. 백제 시대 벽골군으로 불리던 김제는 벼의 고을이라는 뜻으로 도향의 중심부를 이루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안장천팔백보"라 했듯이,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수리 저수지가 있는 김제땅은 일찍이 벽골제로 인하여 "도작 문화의 요림지이며 미곡의 본고장"이라는 위치를 굳혀 왔다. 몽리 면적 1만여 정보에 달하는 그 벽골제 둑이 허물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니 진정 큰일 날 일이다. 전주 도독부에서는 이 사실을 급히 조정에 알려 보수해 줄 것을 간청했다. "전하, 벽골제는 멀리 우리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기 이전부터 김제 만경 평야를 기름지게 적셔 오던 생명의 젖줄기였습니다. 하오나 지금 도작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김제 벽골제 둑은 위태로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는 것이옵니다. 깊이 통촉하소서, 전하. 벽골제는 그 역사가 오래고 방축이 노후해서 지금 주민들의 기름진 논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벽골제의 둑이 허물어지는 날, 김제 만경 평야에 목숨을 맡기고 땅을 일궈 오던 수만의 백성들은 갈길을 알지 못하고 수마에 할퀼 것이 자명한 일이오니, 청컨대 저하께옵서는 서라벌의 명망 높은 토목 기사를 보내시어 군량과 진상미의 고장 김제 만경 평야를 길이길이 보존하시옵소서." 전주 도독부의 보고를 받은 원성왕은 급히 예작부에 하명해서 사례 벼슬아치 원덕량을 불러들였다. 젊은 토목 기사 원덕이 대하에 무릎을 꿇자 왕은 근엄한 목소리로, "그대는 이번에 김제 벽골제 중수에 총책을 맡고 떠나라."하고 명했다. "어리석고 재주 없는 소신이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옵니다, 전하." "김제 태수 유품이 그대를 도울 것이요, 서라벌의 천신이 또한 그대 일을 도울 것이니 과히 염려말고 내일이라도 현지로 떠나도록 하라." 추상 같은 어명이요 지엄한 분부라 국록을 먹고 사는 원덕으로서는 감히 거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원덕은 왕명을 거역하고 싶었다. 이번 한 번만은 나라고 무엇이고 모두 팽개치고 사랑하는 월내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국사를 떨쳐 버리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원덕은 정혼자인 월내의 집으로 말을 달렸다. "아, 오셨군요, 원덕랑." "우리들의 잔칫날이......." 미처 원덕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월내의 상기된 얼굴은 벌서 잔칫날의 즐거움 속에 젖어 있었다. "우리들의 잔칫날. 그래요, 앞으로 닷새밖에 남지 않았어요, 원덕랑." "닷새......" "그렇다니까요. 원덕랑도 기쁘지 않으세요? 몇 년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들의 날이에요. 원덕랑이 나라의 큼직큼직한 토목 공사에 참여하느라 우리는 기껏 택일을 해 놓고서도 잔치를 두세 번씩 연기해 오지 않았던가요?" 순간 월내의 곱다란 얼굴에 기다림으로 응결진 우수가 깃든다. 이번만은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혼례를 연기할 수 없다는 각오가 그러한 표정 속에 굳어 있었다. "원덕랑........." 원덕은 대답을 않고 멍하니 밤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원덕랑........." 월내의 목소리가 두 번째 귀에 울렸을 때 그는 이 어리고 나약한 낭자에게 슬픔을 안겨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원덕랑. 나라에 또 무슨 급한 토목 공사가 생겼나요?" 월내는 직감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원덕의 입에서는 그래서야 한숨 섞인 말이 흘러 나왔다. "혼례를 며칠 앞두고 또 이 무슨 액운이오. 우리들의 혼사가 내 직업으로 인하여 이렇듯 두세 번씩 연기될 줄 알았더라면 내 일찍 이 토목 기술을 배우지 않았을 것을......." "어디로 떠나시게 되었는데요, 원덕랑." "벽골제로, 둑을 쌓으러 떠나라는 어명을 받았소." 월내는 놀라지 않았다. "언제 완공이 될까요, 벽골제 둑은?" "글쎄, 해동이 되는 대로 시작을 하면 늦어도 여름 장마 전에는 끝낼 수 있을 거요." "여름 장마........" 여름이라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지금이 정월이니까 꼬박 반 년은 기다려야 한다. "반년 뒤면 틀림없이 완공이 될까요?" "일을 시작해 보지도 않고 어찌 완공 날짜를 미리 알 수 있겠소. 허나 그대 월내 낭자가 이 몸의 귀환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깊이 새기고 떠나리다." 그런 말을 남기고 원덕은 떠났다. 오늘날의 김제읍에서 부안 가도를 따라 약 6킬로미터쯤가다 보면 부안면 포교리에 이르고 이곳에서 남쪽 명금산 북단까지 엇비슷하게 둑이 뻗어 있는데, 이 둑이 곧 벽골제 제방이다. 원덕이 김제 고을에 닿은 것은 월내와 작별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그는 김제에 닿자마자 태수 유품의 집에 머물면서 공사를 서둘렀다. 벽골제 제방 수축 공사에 동원된 7개 주 고을 사람들은 왕명을 받들고 특파된 원덕의 말을 따라 힘겨운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매사는 원덕의 생각대로 되어 주지를 않았다. 노령 산맥의 무악산과 상도산을 비롯, 크고 작은 연봉이 흘러내리는 물을 저류시켰다가 김제 만경 평야로 흘러내려 보내는 일이 곧 벽골제의 역사였으나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지금의 숫용에게 낭자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용이 살고 있는 곳은 연포천의 용소말고도 또 한 군데가 있었다. 원평천의 백룡이 바로 그 용이었다. 이른바 쌍룡추라 하여 오늘날에도 신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용소에 낭자 하나를 바치는 일은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원덕은 일단 공사가 시작되자 용소에 바칠 낭자 문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태수 유품을 조용히 만났다. "태수 어른, 기어이 낭자를 용소에 바쳐야 하나요?" "바쳐야 하구말구, 역사를 하는 도중에 낭자를 용소에 바치지 않으면 청룡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네." 늙은 태수는 그것이 당연한 처사라는 듯이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대답했다. "만일........ 만일 말입니다. 용소에다 낭자를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거지요?" "무슨 소린가, 원덕랑........ 청룡의 노여움이 자네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전 아직....." "큰일날 소리! 청룡의 노여움을 사는 날엔 방죽이 터져! 벽골제 둑이 완공되기도 전에 물난리를 치러야 한다, 이런 말일세." 도무지 모를 소리였다. 어찌하여 용소에다 낭자를 바치지 않으면 청룡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벽골제 둑이 허물어진다는 것인지 원덕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벽골제 수축 공사의 총책이라면 한 사람의 산 여자, 그것도 출가하지 않은 아리따운 낭자 하나를 물속에 집어 넣는 일에도 모든 책임을 저야 했다. 총책 원덕은 그러나 낭자를 용소에 바치는 일에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아니됩니다, 태수어른. 이 원덕이 벽골제 수축 공사의 총책을 맡고 있는 한 죄없는 낭자를 물속에 처넣어 죽일 수는 없소!" 원덕의 하루하루는 오로지 벽골제 수축 공사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내어졌다. 이따금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와의 해후는 다만 벽골제 둑이 완공되는 날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원덕의 벽골제에 쏟는 열성은 그만큼 절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소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싶자 이번에는 또 다른 장애가 그의 작업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태수 유품의 딸 단야의 접근이었다. 원덕이 처음 태수의 집에 행장을 풀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청혼자가 있는 그도 단야의 미모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야 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태수의 무남독녀로서 단야 낭자의 성장은 지극히 평탄하고 총애받는 사랑 속에서 자라 온 터이다. 외간 남자와 별로 접촉할 사이도 없이 다만 양주의 사랑과 관심, 바람을 타지 않은 온실 속의 꽃과도 같이 무풍 지대에서 꿈을 먹고 자라 온 순박한 소녀였다. 하지만 온실 속의 꽃은 젊고 귀골스런 원덕의 등장으로 내면에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토목 기술자가 온다기에 처음에 단야는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었다. 저수지 둑이나 감독하고 성곽이나 쌓는, 이를테면 돌처럼 무뚝뚝하고 메마른 남자가 자기 집에서 머물게 되겠거니, 그런 정도의 상상밖에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서라벌에서 온 토목 기술자가 자기 집에다 행장을 풀던 첫날 단야는 설레이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토목 기술자가 아니라 저분은 서라벌의 왕족일지도 모른다. 왕족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귀태를 가질 수 있을까?' 단야와 월내를 두고 문득 그 여성스런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던 원덕도 마음이 설레었다. '미모로 볼진대 오히려 월내보다 단야 쪽이 앞서는 것 같구나. 만일 내 일찍이 서라벌에 월내라는 정혼자를 두고 오지 않았다면 태수 어른을 졸라 저 아름다운 단야 낭자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그 마음의 설레임도 잠시, 원덕은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를 버릴 수 없다고 단정했다. 자기로 인해서 두세 번씩 혼례를 미뤄온 월내가 아닌가. 벽골제 수축 공사가 끝나는 대로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와 혼례를 치르기로 굳게 약속한 사이가 아닌가. 말하자면 혼례만 치르지 않았다뿐이지 월내는 이미 자기의 아내나 다름없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주다니 천벌을 받을 일이라 생각했다. 원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가뜩이나 신세를 지고 있는 태수 유품의 집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1월도 가고 어느 새 2월. 그 짧은 초봄의 하루하루가 미리 계획된 작업량을 채우느라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을 거듭해 갔다. 요 며칠 사이 원덕은 태수의 집을 아주 나오다시피해서 현장 생활을 하며 인부들을 독려했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할 때는 그렇게 의욕에 차 있던 인부들이 날이 갈수록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아 원덕은 적이 걱정되었다. 작업 능률도 오르지 않았고, 인근 7개 주 백성들의 사기도 그만큼 떨어져 갔다. 봄철을 맞이한 농민들은 저마다 못자리판을 서둘러야 했는데 벽골제 저수지 물이 제대로 공급될는지 그게 걱정이어서 선뜻 씨앗을 담그는 농가가 드물었다. 일이 이쯤 되자 둑 쌓기에 동원된 인부들은 저마다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거야 바루 용소에 가시나를 하나 갖다 바쳐야 일이 척척 맞아 떨어져 것인디, 가시나를 안 바쳐서 공사가 늦어지능기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응께로 낭자를 구해다 용님헌티 바치라고히여." "내 고장 농사는 내가 더 아는디 지까짓게 뭘 안다고 가시나를 안 바칠라고 허는지 소갈머리를 모르겄다닝께..." "책임을 지라고 히여, 책임을...... 농사 못 짓고 일년 농사 피롱하면 지가 쌀 됨이나 대줄랑가? 체......" 원덕은 그 같은 불평을 듣고 더 주저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낭자 하나를 용소에다 바치지 않으면 인부들은 연장을 챙겨 가지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릴 태세였다. '어쩐다......?' 밤이 되자 원덕은 막사에 누워서 또 그 '낭자 제물'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그의 착찹한 생각을 씻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그는 응당 서라벌에 두고 온 월내 낭자의 얼굴이라도 떠올리면서 향수를 달래어 옳았으나 어찌 된 셈인지 월내의 모습은 윤곽도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단야......" 월내 대신 원덕의 입에서 한숨처럼 이름이 튀어나왔다. "단야!" 그 비를 온통 심장 속까지 맞고 단야는 원덕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원덕랑, 원덕랑!" "단야, 어인 일이오...... 태수 어른께서 이 몸을 오라 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버님이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 몸이 원덕랑 일이 궁금해서 빗속을 달려왔을 뿐입니다. 허물이 된다면 꾸짖어 주십시오." 원덕은 그 말에 속으로 부르짖었다. '허물은 아니오, 허물은 아니오! 내 진정 단야 낭자를 보고 싶었소. 월내가 아닌 그대 몸을 가까이 모시고 싶었소.' "원덕랑, 여기까지 달려온 이 몸을 나무라지 않으신다면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개 있는데 들어주시겠는지요?" 단야의 비에 젖은 두 눈이 크게 빛을 발했다. 어쩌면 단야는 벌써 크고 빛나는 두 눈에 빗물이 아닌 눈물을 담고 있는지도 몰랐다. "말하지 마시오. 단야 낭자! 말하지 않아도 이 몸은 이미 낭자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말하지 아니하면 나라가 죽습니다." "나라가 죽다니오?" 원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지금 단야의 은근한 사랑의 고백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야는 두 사람 사이의 더욱 절박한 용소 문제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용소...... 용소......" "그렇습니다. 용소에는 낭자가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성은 아버님 태수의 오랜 숙원입니다. 용소의 용이 노하지 않고 벽골제 아래 그 너른 김제 만경 들에 잘 익은 벼이삭이 출렁거리게 될 때 이 고을은 태평 성대를 노래합니다. 그대 원덕랑은 벽골제 중수의 총책을 맡으신 어른이라 이 고장의 태평 성대를 바라시겠지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벽골제 공사가 질척거리게 된 것이 용소의 숫용을 노하게 만든 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한 용을 달래기 위하여 낭자를 바치자는 소리가 이 고을 전체의 외침이었다는 것을 단야 낭자는 설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태수가 찬성하고 고을 백성들이 한결같이 원하고 있는 제물을 어찌하여 원덕랑 혼자서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따지러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덕은 단야의 사랑 뒤에 병풍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애향심을 읽고 있었다. 고을을 사랑하는 힘은 곧 개인의 사랑을 초월하여 애국의 바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야가 가장 필요로 하는 원덕의 사랑은 제것으로 차지하지 못한 채, 그녀는 7개 주 고을 백성의 대변자가 되고 있었다. 적어도 벽골제 수축 공사 총책임자 원덕랑 앞에서 단야는 그런 신분 밖에 되지 않았다. 단야는 그것이 슬펐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7개 주 고을 백성들의 바람을 원덕랑에게 전달하는 기회에 그녀의 사랑도 함께 전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원덕랑, 내일이라두 곧 낭자를 구하여 숫용의 노여움을 풀게 하세요. 그리하여 벽골제 공사를 완공하신 뒤 서라벌로 돌아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월내 낭자와 화촉을 밝히세요......" "뭐 월내 낭자라구요?" 원덕은 놀랐다. '알고 있었구나, 단야는 내가 서라벌의 월내를 두고 떠나온 몸이라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했구나, 갸륵한 사람.' "단야...... 단야......" 새삼스럽게 단야의 단심이 가슴에 젖어 오자 원덕은 지극한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원덕이 단야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고 팔을 내뻗었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막사에서 빠져 나가고 없었다. "단야! 단야!"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 단야를 부르는 원덕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주저않고 마는데 단야는 아무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틑날 비가 개인 뒤 단야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용소 가에다 신발을 벗어 놓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용의 제물이 되고 만 것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정치의 격동 속에서 왕의 업적은 아내와 후손의 수에 비례한다. - 김기덕(건국대 강사) 왕의 후손은 많을수록 좋다? 남편 한명에 부인 한명(일부일처제)이 원칙인 오늘날 입장에서 본다면, 예전의 왕들은 많은 아내를 두었다는 점에서 우선 특이한 존재다. 물론 전근대에는 왕뿐만이 아니라 일반인 특히 귀족들도 다처가 가능했다.그러나 귀족의 다처는 본부인(처)외에 첩 한명을 두는 정도가 일반적이었으나, 왕은 여러 명 심지어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은 왜 일부다처였을까? 왕은 절대권력자이므로 그만큼 많은 여자를 아내로 두는것은 당연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복적인 이유는 왕의 경우 대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겼을 경우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 하는 점은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커다란 문제였다. 신라시대에는 여자쪽으로 왕위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왕위는 항상 남자쪽으로만 계승되었다. 이 경우 왕위가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사실상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일종의 ‘스페어 타이어’격이었다. 본 타이어가 펑크나지 않는다면 스페어타이어는 없어도 된다. 마찬가지로 장남이 제대로만 자라서 오래 산다면 나머지 아들이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남이 일찍 죽거나, 능력이 현저하게 모자라거나 혹은 그에게서 다시 대를 이을 아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가의 보존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왕의 후손이 많음에 따라 불필요한 왕위경쟁이나, 혹은 왕족파워의 형성 등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일반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일단 왕실은 번성하여 후계가 안정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라말 진골왕족의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고려왕조는 처음부터 왕족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다. 왕족들에게는 공작,후작,백작 등 명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경제적 대우를 해 주는 대신, 관직을 갖고 실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고려초부터 시행되었던 왕족들의 사환(벼슬살이)금지는 이처럼 신라말 역사적 교훈의 소산이었고, 이는 원칙적으로 다음 왕조인 조선시대 끝까지 관철되었다. 다음의 표는 고려시대 왕의 부인과 자녀의 수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부인과 자녀의 수가 단연 많은 왕으로는 제1대 태조, 제8대 현종, 제11대 문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왕의 가족관계는 몇가지 점에서 조선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먼저 왕의 부인의 경우 조선은 정비와 후궁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정비는 한 명이며, 죽거나 폐비되었을 경우 다시 간택되었다. 정비와 후궁의 차별은 그 소생자녀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원 간섭기 때에는 원나라 출신 왕비가 정비였고, 나머지 고려인 왕비는 후궁이었다. 그 이전에는 왕비의 호칭이 왕후.비.궁주.부인.궁인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 중 명칭상으로는 왕후가 정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후가 한 명이 아닌 경우도 있었으며, 천인 출신의 궁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왕비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물론 어느 왕 때나 제1왕비 즉 정비로 인정되는 왕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 왕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되는 왕비나 종묘에 왕과 같이 모셔지는 왕비는 원칙적으로 1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왕비들 사이에는 조선시대처럼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여러 왕비들의 소생자녀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저이 소생의 아들을 군, 딸을 옹주라 하여 명칭에서도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대우도 달랐다. 또한 그들의 배우자나 후손들도 다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고려시대 왕비의 경우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크지 않았던 것이나 그들의 소생자녀들 또한 차별이 없었던 점은, 고려시대가 처첩의 구분이나 적서의 구분에 있어 조선시대와는 매우 달랐음을 말해준다. 태조 아내 스물 아홉의 다양한 삶, 갖가지 사연들 왕실의 후손이 많을수록 좋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조의 아내는 29명이나 되었을까? 태조 왕건은 본래 궁예의 밑에서 수상을 맡고 있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부인은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두 명뿐이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전국의 유력 호족의 딸과 지속적으로 혼인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른 태조의 지방호족 포섭책이었다. 태조 즉위년(918)직후의 고려 정치상황은 상당히 불안하여, 태조를 반대하는 반란이 6개월여동안 수차에 걸쳐 일어났다. 이같은 상황에서 태조는 자신의 지원세력을 광범하게 확대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호족의 딸을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이른바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는 이와 같은 지방세력가와의 혼인을 통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의 아내 29명중 거의 대부분인 25명의 혼인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가 12명으로 양도에 집중되어 있고, 다음이 경상도 그리고 기타 충청. 강원. 전라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태조의 혼인이 일종의 혼인정책의 일환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태조의 아내들의 삶은 각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그 자녀들이 모두 수도인 개경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다. 태조의 제1왕비였던 신혜왕후 유씨는 호족의 딸답게 대단히 뱃심이 세었던 것 같다. 궁예 말년에 신하들이 태조의 집에 와서 쿠데타를 권유하자 태조는 자꾸 거절했다. 이에 몰래 엿듣고 있던 왕후는 뛰쳐 나오며 ‘궁예의 폭정은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손수 갑옷을 가져다 남편에게 입혀 주었고,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앞세우고 나감으로써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918년 42세의 나이에 즉위한 태조는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당시 아들로는 장화왕후 소생의 무(뒤의 혜종)가 유일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뒤 곧 일곱 살 난 무를 후계자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후계자 책봉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보다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결국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의 주청으로 921년(태조 4) 무는 열살의 나이에 후계자로 책봉되었다. 태조가 뜻을 세운지 3년 뒤에나 책봉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처음에 왕후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피임방법을 취하여 정액을 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는 그것을 흡입하여 드디어 임신해서 혜종을 낳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탓으로 혜종의 얼굴에는 돗자리무늬가 있었으며 세상에서는 혜종을 ‘주름살임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화왕후 오씨의 출신지인 나주지역은 사실상 왕건보다는 견훤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후삼국 정립기에 서남해안 일대 전라도의 호족세력들은 왕건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에 보면 차령 이남 지역은 반역의 땅이니 그 곳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지역갈등의 근원으로까지 얘기되고 있는데, 정작 태조는 차령 이남의 인물도 많이 기용하였고 나주 여인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훈요십조>가 위작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나주는 고려정부와 항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거란족의 침입으로 제8대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할때 전주절도사가 마중 나와 전주로 가기를 청했으나 굳이 나주를 피난처로 정한 점, 뒤에 담양 일대를 기반으로 무신정권 말기에 전라도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1236-1237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평정하고자 파견된 김경손이 나주는 어향(왕의 고향)이므로 반란군에 동조하지 말 것을 강조한 점, 또한 삼별초 항쟁기에 전라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나주의 호장세력은 끝까지 삼별초에 대항한 점 등은 고려를 개창한 태조의 처향이자 뒤를 이은 혜종의 탄생지로서 나주의 친고려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조의 혼인은 다분히 정략적인 것이었으므로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대서원부인 김씨와 소서원부인 김씨는 다 황해도 서흥지역 호족 김행파의 딸인데, 태조가 평양에 가는 길에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 자매와 하룻밤씩 잤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행차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제1왕비인 신혜왕후도 태조를 모신 뒤 한참 동안 소식이 끊어져 여승이 되었다가 뒤에 태조가 다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성씨나 가계도 알 수 없는 서전원부인이나, 성씨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는 숙목부인. 월화원부인. 소광주원부인 등도 하룻밤의 정략인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 29명의 왕비들의 아들이 대부분 태자 칭호를 띠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총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 7명을 제외한 18명중 11명이 태자를 칭하고 있으며 나머지 7명은 군을 칭하고 있다. 태자는 왕위계승권자를 의미한다. 이미 신라시기에 태자제조가 운용되었으므로 고려 태조가 태자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태조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위계승권자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호족과의 혼인정책이 추진되던 고려초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즉 각 지역 출신 왕비들은 자신의 아들도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그 결과 이 때부터 태자는 단지 왕자칭호의 하나로 일반화되었고, 왕의 정식 후계자는 따로 ‘정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뒤에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제4대 광종 16년(965)에 아들 주(뒤의 경종)를 ‘태자’로 책봉한 이후 일반왕자들의 태자칭호가 사라졌다. 이 때부터는 ‘태자’의 호칭이 명실상부한 왕위계승권자를 뜻하게 되었다. 고려 전기 국왕 혼인의 추이 태조의 혼인정책은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호족세력의 힘이 상존하는 한 비록 태조만큼 다수를 대상으로 혼인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방식은 계승되었다. 고려 제2대 혜종은 4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중 궁인 신분인 제4비는 별개로 하더라도 나머지 3명 전부가 군사력을 지닌 지방호족 출신의 딸이었다. 역시 태조의 아들로 제3대 왕인 정종은 3명의 부인이 있었다. 2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로 후백제 지역의 호족세력을 무마할 필요성에서 혼인관계가 이루어졌으며, 1명은 청주호족 김긍률의 딸로 역시 정략혼인의 일환이었다. 태조의 아들인 제4대 광종은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복여동생과 조카(혜종의 딸)였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 이전 신라왕실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혼인형태였는데, 고려 초창기의 일시적인 과도기를 거쳐 광종의 혼인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국왕의 근친혼은 광종 이후 원 간섭기 이전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제4대 광종에서 제7대 목종까지는 총 11명의 왕비 중 8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었다. 그런데 다음 제8대 현종은 총 1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중 3명의 궁인은 별개로 하더라도 10명 중 3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고 7명이 이성혼이었다. 근친혼이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당대 유력가문 및 공신들의 딸과 폭넓은 이성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전기 국왕혼인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호족의 협조하에 국가를 이끌어가야 할 시기에는 호족과의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1대 태조~3대 정종). 다음으로 왕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4대 광종~7대 목종). 이후에는 오히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왕실혼인을 개방하였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였다(8대 현종 이후). 한편 근친혼을 하였던 왕비들은 그 성을 칭함에 있어 독특하였다. 그들은 실제 왕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근친혼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 성 즉 외성을 칭했던 것이다(대목왕후황보씨의 사례). 그것은 근친혼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 외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고려의 사회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첩된 근친혼으로 인해 때로는 부모 모두 왕씨인 왕비도 있었다. 이 때는 어머니의 외성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외성, 즉 친할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대명궁부인 유씨의 사례). 태조의 아내는 29명이었고 그 자손이 많았으나, 4대 광종 때 왕권강화 과정과 7대 목종 때 정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도태되었다. 따라서 고려왕실은 실제 현종 때에서 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1대 문종은 5명의 부인에게서 13명의 왕자와 7명의 공주를 두어 왕실을 확실하게 번성시켰다. 이후 왕실의 주된 가닥은 전부 문종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태조의 아내가 29명에 자녀가 35명, 현종의 아내가 13명에 자녀가 13명, 문종의 아내가 5명에 자녀가 20명인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겠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대체로 전근대사회 국왕의 경우, 할 일 많고 실제 뛰어난 업적을 수행한 임금들은 아내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국왕의 업적은 대체로 아내와 자식의 수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가장 값진 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해 가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엄마가 쓰러지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다 어느 큰 병원에서 '뇌지주막하출혈'이라는 병명으로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다. 그때는 내가 직장 생활에 겨우 적응하여 안정을 찾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렵게 한 달간 휴직계룰 내고 모든일을 뒤로 한 채 엄마의 병간호를 했다. 엄마는 두 번이나 수술을 받으셨기 때문에 한 달만에 퇴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다 못해 내가 일년 동안 쓸수 있는 연차와 월차를 미리 당겨서 다 썼다. 그러다 보니 한 달 보름동안 회사에는 서류가 쌓일 대로 쌓이고 일 처리는 늦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쉽게 낫지 않으셨다. 엄마를 간호하려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가족중에 엄마를 간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 둘까? 하지만 엄청난 병원비는 누가 다 감당하고.....' 속상한 마음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 미숙이가 병문안을 왔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답답해서 미숙이에게 푸념을 늘어 놓았다. 그런데 이틀 뒤에 미숙이가 다시 병원에 왔다. "미숙아, 웬일이니? 회사는 어떡하구....." "그냥 일하기 싫어서 일주일 휴가냈다. 어머니 병간호나 할란다. 너는 회사에 가 봐라." 직장 생활하면서 휴가를 낸다는 것이, 그것도 갑자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숙이는 일하기 싫어서 왔다고 하지만 나 때문에 일부러 휴가를 낸 것이다. 그것도 아무리 친구의 엄마라지만 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힘든 간호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미숙이의 손을 잡고 한 참동안 울었다. 엄마는 미숙이의 그런 정성 때문인지 건강한 모습으로 무사히 퇴원하셨다. 엄마는 지금도 미숙이 얘기를 하신다. "미숙이한테 잘해 주거라. 그런 친구 정말 보기 힘들어." 나도 안다. 미숙이 같은 친구가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신순영 님/경남 양산시 신기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2 - '독일국민에게 고함': 피히테(1762-1814) 그때 세계에서는 1796년: 영국 제너, 종두법 발견 1803년: 영국의 돌턴, 원자론을 설명 삼성문화재단에서 삼성문고를 발간했을 때 그 첫째 권으로 나온 것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었다. 이 책은 아직도 그만큼 우리의 관심을 끄는 책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때 피히테는 유명한 철학자이면서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있었다. 당시의 독일 지성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전 독일을 유린하고 수도인 베를린까지 점령당하게 되는 것을 보았을 때, 조국의 운명과 장례를 위해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애국적인 강연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과 뜻있는 지식층 국민들이 그 강연을 경청했던 것이다.그 당시 유럽대륙에서는 프랑스가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었다. 프랑스 문화가 물밀듯이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는 프랑스 정신이 미래를 이끌어갈 횃불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러시아 귀족들은 앞을 다투어 프랑스에 유학했고, 그들은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생활의 자랑스러운 언어로 자긍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인물들도 프랑스를 점령한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 비슷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괴테도 나폴레옹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애독자였기 때문에 바이마르에 침입해 들어왔을 때 서로 기대감을 갖고 만난 일이 있었다. 베토벤도 나폴레옹에게 바치기 위해 '영웅 심포니'를 작곡했다가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실망해, 한 영웅을 회상하는 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헤겔은 예나 시를 무혈점령하고 군대사열을 하는 말 위의 나폴레옹을 보고, 후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경의를 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했고 프러시아 황제의 정권을 옹호하고 있던 피히테는 앞으로의 독일을 위해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족교육을 통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고, 치욕스러운 프랑스의 점령같은 수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조국건설의 의무를 호소했던 것이다. 피히테는 신학과 종교계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정열과 야심을 지닌 대학생이었다. (후일에 그의 아들 소.피히테가 그 뜻을 계승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가 뜻하지 않은 기회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아프게는 하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 쾌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곧 서재에 틀어박혀 5-6주간 동안에 한 저작을 끝냈다. "계시의 철학"으로 알려진 글이다. 그 원고를 갖고 칸트를 찾아가 보였을 때 칸트는 뜻밖의 후계자를 얻은 기쁨으로 그 책의 출판을 종용했다. 사람들은 그 책이 이름을 바꾸어 내놓은 칸트 자신의 저서일 것으로 오인할 정도로 피히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피히테는 일약 저명한 철학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칸트의 후광을 업고 출발한 피히테가 "전 지식학의 체계"라는 자신의 철학으로 발전시켰을 때는 칸트의 강한 부정적인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칸트는 나를 인용할 가치도 없는 철학이라고 학문적 단절을 선언했고, 피히테는 칸트가 자기의 철학을 이해하기에는 모자라는 노인이라고 결별을 고했다. 칸트는 자기의 철학은 그것으로 완결되었기 때문에 수정이나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공언했다. 그러나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은 논리학으로 출발로 하나 하나의 시론일 뿐, 그것 은 좀 더 높은 철학에서 완성되어야 하며 자신이 그 완성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느 편이 옳은가? 칸트를 따르는 사람은 칸트로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위치에서 본다면 피히테는 지나치거나 불필요한 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입장을 따른 사람은 피히테의 체계는 칸트를 극복했고 완성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철학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칸트의 철학은 피히테와 관계없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평가는 올바른 것이다. 피히테를 역사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한 부호가 어린 피히테의 영리함을 보고 신학자로 키우려는 배려에서 학업을 뒷받침한데서 출발했다. 첫번째 운명의 손길이었다. 칸트를 만난 것이 그의 두번째 운명이었다면, 그의 죽음 또한 마지막 운명의 결과였다. 피히테의 부인은 피히테보다 5-6년이나 연장이었고 페스탈로치와 함께 교육학을 전공했다. 1814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되고 있었다. 자선사업에 힘을 쏟고 있던 피히테의 부인이 그 병을 남편에게 전염시키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콜레라는 인구의 몇분의 1씩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피히테는 57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사꾸라'는 일본어...말고기를 뜻합니다 우리가 늘 쓰던, 그리고 지금도 쓰고 있는 일본어 '사꾸라'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사꾸라'는 일본의 국화 '사쿠라'를 연상하게 하지요. "그 사람 사꾸라야"처럼 이 '사꾸라'는 흔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사꾸라'는 '벚꽃'인 '사쿠라'가 아닙니다. '사꾸라'는 역시 일본어인데, sakura, 즉 말고기를 뜻합니다. 일본에서 쇠고기로 속여 말고기를 파는 데서 온것으로 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생사의 이치를 탐구한 사람들 - 서화담 / 소강절 생사는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 서화담 서경덕은 조선조 성종 20년 송도의 화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성의 동문 밖 화담 위에 서사정이란 초막을 짓고 단좌묵상하면서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니 사람들이 그를 화담 선생이라 불렀다. 어머니 한씨는 공자의 묘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타고난 총명으로 어릴 때부터 그는 탐구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그가 어릴 때 나물을 뜯으러 가서 매일 빈바구니로 늦게 돌아오자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나물을 뜯다가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제는 두 치쯤 날아올랐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아오랐습니다. 새의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하늘 천 자를 벽에 붙여놓고 문을 잠그고 한없이 글자를 바라보며 그 이치를 생각하였다. 14세때 향촌 서당에서 기삼백 편을 수학하다가 막혀 버리자 집에 돌아와 보름 동안을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스스로 해득하였다고 한다.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앎을 얻게 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함에 있다) 장에 이르자 기쁨의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운 것은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 사람이 되어서 우주의 진리, 그를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이며 선비가 되어서 그를 격구치 못하고야 글을 읽어 무엇하랴? 분발하면서 며칠씩 잠을 자지 않기로 하고 조금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 졌으며 나이 40에 벌써 60노인처럼 보였다. 당년에 그를 만나보았으면 10년 동안 읽은 글보다 나을 것을! 퇴계는 그를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서화담은 자질이 상지에 가까워서 시골에서 일어나 스스로 공부할 줄 알았고 소옹(소강절)의 역학에 더욱 깊어서 황극경세의 수를 산출한 것이 하나도 틀림이 없으니 기특하도다. 복희의 역학방법을 아는 이는 아조의 이 한사람뿐이었다. 상촌 신흠이 그의 문집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해 놓았다. 화담은 공자가 주공을 사무치게 그리듯, 소강절을 몹시도 사모하였다. 화담은 <귀신생사론>에서 생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이천은 사와 생, 사람(생)과 귀신(사)은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 했으니 이것으로써 다 말한 것이다. 나도 사와 생, 인과 귀란 다만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어 흩어짐은 형체만 흩어질 뿐이요, 담일 청허한 기운의 뭉침은 끝까지 흩어지지 아니 하느니 흩어진다 해도 태허담일한 안에 있어 그와 동일한 기이다. (생략) 눈앞에 사라져 버림을 보지만 그 나머지 기운이야 마침내 흩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다 없어진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화담은 생사를 촛불에 비유하여 촛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는 우주 안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 그대로 있다고 하였다. 화담이 떠나던 날은 늦더위가 한창인 7월이었다. 화담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화담 못가로 옮겨 달라고 하여, 그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돌아온 후 임종에 이르렀다. 명종 원년. 세수는 58세였다. 그날은 마침 천계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 날이었다. 소강절 소강절은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이름은 옹, 자는 요부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에게 도가의 도서선천성수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이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다. 소강절은 <황극경세서>에서 우주의 생성과정을 숫자로 파악해 놓았다. 이에 화담은 소옹의 도서나 상수에 관한 이론들을 해설하였고, 이러한 화담의 기수학은 토정에게로 이어졌다. 살펴보면 소강절과 서화담, 이 두 사람의 생애는 물론, 죽을 때의 모습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다, 도학자답게 안심입명의 태도를 취하면서 마지막 한 말까지도 그들은 비슷하였다. 집안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그들의 선대는 비록 덕망은 높았으나 모두 벼슬없이 가난한 살림을 살았으므로 둘은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비바람이나 겨우 가리는 초당에서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면서도 두 사람 모두 진리 탐구에 몰두했으며, 세상의 명리나 벼슬따위에는 둘 다 초연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리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들은 여행을 하였는데 소강절은 황하 유역, 한수 유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둘러보았고, 화담은 속리산, 지리산, 금강산 등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특히 그들의 학문은 궁리를 통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득해 들어가는 공부의 방법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던 것이다. 우주의 원리를 궁리하는 것에 그들은 다같이 일생을 바쳤다. 향년 66세, 소강절은 죽음에 임하여 삶과 죽음이란 모두 보통있는 일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임종을 앞둔 화담 또한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니 심경은 평안하기만 하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6. <동방 견문록>을 기록한 사람은 따로 있다 15~16세기의 지리상의 발견을 촉발한 것 중의 하나가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 견문록>이다.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동방, 특히 지팡구(일본을 가리킴)라는 황금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유럽 사람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 <동방 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 있을 때 만들어지게 된다. 1271년 17세의 마르코 폴로는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동방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동방과 교역하고 있던 상인이었는데 그들은 5년 전 몽고의 쿠빌라이 칸(1215~94)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부탁받았다. 즉 로마 교황에게 말하여 기독교의 교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살마 100명과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무덤에 켜 있는 램프의 기름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코의 아버지와 숙부는 기름은 가지고 갔지만 기독교의 교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 때 쿠빌라이 칸의 눈에 띈 것이 마르코 폴로였다. 그는 긴 여행으로 벌써 20세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칸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마르코 폴로는 이후 장장 17년 동안 궁정에서 일하면서 귀중한 체험을 얻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매우 유능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왔다. 원나라 왕조의 왕녀 코카친이 17세가 되던 해 일 한국의 아르군 칸에게 시집 가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 여행에 마르코 폴로 일행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마치고 나서 고향 베네치아에 잠시 들렀다 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1290년 말 마침내 마르코 폴로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에 도착하고 보니 쿠빌라이 칸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어 굳이 원나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동방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도리어 그는 허풍쟁이로 몰리곤 했다. 그러던 중 베네치아와 이웃 도시인 제네바가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 때 참가한 마르코 폴로는 포로가 되었다. 어둡고 습기찬 감옥 생활의 유일한 낙은 서로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 체험은 그를 감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행히도 당시 감옥에는 루스티케로라는 작가가 갇혀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루스티케로의 손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동방 견문록>에서 마르코 폴로는 허풍쟁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무수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는 우선 수도 칸발리크(지금의 북경)의 도시 계획에 놀랐던 것 같다.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잘 정비되어 있고 도로도 상당히 넓었다고 한다. 또한 수도와 지방을 잇는 교통망의 발달도 그를 놀라게 했다. 거기에 지폐(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지폐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의 유통, 연료로 석탄을 사용하는 것 등에서 중국 여성의 예의바름까지 그가 중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외국인이라면 당연히 흥미를 가질 만한 일이 <동방 견문록>에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그 외에 여성의 전족의 관습, 중국의 연중 행사, 한자의 구조 등에 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도 역시 외국인이었다. 특히 그는 중국어와 한문을 알지 못했다 (그는 몽고 어와 페르시아 어에는 능통했는데 당시 원제국 안에서 이 두 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여행에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중국 고유의 풍습, 문물을 깊게 이해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 이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 밖에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유럽 인들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9. 불타는 헐리우드 정치적으로 기세둥등하고 난폭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대하게 제작, 포장되어 나오는 할리우드영화는 소위 '미국문화'를 대표하면서 세계 각 지역을 침범하고 있다. 극도의 폭력장면과 성범죄로 가득찬 할리우드영화는 사람들의 감성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으며 그 결과 많은 국가의 영화 산업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 그들의 전통문화 현대문명을 참혹 하게 목조르고 있다. 1) {킬러}와 '어린이 보호' 이전의 할리우드영화가 인성의 선량함과 박애, 자유,평등을 선양하여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색정, 폭력, 범죄 등 소위 사회문제와 반항 등으로 가득찬 지금의 할리우드영화는 사람들의 말초신경에 강한 자극을 주어 방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어 인간을 포악하게 만들고 심성을 황폐하게 하고 있다. 1995년 가을, 나는 사회조사를 하기 위해 중국 서부의 비교적 낙후된 지역인 닝샤(寧夏)에 간 적이 있다. 인환(銀川) 시의 사람들은 홍콩영화나 국산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할리우드영화를 좋아하고 있었다. 당시 {트루라이즈} {스피드} 등 할리우드 대작들이 상영되는 극장은 관객들로 만원을 이루었으나 나는 이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레이저디스크 영화관에도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는 것이다. 당시는 중 . 미 간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란이 한창 격렬하게 진행되는 중이어서 래이저디스크 방영은 아직 단속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필자는 친구의 초청으로 {킬러}라는 미국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사회문제를 전문적으로 찍어 미국인을 떨게 만드는 그 유명한 올리버 스톤이었다. '이십 세기 폭력경전'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이 황당하면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밑바닥생활을 하는 어느 청년이 애인의 아버지가 애인을 성희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분을 못 이겨 애인과 함께 그 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동안 그에게 있어 유일한 낙은 바로 살인이었다.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너무나 공허하여 살인을 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존재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살인을 할수록 유명해졌고 점점사람들의 숭배를 받기 시작했다. NBA 농구를 방영하는 TV에 game'이라고 고함치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살인마들을 두고 '?라고 외쳐댔다. 경찰들도 '그들 둘을 잡으면 하루 아침에 유명해지겠군'하며 정신나간 듯이 말하였다. 그들이 잡힌 후 미국인들은 뭔가를 갑자기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리에는 그들을 지지하는 플래카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초상화가 거리 곳곳과 숭배자들의 옷 위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출세욕이 강한 한방송국 기자는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 감옥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시각에 전 미국인들은 Tv 앞에 몰려들었고, 주인공들은 마치 대통령선거연설을 하듯이 군중을 선동하였으며 이에 사람들은 차를 부수고 상점을 불태우는 등 마치 모든 것이 완전히 미쳐 버린 듯했다. 미국은 순식간에 폭력의 현장으로 변해 버렸다. 살인마들은 이 기회를 틈타 기자를 협박하고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인을 경험한 사람들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기자는 갑자기 카메라첸즈를 자신에게 대고 소리켰다. '난 참을 수 없어. 나도 저들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어.' 그리고 그는 살인마들을 도와 도망칠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살인마들은 숲속에서 그들 손에 죽고 싶어하는 기자를 죽여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숭배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영화는 몽타주기법과 흑백과 컬러의 혼용, MTv의 수법들을 대거 동원하여 시각적으로 아주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관람이 끝나자 나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어때? 살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그날 밤 이 말이 생각나 나는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이 영화는 미국에 만연된 폭력범죄의 사회문제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사회에 경종을 울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문화배경을 가진 다른 국민들이 과연 영화에 내포된 뜻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경제가 쇠락의 길을 걷고 폭력, 성범죄, 동성애. 마약 등 복잡한 사회문제에 얽혀 인성이 사라져가는 미국이 다른 나라 국민을 계도할 수 있을까? 고층빌딩의 숲속에서 횡행하는 돈, 살인, 성범죄등으로 가득찬 미국영화가 중국 소년들의 판단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과 같이 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도 필자의 능력을 초월한 것 같다, 상업적 이익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는 할리우드는 이와 같은 영화를점점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 강렬한 시각적 충격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할리우드의 이런 영화들이 미국의 범죄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의 범죄의식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은 더욱 많은 폭력과 범죄에 시달리고 있다. 어쩌면 황색피부를 가진 소년은 이런 영화를 보고 뛰쳐 나와 길가의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고 흡족해 하면서 재빠르게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한 친구가 나의 이런 근심을 비웃으면서 할리우드에는 이런 영화만 있는 게 아니야.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포레스트 검프}등과 같은 영화들이 할리우드 영화세계에서 예술적 중심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있지'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거기에서 나오는 대다수의 영화는 어떤 종류인가?매년 제작되는 몇 천 편의 영화 중 정말 사랑이 넘쳐흐르는 따뜻한 영화, 인간의 선량한 인성을 그린 아름다운 영화는 대체 몇 편이나 되지?'라고 반문하였다. 작년에 수입된 10편의 대작 중 7편이 할리우드영화였다. 그 중 만화영화 {라이온 킹}과 {포레스트 검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폭력,살인, 강도 등을 주내용으로 한 액션영화였다. 이와 같이 개인 영웅?주의를 내세우는 영화들은 흥행수입을 올리기 위해 대량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잔혹한 살인과 대형 폭발장면 등을 연출해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이 영화로 인해 범죄의 충동을 느낄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청소년들도 이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 가득찬, 인간과 인간 사이에 깊이 박힌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고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루쉰(홀迅)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들을 구제합시다.' 2) '불타는 할리우드'-프랑스인들의 분노 할리우드는 어떻게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갈수록 많은 돈을 투자하여 제작하고 또 세계 각지에 보급하여 거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할리우드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보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할리우드영화가 계속해서 살인과 성범죄장면 등을... 할리우드 스타들의 수입에서 대강 짐작 할 수 있다.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연수입은 대략 2천3백만 달러였고 브루스 윌리스는 {다이하드} 한 편의 출연료로 1천5백만달러를 받았다.실베스타 스텔론은 {저지드레드}한 편에서 1천3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고, 데미 무어는 {스트립티즈}에서 1천9백만 달러를 받았다. {늑대와 춤을}으로 유명해진 케빈 코스트너는 이혼할 때 전처에게 1억 달러가 넘는 위자료를 주었다. 이를 볼 때 세계 각지의 스타들이 할리우드로 벌때처럼 몰려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그에 비해 중국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에는 관객이 가뭄에 콩나듯이 있었다. 우리들이 10편의 할리우드 대작을 수입해 즐겁게 주머니돈을 털어 영화관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지구의 다른 쪽 프랑스에서는 항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관세와 무역에 관한 협정을 논하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테이블에서 프랑스인들은 미국을 힐책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가 상업적 이익에 혈안이 되어 무책임한 선동적 수법으로 '문화침략'을 감행하여 프랑스 영화산업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 본국에서도 항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프랑스 및 유럽의 영화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한 배우 제랄드 드 데빠르디유가 직접불을 붙여 거의 백 편에 달하는 할리우드영화 팜플렛을 불태웠다. 물론 그 영화들은 대부분 폭력, 색정, 살인, 마약으로 얼룩진 상업영화였다. 여기에 참가한 한 영화인은 '이는 프랑스와 유럽만의 분노가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시위는 소리없이 느린 속도로 질서를 지키면서도 비장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프랑스대사관에 근무하는 친구였다. 프랑스인은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지만 평소 국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번에 보여준 그들의 자존심은 그 친구로서도 정말 놀라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몇 년 전에 프랑스는 모든 거리에 붙은 영어표지판을 없애 프랑스어의 존엄성을 지키기로 한 나라가 아닌가. 우수한 전통문화를 가진 프랑스가 세계문명에 공헌한 바는 확실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영화는 신문화운동 이후로 낭만, 소박, 박애. 자유. 평등 등의 예술적 소재로 인간성을 계발하고 우수한 문명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영화를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더욱 많은 인간 내면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세계 영화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양질의 예술영화 제작으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은 공리주의와 향락주의로 얼룩진 할리우드영화가 폭력과 색정이라는 저속한 수법으로 영화시장을 점거한 데 대해 통탄하고 있다. 그들은 할리우드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 추구하는 영화를 제작하여 자국 영화산업이 취약해진 데대해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불태운 것은 그들의 신념이었다.그들의 신념이 표방한 것은 영화예술의 존엄이자 프랑스의 존엄이며, 유럽의 존엄이자 문화의 존엄이었다. 그것은 또 인간성의 존엄인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금붕어의 죽음 서울 영희네 집 어항 속에 세 마리의 금붕어가 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이름은 붉은 붕어이고, 나머지 한 마리의 이름은 검은툭눈금붕어였다. 붉은 붕어는 마음이 곱고 서로 형제처럼 잘 지냈으나, 검은툭눈금붕어는 마음이 사납고 욕심이 많아 툭하면 붉은붕어를 못 살게 굴었다. 붉은붕어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검은툭눈붕어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으며, 검은툭눈금붕어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이 좁은 어항에서 혼자 좀 넓고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붉은 붕어 한 마리가 뭘 잘못 먹었는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헤엄을 치다가 수초 사이에 꼬리가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물레방아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이 누워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그만 붉은 붕어 한 마리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수면 위로 배를 뒤집고 떠 있더니 어느새 어항 밑으로 깊게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한 마리 남은 붉은 붕어의 슬픔은 컸다. 좁은 어항 안에서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더니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검은툭눈금붕어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하느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생각에 시종 마음이 즐거웠다. 영희 엄마가 죽은 붉은 붕어를 땅에 묻어 주려고 어항에서 꺼내갈 때는 살며시 돌아서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나머지 한 마리 남은 붉은 붕어마저 하루빨리 죽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보다 많은 먹이를 먹을 수 있고, 보다 맑은 신선한 물과 공기를 마음껏 혼자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머지 한 마리 붉은 붕어 죽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도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잘 지냈다. 검은툭눈금붕어는 속이 상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밤낮 머리를 싸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으나 적당한 때에 기회를 봐서 붉은 붕어 죽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검은툭눈금붕어는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 기회는 왔다. 영희네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모두 영희 이모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는 바로 그날 붉은 붕어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물론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그는 승리감에 취해 하루 종일 노래를 불렀다. 먹이도, 물론 혼자 다 먹고 마셨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흘쯤 지나자 어항의 물이 차차 탁해지기 시작했다. 죽은 붉은 붕어 몸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검은툭눈금붕어는 갈수록 숨쉬기가 곤란해져 갔다. 영희네 식구들이 1주일만에 부산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금붕어 두 마리가 다 함께 죽어 있었다. 집을 비우기 전에 물을 갈아주고 먹이도 알맞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글터 → 이글저글 즐거운 고통의 부르짖음, 암코양이가 수코양이와 교미할 때 내는 소리는 쾌락의 소리가 아니라 고통의 소리이다. 수코양이의 음경이 암코양이의 질에서 빠져나올 때 수코양이가 가진 바늘같은 가시 때문에 암코양이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이 고통이 배란의 원동력이 된다고 한다.바람 피우는 동물들, 곰, 영락새, 침팬지, 샌드 파이퍼 등일부다처제 동물들, 꿩, 산양, 야생마, 굴뚝새, 큰 사슴, 물개 등일처다부제 새들, 남미산 메추라기, 타스마니안 헨즈 등일부일처제 동물들, 제비, 오리, 여우, 독수리, 늑대, 백조 등사하라 사막에서도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사막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들이 있어 모래를 파내면 민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낙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외투를 입고 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자유자재로 몸의 색깔을 바꿀 수 있다. 더욱 신기하게도 목의 각 부분도 동시에 다른 색깔로 바꿀 수 있다. 있는 곳의 색깔에 따라 그대로 바꾸기 때문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농어(sea bass)라는 물고기는 새끼 때는 모두 암컷이지만 5년뒤에은 반 정도가 수컷으로 변한다.돌고래는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를 갖고 있다. 돌고래는 상어를 코로 떠 받아 죽일 수 있고, 꼬치고기를 입으로 한 번 물어 뜯어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돌고래는 결코 인간을 해치지는 않는다.문어 수컷의 생식기는 오른쪽 세 번째 발에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