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8 02:32 【독서편지】: 제 71 호 風磬 조회 수 9,994 추천 수 11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1 호4339.11.28 (10.08)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깨끗한 양심처럼 더없이 폭신한 베개는 이 세상에없다. / 프랑스 속담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난세를 살다간 열녀 -심씨 부인 병자호란 당시 신광철의 아내 심씨 부인이 보여 준 죽음은 열녀의 표상이었다. 심씨 부인은 전란 속에 피어난 한 떨기 꽃이요, 각박하고 응달진 시대를 사는 많은 여성들에게 지어미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모성의 근간이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다. 겨울이었다. 인조 14년 12월 9일. 청나라의 13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으로 밀어 내려오고 있었다. 청의 황제 스스로 침략의 기치를 들고 앞장서 온 이 뜻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 왕조는 대들보가 흔들렸다. 의주, 개성이 떨어지고, 한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되자 국왕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떠났다. 그보다 앞서 왕은 왕자와 빈궁을 강화섬으로 떠나 보내고 적군과의 대전을 숙의 했으나 쉬이 묘책이 서질 않았다. 곧 한성이 떨어졌다. 청군은 한성을 짓밟고 나자 여세를 몰아 남한산성을 에워쌌다. 독안에 든 쥐, 이는 당시의 인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성안에서는 의용병을 모집하여 적군과 맞섰으나 역시 역부족. 화살 한 대 쏘아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아군의 대장들 때문에 병졸들의 사기만 죽었고 나라의 운명을 위기에 처하였다. 군량은 떨어지고 적의 위세는 날로 더해 갔다. 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적의 위세와 함께 추위가 혹심해졌다. 포위망이 좁혀졌다. 그렇게 물러서기만 하기를 40여 일. 그 동안에 인조는 잠자리도 변변치 않은 영하의 추의 속에서 출구를 찾기에 고심했다. 그러나 출구는 아무 곳에도 나 있지 않았다. 왕은 결심했다. 좌우 중신과 성 안 백성들의 통곡 속에 왕은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전쟁은 끝이 났다. 역사상에 일찍이 없었던 이 민족적인 굴욕은 전국에 파급되어 난세를 당한 백성들의 비극을 속출케 했다. 호란 당시의 경기도 평택 땅. 이곳에 사는 선비 신광철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이었다. 고향을 찾았다가 졸지에 호란을 당한 신광철은 처자가 있는 평택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찌한다......" 그러나 역시 묘책은 서지 않고 막막했다. 평택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심씨 부인의 간장은 오그라들기만 했다. 들리느니 흉흉한 소문뿐이었다. 평택 북쪽에 사는 백성들은 소문대로 믿는다면 모두 오랑캐의 죽창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씨 부인은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설마하니 남편의 소식이야 들을 수 있을 것이었고, 남편이 재숫머리 없게 오랑캐의 죽창에 찔려 죽었다 하더라도 혼백이야 그녀 곁으로 오지 않으랴 싶었던 것이다. "얘야, 싸움이 어찌 되어간다든?" "싸움이오?" 심씨 부인은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드는 것이었다. "싸움이랄 것도 없는 모양이에요, 어머니. 여름 장마철에 둑이 터져서 물이 밀려 내리듯이 그렇게 자꾸만 밀리기만 한다는군요." "그럼 남한산성으로 떠난 네 동생이 위험하겠구나." "위험하긴요! 그 애가 얼마나 똘똘한 애라구요." 겉으로는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이 쑥대 밭 같은 전란 속에서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을 듣고 나자 심씨 부인의 어깨가 더한층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 병영 생활을 하는 친정 동생의 안위까지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한 여인의 팔자치고는 너무 기구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한숨 섞인 탄식이 귀밑에서 머문다. "에유, 자식 하나 있는 걸 남한산성인지 북한산성으로 떠나 보내고 이늙은 게 무슨 재미루 산담." 전세는 시시각각으로 긴박해 갔다. 그에 따라 들리는 소문도 점점 무지막지한 것들뿐이었다. "아이고, 오랑캐 놈들이 홍수처럼 밀어 내려오면서 아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욕보인다면서?" "성님, 그 소문이 참말이우?" "참말이구 거짓말이구가 어딨어. 지금 오랑캐 놈들한테 당한 아낙이 마실 앞 공동 우물에 빠져 죽었다구 난린데....." "아이구머니! 현자 어미 지금 한 얘기 사실이우?" "그러엄." "아이구 그럼 난리는 우리 마실 공동 우물두 치른 셈이게?" "누가 아니라우. 온통 이 동네가 그 얘기루 벌집 쑤셔 놓은 것 같다니까." 듣고 있던 심씨 부인의 몸이 무서움으로 떨려 왔다. "오랑캐 놈들은 싸움만 하는게 아니라 그짓들도 하는구먼?" 그러니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그놈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날이면 자기는 갈데 없이 겁탈을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얘야, 동네가 온통 피난을 떠난다구 법석인데 우리는 어쩌면 좋으냐?" 친정 어머니가 또다시 걱정어린 얼굴로 다가와 묻는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글쎄다. 보아하니 신서방은 올 성싶지 않구, 네 동생두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돌아오기는 다 틀린 일이니......." 어머니 송씨는 어서 마을 사람을 따라 피난을 떠나자는 말투였다. 그러나 심씨 부인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돌아올 남편을 버려두고 나만 살겠다구 집을 비운다는 것은 부부의 도리가 아니야.' 어머니의 생각을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무한정으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하루가 지나고 새 날이 밝으면 새로운 소식이 마을을 뒤덮었다. 반가운 소식은 한 없고 모두 불길하고 가슴 아픈 소식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소식이든 다투어 알아내려고 목을 뽑았다. 그 중에서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심씨 부인이 가장 안달이었다. 기다림이란 게 이토록 뼈를 깎는 아픔인 줄을 심씨 부인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 살 남편의 출타가 곧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도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다림이 주는 아픔을 잊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뒤껄 석류나무 밑에 정한수를 떠다 놓고, 남편이 떠나간 북녘 평산 땅 쪽을 바라보고 절부터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제발, 평생 한번 비옵건대 우리집 기둥이신 그이가 살아서 무사히 사립문을 밀치고 돌아 오게만 해 주사이다. 제발 신령님......" 어느새 치성을 드리는 심씨 부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자 신명께 비나이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목 그늘을 적셔도 심씨 부인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치성을 게을리하면 당장 신령님의 노여움을 사서 남편을 해칠 것 같아서였다. 문득 치성을 드리는 심씨의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래도 심씨 부인은 치성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만에 등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예야, 손님이 오셨다........." 하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씨 부인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그제서야 뒤돌아 보았다. 어머니의 말대로 거기에는 이미 단출한 몸단장을 하고 피난을 떠나는 길에 잠시 얼굴을 들여 놓았다는 성씨 부인이 서 있었다. 성씨 부인이란 심씨 부인에게는 형님뻘이 되는 셈이었다. "성님, 어떻게 예까지?" "나좀 보세!" 성씨 부인은 우선 심씨 부인을 저만치 데리고 가서 귀엣말로, "여보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무척 고깝게 들을는지 모르겠으되....." "예, 무슨 말씀이신지 개의치 마시고 해보세요, 성님." "아무래도 난리가 쉬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으니 무슨 딴 궁리를 해야 하지 앉겠어?" "하긴 해야죠." "자네는 이 난리가 쉬이 끝날 것 같은가?" "글쎄요, 지가 무얼 알겠어요. 나라하구 나라가 싸우는 일을....." 심씨 부인은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부인은 당달아 한숨을 내뿜고 나서, "그래서 하는 예긴데, 동생......" "예, 말씀하시래두요." "아재가 평산에 가신 지도 여러 날이 되었구, 남들이 다들 떠나는 피난을 안 갈 수도 없는 게 동생이 속태우는 일 아냐?" "예........" "내가 말을 안해도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남자의 몸도 아니고 젊은 아낙의 몸으로 피난을 떠나는 일도 어려운 일이요, 떠나지 않고 여기서 눌러 앉아 있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 "방정맞은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피난을 떠나지 않고 여기 남아 있다간 십중 팔구 북쪽 오랑캐놈들한테 당할 것이요......" "성님! 그만해 두세요." "아니야, 한마디만 더 하겠어. 기왕지사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엉뚱한 놈들한테 욕을 당하느니보다 나와 같이 홍주로 피난가세. 어린 새끼들 목숨이나 잘 건사해 봐야지." 성씨 부인의 얘기는 간곡한 부탁이라기보다 오히려 명령조로 들렸다. "성님." "말해 보게, 동생." "평산 땅은 오랑캐 떼가 내려오는 길목이라 들었어요. 그런 사지에 남편을 남겨 두고 그이 소식 한 자락 듣지 못한 채 저 한몸만 살겠다구 피난을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이 제 경우라도 아마 떠날 수가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 "글쎄 난 당해 보지 않아서........" "전 피난 안 가겠어요. 오랑캐놈들한테 죽음을 당할지라도 피난은 안 가요." 심씨 부인이 이렇게 나오자 성씨 부인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자네의 마음 내가 모르는 게 아니야.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떠날 수야 없지. 허지만 이 부탁은 꼭 들어줘야겠네." "무슨 부탁인데요?" "신씨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대를 이을 아들....." "그럼! 허니까 자네 아들 하나를 나한테 맡겨서 만일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하세." 성씨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씨 부인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울음 소리로 보아 당장 남편과 아들이 참살을 당하기라도 한듯한 형국이었다. 겨울 바람이 거센 눈발을 몰고 불어온다. 심씨 부인은 얼마를 울었는제 모른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꾸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결국 심씨 부인은 친정 어머니와 아들을 성씨 부인한테 딸려 보내고 이렇게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텅빈 집. 텅빈 마을. 천지가 온통 빈 하늘만 걸린 듯했고,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않는 마을을 심씨 부인은 또다시 정한수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뒤껼 석류나뮤 밑으로 갔다. 이번에는 피난 떠난 아들과 친정 어머니의 무사를 겸해서 칠성님께 축원할 참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이춥고 매서운 서릿발 같은 겨울 날씨에 살 길을 찾아 집을 떠난 자식이랑 우리 친정 어머니를 칠성님이 보살피사, 멀리 평산 고을로 가신 우리 그 양반 생전에 견우 직녀 다정하게 상봉하듯 기꺼운 상봉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녀의 축원은 끝이 없었다. 축원이 효험을 발한 것일까. 모두들 마을을 비우고 떠나간 넓은 마을에 홀연히 심씨 부인의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다. "여보! 살아 계셨구려." 심씨 부인은 그 한 마디 말을 겨우 입 밖으로 내 보내고 남편 무릎 아래 폭삭 엎어져서 어깨를 들먹였다. 아내도 울고, 남편도 울고. 울음소리는 공허하게 텅빈 집에서 울타리 밖으로 번졌다. 그러나 남편 신광철은 금세 울음을 그쳤다. "아니....." 신광철은 눈물을 닦고 둘레를 휘둘러본다. 마땅히 자기의 생환을 기뻐해 주어야 할 사람이 집안에는 있질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건가, 응?" 남편의 눈이 아내의 두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아내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남편 신씨는 부리나케 사립문을 나섰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당신?" 심씨 부인이 뒤쫓자 남편은 거의 달리는 걸음으로 곧장 남으로 향하면서, "아이를 찾아야 해. 그리구 당신 어머니두 찾아야 하구." "큰집 성님이 홍주로 데리고 갔다구 했잖아요." "그래도 난 마음이 놓이질 않아, 홍주로 가서 우리 식구들 얼굴을 대하기 전엔." 오랜만에 만난 부부는 그간의 이야기를 나눠 볼 사이도 없이 길을 나섰다. 그들이 피난길을 재촉하여 충청도 아산 따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산속에서 죽창을 들고 뛰어 나온 무리가 있었다. 몇 안되는 일행은(함께 내려간 피난민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심씨 부인도 그 바람에 남편과 헤어졌다. 여기까지 밀고 내려온 오랑캐를 피해 혼자 숲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심씨 부인은 적병의 동정을 살피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이그머니! 저, 저건 우리 친정 어머니가!" 외손자를 데리고 형님 뒤를 따라 홍주로 향하던 친정 어머니가 지금 가까운 숲속에서 청나라 오랑캐들한테 겁탈을 당하려는 순간이었다. 심씨 부인은 앞 뒤 돌아볼 것도 없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나를! 나를 죽여라 이놈들! 우리 어머니를 죽이지 말고 나를 죽여!" 적병들이 제발로 들어온 호박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심씨 부인이 호락호락 그들의 농락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완강히 버티었다. 어머니를 살려 놓았는데 당하랴 싶었다. 말을 듣지 않으니까 오랑캐들은 심씨 부인을 말에 태우고 달렸다. 달리면서 그들은 심씨 부인의 옷을 교묘히 벗겨서 들판에 내던지는 것이었다. 먼저 심씨 부인의 윗저고리를 벗겼다. 상체가 드러나자 그녀는 앞가슴을 묶인 두 손으로 가렸다. 오랑캐들은 계속 말을 달리면서 그녀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전라의 몸이 되자 그들은 말을 세우고 야욕을 채우려고 하나씩 덤벼들었다. 묶인 손이 자유를 잃자 그녀는 입으로 덤벼드는 사나이를 물어 버렸다. 그러는 그녀의 이빨의 힘은 성난 표범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오랑캐들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이 여인의 매서운 힘을 당할 재주는 없었다. 오랑캐 중의 하나가 보다 못해 화가 나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깨끗한 몸으로 죽어 갔다. 오랑캐들이 물러나고 주위에 흩어졌던 피난민들이 길가로 나오다가 거기 무참하게 죽어 있는 심씨 부인은 어머니를 살리고 대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심씨 부인의 효행이 나라를 감동시킨 셈이었다. 나라에서는 심씨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세웠는데 그문에는, '열녀가선대부 신광철지처 심씨지려'라고 새겨져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정치의 격동 속에서 왕건은 어떻게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나 - 김갑동(원광대 교수)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토지를 욕심내서인가, 반역을 토벌하기 위해서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려 했기에 한 번 싸워 후백제 수천리의 강역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땅을 얻고 나서 원흉을 용서하였으니 인의로 시작하고 이익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은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고도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유계가 평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계는 아버지 견훤을 배반한 신검을 혹평하는 한편 그런 신검을 토벌하였기에 왕건이 쉽게 승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역사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라말의 난세에 나타나 궁예와 견훤을 제치고 통일 대업을 이룩한 것은 그만한 노력과 자질이 있엇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객관적 시각에서 왕건이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했는가 분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생각하고 앞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궁예. 견훤. 왕건의 출현과 ‘후삼국 시대’의 성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통치제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하대가 시작된 이후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 다툼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흥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균정과 시중 김명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이나 사원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였다. 권력이나 문서위조, 고리대 등의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전개되었다. 이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호족)들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종래의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실 출신으로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고 태어나는 날 지붕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있었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계집종이 구출하여 도망하였다.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지금 영월의 흥고사지로 추정)라는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까마귀가 떨어뜨린 나뭇가지가 주발 위에 ‘왕’자 모양을 그렸다. 이에 그는 자부심을 품고 속세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891년에 죽주(경기도 죽산)의 양길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그 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원주, 강릉을 거쳐 철원, 금화 등지를 장악하는 대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급기야는 양길까지도 격파하고 태봉을 건국하였다. 궁예는 집권 초기에는 사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 아들들에게는 신광보살, 청광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른바 미륵신앙을 이용한 전제정치를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용한 정치는 한계가 있었고, 세월이 갈수록 궁예는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었다.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은 물론 자기 부인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의식으로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이러한 파행적이고 흉폭한 행동은 더 이상 그를 왕좌에 앉아 있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왕건이 추대되었다. 견훤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상도 상주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자개는 원래 농민이었다가 뒤에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서는 견훤을 진흥왕의 후손이라 하였고, 같은 책에 인용된 <고기>에서는 광주의 북쪽마을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상주출신인가 광주출신인가. <삼국사기가> 대체로 유교사관에 입각한 합리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였다고 볼 때, 상주태생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북촌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는 지금의 전남. 북 지역에 주요 근거지를 두고 있던 견훤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즉 그가 광주지역의 토착민임을 내세워 그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술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견훤은 체격이 장대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그는 농민봉기로 혼란한 시기에 신라의 군인으로 들어가 서남해안 지역을 지키다가 세력을 키워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였다. 나아가 북쪽으로 진출하여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드디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던중 나주지역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이를 공격, 탈환하기도 하였으며 덕진포에서 궁예휘하의 왕건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후 궁예를 내쫓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개성) 출신이었다. 그의 선대는 본래 고구려 계통으로서, 남하하여 개성지역에 정착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서해를 무대로 한 해상무역에서 부를 축적하여 호족이 되었다. 왕건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숙종이라거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등의 기록은 선대의 해상무역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다가 왕건은 아버지 용건이 896년 궁예에게 귀순함으로써 궁예 휘하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양주 등지를 공략하고 이어 청주, 충주, 괴산, 남양 일대를 점령하는 대활약을 보였다. 또한 금성군(나주)을 공략한 후 해군대장군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중앙에 올라와 수상격인 시중 직책에 있기도 했지만,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위험을 피하려 다시 나주에 내려가 전초기지를 수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철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홍유. 신승겸. 복지겸. 배한경등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과 견훤의 힘겨루기 왕건과 견훤은 초반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공작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다. 또 고려의 영역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920년(태조3)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를 공격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에 왕건이 원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줌으로써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본격적인 대결은 태조 8년 조물군(현재 지명 미상) 전투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그 전 해인 924년 견훤측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고려측에 불리해지자 이듬해인 925년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자 화친을 맺고 서로간에 인질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친은 다음해에 깨지고 말았다. 전년에 인질로 고려에 온 진호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진호가 살해당했다고 의심하여 왕건측 인질인 왕신을 죽이고 고려의 영역이었던 공주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927년 왕건이 용주(예천)을 선제공격함으로써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군사력 면에서 볼 때 견훤 쪽이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늘 살해할 때 왕건은 이를 구원하려다 죽을 위기를 맞기까지 하였다. 대구 부근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친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개국 1등공신이었던 신승겸이 장군 김락 등과 함께 힘껏 싸워 태조를 피신시키고 전사하였던 것이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이두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이며, 현재 대구시 저묘동에 있는 표충사는 신숭겸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왕건은 그 후 명주(강릉)의 호녹 왕순식으로부터 군사적인 도움을 받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929년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안동) 전투에서는 왕건이 크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는 그 곳의 토착세력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의 도움도 크게 작용하였다. 현재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삼태사묘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듬해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귀순할 뜻을 알려오기도 하였다. 이후 견훤은 수군을 동원하여 몇 차례의 공격을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내부의 분열은 견훤 측의 패배를 부채질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글인 금강을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자 그 형 신검. 용검. 양검 등이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나주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곧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눈앞에 다가오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검과의 마지막 결전이었다. 이보다 앞서 왕건은 견훤의 사위로서 승평군(승주)를 지키고 있던 박영규의 내응을 약속받는 한편, 반역한 자식을 죽여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결국 왕건은 군사를 출동시켜 경북 선산군 해평면 일대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은 지형을 살피기 위해 도리사가 있는 산에 올랐는데 이런 연유로 지금 그 산을 ‘태조산’이라 하고 신검과 싸운 들판은 ‘어견평야(견씨를 제압한 들)’ 또는 경상도 말로 ‘어갱이들’이라 부르고 있다. 이 때 고려측에서는 중앙군은 물론 각 지역에서 온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그 병력은 무려 9만 여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검군은 패배하여 황산군(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으로 달아났다. 왕건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하였다. 이로써 왕건은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인 936년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왕건은 승리를 기념하여 연산에 개태사를 세우고, 이 절의 뒷산 이름을 하늘이 도와 주었다 하여 천호산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견훤 자신도 이 전투에 참가하여 신검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왕건은 신검이 자의로 아비를 배반한 것이 아니며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하여 살려주었다. 견훤은 이를 분해하다 병이 나서 황산군의 어느 절간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였다. 지금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에는 견훤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황량하게 자리잡고 있다. 민심, 승패의 갈림길 그렇다면 왕건이 견훤을 이기고 후삼국을 통일한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반대로 견훤이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요인은 무엇인가. 양자의성격이나 정책의 일면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견훤은 앞서 본 대로 군사력 면에서는 왕건보다 우세하였다. 견훤의 군대는 궁예시대에는 물론이고 왕건이 등극한 후 태조 13년(930)까지 패배한 적이 별로 없었다. 또 외교정책에서도 왕건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견훤은 이미900년(효공왕 4)부터 중국의 오월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 925년(태조 8)에는 북중국의 후당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왕건은 926년에 와서야 후당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하여 민심이 떠나게 되자 이러한 외교활동을 이용하여 고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927년 11월 오월국의 사신이 후백제에 와서 고려와의 화친을 권유하는 편지를 전하자 견훤은 이를 고려에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우세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패배한 것은 우선 백성들이 바라는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은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관제의 면에서 볼 때 그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또 다른 요인은 후백제 정권의 내부 분열이었다. 부자나 형제간에 권력을 다투었던 그들의 이기심은 견훤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패배 요인은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신라의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신라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권위이며 상징인 왕을 등에 업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왕건에게 선두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신하로서 왕을 죽인 자기모순이며,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신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민심까지도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신하로서 왕을 시해했다는 비난이 주된 것이었다. 반면 왕건은 신라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같은 그의 정책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예에 대한 반동정책이기도 했다. 왕건은 궁예의 극렬한 반신라정책이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신라에 대한 유화정책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때로는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사지에 뛰어들기까지 하였다.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는 호족들에 대한 정책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또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 지역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29명에 달하는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호족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왕’성을 하사하여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반면에 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여 유사시 호족들을 견제하는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많은 호족들이 귀순해 왔으며 급기야는 경순왕까지도 나라를 들어 바쳤던 것이다. 한편 왕건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였다. 스스로 근검. 절약을 강조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궁예 시절에는 수확의 반 가량을 수탈해 갔지만 그가 즉위하면서는 수확의 10분의1만 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흑창이란 기관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풀어주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여 진정한 민족사적 통일을 이루려는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아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결과 통일신라 때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생각하여 발해국에서 망명해 온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민심을 얻게 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도자로서 가져서는 안 될 생각도 일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죽으면서 남긴 <훈요십조>에서 찾을 수 있다.10조 중 제8조의 내용을 보면 차현 이남 공주강(현재의 금강)밖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그 진위여부와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 정치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태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후삼국기의 역사 상황이 지금의 정치.사회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는 지혜와 덕,용기 등을 갖추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진정한 민심의 향방을 아는 것이다. 말로만 ‘민주’. ‘민의’를 내세워서는 안되고 진정으로 백성들,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사심이나 적대의식을 지양하고 같은 민족을 포용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언니와 나, 딸 둘뿐인 우리에게 사촌 오빠들이 입던 옷을 물려입게 하셨다. 가끔씩 겉옷은 물론 속옷도 물려 입었는데 어린 우리는 별다른 불평없이 엄마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삼학년 신체검사 때의 일이다. 그 날도 여느때처럼 나는 남자 속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남자애들이 복도로 나간 뒤, 나는 웃옷을 벗으려다가 그만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친구들의 속옷 모양이 내가 입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의 속옷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차마 웃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옷을 벗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달래고, 혼내시다가 결국 지친 나머지 맨 나중에 검사 받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나에게 남자 속옷을 입힌 엄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또 아무 잘못없는 담임선생님이 괜히 미웠다. 한쪽에서 울먹이고 있는 내게 먼저 검사를 마친 단짝 미경이가 다가왔다. 나는 미경이에게만 속상한 내 마음을 살짝 털어놓았다. "내가 입고 있는 속옷은 남자거야." 그러자 미경이가 얼른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검사가 끝났으니까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빨리." 미경이 덕분에 나는 반 친구들에게 놀림 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속옷을 선물한다. 속옷을 고를 때마다 미경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은정 님/대전시 서구 삼천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1 - 비판주의 이성 철학자 : 칸트의 비판철학(1724-1804) 그때 세계에서는 1774년: 영국 와트, 증기기관을 실용화 1782년: 중국에서 "사고전서"완성 1785년: 조선 "대전통편"완성 1792년: 프랑스 공화정 수립 Immanuel Kant /1724-1804 1793년 칸트는 자기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의 세 가지 과제의 연구를 끝냈다. 1.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3.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 가라는 것이었다. 이제 앞으로 남은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있을 뿐이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칸트가 자신의 종교철학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끝냈을 때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제 4의 주저를 끝낸 후련함을 친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함은 그의 "순수이성비판"에 해당하는 책이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실천이성비판"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을 계속 발표했다. 그것은 미와 예술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 비판서를 끝낸 뒤 칸트는 오래 미루어두었던 종교철학을 집필했던 것이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정통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식론과 이론철학, 실천철학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철학, 예술철학, 그리고 종교철학 이 네 가지는 갖추어야 철학자다운 철학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 그런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철학의 근본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칸트의 저서는 그 나름대로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모두가 칸트의 비판정신을 기초로 하는 칸트의 철학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중에서 어느 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전공분야에 따라 달라지겠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분야를 택할 것이며, 미학이나 예술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판단력 비판"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예상했던 "인간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탁월하거나 특성있는 과제와 해결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는 어느 것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을 추천할 것이다. 다른 저서들이 그로부터 인출되었고, 철학의 혁명적인 계기를 만든 책은 역시 '제1비판'서인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들은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가고 묻고 싶을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과학자들은 지식과 진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고찰하며, 사물과 사실을 법칙과 원리에 따라 밝히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은 그렇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재료를 제공해줄 뿐이고, 그것을 지식과 진리로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주관이성이라는 것이다. 객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경험과학에 속하나, 철학적 인식은 그 주어진 것들을 의식과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을 진리로 구성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쇳물은 재료에 불과하다. 그 쇳물을 가지고 여러가지 형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제철기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을 지식에 있어서는 이성이라고 본다. 이 이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기능을 갖고 논리적인 판단과 추리를 하게 되며, 그 판단과 추리가 정당하고 타당성있는 과정을 밟을 때 비로소 지식이 탄생된다고 본다. 이때 순수이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경험에 붙잡히거나 심리적 의식작용을 넘어선 선천적인 이성기능을 가리키며, 그 이성의 인식기능은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자기자신을 비판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칸트가 비판은 지식형성의 재판소라고 말한 데도 이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칸트의 철학은 이성철학이며 그 방법은 비판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것을 실천이성에 해당시켰을 때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되며, 미적인 판단력에 적용했을 때 미술 철학이 전개되는 것이다. 종교문제도 이러한 이성의 영역 안에서 취급되지 못하면, 그것은 미신과 잘못된 종교에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모든 철학은 언제나 이성의 기능과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평생에 걸쳐 연구하는 칸트의 철학을 짧은 글로 해설한다는 것은 도에 넘치는 모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은 칸트를 몰라도 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 중, 미학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나 윤리학을 먼저 공부한 뒤에 인식론인 "순수이성비판"을 대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사실 철학은 어려운 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나 헤겔을 비롯한 독일 철학자들때문에 철학은 난해의 학문이라는 평을 받게 된 된 것도 사실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섬유회사 '코오롱'은 '코리아'+'나이롱' 우리나라에 '코오롱' 회사가 있지요. 원래 이 회사는 섬유로부터 시작한 회사입니다. '코오롱'은 '코리아'+'나이롱'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나이롱'이란 말도 원래 '최신'이란 뜻을 가진 관형사인데, 미국 듀폰(Dupon)사의 상표로부터 일정한 섬유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이롱 뽕'이라는 화투의 용어가 생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 부른 장자 장자의 이름은 주이고 자는 자휴이다.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69년경 송나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289년 경에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세치 않으나 <사기>에 의하면 하남성 부근 지역인 몽현에서 옻나무 동산을 관리하는 하급관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생활에 곧 싫증을 내고 청산으로 들어갔다. 짚신을 엮어 호구를 해결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아내가 죽자, 장자는 땅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둘도 없는 친구 혜시가 조문을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친구를 나무랐다. 장자는 혜시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내가 죽자 나도 놀라고 슬펐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듯이 무한히 순환하는 것과 같다. 내 아내는 지금 거대한 방에서 편히 잠자는데 내가 곡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나 천명을 모르는 소행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곡을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는 한 하늘 아래, 흐린 날과 맑은 날이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그렇게 해석했다. 오직 나와 저(해골)만이 알고 있다. 일찍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삶과 죽음을 걱정하랴 삶과 죽음을 즐거워하랴 오직 너와 나만이, 네가 일찍이 죽지 않았고 일찍이 산 적도 없다는 것을 안다. 너는 과연 해골이 된 것을 괴로워하는가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겠는가 그는 죽음이 임박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땅으로 관을삼고, 하늘로 관뚜껑 삼겠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장식품이 되리라. 내 장례는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준비하랴.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5. 다 빈치가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간 이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예의 부활로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는 중세의 종교(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고전 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근대적 문화를 창조하려는 문화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의 구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은 <모나리자>의 작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이다. 1452년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다 빈치는 집에서 법률 공부를 강요했으나 자신에게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더 있다고 생각하고 그림 공부를 고집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모나리자>를 그린 훌륭한 화가만은 아니었다. 다 빈치는 14세 때 조각가로 유명한 화공인 베로키오 밑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화공 길드는 기술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맡았다. 토목, 건축, 회화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역시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배웠다. 또한 당시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만능의 천재`가 동경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젊은 날을 베로키오 밑에서 보낸 다 빈치는 1482년 밀라노로 갔다. 20년간의 밀라노 시대에 그는 군사 기술자로서 종군, 측량과 지도 제작, 기중기의 고안, 운하 건설, 궁정 오락 연출 등 실로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완성된 그림이 <최후의 만찬>이다. 또한 압연기 등 새로운 공작 기계를 발명했고 새의 날개와 공기의 운동을 연구하여 인력을 동력으로 하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설계도도 남겼다. 물론 이러한 기발한 발상들은 실제로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그의 노트에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는 인체 해부도도 남겼는데 이는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인체를 해부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인체의 여러 부위의 구조와 비례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 교회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직접 해부해 보았다. 그는 약 30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묘지에서 시체를 파 내어 촛불로 비추어 가면서 해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세계에 중심에 놓으려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집념은 다 빈치의 시체 해부와 인체 해부도에 깃들어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부록 : 태평양 지역의 동반자 - 찰스 크라트하머(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세계 각지를 순방하게 되었다. 순방의 주요목적은 두 사람의 대통령 경선을 도우려는 것이다. 하나는 러시아의 옐친을 위한 것으로, 옐친을 한껏 칭찬하며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다른 하나는 클린턴 자신을 위한 것으로. 세계의 영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대통령선거 때 Tv의 선거홍보용으로 쓰이게될 것이다, 심지어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을 중동으로 파견해 이스라엘과 레바논 의 이슬람계 정당 간에 휴전을 촉구하게 한 것도 역시 이스라엘의 페레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레바논과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한 페레스는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다. 동기는 어디까지나 동기일 뿐이고 대외정책에서 최후의 입김으로 작용하는 것은 역시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이다. 클린턴의 대외정책에 대해 가장 심한 비평을 하는 사람도 이번 세계 순방에서 클린턴은 커다란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클린턴은 동경에서. 평화시에도 일본은 미군에 군수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초보적 동의를 받아 내었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미국과의 군사협력 가능성에 대한 모색도 하였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활동이 평범하고 사사로운 외교적 활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특히 중국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일본은 끝내 태평양지역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뉴스이다. 우리는 일본의 완벽한 음향기기를 사다 쓰기 위해 일본을 정복하고 우리 생각에 따라 일본을 재건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일본이 2차대전중이나 대전 전에도 모종의 능력 우리는 이것을 군사적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런 일본의 능력을 통제하고 이용하며 그들을 우리 편에 두었던 것이다. 30년 이래 그들은 확실히 우리 편에 서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통제를 받았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평화유지를 위한 조항을 헌법에 써넣었다.하지만 50년 뒤인 지금은 단순한 평화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일본은 강력하다. 중국은 이제 강렬한 빛을 발하며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비록 최강국이지만 이미 지쳤다. 특히 단독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우리 미국은 혈혈단신으로 뛰어 다녔다. 우리는 확실히 일부 작은 동맹국과 함께 전쟁을 한 적은 있으나 일본과 함께 한 적은 없다. 다시 이래서는 안 된다. 냉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미국인들은 세계 경찰의 역할을 해야 하는 부담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의 어떤 침략자에 대해서도. 군사력으로는 단독으로 대항할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심리적으로는 능력이 없다. 아시아에서 어떤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 경우. 이에 대해 일본이 방관적 태도를 취한다면 앞으로 어떤 대통령도 난관을 뛰어넘는 데 필요한 국내의 지지를얻지 못할 것이다. 4월 18일의 '도쿄합동선언'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선언은 당연히 중국에도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미 . 일의 새로운 동맹은 중국을 겨냥한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에 중국은 즉각 항의하였다. 일본과 미국이 적극적인 군사협력 단계로 접어드는 역사적 전환은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몇 차례에 걸친 중국의 강력한 항의가 이의 중요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클린턴의 변신은 일본의 변신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는 않지만 환영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3년 동안 정부는 계속해서 일본을 경제침탈자이자 실질적인 적으로 대해 왔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분명히 해 놓 았다. 일본은 이미 친구이다. 만일 이 지역에 잠재적인 적이 남아 있다면 그는 바로 중국일 뿐이다. 정부가 중국이 잠재적인 적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국이 고도의 민족주의 독재체제 아래서 두 자리 수에 달하는 경제성장률을 보였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중국은 1994년 남중국해에서 다섯 나라가 주권을 주장하는 도서를 겅섬하는 행동을 감행하였지만 우리 정부에 그다지 큰 부담을 주지는 않 았다. 중국이 또 파키스탄과 이란에 핵무기와 화학무기 기술을 판매했을 때도 역시 그랬다. 정부가 비로소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지난 달 대만에 대해 대담한 군사위협을 가할 때였을 것이다. 실탄 군사훈련과 유도탄 발사, 그리고 일부 지역의 해상봉쇄는 미국으로 하여금 더이상 좌시할 수 없게끔 하였다. 정부는 뒷통수를 한 방 먹은 후에야 중국과의 소극적인 교류 및 일본과의 대립정책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캐달았다. 그래서 지금 클린턴은 이와 같은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단순히 대선을 겨냥한 선거전술의 하나에 불과하다. 일본과 마찰없는 우호적인 장면들을 매스컴에 보낼 좋은 기회인 것이다, 외교정책이 경제로부터 지연전략(地緣戰略)으로 바뀐 것이 단지 선거용에 불과한 것인지는 클린턴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클린턴이 연임하게 된 후에도 이 변화는 지속될 것인지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의 연임 후에도 이런 변화가 지속된다면, 클린턴의 모스크바 재3차 정상회담이나 크리스토퍼의 제21차 다마스크 방문 같은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겠지만 클링턴의 이번 동경행은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새로운 대일본정책은 아군과 적군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정책으로 일본은 미국과 함께 태평양 지역을 감시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비록 그다지 큰 힘이 되지는 않지만 동북아의 중요한 것은 21세기에 닥쳐 올 중대한 도전-중국을 제재하기 위한 기초를 세웠다는 점이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전재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시인과 장미 한 젊은 시인이 있었다. 그는 한 여인을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 여인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삶은 오직 그녀를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하루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새로왔다. 풀잎을 스치는 바람도, 어린 나뭇가지에 어리는 햇살도, 푸른 하늘을 나는 작은 새도, 그녀를 사랑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아름다움과 경이의 세계였다.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진정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지 않는 혼자만의 삶이란 정말 무의미한 삶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느 날,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붉은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그 여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청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인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해해 주세요." 눈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천지가 뒤바뀌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끓여 준 커피도 채 들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집 대문을 막 나섰을 때였다. 여자가 창문 밖으로 장미꽃을 획 집어던졌다. "미안해요. 청혼의 의미로 주는 장미꽃은 받을 수가 없어요." 그는 엉겁결에 발 앞에 떨어진 장미꽃을 주웠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후, 그는 장미꽃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실연의 원인이 마치 장미에게 있었던 것처럼 꽃 중에서 장미꽃만은 극도로 싫어하는 병적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는 장미를 볼 때마다 그 여자한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되살아나서 싫었다. 그 여자를 잊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마음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는 장미가 있는 곳은 어디든 피해 다녔다. 그러나 장미는 어디에든 있었다. 꽃집이나 이웃집 담벼락뿐 아니라 무심코 들른 레스토랑의 탁자 위에도 장미꽃은 피어 있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장미가 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의 소원은 이 세상의 모든 장미를 없애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해도 장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장미의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언어학자를 찾아갔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장미라는 이름을 바꿀 수 있을까요?" 늙은 언어학자가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언중에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언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건 언중들의 마음입니다. 학자인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언어학자의 집을 나오면서 자신의 일생을 장미의 이름을 바꾸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이름은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주장해 나갔다. 그러면서 열심히 장미의 부정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를 써서 발표했다. 언중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자신이 쓴 시를 들려주었다. 어느덧 많은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젊은 시인이 늙은 시인이 되었고, 마침내 사람들은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장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다들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이 바뀌어도 단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것은 장미의 향기였다. 글터 → 이글저글 말은 서서 잠잘 수 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할 때 잠을 자고 있는 말 위에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한다.코끼리 음경의 무게는 약 27킬로그램이나 되고 발기했을때 길이가 1.5미터나 된다. 코끼리는 보통 다른 동물들처럼 뒤로 교접하지만 침팬지, 오랑우탕, 고릴라들은 사람처럼 정상 체위를 갖는다.동물은 강간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암컷이 자진해서 몸을 허락할 때만 교미가 이루어진다.호랑이의 생식, 암호랑이는 특수한 소리로 수컷을 유혹한다. 수컷이 접근하면 암컷은 부드럽게 몸을 비비며 성교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 수컷이 올라타서 교접하는데 절정에 도달하면 암컷의 목을 조르며 큰 고함을 지른다. 이 교접은 3분동안, 하루에 20번 이상 3주동안 계속된다.자위하는 동물로는 고슴도치, 코끼리, 사슴, 사자, 원숭이, 멧돼지, 돌고래, 노루 등이 있다.고래의 음경은 2.7미터나 되고 직경이 30센티나 된다. 코끼리는 1.5미터, 해마는 61센티나 길며, 코뿔소는 61센티, 돼지는 43센티, 호랑이는 28센티, 침팬지는 8센티이다. 또 수탉은 직경 2밀리미터밖에 안되는 동물 중 가장 작은 옥근을 가지고 있다.공룡(dinosaur)의 수컷은 남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1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08Nov by 風文 2024/11/08 by 風文 Views 412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06Nov by 風文 2024/11/06 by 風文 Views 348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04Nov by 風文 2024/11/04 by 風文 Views 373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02Nov by 風文 2024/11/02 by 風文 Views 384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8Oct by 風文 2024/10/28 by 風文 Views 343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5Oct by 風文 2024/10/25 by 風文 Views 548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4Oct by 風文 2024/10/24 by 風文 Views 32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3Oct by 風文 2024/10/23 by 風文 Views 940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2Oct by 風文 2024/10/22 by 風文 Views 801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1Oct by 風文 2024/10/21 by 風文 Views 793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18Oct by 風文 2024/10/18 by 風文 Views 802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17Oct by 風文 2024/10/17 by 風文 Views 513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16Oct by 風文 2024/10/16 by 風文 Views 504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15Oct by 風文 2024/10/15 by 風文 Views 607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14Oct by 風文 2024/10/14 by 風文 Views 406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13Oct by 風文 2024/10/13 by 風文 Views 435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12Oct by 風文 2024/10/12 by 風文 Views 456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10Oct by 風文 2024/10/10 by 風文 Views 404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09Oct by 風文 2024/10/09 by 風文 Views 353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08Oct by 風文 2024/10/08 by 風文 Views 33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07Oct by 風文 2024/10/07 by 風文 Views 304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06Oct by 風文 2024/10/06 by 風文 Views 364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71 호4339.11.28 (10.08)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깨끗한 양심처럼 더없이 폭신한 베개는 이 세상에없다. / 프랑스 속담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난세를 살다간 열녀 -심씨 부인 병자호란 당시 신광철의 아내 심씨 부인이 보여 준 죽음은 열녀의 표상이었다. 심씨 부인은 전란 속에 피어난 한 떨기 꽃이요, 각박하고 응달진 시대를 사는 많은 여성들에게 지어미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모성의 근간이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다. 겨울이었다. 인조 14년 12월 9일. 청나라의 13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으로 밀어 내려오고 있었다. 청의 황제 스스로 침략의 기치를 들고 앞장서 온 이 뜻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 왕조는 대들보가 흔들렸다. 의주, 개성이 떨어지고, 한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되자 국왕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떠났다. 그보다 앞서 왕은 왕자와 빈궁을 강화섬으로 떠나 보내고 적군과의 대전을 숙의 했으나 쉬이 묘책이 서질 않았다. 곧 한성이 떨어졌다. 청군은 한성을 짓밟고 나자 여세를 몰아 남한산성을 에워쌌다. 독안에 든 쥐, 이는 당시의 인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성안에서는 의용병을 모집하여 적군과 맞섰으나 역시 역부족. 화살 한 대 쏘아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아군의 대장들 때문에 병졸들의 사기만 죽었고 나라의 운명을 위기에 처하였다. 군량은 떨어지고 적의 위세는 날로 더해 갔다. 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적의 위세와 함께 추위가 혹심해졌다. 포위망이 좁혀졌다. 그렇게 물러서기만 하기를 40여 일. 그 동안에 인조는 잠자리도 변변치 않은 영하의 추의 속에서 출구를 찾기에 고심했다. 그러나 출구는 아무 곳에도 나 있지 않았다. 왕은 결심했다. 좌우 중신과 성 안 백성들의 통곡 속에 왕은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전쟁은 끝이 났다. 역사상에 일찍이 없었던 이 민족적인 굴욕은 전국에 파급되어 난세를 당한 백성들의 비극을 속출케 했다. 호란 당시의 경기도 평택 땅. 이곳에 사는 선비 신광철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이었다. 고향을 찾았다가 졸지에 호란을 당한 신광철은 처자가 있는 평택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찌한다......" 그러나 역시 묘책은 서지 않고 막막했다. 평택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심씨 부인의 간장은 오그라들기만 했다. 들리느니 흉흉한 소문뿐이었다. 평택 북쪽에 사는 백성들은 소문대로 믿는다면 모두 오랑캐의 죽창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씨 부인은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설마하니 남편의 소식이야 들을 수 있을 것이었고, 남편이 재숫머리 없게 오랑캐의 죽창에 찔려 죽었다 하더라도 혼백이야 그녀 곁으로 오지 않으랴 싶었던 것이다. "얘야, 싸움이 어찌 되어간다든?" "싸움이오?" 심씨 부인은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드는 것이었다. "싸움이랄 것도 없는 모양이에요, 어머니. 여름 장마철에 둑이 터져서 물이 밀려 내리듯이 그렇게 자꾸만 밀리기만 한다는군요." "그럼 남한산성으로 떠난 네 동생이 위험하겠구나." "위험하긴요! 그 애가 얼마나 똘똘한 애라구요." 겉으로는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이 쑥대 밭 같은 전란 속에서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을 듣고 나자 심씨 부인의 어깨가 더한층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 병영 생활을 하는 친정 동생의 안위까지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한 여인의 팔자치고는 너무 기구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한숨 섞인 탄식이 귀밑에서 머문다. "에유, 자식 하나 있는 걸 남한산성인지 북한산성으로 떠나 보내고 이늙은 게 무슨 재미루 산담." 전세는 시시각각으로 긴박해 갔다. 그에 따라 들리는 소문도 점점 무지막지한 것들뿐이었다. "아이고, 오랑캐 놈들이 홍수처럼 밀어 내려오면서 아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욕보인다면서?" "성님, 그 소문이 참말이우?" "참말이구 거짓말이구가 어딨어. 지금 오랑캐 놈들한테 당한 아낙이 마실 앞 공동 우물에 빠져 죽었다구 난린데....." "아이구머니! 현자 어미 지금 한 얘기 사실이우?" "그러엄." "아이구 그럼 난리는 우리 마실 공동 우물두 치른 셈이게?" "누가 아니라우. 온통 이 동네가 그 얘기루 벌집 쑤셔 놓은 것 같다니까." 듣고 있던 심씨 부인의 몸이 무서움으로 떨려 왔다. "오랑캐 놈들은 싸움만 하는게 아니라 그짓들도 하는구먼?" 그러니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그놈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날이면 자기는 갈데 없이 겁탈을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얘야, 동네가 온통 피난을 떠난다구 법석인데 우리는 어쩌면 좋으냐?" 친정 어머니가 또다시 걱정어린 얼굴로 다가와 묻는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글쎄다. 보아하니 신서방은 올 성싶지 않구, 네 동생두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돌아오기는 다 틀린 일이니......." 어머니 송씨는 어서 마을 사람을 따라 피난을 떠나자는 말투였다. 그러나 심씨 부인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돌아올 남편을 버려두고 나만 살겠다구 집을 비운다는 것은 부부의 도리가 아니야.' 어머니의 생각을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무한정으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하루가 지나고 새 날이 밝으면 새로운 소식이 마을을 뒤덮었다. 반가운 소식은 한 없고 모두 불길하고 가슴 아픈 소식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소식이든 다투어 알아내려고 목을 뽑았다. 그 중에서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심씨 부인이 가장 안달이었다. 기다림이란 게 이토록 뼈를 깎는 아픔인 줄을 심씨 부인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 살 남편의 출타가 곧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도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다림이 주는 아픔을 잊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뒤껄 석류나무 밑에 정한수를 떠다 놓고, 남편이 떠나간 북녘 평산 땅 쪽을 바라보고 절부터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제발, 평생 한번 비옵건대 우리집 기둥이신 그이가 살아서 무사히 사립문을 밀치고 돌아 오게만 해 주사이다. 제발 신령님......" 어느새 치성을 드리는 심씨 부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자 신명께 비나이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목 그늘을 적셔도 심씨 부인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치성을 게을리하면 당장 신령님의 노여움을 사서 남편을 해칠 것 같아서였다. 문득 치성을 드리는 심씨의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래도 심씨 부인은 치성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만에 등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예야, 손님이 오셨다........." 하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씨 부인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그제서야 뒤돌아 보았다. 어머니의 말대로 거기에는 이미 단출한 몸단장을 하고 피난을 떠나는 길에 잠시 얼굴을 들여 놓았다는 성씨 부인이 서 있었다. 성씨 부인이란 심씨 부인에게는 형님뻘이 되는 셈이었다. "성님, 어떻게 예까지?" "나좀 보세!" 성씨 부인은 우선 심씨 부인을 저만치 데리고 가서 귀엣말로, "여보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무척 고깝게 들을는지 모르겠으되....." "예, 무슨 말씀이신지 개의치 마시고 해보세요, 성님." "아무래도 난리가 쉬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으니 무슨 딴 궁리를 해야 하지 앉겠어?" "하긴 해야죠." "자네는 이 난리가 쉬이 끝날 것 같은가?" "글쎄요, 지가 무얼 알겠어요. 나라하구 나라가 싸우는 일을....." 심씨 부인은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부인은 당달아 한숨을 내뿜고 나서, "그래서 하는 예긴데, 동생......" "예, 말씀하시래두요." "아재가 평산에 가신 지도 여러 날이 되었구, 남들이 다들 떠나는 피난을 안 갈 수도 없는 게 동생이 속태우는 일 아냐?" "예........" "내가 말을 안해도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남자의 몸도 아니고 젊은 아낙의 몸으로 피난을 떠나는 일도 어려운 일이요, 떠나지 않고 여기서 눌러 앉아 있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 "방정맞은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피난을 떠나지 않고 여기 남아 있다간 십중 팔구 북쪽 오랑캐놈들한테 당할 것이요......" "성님! 그만해 두세요." "아니야, 한마디만 더 하겠어. 기왕지사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엉뚱한 놈들한테 욕을 당하느니보다 나와 같이 홍주로 피난가세. 어린 새끼들 목숨이나 잘 건사해 봐야지." 성씨 부인의 얘기는 간곡한 부탁이라기보다 오히려 명령조로 들렸다. "성님." "말해 보게, 동생." "평산 땅은 오랑캐 떼가 내려오는 길목이라 들었어요. 그런 사지에 남편을 남겨 두고 그이 소식 한 자락 듣지 못한 채 저 한몸만 살겠다구 피난을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이 제 경우라도 아마 떠날 수가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 "글쎄 난 당해 보지 않아서........" "전 피난 안 가겠어요. 오랑캐놈들한테 죽음을 당할지라도 피난은 안 가요." 심씨 부인이 이렇게 나오자 성씨 부인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자네의 마음 내가 모르는 게 아니야.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떠날 수야 없지. 허지만 이 부탁은 꼭 들어줘야겠네." "무슨 부탁인데요?" "신씨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대를 이을 아들....." "그럼! 허니까 자네 아들 하나를 나한테 맡겨서 만일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하세." 성씨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씨 부인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울음 소리로 보아 당장 남편과 아들이 참살을 당하기라도 한듯한 형국이었다. 겨울 바람이 거센 눈발을 몰고 불어온다. 심씨 부인은 얼마를 울었는제 모른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꾸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결국 심씨 부인은 친정 어머니와 아들을 성씨 부인한테 딸려 보내고 이렇게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텅빈 집. 텅빈 마을. 천지가 온통 빈 하늘만 걸린 듯했고,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않는 마을을 심씨 부인은 또다시 정한수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뒤껼 석류나뮤 밑으로 갔다. 이번에는 피난 떠난 아들과 친정 어머니의 무사를 겸해서 칠성님께 축원할 참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이춥고 매서운 서릿발 같은 겨울 날씨에 살 길을 찾아 집을 떠난 자식이랑 우리 친정 어머니를 칠성님이 보살피사, 멀리 평산 고을로 가신 우리 그 양반 생전에 견우 직녀 다정하게 상봉하듯 기꺼운 상봉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녀의 축원은 끝이 없었다. 축원이 효험을 발한 것일까. 모두들 마을을 비우고 떠나간 넓은 마을에 홀연히 심씨 부인의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다. "여보! 살아 계셨구려." 심씨 부인은 그 한 마디 말을 겨우 입 밖으로 내 보내고 남편 무릎 아래 폭삭 엎어져서 어깨를 들먹였다. 아내도 울고, 남편도 울고. 울음소리는 공허하게 텅빈 집에서 울타리 밖으로 번졌다. 그러나 남편 신광철은 금세 울음을 그쳤다. "아니....." 신광철은 눈물을 닦고 둘레를 휘둘러본다. 마땅히 자기의 생환을 기뻐해 주어야 할 사람이 집안에는 있질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건가, 응?" 남편의 눈이 아내의 두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아내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남편 신씨는 부리나케 사립문을 나섰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당신?" 심씨 부인이 뒤쫓자 남편은 거의 달리는 걸음으로 곧장 남으로 향하면서, "아이를 찾아야 해. 그리구 당신 어머니두 찾아야 하구." "큰집 성님이 홍주로 데리고 갔다구 했잖아요." "그래도 난 마음이 놓이질 않아, 홍주로 가서 우리 식구들 얼굴을 대하기 전엔." 오랜만에 만난 부부는 그간의 이야기를 나눠 볼 사이도 없이 길을 나섰다. 그들이 피난길을 재촉하여 충청도 아산 따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산속에서 죽창을 들고 뛰어 나온 무리가 있었다. 몇 안되는 일행은(함께 내려간 피난민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심씨 부인도 그 바람에 남편과 헤어졌다. 여기까지 밀고 내려온 오랑캐를 피해 혼자 숲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심씨 부인은 적병의 동정을 살피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이그머니! 저, 저건 우리 친정 어머니가!" 외손자를 데리고 형님 뒤를 따라 홍주로 향하던 친정 어머니가 지금 가까운 숲속에서 청나라 오랑캐들한테 겁탈을 당하려는 순간이었다. 심씨 부인은 앞 뒤 돌아볼 것도 없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나를! 나를 죽여라 이놈들! 우리 어머니를 죽이지 말고 나를 죽여!" 적병들이 제발로 들어온 호박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심씨 부인이 호락호락 그들의 농락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완강히 버티었다. 어머니를 살려 놓았는데 당하랴 싶었다. 말을 듣지 않으니까 오랑캐들은 심씨 부인을 말에 태우고 달렸다. 달리면서 그들은 심씨 부인의 옷을 교묘히 벗겨서 들판에 내던지는 것이었다. 먼저 심씨 부인의 윗저고리를 벗겼다. 상체가 드러나자 그녀는 앞가슴을 묶인 두 손으로 가렸다. 오랑캐들은 계속 말을 달리면서 그녀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전라의 몸이 되자 그들은 말을 세우고 야욕을 채우려고 하나씩 덤벼들었다. 묶인 손이 자유를 잃자 그녀는 입으로 덤벼드는 사나이를 물어 버렸다. 그러는 그녀의 이빨의 힘은 성난 표범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오랑캐들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이 여인의 매서운 힘을 당할 재주는 없었다. 오랑캐 중의 하나가 보다 못해 화가 나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깨끗한 몸으로 죽어 갔다. 오랑캐들이 물러나고 주위에 흩어졌던 피난민들이 길가로 나오다가 거기 무참하게 죽어 있는 심씨 부인은 어머니를 살리고 대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심씨 부인의 효행이 나라를 감동시킨 셈이었다. 나라에서는 심씨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세웠는데 그문에는, '열녀가선대부 신광철지처 심씨지려'라고 새겨져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정치의 격동 속에서 왕건은 어떻게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나 - 김갑동(원광대 교수)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토지를 욕심내서인가, 반역을 토벌하기 위해서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려 했기에 한 번 싸워 후백제 수천리의 강역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땅을 얻고 나서 원흉을 용서하였으니 인의로 시작하고 이익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은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고도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유계가 평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계는 아버지 견훤을 배반한 신검을 혹평하는 한편 그런 신검을 토벌하였기에 왕건이 쉽게 승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역사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라말의 난세에 나타나 궁예와 견훤을 제치고 통일 대업을 이룩한 것은 그만한 노력과 자질이 있엇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객관적 시각에서 왕건이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했는가 분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생각하고 앞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궁예. 견훤. 왕건의 출현과 ‘후삼국 시대’의 성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통치제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하대가 시작된 이후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 다툼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흥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균정과 시중 김명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이나 사원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였다. 권력이나 문서위조, 고리대 등의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전개되었다. 이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호족)들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종래의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실 출신으로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고 태어나는 날 지붕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있었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계집종이 구출하여 도망하였다.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지금 영월의 흥고사지로 추정)라는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까마귀가 떨어뜨린 나뭇가지가 주발 위에 ‘왕’자 모양을 그렸다. 이에 그는 자부심을 품고 속세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891년에 죽주(경기도 죽산)의 양길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그 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원주, 강릉을 거쳐 철원, 금화 등지를 장악하는 대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급기야는 양길까지도 격파하고 태봉을 건국하였다. 궁예는 집권 초기에는 사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 아들들에게는 신광보살, 청광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른바 미륵신앙을 이용한 전제정치를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용한 정치는 한계가 있었고, 세월이 갈수록 궁예는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었다.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은 물론 자기 부인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의식으로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이러한 파행적이고 흉폭한 행동은 더 이상 그를 왕좌에 앉아 있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왕건이 추대되었다. 견훤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상도 상주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자개는 원래 농민이었다가 뒤에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서는 견훤을 진흥왕의 후손이라 하였고, 같은 책에 인용된 <고기>에서는 광주의 북쪽마을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상주출신인가 광주출신인가. <삼국사기가> 대체로 유교사관에 입각한 합리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였다고 볼 때, 상주태생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북촌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는 지금의 전남. 북 지역에 주요 근거지를 두고 있던 견훤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즉 그가 광주지역의 토착민임을 내세워 그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술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견훤은 체격이 장대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그는 농민봉기로 혼란한 시기에 신라의 군인으로 들어가 서남해안 지역을 지키다가 세력을 키워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였다. 나아가 북쪽으로 진출하여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드디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던중 나주지역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이를 공격, 탈환하기도 하였으며 덕진포에서 궁예휘하의 왕건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후 궁예를 내쫓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개성) 출신이었다. 그의 선대는 본래 고구려 계통으로서, 남하하여 개성지역에 정착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서해를 무대로 한 해상무역에서 부를 축적하여 호족이 되었다. 왕건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숙종이라거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등의 기록은 선대의 해상무역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다가 왕건은 아버지 용건이 896년 궁예에게 귀순함으로써 궁예 휘하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양주 등지를 공략하고 이어 청주, 충주, 괴산, 남양 일대를 점령하는 대활약을 보였다. 또한 금성군(나주)을 공략한 후 해군대장군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중앙에 올라와 수상격인 시중 직책에 있기도 했지만,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위험을 피하려 다시 나주에 내려가 전초기지를 수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철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홍유. 신승겸. 복지겸. 배한경등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과 견훤의 힘겨루기 왕건과 견훤은 초반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공작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다. 또 고려의 영역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920년(태조3)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를 공격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에 왕건이 원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줌으로써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본격적인 대결은 태조 8년 조물군(현재 지명 미상) 전투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그 전 해인 924년 견훤측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고려측에 불리해지자 이듬해인 925년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자 화친을 맺고 서로간에 인질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친은 다음해에 깨지고 말았다. 전년에 인질로 고려에 온 진호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진호가 살해당했다고 의심하여 왕건측 인질인 왕신을 죽이고 고려의 영역이었던 공주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927년 왕건이 용주(예천)을 선제공격함으로써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군사력 면에서 볼 때 견훤 쪽이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늘 살해할 때 왕건은 이를 구원하려다 죽을 위기를 맞기까지 하였다. 대구 부근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친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개국 1등공신이었던 신승겸이 장군 김락 등과 함께 힘껏 싸워 태조를 피신시키고 전사하였던 것이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이두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이며, 현재 대구시 저묘동에 있는 표충사는 신숭겸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왕건은 그 후 명주(강릉)의 호녹 왕순식으로부터 군사적인 도움을 받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929년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안동) 전투에서는 왕건이 크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는 그 곳의 토착세력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의 도움도 크게 작용하였다. 현재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삼태사묘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듬해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귀순할 뜻을 알려오기도 하였다. 이후 견훤은 수군을 동원하여 몇 차례의 공격을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내부의 분열은 견훤 측의 패배를 부채질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글인 금강을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자 그 형 신검. 용검. 양검 등이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나주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곧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눈앞에 다가오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검과의 마지막 결전이었다. 이보다 앞서 왕건은 견훤의 사위로서 승평군(승주)를 지키고 있던 박영규의 내응을 약속받는 한편, 반역한 자식을 죽여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결국 왕건은 군사를 출동시켜 경북 선산군 해평면 일대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은 지형을 살피기 위해 도리사가 있는 산에 올랐는데 이런 연유로 지금 그 산을 ‘태조산’이라 하고 신검과 싸운 들판은 ‘어견평야(견씨를 제압한 들)’ 또는 경상도 말로 ‘어갱이들’이라 부르고 있다. 이 때 고려측에서는 중앙군은 물론 각 지역에서 온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그 병력은 무려 9만 여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검군은 패배하여 황산군(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으로 달아났다. 왕건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하였다. 이로써 왕건은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인 936년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왕건은 승리를 기념하여 연산에 개태사를 세우고, 이 절의 뒷산 이름을 하늘이 도와 주었다 하여 천호산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견훤 자신도 이 전투에 참가하여 신검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왕건은 신검이 자의로 아비를 배반한 것이 아니며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하여 살려주었다. 견훤은 이를 분해하다 병이 나서 황산군의 어느 절간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였다. 지금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에는 견훤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황량하게 자리잡고 있다. 민심, 승패의 갈림길 그렇다면 왕건이 견훤을 이기고 후삼국을 통일한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반대로 견훤이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요인은 무엇인가. 양자의성격이나 정책의 일면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견훤은 앞서 본 대로 군사력 면에서는 왕건보다 우세하였다. 견훤의 군대는 궁예시대에는 물론이고 왕건이 등극한 후 태조 13년(930)까지 패배한 적이 별로 없었다. 또 외교정책에서도 왕건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견훤은 이미900년(효공왕 4)부터 중국의 오월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 925년(태조 8)에는 북중국의 후당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왕건은 926년에 와서야 후당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하여 민심이 떠나게 되자 이러한 외교활동을 이용하여 고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927년 11월 오월국의 사신이 후백제에 와서 고려와의 화친을 권유하는 편지를 전하자 견훤은 이를 고려에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우세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패배한 것은 우선 백성들이 바라는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은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관제의 면에서 볼 때 그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또 다른 요인은 후백제 정권의 내부 분열이었다. 부자나 형제간에 권력을 다투었던 그들의 이기심은 견훤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패배 요인은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신라의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신라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권위이며 상징인 왕을 등에 업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왕건에게 선두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신하로서 왕을 죽인 자기모순이며,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신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민심까지도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신하로서 왕을 시해했다는 비난이 주된 것이었다. 반면 왕건은 신라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같은 그의 정책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예에 대한 반동정책이기도 했다. 왕건은 궁예의 극렬한 반신라정책이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신라에 대한 유화정책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때로는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사지에 뛰어들기까지 하였다.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는 호족들에 대한 정책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또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 지역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29명에 달하는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호족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왕’성을 하사하여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반면에 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여 유사시 호족들을 견제하는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많은 호족들이 귀순해 왔으며 급기야는 경순왕까지도 나라를 들어 바쳤던 것이다. 한편 왕건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였다. 스스로 근검. 절약을 강조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궁예 시절에는 수확의 반 가량을 수탈해 갔지만 그가 즉위하면서는 수확의 10분의1만 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흑창이란 기관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풀어주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여 진정한 민족사적 통일을 이루려는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아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결과 통일신라 때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생각하여 발해국에서 망명해 온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민심을 얻게 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도자로서 가져서는 안 될 생각도 일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죽으면서 남긴 <훈요십조>에서 찾을 수 있다.10조 중 제8조의 내용을 보면 차현 이남 공주강(현재의 금강)밖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그 진위여부와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 정치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태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후삼국기의 역사 상황이 지금의 정치.사회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는 지혜와 덕,용기 등을 갖추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진정한 민심의 향방을 아는 것이다. 말로만 ‘민주’. ‘민의’를 내세워서는 안되고 진정으로 백성들,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사심이나 적대의식을 지양하고 같은 민족을 포용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언니와 나, 딸 둘뿐인 우리에게 사촌 오빠들이 입던 옷을 물려입게 하셨다. 가끔씩 겉옷은 물론 속옷도 물려 입었는데 어린 우리는 별다른 불평없이 엄마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삼학년 신체검사 때의 일이다. 그 날도 여느때처럼 나는 남자 속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남자애들이 복도로 나간 뒤, 나는 웃옷을 벗으려다가 그만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친구들의 속옷 모양이 내가 입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의 속옷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차마 웃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옷을 벗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달래고, 혼내시다가 결국 지친 나머지 맨 나중에 검사 받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나에게 남자 속옷을 입힌 엄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또 아무 잘못없는 담임선생님이 괜히 미웠다. 한쪽에서 울먹이고 있는 내게 먼저 검사를 마친 단짝 미경이가 다가왔다. 나는 미경이에게만 속상한 내 마음을 살짝 털어놓았다. "내가 입고 있는 속옷은 남자거야." 그러자 미경이가 얼른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검사가 끝났으니까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빨리." 미경이 덕분에 나는 반 친구들에게 놀림 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속옷을 선물한다. 속옷을 고를 때마다 미경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은정 님/대전시 서구 삼천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1 - 비판주의 이성 철학자 : 칸트의 비판철학(1724-1804) 그때 세계에서는 1774년: 영국 와트, 증기기관을 실용화 1782년: 중국에서 "사고전서"완성 1785년: 조선 "대전통편"완성 1792년: 프랑스 공화정 수립 Immanuel Kant /1724-1804 1793년 칸트는 자기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의 세 가지 과제의 연구를 끝냈다. 1.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3.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 가라는 것이었다. 이제 앞으로 남은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있을 뿐이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칸트가 자신의 종교철학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끝냈을 때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제 4의 주저를 끝낸 후련함을 친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함은 그의 "순수이성비판"에 해당하는 책이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실천이성비판"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을 계속 발표했다. 그것은 미와 예술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 비판서를 끝낸 뒤 칸트는 오래 미루어두었던 종교철학을 집필했던 것이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정통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식론과 이론철학, 실천철학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철학, 예술철학, 그리고 종교철학 이 네 가지는 갖추어야 철학자다운 철학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 그런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철학의 근본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칸트의 저서는 그 나름대로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모두가 칸트의 비판정신을 기초로 하는 칸트의 철학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중에서 어느 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전공분야에 따라 달라지겠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분야를 택할 것이며, 미학이나 예술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판단력 비판"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예상했던 "인간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탁월하거나 특성있는 과제와 해결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는 어느 것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을 추천할 것이다. 다른 저서들이 그로부터 인출되었고, 철학의 혁명적인 계기를 만든 책은 역시 '제1비판'서인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들은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가고 묻고 싶을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과학자들은 지식과 진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고찰하며, 사물과 사실을 법칙과 원리에 따라 밝히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은 그렇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재료를 제공해줄 뿐이고, 그것을 지식과 진리로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주관이성이라는 것이다. 객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경험과학에 속하나, 철학적 인식은 그 주어진 것들을 의식과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을 진리로 구성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쇳물은 재료에 불과하다. 그 쇳물을 가지고 여러가지 형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제철기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을 지식에 있어서는 이성이라고 본다. 이 이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기능을 갖고 논리적인 판단과 추리를 하게 되며, 그 판단과 추리가 정당하고 타당성있는 과정을 밟을 때 비로소 지식이 탄생된다고 본다. 이때 순수이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경험에 붙잡히거나 심리적 의식작용을 넘어선 선천적인 이성기능을 가리키며, 그 이성의 인식기능은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자기자신을 비판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칸트가 비판은 지식형성의 재판소라고 말한 데도 이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칸트의 철학은 이성철학이며 그 방법은 비판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것을 실천이성에 해당시켰을 때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되며, 미적인 판단력에 적용했을 때 미술 철학이 전개되는 것이다. 종교문제도 이러한 이성의 영역 안에서 취급되지 못하면, 그것은 미신과 잘못된 종교에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모든 철학은 언제나 이성의 기능과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평생에 걸쳐 연구하는 칸트의 철학을 짧은 글로 해설한다는 것은 도에 넘치는 모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은 칸트를 몰라도 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 중, 미학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나 윤리학을 먼저 공부한 뒤에 인식론인 "순수이성비판"을 대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사실 철학은 어려운 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나 헤겔을 비롯한 독일 철학자들때문에 철학은 난해의 학문이라는 평을 받게 된 된 것도 사실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섬유회사 '코오롱'은 '코리아'+'나이롱' 우리나라에 '코오롱' 회사가 있지요. 원래 이 회사는 섬유로부터 시작한 회사입니다. '코오롱'은 '코리아'+'나이롱'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나이롱'이란 말도 원래 '최신'이란 뜻을 가진 관형사인데, 미국 듀폰(Dupon)사의 상표로부터 일정한 섬유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이롱 뽕'이라는 화투의 용어가 생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 부른 장자 장자의 이름은 주이고 자는 자휴이다.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69년경 송나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289년 경에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세치 않으나 <사기>에 의하면 하남성 부근 지역인 몽현에서 옻나무 동산을 관리하는 하급관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생활에 곧 싫증을 내고 청산으로 들어갔다. 짚신을 엮어 호구를 해결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아내가 죽자, 장자는 땅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둘도 없는 친구 혜시가 조문을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친구를 나무랐다. 장자는 혜시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내가 죽자 나도 놀라고 슬펐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듯이 무한히 순환하는 것과 같다. 내 아내는 지금 거대한 방에서 편히 잠자는데 내가 곡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나 천명을 모르는 소행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곡을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는 한 하늘 아래, 흐린 날과 맑은 날이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그렇게 해석했다. 오직 나와 저(해골)만이 알고 있다. 일찍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삶과 죽음을 걱정하랴 삶과 죽음을 즐거워하랴 오직 너와 나만이, 네가 일찍이 죽지 않았고 일찍이 산 적도 없다는 것을 안다. 너는 과연 해골이 된 것을 괴로워하는가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겠는가 그는 죽음이 임박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땅으로 관을삼고, 하늘로 관뚜껑 삼겠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장식품이 되리라. 내 장례는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준비하랴.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5. 다 빈치가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간 이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예의 부활로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는 중세의 종교(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고전 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근대적 문화를 창조하려는 문화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의 구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은 <모나리자>의 작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이다. 1452년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다 빈치는 집에서 법률 공부를 강요했으나 자신에게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더 있다고 생각하고 그림 공부를 고집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모나리자>를 그린 훌륭한 화가만은 아니었다. 다 빈치는 14세 때 조각가로 유명한 화공인 베로키오 밑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화공 길드는 기술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맡았다. 토목, 건축, 회화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역시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배웠다. 또한 당시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만능의 천재`가 동경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젊은 날을 베로키오 밑에서 보낸 다 빈치는 1482년 밀라노로 갔다. 20년간의 밀라노 시대에 그는 군사 기술자로서 종군, 측량과 지도 제작, 기중기의 고안, 운하 건설, 궁정 오락 연출 등 실로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완성된 그림이 <최후의 만찬>이다. 또한 압연기 등 새로운 공작 기계를 발명했고 새의 날개와 공기의 운동을 연구하여 인력을 동력으로 하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설계도도 남겼다. 물론 이러한 기발한 발상들은 실제로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그의 노트에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는 인체 해부도도 남겼는데 이는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인체를 해부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인체의 여러 부위의 구조와 비례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 교회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직접 해부해 보았다. 그는 약 30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묘지에서 시체를 파 내어 촛불로 비추어 가면서 해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세계에 중심에 놓으려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집념은 다 빈치의 시체 해부와 인체 해부도에 깃들어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부록 : 태평양 지역의 동반자 - 찰스 크라트하머(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세계 각지를 순방하게 되었다. 순방의 주요목적은 두 사람의 대통령 경선을 도우려는 것이다. 하나는 러시아의 옐친을 위한 것으로, 옐친을 한껏 칭찬하며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다른 하나는 클린턴 자신을 위한 것으로. 세계의 영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대통령선거 때 Tv의 선거홍보용으로 쓰이게될 것이다, 심지어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을 중동으로 파견해 이스라엘과 레바논 의 이슬람계 정당 간에 휴전을 촉구하게 한 것도 역시 이스라엘의 페레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레바논과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한 페레스는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다. 동기는 어디까지나 동기일 뿐이고 대외정책에서 최후의 입김으로 작용하는 것은 역시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이다. 클린턴의 대외정책에 대해 가장 심한 비평을 하는 사람도 이번 세계 순방에서 클린턴은 커다란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클린턴은 동경에서. 평화시에도 일본은 미군에 군수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초보적 동의를 받아 내었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미국과의 군사협력 가능성에 대한 모색도 하였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활동이 평범하고 사사로운 외교적 활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특히 중국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일본은 끝내 태평양지역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뉴스이다. 우리는 일본의 완벽한 음향기기를 사다 쓰기 위해 일본을 정복하고 우리 생각에 따라 일본을 재건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일본이 2차대전중이나 대전 전에도 모종의 능력 우리는 이것을 군사적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런 일본의 능력을 통제하고 이용하며 그들을 우리 편에 두었던 것이다. 30년 이래 그들은 확실히 우리 편에 서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통제를 받았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평화유지를 위한 조항을 헌법에 써넣었다.하지만 50년 뒤인 지금은 단순한 평화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일본은 강력하다. 중국은 이제 강렬한 빛을 발하며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비록 최강국이지만 이미 지쳤다. 특히 단독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우리 미국은 혈혈단신으로 뛰어 다녔다. 우리는 확실히 일부 작은 동맹국과 함께 전쟁을 한 적은 있으나 일본과 함께 한 적은 없다. 다시 이래서는 안 된다. 냉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미국인들은 세계 경찰의 역할을 해야 하는 부담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의 어떤 침략자에 대해서도. 군사력으로는 단독으로 대항할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심리적으로는 능력이 없다. 아시아에서 어떤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 경우. 이에 대해 일본이 방관적 태도를 취한다면 앞으로 어떤 대통령도 난관을 뛰어넘는 데 필요한 국내의 지지를얻지 못할 것이다. 4월 18일의 '도쿄합동선언'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선언은 당연히 중국에도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미 . 일의 새로운 동맹은 중국을 겨냥한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에 중국은 즉각 항의하였다. 일본과 미국이 적극적인 군사협력 단계로 접어드는 역사적 전환은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몇 차례에 걸친 중국의 강력한 항의가 이의 중요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클린턴의 변신은 일본의 변신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는 않지만 환영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3년 동안 정부는 계속해서 일본을 경제침탈자이자 실질적인 적으로 대해 왔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분명히 해 놓 았다. 일본은 이미 친구이다. 만일 이 지역에 잠재적인 적이 남아 있다면 그는 바로 중국일 뿐이다. 정부가 중국이 잠재적인 적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국이 고도의 민족주의 독재체제 아래서 두 자리 수에 달하는 경제성장률을 보였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중국은 1994년 남중국해에서 다섯 나라가 주권을 주장하는 도서를 겅섬하는 행동을 감행하였지만 우리 정부에 그다지 큰 부담을 주지는 않 았다. 중국이 또 파키스탄과 이란에 핵무기와 화학무기 기술을 판매했을 때도 역시 그랬다. 정부가 비로소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지난 달 대만에 대해 대담한 군사위협을 가할 때였을 것이다. 실탄 군사훈련과 유도탄 발사, 그리고 일부 지역의 해상봉쇄는 미국으로 하여금 더이상 좌시할 수 없게끔 하였다. 정부는 뒷통수를 한 방 먹은 후에야 중국과의 소극적인 교류 및 일본과의 대립정책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캐달았다. 그래서 지금 클린턴은 이와 같은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단순히 대선을 겨냥한 선거전술의 하나에 불과하다. 일본과 마찰없는 우호적인 장면들을 매스컴에 보낼 좋은 기회인 것이다, 외교정책이 경제로부터 지연전략(地緣戰略)으로 바뀐 것이 단지 선거용에 불과한 것인지는 클린턴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클린턴이 연임하게 된 후에도 이 변화는 지속될 것인지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의 연임 후에도 이런 변화가 지속된다면, 클린턴의 모스크바 재3차 정상회담이나 크리스토퍼의 제21차 다마스크 방문 같은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겠지만 클링턴의 이번 동경행은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새로운 대일본정책은 아군과 적군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정책으로 일본은 미국과 함께 태평양 지역을 감시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비록 그다지 큰 힘이 되지는 않지만 동북아의 중요한 것은 21세기에 닥쳐 올 중대한 도전-중국을 제재하기 위한 기초를 세웠다는 점이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전재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시인과 장미 한 젊은 시인이 있었다. 그는 한 여인을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 여인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삶은 오직 그녀를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하루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새로왔다. 풀잎을 스치는 바람도, 어린 나뭇가지에 어리는 햇살도, 푸른 하늘을 나는 작은 새도, 그녀를 사랑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아름다움과 경이의 세계였다.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진정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지 않는 혼자만의 삶이란 정말 무의미한 삶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느 날,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붉은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그 여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청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인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해해 주세요." 눈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천지가 뒤바뀌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끓여 준 커피도 채 들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집 대문을 막 나섰을 때였다. 여자가 창문 밖으로 장미꽃을 획 집어던졌다. "미안해요. 청혼의 의미로 주는 장미꽃은 받을 수가 없어요." 그는 엉겁결에 발 앞에 떨어진 장미꽃을 주웠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후, 그는 장미꽃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실연의 원인이 마치 장미에게 있었던 것처럼 꽃 중에서 장미꽃만은 극도로 싫어하는 병적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는 장미를 볼 때마다 그 여자한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되살아나서 싫었다. 그 여자를 잊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마음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는 장미가 있는 곳은 어디든 피해 다녔다. 그러나 장미는 어디에든 있었다. 꽃집이나 이웃집 담벼락뿐 아니라 무심코 들른 레스토랑의 탁자 위에도 장미꽃은 피어 있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장미가 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의 소원은 이 세상의 모든 장미를 없애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해도 장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장미의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언어학자를 찾아갔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장미라는 이름을 바꿀 수 있을까요?" 늙은 언어학자가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언중에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언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건 언중들의 마음입니다. 학자인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언어학자의 집을 나오면서 자신의 일생을 장미의 이름을 바꾸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이름은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주장해 나갔다. 그러면서 열심히 장미의 부정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를 써서 발표했다. 언중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자신이 쓴 시를 들려주었다. 어느덧 많은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젊은 시인이 늙은 시인이 되었고, 마침내 사람들은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장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다들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이 바뀌어도 단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것은 장미의 향기였다. 글터 → 이글저글 말은 서서 잠잘 수 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할 때 잠을 자고 있는 말 위에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한다.코끼리 음경의 무게는 약 27킬로그램이나 되고 발기했을때 길이가 1.5미터나 된다. 코끼리는 보통 다른 동물들처럼 뒤로 교접하지만 침팬지, 오랑우탕, 고릴라들은 사람처럼 정상 체위를 갖는다.동물은 강간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암컷이 자진해서 몸을 허락할 때만 교미가 이루어진다.호랑이의 생식, 암호랑이는 특수한 소리로 수컷을 유혹한다. 수컷이 접근하면 암컷은 부드럽게 몸을 비비며 성교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 수컷이 올라타서 교접하는데 절정에 도달하면 암컷의 목을 조르며 큰 고함을 지른다. 이 교접은 3분동안, 하루에 20번 이상 3주동안 계속된다.자위하는 동물로는 고슴도치, 코끼리, 사슴, 사자, 원숭이, 멧돼지, 돌고래, 노루 등이 있다.고래의 음경은 2.7미터나 되고 직경이 30센티나 된다. 코끼리는 1.5미터, 해마는 61센티나 길며, 코뿔소는 61센티, 돼지는 43센티, 호랑이는 28센티, 침팬지는 8센티이다. 또 수탉은 직경 2밀리미터밖에 안되는 동물 중 가장 작은 옥근을 가지고 있다.공룡(dinosaur)의 수컷은 남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