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6 14:20 【독서편지】: 제 69 호 風磬 조회 수 9,758 추천 수 14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9 호4339.11.26 (10.06)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긴 논쟁은 쌍방이 다 옳지 않다는 증거. / 볼테르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현모양처의 산수화도 - 신사임당 -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눍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신사임당은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현부로 꼽혀 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신사임당은 가장 우수한 여류 서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어머님 그리워 산 첩첩 내 고행 천리건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친정 어머니를 그리는 이 두어 편의 시로 미루어 보아도 그녀는 항상 시심을 간직하고 살아온 천부적인 예술가였고, 서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 시대 여류 예맥의 한 정상을 이루었다. 아니 그녀는 여류 시인이요 여류 서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수가이기도 하고, 그 위에 교육가, 현부인, 효녀, 학문가라는 평가를 함께 받아 온 여인이었다. 1504년 강원도 강릉북평 마을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그녀의 나이 19세 때 덕수 이씨 원수에게 시집을 갔다. 신사임당은 태어날 때부터 인물이 빼어나고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가정 안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기초적인 실력을 쌓아 나갔다. 신사임당의 서화 솜씨와 문장 실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이사온한테서 한문을 익힌 현부라 사임당은 그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사임당의 그림 솜씨가 뛰어나자 어린 그녀에게 아낌없는 칭송을 보내었다. "허헛 참, 송정선생의 딸이 겨우 일곱 살인데도 벌써 안견의 산수화를 놓고 그림 그린다지 않는가." "진정 놀라운 일이네. 안견의 산수화뿐 아니라 그 애는 포도라든지 벌, 나비, 잠자리 따위를 썩 작 그린다는군 그래." 안견이란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인데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흉내내어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의 화법은 너무 뛰어나서 감히 견줄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사임당이 잔칫집에 갔더니 부인 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임당이 그 까닭을 묻자 그 부인은 빌려입고 온 홍금 비단 치마를 더럽혔다며 울먹였다. "새 것으로 바꾸려 해도 살림이 넉넉지 못해 바꿀 수도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했으면 좋을꼬." "제가 새 것으로 만들어 드릴 터이니 너무 상심 마세요." 사임당은 부인을 위안시키고 나서 천을 놓고 붓을 들어 폭마다 포도를 그렸다. 그 포도 송이송이에는 신기롭고 또한 기품이 흐르는 운치가 돋보였다. "아주머니, 이 포도 천을 가지고 가서 저자에 나가 파세요. 그 값이 치마 몇 갑절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어유, 진정 고마우이." 부인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사임당이 그린 풀벌레 그림첩을 볕에 쬐려 했더니 새들이 벌레를 마구 쪼아 버려서 그림을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사임당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집 앞 나뭇가지 위에 새가 날아와 앉았다. 그 새의 그림자가 물위에 비치는데 완연한 새의 모습이라, 그녀는 일하던 바늘로 새의 눈동자 부근을 찔렀더니 새가 나뭇가지에서 그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잉태할 때 일이니까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어느 날 사임당이 꿈을 꾸었는데 동해에 산다는 신선이 살결이 백옥같이 흰 아들을 안고 와서, "이 아들을 받으시게."하고 사임당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아기의 몸에서는 신령스런 빛이 솟아 사임당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과연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잉태한 지 열두 달 만에 율곡을 낳았다. 율곡이 탄생하던 날 밤에 사임당은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검은 용이 큰 바다에서 나와 사임당의 침소에 들어왔다. 사임당은 깜짝 놀라 꿈을 깨었다. 흑룡의 꿈을 꾸고 나자마자 태어난 아기, 그가 뒷날 율곡이었다. 사임당 내외는 꿈에 용을 보았다 하여 율곡의 아명을 현룡이라 불렀으며, 율곡을 낳은 침소를 몽룡실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사임당은 여러 자녀들 중에 셋째 아들 율곡을 특히 사랑했고, 율곡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7남매의 어머니로서 사임당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사임당은 평소에 유교의 경전을 읽어 현부의 길을 밟아 나갔다. 7남매를 키우는 틈틈이 익힌 글씨는 뒷날 시인 묵객들의 찬사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1868년 강릉 부사로 부임한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보고 이렇게 예찬했다. "과연 그 필적에 있어서는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저 옛날 무왕의 어머니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명종 때 어숙권의 말이다. "사임당 신 부인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가나고 하였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솔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랴." 사임당은 딸들의 교육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장녀 매창과 넷째 아들 우는 그녀가 기른 빼어난 예술가였다. 외로운 이내 신세 한탄 하노라 범이 차서 가진 임 옷 꿰매노라 사창에는 한 나절 해가 비칠 때 머리 숙여 바느질 손 놀리노라면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네 강가 다락에서 느낀 대로..... 사방들에 가을 빛이 너무 좋기에 혼자서 강가의 다락 오르니 어디선가 풍류객이 날 쳐다보고 술병하고 다락으로 찾아오시네 이매창의 이와 같은 풍부한 감성과 꺼질 줄 모르는 시심은 그것이 그대로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었다. 율곡은 뒷날 어머니 사임당을 회고하여 이렇게 쓴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며,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지으며 우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시기도 했다." "어느 때 친척 되는 심공의 집 시비가 와서 거문고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는 그 곡조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으시므로 온 방안 사람들이 모두 따라 슬픈 생각에 잠겼다." 고행과 모정을 그리는 밤에 눈물짓고, 슬플 때 밤을 꼬박 새우며 울 줄 알았던 천부적 여류 예술가 사임당은 학문과 문장, 그림과 글씨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아들 율곡을 역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와 딸 매창을 다 그 시대의 추앙받는 예술가로 키워 놓고 1551년 5월,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 - 이정란 (1/2) ‘첩 두자’는 상소에 팔 걷어부친 여자들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말이 되면 일부다처제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시기의 해프닝으로 ‘박유사건’이 주목된다. 원 간섭기에 박유라는 재상은 평소에 늘 주위 사람들에게 주장하기를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여자의 머리가 희어지도록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 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고하를 물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인원수의 제한이 없이 장가를 드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몰려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처와 첩을 두게 하되 그 관품에 따라서 그 수효를 줄여서 서인에 이르면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얻도록 법제를 만든다면, 원성은 줄어들고 인구는 번성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도리도 됩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부녀자들이 모두 박유를 원망하며 앞으로 변화할지 모를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연등회를 보기 위해 박유가 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첩을 두자고 건의한 거렁뱅이 늙은이다”라고 외쳤고, 이에 주위의 여인네들이 모두 그에게 손가락질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재상들 중에 자신의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박유의 건의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고려가 당시까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실제 남자의 수가 여자의 수에 비해 훨씬 적어 결혼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생겨났고, 또한 일부다처의 사회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고려말에 일부 관인층 사이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집살이 않은 여성, 처가살이하는 남성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혼인한 뒤 어느 쪽에서 거주했을까? 당연히 남자 집에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고려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는 주로 서류부가혼이 일반적이었다. 즉 결혼식을 처갓집에서 하고, 결혼 후에도 일정 기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라거나 “뒷간과 처갓집을 멀수록 좋다”거나, “출가외인”이란 말은 모두 조선시대에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경우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위가 처가살이 자체를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가살이를 계속하여 자신의 손자까지 처가에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왕자도 외가에서 자라는 경우가 있었다. 인종의 어머니는 유명한 이자겸의 딸로, 인종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다. 비록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이 이자겸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도 인종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란 것이다. 유명한 관리의 묘지명을 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외가에서 자라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의 은혜가 크다는 기록도 흔히 나오고 있다. 처가살이가 고려시대 일반적인 결혼 생활의 한 가지 유형이었던 만큼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던 조선시대에 비하면 고려의 여성들이 친정에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시집살이를 하였더라도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을 겨우 계속해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의 경우에는 과부들 중 상당수가 친정에 되돌아가서 생활을 하였다. 아들 딸 차별없이 균등 상속, 균등 의무 고려시대 재산상속은 자녀간의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부모의 유언이 없을 경우 재산은 자녀간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당시 재산의 균분은 관습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부모가 죽은 후 형제자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를 꺼렸던 이지저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의 사례는 자녀간 균분상속의 관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손변이 경상도의 안찰사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 남동생과 누이가 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이고 있었다. 남동생은 “한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누이 혼자 재산을 갖고, 동생은 그 몫이 없단 말입니까”라고 하였고, 누이는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전 재산을 나에게 주고 네가 가질 것으로는 검은 옷 1벌, 검은 관 1개, 신발 1켤레, 종이 한 장뿐이었으니, 어찌 이를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송사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았는데, 손변이 부임해 와서 이 송사를 듣고 이르기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균등한데 어찌 장성하여 결혼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박하겠는가? 어린아이가 의지할 자는 누이였으니 만일 누이와 균등하게 재산을 물려주면 동생을 사랑함이 덜하여 잘 양육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하게 되면 물려준 옷과 관을 갖추어 입고서 상속의 몫을 찾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종이와 붓 등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라고 하니, 누이와 남동생이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이 사례를 통해서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자녀간의 균분상속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비록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균등하지 못한 유산상속을 했더라도 이것은 아버지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결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녀간에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에 따른 의무도 균등하였음을 의미한다. 재산상속에 따른 자녀의 의무는 부모 살아서는 부모 봉양을 잘 하는 것이고,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 생전에 부모에 대한 봉양은 조선 후기 이후에는 전적으로 장남의 몫이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딸도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부모가 딸과 사위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부모 봉양에 있어 딸의 역할이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호적에서 아들·며느리와 동거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딸·사위와 동거하는 경우가 상당수에 달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가 바로 재산상속에 따른 또 하나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래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장자의 책임이었고, 이런 책임을 맡은 장자는 그 의무에 상응하여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봉사조라는 명목으로 적어도 20퍼센트를 더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제사는 장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의무이자 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 1990년에 민법이 개정될 때까지는 호주는 재산상속분에서 5할을 더 가산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고려나 조선 전기에는 제사가 장남만의 몫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조상에 대한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돌아가며 맡았는데, 이를 윤행이라 하였다. 즉 재산균분에 따라 제사도 자녀간에 균등하게 돌아가며 이루어졌던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부끄러움을 알게 해 준 친구 나는 어릴 때 몸이 많이 허약했다. 체력이 워낙 약한 탓도 있었지만 엄마의 지나친 보호가 나를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 체육 수업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랑 뛰어논 기억도 별로 없고 소풍도 엄마의 채근에 못 이겨 억지로 따라 나섰다. 게다가 선생님들까지 내가 건강이 안 좋다며 많은 배려를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학년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체육 시간에 교실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남자아이와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수업시간에도 모자를 벗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시간, 그날도 그 애와 단둘이 교실에 남아싿. 나는 그 애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야, 왜 너는 내일 모자를 쓰고 있지?" 그 애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안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해서 나는 그 애 뒤로 슬금슬금 가서 모자를 확 벗겨 버렸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애의 머리엔 머리카락은 없고 듬성듬성 솜털 같은 것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 애의 머리를 쑤욱 눌렀는데 물렁물렁했다. 그 애는 당황한 채로 서 있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마룻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썼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애는 조용히 자신의 아픔을 참아 왔다는 것을, 갑자기 조금만 아파도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던 나의 철없는 행동들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애가 얼마뒤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 이임경 님/부산시 수영구 망미2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9 - 혁명의 불길을 당긴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그때 세계에서는 1787년: 미국, 연방헌법 초안이 이룩되고 각 주의 비준 시작 1789년: 라부아지에"질량보존의 원리" 1789년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루소와 볼테르가 죽은 지 3년 후의 일이다.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모두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이 그 정신적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 자신도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렇게 배웠다. 사실 이 사상가들의 이성적인 힘과 자유의 정신이 프랑스 정신계를 일깨워줄 수 없었다면 혁명적인 민중봉기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루소의 "민약론"은 미래지향적인 정치방향과 국민적 권리의식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체계의 기틀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정리된 저서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었다. 이런 것은 선진국가가 되는 하나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120년쯤 전에 "민약론"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정치지도자들이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 프랑스식 민주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정객들이 있었다. 그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40년쯤 전의 일이며, 우리 정치가들에게는 관심 밖의 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상과 이념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거 같은 인상이 들기도 한다. 루소는 학교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여러 가정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학문과 사상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나는 생각하기 전에 느끼기부터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의 고백에서 그의 영국적인 계몽정신이 백과전서 시대로 발전했고, 그것이 다시 감정주의 철학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바로 루소가 그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국민학교 여선생에게 사랑의 뜻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이 관여한 음악이 연주될 때 귀부인들이 참석한 데 대해 감격의 정을 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바 없는 하녀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첫아기를 낳을 때까지 달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루소는 말년에도 숲속을 산책하다가 누군가의 인사를 받으면 황급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고 한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같이 느껴지곤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이 루소 같은 이를 통해 전달된 내용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모든 삶의 판단은 이성에 의해서였고, 개인에게는 자유가, 사회에서는 평등이 보장되는 삶과 국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에 왕권과 결탁되어 전통적인 신앙을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던 종교계에 대해서는 이성적 판단은 큰 혁명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혁명 당시 제창된 박애정신도 기독교 전통의 사랑의 정신이기보다는 휴머니즘의 결실로서의 박애정신이었던 것이다.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후진국에 속하던 독일로까지 번져갔다. 칸트도 대단한 루소의 애독자였다고 전해진다. "민약론"에 도취된 나머지 그의 유명한 산책시간을 놓쳤다고 전해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모든 정치와 자유로운 사상은 프랑스에서 전해지는 듯이 믿어졌고, 독일사상가들의 혁명에 대한 기회와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을 칸트에게로 계승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크리스티안 볼프 같은 철학자도 그런 부류의 철학자에 속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국, 프랑스, 독일을 휩쓴 계몽주의 정신은 서구사회를 새로운 무대로 변질시키는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후부터는 세계 여러 후진국들이 자시 나라의 계몽주의 시대를 찾아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명치유신 기간을 일본이 새로이 태어나는 계몽주의 시대였다고 자인하고 있다. 적지 않은 선구자들이 미국과 유럽을 다녀왔고 서구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는가하면, 그 사상들이 일본 변혁기의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계몽주의는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유도해주며 정치사회의 변혁을 약속해주었다. 일본도 그런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계몽기적 역할을 언제, 누가 감당해왔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계몽기간은 퍽 늦었던 것 같아보인다. 어떤 이들은 사상적 계몽기는 19세기말기보다는 20세기 초반기에 속하지 않는가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최남선, 이광수씨 같은 이의 역할을 얘기하기도 한다. 철학의 계몽기는 더 늦었을지 모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글로 된 철학책이 단 두 권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한치진씨의 "철학개론"과 "인생과 우주"뿐이었던 것 같다. 해방이 된 뒤에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몇 권의 철학책들이 출간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일본어로 읽기는 했으나, 그것은 주로 번역서들이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학독'은 원래 '확독' ...나무나 돌을 움푹 파서 고추를 찧는 도구 어느 분이 '학독'의 뜻을 물으셨고, 이 태영 교수가 그 뜻을 알려 드렸습니다. 방언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이 태영 교수의 풀이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 '학독'은 원래 '확독'입니다. '확'은 지금도 방언형에서 쓰이고 있는데, 나무나 돌을 움푹파서, 그곳에 고추를 넣고 찧거나 하는 도구를 말합니다. 움푹 들어간 곳을 '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독'은 '돌'의 방언형입니다. 지금도 남부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늘 말하는 '바둑'의 '둑'도 원래는 '돌'의 뜻입니다. '바둑'도 방언에서 '바돌'이라고 하는 지역이 많거든요.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육신, 그 하찮은 것들 - 프로티누스 / 데모낙스 / 함허득통 프로티누스 프로티누스(서기 205-270)는 일체가 죽어도 죽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인간에게는 신적인 것이 있다 는 것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다. 나는 가끔 육체로 부터 나 자신으로 깨어나 다른 모든 것 밖으로 나가고,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와 경탄할만한 아름다음을 거기에서 발견한다. 이렇게 황홀경의 체험을 말한 그는 신비주의의 개조가 되어 시인 키츠, 예이츠, 엘리어트, 릴케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폴피리우스, 디오니소스,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헤겔 등으로 계승되었다. 프로티누스는 자기가 육체를 쓰고 있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상이나 부모나 고향에 대하여 일체 말하지 않았다. 고 폴피리우스는 그의 전기에 적고 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을 때, 그는 노발대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자연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그림자(모상)를 쓰고 있는 것도 부족해서 좀더 오래 가기 위해서 그림자의 그림자를 그려서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는 만년에 폐결핵과 후두염을 앓았다. 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손발에 종기가 흉했으나 끝까지 강의실에서 최선을 다했다. 흐려진 목소리로 프로티누스는 임종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들의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을 만유 속에 있는 신적인 것 밑으로 돌이켜 올려보내기 위해서 나는 지금 애쓰고 있다. 한 마리의 뱀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및을 지나서 담 사이의 틈 바구니로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을 때, 바로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6세였다. 데모낙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낙스는 107세가 되어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처럼 식음을 전폐하여 굶어 죽고 말았다. 당신 같은 분의 유해가 개나 새 따위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언을 따를 수 없다고 우겼다. 데모낙스는 말하였다. 죽어서도 아직 살아 있는 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데모낙스도 몸(시신)을 가벼이 여겼다. 함허득통 스님 무학 대사의 제자이던 함허득통 스님은 더 쉬운 말로 이것을 설명했다. 원래 죽음이란 없는 것이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한다면 부스럼딱지와도 같은 시신은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죽음은 부스럼이 딱지져 딱지를 없애는 것과 같고, 묶은 것을 풀어서 칼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고, 새가 초롱을 나오는 것과 같고. 즉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요. 그런데도 육신을 잊지 못해 어찌 미련을 두는지, 이런 사람의 시체는 물에 띄어도 옳고 길가에 팽개쳐도 옳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3. - 14세기 중세를 뒤흔든 흑사병 현대에도 에이즈라는 죽음의 병이 있지만 그것은 세계를 뒤바꿀 만큼 무시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커다란 전염병의 발생은 사회 경제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의 심성까지 바꾸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4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흑사병(Black Death)이다. 페스트의 일종인 흑사병은 아시아 지역에서 발원하여 1346년 봄 이탈리아 상선대에 의해 흑해 연안에 도달했다. 이후 크림 반도 남단에 상륙하여 무역로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러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북부 도시까지 강타했다. 같은 해 말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에 퍼졌고 다음해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이 되면 흑사병은 영국 전역까지 만연했고 1350년에는 북유럽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의 의학으로는 이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는 엄청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시의 인구는 엄청나게 줄었으며 농촌 마을도 사람들이 죽거나 병마를 피해 마을을 버린 까닭에 폐촌이 된 곳도 적지 않았다. 흑사병으로 인한 희생자수는 확실치 않다. 대략 당시 유럽 인구의 1/3~1/4인 약 3,000만 명이 쓰러졌다고 한다. 또 당시 교황청은 사망자수를 4,283만 4,486명으로 추산했다. 엄청난 인구 감소를 가져온 흑사병은 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죽음의 공포가 사회를 휘감았으며 살아 나기 위한 투쟁은 기존의 가족 관계나 인간 관계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굴렀다. 죽음의 대한 공포는 흑사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가중되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설이 난무했지만 모두 허황된 것들이었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 그럴듯하게 퍼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평소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이나 집단이 공격을 받았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속죄를 부르짖는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 종교 집단도 발생했다. 그럼 이 엄청난 사태를 겪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 흑사병의 피해가 컸던 곳은 무엇보다도 인구가 밀집했던 도시 지역이었다. 요행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죽은 귀족이나 대상인들의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텅 빈 도시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운영권도 이 과정을 통해 재산을 획득한 신참자들에게 돌아갔다. 한 마디로 도시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완전히 흔들릴 정도로 바뀌었다. 농촌의 경우는 사망률은 낮았지만 인구비가 높았기 때문에 실제 사망자수는 더욱 많았다. 그 결과는 엄청난 노동력의 부족과 방치된 많은 토지 그리고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였다. 살아 남은 영주들은 어떻게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며 따라서 임금은 계속 상승했다. 반면 임금 인상이라는 방법과는 정반대로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농노 해방을 중지하고 부역을 강화하려는 영주들도 나타났으며 정부에서는 임금을 묶어 두려는 억압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동적인 시도는 강화된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 이외에도 흑사병의 유행이 사람들의 심성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짧은 기간에 일어난 대량의 죽음, 그것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은 사람들에게 늘 삶과 함께 하는 동반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양한 미신적 종파를 발생시켰다. 죽음을 가져오는 병을 신의 분노로 보고 몸 안의 악을 내쫓기 위해 신자들이 서로 채찍질을 하면서 행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신과의 영적인 합일에 의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흑사병 이후 그림에는 최후의 심판과 지옥이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으며 조각을 통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나타났다. 의학적 무지에 의해 흑사병의 피해가 더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흑사병은 상업의 발달로 인한 물자 교류의 확대에 의해 급속히 퍼졌다. 이것이 당시 농업 생산력의 정체로 나타난 봉건 경제의 전반적인 위축과 맞물려 커다란 희생을 초래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흑사병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1) 은혜를 모르는 일본에게 전쟁배상금을 받았다면...... 쩌우인라이 총리가 일본의 전쟁광들과 일본 국민은 별개라고 한 당시의 생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이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생각이었다. 쩌우인라이는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우리가 일본에 대해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배상하라고 우긴다면 이 부담은 결국 일본 국민들의 어깨에 얹혀질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히데키 토조(東條英機)를 우두머리로 하는 극소수의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이고 모든 일본 국민들 역시 이들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다.' 당시 모든 중국인들은 쩌우인라이의 태도-사실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 찬성하였다. 맞는 말이다. 우리 중국은 이처럼 대국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배상은 다음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양국이 계속해서 우호적인관계를 유지하고 이전과 같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전쟁의 배상이 일본 국민들에게 정말큰 부담이 된다면 우린들 이 돈을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갰는가? 우호적 중 . 일 관계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마음과 중국인 특유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주는' 사고는 유감스럽게도 모든 일본민족에게 어떠한 존중이나 이해도 받지못했다. 만일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전쟁배상금문제는 다음으로 미루어 두었다가 차후 때를 기다려 다시 거론하여 결산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중국인의 속이 좁거나 변덕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듯이, 우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고해서 일본인들이 우리에 대해 진정한 우호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우호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자구책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냇물 건너 이웃'이나 '같은 문자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항상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친밀감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은 적이 없다. 사실 전후 일본 전범들을 재판할 때 국제사회에서는 전쟁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생명과 재산손실에 대한 일본의 배상액을 규정했었다. 그 중 중국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배상금을 받도록 판결되었지만, 실제로 확정된 배상액은 우리들이 입은 피해의 실제상황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제점은 종종 역사의 진전과 국제관계의 변화로 점차 명확해지기도 한다. 잘못은 군국주의가 저지른 것이고 일본 국민들도 이들의 피해자란 말은 맞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자란 토양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민족모두가 국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었다면 군국주의가 그렇게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모호한 과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했다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논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중국인이 군국주의와 국민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것은, 바로 일본민족이 더욱빨리 전쟁의 상처와 절망과 비애에서 벗어나게 하고, 제대로 된 국가의모습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며, 국교수립을 통해 같이 손을 잡고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관용의 나무가 맺은 치졸한 돌연변이의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 국민에게 전쟁배상의 무거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소박한 생각은 중국인이 새로운 시대에 걸었던 희망을 앗아갔으며 또 우리 선배들의 피어린 상처는 상징적인 위로조차도 받을 길이 없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것은 고작 침략자를 내쫓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현대화 속도는 더욱 빨랐을 것이며 국민들의 생활도 지금보다 훨씬 풍족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받아야 할 채무를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이라는 죄인이 반성하는 절호의 계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일본이 거론하고 있는 대중국 차관에 관한 문제도 간단해졌을 것이다. 우리가 배상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일본이 마음대로 대중국 차관을 동결하는 수법으로 중국을 압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대중국 차관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죄악에 대한 일종의 배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중국이나 일본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러한 각도에서 대중국 차관문제를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 만약 일본이이 문제와 연계하여 중국의 핵실험 포기를 요구한다면 이는 비열하기 그지 없는 행위로써 국제 정치무대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상 이야기한 내용은 모두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찮은 권리를 포기하였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가정' 할 권리뿐이다. 2) 처신도 못하고 낮만 두꺼운 일본 1978년 중 . 일 간에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후 쌍방 간에는 무척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빵(胡濯邦)은 다음 21세기에도 양국이 화합하고 공존공영하길 바라며 직접 중 .일 간의 청년교류를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80년대 중반 3천 명의 일본청년이 중국으로와 중국청년들과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중국의 신세대 지도자들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질곡을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세계의 미래를 바라보고 중국이 가야할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3천 명의 일본청년들이 중국에 왔을 때 외형상으로는 조금 우쭐해 하는 면이 있긴 하였으나 가식적인 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시 쌍하이 화똥(璜)사범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청년들이 쌍하이에 오기 전까지는 마치 무슨 중요한 경축일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교내를 청소하고 꽃을 꽂고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주고 받기 위해 속성으로 일본어를 배우기까지 하였다. 학교 극단에서는 중 .일 우호를 주제로 한 연극을 준비하였다. 그때 쑴창은 극중에서 전쟁 당시 중국 부녀자를 강간하였으나 종전된 후 중 .일 우호관계에 전력을 다하는내용의 한 일본 노인 역을 맡았었다. 그는 몰입해서 연기하였고 무대를 내려와서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교내에서 모든 여학생들이 그를 피해다니는 등 그가 겪은 고통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눈앞의 구름과 같이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가 가졌던 흥분은 냉엄한 현실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일본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중국 인민의 인권을 대대적으로 유린하고 박탈했던 나라가 무슨 자격으로 인권을 논하고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질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는다. 모두 알다시피 최근 일본 국내의 적지 않은 정계요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시아를 침략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과서에 실린 소위 '중국으로 진출하다'는 표현은 일본인이 민간여객기를 타고 중국에 왔다는 뜻이란 말인가? 한 일본 병사가 중국의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공중에 들어 올린 사진을 보고도 일본 국내에서는 반성의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난징 대학살이라고? 3십만 명? 이거 일본을 모함하려는 계략 아니야?'라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아직도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실어 자신들의 억울함을 벗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 각국의 압력으로 '망언'을 일삼는 고위인사들을 물러나게 하여도 망언은 끊이지 않았다. 왜 뒤에 오는 사람마저도 연거푸 망언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한 연극이며 그것도 명연기를 하는 연극임에 틀림없다. 현재 일본을 이끄는 정치가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과거의 역사는 인간이 창조해 온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 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다'라는 신념에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침략'은 '진출'로 바뀌었다. 일본군대는 분명 중국에 왔었다. 그 진출의 방식에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난징 대학살사건 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는지 여러 번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확실한 자료나 자세한 기록도 없다. 게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상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이 전범들의 망령을 추도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만 해도 그렇다. 이에 대해 중국이 거듭해서 언급한다면 이는 일본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일본이 가진 중국 국민의 인권에 대한 태도이다. 제6차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취한 행동을 일본이 추종하는 것은 더없이 교활한 짓이다, 같은 패전국으로서 독일이 반성하는 태도는 일본에 비해 훨씬 진지하고 성실하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전후 여러 해 동안 독일은 몇십억 마르크를 자발적으로 내놓아 침략당하고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게 배상하였고,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이 가장 컸다고 한다. 이는 독일인의 마음속에 지고 있던 빚을 더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독일에서 파쇼의 영혼을 부르는 짓을 했다간 법에 의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세계가 보는 가운데 2차대전중 희생당한 폴란드인들의 영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행동은 결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도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전세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본 수상도 중국의 영토에 들어와 무릎을 끓은 적이없으며 어떤 정치가도 중국에 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한 행동으로 우리를 감동시킨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야스쿠니신사와 전범들의 위패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으니까. 이상으로 우리는 일본의 인권 관 역시 '모호'하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진심으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존중하는 것은 서구의 가치관과 서구의 대중국 전략일 뿐이다. 마치 그들이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하려 했을 때와 같이 미국이 앞서 달려가니까 황급히 뒤쫓아 갔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감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국교정상화를 꾀한 일본인의 생각은 아주 실질적이고 긴 '안목'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야말로 잠재력을 가진 얼마나 거대한 시장인가? 당시에 중국인을 6억으로 계산했을 때 모든 사람이 일본산 신발을 한 켤레씩만 사도 6억 켤레가 된다는 계산이다. 국제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구미에는 얼굴을 내밀고 아시아에는 등을 돌리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자신들의 '처신'조차도 아주 모호하고 번잡스러워 아시아나 구미를 막론하고 어느 국가 하나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봄을 기다린 두 토끼 겨울 산 속에 두 마리 토끼가 살고 있었다. 한 마리는 양달진 산비탈에 살고 있었고, 또 한 마리는 응달진 산비탈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나깨나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소원은 하루 속히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일이었다. 허옇게 산을 뒤덮은 흰눈이 녹고 계곡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산과 들에 막 새로 돋기 시작한 이파리들을 마음껏 뜯어먹는 일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다. 조금 따뜻한 기운이 돈다 싶어 굴 밖으로 머리를 조금 내밀면 이내 한풍이 휘몰아쳤다. 지난 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래로 내내 굴속에 갇혀 겨울잠만 자고 있기란 정말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아아, 언제 봄이 오려나?" "춥고 배고파서 못 살겠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봄은 오겠지." 그들은 하루하루가 1 년 같았다. 겨우내 먹을 양식마저 곧 떨어질 것 같아 아끼고 또 아껴 먹었다. 땔거리마저 모자라 한밤중에 기온이 뚝 떨어져도 불을 지피지 않고 참고 견뎠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 누구와 살이라도 맞대고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봄은 돌아올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굴 밖으로 나가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 굴 밖으로 나갔다가는 토끼 몰이 나온 마을 사람들이 산 위에서부터 몽둥이를 들고 몰아쳐 내려오면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잡혀 버릴 게 뻔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구나. 참고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봄이 오겠지." 그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다시 깊은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양달진 산비탈에 살던 토끼는 이따금 깨어나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봄이 와서 눈이 녹았나 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엔 눈이 허옇게 쌓여 있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게로군. 깨어날 때가 아직 멀었어." 그는 다시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눈을 뜨고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어머나!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았네. 눈이 다 녹으면 나가야지." 그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는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는지 모른다. 눈을 떠서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면 언제나 눈은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토끼는 양달진 굴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굶어 죽고 말았다. 응달진 산비탈에 살던 토끼도 문득 겨울잠에서 깨어나 건너편 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볕바른 그곳엔 어느새 눈이 다 녹아 버리고 없었다. "아, 내가 잠든 사이에 벌써 봄이 왔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구나!" 그는 얼른 굴 밖으로 뛰어나와 눈 녹은 양지쪽을 행해 힘껏 달려갔다. 그러나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그는 결국 굴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찬바람 몰아치는 산 속에서 얼어죽고 말았다. 양달과 응달에 살던 두 토끼가 봄을 기다리다가 그만 둘 다 죽고 만 것이다. 글터 → 이글저글 사슴은 콧구멍 외에도 숨쉬는 기관이 하나 더 있어서 달리기를 많이 할 때 숨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한다.돌고래의 IQ는 90정도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짝사랑에 번민하기도 한며 호모 섹스를 즐기기도 한다.박쥐는 공중을 날 때 입으로 1초에 30 - 60회 진동하는 빠르고 작은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너무 높아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이 소리가 물체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면 박쥐는 그 소리를 듣고 그 물체의 위치를 알게 된다. 박쥐의 귀는 1초에 100,000회 진동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온갖 물건이 꽉차 있는 방이라 해도 쉽게 날아다닐 수 있다. 하지만 박쥐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여기저기 부딪쳐서 날 수 없을 것이다.소는 색맹이므로 빨간색을 알아보지 못한다. 따라서 투우를 할 때 투우사가 빨간천을 흔들어 소를 흥분시킨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다. 개도 색깔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새는 색깔을 볼 수 있다.고양이는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거세된 소는 거세되지 않은 소보다 일을 더 잘한다. 고대인들은 아이들을 거세한 뒤 그 껍질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고래는 보통 100톤이 넘고 쥐는 겨우 몇 그램밖에 되지 않지만 둘 다 처음에는 비슷한 크기의 알에서 시작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4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08Nov by 風文 2024/11/08 by 風文 Views 419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06Nov by 風文 2024/11/06 by 風文 Views 348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04Nov by 風文 2024/11/04 by 風文 Views 373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02Nov by 風文 2024/11/02 by 風文 Views 384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8Oct by 風文 2024/10/28 by 風文 Views 343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5Oct by 風文 2024/10/25 by 風文 Views 548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4Oct by 風文 2024/10/24 by 風文 Views 32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3Oct by 風文 2024/10/23 by 風文 Views 940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2Oct by 風文 2024/10/22 by 風文 Views 801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1Oct by 風文 2024/10/21 by 風文 Views 793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18Oct by 風文 2024/10/18 by 風文 Views 802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17Oct by 風文 2024/10/17 by 風文 Views 513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16Oct by 風文 2024/10/16 by 風文 Views 504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15Oct by 風文 2024/10/15 by 風文 Views 607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14Oct by 風文 2024/10/14 by 風文 Views 406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13Oct by 風文 2024/10/13 by 風文 Views 435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12Oct by 風文 2024/10/12 by 風文 Views 456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10Oct by 風文 2024/10/10 by 風文 Views 404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09Oct by 風文 2024/10/09 by 風文 Views 353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08Oct by 風文 2024/10/08 by 風文 Views 33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07Oct by 風文 2024/10/07 by 風文 Views 304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06Oct by 風文 2024/10/06 by 風文 Views 364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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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헛 참, 송정선생의 딸이 겨우 일곱 살인데도 벌써 안견의 산수화를 놓고 그림 그린다지 않는가." "진정 놀라운 일이네. 안견의 산수화뿐 아니라 그 애는 포도라든지 벌, 나비, 잠자리 따위를 썩 작 그린다는군 그래." 안견이란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인데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흉내내어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의 화법은 너무 뛰어나서 감히 견줄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사임당이 잔칫집에 갔더니 부인 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임당이 그 까닭을 묻자 그 부인은 빌려입고 온 홍금 비단 치마를 더럽혔다며 울먹였다. "새 것으로 바꾸려 해도 살림이 넉넉지 못해 바꿀 수도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했으면 좋을꼬." "제가 새 것으로 만들어 드릴 터이니 너무 상심 마세요." 사임당은 부인을 위안시키고 나서 천을 놓고 붓을 들어 폭마다 포도를 그렸다. 그 포도 송이송이에는 신기롭고 또한 기품이 흐르는 운치가 돋보였다. "아주머니, 이 포도 천을 가지고 가서 저자에 나가 파세요. 그 값이 치마 몇 갑절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어유, 진정 고마우이." 부인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사임당이 그린 풀벌레 그림첩을 볕에 쬐려 했더니 새들이 벌레를 마구 쪼아 버려서 그림을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사임당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집 앞 나뭇가지 위에 새가 날아와 앉았다. 그 새의 그림자가 물위에 비치는데 완연한 새의 모습이라, 그녀는 일하던 바늘로 새의 눈동자 부근을 찔렀더니 새가 나뭇가지에서 그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잉태할 때 일이니까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어느 날 사임당이 꿈을 꾸었는데 동해에 산다는 신선이 살결이 백옥같이 흰 아들을 안고 와서, "이 아들을 받으시게."하고 사임당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아기의 몸에서는 신령스런 빛이 솟아 사임당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과연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잉태한 지 열두 달 만에 율곡을 낳았다. 율곡이 탄생하던 날 밤에 사임당은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검은 용이 큰 바다에서 나와 사임당의 침소에 들어왔다. 사임당은 깜짝 놀라 꿈을 깨었다. 흑룡의 꿈을 꾸고 나자마자 태어난 아기, 그가 뒷날 율곡이었다. 사임당 내외는 꿈에 용을 보았다 하여 율곡의 아명을 현룡이라 불렀으며, 율곡을 낳은 침소를 몽룡실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사임당은 여러 자녀들 중에 셋째 아들 율곡을 특히 사랑했고, 율곡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7남매의 어머니로서 사임당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사임당은 평소에 유교의 경전을 읽어 현부의 길을 밟아 나갔다. 7남매를 키우는 틈틈이 익힌 글씨는 뒷날 시인 묵객들의 찬사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1868년 강릉 부사로 부임한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보고 이렇게 예찬했다. "과연 그 필적에 있어서는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저 옛날 무왕의 어머니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명종 때 어숙권의 말이다. "사임당 신 부인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가나고 하였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솔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랴." 사임당은 딸들의 교육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장녀 매창과 넷째 아들 우는 그녀가 기른 빼어난 예술가였다. 외로운 이내 신세 한탄 하노라 범이 차서 가진 임 옷 꿰매노라 사창에는 한 나절 해가 비칠 때 머리 숙여 바느질 손 놀리노라면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네 강가 다락에서 느낀 대로..... 사방들에 가을 빛이 너무 좋기에 혼자서 강가의 다락 오르니 어디선가 풍류객이 날 쳐다보고 술병하고 다락으로 찾아오시네 이매창의 이와 같은 풍부한 감성과 꺼질 줄 모르는 시심은 그것이 그대로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었다. 율곡은 뒷날 어머니 사임당을 회고하여 이렇게 쓴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며,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지으며 우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시기도 했다." "어느 때 친척 되는 심공의 집 시비가 와서 거문고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는 그 곡조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으시므로 온 방안 사람들이 모두 따라 슬픈 생각에 잠겼다." 고행과 모정을 그리는 밤에 눈물짓고, 슬플 때 밤을 꼬박 새우며 울 줄 알았던 천부적 여류 예술가 사임당은 학문과 문장, 그림과 글씨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아들 율곡을 역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와 딸 매창을 다 그 시대의 추앙받는 예술가로 키워 놓고 1551년 5월,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 - 이정란 (1/2) ‘첩 두자’는 상소에 팔 걷어부친 여자들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말이 되면 일부다처제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시기의 해프닝으로 ‘박유사건’이 주목된다. 원 간섭기에 박유라는 재상은 평소에 늘 주위 사람들에게 주장하기를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여자의 머리가 희어지도록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 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고하를 물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인원수의 제한이 없이 장가를 드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몰려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처와 첩을 두게 하되 그 관품에 따라서 그 수효를 줄여서 서인에 이르면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얻도록 법제를 만든다면, 원성은 줄어들고 인구는 번성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도리도 됩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부녀자들이 모두 박유를 원망하며 앞으로 변화할지 모를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연등회를 보기 위해 박유가 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첩을 두자고 건의한 거렁뱅이 늙은이다”라고 외쳤고, 이에 주위의 여인네들이 모두 그에게 손가락질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재상들 중에 자신의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박유의 건의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고려가 당시까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실제 남자의 수가 여자의 수에 비해 훨씬 적어 결혼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생겨났고, 또한 일부다처의 사회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고려말에 일부 관인층 사이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집살이 않은 여성, 처가살이하는 남성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혼인한 뒤 어느 쪽에서 거주했을까? 당연히 남자 집에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고려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는 주로 서류부가혼이 일반적이었다. 즉 결혼식을 처갓집에서 하고, 결혼 후에도 일정 기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라거나 “뒷간과 처갓집을 멀수록 좋다”거나, “출가외인”이란 말은 모두 조선시대에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경우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위가 처가살이 자체를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가살이를 계속하여 자신의 손자까지 처가에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왕자도 외가에서 자라는 경우가 있었다. 인종의 어머니는 유명한 이자겸의 딸로, 인종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다. 비록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이 이자겸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도 인종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란 것이다. 유명한 관리의 묘지명을 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외가에서 자라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의 은혜가 크다는 기록도 흔히 나오고 있다. 처가살이가 고려시대 일반적인 결혼 생활의 한 가지 유형이었던 만큼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던 조선시대에 비하면 고려의 여성들이 친정에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시집살이를 하였더라도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을 겨우 계속해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의 경우에는 과부들 중 상당수가 친정에 되돌아가서 생활을 하였다. 아들 딸 차별없이 균등 상속, 균등 의무 고려시대 재산상속은 자녀간의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부모의 유언이 없을 경우 재산은 자녀간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당시 재산의 균분은 관습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부모가 죽은 후 형제자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를 꺼렸던 이지저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의 사례는 자녀간 균분상속의 관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손변이 경상도의 안찰사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 남동생과 누이가 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이고 있었다. 남동생은 “한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누이 혼자 재산을 갖고, 동생은 그 몫이 없단 말입니까”라고 하였고, 누이는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전 재산을 나에게 주고 네가 가질 것으로는 검은 옷 1벌, 검은 관 1개, 신발 1켤레, 종이 한 장뿐이었으니, 어찌 이를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송사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았는데, 손변이 부임해 와서 이 송사를 듣고 이르기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균등한데 어찌 장성하여 결혼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박하겠는가? 어린아이가 의지할 자는 누이였으니 만일 누이와 균등하게 재산을 물려주면 동생을 사랑함이 덜하여 잘 양육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하게 되면 물려준 옷과 관을 갖추어 입고서 상속의 몫을 찾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종이와 붓 등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라고 하니, 누이와 남동생이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이 사례를 통해서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자녀간의 균분상속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비록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균등하지 못한 유산상속을 했더라도 이것은 아버지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결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녀간에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에 따른 의무도 균등하였음을 의미한다. 재산상속에 따른 자녀의 의무는 부모 살아서는 부모 봉양을 잘 하는 것이고,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 생전에 부모에 대한 봉양은 조선 후기 이후에는 전적으로 장남의 몫이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딸도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부모가 딸과 사위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부모 봉양에 있어 딸의 역할이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호적에서 아들·며느리와 동거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딸·사위와 동거하는 경우가 상당수에 달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가 바로 재산상속에 따른 또 하나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래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장자의 책임이었고, 이런 책임을 맡은 장자는 그 의무에 상응하여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봉사조라는 명목으로 적어도 20퍼센트를 더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제사는 장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의무이자 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 1990년에 민법이 개정될 때까지는 호주는 재산상속분에서 5할을 더 가산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고려나 조선 전기에는 제사가 장남만의 몫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조상에 대한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돌아가며 맡았는데, 이를 윤행이라 하였다. 즉 재산균분에 따라 제사도 자녀간에 균등하게 돌아가며 이루어졌던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부끄러움을 알게 해 준 친구 나는 어릴 때 몸이 많이 허약했다. 체력이 워낙 약한 탓도 있었지만 엄마의 지나친 보호가 나를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 체육 수업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랑 뛰어논 기억도 별로 없고 소풍도 엄마의 채근에 못 이겨 억지로 따라 나섰다. 게다가 선생님들까지 내가 건강이 안 좋다며 많은 배려를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학년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체육 시간에 교실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남자아이와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수업시간에도 모자를 벗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시간, 그날도 그 애와 단둘이 교실에 남아싿. 나는 그 애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야, 왜 너는 내일 모자를 쓰고 있지?" 그 애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안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해서 나는 그 애 뒤로 슬금슬금 가서 모자를 확 벗겨 버렸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애의 머리엔 머리카락은 없고 듬성듬성 솜털 같은 것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 애의 머리를 쑤욱 눌렀는데 물렁물렁했다. 그 애는 당황한 채로 서 있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마룻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썼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애는 조용히 자신의 아픔을 참아 왔다는 것을, 갑자기 조금만 아파도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던 나의 철없는 행동들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애가 얼마뒤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 이임경 님/부산시 수영구 망미2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9 - 혁명의 불길을 당긴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그때 세계에서는 1787년: 미국, 연방헌법 초안이 이룩되고 각 주의 비준 시작 1789년: 라부아지에"질량보존의 원리" 1789년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루소와 볼테르가 죽은 지 3년 후의 일이다.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모두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이 그 정신적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 자신도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렇게 배웠다. 사실 이 사상가들의 이성적인 힘과 자유의 정신이 프랑스 정신계를 일깨워줄 수 없었다면 혁명적인 민중봉기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루소의 "민약론"은 미래지향적인 정치방향과 국민적 권리의식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체계의 기틀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정리된 저서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었다. 이런 것은 선진국가가 되는 하나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120년쯤 전에 "민약론"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정치지도자들이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 프랑스식 민주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정객들이 있었다. 그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40년쯤 전의 일이며, 우리 정치가들에게는 관심 밖의 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상과 이념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거 같은 인상이 들기도 한다. 루소는 학교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여러 가정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학문과 사상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나는 생각하기 전에 느끼기부터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의 고백에서 그의 영국적인 계몽정신이 백과전서 시대로 발전했고, 그것이 다시 감정주의 철학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바로 루소가 그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국민학교 여선생에게 사랑의 뜻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이 관여한 음악이 연주될 때 귀부인들이 참석한 데 대해 감격의 정을 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바 없는 하녀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첫아기를 낳을 때까지 달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루소는 말년에도 숲속을 산책하다가 누군가의 인사를 받으면 황급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고 한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같이 느껴지곤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이 루소 같은 이를 통해 전달된 내용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모든 삶의 판단은 이성에 의해서였고, 개인에게는 자유가, 사회에서는 평등이 보장되는 삶과 국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에 왕권과 결탁되어 전통적인 신앙을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던 종교계에 대해서는 이성적 판단은 큰 혁명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혁명 당시 제창된 박애정신도 기독교 전통의 사랑의 정신이기보다는 휴머니즘의 결실로서의 박애정신이었던 것이다.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후진국에 속하던 독일로까지 번져갔다. 칸트도 대단한 루소의 애독자였다고 전해진다. "민약론"에 도취된 나머지 그의 유명한 산책시간을 놓쳤다고 전해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모든 정치와 자유로운 사상은 프랑스에서 전해지는 듯이 믿어졌고, 독일사상가들의 혁명에 대한 기회와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을 칸트에게로 계승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크리스티안 볼프 같은 철학자도 그런 부류의 철학자에 속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국, 프랑스, 독일을 휩쓴 계몽주의 정신은 서구사회를 새로운 무대로 변질시키는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후부터는 세계 여러 후진국들이 자시 나라의 계몽주의 시대를 찾아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명치유신 기간을 일본이 새로이 태어나는 계몽주의 시대였다고 자인하고 있다. 적지 않은 선구자들이 미국과 유럽을 다녀왔고 서구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는가하면, 그 사상들이 일본 변혁기의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계몽주의는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유도해주며 정치사회의 변혁을 약속해주었다. 일본도 그런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계몽기적 역할을 언제, 누가 감당해왔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계몽기간은 퍽 늦었던 것 같아보인다. 어떤 이들은 사상적 계몽기는 19세기말기보다는 20세기 초반기에 속하지 않는가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최남선, 이광수씨 같은 이의 역할을 얘기하기도 한다. 철학의 계몽기는 더 늦었을지 모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글로 된 철학책이 단 두 권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한치진씨의 "철학개론"과 "인생과 우주"뿐이었던 것 같다. 해방이 된 뒤에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몇 권의 철학책들이 출간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일본어로 읽기는 했으나, 그것은 주로 번역서들이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학독'은 원래 '확독' ...나무나 돌을 움푹 파서 고추를 찧는 도구 어느 분이 '학독'의 뜻을 물으셨고, 이 태영 교수가 그 뜻을 알려 드렸습니다. 방언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이 태영 교수의 풀이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 '학독'은 원래 '확독'입니다. '확'은 지금도 방언형에서 쓰이고 있는데, 나무나 돌을 움푹파서, 그곳에 고추를 넣고 찧거나 하는 도구를 말합니다. 움푹 들어간 곳을 '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독'은 '돌'의 방언형입니다. 지금도 남부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늘 말하는 '바둑'의 '둑'도 원래는 '돌'의 뜻입니다. '바둑'도 방언에서 '바돌'이라고 하는 지역이 많거든요.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육신, 그 하찮은 것들 - 프로티누스 / 데모낙스 / 함허득통 프로티누스 프로티누스(서기 205-270)는 일체가 죽어도 죽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인간에게는 신적인 것이 있다 는 것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다. 나는 가끔 육체로 부터 나 자신으로 깨어나 다른 모든 것 밖으로 나가고,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와 경탄할만한 아름다음을 거기에서 발견한다. 이렇게 황홀경의 체험을 말한 그는 신비주의의 개조가 되어 시인 키츠, 예이츠, 엘리어트, 릴케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폴피리우스, 디오니소스,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헤겔 등으로 계승되었다. 프로티누스는 자기가 육체를 쓰고 있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상이나 부모나 고향에 대하여 일체 말하지 않았다. 고 폴피리우스는 그의 전기에 적고 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을 때, 그는 노발대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자연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그림자(모상)를 쓰고 있는 것도 부족해서 좀더 오래 가기 위해서 그림자의 그림자를 그려서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는 만년에 폐결핵과 후두염을 앓았다. 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손발에 종기가 흉했으나 끝까지 강의실에서 최선을 다했다. 흐려진 목소리로 프로티누스는 임종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들의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을 만유 속에 있는 신적인 것 밑으로 돌이켜 올려보내기 위해서 나는 지금 애쓰고 있다. 한 마리의 뱀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및을 지나서 담 사이의 틈 바구니로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을 때, 바로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6세였다. 데모낙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낙스는 107세가 되어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처럼 식음을 전폐하여 굶어 죽고 말았다. 당신 같은 분의 유해가 개나 새 따위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언을 따를 수 없다고 우겼다. 데모낙스는 말하였다. 죽어서도 아직 살아 있는 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데모낙스도 몸(시신)을 가벼이 여겼다. 함허득통 스님 무학 대사의 제자이던 함허득통 스님은 더 쉬운 말로 이것을 설명했다. 원래 죽음이란 없는 것이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한다면 부스럼딱지와도 같은 시신은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죽음은 부스럼이 딱지져 딱지를 없애는 것과 같고, 묶은 것을 풀어서 칼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고, 새가 초롱을 나오는 것과 같고. 즉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요. 그런데도 육신을 잊지 못해 어찌 미련을 두는지, 이런 사람의 시체는 물에 띄어도 옳고 길가에 팽개쳐도 옳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3. - 14세기 중세를 뒤흔든 흑사병 현대에도 에이즈라는 죽음의 병이 있지만 그것은 세계를 뒤바꿀 만큼 무시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커다란 전염병의 발생은 사회 경제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의 심성까지 바꾸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4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흑사병(Black Death)이다. 페스트의 일종인 흑사병은 아시아 지역에서 발원하여 1346년 봄 이탈리아 상선대에 의해 흑해 연안에 도달했다. 이후 크림 반도 남단에 상륙하여 무역로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러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북부 도시까지 강타했다. 같은 해 말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에 퍼졌고 다음해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이 되면 흑사병은 영국 전역까지 만연했고 1350년에는 북유럽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의 의학으로는 이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는 엄청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시의 인구는 엄청나게 줄었으며 농촌 마을도 사람들이 죽거나 병마를 피해 마을을 버린 까닭에 폐촌이 된 곳도 적지 않았다. 흑사병으로 인한 희생자수는 확실치 않다. 대략 당시 유럽 인구의 1/3~1/4인 약 3,000만 명이 쓰러졌다고 한다. 또 당시 교황청은 사망자수를 4,283만 4,486명으로 추산했다. 엄청난 인구 감소를 가져온 흑사병은 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죽음의 공포가 사회를 휘감았으며 살아 나기 위한 투쟁은 기존의 가족 관계나 인간 관계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굴렀다. 죽음의 대한 공포는 흑사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가중되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설이 난무했지만 모두 허황된 것들이었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 그럴듯하게 퍼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평소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이나 집단이 공격을 받았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속죄를 부르짖는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 종교 집단도 발생했다. 그럼 이 엄청난 사태를 겪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 흑사병의 피해가 컸던 곳은 무엇보다도 인구가 밀집했던 도시 지역이었다. 요행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죽은 귀족이나 대상인들의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텅 빈 도시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운영권도 이 과정을 통해 재산을 획득한 신참자들에게 돌아갔다. 한 마디로 도시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완전히 흔들릴 정도로 바뀌었다. 농촌의 경우는 사망률은 낮았지만 인구비가 높았기 때문에 실제 사망자수는 더욱 많았다. 그 결과는 엄청난 노동력의 부족과 방치된 많은 토지 그리고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였다. 살아 남은 영주들은 어떻게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며 따라서 임금은 계속 상승했다. 반면 임금 인상이라는 방법과는 정반대로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농노 해방을 중지하고 부역을 강화하려는 영주들도 나타났으며 정부에서는 임금을 묶어 두려는 억압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동적인 시도는 강화된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 이외에도 흑사병의 유행이 사람들의 심성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짧은 기간에 일어난 대량의 죽음, 그것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은 사람들에게 늘 삶과 함께 하는 동반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양한 미신적 종파를 발생시켰다. 죽음을 가져오는 병을 신의 분노로 보고 몸 안의 악을 내쫓기 위해 신자들이 서로 채찍질을 하면서 행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신과의 영적인 합일에 의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흑사병 이후 그림에는 최후의 심판과 지옥이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으며 조각을 통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나타났다. 의학적 무지에 의해 흑사병의 피해가 더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흑사병은 상업의 발달로 인한 물자 교류의 확대에 의해 급속히 퍼졌다. 이것이 당시 농업 생산력의 정체로 나타난 봉건 경제의 전반적인 위축과 맞물려 커다란 희생을 초래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흑사병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1) 은혜를 모르는 일본에게 전쟁배상금을 받았다면...... 쩌우인라이 총리가 일본의 전쟁광들과 일본 국민은 별개라고 한 당시의 생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이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생각이었다. 쩌우인라이는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우리가 일본에 대해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배상하라고 우긴다면 이 부담은 결국 일본 국민들의 어깨에 얹혀질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히데키 토조(東條英機)를 우두머리로 하는 극소수의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이고 모든 일본 국민들 역시 이들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다.' 당시 모든 중국인들은 쩌우인라이의 태도-사실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 찬성하였다. 맞는 말이다. 우리 중국은 이처럼 대국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배상은 다음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양국이 계속해서 우호적인관계를 유지하고 이전과 같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전쟁의 배상이 일본 국민들에게 정말큰 부담이 된다면 우린들 이 돈을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갰는가? 우호적 중 . 일 관계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마음과 중국인 특유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주는' 사고는 유감스럽게도 모든 일본민족에게 어떠한 존중이나 이해도 받지못했다. 만일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전쟁배상금문제는 다음으로 미루어 두었다가 차후 때를 기다려 다시 거론하여 결산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중국인의 속이 좁거나 변덕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듯이, 우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고해서 일본인들이 우리에 대해 진정한 우호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우호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자구책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냇물 건너 이웃'이나 '같은 문자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항상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친밀감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은 적이 없다. 사실 전후 일본 전범들을 재판할 때 국제사회에서는 전쟁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생명과 재산손실에 대한 일본의 배상액을 규정했었다. 그 중 중국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배상금을 받도록 판결되었지만, 실제로 확정된 배상액은 우리들이 입은 피해의 실제상황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제점은 종종 역사의 진전과 국제관계의 변화로 점차 명확해지기도 한다. 잘못은 군국주의가 저지른 것이고 일본 국민들도 이들의 피해자란 말은 맞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자란 토양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민족모두가 국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었다면 군국주의가 그렇게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모호한 과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했다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논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중국인이 군국주의와 국민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것은, 바로 일본민족이 더욱빨리 전쟁의 상처와 절망과 비애에서 벗어나게 하고, 제대로 된 국가의모습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며, 국교수립을 통해 같이 손을 잡고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관용의 나무가 맺은 치졸한 돌연변이의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 국민에게 전쟁배상의 무거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소박한 생각은 중국인이 새로운 시대에 걸었던 희망을 앗아갔으며 또 우리 선배들의 피어린 상처는 상징적인 위로조차도 받을 길이 없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것은 고작 침략자를 내쫓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현대화 속도는 더욱 빨랐을 것이며 국민들의 생활도 지금보다 훨씬 풍족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받아야 할 채무를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이라는 죄인이 반성하는 절호의 계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시 전쟁배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일본이 거론하고 있는 대중국 차관에 관한 문제도 간단해졌을 것이다. 우리가 배상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일본이 마음대로 대중국 차관을 동결하는 수법으로 중국을 압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대중국 차관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죄악에 대한 일종의 배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중국이나 일본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러한 각도에서 대중국 차관문제를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 만약 일본이이 문제와 연계하여 중국의 핵실험 포기를 요구한다면 이는 비열하기 그지 없는 행위로써 국제 정치무대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상 이야기한 내용은 모두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찮은 권리를 포기하였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가정' 할 권리뿐이다. 2) 처신도 못하고 낮만 두꺼운 일본 1978년 중 . 일 간에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후 쌍방 간에는 무척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빵(胡濯邦)은 다음 21세기에도 양국이 화합하고 공존공영하길 바라며 직접 중 .일 간의 청년교류를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80년대 중반 3천 명의 일본청년이 중국으로와 중국청년들과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중국의 신세대 지도자들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질곡을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세계의 미래를 바라보고 중국이 가야할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3천 명의 일본청년들이 중국에 왔을 때 외형상으로는 조금 우쭐해 하는 면이 있긴 하였으나 가식적인 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시 쌍하이 화똥(璜)사범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청년들이 쌍하이에 오기 전까지는 마치 무슨 중요한 경축일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교내를 청소하고 꽃을 꽂고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주고 받기 위해 속성으로 일본어를 배우기까지 하였다. 학교 극단에서는 중 .일 우호를 주제로 한 연극을 준비하였다. 그때 쑴창은 극중에서 전쟁 당시 중국 부녀자를 강간하였으나 종전된 후 중 .일 우호관계에 전력을 다하는내용의 한 일본 노인 역을 맡았었다. 그는 몰입해서 연기하였고 무대를 내려와서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교내에서 모든 여학생들이 그를 피해다니는 등 그가 겪은 고통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눈앞의 구름과 같이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가 가졌던 흥분은 냉엄한 현실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일본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중국 인민의 인권을 대대적으로 유린하고 박탈했던 나라가 무슨 자격으로 인권을 논하고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질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는다. 모두 알다시피 최근 일본 국내의 적지 않은 정계요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시아를 침략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과서에 실린 소위 '중국으로 진출하다'는 표현은 일본인이 민간여객기를 타고 중국에 왔다는 뜻이란 말인가? 한 일본 병사가 중국의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공중에 들어 올린 사진을 보고도 일본 국내에서는 반성의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난징 대학살이라고? 3십만 명? 이거 일본을 모함하려는 계략 아니야?'라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아직도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실어 자신들의 억울함을 벗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 각국의 압력으로 '망언'을 일삼는 고위인사들을 물러나게 하여도 망언은 끊이지 않았다. 왜 뒤에 오는 사람마저도 연거푸 망언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한 연극이며 그것도 명연기를 하는 연극임에 틀림없다. 현재 일본을 이끄는 정치가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과거의 역사는 인간이 창조해 온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 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다'라는 신념에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침략'은 '진출'로 바뀌었다. 일본군대는 분명 중국에 왔었다. 그 진출의 방식에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난징 대학살사건 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는지 여러 번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확실한 자료나 자세한 기록도 없다. 게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상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이 전범들의 망령을 추도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만 해도 그렇다. 이에 대해 중국이 거듭해서 언급한다면 이는 일본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일본이 가진 중국 국민의 인권에 대한 태도이다. 제6차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취한 행동을 일본이 추종하는 것은 더없이 교활한 짓이다, 같은 패전국으로서 독일이 반성하는 태도는 일본에 비해 훨씬 진지하고 성실하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전후 여러 해 동안 독일은 몇십억 마르크를 자발적으로 내놓아 침략당하고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게 배상하였고,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이 가장 컸다고 한다. 이는 독일인의 마음속에 지고 있던 빚을 더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독일에서 파쇼의 영혼을 부르는 짓을 했다간 법에 의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세계가 보는 가운데 2차대전중 희생당한 폴란드인들의 영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행동은 결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도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전세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본 수상도 중국의 영토에 들어와 무릎을 끓은 적이없으며 어떤 정치가도 중국에 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한 행동으로 우리를 감동시킨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야스쿠니신사와 전범들의 위패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으니까. 이상으로 우리는 일본의 인권 관 역시 '모호'하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진심으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존중하는 것은 서구의 가치관과 서구의 대중국 전략일 뿐이다. 마치 그들이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하려 했을 때와 같이 미국이 앞서 달려가니까 황급히 뒤쫓아 갔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감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국교정상화를 꾀한 일본인의 생각은 아주 실질적이고 긴 '안목'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야말로 잠재력을 가진 얼마나 거대한 시장인가? 당시에 중국인을 6억으로 계산했을 때 모든 사람이 일본산 신발을 한 켤레씩만 사도 6억 켤레가 된다는 계산이다. 국제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구미에는 얼굴을 내밀고 아시아에는 등을 돌리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자신들의 '처신'조차도 아주 모호하고 번잡스러워 아시아나 구미를 막론하고 어느 국가 하나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봄을 기다린 두 토끼 겨울 산 속에 두 마리 토끼가 살고 있었다. 한 마리는 양달진 산비탈에 살고 있었고, 또 한 마리는 응달진 산비탈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나깨나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소원은 하루 속히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일이었다. 허옇게 산을 뒤덮은 흰눈이 녹고 계곡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산과 들에 막 새로 돋기 시작한 이파리들을 마음껏 뜯어먹는 일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다. 조금 따뜻한 기운이 돈다 싶어 굴 밖으로 머리를 조금 내밀면 이내 한풍이 휘몰아쳤다. 지난 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래로 내내 굴속에 갇혀 겨울잠만 자고 있기란 정말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아아, 언제 봄이 오려나?" "춥고 배고파서 못 살겠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봄은 오겠지." 그들은 하루하루가 1 년 같았다. 겨우내 먹을 양식마저 곧 떨어질 것 같아 아끼고 또 아껴 먹었다. 땔거리마저 모자라 한밤중에 기온이 뚝 떨어져도 불을 지피지 않고 참고 견뎠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 누구와 살이라도 맞대고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봄은 돌아올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굴 밖으로 나가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 굴 밖으로 나갔다가는 토끼 몰이 나온 마을 사람들이 산 위에서부터 몽둥이를 들고 몰아쳐 내려오면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잡혀 버릴 게 뻔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구나. 참고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봄이 오겠지." 그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다시 깊은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양달진 산비탈에 살던 토끼는 이따금 깨어나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봄이 와서 눈이 녹았나 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엔 눈이 허옇게 쌓여 있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게로군. 깨어날 때가 아직 멀었어." 그는 다시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눈을 뜨고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어머나!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았네. 눈이 다 녹으면 나가야지." 그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는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는지 모른다. 눈을 떠서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면 언제나 눈은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토끼는 양달진 굴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굶어 죽고 말았다. 응달진 산비탈에 살던 토끼도 문득 겨울잠에서 깨어나 건너편 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볕바른 그곳엔 어느새 눈이 다 녹아 버리고 없었다. "아, 내가 잠든 사이에 벌써 봄이 왔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구나!" 그는 얼른 굴 밖으로 뛰어나와 눈 녹은 양지쪽을 행해 힘껏 달려갔다. 그러나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그는 결국 굴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찬바람 몰아치는 산 속에서 얼어죽고 말았다. 양달과 응달에 살던 두 토끼가 봄을 기다리다가 그만 둘 다 죽고 만 것이다. 글터 → 이글저글 사슴은 콧구멍 외에도 숨쉬는 기관이 하나 더 있어서 달리기를 많이 할 때 숨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한다.돌고래의 IQ는 90정도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짝사랑에 번민하기도 한며 호모 섹스를 즐기기도 한다.박쥐는 공중을 날 때 입으로 1초에 30 - 60회 진동하는 빠르고 작은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너무 높아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이 소리가 물체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면 박쥐는 그 소리를 듣고 그 물체의 위치를 알게 된다. 박쥐의 귀는 1초에 100,000회 진동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온갖 물건이 꽉차 있는 방이라 해도 쉽게 날아다닐 수 있다. 하지만 박쥐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여기저기 부딪쳐서 날 수 없을 것이다.소는 색맹이므로 빨간색을 알아보지 못한다. 따라서 투우를 할 때 투우사가 빨간천을 흔들어 소를 흥분시킨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다. 개도 색깔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새는 색깔을 볼 수 있다.고양이는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거세된 소는 거세되지 않은 소보다 일을 더 잘한다. 고대인들은 아이들을 거세한 뒤 그 껍질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고래는 보통 100톤이 넘고 쥐는 겨우 몇 그램밖에 되지 않지만 둘 다 처음에는 비슷한 크기의 알에서 시작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