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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49 호
4339.11.03 (09.13)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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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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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시며 → 자유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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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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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교양이란 화를 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은 채 어떤 얘기라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말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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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40. We have a blurry picture.
저자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어느 일요일, 미국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하니까 I'm just watching the boob tube.라고 하기에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Watching what?(무얼 보고 있다고?)라고 반문했더니 그는 다시 I'm watching TV.라고 고쳐 말했다. 미국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가끔 the boob tube 또는 더 간단히 the tube라고도 한다. 우리도 텔레비전을 가끔 '브라운관'이라고 부르는데 브라운관의 '관'이 tube이다. 그래서 아마 미국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the tube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tube를 텔레비전이란 뜻으로 사용할 때는 반드시 앞에 the를 붙인다. boob는 '바보'라는 말이다. 텔레비전만 너무 보고 있으면 사람이 멍청하게 된다는 뜻에서 텔레비전을 경멸적으로 the boob tube라고도 한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 일부러 텔레비전을 the tube나 the boob tube라고 할 필요는 없고, 미국인이 이런 말을 쓸 때 알아듣기만 하면 될 것이다.
A: What kind of television do you have? B: We have a color TV. A: What make is it? B: An RCA. A: What size? B: A 25-inch console. We also have a 13-inch black-and-white portable. A: 어떤 텔레비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B: 컬러 텔레비전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A: 어느 회사 제품입니까? B: RCA입니다. A: 크기는요? B: 25인치 콘솔입니다. 그리고 13인치 휴대용 흑백 텔레비전도 있습니다.
* console은 TV를 받침대 없이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상자.
텔레비전이 고장나서 TV repair shop(텔레비전 수리점)에 전화를 걸었다. A: Tom's TV Repair. B: My TV set is out of order. Do you make house calls? A: Yes, we do. What seems to be the problem? B: The picture is out of focus. A: I see. What make is ti? B: An RCA color. A: What size is it? B: A 30-inch console. A: Okay. We'll send a technician tomorrow morning? Will anyone be home? B: Yes. A: may I have your name and address, please? B: George Brown. The address is 3246 Maple Street. A: What's your phone number? B: 484-5321. A: All right, Mr. Brown. Thank you for calling. Bye. B: Bye. A: '탐즈' 텔레비전 수리점입니다. B: 우리집 텔레비전이 고장입니다. 집에 와서 좀 고쳐줄수 있습니까? A: 예, 할 수 있습니다. 어디가 고장입니까? B: 화면의 초점이 맞지 않습니다. A: 알겠습니다. 어느 회사 제품이죠? B: RCA 컬러 텔레비전입니다. A: 크기는요? B: 30인치 콘솔입니다. A: 좋습니다. 내일 오정에 기술자를 보내드리죠. 집에 누가 계실 겁니까? B: 네. A: 성함과 주소 좀 대주시겠어요? B: 조지 브라운입니다. 주소는 3246메이플 스트리트입니다. A: 전화 번호는요? B: 484-5321입니다. A: 알겠습니다. 브라운 씨. 저희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B: 안녕히 계십시오.
텔레비전 고장을 설명하는 말 몇 가지를 더 소개하면, We have a blurry picture.(화면이 흐릿하다-초점이 맞지 않다) We have a fuzzy picture.(화면에 눈이 내리는 것 같이 뿌옇다) We have a jumpy picture.(화면이 자꾸 아래위로 움직인다) We have double images.(화면이 이중으로 보인다) We have no picture at all.(전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We have no audio at all.(소리가 전혀 안난다) We have squeezed images.(화면이 찌그러져서 보인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The 8-year-old girl was showing her younger sister a picture of the baby Jesus and Mary. The little one looked closely at the picture and asked,"where's Joseph?" Her sister pondered for a moment, and then said, "He's taking the picture!" 8살 먹은 소녀가 어린 동생에게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동생은 그림을 자세히 보다가 물었다. "요셉은 어디 갔지?" 언니는 잠시 곰곰히 생각한 뒤 대답했다. "요셉은 이 사진을 찍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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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해삼물류>
38.명태 - 동해안의 보물
명태를 중요한 생선의 하나로 여기고 다양하게 조리하여 먹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도 명태가 잡히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명태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옛 의서에도 명태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 민족만이 유일하게 명태를 즐겨먹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어느 민족이건 그 민족만 특별하게 먹는 음식이나 식품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저 어찌어찌 하다보니 명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생선이 되었다고 가정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기름기 적고 담백하며 시원한 맛이 우리 민족 고유의 식성과 잘 맞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조상들이 명태를 즐겨 먹어온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는 있다. 이렇게 명태를 즐겨 먹었던 까닭에 '맛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로는 명태'라는 말도 생겨날 정도였다. 즉, 명태는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가장 많이 먹어온 생선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양가도 풍부하며 어느 한 군데도 버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는 점에서 볼 때 명태는 우리 민족과 가장 친근한 생선이다. 그래서 명태는 이름도 많다. 생명태를 선태라 하고 망태, 간태, 북어, 춘태(이상 자란 명태)왜태, 애태, 애기태, 노가리(이상 명태새끼)건태, 동태, 북어(이상 가공한 명태)등 20여 가지가 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류성 물고기인 명태는 우리나라 동해안 북부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명태의 주된 산란장은 우리나라 원산만 부근과 북해도 서쪽 연안이며 1∼2월에 가장 활발하게 산란을 한다. 산란을 할 때에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부들이 그물로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몽롱하게 취해버린다. 산란 시각은 자정부터 새벽까지이고 바람이 자거나 부드러울 때 주로 산란한다.
그러나 산란이 끝난 명태는 잔뜩 굶주린 승냥이처럼 작은 물고기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는다. 이처럼 잔인할 정도로 먹어치우는 바람에 정어리, 멸치, 도루묵, 오징어 등은 숨바꼭질을 하듯 명태에게 쫓겨다닌다. 그리고 해삼, 조개, 털게 같은 것들은 아예 집을 버리고 도망쳐버리기도 한다. 산란을 위하여 명태가 연안으로 찾아들면 그때까지 평화롭게 살던 작은 물고기들은 이같이 비상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명태는 대구와 그 생김새가 비슷하다. 그리고 생김새가 비슷한 만큼 왕성한 식욕에 있어서도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명태는 대구떼를 만나면 형님, 아우 하듯이 함께 몰려다니며 놀라운 식욕을 발휘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상어새끼와 돌자갈, 심지어는 자기 새끼까지도 잡아먹는 대구가 제 덩치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명태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명태가 지닌 특유의 독성 때문으로 보인다. 명태와 대구는 이처럼 생김새나 식욕에 있어서 사촌쯤 되는 관계이지만 자세히 보면 명태는 대구보다 몸통이 조금 작고 날카로운 이가 촘촘하게 나 있다. 또한 명태는 입을 다물었을 때 아랫턱이 윗턱을 덮고 대구는 윗턱이 아랫턱을 덮는다. 그리고 명태는 턱 아래에 짧은 수염이 하나 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명태와 대구를 구분할 수 있다. 명태는 3∼4살쯤 되면 다 자라서 성어가 되는데 암컷이 수컷보다 크며 숫자도 많다. 다 자라면 길이 35cm쯤 되고 수명은 8년 이상이라고 한다. 명태는 회유성이 강한 물고기로 원산만에서 북해도 서안까지 회유하기도 하는데 회유속도도 매우 빨라 하루 10마일을 회유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완전한 생활상을 추적하기가 어려워 자세한 생태는 알기가 어렵다.
명태는 장기간 보관을 해놓고 필요할 때 먹을 수 있는 생선이다. 그래서 잡아올린 명태는 일단 건조를 시켜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명태 말리는 방법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이다. 명태는 주로 겨울철에 많이 잡아올리는데 이 때 동해안에 인접한 지방에 가면 어디서든 해안에 설치된 명태 건조장을 구경할 수 있다. 말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건조장에다 갓 잡아온 생태를 걸쳐서 냉동건조시킨다. 그러면 밤에는 명태 세포 사이에 있는 수분이 얼어붙었다가 낮에는 얼음이 녹으면서 천천히 건조된다. 이처럼 밤에 얼었다가 낮에 녹는 현상이 오랫동안 반복되면 명태살이 졸아들었다 부풀었다 하기 때문에 바짝 말라도 겉이 부드럽고 누르스름한 빛을 띠게 된다. 이렇게 말린 명태를 황태, 또는 더덕북어라고 한다. 살이 황금빛이 나고 제맛을 내는 황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하 20도 이하의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한겨울 내내 명태를 잠재워야 한다. 명태가 우리 민족의 식성에 맞는 물고기로 각광을 받아온 것은 단지 명태 자체의 영양분이나 맛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한겨울의 모진 추위 속에서 뿜어낸 어부들의 입김이 서리고 서렸기 때문에 '많이 먹기로는 명태'라는 말이 성립되었는지도 모른다.
성분
명태의 주성분은 단백질이다. 그리고 함유량은 쇠고기, 계란, 우유와 거의 비슷한 정도이다. 명태육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조성은 인체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이 고루 들어 있어 질적으로 매우 우수하다. 또한 명태육에 들어 있는 지방의 함량은 적지만 간장에는 지방을 많이 축적하고 있다. 창란젓과 명란젓도 영양가가 대단히 높다. 우선 지방의 함량을 보면 명란젓은 3.2%, 창란젓은 3.6%로 두 가지 다 팔미트산, 올레산, EPA, DHA의 조성비가 높은 영양식품이다. 특히 명태의 간에는 지질 함량이 많아 46.2%에 이르며 이들의 지방산 조성은 포화산으로는 팔미트산, 불포화산으로는 EPA, DHA의 함량이 많아 건강식품으로 권장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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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명태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생선이다. 살은 국이나 찌개를 끓이고, 내장은 창란젓을, 귀세미로는 귀세미젓을, 알은 명란젓을 담가 먹으며 눈알은 구워서 술안주로 먹는다. 고니는 그대로 빼내어 국을 끓이고 생살을 짓이겨서 어묵을 만들기도 한다. 피문어와 홍합과 파를 함께 넣어서 '건곰'이라는 국을 끓이는데 이것은 노인이나 병후의 환자들에게 좋은 보신음식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리나라 동해안의 명태는 각종 독에 중독되었을 때 최고의 해독제이기도 하다. 날로 늘어가는 농약중독, 공해독, 연탄가스 중독, 독사에 물렸을 때, 미친개에게 물렸을 때 등 어디든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명태의 약성을 이와 같이 새롭게 소개한 {신약}에 의하면 명태는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라, 연탄가스에 중독되거나 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에 걸린 사람도 깨끗이 치료한다. 그리고 독사나 미친개에게 물렸을 때, 핵독이나 각종 공해독에 신비한 약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명태가 눈병에 좋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같은 효능이 사실로 입증된 사례도 있다. 옛날에 함경북도 삼수갑산 같은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은 풍토병이 많았다 한다. 이 풍토병에 걸린 사람들은 겨울 동안 가까운 해변이나 어촌으로 내려가 머물면서 명태 창자 속에 들어있는 간유를 빼먹어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이것이 토종
요즈음 우리나라 동해안에서는 명태가 별로 잡히지 않는다. 주로 먼 북양에서 잡아오는 명태가 대부분이다. 이런 명태는 덩치는 크지만 오랫동안 물속에 담가오므로 살속의 간맛이 모두 빠져버려 싱겁고 퍼석퍼석해서 별로 맛이 없다. 반대로 동해안에서 잡은 명태는 크기는 작아도 짭짤하고 구수한 맛이 나는 데다 양념을 잘 흡수하므로 가장 질 좋은 것으로 친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잡은 명태를 '지방태'라고 하여 으뜸으로 치는 것이다. 이런 토종 명태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는 이유는 최근 동해안의 수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명태가 가장 많이 잡히기로 유명한 고성군 거진 부근의 평균 수온이 최근 10oC를 옷돌아 명태가 살기에는 너무 따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70년대 이후 성행한 저인망 어선이 명태새끼인 노가리까지 훑어내 자원이 고갈된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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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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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술에 울고 웃던 고려인 삶의 빛과 그림자 - 홍영의(국민대 박물과 학예원)
굴러 들어온 소주가 토속주를 몰아내다.
얼마전 모 국회의원과 재벌이 일반인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루이14세’인가 ‘발렌타인 30년산’인가 하는 값비싼 양주를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문득 1079년(문종33) 송나라에서 붉은 칠에 도금하고 꽃을 조각한 상자에 곱게 넣어 보내온 행인자법주 10병이 생각났다. 물론 그것은 약용으로 쓰였을 터이지만, 아마도 당대에는 가장 비싼 수입주가 아니었나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서민들이 그런 고급 술은 커녕 술병조차 구경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고급 술만이 술은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 대개 이 두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히 알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술이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말한다. 주세법에 의하면 알코올 1도 이상의 음료는 술로 정하고 있다. 술은 일부 민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민족이 즐기고 있으며, 그 용도도 다양하여 관혼상제와 같은 행사에 꼭 필요한 물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쌀로 술을 빚었다. 언제부터 곡물로 술을 빚었으며, 어떤 재료와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지는 자료가 부족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술 빚는 솜씨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음은 틀림없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때보다 술의 종류와 이름도 많이 보인다. 우리 나라의 전통 술 중에서는 막걸리와 청주가 일찍부터 빚어졌다. 고려 최고의 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각종 문집에는 수많은 토속주가 소개되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동동주. 황금주. 춘주. 송주. 국화주.두견주. 죽엽주. 백주. 이화주. 오가피주. 백자주. 창포주. 자주. 부의주 등이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술들은 조선시대에도 대갓집이나 각 고을의 토속 명주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서민층과 가장 절친한 소주는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전래의 막걸리. 청주와 함께 3대 주종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소주는 타이나 인도네시아. 서인도에서는 ‘아라크’, 원나라에서는 ‘아라길주’, 만주어로는 ‘알키’등으로 불려져 왔으며, 우리 나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도 했다. 최근 각광받는 안동소주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계획으로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면서 전파시킨 것이다. 이 때 들어온 소주를 지금껏 우리 술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정하였듯이 언젠가는 양주를 우리 술로 인정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때는 양주를 어떻게 부르게 될까? 이렇게 밖에서 굴러 들어온 소주가 박힌 토속주를 빼내 자리를 잡고 난 이후, 소주는 빠른 속도로 유행을 타게 된다. 1375년(우왕원년)에 소주금주령이 내려진 것이나, 그 이듬해 김진의 소주에 얽힌 일화는 자못 흥미롭다. 이 사건은 경상도 원수였던 김진이 이름난 기생을 모아 부하 장수들과 밤낮으로 소주를 마시는 바람에 ‘소주도’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는데, 왜구가 마산에 침입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와서는 약으로 쓰는 것 이외에는 소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할 정도였다.
무역항, 벽란도에서 질펀한 술 한 잔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맑디 맑은 강가엔 낮이나 밤이나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들, 낮이면 드나드는 상선과 어선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조운선들로 나루는 발 디딜 틈 조차 없다. 만선을 하고 돌아온 어부들은 서로가 고기를 많이 잡았네 하며, 잡아온 고기를 상인에게 넘기며 옥신각신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양 씨름하며 값 치루기에 바쁘고, 온갖 물화를 도성으로 나르는 수레꾼들은 진흙탕에 빠진 수레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 쪽에서는 물주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송인들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아라비아 상인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를 저희들끼지 주고 받으며 노닥거리고 있다. 이들이 들여온 물건은 상류층이나 살 수 있는 약재, 비단, 그리고 도자기와 향료. 상아. 공작등의 금은 보화들... 갈매기떼 노니는 한쪽 백사장 가에 수군들을 옹위하여 나팔 소리 요란하게 불며 나타난 조운고사관은 사공들의 굽실거림에 흐뭇한 듯 연신 거들먹거리며 아래 관원에게 삿대질하는 모양새가 가관이라. 바로 이곳이 수도 개경에서 30리 길인 예성강 포구의 벽란도이다. 신라 때부터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이래 광종 때 송나라와 공식 무역관계가 열린 이후부터 국제간의 무역항으로 크게 자리잡은 것이다. 여기 저기에서 우리의 금.은.인삼.면포 등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대상인들이 관리를 붙잡고 무역허가를 내달라며 아우성치던 곳, 이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 나라가 ‘코리아’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여기는 밤만 되면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룬다. <예성강곡>을 부르며 고기를 낚는 어선들의 불빛, ‘청기’라 불리는 등 달아세워 둔 주막의 푸른 깃대, 포구 안쪽에 즐비한 요리집과 긴 장대를 세워 양가와 구별한 색주가의 붉은 등불 아래 문을 기대어 비단 옷 입고 손짓하며 뭇 남정네를 유혹하는 여인들, 무뢰배와 시비가 붙은 어느 순진한 시골 장정의 우격다짐, 어디선가 시회를 여는지 기생들의 풍악소리와 술 취한 이들의 호기 어린 웃음소리, 도성에서 바람 쐬러 나왔는지 한 무리의 고관과 그 부인들을 인도하는 초롱불, 그리고 하인이 소리 지르는 벽제소리...도성에서 두서너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이기에 너나 할 것없이 모여든 벽란도의 저녁풍경에 길 가는 이나, 도회에서 바람 쐬러 나온 이들의 눈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벽란도도 한때는 그 명성이 퇴조하기도 하였다. 몽고침입과 그로 인한 강화로의 천도는 새로운 환락가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자의 <삼도부>를 보면, 대몽항쟁시 항전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풍경을 그린 내용이 보인다. 이 글에는 수도천도와 함께 새로운 번화가로 등장한 13세기의 강도에는 해안과 언덕에 공경대부의 화려한 저택과 비교되는 상인. 어부. 소금 굽는 이의 집들이 즐비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대몽항전의 본거지가 오히려 이전의 개성에서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였다면, 강화로 천도한 최씨정권의 항몽자세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삼별초와 일부 관료들, 일반민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제주와 진도로 옮겨 가면서 그들과 대항하게 되었던 근본적인 이류가 되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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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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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선과 악
현대서양은 ‘점진적인 신앙의 부패’로 정신적인 공백기를 맞고 있다고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종교가 쇠퇴하면서 현대 서구사회가 우주를 방법론적으로 탐험하려고 한다. 과학적인 접근의 결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자신에게, 그리고 그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이해하고 개선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접근이 아닌 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권력과 과학은 상승하고 있으나 윤리와 종교는 하락하고 있다. 더구나 유럽문화가 뿌리 채 썩고 있다고 말한다. 서양과 달리 아랍세계는 우주가 아직도 알라의 의지에 따라 예정된 궤도를 달리고 있고, 알라가 세상을 자유로이 인도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간운명을 예정한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알라에게 복종할 뿐이다. 무슬림의 예정론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 시작의 때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쿠란에 근거하여 확고히 고정된 교리로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쿠란 54장 49절 ‘보라, 우리가 치수를 재어 모든 것을 창조했다. ’ 쿠란 87장 2절에서 3절은 ‘창조하시고 질서를 세우셨다. 운명을 정하시고 인도하셨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알라의 뜻에 종속되고 통제받는다. 인간이 올바르게 걷고자 해도 알라의 뜻이 아니면 올바르게 걷겠다던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방황케 하고 올바르게 인도하셨다. 이런 구절에 깔려 있는 이슬람 교리들은 이슬람 내에서도 많은 철학적 토론, 분석, 그리고 논쟁을 낳았다.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러한 내용들이 간소화되고 일반화되었다. 즉, 어떤 사람이든, 또 무엇을 하든,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직접 알라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러한 결정론적인 견해는 무함마드가 살았던 시대에도 고대 유대 즉 기독교인의 유산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전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더욱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본래의 결정론을 상당히 수정하였다. 예정론의 두 기둥, 선택의 교리와 유기의 교리는 인간의 참여없이 모두 창세 전에 일어난 하나님 자신에 의해 결정된 하나님의 결의인데, 이 결정대로 예정된 자는 구원을 받고 유기로 작정된 자는 결국 망한다는 교리이다. 이러한 예정론은 예전부터 수많은 반대에 부딪쳐왔는데, 첫째는 예정론이 운명론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1936년 칼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정된 자이고, 1942년에 발표된 그의 예정론은 은총의 총화로,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영원 전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의 죄를 담당하고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예정론의 핵심은 복음이고, 복음의 총화가 예정론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이와 달리 절대적인 의지가 아직도 냉혹한 법안에서 작동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사실 어떤 무슬림들은 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한다. 둘 다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객관적인 척도가 없다. “알라가 선이라고 부른 것은 선이고, 선을 행한 자가 덕이 있는 자이다. 비슷하게 알라가 악이라 칭한 것은 악이고 악을 행한 자는 죄인이다. ” 알라는 거의 전횡적으로 각 개인의 성격을 결정하낟. 이것은 오늘날까지 아랍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마을 사람들과 민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믿음이다. 개인 스스로 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도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성품은 바꿀 수 없다. 신이 준 인간의 인격은 그의 생애를 통해 잔존하며 그가 살아가는 데 어느 일정한 방식을 그에게 운면지워 진다. 어느 개인의 인생에서 나타나는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이슬람의 예정론은 이미 규정된 운명만이 강조되는 기계적인 예정론인 것이다. 인간은 선택할 여지가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는 자신이 벌을 받을 뿐이다. 각 사람은 그의 것에 해당하는 운명(몫)을 받는다. 인간 자신은 어쨌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큰 일은 물론 작은 일까지도 인간은 절대적으로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심지어 그의 행동이나 그가 행할 방법까지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러한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같지 못했다는 것과, 나아가서는 그의 도덕성과 행위에 개인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집트에서 에드워드 윌리암 레인(E. W. Lane)은 매우 유사한 관찰을 했는데 무슬림은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믿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무슬림이 예정론에 대한 믿음에서 다음과 같은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있는 것을 보았다. 불확실성에 대한 고뇌와 괴로운 사건 뒤에 따라오는 현저할 정도의 체념과 인내로 인한 한숨 섞인 슬픔이었다. ‘알라 카림(하나님은 관대하다)’이란 외침 속에 여인들은 그들의 슬픔을 과격한 울음으로 해소하고, 예정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무슬림은 그의 미래의 행동과 미래 사건에 대하여 짐짓 가정도 못한다. 그는 “만일 신의 뜻이라면(인샤알라)”이란 말을 빼놓고는 미래에 그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든지 어떤 상황을 기대하든지 어떤 상황을 기대하든지 어떤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집트인들은 샤으반달 15일째 되는 밤에는 그 다음 해의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예정론에 대한 아랍인들의 믿음에서 하나님이 동시에 어느 곳에나 있다고 하는 믿음과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의 표명은 그들이 어느 경우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가능하다. 오늘날까지 아립인들은 어떤 일을 할 때나 어떤 말을 할 때, 또 어떤 얘기를 들을 때 비쓰밀라(아라 이름으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알 함두릴라(아라를 찬양한다) 등의 표현을 쓴다. 미래에 관한 모든 것 즉 무언가 하려고 계획한 것, 어떤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에는 ‘인샤알라(하나님이 원한다면)’를 쓴다. 놀랍거나 흥분되는 것을 보았거나 들었을 때 보통 쓰이는 감탄은 ‘왈라히(맹세컨대)’등이 있다. 서민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은 다음 표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수확을 거두신다. 하나님은 안내하시는 분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운명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에게 되돌아간다. 하나님이 계신다. 인간은 제안하고 하나님이 정하신다.” 하나님이 아랍인의 마음속에 언제나 있다는 것과 가장 작은 일상적인 일이나 행동이라도 하나님의 개인적 결정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느다. 다시 쿠란 87:2~3장의 내용을 보자. “창조하시고 같게 만드시고(조화) 정해진 양대로 정하시고 인도하신다.” 여기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위 네 가지 사실에 따른다. 창조, 조화, 운명을 정함, 올바른 길로 인도 등이다. 모든 피조물은 조화를 위해 창조되었고 이 조화를 정해진 운명에 따라 신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든 사물은 자기 고유의 발달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사물의 운명은 다른 사물의 운명과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은 신이 행하는 선악에 대한 절대적인 능력이다. 이슬람 운명론은 나중에 발생된 것인데, 이슬람이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은 인간에게 일정한 권능을 주어 창조했고, 인간은 일저한 규범 내에서 이 권능을 행사함으로써 선과 악이 파생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은 인간에게 언어능력을 주었는데 인간은 이 언어능력을 인간에게 선하게 또는 해롭게 쓸 수 있다. 또, 동일한 행위가 한쪽에게는 미덕이 될 수 있디만 다른 쪽에는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쿠란은 인간이 신에게서 위임받은 재능과 능력을 일정한 한계적 범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다른 피조물들이 일저한 제한규범에 구속되는 이치와 같다. 이 제한된 규범이 ‘정해진 운명’이란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이 살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설정했다. 인간이 부여받은 모든 힘과 재능은 일정한 규범과 제약에 의해 제한된 상황하에서만 적절히 행사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재능은 신의 속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속성은 불완전하고 일정한 제약하에서만 작용된다. 신은 만물을 널리 보고 들을 수 있다. 물론 인간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보고 듣는 능력은 신의 전능함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인간의 속성은 무한하고 완전한 신의 속성에서 아주 초보적이고 극히 미미한 일부분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행위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속성 아래 놓이고 된다. 인간의 지식, 사물에 대한 힘의 행사 또는 사물과 관련된 의지의 표현은 일정한 기준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한계와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와 종속관계는 인간의 여러 속성과 신의 속성과의 관계와 같다. 그는 제한된 법칙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데 각 경우마다 상이하고 다양한 선택환경이 존재한다. 사실은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하기고 하고 모든 경우에 행해진 것에 일률적인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아랍인 의식구조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이슬람은 종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와도 밀접하고 다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이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곧 이슬람이라는 생각을 아랍인들은 가지고 있고, 이슬람은 인류와 함께 있었으므로 인간은 이슬람의 테두리 안에 생활해야 옳은 길을 걷는다고 무슬림은 말한다. 종교로서으 이슬람은 앞선 종교인 유대교나 기독교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예언자 무함마드가 제시한 것이므로 인간행위의 최종지표라고 아랍 무슬림들은 생각한다. 인간행위의 최종지표란 이슬람의 테두리 속에 산다는 것이며, 인간이 정해진 운명 속에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정면관이며, 아립인 의식 속의 운명론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이 신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며, 어떤 것이라도 신의 지배를 받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까다르(Qadar)이다. 신이 정한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만물이 운동을 하는 규범을 절대불변이고, 질서정연한 것이다. 따라서, 이 규범질서에 인위적으로 역행한다는 것은 최후 심판의 날에 지옥에 던져질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신이 정한 법규에 따라 삶을 누려햐 한다는 것이 아랍 무슬림의 의식구조이다. 인간이 행해야 할 일정한 행동이란 마치 별들이 각각 그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것처럼 인간도 신이 마련한 초월적 규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의식 속에 아랍인의 운명관이 자리잡는다. 신은 인간 각자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믿고 있다. “개인 그 자신이나 어떤 외적요소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한 인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어떤 일이 한 인간의 생활과정에 발생하는 일은 처음부터 신에 의해 결정지어졌다.”라는 운명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인간 스스로가 노력하여 어떤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욕망은 별로 없다.
이런 운명관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자기의 행위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사회적 접촉은 극히 평범한 것이라도 신의 이름으로 행한다. 책임은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모든 것을 신과 결부시킨다. 개인의 운명은 영겁의 옛날부터 하늘에 있는 명판에 기입되었다고 한다. 성별, 수명, 즉 사주팔자가 정해져 있으며,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써 팔자를 고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떨어질 자도 신의 의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예정하고 있으며, 예정하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실현하며, 신이 예정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고 아랍인은 생각한다. 모든 행위의 결과를 신에게 돌리는 아랍인의 태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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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죄 값을 치르다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 때 저질렀던 철없던 내 행동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시골의 넉넉치 못한 환경에서 자란 나는 먹고 싶고, 사고 싶었던 걸 항상 마음속에 묻어 두어야 했다. 날마다 친구들이 사주는 과자를 얻어먹으면서 단 한번만이라도 그 애들에게 보란 듯이 과자를 사 줄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혹시 입을 만한 가을 옷이 없나 해서 옷장을 열어 보게 되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몇 년씩 입어 닿을 대로 닿은 옷들만 즐비한 옷장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옷장 바닥에 만 원짜리 한 장이 놓여 있는게 아닌가! 길바닥에서 주웠으면 웬 횡재인가 했겠지만 옷장 바닥에 숨겨져 있는 만 원의 주인은 분명 엄마였다. 평소에 용돈 좀 달라고 하면 언제나 없다고만 하시던 엄마가 몰래 그곳에 넣어 두신 것이 분명했다. 그냥 제자리에 두고 내 옷만 꺼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이미 가게에 있는 많은 과자와 인형,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누가 볼세라 호주머니에 얼른 그 돈을 넣고 옷장을 원래대로 정리한 다음 바삐 방을 빠져 나왔다. 한 번 마음먹으니까 다음일을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선 다음날 하교 길에 친구들에게 그 동안 사주고 싶었던 과자를 잔뜩 사서 나누어 주었다. 그래도 내 손엔 천원짜리 몇장과 동전몇개가 더 남아 있었다. 평소엔 만저보지도 못하는 큰 돈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돈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면 발각될 것만 같았다. 그 돈이라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용서를 구해야 겠다는 양심의 소리는 불행히도 들리지 않았다. 집 안에 숨겨 놓으면 아무래도 들킬 염려가 많으니까 바깥에다 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휙 던져 놓고 우산을 쓰고 집 앞에 있는 샘으로 달려갔다. 평소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큰 돌 밑에 천원을 숨겨 놓겨, 화단 담장에 천원을 숨기고, 교회 담밑에도 숨겨 놓았다. 우산을 쓴 작은 아이가 첩보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돈을 숨겨 놓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나는 벌벌 떨리기는 했지만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옷장을 열심히 뒤지고 계셨다. "어디 갔지?"하면서 찾으시는 것은 분명 내가 쓰고 꽁꽁 숨겨 둔 돈 만원일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앙큼하게 모르는 척했다. "엄마가 너희들 운동회 때 쓰려고 만 원을 옷장에 넣어 놨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안 보인다. 혹시 못 봤니?" 순간 뜨끔했지만 나는 모른척 했다. "몰라, 잘 찾아봐. 엄마가 딴데다 넣어 둔 것 아냐?" 엄마 말씀이 그 돈은 내가 운동회 때 신을 실내화와 김밥 재료를 살 돈이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푹 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운동회 날 하얀 실내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경기에 참가했으며 김밥대신 하얀 쌀밥을 먹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죄 값을 치른 것이다.
임길자 님/광주시 동구 내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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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39 - 중세철학의 종말: 로저 베이컨(1214-1294년)
그때 세계에서는 1294년: 독일,뤼백을 맹주로 한지동맹 융성 1298년: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1300년: 유럽에서 화약 발명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철학사상도 어떤 전성기가 오면 그 안에 이미 새로운 사상이 출발할 수 있기 위해 와해기, 즉 종말이 예고되게 마련이다. 스콜라 철학도 비슷한 운명의 전철을 밟았던 것이다. 다음의 한 두 사람의 철학을 소개함으로 그 과정과 내용을 엿보기로 하자. 영국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은 영국 근대철학의 선구자인 프렌시스 베이컨(F.Bacon)과 거의 차이가 없는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수도신부였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연구했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가면서 물리학 실험에 열중했었다. 그는 모든 선입관념을 배제해야 한다면서, 희랍어를 몰라 라틴어 번역만을 읽었고 수학이나 물리학을 모르는 토마스는 진정한 학자가 못된다고 비판했다. 인문학을 위해서는 원어를 알아야 하며, 자연과학을 위해서는 물리학.천문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인식에 있어서는 과학적 방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는 모든 권위, 습관, 공허한 말 등을 떠나 자기비판이 있어야 한다. 유명한 인사의 가르침이라든지, 자기 완성감이 빠져서는 참다운 학문은 불가능하다. 토마스식으로 무조건 종합과 체계에 편중하게 되면 참다운 지식은 얻을 수가 없다. 신앙과 신학은 이성적인 사고의 유산도 아니며, 그 체험의 결과에서 개념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교회와 신앙의 바른 길인 것이다. 베이컨은 이러한 근대적인 주장 때문에 교회의 비난과 반박을 받고 있다가, 그를 비호해주던 클레멘스 4세 교황이 서거한 후에는 10년간 수도원에 수감되는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의 과학적인 성격과 근대적인 사고는 아직 그 당시에는 용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베이컨과 더불어 중세기의 종말을 재촉한 또 한 사람의 철학자는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cam, 1285?-1349)을 들어야 할것이다. 그도 프란체스코 교단에 머물면서 둔스 스코투스를 따랐다. 파리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그는 교황권과 제왕권의 분리를 호소하면서, 정치는 제왕의 권력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의 박해를 피해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황제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왕은 검으로 나를 지켜주고 나는 붓으로 왕을 지켜준다'는 말이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50세 전후의 나이로 뮌헨에서 변사했다. 아마 그 당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윌리엄의 학설은 보편논쟁에서 유명론(Nominalism)을 택했다는 점이다. 안젤무스 이후 유명론은 교회에서 배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복고시켰다는 것은 곧 모든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반격한 과감한 반론이었던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개물이고, 보편개념은 사유하는 정신만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은 개념은 사물의 모사가 아니고 기호라고 보았다. 최초의 기호론자가 된 셈이다. 인식에 있어서도 직각적인 지각을 바탕으로 삼았다. 지각이 경험에서 내적인 작용을 할 때 심리적인 귀납성이 되고, 외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 사물에 대한 작용이라고 보았다.이성적 학문인 철학과 신학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며 신학은 계시에 속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보았다. 신의 존재와 본질의 문제는 이성의 논증에 속하는 것이 못되며, 오직 유사(analogia)성에 따른 개념적 이해가 가능할 뿐이라고 보았다. 신은 이런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이해가 있을 뿐이다.
그가 교회로부터 더 큰 비난을 받은 것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분리를 주장한 때문이며, 교회 안에 먼저 평등과 청빈이 있어야 한다고 기성교회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부를 신랄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제왕에게 속하며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 때문에 파리는 그 당시 자유로운 사상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종교적 비난과 박해로부터 보호를 받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마틴 루터도 신앙적 핍박을 느끼면서 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와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윌리엄의 후계자인 요한 부리단(Johann Buridan, 1327-48년 동안 파리의 총장)이 근대사상의 소유자이면서 존경받는 학문적 지도자가 되었다면, 스콜라와 더불어 중세철학은 사양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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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영낙없이 지 애비 탁했네" -> "영낙없이 지 애비 닮았네"
어린 자식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 가서 일가 친지를 뵙고 인사를 올리면 어른들께서는 자주 이런 말씀을 합니다.
" 아 그녀석 지 애비 영낙없이 탁했네. " " 아 그럼 부모를 탁해야지 누구를 탁해. "
부부 사이에도 아이 문제로 말다툼을 하실 때, 이런 불평을 합니다. "길동이가 나를 탁했으면 심부름도 잘 할 텐데, 당신 탁해서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요."
전북 지방에서는 '누구를 닮았다'는 표현을 '누구를 탁했다'라고 합니다. 얼굴을 닮은 것도 '탁했다'고 표현하고, 행동을 비슷하게 하는 것도 '탁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으로 '친탁하다'고 하고, 외가를 닮았을 때는 '외탁했다'라고 합니다. 이 때 사용하는 '친탁하다, 외탁하다'는 자동사이기 때문에 '철수는 친탁했다, 철수는 외탁했다'와 같이 사용하지만. 전북 지방에서는 '철수는 아빠를 탁했다'와 같이 사용하여 목적어를 갖는 타동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전에는 '탁하다'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말은 방언입니다. 표준어로는 '닮다'라고 해 야 합니다. " 이 아이는 꼭 아빠 닮았네. "
아이들은 부모를 그대로 닮는다고 합니다. 얼굴만 부모를 닮는 게 아니고, 행동이나 습관도 부모를 그대로 닮는다고 하니, 아이 앞에서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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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36년간 유랑하던 파가니니의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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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으로부터 가능한 온갖 비밀을 이끌어 내어 신의 하모니를 연주한다. 는 유례없는 천재 니콜로 파가니니. 그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프랑스 니스였다. 사후에 그의 유체가 안식을 얻지 못하고 36년간을 떠돌다가 겨우 조국에 돌아와서 파르마 공동묘지에 묻히기까지의 기구한 사연은 소설 한권의 분량이 되고도 남으리라 생전에 그를 따라다니던 고약한 평판. 난봉꾼, 수전노, 도박꾼, 그리고 심지어 살인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니스에서 매장의 허가를 얻어내지 못해 파가니니의 친구들은 그의 고향 제노아로 옮겨오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거절당한다. 교회의 승인 없이는 왕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제노아 교회는 파가니니가 사악한 생애를 보냈으며 자신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으므로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니스의 주교가 성화된 땅에 그를 묻을 수 없다. 고 선고했다. 파가니니는 부활절 성사와 임종의 고백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유산을 교회에 조금도 자선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나쁜 평판까지 무성하여 매장의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아킬레스가 아버지의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두 달 동안이나 죽음의 침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런 다음 그 집의 지하실로 옮겨 1년 이상을 그곳에 두었다. 아들은 주교의 판결을 번복시키려고 교회재판소에 탄원을 해보았으나 무효, 고향으로 시체를 옮겨가고자 했으나 그 또한 거절당한다. 파가니니의 유해는 갈 곳이 없었다. 로마교황에게 호소하러 간 사이, 프랑시 니스의 보건당국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어느 해안에 있는 음습한 문둥이의 집으로 우선 그를 옮겨갔다. 그러나 괴기스런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 이번에도 옮겨야만 했다. 올리브 기름공장의 시멘트 통속에 넣어 뒀다가 한밤중 캡페라는 포구 위에 있는 어떤 개인집의 정원으로 옮겨갔다. 1844년 4월 죽은 지 거의 4년이 되는 해, 파가니니의 시체는 세 개를 겹친 관 속에 넣어져 고향인 제노아 라마로네의 어느 저택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년 후, 파가니니의 후원자였던 오스트리아의 통치자 마리루이제 대공비로부터의 허락이 떨어지니 파가니니의 유해는 드디어 자신의 별장 정원 속에 묻히게 된다. 집에는 돌아왔으나 그의 유해는 과연 어떤 상태였을까? 1876년 드디어 니스 주교의 간악한 판결이 무효화되니 그제야 파가니니의 시신은 파르마 공동묘지에 와서 제대로 묻히게 되었다. 죽은 지 꼭 36년 뒤의 일이었다. 파란만장했던 전설적인 생애를 살다간 파가니니의 모습을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인상엔 고뇌와 천재와 지옥의 징조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일부러 자신의 태도를 신비적으로 만들어 청중의 흥미를 끌려고 하였는데 실지의 풍채도 그러했다. 장발장신으로 몸이 가늘고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혹은 바이올린의 귀신 이라 불렀다. 그러나 대음악가들의 질병을 연구한 독일의 케르너 박사는 파가니니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네살도 되기 전에 홍역을 앓았다. 홍역 중 파가니니는 강직경련 의 증상이 나타나 이틀 동안 송장처럼 빳빳하게 누워 있었는데, 이때 그의 모친은 이미 시체를 쌀 수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 이 유발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거장이 지닌 여러가지 특이성, 즉 그의 비사회적 태도, 자극 과잉, 언어동작의 경직성, 성적 탈선, 비뚤어진 성격, 그리고 그 외 그의 사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상성 같은 것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기술이란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결국 정신적,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전무후무의 저 완벽한 예술적 명기도 필경은 이 병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보다도 그는 많는 병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33세에 조로현상을 보였으며 폐결핵, 매독, 류머티즘, 후두염, 신경장애 등에 시달리면서 죽은 순간까지 삶에 집착했다. 그는 결코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연주를 하는 동안에는 매독 3기 증상으로 보이는 하악골 농양으로 인해 아랫니를 몽땅 뽑아야 하는 곤욕도 치뤄냈다. 그는 만성 인후염으로 인해 만년의 2년 반 동안은 실제로 무성에 가까운 상태로 지냈다. 임종의 고해를 거부한 것도 실은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사의 처방과 그 많은 약을 매달리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은 이제 말을 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손은 떨리고 다리는 부어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절망해서 소리쳤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겐 더 이상 힘이 없나이다. 그리고 나의 몸은 문자 그대로 조각조각 분해되어가고 있다. 이제 나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다. 고 그는 말하였다. 계속되는 출혈 속에서 그의 육신은 서서히 꺼져갔던 것이다. 1840년 5월 27일,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아들 아킬레스의 손을 꼭 잡은 채 58세의 나이로 파가니니은 영욕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이름 파가니니는 작은 이교도 라는 뜻인데 그는 과연 이름 그대로 한 세상을 이교도로서 살다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의 신에 대해 일고를 해보게 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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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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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집트의 미라도 자격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미라이다. 물론 미라는 이집트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는 미라 보존에 적합해 현재까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 미라에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후일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와서 죽은 후에도 삶이 지속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오시리스 신화`에도 남아 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류를 훌륭하게 다스리는 자비로운 왕 오시리스가 있었는데 이를 질시한 동생이 그를 죽여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시스가 고생 끝에 남편의 유해를 찾아 관에 정성스럽게 모셨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다시 관을 찾아내어 오시리스의 유해를 조각조각내어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 그러나 이시스는 다시 남편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었다. 이후 소생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들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이 신화는 왕이 사후에 부활해 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삶을 보낸다는 고대 이집트 인의 내세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에 바탕해서 만들어진 것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한 미라이다. 그런데 아무나 영혼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무나 미라가 되지는 못했다. 고대 이집트 초기에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파라오(pharaoh: 이집트의 왕)뿐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자 신과 같은 존재여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국가였으며 국토 전체는 형식상 파라오의 소유였고 상업, 농업 등 모든 경제 활동이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렇듯 전제 국가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최고 지배자인 파라오만이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 귀족들도 영혼이 다시 돌아온다고 믿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종교적 계율을 열심히 지키다가 일생을 마친 일반 사람들 역시 내세에 부활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라 만드는 전문 직인도 있었다고 한다. 미라 만드는 방법은 우선 사체에서 뇌를, 다음으로 내장을 끄집어낸다. 그 다음 소금, 향료, 수지의 혼합물을 이용하여 사체에 방부 처리를 하고 건조시킨다. 이후 미라의 속을 채우고 끝으로 아마포로 몇 겹씩 감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라는 유가족에게 돌아와서 상징적인 의미의 `입을 벌리는 의식`을 받는다. 이것은 죽은 자로 하여금 다시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게 한다는 뜻에서 치러진 의식이다. 이로써 미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모든 채비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도 미라가 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차별은 존재했다. 그것은 재력에 따른 것이었는데 미라 만드는 사람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정도에 따라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훌륭한 미라가 되는 것은 부자들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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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식 돈벌이 - 후지다 덴
제 1부 - 현금을 손에 쥔 나의 방법
10미터는 10킬로미터와 같다 - '돈 버는 장소'의 결정
'로케이션'이란 말이 있다. 영화의 야외 촬영에서 이 따금씩 사용되기 때문에 '로케이션'이라는 말을 '야외촬영'이라는 영화 전문용어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원래의 의미는 '장소 선정' 이란 뜻이다. 유태 상술에서는 이 '로케이션', 즉 '장소 설정'을 아주 중요시 한다. 일본의 상인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긴자로 진출할 경우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긴자로 나가기만 하면 어디라도 좋다' 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참으로 여유만만한.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엉뚱한 잘못 인 것이다. 긴자에도 '장사가 되는 장소', 즉 '돈이 벌리는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가 있다. 그리고 돈이 벌리는 장소와 돈이 벌리지 않는 장소와의 거리 차이는 불과 10미터 사이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나는 긴자 미쯔고시의 국도 1호선, 이른바 긴자통에 면한 장소에 햄버거 점포를 냈지만, 이 가게를 미쯔고시의 뒤편에다 냈다고 하면 이렇게 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긴자 미쯔고시의 뒤쪽이라면 주차장은 할 수 있어도 햄버거를 팔 수는 없는 곳이다. 그림을 보아 주십시오. M이 긴자 미쯔고시에 있는 햄버거 점포이다. 이 가게는 긴자 잇쪼오메(일정목)에서 핫쪼오메(팔정목)에 이르는 긴자통의 중심인 긴자 욘쪼오메(사정목)의 고차점으로부터 산쪼오메(삼정목)쪽으로 핫쪼오메를 향하여 왼쪽에 있다. A는 긴자 핫쪼오메의 바로 옆인 신바시에 있어 긴자통으로 튀어나온 듯이 서 있는 신바시 스미또오 빌딩 6층에 있는 나의 사무실이다. 나는 언제나 사무실에 망원경을 준비해 놓고 틈만 있으면 긴자통의 흘러가는 인파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던 중에 사람의 물결에도 어떤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자 거리의 인파는 잇쪼오메에서부터 욘쪼오메까지는 신바시로 향하여 왼쪽이 사람의 왕래가 훨씬 많고, 고쪼오메에서부터 핫쪼오메까지는 반대로 오른편 쪽이 사람의 흐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긴자에서 햄버거 가게를 내려면 긴자 미쯔고시 밖에는 없다. 나는 일찍부터 마음 속으로 그렇게 결정하고 있었다. 긴자에서 가장 사람의 발걸음이 많은 장소에 '로케이션'을 하면 반드시 돈을 번다고 눈독을 들여 왔기 때문이다. 사실 똑같은 긴자라도 욘쪼오메의 반대편에 있는 D라는 동업자의 가게는 사람의 왕래가 적은 만큼 가게 손님도 적다. 더군다나 맥도날드와 D의 차이점은 단순히 인파가 많고 적음 뿐만이 아니라 품질, 맛 등에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우선 제외시킨다고 해도 장소를 어디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장사를 하는데 있어서 기본 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 긴자의 맥도날드 점포를 미쯔고시로부터 쓰끼지 쪽으로 10미터 쯤 들어간 곳에 열었다고 하면 하루에 1백만 엔이니 2백만 엔이니 하는 매상 기록을 올릴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이 10미터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본인들은 표준의 자 하나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10미터의 거리는 일본인의 자로 재는 한 어디까지나 10미터밖에는 안 되지만, 상업면으로 따져 볼 때는 장소에 따라서 10미터의 차이는 10킬로미터의 차이와 맞먹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나의 경우로 말하면 만일 내가 1호점을 긴자 미쯔고시의 현재의 장소가 아니라 긴자 욘쪼오메로부터 10미터만 쓰끼지 쪽으로 옮겨 잡았더라면, 매상액은 긴자 욘쪼오메로부터 10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다 가게를 차린 경우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유태 상술에서는 10미터는 결코 10미터가 아니다. 10미터는 10킬로미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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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우물 밖의 세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우물 안에 늘 우물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는 한 젊은 개구리가 있었다. 낮이면 구름이, 밤이면 별들이 우물에 비치는 것을 보고 그는 늘 어떻게 하면 우물 밖의 세상에 나가 살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날마다 우물에 비치는 구름과 별들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친구들이 거울처럼 잔잔한 물결을 흩뜨려 놓으면 다시 물결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물에 비치는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하루는 우물 안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바람에게 물었다. "바람아, 우물 밖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니?" "햇살이 눈부신 넓은 세상이야. 여기처럼 이렇게 어둡고 좁은 곳이 아니야. 바다도 있어." "바다? 도대체 바다가 뭐니?" "이 우물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넓은 곳이야. 멀리 수평선이 있고, 커다란 고래도 살아." 그는 바람의 말에 바다가 보고 싶어 가슴이 뛰었다. "바람아, 날 바다에 데려다 줄 수 없겠니? 난 이 우물 안이 너무 춥고 답답해." "글쎄, 난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어. 그건 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야." 바람은 그 길로 황급히 우물을 빠져나갔다. 우물 밖에 바다가 있고, 바다에 고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더욱더 우물 밖의 세상이 그리웠다. 그는 허구 한날 어떻게 하면 우물 밖으로 나가 보다 넓은 세상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거듭했다. 그러나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웃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몇 번이나 우물 한 귀퉁이를 기어올라가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엄마, 전 우물 밖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우물밖엔 나쁜 놈들이 많아. 특히 뱀이란 놈은 우리 개구리들을 한입에 잡아먹는단다." "엄마, 뱀이 무서워서 한평생을 여기에서 살수는 없어요." "아니야, 우리가 살 곳은 여기야. 여기가 제일 안전한 곳이야." 어머니는 우물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는 우물 밖에 나가 살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어느 해, 가뭄이 극심한 여름날, 사람들이 하나둘 우물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우물은 다 말라 버렸는데, 이 우물만은 마르지 않았어. 이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우물엔 하루종일 물을 길으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우물 안으로 계속 두레박을 드리웠다. 그것은 그가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어머니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작별 인사를 고했다. "엄마, 결코 엄마 곁을 떠나고 싶진 않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아요. "그래 알았다. 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섭섭하구나. 그렇지만 난 내 아들을 언제까지나 이렇게 좁은 곳에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이 우리 우물을 늘 찾아왔을 땐 두레박을 타고 많이들 밖으로 나갔다. 이거 한 가지만 명심해라. 나가면 두번 다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 나라엔 우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돌아오는 날이면 사형을 받게 돼. 알겠지?" "네 엄마."
그는 새벽이 오기를 기다려 물을 길으러 온 어느 여인의 두레박을 타고 우물 밖으로 나왔다. 우물 밖의 세상은 바람이 말한 그대로였다. 눈부신 햇살 아래 끝없이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 들판 끝에 푸른 바다가 있었다. 그는 바닷가 가까운 강기슭에서 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다. 멀리 수평선 아래로 고래가 물을 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더 없이 행복했다. 우물 밖에 사는 개구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도 낳아 더 이상 부족함이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몇 년이 지나갔다. 그는 문득 우물 속에 사는 어머니가 그리웠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좁은 우물 속에 갇혀 사는 형제들이 불쌍했다.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해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우물 속으로 돌아가 세상에는 우물 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잊고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돌아오다니!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을꼬!" 어머니는 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우물 밖으로 나가 살자고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설득했다. "너는 국법을 어긴 죄가 크다. 우물 밖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국법을 어긴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는 곧 체포되어 많은 형제들이 보는 가운데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더구나 평화롭게 잘 사는 형제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 우물 밖으로 나가 살자고 감언이설로 유혹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재판장의 목소리는 서릿발같았다. "재판장님! 우물 밖에는 여기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없다." "저는 우리 형제들에게 우물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넌 도대체 어떤 세상을 보고 와서 그따위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 "바다가 있는 세상입니다." "이놈아, 바다라니? 그런 세상은 없다. 여기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다." "재판장님! 우물 밖에는 분명 바다가 있습니다. 우물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린 우물에 갇혀 살 것이 아니라 망망대해가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을 명했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아직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 한번의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우물 밖에 바다가 없다고 말하라. 네가 살아본 바깥 세상보다 여기가 더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라. 그러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 사형대 위에 선 그는 잠시 망설였다. 울음을 삼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아직도 우물 밖에 바다가 있느냐?" 서릿발같은 재판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는 말했다. 또박또박 힘있는 목소리로. "네, 우물 밖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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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인 현재는 달뿐 아니라 머나먼 우주까지 인간의 꿈이 넘나들지만, 로켓을 타고 달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표현한 소설은 1650년에 있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시라노 드 벨쥬락이 쓴 공상 과학소설 ‘빛의 마차를 타고’가 그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900편 이상의 시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것은 네 편뿐이다.
타자기로 쓴 최초의 소설은 ‘톰소여의 모험’이다. 1875년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을 직접 타자기를 쳐서 썼다.
미혼 여성들은 “당신은 매우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할때보다 “결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가장 보기좋은 표정과 몸짓을 보인다고 한다.
히브리어는 2300년 동안 잠자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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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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