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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 호
4339.10.10 (08.19)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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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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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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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자 고집하는 사람은 결코 결단을 내리지 못 한다. / 앙리F.아미엘 (스위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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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23. How would you like your steak?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한국의 모 영문학과 교수가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교수가 L.A.에 도착하여 제자인 교포 P씨의 환영을 받고 식당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beef steak를 시켰는데, 웨이트리스가 How would you like your steak?(스테이크를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고 물으니까 교포 P씨가 먼저 Medium.(중간으로) 이라고 말했다. 다음엔 웨이트리스가 교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교수는 Large!라고 대답했다. 제자가 "중간으로"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스테이크의 크기를 묻는 것으로 오해하고 배가 출출했던 김에 "큰 것으로"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How would you like your steak?는 물론 "스테이크를 어떻게 구워 드릴까요?"란 말이다. 이럴 때는 rare(살짝 구운 것) 또는 medium(중간으로 구운 것) 또는 well done(많이 구운 것) 중 하나를 골라 대답해야 한다. steak가 나오기 전에 먼저 salad가 나오기 마련인데, salad에 치는 sauce를 어떤 종류로 하겠느냐고 웨이트리스가 What kind of dressing would you like?라고 묻는다. 여기서 dressing은 옷이나 붕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salad sauce를 뜻한다. dressing에는 Italian, French, Russian, Thousand Island, Caesar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중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만 대면 된다.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한국 사람에게는 분홍 색깔에 약간 단맛이 나는 Thousand Island가 무난하다. 아침 식사때 계란을 주문하면 How would you like your egg?(계란을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이때는 Fried.(후라이드) 또는 Scrambled.(스크램블드) 중 하나를 택해서 대답하면 된다. 식성이 까다로운 사람은 Sunny-side up, please.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계란을 한 쪽만 구워서 노른자가 동그랗게 남게 해 달라"는 뜻이다. Over easy, please.라고 하면 "양쪽을 다 구워 달라"는 뜻이 된다.
Waitress: What would you like, sir? Brown: I'd like a steak. Smith: Same, here. Waitress: How would you like your steak? Brown: Rare. Smith: Medium, please. Waitress: What kind of dressing would you like? Brown: French. Smith: Thousand Island. 웨이트리스: 무엇을 드릴까요? 브라운: 비프 스테이크를 주세요. 스미스: 나도 같은 걸로 주세요. 웨이트리스: 스테이크를 어떻게 해드릴까요? 브라운: 살짝 구워서 주세요. 스미스: 중간으로 구워 주세요. 웨이트리스: 드레싱은 어떤 걸로 드린까요? 브라운: 프렌치로 주세요. 스미스: 사우전드 아일랜드로 주세요.
Waiter: What would you like, ma'am? Lady: I would like ham and eggs, please. Waiter: How would you like your egg? Lady: Sunny-side up, please. Waiter: All right. What kind of bread would you like, white or wheat? Lady: White. Waiter: What would you like to drink? Lady: Let me have a glass of orange juice, please. Waiter: All right, ma'am. Thank you. 웨이터: 뭘 드시겠습니까, 부인? 부인: 햄과 계란을 주세요. 웨이터: 계란을 어떻게 해드릴까요? 부인: 구워 주세요. 뒤집지 말고 한 쪽만요. 웨이터: 알겠습니다. 빵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흰빵을 드릴까요, 갈색 빵을 드릴까요? 부인: 흰빵으로 주세요. 웨이터: 마실 것은 뭘 드릴까요? 부인: 오렌지 주스 한 잔 주세요. 웨이터: 알겠습니다. 부인, 감사합니다.
* Wheat bread는 밀가루를 표백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색깔로 둔 것, 그래서 더 영양가가 있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 millionaire saw his 9-year-old grandson selling lemonade at garage sale and asked if there was anything he could do for him. "Yes," the little boy said, "can you run a $20,000 TV commercial for my lemonade stand?" 어떤 백만 장자가 주유소 세일하는 곳에서 레몬주스를 팔고있는 9살난 손자에게 뭣 좀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묻자 꼬마가 대답했다. "네, 있어요. 이 레몬 판매대를 위해 2만 달러 짜리 TV 광고 한번 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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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21.무 - 배처럼 시원하고 단맛나는 조선무
무처럼 여러가지 반찬으로 우리 식탁에 오르는 채소도 드물다. 우선은 무가 김장철에 겨울을 나기 위한 여러가지 반찬의 재료로 쓰이는 것만 열거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래서 서민들의 밥상에는 깍두기, 생채, 무국, 무말랭이무침 등 무로 만든 반찬이 한꺼번에 서너 가지씩 오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무는 오래 전부터 식용 해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 전 이집트에서 피라밋을 만들 때 동원된 노예들이 무를 먹었다고 하며, 전쟁시의 비상 식량이나 구황 식량으로도 널리 이용되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무는 오래 전부터 인류와 친숙한 작물이었던 것이다. 무는 그 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먼 옛날부터 유럽과 동남 아시아 전역에서 재배되어 왔으며, 품종도 다양하다. 그리고 분포지역에 따라 상당한 형태적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무는 냉량한 기후를 좋아한다. 자라는데 알맞는 온도는 20℃ 정도이며 0℃가까이에서도 큰 피해를 받지 않을 정도로 내한성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을과 봄에 재배되며 고냉지에서는 연중 재배가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무의 종류는 조선무와 왜무 등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요즘은 조선무와 왜무를 교배한 품종도 많다. 평강김장무, 청풍무, 미농조생무, 여름무, 진주대평무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무는 생장시기에 따라 봄무, 여름무, 가을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성분
무에는 우리 인체에 필요한 여러가지 영양소가 많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약효도 지니고 있다. 그 한 예로 무잎 속에는 카로틴이라는 중요한 물질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체내에서 비타민 A로 변한다. 또한 칼슘과 비타민C도 풍부하게 들어있다.
또한 여러가지 소화효소와 전분 분해 효소인 아밀라제가 많아서 천연의 소화제라 일컬어질 정도이다. 떡이나 밥을 과식했을 때 무즙이나 무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는 소화불량, 만성 기관지염, 천식, 구토, 기침 등에 좋을 뿐만 아니라 건위, 거담, 이뇨 및 소염제의 약효도 지니고 있다. 무즙은 소화촉진과 함께 니코틴 독을 없애주고 지해, 지혈, 소독, 해열 작용도 한다. 담즙과 함께 담석을 용해하는 작용도 한다. 무는 수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당질, 단백질, 칼슘, 인, 철, 비타민B, C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무잎에는 비타민 A가 많이 들어 있다. 예로부터 속병이 깊은 사람이 무를 상식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 속에 있는 전분의 분해요소인 디아스타아제, 글리코시다제 등이 소화를 돕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무즙에 함유되어 있는 수분은 장에 습기를 더해 주고,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장내의 유익한 세균의 수를 불려준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세균에 의해 노폐물의 배설이 활발하게 촉진되어 비만이 해소된다. 특히 무는 칼로리가 굉장히 적으므로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어도 살찌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비만 환자에게 있어서 무는 실로 반가운 식품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무의 장점은 지방분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반면 비타민,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만일 다른 식품에서 무와 같은 양의 비타민, 미네랄을 섭취하려면 아무리 조심해도 다량의 지방분을 함께 섭취하게 된다. 그러나 무를 이용하면 배고픔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도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 한방에서는, 여덟 가지 사 중의 하나인 풍사가 체내에 들어와 감기를 일으킨다고 한다. 이 풍사는 음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몸의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서는 양의 식품을 섭취해야 하는데 대표적인 양의 식품이 바로 무다. 무의 매운맛은 시니글린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이 성분은 점막을 자극하여 수성점액의 분비를 활발히 하는 기능이 있다. 이 수성점액의 분비가 활발해지면 가래가 엷어져 쉽게 뱉어낼 수 있게 되고 기관지에 붙어 있던 이물질도 제거된다. 이밖에도 무는 소염작용을 하므로 술로 인한 위의 염증을 치료할 수 있고 소화 배변을 촉진시켜 숙취를 해소한다.
쓰임새
무는 보통 조리하여 반찬으로 먹는다. 단단하게 잘 여문 무를 채로 썰어 무쳐 먹기도 하고 찌개의 재료로도 쓴다. 또한 사각으로 굵게 썰어서 담궈 먹는 깍두기 맛도 일품이다. 저장용으로 가공한 무말랭이는 무침, 조림, 볶음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데 가을철에 나온 무를 길쭉하게 썰어 실에 꿰어 말려놓은 모습은 예전에는 여염집 처마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먹을 때 무를 함께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원기보양에도 좋다. 어패류와 함께 먹으면 비린내와 독성을 풀 수 있다.그러나 위궤양을 앓는 사람이 무를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무는 적체와 술독을 풀어주고 어혈을 풀어준다. 또 음식을 소화시켜 주고 대소변을 이롭게 하며 천식을 다스린다'고 한다. {식감본초}에는 '무를 생식하면 갈증이 멈추고 속이 시원해지며 설사가 낫는다. 또 무를 삶아서 먹으면 담이 없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무를 효과적으로 잘 이용하면 기침에 좋다고 전해지는데, 무씨와 살구씨를 함께 넣고 볶아서 분말로 하여 따끈한 물로 복용하면 기침에 즉효약이다. 무를 잘게 잘라 사기 그릇에 넣고 물엿 반홉을 넣은 다음 뚜껑을 꼭 덮어두고 하룻밤을 재운 뒤에 보면 맑은 물이 괴는데, 이것을 자주 먹어도 기침에 효과가 좋다. 감기가 들어서 몸에 한기가 느껴지고 목이 간지럽거나, 몸에 열이 있을 때 무 주스를 마시면 아주 좋다. 무 주스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무를 다져서 물엿, 혹은 꿀과 섞어서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거나 무나 생강을 꿀 혹은 엿과 섞어서 끓여 먹으면 된다. 이같은 무 주스는 숙취나 과식, 어깨가 시리고 저릴 때, 신경통, 소화불량, 식중독, 위산과다 등에도 효과적이다. 해소나 천식, 또는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무를 노랗게 볶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 꿀과 함께 환약으로 만들어 수시로 먹으면 좋다. 무는 몸통 뿐만 아니라 무청도 약성이 탁월하다. 무청은 원기를 돋우는 최고의 보양제로 신체, 비위 등이 허약하거나 동맥경화, 고혈압, 저혈압, 신경통, 요통, 이명증, 시력장애 등에 효과가 뛰어나다. 그리고 기억력을향상시켜주는 작용을 하므로 수험생들에게 아주 유익하다. 그런데 7잎이 나온 다음부터 나오는 무청은 약간의 독성을 머금고 있다. 이 독성 때문에 무를 먹고 채독에 걸리는 수가 있다. 이 독성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이 지나면 서리를 맞아 없어지므로 이 때는 날로 먹어도 상관이 없다.
이것이 토종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무는 크게 나누어 우리 재래종인 조선무와 일본종인 왜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왜무는 가늘고 길쭉하며 껍질이 두꺼운 것이 특징인데 주로 단무지의 재료로 쓰인다. 반면 조선무는 뿌리가 굵고 뭉툭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살이 단단하고 저장하기에 좋고 영양가도 많다. 특히 파릇한 윗부분에는 밀감에 버금가는 비타민 C가 들어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아직도 항간에서는 일반음식을 만드는 재료로 왜무보다 조선무를 더 많이 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무는 다른 작물에 비해서 종자오염이 덜 되었으며 그리 어렵지 않게 토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재배되어온 재래종인 조선무는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막론하고 대체로 물이 많아서 그 맛이 마치 배처럼 시원하고 달았다. 그러나 굳이 품질 좋은 무를 고른다면 예전에는 나주산 무를 최고품으로 쳤으나, 요즘에는 대관령이나 진부령 같은 고냉지에서 나는 무 또한 맛과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따라서 일교차가 심한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고지대에 토종 조선무를 대규모로 재배하여 그 종자를 계속 보전한다면 우리의 토종으로 당당하게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무는 무말랭이 형태로 수입되고 있는데 수입산 무말랭이는 대체로 정갈하지 못하고 지저분하며 색상이 검거나 얼룩이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조금 굵은 편이며 거칠다. 반면 국내산은 말린 상태가 깨끗하며 색상이 희다. 또한 두께가 얇고 자른 부위가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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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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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떻게 다른가 - 강성원(한국외국어대 강사)
<삼국유사>, 자주의식과 신이사관
일연은 속성이 김씨이며, 현재의 경북 경산지역의 향리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에 출가한 다음 승과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불법을 닦는 과정에서 몽고병이 침략해 왔을 때는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피난처를 알려주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40대에 최우의 인척이었던 정안의 초정을 받고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대장경 조판사업에 참여하면서 정계와 관련을 맺었다. 최씨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원종과 충렬왕의 존숭을 받았다. 77세 되던 해에는 충렬왕이 그를 국존으로 책봉하였으며,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절하는 의례를 행할 정도로 일연을 후대하였다. 만년에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에서 선문을 총망라하여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는 등 불교 교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전국 각지의 절에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일반민의 생활모습과 그들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데 상당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하고 끝내 그들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일반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와 고통의 질곡에서 구원과 희망을 갖기 위해 신앙생활에 의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때 일연은 이러한 욕구에 부응하여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하고 민족적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1281년 무렵에 완성한 <삼국유사>의 편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기 때문에 체제와 양식이 자유롭다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면 정말 이 책은 일연 혼자 편찬한 것일까. <삼국사기>가 김부식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듯이, 이 책도 일연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고 자료수집, 필사, 판각등을 제자들과 함께 곧동 작업한 결과였다. <삼국유사>의 편찬에 앞서 선행작업으로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역대연표>를 간행하였는데, 그런 과정에서 일연의 제자들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것이 <삼국사기>라면, <삼국유사>는 기이하고 신비한 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이사관으로 편찬되었다. 때문에 당대의 고승 일연이 이 책에서 불교사상, 불교설화, 고승들의 일화, 일반민들의 불교 신앙사례, 구도와 득도의 과정 등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당연하다. 일반민은 합리적인 유교사상보다는 무속 신앙을 믿었고, 불교 역시 미신적인 기복신앙의 형태로 믿었다. 또 산수와 지형의 모습이 인간생활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지리 사상도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삼국사기>가 유교이념에 입각한 사회질서 정치질서의 재정립에 목적을 두고 편찬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당시 현실 속에서 광범위한 대중에게 구원과 희망을 갖게하기 위하여 신이사관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삼국유사>를 쓸 당시는 이민족인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랜 항전을 치루고 나서 그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적 자주의식 내지 위기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일연뿐만 아니라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도 역사를 서술하면서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배경과 편찬목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 비교를 하여<삼국유사>가 <삼국사기>보다 복고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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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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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쿠란의 수집 및 보존
그러나 자음으로만 기록된 쿠란사본은 아랍어 글자의 결함 때문에 기본적인 일치 이외에 쿠란독경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문어체가 된 쿠라이시 방언과 각 부족의 구어체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쿠란은 쿠라이시 방언으로 계시되었으나 무함마드 생존 말엽에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방언에 익숙해진 아랍의 다른 부족들이 이슬람에 귀의하면서 쿠라이시 방언으로된 쿠란의 일부 낱말을 발음하지 못하자 무함마드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고유어법에 따라 이들 낱말을 발음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무함마드 시대 (610~632) 가. 쿠란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나. 아랍어로 쓰였다. 다. 자음의 점과 모음부호가 없었다. 라. 쿠란을 기록했던 아랍어 자음은 15개였다. (하나의 글자가 하나 또는 하나 이상의 음소를 나타냈다. ) 마. 23년간 간헐적으로 계시되어 쿠란이 한곳에 모아지지 않았다.
2. 아부 바크르 시대 (632~644) 가. 제1차 수집기록~쿠란이 한곳에 모아졌다. 나. 예언자 시대의 글자가 그대로 쓰였다. 다. 많은 교우들이 각기 쿠란원본을 지녔다.
3. 오스만 시대 (644~656) 가. 제2차 수집기록^36^쿠란기록의 정확성을 기했다. 나. 무슬림들이 계시 장소에서 멀어져 각 지역으로 퍼졌다. 다. 일반 사람들은 교우들이 전한 쿠란독경을 받아들였다. 라. 쿠란독경에 대한 그들의 차이를 인식하고 쿠란을 집대성하였다. 마. 자음의 점과 모음표시가 없어졌다.
그 후 모든 무슬림들은 단시 아랍어 글자가 갖는 결함-이슬람력 50년까지 28개 음소를 15개 글자로 나타냄-에도 불구하고 쿠란은 오스만 정서법에 따라 낭송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이 전파되고 비아랍인이 이슬람에 개종하자 쿠란독경에도 오류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가령 쿠란 9:3에서 rasuluh가 rasurih로 발음되었던 것이다. 글자의 결함은 자연히 구두전달에 의존하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글자들을 구별짓기 위한 점이나 부호들이 필요했다. 단모음을 나타내는 부호는 아직까지 없었고, 다만 장모음을 나타내기 위해 약자음 (w.y.)이 쓰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자음만으로 된 쿠란 사본은 구두전달에 의해 있을 수 있는 대안과 개연성의 범위를 상당히 제한시켜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쿠란 독경사들은 쿠란사본의 권위만큼 높아졌다. 그래서, 메디나, 메카, 다마스쿠스, 바쓰라와 쿠파에서 쿠란 독경사들은 쿠란사본에 모음붙이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움직임이 바쓰라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아불 아쓰와두 알두알리, 나쓰르 이븐 아씸, 야흐야 이븐 야으마르 등이 이와 관련되었다. 쿠란을 독경하는 법을 표시하기 위해 시리얀(아랍어)에 쓰였던 점이 도입되었고, 사선도 점차 쓰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논란이 되었던 부분에만 구별표시를 하였는데, 그것은 일부 무슬림들이 알라가 내려준 쿠란원문에 이같은 구별표시는 위험스런 발상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쿠란사본의 전문에 걸쳐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구별표시가 이루어진 것은 칼리파 압둘 말리크(685-705) 시대에 이라크 통치자였던 알 핫자즈 이븐 유수프의 강력한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이 때 비로소 같은 기본꼴을 가진 글자들에 점을 넣어 서로 구별짓고 단모음도 붙이게 되었다. 게다가 장모음을 표시하기 위해 쓰였던 약자음의 활용도 더욱 체계화되었고 함자의 표시도 도입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쿠란이 된 것은 934년 이었다. 아부 바크르 무자히드가 바그다드에서 7명의 쿠란독경의 대가(나피으, 이븐 카씨르, 아부 아므르, 아씸, 핫자, 알 카사이)의 이름을 발표하고 이들의 독경법을 공인하였다.
무슬림은 지금 갖고 있는 쿠란의 신빙성, 확실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쿠란의 본문으로 삽입되지 못한 부분도 있고, 쿠란본문에 아랍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의 낱말도 있는 것을 보면, 쿠란이 꼭 아랍어로만 계시되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슬람 학자 몽고메리 와트는 그의 저서 '무함마드와 메카'에서 쿠란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결정을 피하기 위하여 쿠란을 참조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혹은 무함마드가 말하길 이란 말 대신에 쿠란에 기록되어있기를 이라고 썼다. 그러나 옛 기독교 저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쿠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저자는 쿠란을 사탄의 가장 간교한 위작이라고 혹평을 했다. 정통적인 무슬림은 추호도 의심없이 쿠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안에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쿠란과 신약은 서로 모순된다. 쿠란에서 하나님은 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 신약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사흘 후에 부활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고 신약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확증되고 있지만, 쿠란은 이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쿠란은 인간(종)과 하나민(주인)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표현이다. 쿠란은 하나님의 율법과 의지의 계시인 반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속에 나타난 신성한 영감으로 정확히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말씀을 직접 받아 그대로 전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영감을 받아 그들 자신의 말로 썼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딤후 3:16) 그래서 저자들은 하나님의 대변인들이다. 이러고 보면 결국 기독교와 이슬람의 접촉점이 책들간의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콜린 채프만 (Colin Chapman)은 기독교 안에서 예수의 역할과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의 역할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고, 더구나 기독교 안에서 성경의 위치와 이슬람에서 쿠란의 위치를 상호 비교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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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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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친정 엄마 같은 시어머니
결혼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은 풋내기 새댁이자 아기 엄마인 나는 종가의 맏며느리이기도 하다. 난 가끔 내가 결혼한 게 실감이 나지 않을때가 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지 못한 친정 때문에 결혼을 치르기까지 말 못할 어려움도 참 많았다.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모두들 초조해했지만, 그래도 일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 둘씩 잘 풀려 나갔다. 예물 준비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정 엄마는 일 때문에 그 자리에 함게 갈 수 없어서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갔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내쪽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다. 정말이지 엄마도 안 계시고 돈도 없고, 그곳을 뛰쳐나오고 싶었다. 그런 순간마다 내 마음을 읽으신 시어머니께서 자상하게 "어떤 게 맘에 드냐? 돈은 생각지 말고 맘에 드는 것으로 하렴"하시며 편안한 미소로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고 당신도 함께 보시는 것이었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 보았다. 얼마 뒤 예식장 예약 문제로 함께 예식장에 갔을 때도 시어머니께서는 그 화려한 분위기에 주눅들어 있는 나를 따사롭게 감싸 주셨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친정 엄마와 딸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예약을 마친 뒤 착잡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말없이 밖으로 나온 나에게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너무 걱정마라. 없는 마음이 더 아픈 거 안다. 엄마한테 이것저것 해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엄마 걱정 안 하시게 위로해 드려라."
그 순간 마음 속으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각박한 세상에 이런 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주는 것에 비해 받기만 좋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지나온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쑥스러워 어머님께 말씀 드려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오늘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해 드리고 싶다.
"어머님! 딸처럼 편히 대해 주신 것, 제가 아플 때도 싫은 내색없이 뒷바라지 해 주신 것,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머님 보시기에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은 줄 압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바라시는 큰며느리로 자리를 굳히는 데 아낌없는 가르침을 주십시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으로 절 지켜봐 주세요."
김연숙 님/경북 구미시 임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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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22 이상주의 철학의 마지막 불꽃: 신플라톤 학파 창시자, 플로티노스 (204-270)
그때 세계에서는 BC 250년: 인도 아소카왕, 왕자를 실론으로 보내 불교전파: (구약성서)그리스 어로 번역 BC 241년: 에라토스테네스, 지구의 원주율 계산
촛불은 다 타고 꺼지기 전에는 마지막 불꽃을 밝게 태우면서 사라진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 마지막으로 의식을 되찾는다. 의사들은 유언을 위한 최후의 기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상과 철학의 역사도 그런지 모르겠다. 길게 보면 1천 7백년에 걸친 고대철학사상이 마지막을 고하게 되면서 한 번 더 밝은 빛을 발휘하고 끝난 듯한 인상을 준다. 그 마지막을 크게 장식한 사람이 바로 플로티노스(Plotinos, 204-270)였다. 그의 생존연대는 벌써 AD로 접어들었으며, 로마에서는 기독교 사상과 철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플로티노스도 기독교 철학의 영향을 측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인 고대철학의 주류를 계승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자라고 부른다. 모든 철학은 상식과 교양으로 화하고, 처세를 위한 지혜가 곧 철학인 듯이 받 아들여지고 있던 로마 시대에 있으면서 한번 더 이상주의적인 철학을 꽃피우고 싶은 것이 플로티노스의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토아-에피쿠로스-회의학파 등을 떠나 플라톤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철학의 정상적인 길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택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플라톤주의는 로마의 현실주의와 물질 문명적 흐름을 좀더 높은 차원의 철학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신흥종교인 기독교의 긍정적인 세계관과 초월적인 종교관이 플라톤의 철학과 통하는 바가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를 계속 연구하고 있다.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이 중세기에 와서는 기독교가 주인이 되고 플라톤 철학이 손님의 위 치를 차지하나, 플로티노스에 있어서는 플라톤 철학이 주가 되고 기독교 사상 이 객이 되는 위상에 머물고 있었다. 지금도 플로티노스를 읽는 사람은 바이블의 요한복음을 읽는것 같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두 사상에는 공통성이 발견되고 있다. 적어도 그 당시 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자기 자신을 탁월한 철학자이면서 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자처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를 가리켜, 육신을 갖고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 태생이면서 로마에서 교육을 폈고 학교를 주관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50살이 넘으면서부터 저작에 착수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의 "유일자에 관하여"하는 형이상학적 저작에 접하고 있다. 그는 모든 여타의 철학을 플라톤 철학에 접합시켜 새로운 학설을 꾸몄으며, 거기에는 종교성이 짙은 이데아 론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최초의 신비주의 철학자라고 부르며, 종교철학의 창시자라고도 평한다. 가장 예술적 직관 력을 갖고 철학적인식을 개척해준 사상가라고도 본다. 그는 모든 존재는 유일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 유일자는 신 또는 절대자라고 부를 수 있는 지선 또는 완전선의 암시자다. 초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충분히 인식할 수는 없다. 만물은 그 유일자로부터 빛을 발하듯이 나타났으며, 유출되었으며, 생산된 것이다. 태양은 그 자체가 빛이듯이 유일자는 그 스스로가 자신을 밝혀주며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유일자는 초절해 있는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유출된 만물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최초의 직접적인 유출은 이성 또는 정신이다. 모든 사상과 이데아들은 이 이성 및 정신과 더불어 머문다. 이성의 가장 큰 능력은 사고다. 누스는 사고의 주체가 된다. 이 일차적인 유출에서 제2의 유출로 나타나는 것이 영혼이다. 영혼은 인간적기능의 일부이기 때문에 순수한 이성이나 정신보다 하위에 머문다. 로고스는 바로 이 단계에 머문다. 제3의 유출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이며 자연에 속하는 물질과 질료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위로 이성과 정신으로 향햐게 되면 선과 빛 으로 상승하게 되나, 반대로 영혼이 육체나 물질을 택하게 되면 하강하는 운명 에 빠진다. 악과 암흑에의 퇴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어진다. 이렇게 상승하는 길은 직관에 의하는 것이나, 하강하는 것은 감정이나 욕망의 길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중세기의 기독교적 인간관과도 잘 통하는 내용이다. 플로티노스는 오랫동안 물질주의와 유물론의 흐름에 젖어 있던 고대철학을 다시 한번 플라톤주의 철학으로 복원시키는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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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21. '꽁치'의 어원에 관한 유력한 설이 있습니다
생선의 하나인 '꽁치'를 모르시거나 한 번도 드시지 않은 분은 없겠지요. 이 '꽁치'의 어원은 현재로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치'는 물고기를 나타내는 접미사로서 알고 있지요. '넙적한 물고기'는 '넙치', '날라서 가는 물고기'는 '날치', '칼과 같은 물고기'는 '갈치'('칼'은 예전엔 '갈'이었으니까요), '검은 물고기'는 '가물치' 등등, '-치'가 무척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가 붙은 물고기 중에 알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꽁치'와 '멸치'입니다. '멸치'의 어원은 알 수 없고, '꽁치'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꽁치'에 대해서는 '아언각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꽁치'는 원래 '공치'인데, 이 물고기는 아가미 근처에 침을 놓은 듯 '구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치'는 '구멍 공'의 '공'에 '-치'가 붙었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이 된소리가 되어 '꽁치'가 되었다는 것 같습니다. 아언각비의 설명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아직까지는 이 설이 가장 그럴 듯합니다. '꽁치'를 한 번 살펴 보시지요.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는 분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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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기간 코끼리 626일, 코뿔소 560일, 기린 410일, 낙타 400일, 염소 151일, 개 63일, 고양이 60일, 고래 365일, 말 340일, 인간 266일, 원숭이 237일, 토끼 30일, 쥐 19일, 주머니쥐 12일
개미는 자기 몸무게보다 50배나 더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고 벌은 자기보다 300배 더 무것운 것을 운반할수 있는데, 인간으로 보면 10톤짜리 트레일러를 끌어야 하는 것과 같다.
한 단어를 말하는데 650개의 근육중 72개의 근육이 움직여야 한다.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키가 작은 사람들이 키가 큰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산다.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7년 더 오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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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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