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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 호
4339.10.08 (08.17)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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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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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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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겁쟁이도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만이 불안을 이겨 낼 수 있다. /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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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21. I'd like to return this.
미국에는 일단 판매한 물건을 손님의 요청에 따라 도로 물러주는 refund(리펀드) 제도가 아주 잘되어 있다. 이른바 money-back guarantee(마니 백 개런티)라고 해서 고객이 상품에 만족하지 않을 때는 군소리 하지 않고 돈을 도로 내주는 것을 보증한다고 선전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작은 개인 상점들은 간혹 All sales are final.(한번 팔면 그만입나다) 또는 No refunds or exchanges.(무르거나 교환해 주지 않음)이라고 써붙여 놓은 곳도 있지만, 공신력을 자랑하는 대규모 백화전 등에서는 고객의 요구가 있으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refund를 해준다. 백화점에서 어떤 물건을 샀다가 도로 무르고 싶으면 백화점 안에 service desk나 REFUNDS라고 써붙여 놓은 곳에 가서 영수증과 물건을 보여 주면서 I would like to return this.라고 하면 "이것을 무르고 싶습니다"란 말이 된다. Can I get a refund on this?라고 해도 같은 뜻이 된다. refund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Can I have my money back on this?라고 해도 같은 뜻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말하면 What seems to be the problem? 또는 What's wrong with it?이라고 말해서 무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수도 있다. 이럴땐 I think this is defective.(이것은 결함이 있는 상품인 것 같습니다)라든가 옷 같으면 It's the wrong size.(크기가 맞지 않습니다)와 같이 적당히 이유를 대면 더 이상 묻지 않고 refund용지에다 고객의 서명을 받고 물러 줄 액수를 기록해서 준다. 그러면 그것을 cashier에게 갖다 주면 돈을 전액 반환해 준다. 단 수표로 물건을 샀을 경우는 그수표가 결제될 때까지(보통 1주일 이상) 기다린 후 물러 준다. 산 물건을 돈으로 무르지 않고 다른 물건과 바꿀 경우에는 물건과 영수증을 보이면서 Can I exchange this? (이것을 다른 것과 좀 바꿀 수 있습니까?) 또는 I would like to exchange this.(이것을 다른 것과 교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다른 물건과 교환할 경우도 일단 돈을 도로 내주고 손님이 그 돈으로 다른 물건을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돈을 도로 받은 위 마음이 변해서 다른 물건을 사고 싶지 않다면 사지 않아도 그만이다.
Customer: I'd like to return this. Service desk: What seems to be the problem? Customer: This watch doesn't work right. Service desk: All right. Sign this refund check and take it to the cashier. Customer: Thank you. 고객: 이것 좀 무르고 싶은데요. 봉사 창구: 문제점이 뭔가요? 고객: 이 시계가 제대로 가질 않아요. 봉사 창구: 좋습니다. 이 환불 용지에 서명하신 후 현금 출납원한테 가져 가십시오. 고객: 감사합니다.
Service desk: What can I do for you? Customer: I'd like to exchange this. Service desk: What's wrong with it? Customer: It's the wrong size. Service desk: All right. Sign this refund check and take it to the cashier. Get your money back and buy the right size. Customer: Thank you. 봉사 창구: 어떻게 오셨지요? 손님: 이것 좀 바꾸려고 하는데요. 봉사 창구: 뭐가 잘못 됐나요? 손님: 크기가 맞질 않아요. 봉사 창구: 알겠습니다. 이 환불 용지에 서명하시고 현금 출납원한테 가져 가십시오. 돈을 도로 받아 크기가 맞는 것을 사도록 하십시오. 손님: 감사합니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Teacher: If you had 20 cents and you asked your granny for another 20 and your grandpa for 30, what would you have, John? Pupil: 20 cents. Teacher: You don't know your arithmetic, young man. Pupil: And you don't know my grandparents.
선생: 만일 네가 20센트를 가지고 있는데, 할머니에게 또 20센트, 할아버지에게 30센트를 달라고 했다면 넌 모두 얼마를 갖게 되지, 존? 학생: 20센트요. 선생: 애야, 넌 아직 산술을 모르는구나. 학생: 선생님은 아직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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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19.황기(단너삼) - 인삼 대용의 보약
황기는 산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서 흔히 단너삼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때에는 이두글자로 수판마라고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감판마라고 하다가 17세기 경에 와서는 단너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너삼과 모양은 비슷하되 단맛이 나므로 '단너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단너삼은 주로 약용으로 쓰기 위하여 재배하는데 줄기의 길이는 1m 안팎이고 줄기 전체에 잔털이 나 있다. 그리고 해마다 7∼8월 여름이면 연한 황색으로 꽃이 핀다. 주로 우리나라 북부지방 고냉지에 자생하지만, 모든 지방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중,북부지방 산간의 서늘한 곳에서 가장 잘 자란다. 황기는 서늘한 가을날씨 같은 곳이라야 뿌리가 잘 발달하므로 온도가 높고 다습한 지역에서의 재배는 불리하다. 우리나라 주산지를 보면 강원도 정선, 충청북도 제원과 같이 산간 고냉지에서 우량품이 생산되고 있다. 겉흙이 두껍고 지하 수위가 낮으며 적당한 습기가 배어있는 식질양토나 부식질 양토에서 잘 자라며, 유기질이 많은 식양토나 사양토에서도 비교적 생육이 잘 된다. 그러나 모래땅이나 질참흙에서는 잔뿌리가 많이 생기고 뿌리가 썩기 쉽다. 황기는 단일 품종이다. 옛날에는 산에 자생하는 것을 채취하여 썼지만 지금은 포장, 또는 순화재배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새로운 개량종으로 육성된 품종은 없다. 그래서 자연산을 채종하거나, 인공재배한 것 중에서 병충해의 피해를 입지 않은 건실한 포기를 선택하여 종자를 배양한다. 종자를 선택할 때는 광택이 나며 튼실한 햇종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선별한 종자를 직접 파종하거나 육묘로 이식하여 재배한다. 황기, 즉 단너삼은 뿌리 부위를 약으로 쓴다. 단너삼의 뿌리는 한열을 다스리고, 강장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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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황기에는 글루코스(Glucose), 후로크토스(Fructose), 과당, 전분, 점액질이 함유되어 있다. 뿌리는 주로 약재로 이용하는데 그 약효 성분은 폴리산, 콜린 등이다. 동물실험 결과 중추신경계의 흥분작용과 이뇨작용에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또한 흰쥐에게 대량의 분말을 투여하였을 때 신염의 발생을 억제하는 효과가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콜레스테롤 혈증의 발생도 지연시켰으며 혈압강하 작용도 인정되었다.
쓰임새
황기는 대부분 한약재로 사용된다. 황기의 약성은 온화하고 매우 달다. 따라서 원기를 돕고 땀을 많이 흘리는데 좋은 약재이다. 또 예로부터 강장약의 하나로서 허약체질을 튼튼하게 해주며 살결을 아름답게 해주는 효능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황기는 비위를 보강시켜주고, 심장의 기능을 항진시키며, 피로회복과 체력증강에 좋다. 그리고 이뇨작용과 지한작용을 하며 설사를 멈추게 한다. 한방에서는 십전대보탕, 황기별갑탕, 보중익기탕 등 중요한 처방에 쓰인다. <방약합편>에 따르면 '미감 성온하며 한표를 거둔다. 창이 난 곳을 아물게 하며 허한데 많이 쓴다. 또한 당뇨병, 결핵성 질환, 신체허약, 만성궤양, 심장쇠약 등에도 효험이 있다. 이밖에도 당귀 등의 약재와 함께 보혈제로도 많이 쓰인다. 황기가 음식의 재료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그 중 한가지로 '황기 닭찜'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 요리는 특히 여름철에 땀을 많이 흘려 원기가 떨어지고 식욕마저 떨어졌을 때, 또 몸이 허약하거나 체질적으로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에게 훌륭한 보신제가 된다. 황기닭찜을 만드는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깨끗이 씻어 물에 삶아 피를 뺀 닭 1마리와 황기 20g, 화초수(산초라는 한약재를 물에 담가 우려낸 것)10g, 그리고 파, 생강, 소금, 청주 등을 약간씩 준비한다. 이와 함께 깨끗이 씻은 황기, 알맞은 크기로 썬 파와 생강 등을 넣고 소금, 청주, 화초수를 뿌린다. 이때 황기는 잘 다져서 물을 넣고 졸여 베로 걸러낸 약즙만 써도 된다. 위 재료가 담긴 질그릇을 찜통에 넣고 센 불에서 찐 다음에 먹으면 된다.
이것이 토종
최근 들어서 생약재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인정됨에 따라서 한의학에 대한 인식도가 달 지고 있으며 그 수요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재배면적도 증가하고 으며 재배기술도 발달하여 조기 수확이 가능해짐에 따라 생산량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생약재의 국내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국내 한약재 가격 안정을 위하여 꾸준히 수출 증대에 힘써 왔다. 또한 국내 생산농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외국산 한약재의 수입을 강력히 억제했다. 그 결과 지난 1987년에는 수출액이 약 1천8백만 달러에 이르렀고 수입액은 2만 7천 달러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수출흑자 품목 중에서 황기는 주요한 품목 중의 하나다. 대부분 한약재로 사용되는 황기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지역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는데 정선, 삼척, 영월, 봉화, 울릉도 등이 주산지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강원도 영월산 황기는 예로부터 품질과 약효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하여 수출하는 한약재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략 2백여 종에 달했으나 점차 70여 종으로 줄어들었으나 황기는 변함없는 주요수출품목 중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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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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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떻게 다른가 - 강성원(한국외국어대 강사)
김부식(1075-1151)이 활동했던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사회의 내부갈등이 심화되어 간 시기였다. 농민이 유망하고 지배층이 분열하는 가운데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 격동이 이어졌다. 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면서 종전과는 다른 국제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구 후 무인정변이 일어나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사회모순이 더욱 격화되고 농민. 천민의 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어 몽고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항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 김부식과 일연, 두 사람의 성장배경이나 직업, 종교 등이 다르듯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체제와 내용, 역사관이 서로 다르다. 두 책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에 관한 일들을 기록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두 책은 서로 보완적이며, 어느 것이나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는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 김부식의 본관은 경주이며, 2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때부터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다섯 형제 가운데 승려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김부식은 유교의 예법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으며, 뛰어난 문학소양과 유학지식을 바탕으로 출세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이자겸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에 붙은 사람들은 이자겸이 임금의 외조이고 장인이라고 하여 신하의 예로 대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또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이자겸은 신 이라고 쓰지 말고, 신하들이 모인 연회석상에서도 백관들과 함께 설 것이 아니라 임금과 함께 앉게 하자고 하였다. 그 때 대 부분의 신하들은 이자겸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그 의견에 따랐으나, 김부식은 중국에서도 이 같은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또한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자고 하였을 때, 김부식은 당나라 현종때부터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이라고 불렀는데 신하의 생일을 절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처럼 김부식은 아무리 실권을 가진 사람의 의견이나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도 예의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반대하였다. 이자겸세력이 제거된 다음 곧이어 묘청세력이 임금에게 황제를 칭하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면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였을때, 김부식은 반대하였다. 그리고 묘청세력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뒤 수상까지 승진하여 정계를 주도하였다. 이 무렵인 1145년(인종23)에 <삼국사기>편찬을 주도하였다. 흔히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쓴 것처럼 생각하지만,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해 관에서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김부식이 책임자로서 감수를 했을 뿐이다. 물론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제 자료수집, 분석, 서술에는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임금이었던 인종과 김부식세력은 계속되는 사회변동과 정치변란에 대응하여 지배질서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사회가 어지러우면 흔히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관료와 지식층이 우리 나라 역사보다 중국 역사에 더 달통한 것을 개탄하고 중국 역사책만으로 교훈을 삼기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는 정치를 밝혀 권장하고 훈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역사책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책은 당연히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인정을, 신하에게는 충절을, 자식에게는 효행을 강조하여 수술하였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어떤 부분에 유교적 역사관과 합리주의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삼국사기>는 역사책의 편찬 방법 중에 본기, 지, 표, 열전으로 분류하여 편찬하는 기전체로 만들었다.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정치, 전쟁, 외교에 관한 것을 주로 기록하였다. 정치는 유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그 실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왕을 하늘의 명령을 대리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왕을 거역하는 일은 철저히 응징하는 논조를 폈다. 이는 논어에 ‘왕은 바람이요 민은 풀이라 바람이 불면 풀은 눕게 마련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하려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자연변이에 대한 기록을 정치적 사건과 관련시켜 서술하였는데, 정치가 순조롭지 않을 경우 혜성의 출현, 일식, 월식 등 자연질서에 이변이 생긴다고 보았다.
<열전>에는 충효와 정절을 강조하여 그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기록하였다. 예컨대 승려였지만 백제가 침공하여 신라가 위기에 봉착하자 승복을 벗고 전쟁에 뛰어들어 온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혀 죽은 취도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형제들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미모에 반한 임금의 수청을 거부하고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남편과 운명을 같이한 도미 부인의 기록에서 여자의 정절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몸을 부잣집의 노비로 팔아 부모를 잘 봉양한 효녀 지은을 서술하여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열전에 기록한 많은 인물들의 사례를 통하여 유교의 기본 사상인 삼강오륜의 실천을 중시하고 그에 바탕을 둔 사회질서가 확립될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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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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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수라와 아야 쿠란은 길이가 다른 114수라로 되어 있다. 수라는 담벽이나 포도덩굴의 줄(열)을 의미하는 히브리 낱말에 기원을 둔다. 오스만 제3대 칼리파 때에 와서야 쿠란에 제목이 붙었다. 쿠란을 책 형태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길이에 따라 수라를 배열했다. 제9장을 제외하고 모든 수라는 비쓰밀라히 라프마니 라힘(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으로 시작된다. 절(아야)은 원본에는 없었다. 그래서 영어 번역본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더구나 절의 차이로 인해 책마다 다르게 절이 표시되고 있어 어떤 절이 없으면 앞뒤를 찾아보아야 한다. 29개의 수라는 비쓰밀라로 시작한 다음에 아랍어 자음 "알리프, 람, 밈"으로 시작하는데, 이 신비로운 글자에 대한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다음은 쿠란 제 112장이다. 다음 숫자는 절에 해당한다.
제 112장 -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1. 말하라, 알라는 한 분이시며 2. 알라는 가장 위대하며 3. 알라는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4. 그 분과 대등한 자는 아무도 없도다.
무슬림들은 수라의 순서를 알라가 정해 주었다고 하는 학설이 유력하다. 쿠란절의 총 수는 다음과 같이 이슬람 학자마다 다르다.
1. 나피오가 말하길 "쿠파 사람들은 6217절이라 하고, 바쓰라 사람들은 6214절이라 했다. " 2. 이스마엘 븐 자아파르는 6214절이라 했다. 3. 앗다니는 6210절이라 했다. 4. 아따 븐 야싸르는 6204절이라 했다. 5. 야흐야는 6227 또는 6226 절이라 했다. 6. 샤리흐 븐 자이드는 6232절이라 했다. 7. 함자 븐 하비비는 6236절이라 했다.
언어적으로 절(아야)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전부 모은다는 뜻이고 또다른 의미는 표시라는 뜻이다. 즉, 몇 개의 낱말이 모여서 된 구절이란 뜻과 말이나 구절이 끝났을 때 표시가 있는 것이란 의미이다. 쿠란의 낱말 수도 학자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77934개의 낱말이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77437 또는 77277개의 단어가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차이는 가령 '하늘에서'를 두 낱말로 또는 한 낱말로 세었기 때문이다. 쿠란은 전체를 30등분하여 30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을 알 주즈라하고 매일 한 줄씩 읽으면 한 달 만에 전체를 읽게 된다. 쿠란 전체를 7등분 하면 7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을 알 만질 도는 히즙이라하고, 하루에 한 만질 씩 읽으면 쿠란 전체를 일 주일에 다 읽게 된다. 또 쿠란 전체를 4등분하면 루브으, 2등분하면 나쓰프, 4분의 3은 쑬쑤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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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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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반찬을 싸 오시는 아버지
아버지라는 그분은 언제나 낯설고 알지 못하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팔 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스무 살이 된 지금, 제게는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십니다. 십오 년 동안이나 친딸처럼 저를 키워 주시고 어머니를 사랑해 주신 분입니다. 지금은 자상하신 아버지 덕택에 어색함 같은 것이라곤 전혀 없지만 사춘기 시절엔 왜 그리도 '아버지'란 소리가 안 나왔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라는 말은 저를 늘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때로는 학교에서 조사하는 가족사항에 거짓을 써넣기도 하고 동생과 성이 틀리다는 친구들의 의아한 눈빛을 받을 때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어머니를 원망하며 혼자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광주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혼자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약한 제 몸을 걱정하셨지만 저는 알 수 없는 해방감에 마음이 조금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안 돼 아버지가 반찬을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뒤 아버지는 두 시간 거리인 해남에서 광주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반찬을 몰래 갖다 놓고 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몹시 아파 하루를 결석하고 이튿날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4교시 수업이 시작될 무렵 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취집에 오셨다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제 얘기를 전해 들으셨나 봅니다. 아버지는 약 한봉지를 내밀며 몸조리 잘하란 말만 남기고 곧바로 가셨습니다.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한 저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못난 자식이었습니다. 학교가 파한 뒤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어 보니 한쪽엔 아버지가 챙겨 오신 반찬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반찬통을 싸온 녹색 보자기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고 그 밑엔 얼마의 용돈과 평소에 먹던 약봉지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잊지 말고 잘 챙겨 먹으라는 뜻이었겟지요. 그때서야 저는 내게도 어느 누구보다 부럽지 않은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도 어느덧 환갑을 목전에 두고 계십니다. 저와 어머니를 십오 년간이나 돌봐 주신 아버지의 머리 위엔 어느새 흰 눈이 내렸습니다. 그 동안 말 못할 시련에 아버지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서려 있는 듯 느껴집니다. 이제서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입밖에 내놓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다니 저는 참 못난 딸입니다.
오정순 님/광주시 동구 계림 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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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20 "최고의 선은 정신적 쾌락이다. ": 에피쿠로스 학파(기원전 4-3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287년경: 로마, 호르텐시우스 법 제정 BC 280년경: 아리스타르코스, 지구의 자전과 공전 설명
스토아 철학만큼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은 남기지 못했으나 헬레니즘 시대에 큰 흐름을 형성한 또 하나의 철학사조로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다. 에피쿠로스(Epicouros, 341-270 BC)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키레네 학파의 윤리학을 종합한 성격의 철학을 창안했다. 대단히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 하나, 전해지고 있는 것은 수편의 어록 정도다. 데모크리토스를 따랐기 때문에 유물 론적인 원자론적 자연관을 철학의 기반으로 삼았고, 인식에 있어서는 감각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두 가지 다 새로운 학설로 발전시킨 것 같지는 않다. 에피쿠로스는 몇 권의 윤리학 책을 남긴 것 같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해져 내려오는 쾌락주의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쾌락주의는 자연히 사회성보다는 개인주의 윤리관에 치중하게 되며 정서적 이기주의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즐거움은 나의 것이며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성의 출발은 인정되나 거기에는 두 가지 과제가 따르게 된다. 그 하나는 쾌락의 질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어떻게 즐거움이 사라지않고 오래 강하게 머물 수 있는가 함이다. 이 둘을 합친 것으로 그들은 아타락시아(ataraxia)의 상태를 추구했다. 말하자면 흩어지지 않고 동요가 없는 마음의 안정된 상태를 가르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즐거움이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발전해야 하며, 육체의 현재성이 영혼의 영구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성적 식견이 현실적 생활을 이끌어가는 상태가 아니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스토아의 정신으로 흡수되거나 같은 방향을 택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쾌락은 질에있어 행복과 통하며, 높은 차원의 행복은 정신적이며 이성적인 것과 합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 가지 탈출구를 고집한다. 하나는 이성과 식견은 행복을 위한 수단은 될 수 있어도 그 목적은 될 수 없다는 본래의 주장을 편다. 그리고 안정부동의 쾌락을 위해서는 숨어서 살라는 은둔생활의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욕망을 지배하며, 외적 관심과 물욕에서 독립하며, 속세에서 신과 같이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과 빵만으로 살면서도 제우스 신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앞세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시대사조에 걸맞게 세계시민적 정신과 우정과 관용과 이웃에 대한 호의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보다는 고통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고통의 짐을 벗어 날 수 없다면 죽음을 택하는 것도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스토아의 사상과 같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은로마의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풍토와는 맞지않았던 때문이며,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가치관을 필요로 하는 시대와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이 계통의 철학자들 가운데 루크레티우스 카루스(Lucretius Carus, 97-55 BC)라는 사람의 저서"자연의 본질에 관하여"6편이 완전히 전래되어 그들의 철학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정신적 상황을 잘 그려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미신인 종교를 떠나라. 무로부터 생기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다. 물질의 시원인 원자만이 공간에서 움직일뿐이다. 원자의 결합에서 감각이 생기고 세계에는 무한수의 물건들이 있다. 죽음의 공포나 불사의 신앙을 배척하라.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육체를 떠나면 소멸될 뿐이다. 감정이나 성적 사랑도 물질적인 성격의 발로다. 인류가 얻을 수 있고 만드는 것은 자연에서 문화를 찾아내는 역사적 과정일 뿐이다. 자연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소멸한다. 자연에는 이상현상이 있고, 신체에도 병적인 이상현상이 발생하며, 그것은 병리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등의 설명을 가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유물론적인 철학사상을 계속 견지했고, 윤리학에서는 쾌락주의적 방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스스로의 학설과 주장들 속에 적지않은 모순을 내포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로마 시대로부터 그 이후까지는 철학적 여맥을 이어가지 못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스토아에 흡수되든가, 또는 회의주의 방향으로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그런 결과가 역사적으로 나타나고도 있다. 스토아 학자들이 그들의 윤리관을 흡수한 흔적도 없지 않으며, 에피쿠로스 학파때문에 회의주의 철학이 더 세력을 강화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였다. 진리는 시대의 딸들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에피쿠로스와 회의학파는 바로 그런 성격의 유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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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물 한 모금 마시고'의 '모금'은 '먹다'와 연관된 단어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제가 국민학교 때 국어 시간에 배웠던 동시의 한 구절입니다. 이 때 '모금'은 지금은 그 어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옛말의 형태를 보시면 금방 그 어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서는 '모금'은 '머곰', 또는 '먹옴'이었으니까요. 그러면 쉽게 그 어원을 짐작하시겠지요? '먹다'와 연관된 단어입니다. 어간 '먹-'에 명사형 접미사인 '음', 또는 '옴'이 붙어서 된 단어이거나, 이 '먹-'에서 파생된 단어인 '머곰다'의 어간형이 그대로 명사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사 어간이 그대로 명사로 쓰이는 예는 그리 흔하지 않아서, 전자의 설명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곰다'(또는 '머굼다')가 오히려 '머곰'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것을 영 파생이라고 하는데, 우리 국어에서는 그 예를 흔히 발견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신' - '신다' '품' - '품다' '안' - '안다' '배' - '배다' '띠' - '띠다' '되' - '되다' '갈(칼)' - '갈다' '빗' - '빗다'
등등이 그러한 예들입니다. 물론 이중에는 동사에서 명사로 파생된 것도 있습니다. '머곰'의 '머'는 '미음' 때문에 뒤의 모음 '어'가 원순모음화되어서 '모곰'이 되고 이것이 다시 '모금'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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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자동차를 만드는 데는 보통 13,000개의 부속품이, 747제트 여객기를 만드는 데는 3,000,000개의 부속품이, 그리고 우주선을 만드는 데는 5,000,000개의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는 10,000,000,000,000개의 세포조직이 있고, 정맥과 동맥, 모세혈관 등 혈관의 총 길이는 112,000킬로미터로 지구를 두번 반이나 돌 수 있다. 또 피속에는 산소를 운반하는 25,000,000,000,000개의 적혈구와 질병과 싸우는 25,000,000,000개의 백혈구가 있다. 심장은 1분에 4.7리터씩 피를 내보내고 9,000개 이상의 미각 세포가 혀에 있어 음식의 맛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몸에는 모두 206개의 뼈와 650개의 근육, 100개 이상의 마디가 있다. 이 놀랍고도 신비로운 메커니즘이 바로 조그마한 인간의 몸 속에 있다.
인간의 뇌는 고통에 민감하지 않다. 뇌에 이상이 있어도 우리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머리가 아픈 것은 뇌를 싸고 있는 근육에서 오는 것이지 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위와 비장의 50%, 간의 70%, 내장의 80%와 한개의 신장, 한 개의 폐를 떼어 낸다고 하더라도 살아 갈수 있다.
신장이나 심장은 이식할 수 있으나 눈은 완전히 이식할 수 없다. 단지 눈의 부분만 이식할 수 있을 뿐이다. 눈은 뇌의 둣부분에 있는 1,000,000개 이상의 신경조직과 연결되어 있어서, 이것이 잘렸을때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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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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