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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 호
4339.10.03 (08.12)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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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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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전주=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장편소설 '혼불'의 작가인 고(故) 최명희(1947-1998)씨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제6회 혼불문학제가 오는 10일 전북대에서 열린다.
혼불기념사업회와 최명희문학관이 공동 주최하는 올해 문학제에서는 장미영 전주대 교수와 시인 윤지영 씨 등이 참가해 '혼불과 소통'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와 혼불문학공원 탐방 등의 부대행사가 열린다.
또 제6회 혼불학술상 시상식이 열려 한국 전통문화 속 여성의 지위를 토대로 페미니즘 이론을 재조명한 논문집 '페미니즘 미학과 보편성의 문제'를 낸 명지대 김복순 교수(50)가 받는다.
주최측 관계자는 "최명희 선생의 삶과 문학 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문학제"라며 "'혼불'을 토대로 문학이 문화.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논의해 보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최씨는 조선시대 남원지역 양반가의 몰락 과정과 3대째 종가를 지켜온 며느리의 애환을 그린 대하소설 '혼불(10권)'을 17년 동안에 걸쳐 완성, 전북 애향대상과 단재문학상, 호암상 등을 받았으며 지난 98년 12월 암으로 타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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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건강을 지닌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희망을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 아라비아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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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6. Can you come down a little?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포가 경영하는 어느 선물 가게에 미국인 손님이 들어왔다. 손님은 큰 한국 인형 하나를 가리키며 How much is that doll? (저 인형 얼마죠?)라고 물었다. 이때 주인은 마침 안락 의자에 앉아 장부 정리를 하고 있던 터라 앉은 채로 인형 가격을 45달러라고 말해 주었더니 미국인이 이번엔 Can you come down a little?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교포는 자기가 의자에 앉은 채로 손님을 대한 것이 불쾌해서 미국인이 "좀 내려올 순 없습니까?"라고 말한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교포는 I am sorry.라고 말하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자 손님이 다시 Can you come down a little?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포는 미국인의 말뜻을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미국인이 한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당신 좀 내려올 수 있느냐?"이지만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오라는 말이 아니라, "높은 가격에서 낮은 가격으로 좀 내려올 수 없습니까?" 즉 "에누리 좀 할 수 없습니까?"라는 말이다. '에누리' 라면 discount라는 말밖에 몰랐던 이 교포상인이 어리둥절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상점에 들어가서 점원이 May I help you?라고 말할 때 "그저 구경좀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면 I am just looking. 또는 I am just browsing.이라고 하면 된다. browse(브라우즈)는 "이곳 저곳 둘러 본다"는 뜻이다. 상점 유리창에 가끔 Browsers welcome.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물론 "구경만 해도 좋다"는 뜻이다. 값이 비싼 것은 expensive 또는 steep이라고 한다. 값이 좁 비싸다 싶을 때 Too expensive. 또는 Too steep.이라고 하면 "너무 비싼데요"가 된다. 그러나 값이 터무니없이 비쌀 때는 This is highway robbery.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건 노상 강도다"가 되겠지만 사실은 "이것은 노상 강도나 다를바 없구나"란 뜻이다. This is a rip-off.이라고도 하는데 "바가지 썼구나"란 뜻이 된다.
Salesgirl: Hello, may I help you? Customer: I'm just looking. Salesgirl: All right, sir.
A few minutes later-
Customer: How much is this watch? Salesgirl: One hundred sixty dollars. Customer: Too steep. Can you come down a little? Salesgirl: Sorry, we don't discount. Customer: All right, I will take it. Can you giftwrap it, please? Salesgirl: Sure. 판매원: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무엇을 찾습니까?) 손님: 그저 구경 좀 하고 있습니다. 판매원: 알겠습니다.
잠시 후-
손님: 이 시계 얼마죠? 판매원: 160달러입니다. 손님: 너무 비싼데 에누리는 안 됩니까? 판매원: 죄송하지만 할인 판매는 안 하는데요. 손님: 좋아요, 사겠어요. 선물용으로 포장해 줄 수 있어요? 판매원: 예.
Customer A: Hey, look at these price tags. Sixty-five dollars for a necktie? This is highway robbery! Customer B: You are right. This is a rip-off. Let's go to some other place. 손님 A: 야, 이 가격표 좀 봐. 넥타이 하나에 65달러라구? 이건 노상 강도나 다름없군! 손님 B: 그래 이건 바가지야, 딴 데 가보자구.
Salesgirl: Good afternoon, sir, may I help you? Customer: I think I will just browse around. Salesgirl: All right, sir. In case your need help. My name is Cindy. Customer: OK, Cindy. 판매원: 안녕하세요. 무얼 찾으세요? 손님: 그저 구경 좀 할까 해요. 판매원: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저를 불러 주세요. 제 이름은 신디예요. 손님: 알았어요, 신디.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 doctor gave a patient six months to live. But when the patient didn't pay his bill, the doctor gave him another six months to live. 의사가 어떤 환자에게 앞으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환자가 입원비를 물지 않자 의사는 환자 에게 6개월 더(도합 1년) 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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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14.오미자 - 다섯 가지의 신비한 맛
{천금방}이라는 책에서는 남성의 발기불능에 대한 치료법을 밝히고 있는데 그 중에 오미자 처방이 나온다. 오미자 1근을 말려 가루를 내서 날마다 한 숟갈씩 세 번 나누어 먹는다. 이렇게 백일 이상 계속 먹으면 열 명의 여인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사실이 실증되기만 한다면 아마도 오미자 값이 금값으로 뛸 것이다. 정력제라면 별의별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같은 효능을 가진 오미자를 가만 둘 리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무지무지한 정력의 원천(?)이 되는 오미자는 과연 무엇인가. 가을녘이면 높은 산지의 등성이나 계곡 등지에는 마치 포도송이 같은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열매를 일러 오미자(오미자)라 하는데 이것은 이름 그대로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가지의 맛을 고루 갖추고 있다. 목련과에 속하는 낙엽덩굴성 관목인 오미자나무는 전국 각처의 산골짜기, 특히 전석지(전석지)에서 군총을 이루어 자란다. 잎이 어긋나며 넓은 타원형, 긴 타원형 또는 난형을 이루고 있다. 열매는 구형 또는 도란상 구형이고 길이 10cm 정도로서 한두 개의 종자가 들어있으며 신맛이 강하다. 오미자는 건조하면 약간 투명한 감이 있으며 누글누글하고 오미자의 독특한 향기가 난다. 오미자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대만 등의 나라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든 재배가 가능하지만 가장 적합한 곳은 서북쪽의 서늘하며 경사도가 낮은 지대이다. 특히 오미자나무는 연약하기 때문에 강풍에 약하다. 그래서 거친 바람이 불지 않는 계곡에서 열매를 잘 맺는다. 바람벽이나 방풍림이 있는 곳이라면 재배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오미자나무는 강한 햇빛을 견디지 못한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면 햇볕에 노출된 오미자나무는 잎끝이 마르고 시들시들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미자나무는 서늘한 음지에서 더 잘 자라고 더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오미자는 품종에 따라 북오미자, 남오미자, 흑오미자, 개오미자 등으로 분류되는데 북오미자는 주로 전라북도 지리산, 충청북도 속리산, 강원도 태백산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 남오미자는 남쪽 섬에 자라는 상록성 덩굴식물이고 흑오미자는 제주에 자라는 낙엽덩굴식물이다.
성분 오미자 신맛의 성분은 말산, 타르타르산 등이다. 과실에 들어있는 산성물질은 유기산이고 그외 당점액질 등을 함유하고 있다. 약성은 완만하고 맛은 시며 독성은 없다. 효능은 성신경의 기능을 항진시키므로 유정, 몽정, 정력감퇴, 유뇨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동물실험에서는 대뇌신경을 흥분시키고 강장작용이 나타났으며 호흡중독에도 직접 작용하고 있다. 또한, 심장활동을 도와서 혈압을 조절하고 간장에 들어가서는 간장의 대사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인정되었다.
쓰임새 오미자는 주로 한방에서 약재로 이용된다. 또한 민간요법에서는 오미자가 기침약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오미자를 물에 담가두고 그 물을 수시로 마시면 기침에 효과적이고 조갈증에도 좋다. 또한 오미자는 예로부터 정력의 강장제로 전해온다. 특히 오미자차를 여성이 자주 마시면 피부가 윤택해지고 탄력성이 생기며 질내의 이상분비를 조절하여 건강과 아름다움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오미자는 남성들에게 강한 정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오미자 즙에 녹두 녹말을 넣어 끓인 응이를 오미자응이라 한다.
오미자응이는 오미자 즙에 녹두를 곱게 갈아서 가라앉혀 만든 녹말을 넣고 끓여서 드는 데 오미자 즙의 고유한 진달래색과 새콤한 특지가 가미되어 담백한 맛을 준다. 한편, 오미자는 달여서 차로 끓여 마신다. 가을에 열매를 따서 잘 말린 다음 종이 봉지에 넣어 습기가 없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에 매달아서 보관한다. 건재약방에서 쉽게 구입할 수도 있다. 열매는 곰팡이가 생기므로 차를 만들기 전에 잘 살펴보아야 한다. 오미자차는 오미자 열매를 넣고 끓이거나, 아니면 열매를 가루로 하여 끓인 물에 타서 마시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보통 끓인 물 1잔에 차숟가락으로 2,3개 정도의 분량을 타서 마신다. 흔히 설탕이나 꿀을 타서 마시는데 독특한 향기와 맛이 있다. 이밖에도 오미자는 여러가지 민간요법의 재료로 쓰인다. 당뇨병환자가 입이 자주 마르고 갈증을 느낄 때에 복용하면 갈증이 제거되고,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에 복용하면 더위를 이겨내고 갈증을 적게 느끼게 된다. 오래도록 잘 치유되지 않는 해소에 사용하면 기침을 멈추게 하는 효과도 있다. 최근의 임상보고에 의하면 급성황달형 전염성간염에도 좋은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다. 금기사항으로는 감기로 인한 기침에는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이것이 토종 {명의별록}에 의하면 '오미자는 고려에서 난 것이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 발행한 {약용식물사전}에도 '오미자는 조선산이 가장 좋고 버금은 중국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양나라 시대 학자였던 도홍경도 '오미자는 고려에서 난 것이 제일이다. 과육이 많고, 시고 달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난 오미자는 그 질의 우수성을 일찌기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야생하는 오미자는 평안북도 영변산과 경상북도 영양산, 그리고 전북 장수군의 덕유산, 장안산 일대에서 난 것이 질이 좋다. 수정 모양으로 약간 투명한 감이 있으며 누글누글하고 오미자의 독특한 향기를 지닌 것이 좋은 오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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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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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푸른 옥에 핀 꽃, 천하제일의 고려청자 - 장남원
흙의 자유로움, 그 다양한 시도
한편 청자 생산이 시작되는 9-10세기 이후부터 강진이 요업 중심지로 부각되는 11세기까지 청자 발전기에는 청자의 질과 형태 및 문양이 안정되고 발생 초기에 강하게 나타나던 중국적 요소가 약화되며 12세기 경에는 고려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즉 이미 생활용기로서 자리잡은 청자는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도기류나 금속기의 형태적 기능적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기만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품종 대량생산체제 아래서 청자를 만들면서 좀더 효율적인 제작방법을 모색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청자는 형태와 제작방법에서 도기나 금속기와는 다른 독자성을 갖는다. 즉 흙의 특성과 제작의 목적에 따라 도기와는 다른 다양한 제작방법이 시도되는데, 물레성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틀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거나, 부분적으로 문양을 눌러 찍거나, 또는 서로 형태가 다른 부분들을 별도로 만들어 접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청자는 표면장식에 따라 순청자, 음각청자, 철화청자, 진사청자, 화금청자, 철재청자 등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순청자는 무늬장식이 없는 순수한 청자이며, 음각청자는 순청자 위에 음각기법으로 꽃이나 기타 식물 또는 장식 문양을 넣은 경우를 말한다. 양각청자는 무늬를 돋을새김하여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고 철화청자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붓에 철분 안료를 묻혀 회화적 방법으로 무늬를 그린 것이다. 그 밖에 그릇의 벽면을 뚫어 장식하는 투각, 백토를 바르는 퇴화, 다른 색의 흙을 섞어 만든 연리문청자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청자 등이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흙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방법들이 시도되고 다시 반복되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푸른 옥에 핀 꽃, 상감청자
청자 상감 퇴화 풀꽃무늬 표주박모양 주자와 승반
이미지 출처 : http://blog.empas.com/dwban22/1206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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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비색이 정점에 달했던 12세기를 전후하여 고려인들은 상감이라는 공예기법을 과감히 도자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상감은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또는 바탕과 색이 다른 물질을 집어 넣는 보편적 공예기법으로 동서양에서 모두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이다. 고려의 금속공예에서도‘입사’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상감청자는 강진과 부안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청자의 몸체에 무늬 부분을 선 또는 면으로 파낸 후, 문양 부위나 또는 바탕에 백토나 자토를 넣어 메우고 다듬고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이다. 그 결과 문양은 백색 또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게 되고 청자의 푸른 바탕위에서 강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었다. 상감기법의 발달로 청자는 지금까지의 단색을 주조로 하는 정적인 고요함에서 다채롭고 장식적인 새로운 멋을 품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고려의 장식미술, 특히 청자 조형감각의 새로운 변화를 맛보게 된다.
푸른 자기 술잔을 구워 내어 열 가운데 하나를 고르니 빛나도다, 푸른 옥의 광채여 몇 번이나 푸른 연기에 파묻혔던고 ... 이제야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 하늘의 조화 빌어온 것을 작은 점 꽃무늬 오묘하기가 그림 그린 듯하네
이규보의 시는 고운 비색 바탕에 그림으로 그린 듯 섬세한 꽃무늬를 넣은 상감청자 술잔에 대해 노래한 것으로 상감청자의 다채롭고 명랑한 경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12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상감문양은 지나치게 의장화되며 청자의 본 바탕을 가리게 될 만큼 문양의 비율이 많아졌고 내용 또한 복잡해진다.
청자의 조락, 그리고 움트는 새싹
몽고침입 이후 13-14세기를 지나면서 약간의 고급품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청자의 질은 퇴보한다. 이제 이전과 같은 투명한 비색의 좋은 질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른 이후 국력이 소모되면서 전과 같은 청자제작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제작상의 통제와 집중력이 약화되면서 청자의 문양은 긴장감을 잃게 되고 형태의 유려함과 제작의 공교함, 뛰어난 유약, 번조기술 등이 해이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자는 더 이상 한정된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대중 일반을 위해 대량 생산된다. 그리고 특정 지역이 아닌 전국의 가마에서 같은 유형이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면모로 탈바꿈한다. 바야흐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상감의 아들이 분청자라는 청자 2세대를 펼치면서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후 이루어 낸 경질백자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고려청자 제작기술, 즉 도토의 정제와 장석유의 사용 및 고화도 환원번조 등을 모태로 하여 가능케 된 것임을 생각할 때 고려청자의 도자사적 위치와 그 중요성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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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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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무함마드의 출생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쿠라이시 부족에 속하는 하심 가문에서 이슬람력 제3월(라비아 알 아우왈)12일에 출생하였는데, 부친 압둘라는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고, 모친 아미나 역시 무함마드가 여섯 살 되는 해에 사망하였다.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처음에 조부 압두 알 부딸립에게 맡겨져 양육되다가 두 삼촌 압바스와 아부 딸립 중 아부 딸립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무함마드는 태어나자 베드윈 출신 유모 씨아드족의 여인 할리마에게 맡겨져 다섯살 때까지 사막에서 자랐고, 8세 때는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는 삼촌 밑에서 양치기하다가 12세 때 삼촌 아부 딸립을 따라 시리아 대상 무역길에 오르게 된다. 한편,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을 도와 대상무역에 종사하면서 사업에 있어서는 성실하고 유능한 인물로 인정을 받아 ‘아민(정직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를 지켜 보던 과부 카디지가 청혼을 하였는데, 25살 되던 595년에 그녀와 혼인하였다. 그는 결혼하고도 부인과 함께 상업거래는 계속하였다.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경제적인 안정과 사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메카 교외의 사막을 거닐거나 동굴에 들어가서 명상을 즐기곤 하였다. 메카 근교 히라산의 어느 동굴에서 묵상하던 그가 40세 되던 해 610년 라만달달(이슬람력 제9월)에 예언자로서 첫 부름을 받는다. 그는 이것을 첫 계시라 불렀다. 무함마드의 가문은 메카의 카바 신전을 보살피는 제살장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무함마드는 당시 메카에 만연되어 있던 많은 우상숭배와 미신들을 몹시 불만스럽게 생각하였고, 특히 자신이 속한 부족이 우상을 섬긴다는 사실에 회의를 갖게 되면서 유일신 사상에 몰두하게 되었다. 당시의 메카사회는 소수의 귀족들이 다수의 노예들을 착취하면서 온갖 불의와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당시의 우상숭배, 부도덕, 노예착취, 부녀자와 고아들의 차별대우 등과 같은 사회적 병폐들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그가 기존의 사회가 부폐되었고 이 사회의 윤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외치자 기성세대들은 그를 잡아 죽일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615년과 616년 그는 자신이 속한 쿠라이시 부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자 그의 추종자 일부(남녀 100여 명)를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 기독교 왕국으로 이주시켰다. 그 때까지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은 메카에 머물렀다.
그러나 619년 부인 카디자와 삼촌이며 보호자이었던 아부 딸립이 사망하자 부족 내에서 그의 입지와 안전은 더욱 불안해져만 갔다.언제 죽을 지 몰랐다.그러던 차에 메디나에서 부족 간의 중재로 와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622년 메카 북쪽 메디나로 이주하기 직전에 카바 신전 근처 성소에서 부라크(Buraq: 나귀보다 크고 노새보다 작은 동물)를 타고 가브리엘과 나란히 예루살렘성전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일곱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현재는 이것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의 옛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 황금동을 만들었다. 그러나 메디나에 있는 여러 공동체 사이에 빚고 있던 충돌을 해결해 달라는 무슬림 개종자(안싸르)들의 초청에 응하여 메디나로 이주한 것이 역사상 자주 언급되는 이른바 히즈라(Hegira)이며, 이것이 이슬람력의 시작이 되었다. 메디나 무슬림들이 메카의 대상을 급습하기 시작하자 624년부터 일련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해 1월 바드르(badr)전투가 있었는데, 무슬림 324명의 장정이 메카인 950명의 장정을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 14명과 메카인 49명이 전사했다. 그 다음 해에 우후드(uhud)에서 양 군대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에는 무슬림이 메카군에게 패했다. 그리고 아부 수프얀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가 이 전투에서 패퇴하였다. 627년에는 아흐잡전투가 있었는데 이 때에는 무슬림들이 메디나에서 메카인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628년, 마침내 무함마드와 메카인 사이에 후다이비야 맹약을 맺음으로써 그 다음 해에는 무함마드와 그의 일행이 메카를 자유롭게 순례하도록 허락되었다. 629년 1월11일 무함마드는 무슬림 1만여명의 장정을 이끌고 메카에 무혈입성 하였다. 메카인들이 싸움 없이 항복했던 것이다. 무함마드가 대사면을 선언했고, 카바의 모든 우상은 이 때 파괴되었다. 마리아의 성화는 부수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다사 메디나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슬람을 신봉하는 부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차츰차츰 무함마드에게 몰려오고 있었다. 631년 무함마드는 메카순례를 끝으로 얼마 동안 병석에 있다가 632년 6월8일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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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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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새악아 미안하데이
"엄마, 괜찮아요......이까짓 다리 좀 불편한 것 사는데 지장없다구요!" 속상하신 나머지 어머니는 "그러게 누가 맏며느리 자리에 시집가랬더냐!" 하시며 내가 교통사고 당한 것을 시집 잘못 간 탓이라고 여기셨다.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는 시동생, 시누이 뒤치다꺼리와 일 년에 열 번이 넘는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며 사십여 년 간 두 다리 죽 뻗고 자본 일이 없다고 자주 얘기하시곤 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던 종가집 며느리 자리에 막내딸이 시집간다고 했을 때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나는 잘살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속으론 그 많은 시댁 식구들과 어떻게 맞추어 살아갈 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이 점점 커지긴 했지만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시할머님, 시부모님, 시누이, 모두들 내게 세심하게 잘해 주었지만계속되는 생일 잔치, 제사, 차례는 나를 몹시 힘들게 하였다. 그러던 중 시할머님 생신을 하루 앞둔 날, 시장에 다녀오다가 오토바이와 부딪힌 나는 중상을 입어 다리를 절뚝거리게 되었다. 병원에서 몇 달 간 치료를 한 뒤 나는 곧바로 친정으로 옮겨졌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도 잘 모르겟고, 시댁으로 돌아갈 업두 또한 나지 않았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자주 들러 "그만 집으로 오라"고 하셨지만 나는 차일피일 날짜만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시누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시할머님이 새아기가 그리된 것은 모두 당신 탓이라며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시고 우시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시댁 식구들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전화를 끊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은 나는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런데 그날 밤, 아버지가 부르셔서 나가보니 시댁 식구들이 모두 서 있는 것이었다. 남편과 시부모님, 시누이, 시할머님까지..... 허리가 구부러져 몸이 새처럼 작은 시할머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새악아.....미안하데이."
그 길로 나는 챙겨 놓은 짐을 들고 시댁 어른들을 따라나섰다. 시댁 어른들의 배려 속에서 불편한 몸에 대한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선 나는 시할머님, 시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글쓴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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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5. 만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
그때 세계에서는 BC 377년: 아테네, 제2해상동맹 조직 BC 367년: 주나라, 동서로 분열
플라톤은 스승으로서 성공한 이였고, 따라서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 제자들 가운데 묵묵히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한 제자가 있었다. 플라톤이 때로는 '좀 쉬면서 공부해도 될텐데...'라고 우려할 정도로 열심히 학문에 몰두한 제자 중의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친은 의사였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과학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셈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피리포스 2세를 위한 의료책임을 맡고 있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아로 자란 셈이다. 17살의 젊은 나이로 플라톤의 문하에 들어와 20년 동안 플라톤을 섬겼다. 가장 학문에 열중할 수 있는 기간을 청강, 사색, 독서로 보냈다. 말하자면 누구보다도 플라톤의 철학을 잘 이해했고, 스승의 학설을 분과적으로 발전시켜 스승 못지않은 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플라톤이 죽은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가의 초청을 받아 14살 되는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철학자와 최대의 대왕이 사제관계로 맺어진 것이다. 알렉산더는 일찍부터 대권의 야망을 품고 있는 천분을 지닌 정치, 군사 전문가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치밀한 과학성을 지닌 철학자였다. 자연히 알렉산더는 학문의 존귀성, 사상의 필요성등은 스승을 통해 깨달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학자로서의 관심은 일찍부터 없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을 떠나 스승을 섬기던 아테네로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사색과 저술에 열중했다. 체육장을 근거로 강의를 했고 가로수 밑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소요(Peripatos)학파라고 불렀다. 12년 동안 학구와 교수생활에 열중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통치권을 벗어나려는 정치적 움직임도 있어 대왕과의 관계를 우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떠났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도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2년 사이에 가장 넓던 철학자를 한꺼번에 잃게 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이 가장 중요시하는 이데아의 실재성에 관해 처음부터 그 타당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플라톤의 종교적 성격이나 예술적 직관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천적으로 경험 과학적이었고 비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데아의 실재는 실념성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생각과 관념으로 있는 것이지, 철학이나 과학적 실재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현실세계일 뿐이며, 이데아에 해당하는 것은 현실사물의 형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우리들의 학문적 대상이 되는 것은 현실계가 있을 뿐이며, 현실계는 감관적 개물과 이성적 보편자로 볼 수 있는 유개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의 원형이 아닌 사물의 형상일 뿐이며, 오히려 사물로부터 주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면 물건의 질료(Materie)와 형상(Form eidos)라고 보았다. 질료 속에는 가능성과 잠재적인 세력이 있고, 그것이 구현되며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건축을 위한 석재는 질료가 된다. 집의 개념은 형상이다. 건축사는 동력인이 되고 현실의 집이 건축의 목적이 된다. 만일 그 차등을 찾는다면 완전질료에 속하는 부분이 있고, 형상을 갖춘 질료가 있고, 질료가 없는 형상이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질료가 없는 형상을 이데아로 보았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론을 관념적인 철학으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실재론적이며 본질적으로 과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문제는 질료로 하여금 현상이 되게 하는 운동 또는 변화에는 어떤 동인력이 필요해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원인은 그 안에 있는 목적이 잠재되어 있다. 종자는 나무가 되려 하며, 운동은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동인력 가운데 최초의 동인력, 타로부터 원인을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동인을 가지면서 목적이 되는 제일의 원인, 능동자, 그 자체는 부동이면서 운동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인 자인자, 그것은 신적 정신에 속하는 것이며, 최초의 원인인 동시에 창조적인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데모크리토스의 기계론과 프라톤의 이데아를 합해 최초의 목적론자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하면 좋겠다. 먼후일에 H. 베르그송은 그 목적론을 부정하고 창조적 진화를 제창하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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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벽'의 사투리인 '베름빡'에 관하여
'베름빡'이라고 하면 알아 들을 분이 몇이나 되실 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에서 사용되는 사투리의 하나이지요. 보통은 '벽'이라고 하는데, 시골에서는 '베름빡'이라고 하지요.
'베름빡'은 원래는 '바름'(모두 아래 아자)이었습니다. 그 뜻은 '흙으로 발랐다'는 뜻이지요. 그러던 것이 한자가 들어 와서 여기에 다시 '벽'이 붙었지요. 그래서 결국 '바름벽'이었는데, 이것이 음운변화를 일으켜서 '베름빡'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그 어원을 거의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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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과 의사들은 사마귀가 있는 사람과는 키스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마귀의 원인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로 키스로 옮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보통 한 남자의 심장은 1년에 38,000,000번, 일생동안에는 약 2,000,660,000,000번 뛴다.
사람의 오른쪽 허파는 왼쪽보다 더 무겁다. 성인 남자의 허파 무게는 평균 오른쪽이 625그램, 왼쪽이 600 그램이다.
morning rise(아침발기)란 무엇인가? 남성 호르몬의 일종인 테스토스테론은 아침에 태양이 뜨자마자 생산된다. 이것이 새벽에 남성을 발기시키는 즉 ‘morning rise'시키는 원인이라고 한다. 오리는 태양이 뜨자마자 알을 낳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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