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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 호
2006.09.23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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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만나봐야 알지 원.
책을 끼고 사는 터라 두세 평 정도되는 방 이곳저곳에 꽉찬 책꽂이에 들어갈 수 없는 피난書들이 있습니다. 커피를 타오다가 발길에 채이기라도 하면 무생인 책에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때면 내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누구나 책꽂이에 오래 방치되어 있거나 다락방에 처박혀 이사갈때나 만날 책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발에 걸린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 었습니다. 바로옆에 짝궁인양 해설집도 있더군요. 드르륵 책을 둘러보는데 책속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해보지 않았다면 원수를 사랑하라 가르치지 말라'
새삼 기억나는 구절이었습니다. 커피잔을 집어 한모금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책으로부터 받는 것보다는 선생님들이나 친구, 선배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그 지식은 입시위주의 암기나 수단으로서 오기도 하지만 학창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입시와 관계없는) 가르침도 있을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사회생활을 하며 조직의 성격도 배우고 장사의 수단도 배우고 삶의 현장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자연스레 노하우가 생기고 이런 상황에는 이렇게 대처하고 상대가 이런말을 하면 이렇게 되받아치면 되겠다 하는 자신만의 Rule 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Rule을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면 이렇게 해주고 계속 이것만을 해줄 것이고, 나는 취업이 되면 회사를 열심히 다니며 이렇게 해서 저렇게 성공할 것이고, 내가 십년 후에는 이렇게 되어야하고 어느정도 위치까지 가야하고, 이것은 진리니까 나는 따라야하고 지켜야하며 그말을 전파해야하고...
살아보세요. 저런 결심들은 당면하면 사라집니다. 인간은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탈없이 걱정거리 없이 편하게 사는 중이라면 실행가능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생각대로 풀리는 인생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오늘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만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마치 선지자처럼 나불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사람은 저더러 맞아봐야 아픈 것을 아느냐고 반문합니다. 나는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어린시절 놀다가 넘어지고 친구들이랑 다툼도 하고 선생님한테 회초리도 맞아보지 않았나요. 맞아봤으니 아픈걸 알지 평생 넘어져보지도 맞아보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압니까? 그런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궁금증에 못이겨 자기 종아리를 때려보기라도 할 것입니다. 안그런가요?
1+1 이 2 라는 지식은 받아 들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을 지배하는 구절은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경험을 토대로 말하는 책이 있고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속에 떠올려 말하는 책이 있습니다. 잘 골라야 하고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험을 토대로 쓴 책만 책의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화두로서 당신의 마음에 늘 두어야 합니다. 스스로 말꼬리 잡아가면 득이 아니라 실이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책이 좋냐는 질문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답변할 수 있을까요?
예언자가 아닌 이상 원수를 사랑하게 될지 원수에게 복수를 할지는 만나봐야 압니다. 책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 봐야 압니다. 사업적인 만남이 아니라면 계획하지 마세요. 계획하면 실망은 당신만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추천 드리자면 늘 곁에 있는 책이나 사람들 보다는 태어나 처음 보는 책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이 더 중요하고 더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는 경험해봤을 까요?
늦더위가 여전합니다. 엘니뇨에 대한 겨울비상책들이 나오고 있는 묘한 지구촌입니다. 건강챙기세요. 그래야 책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지요.
- 2006.09.23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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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1달러라도 교회에 가져 갈 땐 커 보이고 가게에 가져갈 땐 작아 보인다. /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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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7. Can I get some cash back?
요즘 credit card 한두 개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보기 드물다. credit card는 글자 그대로 '신용 카드' 즉 '외상 카드'다. 신용 카드는 엄밀하게 따져서 credit card와 charge card의 두 종류가 있다. credit card는 빌려 쓴 돈을 여러 번 나누어 갚을 수 있으나 charge card는 전액을 한 달 내에 다 같아야 한다. 은행에서 발행하는 VISA나 MASTERCARD는 모두 credit card에 속하고 American Express, Diners Club, 그리고 석유회사들이 발행한 gas card들은 대개 charge card이다. 예를 들어 700달러의 비행기 표를 credit card로 구입하면 한 달에 20~30달러씩 분납 상환이 가능하지만 (물론 일시에 다 갚아도 무방하다) charge card로 구입하면 한 달 내에 전액을 다 같아야 한다(요즘은 charge card도 분납을 허용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credit card를 가지고 상품이나 서비스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현금까지 받아 쓸 수 있다. 예를 들면, 백화점에서 52달러어치의 상품을 사고 48달러의 현금을 받고 100달러의 외상 서류에 서명을 해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하는 말은 Can I get cash back with my purchase? 또는 더 간단히 Can I get some cash back? 이다. 즉 "물건을 사고 현금도 좀 받을 수 있습니까?"란 말이다. 멀리 여행을 할 때도 credit card만 가지고 있으면 은행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ATM(현금 자동 인출기)에 카드를 집어넣고 현금을 꺼내 쓸 수 있다.
At the department store checkout- Cashier: Cash or charge? Customer: Charge. Can I get some cash back? Cashier: Sure. How much do you need? Customer: Fifty dollars, please. Cashier: OK. 백화점 카운터에서- 점원: 현금으로 내실 겁니까? 크레디트 카드를 쓰실 겁니까? 손님: 크레디트 카드요. 현금을 좀 줄 수 있습니까? 점원: 그러세요. 얼마나 필요하세요? 손님: 50달러요. 점원: 알겠습니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 company president to his new secretary: "You must understand that your job is temporary. As aoon as my wife sees you, you are through." 회사 사장이 새로 온 여비서에게 "아가씨의 취직은 임시적이란 걸 알아야 해요, 우리 집사람이 아가씨를 보는 순간 끝장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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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6.녹두 - 그릇된 역사를 응징하는 곡식
우리 역사 속에는 녹두에 얽힌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다. 타락한 지배자들에게 의연히 항거했던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불렀던 것으로 시작해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 나오는 '녹두꽃' '청포' 그리고 육신을 등지고 세조의 공신이 된 신숙주의 변절행위에서 따온 '숙주나물' 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녹두를 사용한 음식인 빈대떡은 김치, 불고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특수요리에 속한다. 외국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요리 선호도 조사에서 빈대떡이 단연코 인기 1위였다고 하니 빈대떡의 맛이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빈대떡의 원래 이름은 '빈자(빈자)떡'이다. 그 이름처럼 빈자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떡'이다. 빈자떡은 본래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기름에 지진 고기를 올려놓을 때 밑받침으로 썼던 것이라 한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유랑민들이 남대문 밖으로 수없이 몰려들었고 당시의 세도가들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빈자떡을 만들어 달구지에 싣고 와서 "아무개 댁의 적선이오"라고 자랑하며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녹두는 콩과에 달린 한해살이 작물로 원래 인도, 히말라야, 비루마 등지에 자생하던 것을 인도에서 3천여 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녹두의 기원지는 인도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인도에서는 녹두의 무게를 중량의 단위로 삼았던 적이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재배되었다. 견해에 따라서 녹두는 팥의 변종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팥과 비슷한 일년생 초본으로 모양이 팥의 축소판 같지만 종피의 색깔은 녹색이 대부분이고 황색, 흑갈색인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녹두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된 일이다.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녹두를 재배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우리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해온 작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녹두를 사용한 음식이 우리만큼 발달한 나라도 없을 정도이다. 녹두나물은 맛도 좋고 영양가도 풍부해서 나물 중에서도 으뜸이다. 서울지방에서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른다.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만기요람}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는데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속설에 의하면 숙주나물의 숙주는 신숙주에서 온 것인데, 그는 육신을 등지고 세조의 공신이 되었으며, 죄없는 남이를 죽이고 공신의 호를 받은 사람인즉 서울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이른바 성을 제거 당한 것이라 한다."
숙주나물은 무쳐놓고 조금만 지나면 곧 쉬어버리는데 이를 신숙주의 변절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나물 이름 하나에도 사연을 만들어 놓은 선조들의 기지가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성분
녹두의 주성분은 당질(44.9%)과 단백질(21.2%)로 팥과 흡사하다. 그러나 녹말 이외에 당질의 구성이 약간 다르다. 녹두의 당질에는 점성을 가진 성분이 있어서, 이 성질을 이용하여 녹두 가루로 당면이나 국수를 만들 수 있다. 또한 녹두에는 금이신, 라이신, 발린 등의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그리고 불포화 지방산인 리놀레인산이 많아 영양이 우수하고 아밀라제, 인벨타제, 우레아제 등 여러가지 소화효소가 들어있어 소화도 잘되는 편이나 메티오닌, 트립토판, 시스틴 등은 부족하다.
쓰임새
옛말에 '녹두는 1백 가지 독을 푼다'고 했다. 그만큼 해독작용이 강하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큰병을 겪고 난 환자에게는 녹두죽을 쑤어 먹이곤 하였다. 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 녹두로 만든 음식에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청포묵, 녹두나물 뿐만 아니라 녹두죽, 녹두빈대떡, 녹두밥, 녹두차, 녹두주 등 다양하다. 녹두로 만든 음식은 소화가 잘되며 몸의 열을 내려준다. 녹두묵은 보통 '청포'라고 부르는데 노란색이 도는 녹두묵은 '황포' 라고 부른다. 청포는 다른 재료를 여러가지 혼합하여 만든 묵이다. 녹두를 약용으로 사용한 민간요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토사곽란에는 녹두가루, 설탕을 각각 2냥(75g)씩 섞어 물에 타서 먹는다.
* 더위를 먹어서 설사를 하는 경우에는 녹두를 삶아 탕을 만들어서 양껏 마신다.
뭉근한 불 위에 녹두를 넣고 알맹이가 다 풀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삶은 다음 자루나 눈이 가는 체로 치면 녹두물이 나오는데 이것을 냉장해두었다가 수시로 마시면 건강음료로 일품이다. 여기에 꿀 등의 감미료를 약간 넣어서 마시면 더욱 훌륭한 맛이 난다.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는 녹두꽃을 그늘에 말려 가루로 만든 것을 작은 찻숟가락 하나 정도로 온수에 복용하면 술이 한결 빨리 깬다. 또한 술 마시기 전에 이것을 먹으면 빨리 취하지 않고 속을 덜 상한다. 땀띠나 여드름 등의 피부질환이 있는 사람은 잠자기 전에 얼굴을 깨끗이 씻은 다음 녹두를 갈아 미지근한 물에 풀어 이것을 얼굴 전체에 골고루 바르면 효과적이다. {천금식치}에 의하면 '녹두는 속의 열을 내리고 설사를 그치게 하며 소변불통을 다스린다'. {식료본초}에는 '녹두는 원기를 보하는데 유익하고 오장을 조화하며 정신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이밖에도 녹두는 간을 강하게 해주고 살이 찌지 않게 해주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하게 한다. 단, 녹두는 열을 제거시키고 몸을 차게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몸이 냉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또 저혈압이나 냉증 증세가 있는 사람은 녹두를 먹지 않는 편이 좋다.
이것이 토종
녹두는 현재 국내 생산량 부족으로 농수산물유통공사에서 일괄 수입하여 국내 소비처에 방출하는 품목이다. 아직은 수입자유화가 되지 않은 품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통공사-도매상-소매상-소비자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입산이 국내산으로 둔갑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체로 수입산의 가격이 국내산의 절반 정도이므로 중간상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머잖아 수입자유화가 이뤄지면 개인업자에 의해 이런 부작용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녹두는 전량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다. 중국산 녹두는 알이 굵고 껍질을 벗기면 면이 거칠다. 또한 색깔은 연한 녹색이고 윤기가 별로 없다. 이에 반해 국내산 녹두는 진한 녹청색을 띠고 있으며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특히 껍질을 벗겨보면 면이 곱다. 중국산은 알이 굵어 쉽게 눈길을 끌지 모르지만 윤기가 떨어지고 면이 거칠다. 또한 수입산 녹두는 색깔이 연한것이 특징이다. 중간상인들에게 속지 않고 안전하게 구입하기 위해서는 유통공사 직판장을 통해서 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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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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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지눌은 왜 불교계를 비판하고 결사를 창립했나 - 박영재(서울대 강사)
우리는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눌의 불교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 ‘돈오점수 정혜쌍수’이다. 그는 <수심결>에서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인들이 밟아간 길이라고 단언하였다. 자신이 바로 부처임을, 자신이 부처와 똑같은 완전한 지혜;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단박 깨닫는 것이 돈오이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았더라도 깨닫기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몸에 배어 온 습관의 기운이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선정과 지혜로 점차 지속적으로 닦아야 한다고 아였으니, 이것이 점수이다. 이 점수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고 해서 정혜쌍수인 것이다. 이러한 수행이 필요한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난 날에 모든 기관이 성장한 어른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힘이 충분하지 않아 먹고 뛰놀며 세월이 흘러서야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눌은 돈오의 철학적 근거를 그가 두 번째의 깨달음에서 의지한<신화엄경론>에 두고 있다. 선사사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교학의 사상을 과감하게 원용한 것이다. 이는 신라말 고려초 선종의 수입으로 인해 불교사의 새로운 과제가 된 선동과 교종 사이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했던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런데 지눌의 사상은 다분히 지적 이해의 차원이 ‘돈오점수 정혜쌍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부청의 성품을 깨달으라 하면 그 성품이 절대적으로 실재하거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이는 원시불교의 연기사상이나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 보면 비불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말과 글로 이해하는, 다시 말해 생각하고 헤아려서 깨닫는 것은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에서 아직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화두 참구라는 수행법을 권한다. 화두야말로 알음알이를 뛰어넘어 인식과 실천의 간격이 없는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뛰어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눌 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깨달음을 중생에게 되돌려 그들을 구제하려는 이타적 보살행의 실천이다. 지눌은 자신만 깨달은 채 중생의 고통을 외면한 승려가 아니었다. 그는 저술 곳곳에서 깨달음에만 머물러 중생을 외면하는 세태를 경계한다. 돈오점수거나 화두 참구거나 보살행이 없으면, 고요한 곳에 빠져 깨달음에 생명력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깨달은 후에 중생의 능력과 형편에 맞추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굳은 원을 내여 실천해야만 그 깨달음은 비로소 원만히 완성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지눌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수선사 제2세 주지인 혜심에 의하여 사회의식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지눌의 비문은 조계산 아래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부처가 떠나신 지 오래 되어 법도 따라서 해이해졌다. 학자들은 케케묵은 말만 지키고 비밀스런 뜻을 몰라 근본은 버리고 말단만 좋고 있다. 그리하여 마음을 관찰해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은 막히었고 문자로 희론하는 풍조는 벌떼처럼 일어나 올바른 불법은 거의 땅에 떨어졌다. 이에 여기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홀로 들뜨고 거짓된 속세를 등지고 바르고 참된 종지를 사모하여 처음에는 경전의 말에 따라 진리에 나아가고 마침내는 선정을 닦아 지혜를 드러냈다. 이미 몸소 얻으매 ,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서 잠자던 선풍을 떨치게 하고 어두웠던 조사의 가풍이 다시 밝아지게 하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가섭의 적손이며 달마의 적통으로서 잘 이어받고 잘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일 것이다. 아, 우리 국사가 바로 그 분이시다. 지눌은 정치권력의 안주로부터 빠져 나와 권력과 결탁한 불교계를 비판하였으며, 이와 함께 독창적인 선사상 체계를 마련, 선수행 공동체를 결성하여 남과 더불어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는 불교운동에서 끝나지 않고 역사 정화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그가 비록 현실에 뛰어들어 사회적 해방을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그의 종교적 해방의 과정은 넓게 보아 사회변혁과 궤도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오늘에 살아 있는 지눌
현재 지눌이 창건한 송광사는 제8차 중창공사를 마무리하고 지눌사상의 선양으로 내실을 도모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은 종헌에 지눌을 중천조로 명시하고 있다. 작게는 송광사에서 크게는 한국불교에서 그의 사상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고려불교의 깃발 아래 살고 있고 지눌의 숨결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눌의 삶과 사상은 오늘의 종교계 내지 불교계에 많은 시사를 줄 수 있다. 고려, 유교. 불교. 도교가 역할 분담으로 갈등없이 공존했던 그 시대에서 사상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지눌의 사유체계는 분명 다종교시대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3교를 포용하고 선종과 교종을 아우를 포괄적인 지눌의 선사상과, 권력과 밀착되어 타락한 불교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축발한 그의 결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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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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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문화와 종교의 매개체
문화의 전달자
아랍인과 무슬림 문화에서 아랍어의 중요성은 종교적인 중요성에 그 역할을 덧붙여 준다. 아랍어는 이슬람 제국에서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그래서 무슬림 국가에서 국어가 되었고, 9세기와 10세기에 아랍어와 외국학이 배양되었을 때에도 많은 문학작품이 아랍어로 쏟아져 나왔다. 아랍어가 보편적인 표현수단으로, 그리고 지적인 표현수단으로 무슬림과 비무슬림들에게 쓰이게 되었다. 아랍어와 이슬람은 여러 민족과 종교, 즉 유대교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아랍인, 시리얀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이집트인,스페인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사상가이자 학자인 알 비루니(al Biruni, 1048년사망)는 아랍어를 배운 후 아랍어가 자신의 모국어보다 더 뛰어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의 알 주바이디(al Zubaydi, 989년 사망)는 스페인에서 아랍어를 지적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아랍어는 문화의 언어이며 모국어보다 더 월등하게 평가받았다. 스페인에서 아랍어가 문학에 사용된 부편적인 언어로 등장한 것은 오늘날 스페인 문학에서 그 영향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에 종교적인 긴장이 있었고, 아랍인 간의 내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으며, 또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간의 충돌과 여러 방언 때문에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아랍어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힘썼다. 게다가 아랍어는 그리스 학문을 전달하는 매개체로도 쓰였다. 아랍어 책들이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서구에 전달되었다. 스페인과 시실리는 동서양 문화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번역은 11세기에 시작되어 그 뒤 계속 증가되었다. 스페인의 톨레도(Toledo)는 아랍문화를 유럽에 전하는 영광을 가졌다. 9세기, 칼리파 알 마으문이 지혜의 전당(Bayt al Hikmah)을 바그다드에 세워 번역을 장려했듯이, 이와 유사한 번역기관이 스페인에도 11세기에 세워졌다. 아랍어로 된 수학, 천문학, 의학, 연금술, 물리학,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 등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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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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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
우리 집은 아들 둘에 딸이 둘이다. 할머니께서 내리 딸만 일곱을 낳고, 마지막으로 귀한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들 손자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신 분이셨다. 엄마는 오빠 둘을 낳은 후에 나를 낳았는데 첫째, 둘째가 아들이었으니 셋째도 당연히 아들일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할머니께 나는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달고 나와야 할 고추는 어디다 떼어 버리고 나왔냐"며 내가 태어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쪽에 밀어두고 씻어 주지도 않으셨을 정도였으니까. 손자가 둘 씩이나 있었으면서도 뭐가 그리 서운하셨는지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까지도 나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으셨다. 그래도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손녀일 거라고 미리 생각하셨던지 "달덩이처럼 곱구나"하시며 좋아하셨다. 어쨋든 할머니와 나 사이엔 '마가 끼었다'며 오빠들이 놀려대곤 했다. 출장은 자주 다니셨던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면 가방 속에는 항상 사탕 봉지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그 사탕을 받아서 큰오빠 열 개, 작은 오빠 일곱 개, 나와 동생에게는 다섯 개씩 나누어 주셨고 분배가 끝나고 남음 사탕은 다시 오빠들의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 주셨다. 언제나 똑같은 할머니의 사탕 분배는 내게 커다란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였다. 육개월 동안 병으로 누워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엄마에게 여기저기 숨겨둔 당신의 비상금을 찾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를 모두 불러 놓고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와 동전들을 모두 꺼내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다."
그리고는 큰 오빠에게 천 오백원을, 작은 오빠에게는 천 원은, 나와 동생에게는 오백원씩 나누어 주셨다. 그것은 할머니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이었고 할머니의 마지막 분배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었다. 오빠들과 동생이 없던 그날 오후에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가 아직 이백원이 더 있었네."
이불 밑에 숨겨 두었던 이백원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큰손녀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서 집어 넣으라고 고갯짓을 하시던 할머니, 그 모습이 아짓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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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 풀리지 않는 논쟁의 시작: 파르케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5세기)
그때 세계에는 BC 438년경: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완성 BC 420년경: 루키포스 '이성에 대하여', 디오게네스 '자연에 관하여'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여기 흰 분필이 있는데 그 분필을 푸른 잉크에 담갔다가 꺼냈더니 푸른 분필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흼이 푸름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흼은 언제나 흼으로 있고 푸름은 변함없이 푸름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장은 옳다. 흰 분필은 푸른 분필로 바뀌었으나 흼이 푸른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흰 분필이 푸른 분필이 되었으면 흰 것이 푸른 것이 되었지, 무슨 흼이 따로 있고 푸름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반론도 나온다. 그러면 먼저 사람은, "그것은 더 큰 잘못이다. 흼과 푸름이 있다는 것이 중하지, 어떤 물건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흼과 푸름이 없으면 흰 물건이나 푸른 물건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논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흼과 푸름이라는 본질이 중요한 것이지 분필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 속성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과, 물체가 있을 뿐이고 흼과 푸름은 존재하는 물질의 속성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차이인 것이다. 최근에도 E. 후설과 E. 마흐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 이런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라고 본 것이 후설의 견해였고, 물체를 떠나서는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이 에른스트 마흐의 학설이었다. 따라서 본질을 택하는 사람은 관념론으로 기울게 되고, 물체를 택하는 사람은 실재론을 계승하게 된다. 전자는 관념에서 지식과 진리의 길을 택하게 되고, 후자는 실재에서 물질과 과학의 길을 따르게 된다.
옛날 피타고라스의 뒤를 계승한 철학자들이 그와 비슷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엘레아(이탈리아) 학파에 속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00년경)는, 감각에 나타나는 세계, 즉 변화, 유전하는 만물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학문과 진리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진정한 존재는 우리의 자유에 의한 존재의 동일성이 있을 뿐이다. 그 동일성의 파악이 철학의 과제인 것이다. 진정한 존재는 그 본질로서의 자기 동일성인 것이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그는 그 본질의 불변의 실재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후에 플라톤의 이데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에베소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C)는, 그것은 사유의 조작일 뿐 만물은 쉴새없이 유전하고 있다. 같은 시간에 제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조화보다는 상반됨이 존재의 본질이며, 동일성은 없어도 모순이 있어 만물의 변화, 생성을 가능케 해 준다, 싸움은 만물을 탄생시킨 아버지로 보아야 하며 존재의 왕자는 싸움이라고 현실을 설명했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물은 가뭄과 음료수로서는 이로운 것이나, 홍수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침수는 해로울 뿐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은 헤아릴 수가 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인생도 그렇다. 삶의 가치는 바닷가에서 놀이를 하는 애들과 같은 것일 뿐이다. 영원한 위치에서 본다면 상대적인 것은 더욱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적 가치관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고대의 파우스트라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뒤를 따르는 제논(Zenon, 490--430 BC) 같은 이는 운동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자리에 있을 때마다 보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정된 자리에 있을 뿐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할 때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앞서 있으면 토끼는 절대로 거북을 앞지를 수가 없다. 토끼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가면 거북이는 언제나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는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가고 토끼는 언제나 그 떠난 자리로 들어서게 되었을 뿐이다. 토끼가 앞선듯이 보이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 따랐을 뿐, 진정한 선주자는 언제나 거북이로 있을 뿐이라고 말해 운동 자체를 거부하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겔을 비롯한 변증론자의 아버지는 헤라클레이토스였고, 모든 관념적 논리주의자들은 엘레아 학파의 후예들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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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일본어에서 온 말이 아니라 중국의 '백화문'에서 온 말
'자유'라는 말은 어디서 온 말일까요? 보통은 일본어에서 온 줄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문에 어느 국어학 전공 교수가 쓴 글을 읽어 보니, 이 '자유'라는 말도 일본어에서 온 단어라고 하였더군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중국의 백화문에서 온 단어입니다. 17세기에 간행된 우리 나라 문헌 중에 '어록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중국에서 사용 하는 속어인 백화문을 풀이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자유'를 '제 주변대로' 또는 '제 마음으로 하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자로 된 문장인 한문이 사용되다가 송나라 때부터 속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한문은 한자의 뜻만 알면 그 문장이나 단어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이 속어는 그렇지를 않아서, 중국의 문헌으로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애를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에서는 속어(즉 구어이지요)로서 옛날 한문을 풀이한 책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문헌을 읽을려고 하니까, 이 속어인 백화문을 이해하지 못하여 미암 유희춘, 퇴계 이황 등이 이들의 뜻을 주석을 달아 설명하였는데, 이것을 모으고 새로 주석하여 만든 책이 '어록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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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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