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89호 - 2024.12.04. 수요일(음력 : 11.04.)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1 |
|
올 여름에도 미국민의 ⅓은 초라한 집에서 옷도 제대로 못입고 밥도 제대로 못먹으며
살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휴가라고 부를 것이다.
|
|
글나눔 → 말글
|
|
|
불규칙용언 (3)
‘낳다, 넣다, 놓다, 닿다, 땋다, 빻다, 쌓다, 찧다, 좋다’는 ‘낳고, 넣지, 놓은, 좋아’ 등과 같이 어떤 어미를 만나더라도 어간의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불규칙용언이 아니라는 말인데, ‘좋다’만 빼고 모두 동사다. 이들 외에 어간 끝음절의 받침이 ‘ㅎ’인 말은 모두 형용사다. ‘까맣다, 거멓다, 노랗다, 누렇다, 말갛다, 뿌옇다, 좁다랗다, 그렇다, 이렇다, 어떻다, 조그맣다, 동그랗다’ 등. 그런데 이들은 ‘까마면(까맣+면), 누레(누렇+어), 좁다란(좁다랗+ㄴ), 그럴(그렇+ㄹ), 동그랬어(동그랗+었어)’와 같이 특정한 어미와 만나면 ‘ㅎ’이
탈락한다. 히읗불규칙용언인 것이다. 정리하면, “어간 끝음절의 받침이 ‘ㅎ’인 형용사는 모두 히읗불규칙용언이다. 단, ‘좋다’는 아니다.”
‘노랗다, 동그랗다’는 ‘노래, 동그랬다’로, ‘누렇다, 둥그렇다’는 ‘누레, 둥그렜다’로 활용한다. 활용형에 모음조화가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어떻다’도 ‘*그레, *어떼’로 됨직하지만 이들은 모음조화와 관계없이 ‘그래, 어때’로 적어야 한다. 본말이 ‘그러하다, 어떠하다’인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하여→그러해→그래’. 즉, ‘그러하여’의 준말인 ‘그러해’가 다시 줄어들어 ‘그래’가 된 것이다.
히읗불규칙용언이 어미 ‘네’와 결합할 때는 ‘ㅎ’이 탈락하기도 하고 탈락하지 않기도 한다. 즉, ‘노랗네, 그렇네, 조그맣네’와 같이 써도 되고 ‘노라네, 그러네, 조그마네’와 같이 써도 된다는 뜻이다. 종전에는 ‘ㅎ’을 탈락시킨 것만 맞는 표기로 인정해 왔으나, 불규칙활용의 체계성과 현실의 쓰임을 고려하여 2016년부터는 ‘ㅎ’을 탈락시키지 않은 것도 표준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긴팔과 긴소매
“손목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뭐라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긴소매’라고 대답할 것이다. 질문을 바꿔 “팔꿈치 위나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짧은 소매를 뭐라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반소매’로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한 사람들도 실생활에서는 ‘긴소매 셔츠’보다 ‘긴팔 셔츠’를, ‘반소매 셔츠’보다 ‘반팔 셔츠’를 자연스럽게 쓸 것이다. 이처럼 의미를 먼저 제시하고 물을 때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달리 대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옷의 소매가 길고 짧은 것이라는 사실만 상기하면
‘긴소매’와 ‘반소매’라 말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긴팔, 반팔’을 ‘긴소매, 반소매’와 같은 말로 풀이하고 있다. ‘긴팔, 반팔’이 일상화된 언어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긴팔’과 ‘반팔’처럼 상식에서 벗어난 표현이 일상화된 언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규범적인 관점에 선다면 의미에 주의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이런 표현을 양산한 이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의미에 주의하지 않은 결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긴소매, 반소매’의 ‘소매’를 일관되게 ‘팔’로 대체할 수 있다면, ‘소매’에서 ‘팔’을 혹은 ‘팔’에서 ‘소매’를 연상하는 것도 언어 작용의 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것(팔)을 이용하여 그것과 상관성이 있는 다른 것(소매)를 나타내는 것은 비유의 한 방법이다. 비유의 원리를 감안한다면 언어 상식의 범위는 넓어질 수 있다. ‘주전자가 끓는다’에서는
‘주전자 안의 물’을 ‘주전자’로, ‘손이 모자란다’에서는 ‘손으로 일을 하는 일꾼’을 ‘손’으로 표현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
이런 날 - 윤동주
사이 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
|
기도 - 김수영
-4.19殉순국학도위령제에 붙이는 노래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여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허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러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혁명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죄있는 몸의 억천만개의 털구멍에
죄라는 죄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1960. 5. 18>
~~~~~~~~~~~~~~~~~~~~~~~~~~~~~~~~~~~~~~~~~~~~~~~~~
|
산위에서 - 이해인
그 누구를 용서할수 없는 마음이 들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이야기는 나만이 아는것
세상에 사는동안 다는 말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낼수 없다
꼭 침묵해햐할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좀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새가 있는 언덕길에서 5~8) - 이해인
5
비 내리던 오늘 아침. 미사와 기도시간 뒤에도 종다리의 노래를 들었다. 빗속에 듣는 새소리는 더욱 잊을 수 없다. 참으로 밝고 명랑한 새들의 합창을 들을 때면 사소한 일로 우울하고 어두웠던 내 마음을 훌훌 털고 이내 명랑해져야겠다는 의무감마저 생겨 새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보낸다.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부르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얼마나 멋지고 흥겨운지!
6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숨겨져 있는 동심과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들로 여겨져 그 아름다움에 끌려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에 다녀왔다는 석영이란 독자가 특별히 나를 생각해서 보내 준 화집을 나는 요즘 거의 매일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까치` `비상` `나무와 새` 등등 그의 그림에 많이도 등장하는 새들의 모습에서 난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다. 새가 그려진 엽서. 달력, 우표, 손수건 그리고 아름답고 멋진 그림들을 몇개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부자로구나.
7
까치들은 잘 보이는데 참새는 전보다 흔치 않아서인가 워낙 작아서인가 마음먹고 보아야 눈에 뜨인다. 참새들을 보면 반가운 마음으로 오규원님의 도시 `참새`를 크소리로 읽고 싶어진다.
그 맑고 쨍한 소리를
짹짹짹 그 소리를 동그랗게 찍어내는 노오란 주둥이
참새가 귀여운건
그 노오란 주둥이 때문이다.
간지럽게 귓바퀴를 맴돌다 가는
포르르 날아가고 오는 그 소리
참새가 귀여운 건
간지러운 그 소리 때문이다.
나뭇가지에 기우뚱하며
간신히 앉고도 시침을 딱 떼고
점잖게 앉은 모습
참새가 귀여운 건
그 아찔하고
장난스런 얼굴 때문이다.
8
나는 늘 새가 있는 언덕길을 지나 아랫집 일터로 간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지만 새들이 자주 오르내려 더욱 아름답고 정겹게 느껴지는 수녀원 언덕길을 벌써 30년이나 오르내리며 나는 참으로 고운 새들을 많이 만났다. 가슴은 볼록 나오고 다리는 아주 가느다란 조그만 새들. 앙증맞고 어여쁘다 못해 그 작은 모습이 가끔을 안쓰러워 보이던 새들에게서 나는 삶에 힘이 되는 꿈과 노래와 기도를 배웠다.
|
|
시나눔 → 동시
|
|
|
눈 - 박두순
자장
자장
하늘이 불러 주는
하얀 자장가
풀잎 머리 위에
나무의 팔 위에
산의 어깨 위에
자장
자장
지붕이 하얗게 잠들고
들이 하얗게 잠들고.
------------------------------------------------------------
아이들은 즐겁다 - 장사도
비 오는 날
풀 폭탄 맞고도
즐거운 등굣길.
눈 오는 날
눈 폭탄 맞고도
즐거운 골목길.
|
|
시나눔 → 외국시
|
|
|
발견 - 괴테 / 기주연 옮김
그렇게 나 홀로
숲속으로 걸어갔네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았지.
그것이 내 생각이었어.
그늘 속에서 나는
한 떨기 작은 꽃송이를 보았어.
별처럼 빛나며,
작은 눈동자처럼 아름다운
나는 그 꽃을 꺾으려 했지.
그러자 꽃은 속삭였어.
난 꺾여
시들어져야 할까요 ?
뿌리째 온통
난 그 꽃을 뽑아 내어
집 옆 예쁜 정원으로
옮겨왔다네.
그러자 그 꽃은 조용한 구석에서
다시 살아났지.
지금 그 꽃은 가지를 쳐가고
자꾸자꾸 꽃을 피워가고 있다네.
|
|
글나눔 → 추천글
|
|
|
이외수의 감성사전
사랑
반드시 마음 안에서만 자란다. 마음 안에서만 발아하고 마음 안에서만 꽃을 피운다. 사랑은 언제나 달디단 열매로만 결실되지는 않는다. 사랑에 거추장스러운 욕망의 덩굴식물들이 기생해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려 할 때 샘물처럼 고여든다. 그 샘물이 마음 안에 푸르른 숲을 만든다. 푸르른 낙원을 만든다. 온 천지를 둘러보아도 사랑의 반대말이 없으며 온 우주를 살펴보아도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는 낙원을 만든다. 사랑은 바로 행복 그 자체이다.
접시닦이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유흥업소나 접객업소 등을 이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수 없을 때 현장에서 취득할 수 있는 직업의 일종. 접시를 닦기 전에 마음부터 먼저 닦으라는 교훈이 내포되어 있지만 대체로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선택하는 직업이며 정상적인 신체기능을 가졌다면 특별한 연수교육을 거치지 않고도 단시간 내에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대개 임시직이지만 엄처 시하에 있는 공처가들에게는 거의 영구직이나 다름없다.
인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담과 이브를 필두로 하나자손 모두를 지칭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주에서 가장 나이가 어림 생명체이며 가장 욕심이 많은 철부지들이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선악과라는 이름의 과일이 에덴동산이란 낙원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뱀의 감언이설에 빠져 그 과일 한 개를 따먹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름으로써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이후 그 후예들은 몇 천 년 동안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자자손손 죄수로 살아가고 있다. 한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한 메시아가
나타나 전 생애를 다 바쳐 사면운동을 벌였으나 아직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사면되지 않은 상태로 복역중이다. 사랑하라. 단지 그 한마디만을 실천하면 되는데도.
인간
지구에 기생하는 생명체중에서 가장 이기주의적으로 지능이 발달한 영장류. 지구에 기생하는 생명체중에서 가장 많은 전쟁무기를 가지고 있다. 여러번의 핵실험을 통해 대기권 안의 전 생명체들을 멸종의 지름길로 인도하고 각종 폐기물을 통해 대기권 전역의 생태변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으나 지구에 기생하는 어떤 생명체도 숙주인 지구를 파괴하는 법은 없으며 오직 인간들만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자연에게서
많은 것을 착취해 왔으나 자연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은 가장 조화된 것은 가장 진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이며 안다고 하더라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자신들의 껍질에 가리워져 스스로의 참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지구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피부에 기생하는 암세포에 상응하는 미생물이다. 그것들은 지구의 피부 전역에 착생하여 닥치는 대로 부스럼을 만들고 종양을 일으키며 살을 썩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심지어는 지역별로 세력권을 형성하여 같은 종끼리도 잔혹하게 목숨을 짓밟는다. 인간들의 형태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미생물이 기생한다. 그 중에서 가장 진화된 미생물은 백혈구라고 명명한 혈액세포의 일종이다. 그것은 핵을 가진 하나의 독립세포다. 그것은 숙주와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것이 감소하면 숙주도 생명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이 감소한다고 해도 결코 생명의 위험은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각종 피부질환만 치유될 뿐이다. 지구가 바뀌기를 바라지 말고 인간 스스로를 바꾸면서 살아갈 일이다.
자연보호
전 인류가 집단자살로써 자연에 귀의할 때야 비로서 성취되어 질 수 있는 과업.
|
|
독서실 → 외국소설
|
|
|
어린 왕자 - 생떽쥐베리
어린왕자 - (4/5)
재치를 부리려다 보면 조금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다. 가로등 켜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한 이야기는 아주 정직한 것은 못된다. 지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칫하면 지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할 수도 있을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지구 위에서 차지하는 자리란 실은 아주 작은 것이다. 지구에서 사는 20억의 사람들이 어떤 모임에서처럼 서로 좀 바짝바짝 붙어서 있는다면 세로 20마일 가로 20마일의 광장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태평양의 아주 작은 섬 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자신들이 굉장히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오밥나무처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들에게 계산을 해보라고 일러주어야 한다. 그들은 숫자를 좋아하니까. 그럼 그들은 기분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문제를 푸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는가. 어린 왕자는 그래서 지구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사람이라곤 통 보이지 않는데 놀랐다. 그가 잘못해서 다른 별로
찾아온 게 아닌가 겁이 나 있을 때, 달같은 빛깔의 고리가 모래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안녕."
어린 왕자가 무턱대고 말했다.
"안녕."
뱀이 말했다.
"지금 내가 도착한 별이 무슨 별이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지구야. 아프리카지."
뱀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지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니?"
"여긴 사막이야. 사막에는 아무도 없어. 지구는 커다랗거든."
뱀이 말했다. 어린 왕자는 돌 위에 앉아 눈길을 하늘로 향했다.
"누구든 언제고 다시 자기 별을 찾아낼 수 있게 별들이 환히 불 밝혀져 있 는지 궁금해. 내 별을 바라봐. 바로 우리들 위에 있어......그런데 어쩌 면 저렇게 멀리 있지!"
"아름답구나. 여기 무엇 하러 왔니?" 뱀이 말했다.
"난 어떤 꽃하고의 사이에 골치아픈 일이 있단다."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래!" 뱀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잠자코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사막에선 조금 외롭구나......"
어린 왕자가 마침내 다시 입을 떼었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뱀이 말했다. 어린 왕자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넌 아주 재미있게 생긴 짐승이구나.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고......" 그가 말했다.
"그래도 난 왕의 손가락보다도 더 힘이 세단다." 뱀이 말했다. 어린 왕자는 미소를 지었다.
"넌 힘이 세지 못해...... 발도 없고...... 여행도 할 수 없잖아......"
"난 배보다 더 먼 곳으로 너를 데려다줄 수 있어." 뱀이 말했다.
그는 어린 왕자의 발뒤꿈치에 팔찌처럼 몸을 휘감더니 말했다.
"나를 건드리는 사람마다 그가 나왔던 땅으로 돌려보내 주지.하지만 너는 순진하고 또 다른 별에서 왔으니까......" 어린 왕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네가 측은해 보이는구나. 무척이나 연약한 몸으로 이 돌멩이 투성이의 지 구에 왔으니. 네 별이 몹시 그리울 때면 언제고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난......"
"응! 아주 잘 알았어. 헌데 왜 그렇게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니?"
"난 그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 뱀이 말했다. 그리고는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어린 왕자는 사막을 횡단했는데 오직 꽃 한 송이를 만났을 뿐이었다. 석장의 꽃잎을 가진 볼품이라곤 없는 꽃이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꽃이 말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어린 왕자가 정중히 물었다. 그 꽃은 언젠가 대상(隊商)의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라구? 한 예닐곱 사람 있는 것 같아. 몇 해 전에 그들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야. 그들은 바 람결에 불려다니거든, 뿌리가 없어서 몹시 곤란을 받고 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꽃이 말했다.
어린 왕자는 한 높은 산 위로 올라갔다. 그가 아는 산이라곤 그의 무릎에 닿는 세 개의 화산이 고작이었다. 불 꺼진 화산은 걸상으로 이용하곤 했었다.(이 산처럼 높은 산에서는 이 별과 사람들 모두를 한 눈에 볼 수 있을거야......) 그러나 바늘 끝처럼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만 보일 뿐이었다.
"안녕." 그가 혹시나 하고 말해 보았다.
"안녕...... 안녕...... 안녕......" 메아리가 대답했다.
"너는 누구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지......" 메아리가 대답했다.
"내 친구가 되어 줘. 나는 외로와." 그가 말했다.
"나는 외로와...... 나는 외로와...... 나는 외로와......" 메아리가 대답했다.
(참 얄궂은 별이군! 메마르고 뾰족뾰족하고 험하고, 게다가 사람들은 상상력이 없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되풀이하니......나의 집에는 꽃 한 송이가 있었지, 그 꽃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그리하여어린 왕자는 모래와 바위와 눈 가운데를 오랫동안 걷고난 끝에 드디어 길을 하나 발견했다.그런데 길들이란 모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통하는 법이다.
"안녕." 그가 말했다. 그것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이었다.
"안녕." 장미꽃들이 말했다.
어린 왕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그의 꽃과 쏙 빼닮은 것들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깜짝 놀란 어린 왕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장미꽃들이야." 장미꽃들이 말했다.
"아. 그래?"
그러자 어린 왕자는 자신이 아주 불행하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그의 꽃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그런데 정원 하나 가득히 그와 똑같은 꽃들이 5천 송이는 되는 게 아닌가! (내 꽃이 이걸 보면 몹시 상심할 거야)하고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기침을 지독히 해대면서 창피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죽으려는 시늉을 할 거야. 그럼 난 간호해 주는 척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러지 않으면 내게 죄책감을 주려 정말로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꽃을 가졌으니 부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가진 꽃은 그저 평범한 한 송이 꽃일 뿐이야. 그중 하나는 영영 불이 꺼져 버렸는지도 모를,내 무릎까지 오는 세 개의 화산과 그 꽃으로 내가 굉장히 위대한 왕자가 될 수는 없어......) 그래서 그는 풀숲에 엎드려 울었다.
여우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안녕." 어린 왕자는 공손히 대답하고 몸을 돌렸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여기 사과나무 밑에 있어." 좀전의 그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누구지? 넌 참 예쁘구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난 여우야." 여우가 말했다.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놀아. 난 정말로 슬프단다......" 어린 왕자가 제의했다.
"난 너와 함께 놀 수 없어." 여우가 말했다.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
"아,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 본 후에 그는 다시 말했다.
"<길들인다>는게 뭐지?"
"넌 여기 사는 애가 아니구나. 넌 무얼 찾고 있니?" 여우가 물었다.
"난 사람들을 찾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길들인다>는게 뭐지?"
"사람들은 소총을 가지고 있고 사냥을 하지. 그게 참 곤란한 일이야! 그들은 병아리들도 길러.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지. 너 병아리를 찾니?" 여우가 물었다.
"아니야.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게 뭐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만든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 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 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차츰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꽃 한 송이가 있는데...... 그 꽃이 나를 길들인 걸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여우가 말했다.
"지구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으니까......"
"아, 아니야! 그건 지구에서가 아니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여우는 몹시 궁금한 기색이었다.
"그럼 다른 별에서의?"
"그래."
"그 별엔 사냥꾼들이 있지?"
"아니, 없어."
"그거 참 이상하군! 그럼 병아리는?"
"없어."
"이 세상에 완전한 데라곤 없군."
여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우는 하던 이야기로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내 생활은 단조롭단다. 나는 병아리를 쫓고 사람들은 나를쫓지. 병아리 들은 모두 똑같고 사람들도 모두 똑같아. 그래서 난 좀 심심해. 하지만 네 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히 밝아질 거야. 다른 모든 발자국소리와 구별되는 발자국소리를 나는 알게 되겠지. 다른 발자국소리들은 나를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 테지만 너의 발자국소리는 땅 밑 굴에서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은 먹지 않아. 밀은 내겐 아무 소용도 없는 거야. 밀밭은 나에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그건 서글픈
일이지!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사랑 하게 될 거야......"
여우는 입을 다물고 어린 왕자를 오래오래 쳐다보더니,
"부탁이야......나를 길들여 줘!" 하고 말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어린 왕자는 대답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아. 친구들을 찾아 내야 하고 알아볼 일도 많아."
"우린 우리가 길들이는 것만을 알 수 있는 거란다."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상점에서 이미 만들 어져 있는 것들을 사거든.그런데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는 거지.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 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다음날 다시 어린 왕자는 그리로 갔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 절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을 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儀式)이 필요하거든."
"의식이 뭐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것도 너무 자주 잊혀지고 있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그건 어느 하루를 다른 날들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 들과 다르게 만드는 거지.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사냥꾼들에게도 의식이 있어. 그들은 목요일이면 마을의 처녀들과 춤을 추지. 그래서 목요일은 신나는 날이지! 난 포도밭까지 산보를 가고.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추면, 하루하루가 모두 똑같이 되어 버리잖아.그럼 난 하루도 휴가가 없게 될 거고......"
그래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말했다.
"아아! 난 울 것만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하지만 내가 널 길들여 주길 네가 원했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그래." 여우의 말이었다.
"헌데 넌 울려고 그러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러니 넌 이익본 게 아무것도 없잖아!"
"이익본 게 있지. 밀밭의 색깔 때문에 말야."
여우가 말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장미꽃들을 다시 가서 봐. 너는 너의 장미꽃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 라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돌아와서 작별인사를 해줘. 그러면 내가 네게 한 가지 비밀을 선물할께."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보러 갔다.
"너희들은 나의 장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아 니야."
그들에게 그는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도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꼭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여우야."
그러자 장미꽃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어." 그가 계속 말했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하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병풍으로 보호해 준 것은 그 꽃이기 때문이지.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것 (나비 때문에 두세 마리 남겨둔 것말고)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또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내가 귀기울여 들어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그건 내 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는
여우에게로 돌아갔다.
"안녕." 그가 말했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다."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되뇌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 간이란다."
"......내가 나의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이란다......"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라 말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나는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는 되뇌었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일연의 삼국유사 - 박남일
4. 설악산 진전사를 찾아서
일연은 무량사 주지 스님이 적어준 편지를 품에 넣고 5년 동안 몸을 담았던 무량사를 떠나 설악산 진전사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먼 여행길이었다. 일연은 설악산 진전사로 가는 도중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런 백성들을 볼 때마다 일연은 마음이 아팠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는 또다른 근심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이민족의 침입이었다. 남으로는 왜구가 극성이었고, 북으로는 거란족의 노략질이 심했다. 그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백성들이 성 쌓는 일에 이리저리 불려다녔다. 그런
백성들을 볼 때마다 일연은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쳤다. 가난한 데다가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따뜻한 자비의 손길이 미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백성들이 이렇게 굶주리고 있으니 일연은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밥 한 끼 얻어 먹기도 힘들었다. 여기저기 절이 있었지만 쌀 한 톨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 불공을 드리는 절은 자연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일연은 어제 한 사찰에 들러 겨우 요기를 하고 주먹밥 두어 덩이를 얻어 바랑에 집어 넣었다. 가난한 사찰에서 밥을 얻어먹는다는 사실이 미안했지만
며칠을 굶은 터라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열연은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절집 식구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했다. 그렇다고 고려의 모든 절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절 중에는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부유한 곳도 있었다. 그런 절은 주로 권세 있는 귀족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특히 잘 사는 절일수록 무신 최충헌이 그 뒤를 봐주는 곳이었다. 일연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불공을 드리는 절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가난한 백성들이 모이는 절집만 주로 찾아다녔다. 그러다보니 끼니를 거르는 일도 많았다.
하룻밤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잠자리만 얻어도 다행일 지경이었다. 일연이 한 마을을 지나던 길이었다. 그곳에는 몇 해째 흉년이 들었다. 게다가 땅 주인들은 쌀 가마니를 절에 올려 보내고 백성들에게는 한 톨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런 형편이라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심했다. 날이 저물 무렵, 일연은 한 농가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하룻밤 묵을 잠자리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괴상한 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울음 소리는 보통 우는 소리와 어딘지 좀 달랐다. 뭔가 억눌리고 억울한 것 같은,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체념 같은 것들이 묻어 있는 그런 울음소리였다. 일연이 소리를 높였다. "하룻밤 묵어갈 수 있습니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호호백발의 노파였다. 허연 머리와 거무튀튀한 얼굴 피부는 무척 대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몹시 찌들린 얼굴이었다.
"할머니,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머물 수 있을까 해서..."
"이 집에는 아무 것도 드릴 게 없어서..."
노파는 일연을 시주승으로 알았는지, 아무 것도 나누어 줄 게 없다고만 말했다.
"아니, 그냥 하룻밤 이슬만 피하게 해주신다면..."
일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굳이 살림이 어려운 이 집에 폐를 끼치는 것이 옳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연의 마음을 잡아맨 것은 좀전의 울음소리였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그냥 그 집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연의 처치가 딱해 보였던지 노파가 하룻밤 묵는 것을 허락했다. 일연이 방안으로 들어갔더니 방 한구석에는 세 아이들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몹시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일연은 그런 아이들을 위해 삼베 바랑을 풀어 주먹밥 한 개씩을 나누어주었다. 전날 절에서 얻어온 것인데, 배가 고프면 먹으려고
아껴둔 것이었다. 아이들은 사양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주먹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자 그 노파가 매우 송구스러워 하며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어둠이 깔리고 하늘에 별이 뜨기 시작할 무렵, 젊은 부부가 돌아왔다. 그들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몹시 피곤하게 보였다. 부부는 시큰둥한 눈으로 일연을 바라보았다.
"어려운 사정을 알면서도 하룻밤 묵어갈까 하고 들렀습니다."
일연이 젊은 부부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젊은 부부의 얼굴 표정은 굳어 있었다. 생활에 무척 찌들린 얼굴이었다.
"아, 여기 이 스님이 아이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셨다. 애들이 오랜만에 배불리 밥을 먹었어."
노파의 말을 들은 젊은 부부의 얼굴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경황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성 쌓는 일을 하루 종일 하다보니 늦었군요. 편히 쉬세요. 참, 저녁 식사는..."
젊은 남자는 힘없이 물었다. 그 집의 처지를 뻔히 알고 있는 일연은 거짓말로 둘러댔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다른 곳에서 먹었습니다."
일연은 젊은 부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는 물러 나왔다. 일연은 피곤한 몸을 쭉 뻗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흑흑흑..."
일연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흐느낌 소리는 마당에서 들려왔다. 일연은 들창을 보았다. 들창 안으로 희미한 달빛이 흘러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연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주인 남자가 울고 있는 소리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한 생각이 들었지만 남의 집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일연은 궁금증을 억누르며 내처 누워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남자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훌쩍거렸다. 일연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주인 남자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깊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일연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일연이 주인 남자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주인 남자는 일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남자는 일연이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 달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비록 제가 어리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털어놓으면 마음이라도 후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인 남자는 언뜻 입을 열지 않았다. 설움이 복받치는 듯 한참 동안 흐느낄 뿐이었다. 일연은 그 남자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일연은 다시 한 번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제서야 울음을 그친 주인 남자는 한숨을 푹 쉰 뒤 입을 열었다. 젊은 부부는 가난한 살림이지만 열심히 일을 해서 근근히 밥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그 해는 워낙 흉년이라 식량마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땔감을 장에 내다 팔아서 식량으로 바꾸어 오고, 아내는 나물, 풀뿌리, 나무 껍질을 구해다
죽을 끓여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성을 쌓는 일에 끌려가다 보니 식량을 구할 길이 없어서 온 식구가 굶기를 밥먹듯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정말로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며 주인 남자는 다시 한번 서럽게 울었다.일연은 남자의 말을 듣고 나니 콧날이 시큰해졌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며 보채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나이가 많으신 어머니께 효도는 커녕 밥 한 끼 제대로 못 지어 드려서 죄스럽기 짝이 없구요. 그래서..."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래서요?" 일연이 부드럽게 물었다.
"차라리 늙으신 어머니를 산에 모시는 게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는 길이 아닌가 하고..."
남자는 또 울먹였다. 그런 그를 보며 고려장을 하려는구나 하고 일연은 생각했다. 당시에는 부모가 늙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죽을 때가 되면 지게에 지고 가서 산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숲속으로 갔습니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셈치고 어렵게 쌀 한 됫박을 구해 지었던 밥 한 소쿠리를 어머니 앞에 내밀었습니다..."
사내는 하루 종일 숲길을 가다가 큰 나무 그늘 아래 도착해 잠깐 쉬면서 쌀밥을 어머니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밥을 받아 먹지 않고 오히려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야 곧 죽을 몸인데 밥은 먹어서 뭘 하겠느냐. 나를 지고 오느라 배 고플 테니 네가 어서 먼저 먹으렴. 그리고 남는 밥은 가지고 가서 집에 있는 아이하고 에미에게 먹이려므나."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그만 어머니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들은 마침내 어머니를 다시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를 모시고 오기는 했지만 살 길이 막막해서요... 이렇게 울기라고 하면 마음이나 편할까 해서..."
젊은 남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눈물을 닦아냈다. 일연의 볼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부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진정하세요. 효성이 그토록 지극한데 부처님의 자비가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일연은 이 말밖에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젊은 부부에게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다.일연은 날이 채 밝기 전에 젊은 부부의 집을 나왔다.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내가 과연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몹시 가물어서 먼지만 푸석푸석한 흙길을 걸으며 일연은 오래도록 이 생각을 했다.
설악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일연의 길이 닿는 곳은 어디나 흉년이 들어 사람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벼를 심지 않은 빈 논이 대부분이었고 모내기를 끝낸 논에도 누렇게 모가 말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논바닥은 거북의 등처럼 쩍쩍 금이 가 있었다. 그래도 비가 내릴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종일 시뻘건 해가 뜨거운 빛을 내뿜었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인심은 극도로 나빠져 민심이 흉흉했다.
"백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지독한 흉년이야."
"왕실이 무너져서 하늘이 떠난 거라고."
고을마다 백성들은 산에 올라가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다. 또한 묘를 파헤쳐 하늘에 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말에 따라 파헤쳐지는 묘도 많았다. 일연이 대둔산 언저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한여름이라 날씨가 무척 더웠다. 일연은 마치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앉은 것처럼 땀을 비오듯 흘리며 걷고 있었다. 배에서는 꾸르륵 하는 소리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제대로 밥 한 끼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아, 너무 힘이 들구나.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집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나무 등짐을
해서라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일연은 지금이라도 당장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없이 마셔보고 싶었다. 마치 목구멍에다가 훨훨 불을 지피는 것 같은 목마름이었다. 입 안에는 더이상 삼킬 침도 남아 있지 않을 무렵, 일연은 계곡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연은 엎드려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빈 뱃속에다 물을 넣어서인지 속이 쓰리고 아팠다. 일연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하는 사람들의 말 소리가 들렸다. 한적한 산 속에서 사람 소리를
들으니 더없이 반가웠다. 먹을 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할 참이었다. 그래서 사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낙네 몇이 열심히 소나무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서 몇 걸음 떨어진 그늘에는 보자기에 싸인 아기가 잠자고 있었다. 일연은 힘이 쭉 빠졌다. 나무껍질이라도 벗겨 배를 채우려는 아낙에게 차마 먹을 것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 모두 하나같이 어렵게 살고 있구나! 무엇이 문제일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고을을
지나면 부자들이 큰 잔치를 벌이던데... 그 부자들은 왜 많은 양식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눠 먹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수록 극락에 가기가 쉽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야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일연은 그대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해가 기울고 산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일연은 큰 바위 틈에 풀잎을 깔고 몸을 눕혔다.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일연은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무량사를 떠나 설악산 진전사로 향한 지 몇 달이 지났는지 일연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아침이면 길을 떠나고 저녁이면 누울 곳을 찾았다. 처음 무량사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곧바로 설악산 진전사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날을 거듭할수록 바뀌었다. 도량에서 자신을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백성들의 고된 살림살이를
직접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어쩌면 부처님을 더 잘 따르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일연은 그즈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연은 오대산 중턱에 다다랐다. 오대산은 설악산에서 가까운 산에 있었다. 일연이 그곳에 다다랐을 때 그의 차림새는 영락없이 거지꼴이었다. 일연의 바랑에는 이제 하나 남은 짚신이 달랑거렸으며, 옷은 이곳 저곳이 찢어지고 구멍이 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는 들풀처럼 풀어헤쳐져 있었고, 살은 까맣게 타고 상처투성이었다. 하지만
일연은 이제 설악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지막 힘을 내어 걸어갔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인심 좋은 절에서 주먹밥까지 얻은 터라 발걸음이 사뭇 가벼웠다. 그렇게 마을을 지나 오대산 고갯길을 절반쯤 올랐을 무렵이었다. 일연은 다리도 쉴 겸 계곡으로 내려가 그늘에 앉았다. 그리고 바랑에서 주먹밥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 때였다.
"네 이놈, 꼼짝 마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을 테다!"
사내 두 명이 당장 죽일 듯이 몽둥이를 들고 성큼성큼 일연에게 다가왔다. 일연은 깜짝 놀라 귀한 주먹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일연은 황급히 그것을 다시 주워들었다. 일연의 그 모습을 보고 사내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봐라.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는데 차림새는 영락없는 거지로구먼. 이거야 원, 오히려 보태줘야 될 놈 같구먼."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는 사내가 일연이 짊어지고 있는 바랑을 확 낚아챘다. 그 바랑 속에는 무량사 스님이 설악산 진전사 대웅선사에게 보내는 편지와 불경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일연은 다시 사내의 손에서 바랑을 낚아채 품에 안고 소리쳤다.
"도대체 당신들이 누군데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이오?"
일연의 말에 사내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일연은 지지 않으려고 크게 소리쳤다.
"주먹밥을 나눠달라면 주겠지만 이 바랑에는 당신들이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손대지 마시오."
"허, 이놈 봐라."
일연이 전혀 겁을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호통까지 치자, 두 사내는 잠시 놀라는 듯했다. 하지만 곧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주 당돌한 녀석로구나. 너는 아직 우리가 무엇하는 어르신네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 놈아, 우리는 이 산의 주인이다. 이 산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지. 너도 이 길을 지나가려면 당연히 세를 물어야 된다. 보퉁이에 손대지 못하게 하는 걸 보니, 그 속에는 꽤 값진 물건이 들어 있는 모양이구나. 어서 이리 내놓으면 몸성히 보내주겠다. 하지만 만일 계속 반항하면 이 몽둥이로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겠다!"
'이들이 바로 산적이구나'하고 일연은 생각했다. 그러자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바랑을 사내들에게 건네주었다.
"자, 보시오. 하지만 당신들이 필요한 물건이 없으면 즉시 돌려 주어야 하오."
사내들은 바랑을 건네받아 뒤지기 시작했다.
"에이 이런 빌어먹을, 완전히 거지구만. 이거 오늘은 계속 헛탕만 치는걸."
"형님한테 야단 듣겠다."
곰보 사내가 일연의 바랑을 걷어차며 침을 뱉었다.
"퉤, 퉤."
그러자 다른 사내가 곰보를 가까이 불러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소근거렸다. 그 사이 일연은 흐트러진 물건을 정리하여 바랑에 넣었다
"음. 음. 그래 그래..."
"좋다. 꿩 대신 닭이다."
곰보는 무슨 꾀를 냈는지 일연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가자. 그렇지 않아도 산채에 일손이 부족한데 너라도 잡아가야겠다."
일연은 사내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나는 설악산에 가야 해요."
하지만 일연의 몸부림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정을 하여도 두 사내는 일연의 팔목을 힘있게 잡아끌었다. 사내들은 결국 일연을 그들의 소굴로 끌고 갔다. 얼마나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왔는지 일연은 풀려난다 해도 산을 내려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산적들이 머무는 곳에는 통나무로 만든 집이 네 채가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대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일연은 재빠르게 그 곳에 있는 산적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일연은 곧장 두목인 듯한 사내가
머물고 있는 산채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곰보가 일연을 두목 앞에 꿇어앉혔다.
"형님, 잔일손도 부족하고 해서 하나 잡아왔습니다. 아직 어리고 하니 잘 키우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헤헤."
일연은 고개를 들어 형님이라고 불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내는 몸집이 작고 다부져 보였는데, 눈빛이 매우 선량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 산적의 두목이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그때였다. 두목이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야, 이놈들아! 누가 이런 아이를 잡아오라고 했냐? 너희들은 내가 한 말을 잊었느냐? 관리들이나 부자놈의 짐은 빼앗되 가난한 백성은 건들지 말 것이며, 혹시 굶어 죽으려는 자가 있으면 먹을 것을 나눠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에이 이 못난 놈들. 입만 하나 더 늘었네."
두 사내는 두목의 말을 듣고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큰형님, 멋 모르고 날뛴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두 사내의 행동을 보고 일연은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 이들도 한때는 모두 마음씨 착한 농부들이었구나.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일연은 자신이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두목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두 사내에게 명령하였다.
"됐다,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두 사내가 머리를 조아린 뒤 밖으로 나가자 산채 안에는 일연과 두목 단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두목은 일연을 한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몇 살이냐?"
"열다섯 살입니다."
"무엇하는 놈이냐?"
일연은 눈망울을 또랑또랑하게 굴렸다.
"설악산 진전사로 공부를 하러 가는 길입니다."
일연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설악산 진전사라... 글을 아느냐?"
두목이 다시 물었다.
"네, 읽고 쓸 줄 압니다."
"설악산에 가서 무슨 공부를 할 거냐?"
산적 두목은 계속 다그치듯 물었다.
"부처님의 말씀이 적힌 불경을 읽고 또..."
"또, 뭐냐?"
"예, 힘들고 고달픈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일연은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목이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실은 이 대답을 가장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목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름이 뭐냐?"
"일연이라고 합니다."
두목은 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네 얼굴을 보니 장차 백성들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마터면 그런 네게 내 부하들이 큰 일을 저지를 뻔 하였구나. 여기서 하룻밤 쉬고 내일 아침에 떠나거라."
일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산적들의 소굴에 잡혀와 이렇듯 쉽게 풀려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산적은 선반 위에 얹어두었던 책을 꺼내 일연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어느 부잣집을 털러 갔다가 가져온 것이다. 이 곳에서는 필요없는 책이니 네가 가지고 가거라."
"고맙습니다."
일연은 인사를 하고 두목을 바라보았다. 두목의 얼굴에 까닭 모를 쓸쓸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두목이 준 책은 인종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이었다. 일연은 그 책을 바랑 깊숙한 곳에 넣고 산채를 떠났다. 전날 일연을 끌고 왔던 곰보 사내가 일연을 큰길까지 바래다주었다.
"형님이 네게 이것을 주라고 하셨어."
곰보 사내는 주먹밥 몇 덩이를 일연의 바랑에 넣어 주었다. 그런 곰보 사내를 보며 일연은 그 역시 순박한 농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연은 그 사내에게 물었다.
"아까 그 두목은 몸집도 작은데 어떻게 두목이 되었나요?"
"아? 그 큰형님. 우리들 중에는 그래도 그 형님이 글자를 알고, 옳고 그른 것을 잘 가리기 때문이란다."
"그런 사람이 왜 남의 것을 훔치면서 살아가죠? 어떤 이유에서도 그 일은 나쁜 것이에요. 두목에게 이르세요.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나쁜 부자들이나 무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말이에요."
일연의 당돌한 말을 들은 곰보 산적이 빙그레 웃었다
"허 참, 그 녀석. 맹랑하구만."
그런 사내의 모습은 순박한 농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연은 처음 붙잡혔던 곳에서 곰보와 헤어졌다.
서쪽 하늘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일연은 산 아랫마을로 발길을 재촉했다. '귀족들은 백성들의 것을 빼앗기에 바쁘고, 백성들은 귀족들에게 빼앗기고 오랑캐들에게 빼앗기고, 도적들에게 빼앗기고... 부처님의 자비로 그런 백성들을 구할 수 있다면...'일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어느새 진전사를 품고 있는 설악산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일연은 마음이 급했다.
|
|
글나눔 → 읽어둘문학
|
|
|
|
여자의 일생(Une Vie:1883) - 모파상 (1/2)
해설
이 작품은 주제와 묘사법에 있어서 모파상의 대표적인 장편이다. 꿈과 희망에 부풀던 한 소녀의 학대와 절망에 얽힌 삶이 작가가 자라난 노르망디의 절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절묘한 필치로 묘사된 것이다.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허무 염세와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심연에서 느끼는 슬픔과 체념을 깨닫게 한다. "여자의 일생"은 출판되자마자 단번에 2만 5천 부가 매진되었으며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비평가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 까닭은 모파상이 자연주의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잔의 암담한 회색으로 물든 인생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꿈 많은 처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 여인이 걸은 길은 결국 근대 생활에 대한 가혹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증오하고 조소할 만한 사실 이외에 깊이 공감할 만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문단의 자연주의 경향은 심하게 부정되었던 인간애를 가치 있는 인간성으로 취급하였다. 여러 가지 예술적 경향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는 톨스토이도 이 작품만은 높이 평가했다
"이 작품은 모파상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후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일 것이다"
독일의 세계적인 철학자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저서에서 독일의 문학자들을 악평한 후 프랑스의 문학자를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 모파상을 그 중 뛰어난 천재로 손꼽히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꿈과 낭만적인 희망에 들뜬 순진한 귀족 아가씨가 있다. 그녀는 냉혹 무정한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자식에게도 배신당한다. 꿈결 같이 짧은 한때의 신혼 여행을 마지막으로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녀의 희망을 빼앗고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다. 왜 그럴까? 이 의문을 내놓은 작가는 스스로 아무런 해답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 주인공에 대한 동정과 주인공의 생애를 더럽힌 남자에 대한 비난은 소설 전편을 통하여 충분한 해답을 하고 있다고 본다. 결론은 염세주의에 대한 하나의 항의로 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작가 약전
모파상은 프랑스 노르망디 리엡 근처의 투르빌 쉬르 아르크, 밀로메니르의 성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구스타브는 네덜란드 귀족이었고 예술적인 기질은 어머니 로르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양친이 별거하는 동안 모파상은 어머니 밑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루앙코르네이유 중학교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 중학교 졸업 후 파리에 나가서 약 10년 간 해군성 문부성에 근무했는데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어머니는 모파상의 재능을 믿고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플로베르에게 문학 지도를 부탁했다. 그는 플로베르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모든 문학 수업을 쌓았다. 그가 처음 소설을 발표하기까지 20편이나 플로베르의 엄격한 수중에 보류되었다고 한다. 1880년 그가 30세 때 에밀 졸라가 주재하던 '메당의 저녁'에 "비계덩어리"가발표되자 큰 호응을 얻고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 그 해에 처녀 시집을 내고 이어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다. 1880년부터 1891년에 걸쳐서 쓴 단편 소설의 수는 약 300편에 달한다. 이 밖에 6권의 장편 소설 3권의 기행문 1권의 희곡이 있다. 생전에 출판된 단편집의 수는 15권이었는데 현재는 18권이고 그 중의 2권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단편집은 미국, 독일, 일본 등의 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다. 세계3대 단편 작가로 미국의 포, 러시아의 체호프, 그리고 프랑스의 모파상이다. 1892년 1월 2일 밤 모파상은 돌연 목을 끊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파시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듬해 7월 6일에 정상적인 정신으로 돌아서지 못한 채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몽파르나스의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줄거리
잔은 짐을 꾸리고 창가로 가 보았으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제 수도원을 갓 나온 잔은 영원한 자유의 몸이 되어 그처럼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인생의 온갖 행복을 막 손에 넣으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만약 날씨가 개지 않으면 부친이 출발을 망설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염려스러워 아침부터 여러 번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잔은 열두 살까지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딸에 대한 미래 설계에 의해 모친의 눈물도 돌아보지 않고 수녀원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을 속세와 격리시켜서 남의 눈에 뛰지
않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모르게 해 놓았다. 열 일곱 살이 되면 순결한 채로 자기에게 돌려보내 줄 것을 모친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소 일종의 올바른 시의 목욕통 속에 딸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들을 걸어 다니고 기름진 대지의 한복판에 소박한 사랑의 모습과 동물의 단순한 애정 생의 청량한 법칙을 보여 주고 딸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넋을 열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이제 잔은 수도원을 떠나려는 것이다. 환하게 낯을 반짝이고 생기와 행복에 차서 한가한 낮 긴 밤 가지가지의 희망만이 떠오르는 고독 속에서 그 여자의
마음이 이미 떠돌아다니던 온갖 기쁨과 즐거운 가지가지의 우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한여름을 이포르 근처의 절벽 위에 세워 놓은 선조 대대의 옛 성관인 레페플의 저택에서 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 해변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에서 무한한 환희를 기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저택은 그 여자의 것으로 되어 있었고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그 곳에서 영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출발하려는 순간 전날 밤부터 쉴새 없이 내리고 있는 비는 그 여자의 생애에서 최초의 큰 슬픔이었다. 남작 부인은
몇 해 전부터 심장 비대증으로 부쩍 뚱뚱해져서 늘 심장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숨을 몹시 헐떡거리면서 낡은 호텔의 정면 층계까지 오자 빗물이 내처럼 넘쳐흐르는 앞뜰을 바라보고 "정말이지 제 정신은 아니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남편은 늘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임자가 그러자고 한 거요. 아델라이드 부인"
부인이 아델라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다소 놀려대는 듯한 경의를 표해서 언제나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발 속에서 두 필의 말 엉덩이에서는 온통 젖어 김이 나고 있었다. 잔은 아름다웠다. 장미빛을 띤 살결에는 우단 같은 솜털이 나고 금발 머리는 광채를 내며 물결치고 있었다. 눈은 도자기처럼 푸르고 날씬한 키에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명랑한 웃음 소리는 환희의 물결이 되어 사방에 퍼졌다. 줄리앙 라마르
자작은 레페플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남성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느낌을 주었으나 모든 여성에게는 이상적인완전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가 건강한 이마를 덮고 두터운 눈썹은 거무스레한 눈을 그윽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짙고 긴 속눈썹은 그 시선에 여자들의 가슴을 뒤 흔들어 놓은 정열적인 빛을 드리우게 했다. 아베 피코 사제의 소개로 알게 된 자작은 바로 이틀 후에 레페플로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남작댁의 만찬에 초대받게 된 것이다. 심장 비대증 때문에 언제나 잔심부름꾼
로잘리의 팔에 매달려 걷는 아델라이드 부인은 자작을 보면 항상 그 팔을 끼고 부인의 산책길을 걸었다. 자작은 잔을 향해서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과 눈은 무엇엔가에 끌리듯이 마주치곤 했다. 라마르 자작과 함께 남작과 잔이 에트르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배가 둑에 가까워지자 남작이 맨 먼저 뛰어내려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자작은 잔이 발을 적시지 않도록 두 팔로 안아서 내려 주었다. 그 짧은 포옹에 흥분한 가운데 두 사람이 해안의 자갈길을 올라가노라니 뜻밖에도 고기잡이 라스티크 아저씨가 남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두 사람 귀에 들려왔다.
"바로 이 사람이 점찍은 대로야 잘 맞는 귀여운 부부고 말고"
그 날 밤 잔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낸 주신 사람 내 생애를 바칠 사람일까? 그와 나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되고 떨어질 수 없이 한데 어울려져 그러다 사랑을 낳을 사이일까? 잔은 사랑하고 싶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날마다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작 옆에 있으면 가슴이 뛰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데보 남작이 외딸인 잔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침대 발치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르 자작이 우리에게 청혼을 해 왔다"
잔은 담요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아무튼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해 뒀지 네가 저쪽보다도 훨씬 부자지만 한평생의 행복이란 돈 문제가 아니거든 자작 형편으로서는 네가 결혼한 후에도 이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나 나나 그 남자가 맘에 든단다. 그렇지만 네가 어떨른지?"
잔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귀밑까지 새빨개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푸른 눈 속을 들여다 보며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
데보 남작은 워낙 귀족 태생이어서 혁명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의지가 약한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결점이기도 했다. 남작이 잔을 위해서 새로 만들게 한 배의 기도식이 있던 날이었다. 자작은 몰라볼 만큼 훌륭한 복장을 차리고 왔다. 몸에 착 붙은 프록 코트에 가슴에는 레이스 장식이 보이고 에나멜 장화를 신은 그 모습은 참으로 당당한 귀족이었다. 로잘리까지도 황홀한 듯 그 자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
부부와 젊은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해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꽃다발로 장식한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돛과 줄에 매달아 놓은 기다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윽고 성가를 부른 뒤 사제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았다. 잔은 자작이 자기 손에 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리고 차츰 세게 잔의 손을 죄어 왔다. 자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속삭였다.
"잔은 당신만 좋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약혼식이 되는 겁니다"
잔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 '네'하고 말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배에 성수를 뿌리고 있던 사제는 두 사람의 손가락 위에도 성수를 몇 방울 떨어뜨려 주었다. 짧은 약혼 기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하고 코르시카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결혼 첫날 밤 무참히도 무너져 버린 환멸 속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망한 잔의 푸념은 그 후로도 내내 몸에 붙어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이것이, 그래, 그이가 말하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구나? 이것이! 아니 이것이!"
남편 줄리앙은 호텔 주인이나 하인 마차꾼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상인들을 상대로 항상 다투었다. 그리고 다만 얼마라도 값을 깎게 되면 손을 비비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난, 도둑맞는 게 싫단 말이야"
계산서가 올 때마다 잔은 몸서리나는 것을 느꼈다. 일일이 말썽을 부리면서 에누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하인들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귀밑까지 화끈해졌다. 호텔에 들어서서 점심을 마치고 나면 줄리앙은 잔을 껴안고 귓전에 속삭였다.
"어때, 잠깐 쉬지 않겠어?"
"난, 지금 별로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 거야 알겠어?"
잔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잔은 경멸하다시피 남편을 쳐다보았다. 잔은 줄리앙을 외면하였다.
"호텔 것들이 뭐라던 그까짓 것 문제삼지 않아"
줄리앙에게는 수치심이라는 섬세한 신경이 전혀 없었다. 잔은 두 인간이 진정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융합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잔은 또한 남편의 그 부단한 욕망에서 무언지 야수적인 심한 오욕 이외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잔의 여성으로서의 감각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것이다. 그런데 코르시카 깊숙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따가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샘터로 나섰다. 융단을 빽빽하게 깔아 놓은 것 같은 이끼 위에 무릎을
꿇은 잔이 물의 싸늘한 맛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이 허리를 끌어안고 나무통 끝으로 흐르는 물을 가로채려 했다. 잔은 한사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며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실낱 같은 물줄기가 꺼졌다가 맞히곤 하면서 얼굴과 목과 옷, 손에 물이 튀고 두 사람의 머리에서 진주처럼 빛났다. 그러다가 뜨거운 키스 시간이 물줄기와 함께 흘렀다. 잔은 갑자기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사랑의 영감을 느꼈다. 심장은 뛰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 눈이 눈물에 젖은 잔은 나직이 남편에게 속삭였다.
"줄리앙!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소리를 내어 즐겁게 웃으면서 빨갛게 물든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이후의 여행은 참으로 꿈과 같았다. 그칠 줄 모르는 환희의 연속이었다. 잔의 눈에는 오직 줄리앙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찬란한 남국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노르망디는 벌써 가을이었다. 노르망디의 가을은 하염없이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은 몹시 지쳤다. 즐거운 추억에 넘치는 이 시골의 풍물이 자취도 없이 퇴색해 보였다. 춥고 습기 찬 나날이 어제와 똑같은 단조로움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줄리앙은 어느새 아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기 역을 끝마친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 일에 마음을 쓰는 기색도 없고 모든 사랑의 흔적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방을 찾아드는 밤도 드물어지고 그는 재산의 관리와 살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일꾼처럼 차리고 있어 약혼 시절의 고상한 태도를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겨울이 닥쳐 왔다. 잔의 양친은 정초에 루앙으로 옮겨 갔다. 줄리앙은 극도로 인색한 본성을 나타내어 하인들의 식량에 이르기까지 엄밀히 제한을 했다. 잔이 매일 아침 빵집에 주문하던 가레트를 금하고 보통 빵으로 바꿨다. 잔은 말다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바늘 끝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줄리앙은 하인들 급료나 그 밖의 어떠한 지출에서 얼마씩 돈을 뗄 때마다 그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싱글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거든 "
쾌활하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던 로잘리도 달라졌다. 새빨갛던 두 볼이 혈색을 잃고 거북한 듯이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고서 "너, 어디 아프니?" 하고 잔이 물으면 으레, "아녜요. 부인"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로잘리는 노르망디 태생으로 잔의 젖동생이기 때문에 다른 하인들과는 좀달리 대우받고 있었다. 정월도 다 갈 무렵에 눈이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들 전체가 눈에 덮이고 모든 나무는 다 얼어 붙었다. 어느 날, 점점 더 변화가 심해진 로잘리가 몹시 대견스럽게 잠자리를 보고
있는 동안 잔은 난로 옆에서 발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무척 괴로운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니?"
잔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아녜요. 부인"
로잘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심한 신음 소리로 변했다. 잔은 겁이 났다. 창백한 얼굴, 핏기 어린 흐릿한 눈, 로잘리는 두 다리를 뻗고서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러니, 로잘리 웬일야?"
로잘리는 말 한 마디 없이 미칠 것 같은 눈으로 잔을 쳐다보며 무서운 고통에 찢기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을 주고는 이를 깨물고 비명을 죽이면서 뒤로 미끄러져 굴렀다. 그러자 아래 옷으로 무엇인지 움직여 보였다. 곧 거기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물결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목을 눌러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제 아기 울음 소리로 변했다. 가냘프고 고뇌에 찬 호소의 소리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 얼굴을 내놓은 인간의 최초의 호소였다. 줄리앙은 몹시 격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저 계집애를 어떻게 할 셈이야? 애비 없는 자식 따위를 집에 둘 순 없어"
"그렇지만 여보, 어디, 맡기기라도 하면..."
"돈은 누가 치르고? 당신이 ?"
"그야 애 아버지가 내겠지요. 그 사람이 로잘리와 결혼하면 되잖아요?"
"애비라고? 당신은 그게 누군지 알고 있나? 알 까닭이 없지"
"하지만 저 애를 저대로 내버려둘 순 없어요. 그건 비겁하잖아요? 이름을 물어 봐서 내가 그 남자를 만나겠어요"
"흥 남자 이름을 대줄 게 뭐야 그리고 만일 사내가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애비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있는 저런 여자를 그냥 여기 두어서는 안 돼. 얼마쯤 돈을 줘서 내쫓아야 해"
잔은 단호히 반대했다.
"안 돼요. 그것만은 안 돼요. 저 애는 내 젖동생이에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걸요. 우리집에서 쫓아 내다니, 안 될 말이에요. 정 그렇다면 내가 애를 키우지"
줄리앙은 빨끈해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쳤나?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는 노발대발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날 오후 잔은 산파 집을 찾아 나갔다. 로잘리는 잔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담요 밑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잔이 키스하려 할 때 절망적으로 온 몸을 떨며 로잘리는 얼굴을 피하며 거절했다. 잔은 어린애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한편 줄리앙은 아내에게 거의 말 한 마디 없이 지냈다. 이 주일 후에 로잘리는 일어나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잔은 어느 날 아침 로잘리의 두 손을 꼭 쥐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 로잘리, 바른 대로 얘기해 줘. 저 앤 누구 애지?"
로잘리는 또 다시 무서운 절망에 사로잡혀 주인의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기어이 손은 뿌리치고 미친 사람처럼 달아나 버렸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이 추운 밤이었다. 잔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이불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고 심장은 쿵쿵 울리다가 가끔 멈추는 것 같기도 했다. 별안간 두려움에 잔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로잘리를 부르는 종을 눌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잘리는 오지 않았다. 잔은 정신 없이 맨발로 계단 쪽으로 뛰어가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갔다. 겨우 문을 찾아서 열었다.
"로잘리!"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부딪쳤다.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보니 잠자리는 비어 있었다. 싸늘한 채였다. 당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잔은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면서 계단을 내려와 줄리앙을 깨우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꺼져가는 난로 불빛에 잔의 눈에 비친 것은 남편의 머리와 나란히 베개 위에 얹힌 로잘리의 머리였다. 잔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잔은 우뚝 멈췄다. 그러나 금새 돌아서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뒤에서
다급하게 잔을 부르는 줄리앙의 소리가 울렸다. 잔은 방에서 나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남편의 거짓말을 듣기가 죽기보다도 무서웠다. 잔은 도망쳐 버리고 싶은 격한 생각에 사로잡혀 속옷 바람으로 집을 나섰다.무릎까지 올라오는 눈 속을 절망적으로 달려 갔다. 오랜 실신 상태에서 깨어나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자신으로 돌아간 잔은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데 따라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루앙에서 달려온 남작 부부에게 잔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노기에 불타는 남작은 당장 줄리앙에게로
뛰어가서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줄리앙은 신에게 맹세하면서 부인했다.
"대관절 무슨 증거가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잔은 열병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겁니다"
줄리앙은 오히려 격렬하게 화를 내며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남작은 어리둥절했다. 잔은 남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잔은 로잘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으나 남작이 그것을 거절했다. 마음이 산란할 때에 의사가 들어왔다. 잔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로잘리를 만나겠다고 계속 반복했다.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시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 임신 중이니까요"
잔의 손을 잡고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멍한 표정으로 잔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뱃속에 애가 살고 있다. 그것이 줄리앙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잔은 마침내 사제를 오게 하고 그 자리에 로잘리도 나오게 했다. 남작에게 떼밀려 로잘리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잔은 홑이불처럼 창백해져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내가 느닷없이 방에 들어갔을 때 줄리앙의 잠자리에 있었던 건 너지? 로잘리!"
"네, 부인"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처음 여기서 식사를 하시던 날 제 방으로 오셨습니다. 다락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럼 네 아인... 그 사람 거야?"
"네, 부인"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언제부터 또 시작했니?"
"오시던 그 날 밤부터..."
말 한마디한마디가 잔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맥이 풀리고 무한한 절망감이 전신을 감돌았다. 그 이상 듣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나가, 어서 나가!"
잔은 소리쳤다. 남작이 다시 로잘리의 어깨를 붙들고 문에서 끌고 나가 짐짝처럼 마루에 떼밀어 버렸다. 남작이 얼굴이 파래져서 자리로 돌아오자 사제가 말했다.
"참 야단입니다. 이 고장의 여자들이 다 저 모양이거든요"
"아니, 용서 못할 인간은 줄리앙이죠. 더러운 녀석! 제 딸을 데리고 가겠어요"
"좀 참으십시오, 남작님. 그도 그저 예사로운 일을 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남작님 자신만 하더라도 생각해 보시면 아실 텐데요. 하하하..."
남작은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울고 있던 잔의 얼굴에는 미소의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사제는 좋은 기회라는 듯이 말했다.
"부인 항상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부인에게는 크나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신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큰 행복으로 이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부인은 장차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애가 부인의 위안이 될 것입니다. 잔 부인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봐서도 줄리앙 씨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어린애는 두 분 사이를 맺은 인연의 실마리니까요"
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작은 2만 프랑에 상당하는 농장을 붙여서 사제의 주선으로 다른 남자와 로잘리를 결혼시켰다. 줄리앙은 펄펄 뛰며 아내가 상속받아야 할 재산이라고 주장했으나 남작도 잔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은 모든 것을 체념한 가운데 임신 기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빨리 7월 말에 사내 아이를 낳았다. 무서운 고통 끝에 인생의 목표를 잃고 있던 잔은 갓난아이의 가냘픈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환희의 섬광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는 잔의 열광적인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남작 부부도 좋아서 야단이었으나 이기적인 줄리앙은 자신의 지배적인 권위를 침범하는 어린애의 존재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줄리앙은 얼마 전부터 근처에 사는 푸르빌 백작 집에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얼굴이 희고 깊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백작은 벌건 턱수염을 기다랗게 기르고 거선처럼 거대한 남자로 사냥에 미친 사람이었다. 잔은 남편을 따라 이 부부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루이 13세 양식인 굉장한 저택은 계곡의 경사진 곳에 있었고 한쪽 돌담이 전부 커다란 연못 속에 들어 있었다. 돌층계 아래에는 배가 네 척 매달려
있었다. 백작은 그 못에서 오리를 잡기도 하고 고기를 낚기도 했다. 잔은, 거칠기는 하지만 호인인 이 곰 같은 거인에게 호감을 가졌다. 백작은 레페플에 오면 잔의 손에서 폴을 받아 안고, 털이 난 큼직한 손으로 어린애를 잘 다루었다. 수염 끝으로 어린애 코를 간지럽히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항상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편 줄리앙은 햑혼 시절처럼 말쑥하고 단정하며 매혹적인 미남이 되었다. 그 눈에는 다시 애무하는 듯한 빛이 돌았다. 3월이 되자 질베르트 백작 부인의 제안으로 넷이서
가끔 먼 곳까지 승마를 했다. 백작 부인과 줄리앙이 앞서고 잔은 백작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속삭이다가 별안간 큰 소리로 웃어대기도 하고 의미 심장한 눈초리로 은근히 서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채찍질을 하고 달리는 것이었다.
|
|
독서실 → 외국소설
|
|
|
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2부 기묘한 천직 - 4
4
호리웰의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느티나무 그늘이 길다랗게 드리워져있었지만, 북극의 6월의 석양은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다. 일몰이 늦고 금방 또 아침이 되기 때문에 오로라는 푸른 하늘에 아주 잠깐 동안 번쩍이면서 그 모습을 나타낼 뿐이었다. 프랜치스는 '철학 연구회'에 선출된 후 로렌스 허드슨, 안셀모 밀리와 함께 공동으로 천장이 높은 작은 공부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열어 놓은 창가에 앉아 비통하리만큼 쓸쓸한 기분으로 시시각각 변해 가는 아름다운 전망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눈앞에는 1909년에 아치볼드
프레이저 경의 성으로 세워졌다가 지금은 카톨릭 중학교가 된 장대한 화강암 건물이 솟아 있었다. 그 건물의 오른쪽 모퉁이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성당이 있고, 역사적으로 이름높은 커다란 회랑에 의하여 도서관으로 통하는 그곳은 네모진 잔디밭으로 에워싸여 있다. 그 건너편에는 테니스와 핸드볼 코트 등 운동장이 있고, 또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스틴챠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강기슭의 넓은 목장에는 뿔이 없는 폴드 앙가스 종의 검은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떡갈나무와 참나무 숲 속에는 양치기의 오두막집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배경으로 파랗게 톱니처럼 솟아 있는 그랜피언의 산들이 멀리 바라다 보였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눈보라가 치던 그날 두운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던 일, 미지의 세계를 앞에 놓고 불안에 떨던 신입생 시절, 그리고 교장인 하미슈 마그냅 신부 앞에서 면접 시험을 치르던 일 등이 바로 어제의 일인 것 같았다. 가벨로호 제도의 명문가문인 마그냅의 사촌인 라스티 맥(녹슨 또는 침침한 색이라는 뜻으로 마그냅 신부의 별명)이 격자무늬의 두건을 쓰고 책상 건너편에 몸을 구부리고 곱슬곱슬한 붉은 눈썹
아래서 오그라들 것 같은 눈으로 힐끔 쳐다보았을 때의 일은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그래, 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는......아직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못해! 아일랜드 프링(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 추는 활발한 춤)도 추지 못하는가?"
"네!"
"뭐라고, 치셤이란 훌륭한 이름을 가지고서도......"
"죄송합니다."
"음, 그럼 넌 재주를 못 부리는 원숭이란 말이지?"
"네, 그렇지만 단지......"하고 떨면서 "낚시질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구?" 그는 천천히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다면 우린 친구가 될 것 같군. 치셤이라든가 마그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함께 낚시질도 했고 그리고 싸움도 했었지. 너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말이야. 돌아가도 좋다, 매맞기 전에."
이것이 모두 어제의 일같이 생각되는데 벌써 1학기만 지나면 졸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다시 분수대 옆의 자갈길을 왔다갔다하는 몇몇의 그룹에 쏠렸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대부분 이곳을 졸업하면 스페인의 산 모랄레스 신학교로 갈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같은 방을 쓰는 친구도 둘이나 있다. 안셀모는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한 손을 정답게 친구의 팔에 걸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자꾸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프레이저 특별 장학금을 탄 사람다운 자신만만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
뒤에서 또 다른 학생들에게 에워싸여 걷고 있는 사람은 키가 크고 바싹 마른 얼굴색이 까만 타란트 신부였다.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비꼬기를 잘하고 고상한 성품이긴 해도 자기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다. 그 젊은 신부의 모습을 본 순간 프랜치스의 표정은 이상하리만큼 굳어져 버렸다. 그는 창틀에 올려놓은 노트로 시선을 옮겨 펜을 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일기는 타란트 신부로부터 벌로써 과해진 것이었다. 그는 훤칠한 이마에도 잘 생긴 볼에도 아니 깊숙한 맑은 갈색의 눈에도 활기가 넘쳤고, 열 여덟의 청년으로서 갖추어야 할 튼튼하고
건강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자연스런 변화를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다듬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1887년 6월 14일,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을 이 혐오스러운 일기장에 기록해 타란트 신부에게 복수를 해야 내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저녁 기도 전의 이 값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지만-어차피 안셀모가 나도 학생의 본분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핸드볼을 권유하러 올 것이 틀림없겠지만-오늘은 목요일, 예수 승천 축일, 맑음. 라스티 맥과의 기억해 두어야 할 만한 모험이 행해졌다라고만 써 두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랄한 부학장은 내 집안의 좋은 점, 양심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강의 후에 이렇게
말했다.
"치셤, 앞으로 일기를 써라. 물론 발표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여느 때처럼 조소를 섞어서
"양심의 규명을 위해서 말이다. 치셤, 넌 지나칠 만큼 정신적인 고집으로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 마음속을 털어놓고 보면......그럴 수만 있다면......조금은 그것을 고칠 수가 있을는지 모른다."
신부의 명령에 나는 얼굴이 화끈해지고 화가 났다.
"말씀하신 대로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타란트 선생님?"
신부는 검고 깡마른 체구에다 코끝은 송곳처럼 뾰족했다. 양손을 수단 소매 속에 감추고 나 같은 건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에 대한 혐오를 감추려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엄격한 언동을 함으로써 무자비할 만큼 자기를 단련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막연히 "마음가짐에 순종성이 없어......" 하고 말해 놓고는 나가 버렸다. 2년 전에 여기에 부임한 이래 타란트 신부의 주위에는 안셀모를 중심으로 한 많은 숭배자가 있었는데 유독 나만은
그를 모범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혹독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자만심일까. '유일하며 진실한 사도적 종교'의 강의에 대해서 내가 말한 것을 그는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신부님, 종파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니까 하느님도 종파따위를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에 모두 어안이벙벙해서 잠자코 있는 가운데 그는 당황한 것같았으나 냉정하게 말했다.
"치셤, 너는 굉장한 이단자가 될 소질이 있는 것 같구나."
적어도 나에게는 결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다는 이 한 가지 점에대해서만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할까. 아직 열 여덟의 애송이인 주제에 나는 이렇게 오만불손한 글을 쓰고있다. 이것도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허세일는지 모른다. 하여간 여러가지 일이 괴롭다. 첫째 타인카슬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 방학이래야 겨우 4주간밖에 되지 않으니, 타인카슬과 멀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것이다 .매년 휴가가 짧은 것이 호리웰의 유일하고 엄격한 규칙이다. 신앙심을 굳건히 하는 데는 좋을는지 모르지만 너무 마음을
조리게 했다. 네드 아저씨는 나에게 한 번도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 호리웰에 2년 있는 동아 아저씨가 보낸 것이라곤 뜻밖의 선물로 먹을 것을 보내 준 것뿐이었다. 여기에 온 첫 번째 겨울, 파지장에서 보내 준 엄청나게 큰 밀크 부대와 작년 봄 보내 준 바나나다. 그 바나나는 2분의 1이 너무 익어 그것을 먹고서 신부님과 신학생들이 집단 설사를 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러므로 네드 아저씨로부터 소식이 없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게 없었고, 폴리 아주머니의 편지는 나를 근심스럽게 했다. 언제나 알려 주시는 아주머니 특유의 이웃 소식이 요즈음에는
주로 날씨가 어쩌고 하는 무미건조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그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노라는 아무 소식도 전해 주지 않는다. 그녀는 일년에 한 번 바닷가에서 단 몇 분만에 써 버린 것 같은 그림엽서를 보낼 뿐이다. '스카바라 부두에서 바라본 석양빛'이라는 최후의 그림엽서가 온 것은 이미 수세기가 지난 것 같은 느낌이고, 내가 보낸 두 통의 편지에 대하여는 '호이트리 만의 달빛' 정도의 엽서라도 보낼 만 할 텐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노라! 나는 그 사과 창고에서의 이브와 같은 너의 행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다시 고스포스까지 함께 걸을 기회는 있을 테지. 네가 어른이 되는 것을-나는 숨을 죽이고 은밀히 관찰해 왔다. 나는 너의 약삭빠르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담하고 민감한, 어떻게 보면 건방져 보이기도 하는 노라의 티없이 맑은 명랑함과 천진난만함, 어느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있어도 나는 폴리 아주머니와 나의 흉내를 내면서 가냘픈 팔을 허리에 대고 파란 눈을 반짝이면서 결국엔 참을 수가 없어서 춤을 추어 버리던 너의 매혹적인 빈틈없는
작은 얼굴이 보인다. 너의 모든 것은-가냘픈 몸을 흔들면서 결국에는 큰 소리로 울어 버리는 신경질마저도-어쩌면 그렇게 인간다우며 생동적인 것일까. 결점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마음이 따스하고 정직한 너는 무의식적으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에도 바로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힌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 커다랗게 눈을 뜨고 너의 일을 생각한다. 그 눈 속의 표정이나 작고 둥글한 유방, 그리고 슬프기만 한 늑골의 언저리 등을......
프랜치스는 여기까지 쓰고 나서 문득 펜을 놓고 불현듯 얼굴이 빨개지며 마지막에 쓴 것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백은 계속되었다.
둘째로 나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신분에 적합한-이것도 타란트 신부는 동의할 것이다-교육을 받고 있다. 호리웰 학교 생활도 이제 한 학기 남았다. 싫어도 역시 유니온 주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젠 더 이상 네드 아저씨-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폴리 아주머니에게(최근에 우연히 안 일이지만 폴리 아주머니는 어쩌면 그렇게 훌륭하실까! 아주머니는 약간의 수입 가운데서 나의 수업료를 지불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담을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 야심을
가지고 있다. 폴리 아주머니에 대한 애정과 넘치는 감사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에 보답해야 한다고 나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최대 희망은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처럼 졸업생의 3분의 2개 성직자가 되도록 되어 있는 데서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이런 경우에 갈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타란트 신부는 차치하고 마그냅 신부는 나 같은 사람도 좋은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그 신부님의 기민함과 친구처럼 사람을 대하는 친근함, 그리고 강한 인내심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신학교의 학장으로서 하느님의 소명에 대하여 그는 뭔가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하긴 나는 본래 성질이 격하기 쉽고 급한 데가 있다. 더구나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자란 생활 환경이 나에게 종파분립적인 관념을 붙여 버린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학교 도서관에서 빠지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내 생애를 하느님께 바친 청년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릴적부터 입으로 기도문을 외우고, 숲 속에서 제단만들기를 하였고, 혹은 '테레사나 아나벨도 가까이 오지 말라. 나는 그대들과 한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는 식으로 온 마을의 축제에 모여드는 작은 여자아이들을 타박하거나 자기 혼자만이 큰 은총이라도 받은 듯이 행동하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러나 때대로 갑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그 순간적인 감정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혼자서 두운 역을 향해 갈 때라든가, 밤중에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라든가, 또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기침을 하면서 조용조용히 속삭이며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호젓하게 혼자 남아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 말이다. 그것은 묘한 불안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전부터 흔히 있었던 그 혐오스러운
감상적인 무아의 경지가 아니고 오히려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는 그런 감미로움이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수련사장의 광분한 얼굴만 보면 왜 구토증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것을 쓰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 나는 괴롭다 .나 이외에 아무도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기 내부의 불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도 이렇게 일기장에 적어 버리고 나면 타 버린 재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어져 버린다. 그래도 나는 적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싫건 좋건 간에 하느님께 소속된다. 그리고 또 이 우주의 정연하게 예정된 무자비한 운행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이 갑자기 암흑 가운데서 번쩍하고 번득이는 것을 나는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다니엘 그레니의 그 그리운, 그 미치광이 '다니엘 성자'의 영향이라고 나는 느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외할아버지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제기랄 것-타란트 신부가 말한 대로이다-나는 나의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있다. 만일 나에게 그 만큼의 의지가 있다면 왜 하느님을 대신하여 행하여야 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 저 냉담하고 무엄한 군중을, 오늘날
온 세계에 만연되고 있는 유물주의에 물든 무지한 군중들을 인도하지 못하는가......요컨대 사제가 되지 못하는가. 아니 정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모두 노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라에 대한 나의 아름다운 정감으로 나의 마음은 터져 버릴 것 같다. 성모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마저도 그 귀여운 그녀의 얼굴이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운 노라! 내가 산 모랄레스 행의 성스러운 급행 열차의 차표를 사지 않는 참다운 이유는 너 때문인 것이다!
그는 펜을 놓고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채 방황했다. 이마는 약간 찌푸렸으나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침착하려 했다.
라스티 맥과의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아무래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오늘은 감사 휴일(학과나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미사에 참가하는 날)이었으므로 오전에는 자유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수위실 앞에서 스틴챠 강에서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돌아오는 학장 선생님과 마주쳤다. 학장은 걸음을 멈추고 작달막한 몸집을 낚싯대에 기대면서 타는 듯한 빨간 머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아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라스티 맥을 아주 좋아했다. 그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다같이 순수한
스코틀랜드인 기질로 낚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스코틀랜드인은 전체 학교에서도 두 사람뿐이다. 프레이저 부인이 스틴챠 강 연안의 소유지를 학교에 기증했을 때에도 라스티는 그 자리에서 이 강가를 자기의 전용으로 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다음날 호리웰 학교 신문에 '나의 강에는 얼간이 낚시꾼의 낚싯줄 한 가닥도 드리지 못할지니......'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감탄조의 노래가 실려 있었는데, 이 노래야말로 학장 신부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낚시를 좋아했다. 학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프레이저
저택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막역한 친구인 장로교파의 질리 씨가 성당 유리창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흥분을 억제하는 듯한 소리로 "마그냅 신부! 로카바의 강가에 많은 낚시꾼들이 모였어요" 하고 급보를 전한 것이다. 그때만큼 미사가 빨리 끝난 적은 없었다. 프레이저 부인을 비롯하여 어안이벙벙해진 일동은 대단한 스피드로 축복을 받았는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에는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하는 악마와 같은 시커먼 것이 제의실에서 날아가듯 뛰어나갔다. 오늘 아침은 그 신부가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마리도 없어. 손님을 위해서 한 마리라도 잡혔으면 했는데 말이야."
오늘 교구의 주교와 이번에 퇴직하는 산 모랄레스 신학교의 학장과 오찬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브 강이라면 한 마리쯤은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 하고 내가 말했다.
"이 강에는 전혀 없어. 피라미 한 마리도 없어......아침 여섯 시부터 한건데."
"큰 것도 있습니다."
"거짓말 작작 하라고."
"아닙니다. 어제 뚝 밑에서 보았는걸요. 물론 잡으려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빨간 눈썹 밑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고집쟁이야, 치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녀오렴."
그는 나에게 낚싯대를 주고는 가 버렸다. 나는 마침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소리에 가슴을 설레면서 그리브 강으로 내려갔다. 데그스 실 끝에 달린 낚싯바늘은 '실버 닥터'라는 것으로, 강에 꼭 어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거의 한 시간쯤 기다렸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건너편 그늘진 곳에서 까만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것을 본 듯싶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문득 조심성 있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외출용 까만 수단을 입고 장갑에 실크 해트를 쓴 라스티 맥이 서 있었다. 두운 역으로
손님을 맞으러 가다가 애를 태우고 있는 나를 놀려 주려고 온 것이다. "야아, 큰놈인 것 같다, 치셤" 하고 그는 히죽 웃었다. "그게 언제나 골치야, 피라미일 게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30야드 전방에 낚시를 던져 넣었다. 낚싯바늘은 뚝 가까이 소용돌이의 거품이 이는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손에 감촉을 느끼고 지체없이 낚싯대를 잡아챘다. "잡았구나!" 하고 라스티가 큰 소리를 쳤다. 동시에 연어를 4피트나 높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으나 바로 그때 그가 재빠르게 낚싯대를 잡아 주었다. 그는 내 옆에 서서 몸을 꼿꼿하게 젖히고 "야아, 대단한걸!" 하고 놀란 소리로 말했다. 그 연어는 이 스틴챠 강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어장인 티드사이드에서도 본 일이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머리 쪽부터 올리는 거야" 하고 라스티가 소리쳤다. "그래, 옳지, 아가미를 잡아라."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횡무진으로 설쳐대던 연어가 강 아래쪽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정신없이 따라갔다. 그 뒤를 라스티가 따랐다.
스틴챠 강도 호리웰까지 오면 티드 강과는 달리 다갈색의 분류를 이루고, 소나무나 협곡 사이를 꾸불꾸불 돌아가는가 하면 미끈미끈한 암석이나 높은 낭떠러지와 부딪쳐 물안개를 일으키고 있었다. 10여 분 후에는 학장도 나도 이미 반 마일이나 강 아래까지 와 버렸고 이미 숨이 턱까지 찼다. 그러나 아직 두 사람은 연어를 쫓고 있었다. "치셤, 잡아라, 잡아!" 라스티는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 있었다. "아니야, 아냐. 그렇게 깊이 들어가면 안 돼!" 그렇지만 연어는 이미 깊숙한 데로 들어가 버렸고,
강바닥에 있는 너저분한 나무뿌리에 실이 엉켜 아무리 해도 빠지지를 않았다. "늦춰라, 늦춰! 돌로 칠 테니 약간 늦춰." 학장은 잠시도 가만있을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숨을 죽이고 실이 끊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너무나 긴장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숨어 있던 연어가 다시 요동을 치며 달아나기 시작하자 낚싯줄이 풀리며 학장도 나도 뛰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두운 마을의 건너편의 얕은 곳까지 왔을 때 연어도 드디어 패배의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몇 번 놓칠 뻔했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연어를 쫓았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런 만큼 완전히 지쳐 버렸다. 라스티가 헐떡거리면서 다시 고함을 질렀다. "저기다, 저기. 모래 위야!" 그는 이제 완전히 목이 쉬어 있었다. "작살이 없으니까 조심해라. 이 이상 끌고 가면 줄이 끊긴단 말이다. 조심하라고." 나도 입안이 바싹바싹 탔다. 나는 헐떡이던 숨을 가다듬고 연어의 옆에 섰다. 얌전한 것 같던 연어가 갑자기 미친 듯이 최후의 발악을 했다 .선생은 앗!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저런, 저런......이번에 놓치면 마지막이야!" 얕은 물에서 보니 연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만일 또 놓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는 연어를 뒤에서 몰아 겨우 모래사장 위로 밀어 올렸다. 숨을 죽인 학장이 손으로 연어의 아가미를 붙잡고는 굉장히 큰 연어를 풀밭 위에 내동댕이쳤다. 파란 풀밭 위에서 보니 40파운드 이상 될 것 같은 연어는 굉장했다. 활처럼 굽은 등에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바닷진드기가 붙어 있었다. "최고다, 최고야!" 학장은 우쭐해져서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판댕고(스페인 무용)를 추고 있었다. "42파운드가 확실해......기록을 해 두도록 하자." 학장은 나를 얼싸안고 "이봐, 치셤, 넌 훌륭한 낚시꾼이다!" 하고 말했다. 마침 그때 강 건너 철로에서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라스티는 숨을 몰아쉬며 야단났다는 얼굴이 되었다.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기관차의 연기와 두운 역의 빨간 신호기가 급히 아래로 내려졌다. 겨우 정신을 되찾은 학장은 바지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이거 큰일났구나, 치셤!" 그 소리는 이미 호리웰의 학장의 것이었다. "저건 주교가 타고 있는 기차야." 궁지에 빠진 것은 명백했다. 고귀한 손님을 5분 안에 마중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역까지 가는 데는 5마일의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더구나 그 역은 스틴챠 강을 경계로 하여 바로 눈앞의 논밭 건너에 보이는 것이다. 선생은 결심을 한 듯이 천천히 말했다.
"저 놈을 가지고 가서 점심에 통째로 구워 내라고 해라. 자, 빨리 가거라. 그리고 롯의 처와 소금 기둥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돼(롯의 처가 여호와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는데도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하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비유).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이 첫 번째로 구부러진 곳에 와선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관목 사이에서 돌아다보았다. 라스티 신부는 이미 벌거벗고 예복을 둘둘 말고 있었다. 그리고 실크 해트를 단단히 쓰고 옷을 마치 목장(끝이 구부러진 지팡이. 주교의 표시)처럼 쳐들고 벌거벗은 채 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철벅거리고 걸어갔으나 그러는 동안에 물이 목까지 차는가 싶었는데 벌써 건너편 언덕에 닿았다. 그러자 바로 황급히 예복을 입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기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용감하게 달려갔다. 나는 배꼽을 움켜쥐고 풀밭 위를 뒹굴었다. 내가 감동한 것은 사람도 없는데 단정히 머리 위에 쓴 실크 해트의 모양 따위가 아니다-그것도 영원히 잊을 수 없지만-그것보다도 그 갑작스러운 행위의 배후에 숨어 있는 대담한 배짱이다. 그런 학장 신부님이라면 인간의 알몸을 보고 질겁을 하지 않고 여체를 보고도 너털웃음을 웃을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을 했다.
문 밖의 발소리에 프랜치스는 쓰던 것을 멈추었다. 방문이 열리고 허드슨과 안셀모 밀리가 들어왔다. 가무스름한 피부에 온순한 허드슨은 의자에 앉아서 구두를 벗기 시작했고, 안셀모는 저녁때 온 우편물을 손에 들고 있었다. "편지야, 프랜치스" 하고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리는 하얀 얼굴에 언제나 혈색이 좋은 아름다운 청년이다. 눈은 맑게 빛났고 건강했다. 무슨 일에나 열심이고 따라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그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확실히 학교 안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성적은 뛰어나게 우수하다 할 수는 없었으나 어느 교수에게나 호감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언제나 우등생 명단에 들어 있었다. 크리켓이나 테니스나 그다지 힘들지 않은 스포츠는 무엇이나 잘했고, 사람을 조직하는 특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표 수집을 비롯하여 철학 연구회까지 많은 그룹을 능숙하게 움직였고, 의결에 필요한 정원수라든가 의사록이라든가 의장 등등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교묘히 구사할 줄도 알았다. 새로운 그룹이 생길 때마다 안셀모의 의견을 반드시 듣게 마련인데, 결국은 자연히 그가 회장이 되곤 했다. 성직자의
생활을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그의 말투에는 어딘지 과장된 감정도 엿보였으나 어쨌든 훌륭한 학생으로 그의 성공은 틀림없이 보장되는 듯했다 .다만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학장과 고독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그를 대단히 싫어한다는 것 외에 그는 교내에서 영웅적인 존재였으며, 그리고 그들로부터의 찬사를 사양하면서도 떳떳하게 받아들였다. 지금도 프랜치스에게 편지를 건네주면서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틀림없이 좋은 소식일 거야." 프랜치스는 편지를 재빨리 뜯어보았다. 날인도 '타인카슬
운하 가 유니온 주점 네드 바논 보냄'이라고 되어 있었고 편지 내용은 연필로 쓴 것이었다.
프랜치스, 너도 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도 잘 있다. 연필로 편지를 쓰는 것을 용서해 다오. 요즈음 집에 대단한 일이 생겼단다. 너에게 이러한 일을 알리는 것은 매우 유감이지만 이번 방학은 그곳에서 보내 주었으면 한다. 지난 여름방학이래 줄곧 만나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유감이고 또한 슬픈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참으로 이번만은 돌아와서는 안 되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너는 이런 말을 하여도 들어주리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번만은 그럴 수밖에 없으며 성모 마리아님이
증인이시다. 물론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별로 숨길 생각은 없다. 이것은 너에게는 아무 도움도 방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돈이나 누가 앓아 누운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다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나가고 모든 것이 잊혀질 수만 있었으면 하고 빌 따름이다. 그러니까 방학은 학교에서 보내도록 결심하기 바란다. 여분의 비용도 아저씨가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책도 사보고 그곳은 경치도 좋으니까 더구나 크리스마스에는 돌아올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다오. 아저씨는 개를 모두 팔아 버렸는데
이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길포일 아저씨가 여러 가지로 잘 돌봐 주고 있단다. 거기도 그다지 기후가 좋지 않을 듯싶으나 여기는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단다. 제발 프랜치스, 지금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묵고 있어서 네가 온다 해도 잘 곳도 없단다. 끝으로 한 번 더 말하지만 이번 방학만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라. 돌아오지 말고(여기에 점선이 이중으로 그어져 있었다). 오늘은 이만 쓴다. 안녕!
폴리 바논
프랜치스는 창가로 가서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문맥의 의도는 명백했으나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니?"
안셀모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프랜치스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를 몰라 침착하지 못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이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인데."
안셀모는 터벅터벅 다가와서 위로하는 얼굴을 하며 프랜치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봐, 자아" 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밤엔 핸드볼을 할 기분이 나지 않겠구나."
"으응" 하고 프랜치스는 중얼거렸다. "오늘밤은 참가하지 못하겠어."
"좋아, 좋아, 프랜치스."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뭔가 근심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오늘밤은 특히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기도하는 동안 프랜치스는 폴리 아주머니가 보낸 편지를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았다. 기도가 끝나자 그는 문득 라스티 맥에게 상의해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넓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학장실에 들어가 보니 학장은 타란트 신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프랜치스가 들어간 순간 이상하게 대화를 끊어 버린 것으로 보아 프랜치스는 두 사람이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직감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망설이는 시선을 라스티 맥에게 던졌다.
"손님이 계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죄송합니다."
"괜찮아, 치셤. 앉아라."
프랜치스는 나오려던 몸을 돌려 학장이 따뜻한 눈길로 가리키는 의자에 낮았다. 라스티는 짧고 굵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닳아빠진 마도로스 파이프에 담배를 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는 신부님 혼자 계신 줄 알고......"
왠지 학장은 그의 시선을 이상하게 피하는 것 같았다.
"타란트 신부가 계셔도 상관없지 않은가. 무슨 용무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른 구실도 생각이 나지 않아 프랜치스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편지가 왔습니다......집에서."
아까는 라스티 맥에게 폴리의 편지를 보여 줄 생각이었으나 타란트 신부의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방학 때는 학교에서 보내라는 겁니다."
"그래?"
내가 지나치게 과민한 탓일까. 두 사람이 재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 참 실망이 크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더구나 편지 내용이 마음에 걸립니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학장님께 여쭈어 보려고 왔습니다."
마그냅 신부는 낡아빠진 파이프를 만지작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그는 대개의 학생들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나 지금 자기 옆에 앉아 있는 학생은 자기의 마음에 불을 밝혀 줄 것 같은 섬세하고 아름답고, 더구나 완고하리만큼 정직한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실망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야, 프랜치스."
그 말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타란트 선생님이나 나도 실망할 일이 생겼단다. 스페인에 있는 신학교로 전근 명령을 받았단다. 나는 학장으로 신부는 부학장에 임명되었어."
프랜치스는 말이 막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산 모랄레스에 가는 것은 주교가 되기 위한 단계로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영전이었다. 그러나 학장은 조금도 기쁜 빛이 없었다. 프랜치스는 타란트 신부의 무표정한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떤 사람보다도 호리웰의 푸른 숲과 스틴챠 강을 진정으로 사랑해 온 학장으로서는 건조한 땅인 아라곤(스페인 동부 지방)의 평원은 뭐니뭐니해도 이방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라스티 맥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말이지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으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너는 너대로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겠지. 그러나 어쩌겠나.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한 이 징벌을 우리 두 사람 다같이 달게 받아들이세."
프랜치스는 혼란한 머릿속에서 적당한 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저는 다만......걱정이 되어 찾아뵈었습니다......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 하고 마그냅 신부는 말했다.
"타란트 선생, 어떻게 생각하시오." 타란트 신부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저의 경험으로는 복잡한 일은 당사자들이 처리하게 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은 말할 것이 없었다. 학장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에 스위치를 넣었다. 어둡던 서재가 갑자기 밝아졌다. 회견도 끝이라고 생각되었다. 프랜치스는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똑바로 섰으나 마음은 학장을 향해 말했다.
"신부님이 스페인으로 가시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도......아니, 저는 정말 섭섭합니다."
"거기에 가서 또 만나게 되겠지."
그 말에는 희망과 온화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프랜치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뚝 선 채로 복잡한 감정이 엇갈리는 눈길을 돌리다가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편지를 보았다. 약간 거리가 멀어 글씨는 잘 안 보였으나 편지 겉봉에 선명하게 잉크로 인쇄된 글씨가 보였다. 프랜치스는 얼른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성 도미니코 성당, 타인카슬'이라는 것밖에 읽지 못했다. 온몸이 떨렸다. 집에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로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신부들은
그가 편지를 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프랜치스는 이미 누가 반대할지라도 자기가 나아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