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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3호 - 2024.07.30 화요일(음력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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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최대의 영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이다.
- 골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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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에 만나는 우리말
지난주에 이어 여름철에 많이 쓰는 몇 단어를 더 보고자 한다. 다음은 여름휴가를 떠난 나여름 씨의 하루 이야기이다.
“나여름 씨는 바캉스를 떠났다. 그녀가 선택한 의상은 시원한 노슬리브와 핫팬츠 차림. 청결을 위해 디오더런트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워터파크에서 신나게 물놀이도 즐기고, 에이티브이를 타고 모래밭을 질주하기도 했다. 저녁에는 월풀에서 지친 몸을 리프레시했다.”
여기에는 어려운 말이 적지 않은데, 좀 더 쉽게 표현할 수는 없을까. 국립국어원의 다듬은 말에 따르면, ‘노슬리브, 핫팬츠’는 ‘민소매, 한뼘바지’이다(나 씨가 ‘시스루, 오프숄더’ 차림이었다면, ‘비침옷, 맨어깨’ 차림이 된다). ‘민소매’는 예전의 일본말 ‘(소데)나시’를 이겨 낸 말이기도 하다.
‘디오더런트’는 ‘체취 제거제’이며, ‘워터파크’는 말 그대로 ‘물놀이 공원’, 바퀴가 네 개 달린 오토바이인 ‘에이티브이(ATV)’는 ‘사륜 오토바이’, 그리고 ‘월풀’은 ‘공깃방울 욕조’, ‘리프레시’는 ‘재충전’이다. 이제 다듬은 말과 함께 나 씨의 하루를 다시 따라가 보자.
“나여름 씨는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녀가 선택한 의상은 시원한 민소매와 한뼘바지 차림. 청결을 위해 체취 제거제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물놀이 공원에서 신나게 물놀이도 즐기고, 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모래밭을 질주하기도 했다. 저녁에는 공깃방울 욕조에서 지친 몸을 재충전했다.”
서구 외래어ㆍ외국어에 짓눌린 우리말,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어 가볍게 해 주자. 교과서에서는 ‘물놀이 공원’이라고 애써 교육하는데, 학교 밖에서는 ‘워터파크’가 더 널리 쓰이는 게 우리말의 현실이다. 여름휴가 동안 이 주제로 자녀와 대화를 나누어 보면 어떨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이탈리아? 이태리?
리우올림픽 개막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시간으로 8월 6일 오전 8시부터 시작하는 리우올림픽 개막식에는 206개국에서 온 선수들이 자국의 국기를 앞세우고 입장을 하게 되는데, 국가 이름 중에는 바뀐 이름들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2008년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기로 선언한 ‘그루지야’는 국가의 대외적 명칭을 영어식 표기로 바꿈에 따라 국가 이름이 ‘조지아’로 바뀌었다. 또한 우리에게 ‘대만’으로 익숙한 ‘타이완’은 올림픽 개막식 입장 때 ‘타이완’의 이름으로 입장할 수 없고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의 이름으로 입장해야 한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대만은 자동 탈퇴하게 되었고 이후 ‘타이완’은 올림픽대회나 국제기구에 참가할 때 독자적인 국호를 쓰지 못하게 되어 국가 명칭을 ‘차이니스 타이베이’로 쓰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국제기구 행사 이외의 경우에는 ‘타이완’이라는 국가명을 사용하는데,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타이완’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며,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관용을 허용한다는 조항에 따라 ‘대만’으로 쓰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국가명의 경우 한자를 가지고 외국어의 음을 나타낸 말인 음역어(音譯語)를 사용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이탈리아’를 ‘이태리(伊太利)’,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스페인’을 ‘서반아(西班牙)’,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는 음역어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음역어는 로마자를 모를 때에 쓰던 표기 방법이기 때문에 요즘에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사이시옷 적는 법
사이시옷은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따라 적는다.
첫째, 사이시옷은 ‘촛불(초+불), 나뭇잎(나무+잎)’처럼 명사와 명사가 합쳐질 때만 쓸 수 있다. ‘해님’일까, ‘햇님’일까? ‘해’는 명사지만 ‘-님’은 접미사이므로 사이시옷이 나타날 환경이 아니다. ‘해님’이 맞다.
둘째, 사이시옷은 두 말 사이에서 소리가 덧나거나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변할 때만 쓸 수 있다. ‘위’와 ‘마을’이 합쳐지면 /ㄴ/이 덧나 [윈마을]이 된다. 그래서 ‘윗마을’로 적는 것이다. ‘위’와 ‘동네’가 합쳐질 때는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변해 [위똥네]가 된다. 그래서 ‘윗동네’로 적는 것이다. ‘위쪽, 위층’의 경우, 별다른 소리의 변화가 없으므로 사이시옷을 적을 수 없다. ‘윗쪽, 윗층’은 잘못이다. 이처럼 사이시옷은 소리와 직접 연관되어 있으므로 평소에 표준 발음을 잘 익혀 두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사이시옷은 두 말 가운데 순우리말이 하나 이상 있고 외래어가 없을 때에만 쓸 수 있다. ‘소수점(小數點)’은 [--쩜]으로 소리가 나므로 사이시옷을 쓸 만한 환경이지만 순전한 한자어이므로 사이시옷을 쓸 수 없다. ‘꼭짓점(--點)’은 [--쩜]으로 소리가 나고 ‘꼭지’가 순우리말이므로 사이시옷을 써야 한다. ‘만둣국’이나 ‘우윳빛’도 같은 이유로 사이시옷을 쓴다. ‘핑크빛(pink-)’도 뒷말이 된소리로 바뀌지만 ‘핑크’가 외래어이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곳간, 셋방, 숫자, 찻간, 툇간, 횟수’는 순전한 한자어이지만 예외적으로 사이시옷을 적도록 하고 있다. 예외는 이 6개에 한정되므로 ‘전세방’이나 ‘기차간’을 ‘*전셋방’이나 ‘*기찻간’으로 적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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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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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천상병
1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새 시인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주십시오. 이름은 조지훈, 김수영, 최계락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2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전세계보다
더 복잡하고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
지도 - 정지용
지리 교실전용지도는
다시 올아와 보는 미려한 칠월의 정원.
천도열도 부근 가장 짙푸른 곳은 진실한 바다보다 깊다.
한가운데 검푸른 점으로 뛰여들기가 얼마나 황홀한 해
학이냐 !
의자 우에서 따이빙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순간,
교원실의 칠월은 진실한 바다보담 적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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煙氣(연기) - 이해인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선수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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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노래 1 - 이해인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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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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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2 장 자유로 가는 길
2. 큰 신심
2) 덕산스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 보면 임제종을 창설한 임제스님과, 운문종, 법안종의 종조(宗祖)되는 덕산(德山)스님, 이 두 분 스님을 조사들 가운데 영웅이라고 하여 칭송하고 있습니다. 덕산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 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스님의 속성이 주(周) 씨이므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그 무렵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점심(點心)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떡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 하여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노파가 물었습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어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고 모로 외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떡장수 노파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방에 큰 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 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 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는 말을 들고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주금강은 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용담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용담스님 방에서 공부한 뒤에 자기방으로 돌아가려고 방문을 나섰다가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용담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 주는데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자마자 곧 용담스님이 촛불을 확 불어 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습니다. 그러고는 용담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말하였습니다.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과 같다.
모든 변론과 언설이 하도 뛰어나서 온 천하의 사람이 당할수 없다고 해도, 깨달은 경지에서 볼 때는 큰 허공 가운데 있는 조그만 터럭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깨친 것은 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한 것으로, 이 대도라는 것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수단을 다하는 재주가있다 하여도 그것은 큰 골짜기에 작은 물방울 하나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지식이 장한 줄 알았다가 바로 깨쳐 놓고 보니 자기야말로 진짜 마군이의 제자가 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덕산스님은 이렇게 깨치고 나서, 사람을 가르치는 데 누구든 어른거리면 무조건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부처님이 와도 때리고 조사가 와도 때리고 도둑이 와도 때리는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 주일마다 온 절안을 뒤져서 무슨 책이든 눈에 뛰기만 하면 모두 불에 넣어 버렸습니다. 이 덕산스님의 몽둥이 밑에서 무수한 도인이 나왔습니다. 천하에 유명한 설봉스님, 암두스님이 나왔으며, 운문스님의 운문종과 법안스님의 법안종이 또한 이 몽둥이 밑에서 나왔습니다. 이렇듯 자기개발이란 오직 마음을 닦아서 삼매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언어 문자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3) 임제스님
중국에서 선종이 천하를 풍미할 때 선종은 임제종, 조동종, 위앙종,운문종, 그리고 법안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임제종이 가장 융성했습니다. 임제종의 종주는 황벽스님의 제자인 임제스님으로, 일찌기 교학을 많이 배운 스님입니다. 스님은 교(敎)만으로는 부족하고 꼭 선(禪)을 해서 깨달아야겠다고 특별한 가르침을 배운 적도 없이, 나면서부터 아는생이지지(生而之知)로서, 당시의 천자인 선종(宣宗)을 두드려 팬 일이있는 걸출한 선승이었습니다. 이 스님 밑에서 한 삼년 열심히 공부를했습니다. 그 때에 황벽스님 회상에는 수자로 목주스님이 있었는데 임제스님을 격려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삼 년입니다."
"그러면 황벽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지 아니하였는가?"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에게 가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묻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스무대나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임제스님이 몸둥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스님이 물었습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 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여쭙자 황벽스님은 또 몽둥이로때렸습니다. 이와 같이 세번 가서 여쭙고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임제스님이 돌아와서 목주스님께 말했습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스님께 가서 문답케하셨으나 세번 여쭈어서 세번 다 몽둥이만 실컷 맞았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스님께 꼭 인사를 드리고 떠나라."
임제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법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 스님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 뵈오니 대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든가?"
"제가 세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 하고 여쭈었는데 세 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벽이 이렇게 노파심절(老婆心切)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스님이 그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습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대우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 오줌싸개 놈아!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보라!"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번 쥐어 박았습니다. 그러자 대우스님이 멱살 잡은 손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하직하고 황벽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노파심절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젓번에 일러주신 대로 대우스님께 갔다 옵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이 그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스님이 말씀했습니다.
"뭣이라고! 이 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둥이로 때려주리라."
그러자 임제스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습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스님의 뺨을 후려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미친 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그 뒤 임제스님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법하면서 누구든지 앞에 어른거리면 고함을 쳤습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법 쓰는것을 비유하여 '우뢰같이 고함친다(喝)'고 평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임제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제스님이 소리지르는 것(喝), 덕산스님과 황벽스님이 사람 때리는 것(棒), 이 이치를 바로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전에는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고 모로 외워도 소용없습니다. 지식으로는 박사의 박사를 더한다 해도 소용없으니, 오로지 불법은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절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다 개발하면 영원토록 대자유, 대자재한 절대적인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 반드시 무심삼매를 성취해야 되고, 이 무심삼매를 성취하려면 오직 마음을 닦아야지 지식과 언설로써는 절대로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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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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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누구와 이야기할 것인가
옛날 어떤 현인은 친구와 대화를 나눈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하룻밤은 내가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네.' 그렇다. 사랑하는 친구와 밤을 새워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인생의 더없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참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눌 상대를 만나는 것처럼 행복할 때는 없다. 그것은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식물학자가 새로운 변종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 이런 대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이 적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어쩌면 왕래가 잦던 가정이 닫힌 아파트 생활로 바뀐 것이 도화선이고, 빨리 달려야만 하는 자동차가 그 파괴를 완성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저 나누는 이야기와 느낌이 있는 대화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느낌이 있는 대화란 소탈하고 한적한 맛이 있으며 결코 사무적인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기쁨으로 밤을 새울 수가 있다. 우리는 옛 친구와의 유쾌한 재회,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 출장길의 여관에서 종종 그런 기쁨을 발견하곤 한다. 이야기하기 가장 좋은 때는 물론 밤이다. 낮의 대화는 어쩐지 매력이 없을 것만 같다.
장소는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프랑스 풍의 카페에서는 문학이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또 오후의 햇볕이 드는 농원에서 옛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불빛이 비치는 호수에서 뱃사공과 함께 어떤 전설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다. 참으로 담화의 참 맛은 그 환경과 상대는 바뀌는 데 있다. 어떤 때는 진달래가 필 무렵의 달밤이었고, 어떤 때는 벽난로가 벌겋게 달아오른 해변의 방갈로, 또 바닷가에 가득한 쪽배들을 기억해 내기도 한다. 그런 정경은 당시 누군가와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해 내기 쉽게 만들어준다. 정말로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친근한 수필과도 같다. 그리하여 친숙한 사람까지 만나면 아무리 엄숙한 주제라도 편하고 한가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편안한 기분이어야 한다. 친구끼리라면 한 사람은 옆 테이블에 두 다리를 걸치고 누워 있으며, 한 사람은 창턱에 앉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방바닥에 비스듬히 베개를 끌고 누워 있다. 이렇듯 몸이 편안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그 모습은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둘러보니 흉금을 털어놓는 친구들뿐. 주위에는 눈에 거슬리는 놈이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열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인생의 또 다른 행복이며,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이다. "수호전"을 쓴 시내암 역시 그런 행복을 느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수호전"서문에 친구와 담화를 하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유쾌한 문장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다 내 집에 모이면 열 여섯 명인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이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그러나 비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 아니라면 반드시 모두 모여든다. 평소에는 예닐곱쯤 집안에 모여 있지만 오자마자 생각에 잠기거나 하는 사람은 없다. 마시고 싶어지면 마시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둔다. 즐거움을 술에 있지 않고 담화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 것은 성질이 다른 이야기이다. 또 이렇듯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그런 주제는 소문일 경우가 많다. 전해들은 소식은 풍설이며, 그것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우리는 또 세상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비방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단지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를 원하지만 아직 그렇지는 못하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것들이므로 바쁜 세상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느낌이 있는 만남
인간의 문화와 행복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는 담배와 술과 차의 발명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정과 사교와 한담을 즐기는 데 이만큼 직접적인 효력을 지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모두가 만남에 소용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 음식처럼 배가 부르지 않으므로 식사 중에도 즐길 수 있다.
셋째, 후각을 자극시켜 코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이런 담배와 술, 차를 즐기는 풍습은 한가롭게 우정이나 사교를 나누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결코 발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정을 알고, 심성이 세심하면서 천성이 한가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적당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꽃은 어떤 인물과 어울리는 정감이 있다. 빗방울 소리는 한 여름 산사에서 듣는 것이 제격이다. 또 어떤 경치는 그에 알맞은 여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즉 사물의 기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물에는 저마다 정감이 있어서 적당한 상태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성격이 잘 맞는 친구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야만 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바둑의 고수가 천리가 멀다 않고 적수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분위기란 이처럼 중요하다. 함께 즐기고자 하는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와 즐기고자 하는 종류가 다르면 그에 알맞은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학문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과 운동을 같이 하려 하거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음악회에 초청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차와 함께 나누는 마음
차를 즐기는 핵심은 그 색채와 향기와 풍미를 감상하는 것이며, 그 만드는 원칙은 청순, 건조, 청결에 있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데는 조용한 분위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에 대한 평론서인 "다소"에서는 차를 마실 때 어울리는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도 손도 한가로울 때
시를 잃고 난 후 피로할 때
마음이 산란해졌을 때
음악을 감상하고 있을 때
노래가 끝났을 때
휴일에 집에 있을 때
그림을 감상할 때
깊은 밤 대화를 나눌 때
아름다운 벗이나 고운 애인과 함께 할 때
소나기가 내릴 때
잔치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한적한 별장에 있을 때
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냉철한 머리로 세계를 관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신통찮은 사람이 시중을 들거나 하면 맛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무심코 마셔 버리게 되고 만다. 그래서야 어찌 차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함께 마시는 상대도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란스러워지고, 차의 고상한 매력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혼자서 차를 마시면 속세를 떠났다고 하며, 둘이서 마시면 한적하다고 하고, 서너 명이 마시면 유쾌하다 하며, 대여섯이 마시면 저속하다고 하고, 예닐곱이 마시면 비꼬는 말로 박애라고 한다. 또 차를 마실 때 커다란 주전자에서 거듭 따르거나, 단숨에 꿀꺽 들이마시거나, 식은 차를 데워 마시거나, 진한 차를 원하는 것은 심한 노동 끝에 배를 채우고자 하는 농민이나 노동자의 기갈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차의 풍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하여 예로부터 다도에 정통한 사람은 깨끗한 심신을 갖춘 다음 손수 차를 끓여내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다도처럼 까다로운 의례로 발달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평온하고 고상한 취미로 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수박 씨를 깨무는 것처럼 차를 끓이는 행위조차 차를 마시는 즐거움만큼의 만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옛날 채양이란 사람은 늙어서 차를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손수 차를 끓이고 그 내음을 맡은 즐거움을 가졌다. 또 주문보라는 학자는 매일 여섯 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차를 끓여 마시고, 죽을 때 자신의 관에 찻주전자를 넣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정결한 마음과 취미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차이지만 다음과 같은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도를 갖춘다면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차는 순하여 냄새가 옮기 쉽다. 그러므로 술이나 진한 향이 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둘째, 차는 시원하고 습기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셋째, 차의 맛은 물에 있다. 산의 샘물이 가장 좋고, 냇물, 우물물이 순이다. 혹 논물이라도 방죽의 물이라면 본래 산간의 물이므로 괜찮다. 넷째, 진귀한 찻잔을 감상할 때는 조용한 친구와 함께 한다. 다섯째, 일반 차의 순수한 빛깔은 엷은 황금색이다. 검붉은 색깔의 차는 우유나 레몬 등 향이 강하여 차의 맛을 지울 수 있을 만한 것을 넣어서 마셔야 한다. 여섯째, 좋은 차에는 뒷맛이 있다. 그것을 마시고 나서 30초쯤 지났을 때, 차의 성분이 침샘에서 작용하는 신간이 지난 뒤에 느껴지는 맛이다. 일곱째, 차는 신선한 것을 끓여 곧 마셔야 한다. 그리고 한번 따를 뒤에 나머지도 너무 오랫동안 두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차는 갓 길어온 물로 끓여야 한다. 아홉째, 순수한 차에 다른 것을 넣는 것은 좋지 않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향료를 넣는 것은 괜찮다. 열째, 최상의 차에서는 마치 갓난아이의 살갗처럼 미묘한 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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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다키아 전쟁
서기 84년 겨울, 도미티누스는 7년 동안이나 브리타니아 제패를 혼자 떠맡고 있던 총독 아그리콜라를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타키투스가 '역사' 첫머리에서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끝났는데도 방치되었다."고 씁쓸하게 말한 것은 아그리콜라의 귀국과 함께 로마의 스코틀랜드 제패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칼레도니아를 제패하는 것은 단념했지만, 브리타니아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는 왜 이제 와서 스코틀랜드 제패를 포기했을까. 그 무렵 도미티아누스가 도나우 강 방위선을 강화하기 위해 군단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미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서는 강북에 사는 게르만족이 자주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리타니아에서 도나우 방면으로 군단을 이동시키려면 스코틀랜드 제패는 단념할 수밖에 없다. 전쟁 수행 방식을 바꾸려면 지휘관을 교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공격을 장기로 삼는 아그리콜라 대신에 수비형 지휘관을 보내면 된다.
도미티아누스의 후임 황제들,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브리타니아 대책으로 미루어 보아도, 서기 84년 당시에 도미티아누스가 채택한 방책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출동해 있는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은 비난의 표적이 되기 쉽다. 아우구스투스는 엘베강을 국경으로 삼기 위해 게르마니아 중심부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이런 아우구스의 생각을 물리치면서까지 라인강으로 철수를 감행하자,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의 잘못은 칼레도니아를 활용하지 못한데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무렵 도나우 전선은 로마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공격형 지휘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본국으로 불러들인 아그리콜라를 도나우 전전에 파견하여 다키아 전쟁의 일선 사령관에 임명했다면 도나우 전선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고, 아그리코라에게 심취해 있던 타키투스도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비난을 상당히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를 본보기로 삼았다지만, 티베리우스는 군사적 재능만이 아니라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이런 재능과 경험은 전투를 지휘할때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휘하 장수를 등용할 때도 발휘된다. 이 점에서 도미티아누슨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부터 서술할 다키아 전쟁만큼 도미티아누스의 결함을 분명히 드러낸 사건도 없다.
교역보다는 해적질로, 농경이나 수공업보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꾸리려는 자가 있는 한, 방위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방위의 결과가 대화나 타협보다 힘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힘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양쪽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로마 특유의 공동운명체를 형성하여 제국 내에서는 사고방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고방식을 공유하지 않는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로마사는 서기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입이 로마 멸망의 원인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오해다. 공화정과 제정을 통틀어 로마의 역사는 야만족 침입의 역사와 완전히 겹친다고 해도 좋다. 수도 로마까지 야만족이 침입한 기원전 390년부터 로마가 다시 야만족에 유린당하는 서기 410년까지 800년 동안 로마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방위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기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입은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를 정도의 규모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붕괴를 면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에서는 방위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 이동하는 야만족도 이 동로마 제국을 피해 방위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서로마 제국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민족간의 충돌이 '사고방식'의 차이 떄문이라 해도 좋은 현실에서,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방위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로마 황제의 양대 책무는 안전보장과 식량보장이었다. 그리고 '식량'보장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황제에 대한 평가가 군사적 업적으로 좌우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황제가 '임페라토르'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영어로 황제를 뜻하는 '엠퍼러'(emporor)의 어원인 '임페라토르'는 최고 사령관을 뜻한다. 서기 85년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던 어느날, 로마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도나우 강 하류의 북쪽 연안에 살고 있는 다키아족이 대거 강을 건너 로마 영토인 남쪽으로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었다. 야만족이 침입했다는 소식은 물론 뉴스이긴 하지만, 충격적인 뉴스는 아니다. 그것이 충격으로 바뀐 것은, 다키아족을 격퇴하러 나간 군단이 참패당하고 그 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모에시아 속주 총독 사비누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뒤이어 도착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직접 전선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봄에 시작될 로마군의 반격을 현지에서 총지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전 지휘관으로는 근위대장 푸스쿠스를 데려가기로 했다. 푸스쿠스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근위대는 국경을 지키는 군단과 달리 전선에서 근무해본 경험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장인 푸스쿠스가 군복만 화려한 근위대장에 불과했다면, 그런 인물에게 실전지휘를 맡긴 도미티아누스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야만족은 전략 전술도 없이 대거 습격해오기 떄문에 대응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야만족을 상대하는 전투의 특징이다. 정규군은 정규군을 상대하기보다 게릴라를 상대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6년 동안이나 칼레도니아에서 게릴라를 상대로 싸운 아그리콜라를 등용해야 했다. 도미티아누스도 개인적으로는 아그리콜라를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하기는커녕, 충분한 영예를 주어 경의도 표했다. 그런데 왜 아그리콜라를 활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서기 86년에 벌어진 다키아족과의 첫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5개 군단의 주전력과 그와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 외에 근위대의 절반도 참전했다니까, 로마가 동원한 총병역은 6만 명이 넘은 셈이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다키아족을 일단 도나우 강 북쪽으로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다키아 족장 데케발루스는 전투를 종결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해왔다. 로마는 거절한다. 도나우 강 북쪽으로 진격하여 다키아족의 본거지를 쳐부수는 것을 두 번째 전투의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전에서 승리를 거둔 데에 만족한 도미티아누스는, 두 번째 싸움은 푸스쿠스에게 맡기고 수도 로마로 돌아갔다. 황제로서 할 일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전선에 머물렀다 해도 두 번째 전투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르마니아 방벽'을 구상하고 실행한 사람이니까, 예측할 수 없는 사태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임기응변의 능력만의 비극을 면하게 해준다. 도미티아누스가 보고를 받은 두 번째 전투 결과는 참패였다. 1개 군단 과 근위병은 전멸하고, 총지휘를 맡고 있던 푸스쿠스도 전사했다는 것이다. 군단기인 은독수리 깃발도 적에게 빼앗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다키아족과의 이 전투는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일대에서 벌어졌다. 로마군은 다키아족의 본거지인 사르미제게투사로 쳐들어가기는커녕, 도나우 강을 건너 북상하기 시작했을 때 사방에서 협공을 당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에게는 통렬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로마인이었다. 패배를 맛보았을 때 로마인들이 맨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설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설욕전 준비는 1년 동안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로마에서는 패배를 경험한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고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여 설욕전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패배를 맛본 병사들을 다시 전선에 투입한다. 로마군만큼 '설욕'이라는 낱말이 어울리는 군대도 없었다. 사령관이 전사했기 때문에 후임 사령관을 선정해야 한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골랐다. 도미티아누스가 임명한 사령관은 율리아누스였다. 모에시아 속주에 주둔하는 군단장을 지낸 경험이 있고, 기사계급 출신인 푸스쿠스와는 달리 원로원 의원에다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이 인사에서는 원로원의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현지 사정을 잘 알고 다키아족과 싸워본 경험도 풍부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설욕전에 투입할 병력을 증강하지는 않았다. 전사자들 때문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 카르타고에 주둔해 있는 1개 대대가 지중해를 건너 도나우 강까지 이동했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정도였다.
서기 88년, 로마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 땅으로 진격한 율리아누스는 교묘한 움직임으로 적을 유인하여 평원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로마군은 넓은 평원을 무대로 벌어지는 회전에서는 천하 무적이었다. 결과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다키아족 병사들을 이번에는 로마군 병사들이 쫓아가서 죽였다. 하지만 다키아족의 본거지까지 쳐들어가지는 못했다. 겨울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방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고 있는 율리아누스는 도나우 강 남쪽으로 철수한 뒤, 배다리를 해체하고, 이듬해 봄까지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반란
불만은 대개 상황이 나빠졌을 때 분출하는 법이다. 그러나 서기 88년에서 89년에 걸친 겨울은 상황이 호전된 시기였다. 따라서 왜 그런 시기에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휘하의 2개 군단을 이끌고 도미티아누스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몇 가지 경우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황제의 독재 통치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은 도미티아누스에게 반감을 품은 원로원 의원들이 부추긴 게 아닐까. 둘째, 다키아 전쟁에 전념하고 있는 도미티아누스의 허를 찌를 속셈이었던 게 아닐까. 셋째, 이 무렵 제국 동방에 네로 황제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사내는 파르티아에 가서, 자기를 앞세워 로마에 대한 군사행동을 일으키라고 권했다. 그렇게 되면 도미티아누스는 도나우 강하류의 다키아족만이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하류의 다키아족만이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강대국 파르티아에 대해서도 시급히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테니까. 그 틈에 서방에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반란의 불길을 댕기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제7권에서도 말했듯이 네로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평화를 확립했기 때문에 파르티아 국왕은 네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전통적으로 로마의 가상적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에 반대하여 일어날 마음이 있다면, 네로 황제를 내세우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효력을 갖고 있었다. 제국 서방에서는 원로원과 시민만이 아니라 군단까지도 네로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네로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지만,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여 동방에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오리엔트에서는 네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바뀌었어도,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깰 뜻이 없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요청에 따라 가짜 네로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게 인계되었다. 물론 그 사내는 당장 처형되었다.
따라서 파르티아가 가짜 네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리라 믿고 반란의 불길을 댕겼다면, 사투르니누스는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와 동년배인 타키투스도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 황제를 자칭하는 가짜를 내세워 로마에 반기를 들려했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간단히 해결된 사건이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로마인의 간담이 서늘해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짜 네로 사건과 마찬가지로 고지 게르마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간단히 처리되었다.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휘하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한 것은 서기 89년 1월 12일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당장 에스파냐에 주둔해 있는 제7군단장 트라야누스에게 병력을 이끌고 마인츠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남아 있는 근위병만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황제도 트라야누스도 그렇게 서둘러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막시무스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본과 코블렌츠의 중간 지점에서 사투르니누스파 병사들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1월 25일에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자결했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경거망동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내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유혈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뒤에 마인츠에 도착한 도미티아누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처음 겪은 반란이었다. 자결하기 전에 사투르니누스는 남에게 누를 끼칠 위험이 있는 서류를 모두 불태워버렸지만, 도미티아누스의 분노는 격렬했다. 사투르니누스의 야욕에 공모자가 된 군단 장교들 중에서 여러 명이 처형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에스파냐에서 갈리아를 가로질러 도착한 트라야누스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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