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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7호 - 2024.07.23 화요일(음력 : 06.18)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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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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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결함이 남들한테 나타나면 견딜 수 없이 짜증스러운 법. - 네덜란드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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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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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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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의의
국어의 모음은 10개의 단모음과 11개는 이중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모음은 소리를 내는 도중에 입술 모양이나 혀의 위치가 달라지지 않는 모음이고 이중모음은 입술 모양이나 혀의 위치가 달라지는 모음인데, 이중모음의 예로는 ‘ㅘ’, ‘ㅝ’, ‘ㅢ’ 등이 있다. 이중모음은 입술 모양이나 혀의 위치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발음하기가 어려운데, 특히 이중모음 ‘ㅢ’를 주의 깊게 발음하지 않으면 단모음 ‘ㅡ’로 발음하기 십상이다. 이중모음 ‘ㅢ’를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는 ‘ㅡ’를 발음할 때의 혀의 위치에서 ‘ㅣ’를 발음할 때의 혀의 위치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ㅡ’는 중설모음(中舌母音)으로서 혀의 정점이 입 안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반면에 ‘ㅣ’는 전설모음(前舌母音)으로서 혀의 정점이 입 안의 앞쪽에 위치해 발음되는 모음이다. 따라서 ‘ㅢ’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혀를 입 안의 가운데 지점에서 앞쪽으로 밀어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도중에 혀의 위치를 바꿔야 하는 어려움을 고려해 표준발음법에서는 단어의 첫 음절 이외의 ‘의’는 [ㅣ]로, 조사 ‘의’는 [ㅔ]로 발음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주의’는 [주이]로 발음할 수 있고 ‘강의의’는 [강:이에]로 발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의의’는 어떻게 발음하는 것이 좋을까? ‘민주주의’에서 ‘의’가 단어의 첫 음절 이외의 위치에 왔기 때문에 [민주주이]로 발음할 수 있고 조사 ‘의’는 [ㅔ]로 발음할 수 있으며 ‘의의’의 경우 둘째 음절 ‘의’가 첫 음절 이외의 위치에 왔기 때문에 [의:이]로 발음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의의’는 [민주주이에의:이]로 발음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리한 발음법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데, 대
‘찌개’가 맞는지, ‘찌게’가 맞는지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재’와 ‘결제’도 마찬가지다. 부장님께 보고서를 승인받을 때는 ‘결재(決裁)’를 써야 하고, 대금을 지급할 때는 ‘요금을 카드로 결제했다’처럼 ‘결제(決濟)’를 써야 하는데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우리말에서 모음 ‘에’와 ‘애’ 소리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 할 때는 구분되지 않는 소리를 구분해서 적어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이 말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말인지를 알고 있는 게 도움이 된다.
발음상 구분되지 않아 혼동하는 예로 종결 어미 ‘-데’와 ‘-대’를 들 수 있다. 소리로는 구분되지 않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른 뜻을 나타내므로,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잘 구별해 써야 한다.
예를 들어 ‘그 식당이 음식 맛이 좋데’와 ‘그 식당이 음식 맛이 좋대’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자. 뜻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겠는지. 두 문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말하는 사람이 직접 그 식당에 가 봤는지 여부이다. ‘-데’가 쓰인 첫 번째 문장은 말하는 이가 경험해서 알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한 결과를 현재 시점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식당이 음식 맛이 좋더라.’처럼 ‘-더라’로 바꿔 쓸 수 있다. 이 ‘-데’나 ‘-더라’로 끝나는 문장에는 가벼운 감탄이나 놀람의 뜻도 담겨 있다.
‘-대’로 끝난 두 번째 문장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들은 말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즉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는데) 그 식당이 음식 맛이 좋다고 해.’라는 뜻이다. ‘좋다고 해.’가 줄어서 ‘좋대’가 되었다. ‘-데’에는 ‘더’가 들어있고 ‘-대’에는 ‘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비껴가다’와 ‘비켜 가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문제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상황에서 자막에 ‘정답을 빗겨간’이라고 나왔다. 이 ‘빗겨가다’는 현대국어에 없는 말이다. 옛말에서는 ‘빗기다’라고 하였지만 현대국어에서는 ‘비끼다’이다. 창을 비스듬히 들면 ‘비껴들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면 ‘비껴쓰다’,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면 ‘비껴가다’이다.
그런데 이 ‘비껴가다’와 흔히 혼동하는 말로서 ‘비켜 가다’가 있다. 어떤 대상을 피해서 간다는 뜻으로 ‘진흙탕을 비켜 가다, 세월을 비켜 가다’처럼 흔히 쓰이는데, 아직 한 단어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위 프로그램의 자막에는 ‘비껴가다’와 ‘비켜 가다’ 중 어느 것을 써야 할까? 출연자가 정답을 맞히지 못하고 피해 간다는 것이니 ‘비켜 가다’가 적합한 말이다. 즉 자막을 정확하게 넣는다면 ‘정답을 비켜 간’이라고 해야 한다.
‘비껴가다’는 두 가지 뜻으로 쓴다. 첫째는 ‘비스듬히 스쳐 지나다’, 둘째는 ‘어떤 감정, 표정, 모습 따위가 얼굴에 잠깐 스쳐 지나가다’는 뜻이다. 앞의 의미로는 ‘공이 골대를 비껴가다’, 뒤의 경우로는 ‘서운한 빛이 얼굴을 비껴가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이와 같이 ‘비켜 가다’와 ‘비껴가다’는 구별되는 말이다. 위 자막의 ‘빗겨간’처럼 엉뚱하게 쓰는 경우도 있지만, 그 외에도 ‘운명을 비껴간, 세월을 비껴간’처럼 ‘비켜 가다’로 쓸 것을 ‘비껴가다’로 쓰는 잘못을 종종 볼 수 있다. 둘을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비켜 가다’의 경우 띄어 쓰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비켜나다, 비켜서다’처럼 한 단어로 인정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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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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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삼청공원에서(어머니 가시다) - 천상병
1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공원으로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사나이가 왔다.
외롭다는 게 뭐 나쁠 것도 없다고 되뇌이면서 이맘때쯤이 그곳 벚나무를 만발하게 하는
까닭을 사나이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벚꽃 밑 벤치에서 만산을 보듯이 겨우
의젓해지는 것이다. 쓸쓸함이여, 아니라면 외로움이여, 너에게도 가끔은 이와 같은
빛 비치는 마음의 계절은 있다고, 그렇게 노래할 때도 있다고, 말 전해다오.
2
저 벚꽃잎은 속에는 십여 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가 생전의 가장 인자했던 모습을 하고 포오즈를 취하고 있고, 여섯에 요절한 조카가 갓핀 어린 꽃잎 가에서 파릇파릇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
유리창 1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
休息 (휴식) - 김수영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마음을 쉬다
매일같이 마시는 술이며 모욕이며
보기싫은 나의 얼굴이며
다 잊어버리고
돈 없는 나는 남의집 마당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쉬다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
연못 흰 바위
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
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멀리서 산이 보이고
개울 대신 실가락처럼 먼지나는
군용로가 보이는
고요한 마당 우에서
나는 나를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
구태여 낯익은 하늘을 보지 않고
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마음을 쉬다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한데
나 역시 이 마당에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비록 내가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
꿈을 꾸는 마당이라고 해서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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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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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2 장 윤회는 있다
1. 전생기억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는 대개 두 서너살 되는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들은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곧"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 보면 모두 사실과 맞곤 합니다. 이것이 전생기억 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부터 25년 전 터어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이스마일이 태어난지 일년 반쯤 되던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 갈 테야.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네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 스루무스야. 아비스 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테야."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쉰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을 벌여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굿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그 뒤에 내가 이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테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생의 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리를 못하게 하면 울고,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는데, 이 어린 아이가 가더니 가장 큰 조각을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집에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더러 이 동네에 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그 어린 아이는 뛰어 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 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지? 내가 또 네 할례(割禮)도 해주지 않았더냐?"
놀랍게도 그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과 일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자꾸 자꾸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터어키는 회교국이기 때문에 회교 교리에 따라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환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 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그가 말하는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이는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치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의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아이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쳐다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 아이가 중년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 남편인 아비스 스루무스이다. 저 건너 동네에서 다시 태어나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서,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 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말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제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에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기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때 일본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었었는데 돈을 빌려간 사람은 아비스 스루무스가 죽어버리자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일은 그 돈을 빌려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들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내었습니다. 이 사실은 죽은 아비스 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사람,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어린 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이며 또 누가말하여 주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조사단은 이스마일이 바로 아비스 스루무스의 환생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정을 짓는 보고서를 내었습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 중에서 또 유명한 것으로 인도의 산티데비 San ti Deui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타 데비는 1926년 인도의 델리에서 태어났는데 세살 때부터 자꾸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전생에 무트라 Muttra 지방에 사는 케다르 Kedar라는 사람의 아내였는데 자기를 그곳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산티 데비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러가지 전생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처음에는 아이가 정신이 좀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생 이야기를 너무나 생생하게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이가 말하는 무트라 지방에 가서 케다르라는 사람을 찾아 보았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아이가 말한 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집에 일곱살 되는 계집아이가 있는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의 아내 였다고 하니 그것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몇 시에 자기 집으로 와서 확인해 보자고 제의했습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이렇게 비밀리에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약속을 한 그날에 케다르 씨는 산티 데비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가 문에 들어서자 이를 본 산티 데비는 깜짝 놀라며 반색을 하고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항상 생각하며 당신에게 가려고 해도 이 집에서 보내주지 않아서 못 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전생의 남편인 케다르를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티 데비는 옆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던 중에 자기가 죽으면 재혼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왜 장가를 갔느냐고 다그치기도 하였습니다. 또 자기 어머니에게 케다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준비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자신에 대해 상세히 말을 하자 케다르 씨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등을 볼 때 전생의 자기 아내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티 데비의 전생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인도 정부에서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조사단은 산티 데비를 데리고 무트라 마을에 가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집을 찾도록 했습니다. 산티 데비는 너무나 오랫동안 산 곳이라 눈을 감고도 척척 찾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쯤 가면 느티나무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길이 좁아지니 거기서 차를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산티데비는 앞장서서 옛날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서 머리가 허연 노인에게 "아버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전생의 시아버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불러서 한 사람씩 이름을 말하는데 모두 사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산티 데비는 살림을 돌아보고 나서 살림이 궁색해졌다고 하며 지하실에 묻어 둔 금을 파서 살림에 보태 쓰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가서 가리킨 곳을 파 보았으나 빈 궤짝만나오고 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이 그금을 파 내어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이야기로 전생에 산티 데비가 지하실에 금을 묻어둔 것은 사실임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도 조사단은 계속해서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델리와 무트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산티 데비는 델리에서만 살았고, 아직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무트라 지방의 말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트라 지방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어린아이라면 무트라라는 지방이 있다는 것도 잘 모를 텐테 억양도 말씨도 틀림없는 그 지방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조사단은 더 이상 의심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 외에도 여러가지를 검증해 본 결과 조사단은 산티 데비가 전생의 케다르 씨의 아내가 환생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인도 정부에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서를 냈습니다.
"산티 데비의 환생 문제는, 더러 반대하는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전국적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이 직접 상세히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이 조금도 거짓말이 아닌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져 전생기억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산티 데비는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에서 공무원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 생존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스마일이나 산티 데비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중에 한두 가지만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년 7개월 된 쌍동이가 있는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그 아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의 주민들을 수 백명 모으고 그 가운데에 그 아이가 말하는 전생의 부모형제들을 섞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와 형제를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살 된 어느 아이도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이빙 선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도 다이빙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살 되는 어린 아이를 높은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아이는 다이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했습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生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난 뒤로 한번도 글을 배운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여도 모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곧 나면서부터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생이지지는 바로 전생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금생에로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가보는 곳인데 낯이 설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생기억에 대해 누구보다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버지니아대학의 이안 스티븐슨 Ian Steuenson 교수입니다. 그는 세계 각국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으면 학자들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여 확인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바로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사례 Twenty Cases Suggestiue of Reincarnation ]라는 책으로, 뒤의부록 1에서 소개됩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서는 가장 확신이 있고 어떤 사람이든 반대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1973년까지 약 2,000건의 전생기억을 가진 사례를 조사하여 보고했습니다. 자료가 이만큼이나 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윤회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리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정신과 교수로서 전통적인 의학에 대한 연구 경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전통적인 이론은 인간의 성격을 유전과 환경과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이들 복합적인 요인만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수 없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해 보고자 했다."
그는 윤회를 한다고 정식으로 공포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는 어른들보다 자신의 기억을 해석하려고 들지 않는 어린이의 사례 조사에서 90퍼센트 이상의 정확성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안 스티븐슨교수는 전생기억에 나타난 사례들에서 몇 가지 특징을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생기억과 연령과의 관계입니다. 대개는 태어난 지 두서너살이 되면 전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좀더 나이가 들어서나 아니면 말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로 말을 잘 할수 없는 시기의 전생기억이 좀더 정확한 수가 많습니다. 어린 아이가 전생에 대해 말하는 첫 말은 대개 자신이 알았던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입니다. 그러다가 다섯살에서 여덟살 사이쯤 되면 어린이들은 전생기억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때가 되면 가정의 제한된 테두리를 벗어나 이웃과 학교에서 여러가지를 경험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점점 사라지는 전생기억 위에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서 전생기억은 아주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거나 위엄과 지혜를 갖는 등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그 행동이 다릅니다. 이러한행동은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본인에게는 당연한 행동이며 그것은 전생의 자기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증언자들이 말하는 죽은 사람의 행동과도 일치합니다. 세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자기 육체의 생소함을 말하곤 합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작은 육체에 갇혀서 답답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곤 합니다. 네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가장 생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전생에서 죽음과 관련된 것이며, 바로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전생기억 중에서 교통사고나 살인, 전쟁과 같이 격렬하게 죽은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만이 환생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경우일 수록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격렬한 죽음의 경우, 전생기억을 하는 아이는 대개 죽음을 가져다 준 물건이나 환경에 대해 강한 공포심을 나타냅니다. 한 보기로서 어떤 어린이는 전생에 다리 위에서 버스를 지나가게 하느라고 비켜 서다가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다리, 버스, 물에 대해서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목욕시키려면 네 명의 어른이 강제로 붙잡아야 할 정도로 물에 대한 공포에 떤다고 합니다. 다섯째로, 사람과 환경의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처음 가는 집이라면 그 집이 어떻게 변하였고, 거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보통의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에는, 처음 전생 집을 찾아갈 때, 구조가 어떻게 변경되었다는둥 가족 중에 누가 안 보인다는둥 그 집의 변화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섯째로, 환생을 예견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 어느 가정에 태어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꿈에 예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꿈이 동, 서양에서 종종 화제가 되곤 합니다. 일곱째로, 임신 중의 비정상적인 식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에는 임신을 하게 되면 평소에 잘 안 먹던 음식이나 제 철이 아닌 음식에 대해 그 사람은 비상한 식욕을 느낍니다. 그것을 임신부의 변덕이라고 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기억을 하는 어린 아이의 경우, 전생에 좋아했던 음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음식이 바로 어머니가 임신 중에 먹고 싶어 했던 음식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여덟째로, 배우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생기억을 하는 어린이 중에는 배우지도 않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에 가졌던 기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보기를 하나 들자면 벨기에에 로버트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은 어느 날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5년에 죽은 자기 삼촌인 알버트의 초상화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일이 있은 뒤에 세살이 조금 지나서 로버트는 부모와 같이 처음으로 수영장에 갔는데 멋진 동작으로 다이빙을 하여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삼촌인 알버트는 훌륭한 수영선수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수영은 세살 정도의 어린아이도 할 수 있지만 다이빙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영장에 처음 온 아이가 다이빙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 아이가 전생의 알버트였음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우지도않은 기술이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사례는 외국어를 말하는 경우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리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동시에 노벨수상자이기도 한 샤를르 리히Charles Richet는 그러한 현상을 지노글로시Xenoglossy라고 붙였습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이 지노글로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독백과 같은 것인데, 당사자는 이상한 언어의 조각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잠재된 기억 속에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도출되는 경우인데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반응적인 경우인데, 이것은 직접 상대방과 그 외국어로써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슨은 두번째 경우인 반응적인 지노글로시의 사례는 죽음 이후의 인간의 윤회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곧 전생에 그 언어를 배웠거나 사용한 사람이 아니면 그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이 언어를 배우 지도 못한 어린이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최초의 지노글로시는 19세기에 있었던 일인데 최면에 의해서입니다. 1862년 독일의 왕자 갈리첸Galitzen은 어떤 여인을 대상으로 최면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18세기의 훌륭한 프랑스어로 브리타니에 살았던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리첸 왕자는 그녀가 프랑스어를 배웠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그녀는 일반 교육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었고, 다만 자기 지방의 독일어 방언 밖에는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이 판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자는 전생에 프랑스에서 살다가 다시 독일에 태어난, 윤회의 실증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홉째로, 출생 자국을 들 수 있습니다. 아이가 출생할 때부터 흉터가 있거나 불구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선천적 기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대부분 유전이나 임신 중의 약물 복용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이 전생의 업보에 의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윤회를 입증하는 전생기억에 관한 사례는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삼국지(三國誌)]라는 책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아무도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조조도 못하고 유비도 못하고 손권도 못하였습니다. 정작 중국이 통일된 것은 세월이 흐른 뒤 진(晋)나라 때입니다. 그 때 진나라의 재상이며 군인이고 또 덕인(德人)이었던 양호(羊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서너살이 되어서, 한번은 유모를 보고 가지고 놀던 금고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모는 아기에게 금고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양호는 유모를 데리고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집 마당의 큰 고목나무 밑으로 가서 썩은 나무 밑둥치의 구멍 속으로손을 쑥 넣더니 금고리를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금고리를 본 그 집 주인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의 죽은 아이가 가지고 놀던 것인데 그 아이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웃 아이가 와서 그것을 찾아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 이웃집의 아이가 죽어서 양호가 되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이 금고리입니다. 1930년에 죽은 양계초(梁啓超)의 선생님인 강유위(康有爲)라는 대학자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전생이 있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유교에서는 윤회를 부정합니다. 그런데도 유교학자인 강유위는 윤회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양호의 금고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자가 양호의 금고리 사실 하나만으로 전생이 있고, 윤회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수집한 2,000여 건의 사례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신라 통일시대의 김대성의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김대성이 처음 태어난 집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근근히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집에서 밭을 조금 떼어 주어서 그것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옆집에서 시주를 하자 스님께서 '시일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축원하는 것을 김대성이 듣게 되었습니다. 김대성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자기네의 조그만 밭을 스님에게 시주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시 '시일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축원을 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김대성은 죽었습니다. 그날 밤, 대신(大臣)인 김문량(金文亮)의 꿈에 '모량리(牟梁理)의 대성(大城)이가 너의 집에 태어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모량리에 가서 알아보니 과연 김대성이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김 문량의 부인은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날 때 손을 꽉 쥐고 있다가 이레 만에 손을 폈는데 손바닥을 보니 '대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 문량의 집에서는 이 아이가 모량리의 김대성이 다시 환생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 이름을 그대로 대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있게 하였습니다. 김대성은 성장하면서 사냥을 좋아하였습니다. 하루는 토함산에 가서 곰 한 마리를 사냥해 오다가 산 아래 마을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에 곰의 혼이 나타나 자기를 죽였으니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김 대성이 너무 무서워 잘못했다고 빌었더니 곰의 혼은 자기를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잠에서 깨어보니 그것은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그 뒤로 김 대성은 사냥을 끊었으며, 꿈에서 약속한 대로, 그 곰을 잡은 땅에다 장수사(長壽寺)라는 절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願)을 세워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佛國寺)를 짓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지금의 석굴암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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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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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3권
2. 경제 재건의 걸림돌 (2/2)
<신풍회(新風會)> 민주당 내의 정치 서클의 하나인 신풍회가 정식으로 발족된 것은 사실은 새해에 들어선 1월 27일이었다. 그전에는 그저 소장파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소장파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이철승을 보스로 뭉쳐져 있던 소장파의 정치 서클인 신풍회는 민주당을 쓰러뜨릴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신풍회는 민의원 의원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숫자로 야당과 야합하기만 한다면 장면 정권쯤은 하루아침에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이철승은 또 원외세력(院外勢力)도 거느리고 있었다. 민정회(民政會)가 바로 그것이었다. 민정회는 전국학련(全國學聯) 출신자들로 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철승이 명령만 내리면 전위대 구실을 다해 줄 조직체였다. 이렇듯 이철승이 원내.외에 막강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사이엔가 정가(政街)에는 이런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철승이 장면 내각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총리직을 차고 앉을 공작을 하고 있다더군.> 그럴싸한 소문이었다. 이철승의 나이, 경력, 지지세력으로 미루어 보아 그만하면 내각책임제의 국무총리 재목감으로서 충분했다. 그러잖아도 국무총리 장면은 함종빈의 중석과 관련된 백만 달러 코미션 폭로설로 적잖게 골치를 썩히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적잖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오위영이 펄펄 뛰면서 함종빈을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제기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노.소장파간의 대립은 더없이 첨예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위영이 함종빈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자 신풍회 보스인 이철승은 <좋아! 고소를 할 테면 해봐. 나는 국민이 다치기 전에 그들이 묻어 둔 지뢰(地雷)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묻어둔 지뢰라니? 그들이 묻어둔 지뢰가 어떤 지뢰이기에 이철승은 국민이 다치기 전에 하나하나 터뜨리겠다고 노장파에 대해서 포문을 연 것이었을까? 공연한 엄포였을까? 아니면 중석 일수판매계약을 해서 백만 달러 코미션설이 튀어나왔듯이 뭔가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될 흑막이 있는 것이었을까? 국민은 민주당의 집안싸움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제2라운드가 벌어지는 것이 언제일까 주시하고 있었다. 장면은 자꾸만 첨예화되는 노.소장파간의 알력에 적지 않게 가슴을 앓아야 했다. (이 사람들이 정치의 룰이나 제대로 알고 정계에 뛰어든 사람들일까?)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의 싸움을 말릴 수 있다지? 결국 소장파에선 입각을 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반발을 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집안 식구끼리 이전투구와도 같은 싸움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도대체가 장면은 후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였다. 세상의 쓴맛 단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었다. 일제시대에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두말없이 다마오까 쯔도무(玉岡勉)라고 창씨개명을 했었다. 머리 속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신만 똑똑히 집어넣고 있다면 창씨개명을 했다고 해서 지론이었다. 물론 학교를 지켜야겠다는 사명감도 그가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던 한 이유이기도 했다. 가톨릭 재단인 동성(東星)상업학교 교장이었던 그는 창씨개명에 항거함으로써 학교 경영에 어떤 화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의 숭실(崇實)전문학교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폐교당했듯이 동성도 가톨릭 재단이었던 만큼 구실만 잡히는 날이면 폐교의 운명을 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뒷날 나라가 독립을 되찾으면 창씨개명이 문제가 되어 <친일파>라고 해서 얼마나 호된 규탄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면은 <한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수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한 성경구절을 생의 철학으로 삼고 있었다. 어정쩡한 종교인이라면 모르지만 남다른 신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후진국의 정치인으로서는 맞지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까지 갈라져 항상 아귀다툼을 벌여야 하는 나라에서는 특히 그렇다. 남하고 아귀다툼을 한다는 것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얼마나 고약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장면이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말미암은 후천적 성품 때문이었다. 지도력을 하고 또 때론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질책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장면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은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장면 같은 사람은 정치가 고도화된 선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국의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건 그렇고 장면은, (또 한 번 신풍회를 달래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난 1월 14일의 일이었다. 구파가 야당을 하겠다고 떨어져 나가자, 민주당 중앙당부에는 많은 감투가 비게 되었다. 장면은 이 빈 자리에 소장파를 앉힘으로써 노장파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소장파의 조일재(趙一載)를 청년부장에, 박주운(朴周運)을 문화부장에, 조연하를 조직부 차장에, 함종빈을 외교부 차장에 각기 임명하였다. <내가 이만큼 소장파를 생각하고 있으니, 불평불만 좀 그만하고 당을 위해서 합심 협력하자>는 뜻에서였다. 사실에 있어서는 그 이상 줄래야 줄자리가 없었다. 억지로 주려면야 못 줄 것도 없었지만, 그랬다간 노장파나 합작파에서 또 반발을 할 테니, 장면은 그저 그 정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어버이 마음 자식이 모른다>고 소장파들은 또 뭐라고 빈정거렸던가? 젊은이들한테는 빈 껍데기 자리나 안겨줘?" 하며 도무지 고마워할 줄을 몰랐다. 결국 주나마나한 꼴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줄수록 양양이라더니 딱하군 딱해!" 그렇다고 젊은이들을 불러다가 호통을 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 같았으면 <뭐야? 어느 놈이 불평불만을 터뜨려? 그런 자들은 모조리 볼기를 쳐서 당에서 쫓아내 버려!> 했겠지만 장면은 속으로 끙끙 앓을지언정 서릿발 같은 호통을 칠 수 있는 성품이 못 되었다. 장면이 조각을 할 때 소장파를 입각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노장파의 반대가있기도 했지만 좀더 정치훈련을 쌓은 다음에 유용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것을 소장파들이 십분 이해해 주었으면 어두워진 소장파라 아예 처음부터 장면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노장파와 으르렁거리게 되었고 마침내는 함종빈이 폭로전술을 쓰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여간에 장면은 소장파를 한 번 더 달래보기로 했다. 1월 28일 아침, 장면은 숙소인 반도호텔로 이철승을 불렀다.
"구파 3부 장관이 사표를 냈어요. 그래서 개각을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당내 의견을 종합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장면은 부른 이유를 말했다. 구파에서 차출한 4부 장관 가운데 박해정은 <나는 원래 민주당원일 뿐>이라는 때문에 논외로 하고 나머지 3부 장관은 참으로 오랫동안 뭉그적거렸다. 바지에 똥을 싸고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뭉그적거리고 있는 것과 똑같은 꼴이었다. 장관감투 내놓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눌러앉아 있자니 구파에서 변절자라고 규탄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등을 밀어낸 것은 민주당 노장파였다. 도대체 환영받지 못할 자리에 뭣 때문에 미련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뒷공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장관 자리에 미련이 있거들랑 아예 구파한테 결별을 선언하고 민주당에 남든가, 결단을 내릴 일이지....... 결단성 쯧쯧......."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런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고약한 작자들 같으니, 거국내각을 해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입각해 주십시오, 입각해 주십시오 하고 사정을 할 땐 언제고 등을 밀며 나가라고 할 땐 언제야. 돌아가지 돌아가! 돌아가서 이놈의 장 정권 타도에 앞장을 설 테니 두고 보라구."
그래서 그들은 진작 물러날 뜻을 밝혔던 국방장관 권중돈과 더불어 1월 27일에 사표를 내던졌다.
"그래 이 의원, 이번 개각에 입각할 장면이 물었다.
"저보다는 우리 소장파에서 두 사람만 입각시켜 주십시오."
이철승은 엉뚱한 제의를 했다.
"소장파에서 두 사람을?"
"네. 김재순, 김준태, 그 밖에도 소장파에서는 인물이 제제다사인 만큼박사님께서 점 찍으셔도 좋습니다."
소장파에서 두 사람을 입각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은 장면의 심정은 자못 착잡하기만 했다. 장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의원이 필요해요. 이 의원이 입각을 해주었으면 고맙겠소."
"제가 입각을 수락한다면 어떤 자리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이철승은 좀 역정이 나는 모양이었다.
"박사님, 저는 오랫동안 국회에서 국방위원으로 활약해 왔습니다. 보건사회문제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보사를 맡겠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자유당 치하에서 두 번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승은 줄곧 국방위원으로만 활약하다 보니, 이제 국방문제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면 내각이 출범을 할 때 국방장관을 시켜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랬다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각료의자는 모조리 노장파에서 독식해 버린 (흥, 잘들 논다. 어디 늙은이들이 얼마 동안이나 해먹나 보자!) 그래서 그는 소장파의 친목 그룹을 서클로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철승이 국방을 맡기면 입각할 수도 있다는 간접 표현을 했으나, 장면은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물러가는 게 옳겠지, 물러가는 게?) 이철승은 물러가는 게 옳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장면으로부터 또 무슨 말이 있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오위영을 앞세우고 이상철, 이석기(李錫基), 이태용(李泰鎔), 한통숙(韓桶淑) 등이 들어왔다.
"박사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동지들하고 상의해 보고 난 뒤에 회답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갔다. 그의 뒤통수를 오위영이 잡아먹을 듯한 험악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철승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오위영이 따지듯 물었다.
"박사님, 이 의원한테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동지들하고 상의해 보고 난 뒤에 확답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 시작이구나.) 장면은 짜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이철승을 불렀던 이유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얘기를 듣고 난 오위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반문했다.
"안 됩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각책임제란 경륜 있는 사람이라야만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까? 국회의원 한두 번 했다구 해서 경륜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오위영은 팔딱팔딱 뛰었다.
"오 위원 말씀이 맞습니다. 당보다 서클의 이해나 앞세우는 젊은이들을 등용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석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엉덩이에 뿔도 나기 전에 장관이나 하려고 덤비고, 이래가지고 당의 기강이 서겠습니까? 당의 원로가 기라성 같은 판국에 젊은 사람들이 장관이나 하려고 위계질서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정책을 일관해서 펴나가기도 어렵습니다."
이석기는 소장파에 대해서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신.구파가 합쳐져 있을 때의 민의원 원내총무는 유진산이었다. 한국의 경우 민의원 원내총무는 야전군 사령관이라 일컬을 정도로 중요한 포스트였다. 원내총무는 곧 당수(黨首)로 발돋움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구파가 갈라져 나갔으니 민주당으로서는 원내총무를 새로 뽑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0년 11월 23일에 원내총무를 뽑기 위한 의원총회가 있었다. 이때 노장파가 민 것은 이석기였다. 소장파는 여기에 반발, 홍익표(洪翼杓)를 입후보시켜 밀었다. 표를 얻어 선출되었지만 그는 소장파가 홍익표를 밀었다는 사실 한 가지로 해서 적대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철승을 입각시켜 소장파를 무마하려던 장면의 뜻은 꺾이고 말았다. 그는 노장파를 설득할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번 개각에서도 소장파를 제외시키면 그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질 텐데 그땐 무슨 수로 그들을 무마한단 말이오? 거기에 대한 무슨 대책이라도 있소?"
"대책 같은 건 없습니다."
"박사님."
오위영은 장면을 불러놓고 그의 표정을 살펴보고 나서 물었다.
"박사님은 소장파의 반발은 두렵다는 말씀입니까?"
장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하긴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노장층의 반발보다는 소장파의 반발이 더 두려운 게 사실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들이라 불평불만이있더라도 하늘 대고 침뱉는 짓은 하지 않거든. 거기에 반해 소장파는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니, 그들을 달랠 수밖에.)
"소장파 중에서 한 사람만 입각시키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이해가 있으면 고맙겠소."
장면은 물었다.
"박사님께서는 이철승 의원을 입각시킬 생각이시죠?"
"입각하라고 권고했소."
"안 됩니다."
오위영이 또 단호히 안 된다고 반대했다.
"박사님, 장관을 시키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당의 노장층은 제제다사입니다. 그들은 나이도 많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반독재투쟁을 해온 그들에게도 꽃다발 한 번쯤은 안겨주셔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소장파는 앞으로 기회가 얼마든지 있거니와 또 아직 정치적으로 미숙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정무차관으로 기용한다면 모를까 입각은 안 됩니다."
오위영은 촌보도 양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결국은 장면이 꺾이고 말았다. 그런 경위를 밟은 끝에 1월 30일, 마침내 4부 장관에 대해서 개각을 단행했다. 이때 새로이 장관에 기용된 인물은 국방부에 현석호, 부흥에 태완선(太完善), 보사에 김판술(金判述), 체신에 한통숙 등이었다.
<누워서 하늘에다 대고 침을 뱉아 봐라. 그 침이 어디로 떨어질 성싶으냐?>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나무랄 때 곧잘 이런 비유법을 쓴다. 어차피 물러나지 않고는 못 배길 구파의 몫이었던 4부 장관을 기어이 소장파에서 차지하고 말겠다는 집념 어린 정략에서였을까? 아니면 국정을 감시 감독하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를 1월 26일 아침 신풍회의 함종빈이 이런 발설을 했다.
"동경식품과의 중석 일수판매조로 백만 달러의 코미션을 받기로 했다는 설이 있다."
가히 백만 메가톤급 폭탄의 위력에 해당될 만한 폭로였다. 장면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을 만한 것을 찾고 있던 언론에서는 얼씨구 좋다고 대서특필로 이것을 보도했다. 신문 구독자들의 추위를 잊게 해주기에 족할 만한 기사거리였던 것이다.
"이런 죽일 놈들, 민주당 정권 이놈들, 이거 자유당 정권하고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내 눈깔이 삐었었군.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지키라는 꼴이었어. 그런 놈들한테 자리를 주었으니."
신문을 펼쳐든 사람이면 누구나가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댔다. 정계도 발칵 뒤집혔다. 꼭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야당인 신민당이나 민정구락부로서야 얼마나 입맛을 돋구는 폭로였겠는가. <이거 잘만하면 민주당 내각을 쓰러뜨릴 좋은 구실이 되겠다>며 물고 늘어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함종빈의 발설로 벌어진 사건을 세칭 <중석사건>이라고 한다. 자유당 정권 때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세칭 <중석불사건>이라 호칭하고, 민주당 집권기간인 이때에 벌어진 사건은 <중석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아주 중시했던 사건으로서 군사 쿠데타 직후 대한중석 사장이었던 문창준은 수사기관에 끌려가 무지무지한 고문을 당하며 이 사건에 대한 자백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 정권이 장면 정권을 <부패> 정권으로 낙인찍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중석사건>이었으므로 사건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를 소상히 소개하기로 한다. 중석은 희중석, 망간중석, 철망간중석, 동중석 따위의 울프럼산염 광물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중석은 전략물자의 하나. 이 전략물자의 하나인 중석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 중석이 전략물자이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행여 적성국가로 해외수출에 아주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유당 정권 때에는 이 중석이 수출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의 2년 동안에만도 한.미 중석협정에 의해 1년 평균 4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여들였었다. 그러나 그 뒤 국제시세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판로도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큰 몫을 해주던 외화벌이가 이꼴이 되니 무엇인가 방법을 연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머리를 짜냈다는 것이 고작 일수위탁판매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미국의 컨티넨탈 회사와 체결했었다. 1958년의 일이었다. 이 계약은 1961년 1월 23일 만료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창준이 대한중석 사장에 취임한 것은 국책회사의 사장도 바뀌기 마련이다. 문창준을 대한중석 사장에 앉힌 것은 물론 국무총리 장면이었다. 문창준은 장면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였다. 6.25 때의 일이다. 당시 장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에 장면의 두 아들은 서울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두 아들에게 있어 부산은 낯선 고장이었다. 주미대사의 아들이라고 해서 돌보아 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문창준을 찾아갔다.
"너희들 정말 용케 탈출해 나왔구나."
문창준은 사선을 뚫고 온 장면의 두 아들을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 그러다가 주었다. 장면이 이승만의 정적으로 돌아서 야당생활을 할 때 그의 생활을 보살펴 준 것도 문창준이었다. 야당인사의 생활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엔 갖가지로 박해를 받게 되던 시대였다. 문창준은 그것을 무릅쓰고 장면의 생활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창준의 원조가 장면으로서는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장면은 국무총리가 되어 정권을 잡자 은혜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문창준을 대한중석 사장에 앉혔던 것이다. 대한중석 사장직에 취임한 문창준이 처음으로 부닥친 문제가 1961년 1월 23일자로 계약이 끝나게 되어 있는 중석의 회사하고 맺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미창실업이라는 회사의 정수복이었다.
"문 사장, 이번엔 중석의 일수판매계약을 일본 회사하고 맺어보면 어떻겠소."
정수복은 일본 회사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할 것이라고 하며 애써 문창준을 설득했다. 그는 중개료에 바싹 구미가 당겨져 있었던 것이다.
"정 사장, 일본 회사하고 계약을 체결하라 하지만 일본하고는 국교도 맺어져 있지를 않지 않소? 그런 처지인데 일본 회사하고의 계약체결이 가능하단 말씀입니까?"
"국교정상화하고 장사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소? 돈벌이에는 국교정상화 따위는 그렇군. 상공장관이 허락만 하면 되니까 상공장관의 허락이나 얻어두도록 하슈."
"우리 회사의 중석을 맡아서 팔아 줄 일본 회사는 있을 성싶습니까?"
"있구 말구요. 중석은 굉장한 돈벌이가 되는데 없을 리가 있습니까? 이 정수복이 나서면 그쯤은 하루아침에 해결해 드릴 테니 그 점도 염려하지 마슈."
문창준은 다음날 상공부 장관 주요한을 찾아갔다. 그는 미국회사하고의 중석판매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일본 회사하고 계약을 했으면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일본 회사 가운데 우리 중석을 맡아서 팔아주겠다는 회사가 있습니까?"
주요한이 되물었다.
"사장이 중개를 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회사는 얼마든지 소개해 주겠으니 염려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일본하고는 국교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데, 과연 상거래를 해도 괜찮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미국 회사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야 괜찮지 않겠소? 국교정상화가 돼 있지 않은 점을 염려하고 있지만 우리 민주당 정권의 가장 으뜸가는 정책이 일본과의 조속한 국교정상화의 실현인 만큼 괜찮으리라고 봅니다."
문창준은 미국 회사보다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한 주요한의 말에 고무되었다. 그는 1960년 11월 20일에 일본 도쿄로 24일에 일본으로 떠났다. 문창준은 도쿄의 한 요정에서 정수복의 소개로 도쿄식품 사장인 리끼이시 도시다께와 만났다. 문창준을 대하는 리끼이시의 태도는 자못 정중했다.
"문 사장, 한국의 중석을 우리한테 맡겨 주십시오. 미국의 컨티넨탈 회사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팔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며 그는 일수판매계약을 자기네 회사하고 맺자고 간청했다. 이럴 경우 단박 <아, 네. 그렇습니까? 좋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잘 아시겠지만 중석은 전략물자의 하납니다. 우리 한국은 중석을 팔아야 할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공산주의 적성국가로 흘러들어가도 좋다고 하면서 팔 적성국가를 젖혀 놓고서 팔 자신이 있습니까?" 하고 문창준은 물었다.
"여부가 있습니까? 우리도 그쯤의 양식은 있는 사람입니다. 세계 적화를 꿈꾸는 공산국가에 어찌 전략물자인 중석을 팔아 먹겠습니까? 그 점은 염려 마시고 우리 도쿄식품에 일수판매나 할 수 있도록 일을 맡겨 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으로 거래를 했으면 좋겠는지 거래조건을 문서화해서 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창준은 이 정도로 타협을 지어놓고 귀국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오자 미국의 컨티넨탈 회사에 대해서 <계약조건에 따라 대한중석과 컨티넨탈과의 계약은 1961년 1월 23일부터 만료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발견해 놨으니 컨티넨탈과 손을 끊겠다는 통고를 했다. 이 통고를 받은 미국의 컨티넨탈에서 사람을 보냈다. 중석의 국제시세가 떨어지고 판로가 좁아졌다고는 하나 세계무역시장에서는 아직도 이것이 괜찮은 장사의 한 품목이었다. 컨티넨탈에서 보내온 사람은 재계약을 요구하고 나섰다. 컨티넨탈에서는 종전의 계약이 불만이라면 계약조건을 한국측에 조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체결해도 좋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문창준은 컨티넨탈에서 이렇게 매달리자, <중석의 국제시세가 하락하고 판로가 좁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얼마든지 팔아먹을 길이 있는 모양이다>는 생각이 들어 중석판매에 자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미국의 필립 브러더스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다. 이 회사는 미국과 영국의 합작회사였다. 필립 브러더스에서는 <실력자는 주요한이다>고 생각했던지 처음부터 문창준은 도외시하고 주요한에게 매달렸다. 어느 하루 주요한이 상공부 장관실로 문창준을 불렀다.
"중석판매에 관한 문젠데, 어떻게 일본의 어느 회사하고 계약을 맺기로 했소?" 하고 물었다.
"계약을 맺기로 했다면 당연히 먼저 장관님께 보고를 올렸을 게 아니겠습니까? 도쿄식품이 중석의 일수판매를 계약하기를 희망하기에 거래조건을 제시해 달라고 하고 지금 그걸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일수판매계약을 희망해 왔는데 만나서 계약조건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소?"
"컨티넨탈에서도 지금 사람이 와 있습니다. 종전의 계약이 불만이었다면 좀더 유리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해도 좋다고 합니다. 도쿄식품이 어떤 거래조건을 내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회사에서 제시하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컨티넨탈하고 재계약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상도의상으로 봐도 그렇고......."
문창준이 이렇게 말하자 주요한이 펄쩍 뛰었다.
"컨티넨탈은 절대로 안 돼요. 그 자들은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어 이승만으로 하여금 독재정치를 할 수 일이 있어도 컨티넨탈하고는 재계약을 하지 않도록 하시오."
컨틴네탈하고의 재계약을 완강히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컨티넨탈에서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을 문창준은 주요한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컨티넨탈과의 계약조건이 좀 불합리한 점이 많다 했더니 그런 흑막 때문이었구나.) 문창준은 기가 막혔다. (이것 자칫 잘못했다간 장면 박사한테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자도 있을는지 모르겠는걸.)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쿄식품이 어떤 성격의 회사인가 하는 것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지 않은 점이었다. <무역은 춤춘다.> 19세기의 국제무대에서는 <회의가 춤춘다>고 했지만 20세기의 국제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무역이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세계가 동.서 두 진영으로 갈리자, 무역은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 국가의 상인들은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공산주의 국가에 무기를 팔아먹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도쿄식품이라는 회사도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슨 장사고 서슴지 않았다. 이 회사는 전전의 회사였다. 소련과 중공에 쌀과 그 밖의 식료품을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부(富)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문에 도쿄식품은 <용공상사>라는 레테르가 붙여져 있었다. 도쿄식품은 어느 나라에 중석을 팔아먹을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대한중석과 계약만 체결되면 공산주의 국가와의 무역은 중단하겠다>고 할 정도로 대한중석과의 계약을 열망하고 있었다. 도쿄식품이 대한중석과의 거래조건을 마련해 가지고 서울로 날아온 것은 1960년 12월 28일이었다. 이 회사가 내건 거래조건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였다.
(1) 앞으로 1년간 4백 톤 이상의 중석 중단될 때에는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2) 계약의 해제는 50일 전에 쌍방 협의 아래 하고 도쿄식품은 선도금으로 백만 달러, LC 개설시에는 백만 달러를 각각 대한중석 앞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토록 한다.
이런 호조건에 도쿄식품은 부대조건으로 중석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선박은 한국선적의 선박을 쓰도록 하겠다고 되어 있었다. 이 부대조건은 한국측에서 허리를 굽혀 감사해야 할 조건이었다.연간 4백 톤의 중석을 운반하는 데서 얻어지는 수익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잠재실업자까지 합쳐져 3백만이나 되는 실업자군에게 다소나마 일자리를 얻어줄 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있었다. 거래조건을 문서화해서 가지고 온 사람은 도쿄식품의 업무부장인 야스다 가오추이었는데, 그는 구두로 이런 부대조건을 내세우기도 했다.
"한국은 3면이 바다라 많은 수산물이 생산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수판매계약이 성립되기만 하면 한국에게 통조림공장과 냉동공장 설치를 비롯해서 수력발전 사업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줄 생각입니다."
야스다의 말이 통조림공장이나 냉동공장 또는 수력발전 사업을 공동으로 벌이자는 얘긴지 아니면 공짜로 지어 주겠다는 얘기인지 우선은 애매했으나 어쨌거나 도쿄식품 사장인 리끼이시가 병구를 이끌고 서울로 날아온 것은 해가 바뀐 1월 10일이었다. 일본에서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는 경제시찰단의 방한 예정일보다 훨씬 앞서 혼자서 내한했던 것이다. 문창준은 그를 맞아 비밀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이 이 비밀회담에서 어떤 문제를 논의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대한중석의 불하문제가 논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울에서 도쿄로 타전한 비밀전보문에 이 사실이 나타나 있다고 하지만 글쎄, 문창준이 제2의 이완용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중석 같은 전략물자를 생산 판매하는 협력하려고 했을까? 아무래도 이것은 군사 쿠데타 정권에서 조작해냈던 것 같은 느낌이 짙기만 하다. 하여간에 1월 24일 대한중석 상무인 조경규와 도쿄식품 업무부장인 야스다 사이에 가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런 지 이틀 뒤에 신풍회의 함종빈이 <1백만 달러 코미션>설을 터뜨렸던 것이다.
"집권당 소속의 의원이 폭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인 것이 틀림없다. 민의원은 지체없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
야당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여.야 동수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먼저 상공장관부터 불러요. 조사에 착수하는 것이 좋겠소."
주요한이 조사위원회에 나왔다.
"장관은 대한중석이 도쿄식품인가 하는 회사하구 중석 일수판매 계약을 체결하려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소?"
"알고 있소."
"그 도쿄식품인가 하는 회사에서 백만 달러 코미션을 내놓은 모양인데, 도대체 그 코미션은 누가 받아서 챙겼소? 장관이요, 대한중석이오?"
"글쎄요, 백만 달러 코미션 운운하는 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소."
"장관께서 모른다 그 소리요?"
"그렇소, 모르오."
"장관이 모를 리가 있소. 장관은 위증을 하고 있어요!"
주요한은 태연히 배짱을 튕겼다.
"내가 위증을 하는 것 같으면 조사위원회도 구성됐겠다, 조사를 해보면 알 게 아니오."
때마침 도쿄식품의 업무부장이 서울에 와서 아직 체류중에 있었기 때문에 조사위원들은 야스다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증인심문을 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백만 달러 선도금 문제와 냉동공장 건설을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사위원들은 이 두 가지 문제에 조사의 초점을 맞추고 조사에 착수했다.
"대한중석은 지금까지 백만 달러씩이나 되는 거액의 선도금을 받고 계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식품에서는 굳이 백만 달러씩이나 되는 여기에 무슨 흑막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야스다는,
"대한중석은 지금까지 미국 회사하고만 거래를 해오지 않았소? 우린 어떻게 해서든 중석의 일수판매계약에 욕심이 나서 백만 달러의 선도금을 주려고 했던 거요. 이 점은 가계약서에도 명시되었소. 물건 값을 주는 것도 무슨 잘못인가요?" 하고 오히려 반문했다. 야스다는 백만 달러 선도금을 주겠다고 한 계약상의 문제를 트집잡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되물었다.
"우리 회사에서 어떻게 해서든 대한중석하고 계약을 체결하고 싶어 백만 달러를 미리 물건값으로 내놓겠다고 반하는 행동인가요? 내가 알기로는 우리 일본은행의 금리는 연리 7부입니다만 한국의 은행에서는 연리 2할까지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금리고 따져도 벌서 얼맙니까? 한 달이면 근 2만 달러나 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국회에선 그런 금리는 필요없다는 말씀인가요?"
이렇게 되면 도리어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결과가 된다. 이런 망신은 면해야 했다. 그래서 한 조사위원이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책상을 탕 치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 대한민국의 국회를 모욕하는 따위의 발언은 삼가하시오. 우리가 조사한 바는 한국의 금리가 높으니까 백만 달러를 미리 한국은행에 예치해 놓고 그 이자를 도쿄식품과 대한중석에서 각기 반반씩 사실이지요? 진실을 말하시오, 진실을!"
그 말을 들은 야스다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의원님도 참, 백만 달러는 대한중석 앞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해 놓는 건데, 어떻게 금리를 반분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중석 앞으로 예치해 놓으면 대한중석의 장부에 계정되게 되는데 말입니다."
그건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대한중석 앞으로 예치해 놓았으니 금리도 당연히 대한중석의 장부에 오르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답변에 궁해진 조사위원들은 이번에는 냉동공업을 후원해 주겠다는 것은 무슨 속셈에서였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것도 대한중석과 욕심에서 그런 제의르 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야스다는 그 이상의 내용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가 그 이상한 내용을 증언하기를 거부하니 아무리 민의원 조사위원들이라 하더라도 강압적으로 그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조사위원들은 끈질기게 조사활동을 벌인 끝에 다음과 같은 의심 짙은 내용을 밝혀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창준이 일본으로 떠난 것은 11월 20일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이틀 전인 11월 18일 민주당의 실력자인 오위영이 한발 앞서 일본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을 한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는 실력자였다. 장면 다음의 제2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오위영이 하필 어째서 이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조사위원들은 문창준의 도일(渡日)과 때가 비슷한 데에 주목하게 되었다.<구리다. 구려!> 아무래도 구린내가 풍겨졌다. 조사위원들은 오위영이 무엇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공식적으로는 <신병치료차>라고 되어 있었으나, 외무부에서 발급받은 여권에는 <일본 경제계 시찰>로 되어 있었다. 조사위원 한 사람의 머리에 문득 오위영의 사위인 강영욱이 한국 (도쿄식품에서는 계약만 체결되면 냉동공장과 게 통조림공장을 세워 주겠다고 언약했다 했겠다? 그렇다면......? 그렇지, 오위영이 막후에서 작용했어. 대한중석이 도쿄식품과 중석 일수판매계약을 체결하려 하는 것을 교묘히 이용해 사복을 채우려 했던 거야) 하는 심증이 갔다. 조사위원회에서는 강영욱의 최근 얼마 동안의 동정을 조사해 보았다. 오위영이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가 일본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강영욱이 도쿄식품의 수산부장과 만난 사실이 있는 것을 밝혀냈다. (흐흠, 역시 추측한 대로였어.) 오위영이 막후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힌 조사위원들은 문창준을 다시 불러 물었다.
"오위영 의원을 만난 일이 있지요?"
"없습니다."
문창준은 부인했다.
"문 사장 위증죄가 드러나는 날엔 그 체벌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조사위원들은 엄포를 놓기도 했다.
"만나지 않고도 만났다고 진술한다면, 그것도 위증죄가 되잖겠습니까?"
문창준은 역습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오위영 의원은 민주당 정권의 실력자인데 국책회사의 사장인 문 사장이 도쿄 하늘 아래 똑같이 체류해 있으면서 만나지 않았다니? 이거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까?"
"상식이 진리일 순 없잖아요? 내가 없습니다."
문창준은 끝까지 부인했다.
"그럼 도쿄식품에서 중석 일수판매계약만 성사되면 게 통조림 공장하고 냉동공장을 설치해 주겠다고 구두 약속을 한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옳겠습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쪽 호의로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야당 조사위원들은 노여움을 터뜨렸다.
"이보시오, 문 사장. 게 통조림 공장이 어디 한두 푼으로 세울 수 있는 공장이오? 엄청난 건설비와 시설비가 소요되는 공장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세워 주겠다고 했다면 이건 단순한 호의는 아니잖소?"
문창준이 다시 또 역습으로 나왔다. 회사하고 중석의 일수판매계약을 체결하고 중석을 수출해 왔습니다만 컨티넨탈 회사에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나 해준 것이 있었던가요? 도쿄식품과 중석 일수판매계약만 체결해서 게 통조림 공장이다, 냉동 공장이다 하고 세워 주면 그건 우리한테 이로운 일이지 해가 되는 일이던가요? 함종빈 의원 말대로 우리가 백만 달러의 코미션을 받아먹었다 해봅시다. 그래도 도쿄식품에서 우리한테 두 개의 공장을 세워 주겠다고 구두언약을 할 성싶습니까?"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중석 4백 톤의 일수위탁판매로 얼마만큼의 이익을 올릴 수 있는지는 몰라도 백만 달러나 되는 코미션을 내놓고 거기에 또 막대한 자금이 할 리는 없었다. <중석사건> 조사위원회는 각각 여.야가 별도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해서 국회(민의원) 본회의에 내놓았지만, 함종빈의 폭로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제시하지를 못했다. <태산 명동에 서일필>격인 소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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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빵과 서커스'
후세 사람들이 로마인을 비난할 때 맨 먼저 들먹이는 것이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다. 로마인은 국가로부터 식량을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었고, 역시 국가가 제공하는 투기 따위를 즐기면서 놀고 지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부모와 세 자녀로 구성된 일가족이 있다고 하자. 세 아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10세가 넘었지만 그중 하나는 딸이고, 10세가 되지 않은 막내는 아들이다. 이 다섯 식구 가운데 '소맥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장남뿐이다. 이들 두 사람이 공짜로 받을 수 잇는 밀은 매달 10모디우스, 약 60킬로그램이다. 하루 배급량은 2킬로그램이 된다. 배급받는 것은 밀가루가 아니라 탈곡만 끝낸 상태의 밀이었으니까, 이것을 우선 가루로 빻는 데 비용이 든다. 가루로 빻은 뒤의 요리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빵으로 구워서 먹는 법. 로마인들은 빵집에 밀가루를 가져가서 구워달라고 부탁했다. 둘째는 야채나 치즈를 넣어 죽처럼 걸쭉하게 끓여서 먹는 법. 어느 방법에도 돈이 든다. 첫 번째 경우에는 빵집에 돈을 주어야 하고, 두 번째 경우에는 죽에 섞을 재료를 구입하는 비용과 연료비가 든다. 이런 비용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해도, 밀 2킬로그램을 사용한 요리로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칼로리는 4천 칼로리 안팎이었을 것이다. 일가족 다섯 명이 이것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생활보호법에 따른 빈민구호책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대상자가 일자리를 얻어 수입을 얻기 시작하면 지원이 중단된다. 하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직업을 갖고 있어도 밀을 공짜로 배급받을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지 않는다. 일가족 다섯 명이 4천 칼로리만 섭취하면 굶어죽는 것만 간신히 면할 뿐이고, 그 이외에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신자도 별차이가 없다. 하루에 1킬로그램의 밀은 공짜지만, 공동주택에 방 한 칸이라도 빌리면 방세를 내야 한다. 게다가 옷가지도 사야 하고, 우선 밀가루만 먹다가는 영양실조로 결국 병에 걸린다. 어떻게든 일을 해서 수입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되풀이 말하지만, 국가가 보장해준 것은 적어도 굶어죽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빵과 서커스'는 로마인 자신이 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풍자작가의 과장이고, 그런 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러고 이 '소맥법'이 존재했기 때문에 인구 백만의 도시 로마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한 제국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지방도시나 속주에도 이와 비슷한 사회복지가 보급되었기 때문에, 그 광대한 로마 제국에서 기아로 인한 집단 사망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지 않을까. 매일처럼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기아 사태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현대로부터 무려 2천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배급이라 해도, 그 수가 20만 명에 이르면 국고 부담이 커진다. 밀 1모디우스의 시가는 평균 10세스테리티우스였다지만, '소맥법'이 국고에 주는 부담을 시가로 계산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밀은 네로 시대부터 비과세였다. 따라서 생산자 가격에 덧붙는 것은 '소키에타스'가 소유하고 있는 배에 밀을 실어서 오스티아 항에 하역할 때까지의 수송비다. 생산비와 수송비를 전부 합친다해도, 1모디우스의 가격은 6세스테르티우스 안팎이었을 것이다. 20만 명에게 1년 동안 밀을 배급하는 데 필요한 총량은 1천 200만 모디우스. 여기에 드는 비용이 7천 200만 세스테르티우스라면, 로마 제국의 사회복지비는 로마군 전체 장병에게 지급하는 급료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한 시책은 상당한 비용을 필요로 한 셈이다. 그래도 황제들은 이 정책을 계속 시행했다. '소맥법'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밀에 대해서도 공급량을 확보하고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항만이나 창고 설비를 완비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황제의 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정보장과 식량보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경기장에서 야유를 당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하지만 현대 국가의 복지제도를 알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복지에는 의료와 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로마인은 이 두 가지를 국가의 책무로 생각지 않았다. 다만 예외는 있었다. 군단기지라면 어디에나 마련되어 있는 군병원이다. 전선의 군단기지에는 이렇게 시설이 완비된 병원이 있었지만,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큰 병원이 없다. 시민의 환심을 사고 싶으면, 황제들은 다투어 큰 병원을 지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들이 다투어 건설한 것은 큰 병원이 아니라 큰 목욕탕이었고, 여름철에도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상수도였다. 로마 제국 시대의 수도 로마를 복원한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공공시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학교다.
교육과 의료
고대 로마인이 의료와 교육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에 이미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의사와 교사에게는 본인의 출신지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준다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로마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곧 속주세라는 직접세를 면제받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생각은 직접세를 면제해줄 테니까 적정한 보수를 받고 의료나 교육에 종사하라는 것이었다. 현대의 일본에 비유해서 말하면, 출신 국가가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독일이든 인도든 관계없이 일본 국적을 주고, 일본에서의 소득세를 면제해줄 테니까 일본에서 의료나 교육에 종사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지적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특전을 주어 그 직종의 자유시장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경쟁원리를 도입하여 그들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비용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대규모 국립병원과 공립학교는 없지만, 소규모 진료소나 사설 학당은 난립하게 되었다. 의술의 신 아이스쿨라피오스(그리스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 딸린 진료소나 의사의 사택 일부가 질병 치료에 활용되었을지도 모르고, 신전이나 포룸이나 회당의 한 귀퉁이가 사설 학당 자리로 제공된 사실은 기록에도 남아 있다. 카이사르 포룸에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것으로 보이는 낙서까지 남아 있다. 카이사르의 이런 방식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줄곧 유지되었다. 의료와 교육을 민간에 맡긴 이 방침이야말로 로마의 사회복지비가 국가 재정을 압박하지 않은 요인이 아닐까. 요컨대 로마 제국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은 모두 민간에 위탁하는 방침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작은 정부'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이 방식이 로마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과 의료에 대한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이 그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인들은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의욕과 자질과 경제력 여력이 있는 자가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예라 해도 의욕과 자질이 있으면 주인의 아들과 함께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또한 로마 사회에서는 교육 수준의 높낮이가 경력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역대 황제들 중에도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던 아테네나 로도스 섬에 유학한 사람은 없다. 다만 역대 황제들은 제국의 수도 로마에 국립도서관을 정비하는 데에는 열심이었다. 도서관은 그 자체가 이미 연구소다. 또한 원로원 의사록을 포함한 로마의 공식 기록은 모두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타불라리움'(의역하면 '공문서 보관소')도 연구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복한 가정은 자녀 교육비를 아끼지 않는다. 또한 도서관에서 연구나 집필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면 직접세 면제라는 특전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환경이 갖추어지면 사람은 저절로 모여들게 마련이다. 속주 출신의 유망한 젊은이들은초목이 바람에 휘듯 로마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로마의 아이들을 가르쳐 학비를 벌기도 했다.
의료에 관한 로마인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생사관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국이라는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다친 사람에게는 완벽한 치료가 보장된다. 하지만 수명은 이미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감수한다. 그렇다면 나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로마 황제 가운데 수명을 늘리려고 기를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고령자가 병으로 쓰러져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치료를 거부하고 곡기를 끊고 자살을 선택한 경우가 적지 않다. 로마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명을 늘리겠다는 생각과는 인연이 없었다. 사회적 지위나 지적 수준이 높을수록, 두뇌나 정신이나 육체가 다 소모된 뒤에도 계속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동안 충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이 로마인들에게 깊숙이 침투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리스 의학의 시조인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도 계속 살아 있었다. 병에 걸린 뒤에 치료하기보다는 우리몸이 원래 갖추고 있는 저항력을 높이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로마 황제들이 대형 병원보다 대형 목욕탕이나 상수도 시설을 건설하는데 열심이었던 것도 이 사상의 귀결이 아닐까 여겨진다.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습관은 면역력을 증진시킨다. 식량을 보장하는 것은 체력을 유지하여 병을 멀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로마에는 공중목욕탕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아그리파가 기증한 것이고, 또 하나는 네로 황제가 기증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도니 티투스는 콜로세움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세 번째 대형 목욕탕을 건설했다. 로마시대의 목욕탕을 '테르마이'(thermae)라고 부르는데, 입욕과 마사지 설비만이 아니라 운동장과 도서관, 게임을 즐길수 있는 오락장, 정원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여가 선용을 목적으로 하는 종합시설이었다. 몸을 깨끗이 씻고 마사지로 혈액순환을 좋게 한 다음에는 각자 기호에 따라 장기 게임을 즐기든, 필드에서 공놀이에 열중하든, 독서를 하든, 산책을 즐기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카이사르는 의사에게 직접세 면제라는 특전을 주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마사지사에게도 같은 특전을 주었다. 로마인들이 마사지를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이지만, 마사지의 효용성을 중시한 대우이기도 했다. 목욕탕은 동틀녘부터 시작된 하루일이 끝나는 오후 2시께에 문을 열어 해질녘에 문을 닫았다.
이 로마 특유의 '목욕탕' 입장료는 남자가 0.5아시스. 여자가 1아시스였다. 여자가 더 비싼데에는 여자인 나도 불만이지만, 여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는 무료였다. 그 밖에 병사, 공직에 종사하는 해방노예와 노예도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목욕탕'은 원로원 의원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또한 특별한 축하행사가 있는 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 입장의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0.5아시스는 밀 300그램의 가격에 해당한다. 온탕, 열탕, 냉탕 등 세 종류의 욕탕과 그 밖의 온갖 설비를 갖춘 넓고 호화로운 목욕탕을 이 정도 입장료로 운영하기는 어렵다. 공영이 아니면 계속 운영할수 없을게 분명하다. 여가 선용과 위생수준 유지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공적 자금을 지출해서라도 계속 운영하게 했을 것이다. 이 로마식 목욕탕은 로마 제국 안이라면 어디에나 있었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중소도시에 불과한 폼페이에도 병원 유적은 없지만 목욕탕 유적은 있다. 제국의 북쪽 변경인 영국의 하드리아누스 성벽 근처에 남아있는 목욕탕 유적을 보았을 때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얕은 여울가에 있어서 마치 일본의 온천장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구조는 어디까지나 로마식으로 튼튼하게 지어졌고, 짜임새도 논리적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연간 예산이다. 에산에는 그 나라 국민들의 사고 방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의 '예산'도 로마인의 사고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세출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로마인의 생활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세금의 세율을 올리면 사회 불안 요인이 될 게 뻔하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칼리굴라나 네로도 그것까지는 겁나서 손을 대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갈리아 제국 소동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라인 강 방위선을 재건하고, 브리타니아를 제패하고, 직할 통치를 실시할 수밖에 없는 유대에 1개 군단을 상주시키는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어떻게든 조세 수입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후세가 최고의 국세청장감으로 평가하는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재원을 찾아서
베스파시아누스는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였다. 상식인이 '구조조정'을 강요당했을 경우 맨 먼저 하는 일은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서기 73년, 베스파시아누스와 아들 티투스는 재무관에 취임한다. 황제와 황태자가 함께 제국 전역에서 실시되는 국세조사(켄수스)를 진두 지휘하게 된 것이다. 제국 전역에 걸친 국세조사는 제정이 된 뒤 한 세기 동안 베스파시아누스 시대를 포함하여 세 번 실시되었다. 서기 14년-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가 임기 1년 반인 재무관(켄소르)에 취임했다. 서기 47년-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그의 둘도 없는 협력자였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재무관에 취임했다. 서기 73년-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제위계승자인 티투스가 함께 재무관에 취임했다. 고대에 국세조사를 실시한 민족은 로마인뿐인데, 그것은 이런 조사의 원래 목적이 병역에 끌어낼수 있는 나이의 성인 남자-즉 17세부터 45세 까지의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정으로 바뀐뒤에는 속주까지 포함한 제국 전역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조사로 바뀌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이 실시한 '국세조사'는 오늘날에도 몇 년에 한번씩 실시되는 국세조사보다는 오히려 해마다 실시되는 국세조사보다는 오히려 해마다 실시되는 세금 확정신고의 색체가 짙었다. 조세 실무를 민간기업에 맡길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소득을 조사하여 세금 액수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결정된 세금을 징수하는 일만 맡았기 때문이다. 세금 확정신고와 비슷한 국세조사가 매년이 아니라 30년의 간격을 두고 실시된 것은 조사 자체가 엄청난 수고를 필요로 한데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경제 상태의 추이가 지극히 완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의도가 국세조사를 통해 조세 수입을 늘리는데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지난번에 국세조사를 한 지 벌써 26년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은 1년의 내란기를 제외하면 경제활성화에 유리한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동안 경제력이 향상 된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알수 있는 일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조세 수입을 늘리기 위해 생각해낸 또다른 방책은 국유지 임차료 수입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기원전 59년에 카이사르가 성립시킨 '농지법'에는 국유지를 임차할 수 있는 면적에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이 법의 목적이 중소 규모의 자작농을 진흥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에게는 500유게룸(125헥타르).그 밖에 아들 명의로 아들 1인다. 250유게룸. 다만 일가족이 임차하는 총면적은 1천 유게룸을 초과할수 없다. 따라서 국유 경작지를 분할할 때 의 최소 단위는 250유게룸(62.5헥타르)이 된다. 또한 만기 제대병에게 퇴직금으로 주어진 토지의 하한선은 200유게룸(50헥타르)이었던 모양이다. 국유지를 빌려주거나 공여할때의 최소 단위가 50헥타르 였다면, 그보다 좁은 토지는 빌려주거나 공여할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토지가 이 분할법에 적합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지에 '자투리땅'이 산재해 있었을게 분명하다. 그리고 200유게룸에 미달하는 토기는 거기에 인접한 땅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경작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임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류상으로는 임차지가 아니니까 국가에 임차료를 낼 의무가 없다. 이런 상태로 130년이 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한일은 이 '자투리 농지'오 일일이 측량하여 임차료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조세 수입이 상당히 늘어났다고 한다. 조세 수입을 늘리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열의는 마지막으로 '벡티갈 우리나이(Vectigal urinae)라는 세금을 신설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가십을 좋아하는 로마인들이 가장 많이 도마에 올려놓은 이세금은 '오줌세'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 위생관념이 강했던 로마인은 하수도 정비에 열심이었지만, 시내 곳곳에 공중변소를 설치하는데에도 열심이었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가 고안한 '오줌세'는 공중변소 이용자에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 공중변소에 모인 오줌을 수거하여 양털에 포함되어 있는 기름기를 빼는 데 사용하고 있는 섬유업자에게 부과되었다. 공짜 오줌을 사용하여 이윤을 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기에서 아들 티투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버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의 코앞에 은화 한 줌을 들이대면서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티투스가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황제는 말했다. "나지 않느냐. 이건 오줌세로 거둔 세금인데." 오늘날에도 유럽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라는 이름이 그 나라 공중변소의 통칭으로 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라고 말하면, 로마황제가 아니라 공중변소를 가리키는게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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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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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견훤의 출생지 - 지렁이의 건국설화
백제왕 견훤. 그는 신라 말기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옛 백제 유민들의 한을 풀기 위해 일어섰던 영웅이다. 자욱한 전장의 먼지 속을 30여 년 동안 헤매며 후삼국을 통일할 꿈을 다지던 그였지만 결국 자중지란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에게 있어서 왕이라는 칭호는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포부는 한때나마 옛백제 유민들의 열렬한 기대를 모았다.
서로 다른 출생설
견훤의 출생에 얽힌 얘기는 신기한 설화로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출생지는 상주라는 설과 무진주(현 광주)라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는 견훤이 상주 가은현(현 문경시 가은면) 사람이며, 서기 867년(신라 경문왕 7년)에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본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으로 성을 삼았다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로 상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장군이었다. 또한 삼국유사는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라는 설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견훤이 신라의 무인이 아니라 광주지방의 토호로서 세력을 얻어 후백제를 건국했다는 후세의 설도 있다. 견훤의 출생담은 '야래자전설'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 줄거리는 약간씩 변형되지만, 대개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곳의 양반집에 과년한 처녀가 살았다. 그런데 밤중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립동이가 처녀방에 들어와 잠을 자고 갔다. 처녀가 임신을 하자 처녀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추궁했다. 처녀는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밤이면 와서 자고 갔다"고 털어놓았다. 부모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두었다가 그 남자의 옷에 꽂아두라"고 일러 주었다. 그대로 했다. 처녀가 이튿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보니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처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견훤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는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문경시 가온면 갈전2리에 있는 아차마을(또는 아개마을)의 금하굴에 얽힌 설화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곳은 삼국유사가 밝힌 바로 그 출생현장이다. 점촌에서 문경 쪽으로 가다가 마성에서 가은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가은면 소재지에서 이내 가은천을 건너, 강따라 1km쯤 올라가면 이 마을이 나온다. 마을 나이든 분들의 얘기에 의하면 아자개는 이 아개마을에서 큰 부자로 살았으며 그 지렁이가 살던 굴이 금하굴이었다는 것이다. 그 굴에서는 늘 풍악소리가 났다고 한다. 금하굴은 아개마을의 남쪽 속칭 남산 아래에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지나, 은행 나무 고목이 있는 외따로 떨어진 집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일제침략기에 세워진 금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 있는 집에는 올해 88세인 이귀현 할머니가 막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굴은 이씨 집의 바로 뒤편에 있다. 이곳은 남산의 묏부리가 뻗어내리다 멈춘 봉긋한 곳으로, 굴은 지표에서 80도의 각도로 3m쯤 지하로 뚫려 있다. 굴의 입구는 좁아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금하굴 속에서는 굉장한 소리가 났다고 하며 이 굴이 온전히 뚫리면 아개마을의 운수가 크게 열린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해방 후 이 마을 사람들이 막힌 굴을 뚫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굴 속에 들어가면 물소리가 들린다. 굴 밖을 감돌아 아개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의 지하수가 이 굴 밑을 흐르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귀현 할머니는 "전에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이 굴 속에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다"며, "깊이가 장정 두 명의 키 정도 되기 때문에 사다리 두개를 이어서 놓고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굴 입구는 좁지만, 안에 들어가면 몇 사람이 앉을 정도의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 이 할머니는 "특별히 쓰일 일도 없고, 또 후미진 곳이라 찾는 사람도 없어 버려진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전국에 분포된 야래자 전설
이밖에도 야래자 전설은 많다.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가 있는 지룡산 역시 견훤의 출생지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에서는 '지룡'이 '지렁이'와 같다는 점에 근거한 지명설화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운문사 자리에 견훤의 모친이 살았으며 지룡산의 지렁이가 밤마다 잠자러 내려왔다고 한다. 한편 공주시내의 태봉산(현재 산은 깎여 없어졌다)이 견훤의 출생지라는 전설도 있다. 전북 전주시내에도 '야래자전설'이 전해온다. 전주고교와 옛 역전 사이에 있는 '물왕멀' 동네가 그곳인데, 지렁이의 화신인 견훤이 여기에 도읍하여 '물왕의 마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밖에 충북 영동군 영동읍, 충남 연기군 서면 쌍류리 등을 비롯하여 강원도 횡성, 전북 익산, 경남 동래, 함북 회령, 함북 성진 등에도 '야래자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곳에 '야래자전설'이 전해오며, 그것이 곧잘 견훤의 출생과 결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견훤이라는 인물을 영웅시하려는 백제 유민들의 열망의 한 표시일 수도 있으며, 견훤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이려는 후백제인의 의도도 작용된 듯하다. 또는 백제의 건국신화를 흡수한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렁이는 용의 축소 형태이다. 지렁이의 아들인 견훤은 결국 용의 아들로 자처, 왕으로서의 개국신화를 열어 보이려고 스스로 지렁이의 아들임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백제 재건의 야망
견훤은 백제 패망 후 3백 년 만에 백제 옛 땅에서 백제를 재건했다. 백제 옛 땅의 백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그는 급속도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백제를 패망시킨 신라에 대한 복수라는 명목으로 신라 궁중을 유린, 포석정에서 애장왕을 자결케하고 그 왕비를 겁탈했으며, 결국 신라인의 적개심에 불을 질렀다. 그가 성장한 시기는 신라에서 지방의 호족이 크게 대두되어 장군이나 성주로 성장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심던 시기였다. 20여 세에 군인이 된 그는 서해안 방비에 용감했다는 이유로 비장이 되었다. 당시 신라 정부는 방향감감이 없고 중앙집권 체제도 흔들려 나약했다. 진성여왕 3년에 기선과 양길이 죽산과 원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원종과 애노 등은 상주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야심만만한 견훤은 892년 20대의 청년장군으로 군사 5천을 이끌고 광주를 공격, 점령하여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한다. 기반을 닦은 그는 양길을 회유하여 전주에 다다랐다. 그는 백제의 후계자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면서 전주에 도읍을 정한다. 이 시기에 궁예도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바야흐로 40년간의 후삼국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의 세력은 경주를 침범한 3년 후(930) 안동전투에서 참패한 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더욱 신흥 고려와의 싸움에서 참패를 거듭했으며 신하들이 고려로 투항하기 시작, 공주 이북의 30여 개 성이 고려로 넘어가는 불운이 겹쳤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70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의 계기는 의외로 내부에서 나타났다. 그의 10여 명의 아들 중 왕위를 네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장남 신검이 이에 불복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고려의 왕건에게 신세를 지다가 등창이 터져 죽었다. 백제를 재건하려던 그의 원대한 꿈은 그의 죽음으로 허무한 끝을 맺었다.
[아차마을 금하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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