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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5호 - 2024.07.21 일요일(음력 : 06.16)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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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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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의심할지 모르나 당신의 행동은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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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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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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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와 ‘로브스터’
영어나 프랑스어 등 외국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국어처럼 쓰이는 단어를 외래어(外來語)라고 하는데, 국어를 ‘한글맞춤법’에 맞게 표기해야 하는 것처럼 외래어를 표기할 때에도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표기해야 한다. 일례로 ‘바닷가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 ‘lobster’를 대중들은 ‘랍스터’라고 사용해왔지만 이는 틀린 표현이었고 ‘로브스터’가 바른 외래어 표현이었다. 외래어표기법의 영어 표기 세칙에 따르면 어말과 모든 자음 앞에 오는 유성 파열음([b], [d], [g])은 ‘으’를 붙여 적도록 되어 있는데, ‘lobster[l?bst?]’의 ‘b’가 유성 파열음이기 때문에 ‘으’를 붙여 적어 ‘로브스터’라고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팀 이름인 ‘시카고 커브스(Chicago Cubs)’에서 ‘새끼 곰들’을 뜻하는 ‘Cubs’의 ‘b’가 유성 파열음이기 때문에 ‘으’를 붙여 적어 ‘커브스’라고 적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만약 이 팀의 이름을 ‘시카고 컵스’로 적게 되면 팀의 상징물인 ‘새끼 곰(cub)’을 물을 마실 때 사용하는 ‘컵(cup)’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시카고 커브스’로 적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닷가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 ‘lobster’도 ‘로브스터’로 적어야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다수 언중들은 ‘로브스터’ 대신에 더 익숙한 말인 ‘랍스터’를 사용해왔다. 이는 ‘lobster’의 영국식 영어 발음인 ‘로브스터’보다 미국식 영어 발음인 ‘랍스터’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어도 생명체와 같아서 표준어가 아니지만 ‘짜장면’처럼 대다수 언중들이 압도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결국 사전에 등재할 수밖에 없다. 국립국어원은 올해 1분기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와 있는 표제어를 일부 수정했는데, ‘랍스터’도 ‘로브스터’의 복수 표기로 인정했다. 즉 ‘바닷가재’를 뜻하는 외래어 표기로 ‘로브스터’와 ‘랍스터’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장면’과 ‘짜장면’처럼 ‘로브스터’와 ‘랍스터’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돼 이제는 둘 중에 어느 것을 사용해도 되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선생님이 너 오시래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은 높임말 때문에 한국어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높임법을 어려워하는 것은 외국인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높임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선생님이 너 교무실로 오시래.” 학창 시절 누구나 들어봤음 직한 말인데, 흔하게 저지르는 높임법 실수 중 하나다. 동사나 형용사에 ‘-시’를 붙이는 것은 높임말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동생이 왔다.’는 문장의 주어를 어머니로 바꾸면 ‘어머니가 오셨다.’라고 ‘-시’를 넣어서 말해야 한다. 이때 ‘-시’는 서술어의 주체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선생님이 너 오시래.”가 어색한 이유는 ‘오는’ 동작의 주체, 즉 오는 사람이 선생님이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높여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여기서 ‘-시’는 잘못 쓰였다. 그러면 불필요한 ‘-시’를 빼고 “선생님이 너 오래.”라고 말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선생님을 높이는 장치가 없어서 공손하지 못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오다’의 주체인 친구를 높일 필요는 없지만 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높여야 한다. 여기서 ‘오래’는 ‘오라고 해’가 줄어든 말이다. 따라서 선생님을 높이려면 ‘하다’를 높여서 ‘선생님이 너 오라고 하셔’, 또는 줄여서 ‘오라셔’라고 해야 한다.
어떤 행사에서 사회자가 ‘호명하시는 분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호명하다’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므로, 호명하는 사람은 사회자 자신인데, ‘-시’를 넣어서 존대를 하고 있다. ‘제가 호명하는 분은’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호명되시는 분은’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다.
‘내가 아시는 분’이라는 표현도 많이들 쓰는데, 이 말도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있으므로 옳지 않다. ‘내가 아는 분’이라고 해야 맞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브렉시트
요즘 ‘브렉시트(Brexit)’라는 말이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Britain’과 ‘Exit’의 일부를 따서 만든 것으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국내에서는 서울의 지하철 안전문(스크린도어) 사고와 관련하여 ‘메피아’라는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메트로’와 ‘마피아’의 일부를 따서 만든 말이다.
이 ‘브렉시트’ ‘메피아’와 같이 단어의 일부를 따서 만든 말을 혼성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스모그(smoke+fog) 레포츠(leisure+sports) 브런치(breakfast+lunch)’ 등처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말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단어는 ‘메피아’ 외에도 ‘모티켓(모바일+에티켓) 줌마렐라(아줌마+신데렐라) 맛캉스(맛+바캉스)’ 등처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또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주로 외래어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반쪽이라도 외래어인 경우가 보통이다. 그렇지 않은 예로는 ‘라볶이, 차계부, 쌈추’ 등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우리말에서 단어의 일부를 따서 새말을 만드는 주된 방식은 ‘노조(노동조합), 몰카(몰래 카메라)’ 등처럼 첫 음절을 따서 만드는 것이다. 서구어에서 ‘EU(European Union)’처럼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드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단어는 혼성어와 구별하여 두자어라고 한다.
이에 비하면 혼성어는 우리말의 주력적인 조어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외래어를 중심으로 점점 그 세력권을 넓혀 가고 있는데, 이러한 조어법이 얼마나 보편화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언젠가 ‘라이거’를 ‘사랑이(사자+호랑이)’로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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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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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아버지 제사 - 천상병
아버지 제삿날은 음력 구월 초사흗날
올해도 부산에 못 가니
또! 또!
아버님 영혼께서 화내시겠습니다.
가난이 천생인 것을
아버지 영혼이시여 살펴주소서
아버님 생전에
"가난하게 살아야 복이 있다" 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젊을 때
천석꾼이었는데
일본놈에게 속아 다 날리고
도일하여 돈을 버신 아버님
아버지! 아버지!
지금까지 생존하셨다면
팔십이 살짝 넘으셨을 아버지
오로지 천국에서 천복을 누리옵소서.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아침 - 정지용
프로펠러 소리...
선연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쾌청 ! 짙푸른 유월 도시는 한층계 더 자랐다.
나는 어깨를 골르다.
하픔... 목을 뽑다.
붉은 수탉모양 하고
피여 오르는 분수를 물었다... 뿜었다...
해ㅅ살이 함빡 백공작의 꼬리를 폈다.
수련이 화판을 폈다.
오르라쳤던 잎새. 잎새. 잎새
방울 방울 수은을 바쳤다.
아아 유방처럼 솟아오른 수면 !
바람이 굴고 게우가 미끄러지고 하늘이 돈다.
좋은 아침-
나는 탐하듯이 호흡하다.
때는 구김살 없는 흰돛을 달다.
~~~~~~~~~~~~~~~~~~~
書冊(서책) - 김수영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
이 책에는
신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된다
잠자는 책이여
누구를 향하여 앉아서도 아니된다
누구를 향하여 열려서도 아니된다
지구에 묻은 풀잎같이
나에게 묻은 서책의 숙련-
순결과 오점이 모두 그의 상징이 되려 할 때
신이여
당신의 책을 당신이 여시오
잠자는 책은 이미 잊어버린 책
이 다음에 이 책을 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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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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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1 장 영혼은 있다
1. 불교의 제8식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상주법계(常住法界)란 모든 것이 하나도 없어짐이 없이 있는 그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라는 것입니다. 상주법계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으로서 앞에서는 등가원리를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과는 다른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정신이라 하고 죽어서는 영혼이라 하는데, 이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논란과 시비를 거듭해 왔지만, 아직도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영혼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이 수천 년동안 계속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어느 경론이나 할 것 없이,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곧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은 업(業)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윤회는 불교의 핵심이 되는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는 실체를 말할 때 그것을 영혼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제8아라야식(Alaya 識)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나눌 때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은 제6의식이 라 하고, 그 안의 잠재의식은 제7말라식(末那識)이라 하고, 무의식 상태의 마음은 제8아라야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고 혈맥이 끊어지고 목숨이 끊어져 버리면 의식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로지 제8아라야식(阿梨耶識)만이 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것입니다. 그래서 무몰식(無沒識) 곧 죽지 않는 식, 없어지지 않는 식이라고 합니다. 또 장식(藏識)이라고도 합니다.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모든 기억을 마치 곳간에 물건을 간수해 놓듯 전부 기억해 두고 있다가, 어떤 기회만 되면, 녹음기에서 녹음이 재생되듯 기억이 전부 되살아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할 때는 무몰식이라 하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뜻에서 말할 때는 장식이라합니자. 이것이 있기 때문에 미래겁이 다하도록 윤회를 하는 동시에 무엇이든 한번 스쳐간 것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래의 불교학자들은 제8아라야식의 존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알아봅시다. 대승불교에 대해 이론을 가장 많이 발달시킨 일본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사람이 우정백수(宇井佰壽)인데, 그는 아라야식은 도저히 증거를 잡을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영혼 자체를 설명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두려워서라고 마음 가짐과 몸가짐을 착하게 하려고 힘쓸 것으므로,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이지만, 그런 주장도 과학의 발달 앞에서는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물질적인데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신과학 분야에서도 크게 발전을 이룸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확실하다는 것이 점차로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서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서, 또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서나 불교를 포교하는 데에서, 또는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꼭 갖추어야 할 흔들림 없는 근본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근사(近死)경험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그 궁금증과 신비가 차차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레이몬드 무디(Raymond Moody) 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대학에서 철학을 배울 때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수는 무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나는 수년 전에 두 번이나 죽었다가 깨어난 경험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의사가 와서 사망을 확인하고 장사를 치를 준비를 하는 도중 에 깨어난 것인데, 깨어나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죽어 있는 동안이 깜깜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혼이 죽어 있는 육체를 빠져나와 그것을 바라보고, 또 여러가지 활동을 한 것을 기억한다."
그 정신과 교수는 죽었다가 깨어나는 순간까지의 자기가 경험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허황된 꿈 이야기나 거짓말 같아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디는 그때에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웃고 말았지만, 뒤에 자신이 철학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부터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무디 교수에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이므로 영생(永生)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며칠 전에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가 깨어났다고 하면서 그 때 할머니가 경험한 것을 들은 대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디 교수가 학생 시절에 앞의 정신과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똑같았습니다. 무디 교수는 이러한 경험담이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롭게 의학을 공부하여 환자들을 상대로 이런 경험담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 뒤에 무디교수는 150명의 사례를 수집하여 그것을 1975년에 책으로 출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례를 보면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되는 경험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죽었을 때는 캄캄한 어떤 터널 같은 곳을 빠져나간다. 그곳을 빠져 나오면 자신의 신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누워 있을까? 내가 죽었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아주 밝은 광명이 나타난다. 그 광명 속에서 자기가 지나간 한평생에 걸쳐 겪은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에 나타난다. 그 뒤에 자기가 아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서로 위로도 하고 소식도 묻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혼은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들이 자기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든지 가족들이 장사 지낼 의논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그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만났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가 없지만, 죽은 뒤에 그의 가족들이 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으니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의사에 의해 죽었다고 판정되면 그 육신은 한갖 물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시신은 머리 끝까지 흰 천으로 덮어 놓았으니, 설령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여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은 자기가 죽어 있는 동안에 가족들이 한 이야기와 그들이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실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사람이 죽고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는 죽었어도 무엇인가 활동하는 활동체가 있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캄캄하여 아무 기억이 없다고도 합니다. 무디 교수는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이 처음 출판되자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레이몬드 무디 교수의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그동안 영혼이나 죽음의 세계에 대해 연구를 해오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결과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이 새롭게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근사경험(近死經驗)이라고 하고, 또 영어로는 약어를 써서 엔디이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하며, 이에대한 연구를 근사연구(近死硏究)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 근사경험에 관한 사례는 수천 건이 수집되었는데, 그런 학자들 중에 가장 이름난 사람이 미국의 시카고대학에 있는 퀴불러 로스 E. Kubler Ross 교수입니다. 이 여자 교수는 무디 교수의 발표 이전에 이미 많은 자료를 수집해 놓고 있었습니다. 무디 교수가 자신이 출판하려는 원고를 가지고 와서 그 여자에게 출판을 상의한적도 있었습니다. 퀴 블러 로스 여사는 그 원고가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같고 또 결론도 동일하여 무디 교수의 책에 서문만써 주고 자신의 책은 출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디 교수는 1977년 두번째 책임 <사후생(死後生)에 대한 회고 Reflections on Life after Life]를 출판하여 좀더 자세하게 근사경험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에 대해서 영혼이나 정신을 유물론적으로 보는 소련의 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뇌세포는 맨 나중에 소멸하므로 아직 죽지 않은 뇌세포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상일 뿐이지 죽은 뒤에 실제로 어떤 활동체가 있어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소생기억이 일, 이 분 동안의 사망에 불과한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하두 시간이나, 길면 이틀이나 사흘씩 죽었다가 깨어나는 경우에는 그런 주장이 성립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죽은 뒤에도 뇌세포만이 몇 시간 동안 또는 며칠 동안 살아 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근사경험이라고 하는 소생기억에 대한 반대 의견들은 현재까지로서는 이렇다 할 만한 뚜렷한 자료나 근거를 뒷받침하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사후에 영혼이 있다는 주장에 관한 오래되고 유명한 기록이 플라톤의<공화국>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군인이 전사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 그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화장하려고 장작더미에 올려놓는 바로 그 순간에 그 군인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깨어난 뒤에 자신이 죽어 있는 동안에 활동한 여러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런 오랜 이야기도 무디 교수의 조사 사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음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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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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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3권
1. 국정의 제1지표 (2/2)
한.일 회담에 관한 한, 민주당 정권도 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유당 정권과 비교해 볼 때 도토리 키재기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 장면은 일본 정부가 외무대신을 <친선사절>로 보냈다는 사실 한 가지에만 고무되어 있었다. 일본의 고위관리가 한국 땅을 밟기는 해방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승만의 대일 자세는 강경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일본 외무대신의 한국방문은 그것이 아무리 <친선방문>을 내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선방문을 표방한 일본 외무대신의 한국방문은 장면을 다분히 고무시켰다. (일본이 천선사절을 보내면서 우호를 가지고 임할 것이 틀림없을 것 같구먼.) 일본 정부가 친선사절을 보냈다고 해서 한.일 회담의 장래에 대해서 이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판단이었다. 서울을 방문한 일본 외무대신 고자까는 한국을 방문한 그날 오후 외무부로 찾아가 한국 정부의 외무부 장관인 정일형과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자까는, "우리 일본 정부는 양국간의 돈독한 우의증진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일.한 회담을 열어 여러 가지의 현안문제를 신속히 풀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소"라고 했다. 이에 정일형은,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조속한 한.일 회담을 재개해서 양국간의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도록 해 보십시다"라고 대꾸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한.일 양국간의 국교정상화가 최우선 과제인 모양이라고 판단했던 고자까는 엉뚱한 제의를 했다. "우리 일본 정부에서는 먼저 일.한 회담 개최에 앞서 주한대표부를 설치했으면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동의해 주었으면 고맙겠소." 한국에서도 일본에 주일대표부를 설치해 놓고 있으니 일본도 먼저 한국에 대표부를 설치해야 옳지 않느냐는 말투였다. 호혜평등의 외교원칙으로 보면 그건 당연한 요구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호혜평등의 얘기밖에 될 것이 없었다. 한국 정부에서 주일대표부를 설치한 것은 1949년 1월 14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주일대표부가 설치됐던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의 최고통치자는 일본 천황이나 수상이 아니라 바로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당시는 연합국의 점령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의 발효로써 비로소 주권을 회복했던 것이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체결한 어떤 조약이나 협정도 유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계속해서 주일대표부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적절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주일대표부를 폐쇄하려면 먼저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맺은 조약이나 협정은 무효다>라는 선언부터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주한대표부 설치를 희망한 고자까의 요청에 대해서 정일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민의 대일 감정은 정부 차원에서 국교정상화를 바라는 만큼 그렇게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주한대표부 설치를 희망하기 이전에 먼저 일본 정부가 한.일 회담에서 성의를 보여주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추진되었던 한.일 언중유골이었다. 또 이 자리에서는 앞으로 열릴 한.일 회담 때, 어떤 문제들을 토의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교환되었다. 고자까는 평화선 문제는 기필코 합의에 도달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정일형은 재일교포 북송문제.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청구권문제.문화재 반환문제 등도 똑같이 중요한 문제인 만큼 평화선 문제와 아울러 동시에 타결되도록 회담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일형.고자까 회담에서 이루어졌던 합의에 따라 제5차 한.일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1960년 10월 25일이었다. 장면 정권은 고려대학교 총장인 유진오가 처음부터 한.일 회담에 관여했던 점을 감안, 그를 엄요섭(嚴堯燮:주일공사), 유창순(兪彰順:한국은행 부총재), 김윤근(金潤根:변호사), 윤석헌(尹錫憲:외무부 장무국장), 진필기(陳弼基:외무부 통상국장), 문철순(文哲淳:주일대표부 참사관), 이상덕(李相德:한국은행 국고부장), 지철근(池鐵根:전 해무청 수산국장) 등이었다. 이밖에 4명의 전문위원이 수행을 했다. 이웃나라하고 선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빼앗은 문화재의 조속한 반환과 일본제국주의에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에 대한 보상문제 등을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한.일 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회담을 해야 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본은 침략국이었다. 한민족에 피해를 준 나라였던 만큼 회담을 한다면 저들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회담을 열도록 해야만 옳았다. 서울에서 회담을 열도록 하되, 먼저 한국 침략에 대한 사죄부터 하고 회담을 열도록 해야만 했다. 일본 수상이 한국 침략에 대해서 사죄하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수상인 이께다에 앞서 수상이었던 기시(岸信介)는 1958년 5월 16일 야쓰기가즈오(矢次一夫)라는 민간인을 <사죄사절>로 이승만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야쓰기는 일본 정부의 사죄사절은 아니었다. 기시가 자기의 사죄사절이었다. 그런 절차 없이 한.일 회담은 열려왔다. 고자까가 친선사절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주무장관인 정일형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총리 장면이나 대통령 윤보선이 그를 접견했을 때조차도 <일본은 당연히 한국침략에 대해서 사죄를 한 연후에 회담을 열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입밖에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해서 고개를 제대로 쳐들지 못하고 매양 저자세로만 일관했던 것이다. 그러니 예비회담이 열렸다고 해야 바람직한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1960년 10월 25일부터였지만, 12월 20일 일단 회담을 마감하기까지 네 개의 분과위원회를 이외에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네 개의 분과위원회란 1) 기본문제 분과위원회, 2) 재산청구권 위원회, 3) 어로.평화선 분과위원회, 4) 재일교포 법적 지위위원회 등이었다. 한데, 그것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회담 의제를 토의하는 동안 한국 대표들은 누구 한 사람 <일본제국주의에 끌려가 희생당한 사람의 보상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한 1942년부터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 장정들을 저들의 탄광으로 또는 군수공장으로 끌어다가 희생을 시켰던가. 또 얼마나 많은 청년학도들을 끌어내다가 저들의 총알막이로 희생시켰던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숫처녀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끌어내다가 저들 왜군들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가. 징병, 징용 또는 정신대로 끌려나가 희생당한 사람의 수가 어림잡아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도 이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입밖에도 내비치지를 않았으니 이런 해괴망칙한 일이 어디 있었으랴! 물론 정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자료를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 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자료를 구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부에서 <일제시대에 징용, 징병, 정신대로 끌려나간 가정에서는 지체없이 신고하라> 했으면 그것으로 사전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가 무성의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이 열리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 대표들은 한국 대표들을 농락하며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예비회담이 막 막을 올린 다음날이다. 일본 정부는 <너희 한국 정부놈들 엿 좀 먹어 봐라> 하는 듯이 재일교포 북송문제를 꾀하기 위해 북한대표와 별도의 회담을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작태는 완전히 한국 정부를 무시한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어째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 할 수 있는가? 1948년 12월 12일의 유엔총회에서는 결의 대다수 국민이 거주하며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협의가 가능했던 지역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력을 갖는 합리적인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선언하며 또한 동 정부는 선거민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에 의한 선거에 입각하고 있으며 동 선거는 감시위원단의 감시를 받은 바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한다>라고 천명했고, 또 일본은 1951년 9월 8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을 위시한 52개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에 있어 동 조약 제2조 (가)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명문화함으로써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땅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중에 북한으로 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의당 이 문제를 한국 정부와 의논해야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 정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총련에 의한 재일교포 북송사업이 개시된 것은 1959년 11월 14일부터였다. 당시 자유당 정권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 <엄중항의>를 하는데 그쳤고, 민주당 정권도 역시 한.일 예비회담이 막막을 올렸을 때 북한과 재일교포 북송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자, 장면은 "이거 일본 정부가 또다시 재일교포 북송을 재개하고자 책동하고 있는데, 이걸 언제까지나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오? 뭔가 비상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오?" 이 질문에 대해서 오위영은, "저들 일본 정부의 행위는 완전히 대한민국을 무시한 행위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어떤 비상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행위를 응징하겠다고 전쟁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면서 엄중항의로 그치자고 했다. 여기에 맞장구를 친 것이 재무부 장관 김영선이었다. "지금 우리가 한.일 회담을 진행중에 강경자세는 자제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그는 행여 한.일 회담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치게 될세라 엄중항의로 의사표시에 그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민주당 정권이 출발과 함께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최고지표로 내세웠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들 민주당 정권이 이 목표의 구현을 위해 한.일 회담에 목을 매달고 있었기 때문에 <엄중항의>라는 소극적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정부는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을까. 아니면 수모를 당하면서도 한.일 회담을 성사시켜 청구권으로 받아온 돈으로 국민을 먹여 자세였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민주당 정권은 물론 <엄중항의>에 그치고 말았음은 다시 부연할 필요도 없다. 예비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을 깔보는 짓을 또 한 번 저질렀다. 1960년 12월 19일의 일이다. 수상 이께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중의원(衆議院:한국의 민의원에 해당)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는 인식하에 한.일 회담에 임하고 있다"라고 언명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놈의 개수작이란 말인가!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북한의 김일성 집단도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는 유엔에서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천명했고, 또 저들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한 이상에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 정부>라는 전제하에 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시켜 나가야 옳은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그것을 굳이 한국에는 엄연히 두개의 정부가 있다고 운운한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현실적으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던 만큼 북한의 김일성 집단도 하나의 정권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국 정부를 초조하게 만들어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어 보자는 속셈에서였다. 진지하게 회담에 임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유당 정권을 상대로 회담을 진행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냥 회담을 질질 끄는 지연전술을 썼다. 그 이유는 <한.일 국교는 너희 한국이 바쁘지 우리 일본은 바쁠 것이 없다> 해서였고,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장면 정권은 안정된 정권이 아니다. 언제 또 정변이 일어나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지 않느냐> 해서였다. 이래서 1960년 10월 25일부터 12월 20일까지 근 2개월 가까이 예비회담을 진행시켜 왔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제를 네 개의 분과위원회에서 다룬다는 것 외에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온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면을 고무시키기에 족했다. 잘만 하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도 있고 경제 재건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가슴속 구석에는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 때의 한.일 회담을 통해서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그렇게 앞날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통치권자가 바뀌기는 했다. 자유당 정권 때는 반일감정이 두드러졌던 이승만이었으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금은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원한을 씻고 하고 있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 정부의 대한 감정을 유리하게 유도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쩐지 장면의 마음은 다소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도 <일본인은 간교하다>는 선입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5일 장면은 국무회의가 끝난 다음 외무장관 정일형을 조용히 불러 물어보았다. "정 장관, 내무부에서 새해 1961년도에 각종 토목사업을 일으켜 69만 명의 실업자를 구제할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는 그런 재원이 없지 않소. 결국은 일본에서 받아낼 청구권을 재원으로 하고자 그런 계획을 회담의 장래가?"
"회담의 장래를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지연전술을 써온 것은 민주당 정권이 안정된 정권이 아니지 않느냐 해서였는데, 이제 우리 사회도 상당히 안정된 만큼 일본 정부도 진지한 자세로 회담에 임해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장면은 이 말을 듣자 적이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것이었다. 그는 한.일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여간 속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했으면 국민을 기아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정책이 가시화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집권 4개월이 흐르는 동안 경제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일 회담이 타결되기 전에라도 미리 얼마라도 청구권을 당겨 쓰는 방법은 없을까?) 마음이 너무 조급하고 초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일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어느 사이에 자신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이런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얼마나 정부재정이 고갈돼 있었으면 이런 생각까지 품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궁즉통(窮則通)이었을까? 오위영이 마치 조급하고 초조해하는 장면의 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동안 한.일 회담은 별다른 진전이 없기는 했습니다만, 언제고 타결될 것만은 시간을 벌 겸해서 일본으로부터 민간차관을 들여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구권을 담보로 해서 말입니다."
오위영의 이 아이디어에 장면의 두 귀가 번쩍 틔어졌다.
"그것이 가능하겠소?"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땅짚고 헤엄치깁니다. 청구권을 담보로 하는데 어찌 차관을 주려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인 것 같았다. 빚만 얻을 수 있다면 하루라도 속히 빚을 얻어 공장도 세우고 또 내무부에서 세운 토목공사도 추진하고 하면 국민의 가난은 점차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민간차관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재무장관과 협의해서 구체적인 그러자 오위영은 한 가지 제안을 또 했다.
"지금 재일교포 중에는 상당한 재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본국에 투자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또 아예 그동안 모은 재산을 가지고 영구 귀국하고 싶어하는 사람도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욕구도 이루어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거야말로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구려. 우리로선 대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오? 그 문제도 경제각료들과 상의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주면 고맙겠소."
민간차관에 곁들여 재일교포 재산만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래서 장면은 1961년의 새해 첫머리에서부터 희망에 들뜨게 됐는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장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새해 1961년 1월 12일에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치사를 했는데, 이 치사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어느 한 개인이나 한 당파가 단독으로 이 나라의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개인이나 당파의 이해를 위하여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태도와 고집을 취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가히 짐작할 수 있고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위기의 첨단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있어야만 하겠습니까?"라며 개탄했던 것이다. 도대체 윤보선은 뭘 가지고 난국이라 하고 위기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난국 또는 위기라고 할 만한 건덕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윤보선은 오늘의 시국이 난국이요, 위기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이래 지난 4개월 동안은 족히 난국이요, 위기라고 할 만하기는 했다.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데모가 계속되어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듯 극성스럽기만 하던 데모도 1960년 12월 중순이 지난 후에는 마치 의논이나 한 듯이 조용히 가라앉아 주었다.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판국인데 뭘 가지고 난국이요 위기니 하느냔 말이다. 데모가 한창 줄기차게 벌어지고 있을 때 언론에서는 걸핏하면 <난국>이니 <위기>니 하고 써댔다. 그러던 언론도 데모가 제풀에 꺾이고 말자 일체 그런 낱말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터에 유독 윤보선만이 치사에서 난국이니 위기니 하는 낱말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뭘 가지고 난국이니 위기니 하는 거야? 대통령이 돼 가지고 마치 국민을 선동하는 따위의 낱말을 구사할 수가 있어? 남은 새로운 각오로 국정에 임할 자세를 가다듬었는데, 그런 말로 찬물을 끼얹을 수가 있어?"
온화한 장면도 윤보선의 연설을 듣고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할 얘기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얘기가 있었다. 특히 윤보선이 양원 합동회의에 나와서 연설을 한 이날은 민.참의원이 새해에 들어와 처음으로 개원을 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그저 의례적으로, <여러분 국가를 위해서 애 많이 쓰고 있소. 새해에도 여전히 국가를 위해서 애 많이 써 주시오> 이렇게 말하면 족할 일이었다. 그것을 국정에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난국이니 위기니 하며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것은 월권행위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로 그쳤다면 화를 내다가도 웃고 떴던 것이다. 뭐라고 했던가?
"우리는 별다른 의미에서 안정과 건설과 수습을 요구하는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정쟁의 휴전을 협정하지 아니하면 안 될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야에게 정쟁의 휴전을 촉구했던 것이다. 이날 국회가 파한 뒤에 장면은 각료 간담회를 열어 윤보선 발언의 속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석해 보기 위해 각료들의 소감을 물어보았다.
"대통령도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이니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나 자연인일 때와 대통령직에 있을 때에는 나라 걱정을 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주요한이 먼저 소감을 말했다.
"난국이니 위기니 하는 낱말은 6.25나 4.19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쓰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올시다. 대통령은 분명히 무슨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의식적으로 그런 험한 말을 골라 쓴 게 틀림없어요."
"나도 그런 인상을 받았소만 과연 그 속셈이 뭐냐, 그거요."
장면은 탄식을 했다.
"그분의 속셈은 너무나 뻔한 게 아닙니까?"
김영선이 이렇게 전제하고 윤보선 발언의 진의를 이렇게 풀이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지금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이 정권을 쓰러뜨려야겠다는 그 한 가지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도각의 명분부터 세워 놔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김영선의 풀이는 그럴 듯했다. 어쩌면 윤보선의 속셈은 그 풀이대로였는지도 몰랐다. 원래가 장면과 윤보선의 사이는 개와 원숭이의 사이보다도 더 험악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멱살잡이라도 하면서 싸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굳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 민주당 정.부통령 선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승만 치하의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야세력을 끌어들여 민주당으로 탈바꿈한 것은 1955년 10월 당시 윤보선은 합당을 하든 안하든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신익희(申翼熙)를 러닝 메이트로 해서 부통령에 입후보할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의 이러한 꿈은 재야의 대통령 후보로 물망에 올라 있던 장면이 신당에 합류해 옴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 후보를 민주국민당에 주는 대신 부통령 후보는 재야에서 합류해 온 쪽에 주어야 한다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야에서 합류해 온 쪽에서 대통령 후보를 택한다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재야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공작을 벌이고 있던 장면을 옹립할 도리밖에 더 있겠는가. 부통령 후보라는 화려한 꿈을 안고돼 버린 윤보선으로서는 그것이 한으로 응어리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 말고는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후, 윤보선은 누가 보더라도 확 드러나 보일 정도로 장면을 싫어했다. 어떻게 보면 생리적이라 할 정도로 장면을 싫어했다. 제5대 국회가 개원했을 때만 해도 그렇다. 윤보선은 구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구파가 대통령직을 차지했으면 총리직은 당연히 신파에 주는 것이 정치도의상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 따위 정치도의 같은 것은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구파의 김도연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에 신파에서 <대통령직을 구파에 주었으면 국무총리직은 당연히 신파에게 주어야 옳지 윤보선은 어디 개가 짖어대느냐는 듯이 숫제 마이동풍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신파정권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다. 아마도 그는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신파 정권 일에 간섭하려 했던 것이다. 이번 국회 개원식에서의 치사만 해도 그렇다. 윤보선이 워낙 간섭하기를 즐겨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놈의 못된 버릇이 발동을 했군> 하고 일소에 붙여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굳이 각료 간담회까지 열어 가면서 윤보선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려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분당을 해서 야당으로 새출발하고자 신당 창당작업을 추진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면이나 그의 각료들은 윤보선이 구파가 신당을 창당하기 전에 도각의 명분을 만들어 두었다가 신당 창당과 함께 정치공세를 취해 장면 정권을 쓰러뜨리자는 정략인 모양이라고 해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료 간담회를 열어 윤보선 발언의 진의를 캐보려 했던 것인데 장면으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김 장관의 얘기가 그럴 듯하긴 하오만, 그렇다면 정쟁의 휴전을 협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소린 무슨 소리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김영선이 해석을 내렸다.
"난국이니 위기니 했으니, 그 말을 더 있겠습니까?"
정쟁은 정당간의 또는 정파간의 싸움을 말한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정쟁을 없애라는 말은 민주주의를 하지 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통령이 하는 말에 일일이 신경을 쓰자면 한이 없어요. 정권을 구파한테 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든 말든 일체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윤보선의 말을 무시해 버리자고 한 사람은 이상철이었다. 그의 한마디로 이날의 각료 간담회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지만, 장면은 윤보선의 행위가 자꾸 괘씸하게만 느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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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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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후계자문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집트에서 대기하고 있고, 티투스도 아직 예루살렘 공략에 착수하지 않은 서기 70년 1월, 무키아누스가 소집한 원로원 회의에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70년을 담당할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이듬해인 71년을 담당할 집정관에도 베스파시아누스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서기 70년 가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귀국한 뒤에는 거의 해마다 아버지와 아들이 집정관을 맡았다(72년, 74년, 75년, 76년, 77년,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들이 아닌 사람과 집정관직을 나누어 가진 것은 서기 71년과 73년뿐이고, 두 부자 이외의 사람이 집정관직을 차지한 것은 서기 78년 한 해뿐이다. 맏아들 티투스를 표면에 내세우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방식은 집정관직을 나누어 갖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유대 전쟁 종결을 축하하는 개선식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제각기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장군으로 참가했다. 주역과 조역이 아니라 주역이 두 명이었다는 게 서기 71년 봄에 거행된 이 개선식의 특징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개선식을 막 끝낸 티투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임페라토르'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밖에도 '절대 지휘권'과 '호민관 특권'까지 주었다. '최고'(마이우스)가 붙으면 로마군 전체의 우두머리라는 뜻이 되고, 이 최고 지휘권은 황제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은 티투스는 부사령관이 된 셈이지만, 민회 소집권에다 거부권이라는 권한까지 갖는 '호민관 특권'은 황제와 동등하다. 이래서는 공동 통치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년의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삼은 티베리우스에게 해준 대우와 똑같았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도 주었다. 따라서 그후 황제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제위계승자는 '카이사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 제위계승자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내전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부정을 만족시키면서 내분의 싹도 잘라버리는 방책으로 제위계승자의 칭호까지 명확하게 정한 것이다.
원로원 대책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제적 색채가 짙은 '황제법'이 성립되기를 바란 사람치고는 원로원에 대한 태도가 온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갖고 있던 균형감각 때문일 것이다. 또한 원로원 의석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출신과 성장 배경에서 그보다 상류층에 속해 있다는 점도 배려한 결과일 게 분명하다. 매달 1일과 15일에 열리는 통상적인 원로원 회의에는 중요한 의제가 없어도 반드시 참석했다. 9년 동안 거의 해마다 집정관직을 겸임했기 때문에 의장석에 앉을 필요도 있었지만. 회의에서는 활발한 토론을 장려했다. 반대 의견에도 찬성 의견과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신랄한 독설을 들어도 불쾌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반론은 제기했다. 하지만 재치와 유머와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상대를 공격하여 회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반대자를 고립시키는 카이사르 같은 재주는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의 말을 반박할 때도 우거지상을 지으면서, 이 나이에 황제 따위를 맡고 있으니까 이런 공격을 받는다는 말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베스파시아누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회의장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번득이는 재치는 없었지만, 붙임성은 있었다. 그가 의원들의 호감을 산 또 다른 이유는, 원로원 의원을 국가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는 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황제법'이 제정됨에 따라 원로원이 황제를 탄핵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이제는 그런 짓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공식적으로 언명한 것은, 순박한 시골뜨기를 가장한 베스파시아누스가 위선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붙임성도 있었지만,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의원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신직에다 봉급도 없는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적어도 10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자신도 원로원 의원에 추천되었을 때 그 돈이 없어서, 형인 사비누스를 보증인으로 새워 겨우 빌린 돈으로 원로원 의원이 된 경험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고안하여 활용한 위원회 방식을 되살렸다. 문제를 서둘러 해결할 필요가 있을 경우, 또는 전문 지식이나 능력이 필요한 경우, 600명이 정원인 원로원에서 토의를 거듭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원로원 의원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해결을 맡기는 방식이다. 물론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고안해낸 방식이다. 돌이켜보면 군사를 잘 알고, 군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닌 황제는 티베리우스 이후로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처음이었다.
인재 등용
황제에 즉위한 직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고 밝힌 베스파시아누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에 12명의 속주 출신을 등용한 것이다. 속주 출신에게 원로원 의석을 준 것은 갈리아 중부와 북부의 갈리아인에게 원로원 문호를 개방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같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 가운데 다섯 명에서 귀족 칭호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원로원에서는 예로부터 연설할 때 '파트레스, 콘스크립티'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의원 여러분' 이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직역하면 '아버지들이여, 새로 가담한 자들이여'가 된다. '아버지'는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 구체적으로는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같은 가문을 가리키고, 키케로처럼 원로원에 처음 들어온 의원은 '아버지'가 아니라 '새로 가담한 자'에 불과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속주 출신 가운데 다섯명을 '파트레스'와 거의 대등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는 기존 지배층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 네로의 실각과 그후의 혼란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활력이 시들어버린 지배층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피'의 인선은 철저한 실력제일주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지배층에 속해 있던 자들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이 다섯 명 가운데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름이 남아 있는 인물은 다음 세 명이다. M.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유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제10군단을 이끌고 싸운 장수. 나중에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의 아버지. 에스파냐 출신. C. 율리우스 아그리콜라-8년 뒤에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도록 파견된 장수.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 갈리아 출신. L.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등용될 당시에는 법무관에 불과했지만, 그후에는 '수도청 장관'을 포함하여 여러 부문의 공직을 역임했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대 로마의 수도에 관한 해설서까지 남긴 인물. 이 사람도 아마 갈리아 출신일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을 포함한 12명의 출신지는 에스파냐, 갈리아,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 제국 전역의 속주에 걸쳐 있다. 카이사르나 클라우디우스는 제국 서방의 속주 출신에게만 원로원 문호를 개방한 반면, 베스파시아누스는 제국 동방의 속주 출신도 원로원에 맞아들였다.
귀족까지는 되지 못했다 해도, 원로원에 의석을 갖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당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모든 국가 요직은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선출된다. 우선 원로원에 의석을 가져야만 집정관도, 속주 총독도, 수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사령관도 될 수 있다. 우리 고장의 자랑이라고 온 주민이 총출동하여 축하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런 평균화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에, 속주도 본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일원이라는 공동운명체 의식이 강해진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보면, 열두 명 가운데 네 명이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가지고 있다. 속주민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이 네 명밖에 없다. 클라우디우스와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속하니까. 이들 두 사람이 자신의 씨족 이름을 주었다면 그들의 씨족 이름은 '클라우디우스'가 되어야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씨족 이름을 받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고 불렸듯이. 칼리굴라는 이런 일에 무관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무관심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면에서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속주 출신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를 뒤이은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문하생'이라는 말이 생겼을 만큼 실력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하지 않은 일은 자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씨족 이름을 여기저기 인심좋게 나누어주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이런 경우에는 언제나 그렇지만, 결국 남는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뿐이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120년 전에 뿌린 씨가 성장하여 맺은 열매를 베스파시아누스가 수확한 셈이 된다. 반란을 일으키는 '율리우스'들도 있었지만, 제국의 중추에 들어와 제 어깨로 제국을 떠받치는 '율리우스'들도 로마 제국에는 부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사계급'과 평민에 대한 대책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사회에서 제2계급이라 해도 좋은 '기사계급' 출신이다. 그런데도 이 계급을 특별히 우대하지 않은 그의 균형감각은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그러긴 하니만, 여기서도 그는 앞사람이 세워 놓은 이정표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걸어간 데 불과했다. 여기서 말하는 앞사람은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였다.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 계급이 정치를 독점했기 때문에 '기세계급'은 경제 분야에서 활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을 행정에 등용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였다. 풍부한 경제 경험 덕에 실무능력이 뛰어난 그들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실무'관료'로 활용한 것이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에는 '경제계'로 총칭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이 제정 시대에 들어선 뒤에는 경제만이 아니라 행정과 군사면에서도 전문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로마 사회는 원로원 계급촵기사계급, 평민계급, 해방노예, 노예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로마인은 공화정 시대부터 있었던 이 계급 구분을 철폐하지 않고 존속 시켰다. 다만 이 다섯 계급 사이의 유동성은 인정했다.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했다. 노예에서 해방노예가 되고, 자격만 갖추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평민계급에 들어갈 수 있다. 기사계급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도 군단에서 실적을 쌓고 공직을 거친 뒤 원로원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되었다. 사회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면 오히려 외부인을 소외시키게 된다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당장 기준 구성원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면 기존구성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난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고있는 '순수 백인'의 인정차별 의식만 보아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로마처럼 사회 계급을 인정하되 계급간의 유동성을 인정하면, 외부인의 유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직 실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우선 하층계급에 들어가게 하고, 그후의 신분 상승은 당사자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실력을 보여준 사람은 당장 그 실력에 어울리는 계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뜻밖에도 다른 폴리스 출신이나 노예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사회였던 반면,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이었고 제정 시대에는 군주정으로 바뀐 로마가 아테네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고대 로마는, '그 시대의 한계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라는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기회 균등을 실현한 사회였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손질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 그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법'을 마련함으로써 원로원의 견제 기능을 박탈했지만, 이것으로 자신과 후계자인 아들들의 지위가 확고해졌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평민계급도 로마 시민권 소유자니까 어엿한 유권자다. 제정으로 바뀐 지 100년이 지난 서기 1세기 후반에는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을 원로원에서 선출하게 되었고, 민회도 그 존재 의미가 퇴색해서 열리지 않게 된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이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오래였다. 국가나 황제, 또는 요인들이 제공하는 각종 경기 대회나 축제가 서민층의 의견을 반영하는 그들은 거침없이 자기 의사를 표출했으니까, 지배자에게는 공포의 장소이기도 했다. 검투사 시합이나 전차경주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든 없든, 황제가 그런 장소에 나타나면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그런 곳이야말로 시민들이 최고 통치자에게 의견을 표출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책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장소에도 성실하게 얼굴을 내민 아우구스투스는 서민들 사이에서 아주 평판이 좋았다. 반면에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책무는 충실히 수행했지만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서민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특히 검투사 시합이라면 질색을 한 것이 서민들 사이에서 악평을 받은 원인이었다. 황제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칼리굴라나 네로가 뜻밖에 서민들의 호감을 산 것은 경기대회나 축제에 '개근'한 덕분이기도 했다. 후세는 이것을 '빵과 서커스'라 하여 로마 제국의 가장 큰 악폐로 꼽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빵'을 보장한 제도와 마찬가지로 '서커스'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락 이외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실증하는 예로,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유대의 공주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는 아버지 휘하에서 우대 전쟁에 참전하고 있을 때부터 유대 공주 베레니케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레니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유대 왕위에 복귀한 아그리파 1세의 딸이다. 유대 전쟁에서 로마 편에 붙은 아그리파 2세의 누나이기도 하다. 티투스보다는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고, 오리엔트 군주들과 두 번 결혼한 경험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그리파 1세는 재기가 뛰어나,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청년 시절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위험 인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능은 아들보다 딸이 더 많이 물려받는지도 모른다. 성격이 고분고분하여 로마의 이상적인 동맹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동생과는 달리, 누나인 베레니케는 로마인 장관이 유대인을 박해하기라도 하면 엄중한 항의도 서슴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세고 드센 성격을 갖고 있었다. 지혜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넓고 깊은 교양도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초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역사가들의 기술을 믿을 수 밖에 없지만, 날씬한 몸매에 행동거지도 우아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한편 티투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비슷했다. 다만 나이가 젊기 때문인지, 아버지가 갖고 있던 일종의 교활함은 갖고 있지 않았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유대 전쟁기'에 묘사된 티투스는 총사령관인데도 졸병처럼 싸우는 사람으로, 용장이긴 했지만 지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순박하고 양심적인 청년이지만 냉철함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엔트의 아름답고 지적인 연상의 여인에게 홀딱 반해 버렸을 것이다. 베레니케도 티투스가 바치는 애정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황제의 아들과 유대 공주의 재회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예방하기 위해 로마를 찾은 아그리파 2세가 누나를 동반한 덕분에 이루어졌다. 티투스는 애인을 황궁에 살게 했다.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딸을 하나 낳은 아내와는 이혼했기 때문에, 이런 일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독신이었다. 로마인도 유대 여자와 동거하는 것 자체는 문제삼지 않았다.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는 황제 가족만이 아니라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도 살고 있었고, 이집트 장관을 지내다가 유대 전쟁이 끝난 뒤에는 수도 경찰청장에 발탁된 유대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도 자주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화젯거리로도 삼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그랬듯이, 티투스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유대 여인과 그대로 애인 관계를 유지했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티투스가 제위계승자가 아니라 일게 행정관이었다면, 유대 여인과 정식으로 결혼해도 로마인은 문제삼지 안았을 것이다. 실제로 베레니케의 언니는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 장관과 결혼했다. 하지만 순박한 티투스는 사랑하는 여인을 애인으로 놓아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을 게 분명한 제위계승자였다. 베레니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베스파시아누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황제 대신 민중이 했다. 그날 경기장 귀빈석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만이 아니라 유대 공주 베레니케도 앉아 있었을지 모른다. 자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그들을 향해 맹렬한 반대의 외침소리를 질렀다.
티투스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상대가 유대 여자였기 때문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로마의 서민들은 오리엔트의 왕녀라는 말을 들으면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머리에 떠올렸다. 100년 전의 얘기지만, 그리스계 이집트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반하여 조국 로마에 활을 쏘기까지 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서민들은 잊지 않았다. 그리스계든 유대계든, 그들에게는 마찬가지였다. 오리엔트 왕가의 여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절이 되돌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티투스는 사랑을 포기했다. 베레니케는 유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9년이 지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죽고 티투스가 제위에 오른 뒤, 베레니케는 다시 한번 로마를 방문한다. 하지만 황제가 된 뒤에도 티투스는 경기장에서 들은 비난의 합창을 잊지 못했다. 유대 여인은 이번에도 다시 오리엔트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티투스는 사랑을 성취하는 것은 체념했지만, 그래도 베레니케에게 사랑을 바치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베레니케와 헤어진 뒤에는 새로운 결혼 상대를 찾지 않았다. 애인조차 두지 않았다. 30대의 한창 나이에 독신을 고수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30대 시절에 남긴 말-"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보다 자유가 제한된다"-을 티투스도 뼈저리게 느꼈을까, 아무리 '황제법'으로 보호를 받는다 해도, 황제는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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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분황사 - 광덕과 엄장의 설화
[분황사모전석탑]
원효가 머물렀던 절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 관음 앞에
비움을 두나이다.
즈믄 손 즈믄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기
둘 없는 내라
하나로 그윽히 고쳐질 것이라
아아, 나에게 끼쳐주시면
놓되 쓸 자비여 얼마나 큰고
분황사에 있었다는 천수관음 앞에서 희명과 그의 아이가 불렀다는 향가이다.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그래서 이 천수관음 앞에 나가 앞의 노래를 불렀더니 눈이 뜨여졌다고 한다. 천수관음의 영험이 큼을 이 설화는 떠올려주고 있다. 이 설화는 신라인들이 분황사를 찾아 행복을 빌었음을 추측케 해주는 설화이다. 분황사는 신라수도의 옛사찰로서 현재 남은 몇 개 안 되는 절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화성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으며 절 경내의 돌우물 속에는 호국의 용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져오는 호국사찰이었다. 또한 이 절에는 명장 강고내미의 걸작 약사상도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는 원효와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다. 문무왕 때에 이미 원효의 독창적인 불교는 해동종이라 불리우기도 하고 분황종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원효는 한반도의 명산을 두루 떠돌았지만, 이곳 분황사에 있었던 기간이 길었다. 이곳에서 그는 "화엄경소" 등 중요한 저술들을 집필했다. 원효는 "화엄경소"를 짓는 도중 제4권 10회향품에 이르러 입적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원효의 초상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그믐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제사는 '이차돈, 원효양성사 봉찬회'가 주관한다 그밖에 원효와 관계되는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경내에 원효를 위한 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측되는 비석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비석대는 화강암으로 된 것인데, 20여 년 전에 이 절의 발굴단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대의 상부에는 '차화정국사지비'라 새긴 예서체 글씨가 보인다. 이 글씨 아래는 '김정희제'라는 사인이 보이다. 화정은 원효의 시호이다. 그러므로 이 비석대는 원효를 위한 비석을 세웠던 비임을 김정희가 밝힌 것이다. 발굴 당시 비석의 파편도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원효가 죽자 그 아들 설총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원효의 모습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예배를 했다. 성종이 예배를 할 때마다 소상은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소상은 '고상'이라 불리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그 소상은 일연이 살고 있었던 고려말까지도 이 절에 남아 있었다. 그 후 소상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광덕과 엄장의 설화
분황사에 얽힌 얘기로는 유명한 광덕과 엄장에 대한 설화가 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지어 나무를 베고, 밭 갈며 살았다. 어느날 광덕이 열반했다. 엄장은 광덕을 제사지낸 후 광덕의 아내에게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살자"고 청혼, 그 아내가 좋다고 말해 같이 살았다. 밤에 엄장이 아내에게 접근하자 아내는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엄장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는 이전에 광덕과는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깨치기 위한 수행에만 몰두했다고 말했다. 엄정은 부끄러웠다. 그는 물러가 원효에게 법을 물었다. 원효는 쟁관법을 지어 가르쳤다.
엄장은 한마음으로 관을 닦아 마침내 서방극락으로 갔다. 그 아내는 분황사의 노비였으나 기실은 관음의 화신이었다는 것. 이 얘기 중 원효의 쟁관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징을 치면서 산란한 생각을 없애며 선정에 들도록 하는 특수한 관법이었던 듯싶다. 분황사는 또한 원효와 쌍벽인 자장이 머물렀던 절이기도 하다. 원효와 자장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서민들 속에서 대중불교를 편 사람이 원효였다. 이에 비해 자장은 그 당시 신라불교 교단의 질서를 확립한 탁월한 행정승이었다. 그는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현재 3층만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탑은 자장이 당에서 보고 익힌 전탑을 모방하여 건립된 것인 듯하다. 그는 대승경전을 크게 펴, 때때로 왕궁에 가서 대승론을 강설했으며, 분황사 앞의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성하기도 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랜 탑
현재 분황사는 많은 유물들이 산실되고 변형된 전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분황사탑은 신라에서 가장 오랜 탑이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만든 이 탑은 아래층의 4면에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양쪽에는 인왕상을 조각했다. 이 인왕상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자세가 잘 드러난 삼국시대 조각품 중 걸작에 속한다. 이 탑은 1915년 일본인들의 손으로 수리되었는데, 당시 사리와 유물들이 꽤 나왔다. 탑의 북쪽 편에는 돌우물이 있다. 화강암을 8각으로 깎아 외부를 구성한 이 우물은 신라의 우물로서는 가장 우수하고 규모가 크다. 이 우물은 '삼룡변어정'이라 불리는데, 그 유래는 호국적인 데서 온 것이다. 신라 원성왕 때 중국사자가 이 우물 안에 나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용을 잡아가면 신라가 망하리라고 생각하고, 이곳의 호국룡을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지고 갔다. 이를 안 원성왕은 중국사신을 뒤쫓아가선 다시 빼앗아 이 우물에 넣었더니, 고기가 원래의 용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설화는 멸망해가는 신라를 다시 소생시키려는 의욕이 깃들어 있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황룡사지 - 신라 최대의 사찰
서라벌의 겨울밤. 눈은 쌓이고 어두웠다. 황룡사에 사는 정수스님은 추위에 잔뜩 웅크린 채 삼랑사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고 있었다. 천엄사 앞을 지날 때였다. 구걸하는 여인이 절 문 밖에서 아기를 낳고 얼어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 걸 보았다. 정수스님은 불쌍히 여겨 한동안 그 여인을 안아주었다. 그 여자의 몸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옷을 홀랑벗어 그 여인을 덮어주었다 알몸이 된 그는 추위에 팔짝팔짝 뛰면서 절로 돌아와 거적을 덮고 오돌오돌 떨며 밤을 새웠다. 이 아름답고도 우스꽝스러운 얘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이다. 정수라는 스님의 행적은 이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이러한 보시 덕분에 왕사로 봉해졌다고 한다. 혹독한 겨울밤의 추위 속에서 자신의 옷을 남에게 홀랑 벗어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버려진 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지극한 극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황룡사복원도]
신라 최대의 사찰터
이러한 설화를 간직한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절은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컸다. 경주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넓은 들이 바로 황룡사 터이다. 이 절은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후 지금까지 폐허로 버려져 왔다. 그래서 황룡사는 삼국유사 등 문헌을 통해 그 규모가 추측되어져 왔을 뿐이다. 그러다가 76년 4월부터 7개년 계획으로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황룡사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이 절의 규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발굴 결과 옛 문헌들이 밝힌 규모가 거짓이 아님이 입증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83년 2월에 이 사찰의 발굴은 끝났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을 통해 황룡사의 규모는 주요 건물터만 해도 8천 8백 평에 이르는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터가 1천 1백 평이니까, 황룡사는 그보다 8배나 더 큰 셈이다. 이 절은 신라 3보 중 장육존상과 9층탑 등 두 개의 보물이 있었으며, 유명한 화가 솔거의 금당 벽화가 있었던 국찰이었다. 발굴 결과 금당 건물터에서 장육존상을 안치했던 대좌석이 발견되었으며, 9층석탑의 심초석도 발견되어 그 규모의 장대함을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냈다.
더불어 이 절은 신라 최대 가람의 규모뿐만 아니라, 가람배치가 유례없이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전형인 한 개의 탑을 금당 앞에 안치한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장육존상을 안치한 본금당의 좌우에 각각 금당을 세움으로써 세 개의 금당을 가진 특이한 양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백제식과 고구려식의 가람배치가 혼합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중문이 있고, 중문의 동서로 회랑이 둘러져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목탑(9층탑)이 나타나고 그 뒤로 세 개의 금당이 세워져 있다. 목탑과 금당이 있는 곳이 절의 중심부이다. 이 중심부를 동서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금당 뒤로는 강당이 있고, 강당의 좌우에는 부속건물들이 세워졌다.
신라 불교의 구심점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었다. 이 절은 불교가 공인된 이후 흥륜사에 이어 세워진 가장 오래된 절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흥왕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 할 때 황룡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대궐 대신 절을 짓고 절이름을 황룡사로 했다는 것이다. 이곳의 절터는 서라벌 내 7처가람지의 하나로 전해지는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에 해당된다. 추측컨대 용의 출현 등의 설화로 보아 이곳에는 원래 못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 못을 메운 후 절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 절은 무엇보다도 9층탑과 장육존상이 유명했다. 9층탑은 선덕여왕 2년(643)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요청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자장은 중국에 있을 때 태화지라는 연못의 신인으로부터 9층탑 건립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기록하고 있다. 9층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아홉 오랑캐)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는 서원을 세우고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신라 불교의 구심점이며 신라인의 정신적 지주로 상징되어 건립된 것으로 보아진다. 이 탑은 여러차례 중수되어 오다가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병화로 불타 없어졌다. 이번에 발굴된 이 탑의 초석은 직경이 약 1m정도 되며 사방 8개씩 놓여 도합 60여 개에 달한다. 그 중앙에는 심초석이 있다. 이 탑지는 1964년까지만 해도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64년 12월에는 도굴꾼들에 의해 심초석 안의 사리함이 도난당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후 이 사리함을 다시 찾았다. 사리함 속에는 탑지가 들어 있어서 이 탑의 규모가 드러났다. 탑의 높이는 2백 25척(약 80m)이라 하여 삼국유사가 밝힌 '철반기상고사십이척, 기하일백팔십삼척'과 정확하게 일치되었다.
거대한 장육존상
또하나의 보물인 장육존상은 금당 안에 있었음이 발굴 결과 드러났다. 금당은 초석으로 보아 전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임을 알 수 있다. 이 금당 안에는 장육(일장은 6자)의 석가 삼존상이 있었고 그 좌우에 10구의 제자상과 2구의 신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 장육존상의 조성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남해에 큰 배가 닿았다. 검사해보니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 실패하고, 배에 실어 띄웠으며 그때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금과 철을 옮겨 진흥왕 35년에 장육존상을 주조하니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이 1만 1백 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천 근과 황금 1만 1백 16분이 들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금당내의 장육존상이 얼마나 거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장육존상 역시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9층탑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는 금당터에 존상을 안치했던 자연석 대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대석은 3개의 둥근 좌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좌대마다 중앙에 조그마한 우물을 파놓은 것처럼 푹 패여져 있고, 반석의 지름은 각각 2~3m 가량 되어 불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장육존상 좌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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