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31호 - 2024.07.17 수요일(음력 : 06.12)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용서하는 것과 용서 받는 것은 같은 일을 달리 말한 것. 중요한 것은 불화가 해소되었다는 것.
― C.S.루이스(英 작가)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안절부절못하다, 엉터리없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긍정적인 의미의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잘못 생각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칠칠하다’이다. ‘칠칠하다’는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의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주로 ‘못하다’, ‘않다’와 같은 부정적인 용언과 함께 쓰이기 때문에 흔히 ‘칠칠하다’를 부정적인 의미로 잘못 이해해 “무슨 애가 그렇게 칠칠맞니?”처럼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칠칠치 못하니?’ 혹은 ‘칠칠맞지 못하니?’로 고쳐 말해야 한다.
‘주책’의 경우는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와 함께 ‘일정한 줏대가 없이 되는대로 하는 짓’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일정한 줏대가 없이 몹시 실없는 사람을 나타낼 때는 “그 사람 참 주책이야.”가 아니라 “그 사람 참 주책없어.”로 말해야 한다.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로 ‘안절부절못하다’가 있다. ‘안절부절’은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뜻하는 부사인데, 이를 동사로 표현할 때에는 ‘안절부절하다’가 아니라 ‘안절부절못하다’로 해야 한다. ‘안절부절’이 ‘초조하거나 불안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못하다’가 ‘안절부절’의 상태를 강조하는 말로 쓰여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 어찌할 바를 모르다’는 뜻이 된 것이다.
‘엉터리없다’도 부정적인 의미의 말들이 합쳐져서 뜻을 강조하는 말이 된 경우이다. ‘엉터리’는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는데, 여기에 ‘없다’라는 부정어가 그 뜻을 강조하는 말로 쓰여 ‘엉터리없다’는 ‘정도나 내용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 된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직장 내 압존법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평균 근로 시간은 하루 9시간 26분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한다. 그만큼 직장에서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기에 자연히 직장 언어 예절에 대한 관심이 높다.
며칠 전 한 직장인이 문의를 해 왔다. 평사원이 부장님께 과장님에 대한 말을 전할 때 ‘-시’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람마다 판단이 달라서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자신은 두 사람 다 상급자이므로 예를 갖추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했는데, 부장님이 언짢아하셨다고 한다.
우리말의 높임법에 ‘압존법’이라는 것이 있다. 윗사람에게 말할 때 그 사람보다 낮은 윗사람은 존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아직 안 오셨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가 아직 안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어법은 주로 가족이나 사제 간처럼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적용된다. 직장 같은 공적인 관계에서는 압존법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말에서는 부장님 앞이라고 해서 과장님을 존대하지 않는 것은 어색하다고 느끼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부장님이나 사장님처럼 과장님의 상급자는 물론이고, 회사 외부 사람 앞에서도 자신보다 상급자인 과장님에 대해서는 높여 말하는 게 원칙이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가정에서도 압존법이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조부모 앞에서도 부모를 높여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일반적이다. 표준 언어예절에서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여 가정에서의 압존법도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편 부모를 가족 외의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낮춰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우리 전통 언어예절에 어긋난다. 따라서 선생님께 부모에 대해 말할 때에는 ‘저희 어머니(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처럼 높임 표현을 쓰도록 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임을 위한 행진곡
최근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여부를 둘러싸고 한바탕 큰 논란이 있었다. 아무튼 민주주의를 기리는 행사이니 언제가 되더라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이 노래는 광주 민주화 운동 이듬해인 1981년 사회 운동가 백기완이 감옥에서 쓴 장편시 ‘묏비나리’ 일부를 바탕으로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전남대 학생 김종률이 곡을 붙여 만든 것이다.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 원래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지금 거의 공식적으로 쓰는 제목인 ‘임을 위한 행진곡’과 다른 것이다.
표준적인 용법으로 ‘님’는 의존명사이다. 그러니 앞에 아무런 말도 없이 쓰이기는 곤란하다. 이와 달리 ‘님’이 변한 말 ‘임’은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자립적인 명사이다. 그래서 속담에도 ‘뽕도 따고 임도 보고’라고 한다. 이를 ‘님도 보고’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국어 사용 면에서 표준적인 표현으로 수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한동안 금지곡으로서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 보니 제목뿐만 아니라 노랫말에도 약간씩 변형이 생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원곡에서는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이었던 것이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바뀌었고,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는 명령형의 표현은 ‘말자’라는 다짐하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노래를 부르는 민중이 스스로의 감성과 의지에 맞게 다듬은 결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이 노래는 민중이 완성한 일종의 구전 가요인 셈인데, 많은 이들이 표현의 미묘한 차이를 느껴가며 다듬은 이 노랫말에서 우리말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3. 주막에서
은하수에서 온 사나이(윤동주 론) - 천상병
1
깊은 밤
멍청히 누워 있으면
어디선가 소리가 난다.
방안은 캄캄해도
지붕 위에는
별빛이 소복히 쌓인다.
그 무게로 살짝 깨어난 것일까?
그 지붕 위 별빛 동네를 걷고 싶어도
나는 일어나기가 귀찮아진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소리가 난다.
무슨 소리일까?
지붕 위
별빛 동네 선술집에서
누가 한잔 하는 모양이다.
궁금해 귀를 쭈빗하면
주정뱅이 천사의 소리 같기도 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리 같기도 하고
요절한 친구들의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닐 게다
저 놈은
내 방을 기웃하는 도적놈이다.
그런데 내 방에는 훔쳐질 만한 물건이 없다.
생각을 달리해야지.
지붕 위에는 별이 한창이다.
은하수에서 온 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겁이 안 난다.
놈도
이 먼데까지 와서
할일없이 나를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들어오라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뚜렷한 우리말로
한마디 남기고
놈은 떠났다.
"아침 해장은 내 동네에서 하시오"
건방진 자식이었는가 보다.
2
비칠듯 말듯
아스름히 닿아오는
저 별은
은하수 가운데서도
제일 멀다.
이억광년도 넘을 것이다.
그 아득한 길을
걸어가는지
버스를 타는지
택시를 잡는지는 몰라도
무사히 가시오.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비로봉 - 정지용
백화수풀 앙당한 속에
계절이 쪼그리고 있다.
이곳은 육체 없는 적막한 향연장
이마에 스며드는 향료로운 자양!
해발 오천 피이트 권운층 우에
그싯는 성냥불 !
동해는 푸른 삽화처럼 움직 않고
누뤼 알이 참벌처럼 옮겨 간다.
연정은 그림자 마자 벗쟈
산드랗게 얼어라 ! 귀뚜라미 처럼.
~~~~~~~~~~~~~~~~~~~
구슬픈 肉體(육체) - 김수영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여.
<1954>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1장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
5. 질문과 답
물음 :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믿는 자는 융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여 절대자인 창조주가 화복(禍福)을 정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업(業)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답 : 예수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만든 이도 하나님이고 따라서 구원도 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누가 만든 사람이 따로 없고 누가 따로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아(自我) 본위입니다. 예수교는 철두철미 남을 의지하는 것이니 두 관점이 정반대입니다. 요즘의 과학적 증명에 의하면 남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예수교에서도 자체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시 주장하는 것은 우주 이대로가 상주불멸이고 인간 이대로가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또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 사람이 모두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데 자기가 착각해서 금덩어리를 똥덩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덩이인 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을 하여 본래의 눈을 뜨고 보면, 본시 금덩이인 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진금(眞金)이고 모두가 부처님 세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원'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개발이고, 자기복귀(復歸)입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의 조사 스님네들이 항상하는 말이 그렇고 또 내가 항상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석가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지금 말하는 성철이도 믿지 말라. 오직 자기를 바로보고, 자기 능력을 바로 발휘시켜라.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그럼, 어째서 부처님은 극락세계등의 의타(依他)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자아(自我) 본위를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지 참 가르침은 아닙니다.
물음 : 업(業)의 변화에 의해서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입니까?
답 : 그렇지요.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햇빛 속에 똑바로 나서면 그림자도 바르게 되고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바른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바르게 되고 굽은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굽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타살(他殺)은 없다, 전부 다 자살(自殺)이라고.
물음 : 불교의 윤리에서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답 : 남을 도우는 것, 남에게 이로운 것은 선(善)이라 하고, 남을 해치는 것,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악(惡)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이란 선과 악을 완전히 버리고 또 선과 악이 융합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도(中道)의 세계를 말합니다. 선과 악이 대립되어 있는 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입니다. 보살계(戒)를 받을 때에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라. 이렇게 하는 것이 보살이다"고 말합니다. 상대적인 변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는 여기에 참 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음 : 도솔천과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도솔천이라고 하는 것은 외계(外界)의 천상(天上)에 있습니다. 그러나 꼭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도솔천이니 33천(三十三天)이니 하는 사상이 있었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 성질이 다릅니다. 이것은 본시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으로써 극락세계를 만들었습니다. 흡사히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다는 식(式)입니다. 아미타불이 원력으로써 만들어 놓은 땅이니 우주창조설과 그 성격이 같은 것입니다.
물음 :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고 불교가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앞으로 과학은 불교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답 : 몇헤 전 불교로 전향한 어느 미국 사람이 서울에 와서 강연한적이 있습니다. 예수교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과학이 발달할수록 퇴색되고 파괴되는데 비해 불교는 더욱 더 그 논리가실증되는 동시에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는 진리를 바로 보았기 때문에 3천년 뒤에도 그것이 참말인 것이 자꾸 증명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진리가 한가지 한가지씩 계속해서 더 증명이 될 따름이요, 불교 이상의 더 나은 진리를 발견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 줄을 알아야지요.
물음 : 캐논 경이 쓴 [잠재력]에서와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실험하는 그들도 화두 공부를 한 것입니까?
답 : 그들이 화두 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 또 완전히 제 8 식(識)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험을 하는 동안에는 무의식 상태에 가깝게 들어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상태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음 : 윤회설과 인구증가 및 산아제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 곧 이전에는 인구가 적었는데 지금에는 인구가 많다 하니 이것은 영혼이 어떻게 된 것인가? 사람이 반드시 사람으로만 윤회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큽니다. 사람만이 사람으로 윤회한다면 인구가 증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는 데에는 동물과인간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외계에서 오는 영혼도 있고 하여 전체적으로는 증감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에서 인구가 자꾸 팽창해 가니 산아제한을 해서 위기를 면해야겠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그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됩니다. 산아제한 한다고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건설적으로 나아가야지 산아제한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많아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개척하고 개발하면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물음 : 불성(佛性)이란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불교의 독특한 용어(用語)인데,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고, 일체법계(一切法界)를 말할 때는 법성(法性)이라 하는데 일체만법의 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을 바로 안 사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것은 변동이 없으므로 진여(眞如)라 하기도 하고, 그 내용은 중도(中道)이므로 중도라 하기도 하고, 활동하는 자체는 연기에 따라 움직이므로 연기법(緣起法)이라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희한하고 희한하구나, 모든 중생(衆生)이 두루 불성을 갖고 있구나."
|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10. 단군 이래의 첫 민주정권 (1/3)
완전 자유 민주주의 정권. 얼마나 멋진 낱말들이냐. 완전 자유민주주의 정권, 이런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4월의 사자들은 그렇듯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이다. 장면 내각은 완전 자유 민주주의의 요람 속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곧 한국에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세계에 대한 신호이기도 했다.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강대국의 숱한 신생국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하나같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공산주의의 밥이 되기에 꼭 알맞았다. 그래서 미국은 젖먹이를 키우는 심정으로 이들 후진적인 신생 독립국가들을 원조해 주었다. 민주주의 국가로 자라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로! 이 한 가지 바램으로 해서 미국은 그들의 국민들이 피땀 흘려 벌어낸 세금으로 아낌 없이 원조해 주었다. 그래야만 공산주의가 쉽게 넘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굶주렸던 자는 소화불량을 생각지 않고 처먹으려 든다. 이들 후진국에서 정치를 한다는 작자들이 꼭 그 꼴이었다. 하면 절대로 내놓으려 들지 않았다.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해먹으려고 늘어붙었다. 그러자니 별의별 정치적 권모술수를 다 써야만 했다. 뻔한 일이었다. 정치적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군부(軍部)가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진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에 끼어들려는 군부의 구실이었다. 미국의 가장 큰 두통거리가 바로 이놈의 군사 쿠데타였다. (우리 미국을 본받아서 미국처럼 자라라는데 너희놈들은 어째 그 모양이냐?) 개탄을 하며 타일러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생리가 꼭 고기맛을 알게 된 중 같았다. (그냥 내버려 뒀다간 안 되겠어. 손을 써야지!) 참다 못한 미국은 간혹 가다가는 그 나름의 독특한 술책을 써서 권력자를 갈아치우는 일도 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력 행사로 해서 도무지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놈의 노인을 갈아치워야 옳은가, 내버려둬야 옳은가?) 미국은 한국문제로 골치를 썩혔다. 그래서 이승만을 갈아치워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적잖이 고민을 해야 했다. 암울할 정도로 짙기만 했었다. 콜론 보고서란 다름 아니라, 미국 상원(上院) 외교위원회가 콜론협회에 위촉해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진단케 한 보고서를 말한다. 콜론 보고서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 것은 1959년 11월 1일이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 민주정치의 발전상과 아울러 그 앞날을 어둡게 하는 면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짤막한 역사의 전 기간을 통해서 정치적 폭력과 난폭한 억압행위와 그리고 모종의 경찰국가적 수법에 의하여 많은 손상을 입어 왔다. 현재로 말하더라도 1960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 옴에 따라 집권당인 자유당 정부는 수 없는 일련의 조치를 자행하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은 협박을 당하고 그의 지도자들은 위협을 받고 그의 언론기관은 제한을 받고 그의 일반적인 권리는 침해되고 있다. 또 이러한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과 같은 법률이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에서 강제 통과되었다. 동시에 지방자치법이 수정되었는데 이것은 시장.읍.면장을 선거제로부터 임명제로 고치려는 것으로써 확고부동한 태세를 갖추고 선거에 임하려는 명백한 기도 밑에서 중앙 정부의 권한을 대폭 증강시키려는 것이다. 아마 한국은 양당 제도라기보다 한 개 반당 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야당의 때문이다. 이렇게 콜론 보고서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소개한 다음, 다각적인 대책을 제시했다.
미국은 한국의 자유와 민주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로 미국 국민과 의회는 한국의 정치적 실정에 대하여 더욱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이 반공국가로 존재하는 한 한국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지든지 미국 국민은 무관심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언론계는 한국 정국을 보도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지면을 소비해야 하고, 사건을 보도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외국 특파원을 파견해야 하고,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을 방문하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동안 민주사회의 기본 조건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되풀이 얘기해야 한다.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력 행사에 골치를 썩히고 있을 때에 이런 비관적인 콜론 보고서가 제출됐으니, 미국은 더욱더 골치가 지끈거렸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권력자를 갈아치우는 따위의 극단적인 술책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첫째,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라고 선전해 오고 있던 체면상의 문제와, 둘째는 한국의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어 군사 셋째로는 한국민은 능히 그들 자신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건설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우선은 좀더 두고 관망하기로 했다. <이제 도저히 손을 쓰지 않고는 안 되겠다> 하고, 참는 것이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두고 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럴 때에 4.19 학생의거가 터졌다. 이 학생의거로 이승만이 하야를 했고 허정(許政)의 과도정부나 또 그 뒤의 정식 정부인 민주당(民主黨) 정권이 드러서서 하는 일을 보고는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역시 한국민은 위대하다.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 쇼윈도가 되기에 족하다"고 이것으로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다>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을 줄로 안다.
완전 자유 민주주의 정권인 장면 내각은 닻을 올리고 출범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면은 이 정권의 키를 잡고 미처 항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심한 격랑에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첫째는 한 자리 원하는 당원드르이 성화였다.
"우리 당원들은 그 무지막지한 자유당 놈들의 탄압을 용케 이겨내고 민주당 깃발을 지켜낸 전위대들이다. 이제 미주당 자리씩을 줘야 할 것이 아닌가!"
당원들은 이렇게 노골적인 말로 한 자리를 요구했던 것은 아니지만 장면은 당원들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원들에게도 한 자리씩 나누어주기는 줘야 할 텐데.......) 장면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이 없었던들 어찌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존립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장면이 권좌에 올라 앉을 수 있었겠는가! 미국에서도 정권이 바뀌게 되면 대통령의 권한으로 3천 명까지는 자리를 줄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미국 같은 나라야 워낙 큰 나라니까 줄 수 있는 자리를 얼마든지 마련해 줄 수 있는 달랐다. 자리가 너무나 비좁아 한 자리 요구하는 당원들한테 자리를 마련해 주자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의 목을 치지 않는 한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면으로서는 이것이 크나큰 고민이었따. (어떻게 해야 모두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자나깨나 그놈의 자리 때문에 골치를 썩혀야 했다. 만일 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할 것 같으면, <뭐야, 죽 쑤어서 개 줄려고 우리가 민주당에서 그 고생을 한 줄 알아> 하고 물어뜯고자 덤벼들 게 틀림없었다. 장면은 우선 그 중에서 쓸 만한 몇 사람의 당원을 비서로 발탁했다. 장면이 그러나 다른 직종도 아닌 비서직은 정말이지 그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야만 했다. 그러자니 당원 가운데서는 손꼽을 정도밖에 발탁할 수밖에 없었다. 또 설혹 32명을 모두 당원으로 채운다 해도 그 정도의 숫자는 새발의 피였다. 한 자리 요구하는 당원의 천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숫자였다. (어디다 자리를 마련한다, 어디다?) 당원들한테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생각하면 우울해지기조차 했다. 그러니 이쯤의 고민은 아직 약과였다. 더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부분의 알력이었다. 장관 감투를 배당받지 못한 박순천, 김상돈 두 사람의 탈당계는 장면이 안주머니에 간직해 두고 반발은 아직도 약과였다. 이철승, 김재곤의 입각에 실패한 소장파들이 똘똘 뭉쳐, <장면 내각 타도>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장면은 조각에 있어 소장파를 제외시켰지만, 그 대신 소장파를 대거 정무차관에 기용했었다. 외무 우희창(禹熙昌), 재무 서정귀(徐廷貴), 교통 천세기(千世基), 체신 김학준(金學俊) 등, 이렇게 장면이 소장파를 대거 정무차관으로 기용했던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을 배우게 해서 장차 유능한 인재가 되라는 원대한 배려에서였다. 그런데도 소장파는 불만을 품고 <장면 내각 타도>를 외치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 신파 내의 소장파들은 구파 내의 소장파들과 제휴해서 그저 입으로만 이철승을 보스로 해서 신풍회(新風會)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당 내의 새 바람을 일으키자는 뜻에서 신풍회라 호칭했던 것이지만 장면 내각에 있어선, 이 신풍회가 눈 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뒤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장면 내각이 출범한 직후의 원내 의석수는 97석, 별도 교섭단체를 구성한 구파동지회가 86석, 민정구락부로 등록한 무소속이 56석 등 이것이 원내 세력의 분표였다. 때문에 시시비비를 표방한 무소속을 잘만 구슬리기만 하면 정치를 해나갈 수가 있었다. 그것을 소장파들 20여 명이 똘똘 뭉쳐 장면 내각 타도를 외치고 나섰으니, 이것이 가장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교섭단체 등록이었다. 구파는 <구파동지회(舊派同志會)>라는 이름으로, 무소속은 <민정구락부(民政俱樂部)>라는 이름으로 각기 국회에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을 했던 것이다. 무소속 인물들 가운데에는 장면 내각을 지지하며 은근히 추파를 보내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조각이 끝나자, 이들 역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리자 민정구락부에 아예 합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곁들여 여전하기만 한 사회적 혼란도 신파 일색의 내각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잇달았다. 도대체 경찰이라는 것이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곁돌고만 있었다. 4.19 사태로 그래도 경찰은 경찰이 아니던가. 주어진 공권력을 행사하면 얼마든지 사회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이때까지도 허탈한 상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경찰이 무력해져 있으니 모든 불만은 데모로 해결지으려는 풍조가 만연해져 있었다. 데모만능의 악폐를 시정하자면 경찰이 경찰다워야 한다. 그러나 경찰이 경찰답지를 못했으니 데모만능의 풍조는 더욱더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그는 제2공화국 출범 후 처음으로 열린 정기국회가 개회된 며칠 뒤, 오위영과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오 위원, 아무래도 개각을 해서 구파를 찾을 수가 있을 것 같소."
장면은 정기국회를 무사히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에 따라 내각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걱정을 했다.
"박사님, 조각을 놓고 구파하고 우여곡절이 이렇듯 많았는데 구파가 다시 또 개각에 협력을 할 것 같습니까?"
오위영은 구파의 협력 따위는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구파는 갈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민주당이라는 큰집에 같이 살고 있는 처지가 아니오? 그들도 현 시국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설사 고개를 가로젓는 한이 있더라도 설득을 해서 끌어들이도록 해야지요."
"꼭 그러셔야겠다면 총리께서 생각한 댈 생각이십니까?"
"그게 바로 내 고민거리요. 조각을 한 지 열흘 만에 각료직에서 물러나라 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러니 이 아니 답답한 일이오?"
장면은 한숨까지 길게 내뿜었다. 아무리 정치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돌 같이 차야 한다고 하지만, 또 아무리 개각이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장관 감투 씌워준 지 열흘 만에 <사정상 당신이 장관 감투 좀 내놔줘야 하겠소>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천주교라는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온 탓인지 장면은 그렇게 모질지가 못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시켜서 욕을 먹일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당연히 1급 참모가 해야 할 일이었다. 오위영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있은 지 4,5일 뒤인 9월 일 아침, 오위영이 장면을 찾아와 넉 장의 봉투를 내놨다. 장관들의 사표였다. 국무원 사무처정인 오위영을 위시해서 내무부 홍익표, 국방부 현석호, 상공부 이태용 등의 사표였다. 봉투에서 한 장씩 꺼내 사표를 들여다보는 장면의 표정은 자못 침통했다.
"이거 이분들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는 목이 메어 중얼거렸다.
"과히 심려하실 건 없습니다. 모두 애당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사표를 오위영은 장면을 위로했다. 장관 감투. 세상에 그토록 매력적인 감투도 또 없을 것이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치고 이 장관 감투에 군침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그 장관 감투의 매력에 이끌려 사나이들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뛰어들런지도 모른다. 아니 장관 감투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여성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기에 민주당의 홍일점 최고위원인 박순천이 조각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홧김에 탈당계까지 내는 해프닝을 벌였던 게 아니겠는가. 그렇듯 매력적인 장관 감투를 홍익표, 현석호, 이태용, 오위영 등 4명은 <애당하는 마음에서>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했던 그들의 마음도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밤, 장면은 이제는 <구파동지회>의 원내총무로 변신한 유진산을 반도호텔 829호실로 초치(招致), 단 둘이 마주 앉아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진산, 진산한테는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구려."
두 사람의 대화는 장면의 사과에서부터 화제의 실마리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진산, 파벌의 이익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 이익이 아니겠소? 나, 경무대 4자회담의 원칙을 이행하도록 하겠소. 그러니 진산, 이 정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 구파에서 흔쾌히 입각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장면의 말을 듣고 있던 유진산은,
"박사님의 고충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저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파의 입각문제가 그리 용이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왜 진작 경무대 4자회담의 원칙을 이행치 않고 있다가 이제와서 이행하겠다고 하느냐 하고 반박할 것이 틀림없으리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진산 자신의 생각은 어떠시오? 나는 진산의 생각이 어떤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도 구파 조직의 일원입니다. 과연 반발을 무마할 수 있겠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진산만 믿겠소. 부디 지난 구파의 협력을 기대하겠소."
두 사람의 단독 면담은 밤 9시부터 10시 반까지, 1시간 반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나 중요한 내용은 대강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예언
요세푸스는 말했다. 당신은 요세푸스라는 이름의 유대인을 붙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신이 어떤 일을 전하기 위해 저를 당신께 보낸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네로의 뒤를 이을 사람은 당신과 당신의 자손이고, 이 예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당신곁에 붙잡아두어야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믿지 않았다. 요세푸스가 이 예언을 했을 당시, 즉 서기 67년 여름, 아구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네로 황제의 지위는 누가 보아도 확고부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는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그런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는,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 하나가 당장 요세푸스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너에게 정말로 예언 능력이 있다면, 왜 요타파타 주민들에게 도시가 함락 되고 너 자신도 결국 포로가 될 운명이라고 예언해 주지 않았는가. 요세푸스는, 예언하긴 했지만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 전쟁기'의 이 대목은 자기변명의 냄새가 강하기 때문에 그의 기술이 모두 사실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베스파시아주스는 예언을 믿을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내 상상이지만, 믿을 마음이 들었다기보다 그 따위 예언은 믿지 않겠다고 단호히 물리치지 않은 정도였을 것이다. 유대인만큼은 아니지만 로마인도 미신을 믿는 성행이 강했다. 닭이 모이를 쪼아먹는 모양으로 길흉을 점치고, 길조라는 점괘가 나오면 병사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로마 지도층은 공화정 시절에도 제정 시절에도 늘 깨어 있었다. 점을 치기 전날부터 모이를 주저 말고 닭을 굶기라고 몰래 명령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요세푸스의 계책은 성공했다. 네로에게 압송될 염려도 없어졌고, 티투스는 자기와 동년배인 이 유대인을 이제 공공연히 친구로 대하게 되었다. 타키투스도 기록한 이 '예언'을 요세푸스의 말처럼 신의 계시로 생각할지, 아니면 나처럼 요세푸스의 대담한 도박으로 생각할지는 각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내가 요세푸스의 도박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서기 67년 7월 - 요세푸스, 네로의 다음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라고 예언 서기 68년 6월 - 네로 자살 서기 69년 7월 - 동방군단,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서기 67년 당시, 관계자들의 나이는 다음과 같다.
네로 - 30세
베스파시아누스 - 58세
티투스 - 28세
요세푸스 - 30세
요세푸스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나라도 도박을 했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네로에 이어 황제가 될거라고 예언했을 뿐, 네로가 자살한다고는 예언하지 않았다. 네로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나이로 보아도 베스파시아누스가 먼저 죽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도박을 하지 않을 경우 요세푸스는네로에게 압송되어 30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예언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판명되는 것은 네로의 나이로 보아 먼 훗날의 일이라고 예측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밑져야 본전이다. 예언이 적중하지 않는다 해도 요세푸스로서는 손해 볼게 없다. 30세의 요세푸스는 어찌되든 해봐서 해로울 건 없다고 생각하고 승부를 건 게 아닐까. 이것이 내 상상이다. 그렇다 해도, 1년 뒤에 갈바가 황제가 됨으로써 요세푸스의 예언이 빗나갔다는게 판명된 뒤에도 베스파시아누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은 것은 흥미롭다. 네 예언은 엉터리가 아니냐면서 요세푸스를 다시 쇠사슬로 묶어 포로로 다루지는 않았다. 갈바가 즉위한 것을 알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새 황제에게 지지와 충성의 뜻을 전하는 특사로 티투스를 로마에 파견했다. 티투스는 로마에 가는 길에 갈바의 죽음과 오토의 즉위를 알게 되는데, 오토에 대해서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요세푸스의 예언은 두 번이나 빗나갔다. 그런데도 요세푸스의 처지는 변하진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심중에는 젊은 유대인의 예언이 남아 있었을까. 아니면 요세푸스의 출신 계급과 지혜를 유대 반란 진압에 활용할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베스파시아누스의 건전한 정신으로 미루어보아. 후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인 서기 69년 7월. 로마 황제가 오토에서 비텔리우스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방 군단은 비텔리우스의 즉위를 납득하지 않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황제를 자칭한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제야 비로소 2년전에 이루어진 요세푸스의 예언을 믿었다. 요세푸스는 석방되어 전처럼 자유의 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로마군 진영을 떠나지는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놓아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요세푸스 자신이 눌러앉기로 결정했을까. 서기 69년 7월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자의 역할 분담이 명확해져 있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간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한다. 재개될 유대 전쟁의 총지휘는 티투스가 맡는다.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티투스를 도와 유대 전쟁에 참전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티투스 측근에 있으면서 예루살렘 공략에 협력하게 되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틀어박혀 있는 동포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요세푸스는 그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성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거부였다. 서기 70년 9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요세푸스는 계속 티투스 측근에 남아 있었다. 그 이듬해에 티투스가 로마에 개선했을 때도 요세푸스를 동반했다. 황제 자리가 확실해졌을 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에게 자신의 씨족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주었다. 그후 요세푸스의 이름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되었다. 로마식으로는 씨족 이름이 앞에 나오니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고 불러야 하지만, 어감을 중시하여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라고 쓰는 연구자가 많다. 어쨌든 요세푸스는 그후 죽을 때까지 반 평생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저작 활동을 하면서 보낸다.
이 요세푸스를 정통 유대교도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의 저술이 없으면 유대 반란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유대 전쟁기를 읽긴 하지만, 그 책을 쓴 인간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배신자'라는 게 오늘날까지 요세푸스에 대한 유대 쪽의 평가다.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공직을 역임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도 유대 민족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는 것은 요세푸스와 마찬가지지만, 이 사람은 처음부터 로마인과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반면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일단 유대 편에 섰다가 로마 쪽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이 배신자의 저술이 없이는 자신들의 역사를 알 수 없고, 요세푸스의 저술의 라틴어와 함께 당시의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유대 반란의 인과관계와 그 경과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린 공적이 있었다. 정통 유대교도도 이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요세푸스에게 던지는 증오에 내포된 이 모순. 아니, 모순되기 때문에 증오도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세푸스의 선택이 보여주듯, 그리고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이 보여주듯, 또한 티베리우스 황제를 누구보다 먼저 정당하게 평가한 철학자 필로처럼, 유대교도가 로마 세계 안에서 존속할 가능성을 믿은 유대인도 있었다. 로마인의 철학이라 해도 좋은 '보편'과 유대인의 종교가 말하는 '특수'가 공존공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도 존재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마치 유대인 전체가 똘똘 뭉쳐서 지배자 로마에 저항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고, 거기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인간 사회의 일면밖에 보지 않는 경향, 카이사르의 말을 빌리면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경향은 유대인 자신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종교와 생활약식, 인종이 달라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옥쇄는 후세를 감동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요세푸스는 거기에 도취할 수 없는 유대인이었다.
전쟁중단
서기 67년 5월부터 유대 반란을 진압하러 나선 로마군은 요세푸스가 지키고 잇던 갈릴라이아를 제압한 뒤에는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겼다. 하지만 전쟁의 진행 상황은 시원시원하지도 않고, 속공도 아니었다.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의 견실한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일부러 천천히 진격한 기미가 보인다. 로마군을 맞아 싸우는 유대쪽에, 유대인이 성향이라 해도 좋은 분파 행동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파견된 로마군의 임무는 반란 진압이고, 군사적으로 진압하느냐 평화적으로 진압하느냐의 선택은 일선 사령관에게 맡겨져 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쪽이 내분을 일으켜 온건파가 우세해지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 쪽에 시간 여유를 줄 생각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공방전이 벌어지면 예루살렘이 패망할게 뻔하다는 생각을 유대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로마군의 우세를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느리기는 했지만,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서기 68년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과 북쪽에서 포위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유대 민족에게는 마음의 고향인 예루살렘 공략만 남겨둔 이 단계에서 갑자기 유대 전쟁이 중단되었다. 네로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대 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네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다음 황제가 그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고 명령할 때까지는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주제넘게 나서기를 싫어하는 베스파시아누스다운 판단이다. 아들 티투스를 새 황제 갈바에게 보낸 것은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갈바한테서는 반 년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로 떠난 티투스는 도중에 갈바가 죽고 오토가 즉위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오토는 석 달 동안 황제를 자칭한 비텔리우스에 대한 대책에만 전념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결국 로마의 회담을 기다리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1년 반이나 되는 휴전기간을 유대 쪽에 준 셈이다. 유대 쪽에서는 물론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 시설 보강과 식량 비축 같은 현실적인 방어대책에 전념했다. 하지만 공방전이 시작될 게 뻔한 유월절(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기념축일)에 예루살렘을 방문할 작정인 사람들에게 전투가 벌어질 테니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고 말리지는 않았다. 말리기는커녕, 유월절을 예년처럼 예루살렘에서 보내라고 장려하기까지 했다. 유일신이 지켜주는 예루살렘이 이교도 로마의 손에 떨어질 리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온건파에 속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급진파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신이 살고 계시는 예루살렘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으리라 믿고 그곳에 남았다.
전쟁 재개
서기 69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예루살렘 공략전을 재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자리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동방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더라도, 유대 전쟁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하게 된 베스파시아누스를 대신하여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지금까지 유대 전쟁에 참가한 제5군단, 제10군단, 제15군단에 새로 제12군단을 추가한 4개 군단이다. 새로 참전하는 제12군단은 3년 전에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의 지휘로 유대에서 철수할 때 유대군에게 패배를 맛본 군단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군단에 그때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준 것이다. 휴전 이전과 마찬가지로 동맹국 병사들이 주전력인 4개 군단을 보조한다. 유대 북동부를 다스리는 아그리파 2세도 직접 참전했다. 로마군은 다국적군으로 싸우는 것이 보통이다. 병력증강보다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다른 나라들도 지배자 로마와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을 수비하는 쪽, 이 경우에는 유대 쪽에 알려주기 위해서다.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부대에도 유대인 병사들이 끼여 있었지만, 이 로마군을 지휘하는 티투스의 측근에도 유대인이 적지 않았다. 30세의 티투스가 심취해 있던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명장 코르불로 밑에서 경력을 쌓은 노장이다. 거기에다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2세, 그리고 이제 티투스와 친구 사이가 된 요세푸스, 이래서는 로마군 참모본부가 로마인과 유대인을 불문하고 예루살렘이 평화적으로 성문을 열기를 강력하게 바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비텔리우스가 죽자 베스파시아누스가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수도 로마로 떠나는 일을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공략을 아들에게 맡기고 그냥 로마로 떠날 수도 없다. 젊은 티투스는 전투 경험이 풍부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티투스가 지휘하는 전투가 필요 이상으로 오래 끌게 되면, 이집트에서 베스파시아누스가 달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이 총지휘를 계속 맡으면 될 것 같지만, 건전한 상식인인 베스파시아누스는 당시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게 황제 계승자가 확정되지 않은 데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맏아들 티투스를 다음 황제로 결정해놓고 있었다. 예루살렘 공략전은 티투스에게 관록을 주는 의미도 있었다. 예루살렘 공략은 조기에 성공시켜야 했다. 티투스의 관록에 도움이 되고, 황제로 귀환하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국 백성들에게 주는 '선물'로 삼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일찍 달성해야 했다.
예루살렘 시내에서는 급진파의 영향력이 계속 강해져,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목소리뿐이었다. 공격하는 로마 쪽에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려면 이제 전단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서기 70년 봄, 티투스가 지휘하는 4개 군단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진을 쳤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위에 서 있는 천연 요새다. 이곳을 공략하려면 깊은 골짜기라는 장애물이 없는 북쪽에서 쳐들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로마가 속주의 일개 도시에 왜 이렇게 까지 완벽한 방어 시설을 허락했나 싶을 만큼 예루살렘은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도 한 겹이 아니라 이중삼중으로 겹쳐있고, 요소요소에는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체가 우뚝 솟아 있다. 종교의 터전인 대신전조차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다. 수도 로마에는 성벽도 없는데 피지배 민족의 도시에는 견고한 성벽을 허락한 것은. 그런 도시들이 제국 전체의 요소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피정복자들이 정복자 로마에 반항하지 않는 동안만 유효하다. 그들이 반항하게 되면, 로마인은 자신들이 허락해준 덕에 견고해진 그 성벽을 부수기 위해 정력을 소비해야 한다. 하지만 동화정책을 채택한 이상, 이것도 불가피한 위험 가운데 하나다. 그 때문에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공략전도 격전의 연속이었다. 물론 로마군은 관례에 따라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항복을 권고한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숫양이 성벽에 격돌하기 전'이다. 숫양(아리에스)이란 성벽을 깨부술 때 사용하는 도구로서, 굳이 번역하면 파성추다. 이것이 부딪치기 전에 항복한 자는 용서하고, 항복하지 않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여 죽어도 좋다는 것이 로마군의 규율이었다. 서기 70년의 공방전에서는 항복 권고를 받아들여 투항하려 한 유대인은 시내의 급진파에게 살해되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싶어한 유대인이 왜 동포를 살해하고, 급기야 마사다 요새에서 집단 자살하기에 이르렀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다하다. 순수함을 최고의 생활방식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불순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신권정치 수립이라는 유대인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죽음뿐이다. 이런 유대인에게 아그리파 2세나 요세푸스의 설득이 효과가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굴불사 사면석불 - 화엄세계의 염원
[불굴사지 사면석상]
땅 속에서 나온 돌부처
신라 35대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했다. 땅 속에는 커다란 돌이 하나 묻혀 있었다. 그 돌의 사면에는 부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왕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라 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굴불사 창건에 얽힌 얘기이다. 이 절은 한때 굴석사로도 불리었던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굴불사가 와전되어 굴석사로 잘못 불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굴불사가 있는 곳은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의 기슭이다. 굴불사지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백률사가 있다. 그 위치는 황성공원의 동쪽 산업우회도로변이며, 굴불사지 바로 아래에는 근래에 지은 듯한 암자(굴불암)가 대숲 속에 서 있다. 굴불사의 절터는 현재 그 흔적조차 없다. 다만 사방불이 새겨진 사면석불(보물 1백21호)만이 참나무와 소나무 숲속, 계곡 곁에 서 있을 뿐이다. 이 사면석불은 경덕왕이 발견했던 바로 그 석불이다. 이 석불은 백률사 밑에 있는 자연석을 깎은 것으로 보인다. 그 바위가 바로 계곡에 있어 계곡의 흐르는 물을 막기 위해 석불 주위에 둥글게 축대를 쌓아 보호해 놓고 있다. 축대의 높이는 사람키의 반쯤 높이이며, 물이 흘러오는 동쪽과 남북편을 둘러싸고 아래쪽인 서편만이 입구가 터져 있다. 그래서 얼핏보면 석불이 땅 속에 반쯤 묻혀 있는 것을 파낸 듯한 느낌을 준다. 굴불사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생긴 듯하다. 또는 홍수라도 지면 계곡에서 흘러내는 물에 떠밀려 온 흙이 이 바위를 덮어버리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홍수 후에는 번번이 땅을 파서 바위를 발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석불은 경덕왕 이전에 조각되어졌으며, 홍수로 흙에 덮였던 것을 다시 찾아내는 작업을 설화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의 사면에 새겨진 부처들
굴불사는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이다. 사면석불의 조성연대 역시 신라 삼국통일 초기의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1세기 가까이 지난 시기로 정치,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가장 흥성했던 시기이다. 즉 통일이후의 수습과정을 끝내고 내외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굴불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창건된 것이다. 사방불은 큰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을 말한다. 신라의 유물과 유적 중에는 사방불이 꽤 남아 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외에도 경주 남산의 사면석불, 안강 금곡사지의 사방불, 호원사지의 사방불 등이 그것이다. 사방불의 4면에 어떤 부처님을 모시는가 하는 것은 이론이 많고, 일정하지 않다. 경전 등에 보면 동서남북의 사방을 주재하는 부처들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경전에 따라 조각되어져 있지는 않다. 시대와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 그 사회가 지향하는 부처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굴불사 사면석불의 경우 동쪽에는 약사여래가, 서쪽에는 미타삼존 즉 중앙이 미타, 좌우에 관음, 대세지 보살을 조성했으며, 북방에는 여래상이, 남방에는 2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높이 4m의 바위 덩어리에 양각으로 새겼으며, 서방 미타여래를 보좌하는 관음과 대세지 보살은 따로 길쭉한 돌로 다듬어 큰 바위 옆에 세워 놓았다. 미타여래의 높이는 3.9m이며, 동방 약사여래는 좌상으로 높이가 1.4m 너비 1.1m이다. 동쪽과 서쪽의 경우는 약사여래와 미타여래가 확실하다. 그러나 남, 북방의 불상은 험하게 마멸되어 그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북방 여래상 오른 편에는 음각으로 보살상을 조각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남방의 2개의 보살상 중 왼편 보살은 머리부분이 부서져 나갔다. 미타여래는 아미타불 또는 무량수불로 불리는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이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빛세계의 교주로 대의왕불로도 불린다. 이 부처는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과 음식을 만족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밖의 남, 북 불상들도 각각 그 방향의 세계의 교주들일 것이다. 이들 불상들은 그 조각에 있어서 입체, 양각, 음각, 입상, 좌상 등 변화있게 배치했다. 또한 불상의 모습이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띠고 있어서 신라통일 초기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불상의 배치 방식
사면불은 거친 바위를 다듬어 화엄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예술품이다. 신라인의 석가와 미타, 지장, 관음보살의 4불을 특히 좋아했다. 또한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약사여래신앙이 크게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다. 굴불사 사면석불 중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시게 된 것도, 신라인 나름의 신앙심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신라의 사방불은 모두 동에 약사, 남에 미를, 서에 미타, 북에 석가로 되어 있다.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라인의 독창적인 배치이다. 일본의 경우 정면에는 석가, 뒷면엔 정광, 좌편에는 미륵, 우편에는 보현으로 되어 있어 사방불이라기보다는 석가 삼존 형식에 머물고 있다. 신라인의 사면불 구성은 경전에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경전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식으로 배치함으로써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굴불사지가 있는 곳은 금강산의 서편 아래 기슭이다. 이 기슭에 굴러다니는 숱한 바위 중의 한 바위에 신라인은 정신을 불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과 예술적 기교를 동원하여 한 이름모를 장인이 사면불을 새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면불의 조각이 완성됨과 동시에 거칠고 황량한 바위덩어리가 화장세계로 변모되고 생기 감도는 정신력을 획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이 사면석불은 신라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과시한 것이며, 동시에 거친 무정물에서 다정다감한 인간성을 추출하는 예술 정신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만하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