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1호 - 2024.07.07 일요일(음력 :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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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말을 그저 들어 주기만 해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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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 표기 규정과 현실 사이
지난 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리 국민들은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네 번의 실패 이후 4전 5기 만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틀린 외래어 표기이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바른 외래어 표기라는 사실이다. ‘Leonardo W. DiCaprio’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적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으로 이름이 불리기 때문인데,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현지 영어 발음에 가까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표기하도록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외래어 표기의 통일을 위해 ‘외래어 표기법’을 만들어 놓았지만 우리 국민들 모두 ‘외래어 표기법’을 익혀 규정에 맞게 표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격월로 회의를 개최해 주요 외래어의 한글 표기를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결정해 국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대다수 국민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이름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바로 잡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중국 인명의 경우에도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한다’는 규정에 따라 현존하는 중국(홍콩) 배우와 감독들의 이름을 ‘장이머우(張藝謀)’, ‘저우룬파(周潤發)’, ‘청룽(成龍)’, ‘류더화(劉德華)’, ‘리롄제(李連杰)’, ‘저우싱츠(周星馳)’, ‘왕주셴(王祖賢)’ 등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도록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괄호 안의 한자음대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바깥어른, 사부님, 부군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여성 동료나 상사의 남편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모님’에 기대서 ‘사부님’이라는 말을 만들어 쓰면서 이 말이 적절한지를 묻기도 한다. 사실 호칭어 같은 언어예절은 실제 생활에서 허용되는 범위가 넓어 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기가 어렵다. 그렇더라도 어느 정도의 합의된 기준은 필요하기에 국립국어원에서는 실태조사와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여 ‘표준 언어예절’을 정하여 권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상사의 남편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홍 선생님’, ‘홍길동 선생님’ 등으로 부르거나 그분의 직함을 활용해서 ‘홍 과장님’, ‘홍길동 과장님’ 등으로 부르도록 하고 있다. 해당 직장 상사나 제삼자에게 지칭할 때에는 위에 나열한 것 외에 ‘바깥어른’이나 ‘바깥양반’ 등을 쓸 수 있다.
때때로 ‘부군(夫君)’을 쓰기도 하나 이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부군’은 아랫사람이나 적어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남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직장 상사나 집안 어른 등 존대를 해야 할 상대에게 ‘부군’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사부님’은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본래 ‘사부(師父)’는 스승이 아버지와 같다고 하여 생겨난 말로 스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나에게 직접 가르침을 준 일이 없는 사람에게 ‘사부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표준 언어예절에서는 ‘아비 부(父)’가 아닌 ‘지아비 부(夫)’ 자를 쓰는 ‘사부(師夫)님’을 따로 두어 여자 선생님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의 범위를 학부모나 학생의 편에서 여자 선생님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한정해 두었기에 직장 상사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해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만 하다’와 ‘만하다’
다음 중 띄어쓰기가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① 형만한 아우 없다. ② 형 만한 아우 없다. ③ 형만 한 아우 없다.
정답은 3번이다. 이 예에서 ‘만’은 조사이고 ‘하다’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단어별로 띄어 쓰되 조사는 앞말에 붙여 쓰는 원칙에 따라 ‘형만 한’으로 쓴다.
이는 ‘형만 못하다’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간다. ‘형만 못하다’는 누구나 이와 같이 띄어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데, 그렇다면 ‘형만 하다’도 같은 식으로 띄어 쓰는 것이 옳다.
다음 중 띄어쓰기가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① 먹을만하다 ② 먹을 만하다 ③ 먹을만 하다 ④ 먹을 만 하다
정답은 1, 2번이다. 위 ‘형만 한’과 같은 모양은 3번이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다. 둘은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먹을 만하다’의 ‘만하다’는 보조형용사이다. 따라서 ‘먹을 만하다’로 쓰는 것이 원칙이고, 보조용언은 본용언에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되는 데 따라 ‘먹을만하다’로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만하다’ 사이에 조사가 개입하면 ‘먹을 만도 하다’처럼 띄어 쓴다. ‘만도 하다’가 한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만’은 의존명사이고 ‘하다’는 형용사이다.
이상과 같이 ‘만+하다’의 구성은 꽤 복잡하다. ‘형만 한’에서는 조사+형용사, ‘먹을 만하다’에서는 보조형용사, ‘먹을 만도 하다’에서는 의존명사+형용사이다. 다만 ‘만하다’를 의존명사+형용사 구성으로 보는 문법학자들도 적지 않은데, 이 경우라면 위 4번처럼 ‘먹을 만 하다’로 띄어 써야 한다. 현재 규범은 ‘만하다’를 보조형용사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먹을 만하다’로 쓰는 것이다. 띄어쓰기는 이와 같이 문법적 이해를 요하는 내용이 많아 관심을 기울여 익힐 필요가 있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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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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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유리창 - 천상병
창은 다 유리로 되지만
내 창에서는
나무의 푸른잎이다.
생기 활발한 나뭇잎
하늘을 배경으로
무심하게도 무성하게 자랐다.
때로는 새도 날으고
구름이 가고
햇빛 비치는 이 유리창이여.
∼∼∼∼∼∼∼∼∼∼∼∼∼∼
절정 - 정지용
석벽에는
주사가 찍혀 있오.
이슬 같은 물이 흐르오.
나래 붉은 새가
위태한데 앉어 따먹으오.
산포도순이 지나갔오.
향그런 꽃뱀이
고원꿈에 옴치고 있오.
거대한 죽엄 같은 장엄한 이마,
기휴조가 첫 번 돌아오는 곳,
상현달이 사러지는 곳,
쌍무지개 다리 드디는 곳,
아래서 볼 때 오리온 성좌와 키가 나란하오.
나는 이제 상상봉에 섰오.
별만한 흰꽃이 하늘대오.
민들레 같은 두다리 간조롱해지오.
해솟아 오르는 동해~
바람에 향하는 먼 기폭처럼
뺨에 나부끼오.
~~~~~~~~~~~~~~~~~~~
너를 잃 고-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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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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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점정(畵龍點睛)
畵:그림 화. 龍:용 룡. 點:점 찍을 점. 睛:눈동자 정.
[유사어] 입안(入眼). [출전] ≪水衡記≫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도 그려 넣는다는 뜻. 곧
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킴. 끝손질을 함.
② 사소한 것으로 전체가 돋보이고 활기를 띠며 살아남의 비유.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장승요는 금릉[金陵:남경(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을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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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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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5. 민주당의 집안싸움
자부월족(自斧월足)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제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뜻이다. <사람이 오죽 미련하면 제 도끼로 제발등을 찍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미련한 놈이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히려 약삭빠른 놈, 자신만만해서 오만에 가득 차 있는 놈이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기가 일쑤였다. 왜 서두에서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민주당이 그 꼴이었기 때문이다.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탈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으로 스스로를 이끌어 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민주당 인사들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제 도끼로 스스로 제 발등을 찍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은 어째서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결과를 빚어 내게 되었던가. 그것은 오만 때문이었다. <차기 정권은 내 것이다> 하는 오만이 민주당 인사들 가슴속에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속된 인간이 오만에 차게 되면 안하무인이 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놈의 괜스레 우쭐대는 것쯤이야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안하무인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이것은 그냥 보아 넘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 가운데에는 어느 사이엔가 정상배와 손을 잡고 이권에 개입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앞으로 총선거를 치러야 할 판이니 돈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의 정상배라는 것이 어제까지 자유당 권력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작자들이었다. 손바닥만한 나라였으니까. 한데, 이 정상배들이란 작자들의 노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들은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의 명함이나 소개장을 얻어들고 것이었다.
"자유당 치하 때 당신들의 관료주의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시오? 내가 제출한 서류를 당장 결재하지 않으면 당신의 모가지는 없다는 것을 아시오!"
이런 협박을 눈썹 한번 찡긋하지 않고 해댔다. 이권에 개입한 것은 비단 중앙의 국회의원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방에서는 별 볼일 없는 친구가 민주당 당원이라는 것을 크게 걸고 이권에 끼어들려 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의 실례로는 과도정권이 출발해서 한창 됐을 때의 얘기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선태(金善太)가 현직 경찰간부인 모 경감의 뺨을 때렸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6월 19일에 한국의 20일 오후에 국회로 연설하러 가던 도중, 대통령 전용차를 뒤따르고 있던 김선태의 지프차를 모 경감이 가로막고 정차를 시켰다. 길을 가로막고 정차를 시킨 것이 바로 그 경감이었다.
"왜 길을 가로막는 거야?"
김선태는 차 안에서 소리쳤다.
"경비 관계상 국빈의 차를 일체 뒤따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뭐가 어째?"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김선태는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이놈아, 난 국회의원 김선태야. 국회의원도 몰라 봐?"
하면서 다짜고짜로 그 경감의 따귀를 올려 붙였다.
"죄송합니다, 몰라 뵈어서."
차에 오르자 쏜살같이 달려갔다. 따귀를 때린 국회의원과 따귀를 맞은 경찰관. 이 정도의 사건이야 신문의 1단짜리 기사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냥 덮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따귀를 때린 국회의원은 이제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따귀를 맞은 경감은 출세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한숨 한번 쉬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그렇게끝나지를 않았다. 따귀를 맞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하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면 다야? 제깐 놈이 뭔데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따귀를 함부로 때려?"
경찰간부의 따귀를 때린다는 것은 경찰에 대한 중대한 모욕 행위야! 우린 결코 이 사건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어!"
"옳소! 경찰이 동네 북이요?
부정선거문제로 두들겨 맞고, 권력을 쥐게 된 정당의 국회의원한테 두들겨 맞고,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한다고 했어요! 따귀를 맞고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따귀를 때린 자를 규탄해서 사과를 받도록 합시다."
마침내 600여 명이나 되는 제복의 경찰관들이 김선태의 행위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김선태 의원은 우리 앞에 나와 공개 사과를 하라!> <국회는 폭력 국회의원을 추방하라!> 외치면서 국회의사당을 향해 세종로 거리로 나섰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데모. 이런 일이 세계 경찰 사상 어느 나라에서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세계적인 토픽감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니 국가의 위신이나 체면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런데 과도정권의 그 누구도 나서서 이 데모를 막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심한 정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관들의 데모를 보다 못해 이것을 만류시키고자 뛰쳐나간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다.
"여러분들이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분노는 데모를 벌이다니 말이 됩니가? 나라의 체면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김선태 위원을 폭력 국회의원으로 우리가 검찰에 고발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데모만은 중지해 주십시오."
대학생들은 이런 말로 데모를 저지시키려고 애를 썼다. 4.19 때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불이 붙은 경찰관들은 막무가내였다. 더구나 그들 데모에 나선 경찰관들은 태반이 성격이 괄괄한 경상도 사나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이젠하워의 방한에 즈음해서 경비관계로 차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찰관들은 대학생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기어이 태평로 국회 앞에 이르러서야 <김선태 의원은 나와서 사과하라!> <국회는 폭력의원을 추방하라!> 경찰관의 데모는 군대에도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지 않았다. 다급해진 내무부 장관은 서울 시경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경국장이 나가서 달래 보시오! 만약,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전원 파면 조치하고 의법 처단하겠소!"
장관의 명령을 받은 시경국장은 즉시 데모 현장으로 출동을 했다.
"경찰관이 데모를 벌이다니 말이나 되는가! 즉시 해산토록 하라!"
서울 시경국장은 한껏 시경국장의 위엄을 부려 보았으나 데모 경찰관들은 어디 개가 짖느냐는 태도였다. 시경국장은 김선태에게 뺨을 맞은
"뺨 한 대 때문에 이런 소동을 벌이도록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서 경감이 책임을 지고 해산을 시키도록 해!" 하고 명령했다. 그러나 서대조는 국장의 명령에 불응했다.
"국장님, 제 동료들이 데모를 벌일 때는 이미 파면 처분을 각오하고 데모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경국장이 나서서 데모를 만류시킬 수밖에 없었다.
"뺨을 때린 김선태한테는 내무부 장관을 통해서 정식 항의를 하고 사과를 받아내도록 하겠다. 그러니 이 정도면 여러분의 의사는 충분히 관철됐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의 체면을 달라!"
서울 시경국장이 명령이 아니라 애원을 해서야 겨우 정복의 경찰관들은 데모를 중지했던 것이다. 데모 만능의 풍조도 문제였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문제였던 것은 민주당의 오만이었다. 그 오만은 결국 군사 쿠데타까지 이어지게 되지만, 하여간에 민주당은 애써 겸손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차기 정권은 내 것이다>라니?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의 의거로 무너졌던 것이다. 학생들이 학생 신분이 아니라 정치집단의 신분이었다면 다음 정권은 으레 그들의 차지였을 것이었다. 그것을 민주당이 어부지리로 얻게 되었던 것인데 겸손할 줄 모르고 오만하게 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민주당의 오만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12년간을 두고 줄곧 갖은 수모와 탄압을 받아왔으니 그쯤 우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었다. 지식인들을 우려케 한 것은 민주당의 신.구파의 싸움이었다.
"정권이 굴러들어오게 돼 있으니 무사하지는 않을걸."
이것이 민주당을 바라보는 식자들의 시각이었다. 어떻게 해서 식자들이 민주당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 하면 민주당이 보고,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물과 기름이야. 도저히 하나의 정당으로서 발전해 나가기는 어려워"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의 내분은 으레 있기 마련이다. 그런 차원에서 민주당의 내분을 바라본다면, 이 또한 그리 걱정할 것이 못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당의 파벌 싸움의 내용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파벌 싸움과는 사뭇 내용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감투>만 놓고 싸웠다. 감투문제만 제기되면 서로 자파에서 그것을 차지하고자 으르렁거렸다. 그런 그들이었으니 정권이 굴러들어오게 된 판국인데 정치 집단이 최고 목표로 하고 있는 <정권>을 앞에 놓고 있을리가 있겠느냐,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우리는 민주당이라는 한 정치집단의 집안 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좀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954년에 자유당이 소위 <4사5입 개헌파동>을 통해서 이승만의 3선의 길을 터놓자, 야당인 민주국민당이나 재야의 정치 세력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힘의 결집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 민주국민당이다.
"이제는 정권을 경쟁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대 독재투쟁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합시다."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독재정권> 운운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획책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던 재야 세력들이 흔쾌히 호응해 왔다. 독립투사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흥사단(興士團) 인사를 비롯해서 피난지의 임시 수도 부산 시절의 원내자유당(院內自由黨)에 소속해 있던 인사, 학생운동 출신 그룹 등이 민주국민당의 주장에 호응, 여기에 모여들었다. 정일형(鄭一亨), 주요한 등이 흥사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오위영(吳緯泳), 김영선(金永善), 김재순(金在淳), 함종빈 등은 학생운동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밖에 조재천, 엄상섭 등은 재야 법조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다. 민주국민당은 이들 재야 세력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창당이 위험에 부딪치는 고비가 없지도 않았다. <지팡이 짚고라도 신당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한 조봉암(曺奉岩)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대립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조봉암은 이른바 혁신계(革新系)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재야 세력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이라는 대원칙하에 민주국민당 당수 신익희(申翼熙)는 조봉암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영입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조봉암은 나중에 진보당(進步黨)을 창당했다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정치적 타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꼭 같은 목적 아래 결합된 민주국민당과 재야 세력은 민주당의 기치 밑에 하나로 뭉쳐질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격앙된 감정이 사그라들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제기되게 되자, 어느 사이엔가 민주당은 신.구파라는 두 개의 파벌로 세포분열을 일으켰다. 구파는 종래의 민주국민당 출신자들이고, 신파는 신참 세력들이 장면을 리더로 해서 똘똘 뭉쳤던 것이다. 거듭 언급하게 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지식인들이 민주당의 신.구파의 세포분열을 우려하게 되었던 것은 어떤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파벌이 당의 이익을 우선시키기보다는 자파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정치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의 신.구파는 어느덧 감정적인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대립 때마다 축적돼 나온 감정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폭발해 버리게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한 우려는 4.19 의거로 해서 이승만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기 시작하자 벌써 그 징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0년 3월 24일이라고 하면 이승만이 하야를 결심하기 이틀 전이다. 이날까지도 이승만은 하야를 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에만 충실하겠다>고 담화를 발표할 정도였다. 이런 내용의 담화가 있자, 자유당 온건파의 리더인 국회 부의장 이재학이 민주당에 대해서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책임제로 고치는 것으로 시국수습을 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이재학의 생각으로는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데다가 건국을 한 대통령이니만큼 대접상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게 하되 대신 정치제도를 내각책임제로 바꾸게 되면 더 이상 불만을 확대함이 없이 시국을 수습할 수 있지 않느냐 해서였다. 이재학의 제의를 받은 민주당에서는 그 즉시 순화동에 있는 부통령 관저에서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간부들이 참석했다.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금의 정국을 효과적으로 수습하는 길은 내각책임제로의 개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종래의 우리 당의 정책이 내각책임제였던 만큼 시급히 당론을 모아서 시국을 수습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내총무인 유진산(柳珍山)이 모임의 뜻을 밝혔다. 아직 이승만이 물러설 결심을 굳히기 전이었으므로 시국수습책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승만을 상징적인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게 하는 정치제도를 내각책임제로 바꿨다고 하면 학생들이 진정해 줄 것이다. 구파는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면으로 그 수습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은 시국수습책이 될 수 없습니다." 유진산이 물었다.
"어째서 시국수습책이 될 수 없단 말이오?"
"학생데모가 어째서 일어났습니까? 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부통령 선거를 치뤄야 학생들이 납득을 하지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한다고 해서 납득할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긴 조재천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은 부정선거가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 제거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렇소. 하나 부정선거의 원인을 또 따지면 정치제도의 잘못에 보다 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차제에 그 큰 원인을 제거해서 다시는 오늘날과 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두자 그 말씀이오!"
"그것은 정.부통령 선거를 먼저 치르고 나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지 않고 언젠가 일어날지 모를 화재예방을 해 두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유진산이 직선적으로 물었다.
"조 의원이 한사코 정.부통령 선거부터 치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속셈이 뭐요? 우리 아니었소? 자유당에서도 시국수습책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에 찬성할 뜻을 비쳤기에 이참에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해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는데, 나는 조 의원이 한사코 반대하는 그 속셈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나는 아무런 속셈도 없습니다. 문제를 순리로 풀어나가자는 것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의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면 그건 학생들의 의거를 이용해서 정치목적을 달성했다는 욕밖에 먹을 것이 더 있겠소?"
"무슨 그런 말씀을!" 유진산의 얼굴 표정에느 노여움이 알알이배어 있었다.
"조 의원은 그런 말로 신파의 속셈을 뭔지 훤히 꿰뚫어 보고 있어요. 신파에서 뭐라 하든 우린 고귀한 학생의 피에 보답하기 위해서 국회의원직 총사퇴를 전제로 한 순수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도록 하겠소. 지금 재선거를 한다는 것은 극도의 혼란만 초래할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대통령 중심제를 그냥 유지해 나가면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든 올바른 민주 정치가 시행될 것이라고 보장할 길이 없어요."
구파는 유진산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팽팽히 맞선 신.구파의 주장은 평행선만 달리고 있을 뿐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파의 모사인 조재천이 구파에서 제기한 시국수습책을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조재천은 학생데모의 원인이 부정선거에 있었던 만큼 원인 제거라는 명분 밑에 정.부통령 성거를 다시 실시해서 장면을대통령에 당선시키자는 속셈이었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는 장면을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 격이었다. 만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타계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조재천은 구파에서 제기한 내각책임제로 개헌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하자는 구파의 주장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병옥이 내세울 인물은 장면 하나밖에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형편이었다. 물론 정.부통령 후보를 다시 지명할 때 구파에서 대통령 후보로 밀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도연이 있었고 윤보선도 있었다. 인물로 따지면 모두 대통령 후보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렇기는 했으나 지명전을 벌여도 장면이 당당히 구파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조재천의 계산이었다.
조재천은 어째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민주당의 정치제도에 대해서 내각책임제를 정책으로 내걸고 있기는 했지만 조재천 개인적으로는 내각책임제보다는 대통령책임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간에 부통령 공관에서의 회의가 신.구파 간에 팽팽한 평행선만을 긋다가 구파가 분연히 자리를 차고 퇴장해 버리자, 그 자리에는 신파 인사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 신파만으로 회의를 연장하는 꼴이 되었다. 바로 어제 부통령직을 사임한 장면이 사뭇 걱정스러운 듯 조재천에게 물었다.
"조 의원, 구파는 내각책임제로 개헌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하자는 안을 끝까지 고집한 눈치 같은데 이렇게 양 파가 자파의 주장만 고집하다간 어느 세월에 시국을 수습할 수 있겠소?"
"시국수습은 이 박사가 권좌에서 물러나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깨끗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박사가 어디 물러날 사람이오? 학생들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지만 고작 한다는 소리가 자유당 총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이 박사가 물러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정치 공세를 취해야겠지요."
조재천의 옆에 앉아 있던 주요한이 끼어들었다.
"구파에서는 자유당 온건파하고 야합을 해서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시국을 수습하자고 하지만, 이 박사가 상징적이든지 뭐든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한 학생들이 절대로 승복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주요한의 견해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옳습니다."
그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의 사태를 수습하는 시국수습책이란 이 박사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장면은 도무지 미덥지도 않고 마음도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기는 하나 우리 당의 정책이 내각책임제가 아니겠소? 그러고 보면 구파에서 들고 나온 시국수습책을 무조건 배척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박사님."
조재천은 이렇게 불러놓고 마치 구파 사람들한테 쏘아붙이듯 격한 어조로
"구파 사람들이 조 박사가 살아 계신다고 하더라도 내각책임제 개헌 시국수습책을 들고 나왔으리라고 보십니까? 전 그렇게 안 봅니다. 그 사람들 조 박사를 잃었으니까, 그런 수습책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럼 내각책임제로 정국을 수습한다고 할 때, 앞으로 정국은 어찌 될 것 같소?"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하고 나면 구파 사람들, 자유당 온건파하고 제휴해서 저희들이 정권을 잡으려 들겠지요."
"잘 보셨소."
이상철(李相喆)이 조재천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 사람들 조 박사가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하고 똑같은 주장을 하고 나섰을 이 박사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를 기본 전략으로 밀고 나가도록 해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선 구파가 자유당 온건파하고 손을 잡았다는 것부터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행위라 할 수 있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당이다. 그 이승만의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기 때문에 4.19 사태와 같은 유혈극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당도 타도해 버려야만 했다. 그런 판국에 구파가 자유당 온건파하고 손을 잡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구파는 어째서 자유당 온건파와 손을 잡았던가? 그것은 <장면의 집권을 막자!> 해서였다. 지금 정국은 신파한테 유리하게 전개되어 나가다가는 장면의 집권은 틀림없이 현실화될 것 같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장면한테 유리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시국에 쐐기를 박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각책임제도의 개헌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자유당 온건파하고 제휴할 수 있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자유당 온건파는 앞으로 정국이 어떤 방향으로 치닫게 되든 민주당 구파와 제휴함으로써 살 길이 열린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 책(自救策)으로써 내각책임제 개헌을 촉구, 시국을 수습해 보고자 구파에게 제의하게 됐던 것이다.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물러나온 구파 인사들은 무교동 당사로 돌아오자, 즉시 표정들이었다. 회의는 유진산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신파는 정국이 자파한테 유리하게 전개돼 나가고 있다 보고 벌써 오리발을 내밀려 하고 있소. 만일 신파의 주장대로 정.부통령 선거를 먼저 치른다 합시다. 그래 가지고 장 박사가 대통령이 된다고합시다. 그때 정권을 잡고 난 신파가 내각책임제 개헌에 동의할 성싶습니까? 그들은 절대로 내각책임제 개헌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또 장 박사가 정권을 잡고 나서 총선거를 치르게 될 경우, 과연 우리 구파에서 몇 명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극히 비관적이 아니 될 수 없소이다."
유진산의 말투는 자못 비장했다.
"그러니까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해야 된다 그 말씀이에요. 대통령 후보를 잃은 우리 구파가 살 길은 그것뿐입니다."
이날의 전략회의에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 난 연후에 총사퇴를 해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렇듯 민주당 신.구파는 벌써 3월 24일에 저마다 꿍꿍이 속을 안고 정국에 대처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똑같은 목표 아래서 동지로 뭉쳤던 이들은 정권이 바로 눈앞에 다가서자 <네가 잡느냐, 내가 잡느냐?> 해서 으르렁대기 시작했던 상황이 이렇게 벌어졌으니 이제 그들은 동지가 아니었다. 마치 칼 끝에 피묻은 원수처럼 그들의 사이는 이날을 기점으로 해서 점점 벌어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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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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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1부 갈바 황제(재위:서기 68년 6월 18일~69년 1월 15일)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
역사상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라고 불리게 된 이 전투는 서술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우선 이 전투를 가장 상세히 서술한 역사가 타키투스부터 '마음이 내켜하지 않는다', 직접 참가하지 않은 전투라도 마치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 듯한 심정이 되면 그 상황을 명쾌하고 생생하게 서술할 수 있지만, 이 내전을 혐오하고 있던 타키투스로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내킨다'는 말은 전투를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현장에 입회한 듯한 기분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대목은 시칠리아에 원정한 아테네군이 참담한 패배를 맛보는 광경이다. 자신은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서술하는 투키디데스의 붓은 분노로 차 있다. 이 패배로 말미암아 조국 아테네가 결정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데 대한 아테네인 투키디데스의 분노다. 그것을 서술하는 투키디데스는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어조로 일관하지만, 격렬한 분노와 절망을 흉중에 숨긴 자만이 그런 서술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대목은 전투 서술의 걸작이 되었다.
이 아테네인과는 반대로, 서기 68년의 베드리아쿰 전투를 그보다 30년 뒤에 서술하게 되는 로마인 타키투스는 이 내전이 조국 로마에 결정타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단순하게 혐오할 수 있었다. 분노와 혐오는 다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타키투스의 서술은 불명료해지고 말았다. 실제로 브리타니아에서 건너온 제14군단과 에스파냐에서 건너온 제7군단이 참전했는지 어떤지도 확실치 않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도착했다고 말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러나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나 반 년 뒤에 일어날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 대한 서술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애매한 것은 타키투스 개인의 감정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누가 서술해도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서술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로마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명장들이 지휘한 전투는 수십 년이나 수백 년 뒤에 서술되어도 명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한니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제2권 참조),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제3권 참조), 카이사르(제4권, 제5권 참조)가 지휘한 전투 가운데 서술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이 주역들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 전체의 전개를 결정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인 전술도 시종일관 승리를 향하여 합리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수단인 전술도 시종일관 승리를 향하여 합리적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적이 예상하지 못한 수단에 호소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까, 전술은 각자 자신의 온 정신을 쏟아부은 결과다. 따라서 목적은 같아도 전술은 사람마다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지 않으면 전투의 승리를 전쟁의 승리로 이어나갈 수 없다. 적을 쳐부수긴 했지만 아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면, 그것은 유럽 격언에 나오는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버린다.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로마군을 무찔렀으나, 싸울 때마다 아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고 결국 이탈리아에서 허둥지둥 귀국한 그리스 장군 피로스에 대해서는 제1권에서 이미 기술했지만, 이런 '피로스의 승리'만 되풀이하면 전투에서도 이겨도 전쟁에서는 승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어차피 '인류의 필요악'인 전쟁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면, 휘하 병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사령관에게 불가피한 과제가 된다. 그리고 효용성과 합리성은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에 있다. 앞에서 말한 여섯 명의 명장 가운데 병력을 함부로 투입하여 이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즉 명장의 전술은 당연히 합리적일 거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수천 년 전의 전투라 해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서기 69년에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내전의 등장인물들은 위의 여섯 명장과는 격이 달랐다. 역량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승리하고 싶은 욕망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은 냉철함을 잃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피까지 흘리게 된다. 어리석은 자들끼리 싸웠을 때의 결함이 그대로 드러난 전투였다. 크레모나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베드리아쿰 주변을 전쟁터로 하여 벌어진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는 양쪽 다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공격하는 비텔리우스 진영의 경우, 카이키나와 발렌스의 두 부대가 합류하긴 했지만 지휘계통은 여전히 카이키나와 발렌스로 양분되어 있다. 둘 다 자기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리고 총사령관 비텔리우스는 아직도 갈리아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중이다.
수비하는 오토 진영도 지휘계통을 통일하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전쟁터에서 총지휘를 맡아야 할 오토 황제는 장병들을 포 강 북쪽 연안으로 보내놓고, 자신은 남쪽 연안의 브릭셀룸(오늘날의 브레셀로)에서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브릭셀룸은 포 강에 면해 있는 작은 마을인데, 마을 앞을 흐르는 강 가운데에 길쭉한 모래톱이 있어서 그것을 따라가면 20킬로미터 떨어진 베드리아쿰 전쟁터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래톱을 따라 20킬로미터라 해도, 강이 사이에 끼여 있다. 강이 없고 육지로 이어져 있다 해도 총사령관이 20킬로미터나 후방에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전투 지휘에 서툴렀던 아우구스투스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토 진영의 가장 큰 패인이다. 원래 동포와 싸울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장병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으려면, 우리는 오토 황제를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그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토는 강 건너에서 결과를 기다린다고 한다. 병사들 사이에 싸움을 꺼리는 분위기가 퍼졌다. 이런 분위기는 비텔리우스와 오토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거짓 정보가 퍼지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오토 진영의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은 것도 패인의 하나였다. 오토 자신은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대신 형 티티아누스와 근위대장 풀크루스가 총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둘 다 실전 경험이 없었다. 반대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파울리누스, 갈루스, 켈수스 같은 역전의 노장들은 제각기 부대 하나씩을 맡았을 뿐이다. 파울리누스는 카이키나에게 치명타를 가할 기회를 놓쳐서 병사들의 경멸을 샀고, 갈루스는 말에서 떨어져 다쳤기 때문에 진두에서 지휘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원로원 의원이고 황제의 친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총지휘를 맡은 티티아누스가 일관된 전략에 따라 각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리라고는 기다할 수 없다. 황제군은 갖고 있는 힘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는커녕, 가진 힘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서기 69년 4월 15일에 벌어진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는 베드리아쿰을 중심으로 한 넓은 평원 곳곳에 흩어진 적군과 아군이 각자 마음대로 맞부딪쳐서 싸우는 혼전으로 시종일관한다. 전쟁터가 통일된 회전을 치를 수 없을 만큼 좁았던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희생을 치르지 않고 전과를 올리는 데 필요한 전략적, 전술적 역량을 가진 인물이 부족했을 뿐이다. 적군도 아군도 같은 로마인이다. 군복이나 장비도 똑같다. 죽인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나 형제를 죽인 것을 알고 통곡하는 비극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승패를 가른 것은 비텔리우스파 지휘관들의 역량이 오토 진영 장수들의 역량을 능가했기때문이 아니다. 로마군의 최강 군단으로 평판이 높은 '라인 군단' 병사들이 전투력을 과시하여 혼성군인 황제군을 압도한 것도 아니었다. 황제군 병사들이 동포와 싸우는 데 대한 망설임을 좀더 강하게 느꼈을 뿐이다.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에게는, 아직도 먼 갈리아에 있는 총사령관 비텔리우스가 참전하지 않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제군 병사들은 바로 뒤에 진을 치고 직접 싸움을 지휘해주리라 믿었던 최고 사령관 오토가 참전하지 않자 맥이 빠졌다.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은 비텔리우스가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오토파 병사들은 오토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최고 사령관이 참전하지 않은 것은 같지만, 부하들에게 주는 느낌이 다르다. 황제군 병사들은 마음 속에 실망감을 안고 싸워야 했다. 어리석은 자의 전투는 전황 전개가 명쾌하지 않을 뿐 아니라, 희생자수도 확실히 많다. 승리한 비텔리우스 진영의 희생자 수도 알 수 없고, 패배한 오토 진영의 희생자 수도 역시 알 수 없다. 명장이 손을 대는 전투에서는 적어도 이긴 쪽의 희생자 수는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된다. 서기 69년 4월 15일의 이 전투에서 승자의 전사자 수도 확실치 않은 것은 양쪽이 마구잡이로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긴 쪽은 비텔리우스 진영이었다. 오토파 장병들이 먼저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그날로 당장 포 강 남쪽에서 기다리는 오토에게 전해졌다.
오토의 자살
패배를 안 오토는, 그로부터 30년 뒤에 역사가 타키투스가 극찬한 일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련없이 깨끗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토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일단 후퇴하여 '도나우 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최후의 결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나우 강 유역에서 본국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입구인 아퀼레이아에는 벌써 본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오토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겨두면 곤란한 문서,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문서는 모두 소각시켰다. 모데나에 있는 비텔리우스의 동생에게 보복행위를 하는 것도 엄금했다. 장병들에게는 승자의 인정에 호소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 밤 칼로 가슴을 찔렀다. 단칼에 심장이 꿰뚤렸다. 비명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방으로 뛰어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3개월 동안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던 오토는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아무래도 체념이 너무 일렀다는 생각이 들지만, 스토아 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로마의 엘리트 중에는 공공심이 풍부한 사람이 많았다. 타키투스의 말대로, 오토는 자기가 죽으면 내전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황제라는 지위도 그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다섯 살 아래인 네로가 선정을 베풀었다면, 황제가 된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로의 실정을 보다 못해 갈리아의 빈덱스 총독이 먼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거기에 호응하여 궐기한 갈바를 지지했을 때부터 오토 앞에는 황제의 자리로 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면 이렇게 간단히 체념할 리가 없다. 따지고 보면 우연히 손에 넣은 지위였기 때문에 미련없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면, 그를 위해 싸운 장병들의 앞날은 보장해준 뒤에 죽어야 하지 않았을까. 승자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사람이라면 패한 장수는 부하 장병들의 앞날을 보장해 주지 않아도 안심하고 죽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나타나지 않으니까 위대한 인물이다. 이번 전투의 승자인 발렌스나 카이키나, 그리고 이들을 통제하는 지위에 있는 비텔리우스가 패배한 병사들의 앞날을 맡길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쯤은 오토도 꿰뚫어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죽인 갈바처럼 비참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붙잡혀서 살해되고, 잘린 머리는 창 끝에 꽂히고, 그 창을 치켜든 병사들이 포로 로마노를 누비고 다닌다. 시민들은 그 목을 향해 돌멩이를 던진다. 아아, 그런 운명만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한 게 아닐까. 그러나 오토의 산뜻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끼리의 내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원인은 비텔리우스가 패배한 병사들을 잘못 처리했기 때문이다. 내전에서는 패배한 병사들에 대한 처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비텔리우스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제3부 비텔리우스 황제(재위:서기 69년 4월 16일~12월 20일)
서기 69년 4월 16일에는 전날 벌어진 베드리아쿰 전투 결과와 그에 뒤이은 오토의 자살이 적어도 북이탈리아 일대에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말을 탄 전령들이 제국의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달려갔다. 수도 로마에, 리옹까지 와 있던 비텔리우스에게, 아퀼레이아에 집결하고 있던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도 비텔리우스 진영이 승리하고 오토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멀리 떨어진 시리아나 유대에는 해로를 통해 전해졌다. 오토 진영의 패배를 알고 모데나에게 볼로냐로 피난해 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오토가 죽은 것을 알자마자 재빨리 비텔리우스를 '제일인자'로 승인했다. 황제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수도 로마에서는 때마침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경기장에 모여 있던 관중은 새 황제의 이름을 듣고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것으로 로마 시민의 승인도 얻은 셈이 되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 말하지만, 로마 제국의 정식 주권자는 원로원과 시민이다. 지금까지는 '라인 군단'의 추대만 받았던 비텔리우스도 이로써 정식 '제일인자',즉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석 달 동안의 황제라 해도 어제까지 황제였던 사람이 죽었는데, 수도 로마에서는 어떤 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 로마의 질서 유지를 맡고 있는 근위대와 경찰이 전선에 나가 있는데도 혼란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수도 경찰청장인 사비누스가 유능한 행정관이었기 때문이다. 유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의 친형인 사비누스는, 군대에서 출세의 길을 택한 동생과는 달리, 요즘으로 말하면 공직자 세계로 진찰한 사람이었다. 오토가 그를 수고 경찰 책임자로 기용한 것은 성공적인 인사로 꼽히고 있었다. 이 사비누스가 경비 업무를 빈틈없이 수행한 덕에, 경찰관이 하나도 없는 인구 백만의 도시에서도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수도 로마 주민들이 황제의 돌연한 죽음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 황제가 자살한 것은 열 달 전인 서기 68년 6월이다. 반 년 뒤에는 갈바 황제가 살해되었고, 다시 석 달 뒤에는 오토 황제가 자살했다. 시민들이 경기장에서 오토의 죽음을 알고 환호와 박수로 비텔리우스의 즉위에 찬성한 것은 오토를 싫어하고 비텔리우스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또 바뀌었나 하는 기분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수도 로마에는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동조자가 어느 정도는 있었을 텐데도 양쪽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 이런 냉담한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리옹에서 접한 비텔리우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이제까지는 간간이 벌이던 잔치를 앞으로는 밤마다 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나이도 어린 아들에게 '게르마니쿠스'(게르만족을 제압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다. 제압한 상대는 게르만족이 아니라 오토 진영의 로마인이니까 좀 묘하지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나 황족에게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황제의 친족이라는 증거를 아들에게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승리한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전과를 보고하고 비텔리우스의 정식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리옹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패장들을 함께 데려갔다. 속주 총독으로서 브리타니아 제패를 진척시킨 빛나는 공을 세운 파울리누스는 군단장급인 발렌스와 카이키나에게는 대선배가 된다. 패장을 연행했다기보다 대선배나 동료를 동반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비텔리우스가 처음에는 그들을 빈정거리면서 냉대한 모양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패장들을 모두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오토의 친형인 티티아누스한테도 형제간이라면 행동을 같이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오토파 사람들 가운데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오토 진영에서 싸운 중견 장교나 병사들에 대한 처우에는 비텔리우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패자에 대한 처우
타키투스는 말해주지 않지만, 베드리아쿰 들판에서 패배한 오토 진영의 병사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패한 것은 아니다. 그냥 여기저기서 맞붙어 싸우다 보니 전사자만 늘어나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싸움에 지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드는 전투였다. 게다가 전쟁터에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최고 사령관은 미련 없이 깨끗하게, 또는 제멋대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남은 병사들을 수습해야 할 사령관들도 리옹으로 떠나버렸다. 사령관들이 떠나버린 것은 이긴 쪽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승자다. 승자들은 상관이 없는 것을 기회로 패자에게 마음대로 횡포를 부린다. 같은 로마 군단병인데, 패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종처럼 혹사당한다. 그것만으로도 굴욕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보다 더 치욕적이었던 것은 '라인 군단'에 딸려 있는 보조병들의 시건방진 태도였다. 군단에 딸린 보조부대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투에서는 패자가 되었지만 어엿한 로마 시민인 군단병에게 속주민인 보조병들이 승자인 양 으스대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다.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고 사령관은 반드시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동포끼리 벌이는 내전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된다. 그보다 한 세기 전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서, 카이사르는 전투에 이길 때마다 무릎을 꿇고 승자의 인정에 매달리려 하는 폼페이우스 진영 병사들에게 무릎을 꿇지 말고 일어나라고 명령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병사의 의무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상관들이 폼페이우스 쪽에 붙었기 때문에 병사들도 폼페이우스의 부하가 되어 카이사르와 맞서 싸운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기 휘하의 병사들에게도 엄명을 내렸다. 패배한 병사들의 몸을 건드리면 안된다. 패배한 병사들의 물건에 손을 대면 안된다. 그들을 모욕하는 언동은 일절 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었다. 한 세기 뒤의 베드리아쿰에는 카이사르가 없었다. 알프스 건너편의 리옹에서 고주망태로 취해 있던 비텔리우스가 내린 명령은, 오토 휘하에서 싸운 각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백인대장은 100명 안팎의 병사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는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대장이겠지만, 로마군에서는 하사관 같은 존재였다. 하사관은 장교가 아니지만, 로마 군단의 상급 백인대장은 작전회의에도 참석했으니까 장교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도 타당치 않다. 로마군의 백인대장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자기가 맡은 병사들과 함께 기거하고 식사도 같이 한다. 무서운 시어미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엄할 때도 있었겠지만, 병사들에게는 아버지나 형님 같은 존재가 백인대장이었다. 그 백인대장을 죽이라는 것이 새 황제의 명령이다. 병사들은 그 명령을 어떤 기분으로 들었을까. 오토 진영 병사들의 마음 속에 굴욕감에 더하여 증오가 싹튼 것도 당연하다. 사형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다. 비텔리우스라는 인물은 인간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뒤이어 내린 명령에 따라, 패배한 병사들은 크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건설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동안 내전에 시달린 크레모나 주민들에게 보상하고, 비텔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올 때 검투사 시합을 거행하여 축하한다는 것이 원형경기장을 건설하는 이유였다. 공공사업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고마 군단병에게 수치스럽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드넓은 제국에 그물처럼 퍼져 있는 로마 가도는 군단병들이 건설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일부에는 오늘날에도 '제*군단이 건설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한 비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중노동이긴 하지만, 그들의 조국에 필요한 공사였다. 내전에서 반대편에 선 죄를 씻기 위해 강제로 동원된 작업은 아니었다. 게다가 명령에 따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돌관공사를 강요당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던져진 크레모나 주민들의 모욕은 같은 로마 시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병사들의 가슴이 패배의 충격과 굴욕감과 증오가 뒤섞인 원한으로 채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 황제 비텔리우스가 언제 본국으로 돌아왔는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옹에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까지는 열흘 거리지만, 리옹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는지 아니면 느긋하게 여행을 했기 때문인지, 5월 중순에야 북이탈리아에 도착한 모양이다. 크레모나에 들어온 비텔리우스는 완성된 원형경기장에서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그의 즉위를 축하하여 주최한 검투사 시합을 관전했다. 시합에 끌려나온 검투사들은 오토가 편성한 검투사 부대에서 비텔리우스 진영을 상대로 싸운 생존자들이었을 게 분명하다. 본국에 들어온 뒤 비텔리우스의 신분은, 오토 황제와의 싸움에서 이긴 승자일 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공식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까지 얻은 유일한 황제였다. 이 시점에는 다른 경쟁자도 없었다. 내전을 수습하고 제국을 재통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서기 15년에 태어난 비텔리우스는 당시 54세. 노령이 정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던 갈바보다는 열여덟 살이나 젊고, 30대라는 나이가 좋게든 나쁘게든 겉으로 드러나 있던 오토보다는 열일곱 살 위다. 고대 로마에서는 40대부터 50대까지가 남자의 한창 나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비텔리우스의 신분은 명문 귀족 출신인 갈바보다 신흥 지배계층인 오토 쪽에 가까웠지만, 그에게는 아버지 루키우스가 남긴 후관이 있었다.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황제에 버금가는 중진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군에게 최강 군단으로 꼽히는 '라인 군단'이 배후에 버티고 있었다.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말로써 남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혁명도 개혁도 재건도 실현할 수 없다. 의지와 설득력 외에 권위와 권력도 있어야 한다. 비텔리우스에게는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받았다는 권위가 있었다. 그리고 '라인 군단'이라는 권력도 있었다. 그런데도 비텔리우스는 이런 '힘'을 활용할 줄 몰랐다. 의욕은 있어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거나 실행하는 데 필요한 힘을 갖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정신적 나태에 불과하다. 게다가 비텔리우스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해서는 안될 일까지 해버렸다. 새 황제 비텔리우스는 먼저 근위병을 모조리 해고했다. 퇴직금도 주지 않았으니까, 파면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토 편에 서서 비텔리우스 진영과 싸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로마군의 일부인 근위대는 최고 사령관인 황제를 지키는 임무도 맡고 있다 베드리아쿰 전투당시, 오토는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받은 정식 황제였다. 그런 오토 밑에서 싸운 근위병들은, 카이사르의 말을 빌리면 병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비텔리우스에게 근위병을 해고한 이유를 물어보면, 역시 정식 황제였던 갈바를 오토의 명에 따라 죽인 것도 근위병들이니까 그런 근위병은 근위대에 계속 근무할 자격이 없고, 계속 근무하도록 허락하면 비텔리우스 자신에게도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 휘하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했듯이 퇴직금을 주고 정착지를 마련해준 뒤에 해고했어야 한다. 그런 배려도 없이 해고당한 근위병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반감을 품은 것은 당연하다.
황제를 보호하는 것이 근위대의 임무임을 비텔리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근위병들은 해고했지만 근위대 자체는 존속시킨 것이 그 증거다. 게다가 그냥 존속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강했다. 아우구스투스이래 9개 대대 9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근위대 규모를 16개 대대로 늘린 것이다. 거기에 딸린 기병대를 합치면 원래는 1만 명 안팎이었는데, 이제는 1만 7천 명이 넘게 되었다. 비텔리우스는 자기 지지세력인 '라인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에 기용했다. 이것도 해고당한 근위병들의 긍지에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근위병은 100년 전부터 로마군의 엘리트로 여겨졌다. 복무기간이나 급료에서도 속주에 근무하는 군단병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격이 낮은 군단병이 근위대에 기용되고 자기들은 쫓겨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반비텔리우스로 굳어져버렸다. 비텔리우스는 근위병만이 아니라 오토 진영에서 싸운 모든 병사들에 대한 대책에서도 잘못을 거듭했다. 그들의 원래 임무는 대부분 변경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카이사르가 했던 것처럼, 다시 폼페이우스 밑에서 싸우든, 이 땅에 남든, 고향으로 돌아가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면서 방면해버릴 수는 없다. 비텔리우스가 아니더라도 근무지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돌려보내는 방식이 좋지 않았다. 굴욕감과 분노와 원한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준 뒤에 돌려보내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냥 근무지로 돌아가라는 명령만 내렸을 뿐이다.
해병으로 구성된 제2군단만은 원래의 근무지인 미세노가 아니라, 그들이 가본 적도 없는 에스파냐로 쫓아보냈다. 제14군단이 받은 명령도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다만 이 군단은 마치 포로처럼 보조부대의 감시를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로마 시민인 군단병이 속주민 병사의 감시를 받으면서 근무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의 폐해를 낳았다. 군단병은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고, 속주민 병사들은 로마군 병사들을 얕잡아보게 되었다. 이 폐해는 나중에 큰 영향을 미칠 게 뻔하다. 주전력인 군단병과 보조전력인 보조병이 각각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야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로마의 방위체제다. 보조부대가 주전력을 깔보게 되면 문제가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동쪽의 도나우 강 유역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심정도 서쪽의 에스파냐나 브리타니를 향해 출발한 병사들의 심정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들의 원한은 더욱 강하고 깊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토 진영에 서서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원형경기장 공사에 끌려나간 것은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한은, 이탈리아에 도착하긴 했지만 베드리아쿰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병사들한테까지 전염되었다. '라인 군단' 병사들이 전우애로 굳게 단결해 있었다면, '도나우 군단' 병사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오토 진영에서 싸운 병사들이 모두 귀환할 무렵에는 로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리아와 유대에도 이미 오토가 죽고 비텔리우스가 즉위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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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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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 느린거북(슬로우 터틀) - 왐파노그 족
"세상은 그러한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열네 살 때 나는 인디언 이름을 받는 의식을 거쳤다. 와시피 왐파노그 족의 어른들은 나에게 '느린거북(슬로우 터틀)'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것은 내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반응이 무척 느리고 동작 또한 굼뜨기 때문이리라. 인디언들은 그것을 무척 지혜로운 행동으로 여긴다. 거북은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항상 목을 빼어 주위를 살핀 다음에 걸음을 옮겨 놓는다. 인디언들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정할 때 그런 식으로 한다. 그 사람의 성격, 그 사물이 세상에 차지하고 있는 위치 등을 기준으로 이름을 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디언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한결 쉽다. 그 사람의 성격과 특징이 곧바로 이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에 비하면 당신들의 이름은 기억하기도 어렵고 별다른 의미도 없다. 인디언에게는 이름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을 부르는 호칭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한 영혼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러한 이름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여덟 명의 자식을 낳았고, 열두 명의 손자를 보았는데 맨 마지막으로 나온 손자는 '오타쿠웨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우리 인디언 말로 '이젠 끝'이란 뜻이다. 어떤 사람은 비를 싫어하지만, 비를 유난히도 좋아한 어느 인디언은 '빗속을 달려(런 인 더 레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는 늘 비만 오면 소리를 지르며 평원을 내달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막 안에 앉아서도 그 비명소리를 듣고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일의 징조처럼 폭우가 쏟아지더니 곧이어 폭설로 변해 평원 전체에 쏟아지기 시작했고, 빗속을달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면서 평원을 달려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빗속을달려의 가족들은 평원에 나가서 몇 날 며칠을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사라지고 말았는지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이름이 그러하듯이,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영혼을 갖고 있으며 그 삶의 길 역시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 우리 인디언들의 믿음이다. 빗속을달려는 평원에 내리는 비 속을 달려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이 그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똑같은 길을 걸으라 하고, 똑같은 기도문을 외라고 한다. 당신들의 교회에 가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당신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똑같은 기도문을 외고 있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저마다의 영적인 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기도를 말한다. 스스로 자신의 기도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내 기도문을 사용해선 안 된다. 그것은 나를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기도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언어들로, 당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넣어서 스스로의 기도문을 만들어야 한다. 비속을달려의 길이 특이하다고 해서 모두가 비 내리는 날이면 평원을 개들처럼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인디언은 또한 남이 써놓은 경전을 잃으면서 "이것 봐!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경전이 필요치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날이 새로운 날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당신들은 힘의 구조를 갖고 있다. 당신들의 정부는 피라미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인 우리에게는 정부 형태라는 것이 언제나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코 계급 구조라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깨닫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높거나 낮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직업이 무엇이고 하는 일이 무엇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추장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위대할 게 하나도 없었으며, 나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위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자연히 질투나 경쟁심리도 없었다. 저마다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듯이 이 세상에서 하나의 위치를 갖고 있었으며,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두려움이라는 것도 없었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 위치에 오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기를 밀쳐 내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문명인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그들 중의 몇몇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매혹되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사회제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준 것도 우리들이었다. 그것이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모두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의사표시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그러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통제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제도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새로운 일이었고, 그래서 결국 또다시 계급사회로 돌아가고 말았다.
원을 그리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원을 그리고 앉아서 가슴 속의 말들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인들이 즐겨 하는 워크숍이나 세미나와는 성격이 다르다. 원은 우주의 상징이며, 모든 생명체를 이끌어가는 힘의 상징이다. 우리는 그 원 속에서 큰 배움을 얻는다.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법, 그리고 타인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운다. 자기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도 함께 있지 못한다. 자기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뜻이다. 원을 그리고 앉아서,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는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모든 각도에서 그 특별한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따라서 원을 그리고 앉는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함께 앉아서 누군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의견을 내놓는다. 그 자리에서는 장황한 이론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이 보는 대로 진실을 이야기하면 된다.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방을 속이는 연습을 어려서부터 해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눈물을 보이거나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인디언 사회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전혀 약점이 아니다. 우는 것은 웃는 것과 똑같은 것이며, 우는 것이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며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이 독특한 존재이며, 모두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개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네 가지 형태라거나 열 가지 형태로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얼굴과 목소리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당신이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꾸며낸다고 해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곧 당신의 독특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신들은 어떤 사람을 따르면서 그 따르는 행위로 인해서 자신들도 우월한 입장이 되었다고 착각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거리를 만들고, 다른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인디언의 창조 설화에서는 사람마다 여행할 길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 다른 여행길에서 자기만이 가진 선물을 나누어 갖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그 설화는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말한다. 신은 모두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으며,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하다고. 또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선물이라고. 왜냐하면 사람마다 나누어 가질 특별한 어떤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부 형태가 원으로 되어있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여를 하게 된 까닭도 이러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 본 적이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되게끔 허용하지도 않는다. 항상 누군가에게 자신을 통제하도록 내맡긴다. 부모가 당신에게 학교와 교회를 선택해 주고, 삶의 모든 방식과 규칙을 정해 놓는다. 따라서 당신은 결코 당신 자신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 다음에는 사회가 당신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금을 그어 놓는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끝없이 시계를 보며 생활하고, 배고프지 않아도 시간만 되면 밥을 먹는다. 그러한 부자유는 우리 인디언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곧 삶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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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두두리들과 신원사지 - 비형랑 설화
귀신의 아들 비형
임금님 혼이 와서 낳으신 아들/비형랑이 이 집에 머물고 있다/저 모든 귀신들 쫓아버리니/아예 이곳에는 있지 말아라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때 사람들의 귀신 쫓는 노래이다. 신라인들은 이 가사를 문에 붙여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이 노래에 나오는 비형랑은 반인반귀의 존재이다. 신라 26대 진평대왕 때에 집사 벼슬을 한 비형랑은 귀신인 왕(25대 사륜왕)과 인간의 아녀자가 사통하여 낳은 희대의 사생아이다. 비형랑의 출생에 대한 설화를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륜왕(시호 진혜대왕)은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여 재위한 지 4년 만에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킨 임금이다. 폐위되기 전 사륜왕은 사량부 서인의 딸이 얼굴이 예뻐 도화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사랑하려 했다. 그러자 여자는 "여자는 두 남자를 섬기지 못합니다. 남편이 있고서 다른 데로 가게 한다면 이는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도 뺏을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왕은 "너를 죽인다면 어쩔 테냐"하고 말하자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할지언정 소원을 달리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왕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해 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그 후 3년 만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남편이 죽은 10여 일 후 밤중에 홀연히 왕이 옛모습으로 그녀의 방에 나타났다. "네가 옛날에 허락했다.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라고 왕은 말했다. 도화랑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왕을 맞아들였다. 왕은 7일을 그 방에서 머물다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곧 태기가 있었으며, 이윽고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비형랑이다.
진평대왕은 이 이상한 얘기를 듣고 비형랑을 궁중에서 거두어 길렀다. 15세에 집사 벼슬을 시켰더니 밤만 되면 멀리 달아나 놀았다. 그래서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켜보게 했다. 그랬더니 그는 항상 월성(반월성)을 날아 넘어 황천 언덕에 가서 귀신들을 이끌고 놀았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비형에게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아라"고 하니 비형이 귀신을 이끌고 하룻밤 새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 이름은 귀교라 했다. 왕은 또 귀신 중 인간세상에 와서 정사를 도울 만한 자를 추천하라 했다. 비형은 길달이란 자를 소개했으며 그에게도 집사 벼슬을 주었다. 길달은 나중에 각간 임종의 아들이 되었다.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의 문루(궁이나 성, 절의 문위에 있는 다락집)를 짓게 했다. 길달은 문루를 지은 후 밤마다 그 문 위에서 잤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쳤다. 이에 비형이 귀신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죽었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
이 재미있는 설화는 인간세상과 귀신세상을 자유로 넘나드는 신라인의 사유가 잘 드러나 있다. 귀신과 사통하여 아이를 낳기도 하며, 귀신을 데려다가 정사를 맡길 뿐만 아니라 아들로 삼기도 하는 등 인간계와 영계는 자유자재로 통해 있다. 도화랑을 통해 드러나는 정조에 대한 관념도 조선시대와 판이하다. 남편이 없으면(죽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고수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편과의 관계가 확고할 때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귀신과 놀던 들
이 설화가 깃든 현장은 어디일까. 설화에 의하면 비형은 밤마다 황천 언덕에서 놀았으며, 신원사 북쪽에 다리를 놓았다고 되어있다. 그 지역은 오릉 서편, 고속도로 진입로 남편의 서천을 낀 탑정동 일대의 들이다. "이 들을 두두리들이라고 부른다"고 이 들에서 농사를 짓는 한 노인은 말한다. 또한 '귀더리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귀더리'란 '귀다리' 즉 귀교를 말하는 듯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지역에 귀교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두두리'는 귀신을 뜻한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의 왕가수조에 보면 '나무사내'의 설명이 나온다. '나무사내'란 귀신을 위패를 말하는 것으로 곧 귀신을 뜻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목랑은 속칭 두두리라고 한다. 비형 이후로 세상에서는 두두리를 섬기기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왕가수는 오릉에서 포석정 사이의 지역으로, 이곳에는 많은 '두두리'들이 있었던 듯싶다. 더불어 오릉 서편의 '두두리들' 지역은 귀신들이 밤마다 들끓은 곳이었다. 비형은 반월성을 날아 넘어 오릉을 지나 이 들에서 그들 귀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얘기가 된다.
'두두리'들은 비록 귀신들이었지만 나라가 위급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돕기도 해 신라의 호국이념에 닿아 있는 특이한 존재들이다. 귀신이라고는 하지만 유령과는 다르다. 흡사 서구의 '님프'나 목신과 같은 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이기도 하다. 우리 민속에 잘 나오는 도깨비의 전형 같기도 한 이들은 익살스럽고 장난기가 넘치고 있다. 오릉 뒤편에 있던 영묘사는 바로 이들 '두두리'의 명복을 빌고 제사를 지냈던 절이다. 선덕여왕 때의 유명한 지귀설화에 나오는 지귀도 이 '두두리'의 일종이었던 듯하다.
남아 있는 절터와 다리터
황천은 남천의 하류이다. 곧 모량 쪽에서 내려오는 모량천과 남쪽의 기린내 그리고 남천(사천 또는 문천이라고도 한다)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남천은 오릉 북쪽을 돌아 들판 북쪽으로 빠지지만, 옛날에는 탑정동 지역에서 합류됐다고 한다. 그래서 세 줄기 냇물이 합류됨으로써 홍수가 나면 이 일대는 황폐하게 변해버려 황천이란 이름이 붙은 듯하다. 경주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지나 경주 쪽으로 들어오다가 다리를 넘으면 왼쪽에 이 내를 끼고 펼쳐진 들이 '두두리들'이다. 들의 남쪽 고속도로 진입로 옆에는 탑동수원지(탑정동 340의 1)가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한 청원경찰은 "처음 수원지를 닦을 때 이곳이 절터였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터가 세고 때때로 사택의 청마루 밑에서 여자의 허연 손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아 10여 년 전에 크게 지신을 밟았다고 한다. 수원지의 서편에는 거대한 옥개석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탑자리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아 있는 옥개석의 하나는 길이가 2m나 돼 탑의 측면 길이가 4m가 넘는 큰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탑재들은 수습이 안 되어 풀덤불 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신원사지라는 안내 팻말만 덩그러니 서 있어 이 일대는 거의 잊혀진 장소로 바뀌었다. 귀교는 신원사의 북쪽 개울에 있다고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일대 주민들은 탑동수원지의 서북쪽 약 30미터 지점 서천에 옛날 귀교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뚝다리'의 흔적인 듯 싶은 돌무더기들이 내를 가로질러 쌓인 채 흩어져 있었다. 뚝다리의 흔적으로 봐서 옛날 강물의 물길은 지금과 달리 김유신 장군묘가 있는 산밑을 흘렀던 듯하다. 이곳에 있었던 다리는 그 지은 솜씨가 특이하여 당시에는 귀신의 솜씨로 빚었다는 소문이 나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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