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0호 - 2024.07.06 토요일(음력 : 06.01)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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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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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보호라는 것에도 일장일단이 있다.
마치 공기 중에 어느 정도 불순물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운 노을이 생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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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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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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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앉으실게요’
몇 년 전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한 ‘∼하고 가실게요’라는 표현이 어법에 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이 ‘∼하고 가실게요’는 잘못된 표현이고 ‘∼할게요’, 혹은 ‘∼하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이라는 자막을 내보낸 적이 있다. 당시 시청자들은 방송에서 바른 말을 써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개그 프로그램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개그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잘못된 표현은 집어내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병원과 백화점, 상점 등에서 ‘∼하실게요’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실게요’는 상대방을 높이는 선어말 어미 ‘-시-’와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의 종결어미인 ‘-ㄹ게요’를 함께 썼기 때문에 호응이 잘못된 표현이다. 예를 들어 종업원이 손님에게 “이쪽으로 앉으실게요”라고 말하면 손님보고 이쪽으로 앉으라는 말인지, 아니면 종업원 자신이 이쪽으로 앉겠다는 말인지 혼동을 주게 된다. ‘앉으시다’라고 존대하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손님을 보고 하는 말 같지만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의 종결어미 ‘-ㄹ게요’를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에 종업원 자신이 이쪽으로 앉겠다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이쪽으로 앉으세요”라고 말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영수증 받으실게요”는 “영수증 받으세요”로, “물리치료 하실게요”는 “물리치료를 해드릴게요”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실게요”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로 고쳐 말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꽤나 깨나
한동안 요리 프로가 인기를 끌더니 요새는 인테리어 방송이 눈에 많이 띈다. 페인트칠만으로 새 집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책장을 침대로 개조하는 일도 뚝딱 해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진다.
한 번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목공일을 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힘 꽤나 쓰는 두 사람’이란 자막이 나왔다. ‘힘깨나 쓰는’이라고 해야 할 것을 잘못 쓴 것이다.
‘꽤나’와 ‘깨나’는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혼동한다기보다는 ‘깨나’를 몰라서 ‘깨나’를 써야 할 자리에 ‘꽤나’를 잘못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꽤나’는 보통을 조금 넘는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 ‘꽤’에 보조사 ‘나’가 합해진 말이다. ‘꽤’는 ‘두 사람은 꽤 가까운 사이다’ ‘어젯밤엔 술을 꽤 마셨다’ ‘학교는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처럼 문장 안에서 동사나 형용사, 또는 다른 부사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꽤나’를 쓰면 ‘꽤’를 쓸 때보다 그 수량이나 정도가 많거나 높음이 강조되는데 살짝 놀라는 뜻이 덧붙기도 한다. 위에 예로 든 표현들을 ‘꽤나 가까운 사이’ ‘술을 꽤나 마셨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로 바꿔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깨나’는 명사 등 체언에 직접 붙는 보조사로, 앞 말에 그것이 상당한 정도라는 의미를 더해 준다. ‘그는 돈깨나 있는 사람이다’ ‘심술깨나 부린다’ ‘그게 나이깨나 든 사람이 할 소리냐?’처럼 쓰는데, 빈정거리거나 가벼운 불만의 뜻이 덧붙여진다.
위의 자막은 ‘힘’이라고 하는 명사에 직접 붙을 뿐 아니라, 힘을 ‘꽤나’ 많이 쓰는 상황을 담담히 나타내기보다는 대단치도 않은 일에 두 사람이나 나서서 끙끙대는 모습을 살짝 비꼬고 있으므로 ‘힘깨나 쓰는 두 사람’으로 해야 맞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누구?
며칠 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그런데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이름이 언론사마다 달랐다. 어떤 보도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하고 어떤 보도에서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맞다. 이미 1998년에 정부ㆍ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는 미국의 영화배우 Leonardo W. DiCaprio의 외래어 표기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정하였다. 이탈리아 출신 아버지를 둔 그의 이름은 이탈리아어 표기법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으로 이름이 불리는 데 따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정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어머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감상하던 중 태동을 느끼고는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결국 같은 이름 Leonardo이지만 언어 환경에 따라 ‘레오나르도’(다빈치)와 ‘리어나도’(디캐프리오)로 달리 적는 것이다.
다만 표기법이 정해진 이후에도 근 20년 가까이 규범에 맞지 않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대중에게 훨씬 익숙하게 쓰여 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었고, 이번에 상을 받은 작품 ‘레버넌트’의 홍보 포스터에 적힌 이름도 여전히 ‘레오나르도 디카프오’이다.
일단 규범으로 정해진 이상 그 표기를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써야 한다. 다만 대중이 흔히 쓰는 표기를 계속 외면하기도 어렵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맥아더’처럼 원어 발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이 흔히 쓰는 데 따라 표기를 정한 예도 있다. 앞으로 이 배우의 이름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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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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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눈 - 천상병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파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의
너를 부르는 어머님의 눈물어린 눈이다.
∼∼∼∼∼∼∼∼∼∼∼∼∼∼∼∼∼∼∼∼∼∼∼∼∼∼∼∼∼∼∼∼∼∼∼∼~~~~~~~
달 - 정지용
선뜻 !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미욱한 잠과 베개를 벗어나
부르는 이 없이 불려 나가다.
한밤에 홀로 보는 나의 마당은
호수같이 둥그시 차고 넘치노나.
쪼그리고 앉은 한옆에 흰돌도
이마가 유달리 함초롬 고와라.
연연턴 녹음, 수묵색으로 찥은데 찢 지
한창때 곤한 잠인양 숨소리 설키도다.
비둘기는 무엇이 궁거워 구구 오느뇨,
오동나무 꽃이야 못견디게 향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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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國(조국)에 돌아오신 傷病捕虜 同志(상병포로 동지)들에게 - 김수영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강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
「여보세요 내 가슴을 헤치고 보세요. 여기 짱빨장이 숨기고 있던 각인보다 더 크고 검은
호소가 있지요.
길을 잊어버린 호소에요.」
「자유가 항상 싸늘한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포로의 애원이 아니라,
이미 대한민국의 하늘을 가슴으로 등으로 쓸고 나가는
저 조그만 비행기같이 연기도 여운도 없이 살아진 몇몇 포로들의 영령이
너무나 알기 쉬운 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당신의 뺨에다 대고 비로소 시작하는 귓속이야기지요.」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육십일수용소에서 단기4284년3월16일 오전5시에 바로 철강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육십이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갔는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느냔 것에 대한 대변이 아니다.
또한 나의 죄악을 가리기 위하여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기 위
한 연명을 위한 아유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이 지루하다고 꾸짖는 독자에 대하여는
한마디 드려야 할 정당한 이유의 말이 있다.
「포로의 반공전선을 위하여는
이것보다 더 장황한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싸워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꼭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꼭같은 밥을 먹었고
꼭같은 옷을 입었고
꼭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이 꽃을 이마 우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어 일어나서
나는 예수 크리스트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각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나오려고
무수한 동물적기도를 한 것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용서하여 주시요,
포로수용소가 너무나 자유의 천당이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으로 만일을 염려하여 말해두는 건데
이것은 촌호의 풍자미도 역설도 불쌍한 발악도 청년다운 광기도 섞여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친구가 빨리 삼팔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포로들에게 말할수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
내가 육.이오 후에 개천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수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내무성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버렸어도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포로와 UN상병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였습니다.」
「돌아오신 여러분! 아프신 몸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는 UN군에 포로가 되어 너무 좋아서 가시철망을 뛰어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못 뛰어나오고
여러 동지들은 기막힌 쓰라림에 못이겨 못 뛰어나오고.」
「그러나 천당이 있다면 모두다 거기서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어굴하게 너머진 반공포로들이
다같은 대한민국의 이북반공포로와 거제도반공포로들이
무궁화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즈막 부르고 갈
새 날을 향한 전승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즉이 부를 수도 소리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즈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서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195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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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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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점(紅一點)
紅:붉을 홍. 一:한 일. 點:점, 점 찍을,흠 점.
[출전] ≪唐宋八家文≫ 〈王安石 詠石榴詩〉
① 여럿 가운데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② 많은 남자들 틈에 오직 하나뿐인 여자.
③ 여러 하찮은 것 가운데 단 하나 우수한 것.
북송(北宋) 6대 황제인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란 재상이 있었다. 당시 신법당(新法黨)의 지도인 왕안석은 재상에 임명되자 부국강병을 위한 이른바 ‘왕안석의 개혁’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정이[호는 이천(伊川)], 소식(蘇軾) 등 유명한 문신들이 주축이 된 구법당(舊法黨)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중단 없이 실행되었다.
왕안석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그의〈영석류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萬綠叢中 紅一點(만록총중 홍일점)]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
[動人春色 不須多(동인춘색 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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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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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4. 갈팡질팡 과도정권 (2/2)
3.15 부정선거에 관련돼 있는 원흉급들은 거의가 국회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검찰에서는 그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국회의 기능이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허정이 의당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입법을 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허정은 처음부터 아예 특별입법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자유당이 동조해 줄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하긴 국회는 아직도 <자유당 국회>인 잡아들여야 할 놈들을 다 잡아들이고 나서도 국회는 여전히 자유당 국회로서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입법이라도 하려고 들면,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우리를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우리 손으로 만들란 말이냐?> 하고 반발하고 나설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겠느냐. 그들이 그렇게 반발하고 나서거든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어? 지금의 이 판국이 어떤 판국인지를 몰라?> 하고 한 번만 눈알을 굴리기만 하면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어찌 감히 끝까지 반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들 모두가 특별입법 법률에 묶일 양심적인 인물은 있었다. 아니 묶이지 않을 자들이 오히려 압도적으로 많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허정은 아예 처음부터 특별입법 따위는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는 뭐라고 했던가?
"부정축재를 한 자들은 주로 탈세(脫稅)를 해서 축재를 한 것임으로 그들한테서는 탈세액을 추징토록 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 문제는 새 정권에 맡기는 것이 좋겠어."
이게 도무지 무슨 놈의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부정축재를 한 자들은 주로 탈세를 해서 축재했다니, 그럼 어제까지 빈털털이였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졸부가 된 것도 탈세를 해서 졸부가 됐단 말인가?
"허정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 부정축재?"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어. 허정도 정치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고 보니 정치 자금 긁어 모으기에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나!"
세상 사람들은 허정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처녀의 넙적다리를 보면 뭘 봤다고 훤자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였다. 허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마치 현장을 목격이라도 한 양, 사실처럼 날조되어 확대돼 갔다.
"허정이 부정축재를 해서 엄청난 돈을 먹었다면서?"
"먹었다면서가 아니라 먹었어!"
"그럴 수가 있어. 이건 마치 고양이한테 반찬가게 맡긴 꼴이 돼버렸잖아?"
여론은 들끓었으나 허정은 떠들라 하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실컷 떠들다 입이 아프면 제풀에 꺾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눈치 같았다. 그는 관계 기관에 지시해서 6월 20일까지 자수 기간이라는 것을 설정했다.
<탈세로 부정축재를 했거나 자인하는 자는 자수를 하라. 그러면 형사처벌은 면하게 해주겠다.>
정부가 이런 기간을 정해 놓았다고 해서 <네, 제가 탈세를 했습니다> 하고 자수를 하는 자가 있을까? 이의 실효성도 극히 의심스럽기만 했다. 이건 나중 얘기지만 이 자수 기간에 탈세를 했다고 해서 자수를 한 자는 7,8명에 불과했다. 부정축재자 자진신고 제1호는 삼호재벌의 정재호였지만 고작7,8명밖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 않았다. 한데, 허정은 여론을 무시한 채 한술 더 떴다. 부정축재자 자진신고 기간을 설정해 놓은 어느 날 허정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고 있는 재벌들을 정부수반실로 초대해 말했다.
"아마 여러분도 여론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지금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는 소리가 여간 높지가 않소. 그렇다고 여러분을 처벌하자면 많은 부작용이 따를 것이 뻔한 일이오. 그래서 하는 소린데, 여러분이 양심에 호소해서 나는 부정한 방법으로 얼마만큼을 축재했으니 차라리 이참에 그만한 액수를 나라에 바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면 당신들도 좋고 나라도 좋은 결과가..."
이거야말로 부정축재자들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한데, 세상만사가 엿장수 마음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불행하게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서울 검찰청의 젊은 검사들이 허정의 부정축재자 처리방안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무슨 소릴 하고 있어. 그래 가지고ㅍ 혁명과업이라 할 수 있어?"
"수반께선 세상이 제대로 돌고 있는지, 아니면 거꾸로 돌고 있는지 도통 캄캄한 게 아냐?"
"수반이 뭐라고 하든 우리 검찰로서는 차제에 부정축재자를 엄격히 다스리면 그뿐이야."
"옳아, 우린 검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면한 우리의 과업이야."
허정으로서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검사들이 반발을 하고 나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검찰총장 이태희(李太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태희는 이화여자대학(梨花女子大學) 법정대학장을 역임한 변호사로서 5월 5일, 허정에 의해서 검찰총장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내 부정축재자 처리방안에 대해서 젊은 검사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는데, 그들 중 몇 사람만 나한테로 좀 보내주시오. 어째서 그들이 반발하고 있는지 얘기나 좀 들어보게."
젊은 검사 세 사람이 곧 내각수반실로 말했다.
"지금 정치적 갈등으로 해서 경제가 말이 아니게 타격을 입고 있는데, 이제 또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게 될 것 같으면 우리 경제가 어찌 될 것 같소? 경제가 마비되게 되면 민생문제가 큰 문제가 아니겠소? 그래서 우선 무엇보다도 민생문제를 생각해야겠기에 부정축재자 처벌 문제는 다음 정권의 숙제로 넘기려 하고 있는 게요. 그러니 그리 알고 여러분의 협조를 당부하겠소."
허정이 젊은 검사를 불렀던 속셈은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주장에 먹혀들리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검사들의 반발은 의외로 강경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치 않는다는 것은 법 운용의 형평에 어긋납니다."
젊은 검사들은 이런 이유에서 부정축재자를 단호하게 처벌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법률을 다루는 사람은 코 막고 답답할 때가 허다하다. 법률 조문하고만 씨름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융통성이 없고 인간의 폭이 좁고 메말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법률을 다루는 사람이란 의당 그래야만 했다. 법률 조문에 인간성을 개입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법률을 양심에 어긋남이 없이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허정도 그 점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법의 형평을 고집하는 검사의 주장을 기어이 꺾으려 든다면 못 꺾을 것도 없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검찰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소. 여러분의 견해가 그런 이상 나로서는 내 주장을 고집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면 이렇게 하도록 합시더. 과도정부로서는 부정축재자에 대한 자료조사만을 하도록 하고, 그 자료를 앞으로 세워질 새 정부에 넘겨서 부정축재자를 처벌토록 합시다."
검찰로서는 이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치 부정축재자를 처벌하자면 조사부터 착수해야 할 것이고, 조사를 벌이다보면 과도정권은 수명이 다해 버리고 말 것은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원칙만 세워 놓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혁명과업을 수행할 책임을 졌던 과도정부가 그것을 마무리짓지 못하면 그 과업은 자연 새 정부가 승계하게 될 것이었으니까.
거듭 또 언급하게 되지만 과도정권이 아무리 시한부 정권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권이었다. 그리고 허정은 그 과도정권의 수반이었다. 그러므로 과도정권의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허정에게 있었다. 그것을 모를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것을 번연히 잘 알고 결정에 젊은 검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이유는 간단했다. 이승만 집권 12년 동안에 벌어졌던 부정부패의 규모가 너무나 엄청나게 큰 데에 경풍을 일으킬 정도로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이건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했어! 부정, 부정 해도 이렇게 대규모적인 부정이 저질러졌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야."
군사정권에서 제4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대형적인 부정부패에 비교하면 새발의 피, 아직 유아기의 부정부패였지만 당시로서는 놀라 자빠질 정도의 엄청난 부정부패라 치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이 따위 부정부패는 이래서 반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당의 정치자금 관계를 주무르던 한희석(韓熙錫)이 체포된 것은 1960년 5월 7일이엇다. 정치자금 관계는 한희석만이 주무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용익(朴容益)도 한희석과 한가지로 정치자금을 주무르고 있었다. 검찰에서는 물론 박용익도 체포, 구속했다. 검찰에서는 처음 그 두 사람한테는 3.15정.부통령 선거에 소요된 선거자금을 중점적으로 캤다. 이제는 세상이 바뀐 것이다. 조금이라도 숨겼다가 그것이 들통이 나는 날에는 어떤 형벌이 더해지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아예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고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다. 얼마씩의 정치자금을 거두어 선거자금으로 썼다고 구체적으로 불어버렸다. 검찰에서는 두 사람의 자백을 토대로 해서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자백은 허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검찰이 조사한 1959년 8월부터 1960년 3월까지 8개월 동안에 걸쳐 자유당한테 2천만 환 이상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인과 경제단체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대한양탄(이정임) 12억 3천만환
경남모방(조봉구) 4천만환
삼호종적(정재호) 6억 5천만환
동양방적(서정익) 2천 5백만환
동양맥주(박두명) 3천만환
한국강업(이광우) 5천만환
조선견직(이지태) 5천만환
태창방적(백남일) 5억환
대동공업(이용범) 7천 5백만환
대한방적(소향동) 3억환
유한양행(유일한) 5천만환
중앙산업(조성길) 2억 6천4백만환
대한중앙산업(이하영) 1억환
동양시멘트(이양구) 2억 3천6백만환
대한양비(박응철) 1억환
삼성물산(이병철) 3억환
동창실업(이동녕) 5천만환
한국나일론(이원천) 8천만환
삼풍제지(이태용) 3천만환
한국교과서(이병후) 5천만환
동신화학(현수덕) 4천만환
대한발효(이영천) 2천만환
대한중기(김운규) 6천만환
방직협회 5억환
기아산업(김길호) 5천만환
소모방협회 1억 9천만환
한국타이어(배동환) 5천만환
석유협회 1억 1천만환
한국유리(최태보) 1억환
생어조합 2천만환
극동해운(남궁련) 4천만환
경무협회 4천만환
전매청출입업자 2천 7백만환
곡물협회 4천만환
자유민주주의 국가치고 이놈의 나라가 없다. 정당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거나 국회의원, 정.부통령 선거를 치르자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당이나 정치인은 기업가와 결탁해서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말썽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막대한 정치자금을 얻어 썼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그만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 정당이고 정치인에게 헌금을 내는 기업인은 자기 주머니나 자기 회사 돈을 털어서 내놓는다. 여기에 비해 한국의 기업인들은 자기 주머니나 회사 돈을 털어서 내놓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정치헌금을 하는가 하면 집권당의 힘을 일부를 떼어내어 정치헌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앞에 열거한 29개 업체의 모든 경영자들이 은행에서 현금 액수의 배 내지 10배의 융자를 받아 그 중에서 일부를 빼내어 정치헌금을 해왔다. 그런 식으로 정치헌금을 하고도 그들은 또 반대 급부로써 갖가지 혜택을 받기도 했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돈을 벌지 못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그는 바보가 아니면 천치일런지도 모른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그 돈에서 얼마를 떼어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는 따위의 행위는 제4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정치자금 헌납문제를 캐다보니 소위 재벌이라는 것들이 어떻게 해서 돈을 모으게 되었느냐는 사실도.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하겠어! 다시는 이런 부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여주는 뜻에서라도 재벌들의 부정축재는 만천하에 파헤쳐져야 해!"
이래서 허정의 부정축재 처리방안에 반박하고 나섰던 것인데, 그러나 검사들한테는 정책결정권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정의감에 불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허정의 설득에 그 젊은 검사들은 불만이 태산 같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허정의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허정이 부정축재자 처리에 단호히 대처하지를 못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역사에 치적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곁들여 밝혀 둘것은 과도정권은 부정축재자에 대해서 6월 20일까지의 자수 기간을 설정했었는데, 6월 초하루부터 20일까지의 자수 기간 동안에 자수를 한 부정축재자는 불과 7명에 불과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삼성재벌의 이병철은 5개 업체에서 21억 4천만환의 탈세를 했다고 자수했다. 삼로재별의 정재호는 4개 업체에서 5억 6천만환, 삼양재벌의 김상홍(金相鴻)은 1억 9천만환, 전주방직의 송영수(宋英洙)는 2억 9천만환, 태창방직의 백남일은 3억 1천만환, 럭키화학의 구인희는 3천만환, 대한양회의 이정림은 6백만환, 중앙산업의 부정축재를 했다고 자수했다.
웃기는 얘기였다. 점잖치 못한 표현이지만 삶은 소대가리라고 폭소를 터뜨릴 일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밝힌 세금 포탈액이 1년 분치라면 모를까 5년 동안에 걸쳐 고작 그 정도의 세금밖에 포탈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것을 누가 진실이라고 믿겠는가? 부정축재자들이 자수를 하면서 신고한 세금 포탈액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았으나, 허정은 관계 기관에 지시해서 사실 여부를 밝히라고 하지 않았다. 깨끗한 일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허정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하필이면 이때에 저질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민주당은 처음에는 과도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문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혁명과업 수행이야, 우양이 알아서 다잘해 줄 것으로 믿어. 그러니 공연히간섭해서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그래서 과도정권의 정책에는 될수록 용훼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첫째는 민주당은 허정을 자기편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허정은 민주당의 전신(前身)의 또 전신인 한국민주당의 창당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해서 허정은 한국민주당을 떠나 이승만의 고굉지신 역을 다하면서도 한국민주당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줄곧 끊지 않고 지속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허정의 고지식할 정도의 정직성에 신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정가적 기질>은 반드시 혁명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렝는데 부정축재자 문제를 자수로써 해결하려 하자, <너무 미온적이 아니냐?> 해서 곽상훈이 허정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속셈을 타진했었다.
"우양, 부정축재자 문제를 좀더 과감하게 척결할 수는 없겠소?"
"삼연,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꿀떡같아. 부정축재자를 과감하게 척결할 법이 없는데야 어쩌겠소? 그러니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문제는 당신네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나거든 손을 대도록 해요."
부정축재자를 처벌할 법이 없다는데야 어쩔 수가 없었다. (여론이 그 문제에 대해선 좀 침묵을 지켜 주면 좋겠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 여론은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과도정권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탄하던 여론은 마침내는 민주당까지도 도매금으로 묶어서 후려치기 시작했다.
"민주당 놈들, 부정축재자 놈들한테 돈을 먹었다더라!"
끝내는 이런 소문이 퍼졌다.
민중이 민주당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다간 민주당에 대한 불신은 고사하고 이것이 구실이 되어 대학생 데모가 격화되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인데.......) 국회의장으로 새로 선출된 곽상훈은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 곽상훈 못지 않게 과도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에 불만을 품고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는 김동욱(金東郁)이었다. 그는 사안(私案)을 만들어 이 안의 찬동자를 구했다. 박해정(朴海禎)이 찬동해 주었다. 두 사람 사안에 찬성을 하고 나선 사람들은 모두가 구파뿐이었다. 김동욱은 10여 명의 찬동자를 얻자, <부정축재자 처단법안>이라 붙여진 이 사안을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인 주요한(朱耀翰)한테 내놓았다.
"당을 살리려고 그럽니까, 죽일려고 그럽니까? 부정축재자에 대해서 과도정권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여론이 뭐라고 아우성치는지 알고 있습니까? 민주당이 부정축재자들과 결탁했다고 지탄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 여론이 데모의 구실이 되었다가는 민주당은 정권도 잡기 전에 제2의 4.19를 맞게 됩니다. 우리 당 정책위원회에서 속히 이 법안을 심의해서 국회에 제출할 수 있도록 그는 이렇게 강력히 요구했다. 주요한은 김동욱이 사안으로 만든 법안을 검토해 보았다. 전문 8조 부칙으로 되어 있는 이 법안은 권력자가 불법수단으로 공공재산을 취득한 것을 다스리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었다. 이 법안을 검토하고 나서, 주요한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자유당 국회의 마지막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는 어려울 것이고, 민주당이 부정축재자에 대해서 단호히 대처하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겠는걸.) 이것이 6월 7일의 일이다. 주요한이 어째서 이 법안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느냐 하면 이미 마감해 놓고 심사에 들어가 있던 처지였다. 이때는 아직 선거 날짜를 결정해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허정이 정권이양을 8.15까지는 한다는 정치 일정을 짜놓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총선거를 실시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만일 이 법안을 국회에 상정해서 통과시킨다 할 것 같으면 민주당으로서는 스스로 정치자금의 파이프 구멍을 막아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 어쩌라 해도 역시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한 총선거를 치르자면 재벌이나 기업인들한테 기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부정축재자 처리문제에서 외면을 하자니 국민 여론이 그것을 용서할 진정시키는 방편으로 김동욱이 만든 법안을 국회에 제출은 하되, <자유당 국회>에서 자동폐기케 하는 방법을 취하고자 했는데, 이는 정치자금의 돈줄인 재벌이나 기업가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해서였다. <부정축재자 처단법안>은 6월 7일 오후에 국회에 제출되었다. 물론 이 법안은 결과에 있어서는 주요한이 생각하고 있던 대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정치란 요지경 속이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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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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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1부 갈바 황제(재위:서기 68년 6월 18일~69년 1월 15일)
'라인 군단' 대 '도나우 군단'
도나우 강 방위를 맡고 있는 '도나우 군단'은 왜 비텔리우스가 아니라 오토를지지했을까. 루시타니아 속주를 훌륭하게 다스린 오토의 치적을 인정하고, 황제로는 비텔리우스보다 오토가 적임자라고 판단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멀리 떨어진 지방의 총독이라도 전쟁에서 화려한 전과를 올렸다면 병사들의 화젯거리가 되었겠지만, 일반 병사들은 행정면에서의 업적에는 주목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루시타니아 속주에 파견될 때까지만 해도 오토는 네로 황제의 놀이 친구였기 때문에 '전방'에서 군단을 지휘한 경험이 전혀 없다. '전방'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오토가 갈바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그의 이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새 황제 오토에게 지지의 뜻을 밝힌 것은 도나우 강을 방위하는 그들의 심중에 '라인 군단'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갈리아 전역을 재패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제국의 '북부 전선'은 라인 강이라는 게 로마인의 상식이 된 지 한 세기가 지났다. 게르마니아를 엘베 강까지 제패하겠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생각도 결국 꿈으로 끝나고, 티베리우스가 엘베 강에서 교묘하게 철수하여 북쪽 방위선을 라인 강으로 정착시킨 지도 어언 반 세기가 지났다.
선견지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라인 강만이 아니라 도나우 강도 로마의 '북부 전선'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도나우 강 이남을 제패하는 일은 카이사르 암살로 말미암아 뒤로 미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엘베 강까지 제국 영토에 편입시켜 북부 전선을 단축하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도나우 강 방위선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도, 그를 뒤이은 티베리우스에서 네로에 이르는 시대에도, 카이사르처럼 단기간에 넓은 땅을 제패해버리는 군사적 천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뛰어난 장수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천재는 없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이 침공을 거듭한 라인 강 유역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네로 시대까지 도나우 강 유역의 야만족은 로마인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 결과, 도나우 강까지의 제패는 서서히 진행되었고, 도나우 강을 제국의 국경으로 확립하는 사업도 좋게 말하면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라인 전선과 도나우 전선을 맡고 있는 군단기지들이 단시 어디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보면 명백해진다. 라인 전선의 군단기지들은 거의 다 라인 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도나우 전선의 군단기지들은 당시만 해도 아직 도나우 강에서 떨어진 내륙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도나우 강 유역의 레겐스쿠르크,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는 모두 로마의 군단기지에서 발달한 도시들이지만, 이런 곳에 로마가 상설 군단기지를 두게 된 것은 그후의 일이다. 하지만 라인 강 방위선이 철벽이 되면, 야만족은 아직 철벽이 아닌 도나우 강 방위선 쪽으로 공격 방향을 돌릴 게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선을 확립하는 작업은 계속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지만, 선견지명은 아무나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서기 69년 당시,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라인 강을 지키는 병사들이 아니라 도나우 강 방위선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고정관념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오차가 존재한다. 로마인에게 가장 중요한 '북부 전선'은 여전히 라인 강이었고, 제국의 최전방을 지키는 정예부대는 그 라인 강 연안 기지에 주둔해 있는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었다. 그래도 당사자들은 실정을 알고 있었다. 도나우 전선의 병사들이 보기에, 오토 황제가 건재해 있는데도 자기네 사령관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고 본국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무력으로 결판을 내려 하는 게르마니아 군단의 행동은 오만불손하고 아니꼬운 월권행위였다. 실제로 피를 흘리며 야만족의 침입을 저지하고 있는 것은 도나우 전선을 지키는 우리들이고, 너희들은 완전히 철벽이 된 라인 강 방위선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도시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없는 오토를 지지하고 나선 게 아닐까.
도나우 전선에 투입된 군사력은 모두 7개 군단이다. 수적으로는 비텔리우스를 옹립한 라인 강 방위군과 같다. 이만한 병력이 자신을 지지했다는 소식은 휘하 병력을 갖지 못한 오토에게 더없는 낭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불리한 점도 있었다. 우선 라인 강 연안에서 남하해 오는 거리보다 도나우 강 유역에서 이탈리아까지 오는 거리가 더 멀다. 그리고 '라인 군단'은 달마티아 속주에 2개 군단, 판노니아 속주에 2개 군단, 모에시아 속주에 3개 군단으로 분산되어, 세 총독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세 총독이 오토를 지지하는 태도도 제각각이었다. 아직은 군단장급 지휘관들만이 지지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을 뿐이다. 어쨌던 오토는 도나우 방면에서 7개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아군'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오는 '적군'은 한겨울인데도 행군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무력 충돌을 향하여
우두머리는 승부가 걸려 있는 곳에 직접 나갈 필요가 있다. 외적와 싸울 경우에는 최고 사령관이 전쟁터에 나가느냐 마느냐가 전투원들의 사기에 영향을 준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 즉 동족끼리의 싸움에서는 우두머리가 직접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우선 동포끼리 싸우는 것이므로, 적군과 아군 병사들의 마음 속에는 동포에게 칼을 휘두르는 데 대한 망설임이 존재한다. 이기려면 그 망설임을 잘라버려야 한다. 병사들이 망설임을 떨쳐버리게 하려면,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적이 미워서가 아니라 우두머리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병사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루비콘 강 앞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저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기 전에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카이사르를 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병사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국법을 어기는 데 따른 망설임을 떨쳐버리고 '루비콘 도하'를 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 때문에 우두머리가 직접 현장에 가서 병사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두번째 이유는, 승리했을 때 부하 병사들이 지나치게 날뛰는 것을 통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동포에게 칼을 휘두르는 행위는 인간성에 어긋나는 짓이다. 그 결과가 아무리 좋게 끝난다 해도, 인간성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는 자괴감은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런 경우 인간은 이 불쾌한 감정에서 달아나고 싶은 나머지, 한 걸음 물러나 이성을 되찾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인 야수성에 몸을 맡기기 쉽다. 최고 사령관의 단호한 명령만이 병사들의 폭주를 저지할 수 있다.
승리한 아군을 통제하는 것 못지않게, 패배한 동포에 대한 처우도 중요하다. 이것도 최고 사령관의 단호한 조치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야수로 변한 부하들의 폭주를 그냥 방치한 사람도 있었다. 술라가 그 전형적인 인물이다(제3권 참조). 그는 적군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하고, 적군은 같은 로마인이라 해도 철저히 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을 철저히 제거한 덕분에 그 자신은 침상에서 편안히 죽을 수 있었지만, 패배한 쪽의 원한은 그후 30년 동안이나 로마 사회에 깊고 넓게 남아 있었다.
"나는 술라가 아니다"라고 단언한 카이사르는, 술라와는 반대로 패배자가 되어버린 동포를 모두 용서하고, 거취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석방된 사람들이 다시 그에게 칼을 들이댈 위험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내전은 언젠가 끝낸다. 내전이 끝난 뒤 사회를 재건할 때, 원한만큼 해독을 끼치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원한을 남기지 않고 이겨야 한다. 그것이 내전의 어려운 점이다. 우두머리가 직접 전쟁터에 나가면 이 해독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서기 69년의 내전 당시 비텔리우스는 승부를 결정짓는 전투는 선발대로 먼저 떠난 부하 장병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뒤따라가면서 그 열매만 따는 방식을 취했다.
비텔리우스는 본국 이탈리아를 향해 남하하는 '라인 군단'을 셋으로 나누었다. 저지 게르마니아의 노바이시움(오늘날의 노이스)에 주둔하고 있는 제4군단장 카이키나가 이끄는 제1군은 군단병과 보조병을 합쳐 약 3만 명. 이들은 거의 정남쪽을 향해 남하하여 오늘날의 스위스를 빠져나간 다음, 후세에 피콜로 산 베르나르도(프랑스어로는 프티 생 베르나르)라고 불리게 된 고개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는 길을 택한다. 제2군은 저지 게르마니아의 본나(오늘날의 본)에 주둔하고 있는 제1군단장 발렌스가 이끈다. 제2군의 규모는 확실치 않지만, 제1군보다 많은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거리는 멀지만 행군하기 쉬운 길을 택했다. 갈리아를 돌아 리옹에 이른 다음, 론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아콰이 섹스티아이(엑상프로방스)에 이르면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카이사르가 퇴역병을 보내 건설한 항구도시 포룸 율리(프레쥐스)로 간다. 거기까지만 가면 서쪽에서(즉 갈리아에서) 안티폴리스(앙티브),나카이아(니스),게누아(제노바)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것은 간단하다. 제3군은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비텔리우스가 직접 이끌었다. 이 제3군의 출발이 늦어진 이유는 비텔리우스 자신이 '우두머리가 앞장서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신병을 모집하여 군단을 편성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텔리우스는 '도나우 군단'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토를 타도하고 황제의 지위를 굳히려면 10만 병력이 이탈리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인 군단'은 저지 게르마니아와 고지 게르마니아에 주둔해 있는 병력을 합쳐서 7개 군단이다. 이들을 몽땅 이탈리아로 데려간다 해도 4만 2천 명이다. 같은 수의 보조병을 합해도 8만 4천 명. 10만 명이 되려면 2만 가까운 병력을 새로 모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비텔리우스는 카이키나의 제1군보다 두 달 뒤에야 이탈리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리 철벽이라고는 하지만, 라인 강 건너편은 용맹한 게르만족이 할거해 있는, 로마 제국 방위선 밖이다.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을 몽땅 이탈리아로 데려가는 것은 황제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일 것이다. 그후 비텔리우스의 행동을 보아도, 이 사람은 제국의 안전보다 개인의 야심을 우선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라인 강을 지키고 리아행에 참가했다.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에는 야만족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결말을 낸 뒤에 병사들을 돌려보내면, 야만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여름까지는 라인 강 방위선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때문에 라인 강 동쪽의 야만족은 로마군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로마 황제에 대한 비텔리우스의 인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다. 군량을 가져가는 것은 한겨울에 강행군을 해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짐이 된다는 이유로,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3만 대군이 이동하면서 필요한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면, 그 지역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들이 지나는 길목에 있는 오늘날의 프랑스나 스위스 주민들은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 통과했을 때와 같은 곤욕을 치렀다. 비용을 아까워한 비텔리우스나 돈을 주고 식량을 조달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빼앗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말했듯이, 이것도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민의 충성심이 흔들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정복한 뒤 로마에 편입시킬 작정인 지역을 제패하러 갈 경우,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돈을 주고 구입했다. 카이사르의 이런 방식은 로마 제국의 전통이 된 지 오래다. 천박한 생각은 나중에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니까 곤란하다.
포 강을 사이에 두고
오토는 쌓인 눈을 헤치며 이탈리아로 진군하고 있는 비텔리우스 군대를 맞아 싸우게 되었지만, 그가 생각한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첫째는 카이키나가 이끄는 제1군과 발렌스가 이끄는 제2군의 합류를 저지할 것. 둘째는 포 강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다. 합류를 저지하고 포 강을 사수하여, '도나우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포 강은 이탈리아의 하천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하지만,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에 비하면 도저히 큰 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알프스 산지에서 발원하여 북이탈리아를 지나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이 강은 작은 배를 늘어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면 쉽게 건널 수 있다. 하지만 강을 건너기가 쉽기 때문에 이 강의 전략적 중요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포 강을 건너면 거의 직선으로 리미니까지 뻗어 있는 아이밀리아 가도가 나온다.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는 리미니에게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아펜니노 산맥을 지나 로마까지 곧장 뻗어 있고, 제노바에서 로마까지는 역시 아우렐리아 가도가 곧장 뻗어 있다. 일찍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바싹 추적했을 때처럼 리미니에서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곧장 남하하여, 그리스와 마주보는 항구도시 브린디시를 제압할 수도 있다. 요컨데 포 강을 적의 손에 넘겨주면 오토는 당장 수도 로마나 본국 이탈리아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포 강을 사수하는 것은 '도나우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행군할 수 있는 로마식 도로망, 즉 당시의 '고속도로'망을 깔아놓은 로마인의 방식이 이런 경우에는 수비하는 쪽에 특히 불리했다. 이런 위험을 두려워한 나머지 좁고 구불구불한 길밖에 만들지 않은 중세인의 방식을 택하느냐, 아니면 경우에 따라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속도로망을 까는 이점을 중시할 것이냐. 어느 쪽이든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오토는 전략상으로는 꽤 훌륭한 이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했을까.
우선 오토는 카이키나의 제1권과 발렌스의 제2군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나폴리 근처의 미세노 해군기지에 있는 함대를 남프랑스의 프레쥐스 항구로 보냈다. 그곳에 병사들을 상륙시켜, 리옹에서 내려오는 발렌스의 제2군을 기다렸다가 기습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오토에게는 휘하 병력이 없었다. 게다가 미세노 함대의 해병은 상륙시켜 육군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출동 목적은 해전이 아니니까 해군을 보낼 필요도 없다. 함대는 수송선단 구실만 하면 된다. 휘하 병력이 없는 오토 황제는 수도 경찰과 소방대원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1개 군단을 만들어 남프랑스로 보냈다. 이 부대의 지휘를 맡은 것은 미세노 함대 제독이다. '팍스 로마나'가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던 시대의 지중해에서 해군은 군인이라기보다 해양경찰이라고 하는 게 타당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독이라 해도 역전의 맹장은 아니었다. 이 6천 명이 갈리아를 지나 남하해 오는 4만 명의 발렌스 부대를 맞아 싸우는 것이다. 오토도 그들이 발렌스 부대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토의 전략은 이 1개 군단이 발렌스 부대를 저지하는 사이에 본군을 이끌고 카이키나 부대를 격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 강을 사수하기 위해 북상하는 본군에는 최고 사령관 오토 주위에 역전의 장수들이 즐비했다. 네로 황제 시대에 크리타니아에서 일어난 주민 반란을 과감한 병법으로 진압한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를 비롯하여 안니우스 갈루스와 마리우스 켈수스도 전투 경험이 풍부한 노장들이다. 이들은 오토를 지지해서 비텔리우스 진영과 싸운다기보다,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정식 황제가 된 사람이 오토니까 로마군 장수는 그 사람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오토의 초빙에 응했던 것이다. 셋 다 집정관 경험자다. 37세의 오토보다 열 살 내지 스무 살은 나이가 많다. 무엇보다 1개 군단도 주둔해 있지 않은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을 지낸 게 고작인 오토에 비해, 이들 세 사람은 전략 단위인 2개 군단 이상을 지휘하여 싸워본 경험이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브라타니아 총독을 지낸 파울리누스는 그곳을 계속 제패하면서 제국 영토에 편입시키는 어려운 임무까지 훌륭히 수행해낸 인물이었다. '장수'는 부족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병사' 쪽이었다.
독재국가에서는 군사력의 진정한 존재이유가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라 국내의 반대파를 억압하는 데 있다. 로마 제국은 이 점에서도 독재국가는 아니었다. 로마 제국은 본국 이탈리아에 1개 군단도 상주시키지 않았다.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은 모두 제국의 국경, 즉 방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본국 이탈리아에 상주하는 군사력은 수도 로마와 본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 편성된 1만 명의 근위대뿐이다. 9개 대대 9천 명의 중무장 보병에다 각 대대에 딸린 기병을 합해야 겨우 1만 명이 될까말까 한 정도다. 그밖에 수도와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인구에 따라 다양한 규모의 경찰과 소방대가 있었지만, 평상시에는 군사력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본국의 질서 유지(실제로는 제정 유지)를 임무로 하는 군사력은 1만 명의 근위대뿐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토로서는 본국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군사력으로 우선 이 1만 명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밖에 네로 시대 말기에 미세노 해군기지의 해병들로 편성된 제1군단(아디우토릭스) 6천 명이 있다. 네로가 왜 새 군단을 편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연구자들 중에는 네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같은 동방 원정을 꿈꾼 흔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서기 69년 당시 1개 군단은 본국에 있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그냥 모아놓은 것만으로는 전력이 되지 않는다. 육상전에 적합한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네로는 그 직후에 자살했고, 원로원의 승인을 과신하고 있던 갈바도 그런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살해되었기 때문에, 오토가 손에 넣은 제1군단은 육상 전력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병사 집단이었다. 해방노예가 주축을 이룬 이 제1군단에 비하면 근위대는 엘리트 집단이었지만, 수도 로마에서 주고 근무하고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 출동하는 일은 드물었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출동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근위병 중에는 실전 경험이 없는 병사가 많았다. 실전 경험에서는 해병 출신인 제1군단 병사들과 오십보백보였다. 이래서는 오토가 아니더라도 불안해지는 게 당연하다. 오토는 2천명의 검투사들을 무장시켜 2개 대대을 편성했다. 로마인이 가장 열광한 인기 스포츠는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경주와 검투사 시합인데, 검투사가 모두 노예였다는 생각은 후세의 오해일 뿐이다. 죽음과 맞서는 위험한 직업이라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도 이 세계에 들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평균 3분의 1정도는 직업으로 검투사를 택한 사람들이었다. 수도 로마는 물론 중소도시에도 검투사 양성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검투사들은 시합이 없는 날에도 훈련에 여념이 없는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날마다 무기를 다루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전력이 될 수 있다. 오토는 원로원의 반대도 무시하고 이 검투사 부대를 전선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포 강을 사수해야 하는 오토측 본대는 근위대와 해병 출신 1개 군단에 검투사 부대를 합쳐서 2만 명이 채 안된다. 하지만 오토는 이미 주둔지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온 다른 군사력을 계산에 넣을 수 있었다.
에스파냐에서는 제7군단(이 군단은 갈바 황제가 편성했기 때문에 갈바 군단이라고 불렸다)이 이탈리아를 향해 오고 있었다. 브리타니아에서는 제14군단이 역시 이탈리아를 향해 갈리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토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도나우 강 방위선에서는 7개 군단 가운데 5개 군단에서 2천 명씩 선발하여 모두 1만 명에 이르는 선발대가 이탈리아로 달려오고 있었다. 모든 군단이 이동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선발대만 보낸 것이다. 오토의 전략은 다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마에서 데려가는 2만 명 외에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에서 오는 2개 군단 1만 2천 명과 보조병을 합한 2만 명, 그리고 '도나우 군단'의 선발대 1만 명, 모두 5만 명이 우선 3만 명의 카이키나 부대를 격파한다. 이어서 서쪽에서 오고 있는 4만 명의 발렌스 부대를 격파하는 데에도 성공하면, 그 사이에 '도나우 군단' 본대도 도착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텔리우스가 직접 이끌고 남하하는 '라인 군단' 후속 부대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이것이 오토의 전략이었다. 만사가 예정되로 진행되었다면 오토의 생각대로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정대로 진행되는 일이 거의 없는 게 인간 사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에게는 임기응변의 능력이 요구되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것이 오토의 약점이었다. 실전을 알았다면, 만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어야만 호과가 있는 전략은 애당초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은 첫 번째 일은 카이키나의 제1군이 겨울철인데도 3월 초에 알프스를 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이들을 맞아 싸우기 위해 본대의 일부를 급히 출동시켜야 했다. 강행군하여 북쪽으로 달려간 병력은 근위대 5개 대대와 거기에 딸린 기병대 및 제1군단을 합쳐 1만 1천 명. 여기에 2천 명의 검투사를 합치면 1만 3천 명이었다. 이들을 지휘하는 임무는 도나우 전선에서 명성을 떨친 갈루스가 맡았다. 갈루스에게는 포 강을 사이에 도구 마주보는 피아첸체와 크레모나를 확보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오토에게 전해진 소식은 발렌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임무를 띠고 남프랑스에 상륙한 1개 군단이 궤멸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발렌스는 주전력인 군단병(레지오나리스)도 보내지 않고 보조전력인 보조명(아욱실리아리스)만을 보내, 경찰관이나 소방대원으로 구성된 이 군단을 격퇴해버렸다. 속주민으로 구성된 이 보조부대 지휘관은 속주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였다. 아무리 급조된 군단이라 해도, 로마인이 속주민에게 패한 셈이다. 이 사건은 발렌스 저지에 실패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갈리아의 한 부족인 트레베리족 출신의 클라시쿠스에게 로마 군단이 공포심을 품게 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반 년 뒤에 일어난 '갈리아 제국' 소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것은 공포보다 경멸 때문이다. 어쨌든 서쪽에서 이탈리아로 다가가고 있던 발렌스 부대 4만 명에게는 이제 장애물이 없어졌다. 오토도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수도를 떠나 북쪽으로 가는 오토 황제를 따른 것은 근위대 4개 대대와 거기에 딸린 기병을 합쳐 약 4천 명. 거기에다 만기 제대한 병사들까지 긁어모아서 함께 데려갔다고 한다. 휘하 병력을 갖지 못한 오토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이 혼성군은 정확한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파울리누스를 비롯한 장수들의 진용은 위풍당당했다. 게다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오토에게 전해진 선발대의 전과는 오토의 기분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선발대 1만 3천 명은 갈루스의 노련한 지휘를 받으며 잘 싸웠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검투사 부대의 분전은 눈부실 정도였다. 게다가 상대인 카이키나가 휘하 병력을 셋으로 나눈 것도 갈루스에게는 다행이었다. 아무기 카이키나가 진두지휘를 한다 해도 1만 명으로 1만 3천 명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갈루스가 지휘하는 황제군 선발대는 포 강 사수의 요충인 파아첸차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피아첸차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카이키나는 포 강 남쪽의 피아텐차와 마주보고 있는 포 강 북쪽의 요충 크레모나에 무혈 입성하여, 그곳을 전초기지로 삼았다. 황제군은 크레모나도 공격했다. 크레모나가 적의 수중에 있는 한, 아퀼레이아를 지나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도나우 군단'이 진로를 방해받기 때문이다. 검투사 부대가 작은 배를 늘어놓아 급조한 다리를 건너 크레모나 교회를 휩쓸고 다니는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도 검투사들의 분전은 대단해서, 카이키나는 셋으로 나누었던 부대를 다시 통합하긴 했지만 크레모나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전과에 기분이 좋아진 오토는 로마에서 강제로 데려온 원로원 의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이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모데나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원로원 의원들을 전쟁터까지 데려온 것은, 군단병의 추대만으로 황제가 된 양 우쭐대는 비텔리우스와는 달리 로마 국가의 공식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자기야말로 정당한 황제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원로원 의원들을 볼모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오토의 강요에 못 이겨 수도를 떠나 모데나까지 끌려온 원로원 의원들 중에는 숨은 비텔리우스파도 적지 않았고, 심지어 비텔리우스의 친동생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피아첸차 공략에 실패한 카이키나는 초조했다. 비텔리우스에게 3만 명의 병력을 나누어 받은 카이키나는 원래는 1개 군단의 군단장이다. 비텔리우스에게 4만 명의 병력을 나누어 받고 이탈리아로 다가오고 있는 발렌스도 군단장이라는 점에서는 카이키나와 마찬가지다. 발렌스가 도착하기 전에 공을 세우려고 초조해진 카이키나는 포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해온 황제군을 매복 전술로 섬멸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기병대를 내보내 공격하는 체하면서 숲으로 유인한 뒤, 숲속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포위하여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포 강 북쪽 연안의 베드리아쿰까지 진출한 황제군을 지휘한 사람은 파울리누스였다. 게릴라 전법에 능한 브리타니아인을 상대로 경험을 쌓은 파울리누스가 이정도 책략에 속을 리가 없다. 숲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카이키나 부대는 적을 포위하기는커녕 오히려 포위당해버렸다.
파울리누스가 명령만 내렸다면 여기서 카이키나 부대의 절반을 궤멸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절반을 섬멸한 뒤에 30킬로미터를 되돌아가서 크레모나를 공격하면, 나머지 절반이 지키고 있는 크레모나도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황제군은 피아첸차와 크레모나라는 두 개의 주요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여 포 강을 사수하고, '도나우 군단'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도 한결 쉬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파울리누스의 입에서는 끝내 포위망을 좁혀 적을 섬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틈에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한 카이키나 부대는 장수도 병사도 모두 달아나 버렸다. 파울리누스로서는 동포를 죽이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부하들의 경멸을 사게 되었다. 내전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있지만, 동포니까 너그럽게 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적에게 이롭지 않도록, 즉 아군에게 이로운 형태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게다가 아군 병사들의 경멸을 사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상충되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지 않으면, 동포끼리의 내전에서 성공하기는 바랄 수 없다. 당시에도 널리 읽히고 있었던 카이사르의 '내전기'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전에서 승리하는 요령을 배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교과서였다. 서기 69년의 내전에 참가한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했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도 가르치는 쪽보다 배우는 쪽의 자질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황제군은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게다가 이 일로 말미암아 카이키나의 제1군과 발렌스의 제2군이 합류하는 것마저 허용하고 말았다.
카이키나의 실수로 잃어버린 병력을 빼더라도, 발렌스 부대와 합류한 뒤에는 6만 대군이 된다. 이 대군과 맞서야 할 처지가 된 오토 진영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포 강 북쪽과 남쪽에 나뉘어 있는 황제군은 로마에서 데려온 2만 명에다 조금씩 나뉘어 이탈리아에 들어온 '도나우 군단' 선발대 1만 명을 합쳐 3만 명. 브리타니아와 에스파냐에서 먼 길을 행군한 끝에 겨우 이탈리아에 들어온 제14군단과 제7군단까지 합치면 5만 명은 되었던 모양이다. 수적으로는 호각지세라고 해도 좋았다. 작전회의에서는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이번 기회에 포 강 북쪽 연안에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결전을 벌일 것이냐, 아니면 '도나우 군단'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포 강을 사이에 두고 계속 적과 대치할 것이냐. 실전 경험이 풍부한 파울리누스와 갈루스, 켈수스 같은 장수들은 후자를 주장했다. 하지만 오토의 친형 티티아누스와 근위대장 풀크루스는 당장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결전을 주장한 것은 오토 황제였다. 결전을 주장한 세 사람은 실전 경험이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격렬한 토론 끝에 결국 최고 사령관의 뜻에 따른다는 느낌으로 오토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계절은 4월이다. 포 강은 큰 강이라서 지류가 많고, 유역은 눈녹은 물로 땅이 질퍽거렸다. 기병도 중무장 보병도 싸우기는 어려운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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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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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 : 빨간윗도리(사고 요 와타) - 이로콰이 족
"당신은 말한다. 이 길만이 신을 믿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 길밖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고."
내 이름은 사고 요 와타이다. 그 뜻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흔히들 나를 '빨간윗도리(레드 재킷)'라고 부른다. 나의 친구여! 오늘 우리가 만난 것은 신의 뜻에 의해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신의 뜻이라는 것이 우리 인디언들의 믿음이다. 신은 우리의 만남을 위해 이처럼 화창한 날씨를 주셨다. 태양을 가리고 있던 자신의 윗도리를 걷어 버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명랑한 햇살을 비춰 주시는 이여! 우리는 눈을 열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본다. 또한 귀를 열고 당신이 말하는 내용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이 모든 것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나의 친구여! 당신은 문명인들이 보낸 한 사람의 선교사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이 만남은 당신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귀를 기울여 당신이 말하는 것을 잘 들었다. 당신은 또 우리에게 자유롭게 말할 것을 요청했다. 이보다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당신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분명히 전할 수 있게 됨을 큰 기쁨으로 여기는 바이다. 우리 모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이제 모두를 대신해 내가 일어섰다.
한때는 우리들의 조상들이 이 드넓은 대지를 소유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지어 놓은 인디언 천막들이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신은 인디언을 위해 이 대륙을 만드셨으며, 들판 가득히 들소와 사슴 등 많은 동물을 뿌려놓으시고 땅에선 옥수수가 자라게 하셨다. 그러나 힘겨운 날들이 찾아왔다. 당신의 조상들이 큰 강물처럼 이 대지 위로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고, 우리는 그들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대했다. 그들은 설명하기를, 자신들이 박해자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작은 땅만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해 그 청을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 더불어 이 대지 위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옥수수와 물고기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에게 독화살을 날려 보냈다. 우리 인디언이 대대로 살아 오고 있던 신비의 대륙을 발견한 문명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우린 그들을 친구로 맞이했으며, 그들 역시 우리를 형제라고 물렀다. 그들을 믿고 우리는 더 넓은 지역을 내주었다. 머지않아 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었고, 그들은 더 많은 땅을 원했다. 나중에는 아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륙 전체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우린 눈이 번쩍 뜨였으며, 마음이 몹시 편치 않았다. 곧이어 전쟁이 일어났다. 그들은 인디언을 매수해 다른 인디언들과 싸우게 했으며, 그 결과 많은 인디언 부족이 멸종되었다. 그들은 또한 독한 술을 들여와 우리더러 마시게 했다. 그 결과 또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친구여! 한때 우리 부족의 자리는 넓었고, 당신들의 자리는 좁았다. 그러나 이제 당신의 부족은 거대해졌으며, 우리에겐 담요 한 장 펼칠 땅밖에 남지 않았다. 당신들이 우리의 대지를 다 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제 우리에게 당신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있다. 당신은 말한다.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신의 마음에 들도록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라고. 그리고 만일 이 시간 이후로 문명인들이 믿는 종교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척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당신들의 종교는 옳고, 우리의 것은 틀리다고. 그 말이 맞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신들의 종교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다. 만일 그 책의 내용이 당신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면 신은 마땅히 우리에게도 그 책을 내려주셨을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에게도 그 책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이해를 심어 주셨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만 당신의 말을 통해 그것에 대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문명인들에게 수없이 속아온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또한 당신은 말한다. 이 길만이 신을 믿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 길밖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고. 만일 그런 식으로 단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한다면 왜 당신들 문명인들은 끝없이 종교 싸움을 벌이는 것인가? 당신들 모두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왜 서로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종교가 당신들의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종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또한 종교를 갖고 있으며, 그것 역시 조상 대대로 그 아들들에게 전해져 왔다. 그 종교는 우리 인디언에게 세상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치고, 서로 사랑하라 이르며, 나무들처럼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한다고 일깨웠다.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우리 인디언은 종교에 대해 결코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신은 당신과 나 모두를 만드셨지만 우리 둘 사이에 큰 차이를 두셨다. 얼굴도 다르게 만들고 관습도 다르게 만드셨다. 당신들에게는 기술 문명을 주셨지만, 신은 그것에 대해선 우리의 눈을 띄워 주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다른 많은 것들에게도 신은 차이를 있게 하셨다. 따라서 종교 역시 그렇지 않겠는가? 신은 우리 인디언에게는 인디언의 세계에 어울리는 종교를 주셨다. 신께서 잘못 판단하실 리 없다. 신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무엇이 가장 적합한가를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 판단에 만족해 왔다. 친구여! 우리는 당신의 종교를 파괴할 의도가 전혀 없다. 당신에게서 종교를 빼앗으려는 생각도 없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의도를 가져선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종교를 원할 뿐이다. 당신은 이 장소에서 얼굴 흰 사람들에게 줄곧 설교를 해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지켜보겠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린 그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설교가 그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당분간 지켜보고 있겠다. 그래서 그들이 정직성을 되찾고 더 이상 인디언들을 속이려 들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당신이 우리에게 말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다. 이것으로 당신은 우리의 답변을 들었으며, 이것이 현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이다. 이제 당신과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당신의 형제들에게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위대한 정령께서 당신을 잘 보호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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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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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처럼 - 전혜린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피를 끓게하는 도시가 나에게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이다. 열흘 가량밖에 있지 않았는데도 비인은 나를 미치게 한다. 비인의 골목을 거니는 기분, 호프만,스탈, 알텐베르그,츠바이크 등이 담론하고 기염을 토하던 다방들, 모짜르트가 [빌리아드]를 친 카페, 베에토벤이 맥주를 마시던 주막집들.
거리의 모퉁이마다 우뚝 서 있는 예술가의 조각들. 브라암스, 슈베르트, 모짜르트, 베에토벤,괴테, 쉴러, 슈트라우스....
거리의 이름도 그곳에 살던 예술가의 이름을 따고 있었고 오페라며 브르크 극장이며 음대며....
아뭏튼 비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예술에 봉사하며 예술에 미쳐 사는 것이었다. 도시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내가 잊을수 없는 것은 교회의 매력이었다, 비인 교외로 코프렌츠행 버스를 타고 칼렌베르그라는 곳에 가 보았다. 정원 다방에 앉아서 바라보니 왼쪽으로 무한히 뻗어 있는 저 유명한 비인의 숲.... 슈트라우스의 비인의 숲의 이야기의 멜로디가 저절로 내 입술로 새어 나오지 않는가? 오른편으로 하늘 빛처럼 푸른 도나우 강이 끝없이 흐르고 있고 그 너머로는 은빛 안개속에 회색의 도시 비인이 꿈같이 흩어져 있었다.
이맘 때면(세모(歲暮)가 되면) 새삼스럽게 비인, 특히 그 교외의 주막에서 마신 헝가리 포도주며, 진짜 집시가 켜던 바이롤린의 피를 끓게 하는 선율이 그리워진다. 나도 집시처럼 정처없이 춤과 노래와 사랑과 점치는 일로써 생활하면서 온 세계를 방랑했으면! 이런 공상이 연말의 여러 가지의 무와 경비로 짓눌리는 부자유한 나의 정신 속에 통기구(通氣口)가 되어주는 것 같다.
196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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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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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선도산__신라 건국신화의 유적지
선도신모가 깃든 산
선도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산이 경주 서북쪽에 있다. 무열왕릉의 뒷산으로 높이는 3백80m. 나지막하지만 옛부터 '신성한 산'으로 경주일대에서 떠받들려져 온 산이다. 이 산은 경주의 진산(성이나 도읍을 수호하는 산)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건국설화와 관련있는 선도신모가 거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선도산의 신모는 신라 건국 초기부터 이 산에 머물면서 경주를 지켜 왔다고 한다. 삼국유사 감통편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부인을 낳은 신이 바로 선도신모라고 되어 있다. 선도산 신모의 설화는 고대인의 산악숭배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얘기이다. 선도산의 신이 여신으로 설정된 것은 모계사회의 영향을 보여주며, 출산 또는 풍요와 연관을 갖는 고대의 여성숭배사상에도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삼국유사에 실린 선도산 신모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신모는 원래 중국 황실의 딸이었으며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머물면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인 황제는 솔개 발에 서신을 매어 부쳤다. '솔개가 머무는 곳을 따라 집을 삼아라'라고 서신에 쓰여 있었다. 사소는 솔개를 놓아 보냈더니 이 산으로 날아와 멈추었다. 사소는 마침내 이곳에 와서 지선이 되었다. 그래서 산이름을 서연산이라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여 나라를 지켜주었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건립된 이래로 늘 삼사(3가지 주요한 제사)의 하나로 했고, 그 차례도 망제(1. 가뭄이 심할 때 비를 기원하며 올린 제사. 2. 매달 보름에 조정에서 종묘에 지내던 제사)의 위에 있었다.
신라시조왕의 어머니인 사소
이 얘기 속에는 선도산 신모의 이름이 사소이며, 그녀가 중국황제의 딸이라는 사실 등 흥미있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솔개와 연관된 서연산이란 명칭도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 설화 속의 여신의 이름 중 '소'는 고어로서 '산'또는 '악' '봉' '영'등을 의미하는 '소리' '수리' '술' ' 솟'의 머리글자를 뜻한다. 서연산은 서악을 말하는 것으로 일명 서술산, 서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술의 '술' '수리'는 옛말로 산, 고상, 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사소라는 이름은 산악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신성한 인물(또는 지역)이란 뜻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연신이 중국황제의 딸로 설정된 것은 그 신성한 지위를 높여주기 위한 것이며, 하늘의 사자로 설정된 소리개를 통해 신성한 장소를 점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선도산 신모의 설화는 민간층에서 부락의 풍요와 수호를 위해 동신(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신 동신당인 국사당(또는 국수당)의 원형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국사당은 대개 부락의 뒷편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은 국사당의 제신이 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면을 보여준다. 국사당이 있는 산은 우주적 중심의 성역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적 통로로 상징된다. 단군신화의 태백산정이나 가락국의 구지봉 등은 선도산 신모의 설화와 같은 사고형태가 끌어낸 것으로 하늘신앙의 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선도산의 신모는 도교적인 신선의 이미지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라는 건국신화적인 연관성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사소가 처음에 진한에 오자 성자를 낳아 동국의 첫임금이 되었는데 아마 혁거세와 알영의 출생이 그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혁거세의 출생신화는 흰말의 '말 토템'을 보여주며, 알영은 계룡의 왼편 갈비뼈에서 나와 '닭 토템'을 보여준다. 이대 흰빛과 '계룡, 계림'등의 닭은 모두 서쪽을 의미하고 있어 서악(선도산)과 쉽게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연관은 시조왕을 더욱 신성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이 선도산의 성모는 유명해졌다고, 지금도 이 산은 무속적인 산앙의 장소로 떠받들려지고 있다.
성모사와 마애삼존불
[선도산 마애삼존불]
선도산의 정상 바로 밑 경주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신모의 유허지가 있으며 그 위패를 모신 사당 성모사가 있다. 현재의 사당은 1975년 11월에 새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 성모사는 박혁거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성모사부인봉참회가 신축했다. 원래의 사당은 지금의 사당 북쪽 1백50m 거리에 있는 묏부리에 있었다. 원래의 사당이 있던 터에는 성모사유허비(1977년 8월 건립)가 서 있다. 이 유허비는 원래 있던 비를 없애고 새로 깎은 비인데 바닥과 돌담 위를 시멘트로 발라 옛맛을 잃어버리고 있다.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3월 10일(음력)에 박혁거세 후손들에 의해 제사가 지내진다. 사당 왼편에는 거대한 마애삼존불(보물62호)이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마애삼존불은 거대한 바위면에 남향하여 높이 7m의 주존 아미타조상을 새기고 그 좌우에 화강암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조성했다. 마애본존불은 그 손상이 심해 얼굴 윗부분이 부서졌다. 남아 있는 뺨, 턱, 눈, 코 등의 표현은 그나마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강하게 떠올리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선후기에 크게 파손을 입었다고 한다. 1970년 12월 이 불상이 경주박물관에 의해 복원되기 전만 해도 두 협시보살은 형체가 두절된 채 주존 아래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 삼존상은 통일신라 즉 7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이 마애석불과 선도산 신모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선도신모의 도교적인 면과 마애불의 불교적인 면이 처음부터 이 산에서 공존해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불상은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이며, 이 세계의 위치가 서쪽에 있는 만큼, 서악이란 명칭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마애불과 성모사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면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산밑에 숱한 고분들이 눈에 띈다. 이 산밑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헌안왕, 진지왕, 무성왕 등으로 추측되는 왕릉과 숱한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마애삼존불은 똑바로 묘소들을 향해 서 있다. 추측이지만 이 마애삼존불과 산밑의 고분군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하다. 성모사의 오른편에는 '도덕회수성원'이라는 간판을 붙인 건물이 있다. 수성원의 한 방에는 황원단이 있고 조물주의 위패와 단군 및 관세음보살의 화상이 걸려 있다. 이곳에는 '도사'가 거주한다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애삼존불과 성모사와 유사종교의 제단이 지금도 여전히 한 자리에 공존하는 것이 이 산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하다.
나정과 알영정 - 신라개국의 산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알영정.]
나정과 알영정의 위치
신라 개국의 현장인 나정은 경주 시가지의 남쪽 남산 아래에 있다. 오릉에서 불국사 쪽과 언양 쪽으로 가는 길이 겹치는 네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2백m떨어진 곳에 나지막한 언덕이 솔숲에 싸여 있는 게 보인다. 이 숲속에 나정이 있다. 나정의 동쪽 3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6촌장 재실이 있고, 그 동편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역시 숲에 싸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언덕에는 양산재라는 재실이 있다. 오릉을 포함한 이 일대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태어난 지역이다.
아득한 옛날(기원전 60년) 혁거세는 하늘의 아들로 이 땅에 강림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삼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냇가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의 위에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방자해졌소. 덕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해야지요."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보니 양산(지금의 남산) 밑 나정 곁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처럼 땅에 비치는데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보랏빛 알(푸른 알이었다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그 알을 깨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동쪽 샘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아졌다. 그래서 그를 혁거세(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라 했다. 사람들은 서로 치하하여 이제 천자가 강림했으니, 마땅히 덕있는 여왕을 정해 배필로 하자고 했다. 이날 사량리 알영정(현재의 오릉 안에 있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얼굴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월성 북쪽 내로 데려다 목욕을 시키니 그 부리가 빠져 떨어졌다. 두 성인을 남산 서쪽(지금의 창림사지)에 궁실을 짓고 기르다가 나이가 13세가 되었을 때 왕과 왕비로 삼았다.
부족간의 연맹을 상징하는 설화
이 설화는 국조탄생 설화의 한 중요한 패턴인 난생 설화형의 전형이다. 더불어 전광과 같은 서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진다든가, 흰 말이 길게 울고 하늘로 올가간다는 등의 상징을 통해 천상에서 땅에 내려오는 천자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떠올린다. 또한 이 설화에는 말, 용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곰, 거북, 악어, 사슴, 말, 용 등은 신화상 수신으로 중요한 동물들이다. 곰, 사슴, 말은 서북방계 신화에서, 용, 악어, 거북 등은 남방계 신화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혁거세집단은 북방계이며 알영집단은 남방계 신화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철순 씨는 혁거세집단은 '말 토템'을 가졌던 천신족으로 북방계에서 경주로 이주해온 유이민집단이며, 알영집단은 '닭 토템'을 가진 지신족인 토착족 또는 앞서 이주해온 집단이라고 추정한다. 이 신화는 그러므로 경주 지역에 먼저 뿌리내린 알영집단과 북방으로부터 이주해온 혁거세집단이 연맹체제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이 내려진다. 고대에 부족국가가 생길 때는 대개 선진 철기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과 토착족들이 연맹을 맺어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스스로는 천신족이라 했다. 이종욱 교수(영남대)는 설화에 나오는 나정과 알영정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만큼 서로 이웃한 마을의 우물들로 파악한다. 이 두 개의 우물 주변에는 각각 마을이 있었으며, 혁거세와 알영의 결혼은 곧 이 두 집단 간에 연맹이 맺어져 한 부족국가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혁거세가 13세 때 왕이 된 것은 혁거세집단이 경주 평야에 이주해 온 후 정착하는데 13년이 걸렸으며, 그 후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당시 6촌장은 현 경주시와 월성군일대 지역인 사도국을 지배한 장로급 촌장들이었다. 이 지역은 이들 6촌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의 면모를 지녔던 듯하다. 혁거세집단과 알영집단의 연맹집단은 결국 사로국의 최고실력 집단으로 대두되어 6부장의 추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런 신화적인 모습으로 그 추대과정이 상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우물터와 비석
나정에는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운 비석을 안치한 비각이 있다. 비각 뒤에는 우물터가 있다. 나정은 사적 2백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정 옆에는 6촌장 재실이 있어 아득한 옛날 이 일대에서 혁거세를 맞이했던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재실은 1970년 정부가 세웠다. 이곳에서는 매년 8월 17일에 6촌장 재실 동편에는 둥글게 솟은 원형의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그 위는 평평하고 넓다. 이 언덕의 남편에 양산재가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다. 이 언덕 남쪽마을(탑정동 835번지)에 사는 한 노인은 "옛날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이 재실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언덕의 모양과 전해오는 얘기로 봐서 이 언덕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도당산일 가능성이 짙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가까운 곳에 나정이 있어서, 이 언덕 위에서 당시 6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 문제는 알천이 된다. 신화에는 6촌장들이 알천 냇가에 모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언덕 아래 가까운 내는 남천으로 남산 동편을 흘러 반월성 남쪽을 돌아 오릉 북쪽으로 해서 흘러간다. 알천은 보문지를 지나 포항 쪽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이곳에서 거리가 멀다.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알천이 황룡사 부근으로 해서 반월성과 현 박물관 옆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고 추측이 되고 있다. 태풍 사라호가 불 때 알천물이 경주들을 지나 이쪽으로 쏠리려고 한 것도 그 한 증거가 아니겠냐고 주민들은 말한다. 알천 물길은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물길이 분황사 쪽으로 흐르면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리고, 물길이 헌덕왕릉 쪽으로 흐르면, 헌덕왕이 땀을 흘렸다는 설화도 알천물길이 변동이 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알천물은 반월성 부근에서 현재의 남천에 합류되어 흘렀다고도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가까운 남천을 알천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지역민들의 추측일 뿐이다. 오릉의 고분 동편 숭덕전 뒤쪽에는 혁거세의 왕비 알영부인이 태어났을 때 그 몸을 씻었다는 알영정터가 있다. 이 우물은 돌로 덮어두었다. 그 곁에는 '신라시조왕비탄강유기'라 새긴 비를 안치한 비각이 수줍은 색시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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