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9호 - 2024.07.05 금요일(음력 : 05.30)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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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변화시킬 만큼 큰 인물이 아니거든 시대를 따라 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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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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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외국어 남용
최근 국민들의 언어 사용 실태를 보면 외국어를 마치 국어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다음은 국내의 모 자동차 광고 문구인데, 거의 모두 영어를 차용해 쓰고 있다. ‘고져스한 쉐입을 이룬 서클 속 알루미늄의 샤이니함이 살아있는 17인치 블랙 럭셔리 알로이 휠, 잇걸의 엣지와 시크를 지닌 페미닌하면서도 트렌디한 레드 스페셜 패키지 인테리어, 모던함과 럭셔리함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엘레강스한 에어커튼홀’. 여기서 ‘고져스’는 ‘멋진’을 뜻하는 ‘gorgeous’, ‘쉐입’은 ‘형태’를 뜻하는 ‘shape’, ‘샤이니함’은 ‘빛나는’을 뜻하는 ‘shiny’, ‘럭셔리’는 ‘호화로운’을 뜻하는 ‘luxury’, ‘잇걸’은 ‘매력적인 젊은 여자’를 뜻하는 ‘it girl’, ‘시크’는 ‘세련되고 멋있다’는 뜻의 ‘chic’, ‘페미닌하다’는 ‘여성스러운’을 뜻하는 ‘feminine’, ‘트렌디’는 ‘최신 유행의’를 뜻하는 ‘trendy’, ‘모던함’은 ‘현대적인’을 뜻하는 ‘modern’, ‘엘레강스’는 ‘우아, 고상’을 뜻하는 ‘elegance’를 차용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말이 있는데도 우리말을 쓰지 않고 영어를 차용해 쓰는 이유는 ‘럭셔리하다’, ‘엘레강스하다’와 같은 영어를 사용하면 우리말을 사용할 때보다 더 고급스럽고 세련돼 보인다는 느낌을 주기 위함인데, 문제는 이렇게 외국어를 남용하다 보면 광고 문구처럼 우리말은 조사와 어미 이외에는 모두 사라지고 외국어만 남게 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외국어를 사용하면 왠지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 뿐이니 앞으로 외국어를 남용하지 말고 우리말을 사용하자.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향년 방년
지난 주말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이없는 자막 오류가 있었다. 한 여가수가 생년월일을 적는 장면에 그만 ‘향년 19세’라는 자막을 내보낸 것이다. 여러 시청자들이 잘못을 지적하자 담당자는 ‘방년’을 쓰려다 실수를 했다며 사과하였다.
자주 쓰지 않는 한자어들은 정확한 뜻을 몰라 혼동하기 쉽다. ‘누릴 향(享)’ 자를 쓰는 ‘향년(享年)’은 국어사전에 ‘한 평생 살아 누린 나이’로 풀이되어 있는데,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를 가리킨다. ‘선생은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처럼 쓴다.
‘꽃다울 방(芳) 자를 쓰는 ‘방년’은 꽃이 화사하게 피는 좋은 때라는 뜻으로 한창 젊은 나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보통은 스무 살을 전후한 나이를 가리킨다. ‘방년 18세 아가씨’처럼 여성에게 주로 쓰지만, 남성에게 쓸 수 없는 말은 아니다. 북한 사전을 포함한 여러 국어사전들에서 여성에게만 쓰는 말이라는 제약이 없으며, 많지는 않으나 실제로 남성에게도 사용된 예들이 있다. ‘김00 군은 방년 20세의 소년이나...’, ‘방년 28세의 배우 부부 이00 씨와 한00 여사’ 등의 용례를 과거 신문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묘령(妙齡)은 ‘방년’과 비슷하지만 스물 안팎의 젊은 여성의 나이만 가리킨다. 남성이나 나이가 많은 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따라서 ‘묘령의 여인’이라는 표현은 가능하지만 ‘묘령의 노인’이니 ‘묘령의 40대 여성’이니 하는 말은 잘못이다. 그런데도 이런 표현이 심심찮게 쓰이는 것은 ‘묘령’을 ‘묘하다’는 말에 끌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남자 나이 스무 살을 이르는 말은 ‘약관(弱冠)’이다. ‘예기’에 나온 말로 스무 살이 갓을 쓰는, 곧 관례를 올리는 나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형편이 폐다’
지난주에는 ‘(빗방울이) 듣다’처럼 점점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낱말 두어 개를 보았다. 이번 주에는 그 연장으로 준말 두어 개를 보고자 한다.
‘쌔고 쌨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흔한 경우를 가리켜 자주 쓰는 말이다. 이 ‘쌔다’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말은 ‘쌓이다’의 준말이다. 그런데 ‘쌓이다’에 비하여 ‘쌔다’는 거의 쓰임이 없는 말로서 ‘쌔고 쌔다’와 같은 관용적인 형식으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눈이 ‘쌓여 있다’라고 하지 ‘쌔어 있다’라고는 거의 하지 않는 것이다. ‘쌔다’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것도 그만큼 이 말의 활동 영역이 좁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폐다’는 사정이 더 심각한 예이다. 이 말은 ‘펴다’의 피동형인 ‘펴이다’의 준말이다. 대표적으로 ‘형편이 폤다’와 같은 용례를 들 수 있다. 구김살이 펴지듯이 형편이 순조롭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 준말 ‘폐다’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경우 흔히 쓰는 말은 ‘피다’이다. 즉 ‘형편이 폈다’와 같이 말한다. 꽃이 피어나듯이 살림살이도 피어나는 것이다. ‘형편이 [펟따]’와 같이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폤다’가 아니라 ‘폈다’가 ‘며느리>메느리’처럼 모음이 단순화한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형편이 폐다’라는 표현은 앞으로 다시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놓이다’의 준말 ‘뇌다’, ‘까이다’의 준말 ‘깨다’, ‘더럽히다’의 준말 ‘더레다’ 등도 비슷한 처지의 말들이다. 우리말에는 생명력을 거의 잃고 국어사전 한구석에 잠들어 있는 이런 준말들이 적잖이 있다. 이 말들이 새로 힘을 얻기는 어렵겠지만 소중한 우리말이기에 되새겨 보았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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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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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휜구름 - 천상병
저 삼각형의 조그마한 구름이
유유히 하늘을 떠다닌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을까?
아주 천천히 흐르는 저것에는
스쳐 지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바람은 구름의 연인이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곳으로,
구름은 어김없이 간다.
희디흰 구름이여!
어느 계절이든지
구름은 전연 상관 않는다.
오늘이 내일이 되듯이
구름은 유유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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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 정지용
비ㅅ방울 나리다 누뤼알로 구을러
한 밤중 잉크빛 바다를 건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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付託(부탁) - 김수영
자라나는 죽순모양으로
부탁만이 늘어간다
귀치않은 부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갖다주는 것으로 연명을 하고 보니
거절할 수도 없는
캄캄한 사무실 한복판에서
나는 눈이 먼 암소나 다름없이 선량한데
이 공간의 넓이를 가리키면서
한꺼번에 구겨지자 없어지는 벼락과 천둥
이것이 또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는지
여미지 못하는 생각 위에
여밀 수 없는 부탁이여
차라리 죽순같이 자라는대로 맡겨두련다
일찍이 현실의 출발을 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며
오늘밤도 보아야 할 죽순의 거치러운
꿈은
완전히 무시를 당하고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부끄러움이 없는
부끄러움을 더한층 뜻있게 하기 위하여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만만치 않은 부탁
내가 너의 머리 위에
너를 대신하여
벼락과 천둥을 때리는 날까지
터전이 없으면 나의 머리 위에라도
잠시 이고 다니며 길러야 할
너는 불행하기 짝이없는 죽순이다
유일한 시간을 연상시키는
만만하지 않은 부탁과 죽순이 자라노니라.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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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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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지몽(胡蝶之夢)
胡:오랑캐, 어찌 호. 蝶:나비 접.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장주지몽(莊周之夢) [출전] ≪莊子≫ 〈齊物篇〉
나비가 된 꿈이란 뜻. 곧
① 물아 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물아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심경.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④ 꿈.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이름은 주(周), B.C. 365~290]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物)의 시비(是非), 선악(善惡), 진위(眞僞), 미추(美醜), 빈부(貧富), 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그 나비인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장자(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주]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요즈음에도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음.
유현 : 사물(事物)의 이치(理致) 또는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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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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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4. 갈팡질팡 과도정권 (1/2)
허정이란 인물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는 세평이 나돌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결단력도 남달랐다.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그 좋은 예가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킨 일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내놓고 경무대를 떠나는 날, 서울 시민들은 연도에 서서 박수로써 전송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거처할 이화장 담벽에 내걸기도 했다. 얼마나 착한 한국의 민초(民草)들인가! 12년 동안 독재를 했지만 이제 권좌에서 물러났으니 <독립 건국의 아버지>로서의 여생이나마 편안히 모시도록 하자는 것이 갸륵하기 이를 데 없는 민초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이 권력을 미끼로 법을 어겼으니 설혹 독립 건국에 공로가 컸다 하더라도 혁명법정에 세워야 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 젊은 학생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 고려대학교의 고성민(高盛敏) 등 10명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뿐만 아니라 발췌 개헌 당시와 4사 5입 개헌 당시의 전 150여 명을 서울 지방검찰청에 고발을 했다. 이것이 여론에 불을 지르는 결과가 되었다. <이승만을 혁명법정에 세워라!>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아우성을쳤다. 이런 여론의 열기로 보아서 이승만을 혁명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사태는 점차 험악해져만 갔다. 허정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가 아무리 과도정권의 수반이라 하더라도 그의 힘으로도 이승만의 혁명재판 회부는 도저히 막아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론은 고조되어 있었다. 그럴 때인데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것은 여간한 그런 행위는 반혁명으로 몰려 돌을 맞아 죽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과에서 오는 피해 따위는 일체 고려하지 않고 결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승만 부처가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경위는 이러했다.
5월 26일이던가? 이날 허정은 정동의 미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망중한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와 진전돼 가고 있는 정국의 앞날에 대해서 상호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ㅅ였다. 5월 26일, 이날에는 주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도 자리를 같이했다.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고 있던 중 미국대사가,
"장군, 나 미스터 허하고 단 둘이 대화 할 시간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한국 사람 같으면 셋이서 얘기하다가 한 사람더러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도 <이럴 수가?> 하고 못내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시 미국인이었다. 사성 장군인 매그루더는 추호도 섭섭해 하는 빛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매카나기는 불쑥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마담 리가 우리 집사람에게 몇 번 전화를 걸기도 했고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용건이 무엇이냐 하면 요즈음 이 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하와이로 휴양을 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미스터 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고 책임자로 법정에 서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여간 조바심을 일으키고 있던 처지가 아니었다. 기실 이승만을 법정에 끌어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여론도 없지는 않았다. 경찰의 총탄에 희생된 학생의 유가족들이 누구보다도 그렇게 하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랬으므로 허정이 조바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정은 이승만의 고굉지신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인간의 정리로서 그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처지였으므로 허정은 두말 않고 찬성했다.
"그것 참 잘 됐습니다. 노경에 큰일을 당하셨으니 충격인들 오죽 하겠습니까? 곧 이렇게 찬성을 하고 난 다음 허정은,
"그런데 대사, 이 박사를 어떤 방법으로 출국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젠데 대사께서 미국 군용기를 주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군용기 주선은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항공편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와이의 한국인 교포들이 이미 전세 비행기를 얻어 놓고 있으니 그걸 이용하면 될 줄로 압니다."
하와이의 한국인 교포들이 이승만의 망명을 위해서 이미 전세 비행기까지 얻어 놓고 있단다. 그렇다면 허정으로서는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승만의 출국에 대해서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서 정치적 결단만 내리고 여권만 내주면 되는 정부 수반실로 돌아온 허정은 지체없이 외무차관 이수영(李壽榮)을 불렀다.
"이 박사께서 하와이에 가셔서 요양을 하고 싶어한다고 들었는데 이화장으로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오시오."
이화장으로 달려갔던 이수영은 곧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럼, 서둘러 여권을 만들어 드리도록 하시오.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이 차관이 직접 여권을 작성토록 하십시오."
이승만 부처의 여권은 이틀 만에 만들어져 극 비밀리에 그들 부처에게 전달되었다. 하와이 교포들이 전세낸 CAT 항공기가 이날 김포공항으로 날아와 나래를 접고 대기하고 있었다. 김포공항까지 모셔서 비행기에 오르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허정은 행여 이승만이 해외로 도망치지 않을까 해서 이화장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끝에 허정은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 어려운 청 한 가지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려운 청이라니요? 뭔가요?"
"이화장에서 김포공항까지 이 박사 부처를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탁하는 것입니다만 MP를 차출해서 좀 경호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망명은 자칫 정치문제화할 염려도 없지 않은데, 유엔군이 그런 정치성을 띤 문제에 개입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매그루더가 한국의 내정문제에 끼어들려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허정은 한국군의 한 고위 장성을 신교동 집으로 불렀다. 그 장성은 이승만의 총애를 입어 별을 달았기에 어쩌면 허정의 부탁을 쾌히 승낙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그 장군은 펄쩍 뛰었다.
"헌병을 동원해서 경호를 해달란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게 하면 지금 이 박사께서 망명길에 오른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얘기인즉 옳았다. 그러나 허정은 섭섭한 마음이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더니 인간의 추한 속성이 슬프기조차 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5월 29일 새벽, 허정은 외무차관 이수영을 이화장으로 보냈다. 이승만 부처를 김포공항으로 모시고 나오라 해서였다. 그런 다음 그는 김포공항으로 직행했다. 이른 새벽이라 공항 숙직 직원들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허정은 친히 그들을 깨워 이승만의 출국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한편, 이화장으로 간 외무차관 이수영은 서둘러 이승만 부처을 차에 오르도록 했다. 눈에도 띄지 않게 감쪽같이 이화장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것은 한참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이수영은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니 이럴 수가?)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깃발을 나부끼며 검은 지프가 뒤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기자가 이화장을 감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밤을 새우면서 감시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야 극비밀리에 진행한 이승만의 망명을 눈치챌리가 없었다. 이건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승만에게 호되게 탄압을 받았던 않을까 해서 늘 기자를 파견, 이화장을 감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이승만의 몰골은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얼굴은 까칠했고 중절모자를 술 취한 사람 모양 머리에 걸치고 있었다. 먼저 공항에 나와 있던 허정을 보자, 이승만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바쁜데 왜 여기까지......."
이승만은 슬픔이 미려 올라오는지 채 말끝을 맺지도 못했다. 그때 뒤따라온 경향신문 기자가 지프에서 내려 이승만 곁으로 다가왔다.
"이 박사께서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출국하시게 되었습니까?"
"나 휴양 좀 하려구 해. 오래 있지는..."
"출국에 즈음해서 소감을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가 남편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한국 국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가 다시 뭐라 물으려는 눈치를 보이자, 이번에는 허정이 가로막고 나섰다.
"선생님, 날씨가 찹니다. 어서 비행기에 오르시죠."
"음."
이승만이 트랩으로 올라가자, 프란체스카가 분주히 그 뒤를 따랐다. 이어서 허정이 따라 올라갔다.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있으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권한행사>를 한 것은 오직 이 한 가지뿐이었다. 그의 정치적 결단이 없었던들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필자는 허정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는 세평이 나돌았다는 것도 덧붙여서 언급했다. 한데, 역시 허정은 세평과 마찬가지로 행정관 이상의 역량은 없었던지 과도정권을 이끌어가면서 발휘한 그의 지도역량은 그리 탐탁한 것이 못 되었다. 허정, 그는 누구인가? 대통령 권한 대행인 군부부터 휘어잡고 손아귀에 넣고 있어야 옳았다. 그래 가지고 군부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판단에 따라 어떤 조치를 내렸어야 옳았다. 그것을 군부문제는 일체 국방장관인 이종찬한테 맡겨 놓고 있었으니 여기서 들썩, 저기서 들썩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6월 8일에 있었던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만 해도 그렇다. 이 회의의 내용에 대해서 그는 참모총장인 최영희나 국방장관인 이종찬에게 보고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는 군부에서 국토방위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호도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허정은 그냥 내 버려두고 말았다. 이러니 군부의 위계질서가 유지될 6월 8일의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이날의 회의는 오후 1시에 열렸다. 최영희가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해서 연 최초의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였다. 주요 지휘관 회의라는 명칭이 말해 주듯이 소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했던 회의였다. 회의는 먼저 국방장관 이종찬의 인사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각급 지휘관은 명령계통을 엄수하고 융화단결해서 국토방위에 매진하고 있음을 치하한다."
대공사찰과 임전태세 강화에 대한 문제가 토의되고, 이어서 인사관리의 쇄신문제가 토의되려는 찰나였다.
"오늘 이 회의에서 어떤 문제를 토의하려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 간에 가장 시급하고 긴급을 요하는 문제는 정군문제입니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박정희는 자유당 치하에서 저질러진 군의 부패상을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가면서 규탄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 책임을 마땅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지휘관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것도 없이 4.19 혁명정신에 입각해서 스스로 물러가도록해야만 합니다. 부정부패에 대한 척결 없이 그 어떤 문제를 협의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할 뿐입니다" 하고 정군문제를 들고 나왔다.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회의장 분위기는 긴장이 쌓이고 싸늘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어쩌자고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그런 폭탄선언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는 1개월 전에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내 <군의 부정선거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했었다. 송요찬이 이 편지에 충격을 받고 물러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하여간에 송요찬이 물러난 것은 군의 부정선거에 전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라 간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박정희는 또 정군문제를 들고 나오더란 말인가? 이유를 유추할 수가 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군파 소장 장교들에 대한 계속적인 고무 격려였다. 김종필, 김형욱, 등 정군파 장교들은 5월 19일 송요찬의 배려로 전원 석방되었는데, 그들이 그 시점에서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박정희는 생각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자면 그들은 고무 격려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장성들에대한 박정희의 혐오감이었다. 자유당 치하의 장성들 가운데에는 정치권력에 아첨해서 자신의 영달을 도모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 권력자한테 줄을 내지 못한 자는 금력으로 자신의 영달을 도모하려 들었다. 장성 진급심사가 있을 밑천을 들였으면 들인 만큼의 밑천을 뽑아야만 했다. 그러니 부정부패는 더욱더 심화돼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국가에 대한 공로 또는 탁월한 실력으로 진급을 하려 들지 않고 정치 권력에 아첨하거나 금력으로 진급을 하려 들었으니 그것이 어찌 망국적 현상이라 하지 않겠는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중국의 장개석이 어찌해서 대만으로 쫓겨나야 했던가? 군대가 썩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러한 사실들을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썩은 놈들, 썩은 놈들!) 그는 그 썩은 놈들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다졌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굉장히 청빈한 생활을 했다.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고 땔감, 끼니 걱정이 늘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한다. 하긴 박정희로서는 부정을 할래야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소령 시절에군사법정에 섰었고, 무기형을 받았다는 경력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만일 잘못 삐꺼덕 하게 되는 날에는 그의 운명은 어떻게 뒤바뀌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간에 청빈을 고수하다 보면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정군을 고집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셋째는 <5.26 정치파동> 때에 이미 군사 정군운동을 군사 쿠데타로 확대시킬 의도에서 끈질기게 정군문제를 물고 늘어졌던 게 아니냐 하는 추리다. 1960년 6월, 이 시점까지 박정희는 정군파 장교들하고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맞대고 정군문제를 위시해서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 논의한 바 없지만 정군파의 김종필하고는 빈번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김종필이 정군운동을 일으킨 그 무렵,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이 논의되고 있지 않았느냐 하는 추리다. 그래서 이 정군운동을 군사 쿠데타로 확대 발전시키는 방법으로써 그토록 끈질기게 정군문제를 물고 늘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다.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로는 보지 않고 삐딱하게만 해석하려 드느냐고 힐난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해석하게 마련인 것을 어쩌랴.
그건 그렇고, 박정희가 정군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던 것은 제2군단장 육군 중장 김형일이었다.
"박 장군, 도대체 장군은 무슨 속셈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나서는 거요! 지금이 어떤 때요? 사회가 혼란하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부화뇌동해야 옳단 말이오? 설혹 정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사회와 정치가 안정된 다음에 그런 주장을 해도 충분할 게 아니오?"
김형일은 다분히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하자, 국방장관인 이종찬이 제동을 걸었다.
"회의 주제에서 벗어난 논쟁은 그 정도로 해두고 어서 회의 주제를 토의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래서 이날의 주요 지휘관 회의는 더 이상의 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한데, 문제는 과도정부의 수반인 허정의 애매모호한 태도였다. 그는 국방장관 이종찬을 통해서 주요 지휘관 회의에 대한보고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과도정부 수반답게 군부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정군문제를 가지고 다시는 논란하지 않도록 한다든가, 아니면 아예 주어진 권한을 행사해서 정군에 손을 댄다든가 어느 쪽으로든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그저 국방장관이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방치한 것이 그의 일생을 두고 후회할 결과를 빚어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뒤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허정은 군부의 동요를 막는다고 7월 17일 제헌절(制憲節)을 맞아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모아 <정치에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다>라는 선서를 시킨 것이 군부에 대한 유일한 조치였다.
허정이 과도내각을 이끌면서 애매모호하게 처리한 것은 비단 군부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과도내각 뭐라고 천명했던가? <이번 사태를 통해 나타나는 국민의 불만과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여 부정, 불법, 부패, 혼란 등의 적폐를 일소하고 민심을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의욕으로 전환시키도록 하겠다>고 공약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부정축재자 처리 문제>에 있어서도 과감해야만 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
이승만이 하야하고 나자 <부정선거> 규탄의 구호는 어느덧 부정축재자 문제로 모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과도정권은 이 문제에 심각하게 달라 붙었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허정은 이 문제에 심각하게 달라붙지를 않았다. 왜 그랬을까? 허정은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일에 있어서 미온적이었던 것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고 하지만 무슨 법으로 처벌하란 말인가? 또 설혹 그들을 처벌한다 해도 부정축재자를 가려내기가 그렇게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이게 납득할 수 있는 소린가? 법이 없었으면 법을 만들면 되었을 것이고 부정축재자를 가려내기가 어려웠으면 공권력을 여기에 총집중시켰으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부정축재자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살펴보기 전에 자유당 치하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부정축재를 했는지 그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자유당 치하의 부정축재는 군사정권에서 제4공화국에 이르는 사이에 벌어졌던 달랐다. 권력형 부정축재는 대형화되어 있는 데 반해 자유당 치하의 부정축재는 <새발의 피> 같은 것이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는 유아기였다고나 할까? 부정축재의 방법은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부정한 방법에 의한 불하(拂下)였다.귀속재산이라 함은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차지하고 있던 재산을 말한다. 토지를 비롯해서 빌딩, 개인주택, 공장 등 재산이 적지 않았다. 이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제값만 받고 불하를 했어도 몇 해동안 국민한테 세금 한푼 거두어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나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지를 쥐고 있는 사람이, 빌딩이나 개인주택 등은 큰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이원화해서 불하를 받기도 하고 불하를 해주기도 했다. 경찰서장쯤만 되면 대지 100평에 건평 50평 정도의 개인주택을 불하받기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정당한값을 받고 불하를 해주었다 해도 <특혜>라고 해서 아우성을 칠 판인데, 그것을 시가의 10분의 1도 못 되는 헐값으로 팔아 넘겼으니 어찌 국민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귀속재산을 이원화하지 말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공매하도록 하라!> 하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는 놈들은 숫제 <어느 개가 짖고 있느냐?> 하는 식이었다. 불하하는 것도 좋다고 치자. 불하를 받는 작자들은 불하대금을 어떤 식으로 마련했느냐 하면 전적으로 은행융자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 호주머니돈은 10원 한장 들이지 않고 엄청난 치부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은행에서 융자를 받은 그 돈은 누구의 돈인가? 그것은 바로 서민들의 돈이었던 것이다. 서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은행에 예금을 하면 그 돈을 특정인에게 대부를 해주어 그놈들의 치부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치부 방법은 군사정권하에서도 원용되었다. 이때는 불하받을 귀속재산이 없으니까, 주로 국유지 불하에 원용되었던 것이다. 죽일 놈들 같으니! 방법이었다. ICA란 미국의 국제 협조처(國際協調處)로서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신생독립국가들에 대해서 막대한 금액의 원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이것을 ICA 원조 자금이라고 한다. 미국은 이 ICA 자금으로 반드시 필요한 물건을 미국에서 사도록 했었다. 정부는 이 ICA 자금으로 미국에서 물건을 사오면 이것을 민간에 불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정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물품을 구입할 때 비싸게 구입한 것처럼 해서 우수리 돈을 먹기도 했고, 이것을 민간인에게 불하할 때도 헐값으로 불하해서 불하를 받은 사람이 비싼 값으로 되팔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이 불하대금을 기업이나 개인한테 대출해 등 어지간한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치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셋째로는 세금포탈을 들 수가 있다. 이 방법은 지금도 근절되지 못하고 원용되고 있는데 치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세금포탈도 상당히 기여를 했다. 자유당 치하 때, 시정에는 <시바 시바>라는 국적불명의 낱말이 유행되고 있었는데, 이 말은 은밀히 청탁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권력을 잡고 있는 놈이나 그 권력에 아부해서 사리나 취하고 있던 놈들이나 모조리 도둑놈뿐이었다. 불쌍한 것은 그 도둑놈들 무리에 끼지 못한 국민들이었다. 4.19로 이승만의 권세가 땅에 떨어지자. <과도정권은 부정축재자를 색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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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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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1부 갈바 황제(재위:서기 68년 6월 18일~69년 1월 15일)
비텔리우스, 황제를 자칭하다
특히 격동기에는 정보전달 속도가 사태 진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봉화로 요새와 요새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적의 내습 같은 단순한 정보전달에 한정되고, 게다가 최전방에서만 사용된다. 드넓은 제국 안에서는 역마를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가도에는 10킬로미터 내지 15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고, 역참마다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을 이용한 경우의 정보전달 속도는 어느 정도였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지만, 여기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역사책의 공통된 기록은 기원전 4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여 남프랑스의 마르세유까지 갔을 때의 기록뿐이다. 이때 카이사르는 짐을 싣지 않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하루에 100밀리아(마일)가 넘는 거리를 소화했다. 1로마마일은 1,480미터니까, 100밀리아라면 약 15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당시의 고속도로인 로마 가도를 짐도 없이 질주했을 뿐이지만, 최고 사령관 카이사르에게는 참모에서부터 호위병인 게르만 기병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부하가 따르고 있었다. 역참마다 이 많은 사람이 갈아탈 말이 준비되어 있을 리는 없으니까, 같은 말을 타고 하루에 150킬로미터를 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2천 년에 말을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열흘 이상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달릴 수도 없었을 테니, 따라서 150킬로미터는 낮에만 달린 거리였을 것이다. 이에 비해 서기 69년에 게르마니아 군단이 황제에게 충성을 거부했다는 중대 뉴스를 가지고 로마로 달려간 전령은, 카이사르와는 달리 역참마다 말을 갈아타는 체제를 활용할 수 있었겠지만, 야간에 달릴 수 없는 것은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마르세이유까지 말을 달린 것이 5월인 데 비해 지금은 계절이 1월이다. 오늘날의 독일 마인츠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를 향해 남하한다고는 하지만, 한겨울의 알프스를 넘어야 하는 절대적인 불리함을 셈에 넣어야 한다. 따라서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거리는 카이사르와 같은 150킬로미터 정도가 아니었을까. 오늘날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서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마인츠는, 로마 시대에는 프랑크푸르트가 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중요한 군단기지인 모곤티아쿰이었다. 여기서 로마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될까. 로마 시대의 가도가 전부 확인되어 있지 않은 현재로서는 정확한 거리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쾰른에서 로마까지 행군하는 데 67일 결렸다는 사실은 사료로 입증되어 있다. 로마 군단은 시속 5킬로미터 정도로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행군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거리는 25킬로미터 내지 30킬로미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속도로 67일 걸렸다니까, 대충 계산하면 1800킬로미터 안팎이다. 쾰른에서 마인츠까지의 거리를 200킬로미터로 보고, 그것을 뺀 1,600킬로미터를 하루에 150킬로미터씩 소화했다면, 마인츠에서 로마까지 최소한 열흘걸렸다는 예기가 된다. 그런데 그 숫자도 상상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인츠는 라인 강 방위군의 최대 거점인 만큼, 여기서 제국의 수도 로마까지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 크게 보아도 두 개의 길이 있다. 이 두 개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 가도, 즉 고속도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길은 라인 강 연안의 마인츠에서 서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모젤 강변의 주요 기지인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의 트리어)으로 간 다음,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베손티오(오늘날의 보장송)와 레만 호를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의 아우구스타 프라이토리아(오늘날의 아오스타)를 거쳐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오늘날의 토리노)에 이른다. 토리노에서 게누아(오늘날의 제노바)까지는 물론 가도로 이어져 있고, 게누아에 오면 로마까지는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곧장 남하하기만 하면 된다. 또 하나는 마인츠에서 라인 강 상류의 군단기지인 아르겐토라툼(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으로 가는 길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라인 강을 따라 계속 올라가 보덴호에 이르면, 오늘날의 스위스를 가로질러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코모 호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간 다음, 코모에서 밀라노와 제노바를 지나 로마에 이른다. 마인츠 군단기지를 떠난 전령이 어느 길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군단병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중대 사건은 적어도 1월 10일께에는 수도에 전해진 게 분명하다. 그 무렵부터 15일까지 며칠사이에 정국이 급변해가기 때문이다.
제국의 후방 부대라 해도 좋은 이베리아 반도의 1개 군단이 현직 황제였던 네로에게 '노'(No)라고 말한 반 년 전과는 사정이 다르다. 제국의 최전방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라인 강 연안의 7개 군단이 현직 황제인 갈바에게 '노'라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불신임을 받은 것은 갈바만이 아니었다. 유권자이기도 한 이들 군단병에게 불신임을 받은 것은 갈바를 승인한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마인츠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군단병들이 1월 1일 결의한 것은 갈바에 대한 충성 거부만이 아니었다. 거부의 뜻을 수도 로마에 전달한 문서에는, 갈바를 대신할 '제일인자'(실제로는 황제)를 선정하는 일을 원로원에 맡기는 것이 군단병들의 뜻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갈바만 불신임을 받았을 뿐, 원로원은 아직 불신임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뒤 각자 막사로 돌아간 병사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로마군 통수권자인 황제에 대해 충성 서약을 거부한 행위는 요즘 같으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도 남을 만큼 중대한 규율 위반이었다. 그것을 결행한 병사들이 흥분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흥분 상태는 언제나 불안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튿날인 1월 2일, 다시 모인 군단병들은 갈바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한다는 뜻은 바꾸지 않았지만, 갈바의 후임자 선정을 원로원에 맡긴다는 항목을 철회하고, 후임 황제로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또다시 전령이 이 결의문을 가지고 수도 로마로 떠났다. 왜 갈바는 싫은데 비텔리우스는 좋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타키투스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역시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갈바가 지휘한 에스파냐의 1개 군단 병사들도 로마군 통수권자였던 네로 황제를 제거하고 그 대신 갈바를 옹립했지만, 그때는 갈리아인이면서도 로마 제국에 대한 우국충정으로 네로에 반기를 든 빈덱스이 호소에 갈바가 응했고, 군단병들은 거기에 동의하는 의사표시나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에스파냐 주둔군이 현직 황제 네로를 불신임한 것은 그들의 직속상관인 갈바가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결과였다. 이와는 반대로 라인 강 연안의 군단병들이 현직 황제 갈바에게 충성을 거부한 것은 일반 병사들이 주도권을 발휘한 결과였다. 사령관도 군단장도 대대장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요즘 군대로 치면 하사관 역할을 맡고 있던 백인대장들조차 일반 병사들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이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기네 사령관을 추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령관에서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병이 통수군자에 대한 충성 거부의 공범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령관이 루푸스였다면, 그들은 진심으로 루푸스를 황제로 추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푸스는 해임되어 본국으로 소환된 상태였다. 루푸스에 대한 갈바의 이런 처사도 병사들의 마음 속에 갈바에 대한 반감을 심어준 요인이 아니었을까. 제국의 최전방인 라인 강 방위를 맡고 있는 '게르마니아 군단'은 라인 강 상류와 하류로 담당 구역이 나뉘어 있다. 상류 지역을 지키는 것은 '고지 게르마니아군', 하류 지역을 지키는 것은 '저지 게르마니아군'이라고 불렸다. 양군 모두 4개 군단으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서기 69년 1월 현재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은 갈바가 임명한 플라쿠스, 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은 갈바가 임명한 플라쿠스,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도 역시 갈바가 임명한 비텔리우스가 맡고 있었다. 고령에다 소극적이고 인망도 없었던 플라쿠스는 병사들에게도 부적격자로 보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비텔리우스밖에 없다. 비텔리우스는 54세니까 나이도 적당하고,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특별히 한 일이 없으니까 판단 자료가 풍부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점수가 깎일 이유도 없었다. 다만 비텔리우스는 아버지가 '티베리우스 문하'의 걸물로 두각을 나타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협력자로 중용된 인물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 쉬운 병사들은 그만한 인물의 아들이라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 게 아닐까. 어쨌든 남국 에스파냐에서 안전하고 편안한 병영생활을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로마 황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면,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최전방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한테는 더 큰 권리가 있을 거라고 믿어버린 병사들에게는 비텔리우스가 아니라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는 하늘에서 넝쿨째 굴러떨어진 이 호박을 이게 웬떡이냐 하고 냉큼 받아먹었다. 로마인들이 백년 동안 잊고 있었던 내전의 먹구름이 또다시 제국의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갈바 살해
상상하건데, 마인츠에서 이루어진 '라인 군단'의 결의는 불과 하룻밤 사이에 더욱 강력한 내용으로 바뀌었지만, 두 차례의 결의가 수도 로마에 전해진 시점에는 최소한 하루나 이틀, 어쩌면 사흘의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사태에 대한 갈바의 대책이 1월 1일의 결의만을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월 1일의 결의에는 갈바 황제에 대한 충성은 거부하되 갈바를 대신할 황제를 선정하는 일은 원로원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갈바는 원로원의 지지를 재확인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생각했다. 원로원은 기득권 세력의 아성인 만큼, 본능적으로 내란을 싫어한다. 내란은 최고 권력자의 후계자가 불투명할 때 일어나기 쉽다. 갈바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갓 서른 살이 된 피소를 양자로 맞아들여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피소는 갈바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오는 명문 귀족 출신이다. 철학자 세네카도 연루된 저 유명한 '피소 음모'가 탄로나는 바람에 피소 집안의 남자들은 어린애까지 모두 추방되었지만, 네로가 죽은 뒤 귀국했다. 피소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전방에 근무하는 군단병들의 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명문 귀족을 좋아하고 네로를 싫어하는 원로원의 호의를 얻는 것만 염두에 둔 조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도 이어받지 않았고 군단 경험도 전혀 없는 상류층 출신의 '도련님'을 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1월 1일과 2일의 결의가 둘 다 동시에 로마에 도착했다면 갈바의 후계자 선택은 달라졌을까. 비텔리우스가 일어났다는 것은 그를 옹립한 게르마니아 군단이 황제와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군사행동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런 사태를 피할 수 있는 길은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기대를 걸 만한 인물을 공동 황제로 발탁하는 것뿐이다. 속주를 통치한 경험도 풍부하고 나이도 젊은 오토나, 게프마니아 군단 병사들에게 인망이 있는 루푸스 같은 인물을 선택했다면 재난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한 것도 원래는 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사정을 납득하고 칼을 거두면, 벌써 황제가 된 양 우쭐대던 비텔리우스의 기반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갈바가 군단병들의 두 가지 결의를 동시에 알았다 해도 그의 후계자 지명은 바뀌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을 피하는 법이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재능이나 자질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기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아니겠지만. 이리하여 갈바는 또다시 인사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때의 실패는 이제까지 갈바를 지지해온 오토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의 결의는 갈바만이 아니라 원로원도 알고 있었으니까, 원로원 의 원인 오토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갈바는 벌써 72세니까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후계자로 지명한 피소는 30세의 젊은이다. 그리고 갈바에 반대하여 일어난 비텔리우스는 54세다. 37세인 오토가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한테는 영영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 근위병들은 반 년 동안 모신 갈바에게 벌써 실망하고 있었다. 젊고 활기에 넘치는데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격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오토가 그들을 회유하기는 식은죽 먹기였다. 게르마니아 군단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할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원로원은 무시해도 좋았다. 갈바가 수도에 들어왔을 때는 열렬히 환영했던 일반 시민들도 모두 갈바에게 등을 돌렸고, 이제는 네로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까지 들리게 되었다. 황제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은 불과 사나흘 만에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결행에 옮겨졌다. 서기 69년 1월 15일, 암살자들은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에서 가마에 타고 있던 갈바 황제를 끌어내려 살해했다. 갈바와 함께 보름 전에 집정관에 취임한 비니우스도 계획대로 살해되었다. 가엾은 피소도 갈바의 양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수도 로마의 교외에 있는 근위대 막사에서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오토는, 결과를 알자마자 "황제 만세!"라는 근위병들의 환호를 받으며 곧장 포로 로마노에 있는 원로원으로 달려갔다. 이제 기정 사실을 사후 승인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어진 원로원 의원들은 오토를 '제일인자'로 승인했다.
제2부 오토 황제(재위:서기 69년 1월 15일~4월 15일)
최고 권력자의 교체는 그리 많은 피도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도 그 시대의 정보전달 속도가 사태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킨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인츠에서 로마까지 정보가 전달되는 데 열흘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토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마인츠에 있는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안 것은 1월 말께였을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규모가 큰 군단의 동향을 좌우할 수 있는 중대사인 만큼, 오토도 서둘러 그 정보를 전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군단이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기로 결의한 것은 1월 2일이었고, 군단병들에게 이런 결의까지 하게 만든 장본인인 갈바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 것은 1월 말이었다. 그 사이는 약 한 달. 그 한 달 사이에 그들이 안 것은 게르마니아 군단 전체가 로마로 진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7개 군단의 4만 2천 병력에, 그것과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사행동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는 것은 쉽지 않다.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아직 낯도 익지 않은 병사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기고만장해진 비텔리우스는,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가서 황제로 군림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염두에 없었다. 새 황제 오토는 죽은 갈바가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건 여담이지만, 로마는 공화정 시대만이 아니라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전방에 파견한 사령관이나 속주 총독, 원주민을 중심으로 한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나 퇴역병을 이주시킨 식민도시(콜로니아)에 후세의 제국주의 국가에 비하면 놀랄 만큼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마키아벨리는 이 방식이 책임체제 확립에 도움이 된다고 예찬했지만, 이것이 로마의 전통이 된 까닭은 단순히 책임체제 확립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중앙정부에 일일이 훈령을 요청할 필요가 없으니까 전방 사령관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도 있고, 각자의 재능도 충분히 살릴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티베리우스 황제의 집착이 보여주듯, 이런 책임체제가 확립되지 않으면 그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로마인이 현지에 그렇게 많은 재량권을 준 것은 그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가능했던 정보전달 속도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유럽 안에서도 열흘, 제국 동방에 자리잡고 있는 중근동과 연락을 주고받으려면 한 달은 족히 걸렸다. 그렇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방식 덕택에 제국 각지의 개별적인 책임체제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각 책임자의 행동도 활기차게 전개된 것은 분명하다.
서기 69년 1월로 다시 돌아가보자.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이 한 달은, 정보전달의 지체가 사태의 주요 원인이 된 대표적인 기간이 아닐까 싶다. '길이 어긋나다'는 표현을 쓰고 싶어질 정도다. 길이 어긋나서 오해나 충돌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면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에서 라인 강 방위선 다음으로 중요한 전선은 도나우 강 일대와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이었다. 이 '동방 전선'의 책임자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였다. 무키아누스는 4개 군단,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두 사령관이 갈바 황제에게 보낸 충성 서약은 아직 지중해를 지나고 있었지만, 이것을 가지고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그리스의 코린트에 들렀다가, 갈바가 죽고 오토가 즉위하고 비텔리우스가 궐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티투스는 이 세가지 정보를 동시에 입수한 모양이다. 당시 30세였던 티투스는 한동안 망설인 것 같다. 이대로 로마까지 가서, 제위에 오른 오토에게 시리아와 유대에 주둔해 있는 7개 군단의 충성 서약을 전달할 것이다. 아니면 충성 서약은 사절을 시켜 오토에게 보내고 자기는 오리엔트로 돌아갈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인 티투스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오토에게 충성 서약을 전달하는 것은 오토에 대한 '동방 군단'의 적극적 지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사절을 시켜 충성 서약만 보내면, 원로원이 승인한 사람이니까 지지한다는 '소극적 지지'를 의미하게 된다. 결국 티투스는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내전에서 구해내는 결과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결정하는 주도권이 군단으로 넘어간 이상, 각 군단의 배치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서기 69년 이전의 추이도 함께 기록했는데, 이 배치표를 보면 제정으로 바뀐 뒤의 '전방' 추이도 함께, 로마 제국이 군사력의 활용을 얼마나 중시했고, 기존의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군사력 증강을 억제하려고 애썼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전이 일어나면 자연히 군사력이 증강되어 국력이 낭비된다는 사실도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 오토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 출신인 갈바와 달리 신흥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할아버지 때까지는 로마 사회에서 계급에 버금가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 등용되어 원로원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아들, 즉 오토의 아버지는 이른바 '티베리우스 문하생'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비롯하여 많은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물론 원로원 의원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실력제일주의를 계승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덕분에 귀족(파트리키)의 반열에 오르는 영예도 누렸다. 이리하여 수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토는 소년 시절부터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여서 부모나 선생이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다섯 살 아래인 네로와는 죽이 맞았을 것이다. 황제가 된 네로가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몰려나가 젊음을 발산할 때 늘 함께 어울린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네로가 이 친구의 아내인 포파이아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가 24세 때 유부녀인 리비아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남편과 직접 담판하여 양보받은 것을 흉내내어, 오토에게 포파이아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리비아의 남편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지만, 오토는 네로 황제의 부탁을 거절했다. 당시 22세였던 네로는 그 정도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오토를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하여 로마에서 쫓아내기로 했다. 27세인 오토는 아직 원로원 의원도 아니다. 루시타니아는 원로원이 관할하는 속주니까,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밖에는 총독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포파이아에 대한 연정에 불탄 네로는 오토에게 '전직 법무관' 자격을 주라고 원로원에 부탁하여, 그를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가 제국 전역에 미친 덕택에, 최전방이 아닌 루시타니아 같은 속주에 부임하는 총독은 처자식을 데려가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포파이아 사비나는 수도 로마에 남았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변방으로 파견되는 것은, 오토의 나이를 생각하면 유배형에 처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오토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총독의 임무도 내팽개치고 대서양이나 바라보며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을 했다 해도 비난보다는 오히려 동정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토는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들이 경탄할 만큼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수도 로마의 이름난 플레이보이가 활력에 넘치는 공정한 행정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의 관저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오늘날의 메리다)에 있다. 퇴역병을 이주시켜 속주 통치의 '핵'으로 삼는 것이 제국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요지를 점하고 있는 '핵'을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카이사르 아우구스타(오늘날의 사라고사), 타라코(타라고나), 톨레툼(톨레도), 코르두바(코르도바), 카르타고 노바(카르타헤나), 히스팔리스(세비야), 말라카(말라가) 등인데, 메리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베리아 반도를 망라하는 로마 도로망의 '요충'이 되어 있었다. 서쪽으로 뻗어 있는 로마 가도를 따라가면 올리시포(오늘날의 리스본)에 이른다. 황제 속주와 달리 원로원 속주에는 '전방'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단을 주둔시키지 않는다. 변경인 루시타니아의 경우, 총독 휘하의 군사력은 기껏해야 1개 중대 정도였을 것이다. 로마군에서는 8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는 '백인대'(켄투리아)가 중대에 해당하는데, 지휘는 백인대장이 맡는다. 갈리아의 주요 속주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에도 1개 대대, 1천 명의 병사밖에 주둔시키지 않는다. '전방'에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제국 전체의 방위전략에서는 로마화가 진행되어 평온한 숙주에까지 군사력을 배치할 여유가 없었다. 루시타니아 속주에 근무하는 군단병들도 본국 이탈리아 출신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다.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뒤 퇴직금으로 땅을 받아 이주한 퇴역병들은 현지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나 손자나 증손자도 어엿한 로마 시민이다. 로마 시민권을 가져야만 군단병이 될 수 있다. 오토 휘하에서 루시타니아 속주의 질서를 지키는 것도 에스파냐 태생의 로마인들이었다. 100명도 채 안되는 군단병을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이 지원하는 체제는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군단과 마찬가지였다. 보조병은 퇴역한 뒤에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지만, 현역으로 있는 동안은 로마 시민이 아니다. 속주민들 사이에 반로마 움직임이 일어나는 경우, 공격의 표적이 될 게 뻔한 총독을 지켜주는 것은 군단병이지만, 이들은 현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어서 현지인 쪽에 붙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낙하산을 타고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속주 총독들이 선정을 베풀려고 애쓰는 것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뒤에 속주민에게 고발당하여 법정에 서기가 싫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기 중에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라도 속주민의 불만을 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젊은 총독 오토는 속주 통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게다가 속주민의 뜻에 영합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속주를 구석구석 시찰하면서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로마식 통치법을 관철했기 때문에 수고 로마에서도 평판이 났다. 플레이보이의 표변이라고, 여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 10년 동안, 오토는 아내 포파이아가 네로 황제의 공공연한 애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정식으로 결혼한 것을 알았다. 오토는 계속 독신으로 남아 있었다. 홀아비로 6년을 살았을 즈음에 포파이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네로는 오토를 로마로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뒤 갈리아 속주 총독 빈덱스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타라코 속주 총독 갈바가 대한 지지를 표명한 사관이 10년째 루시타니아 속주를 통치하고 있던 오토였다. 속주 총독이 세 명이나 반기를 들고, 원로원도 등을 돌리고, 근위병들한테도 버림을 받은 네로가 자살한 것은 서기 68년 6월이다. 그로부터 7개월 뒤에 오토는 갈바를 죽이고 제위에 앉아 있었다. 난세의 황제가 아니라 평온한 시대의 황제였다면 오토는 꽤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평하는 역사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토의 불행은 제대로 정치를 시작하기도 전에 남쪽으로 달려 내려오기 시작한 '게르마니아 군단'에 대한 대책에 전념해야 했다는 점이다.
사실 오토에게는 휘하 병력이 전혀 없었다. 10년 동안이나 로마를 떠나 있었으니까 근위병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근위병들을 돈으로 매수하지도 않고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오토에게 진심으로 심취하지 않았다면, 오토의 명령에 따라 현역황제를 암살하는 따위의 중죄를 지을 턱이 없다. 중죄를 짓고 흥분한 병사들이 갈바파 원로원 의원들도 모조리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오토는 허락하지 않았다. 갈바의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고,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는 데에도 지장을 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갈바의 유골은 네로와 마찬가지로 황제묘(마우솔레움)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리지 못하고, 로마 교외에 있는 갈바의 별장 정원에 매장 되었다. 오토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솜씨가 좋긴 했지만, 남하해 오는 게르마니아 군단은 총병력이 10만 명에 가까웠다. 오토는 먼저 남하자체를 저지하는 방책을 쓴다. 비텔리우스에게 공동 황제에 추대된데다, 최강인 '게르마니아 군단'의 지지를 얻어 그 힘으로 로마에게 황제에 오르는 것밖에는 염두에 없는 비텔리우스는 그 제의를 일축한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로마인끼리 정면으로 부딪치는 내전이 불가피했다. 오토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절이 한겨울이라는 점이다. 2월부터 3월까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한니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도하여 성공했기 때문에 동시대인을 경악시켰을 뿐 아니라, 그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300년 전의 예기다. 지금은 알프스 이북에 있는 갈리아와 연락로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알프스를 넘는 산길도 그때보다는 훨씬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길이 전부 포장된 것은 물론, 8킬로미터 내지 24킬로미터, 평균 16킬로미터마다 알프스를 넘는 데 필요한 물자를 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개인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엄동설한에도 열흘이면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둘로 나뉘어 남하해 오는 '게르마니아 군단'은 양쪽 다 수만명에 이르는 규모다. 봄까지 기다리는 게 상식이지만, 비텔리우스는 길을 서둘렀다. 장병들도 하루 빨리 로마에 가고 싶은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쏟아지는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쪽으로 행군을 개시했다. 오토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느낌이지만, 구원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도나우 강 방위를 맡고 있는 7개 군단이 오토에 대한 지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방 군단' 같은 소극적인 지지가 아니라, 오토의 지위를 확실히 굳히기 위해서라면 '라인 군단'과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적극적인 지지였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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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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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 동쪽에서온사람의삼촌(이스트맨스 엉클) - 샨티 수우 족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문명인들은 가슴을 갖고 있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들은 자기 부족의 어떤 사람을 하인으로 부린다. 그렇다,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이다. 우리 인디언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문명인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하인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오래 전에 그들의 몸에 검은 물감을 칠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제 하인들은 그들과 똑같은 피부색의 아이들만 낳게 된 것에 틀림없다. 문명인들은 삶의 목표를 오로지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에 두고 있다. 그들은 온 세상을 저 혼자 차지하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끝없이 우리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해왔다. 마침내 우리가 말을 듣지 않자 군인들을 보내 강제로 땅을 빼앗아 버렸으며, 우리는 아름다운 땅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문명인들은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하루를 여러 시간으로 나누고, 한 해를 여러 날로 쪼개었다.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나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따지고, 끝까지 이익을 추구하며, 마침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쓰레기라 여긴다. 그들은 아마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은행이라는 큰 집에 돈을 맡기고 가끔씩 이자를 붙여 찾아간다. 그러나 우리 인디언에게는 은행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는 돈이나 담요가 남으면 그것을 부족의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필요할 때는 그들에게서 얻어다 쓴다. 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은행인 셈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삶의 기준을 돈에다 두고 있으며, 진실과 거짓조차 돈 앞에선 그 위치가 바뀌고 만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우리 인디언들과 사뭇 다른 종족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진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진리가 적혀 있다는 책을 늘 지참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들만큼 진리와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자들도 없다. 만일 인디언 부족 내에 그러한 자가 있었다면 당장에 부족 밖으로 추방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책'이라는 것을 가져본 역사가 없으며, 누가 어떤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책에다 적어 놓고 찬양하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진 삶은 죽음이며, 그러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진리의 책도 아무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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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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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생각한다 - 전혜린
봄은 나에게는 취기의 계절, 광기의 계절로 느껴진다.
자연과 인간에서부터 어떤 사랑을 취하게 하는 강렬하고 새로운 생기가 발산하여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뜨겁게 고조된다. 사육제의 광기와 회색 수요일의 허망과 부활주의의 흰 나르시스꽃에 쌓인 길과 이런 나의 젊은 날의 추억들과 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뿐 아니라 내가 나의 첫 번 출산의 이적을 겪은 것도 사월이었다.
겨울생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사실은 겨울이다. 언제나 가을만 되면 [내 계절]이여 빨리 오거라! 하고 기다리며 내 심신이 모두 생기에 넘치게 된다. 마치 목바른 생선이 물을 만난 것 같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내 계절은 지나고 말았다. 그와 함께 해마다 내 계절이면 나에게 찾아와 나에게 생의 애착을 주던 로맨틱도 동경도 가 버리고 말았다.
비가 오던 날 뮌헨의 회색하늘 빛 포도에 망연히 서서 길바닥에 뿌려진 그 전날의 카니발 색종이 조각의 나머지가 눈처럼 쌓여 있는 것을 바라보던 슬픔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부터 나는 봄을 슬퍼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허전함을 잊기 위해 도취와광기를 구하게 된 것이 아닐까? 미친 듯이 그로크를 마시고, 회전당구를 끝없이 회전시키고, 흰 수선화를 잔뜩 사들고 공원의 호수에 가서 백조에게 뿌려주었던 것도 모두 뮌헨의 봄에 있었던 일들이다. 혼돈과 벌써 삼십대에 감미한 비애와 도취.....이런 것이 나의 봄이었다. 지금 벌써 삼십대에 맞은 봄은 그렇게까지 강한 긴장감으로 나를 가득 채워주지 않는다. 그러나 관능을 흔드는 먼지 섞인 봄바람과 해이하게 풀린 연한 하늘을 보면 어떤 먼 메아리처럼 취기의 여음이 가슴속을 뒤흔든다. 그래서 막연히 거리를 걷고 있는 자기를 문득 발견한 때가 있다. 뮌헨에서라면 이럴 때 나는 공동묘지에 갈 것이다. 가서 조각과 꽃으로 에워싸인 조용한 어둠속을 돌아다닐 것이다. 이름을 하나씩 읽고 살았던 기간을 세어 보고 풀밭에 주저 앉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갈 곳이 정말 없다. 공원, 독일적인 의미의 묘지도, 미술관도 아니면 인적 없는 광대한 수풀도 이 도시에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먼~메아리 같은 광기를 가슴 속 깊이 꽉꽉 닫아 놓고 어떤 상실감에 앓고 있다. 내 봄은 언제나 괴롭다. 올해는 더구나 그렇다. 찬란했던 겨울과 결별한 후 나에게는 지칠 듯한 회한과 약간의 취기의 뒷맛이 남아 있다. 그것을 맛보면서 나는 아무 기대도 없이 끔찍한 여름을 향하게 된다.
196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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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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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고선사지 - 원효대사와 뱀복의 인연설화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수몰된 유적지
말 없는 물 잠자는 용이라 어찌 등한하랴/떠날 때 한 곡조에 여러가지 숨겼네/괴로운 생사는 본시 괴로운 것 아니니/연화장에 떠도는 그 세계가 너그럽네
삼국유사 의해편에 나오는 일연스님의 이 찬문(시문을 짓는 일)은 뱀복(또는 뱀부)이라는 사람을 위해 붙인 것이다. 뱀복과 고승 원효와의 유명한 인연설화는 고선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선사는 알천의 상류에 있었다. 보문단지에서 동쪽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산을 하나 넘어 약 2km쯤 가면 물에 잠긴 산골짜기가 나온다. 주소는 경주시 암곡동 1020번지. 이곳에는 75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선사지가 남아 있었다. 거대한 3층 석탑과 거북돌 및 기단과 초석들이 있었다. 그러나 75년 덕동댐이 완공되자 고선사지는 수몰지구에 들어가 물 속에 잠겼다. 원효와 뱀복의 꿈 같은 얘기를 담은 현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설화가 강조한 현상계의 덧없음을 실제로 보여주는 듯하여 감회를 자아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복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경주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살았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뱀복'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머물러 있었다. 뱀복은 원효를 찾아왔다. 원효가 뱀복을 맞아 배례하자 뱀복은 답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대와 내가 지난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다. 같이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떤가" 원효는 그러자고 대답하고 같이 뱀복의 집에 와서 장례를 치렀다. 원효가 시신을 향해 말했다. "나지 말지어다. 그 죽음 괴롭도다. 죽지 말지어다. 그 태어남 괴롭도다." 원효의 말을 듣고 뱀복은 "말이 번거롭다"라고 말하고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괴롭도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시체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지혜있는 호랑이를 지혜 숲속에 장사지냄이 그 아니 마땅한가." 이에 뱀복이 게송(부처의 공덕을 기린 노래)을 지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사라수 사이에서 열반하셨네/지금도 그와 같은 이 있어/연화장계 넓은 데로 들려하네
게송을 마친 뱀복은 띠풀을 뽑았다. 풀뿌리 아래에 한 세계가 열렸다. 그 세계는 명랑하고 맑으며 칠보 난간과 누각이 장엄했다. 뱀복은 시체를 메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땅은 이내 아물었다.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윤회사상이 이룬 설화
불교의 윤회사상이 두드러지는 얘기이다. 인과응보 사상을 담은 윤회설은 한국인의 의식심층을 흐르는 하나의 지배적인 경향이다. 그 심층의 의식이 뽑아낸 이야기가 바로 '뱀복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뱀복과 원효가 전생의 친구였으며, 뱀복의 어머니는 그때 그들의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인연관계 때문에 현세의 인간관계 체계는 무너져버린다. 스님과 신자, 또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사라지고 '나고' '죽는' 현상계의 무상성만이 돋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실 앞에서도 애통과 번민 같은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지 않으며, 천연스러운 장례 해프닝이 벌어질 뿐이다. 일연은 뱀복의 이 천연스러운 행위를 성자의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다. 뱀복은 생사에 초탈한 대성인의 면모로 나타난다. 뱀복의 삶이 영원에 걸쳐 있는 만큼 원효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벌이는 이 해프닝은 현세의 삶에 잠깐 모습을 보인 섬광과도 같은 반짝임일 뿐이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현세의 한정된 삶과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흥미있게 대비시킨다. 어떤 이는 뱀복이가 그 어머니를 경을 싣고 다닌 암소에 비교한 것에 대해 신라인의 철학적 유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뱀복의 모습도 재미있다. 대개 성인이라면 고고하고, 의젓하게 묘사되기 쉽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는 열두 살까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병신스러운 몰골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인물설정은 성속을 한 테두리에 넣어 사고하려는 신라인의 인생관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 설화는 사원(절)에 대한 의식을 보여준다. 뱀복은 띠풀을 뽑는 행위를 통해 그 아래 신선한 세계(그 묘사가 사원의 모습을 띤다)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찮은 풀 한 포기일지라도 그 속에는 '연화장세계'를 품고 있다는 평등한 세계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불법은 만산에 두루 편재하는 만큼 굳이 절을 지어야 수도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무사원사상'이 이 얘기 속에는 깃들어 있다.
박물관에 이전된 유물
이러한 설화를 간직한 고선사지는 영원히 물 속에 잠겨버렸다. 절터에 남아있던 탑과 거북돌 및 발굴유물들은 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탑(국보 38호)은 경주박물관 동남편에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감포의 감은사지 탑과 함께 경주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으로 높이가 10.3m이다. 탑의 상륜부는 날아가고 없다. 이 탑은 군데군데 금이 가고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나 그 단아하면서도 장중한 모습이 일품으로,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고선사지에서 옮겨놓은 거북돌은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탑 앞에 놓여 있다. 암곡동에 사는 남삼진노인은 "수몰되기 전의 절터 주위는 참으로 경치가 좋았다"고 말한다. 절 앞으로 알천의 지류가 흘렀으며, 계곡의 암석들이 개울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덕동댐으로 계곡이 물에 잠기자 절 주변의 2백여 가구들은 고향을 돌아보며 이곳을 떠났다. 더러는 도시로 가서 터를 잡았고, 더러는 못내 고향을 못 잊어 이 주변의 논밭을 사들여 일구고 있다. 언덕에 남은 몇 집들을 돌며 '뱀복이 얘기'를 물어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원효가 간 후 1천 3백 년의 무자비한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하고 잊혀졌다. 다만 사람 사는 데는 여전히 '나고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4월의 덕동댐물은 맑다. 댐 주위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피어 온통 붉다. 붉은 산 그림자가 물에 비쳐 또다른 연화장세계가 새로이 물밑에서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문득 솟는다.
부산성지 - 득오와 죽지랑의 우정
[부산성 터]
모죽지랑가
부산성은 향가 '죽지랑 그리는 노래'의 현장이다. 이 노래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간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눈 도리질 사이에 만나옵기 지오리/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을길/다북쑥 우거진 곳에 잘 밤은 있으리
득오는 죽지랑의 낭도로서 풍류황권(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풍류도를 닦았다. 죽지랑은 김유신과 더불어 3국을 통일하고 진덕여왕 때 중시(신라 집사부의 으뜸 벼슬)가 되어 왕정의 기밀을 관장하는 등 진덕, 무열, 문무, 신문왕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었던 인물이다. 득오가 이 노래를 불렀던 효소왕 때는 죽지랑의 만년으로 백발이 성성한 노장 화랑이었다. 이 노래와 더불어 부산성에서 있었던 득오와 죽지랑의 교분은 화랑도들간의 우애와 신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얘기이다. 그 얘기는 다음과 같다.
득오가 한 열흘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군대의 직책으로 부대장) 익선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임명했습니다. 급히 달려 가느라고 미처 알리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죽지랑은 "당신의 아들이 만일 사적인 일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해야겠군요"하고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부산성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낭도 1백37명도 그를 따랐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의 행방을 물으니 익선의 밭에서 부역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죽지랑은 득오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술과 떡을 대답했다. 그리고는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익선은 그 부탁을 거절했다. 이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서 성으로 싣고 가다가 부하를 중히 여기는 죽지랑의 마음을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행동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진절사지가 타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화랑도를 관장하는 관직)가 이 소식을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짓을 씻어주려고 했다. 그러자 익선은 도망쳐버렸다. 조정에서는 익선의 맏아들을 잡아가 한겨울 성 안의 못에 목욕을 시켜 얼려 죽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익선의 고향인 모량리 사람 중에 벼슬하는 사람을 모두 몰아냈다. 또한 그후로부터는 모량리 사람이 벼슬하거나 중이 되는 것을 금했다.
화랑 사이의 아름다운 우애
이상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득오와 죽지랑 그리고 익선 사이에 부산성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 얘기에는 자기의 젊은 낭도를 위해 성까지 술과 떡을 갖고 가는 늙은 죽지랑의 정과 죽지랑을 따르는 1백37명의 낭도들의 우애가 특히 돋보인다. 거기에는 '사랑'이라고 할만큼 깊은 인간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다. 이러한 우애와 의리야말로 사나이들의 심기를 결속시키고, 삼국을 통일시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익선은 그러한 사나이들의 꽃다운 우애의 한 장애요소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는 이때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지어 불렀던 '죽지랑 그리는 노래'를 기록해 놓았다. 이 노래에는 흡사 애인에게 사랑을 하소연하는 듯한 애틋함이 배어 있다. 존경하는 늙은 화랑 죽지랑을 향한 청년 득오의 어리광과도 같은 정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에 대해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혹자는 득오가 죽지랑의 아름다운 얼굴이 늙어감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죽지랑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라고도 해석한다. 전자의 해석은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라는 귀절을 중요시한다. 후자의 해석은 마지막 귀절인 '다북쑥 우거진 곳에 잘 밤은 있으리'를 이유로 든다. '다북쑥 우거진 곳'은 무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차라리 득오가 부산성에서 부역할 때, 지난 날 낭도들과 더불어 수련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질 듯하다. 이러한 얘기를 간직한 부산성은 경주 서쪽의 여근곡이 있는 바로 그 산에 위치한다. 부산, 또는 주사산으로도 불리는 산의 정상에 위치한 이 성은 현재 성을 쌓은 돌들의 흔적이 몇 군데 남아 있을 뿐이다. "동경잡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 성은 신라 문무왕 3년(서기 663년)에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성했다. 이 성은 '둘레가 3천 6백 척, 높이가 7척이며 안에는 4개의 개울과 하나의 연못, 9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에 오르려면 여근곡의 뒷골짜기를 따라 오르거나, 건천읍에서 '산내도로'를 따라 송선리 쪽으로 나 있는 좁은 도로로 가면 된다.
경주의 중요한 와성
부산의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면 산정에 광활한 평지가 펼쳐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부산성 안에는 시가가 조성되어 있었다. 즉 성내에 군창을 비롯하여 절과 민가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서 한 도읍을 형성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암사가 있으며, 화전민들의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분교(국민학교)가 있다. 성의 넓은 목초지는 목장으로 개간되어 있다. 부산성은 경주의 서쪽 외곽을 지키는 외성으로 중요시 됐던 듯하다. 이 성을 짓기 전인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산 아래 여근곡까지 침입했다가 토벌됐으며, 무열왕 때에는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성이 함락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 성의 축성목적은 경주의 서쪽으로 침입해오는 백제군의 방어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에 난리 때 주민들의 피난처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듯하다. 성터의 여기저기에는 숱한 기와조각이 뒹굴고 있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짙게 한다. 이 일대의 경치는 절경이다. 특히 부산의 정상에 위치한 주암사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넓어 멀리 경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절 뒤로는 김유신이 군사들을 모아 술을 빚었다는 지맥석의 넓은 반석이다.
남산 삼화령 - 안민가의 유적지
부처에게 차공양 하던 곳
신라 경덕왕이 3월에 반월성 서편에 있는 귀정문의 누각에서 지나가던 스님을 불러들였다. 그는 남루한 장삼에 앵통(또는 삼태기)를 걸머지고 있었다. 그 통 속에는 다구가 담겨 있었다. 이름을 물으니 충담이라고 했다. 충담은 "저는 늘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올립니다. 오늘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임금은 차를 청해 마셨다. 충담은 당시 향가를 잘 부르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왕은 대뜸 그가 '찬기파랑가'의 작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주기를 청했다. 충담은 노래했다.
임금은 아비요/신하는 자애로운 어미며/백성은 어린애라 할지./백성은 사랑하는 이 아네/윤회의 차축을 괴고 있는 갓난이/이들을 먹여서 편안히 하라/이 땅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나라 보존할 길 아노라/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나라가 태평하리라
이 노래가 바로 유명한 '안민가'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라는 평범한 말 속에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왕은 감동하여 그를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끝내 사양했다. 삼국유사의 이 얘기 속에 나오는 삼화령은 어디일까? 이 문제는 아직 학계에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침략시대(1925년)에 발견된 3개의 미륵불이 바로 삼화령에 있었던 불상이라고 학계에서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 미륵삼존은 현재 경주박물관 8실에 진열되어 있다. 그 명칭도 '삼화령 미륵삼존'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남산의 북편에 있는 남산성터 바로 밑 고개 위이다. 이 고개의 동편은 부처골이며 서편은 남간사지 등 숱한 절터가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었을 때는 본존상만 있었으며 두 보살 입상은 민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불상이 나온 자리에는 높이 1m 가량 되는 네 개의 석주가 있었으며 이 네 개의 돌기둥 안에 불상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황수영 교수는 이 불상을 신라초기의 것으로 추정, 이 지점 가까이에서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무덤을 찾아내고 그것을 화랑의 무덤으로 간주하여 이곳이 삼화령이며 불상이 들어 있었던 네 개의 돌기둥은 바로 신라초기의 석굴형태였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다소 억지스러움이 있는 듯하다.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선덕왕 때 생의라는 스님이 항상 도중사에 살았다. 하루는 꿈에 어떤 중이 그를 남산으로 끌고가면서 풀을 꺾어서 길을 표해 두라고 하며 산의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묻혔으니 청컨대 스님이 파내어 이 고개 위에 앉혀달라"고 했다. 꿈을 깨어 친구들과 표한 곳을 찾아가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니 돌미륵이 있었다. 그것을 삼화령 위에 두었다가 선덕왕 13년에 절을 세우고 생의사라 했다.
현 삼화령터의 의문점
이 설화에 의하면 삼화령은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을 되어 있다. 현재 삼화령으로 인정되어 있는 곳은 남산 정상의 북편이므로 우선 방위가 틀린다. 또한 네 개의 돌기둥은 높이가 1m 정도밖에 안 돼 세 개의 불상을 안치하기에는 비좁다. 불상조각 솜씨가 뛰어난 점으로 봐서, 그런 불상을 그렇듯 비좁고 거친 석실에 두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주위에 화랑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나, 자세히 살피면 세 개뿐만 아니라 많은 무덤들이 주위에 흩어져 있어, 꼭 세 개만을 집어내기가 힘들다. 그러하면 이 미륵불을 삼화령의 미륵불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경주에 사는 윤경렬 씨는 "이 주변에 기와조각이 다량 출토되는 점으로 봐서 이곳이 절터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절이 없어진 후 그곳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하여 풍우를 피하기 위해 임시 거처를 만든 흔적이 바로 네 개의 돌기둥이 아닌가 한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되면 이곳은 삼화령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그렇다면 삼화령은 어디일까.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정상을 넘어 약 5백m쯤 가면 용장골과 대지계곡을 양 옆에 거느린 뫼뿌리가 나타난다. 동쪽으로는 남산리를 지나 조양들이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용장계곡이, 남쪽으로는 고위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이곳 능선 위에 큰 바위가 바위를 얹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위에 얹힌 높이 약 2m의 바위를 오르면 바위 윗부분에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좌대가 조각되어 있는 게 보인다. 불상을 안치한 흔적이다. 연좌대는 지름이 2백18cm이며 16개의 연잎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남쪽을 보면 경주시내에서 조양들을 지나 바로 앞 뫼뿌리를 넘어 용장골로 해서 고위산 동편 중허리를 넘어 언양으로 가는 고갯길이 바라보인다. 이 고개는 경주에서 언양을 거쳐 부산으로 빠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 산밑에 사는 노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이 연좌바위가 있는 산의 뿌리가 한 꽃잎을 이루고, 정상 쪽으로 치닫는 한 뿌리가 또 한 잎을 이루며, 용장사가 있는 쪽으로 뻗친 뫼뿌리가 또 한 잎을 이루어 세 개의 꽃잎으로 벌어진 한 송이 꽃과 같은 지형을 갖추었다고 한다.
언양가는 고갯길
연좌바위의 서편 아래 50m지점의 계곡에는 절터가 있다. 절터는 상하의 축대가 있어 곧바로 연좌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형태를 보여준다. 추측이지만 연좌 바위가 있는 이곳이야말로 삼화령이 아닌가 한다. 산세의 모양이 세 잎의 꽃잎형이라는 데서 '삼화'라는 명칭이 붙을 수 있으며 바로 앞을 지나는 고갯길로 해서 '삼화령'이라 이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위 밑 절터는 바로 생의사가 된다. 고갯길은 후미진 곳인데다 높아서 오가는 옛사람들이 불안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불안을 덜기 위해 고갯마루에 불상을 안치하여 위안을 삼으려 했을까? 고개 주위에는 지금도 많은 절터가 산재하고 있으며, 고개가 시작되는 오산골의 어귀에도 불상이 서 있다. 그 절들은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숙박시설로도 중요하게 이용됐으리라. 불상은 고갯길의 무사를 비는 마음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더욱 이곳은 남산 정상의 남쪽 편에 해당되는 만큼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의스님이 파내어 이곳에 모셨던 불상은 어디로 갔을까.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윤경렬 씨는 "30년 전 남산을 올랐을 때 이 바위에 부서진 불상이 서 있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바위 주위엔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는 걸로 봐서 생의스님이 파낸 불상이 없어진 후 절 밑에 있는 불상을 대신 모신 다음 그 위를 지붕으로 덮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 아래 절터에서 올려다보면 아득히 진달래꽃 사이로 하늘 속에 솟아오른 연좌대가 보인다. 흡사 도솔천을 올려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 있는 부처이다. 그렇다면 연좌바위 위 불상자리를 도솔천으로 설정하고, 이 절에서 그 청정한 하늘을 바라보며 충담스님이 차를 올렸다고 할 수 있다. 불상을 찾을 길 없고 절도 없어졌지만 청정한 하늘은 그대로 남아 연좌바위가 그 푸르른 세계를 받치고 있다는 감동적인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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