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8호 - 2024.07.04 목요일(음력 : 05.29)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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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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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직면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면하지 않고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 제임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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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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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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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밸런타인데이’인가?
매년 2월 14일은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초콜릿을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이다. 이 날은 고대 로마의 그리스도교 성인인 발렌티누스(영어로는 밸런타인)를 기리는 축일인데, 3세기 무렵 고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가 징집된 병사들이 출병 직전에 결혼을 하면 다른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대의 기강이 문란해질 것을 염려해 결혼을 금지시켰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발렌티누스 사제가 몰래 혼인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한 날을 기린 것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Valentine’s Day’의 외래어 표기가 왜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밸런타인데이’일까? 아직도 많은 언중들은 이 날을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고 ‘밸런타인데이’가 바른 외래어 표기이다. ‘Valentine’s Day’는 영어이기 때문에 영어 발음을 따라 외래어 표기를 해야 하는데, ‘Valentine’의 영어 발음은 [v'l'ntain]이다. ‘외래어 표기법’ 제2장 표 1에 따르면 [æ]는 ‘애’로, [?]는 ‘어’로 적어야 하므로 ‘Valentine’을 ‘밸런타인’으로 적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Abraham Lincoln’의 외래어 표기는 ‘아브라함 링컨’이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인데, ‘Abraham’의 영어 발음이 [eibr'hæ'm]이기 때문이다. ‘상표 사용료’라는 의미의 ‘royalty’도 영어 발음이 [roi?lti]이기 때문에 ‘로얄티’가 아닌 ‘로열티’로 표기해야 한다. 축제를 뜻하는 ‘festival’ 역시 영어 발음이 [fest?v?l]이므로 ‘페스티발’이 아닌 ‘페스티벌’로 표기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들르다, 들리다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그래, 여섯 시쯤 들릴게.” 이 대화에서 ‘들려’와 ‘들릴게’는 잘못 쓰인 말이다. ‘들러’와 ‘들를게’로 적어야 한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어가 머무르다’는 뜻을 지닌 말은 ‘들르다’인데 ‘들리다’로 잘못 쓰는 사람들이 많다. 기본형이 ‘들르다’이므로 ‘들러서, 들르니’ 등으로 활용한다. ‘그는 서점에 자주 들르는 편이다’ ‘집에 오다가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 왔다’처럼 쓰면 된다.
그런데도 이 말을 ‘들려, 들리니’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기본형을 ‘들리다’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형을 ‘들르다’로 제대로 알고 있다면 잘못 쓸 이유가 없다. ‘소리를 지르지 마시오’, ‘점심을 걸렀더니 힘을 못 쓰겠다’ 같은 말에서 ‘지르다’ ‘거르다’ 등을 잘 활용해서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들르다’와 마찬가지로 ‘-르다’로 끝나는 ‘지르다’와 ‘거르다’를 활용할 때 ‘(소리를) 질렀다’나 ‘(점심을) 걸렀다’ 대신 ‘질렸다’나 ‘걸렸다’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본형이 ‘지르다, 거르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들르다, 들리다’처럼 기본형을 곧잘 혼동하는 말 중에 ‘구르다’가 있다. 매우 안타까워하거나 다급해하는 상황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인 ‘발을 구르다’를 ‘발을 굴리다’로 잘못 쓰는 것이다. 지난달 제주도 비행기 결항 사태를 보도한 기사 중에 ‘회항하지 않았을까 우려된다며 발을 동동 굴렸다’는 표현이 있었다. 기본형이 발을 ‘굴리다’가 아니라 ‘구르다’이므로 ‘발을 동동 굴렀다’로 써야 맞다. ‘굴리다’는 바퀴처럼 둥근 물건을 굴러가게 하다는 뜻이므로 ‘발을 굴리다’는 성립하지 않는다. 발을 들었다가 힘주어 내려놓는 동작을 나타내는 ‘구르다’를 써서 ‘발을 굴러, 발을 구르니’ 등으로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빗방울이 듣다
“빗방울이 듣는 차창으로…”
언젠가 낡은 버스 차창 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원고를 보낸 후 인쇄된 글을 보니 ‘듣는’이 ‘드는’으로 고쳐져 있었다.
‘듣다’는 비나 눈물 따위가 방울져 떨어지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는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오타로 여겨질 만큼 생소한 말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적긴 하지만 ‘빗방울이 듣는 일요일 아침 옥상 텃밭에서’, ‘호수엔 빗방울 듣고’처럼 몇 용례가 보인다. 문학적 감성까지 어우러져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그릇을 부시고”
이 말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하나같이 그릇을 깨뜨렸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흔히 ‘부수다’를 ‘부시다’라고 하는 데 이끌린 탓이다. ‘부시다’는 그릇 따위를 물로 씻어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그 정갈한 느낌 때문인지 입안을 헹구는 경우에도 쓰였다.
이 역시 예전에는 적잖이 쓰이던 말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세력이 약해져 이제는 ‘부수다’의 비표준어 ‘부시다’로만 이해되는 데 이르고 말았다. 마치 단아한 아가씨가 우락부락한 장정이 되고 만 느낌이랄까. ‘부시다’에는 ‘씻다’에는 없는 고유한 뉘앙스가 있다. 햇살이 반짝이며 튕겨져 나가는 듯 맑고 시원한 느낌은 오직 ‘부시다’에만 있다.
그래서 낱말 하나하나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선진 국가에서는 그 나라의 국어 시간에 어휘 교육에 굉장히 힘을 쏟는다고 한다. 풍부한 어휘력은 사고력과 표현력을 높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휘 교육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다면 우리말도 더 풍요로워지고 아이들도 더욱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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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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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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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라면 - 한용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 만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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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면 - 정지용
손 바닥을 울리는 소리
곱드랗게 건너 간다.
그뒤로 흰게우가 미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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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 - 김수영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네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
너의 사랑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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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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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浩然之氣)
浩:넓을 호. 然:그럴 연. 之:갈 지(…의). 氣:기운 기.
[준말] 호기(浩氣). [동의어] 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출전] ≪孟子≫ <公孫丑篇)
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
②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③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전국 시대의 철인(哲人) 맹자(孟子)에게 어느 날, 제(齊) 나라 출신의 공손추(公孫丑)란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틀림없이 천하의 패자(覇者)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선생님도 역시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나는 40 이후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용(勇)’이다. 자기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고, 이것이야말로 ‘대용(大勇)’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최상의 수단이니라.”
“그럼,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告子)의 부동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고자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맹자의 논적(論敵)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소극적이다. 나는 말을 알고 있다[知言]는 점에서 고자 보다 낫다. 게다가 ‘호연지기’도 기르고 있다.”
‘지언’이란 피사(편역된 말), 음사(淫辭:음탕한 말), 사사(邪辭:간사한 말), 둔사(遁辭:회피하는 말)를 간파하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또 ‘호연지기’란 요컨대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지간에 넘치는 지대(至大), 지강(至剛)하고 곧으며 이것을 기르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천지까지 충만 한다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그리고 이 기(氣)는 도와 의(義)에 합치하는 것으로서 도의(道義)가 없으면 시들고 만다. 이 ‘기’가 인간에게 깃들여 그 사람의 행위가 도의에 부합하여 부끄러울 바 없으면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도덕적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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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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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3. 움직이는 8기생들
<건의서>
1. 참모총장을 비롯한 부대 지휘관의 처벌 내지 자진퇴진에 관한 건.
2. 수제의 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건의합니다.
내용: 각하께서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지난 4월 19일 학생들은 그들의 고귀한 피로 우리에게 다시 자유와 평화를 회복시켜 주었고 민주주의의 참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재삼 4.19 혁명의 의의를 부연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고귀한 학생들의 피를 모독하는 구악이 아직도 우리의 군 내부에 구태의연하게 잔존하고 있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군대의 앞날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3.15 부정선거에 부패 지휘관들의 처벌 내지 자진퇴직을 아울러 강력히 건의하는 바입니다.
<상세>
1)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고위 책임자
2) 부정축재 장성
3) 무능 내지 파렴치한 지휘관 등
이 건의서의 내용만 가지고 말한다면, 이 건의서에는 군대를 사랑하고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는 젊은이들의 우국충정이 알알이 배어 있다. 오직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으면 군령여산, 상명하복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 내에서 하극상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연판장 운동을 벌였겠느냐 해서 그들의 우국충정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담당하고 있는 군대라는 특수조직체 내에서 이런 하극상의 행위가 과연 바람직한 행위냐 하는 데 대해선 한번 깊이 자기반성을 해 보았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큰 조직은 잡다한 인간들로 구성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지탄을 받을 만한인간이 끼기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군이 잉태될 때 어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잉태되었던가? 잉태의과정부터가 비정상적이었다. 자격 미달자, 무능한 자, 욕심꾸러기 등등 갖가지 잡다한 성분의 인물들이 모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국군을 키워야만 했다. 성장 과정에 있어 6.25라는 미증유의 시련만 없었어도 자라나오는 동안에 옥석은 구분될 수 있었다. 그것이 채 걸음마도 구분해 낼 겨를도 없었다. 무능하다, 부패하다 하더라도 국군은 그러한 인물들이 초석이 돼 주었기에 60만 대군으로 자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연도태될 때만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옥석을 구분하려 든다는 것은 군대라는 특수조직체 내에서는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에 그건 그렇고 이들 여덟 명의 중령들은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에게 미처 연판장을 제출해 보기도 전에 서울지구 육군 방첩대에 체포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체포당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어느 놈이야, 우릴 배신한 놈이?"
그들은 동지 가운데서 누군가가 밀고를 한 것은 최준명이라고 단정을 했다. 조사과정에서 조사관들이 <최준명> 어쩌고 하며 그의 이름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최준명의 밀고로 이들은 체포당하게 되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최준명은 밀고한 것이 아니었다. <믿거라>하고 말을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이 경위는 이러했다. 최준명은 정군파에서 정군운동의 확대와 조직화를 위해서 한 사람당 10명씩의 동지를 포섭하기로 결의를 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동지 포섭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그만큼 정군운동에 열성이었던 것이다. 최준명이 동지를 포섭하고자 눈독을 들인곳이 서울에 출동중인 계엄부대였다. 다행히도 사단장 조재미(趙在美)는 평소 처지였다. 최준명이 계엄부대에서 동지를 얻으려 했던 것도 그 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러니까 정군파 그룹의 결의가 있은 직후였으니까 5월 10일경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최준명이 게엄부대를 방문했으나 사단장은 출타중이었다. 자연스럽게 부관과 잡담을 나누면서 최준명은 슬쩍 정군운동을 화제로 올렸다.
"이제 우리 국군도 자랄 만큼 자랐으니 강군(强軍)을 만들기 위해서도 4.19를 계기로 정군을 해야 하잖겠는가? 군대란 지휘관에 따라서 정예부대가 될 수도 있고 허약한 군대가 될 수도 있는 법,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옳은 말씀입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최준명은 8기생이 중심이 돼서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를 포섭중에 있다는 것을 털어놨다. 그런데 이 부관, 무슨 생각에선지 조재미가 귀대하자, 전혀 얼토당토 않은 보고를 했다.
"조금 전에 최준명 중령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는데, 8기생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쿠데타란 말에 조재미의 두 눈이 번쩍했다.
"쿠데타라니 구게 무슨 소리야?"
"확실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에 8기생이 중심이 돼 가지고 그런 모의를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최준명을 불러 사실 여부를 캐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부관이 엉뚱한 한마디를 더 곁들였던 것이다.
"최 중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조 장군께서 중립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하고 돌아갔습니다."
중립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면 일은 구체적으로 진척돼 있는 모양이라고 조재미는 판단했다.
"주동 인물이 누구라고 하던가?"
"김종필, 김형욱 등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중령들이라고 합니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려 들다니!"
이렇게 씹어뱉듯이 내뱉고 난 조재미는 했다. 그렇지 않아도 4.19가 터지는 것과 함께 군부 내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을 때였다. 송요찬의 촉각이 곤두서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영관급 장교들의 동태에 대해서 내사하라!"
송요찬은 즉시 방첩부대장인 육군 준장 이소동(李召東)에게 명령했다. 영관급 장교들의 내사에 그리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육군본부에 근무중인 중령급은 거의가 다 정군운동에 가담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17일 최준명이 김종필과 함께 서울지구 방첩부대에 잡혀 갔다. 이어서 다음날인 5월 18일에는 김형욱, 옥창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군파 장교들은 5월 18일에 연판장을 송요찬에게 제출할 계획이었다. 그랬던 것이 5월 17일에 이들은 방첩대에 구속되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연판장이나 건의서는 미처 송요찬한테 제출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연판장을 작성한 여덟 명의 중령들은 송요찬을 찾아가서 연판장을 제출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김종필, 김형욱 등이 송요찬과 대면하는 장면은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송요찬에게 연판장을 제출하기 전에 체포당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여덟 명이 송요찬을 이것 역시 그들이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자아첨 잘하는 어느 어용작가가 그들의 정군운동을 과대하게 창작해 냄으로써 세상에는 그렇게 훤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는 <역사는 강자에 의해서 창작되는 것이다>라는 좋은 본보기인 줄로 안다.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끝내 물러나기는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것은 1960년 5월 20일. 송요찬의 퇴임은 갑자기 이루어졌다. 하루 전인 5월 19일까지만 해도 그가 참모총장 자리를 내놓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종찬 이 두 사람과 일언반구도 의논하지 않았다. 송요찬이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명예인 육군 참모총장직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용기있는 행동을 취하고도 <역시 돌대가리는 할 수 없군> 하고 영예롭지 못한 세평을 받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는 사표를 제출하기 전날인 5월 19일 밤, 방첩대에 구속되어 있는 여덟 명의 정군파 장교들을 참모총장실로 데려오도록 했다.
"귀관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나는 탄복을 금치 못하네."
여덟 명의 중령들을 앞에 놓고 입을 연 송요찬이 한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귀관들의 주장은 옳았어! 나는 나의 행동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여 왔네.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나는 정치 문제에 개입을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 앞으로 귀관들이 있는 한 우리 국군은 건전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네. 그런 만큼 나는 안심하고 물러갈 수가 있을 것 같네."
이 말을 들은 여덟 명은 감격했다. 송요찬이 이렇게 깨끗이 물러나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군 중장 송요찬, 그는 일제 시대의 지원병 출신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지원을 한다는 것은 곧 친일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지원병들을 가리켜 덮어 놓고 <네놈은 친일파> 하고 몰아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무슨 친일사상이 있어서 일본군에 지원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될 때까지의 송요찬의 일본군에서 계급은 군조(軍曺:중사)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송요찬은 지원병 2기로 입대했으니까, 그가 일본군으로 나간 것은 1939년이다. 햇수로 6년간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얘기가 된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함으로써 송요찬의 군인 생활은 계속되었다.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던 관계로 해서 그가 장군으로 진급한 뒤부터 그에게는 석두(石頭:돌대가리)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붙었으나 6.25 전쟁 때의 용맹성으로 해서 미군들은 그를 <타이거 송>이라 부르며 외경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여간에 그건 그렇고, 여덟 명의모를 말을 하고 난 송요찬은, "이들을 즉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조치를 취하고 난 다음, 그는 다음날 국방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송요찬의 사표 제출에 놀란 것은 허정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나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허정은 국방장관인 이종찬에게 물었다.
"글쎄올시다. 저하고도 한마디의 상의도 없었습니다. 불쑥 찾아와서 사표를 내던지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가 버리니 무슨 영문인지 원......."
"이 장군, 수고스럽지만 이 장군께서 경위를 조사해서 보고토록 해주시오."
캄캄하기만 했던 허정으로서는 당장 송요찬의 사표를 수리하기도 무엇하고 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종찬이 내각수반실을 물러난 직후, 유엔 사령관인 매그루더가 찾아왔다.
"제너럴 송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지금 막 국방장관을 통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데, 장군께선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문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더군요."
송요찬은 국방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나자, 그 즉시 자진해서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날 것을 천명했던 것이다. 수리해선 안 됩니다. 한국군으로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할 때 군의 최고책임자를 바꾸게 되면 군부에도 혼란이 야기될 우려가 있습니다."
매그루더는 애써 송요찬의 사표를 반려해 줄 것을 간청했다. 허정도 군부의 동요는 원치 않고 있는 바였다. 과도정권을 맡을 때도 과연 군부가 그를 지지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 무척 우려한 바 있었다. 때문에 그는 군부에 대해서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현상을 유지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매그루더의 간청을 쾌히 받아들여 마음속에 새겨놨던 것이다. 다음날, 국방장관 이종찬이 송요찬의 사표제출 경위에 대해서 보고해 왔다. 해서 연판장 운동을 벌인 것이 사표 제출의 동기였던가 봅니다."
이렇게 보고를 하고 난 이종찬은 허정에게 아주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미숙한 탓으로 그런 불상사가 야기되었습니다. 마냥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허정은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 장군으로서는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오?" 하고 송요찬의 사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송 장군 스스로가 앞질러서 물러난다고 기자회견을 해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딴은 그랬다. 물러난다고 세상에 대고 공표를 해벼렸으니 이제는 그를 붙들어 앉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매그루더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면 송요찬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스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일까? 박정희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아서? 아니면 김종필 등 8기생들의 정군운동에 겁을 집어먹고? 송요찬이 김종필이 작성한 정군 건의서를 읽어본 것은 방첩대에서 김종필을 구속한 직후였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물러날 결심을 촉구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송요찬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인간이란 욕심의 동물인데 임명권자에 의해서 자리를 내놓게 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자리를 내놓기란 육군 참모총장직, 그게 어떤 자리인가!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스러운 직책이다. 군복을 입고 별을 달았다고 해서 누구나가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영예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물러났다. 그 용기있는 행동에 감복을 금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송요찬이 물러서더라도 일단은 행정수반인 허정이나 아니면 국방장관 이종찬과 상의하고 물러났어야 옳았다. 다른 직책도 아닌 육군 참모총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진퇴를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 공표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물러난다고 공표를 해버렸으니 사표를 반려할 수도 없는 처지가 돼버렸던 것이다.
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최영희(崔榮喜)가 육군 참모총장에, 그리고 차장에는 최경록(崔景祿)이 발탁되었다. 어떤 기록에 <그때 강한 발언권을 가진 계엄군 부대장 조재미 준장은 송요찬 중장의 유임을 강력히 건의하면서 부득이한 경우의 대안으로 최영희 중장을 추천, 이 장관이 추천한 유 중장에 맞섰다. 이번 경우 허정 과도정권 수반은 이 장관의 건의보다 몇 번에 걸친 조재미 준장의 건의에 더 기울어졌던 것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과도정권이 아무리 시한부 정권이요,허정 역시 시한부 행정수반이었다 하더라도 자리가 계엄군 부대장이라고 해서 군 인사문제에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송요찬의 사표를 수리한 뒤 허정이 국방장관 이종찬에게 의견을 물었다.
"누굴 송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소?"
"글쎄올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참모총장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당장 누가 좋다는 등의 의견 제시를 삼가했다. 왜냐하면 이종찬도 젊은 장교들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해서 이미 보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좀더 시간을 두고 적절한 인물을 물색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최영희를 추천해 왔다. 송요찬이 최영희를 추천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국군은 창군 초기에 잡다한 출신성분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를 비롯해서 학병, 지원병 출신자, 만주 군관학교 출신자, 그런가 하면 독립군 출신자, 중국군 출신자 등등. 그중 유대의식이 가장 강한 것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들과 학병 출신자들, 그리고 지원병 출신자들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들은 그 나름대로 상당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끼리 똘똘 뭉쳐 있었고, 학병 출신은 학병 출신대로 지원병 출신은 지원병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육군 참모총장직에 올랐던 송요찬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는 데 즈음해서 혼란기의 국군이 건재하자면 파벌의식을 지양하고 화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가 국방장관이니, 지원병 출신자였던 내가 물러나면 그 자리에 학병 출신자를 앉힘으로써 국군의 화합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최영희를 추천했던 것이다. 최영희는 일본 센슈우(專修) 대학을 다니다가 일본군에 끌려나갔던 학병 출신자였다. 군대의 서열로 보더라도 육군 참모총장직에 군대에서 물러나면서 군대의 장래까지도 생각했다는 것은 훌륭한 몸가짐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최영희를 추천했던 것인데 때마침 국방장관 이종찬도 최영희를 추천해 왔다. 송요찬이 이종찬한테로 최영희를 밀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허정은 송요찬이 추천한 인물을 국방장관인 이종찬도 <적임자>라고 추천해 오자, 두말 없이 최영희를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군의 화합을 이루어 보자는 뜻에서 육군 참모차장직에는 지원병출신인 최경록을 앉혔다. 최경록은 지원병 출신이기는 하나 일본군 육군 소위에까지 진급했다가 해방을 맞은 인물이었다. 졸병으로 입대해서 장교인 소위로까지 진급했다면 최경록이 얼마나 근면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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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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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1부 갈바 황제(재위:서기 68년 6월 18일~69년 1월 15일)
네로의 죽음이 로마인에게 제기한 문제
서기 68년 6월 9일. 네로 황제가 죽었다. 에스파냐 주둔군이 황제로 옹립한 갈바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올 거라는 소문에 원로원은 재빨리 갈바를 '제일인자'로 인정했고, 로마 시민들도 나몰라라 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네로를 버렸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네로는 결국 3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의 2대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 양쪽에서 불신임을 받은 것이다. 군단병이나 근위병의 첫 번째 자격 조건이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이상, 이들도 어엿한 '유권자'였다. 그러나 네로를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원로원도 시민도 사태를 정확히 인식하지는 못한 것 같다. 네로 대신 갈바가 제위에 앉기만 하면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롭게 이어지리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인류는 온갖 형태의 정치세계- 왕정, 귀족정, 민주정, 나아가서는 공산체제까지-를 생각해내고 실행했지만,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로 양분되는 체제를 해소하는 데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을 꿈꾼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은 유토피아일 뿐 현실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체제가 어떻든 간에,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양분되는 체제는 존속한다는 예기가 된다. 그런 체제가 존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이상,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와 역량이 그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로마 제정에서 '정당성'은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이고, '권위'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역량'은 로마 황제의 두 가지 책무인 안전보장과 식량보장을 비롯하여 제국을 운영하는 데 적합한 능력을 의미했다. '권위'는 지니고 있었지만 '역량'이 모자란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것이 네로의 운명을 결정했다. 네로 이후의 황제들도 위의 세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것을 요구받았다는 점에서는 네로 이전의 황제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정당성과 능력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권위까지 창출해야 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우선 황제를 자칭한 갈바 자신이 누구보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군단이 그를 황제로 옹립한 것은 서기 68년 초여름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네로가 자살한 것을 알았다. 갈바는 당장 로마로 갔어야 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 들어가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혀놓아야 했다. 원로원이 그를 승인하고 로마 시민인 근위병들도 갈바의 즉위를 환영하고 있었으니까 '정당성'은 얻은 셈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으니까 그런 종류의 '권위'는 없었지만, '역량'은 갈바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되도록 빨리 로마에 들어가 황제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라고 불린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가 그의 임지였지만, 총독 주재지인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에서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까지는 순풍을 타고 직항로를 따라가면 닷새밖에 안 걸린다. 불안한 해로를 피해 육로를 택한다 해도, 남프랑스를 돌아 이탈리아로 들어가서 로마에 도착하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지역-의 가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되지 않았던 100년 전에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마르세유까지 가는 데 12일밖에 걸리지 않았고, 마르세유에서 에스파냐 북부 산지에 있는 레리다까지는 17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는 로마의 도로망이 훨씬 잘 정비되어 있었을 테니까. 갈바가 서두를 마음만 먹었다면 타라고나에서 로마까지 간선도로를 따라 편하게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갈바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가을로 접어든 뒤였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갈바는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이상을 허비해버린 모양이다. 로마 도착이 늦어진 것도 단지 느긋하게 여행했기 때문이고,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시간을 활용하여 필요한 조치를 내리는 배려조차도 하지 않았다. 한 세기 동안이나 지속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붕괴라는 중대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막중한 시기에 석 달 동안이나 권력을 공백 상태로 방치해둔 셈이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는 원로원이 일찌감치 인정해준 '정당성'을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다. 원로원이 승인해준 것만으로도 자신의 지위는 확고해졌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또한 로마의 귀족으로 태어나 자란 갈바는, 네로를 대신할 황제를 뽑는다면 자기야말로 가장 적임자라고 과신한 게 아닐까. 게다가 72세라는 고령 때문에, 이런 경우에 가장 필요한 과단성을 잃고 있었던 게 아닐까.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한 뒤에도 수도 로마 출신의 귀족이라는 신분은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피통치자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어난 곳이 칼리굴라나 네로처럼 로마 근처의 소도시 안치오라 해도, 또는 클라우디우스처럼 갈리아 속주의 주요 도시 리옹이라 해도 상관없다. 요컨대 '본적지'가 수도 로마라는 게 중요하다. 제정을 맨 먼저 착상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뿐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본적지를 로마로 옮긴 것도 아우구스투스의 본적지가 지방인 벨리트라이(오늘날의 벨레트리)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집안은 오래 전부터 수도 로마에 뿌리를 내린 명문 귀족이었다. 건국한 지 800여 년이 지나자, 자연의 흐름에 따른 소모와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은 소모 때문에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갈바 가문은 그 얼마 안되는 명문 귀족 가운데 하나였다. 제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명문 귀족이라는 신분만으로는 자신의 통치권을 피통치자에게는 납득시킬 수 없었다. 명문 출신이라는 것 외에 국가 요직을 경험한 경력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는 갈바는 자격이 충분했다. 인재 등용의 흐름 속에서 속주 총독이나 사령관에는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 출신이나 속주 출신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제정 시대. 수도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으로 속주 총독을 지낸 갈바는,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황제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네로 타도의 선봉장이었던 갈리아 총독 빈덱스도 네로를 대신할 황제로 갈바를 천거했다. 빈덱스는 속주 총독이라는 요직을 맡고는 있었지만 갈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네로에게 반기를 들어도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라인강 방위를 맡고 있는 로마군 사령관 루푸스는, 당신에게 황제가 될 용기가 있다면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는 부하 장병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루후스는 로마군에서도 최강으로 알려진 라인 강 방위군 사령관을 맡을 만큼 유능한 장수였지만, 출신지가 북이탈리아의 코뭄(오늘날의 코모)인데다 신분도 로마 사회에서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이었다. 네로는 이들과는 달리 어머니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고, 친가인 아혜노바르부스 집안도 공화정 시대부터 줄곧 수도 로마출신의 명문 귀족이었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지만,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까지 바꾸기는 쉽지 않다. 네로가 죽은 뒤. 로마인들이 수도 출신 귀족으로 요직 경험자라는 조건을 갖춘 갈바의 즉위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과거와 급격히 단절되지 않는 무난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지위를 확립하는 것은 갈바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서기(68년 여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해도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출신지는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도시인 리에티였고, 아버지는 원로원에 의석을 갖기는커녕 군단에서 퇴역한 뒤 스위스로 가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형은 수도 로마에서 행정관-요즘으로 말하면 공무원-으로 출세를 꿈꾸었고, 동생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에서 출세하는 길을 선택했으니까, 그의 집안은 지방의 전형적인 중류층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과는 달리 갈바는 수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지만, 기원전 3년께로 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되찾은 로마에서 인격 형성기를 보낸 셈이다.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에는 역시 티베리우스 황제 밑에서 집정관을 지냈다. 서기 39년에 칼리굴라 황제는 그를 라인 강 방위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4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갈바는 브리타니아 제패를 마무리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따라 브리타니아에 가게 되었다. 실제로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는 일은 플라우티우스나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직업군인들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명문 귀족인 갈바는 황제 수행단의 일원이 되는 게 어울렸을 것이다. 갈바가 47세 때의 일이다. 그후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선임되어 카르타고로 가서, 1개 군단을 지휘하며 1년의 임기를 마쳤다. 아프리카 속주는 원로원 속주로 분류되어 있어서, 공화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임기가 1년이었다. 그후 본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원로원 의원 생활을 계속한 모양이다. 그런데 서기 60년에 네로 황제는 환갑이 지난 갈바를 황제 속주인 에스파냐 북동부의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갈바의 에스파냐 생활은 이때부터 네로가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총독은 속주 통치의 최고 책임자다. 갈바는 아프리카에서 1년, 에스파냐에서 8년 동안 총독을 맡았다. 그동안 한번도 속주민에게 고발당하지 않았다. 로마는 총독의 통치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속주민에게 총독을 고발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주민에게 한번도 고발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갈바의 통치는 속주민들도 만족할 만큼 선정이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갈바는 황제를 자칭한 뒤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편성했는데, 그 작업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갈바의 요청에 따라 군단병을 지원한 에스파냐인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북아프리카나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방위전략상으로 볼 때 '최전방'이 아니었다. 갈바가 맡고 있던 타라코넨시스 속주에는 3개 군단이 배치되는 게 보통이지만, 그중에서 2개 군단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뒤로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1개 군단밖에 주둔하지 않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갈바는 문제가 별로 없는 속주를 통치해본 경험밖에 없었다. 최전방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갈바의 즉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갈바는 한시라도 빨리 황제의 지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행렬을 거느리고 느긋하게 로마로 들어간 갈바는, 이런 경우에 꼭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반대로 해서는 안될 일을 해 버렸다.
민심장악책
로마가 재정으로 바뀐 뒤, 황제가 새로 즉위하거나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수도의 평민이나 속주의 군단병들에게 보너스를 나누어주는 관습이 생겼다.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고, 실제로는 민심을 장악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인당 보너스는 군단병 연봉의 3분의 1 정도였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소비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제정의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는 물론이고, 철저한 긴축재정을 실시한 티베리우스조차 이 인기 정책을 채택했다. 이런 정책이 오현제 시대에는 필요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면 돈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4세기 이후의 로마 제국은 경제 쇠퇴에 따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기독교도인 황제도 푸짐한 보너스를 나누어 주었다는 점에서는 이교도 황제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독일의 카를 w. 베버가 쓴 연구서에 따르면, 로마의 역대 황제들이 나누어준 보너스는 다음 쪽의 표와 같다. 필요악이라고 해도 좋지만, 어쨌든 이것이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갈바는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주지 않았다. 병사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지원한 사람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그것이 정론이다. 그러나 정치는 정론만으로 할 수 없다. 타키투스는 갈바를 단 한 줄로 처리하고 있다.
"좋은 자질을 타고났다기보다 나쁜 자질이 전혀 없었던 데 불과한, 요컨데 평범한 인물이었다."
100년 동안이나 지속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뒤를 잇는 것은 갈바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보너스 문제야 그렇다 치고, 그의 실책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협력자 인선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혼자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협력자를 선택하는 것은 통치자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피통치자들은 협력자 선발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치자의 역량을 헤아리는 것이 보통이다. 갈바는 제1협력자로 당연히 오토를 선택했어야 한다. 오토는 황제가 되겠다고 나선 갈바에게 속주 총독으로서는 누구보다 먼저 지지를 표명한 인물이었다. 오토를 제1협력자로 선택했을 경우의 이점은 세 가지다.
(1)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는 갈바만큼 명문 귀족은 아니지만, 수도 로마를 '본적지'로 하는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다. 따라서 네로의 뒤를 이은 갈바가 제2인자로 오토를 발탁하면 피통치자가 거부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다.
(2) 게다가 오토는 10년 동안이나 루시타니아(오늘날의 포르투칼) 속주 총독을 지냈고, 그 동안의 선정은 수도 로마에서도 평판이 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서기 1세기 당시의 로마 제국에서는 '전방'이 아니었다. 하지만 속주 통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제국 전체에 가장 중요한 사항인 것은 변함이 없다. 속주민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전방'을 지키고 있는 군사력의 일부를 이동시켜 진압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독이 속주민도 만족할 만한 선정을 계속하고 있는 한, 저 넓은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6천 명의 병사만 주둔시키면 충분하다. 로마 제국이 속주민에게 총독 고발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제국 전체의 안전보장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속주가 조용해야 병력을 동원하는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갈바가 오토를 제2인자로 선택했다면, 오랫동안 속주를 공정하게 다스린 실적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 제국 통치의 제1인자와 제2인자 자리에 않게 된다. 갈바 혼자서는 제국 최전방 지역의 속주 총독에 비해 '무게'가 떨어지지만. 오토와 짝을 이루면 이런 불리한 요건도 희석된다. 로마 제국의 '전방'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다.
(3) 오토는 36세의 젊은이였다. 황제를 자칭하고 나선 갈바에게 속주 총독으로는 가장 먼저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오토는 야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야심을 당장 실현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갈바는 72세의 노인이니까 당분간은 협력해도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오토는 갈바의 로마행에 동행하여 함께 수도에 들어갔고, 68년 겨울에는 수도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이 오토를 제1협력자로 선택했다면, 갈바로서는 경쟁자 후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갈바가 이듬해인 서기 69년에 자신과 함께 나라를 다스릴 동료 집정관으로 선택한 것은 비니우스였다. 비니우스는 총독 시절의 갈바 밑에서 군단장을 지낸 인물로 갈바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지만, 문제가 별로 없는 속주의 일개 지휘관에 불과하다. 제국의 '전방'을 지키는 장병들은 비니우스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인사로 갈바는 자신의 지지자가 될 수 있었던 많은 사람을 잃게 된다.
첫째, 배신감을 느낀 오토. 둘째, 제국 방위를 짊어지고 있다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고 실망한 최전방 기지의 장병들. 셋째, 집안이 좋다는 이유로 갈바를 지지했는데,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귀인지는 알 수 없는 자를 제1협력자로 선택한 것을 보고 갈바에게 불안과 불신감을 품게 된 원로원 의원들. 70세가 넘은 갈바의 나이가 이 경우에는 불안 요인으로 바뀌었다. 넷째, 수도 로마의 서민들. 이들에게 네로는 무슨 짓을 해도-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결과로 끝났던 간에-황제다운 황제가 아니었다. 로마 시민들은 되도록 좋은 일을 하는 황제다운 황제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바가 하는 일은 소극적인 노인이 할 만한 일뿐이었다. 어쨌든 보너스도 주지 않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제2인자로 발탁된 비니우스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비니우스 자신도 황제의 동료 집정관으로 선임되자마자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밖에 모르는 인물이었으니, 갈바의 인사는 이중으로 잘못된 셈이다. 갈바는 재정 재건책에서도 실수를 저질렀다. 재정을 재건하겠다고 선언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구체적인 방책은 사람들의 냉소를 샀을 뿐이다. 그가 내놓은 시책은 네로한테 받은 금품을 반납하라는 것이었다. 네로는 선물하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유력자나 부자에게 선물한 것은 아니다. 로마 사회에서 하층계급에 속하는 가수나 배우, 기수, 검투사 등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네로의 통치 기간은 14년이나 된다. 수년 전에 선물받은 것을 반납하라면, 곤혹스럽다 못해 난처해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돌려받는 데 성공했다 해도, 그 정도 금액으로는 대제국 로마의 재정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도 의심스럽다. 갈바의 재정 재건책은 화젯거리만 제공하는 것으로 끝났다. 갈바는 수도에 들어온 이후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던 석 달을 줄곧 그런 실수만 하면서 보낸 셈이다. 그래도 '전방'에 나가 있는 사령관들은 갈바에 충성 서약을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라고 쓸 수밖에 없는 까닭은, 68년 말 현재 갈바에게 도착한 충성 서약은 수도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라인 강 방위군 사령관 루푸스가 보낸 것뿐이었고, 머나먼 시리아나 전쟁 중인 유대에서 보낸 충성 서약은 지중해를 건너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최전방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 갈바의 역량을 인정해서 충성을 서약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은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철저한 실력제일주의 노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신분이나 출신지와는 관계없이 실력만 충분하면 등용될 수 있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실력을 인정받기 쉬운 군사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물론 그들도 제국의 요직에 취임할 때의 자격 조건인 원로원 의석을 갖고 있긴 했다. 하지만 '신참자'(호모 노부스)인 그들은 조상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명문 출신도 아니고, 본적지도 수도 로마가 아니다. 제국 방위를 떠맡고 있다는 자부심은 남달랐지만, 신참자인 만큼 기성체제의 상징인 원로원을 존중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갈바는 그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었다. '전방' 사령관들이 갈바에게 호의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네로에게 실망한 반동으로 갈바에게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사가 몸젠이 말하는 '티베리우스 문하'는 많은 직업군인을 배출하여 제국방위에 이바지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역사적으로 로마의 가상적국 제1호인 파르티아 왕국과 항구적인 우호관계를 확립한 코르불로다. 실력파 장군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코르불로에게 네로는 아무 증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자살 명령을 내렸다. 불과 1년전에 일어난 이 사건의 충격을 그들이 잊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갈바는 이들의 호의에 찬물을 끼얹는 짓을 해버렸다. 라인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푸스를 해임하고 본국으로 소환한 것이다. 게다가 본국으로 불러들여 다른 요직에 앉힌 것도 아니다. 그냥 해임하고 귀국을 명령했을 뿐이다. 루푸스의 후임으로는 나이가 많고 성격도 소극적인 플라쿠스를 보냈다. 플라쿠스라면 경쟁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공석이었던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는 비텔리우스를 임명했다. 자기와 같은 원로원 계급 출신인 비텔리우스라면 끝까지 자기를 지지해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사는 병사들의 분노만 샀을 뿐이다. 루푸스는 병사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로마 제국의 '전방' 중에서도 라인 강 연안은 기후가 혹독하고 지형도 험한 열악한 여건에서 용맹한 게르만족을 상대하는 만큼, 다른 어느 지방보다 중요시되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 군단을 이동시키는 경우는 있었지만, 7개 내지 8개 군단, 4만 2천 내지 4만 8천 명의 상비군 병력이 언제나 집중되어 있는 곳은 제국에서 이 일대뿐이었다. '게르마니아 군단' 또는 '라인 군단'이라고 불린 이 군단에 소속된 병사들은 최전방을 맡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심중에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에스파냐 속주를 통치해본 경험밖에 없는 갈바가 제국을 어떻게 통치할지 두고 보자는 생각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갈바에 대한 반감이 라인 강 전선에서 맨 먼저 폭발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서기 69년 1월 1일, 수도 로마에서는 신임 집정관을 맞아 그해의 첫 원로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1월 1일이 업무를 시작하는 날이었지만, 역시 그날만은 의제 토의를 뒤로 미루고 신임 집정관의 취임식 같은 분위기로 하루를 보낸다. 심복인 비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한 갈바에게는 유쾌한 하루였을 것이다. 로마의 정치제제에서 공식적으로는 최고위 공직인 집정관에 취임한 것은 갈바 치세의 본격적인 출발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역대 황제들도 즉위와 함께 집정관을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날 라인 강 연안의 마인츠에 있는 군단기지에 모인 병사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갈바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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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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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 - 동쪽에서온사람(오히예사) - 샨티 수우 족
"모든 영혼은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서야 한다..."
인디언은 생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종교적이다.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되는 첫날부터 젖을 떼는 두 살 무렵까지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영적인 영향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인디언 어머니는 아이를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순결한 언행과 은밀한 명상을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열려 있는 영혼에게 그가 모든 창조물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인디언의 아이 교육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첫번째 규칙으로 삼는다. 그녀는 거대한 삼림의 정적 속에서, 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평원의 가슴 위에서 홀로 산책을 한다. 그리고는 시적인 마음을 통해 장차 위대한 영혼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리라고 상상한다. 원시의 숨결이 어린 대자연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아무도 그 상상을 방해하지 않는다. 가끔씩 들리는 소나무의 한숨소리나 먼 거리의 폭포소리만이 그녀의 상상을 일깨울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의 삶에 새로운 순간이 열리고, 또한 새로운 삶이 그녀를 통해 지상에 나오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그녀는 혼자서 새 생명을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다했다. 인디언 어머니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신성한 의무라 여긴다. 인디언은 아이의 출산은 어머니 혼자서 맞이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 여긴다. 타인의 호기심은 방해만 될 뿐이다. 대자연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소리친다. "이것은 사랑의 힘이다! 이것은 생의 완성이다!"
아이를 인디언 천막으로 데려오면 어머니의 영적인 가르침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손가락으로 아이에게 자연 속의 사물들을 가리켜보일 뿐이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새처럼 노래를 속삭여 준다. 어머니와 아이는 새를 사람과 똑같은 존재이며, '위대한 신비'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 여긴다. 아이가 성급하게 행동할라치면 어머니는 부드럽게 주의를 준다. "그렇게 하면 영혼이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자작나무가 수런대는 소리, 사시나무의 은빛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밤이면 소리없이 길을 여행해 가는 별들의 대장정을 손짓해 보인다. 침묵, 사랑, 경외감 - 이것이 아이 교육의 세 가지 기준이며, 아이가 좀더 성장하면 자비심, 용기, 순결성의 기준이 뒤따른다.
인디언은 무엇보다도 겸허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친다. 특히 영적인 자만심은 인디언의 성격이나 가르침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인디언은 자신의 말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서 문명인들처럼 상대방을 '어리석은 야만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디언은 침묵의 힘을 믿으며, 그것을 완전한 평정의 표시로 여긴다. 침묵은 육체, 정신, 영혼의 절대적인 조화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영혼이 흔들림없이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 - 나무 이파리 하나 떨리지 않고 물결 하나 일지 않듯이 지식에 물들지 않은 현자의 마음을 갖는 것을 인디언은 생의 목표로 삼는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인간이라 여기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디언과 한 부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에 가까운 학생들이다. 인디언은 문명인들이 책을 갖고 공부하듯이 자연 속의 여러 행동방식들을 통해 배운다. 인디언 아이들은 같은 부족의 어른들을 지켜봄으로써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배운다. 야생의 평원에 사는 아이들만큼 오감을 잘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보고 듣고 냄새 맡는다. 또한 깊이 느끼고, 깊이 맛본다. 야생의 생활만큼 기억력을 발달시키는 생활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침묵과 과묵함을 배웠다. 이것들은 인디언의 성격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사냥꾼과 전사가 되기 위해선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또한 인내심과 자기를 다스리는 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디언 아이들은 문명 국가의 아이들이 법률가나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하듯이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우정을 간직하는 것, 그것이 인디언에게는 삶 속의 가장 중요한 시험이다. 가족과 친척에게는 누구라도 쉽게 신의를 지킬 수 있다. 같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애정은 짝짓기의 본능에 기초하고 있으며 욕망과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친구를 갖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표시이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이 우리 인디언의 믿음이다. 물질적인 길을 뒤쫓으면 영혼이 중심을 잃는다. 따라서 인디언은 어렸을 때부터 자비심의 미덕을 배운다.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남에게 주도록 가르침 받으며, 그래서 일찍부터 주는 것의 기쁨을 알게 된다. 인디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친구나 다른 부족에서 온 손님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늙은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준다. 그리고는 절대로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남에게 베푸는 법을 알았다. 그런데 문명인이 된 다음부터 그 아름다움을 잊어버렸다. 그때는 자연스런 삶을 살았으나 지금은 인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는 조약돌 하나도 가치 있게 여겼으며, 나무를 봐도 놀라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문명인들과 더불어 액자에 넣어진 풍경화 앞에서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있다니! 바위를 갈아서 생긴 돌가루로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로 문명사회의 인위적인 벽을 쌓듯이, 내 안에 있던 인디언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에 말을 잃을 때가 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내린다. 그런가 하면 드넓은 평원에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한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의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의 날이기에! 모든 영혼은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그 새롭고 부드러운 대지,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마주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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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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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몽마르트르 - 전혜린
내가 살고 있는 뮌헨 북부의 일구(一區)는 슈바빙이라고 불리워지는 독특한 지대다. 슈바빙이라는 단어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파리의 몽마르트르나 쌩 제르맹 데 쁘레와 마찬가지고 한 개념이 되어 있다. 이 지대의 역사도 굉장히 오래되어 있어서 이십 세기에 어떤 일족이 이동해와 정착한 것에서 출발하여 점점 발전하고 확장되어서 결국은 뮌헨이라는 대도시가 생겨나다고 한다. 따라서 슈바빙은 뮌헨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슈바빙을 유명하게 만들고 독일의 다른 도시 또는 도대체 독일적인 것과 구별하고 있는 것은 그 오랜 역사 때문이 아니라 특유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독특한 맛-[슈바빙적]이라는 말 속에 총괄되는 자유, 청춘, 모험, 천재, 예술, 사랑, 기지......등이 합친 맛으로서 옛날의 몽마르트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자기의 맛을 가진 정신적 풍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차 대전 후의 몽마르트르나 이차 대전 후의 쌩 제르맹 데쁘레에 일말(一抹)의 우수(憂愁)(독일의 로만티스무스의 안개)와 게르만의 무거운 악센트를 붙인 곳이라고나 할까? 슈바빙의 주요도로인, 거대한 포플러 가로수로 장식되어 있는 아름다운 레오폴드가를 따라 올라가면 사람들은 언제나 평범한 셀러리맨과 중산계급 주부들에 섞인 슈바빙가(슈바빙족)들을 볼 수가 있다.
도로에 의자와 테이블을 내놓은 테라스,카페에 앉은 보들레르식 머리를 기르고 [실존주의자 수염](반 고호 식 수염으로, 화가 수염이라고도 한다)을 기른 검은 스웨터에 검정 골덴 바지를 입은 청년과 마리나 블라디 또는 브리짓드 바르도 식 머리를 한, 화장은 안하고 눈가만을 검게 그리고 끝을 올린 소녀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 잔의 커리 또는 아무것도 안 마시고 담배만을 연거푸 피우면서 몇 시간간이라도 그들은 토론하고 있다. 그들의 화제는 몹시 시대정신과 저널리즘에 민감한 것을나타내고 있으나 특별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영화와 축음기판, 쥴리옛타 마시나와 하이데카, 라이오 넬 헴튼과 석간 신문,시, 기계, 건축, 연애, 강의 노우트, 소련의 로켓....등이 화제다. 그러나 슈바빙적인 것은 어떤 얘기 속에도 얘기 그 자체가 아니라 행간에 놓여 있다. 말해지지 않은 속에 억제된 감동,욕망, 기대가 스며 있다. 돈,시간표, 소시민근성,인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의 의식이 어떤 화제 사이에도 그들을 침묵 속에 굳게 맺어서 일종의 분위기를 빚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테마는 예술이다. 어디선지 모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있고, 조각을 쪼고 있고, 시가 쓰여지고 있는곳, - 감수성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질 청춘과 보헴과 천재의 꿈을 일상사로서 생활하고 있는 곳, 위(胃)보다는 두뇌가, 환상이 우선하는 곳....이런 곳이 슈바빙인 것 같다. 이러한 슈바빙의 주민들(대부분이 학생, 화가, 배우, 음악가, 기자, 시인,마네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에게서 나올 뿐만 아니라 슈바빙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인 수많은 싼 음식점과 댄스홀에서도 풍기고 있다. 즉 한자의 맥주와 한 접시의 수프로 저녁을 대신하고 몇시간씩 난로를 쬐고 트럼프나 하모니커로 놀기까지 하는 학생들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 무관심한 음식점, 한 잔의 맥주로 몇시간 동안이라도 춤출 수 있는, 초 피카소적 장식을 벽에 막그린, 학생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촛불 몇 개만 켜 놓은 어두운 댄스홀, 흑인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도 주저를 안 느끼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사랑할 수 있는 유일의 장소, 이것들이 슈바빙의 특성이다.
어떤 외국 사람에게도 정신적 고풍만을 같이 한다면 지리적 고풍은 의식하지 않게 해 주고 잊게 만드는 곳이 슈바빙인 것 같다 그들이 모여서 가끔 여는 그림 전람회에 [노아의 방주]라는 것이 있는데 그 곳든 폭격맞은 폐허 속에 유지된 단 하나의 방으로서 천정은 머리가 닿게 얕고 어둡다. 그 속에 놀라운 요란한 색채와 기상 처뇌한 착상의 그림자들이 마치 옛날 다다이즘의 한창 때처럼 소심한 시민들을 질색시키기 위한 듯이 진열되고 있다. 그림 밑에는 전부 값이 적혀 있지만 한 개도 붉은 종이가 안붙은 것도 무리가 아니게 보였다. 꿈에 나올 것 같은 인물화, 식욕이 없어질 것 같은 정물,신경 쇠약게 걸릴 것 같이 강열한 요란한 색채의 그림들은 [노아의 방주] 이외의 다른 집을 찾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슈바빙의 또하나의 명물로서 영화연구소라는 아주 작은 의자도 딱딱하고 나쁜 쓰러져가는 영화관이 있다. 이 곳에서는 현대의 영화기술 시네마스코프 최하의 값과 학생 할인으로 그러나 最高(또는 最古? 의 영화를 보여준다. 차프린 한창 시절의 영화, 그레타 가르보의 다시없는 미모, 디트릿히의 젊은 발바리, 모아 형제,독일이 낳은 최고 배우 에밀 야닝스의 불후의 여기, 콘라트 화이트, 폴라 네그리아스타 닐센.....등의 무성 영화에서부터, 무성영화에서 토키로 옮겨가는 경계선의 명서를 원어 녹음과 독일어 자막으로 다른 영화관에서는 다 독일어 녹음이다)다른 영화관을 한바퀴 다 돌고난 후에 얻어다가 보여준다. 하여간 슈바빙은 이 무서운 날카로움으로 발전해 가는 기계 문명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잇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 말하자면 시계바늘과 함께 뮤즈의 미소도 발을 멈추고 얼어붙어 버릴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슈바빙은, 전독일에서 전구라파와 미국에서 재능있고 환상에 넘친 모범적인 젊은이들을 끌어오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특수한 풍토를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젊은 토마스 만, 왓싸만, 웨데킨트, 스테판 게오르게....들을 뮌헨에 끌었던 것도 이 슈바빙적인 것 때문이라고 한다.
이 풍토는 그 속에 한번 들어가서 그것을 숨쉬고 그것에 익고나면 다른 풍토는 권태롭고 위선적이고 딱딱하고 숨막혀서 도저히 못참게 되는 곳인 것 같다. 이 곳에서는 아직도 가난이 수치 대신에 어떤 로매틱을 품고 있고, 흩어진 머리는 정신적 변태가아니라 자유를 표신한 것으로 간주되며 면밀한 계산과 부지런한 노력 대신에 무료로 인류를 구제할 계획이 심각히 토론된다. 물론 이 형형색색의 슈바빙 족속은 근본적으로 보아서 한 오해 또는 참된 예술의 어떤 카리카추어일 것이다.그러나 사무실과 공장과 스케줄과 실험실 속에서 육일과 어덟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에게 특이한 것에의 예감, 자유의 향기...같은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종종 기괴한 이방인들 삐에로, 방랑인 집시..등인 것처럼, 슈바빙가의 무위와 허영과 천재연한 태도속에서도 거부할 수 없이 풍기며 평상인에게도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자유]인 것 같다. 그들의 속과 주위에는 무제한한 자유가 있다. 무위에의 자우, 천재적 착상과 인스피레이션에의 자유, 그리고 돈과 기차 시간표, 착한 시민 근성,입습과 타협으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슈바빙가는 아마 마지막의 개인주의자이며 생활예술가인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얘기만 하고 있는 [정신의 자유]를 그들은 맨 주먹으로 감행해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슈바빙적 정신은 결국은 일반적인, 뮌헨적인 것을 특별히 보다 모험적으로 동요되고 지성적으로 날카로와진 형태속에 압축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뮌헨의 공기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이러한 슈바빙적 냄새가 떠 있다간 어떤 기회에 돌연 괴이한 프라카드 그림, 또는 사육제나 시월제(맥주제)속에서 분출되는 것 같다. 슈바빙은 한 마디로 청춘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회생도 적지 않게 바쳐지는 ,그러나 젊은 목숨이 황금빛 술처럼 잔에 넘쳐 흐르고 있는 꿈의 마을, 이것이 슈바빙이 아닐까? 본질을 파악,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신선한 바다바람같은 자유의 냄새로 사람을 매혹하고 마는 곳-학생 시절을 슈바빙에서 보내고 일생 동안 그 추억을 잊지 못한 토마스 울프가[뮌헨을 말하려거든 [뮌헨은 독일의 하늘(천국)이다]라는 말을 빼놓지 말아라]라고 말한 것도 이런 뜻일 것이다.
끝으로 온갖 것이 합리와 이성으로 처리되는 독일에 빌고 싶은 것은
[슈바빙과 함께 보헴의 정신이여 ! 길이 살아라]
-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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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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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울주 영취사지 - 신라인의 익살과 기행
신라 31대 신문왕 때 재상 충원이 장산국(동래로 추정)의 온천에서 목욕하고 돌아오다가 들에서쉬고 있었다. 그때 누가 매를 놓아 꿩을 쫓는 광경을 보았다. 꿩은 멀리 날아갔다. 찾아가보니 굴정현 관청 북쪽의 우물가 나무 위에 매가 앉아 있었다. 꿩은 우물 속에 있었다. 우물은 핏빛이었고,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를 안고 있었다. 매는 그 정경을 보고 불쌍히 여긴 듯 감히 꿩을 잡지 않았다. 충원은 측은한 느낌이 들어, 왕에게 아뢰어 현의 청사를 옮기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영취사의 내력이다. 영취사의 위치 영취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굴정이라는 지명도 남아있지 않다. 이 이야기의 근거지는 울산 남쪽 8km 지점에 있는 문수산(옛 영취산)이다. 문수산 동쪽 기슭에는 영취마을(울산시 청양면 율리)이 있다. 울산에서 부산 가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0km쯤 가면 처용설화와 관련이 있는 망해사 입구가 나온다. 이를 지나면 바로 오른편으로 문수산 입구가 있다. 입구의 마을이 율리 마을의 초입이다. 40여 호의 집들이 산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율리는 지금도 주민들에 의해 영취마을이라 불리는 데, 바깥 영취와 안 영취 마을이 문수산에서 뻗어 내린 낮은 뫼뿌리를 가로지른 낮은 고개를 사이하여 분리되어 있다. 안 영취 마을 앞의 논바닥에는 부서진 돌탑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이곳이 영취사지가 아닌가 한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곳이 영취사지라는 근거는 있다.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은 "젊었을 때 마을 노인들로부터 이곳이 영취사의 절터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말한다. 마을 이름을 옛부터 '영취'라고 불러온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이 마을을 지나 문수산 중허리를 넘는 고개가 있다. 산 중턱의 문수암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작동마을과 굴화(범서면 굴화리)로 연결된다. '굴화'라는 이름은 '굴정'이라는 이름과 첫자가 같다.
인간으로 화한 문수보살
삼국유사 피은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가 이 고개 위에서 벌어진다. 신라 38대 원성왕 때 영취사에 연회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항상 법화경을 읽으며 정진했다. 그의 도는 높아 뜰의 연못에는 언제나 연꽃 두어 송이가 피어 사철 시들지 않았다. 왕이 그 상서로운 소문을 듣고 그를 국사로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연회는 암자를 버리고 피해 달아났다. 서쪽 고개의 바위를 넘어가노라니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라에서 나를 벼슬로 얽매려들기에 피해가는 길이오"라고 연회가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이름을) 팔지, 뭘 그리 멀리까지 가서 팔려고 하오. 법사는 이름 팔기가 싫지 않은가보군"하고 빈정댔다. 연회는 모욕감을 느끼며 그곳을 떠났다. 한참 가다가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도 역시 어디가느냐고 물었다. 아까처럼 대답하니 노파는 "좀 전에 누굴 만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연회가 노인 얘기를 하자 노파는 그가 바로 문수보살이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연회가 되돌아가 그 노인 앞에 꿇어앉았다. 그때 노인은 시냇가의 그 노파를 바로 변재천녀의 화신이라고 말해준다. 변재천녀는 영가와 음악을 맡은 여신으로 문수산의 산신으로 떠받들려 오는 신이다. 놀란 연회는 국사 자리에 앉는 것이 신의 배려임을 알고, 영취사로 되돌아가 임금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이 재미있는 '해프닝'은 현실의식이 짙은 신라인들의 면모를 거리낌없이 보여준다. 주어진 현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도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생각하면 이 '해프닝'은 심한 야유와 '아이러니'가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연회가 번거로움을 싫어해서 달아난 것은 진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숨기를 원한다면 애초부터 연꽃을 피워 천하게 향기를 뿌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 짓은 점잖은 척하면서 실은 이름을 파는 매명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이 두 가지 뜻을 한 짧은 얘기 속에 포함시킨다.
민중불교를 상징하는 남루함
재미있는 것은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의 변장술이다.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와 같은 거룩한 성인을 꾀죄죄하고 별 볼일 없는 노인과 노파로 슬쩍 분장시키는 상상력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상상력 속에는 흡사 민화를 보는 듯한 위트와 아이러니가 넘친다. 이 얘기에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의 곳곳에는 우스꽝스러운 노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예외없이 미륵보살이나 관음보살의 화신들이다. 때로는 고매한 도를 지닌 승려들이 남루한 행색과 기이한 장식을 하고 시중에 나타나기도 한다. 경흥국사가 잘 꾸민 말을 타고 호화롭게 대궐로 들어가다가 길에서 한 중을 만나는 이야기(삼국유사 감통편)도 그런 식이다. 이 승려는 남루한 옷에 지팡이를 짚고 마른 물고기를 담은 광주리를 메고 나타난다. 그래서 국사를 시종하는 사람들이 중이 고기를 지고 다닌다고 꾸짖자 그 중은 태연하게 "산 고기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뭐 어때서"하고 대든다. 말을 타고 가는 경흥국사를 비꼬는 말이었다. 이 남루한 중은 실은 경주 남산에 있는 문수보살상의 화신이었다. 신라인들은 이처럼 남루와 익살, 그리고 기행 속에다 성스러움을 감출 줄 알았다. 그것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 전환하는 원효 이래의 신라불교의 진면목이기도 했다. 이러한 익살과 기행은 엄숙함보다는 인간적이고 명랑함을 더 숭상했던 신라인들의 삶에 대한 의식이기도 했다. 영취사지로 추정되는 이곳은 현재 절터의 보호상태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 탑은 처참하리만큼 파괴되어 그냥 논가에 방치되어 있다. 탑은 기단(건물의 터전이 되는 받침대)의 터가 넓고 탑 조각들이 거대해 큰 탑이었을 성싶다. 탑은 두 개로 동서에 배치되어 있다. 그 중간에 비가 서 있는 듯싶은 거북돌이 남아 있다. 탑은 조각들을 수습하면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아직 당국에서는 이 탑지의 자리 파악도 않고 있는 데다 남은 유물들마저 논가에 방치한 채 손쓸 엄두를 내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월성 여근곡 + 관능적인 명당 설화
대구에서 경주 가는 고속도로를 달려 건천 못 미쳐 아화터널을 빠져나오면 오른쪽의 부산 골짜기에 여자의 성기를 쑥 빼놓은 듯한 작은 산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여근곡이다. 또는 속칭 '음문골', '보지골'로 불리기도 한다. 주소는 경주시 서면 신평2리. 경주 서쪽에 위치하며 건천읍에서 3km 떨어진 곳이다.
선덕여왕의 예언
이 골짜기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설화와 관계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삼국유사 기의편에 보이는 이 설화는 선덕여왕이 예언한 세 가지 특출한 지혜를 밝힌 것이다. 그중 이곳과 관련되는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개구리들이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신라 벼슬의 첫번째로 높은 직책) 알천, 필탄에게 명했다.
"훈련된 정병 2천 명을 데리고 속히 서쪽으로 나가서 여근곡이란 곳을 물어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다. 습격하여 잡아라." 각간들이 명령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 물으니 부산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숨어 있었다. 신라군은 곧 그들을 사살했다. 백제 장군 우소가 남산 고개에 숨었으므로 그도 에워싸 사살했다. 또한 백제의 후속부대 1천3백 명이 오는 것도 모두 죽였다. 신기하게 여긴 군신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개구리를 통해 백제군이 숨어 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개구리는 성내는 형상이니 군사의 상징이다. 옥문이란 여근이요, 여자는 음인데 그 색은 희고, 흰 것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서쪽에 군사가 있을 것을 알았다. 또한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이 에로틱한 풀이를 통해 신라의 전통적인 사상 속에 음양오행 사상이 합류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음양오행 사상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설화를 통해 보면 이때 이미 우리나라에는 이 사상이 들어와 있었으며, 그것이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양오행 사상은 특히 점복과 관계를 깊이 맺으면서 발전되어 온다. 선덕여왕의 이 얘기도 앞날을 미리 점치는 음양오행의 응용이 두드러진다. 신라뿐만이 아니라 고대국가의 왕은 제정일치의 주제자였다. 제사와 무당을 겸한 것이다. 그것이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권력 구조가 확립됨에 따라 무의적인 요소는 떨어져 나가고 통치자로만 바뀐 것이다. 신라에 있어서 선덕여왕 시기는 중기에 해당된다. 이보다 오래 전에 신라의 왕권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이 설화는 신라왕실에 여전히 초기 때의 무속 관습이 남아 있었음을 비쳐준다.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한 지형
여근곡은 부산의 계곡에 불쑥 솟아오른 작은 산이다. 정면에서 보면 여성 성기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대음순 부분은 전체 모양을 둥글게 싼 부분이며 푸른 소나무숲으로 덮였다. 소음순부분은 잡목숲을 이루고 있다. 질구 부분은 빽빽한 잡목숲을 이룬 가운데 샘이 있다. 중위는 깊은 계곡으로 패여있다. 여근에 해당되는 산은 너무 커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속도로변이나 국도변으로 나와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양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기이한 모양의 산은 산 아래 신평2리 마을 주민들에게는 신성하게 여겨져 왔다. 이 작은 산 위에는 명당의 혈소가 있다. 그 혈소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 또는 명군들에 의해 못질을 당했다는 전설이 아직 전해 내려온다. 또한 "이 산의 샘을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샘물은 동네 어른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져왔다"고 6대째 이 동네서 살아왔다는 김잠락 씨는 말한다. 조금만 감시를 소홀히 해도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부추기려고 타동네 총각들이 이 골짜기에 몰래 들어와 작대기로 휘젓기가 예사였다는 것이다. 현재 샘은 이 동네 상수도의 수원지가 되어 있다. 이 상수도 공사는 20여 년 전에 새마을 사업으로 완공됐다. 이 공사를 놓고 샘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동네 노인의 반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런 미신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면서 상수도 시설을 강행했다. 지금은 이 동네 60여 호의 주민들이 이 샘물을 먹고 있다. 동네전체가 여자의 음수를 먹고 있다는 묘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여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지형이 꽤 있다. 그러한 곳은 예외없이 명당이 되거나, 흉한 자리가 되고 있다. 명당과 흉한 자리는 산의 형세에 따라 달라진다. 산세가 가랑이를 벌린 형세를 한 것은 흉한 곳이나, 정숙하게 오무린 형세를 한 것은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흉한 산세 아래는 여자들의 바람기가 거세어지고, 남자들의 양기가 위축된다고 믿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편법을 쓰게 된다. 여성 성기형의 산세 반대편에 남성을 상징하는 돌을 세우거나 하여 음기를 누르는 것이 그것이다.
마주보이는 남성산
이곳 여근곡도 그 형상이 워낙 두르러지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 기세를 누를 필요를 느낀 듯하다. 그래서 들 건너 마주보이는 산을 남성산으로 설정했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한때 앞산은 남근을 세우고 여근곡으로 접근해 왔다고 한다. 앞산이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들을 건너려고 할 때 때마침 이들을 지나가던 '행금장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호통을 치며 막대기로 돌출한 '그 부분'을 내리쳤다. 그 힘이 너무나 세어 그만 그 부분이 잘린 채 앞산은 주저앉고 말았다. 현재 철도와 고속도로 중간의 들판에 길게 누운 낮은 언덕이 그때 잘린 산의 성기라고 한다. 여근곡도 앞산도 원한이 대단한 듯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잦았다. 이 성이 축성되기 전 선덕여왕 때 이 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어 신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채 여근곡은 여전히 수줍음도 없이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다.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유명한 여근곡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한다. 625사변 때 국도변을 따라 행군하던 미군들이 그 기묘한 산세에 탄성과 야유를 지르며 사진을 찍느라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고 마을 주민들은 말한다. 이 골짜기와 함께 부산산성은 절경의 경치를 가진 만큼 관광지로 개발이 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샘을 상수도시설로 대치한 것과 여근곡에 들어선 암자 등은 명소로서의 품위를 잃게 할 우려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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