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6호 - 2024.07.02 화요일(음력 : 05.27)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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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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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운전자들에게서 정중한 대접을 받으려면 경찰차를 모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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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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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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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배?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에게는 ‘대인배 김 선생’이란 별명이 있다. ‘대인배’는 2000년대 중반에 새로 만들어진 말인데 최근에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심심찮게 쓰인다. 새로 나온 국어사전에는 ‘도량이 넓고 관대한 사람을 소인배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등재돼 있다.
‘소인’은 마음 씀씀이가 좁고 간사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그 반대말은 ‘군자(君子)’다. 군자는 덕성과 학식이 매우 높은 인격자로, 유학에서는 성인(聖人)에 버금가는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이른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너그러운 태도를 지닌 사람을 소인이 아니라고 해서 군자라고 부르기도 적절치 않다. 사람을 ‘소인’과 ‘군자’로만 표현하려 하니 난처해지는 고민이 소인배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대인배’라는 말을 만들어낸 배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말이 만들어진 과정이 독특하다. 본래 ‘소인배’는 ‘소인(小人)’에 ‘-배’가 붙어서 된 말이다. 접미사 ‘-배(輩)’는 대개 부정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에 붙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폭력배’는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불량배’는 행실이나 성품이 나쁜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소인배’는 물론 소인들의 무리다. 그런데 ‘대인배’에는 부정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무리나 집단의 뜻이 전혀 없다. 무리보다는 김연아 선수 같은 특정인을 긍정적인 의미로 가리킬 때 쓴다. 한마디로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 조어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인배’라는 말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점점 쓰임이 늘고 있기도 하다. 잘못된 조어법에도 이 말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생명력을 얻을지, 아니면 유행어로 한때 잠깐 쓰이다 사라지고 말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청소년들의 경어법
얼마 전에 종방한 한 인기 드라마에서 한바탕 싸운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있었다. 내용상 익살스러운 설정이었지만 이 드라마 속 작은 일화는 경어법의 본질이 상호 간의 배려와 존중에 있음을 보여 준다.
1910년대 소설 ‘무정’의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학생들에게 “시간이 늦어 미안하외다” “김 군, 읽어 보시오”처럼 학생들에게 하오체로 말한다. 교사의 권위보다는 성숙한 학생을 존중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다. 필자의 은사님은 1950년대만 해도 대학에서 선배가 후배를 ‘학형’이라고 부르고 말도 높였다고 하시면서, 후배에게 반말을 하는 우리의 수직적인 말 문화를 지적하기도 하셨다.
이미 중학생이 되는 순간 아이들은 선배에게 존댓말을 쓰고,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한다. 주고받는 말에서 엄격한 상하 관계가 세워지고 마는 것이다. 거의 동년배라고 할 아이들이 “야, 너 이리 와” “예, 무슨 일이세요?”처럼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존댓말과 반말을 주고받는 청소년들의 불평등한 언어문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사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말 경어법이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반영한다는 비판적인 견해들도 적지 않다. 경어법은 우리말의 미덕이지만, 권위와 복종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수단일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밝고 아름다운 청소년 시기, “언니, 안녕히 가세요”보다는 “언니, 잘 가” 하는 말이 어울려 보인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평등한 말 문화를 만들어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핵융합’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북한이 지난 1월 6일 실시한 4차 핵실험이 북한이 주장하는 수소탄 핵실험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핵실험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최근 미국 CNN 방송이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수소탄 핵실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해 수소폭탄에 대한 관심이 또다시 증폭되고 있다. 원자폭탄이 ‘핵분열’ 원리를 이용하는 데 반해 수소폭탄은 ‘핵융합’ 원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수소의 원자핵이 서로 융합해 헬륨의 원자핵을 만들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살상·파괴용으로 이용하는 폭탄이 바로 수소폭탄이다. 수소폭탄은 보통 원자폭탄의 수십∼수백 배의 위력을 갖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핵융합’을 발음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해귱합]이라고 발음하면 안 되고 ‘ㄴ’ 음을 첨가해 [행늉합]이라고 발음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핵융합’이 ‘핵’과 ‘융합’의 합성어이기 때문인데, 표준발음법에 보면 “합성어 및 파생어에서, 앞 단어나 접두사의 끝이 자음이고 뒤 단어나 접미사의 첫음절이 ‘이, 야, 여, 요, 유’인 경우에는, ‘ㄴ’ 음을 첨가하여 [니, 냐, 녀, 뇨, 뉴]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가 ‘식용-유’를 글자 그대로 [시굥유]로 발음하지 않고 ‘ㄴ’ 음을 첨가해 [시굥뉴]로 발음하고, ‘색-연필’을 [새견필]이 아닌 [생년필]로 발음하는 이유도 바로 이 규정 때문이다. 핵과 관련된 합성어 중에서 뒤 단어가 ‘이, 야, 여, 요, 유’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많은데, 모두 ‘ㄴ’ 음을 첨가해 발음해야 한다. ‘핵-연료’는 [해결료]가 아닌 [행녈료]로 읽어야 하고 ‘핵-유전자’는 [해규전자]가 아닌 [행뉴전자]로 발음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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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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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구름 - 천상병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없이 목적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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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의 여름저녁 - 한용운
산 그림지는 집과 집을 덮고
풀밭에는 이슬 기운이 난다.
질동이 이고 물깃는 처녀는
걸음걸음 넘치는 물에 귀 밑을 적신다.
올감자를 캐어 지고 오는 사람은
서쪽 하늘을 자주 보면서 바쁜 걸음을 친다.
살찐 풀에 배부른 송아지는
게을리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다.
등거리만 입은 아이들은
서로 다투어 나무를 안아들인다.
하나씩 둘씩 돌아가는 가마귀는
어데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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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1 - 정지용
얼골 하나 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 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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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는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호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가 나를 비웃는 듯이 돌로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도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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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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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학려(風聲鶴?)
風:바람 풍. 聲:소리 성. 鶴:학 학. /:학울 려.
[출전] ≪晉書≫ ≪謝玄載記≫
바람 소리와 울음소리란 뜻으로,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의 비유.
동진(東晉:317~420)의 9대 효무제(孝武帝) 때인 태원(太元) 8년(383)의 일이다.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전진(前秦)의 3대 임금인 부견(?堅:338~385)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효무제는 재상 사안(謝安)의 동생인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 사석(謝石)과 조카인 전봉도독(前鋒都督) 사현(謝玄)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우선 참모인 '유로지'가 5000의 군사로 적의 선봉을 격파하여 서전을 장식했다. 이 때 중군을 이끌고 비수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부견은 휘하 제장(諸將)에게 이렇게 명했다.
“전군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그러나 이는 부견의 오산이었다. 일단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前秦軍)은 반격은커녕 멈춰 설 수도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동진군은 사정없이 전진군을 들이쳤다. 대혼란에 빠진 전진군은 서로 밟고 밟혀 죽는 군사가 들을 덮고 강을 메웠다. 겨우 목숨을 건진 군사들은 겁을 먹은 나머지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風聲鶴?]’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추격군이 온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주] 부견 : 전진(前秦)의 3대 임금.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 저족출신.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씀. 376년 화북(華北: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음.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함.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 (338~385, 재위 357~385).
? =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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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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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3. 움직이는 8기생들
군인을 일러 <국가의 간성>이라고 한다. 국토방위의 중책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군인이 권력에 매료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게 될까?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국토방위를 하라고 안겨준 총칼을 휘둘러 권력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쿠데타>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 마찬가지지만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인치고 권력에 매료되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는 하지 이 명분은 물론 대의(大義)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명분들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경우에도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보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군인이 있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와 육군 중령 김종필(金鍾泌)이 바로 그들이었다. <권력을 잡고자 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무슨 당치 않은 수작을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린 백척간두에 선국가의 위난을 보다 못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거야!> 하고 눈을 부라릴지도 모른다. 하긴 어쩌면 애국심에서 쿠데타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론으로서는 권력에 매료되어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째서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기로 한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이미 자유당 정권 때에 쿠데타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이 4.19로 해서 좌절됐다. 내세울 명분이 없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유당 때에 쿠데타를 계획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쿠데타의 명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얘기는 아닌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포기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주 그럴싸한 대의명분이 주어질 때까지 참으로 지혜롭게 일을 추진시켜 나갔다. 그것이 이른바 정군운동(整軍運動)이라는 <군을 정화하자!>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주 훌륭한 명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에 있어 정군의 필요성은 절실했다.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도 7년, 북한의 김일성 집단은 GNP의 25퍼센트를국방예산에 투입하며 군사력 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라고 해서 현상유지에 만족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면 군사력 증강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정군이었다. 왜 정군이 필요했던가?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군정에 의해 창군된 국방경비대에는 잡다한 성분의 출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군 출신자를 비롯해서 만군(滿軍), 중국군, 광복군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서 군대를 만들어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막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6.25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필연적으로 질보다는 양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자꾸만 계급을 높여 주었다. 창군 때에도 양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자 1년에 두서너 계단씩 올라가던 계급이 전쟁이 벌어지자 계급 진급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20대 장군이 수두룩한 판국이었다. 더구나 전쟁은 진급에 있어 옥석을 구분할 수 없게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장군들도 흔했다. 그런 무능한 장군일수록 정치권력과 결탁했거나 아니면 돈보따리를 안겨 주고 별을 단 자들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지휘관의 부패였다. 뱃속을 드러내 놓고 있는 지휘관들도 적지 않았다. 휴전으로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군대가 어느 정도로 썩어 있었던가? 한두가지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떤 군단장이 있었다. 황금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장군이었다. 돈을 좀 긁어모으기는 모아야겠는데 그렇다고 부하들더러 덮어놓고 현금을 상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짜낸 묘안이 <섰다판>이었다. 그는 휘하의 사단장들한테 전화를 건다. "이 보라우, 오늘 밤 심심한데 내 숙소에 모여서 섰다판이나 한판 벌이자구." 군단장이 심심하다고 섰다판을 벌이자는데 감히 바쁘다든가 또 다른 핑계로 섰다판 참석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섰다판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여기저기서 돈을 긁어모아 한 부대씩 지고 군단장 숙소로 향한다. 그리고는 섰다판이 벌어지면 자꾸 잃어주도록 애를 쓴다. 돈을 일부러 잃어준다는 것도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다. 어쩌다 장땡을 잡게 되면, "허어 이거 재수 옴붙었는 걸, 오늘 왜 이렇게 패가 이 모양이야?" 하고 미련없이 장땡패를 내던져 버리고 만다. 결국 사단장들이 짊어지고 간 돈부대는 군단장 주머니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들, 어째 섰다 실력이 그 모양이지?" 미소를 지으며 그런 너스레를 떤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 역시 황금을 사랑하는 사단장이 있었다.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껏 긁어모아 두어야겠는데 도무지 바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사병들한테 회충약을 먹이는 일이었다. 우선 휘하의 연대를 시찰한다. 그리고 나선 연대장에게 호통을 친다. "이 보라우 연대장, 귀관의 연대 사병들은 어째서 얼굴색이 모두 그 모양이야? 회충약을 먹이지 않으니까 모두 회충에 감염돼서 얼굴색이 노오랗게 떠 있는 게 아냐! 즉시 전 연대 장병에게 회충약을 먹이고 두 끼 정도 굶기도록 해!" 1개 사단은 3개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1개 사단의 병력은 족히 2만 명이 넘는다. 몇 가마니나 될까? 하여간에 사단장은 그 절약된 쌀을 내다팔아 자기 배를 채우는 것이다. 썩은 장성들은 이런 식으로 돈을 긁어 모았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잘 살면 얼마나 더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부정한 수법으로 모은 돈은 당대에나 좀 잘 살 수 있을까? 2대, 3대 자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지는 못한다. 부정하게 모은 돈은 부정하게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국토방위라는 신성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성들 가운데서는 그런 식으로 돈을 모으는 위인이 적지 않았다. "도둑놈의 자식 같으니. 저게 장군이야, 날강도지." 소장 장교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군령여산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들이는 짓은 중지해 주십시오.> 만일 이런 충고를 하든가 항변을 해보라. 당장 어떤 누명을 뒤집어 쓰고 군법회의 감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삭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군>은 이래서 필요했다. 한데 4.19 사태가 벌어졌고 세상이 뒤집혔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정군은가능할 것 같았다. 정군운동을 착안한 것이 바로 육군 소장 박정희였고, 육군 중령 김종필이었다. 두 사람은 처숙질 간이었다. 김종필이 박정희의 처 조카사위였던 것이다. 걸세. 정군운동을 일으켜서 군 수뇌부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보세. 그리고 정군운동은 동지획득의 길도 돼, 두 눈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정군운동에 찬성해 줄 걸세. 정군운동으로 동지를 획득해 놓고 혁명으로 급선회하는 걸세."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 부패, 무능한 지휘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정군>이 필요불가결의 요소였다는 데에 한국군의 비극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군대는 특수조직체다. 물리적인 힘으러 정군을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순리로 자연도태시키는 방법으로 해야만 옳은 일이었다. 허정 과도정권도, 또 영향력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요란스럽게 떠들며 정군을단행치 않고 있는 것은 군대가 특수조직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당장에 무력을 방패로 해서 대치하고 있는 적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군대에 동요를 일으켜 사기를 저하시키는 따위의 행위는 삼가해야만 했다. 지금 우리와 대처하고 있는 적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처음 보는 무뢰한들이었다. 그들에게 어떤 털구멍만한 틈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흉악하기 짝이 없는 적은 오늘의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남한을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보며 그런 처지에 군부에 동요를 일으키는 행위를 자행하는 따위는 절대적인 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김종필은 했다. 이른바 정군운동을 일의키기 위해서 동지포섭에 나선 것이다. 그는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공작을 폈다. 서로 흉허물 없이 귓속말을 주고받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흘렸어야 할 피를 학생들이 대신 흘려주지를 않았는가? 우리는 그들의 피에 보답을 해야 한다. 그들의 피에 보답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군부의 부패무능한 장성들을 숙청해 버림으로써 정예 국군을 만드는 일이야." "옳아! 보다 더 강한 군대, 백전백승 할 무능한 장성은 싸악 쓸어버려야 해." 김종필의 논리에는 명분이 뚜렷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정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때였다. 그럴 때에 김종필이 나서서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육군 중령들, 그들은 30대라고는 하나 아직 20대처럼 패기가 왕성했다.
6.25 전쟁 때는 육군 중위로서 중대장들이었다. 지금은 중대장의 계급은 대위급이었으나, 그때는 장교가 부족한 때라 중위로 중대장을 보하고 있었다. 김종필만이 일선 지휘관 경험이 없을 뿐, 태반이 사선을 넘어도 골백번 넘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패기와 아울러 정의감이 넘쳐 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군에 대한 이들의 열의를 나쁘게 대한 불만의 분출을 여기에서 찾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1960년 당시 70만 군대를 포용하고 있던 국군은 장교의 포화 상태를 이루어 놓고 있었다. 자연도태라도 되어야만 진급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나 수뇌부가 너무나 젊으니 자연도태를 기다리고 있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수뇌부가 나이 들어 물러나자면 줄잡아도 족히 20년은 걸린다는 계산이었다. 장교는 자꾸 양성돼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고 진급의 길은 막혀 있으니 자연 불평이 일기 마련이었다. 어쩌다 T.O.(편제표)상에 자리가 나서 밑에서 한 사람 진급시켜 끌어올릴 경우가 생기게 되면 백 대 일의 경쟁률이었다. 불평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숨통을 터 보고자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군령여산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 함부로 정군운동을 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극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정군> 어쩌고 늘어놓다가는 어떤 누명을 뒤집어 쓰고 군법회의감이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는 지금이야. 우리 군대에서도 이때에 정화 작업을 벌여야 해. 부패 무능한 장성들을 쓸어내고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어 보자구!" 4.19가 혁명으로 간주되고 있을 때다. 군대에서도 정군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감히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장 장교들이 김종필의 주장에 공감을 하고 발 벗고 나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육사 8기 출신인 중령들이었다. 중령이란 계급은 일선 사단의 대대장급으로서 군대에서는 핵심적인 계급이었다.
육군본부에 근무중인 8기 출신 중령들이 정군을 위해서 모임을 가진 것은 4.19 직후였다. 용산 우체국 옆에 있는 중국집에서였다. 이 날의 첫 모임에는 120여 명이나 되는 중령들이 모였다. "지금 혁명의 회오리 바람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이때에 우리도 혁명에 발맞추어 군대다운 군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젊음을 불살라야 햐 때가 아니겠는가?" 것이다. "군대다운 군대, 임전무퇴의 군대를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들은 이 문제를 주제로 해서 토의를 했다. 그 끝에 이들이 얻어낸 결론은 이러했다. <정치권과 야합한 장성들은 군부에서 축출해 버려야 하며, 직권을 이용해서 돈벌이에만 급급했던 장성들도 축출해 버려야 한다.> 대강 이런 정도였다. 그러면 그 방법론은? 역시 방법론이 문제였다. 군대는 군령여산이 조직의 생명이다. 하물며 중령 따위가 장군을 향해 <당신은 무능 부패한 군인이니까 옷을 벗고 나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할 수는 없는 물론 영창에 들어갈 각오가 돼 있다면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랏님 상투도 잡을 수가 있다. 그까짓 것 몇 해 감옥에서 썩을 각오만 되어 있다면야 그까짓쯤의 말 한마디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쥐를 잡으려고 독을 깨는 이상의 우매한 짓밖에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성사시키지 못할 일에 말 한마디로 자신의 신세를 망쳐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말이다. 그러니 역시 방법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왈가왈부 끝에 어떤 결론도 얻지 못하고 다음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회합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방법론을 처음에는 120여 명이나 되던 인원이 60여 명, 30여 명, 20여 명으로 점차 줄어 갔던 것이다. <정군운동도 좋지만 내 신세 망치게 되면 뉘 있어 내 처자식을 돌봐 준단 말인가?>정군운동에서 발을 빼는 인원이 늘게 되었던 이유가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이었다. 비범한 인물과 속인의 차이가 바로 이런 점에서 나타나게 된다. 옛 성현은 <의를 보고 행치 않으면 용기가 없는 탓이다>라고 했다.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은 이상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휘둘러 볼 일이다. 칼을 뺏다가 어물어물 칼집에 도로 꽂는대서야 어찌 사나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여간에 정군운동에 나섰던 8기생 출신 관철하고자 남은 사람들은 불과 8명에 지나지 않았다. 김종필(金鍾泌), 김형욱(金炯旭), 신윤창(申允昌), 오치성(吳致成), 길재호(吉在號), 옥창호(玉昌鎬), 최준명(崔俊明), 오상균(吳尙均) 등이 그들이었다. 여기에서 이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 이 여덟 명의 정군파 소장 장교들 가운데 38 이남 출신은 오직 김종필 단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 일곱 명은 모조리 38 이북 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일곱 명 가운데 옥창호는 만주 출신이었고, 김형욱과 오치성은 석전경우(石田耕牛)라는별명이 붙은 황해도 출신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의 별명이 붙어 있는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들먹이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어 가노라면 자연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허정이 과도정권을 맡기로 하고 조각을 완료했을 때, 그리고 육군본부의 중령급들이 <4월혁명>을 기화로 해서 <정군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을 때, 여기 어깨에 두 개의 별을 단 한 장군이 슬슬 용트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 계급은 육군 소장, 보직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박 장군이 서서히 용트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 석 자는 세상에 별로 번쩍이는 별 두 개씩을 달고 있다고 해서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때쯤 한국의 국군은 60만 대군으로 성장해 있었고 그래서 어깨에 별을 단 이른바 장군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리기가 그리 용이하지가 않았다. 그런 형편이었는데, 이 육군 소장 박정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1960년 5월 8일 부관 손영길(孫永吉)을 시켜 한 통의 편지를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에게 전달케 했다. 부관 손영길은 이날 잠자리 비행기라 불리우는 L-19 경비행기를 타고 올라와 그 편지를 송요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편지를 읽고 있던 송요찬의 표정이 그는 노여움을 억누르기가 어려운 듯 편지로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봐, 부관."
"넷, 각하!"
편지를 전달하고 부관실로 돌아갔던 부관이 황망히 총장실로 달려들어왔다.
"어느 놈이 이 편지를 가져왔어!"
"네, 박정희 장군의 부관이 가져왔습니다."
"그놈을 이리 당장 끌어와!"
송요찬은 총장실이 쩡쩡 울릴 만큼 큰소리를 질렀다.
"벌써 돌아갔습니다만."
"뭐야?"
부관은 박정희의 부관이 돌아간 것이 자기 잘못이나 되는 듯 황송해서 어찌할
"이 빨갱이같이 의리 없는 놈, 뭐가 어째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구 물러나라구? 박정희 이놈, 지금까지 내가 이리저리 감싸주어 왔더니, 겨우 한다는 수작이 물러나라야! 의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송요찬은 노여움을 억누를 길이 없어 한동안 씨근대기만 했다. 박정희는 편지에서 뭐라고 했기에송요찬이 이토록 길길이 뛰며 노발대발한것이었을까? 박정희는 이 편지에서 송요찬더러 군부의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했던 것이다.
'군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엄격한 통수관계임으로 군의 최고명령자이신 정화(淨化)의 태풍이 군 내에 파급되기 전에 용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고도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면 탈속한 성인일 것이다. 한데, 박정희는 어떤 속셈에서 그런 내용의 편지를 송요찬에게 보냈느냐 하는 바로 그 점이다. 박정희가 송요찬더러 <국군 부정선거의 전 책임을 지고 물러나도록 하라>고 했다는 자체가 해괴하기 짝이 없다.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가 대권을 거머쥐자, 몇몇 어용 필자들이 그를 미화하는 글을 쓰면서 이 대목을 언급한 박정희가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일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젊은 장교들이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정군운동에 불을 지르자는 것이 박정희의 속셈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 대목에 대해서 당자인 박정희로부터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들은 바는 없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박정희의 편지 가운데 있는 <정화의 태풍이 군 내에 파급되기 전에> 운운한 이 글귀로 미루어 볼 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내의 중령급 소장 장교들이 정군운동을 논의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논의하기 위해서 모였던 중령급들은 120명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두 번 모이고 세 번 모이는 동안에 점점 그 수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의 인원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숫자로 무슨 놈의 정군운동을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가 앞장서서 정군운동에 불을 지르자. 그렇게 해서 젊은 장교들이 고무 격려되어 궐기하도록 하자!) 이런 속셈에서 감히 붓을 들어 송요찬더러 부정선거에 전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라는 추리는 충분히 성립될 줄로 안다. 그러면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인 박정희가 서울에서 극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던 정군운동의 내막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일게 될 줄로 안다.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간단하다. 정군운동의 주모자 격인 김종필은 바로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정군운동 이상의 것이 벌써부터 논의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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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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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기독교도 박해
왜 네로는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지목했을까. 종교적인 이유로 로마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한 점에서는 기독교도와 마찬가지인 유대교도들은 어떻게 방화 혐의를 면할 수 있었을까. 유대교도들은 서기 64년 여름의 대화제의 피해를 입지 않은 4개 행정구 가운데 하나인 테베레 강 서쪽의 제14구에 모여 살고 있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그곳에서는 공동체를 조직해도 좋다고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아직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생겨난 것은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만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은 서기 33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뒤부터 시작된 사도들의 포교활동은 그들의 동포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유대인 사회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요 도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로마에도 기독교가 포교되었다. 따라서 제3대 황제 칼리굴라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로마의 기독교도는 테베레 강 서쪽의 유대인 사회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은 무엇이든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맨 먼저 반발을 받게 되는 법이다. 예루살렘의 유대교회가 예수에게 보인 적개심이 예수가 처형된 진짜 원인이었다는 사정도 있다. 네로 시대에 들어온 뒤, 로마에 사는 기독교도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거주구역인 제14구가 아니라 거기서 멀리 떨어진 테베레 강 건너편에 살게 되었다. 그곳은 공화정 시대의 세르비우스 성벽 바깥쪽에 있는 제12구였다. 이 성벽은 카이사르가 파괴했지만, 로마에는 아직도 성벽의 일부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제12구는 대화재 때 반소되었지만, 시외라고 해도 좋은 변두리였기 때문에 피해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다신교 민족이라서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도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지 않는 한 허용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기독교도 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다. 하지만 관용은 상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존재는 인정해준다는 뜻이다. 유대교도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는 이런 의미의 진정한 관용이었다. 이런 로마인과 로마에 사는 유대교도 사이에 이렇다 할 마찰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유대교의 선민사상과도 관계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저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 다른 민족도 유대교도가 되어 신의 선택을 받는다면, 유대인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들 내부에서 유대교를 고수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포교하는 데에는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 유대교가 포교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지 않은가.
이와는 반대로 예수는 기독교의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했다. 유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 앞에서'라는 전제조건이 있는 이상, 예수의 평등사상도 다른 종류의 선민사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선민사상'의 이차이 때문에 남에 대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태도에 큰 차이가 생겼다. 유대교도는 남에게 유대교를 포교하는 데 열성을 보이지 않는 반면, 기독교도는 포교에 열심이다. 생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에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로마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베드로가 로마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고 네로 황제의 측근이기도 한 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 그리스도의 가름침에 귀의하라고 설득한다. 이에 대해 페트로니우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말하는 가르침은 틀림없이 옳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될 때는 스스로 독배를 마실 것을 알고 있고, 그리니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오."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이고,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종교에 눈을 뜨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니까, 그 상태에서 구해주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도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기독교도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는 비기독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시 로마인의 눈에 비친 기독교도의 쓸데없는 참견은 다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오만불손과 마찬가지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에피소드인데, 그리스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바울은 많은 신들(그리스인도 다신교도였다)에게 바쳐진 신상을 살펴보다가 맨 마지막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라고 적힌 신상을 발견한다. 베드로와는 달리 전투적인 포교자였던 바울은 군중을 향해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유일신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에 그리스인들이 화를 냈다. 성난 그들은 바울을 내쫓아버렸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이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직 미치지 않은 미지의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심정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신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오만함의 발로라고 다신교도인 그리스인들은 생각한 것이다. 패배자들이 믿는 신까지 받아들여 결국에는 30만이나 되는 신을 가질 만큼 관대한 로마인들도, 화가 나서 바울을 내쫓은 그리스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기에다 로마인 특유의 감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멸망한 뒤 자신들과 동화한 에트루리아 민족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치를 만드는 법부터 의식을 거행하는 법, 검투사 시합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인신공양의 관습만은 절대로 흉내내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에 패배한 카르타고의 수도를 볼모지로 만들어버린 로마인의 마음 속에는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카르타고인을 경멸하는 마음이 있었다. 켈트족의 드루이드교를 로마 제국 영토가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추방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드루이드교에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그리스인보다 더 싫어했다. 기독교 미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제공된다는 거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신에게 제물로 바친 소나 양을 신 앞에서 나누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에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희생이라고 기독교도 자신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제물로 바친 소나 양의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 기독교도는 제물로 바친 인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도는 에트루리아인보다, 카르타고인보다, 그리고 분명한 야만족인 켈트족보다 더 야만스러운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인들의 혐오는 야만족을 피하고 꺼리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지식인인 경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태도도 역시 달랐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는 기독교도는 로마인이 창설한 인류 공생체의 규칙을 어지럽히려 드는 어둡고 불길한 적이었다. 300년 뒤에 로마 제국을 예언하는 듯한, 정확한 파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로 시대에 로마의 기독교도 공동체는 유대인 사회에 비해 규모도 작고 약체여서, 철저한 박해로 궤멸시켜아 할 정도의 세력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는 포파이아 황후라는 보호자를 갖고 있었지만, 기독교도 공동체는 그런 보호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알맞은 상대였다. 네로가 기독교도를 고발한 이유에는 방화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체포는 일망타진이 아니라 고구마 덩굴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밝힌 몇 사람을 잡아서 고문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고발하게 하고, 자백을 끌어낸 뒤 재판에 회부한다. 이 경우, 판결은 재판을 하기 전부터 뻔했다. 물론 사형이다. 체포한 뒤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장으로 보내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로마의 사법기관은 고발을 받아야만 비로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자백이나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타키투스를 비롯한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은 아무도 이때 목숨을 잃은 순교자의 수를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형법이 복잡하고 선정적이었다는 점과 로마 이외의 도시에 있는 기독교도 공동체의 규모 등을 참고하여 현대의 연구자들이 추산한 결과에 따르면, 순교자의 수는 200명 내지 300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도 이만한 수의 사람을 한꺼번에 처형하는 것은 기독교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네로는 이것을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 있었던 경기장이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들개 떼에 물려죽었다. 다른 이들은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이었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나머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졌다. 땅에 박은 말뚝에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산 채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인간 기둥들이 관중석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네로도 경기장 안으로 끌어듣인 전차 위에서 그 광경을 감상했다. 하지만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당한 잔혹한 죽음은 네로가 기대했던것과는 다른 감정을 시민들의 가슴에 불러일으켰다. 네로의 방화설을 믿지 않았던 타키투스도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시민들이 혐오하는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만들어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의혹을 풀려고 했던 네로의 의도는 완전히 벗나가고 있었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남게 되었다.
제정 시대만이 아니라 공화정 시대까지 포함하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아니고, 아우구스투스도 아니다. 바로 네로다. 유명할 뿐 아니라, 로마 황제의 대표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건재했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가 멸망하고, 세계의 주인공이 기독교도로 바뀐 뒤에 정착한 평가다. 서기 64년의 이 박해사건이 네로를 로마 역사상 최고의 유명인으로 만든 것이다. 기독교도는 네로를 반그리스도'(앤티 크라이스트)라고 부르며 규탄하게 된다. 이 경향은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건재하여, 노벨문학상을 받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쿠오 바디스'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네로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네로의 기독교도 박해는 방화죄를 전가하려는 목적 때문인지, 수도 로마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후로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기독교도가 다음에 박해를 받는 것은 30년 뒤인 서기 95년이다. 이때도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기독교도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기독교도까지도 '현제'로 평가하는 오현제는 박해와 무관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서 주교 두 명이 순교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리옹의 기독교도 사회를 탄압했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박해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고, 제국 전역에 박해가 미치지는 않았다. 탄압 이유가 종교적인 것보다 사회질서 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제국 전역에 미치게 된 것은 서기 20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였다. 하지만 서기 250년까지는 여전히 일시적인 현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250년을 경계로 하여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253년, 257년, 257년... 기독교도에게는 수난의 해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서기 260년부터 303년까지 기독교 박해는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춘다. 로마 제국에 사는 기독교도에게는 조용하고 평온한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서기 303년부터 다시 수난기를 맞는다. 로마 제국 재건을 결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인이 창설한 인류 공생체의 규칙을 어지럽히려 드는 기독교도"를 제국에서 소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기독교도를 대상으로 나온 황제 칙령의 수만 보아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단호한 결심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도에게는 최대의 수난기였다. 하지만 서기 313년에 기독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이 수난도 막을 내린다. 황제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교묘히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기독교는 승리자가 되었다. 기독교도 박해의 역사를 대충 살펴보면 위와 같다. 네로 한 사람만 기독교도의 적이 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네로가 기독교도를 박해한 이유에는 방화범과 그 공범자라는 것 외에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인이 말하는 인류 전체'는 곧 '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네로는 역시 그후에 계속된 기독교도 박해의 선도자였다. 생전의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겠지만.
노래하는 황제
네로는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에 대한 악평이나 반감이나 적개심을 견디지 못했다. 튀어나온 말뚝은 얻어맞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남보다 잘나서 튀어나온 말뚝'이 되면 악평이나 반감이나 적개심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초연하게 생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칫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잃어버린 지지를 되찾으려고 허둥대는 추태를 보이거나, 과민하게 반응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모두 다 마음의 평정을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잔혹하게 처형된 기독교도를 동정하는 시민들을 보고 네로는 당황했다. 이듬해인 서기 65년은 제2회 '로마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네로 제전'이라고 불렀지만, 정식 명칭은'5년제'(루디퀸퀘날리)였다. 육체와 시와 변론을 겨루는 이 제전의 당초 목적은 일반 로마인에게도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침투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시들어버린 인기를 만회하려는 목적도 추가되었다. 그래서 네로는 자작시를 음악에 맞춰 노래하는 경연대회에 자기도 출전하겠다고 말했다. 데뷔는 나폴리에서 이미 끝냈고, 박수갈채를 받았기 때문에 잘해낼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로마 민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에 당황한 원로원은, 탤런트 황제 등장'이라는 추문을 막기 위해,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재빨리 네로를 변론 부문과 가창 부문의 우승자로 결의해버렸다. 그러나 네로는 이를 거부했다. 원로원이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자기한테도 재능이 있으니까 다른 출전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겨루어볼 작적이고, 심판의 엄정한 판단에 따라 실력으로 월계관을 쟁취할 작정이라고 언명한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 손을 맞잡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폼페이우스 극장은 노래하는 황제를 보러 온 시민들로 대만원이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로마의 봄은 아무 일이 없어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날씨다. 하지만 3만 명을 수용하는 로마 제일의 노천극장이 만원을 이룬 것은 네로가 출전하는 것을 알고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무대에 올라갔을 때부터 이미 네로는 박수와 환호에 휩싸였다. 그것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황제는 리라를 켜면서 자작시를 자작곡에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몇몇 작품을 보아도 시를 짓는 솜씨는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고 해도 좋은 정도다. 녹음기가 없는 시대니까 곡이 어땠는지는 판단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동시대인인의 평으로는 "제멋에 겨운 풋내기" 수준이었다. 가수의 생명인 목소리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성량이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관중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네로도 열심히 노래했다. 노래를 끝내고, 입고 있던 그리스식 투니카의 소맷자락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땀은 땀닦는 천으로 닦는 것이 상류층 사람들의 예법이지만, 그러려면 시종을 무대 위로 불러내야 하는데, 이것이 극장에서는 황제이고 싶지 않은 네로의 뜻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네로는 노래를 끝내고 심판들의 판정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다른 출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대에 한쪽 무릎을 끓고 리라를 가슴에 껴안은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이런 태도가 관객들을 더욱 기쁘게 해주었다.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역사가들은 네로가 우승했는지 어떤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성공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심판의 평가와 함께 관객의 인기투표도 실시되었다면, 인기상은 네로가 차지했을 게 틀림없다. 출전자들 중에는 네로가 가장 성대한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석 앞쪽의 지정석에 앉아 있던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계급' 남자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관객 속에 섞여 있던 속주나 동맹국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탤런트 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로는 성공에 만족했지만, 28세를 눈앞에 둔 나이인데도 인간의 속성을 너무 몰랐다. 인간은 꽤 복잡하고 까다로운 존재여서,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친근감과 존경심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않으면 황제의 임무는 추진해갈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같은해 말, 역사상 '피소 음모'라고 불리는 네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피소 음모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이런 경우에 추대되는 인물의 전형이었다. 우선 가문이 좋다.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아내의 친정이기도 했다. '결혼은 정략'이라고 명쾌하게 결론짓고 있던 카이사르가 인척관계를 맺었을 정도니까,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원로원에서 대단한 유력자였을 것이다. 제정으로 접어든 율리우스 씨족의 강력한 경쟁자였고, 그 때문에 칼리굴라 황제에게 추방되었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허락으로 귀국한 역사가있다. 피소는 남에게 관대하고 친절한 신사였다. 중늙은이가 된 뒤에도 후리후리한 키의 미남이었다. 아직 30세가 되기도 전에 갈수록 비만해지는 네로와 비교하면, 군장 차림의 토가 차림도 훨신 사나이다웠다. 하지만 재능이나 성격은 평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남다른 재능이나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네로를 죽인 뒤의 황제감으로 점찍혔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브루투스 음모'와 이 '피소 음모'를 비교해보면 두 가지 점에서 완벽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루투스 음모'는 국가체제를 둘러싼 갈등에 원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광대해진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것이냐, 아니면 이전처럼 원로원이 통치하는 과두정을 계속할 것이냐로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는 개혁파였고, 브루투스는 수구파였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음모 가담자들 가운데 일부가 카이사르에게 품고 있었던 사적인 원한도 음모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피소 음모'에는 국가체제를 둘러싼 갈등동 없었고, 사적인 원한도 없었다. 음모 가담자들 가운데 심정적인 공화주의자는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제정을 쓰러뜨리고 공화정을 부활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광대한 로마 제국을 통치하려면 원로원을 통한 소수지도체제보다 한 사람이 책임지는 제정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은 이미 정착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음모 가담자의 수는 20명 내지 30명, 이들 가운데 개인적인 야심이나 사적인 원한이나 공포 때문에 음모에 가담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로마 제국의 장래를 우려하는 마음-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공동체의 이익'을 지키려는 의무감-에서 네로 암살 음모에 가담한 것이다.
주모자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기보다 제국의 행방을 우려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연히 음모가 형성되었고, 네로를 죽인 뒤 누구를 제위에 앉힐 것인지도 결정되었다. 피소를 제외하면, 음모 가담자는 거의 다 네로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네로와 함께 놀러다닌 친구이거나 원로원에서 네로파로 여겨지고 있는 의원들이었다. 그리고 세네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네로의 가정교사이자 보좌관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즉 '피소 음모'는 네로파가 꾸민 음모였고, 국가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만 교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브루투스의 카이사르 암살보다는 오히려 칼리굴라 암살과 더 가깝다. 칼리굴라도 네로도 아직 20대 젊은이였다. 배제하고 싶으면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결행을 앞두고 발각되었을까. 음모 가담자들 가운데 스카이비누스라는 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재산 정리를 해버렸다. 생전에 유언을 집행하듯, 지금까지 충실히 봉사해준 데 감사한다는 명목으로 하인들에게 돈을 나누어준 것이다. 돈을 받은 사람 가운데 밀리쿠스라는 해방노예가 있었다. 스카이비누스는 밀리쿠스에게 단검을 잘 갈아두라고 명령하고, 지혈제와 붕대도 준비 해두라고 일렀다. 해방노예가 품은 의심은 이것으로 결정적이 되었다. 주인에게 자주 사람이 찾아오고,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이 측근들을 물리친 뒤 손님하고만 밀담을 나눈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수상쩍었다. 밀리쿠스는 아내에게 의논했다. 아내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스카이비누스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아내가 이렇게 충고했다. 당신이 잠자코 있어도 다른 사람이 누설할 테니, 그때 공범죄를 뒤집어쓰기보다는 지금 밀고하는 편이 낫다고, 밀리쿠스는 주인이 갈아두라고 지시한 단검을 들고 네로의 거처로 찾아갔다.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은 불타버렸고, '도무스 아우레아'도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네로는 로마 교외에 살고 있었다. 밀리쿠스의 이야기를 듣고 네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에 즉위한 지 10여 년, 그동안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재위 4년 만에 암살된 칼리굴라와 달리, 자기는 누구한테나 사랑과 존경을 받는 황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힌 네로는 부루스가 죽은 뒤 근위대장에 임명한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티겔리누스에게 수사권을 주었다. 티겔리누스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약점을 충성으로 보완하려고 발버둥치는 타입의 사내였다.
스카이비누스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딱 잡아뗐다. 단검을 갈아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원래 노예였던 사람의 말과 원로원 의원의 말 가운데 어느 쪽을 믿는 거냐고 따지기까지 했다. 네로도 그 말을 믿을 뻔했지만, 티겔리누스는 다시 밀리쿠스를 심문했다. 해방노예는 주인을 찾아와 밀담을 나눈 사람 가운데 나탈리스라는 사림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나탈리스가 연행되었다. 로마 사회에서는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기사계급'에 속한 이 사내는 고문 도구만 보고도 겁에 질려, 피소와 세네카의 이름을 댔다. 그리고 나탈리스가 자백한 것은 스카이비누스도 마음이 약해졌는지, 음모 가담자의 이름을 댔다. 거기에는 세네카의 조카이자 시인인 루카누스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네로와 동년배인 이 시인은 숙부인 세네카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부터 숙부한테 배웠기 때문에 네로와는 사형사제 사이다. 네로는 아테네의 최고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를 로마로 불러들여, '네로 제전'의 주제가를 짓게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착시킨 '세기제'의 찬가는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지었다. 네로는 베르길리우스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국민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와 같은 영예를 젊은 시인에게 주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카누스는 심상적인 공화주의자였다. 이 정열적인 시인이 쓴 장편 서사시 '파르살로스'는 그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편든 표현으로 차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로는 루카누스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젊은이까지도 그에게 칼을 들이댄 것이다. 정열적인 젊은 시인은 고문에 약했다. 그가 실토한 음모 가담자들 중에는 모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심문자들도 이 진술은 믿지 않았다.
테겔리누스 휘하의 근위병들이 음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로마 전역으로 달려갔다. 각오한 피소는 병사들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리기 전에 혈관을 잘랐다. 이듬해 집정관에 선출되어 있던 라테라누스에게는 자살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심문도 받지 않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철학자 세네카가 적극적으로 음모에 가담했는지, 아니면 알면서 잠자코 있었을 뿐인지, 또는 완전히 국외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세네카가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나탈리스 한 사람뿐이고, 나탈리스도 자기는 피소의 심부름으로 세네카를 찾아가 피소의 말을 전하고 세네카의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피소는 세네카가 만나주지 않는 것을 불평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세네카의 대답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어느 쪽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모호한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자주 만나는 것은 양쪽에 모두 지장을 초래할 거요. 그렇긴 하지만 은퇴하여 완전히 야인으로 돌아온 내가 무사히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어떨지는 피소의 운명에 따라 결정될 게 분명하오." 이것으로 세네카는 음모 가담자로 단정되고 말았다. 네로는 스승이자 보좌관이었던 늙은 철학자에게 "죽음을 주었다." 즉 자결할 수 있는 시간을 하락했다.
70세가 다된 세네카는 혈관을 잘라도 피가 잘 나오지 않았다. 죽음을 빨리 맞으려고, 철학자는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눕혔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땀을 흘리기 위한 한증막의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겨우 죽을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의 입에서는 네로를 규탄하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세네카는 친구들과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조용히 죽고 싶어했다. 로마 역사상 유일하게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지식인은 이렇게 죽었다. 철학자는 은퇴한 뒤, 그가 그토록 기대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글은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하는 지식인이 기대가 배신당했다는 한마디로 뭉뚱그려 처리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은퇴한 뒤에 쓴 수많은 저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침울한 어조는 과거의 애제자를 멀리서 바라보는 스승의 심경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와는 반대로, 단순함이 미덕인 무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은 유쾌할 만큼 명쾌했다. 네로 암살의 실행자로 예정되어 있던 근위대 대대장 플라우스는 충성을 맹세한 황제에게 왜 칼을 들이댈 마음이 났느냐는 네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황제답고 존경할 만한분이었을 무렵에는 저만큼 폐하에게 충성스런 부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가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운동경기에 열광하고 가수 노릇에 열중하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르게 된 뒤로는 폐하에게 증오밖에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백인대장 아스플루스도 당당하게 네로를 비난한 뒤 죽음을 맞았다. 왜 내가 죽기를 바랐느냐는 네로의 질문에 백인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가 저지른 숱한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폐하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정체에서 절대권력자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테러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음모 가담자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다. 시민권 소유자는 곧 유권자라는 뜻이다. 공모자 이름을 댄 대가로 처벌을 면한 나탈리스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자결하거나 처형당했다. 티겔리누스와 함께 근위대장을 지내고 있던 루푸스도 처음 얼마 동안은 음모 가담자들을 심문하는 쪽이었지만, 결국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들통나서 처형당했다. '피소 음모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네로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든 심문 과정을 공개하고 출판했다. 이것을 읽은 사람들이 음모자들의 언동에 공감할까봐 두렵지 않았을까. 국가의 제일인자에 대한 범죄는 곧 국가에 대한 범죄라는 아우구스투스의 '국가반역죄'에 비추어보면, 음모 가담자들이 법률적으로 모두 유죄인 것은 분명했지만. 어쨌든 사람은 자기가 공격 대상이 된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을 단단히 닫아버리게 마련이다. 개방적이었던 네로도 경계심의 덩어리로 변했다. 곧이어 사랑하는 아내 포파이아가 죽었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고독에 시달리고 의심이 많아진 네로는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의 권력에 제동을 걸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열적인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가 말하는 '공포시대의 재현'이다. 자살을 강요당한 사람들 중에는 풍자문학의 걸작 '사티리콘'의 저자이며 네로의 측근이기도 했던 케프로니우스도 끼어 있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로마를 묘사한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도 주인공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실존인물들 중에서도 페트로니우스는 네로를 철저한 폭군으로 모든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는 충분한 방어태세를 취하고는 있지만, 네로를 비판한 로마인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가설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반체제(기독교) 쪽의 비판만으로는 체제(로마 제국) 비판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완전한 설득력을 가지려면 체제 쪽에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것도 황제와 친한 사람이면 더욱 효과적이다. 소설가도 이 정도 전략은 세울 수 있다. 다만 글을 무기로 하는 사람의 '전략'은 전략이라고 하지 않고 '구성'이라고 부르는 것만 다를 뿐이다.
측근들이 차례로 등을 돌렸지만, 네로가 황제의 책무는 소흘히 하고 황제의 권력만 남용한 것은 아니었다. '피소 음모'가 해결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9개월이나 되는 긴 여행을 마친 파르티아 왕제 티리다테스가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네로는 나폴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로마의 숙적인 이 파르티아인을 국빈으로 대우했고, 로마에서 거행된 성대한 대관식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 왕위를 둘러싼 로마와 파르티아의 분쟁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로마의 가상적국 제1호인 파르티아와도 '평화'를 재확립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릎을 끓고 있는 티리다테스의 머리에 네로가 아르메니아 왕관을 씌워주었을 때, 식장인 포로 로마노를 가득 메운 일반 시민들은 네로를 "황제!"(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환호를 보냈다. 진짜 공로자는 코르불로였지만, 서민들은 그것까지는 모른다. 평화 회복의 공로자는 그들의 눈에는 네로로 보였다. 네로는 국정의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에, 누가 차린 밥상이든 그것을 승인한 네로가 공식 공로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네로 황제는 '평화'를 기뻐하는 일반 시민들의 환호에 따라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게 했다. 로마가 전쟁 상태에 있는 동안은 전쟁의 신 야누스의 신전 문을 열어두고, 형화로워지면 문을 닫는 것이 예로부터의 관례였다.
이 무렵 네로는 '피소 음모'로 흔들린 자신감을 되찾은 게 아닌가 싶다. 로마 시민 중의 '제일인자'라는 위선적인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황제'라는 환호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민회에서 시민들의 박수와 환성으로 우두머리에 뽑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네로는 서투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좋아진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만 한다. 어쩌면 그는 평판이 좋아지면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평화'의 수호신처럼 찬양을 받은 직후에 그는 평소에 동경하던 그리스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황제의 순행이 아니라 가수로서 역량을 시험해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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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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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눈으로부터 여름 꽃에게로 - 구르는천둥(롤링 썬더) - 체로키 족
"사람은 저마다 그 자신만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이 세상에 온 그만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조금 전에 소개받은 대로 체로키 족의 주술사 '구르는천둥(롤링 썬더)'이다. 영적인 문제를 놓고 문명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로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여기 오는 걸 망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의 인디언들은 영적인 문제를 놓고 밤새워 대화를 나눈다. 허나 미리 말해 두겠지만, 오늘 나는 비밀로 지켜야 할 의식이나 명상법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은 아직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나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해서는 어떤 영적인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문명인들이 이 대륙을 차지한 이후로 그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암호로써 그것들을 주고받았고, 암호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랐다. 삶의 방식은 변하기 마련이어서, 6년 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약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는 문명인들의 세계 속으로 여행도 떠나고 그들과 섞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함께 대화를 나룰 수 있는 가슴을 지닌 사람들을 찾곤 했다. 처음에 말한 대로 나로서는 외부 세계에 나와서 영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상황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젊은 문명인들은 과거 세대와 많이 다르다. 그들은 인디언을 좋아하고 인간을 좋아하며 우리에게로 와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나는 인디언 주술사로 태어난 사람이다. 인디언 세계에서 주술사(medicine man)란 단순히 주술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영적인 힘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그는 샤먼이기도 하면서 치료사이고 의사이며 영적 상담자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주술사가 될 수 있는가 묻는다. 주술사란 아무나 마음 먹는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거나 학교를 다녀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술사는 그런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치료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몇명 만나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무엇보다도, 주술사가 되려면 주술사로 태어나야 한다. 그럼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자신이 주술사로 태어났는가를 아느냐고? 꿀벌에게 물어 보라, 어떻게 여왕벌을 아느냐고 인디언은 그냥 알 뿐이다.
우리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어떤 것을 행하지 않는다. 구경거리로 무엇을 하진 않는다. 세상의 돈을 다 갖고 와도 전통적인 인디언 주술사를 살 순 없다. 한참 전에 한 백인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내가 사는 곳까지 날아온 적이 있다. 그는 뉴욕에 있는 큰 회사의 사장 아들이었다. 그는 전용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에게 1만 달러를 내밀었다. 등 전체에 난 붉은 피부병 반점을 치료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치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렇다. 치료할 수 있다." 그는 그렇다면 치료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지금은 안 된다. 1년쯤 뒤에 다시 오라. 다시 올 때는 선물로 담배를 가져올 것이며, 나의 협력자(약초)들에게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말했다. "당신이 꺼내 놓은 1만 달러는 도로 집어넣으라."
문명인들은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될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 삶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몇 가지의 것들이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바로 그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내가 원했다 해도 나는 1만 달러를 꺼내 놓은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없었다. 치료를 시도했다면 내 스스로 대가를 치뤄야만 했을 것이고, 내가 잘못된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나는 전신마비에 걸린 한 노인을 치료했다. 그는 몇 해 동안 그 병을 앓았는데 의사들도 포기한 환자였다. 노인은 치료의 대가로 내 이름이 새겨진 이 목걸이를 나에게 선물했다. 이것을 나는 1만 달러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인디언이든 아니든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기를 정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면 그는 인디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우리 인디언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자연에 자신의 모습을 자주 비추곤 한다. 자연의 숨결과 자신의 숨결을 동일시하고, 대지의 맥박과 자신의 심장을 한 박자로 여긴다. 문명인들은 인간의 힘이 자연을 다스리고 변형시키는 데 있다고 여기며 그것이 곧 생존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힘과 진정한 생존은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여겨 대지의 모든 생명들과 조화를 이루는 일에 있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의 초기에는 대지가 마구 흔들리고 열기로 가득 차서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도 인간이 존재했지만 오늘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첫번째 부족의 후손들이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되는 큰발(빅 푸트) 족이나 티벳의 예티(설인) 족이다. 어떤 부족은 남태평양 한가운데의 바다로 침몰하는 대륙(사라진 대륙)에서 배를 타고 피난해 오기도 했다. 그들의 후손이 아직도 이곳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으며, 우린 그들이 누구인가를 안다. 인디언들의 얼굴 모습이 제각기 다르고 또한 유럽인이나 어떤 민족과도 비슷하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1년에 한 차례씩 호피 족의 키바*에서 회합을 갖는다. 모든 부족의 대표들, 주술사와 추장들이 그곳에 모여 우리의 신성한 문서를 돌려 읽고 해석을 가한다.
*키바란, 푸에블로 인디언에게서 볼 수 있는 구조물로 반지하 형식이 많으며, 보통 둥근 형태로 되어 제사의식, 회의를 위한 장소로 쓰인다.
우리 인디언은 부족도 다르고 언어도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인디언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전혀 없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대화 방법을 갖고 있으며, 당신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캐나다의 퀘벡 주에서 온 인디언 주술사를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화 없이 통하는 상태가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가능했다. 이것은 서부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양인 사이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영적 차원이 비슷한 높이에 이르면 굳이 대화가 필요없어진다. 옛날에는 두 인디언 추장이 들판의 오솔길에서 몇 번이나 마주쳐도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내 어린시절의 기억으로는 노인들 몇 명이 햇살 아래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말이 필요 없었다. 언어 없이도 그들은 내면적으로 서로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잘 통했다. 그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디언은 우리가 사용하는 약초를 협력자라고 부른다. 약초를 캐러 가면 우리는 약초를 발견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어디쯤에 있다는 걸 안다. 때로는 필요한 약초들이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문명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식물을 잡초라 부르는데, 세상에 잡초란 없다. 모든 풀은 존중되어야 할 목적을 갖고 있고, 쓸모 없는 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풀들도 인간처럼 가족을 이루고 살고, 부족과 추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약초를 캐러 가는 사람은 그 약초의 추장에서 선물을 바쳐 존경심을 표시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그 풀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풀만 채취해 갈 것이고 그것도 좋은 목적에 사용하리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문명인들은 그러한 순서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목적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무시하고 말았고 나아가 '자기를 아는 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닌데, 다른 지역에 사는 한 남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날 찾아왔다. 그는 인디언의 관습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담배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병으로 고통받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치료를 해주었고, 그는 병이 나았다. 그러나 청년은 자기도 주술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물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3일간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인디언들은 어떤 것을 결정할 때 대개 3일의 시간을 갖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이 청년을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래서 3일의 여유를 준 것이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서 청년은 나를 찾아와 자기에게 의통을 전수할 것인지 물었다. 대단히 참을성이 없는 친구였다. 지금은 세상 사람 모두가 이처럼 끝없이 서두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니다. 난 너에게 인디언 의술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배운다 해도 넌 마법사 정도밖에 못 될 것이고, 결국 너 자신과 네 주위 사람들을 해칠 것이다." 청년은 무척 화를 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주술사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내가 치료하는 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우리 인디언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법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몸 속의 기운이 치받쳐 그는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빠졌으며, 그것은 하나의 경고였다. 결국 그는 서둘러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만 했다. 문명인들은 모든 것을 서둘러 원하며, 많은 노력 없이 그것을 얻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은 걸 놓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사물에 대한 이해를 놓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해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그 세계 속에 몸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당장 쉽고 빠른 대답을 원한다. 삶의 가르침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단순히 자리에 앉아서 진리에 대해 토론한다고 해서 진리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진리를 살아야 하고, 진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진리는 깨닫기가 어렵다. 진리는 아주 천천히, 점진적으로 다가오며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문명인들은 자연에 고삐를 채우고,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인간의 하인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문명인들이 자연의 방식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말해 준다. 또한 오늘날의 자연환경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있다. 대기오염을 두려워하고, 방사능과 더러워진 물을 두려워한다. 대지는 오염되고 자원은 사라졌거나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자연을 길들이려는 어떤 장치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연의 의식세계를 통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람의 본성과 존재 목적에 반해서 어떤 한 개인의 길을 결정짓거나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가능할 것처럼 보이나 결과는 비극적이다. 결국 모두가 두려워하고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길로 향해 갈 뿐이다.
치료행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진정한 치료사는 치료받는 사람의 카르마(업)와 운명을 충분히 고려한다. 더불어 진정한 치료사는 각 사람의 영혼이 걸어나가야 할 길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만이 보다 실제적인 치료를 가능케 하며, 인간을 그가 처한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자연은 고귀한 것이며, 인간 내면의 자연 역시 고귀하다. 자연은 언제 어디서나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우리 인디언은 모든 것에는 필요한 때와 장소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말하기는 쉬워도 이해하기는 어렵다. 삶을 통해서 당신은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디언은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삶을 살고 삶 속에서 그것과 조화를 이룬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약초를 구하는 때와 장소를 안다. 약초뿐 아니라 해와 땅, 구름, 모기, 식물, 사람과 동물이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해가 떨어진 다음에는 약초를 채집하지 않으며, 필요한 때만 약초를 수집한다. 어떤 풀을 뽑아서 그냥 내버리는 일이 없으며, 재미로 무엇을 죽이는 법이 없다. 우리에게는 잡초라는 것도, 모기에 물리는 것도, 원하지 않는 비도 없다. 바람과 비, 모기와 뱀이 모두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나면 겨울의 눈도 우리 자신이고, 여름의 꽃도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과 하나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본성을 배울 수 있다. 문명인들의 삶은 자연이 아닌 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나무와 새로부터, 곤충과 동물로부터, 변화하는 날씨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참된 본성으로부터도 멀어졌다. 그러한 나머지 문명인들은 자연스러운 것과 마주치면 낯설어하고 어색해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책임을 져야 하며, 생각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인디언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먹을 필요가 없듯이, 생각에 떠오르는 것마다 말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을 잘 관찰하며, 오직 좋은 목적을 위해서만 말을 한다. 원하지 않는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맑게 가져야 할 때가 있다. 그때를 위해서 우리는 꾸준히 자신을 훈련시킨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하다.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꿈과 생각과 관념에 대해 당신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자신을 억압하거나 생각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이 생각과 말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 줄곧 떠오를 경우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라. "난 이런 생각들을 선택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뒤 그 생각을 혼자 내버려 두면 곧 사라져 버린다. 인디언 전사와 같은 인내심으로 그것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몸과 마음이 정결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대지 위에서의 삶을 충분히 살고 나면 우리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할 일이 있고 이뤄야 할 목적이 있는 한 우리는 이곳의 삶을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떠나는 것은 자신에게 거짓된 일이고, 어머니인 대지에게도 거짓된 일이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아직 우리의 성장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일이 그곳에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지 말 것이며, 그 길을 따르고 그 길을 존중하고 그 길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모든 병과 고통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늘 지나간 어떤 것, 다가올 어떤 것에 따른 보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병과 고통에 대해 아무런 치료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명인 의사들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않다. 인디언 주술사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떤 것의 결과이며, 또 다른 어떤 것의 원인임을 안다. 그것은 하나의 사슬처럼 이어진다. 때로 어떤 병과 고통은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그것을 사라지게 하면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자신은 그것을 모를지라도 그의 영혼은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3일 동안의 시간을 갖는 것이며, 그 결과 치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육체의 고통은 좋든 나쁘든 어떤 이유를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언제나 영적인 차원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에 감염된다는 것은 영적으로 순수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육체에 일어나는 일은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치료사는 육체 이상의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문명인 의사들은 환자가 찾아오면 질병만 관찰한 뿐 사람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약을 주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든지 신체의 어느 부위를 잘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어쩌면 그것은 불필요한 일일 수도 있고, 전혀 치료가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인디언은 신체적인 고통에 무척 관심이 높으며, 자연적인 수단으로 고통을 없애는 데 관심이 크다. 우주 안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영적 차원이 있다. 자연 속의 모든 물질은 그 나름의 영적 차원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약초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것은 바로 그 약초의 영적 차원의 협력을 얻는 일이다. 단순히 화학 물질의 합성만으로 치료가 가능하진 않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가슴 안에 자기만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당신도 자기만의 교회를 가슴 안에 갖고 있다. 당신이 그 교회를 따를 때 당신은 위대한 정령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세상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해도 자기 가슴 속의 교회를 잃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우리 인디언이 가르침 받는 방식이다. 사람은 저마다 그 자신만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이 세상에 온 그만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한 저마다 그만의 모습, 그만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그 자신만의 길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 길을 방해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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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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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들 - 전혜린
오렌지 껍질을 씹듯이 나의 일과와 일상성의 의식을, 그리고 뒤덮고 있는 흐린 불투명한 안개를 오렌지 껍질을 씹듯이 한번이라도 놀라게 하고 싶다.- 1964년 1월 5일 -
이유도 없이 엄습하는
그러나 끝났다.
왜 끝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는 모양이다. 결별은 돌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어느 감정인 것 같다. 나 자신으로 파고 들어가고 나를 이룰 계절이 온 셈인가 ?- 1964년 1월 18일 -
소시민적 일요일
권태와 어느 안정감 - 소시민성 속에 자기를 고정시키려는 의도와, 또 그 의도의 무용함과 번거로움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텅빈 공허감이 내 가슴을 찬바람 불 듯 지나간다. 감정도, 애정도 다 떨어진 느낌, 가정, 직장, 나, 국가, 사회......이런 단어들이 아무 연결도 없이 내 머리를 지나간다. - 1964년 1월 19일 -
시간의 풍화작용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사고(思考)는 항상 사실적인 힘임을 믿고 있다. 끊겠다는 의지가 끊는 행위와 같은 것을 뜻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 한 미소나 한 눈동자, 한 목소리를 기억의 표면에서 말살해 버리는 것은 많은 국가와 시간의 풍화작용의 도움이 필요하다. 잊겠다는 의식만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관념이 긍정한 행위를 우리의 감성이 받아들이기에는 또 하나의 훈련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한 자유의지는 아닌 것 같다. - 1964년 1월 20일 -
연기(演技)의 불일치
그렇다. 나는 나와 연기(演技)를 일치시킬 수 없는 순간을 종종 갖는다. 그럴 때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를 혐오해서라기보다 혼자 있는 거의 필요해서인 것이다. - 1964년 1월 21일 -
자매의 혼
오늘 우송해 온 그의 일기 발췌를 재독해 보고 놀랍도록 흡사한, 또 자매의 영혼을 발견한 신기함에 유쾌한 전율을 느낀다. [완벽한 환희]라는 것은 L. 린저의 신작(新作)의 제목이지만 지금의 내 마음속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 1964.1.21 -
두 사람에게의 축제
정말 기적이다. 또 다시 지순한 우리의 상봉은.......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축복한다. 나를 위해, 그를 위해, 릴케의 시집 제목처럼 <나에게 축제, 또 당신에게 축제>이다. 춤추고 싶다.
- 1964년 1월 24일 -
달팽이의 논리
네가 나의 상황(예컨대 나이) 같은 것 때문에 나를 불신하느냐 ? 그와 똑같은 이유로 내가 너를 불신한다면 그것은 원(圓)을 긋고 도는 달팽이의 논리가 될 것이니 그만두자. - 1964.2.12 -
도대체 지엽(枝葉)이 아니라 기본강령이 나에게서 늘 흔들리고 있으니나를 도대체 믿을 수 없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여자의 논리와 남자의 논리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1964년 2월 22일 -
버스 타는 데서 말했다. [악몽을 꾼 줄 알아? 그래도 나는 악의는 없었어. 가짜 게임은 안 했어.]라고.- 1964년 3월 4일 -
그는 애정을 받아 본 것은 여덟 살 적 이후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애정의 구두쇠가 됐는지 모른다. -1964년 3월 6일 -
전화했더니 전화로 독일 유행가 <작 바룸 Sag Warum (이유를 말하라)>을 틀어줘서 들었다.
- 1964년 3월 26일 -
엘리자(貞和)가 내 세계의 축이다. 그 이외에는 모두 방해를....... 내 의무를 다하자, 우수스운 비유이지만 맥아더처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뿐이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모든 것이 지금 사라져 가고 있다.- 1964년 3월 30일 -
그의 독점욕과 나의 그것, 그의 자유로우려는 성격과 나의 그것, 그의 이성적(理性的)인 면과 나의 그것이 항상 부딪쳐 만나면 싸움이다. 그가 너무나 나와 똑같아서 싸우게 된다. 나와 너무다 달라서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약간 희극적이다.- 1964년 4월 22일 -
채에 공을 넣고 흔들 듯이 반복하여 흔든다. 하나의 방향으로 그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가. 도대체 그럴 때면 (거의 신비하게 화를 내고, 신비하게 차를 타고 떠날 때) 방향감각을 잃은 곤충처럼 혼란하다. 숱한 지질시대地質時代를 반복하고 다시 식물은 자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지질시대를 거쳐야 하는가.- 1964년 5월 3일 -
매순간마다 확인시키고 싶다. 도대체 내구성耐九性이 없는 언어로서가 아니라, 언어 따위는 초월한 무엇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1964년 5월 13일 -
가장 큰 고통은 서로 어긋남을 갖는 것이다. 순서가 일치하지 않고 혼동된다.- 1964년 6월 16일 -
조화(調和)하려면 서로 어린애가 되는 차례를 알아서 때를 써야 될 것이다.- 1964년 7월 21일 -
언젠가 그에게서 왔던 참 즐거웠던 편지 하나가 기억 났다. 그것은 단지 흰 큰 종이 위에 <죽었니?>라고 씌여 있었다.- 1964년 7월 23일 -
미래완료의 시간 속에 산다. 일류전(Illution), 모든 것은 환상. 미래까지도 이미 완료된 시칭時稱 속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1964년 9월 19일 -
왜 보를레르는 일생 동안 쟌느 듀발을 사랑한 것일까? 백인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고, 오욕의 생활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마음으로 극악했다는...... 또 릴케가
왜 자기보다 열 네 살이나 위인, 남편 있는, 남성적인 루를 사랑했던가! 니체가 [수세기에 한번 구라파에 나타나는 두뇌를 가진 여자]라고 평한 루의 총명 때문에? 릴케의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정의(定義)할 수 없는, 정의보다는 보다 높은 법칙 밑에 놓여 있어 운명이니, 만남이니, 하는 말로 그 편린을 알 수 있는 이외에는 전모를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결국 이 마술적인 것이 없는 모든 관계는 모래 위의 성인 것 같다. 아무리 그 관계가 지속됐다 해도 그것은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비본질적인 무엇인 것이다.
- 1964년 10월 5일 -
그의 의식에 비친 내 의식에 구토를 느꼈다.-1964년 12월 9일 -
쟝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방안에 가득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네 글 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갑자기 네 편지 전부(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씩 못 보아도 금단현상(禁斷現象)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도 좀 들어야 가슴이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 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내가 이런 옛날 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좀 쑥스럽고 우스운 것도 같다. 그렇지만 죠르조 상드가 뮈세와 베니스에 간 나이인 것을 생각하면아직도 나는 좀더좀더 불태워야 한다고 분발(?)도 해본다. 나의 지병인 페시미즘을 고쳐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 줄 사람은 너야. 오늘 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 중의 일구(一句)야.쟝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다시 쟝에게 1965년 1월 6일. 정오경. 눈이 멎지 않고 내리고 있어. 눈 속을 헤매고 싶어. 너는 무얼 하니? 모든 일에 구토를 느껴. 단지 의외로 『태양병(太陽炳)』의 번역이 나를 몰두시키고 있어. 이런 내용, 그리고 이런 느낌이란다. 태양병균-비정상적인 강한 열 속에서만 생존하는 병균. 나는 토오라는 표범과 사는 마래(馬來)여자 마라와 만났다. 토오는 나를 미워한다. 나는 마라 몰래 토오에게 구하기 힘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직 따스한 암소고기를 먹인다. 다시 야생(野生)으로 돌아가 길들지 말라고. 갈색 피부의 마라-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기는 하나- 나-"토오를 내쫑아" 마라-"나는 토오가 없으면 잠이 안와요." 나는 토오를 미워한다. 토오는 마라의 애정의 일부를 삣고 있다. 우리는 대륙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열파(熱波)의 한가운데 있는데 춥다. 흰 여자가 흰 남자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갈색 남자가 갈색 여자를 사랑할 때는? 내 심장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 나는 마를 사랑한다. 마라는 일어섰다. 나체로, 갈색으로 사랑하면서. 나는 태양병이 무섭다. 그리고 우리의 피는 소리지른다. 호수 한가운데서 나는 세게를 향하여 소리질렀다. "마라!"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 죽어.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갑자기 광적인 생각이 업습해 온다. 죽음이 구제(救濟)를 갖다 줄는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숲의 화재는 광기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나는 마라를 고통 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나는 한계(限界)위에 서 있다. 아, 마라. 진항 향내 나는 H. 노바크의 이 열(熱)같은 표현 속에 나는 서늘함을 느끼고 있다. -전혜린이 죽기 나흘전의 편지...
그러나 부쳐지지 않고 일종의 신비스런 유언같이 남았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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