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2호 - 2024.06.28 금요일(음력 : 05.23)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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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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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를 읽는 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경이, 즉 낱말을 만지면 그 말도 사람을 만지듯 감동시키는 경이로움이 있다. ― 짐 피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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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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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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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파킹? 대리주차!
주차 공간이 충분치 않은 번화가 식당에서는 주차를 대신해 주기도 한다. 이런 서비스를 ‘발레파킹’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통 ‘발레’라고 하면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무용수들이 우아한 몸짓을 하는 무용극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도대체 무용과 주차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주차 대행 서비스를 ‘발레파킹’이라고 부르는 걸까?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무용극을 뜻하는 ‘발레(ballet)’와 ‘발레파킹’의 ‘발레(valet)’는 별개의 단어이다. b와 v를 한글로는 똑같이 ‘ㅂ’으로 적게 됨에 따라 우리말에서 우연히 같은 철자가 되었을 뿐이다.
valet는 시종이나 하인을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이 말이 영어에 들어가서 하인의 뜻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 호텔 종업원이나 주차요원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최근에는 영어에서도 valet parking 등 주차 대행 서비스와 관련한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 이 말이 해당 서비스와 함께 우리 문화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발레파킹’이란 말도 함께 들어왔다.
때때로 ‘발렛파킹’이라는 표기도 눈에 띈다. 이것은 valet의 프랑스어 발음을 모르고 쓴 것이다. 프랑스어에서는 어말의 자음을 발음하지 않는다. buffet, bouquet 등을 ‘뷔페’ ‘부케’라고 읽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프랑스어 발음을 따라 ‘발레’로 하기도 하고 어말 t를 소리 내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발렛’이 아니라 ‘밸릿’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발렛파킹’은 잘못된 표기다.
그러나 이 말에 얽힌 이런 복잡한 사정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굳이 뜻을 알기 어려운 ‘발레파킹’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리주차’나 ‘주차 대행’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소낙눈
꼭 1년 전 일이다. 새해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우리 가족은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전남 보성. 해가 저물어 출발했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길이 걱정이 되어 큰애더러 일기예보 좀 검색해 보라고 했더니, 자정에 폭설이 있단다. 숙소에 도착하는 일도 문제지만 다음날 움직일 일도 걱정이 된다. 폭설이라니 아무래도 하루쯤 발이 묶이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다음 일정을 바꾸느니 마느니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사이 여기저기 뉴스를 찾아보던 딸애가 말한다. “소낙눈이라는데.” 소낙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그 뜻은 온전히 머릿속으로 환하게 들어온다. 잠깐 내리는 눈이구나. 그러고 보니 일기예보에서 왜 하필 ‘자정’에 눈이 내린다고 했는지 의문점이 깨끗이 해소된다.
소낙눈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눈이다. 그래서 폭설과 소낙눈은 의미가 같지 않다. 폭설은 며칠간도 이어질 수 있지만 소낙눈은 짧은 시간 동안만 내리는 눈이다. 나중에 보니 소낙눈은 의외로 일기예보에서 자주 쓰는 말이었다. 이 말은 50년대에 완간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에는 오르지 않았고 70년대 중반 신문 기사에서 한두 개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 그 무렵 생긴 말일 텐데 이후에도 드물게 보이다가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점점 활발하게 쓰여 오고 있다.
누군가 ‘소낙비’를 본떠 만들었을 이 고마운 낱말 하나가 살아남아 오늘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소낙눈은 잠깐 내리는 눈이니 생활에 큰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세상은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새해에는 그 눈만큼 아름다운 이런 말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어느 게 맞나
문장부호는 글에서 문장의 구조를 드러내거나 글쓴이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부호를 말한다. 한국어의 문장부호에는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를 비롯해 총 21개가 있다. 그런데 문장부호도 일정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는 기호이기 때문에 글자처럼 맞춤법에 따라 써야 한다. 한글의 경우 ‘한글맞춤법’의 부록에 21개 문장부호의 이름과 사용법이 명시돼 있다. 예를 들어 제목에는 마침표나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 쌍점(:)의 앞은 붙여 쓰고 뒤는 띄어 쓴다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문장부호를 사용하다 보면 불편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할 말을 줄이거나 말이 없음을 나타낼 때 쓰는 줄임표는 가운뎃점 6개(……)를 찍어 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운뎃점은 컴퓨터 자판에서 바로 입력할 수 없고 문자표에서 입력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1월 1일에 문장부호 개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글맞춤법 일부 개정안’을 고시해, 줄임표의 점을 가운데에 찍는 대신에 아래쪽에 6개(......)를 찍을 수도 있고 6개가 아닌 3개(…)만 찍을 수도 있도록 했다.
또한 공통 성분을 줄여서 하나의 어구로 묶을 때에도 가운뎃점 대신 쉼표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 ‘금ㆍ은ㆍ동메달’ 대신 ‘금,은,동메달’도 쓸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도 낫표(「」,『』)처럼 입력하기 불편한 부호들은 컴퓨터 자판에서 바로 입력이 가능한 따옴표(‘’,“”)로 대체해 「국어 기본법」을 ‘국어 기본법’으로, 『독립신문』을 “독립신문”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런 것을 알고 나면 문장부호 쓰기가 조금 수월해질 듯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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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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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계곡 흐름 - 천상병
나는 수락산 아래서 사는데,
여름이 되면
새벽 오시에 깨어서
산계곡으로 올라가
날마다 목욕을 한다.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들의
제법 다정한 이야기들
큰 바위 중간 바위 작은 바위
그런 바위들이 숱하고
나무도 우거지고
졸졸졸 졸졸졸
윗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더러는 무르팍까지
잠기는 물길도 있어서
(내가 가는 곳은 그런 곳)
목욕하고 있다 보면
계곡 흐름이 그윽한 정취
∼∼∼∼∼∼∼∼∼∼∼∼∼∼∼∼∼∼∼∼∼∼∼∼∼∼∼∼∼∼∼∼∼∼∼∼
반달과 소녀(少女) - 한용운
옛 버들의 새 가지에
흔들려 비치는 부서진 빛은
구름 사이의 반달이었다.
뜰에서 놀던 어여쁜 소녀는
「저게 내 빗이여」하고 소리쳤다.
발꿈치를 제껴 디디고
고사리 같은 손을 힘있게 들어
반달을 따려고 강장강장 뛰었다.
따려다 따지 못하고
눈을 할낏 흘기며 손을 들었다.
무릇각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자장」하더라.
∼∼∼∼∼∼∼∼∼∼∼∼∼∼∼∼∼∼∼∼∼∼∼∼∼∼∼∼∼∼∼∼~~~~∼∼
뻣나무 열매 - 정지용
웃 입술에 그 뻣나무 열매가 다 나섰니?
그래 그 뻣나무 열매가 지운 듯 스러졌니?
그끄제 밤에 늬가 참버리처럼 닝닝거리고 간 뒤로-
불빛은 송화ㅅ가루 삐운 듯 무리를 둘러 쓰고
문풍지에 아름푸시 얼음 풀린 먼 여울이 떠는구나
바람세는 연사흘 두고 유달리도 미끄러워
한창 때 삭신이 덧나기도 쉬웁단다.
외로운 서 강화도로 떠날 임시 해서-
웃 입술에 그 뻣나무 열매가 안나서서 쓰겠니?
그래 그 뻣나무 열매를 그대로 달고 가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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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김수영
도립한 나의 아버지의
얼굴과 나여
나는 한 번도 이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두운 옷 속에서만
이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울린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다
신문을 펴라
이가 걸어나온다
행렬처럼
어제의 물처럼
걸어나온다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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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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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兎死狗烹)
兎:토끼 토. 死:죽을 사. 狗:개 구. 烹:삶을 팽.
[원말] 교토사 양구팽(狡兎死良狗烹)
[동의어] 야수진 엽구팽(野獸盡獵狗烹)
[유사어] 고(비)조진 양궁장[高(飛)鳥盡良弓藏].
[출전]《史記》〈淮陰侯列傳〉,《十八史略》,《韓非子》〈內儲說篇〉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초패왕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의 한 사람인 한신(韓信:?~B.C.196)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는 지난날 그에게 고전한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제후는 초(楚) 땅의 진(陳:하남성 내)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을 진에서 포박하든가 나오지 않으면 제후(諸侯)의 군사로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활한 가신(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 주지. 하지만 그땐 자네도 망한다는 걸 잊지 말게.”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당하자 그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져)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狡兎死良狗烹(교토사양구팽)],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高鳥盡良弓藏(고조진양궁장)],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敵國破謀臣亡(적국파모신망)]고 하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종에게 죽게 되었구나.”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킨 뒤 주거를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제한했다.
[주]《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고조(高鳥)가 비조(飛鳥)로, 양구(良狗)가 주구(走狗)로 나와 있으나 뜻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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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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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41
명예는 객관적으로는 나의 가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이며 주관적으로는 그 의견에 대한 나의 존중이다.
42
사랑이란 상실이며 단념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 버렸을 때 사랑은 더욱 풍부해진다.
43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예의범절을 강요한다. 사회의 관습은 천성이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편리하지만 뛰어난 지성을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하다. 정신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능력과 공적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44
사교적인 모임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질투와 반감을 사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만이 사교적인 모임에서 만족을 얻는다.
45
나를 다른 사람의 처지에 놓아 보면 남에게 느끼는 질투나 증오가 모두 없어질 것이다. 또다른 사람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거만이나 허영심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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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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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1. 인생만사 새옹지마
"올 것이 왔다!"
대통령 윤보선은 5월 16일(1961년)장도영 그리고 박정희 등의 쿠데타 주체들이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들어서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윤보선은 뭘 가지고 올 것이 왔다고 중얼거렸던 것일까? 과연 5.16 군사 쿠데타는 올 것이 와야 했던 사건이었던가? 여기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자면 도리 없이 민주당 정권이 걸어온 발자취와 민주당 정권의 창출 과정을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4.19 의거로 이승만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좀 지루할지 모르겠으나, 꾹 참고 현대사 공부하는 셈치고 4.19에서 5.16까지의 발자취를 함께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래야만 과연 5.16 군사 쿠데타는 와야 할 사건이었는지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가 있고, 또 쿠데타를 통해서 창출해낸 <박정희 정권 18년>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기 꼭 1년 전, 그러니까 1960년 4월 27일의 일이다. 허정(許政)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대통령 권한대행(權限代行)을 맡았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 이틀 전인 4월 25일에 국무원(國務院)의 수석 장관인 외무부장관에 취임하기를 권한대행을 맡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은 고사하고 외무부장관에 기용되리라는 것조차도 예상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래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거늘!"
허정 자신도 기구하게 전개되는 인생에 절로 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 벼슬길에 있었던 감투는 서울특별시장이었다. 이 감투를 쓰기만 했다 하면 돈방석에 올라앉는 자리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서울시청을 복마전(伏魔殿)이라 일컬었다. 그가 이 감투를 썼던 것은 1957년 12월 14일이었다. 그의 관력(官歷)으로 봐서는 <작은 감투>였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의 총애를 이기붕에게 버금갈 정도로 받고 있던 그는 두 달 동안 장관직에 앉아 있던 민희식(閔熙植)의 뒤를 이어 1948년 10월에 제2대 교통부 장관에 발탁되었던 것을 시발로 해서 1950년 3월에 사회부 장관으로 자리를 바꿔앉아 있다가 같은 해 11월에는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다. 허정은 국무총리 서리직에는 불과 4개월밖에 앉아 있지 않았지만, 어찌 됐거나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 자리가 아닌가! 이후, 그는 초야에 묻혀 있다가 1957년 서울시장직에 기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햇수로 따지면 3년이지만 정확히 1년 6개월 만에 타의에 의해서 이 감투를 내던져야만 했다. 1959년 6월 11일의 일이다. 황혼기를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예 세상하고 인연을 끊고 칩거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칩거해 버리자 세상 사람들은 점차 그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가 공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그의 이름 두 자가 꽤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공인, 특히 정치를 한다는 사람의 이름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때에는 대개 두 가지의 경우에서다. 뭔가 기대를 걸 만한 인물의 경우와 아예 사람 됨됨이부터가 개판일 때다. 허정의 경우는 전자에 속했다.
<대쪽같이 꼬장꼬장한 인물.>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고 해야 할 인물.>
꼬장꼬장하다는 것은 청렴결백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모조리 썩어빠진 이승만의 고굉지신(股肱之臣)들 가운데서 유독 허정한테 이런 세평이 붙었다는 것은 그의 정치생명을 위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허정이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개탄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들을 중얼거렸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더니, 정녕 사람 팔자 알 수 없군!"
인생만사 새옹지마(人生萬事 塞翁之馬).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말로, 인생을 살아가자면 화(禍)가 복(福)이 되는 경우도 있고 복이 화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할 때에 흔히 쓰는 말이다. 권한대행을 맡게 되어 배가 아파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승만의 총신(寵臣)들은 모조리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릴 운명에 처하게 됐는데, 총신의 한 사람이었던 허정에게는 도리어 영광스럽게도 <임시 대통령직>이 안겨지게 된 그 행운이 하도 기이하게 느껴져서 내뱉은 중얼거림이었다. 허정이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당시 그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허정을 놓고 그런 가정을 해볼 만했다. 그도 역시 이승만의 충신이요, 고굉지신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허정이 상전인 이승만과 그의 고굉지신들은 모조리 쇠고랑을 차야 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타고난 선천적인 기질 덕분이었다. 그러면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어떻다는 소리인가? 여담이지만 한국의 경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선천적 기질을 분석해 볼 것 같으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 여당적(與黨的) 기질
둘째, 준여당적(準與黨的) 기질
셋째, 야당적(野黨的) 기질
넷째, 기회주의자적(機會主義者的) 기질
이렇게 네 가지 형의 기질로 나눌 수가 있다. 이 네 가지의 기질에 대해서 좀더 기질의 인물에게는 정치가가 갖추고 있어야 할 조건인 행동력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비전도 없다. 있다는 것은 오로지 권력의 그늘에 안주하면서 일신의 영달이나 꾀해 보겠다는 이기심(利己心)뿐이다. 이승만 밑에서 장관, 국회의원을 지낸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여기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렇듯 행동력도 이상적인 비전도 갖지 못하고 있는 집단이 자유당이었으니, 그러한 정당이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반해 준여당적 인물한테는 약간의 뼈가 있다. 당명에 복종은 하나 때로는 제고집을 내세울 줄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당을 박차고 나와서 야당의 대열에 서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는다. 그저 침묵을 전향할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여당적 기질의 인물과 준여당적 기질의 인물이 이러한데 반해 야당적 기질의 인물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거의 고루 갖추어져 있다. 행동력을 위시해서 용기, 결단력, 비전, 예지와 선견지명, 지도력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기에 야당적 기질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제1공화국 시대의 야당인 민주당에 이런 인물들이 집결해 있었기에 이승만은 카리스마적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끝내 독재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음 네번째의 기회주의자적 기질의 치사스럽다. 이런 기질의 인물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신(背信)과 변절(變節)을 다반사로 일삼는다. 심한 경우에는 동지를 팔아먹는 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기질의 인물은 정치가라고 할 수도 없다. 차라리 정상배(政商輩)라고 하는 것이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이런 인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 얘기의 첫머리에 등장한 주인공인 우양 허정의 기질은 어떻다는 소리인가? 그는 물론 준여당적 기질의 인물이었다.
"어떤 면을 보고?"
여기에 대한 회답은 간단하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는 세평이 그가 준여당적 인물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세평이 어떠했든 실제로 <행정형 정치가>라는 것이 있다. 정치학자들은 정치가의 유형을
첫째 이데올로기형 정치가,
둘째 군사독재형(軍事獨裁型) 정치가,
셋째 행정형(行政型) 정치가,
넷째 개발형(開發型) 정치가,
다섯째 정략형(政略型) 정치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여당적 또는 준여당적 인물은 기질적인 유형에 있어 행정형 정치가의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를 위해서는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만일 반골(叛骨) 정신이 강해서 권력자가 하는 일에 일일이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든가 용훼하려 들었다가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정부를 이끌어 나갔던 기간을 우리는 과도기(過渡期)라 일컫고 있다. 표준 국어사전에 <과도기(過渡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1. 옛 것에서 새로운 시기로 옮겨 가는 시기. 한 고비에서 다른 고비로 넘어가려는 그 동안. 과도시대(過渡時代).
2. 사회의 사상과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
그러나 정치사적으로 볼 때는 과도기란 그렇게 바람직스러운 것은 못 된다. 정치적 과도기란 곧 정변(政變)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과도기가 꼭 세 번 있었다. 첫번째는 미군정(美軍政) 때였고, 두번째는 이승만 정권이 넘어진 직후였다. 그리고 세번째는 이 역시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무너진 직후였다. 이렇게 한 정권이 무너지고 나면 꼭 과도기를 거쳐야 했기문에 정치적 의미의 과도기란 그리 바람직스러운 것이 못 된다는 얘기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 들어선 것이 허정 과도정권(過渡政權)이라는 것이다.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한 것은 1960년 4월27일이었다. 이 과도정권은 꼭 백 일 동안 백 일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정권을 담당했다는 것은 허정으로서는 행운이었다. 그는 이승만의 측근 중의 측근자였기 때문에 행운이라는 표현이 더 실감이 난다.
시대의 변화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대사는 피를 통해서만 변화가 촉구되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에 한 시대를 주름잡아 오던 주인공 이승만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묵은 시대는 장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아니 아직 새 시대가 열리지는 않았다. 열리려는 진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처방제는 어떻게 조제되었던 것인가? 앞의 장과 중복되기는 하나 다시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허정이 대통령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를 방문한 것은 4월 21일이었다. <피의 화요일>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4월 19일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다. 이때 이승만은 허정만이 아니라변영태(卞榮泰)도 불러들여 입각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인 22일에도 이승만은 허정과 변영태를 다시 경무대로 불렀다. 이승만이 두 사람을 또 부른 이유는 역시 입각을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이승만의 심정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런 심정이 되어 비롯한 전 국무위원이 사표 한 장을 써서 내던지고 정부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봤나. 이런 무책임한 자들을 거느리고 내가 정부를 이끌어 왔단 말인가?) 장관이라는 자들이 써서 내던진 사표를 받아든 이승만의 마음은 노여움에 앞서 슬픔이 먼저 일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기만 했다. 사건의 원인은 그자들이 유발해 놓고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 하기는커녕 회피하기에 급급해 있었으니, 이승만의 가슴이 미어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스터 허, 미스터 변, 두 사람 다 정부에 들어와서 나를 도와주게!"
이승만은 애원하듯 두 사람의 입각을 완곡하게 입각을 거절했다. 4월 22일 당시, 이승만은 개각을단행하고 대모대가 요구하는 사항을 몇 가지만 들어주면 자신의 대통령직은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허정과 변영태 두 사람을 입각시켜 사태를 수습하고자 그토록 집요하게 두 사람의 입각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두 사람을 종용하는 한편, 4월 23일에는 <나는 자유당과 절연하고 오직 대통령직에만 전념하도록 하겠다>라는 내용의 담화까지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담화 내용이 허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 같다. 그는 21일의 이승만과의 면담 때 세 가지를 건의했다. 첫째,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무효화하고 즉시 총재직을 사임하고 초당적 위치로 되돌아갈 것과 셋째는 각계 각층의 인재를 등용해서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허정은 자신의 건의를 이승만이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허정은 이승만의 담화 발표가 있은 직후, 신당동(新堂洞)으로 변영태를 찾아갔다.
"이 어려운 때에 이 대통령을 도와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인간적 도리가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 같이 정부에 들어가서 이 대통령을 도와드리도록 합시다."
변영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허정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그 어른이 얼마나 어려우면 우리를 찾으셨겠소. 그러니 우리 국무위원인 외무를 맡으시오. 나는 아무 자리라도 좋소."
그러나 변영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아니,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오."
그 태도가 매정할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이럴 순 없잖은가, 이럴 순!) 허정은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신당동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방송을 통해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를 알았다. 본인의 사퇴서로 권력에 도취하여 압제와 폭정을 계속하는 이승만 정부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해서...... 정권욕의 불법수단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집권자의 사병화(私兵化)한 경찰은 평화적 시위학도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잔악한 보복살상과 고문을 무수히 감행하여 국민을 격앙케 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투쟁 전열에서 국민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을 맹세하는 뜻에서...... 등등의 이유를 들어 부통령직을 사퇴한다고 성명을 냈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명분상으로는 그럴싸했다. 그러나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한 참 속뜻은 정권 획득을 위한 과감한 포석이야!) 허정은 그렇게 판단했다. 실지로 그랬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하도록 헌책을 한 것은 엄상섭이다. 그렇다면 엄상섭이 장면에게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헌책한 것은 바로 앞의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었다. 허정이 장면의 속셈을 꿰뚫어 본 바대로 정권 획득을 위한 일련의 포석이었다. 어째서 이러한 정치적 포석이 필요했던가? 그것은 민주당이 정.부통령 선거 때 내걸었던 정치적 공약 때문이었다. 그 공약이란 다름 아니라 정치제도에 있어 민주당은 처음부터 있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도 민주당은 이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했던 만큼 민주당이 집권을 하게 될 경우에는 싫든 좋든 이 공약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런데 4월 22일쯤에 이르면서 <이승만을 하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일기 시작했다. 만일 이승만이 여론에 굴복해서 대통령을 사임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찌 되는가? 헌법의 규정에 따라 부통령인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된다는 것은 곧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정권을 잡은 이상 내각책임제로 바꾸어야만 한다. 장면이 대통령직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하게 되면, 민주당 구파는 장면을 상징적인 존재인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게 해놓고 실속 있는 총리직을 그들이 맡으려 할 것은 불을 보기보다도 더 환한 일이었다.(그럴 수는 없지, 정권을 구파한테 담당시킬 수는 없어!) 이것이 엄상섭의 속셈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장면을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헌책했던 것이다. 한데, 장관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해 놓고 있는데다 장면마저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니, 만일 예기치 않은 사태로 해서 이승만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국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헌법기관의 공백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허정은 바로 이 점을 걱정했다. 어떤 경우에도 정부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제 새삼스럽게 이승만을 찾아가, <저 입각하겠으니 장관 자리 하나 주시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변영태가 입각을 수락한다면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입각하겠다고 생각했으나 변영태가 입각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보니 허정도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딱하군, 딱해!) 허정은 답답했다. 그렇다고 어떤 결단을 그런데 4월 25일, 이승만이 또 허정을 경무대로 불렀다. 다시 입각을 권유하기 위해서 불렀으리라는 것은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다시 이승만의 부름을 받자, 허정은 그제야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필요는 없어!) 그는 지체없이 경무대로 달려갔다.
"나 미스터 허와 미스터 변이 하라는 대로 자유당하고 손을 끊었어. 그러니 어서 입각을 승낙하게."
그렇게 말하는 이승만은 요 며칠 사이에 바싹 늙어버린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허정은 그저 가슴이 아리고 답답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겠어? 입각을 하겠어, 않겠어?"
"예, 선생님 말씀대로 입각을 하겠습니다."
허정은 마침내 입각을 승낙했다.
"그럼, 어서 인선을 서두르게."
이승만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숨결이 감도는 것 같았다. 허정은 이렇게 혼란한 때에는 법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어야만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내무부 장관으로 이호를, 법무부 장관으로는 권승렬(權承烈)을 추천했다. 이승만은 군말이 없었다.
"좋네, 좋으니."
이 말만 연발할 뿐이었다. 허정은 생각 같아서는 나머지 장관들도 모조리 추천하고 싶었으나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수석 국무위원 취임성명을 발표했다.
1. 비상사태의 신속한 수습
2. 책임정치제의 확립과 공무원, 특히 경찰의 엄정중립
3. 관기(官紀)의 쇄신
물론 이날에 민주당은 <이승만의 하야>를 당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지만, 허정은 이승만의 하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생각해 보지를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서 보필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굳은 결심이었다. 한데, 허정의 생각과는 달리 정국(政局)은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허정이 입각을 수락하고 새 각료를 추천하는 등 출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보다도 더 격렬한 데모가 4월 25일에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이날의 데모대의 구호는 지금까지의 <부정선거 다시 하라>가 아니라 <이승만 물러가라>였다. 여기에 또 곁들여 천만뜻밖에도 상아탑 속의 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 교수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계 대학사상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를 벌인 일이 일찍이 어느 나라에서 있었던가?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 교수들은 모두 258명이었다. 전체 대학 교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였지만, 이 258명의 대학 교수들이야말로 실로 그들 교수들 가운데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258명의 대학 교수들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은 즉시 사퇴하라>는 결의를 한 다음, 국회가 있는 태평로로 진출해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시국 선언문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학생의 피에 보답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학 교수들은 그 구호를 플래카드에 쓴 다음 그것을 앞세우고 데모를 벌였다.<대학 교수들이 데모를 벌였다!> 이 말이 서울 장안에 퍼지자, 지금까지 팔짱을 끼고 방관하던 사람들까지도 데모 대열로 뛰어들었다. 삽시간에 데모의 인파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데모가 격렬해지면서 서대문 이기붕의 집에서 발포를 하는 사건이 또 벌어졌다. 동대문 경찰서 관내에서도 무차별 사격을 해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이승만이 <자유당과 결별하고 초당적 위치에 섰다>는 정도로는 도저히 사태를 수습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떤 극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이 사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매듭이 굵어지고 만 것이다.
날이 밝자, 허정은 다시 경무대로 들어갔다. 뒷날 허정은 <4월 26일 아침 6시에 이 박사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놓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기억의 착오가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하루 전인 4월 25일에 수석 국무위원인 외무부 장관 자리에 갓 취임했을 뿐인 그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논리적인 모순을 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허정은 이승만에 의해서 수석 국무위원에 임명된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면 그 역시 물러나야마땅하다. 그것이 정치도의(政治道義)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물러나는 처지에, 그에 의해서 임명된 사람이 명분을 찾기 어려워서라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여간에 허정이 경무대에 들어가니 비서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가 하면, 이미 사표가 수리된 김정열도 거기에 들어와 있었다. 사실은 이날 아침, 이승만은 한 비서관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하야성명 구술을 마치자, 옆에 기립해 있던 김정열에게 매카나기와 유엔군 총사령관 매그루더를 불러들이라고 명령했다. 사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것을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매카나기와 매그루더가 그 모습을 나타내기도 전에 먼저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이 데모대의 대표라는 사람 다섯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모대의 요구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송요찬이 그의 부하를 시켜 동대문에서 데모를 벌이고 있던 군중 가운데서 아무렇게나 뽑아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다섯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유일라(兪一羅:25세, 노동),김기일(金基日:34세, 독학생) 등이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주워섬겼다.
"저 국민의 아우성을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다."
"현 사태를 수습하려면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는 길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국민이 나가라고 한다면 나가겠다."
아마도 다섯 사람은 이승만이 <국민이 나가라고 한다면 나가겠다>고 한 말에 적잖이 고무되었던 모양이다.
"대통령께서 하야하신다면 누구에게 정권을 넘기시겠습니까?"
이승만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잽싸게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저희들 생각으로는 송 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제시했다. 옆에서 송요찬이 벙글벙글 웃으며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뒷날 4.19 학생의거가 벌어지자, 송요찬은 매카나기가 <송 장군이 정권을 인수하도록 하라>고 귀띔해 주더라는 말을 한 일이 있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문관우위(文官優位)가 체질화되어 있고 하물며 외교사절이 매카나기가 그 따위 대표도 아닌 사람들을 대표라고 데려다가 이승만에게 그런 엉뚱한 의견을 개진시켰는가 하면, 매카나기 어쩌고 하며 한 말을 종합해 볼 때 송요찬은 <60만 대군은 내 명령 한마디에 기계처럼 움직여 주겠다. 빌어먹을, 이 기회를 이용해서 대권을 한번 잡아봐?> 하고 그 나름대로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째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데모대 대표니 뭐니 하는 청장년들을 데려다가 엉뚱한 수작을 했겠는가? 하여간에 이날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고 발표하고야 말았다. 국민이 원한다면, 곧 민의(民意)에 따라 민의는 이미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지금까지 전국 각처에서 벌여온 데코가 바로 그 민의였고 또 어젯밤 대학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절규한 것이 바로 <민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것은 무슨 수작인가?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할 때 그 한마디만 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정.부통령 선거도 다시 하고, 또 이기붕을 공직에서도 물러나게 할 것이며 내각책임제로 개헌도 하겠다고 곁들였다. 그는 왜 이런 사족들을 달았던 것인가? 그것은 난마와도 같이 헝클어져 있는 난국을 그의 책임하에 수습하겠다는 해도 이승만이 땅 짚고 헤엄치기로 대통령에 당선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물론 민주당에서 새로이 대통령 후보자를 내놓는다면 그 결과는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체제에 대한 기본 정책은 내각책임제였다. 모사인 엄상섭이 대통령 계승권이 있는 장면을 서둘러 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도 내각책임제로 전환할 때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한 민주당의 처지였고 보면 이제 새삼스럽게 대통령 후보자를 낼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또다시 뽑히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단 대통령에 당선돼 놓고 보면 내각책임제로 체제를 바꾸었다고 해서 그를 대통령직에서 밀어낼 리는 없을 그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껏 대권을 쥐고 흔들던 대통령이었다가 상징적인 대통령으로 신세가 뒤바뀌어진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사태가 이렇게 돼버렸으니. 상징적인 대통령만으로라도 만족하자!) 이것이 이승만의 속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성명이 발표되자, 주한 미대사관에서 일침을 가해 왔다. "그따위 미봉책으로 시국을 호도하려 들지 말라." 주한 미대사관만이 아니었다. 데모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차피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무슨 놈의 군소리가 그리도 많아?" 정말 뜨거운 맛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즉각 하야하라.> 데모대의 열기가 또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가 이승만의 동상을 밧줄로 묶어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오물차에 매달아 가지고 시내로 질질 끌고 다녔다. 데모대의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국회에서도 서둘러 <이승만은 즉시 하야해야 할 것이며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고 개헌을 한 다음 총선거를 실시토록 한다>라는 내용의 시국수습안을 가결했다. 이 <시국수습안>은 민주당에서 제출한 결의안이었다. 국회의 절대 다수당인 자유당 의원들은 데모대의 열기가 야당에 동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벌어지게 되자, 이승만도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정치적 운수도 이제 끝장이라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비서를 시켜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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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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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브리타니아 문제
외국을 침공하여 약탈과 폭행을 저지른 뒤 물러나는 강도짓 같은 군사행동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외국을 침공하여 그 땅을 점령할 뿐 아니라, 그 땅과 주민들을 자기네 세계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행동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우선 군사력을 이용한 제패는 되도록 짧은 기간에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쟁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정복당한 쪽의 적개심이 증폭되게 마련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대군을 일시에 투입하여 속전속결로 나가야 한다.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여 천천히 제패를 진행하는 것은 공격하는 쪽에도 당하는 쪽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나쁜 짓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단숨에 해치워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도 말했다. 타민족을 침략하는 못된 짓은 단기간에 끝내고 전후 처리를 충분히 하는 편이 정복자에게도 피정복자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침략은 무조건 나쁘다는식의 이상주의는 물론 여기서 배제된다. 인류의 역사는 곧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저지른 악행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인간성의 현실이라면, 악행에 따른 폐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도 인간의 지혜를 발휘할 여지는 있다. 로마인이 저지른 '악행'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다.
그는 원로원의 결의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시간만 허비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빚까지 내서 자비로 편성한 10개 군단을 동원하여 8년 만에 갈리아 전역을 제패했다. 로마 군단에는 어김없이 보조부대가 딸려 있지만, 그의 시대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10개 군단은 6만 명의 병력을 의미한다. 갈리아 전쟁 기간의 사상자를 빼면, 실제로는 5만 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인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정예 집단이다. 게다가 8년 만에 갈리아를 제패한 뒤에는 전후 처리에 다시 1년 남짓한 시간을 소비했다. 그의 전후 처리는 보복행위를 삼가고, 기존의 지배계층과 부족을 그대로 유지할 뿐 아니라, 피정복자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고, 부족 내부의 자치까지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정복자의 언어인 라틴어를 강요하지 않고, 풍속과 관습도 전과 다름없이 유지한다. 갈리아 민족을 게르만 민족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로마의 역할이다. 갈리아는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속주세와 관세를 당분간은 다른 속주보다 낮게 유지하여 경제력 향상을 꾀한다. 갈리아가 로마 통치의 우등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갈리아인의 독립심이 희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세계에 편입되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몸젠의 말에 따르면, 갈리아인은 스스로 갈리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로마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로마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단숨에 해치운 악행과 충분한 고려에서 나온 선행'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로마인이 브리타니아에서 갈리아와 정반대되는 일을 했다. 브리타니아 정복을 결행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군사적 무지가 그 원인이었던 게 분명하다. 브리타니아에 투입된 군단은 당초에는 4개 군단이었지만 곧 3개 군단으로 줄어들었고, 그후에는 2개 군단이 정복을 계속했다. 보조병 제도 덕분에 2개 군단이라도 총병력은 1만 2천 명의 두 배 가까이 되지만, 그래도 겨우 2만 명이다. 정예병력은 1만 명도 채 안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현실적이다. 카이사르의 5만 명과는 큰 차이다. 갈리아를 제패하는 데 걸린 기간은 8년이었던 반면, 브리타니아는 정복을 시작한 지 18년이 지나도록 아직 제패하지 못했다. 5만 명과 2만 명의 차이는 바로 이 결과에 나타나 있었다. 이것은 전선 지휘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로마의 황제가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전략상의 문제였다. 현대의 관료처럼 2-3년마다 교체되는 사령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조금씩 정복지를 넓히고, 정복이 끝난 땅에는 퇴역병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로 만들고, 종래의 도시를 지방자치단체로 만들어 속주 통치의 '핵'으로 삼고, 그 핵들을 로마식 가도로 연결하는 정도의 작업밖에는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 자체는 로마의 전통적인 방식이니까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작업에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 서기 61년에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총궐기는 아직 로마가 제패하지 못한 지역에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제패가 끝나,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은 지방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이것은 로마의 브리타니아 통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총궐기한 브리타니아인의 우두머리는 여자였다. 이름은 부디카. 이 여자는 로마와 처음부터 우호관계를 맺은 부족장의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총궐기를 주도한 게 아니라 우두머리로 추대된 데 불과했던 모양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디카의 두 딸이 로마인에게 강간당한 것이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전쟁 때 강간은 아니지만 패배한 갈리아인 여자들과 관계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거기에 분개한 피정복민이 로마에 반대하여 궐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이런 관계를 비밀로 하지 않고, 여자들의 부모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지배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율리우스라는 자기 가문 이름까지 주어 '보상'을 확실히 끝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시대로부터 한 세가기 지난 네로 시대에도 가이우스 율리우스라는 이름까지 카이사르와 똑같은 게르만 부족장이 등장하여 자신의 조상이 카이사르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웃을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도처에 씨를 뿌려도 양쪽이 다 만족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브리타니아에서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 아직 정복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미 패배하여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간 브리타니아인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정복자 노릇을 했다. 무리도 아니다. 지금은 적이 아니라 해도 언제 적과 손잡고 다시 적이 될지 모르는 상대를 자기편으로 대우하기는 어렵다. 제패를 단기간에 끝내지 않고 질질 끈 폐해가 여기에도 나타나 있었다. 둘째는 돈 문제다. 10퍼센트의 속주세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아니다. 그 세금을 내려면 빚을 져야 할 때가 많았는데, 금리가 너무 높았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금리는 상한선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12퍼센트 이상은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속주에서는 금융업자들이 마음대로 받을 수 있도록 방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발전이 뒤떨어진 브리타니아에서는 금융업자라면 로마인이었다.
공화정 말기에 브루투스가 속주에서 48퍼센트나 되는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데 분개한 키케로의 편지가 남아 있지만, 제패가 진행되고있던 브리타니아에서도 이런 고리대금이 횡행했을 게 분명하다. 제패가 끝나지 않은 지역에서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위험이 높을수록 금리도 올라가는 것은 경제의 이치다. 여기에 제동을 거는 것이야말로 정치에 속하는 중요한 '전후 처리'지만,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해본 적이 없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네로 황제는 이런 문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네로의 보좌관인 세네카가 막대한 재산을 모은 것도 브리타니아에 고금리로 투자한 결과라는 소문이 있었다. 황제의 측근이 이럴진대, 경제의 이치에 제동을 거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금융업자들은 제동장치가 없는 것을 기회로 브리타니아에서 폭리를 탐하고 있었다. 브리타니아인의 분노가 금융업자만이 아니라 로마인 전체로 확산된 것도 당연하다. 로마인은 우리를 착취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로마인과 우호관계를 맺은 것도 후회하게 된다. 바로 그 무렵,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인 수에토니우스('황제열전'의 저자와는 다른 인물)가 브리타니아에 주둔해 있는 로마군의 절반을 이끌고 모나 섬(오늘날의 앵글시 섬)에 들어박혀 있는 드루이드교 사제와 신도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도 불행이었다.
궐기한 브리타니아인들은 오늘날의 콜체스터에 정착한 로마 퇴역병을 습격했다. 이들을 피의 제물로 바쳐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반란군은 출동한 로마군 1개 군단까지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브리타니아 속주의 수도인 콜체스터가 적의 공격을 받은 데 이어 1개 군단까지 궤멸하는 참상에 로마군 지휘관은 평정심을 잃었다. 그들은 모나 섬의 수에토니우스에게 당장 돌아오라는 구원 요청을 보내놓고도, 수에토니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군단장도 황제 재무관도 도버해협을 건너 갈리아로 도망쳐버렸다. 로마측 군사력이 공백 상태에 빠지자, 반란군측의 분노를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로마인만이 아니라 로마인과 우호관계에 있던 브리타니아인까지도 화를 당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살해되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의 수는 7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브리타니아인에게는 포로로 잡아서 노예로 파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항복한 사람은 모조리 죽였다. 수에토니우스 총독이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1만 명 안팎에 불과했다. 로마는 갈리아에 군단을 상주시키지 않으니까, 라인 강이나 에스파냐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에토니우스는 평원에 포진하여 정면 대결을 벌이는 회전으로 승부를 겨루기로 결정했다. 아직 미개한 민족인 브리타니아인은 이런 회전에 서투르지만, 회전에서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로마군으로서는 가장 자신있는 전투 방식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로마군은 역사가 타키투스가 "옛날 장수들의 후예답다"고 평했을 정도의 전과를 거두었다. 8만 명이 넘는 적군의 시체가 전쟁터를 가득 메웠다. 아군의 손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일단 응급조치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로마의 네로가 나설 차례다. 네로는 우선 라인 강 방위군 병력 중에서 2천 명의 군단병과 8개 대대의 보조병 및 1천 기의 기병을 떼어 브리타니아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전부 합하면 1만 1천 명 정도일 것이다. 궤멸한 1개 군단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브리타니아의 실정을 시찰하도록 해방노예인 폴리클레토스를 파견했다. 원래 노예였던 자가 특사로 도착한 것은 로마측에 붙어 있던 브리타니아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폴리클레토스는 유능한 시찰관이었다. 그의 보고를 토대로 네로는 브리타니아 통치 체제를 크게 바꾸었다. 개혁의 상세한 내용은 분명치 않다. 하지만 보복 조치가 전혀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를 계기로 피정복자인 브리타니아인에 대한 로마인의 태도는 180도로 바뀌었다. 또한 네로는 수에토니우스 총독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페트로니우스를 신임 총독으로 브리타니아에 보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싸운 수에토니우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로마의 통치 방식이 바뀌었다는 인상을 브리타니아인에게 심어주려면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무려 400년 동안 브리타니아인이 로마에 본격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로마의 제패가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의 브리타니아인은 '팍스 로마나'를 모토로 하는 로마 세계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드루이드교로 상징되는 켈트 문명은 이 무렵부터 브리타니아에서도 쫓겨나 아일랜드로 옮겨갔고, 거기서 살아남게 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으로 갈라지기 오래 전에 이미 로마 세계와 비로마 세계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
네로는 브리타니아 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지만,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대처는 합격점을 받기 어렵다. 그것은 아마 이 두 가지 문제가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브리타니아 문제는 제국의 한 지역을 통치하는 문제였던 반면,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는 제국 전체의 안전보장과 관련된 문제였다. 로마가 낙하산식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힌 티그라네스는 아니나다를까 1년도 지나기 전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아르메니아가 도로 파르티아의 수중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계속 로마 편에 남아 있느냐는 로마 제국의 오리엔트 방위체제가 기능을 발휘하느냐 못하느냐를 좌우한다. 또한 아르메니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자칫하면 파르티아와 전면전이 벌어질 위험도 있었다. 이 문제 해결에 골몰하던 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적당한 후보자가 달리 없는 이상, 로마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끝까지 티그라네스의 왕위를 지켜준다.
(2) 아르메니아 왕국의 두 수도가 로마의 수중에 들어와 있는 지금, 문제가 끊이지 않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아예 로마의 속주로 만들어버린다.
(3)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의 생각을 받아들여, 파르티아 왕제인 티리다테스가 신하로서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서약하는 조건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는 것을 승인한다.
(1)을 채택했을 경우, 불안 요인은 바로 티그라네스의 능력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평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2)르 채택할 경우,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만들어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미개한 민족인 트라키아 왕국을 속주화한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페르시아 문명권에 속하는 문명국이다. 로마는 문명도가 높은 지방을 속주화할 때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한다. 원래 파르티아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아르메니아에 그리스나 시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와 같은 자치권을 부여하면 로마의 속주화는 유명무실해질 우려가 있었다. (3)을 채택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네로는 그 용기를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180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와 우호관계를 지속하려면 (3)의 선택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파르티아 왕제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는 것을 승인하면 로마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고 비난할 것이다. 네로는 그게 두려웠다.
네로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판단을 도와줄 재료는 몇 가지 있었다.
(A) 아르메니아의 상층부는 전통적으로 파르티아파와 로마파로 양분되어 있는데, 로마가 두 수도를 공략했기 때문에 기세가 오른 로마파 사람들을 의지할 수 있다.
(B) 수도는 국가의 중요한 거점이다. 그 요충을 둘 다 수중에 넣었기 때문에 로마가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C) 로마 시민들 대다수는 로마의 영토가 확장되는, 아르메니아 속주화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네로는 (1)도 될 수 있고 (2)도 될 수 있는 대책을 채택했다. 티그라네스의 왕위를 지켜주는 데 성공하면 좋고, 성공하지 못하면 속주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파르티아와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은 높아진 정도가 아니라 확실해지고 말았다. 이 결정을 통고받은 코르불로는 로마의 네로에게 아르메니아 전선만 담당할 사령관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진언했다. 네로는 이 진언을 받아들였다. 사령관에는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강경파인 페투스가 임명되었다.
서기 62년 초에 부임한 페투스에게는, 네로의 명령으로 라인 강에서 이동해온 2개 군단을 포함하여 3개 군단이 주어졌다. 보조병과 동맹국 참가병을 합하면 3만이 넘는 병력이다. 코르불로는 역시 3개 군단 병력으로 시리아 속주 총독의 임무에만 충실하게 되었다. 유프라테스 강 서쪽을 철저히 방위하여, 파르티아군이 진격해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 시리아 총독의 임무다. 코르불로는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늘어서 있는 요새를 강화하는데 전념한다. 이 지역의 로마측 방위선은 철벽으로 변했다. 이 전략은 군사력을 양분하여 두 방면에서 파르티아를 포위하게 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적절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로마 방위선이 철벽이라면,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가 직접 이끄는 파르티아군 본대는 철벽인 서쪽을 피해 페투스의 군대가 집결하고 있는 북서쪽으로 창끝을 돌릴 게 뻔했다. 특히 볼로가세스의 속셈은 로마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첩의 소생인 자기한테 파르티아 왕위를 양보해준 동생 티리다테스를 위해서 아르메니아 왕위를 확보해주려는 것이었다. 로마의 '철벽'을 부수는 게 목적도 아닌데 일부러 그 '철벽'에 머리를 부딪칠 바보는 없다. 한 명의 병사도 지휘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인데, 당대 최고의 장수인 코르불로가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코르불로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페투스의 솜씨를 지켜볼 작정이었을까.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즉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무렵 로마인의 대다수는 페투스가 파르티아군을 무찔러 아르메니아가 명실공히 로마의 것이 되리라고 믿었다. 벌써 다된 밥처럼, 털끝만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민중은 항상 낙관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법이다. 서기 62년 당시 로마에 여론조사가 있었다면, 이 무렵 네로 황제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을 것이다. 이따금 기발한 행동으로 시민들을 놀라게 하고 어이없게 만드는 젊은 황제지만, 브리타니아 문제에서 보여준 적절한 대처와 아르메니아-파르티아 ns제에서 보여준 과감한 대응을 보면 최고통치자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최고책임자의 직무를 완수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의 기발한 행동은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수도 로마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는 수원지가 모두 다르다. 수원지는 대게 지하에서 솟아나는 물을 담아놓은 저수지인데, 로마인들은 그 저수지를 신성시하여 거기서 헤엄을 치거나 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TEk. 신성한 곳이니까 헤엄을 치지 말라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고, 사실은 음료수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저수지에서 네로가 헤엄을 쳤다. 하지만 땅에서 솟아난 물이니까 차갑다. 그날 밤 네로는 고열을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 뒤에는 거짓말처럼 건강을 되찼았지만,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어이가 없었다. 네로도 호되게 앓은 뒤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젊은 혈기로 생각하여 오히려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높은 지지율은 자칫하면 함정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지지율이 올라갈수록 더욱 철저한 자기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통제는 네로가 가장 서투른 분야였다. 게다가 이 무렵 25세의 네로는 사리사욕과 무관하게 그에게 직언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었다.
세네카 퇴장
우선 측근에서 네로를 지켜준 근위대장 부루스가 병사했다. 후세에는 네로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설이 퍼졌지만, 증세로 보아 후두암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은퇴를 결심했다. 세네카와 마찬가지로 문필로 이름을 날린 역사가 타키투스는 "부루스의 죽음으로 세네카의 권력도 쇠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타키투스는 세네카와 마찬가지로 문필로 성공했고 원로원 의원이기도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속주에 근무해본 경험밖에 없다. 황제 보좌역을 맡아 국정에 관여한 세네카와는 정치에 참여한 정도가 전혀 다르다. 제국의 중추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세네카는 지식인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지식인이 지식인으로 남는 한, 실권은 아무것도 없다.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영향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으면 그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 작가는 독자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철학자이자 비극작가이기도 한 세네카는 네로가 12세였을 때부터 14년 동안이나 네로를 최측근에서 섬겼다. 처음 6년 동안은 보좌관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네로가 황제가 된 이후 줄곧 세네카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초기 5년 동안"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네로의 자립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네로의 자립심이 얼마나 왕성한지를 알아차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작가'인 세네카는 '독자'인 네로가 갈수록 외면하는 사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타키투스가 말하는 '세네카의 권력'은 아직 막강했다. 최고통치자로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무거운 짐이다. 귀족적인 티베리우스 황제조차도 이따금 푸념을 늘어놓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 부담에 짓눌려 기력이 소모되었을 정도다. 정치나 군사보다 음악이나 시를 더 좋아한 네로는 많은 분야를 남에게 맡겨버렸다. 세네카나 그 일을 대행해온 것이다. 원로원의 지지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 수많은 법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법안들은 형식적으로는 네로가 입안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세네카가 입안한 것이다. 세네카가 이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네로 황제가 인정했기 때문이지만, 그와 동시에 부루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아무리 교양이 뛰어나다 해도 속주인 에스파냐 출신이고, 로마의 명문 귀족에게는 반드시 따라 다니는 '클리엔테스'도 갖고 있지 않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클리엔테스는 후원회 같은 존재다. 세네카 같은 독불장군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본국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는 유일한 군사력인 1만 명의 근위병을 좌우할 수 있는 부루스가 그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지면 그것이 어떤 권력이든,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비난을 뒤집어쓰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들은 권력자가 약점을 보이자마자 집중 공격을 가해온다. 부루스가 죽기 전에도 세네카에 대한 비난이 일기 시작한 것은, 네로가 세네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원로원 의원들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브리타니아에서 고리대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세네카만이 아니었는데도 세네카는 고리대금업자의 대표처럼 비난을 받았고,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의 책임자라도 되는 듯이 탄핵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루스가 사망한 것이다. 세네카는 발 밑의 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래도 네로에게 매달려 독불장군의 비참한 말로를 보이는 것은 지식인인 세네케의 감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은퇴하여 일개 야인으로 돌아가 저술 활동에 전념하는 쪽을 택했다. 나이도 60대 후반에 집어들어 있었다.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는 세네카가 지식인이라서 네로의 악정을 견디지 못하고 부루스의 죽음을 계기로 은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추측을 하는 사람은 지식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다. 지식인은 '지'를 탐구할 뿐 아니라, '지'로 승부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한 사람이다. 승부에서 질 게 뻔한 경우에는 일단 물러서는 게 당연하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네로의 통치는 악정이 아니었다. 전략에 대한 무지 때문에 실책을 저지르거나 엉뚱한 집념으로 '로마 올림픽' 따위를 개최하기는 했지만, 악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원로원 의원들의 암살 음모도 일어나지 않았고, 시민들도 불만을 외치지 않았고, 변경을 방위하고 있는 군단에서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대 지식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인한 지식인이었던 세네카는 자기가 딛고 서 있는 기반이 무너진 것을 깨닫고 은퇴하기로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스승과 제자의 고별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그 부분을 요약하면, 이제 자기 역할은 끝났으니까 일개 야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세네카에게, 네로는 지금까지의 봉사에 감사하고 스승의 여생이 편안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이런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정말이었다 해도 그건 연극이다. 세네카는 자기가 은퇴하는 이유를 네로에게 말하는 형태로 공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테고, 오랜 관계를 끊을 때에는 네로 쪽에서도 무언가 태도를 밝히는 게 당연했다. 66세의 스승과 25세의 제자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이로써 원래 자제력이 떨어지는 네로에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게다가 이 무렵 네로는 브리타니아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고,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동방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부루스가 죽고 세네카가 은퇴하자, 네로는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애인인 포파이아와 결혼했다. 게다가 이혼한 옥타비아를 섬으로 유배하여 죽여버렸다. 옥타비아를 죽인 것은, 그녀를 동정하고 있던 일반 시민들이 이혼에 분개하여 시위를 벌이자 네로가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로써 네로는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내를 죽였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아내를 죽인 이 사건은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네로는 선황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어,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옥타비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아 그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황제로서 네로의 권위와 권력은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고 있다. 그런데 아직 자식도 낳기 전에 옥타비아와 이혼하면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아그리피나가 이혼에 반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정해둔 '피의 계승' 제도를 받드는 한 아그리피나의 반대론이 옳았다. 게다가 네로는 자기한테도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던 아그리피나마저 죽여버렸다. 황제로서 네로의 정당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황후가 된 포파이아는 시민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아그리피나 같은 야심가는 아니지만, 사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동안은 이런 불상사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당장에 불만이 폭발한다. 홀딱 반한 여자와 마침내 결혼하여 희색이 만면했던 네로는 자기가 폭탄을 품에 안아버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25세의 네로는 '피'의 후원을 받지 못해도 '실력'으로 승부할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의 후원이 사라지면, 원로원과 시민들만이 아니라 군대도 네로 황제가 실력으로 거둔 성과를 더욱 엄정하게 채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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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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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구름처럼붉은(레드 클라우드) - 오글라라 수우 족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자유, 우리 자신의 깨달음이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친구들! 나는 오글라라 수우 족의 추장으로 '구름처럼붉은(레드 클라우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위대한 정령께서 우리 두 부족을 만드셨다. 그분은 우리 부족에게도 대지의 한 조각을 주셨고 당신들에게도 대지의 한 조각을 주셨다. 그런데 당신들은 우리 부족이 가진 대지의 한 조각 속으로 낯선 자처럼 걸어들어왔고 우린 당신들을 형제처럼 맞이했다. 위대한 정령께서 당신들을 만드실 때 그분께서는 당신들을 흰색으로 만드셨으며 좋은 옷을 해 입히셨다. 허나 우리를 만드실 때는 붉은색 피부와 가난을 주셨다. 당신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린 숫자가 무척 많았고 당신들은 얼마 안 됐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들은 숫자가 많고 우린 적다.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 앞에서 연설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이 사람은 이 대륙에 처음부터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대표로 이 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당신들이 우리에 대해 듣고 있는 소문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살인자와 도둑으로 알고 있다. 우린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땅이 더 있었다면 기꺼이 당신들에게 주었겠지만 이제 우리에게 남은 땅은 아무것도 없다. 우린 당신들에게 내쫓겨 섬처럼 작은 땅에서 죄수처럼 생활하고 있다.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 부족을 가난하고 무지한 종족으로 만드셨지만, 당신들에게는 지혜와 부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주셨다. 당신들에게는 길들인 동물을 주셨고 우리에게는 야생의 사냥감을 주셨다. 미국 서부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나 물어 보라. 우린 당신들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당신들도 대지의 아들이고, 우리 역시 대지의 아들이다. 그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상해라, 당신들은 그렇지 않다. 우린 당신들과의 약속을 지키는데 당신들은 지키지 않는다. 나는 오늘 이 말을 하고 내일 저 말을 하는 '점박이 꼬리'가 아니다. 나를 보라. 나는 가난하고, 몸에 걸친 옷조각도 많지 않다. 하지만 나는 한 부족의 추장이다. 우리는 부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일이다. 사람답게 키우는 일, 그것말고 바르게 키우는 일이 또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 인디언에게 있어서 사람답게 키우는 일이란 인디언답게 키우는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되는 일이지 당신들처럼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 당신들의 깨달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깨달음이다.
부라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린 저 세상에 그걸 함께 갖고 갈 수가 없다. 우린 부가 아니라 사랑과 이해를 원한다. 당신들의 목사 한 사람도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재산은 다음 세상으로 갈 때 갖고 갈 수가 없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해라, 그 목사를 포함한 문명인들 모두가 이 세상의 부를 우리에게서 강탈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나는 어린시절을 상인들 틈에서 보냈다. 처음에 상인들이 이 대륙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우리와 좋은 여름을 보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옷 입는 법과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문명인 대추장은 서서히 종류가 다른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끝없이 속임수를 쓰고 술에 취해 살았다. 너무도 질이 나빠서 대추장이 다른 마을로 추방한 자들처럼 보였다. 나는 얼굴 흰 대추장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으나 그 편지들은 전달되지 않았다. 도중에서 다 증발해 버렸으며, 그래서 오늘 이 말을 전하려 얼굴 흰 대추장 앞에 내가 먼 길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오늘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우리 부족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당신들이 보내 주기를 희망한다. 오늘 여기에 올 수 있어서 나는 기쁘다. 당신들은 대지의 동쪽에 속해 있고 나의 부족은 대지의 서쪽에 속해 있다. 내가 이곳에 옴으로써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또한 내 얘기를 들어 주어서 대단히 감사하다. 오늘 오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말한 것에 대해 당신들이 잘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곧 이 대지를 떠날 것이지만 대지 그 자체는 영원하다. 우리가 그 영원함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다해 작별인사를 남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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