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8호 - 2024.01.16. 화요일(음력 : 12. 06.)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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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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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것이 동정보다 낫다. 동정이란 위로를 하면서도 무언가 숨기는 경우가 많으니까.
― 그레텔 에를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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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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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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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센터’ ‘몰던카’
내가 자주 가는 대형 마트에서는 정문 한쪽에 ‘도와센터’를 설치하여, 장 보러 온 사람들의 궁금 사항이나 불편ㆍ불만 사항을 해결해 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고객센터’니 ‘서비스센터’라는 말을 쓰는 데 반해 그곳에서는 ‘도와센터’라는 말을 써서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도와’라는 말을 써서인지 그 대형 마트에서는 장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또 며칠 전 길을 가다가 ‘몰던카’라는 말을 쓰는 상호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언뜻 봤지만 중고차를 사고파는 가게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몰던카’라는 말을 쓰는 사이트도 서넛 있었다. 중고차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중고차’, ‘used car’를 대신해 ‘몰던카’를 쓰기도 하는 모양이다.
‘도와센터’와 ‘몰던카’는 ‘고객센터’, ‘서비스센터’와 ‘중고차’,‘used car’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쉽다. ‘도와’와 ‘몰던’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순 우리말(고유어)이기 때문이다. 의미 전달의 효과는 순 우리말이 한자어, 외래어(외국어)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도와’, ‘몰던’ 등과 ‘센터(center)’, ‘카(car)’ 등의 결합이 아주 자연스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카(car)’는 외래어로도 볼 수 없는 외국어이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순 우리말이 한자어, 외래어(외국어)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순 우리말(고유어)은 ‘도와센터’와 ‘몰던카’처럼 의사소통 측면에서 탁월한 효과가 있다. 새말을 만들거나 가게 이름을 지을 때 적극적으로 활용해 봄직하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영수증 받으실게요”
대형 커피전문점 컵 걸이에 새겨진 글이 화제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X). 나왔습니다(O)” 사물 존칭이 하도 문제가 되다 보니 아예 문구를 새겨 넣은 모양이다. 아르바이트생의 시급보다 비싼 커피이니 나오시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때 씁쓸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사물존칭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사회적인 공감대가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높임말을 어려워한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못지않게 자주 틀리는 말 중에 “-(하)실게요”라는 표현이 있다.“영수증 받으실게요” “여기 앉으실게요” “다른 옷 입어 보실게요” 예는 수도 없이 많다. “-(하)실게요”는 모두 틀린 표현이다.
상대방을 높이는 ‘시’와 말하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약속이나 의지를 담은 ‘-ㄹ게요’는 함께 쓸 수 없다. “영수증 받으세요” “영수증 받을게요”는 되지만 “영수증 받으실게요”는 자신이 영수증을 받겠다는 얘기인지 상대방에게 영수증을 받으라는 것인지 뜻이 모호하게 된다. “영수증 받으세요” “여기 앉으세요” “다른 옷 입어 보세요” 정도면 충분하다.
높여야 할 서술어가 여러 개일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어머니는 나를 보시며 우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며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우셨다’ 어느 것이 맞을까? 어느 쪽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문장의 마지막 서술어에 ‘시’를 쓴다. 즉 ‘어머니는 나를 보며 우셨다’가 자연스럽다. 다만 존경의 어휘와 같이 쓸 때에는 다른 서술어에도 ‘시’를 쓴다. 가령 ‘주무시다’는 그 자체가 어른에게만 쓰는 존경의 뜻을 담은 어휘이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주무시고 가셨다’와 같이 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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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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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새 세 마리 - 천상병
나는 새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텔레비 옆에 있는 세 마리 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새가 아니라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는 은행에서 만든 저금통 위에 서 있는 까치고
두 마리는 기러기 모양인데
경주에서 아내가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세 마리인데
나는 매일같이 이들과 산다.
나는 새를 매우 즐긴다.
평화롭고 태평이고 자유롭고
하늘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진짜 새처럼 애지중지한다.
∼∼∼∼∼∼∼∼∼∼∼∼∼∼∼∼∼∼∼∼∼∼∼∼∼∼∼∼∼∼
반비례 - 한용운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 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
비듥이 - 정지용
저 어는 새떼가 저렇게 날러오나?
저 어는 새떼가 저렇게 날러오나?
사월ㅅ달 해ㅅ살이
물 농오리 치덧하네.
하늘바래기 하늘만 치어보다가
하마 자칫 잊을 뻔 했던
사랑, 사랑이
비듥이 타고 오네요.
비듥이 타고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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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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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축록(中原逐鹿)
中:가운데 중. 原:근원/들/벌판 원. 逐:쫓을 축. 鹿:사슴 록.
[준말] 축록(逐鹿). [동의어] 각축(角逐).
[유사어] 중원장리(中原場裡), 중원석록(中原射鹿).
[출전]《史記》〈淮陰侯列傳〉
중원[天下]의 사슴[帝位]을 쫓는다는 뜻. 곧
① 제위(帝位)를 다툼.
② 정권을 다툼.
③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함.
한(漢)나라 고조(高祖) 11년(B.C. 196), 조(趙)나라 재상이었던 진희가 대(代:산서성)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 틈에 진희와 내통하고 있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도읍 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고조의 황후)와 재상 소하(蕭何)에게 모살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는 여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더이다.”
괴통은 제(齊)나라의 언변가로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제왕(齊王)이었던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사람이다. 그 후 고조 앞에 끌려 나온 괴통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당당히 말했다.
“그때 한신이 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고조는 크게 노했다.
“저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그러자 괴통은 이렇게 항변했다.
“폐하,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진 적이 없나이다. 진(秦)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에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났사옵고, 진나라가 사슴[鹿:帝位]을 잃음으로 해서 천하는 모두 이것을 쫓았던[逐] 것이오며, 그중 키 크고 발빠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던 것이옵니다. 그 옛날 대악당인 ‘도척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었다’고 해서 요 임금이 악인이라 짖은 것은 아니옵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온데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옵기를…‥.”
빈틈없는 항변에 할 말을 잃은 고조는 괴통을 그냥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 요 : 중국 고대의 이상적 성군(聖君).
도척 : 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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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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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10. 여씨천하(2/2)
여태후가 병으로 기력을 잃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유장은 그날도 궁중 연회장으로 불려갔다. 술잔치가 한창 무르 익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 유장이 일어나 여태후에게 청했다.
"저에게도 벼슬자리를 하나 주십시오!"
그런 간청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여씨 일색인 틈바구니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건 태후는 유장의 당돌한 요청에 당황했다.
"벼슬자리를 달라니, 무슨 소리요?"
순간 유장은 술기운 때문에 실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른했다. 그래서 유장은 서둘러 말을 바꾸어서 말했다.
"저 역시 장군의 가계에서 태어난 놈이 아닙니까 지금 술좌석의 질서가 엉망이오니 군법으로 술자리를 단속하는 벼슬을 주십시오."
여태후는 겨우 그까짓 벼슬이냐는 듯 크게 한바탕 웃고는 유장의 요구를 흔쾌히 승낙했다.
"좋소. 술자리를 군법으로 다스리는 벼슬자리에 임명하오."
주연은 더욱 흥겨워졌다. 유장은 옆의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고 춤과 노래를 권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여태후에게 요청했다.
"태후를 위하여 경전의 노래를 부르게 해주십시오."
여태후는 다시 웃고나서 유장을 어린애 취급하듯 말했다.
"그 참 놀라운 일이오. 그대 부친이야 미천한 출신이라 밭일을 알고 있었지만 그대는 날 때부터 왕자가 아니던가. 어떻게 밭일할 때 부르는 노래를 다 알고 있지?"
"그렇지만 농부들의 수고를 곁에서 살피고 느꼈기에 밭노래를 익힐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들어보도록 하지."
유장은 목소리를 길게 높이 뽑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깊이 갈고 많이 심으세. 모는 성글게 그리고 단단히. 다른 종자는 모조리 뽑아버리네. 여씨 일족의 세력을 기르고 여씨 이외의 세력은 제거함을 풍자한 가사라는 것을 짐작했는지 여태후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유장은 태후의 그런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씨 일족 중의 하나가 술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기회는 지금이다! 유씨가 죽어지내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혀 보여주겠다!' 유장은 여씨를 뒤쫓아 나갔다. 전각 밖으로 여씨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게, 여가놈아!"
여씨는 뒤돌아보았다.
"여가놈?"
"그래, 여가놈! 너는 술자리의 질서를 어겼다. 누가 마음대로 좌석에서 이탈하라 그랬느냐."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넌 내가 군법으로 술좌석을 다스리는 직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웃기고 있네! 그건 네 소청이 하도 귀여워서 태후께서 장난으로 내린 벼슬자리가 아닌가. 난 그냥 가 보겠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군법에는 말장난이 없는 법이다. 넌 벌을 받아야 한다!"
유장은 달려가 장검을 뽑아 여씨의 목을 뒤에서 베어버렸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유장은 얼마 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태후에게 보고했다.
"술좌석을 피해 허락도 없이 이탈한 자가 있기로 뒤쫓아가서 제가 삼가 의법처단하고 왔습니다."
"의법처단이라니? 누가 누구를 어떻게 처리했다고?"
"분명 군법을 어겼기로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아, 어떻게 그토록 가혹한 일을! 죽은 자는 누구였던가?"
"여천이라던가요."
"오, 맙소사!"
태후 좌우의 모든 술손님들이 크게 놀랐다. 그러나 태후가 이미 군법을 허락했던 터였으므로 유장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주연은 중지되고 말았다. 유장은 그 때부터 눈엣가시였다. 표적으로 삼고 기회만 오면 살해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여보, 조심하세요. 여씨 일족들이 당신을 주살하려는 모의를 했답니다!"
유장의 부인은 여록의 딸이었다. 때문에 여씨들의 모략을 재빨리 알아내고는 남편에게 주의를 주었다.
"글쎄 말이오. 아직도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고조황제의 중신들인 주발과 관영이 두렵기 때문이오. 그들만 없다면 나 정도가 아니라 유씨 일가들의 씨를 말릴 거요. 조심은 하고 있지만 유씨의 앞날은 짐작할 수가 없소."
그런데 마침내 여태후가 이듬해 죽었다. 유장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친형이기도 하며 제나라 왕인 유양에게 밀사를 보냈다.
ㅡ병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하십시오. 저와 흥거는 내응하여 여씨 일족을 주멸하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형님이 황제가 되십시오.
제왕 유양은 즉시 외삼촌인 사균과 낭중령 축오 중위 위발과 함께 의논했다.
"그러나 여씨 사람인 재상 소평이 우리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일단 제의 해보시지요. 그러나 말을 듣지 않을 땐 죽이는 길밖에요."
축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즉시 소평에게 모의 결과를 통보했다. 그러나 여씨 세력인 소평이 제의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즉각 병사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해버렸다. 군사동원권을 여씨들이 자기사람인 소평에게 준 이상 제나라 왕 유양도 방법이 없었다. 서둘러 사균과 축오와 위발을 다시 불렀다.
"소평이 오히려 과인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위발이 대답했다.
"신에게 묘책이 있습니다. 소평은 아직도 신이 이번 모의에 참여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을 소평에게 보내주십시오."
"여부있겠소. 어서 가 보시오."
위발이 재상 소평에게 달려갔다.
"왕이 군사를 일으키려 해도 한의 출병 증거가 되는 호부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꼼짝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재상께서 왕궁을 포위하고는 왕의 행동을 제약한 것은 잘하신 일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중위 직책에 있는 저에게 병권을 주시어 재상을 대신하여 왕궁을 포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위발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소평은 즉시 위발에게 군사권을 준 뒤 재상부로 돌아갔다. 군사권을 쥐게 된 위발은 지체없이 행동으로 들어갔다.
"지금 곧바로 재상부로 달려가 포위하도록 한다! 소평의 죄는 왕명을 거역하고 왕궁을 포위한 것이다."
재상부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소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 도가에 '바로 단행해야 될 때에 단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해를 입는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소평은 왕을 즉각 처단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자살하고 말았다. 제왕 유양은 재빨리 사균을 재상으로 삼고 위발을 대장군으로, 축오를 내사로 삼은 뒤 국내의 병사를 모조리 동원했다. 한편 축오를 낭야왕 유택에게 보내어 그를 속이라고 했다.
"여씨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나라 왕이 병사를 일으켜 서진하여 이를 주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왕은 아직 나이가 어려 전쟁에는 익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나라 전체를 대왕께 맡기려 하고 계십니다. 제왕께서는 고조황제 시대부터 장군이기에 전쟁에는 익숙하십니다. 제왕은 감히 병력을 떠나 낭야까지 올 수가 없어 대신 저를 보내어 대왕께 청원하도록 했습니다. 부디 대왕께선 임치로 가셔서 제왕과 상의하시고 제의 병력도 아울러 거느리십시오. 그리고 서진하여 관중의 여씨 난을 평정해 주셨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유택이 생각해 보니 매우 그럴듯한 제안이라는 판단이 섰다. 축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제나라로 달려간 유택은 도착 즉시 억류되고 말았다. 제왕 유양이 말했다.
"당신은 이제 속절없이 붙잡힌 몸이오. 축오에게 당신의 명령서를 주어 낭야국의 병력을 총동원할 수 있도록 해주오."
유택은 유택대로 착잡했다. 속은 것이 분했지만 어쩔 수도 없었다.
"좋소. 그렇게 하겠소. 그런데 내 의견을 말해보겠소. 당신의 부왕 도혜왕께선 고조황제의 큰아들이셨소. 그러므로 근본을 따져 말한다면 당신은 고조의 적장손이니 당연히 황제로 즉위할 자격이 있소. 그리고 나는 여씨가 아니고 유씨요. 유씨 중에서도 제일 연장자라 대신들이 나를 기다려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단 말이오. 그런 나를 억류해 놓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소. 물론 내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 나를 억류한 점은 이해가 가오. 아무튼 나를 어서 관중으로 들어가게 해 대사를 마무리짓도록 하는 게 상책일 거요."
유양은 유택의 말도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수레를 마련해 유택을 떠나보냈다. 한편 유택을 보낸 유양은 즉시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군했다. 또한 여러 제후 왕들에게 서신을 띄워 결의를 표명했다.
ㅡ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여러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실 때 부왕인 도혜왕을 제나라 왕으로 앉히셨소. 도혜왕이 서거하자 효혜제는 장량의 제안을 좇아 나를 제왕으로 삼으셨소. 효혜제가 붕어하고 여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멋대로 제를 폐했으며 마음대로 신제를 세우셨소. 나아가 차례로 세 명의 유씨 조왕(여의, 유우, 유회)을 죽여 여씨를 왕으로 대체했으며 결국 나라를 넷으로 분할했소. 이제 태후는 붕어하고 황제는 유소하여 천하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데 이 때 여씨들은 제멋대로 관위를 높이고 병력으로 위세를 떨치며 충신과 열후를 위협해 조칙이라 사칭하며 천하를 호령하고 있소. 이에 유씨의 종묘는 위기에 놓여 있소. 고로 나는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해 부당하게 왕이 된 자들을 주멸하는 바요.
급보를 접한 한나라 조정에서는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상국 여산이 관영에게 군대를 주어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관영이 군사를 이끌고 형양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득 고조 유방에 대한 죄의식이 슬슬 되살아났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볼수록 끔찍하다!' 관영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금 여씨 일족은 관중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유씨를 위협해 여씨끼리 자립하려고 한다. 내가 제나라를 격파하고 귀환한다면 여씨에게 협력하는 일이 되지 않는가! 고조께서 유씨 외에 왕이 되는 자가 있거든 너희들이 협력하여 쳐라 라고 하셨는데, 여씨를 돕는 일은 고조의 뜻에도 배반된다.' 결국 관영은 형양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후 제후들과 제나라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신의 입장과 사정을 알렸다.
ㅡ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연합해서 때려야 여씨 타도의 명분이 서는 겁니다. 조금 더 기회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나라 왕은 즉시 제나라 서쪽 변두리까지 군대를 후퇴시킨 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여록과 여산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안으로는 주발이나 유장 등 유씨세력이 여전히 만만찮아 보였고, 밖으로는 제나라 초나라의 병력이 두려웠으며, 무엇보다 관영이 배반하지 않을까 하는 게 가장 겁났다.
"결국 관영이 제나라 군사와 접전하는 때를 기다렸다가 거사하도록하지!"
당시에 조왕 여록과 양왕 여산은 북군과 남군을 장악한 채 장안에 있었다. 기세가 자못 서슬퍼랬으므로 열후와 군신들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다. 태위인 주발도 병영으로 들어가 군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승상 진평을 찾아가 상의했다.
"노환을 앓고 있는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는 각별히 친한 사이요. 그 점을 이용하는 묘책이 있을 것 같은데."
"역상을 인질로 잡고 아들 역기를 이용해 여록을 함정에 빠뜨리는 책략을 쓰면 어떻겠소."
계략은 즉각 행동으로 옮겨졌다. 역기를 협박한 뒤 곧장 여록을 찾아가도록 했다. 결국 역기는 부친을 살리기 위해 여록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
"고조께서는 여태후와 함께 천하를 평정한 뒤 아홉 명의 유씨 왕과 세 명의 여씨 왕을 세웠소. 이는 중신들의 합의에 위한 것으로 모든 제후들에게 통고하자 그들도 이를 흔쾌히 승인했소이다. 지금 태후는 붕어하시고 황제는 연소하오. 이같은 때에 그대는 조나라 왕이면서도 영지로 부임하지 않고 장안에서 상장군 자리를 차지한 채 군부를 장악하고 있소. 이래가지고는 중신들과 제후들한테서 공연히 의심받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거요."
여록은 역기의 충고를 듣자 문득 자책하고픈 느낌이 들었다.
"그대의 생각이 옳은 것 같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겠소?"
"물어볼 것도 없소. 어서 상장군의 인수를 반환하고 병권을 태위에게 넘긴 뒤 영지로 부임하시오. 양왕 여산에게도 상국의 인수를 반환케하고 군사를 태위에게 돌려준 후 봉국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제나라의 반란도 수습될 것이고 중신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게 될 것이오. 그런 후 그대는 조나라 왕으로서 베개를 높이 베고 사방천리의 땅을 일구며 마음 편히 살 수가 있을 것이오. 세상에 이토록 큰 이득이 어디에 있겠소."
여록은 솔깃했다.
"어차피 여산과도 의논해야 하니 잠깐 시간을 주시오."
"기회를 잃지 않기를 바라오."
여씨 문중 회의가 열렸다. 병권을 태위에게 넘기고 영지로 돌아간다는 안에 대해서 유리하다는 사람과 불리하다는 사람도 있어 결론을 짓지 못해 방책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여록은 역기와 함께 사냥을 나섰다가 마침 고모인 여수에게 들렸다. 여수는 여록을 보자마자 고함부터 질렀다.
"너는 상장군이면서 제 군대를 버린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인간이냐! 우리 집안은 이제 망했다!"
그러더니 장롱 속에 있던 패물들을 꺼내어 마당으로 마구 뿌려대는 것이었다.
"아니, 고모님. 왜 이리 진노하십니까. 어쩌자고 보물들을 함부로 버리시는 겁니까!"
"어차피 빼앗길 것이데, 이렇게 네게 분풀이나 하면서 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고모인 여수조차 이토록 펄펄 뛰니 여록은 더욱 결심을 굳힐 수가 없었다.
중신 조참의 아들인 어사대부 조줄이 상국 여산을 만나 정무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 때 제나라로 사신갔던 낭중령 기수가 돌아와 여산이 얼굴을 보자마자 나무랐다.
"왕께서는 왜 아직까지도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는 가시려 해도 갈 수 없게 됐지만."
"무슨 얘기요?"
"관영이 배반해 제나라 초나라와 합세해서 여씨 일문을 토벌한다고 떠벌리고 있지 않습니까. 화를 면하시려면 어서 궁중이라도 장악하십시오!"
그 말을 우연히 엿들은 조줄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슬며시 밖으로 나와 승상 지평과 태위 주발이 있는 승상부로 달려갔다.
"큰일났습니다! 여산이 지금 궁중을 장악하려 합니다!"
여산이 궁중을 장악한다는 조줄의 소리를 들은 주발은 태위로서의 직위를 빌미로 최소한도 여록의 개입을 막아 보려고 북군으로 뛰었다. 그러나 태위 직위에도 불구하고 북군 사령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애를 태우고 있는데 그때 기신의 아들이며 부절 관리자인 기통이 다가왔다.
"마침 잘 만났소. 군 통제관인 태위인 내가 북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초병들이 나를 막고있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황제의 영이라 속이고 들어가게 해주오! 지금은 만사가 초급하오!"
기통이 주발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북군 사령부로 달려들어간 주발은 재빨리 군을 장악한 뒤 역기와 전객(제후 감시관)인 유게를 불렀다.
"그대들은 빨리 여록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시오.'황제께서는 태위에게 북군의 지휘를 맡기셨소. 그러하니 귀하께서는 서둘러 봉국으로 돌아가길 바라오. 물론 장군이 인수를 반환하고 출발하시는 게 좋소.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신상에 당장 화가 미칠 것이오'라고 말이오!"
역기와 유게는 여록을 만나자마자 그렇게 전했다. 여록은 역기와 친한 사이였다. 역기가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인수를 유게에게 순순히 넘겼다.
"이로써 병권을 태위에게 넘기오."
태위 주발은 병권을 장악하자마자 북군 본영으로 들어가 장병들을 모아놓고 소리쳤다.
"명령한다. 여씨에게 가담할 자는 우단(오른쪽 어깨 내놓기)하고 유씨를 따를 자는 모두 좌단하라!" 그러자 모든 장병들이 하나같이 왼쪽어깨를 드러내 모였다. '됐다! 여록은 이미 상장군 인수를 내놓고 본국으로 떠나버렸고 장병들 모두는 유씨편을 들고 있다. 이로써 북군을 완전 장악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남군은 아직 여산이 지배하에 있었다. 북군쪽의 소식을 전해들은 승상 진평은 재빨리 강화조처를 취했다. 주허후 유장을 불렀다.
"태위 주발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테니 그대가 가서 태위를 보좌하시오."
유장이 도착하자 주발은 유장에게 군문 감시관을 시켰다. 그러고는 평양후 조줄을 급히 불렀다.
"그대는 즉시 위위(궁문을 호위하는 관리)에게로 가서 상국 여산을 궁문 안으로 들이지 않도록 전하시오. 황제의 어명이오!"
한편 여산은 여록이 이미 북군 본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미앙궁을 목표로 쳐들어갔다.
"상국 여산이다! 어서 궁문을 열어라!"
그러나 여산은 안문에서부터 저지당했다. 주졸이 병사들을 거느린 채 궁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문을 열지 못하겠는가!"
"누구냐! 상국 여산이로군. 함부로 궁문을 열라니. 반란인가?"
"궁중으로 들어가 황제를 호위해야겠다. 어서 문을 열라!"
"어림없는 소리! 다시 한 번만 더 그딴 소릴 하면 반역죄로 체포하겠다!"
머쓱해진 여산은 안문을 포기하고 서안문 쪽으로 돌아나갔다. 장성문이나 직성문 쪽으로 방향을 바꿀 생각인 듯했다. 조줄은 다급했다. 병사 한 명을 불러 말했다.
"태위께 말을 몰아 달려가라. 상국 여산이 언제 궁문을 부수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전하고, 황제가 계시는 장락궁은 이미 여씨쪽 사람인 위위 여경시에게 제압 당했노라고 말씀드려라. 긴급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전하란 말이다!"
한편 급보를 받은 태위 주발은 유장을 불러 궁중의 사정을 말하자 유장이 소리쳤다.
"강공책을 쓰는 게 좋겠소. 정면으로 부닥쳐 여씨 일족을 주멸한다고 언명하면 저들의 기세가 꺾일 거요!"
"아니오, 그렇지가 않소. 아직은 여산의 세력이 막강하오. 그들을 가볍게 취급할 수가 없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거요?"
"지금 궁중 출입이 자유로운 신분은 주허후(유장) 그대 밖에 없소. 병사 천 명을 줄 터이니 궁으로 가서 응급조처를 취하시오. 여씨들 주멸 선언은 아직 꺼낼 때가 아니오. 그들이 크게 반발할 거요." 유장은 주발의 경고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없이, 천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바람처럼 병영을 빠져나갔다. 유장이 서안문을 통해 궁정 경내로 들어서자 곧바로 미앙궁이 보였다. 거기서 잠깐 주저했다. '장락궁부터 덮칠 게 아니라 우선 미앙궁을 장악한 뒤 장락궁 쪽의 분위기를 살펴보고 일을 결행해야 되겠다.' 그렇게 판단한 유장은 멋모르고 미앙궁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산은 황제의 거처를 찾지 못했는지 미앙궁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갑자기 맞부닥쳤기 때문인지 여산은 유장을 보는 순간 몹시 놀랐다. 여산이 잠깐 비틀거리는 것을 본 유장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여산을 베어랏!"
유장의 병사들이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오자 기겁한 여산은 궁정 뒷문으로 해서 재빠르게 도망쳤다.
"저놈을 놓치지 마라! 궁 경내를 샅샅이 뒤져 반역자를 처단하라!"
한바탕 유장의 병사들과 여산의 병사들 사이에 칼바람이 일었다. 그틈에 여산은 완전히 숨어버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강풍이 불어 먼지 때문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여산의 병사들은 상국이 도망쳐버린 데다 흙먼지로 혼란에 빠져 저항할 기력을 잃고는 뿔뿔이 도망쳐버렸다. 강풍이 잠잠해졌을 즈음이었다. 어딘가로 달려갔던 병사 하나가 돌아와 유장에게 보고했다.
"여산이 낭중부(궁중 낭중령의 관청)측간 속에 숨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유장은 병사들을 풀어 낭중부를 포위한 뒤 소리쳤다.
"숨은 곳을 알고 있다. 여산은 나와서 벌을 받아라!"
그래도 나오지 않자 궁수들을 측간 속으로 들여보냈다.
"발견 즉시 가차없이 쏘아버려라!"
그날 오후 여산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유장은 즉시 장락궁으로 달려가 황제를 배알하려했으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씨인 위위 여경시가 황제를 인질로 잡고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장락궁으로 쳐들어가서 여씨 위사 일당들을 베어버려? 그렇게 하면 황제가 위험할뿐더러 내가 반역하는 행위가 하닌가!' 고민하고 있는데 수레소리가 나더니 황제의 알자(응접관)가 나타났다. "폐하께서 그대에게 위로하는 부절을 내리셨소.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부절을 전하지는 않겠소."
"무엇 때문에?"
"상국을 살해했기 때문이오. 황제를 호위하는 위사들은 모조리 여씨요. 나 역시 여가요. 당신이 황제를 배알하는 순간 우리 여씨들 씨를 말리겠다는 뜻을 상주할 게 아니오. 그래서 황제를 알현할 수없도록 부절을 전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곰곰 생각에 잠겨있던 유장은 다짜고짜 알자가 타고 온 수레에 올라탔다. 고삐를 뺏아 잡고는 말을 사납게 몰기 시작했다. 곁에 선 알자는 몹시 당황했다. 유장은 장락궁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보고도 모르겠소. 황제를 뵈러 가는 게 아니겠소."
"황제는 무엇 때문에?"
"폐하께선 나에게 부절을 내렸으나 일개 알자인 당신이 마음대로 부절 전달을 거부했으니 난 그걸 따져야 하겠소."
"어쨌건 황제가 계신 장락궁을 침범하는 행위는 반역이오. 알아서 하시오."
알자의 태도에는 여유가 있었다. 훨씬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나 그런 협박을 받으면서도 유장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놈은 내가 고조황제의 종손이 되는 유씨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군. 나야말로 부절 없이도 황궁을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척이란 말이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있는 바는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만치에 장락궁 전문이 보였다. 그 앞에서 위사들을 거느린 위위 여경시가 거드름을 피며 버티고 서 있다가 유장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서랏!" "어야말로 길을 열어랏! 폐하의 부름을 받고 배알하러 가는 길이닷!"
유장은 알자의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짐짓 부절을 소지한 것처럼 행동하며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여경시는 화난 표정으로 유장과 알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유장에게 부절을 전달한 사실을 알자에게 힐책하는 눈길이었다. 알자가 여경시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저, 실은 주허후(유장)께선....!"
그 순간이었다. 번개처럼 장검을 뺀 유장은 손쓸 틈도 주지않고 여경시의 목을 베어버렸다. 여경시의 머리가 섬돌 아래로 굴러가고 있었다. 유장은 얼이 빠져 있는 위사들을 무시한 채 알자의 수레로 다시 올라 타고는 알자를 아래로 밀어버렸다.
"이젠 네놈도 끝이다!"
유장이 수레를 되돌려 나온 것은 북군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북군 본영에 도착한 유장은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그러자 태위 주발은 유장에게 정중히 절했다.
"삼가 그대의 용맹스러움에 경의를 표하오! 여산만이 문제였는데 여경시까지 죽였으니 이제 천하는 태평이오!"
곧 여씨 일족을 남녀 가릴 것 없이 체포해 노소불문하고 베어버렸고 곧 여록도 잡아 처형했으며, 여태후의 여동생 여수는 매질하여 죽이고, 연왕 여통 역시 주살한 뒤 노원공주의 사위 노왕 언은 폐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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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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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21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비결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천박하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눈앞의 일에 얽매인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행복은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현재를 돌아보지도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현재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에도 미래에 대해 낭만적인 기대를 하다가 허망하게 일생을 마감한다.
22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과거의 일에 집착하는 것, 현재를 소홀하게 보내는 것, 미래만을 기다리는 것, 그 모두가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그릇된 태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23
미래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을까? 미래나 과거의 순간은 현재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다. 오직 현재만이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사물은 실물보다 작은 것처럼 보인다. 환상이나 기대감을 품고 사물을 바라보면 그것은 실물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그러나 그 사물은 그것이 가진 크기대로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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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재앙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을 때와 그 일이 일어나는 시기가 이미 확정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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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현재의 상황을 흐리게 만들지 마라. 만약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더라도 재앙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라. 확실하게 예상되는 재앙이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서서히 그 재앙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 충분한 대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재앙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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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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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간송 전형필과 존 개스비 컬렉션
1914년을 전후해서 일본 도쿄에 와서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존 개스비, 당시 25세의 청년이었다. 도쿄에 정착한 지 며칠 안되는 어느날, 그는 거리를 산책하다가 어느 골동상에서 희한하게 아름다운 꽃병 하나를 발견했다. 값을 물으니 500원, 당시 시세로는 호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개스비는 꼭 그것을 입수하고 싶었고, 결국 사고야 말았다. 본시 귀족 가문의 미술품 애호가였던 그는 예리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대 그가 처음으로 산 것은 일본 도자기로 '나베시마 핵회화훼문병' 이었는데, 뒷날 일본의 중요미술품(보물급)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제대로 본 명품이었다. 그는 곧 고려자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서 거기에 완전히 미쳤다.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과 형태는 섹계의 어느 나라의 도자기보다도 훌륭하다"고 개스비는 감동했다. 이후 그는 서양인으로서 고려자기의 최대의 안목 있는 수집가로 군림하게 되었는데,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안에서의 수집은 물론, 여차하면 조선에 건너와 여러 골동상을 순례하면서 걸작과 일품을 사 모았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1930년대 초기의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새해맞기에 바쁜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개스비가 도쿄에서 비행기로 급히 서울에 달려왔다. 알고 보니 전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입수하고 싶다고 서울의 골동상에게 말해놓았던 일본인 고관 수장의 걸작인 고려시대의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과 '백자박산향로' 를 어떤 가격으로라도 사버릴 작정으로 돈을 준비해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와 거래를 하고 있던 골동상은 때가 공교롭게도 섣달 그믐날이어서 난처했지만 개스비의 결의가 하도 비장한 바람에 실례를 무릅쓰고 소장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본인 교관을 움직였던 것인지 개스비는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정월 초하룻날 아침 그가 돈을 아끼지 않고 원했던 두 점의 고려자기를 손에 넣고 도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집념의 성공이었다.
그때 개스비가 서울의 일본인에게서 거액으로 양도해 간 2점의 고려자기는 그의 다른 고려자기 컬렉션과 함께 몇 해 후에 가서 서울의 민족적인 문화재 수집·보호자였던 간송 전형필이 몽땅 인수히게 되지만 보통 진품이 아니었다. 간송이 그것을 인수하자 총독부에선 곧 보물로 지정했었다. 현재는 이 '청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이 국보 제66호, '백자박산향로' 가 보물 제238호로 지정돼 있다. 간송은 1957년에 존 개스비를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고도자, 특히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수집한 사람은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대개는 그 수집품이 양이 많은 반면 질이 떨어지고, 질이 우수하면 양이 많지 못하였다. 또 처음에는 수집열이 대단하였으나 몇 해 지나는 동안에 차차 식어져서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 영국인 존 개스비 씨는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방대한 수량의 최우수 작품만을 모아놓았으니 당시 고려자기 수집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내외에 떨쳤던 것이다. …오랜 시일을 두고 투철한 감상안과 열성 있는 수집으로 이루어진 그의 컬렉션은 당시의 고미술 수집가, 특히 도자기 수집가들의 선망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간혹 수집가와 골동상들이 모여서 한담을 할 때면, '개인으로 그의 수집품만큼 우수한 고려자기르 가진 사람은 없을 것' 이라느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그만큼 거대한 수집을 한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 라느니 하는 것이었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고미술 수집여화) )
1930년대에 중엽에 이르러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은 그처럼 유명했고 또 그 내용은 어떤 수집가의 컬렉션보다도 높이 평가됐다. 따라서 그의 집을 출입하는 골동상이 도쿄·서울·부산 등지에 여러 명 있었다. 간송도 한창 수집을 하던 때라 역시 그들과 접촉이 있었다. 간송은 그들에게 "만약 개스비가 그의 고려자기들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없이 연락해 달라" 고 넌즈시 부탁했다. 그러나 좀처럼 그런 정보는 없었다. 간송 정형필은 존 개스비가 언젠가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모두 내 놓아 처분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때엔 일본 사람이나 기타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안도록 즉각 손을 써서 인수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민족적 사명이었다. 과연 간송의 예측은 적중했다. 1937년 2월의 일이었다 . 개스비와 가까이 접촉하고 있던 도쿄의 한 골동상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 왔는데, "개스비가 고려자기들을 처분하려고 한다" 는 것이었다. 몹시 고대하던 정보였다. 그러나 편지 내용만으로는 미진한 점이 많았다.
"처분한다면 전부냐, 일부냐?"
간송은 그 점을 확실하게 확인해 달라고 도쿄의 정보 제공자에게 지급으로 독촉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정확한 회신이 날아왔다.
"처분결정으느 확실하며,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고 말한다. 중간 알선은 나 한 사람만이 위임받았다. 일단 전보를 칠 터이니, 그때에 지체없이 도쿄로 와 달라."
며칠도 안돼서 기다렸던 전보가 오고, 간송은 그 즉시 도쿄로 출발했다. 2월 26일,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국수적인 반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신과 정부 고위층을 기습, 잔혹한 살상을 감행한 저 유명한 2·26사건의 꼭 1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도쿄 역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골동상이 마중나와 있었다. 급히 여관으로 직행한 간송은 비로소 개스비가 왜 그의 소중한 컬렉션을 전부 처분하려 하고 있는지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1년 전 바로 오늘 발생한 2·26사건을 보고 개스비 씨는 즉각적으로 일본이 멀지 않아 미·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급히 중요한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골동상의 말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변화였다. 사실 2·26사건 이후 일본에선 군부의 정치 지배력이 무섭게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스비가 예측했던 그대로 몇 달 후 먼저 중일전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간송은 중간 골동상의 안내를 받으며 도쿄 고지마치에 호화저택을 갖고 있던 존 개스비를 방문했다. 그때의 인상과 개스비에게서의 극적인 고려자기 인수의 감회를 간송은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밝은 아침 햇볕이 유리창으로 따뜻이 비치는 2층 응접실에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고려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푸른 비취빛이 줄줄 흐르는 향로, 매병과 알토란같이 모아놓은 향합·유호를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단정한 옷차림을 한 주인 개스비 씨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빈틈없는 정장을 한 집사가 엄숙히 시립하고 있었다. 알선인이 '어제 서울에서 오신 전선생이십니다' 하고 소개를 하니, 그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아아, 그러세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하며 반가워하였다. 그날 저녁에 비로소 들으니, 알선인은 그때까지 매수인이 누구인 것을 밝히지 않고, 다만 모 수집가가 내일 올 터이니 준비하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그도 알선인을 전적으로 신임하는 터이므로 어련하겠느냐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도쿄나 오사카의 저명한 수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뜻밖에 한국 청년(당시 간송은 31세였다)이 나타나서 의외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도 전부터 한국의 고미술품 수집가로서의 나의 이름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항상 한국의 그 훌륭한 고미술품들이 한일합방 이후 수십 년 동안을 통째로 일본인 손아귀 속에서 좌우되고 있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국인 수집가가 차차 생겨서 열심히 수집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 대에 내가 나타나게 되니 더욱 반가웠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 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그때 간송이 지금 돈으로 치면 아마 수억 원대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거액의 사재를 아낌없이 지불하고 존 개스비의 알짜 고려자기 컬렉션을 몽땅 인수하여 국내에 되가져 온 용단은 보통 위대하고 용기 있는 민족의식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개스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만일 간송이 평소 예의 주목하고 있다가 즉각 달려가지 않았던들 그것은 일본 안의 재벌 수집가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컬렉션이었다. 또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여러 점의 국보와 보물 고려자기를 그때 영영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국보 '청자상감연로원앙문정병' 과 보물 '백자박산향로' 외에도 그때 도쿄의 영국인 개스비에게서 극적으로 인수, 국내로 되가져다가 보호한 고려자기 가운데 현재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는데,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청자오리형수적'(국보 제74호) 등이 그것이다. 보물 제241호의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도 그때 개스비의 컬렉션에 들어 있었던 물건인 것 같다. 그렇듯 국보급이 5∼6점이나 포함돼 있던 개스비의 컬렉션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사오기 위해 간송은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있던 공주지방의 농장을 급히 처분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 개스비는 전쟁이 임박하고 있는 불안한 국제정세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의 컬렉션을 내놓게 되었으나 근 30년간 최대의 사랑과 안목으로 수집하였던 한국의 도자기들과의 석별을 아쉬워하면서 고려청자의 '양각모란문잔' 하나와 '향합' 하나를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백자박산향로]
"짐(인수한 고려자기)을 싸는 동안 그는 나를 오랜 친구와 같이 친절해 대접해주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연장인 관계도 있었겠지만, '귀하는 아직 연부역강하니 아무쪼록 그 훌륭한 귀국의 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소개하라' 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의 서재나 응접실을 보아도 송청자 화병에 꽃을 꽂아놓고, 조선백자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귀하는 구주나 일본의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고려자가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다 연대가 매우 떨어지지 않아요?' 하는 것이었다.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구말구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존 개스비 씨 이야기), 1957년)
존 개스비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간송에게 모두 도로 내준 후에도 한 1년 동안 도쿄에 머물러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서울로 운반된 개스비의 컬렉션은 1936년 간송의 개인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 생명의 보존처로서 세운 성북동 숲속의 보화각(간송미술관)에 들어간 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호되고 있다. 간송은 또 생전에 그 도자기들을 매만질 적마다 개스비를 생각하곤 했다. (존 개스비 씨 이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맺고 있다.
"그가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다면 때때로 고려자기를 생각할 것아다. 만일 그가 아직 생존해 있어서 노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찾아온다면, 다행히 전화를 면한 그의 애장했던 고려자기를 보여주고 싶다. 말없는 자기들도 뜻이 있으면 반겨하리라."
고려자기를 매체로 한 한국의 간송과 영국인 개스비의 이 일화는 과거 일제 밑에서 도국과 불법적인 독점만 일삼던 부지기수의 일본인 수집가들을 상기할 때 정말 고려자기처럼 깊고 파란 빛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정당한 입장에서 서로 팔고 산 것이긴 하지만 일본인 수집가와의 사이엔 그런 우정도 있는 일화가 하나도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은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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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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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나자 여기에 와 있던 쿠데타 그룹 멤버들 중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은 소사에 있는 제33사단으로, 오치성, 김형욱, 이석제 등은 수색의 제30사단으로 달려갔다.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육군 대령 H아워에 맞추어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태세를 갖추고 시간이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장도영의 전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단장 안동순이 가로막는 바람에 H아워에 맞춰서 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61년 당시 우리 국군의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쿠데타란 목숨을 내건 반란행위다. 그렇듯 비장한 각오하에 결행하려는 쿠데타를 훼방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라도 출동할 것 같았으나 우리 국군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지가 않았다.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이병엽이나 오학진은 그런 무자비한 수단을 속수무책으로 난감해 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에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이 독려차 들이닥친 것이다.
"어째서 여지껏 출동치 않고 있는 거야?"
길재호가 호통치듯 힐난하자, 오학진이 풍이 죽어 대꾸했다.
"사단장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그 말을 듣자, 강상욱이 사단장 안동순을 협박했다.
"20여 분 후에는 서울에 3개 사단이 진주합니다. 해병대하고 공수단도 이미 출동했구요. 전군의 영관장교가 모두 참여했기 때문에 몇 사람이 방해해도 성사가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입장이 곤란하면 가만히 계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결심할 시기가 왔습니다."
이렇게 사단장 안동순을 붙들고 설득을 펴고 있는 사이에 유승원이 오학진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사단장을 붙들고 있을 테니 부대를 이끌고 나가라!"
제30사단의 경우도 사정은 제33사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은 사단장, 부사단장, 참모장이 부대를 떠난 후 서둘러 출동태세를 갖추었다. 이미 탄약까지도 지급해 놓고 H아워에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H아워가 되기도 전에 부사단당과 참모장이 귀대를 아니라 사단장 이상국은 귀대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이상국에게 귀대명령을 내릴 때 어딘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지 김시진과 이강배에게 헌병 1개 분대를 이끌고 가서 제30사단의 반란 주모자를 체포해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아상국 등은 부대에 도착하는 즉시 이백일 체포명령을 내렸다. 다급해진 작전참모 이백일은 작전참모실 뒤 창문을 열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던 제30사단은 완전히 이상국의 손아귀에 쥐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전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예정대로 거사진행을 시킬 수 있었던 부대는 제6군단 설치해 놓고 있던 이 부대는 정각 새벽 1시에 출병, 1시 15분에 X지점에 집결, 서울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6군단 포병단의 거병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駿) 등 5개 대대장이 이끄는 포병대는 1시 15분, 예정된 X지점에서 합류했다. 이들 포병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포병들은 그 육중한 포차를 이끌고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서울을 향해 진군해 나갔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박정희가 떠나고 쿠데타 그룹 멤버인 8기생들이 제30사단과 제33사단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참모장실에 있던 송찬호, 돌아왔다. 그들은 쇼파에 헌병차감인 이광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거동은 마치 서부극에서 보는 총잡이들처럼 권총을 빼드는 솜씨가 민첩했다. 김재춘이 미소를 담뿍 담고 일어서며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헌병차감도 협력하기로 했어요."
그제야 두 사람은 다소 안심이 된 듯 권총을 도로 권총집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이광선의 처남 역시 군인이었다. 그의 처남 김성구(金聖九)는 육군 중위 시절 박정희의 부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이광선은 처남 김성구를 통해서 <군인다운 군인>, <청렴결백한 장군> 등으로 박정희를 그 처남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는지 이광선은 박정희를 존경할 만한 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쿠데타의 지도자로 추대를 받았다면 협력할 가치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송찬호, 윤태일 두 사람이 사령관실로 들어선 지 채 5분도 안 되어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조흥만은 제6관구 사령부로 올 때,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왔다. 사령관실로 들어서자 조흥만은 소파에 앉아 있는 이광선을 보자, 신경질을 부렸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했다. 반란 음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보낸 헌병차감과 수사관 70명이 꿩 구워먹은 소식이요, 함흥차사가 되어 버려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급기야는 그 자신이 출동을 했으니 어찌 핏대가 서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깐만!"
이광선은 눈짓을 하며 서종철, 조흥만을 복도로 끌고 나갔다.
"왜 그러는 거요?"
조흥만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때가 늦어? 때가 늦다니?"
"해병대가 이미 출동했습니다. 공수단도 출동했다는 소식입니다."
"했으면 했지 그게 어쨌다는 거요?"
"나도 박 장군에게 협조하기로 했단말입니다."
이광섭이 씹어 뱉듯이 선언했다.
"뭐?"
조흥만은 놀라서 한동안 멍해져 이광선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체포하든 말든 그것은 헌병감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이광선을 이렇게 말했다. 조흥만은 그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말없이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서종철도 따라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들어오자, 그는 506방첩대로 전화를 걸었다.
"각하, 해병대와 공수단이 출동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출동 했다는 보고를 나도 받았어. 하지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여간 좀 두고 기다려 보자."
장도영의 태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반란진압의 총책임을 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이 이 모양이니, 서슬이 시퍼런 기세를 가지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쳤던 조흥만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체포해야 하나? 아니면 방관하고 있어야 하나?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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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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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의 시작
서기 41년 1월 24일 오후 1시에 제3대 황제 칼리굴라가 살해되어, 폭풍과도 같았던 그의 치세는 4년도 채 되기 전에 끝났다. 황제 암살의 주모자이자 행동대장인 근위대 대대장 카이레아와 그의 동지인 근위병들이 맨 먼저 한 일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을 점거한 것도 아니고, 카이사르를 암살했을 때의 브루투스 일당처럼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에 틀어박혀 자신들의 정당성을 호소한 것도 아니었따.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는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어, 수도 북동쪽에 있는 근위대 병영으로 끌고 간 것이었다.(실제로 그것은 옹립이라기보다 연행이라고 하는 편이 진상에 가까웠다). 대대장 두 명의 주도로 불과 20명 안팎의 근위병이 황제를 죽이는 엄청난 일을 결행했지만, 그들이 클라우디우스를 근위대 병영으로 데려간 것은 다른 7명의 대대장과 기병을 포함하여 1만 명에 이르는 근위대 전체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근위대가 '지지'한 것은, 황제를 바꿀 수 있지만 제정이라는 정체는 바꿀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칼리굴라를 대신할 황제도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칼리굴라를 죽인 카이레아의 의도이기도 했다. 카이레아가 클라우디우스를 근위대 병영으로 '연행'한 것은 제정에 반대하는 유일한 세력이 될 수 있는 원로원에 대해 인질로 삼기 위해서였다.
인질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쪽의 뜻에 거역하면 잡아둔 인질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방법이다. 둘째, 이쪽의 뜻에 거역하면 인질을 내세운 군대를 보내 반대세력을 궤멸시키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는 방법이다.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어른이지만 유력한 지위를 가진 적은 한번도 없이 역사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50세를 맞은 클라우디우스가 죽어봤자 원로원으로서는 아쉬울 게 하나 없다. 따라서 카이레아가 생각한 클라우디우스의 이용법은 당연히 후자였다. 또한 수도 경찰도 칼리굴라가 암살된 직후에는 원로원을 지지했지만, 근위대 전체가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한 것을 안 뒤로는 클라우디우스 쪽으로 돌아섰다. 근위대 9개 대대 1만 명과 수도 경찰 3개 대대 3천 명의 동향이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수도 로마만이 아니라 본국 이탈리아에 배치된 군사력이 모두 제정이라는 정체를 유지하는 쪽에 선 것이다. 긴급히 소집된 원로원에서 칼리굴라 암살이야말로 공화정을 부활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은 원래 소수파였던 만큼, 이 현실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근위대의 협박에 순순히 굴복하면 원로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 또한 근위대의 꼭두각시를 최고권력자로 인정하면 로마 제국의 앞날도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1월 24일 밤에 원로원에 두 호민관을 클라우디우스에게 파견했다. 근위대 병영에 있는 클라우디우스를 직접 만나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두 호민관이 지참한 원로원의 서한은 다음 두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일개인의 생활로 돌아가면 오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
(2) '제일인자'가 될 마음이 있다면 원로원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
두 번째 항목은 원로원도 속으로는 제정 유지를 인정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억지로 끌려갔는데도 클라우디우스는 망설이지 않고 (2)를 택했다. 그리고 호민관들에게 말했다. '제일인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이상 회피할 마음은 없다고.
클라우디우스가 갑자기 권력욕에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엘리트들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철학도 아니다. 같은 그리스 철학이긴 하지만, 후기에 일어나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다. 폐쇄적인 도시 국가가 아니라 세계 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공익에 봉사하는 것이 엘리트의 책무라고 주장한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로마 엘리트들의 심정에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도 엘리트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간성을 탐구하는 역사 연구와 저술로 반생을 보낸 사람이기도 하다. 꿈에도 생각지 않은 사태에 대처하면서 그의 마음 속에도 공익에 대한 봉사정신이 되살아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날 밤 원로원 칼리굴라가 갖고 있던 모든 권한을 클라우디우스에게 부여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제일인자, 로마군 최고사령관, 원로원 의결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호민관 특권, 로마 종교의 우두머리인 최고제사장, 그리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이어받을 권리. 요컨대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승인한 것이다. 젊은 칼리굴라에게 넌더리가 난 뒤인 만큼, 50세라는 나이도 그들을 안심시키는 요소가 되었을지 모른다.
황제가 된 뒤 클라우디우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칼리굴라 살해범을 처형하는 일이었다. 제정을 유지하기로 한 이상 황제를 죽인 자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가 명령한 것은 대대장 카이레아의 처형뿐이다. 또 다른 대대장인 사비누스는 카이레아만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눈감아줄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20명 안팎으로 여겨지는 병사들은 황제 암살에 관여하긴 했지만 직접 손을 댄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았다. '작은 군화' 칼리굴라를 직접 살해한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순순히 사형선고에 승복했다.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보고 난 뒤의 죽음이다. 목숨을 걸고 못난 '가족'을 처리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죽지 않았을까. 동료 사비누스는 사형을 면했는데도 자살을 택했다. 전우끼리의 우정은 다른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주범'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칼리굴라 암살사건은 오랫동안 꼬리를 끌지 않고 깨끗이 처리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했기 때문에 나도 내키지 않지만, 이것은 너무 중요한 사항이라서 역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주권자는 여전히 S.P.Q.R(원로원과 로마 시민)이었다. 황제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라는 '유권자'한테서 통치를 위임받은 존재다. 따라서 대관식도 없는 로마 황제의 치세는 원로원과 시민이 통치를 위임하기로 승인했을 때 시작된다. 그렇기 하지만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은데다 유럽과 중근동,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광대한 로마 제국에서는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유권자를 조사할 수 있었다면, 거기에 반영된는 것은 원로원과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사는 시민의 '목소리'뿐이었을 것이다. 속주민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유권자'가 아니고, 따라서 자신들의 통치를 위임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만, 피통치자라는 점에서는 로마 시민과 같은 처지에 있다. 로마 시민의 열 배는 되었을 이 속주민들도 그저 얌전히 통치만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중앙정부는 이들에게도 속주 총독의 악정을 호소할 권리를 인정해 주었고, 총독의 악정을 이유로 폭동이나 봉기 같은 실력행사에 호소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여론조사가 존재하여 조사 대상을 속주민에게까지 확대했다면, 수도와 본국에서 낮았던 티베리우스의 지지율은 분명 역전되었을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평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 것은 본국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특히 수도 로마에서의 지지율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도는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 '신'이라는 호칭을 쓸 수 없었지만, 이들을 제외한 로마 시민과 속주민이 모두 별다른 저항감 없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계속 '신격'이라고 부른 것은 두 사람이 로마 시민과 속주민 양쪽에서 높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는 수도 주민의 지지를 희생하면서까지 제국 전체의 이익을 중시했기 때문에 악평을 받았고, 칼리굴라는 수도 주민의 지지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제정 파탄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클라우디우스는, 건국 이래 로마 역사와 로마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은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 역사,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창조한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역사'도 마음 속으로 되씹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개개인의 창의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역사는 내가 창조한다'고 생각지 않고 '역사는 인간들이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조상들이 보여준 선례를 참고하는 데에도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서기 41년에 황제가 된 '역사가'는 이 조상들 중에서도 특히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통치 지표로 삼았다.
그러나 원로원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아우구스투스만을 자신의 통치지표로 삼겠다고 선언했을 뿐, 카이사르의 이름은 들먹이지 않았다. 청중이 원로원 의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비록 원로원 자체는 존속시켰지만,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타도한 인물이었다. 반면에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여, 실제로는 제정이면서도 원로원의 역할을 평생 동안 존중하는 체했다. 그러니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해도 원로원의 반발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악평을 받은 황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로원을 무시하고 카프리 섬에 은둔한 채 통치를 계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치 지표로 내걸지는 않았어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정치에는 카이사르와 티베리우스가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게 된다. 특히 제정문제와 속주 통치에서는 티베리우스 정치의 부활이 두드러진다. 물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자면 티베리우스의 정치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짐나. 그러나 지표가 같더라도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는 당사자의 역량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클라우디우스는 훌륭한 의지를 가졌고, 그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욕도 충분했지만, 지도자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무언가가 모자랐다.
50세라면 원숙기에 이른 나이다. 그런데도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서 내디딘 첫걸음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에 뒤이어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풍양속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그 방책으로 다음 사항을 법제화하자고 제안했다.
-로마 시민인 자들은 '토가' 착용을 일상화할 것. 클라우디우스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선황 칼리굴라는 오늘날에도 대중가수나 입을 만한 기발한 옷차림으로 빈축을 사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가는 제4권(51쪽)에서도 설명했듯이 근엄하고 위풍당당한 옷이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 적합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원로원 의원이나 변호사처럼 위엄을 차릴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별문제지만, 로마 시민권 소유자들 중에는 무산계급도 있다. '토가'를 걸치고 있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토가를 입는 의미는 인정하지만, 법제화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새 황제의 말을 들은 원로원 의원들은 토가를 일상적으로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일제히 냉소를 지었다. 그래도 폭소를 터뜨려 경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원로원 의원들도 새 황제에 대한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회의장을 가득 채운 냉소에 클라우디우스는 그만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원로원에서 행한 첫 연설인데, 긴장했을 때의 버릇대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더듬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말을 계속하려 했기 때문에 입가에 하얀 거품이 고인다. 몸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은 클라우디우스는 의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처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입가에 고인 거품이 침이 되어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첫 연설은 이런 식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그의 통치가 중단되지 않고 출범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공익에 봉사하겠다는 의욕이 첫 연설의 실패에도 껶이지 않을만큼 강했다. 둘째, 추태를 보고도 새 황제의 정치가 어디로 가는지를 지켜보기로 작정한 원로원 의원이 비록 소수이긴 했지만 존재했다. 이들이 소수이긴 했지만 유력하고 유능했을 뿐 아니라, 국가 로마의 통치체제로서 제정의 유효성을 이해하고, 따라서 클라우디우스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새 황제에게는 행운이었다. 이들의 대표는 티베리우스가 등용한 인재의 한 사람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였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가 등용한 인쟁를 물려받는 행운도 얻은 셈이다. 이것은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정치'가 성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신뢰 회복
칼리굴라의 통치는 4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제정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다. 클라우디우스의 '정치'는 우선 이 신뢰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국가반역죄'를 이유로 한 처벌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한다. 법을 폐지한 것은 아니다. 이 법률 자체는 아우구스투스가 성립시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법은 존속시키되 행사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추방되거나 유배당한 자들의 귀국을 허락했다. 이를 계기로 귀국한 사람들 중에는 벤토테네 섬에 유배당한 칼리굴라의 두 누이동생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아그리피나는 섬생활로 초췌해지기는거녕 원기왕성하게 귀국한다. 유형지라 해도, 생활의 쾌적함을 추구하는 로마인답게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를 유배했을 때 티베리우스의 배려로 저수조가 정비된 것은 물론, 바다가 거칠어져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 없는 날에도 신선한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바닷물을 끌어들인 대규모 '활어 수족관'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그해에 26세였던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동생이고, 얼마 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되고, 최종적으로는 네로 황제의 어머니가 된다. 이름이 같은 어머니와 구별하기 위해 역사에서는 '소 아그리피나'라고 부르게 되는 이 여인은 1년 동안의 섬생활로 수영의 명수가 되어 귀국했다. '국가반역죄 처벌법'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새 황제의 선언이 걸핏하면 이 법의 표적이 된 원로원 의원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말할 나위도없다. 클라우디우스는 또한 원로원이 환영하는 정책도 실시했다.
집정관을 비롯한 로마 제국 중앙정부의 요직을 티베리우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에서 선출하게 한 것이다. 선거운동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원로원 의원들이 환영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티베리우스의 정치를 답습한 것은 여기까지뿐이고, 황제 자신을 비롯한 부유층 사람들이 선거운동의 일종인 각종 오락 스포츠를 후원하는 것은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했다. 이로써 요직 선거권을 빼앗긴 민중의 불만도 억누를 수 있었다. 다만 이 정책 전환에는 정치적인 이유보다 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말해야할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이런 오락 스포츠를 싫어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반대로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진지한 학지이면서도 권투나 프로 레슬링 경기에 열중하는 사람이 있는데, 클라우디우스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된 그에게 부과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칼리굴라의 실정을 뒤처리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클라우디우스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칼리굴라의 낭비로 파탄에 빠진 국가 제정을 재건해야 한다. 클라우디우스도 세금을 늘려서 제정을 재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긴축재정 정책을 채택할 마음도 없었다. 티베리우스가 받은 악평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공공사업을 중시해야만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 정비'를 지도잘들의 책무로 여기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역사가인 만큼 이 전통을 잘 알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시작한 대규모 수도공사를 칼리굴라가 갖지 못했던 불굴의 의지로 재개했다. 공사 도급업자들도 칼리굴라 시대에는 자주 있어TEjs 공사대금 지연을 걱정하지 않고 공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획했지만 그 후계자들이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은 양대 공공사업에도 도전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지중해 최고의 설비를 갖춘 항구로 바꾸는 공사였고, 또 하나는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피치노 호수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바꾸는 공사였다. 지출을 줄이지 않고 세금도 늘리지 않고 국가 재정을 재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가능'하도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전문적인 경제 지식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식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1) 칼리굴라가 폐지한 '1퍼센트의 매상세'를 부활시켰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한 세금이니까,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클라우디우스에게는 그 세금을 부활시킬 대의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신격이 신설한 것이라 해도, 호평을 받은 세금은 아니다. 칼리굴라가 인기를 얻기 위해 폐지한 것을 부활시키면, 세금을 내 쪽은 새로운 세금을 부과당한 것과 같은 기분이 된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부과한 연료세를 비롯하여 자질구레한 각종 세금을 모두 폐지했다. 이로써 세제 자체도 칼리굴라 이전으로 돌아가 단순명쾌함을 되찾았다. (2) 클라우디우스는 필요한 지출은 줄이지 않았지만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출은 가차없이 삭감했다. 사람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놀랄 만한 지출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연극, 구경거리, 운동경기, 검투사 시합을 제공하는 비용은 필요한 지출로 여겨졌다. 반면에 칼리굴라가 높이 25미터나 되는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운반하기 위해 만든 대형 선박은 그대로 놓아둘 필요조차 없다고 해서, 오스티아 항만공사 때 제방의 토대로 삼기 위해 암석을 가득 채워 침몰시켰다. 몸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은 클라우디우스는 자기가 사는 집에도 무관심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검소한 집에는 더 이상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리우수는 같은 팔라티노 언덕에 새 집을 짓기 시작했지만 카프리 은둔으로 건축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집을 완성한 것은 칼리굴라였다. 클라우디우스는 그 집에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축재에도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 긴축으로 재정을 재건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실제로는 이 정도 긴축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엄격한 긴축재정을 실시해야 했던 티베리우수는 서기 14년에 즉위했다.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것은 서기 41년이다. 30년 남짓 계속된 평화와 인프라 확충으로 로마 제국 전역의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세금은 모두 징수 금액이 일정한 정액세가 아니라 백분율로 되어 있다. 매상세는 1퍼센트, 상속세는 5퍼센트, 관세도 5퍼센트, 속주민이 내는 속주세는 10퍼센트, 동양에서 수입되는 사치품에대한 관세는 25퍼센트다. 경제력이 향상되면, 세율은 변하지 않아도 징수액은 늘어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재정 재건의 토대를 세금의 자연 증가에 둘 수 있을 만큼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경제권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금의 자연 증가에 토대를 둔다면, 세금이 들어오는 통로가 잘 뚫려 있어야 한다. 징세 관계자의 부정행위를 방치해두면 통로가 막혀버린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인데도 지나치게 자주 얼굴을 내민다는 불평을 살 만큼 법정에 열심히 다닌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살인이나 강도 사건을 재판하는 일은 남에게 맡겨도, 선정의 근간인 공정과세는 황제가 직접 챙겨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를 완벽하게 계승하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외교에서도 큰 실책을 저질렀다. 4년도 채 안되는 치세에 용케도 이렇게 외교를 망쳐놓았구나 하는 개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다. 칼리굴라의 외교적 실정 가운데 첫 번째는 북아프리카의 마우리타니와 왕국 문제, 두 번째는 유대 문제, 세 번째는 도버 해엽에 대군을 소집해놓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철수하는 바람에 발생한 브리타니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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