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5호 - 2024.01.04. 목요일(음력 : 11. 23.)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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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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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진정 지혜로웠다면 파리 두 마리는 찰싹 때려 잡았어야 할 것 아닌가. ― 헬렌 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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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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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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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팔’과 ‘망말’
방송이나 신문에서 ‘폭팔’과 ‘망말’이라는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 카리스마 폭팔”과 “망말…주변국 반발”처럼 ‘폭팔’과 ‘망말’을 빈번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폭팔’과 ‘망말’은 각각 한자어인 ‘폭발(暴發)’과 ‘망발(妄發)’의 잘못이다. 폭발은 ‘감정, 힘, 열기 따위가 일시에 세찬 기세로 나옴’을, 망발은 ‘망령이나 실수로 그릇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뜻한다.
먼저 ‘폭발(暴發)’은 앞 음절과 뒤 음절의 첫소리가 각각 ‘ㅍ’과 ‘ㅂ’으로 모두 순음(입술소리)이다. 그런데 앞 음절 ‘ㅍ’의 영향으로, 뒤 음절의 ‘ㅂ’을 ‘ㅍ’으로 잘못 발음하게 되었다. 즉, [폭빨]이 아닌 [폭팔]로 발음하게 되었다. 또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잘못된 발음에 따라 ‘폭팔’로 적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망발(妄發)’ 또한 앞 음절과 뒤 음절의 첫소리가 각각 ‘ㅁ’과 ‘ㅂ’으로 모두 순음이다. 그런데 앞 음절 ‘ㅁ’의 영향으로, 뒤 음절의 ‘ㅂ’을 ‘ㅁ’으로 잘못 발음하게 되었다. 즉, [망:말]로 발음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고유어 ‘막말’ 및 한자어 ‘망언(妄言)’도 얼마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함부로 하는 말’을 뜻하는 고유어 ‘막말([망말]로 소리 남)’ 및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하는 말’을 뜻하는 ‘망언(妄言, [망:언])’과 크게 혼동을 일으켜 이런 잘못이 일어났다.
‘폭팔’과 ‘망말’은 모두 한자어 ‘폭발’과 ‘망발’의 잘못된 발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는 어휘 지식이 크게 부족한 사람들에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잘못이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식욕은 당기고, 얼굴은 땅기는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계절이 바뀌는 건 우리 몸이 먼저 느낀다. 피부가 건조해지고 얼굴이 땅기는 것도 그 신호 중의 하나이다. 식욕은 당기고, 얼굴은 땅기고…. 내가 느끼는 가을이다.
‘당기다’와 ‘땅기다’‘댕기다’는 헷갈리기 쉽다. 흔히 “얼굴이 당겨요” “피부가 당겨요”와 같이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이럴 때는 ‘땅기다’가 맞다. ‘땅기다’는 ‘몹시 단단하고 팽팽하게 되다’는 뜻으로 “바람이 부니 얼굴이 땅겨요” “수술한 부위가 몹시 땅겨요” “상처가 땅겨서 아파요”와 같이 쓴다.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당기다’라고 생각하면 쉽다. ‘당기다’는 ‘마음이 끌리다, 입맛이 돋우어지다, 힘을 주어 가까이 오게 하다, 시간을 앞으로 옮기다’ 등 다양한 뜻이 있다. “호기심이 당겨요” “입맛이 당기니 살을 뺄 수가 없네요” “방아쇠를 당겼다” “결혼 날짜를 당겼다”와 같이 쓴다. 흔히 ‘당기다’를 강조한 표현이 ‘땅기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잘못이다. ‘댕기다’는 불과 관련하여 쓰인다. ‘불이 옮아 붙다. 불을 옮아 붙게 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에는 ‘담배에 불을 댕기다’라고 하는 것이 맞다.
이와 같이 평음과 경음 사이에서 헷갈리기 쉬운 말 중에 ‘달리다’와 ‘딸리다’가 있다. ‘달리다’는 재물이나 기술, 힘 따위가 모자랄 때 쓰는 말인데 이를 ‘딸리다’로 쓰는 경우가 많다. ‘기운이 딸리다’가 아니라 ‘기운이 달리다’, ‘일손이 딸리다’가 아니라 ‘일손이 달리다’가 맞다. ‘딸리다’는 ‘어떤 것에 매이거나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화장실이 딸려 있는 방’ ‘식구가 다섯이나 딸려 있다’와 같이 쓴다. “딸린 식구가 많으니 힘이 달리네요”라고 기억하면 쉽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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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구름 - 천상병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은
지상을 살피러 온 천사님들의
휴식처가 아닐까.
하나님을 도우는 천사님이시여
즐겁게 쉬고 가시고
잘되어 가더라고 말씀하소서.
눈에 안 보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할지 모르오니
널리 용서하소서.
∼∼∼∼∼∼∼∼∼∼∼∼∼∼∼∼∼∼∼∼∼∼∼∼∼∼∼∼∼∼
논개(論介)의 愛人이 되어 그의 묘(廟)에 - 한용운
낮과 밤으로 흐르고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잡습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朝鮮)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 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마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 바람은
귀신(鬼神)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겁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이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삐삐 같은 그대의 손에 꺽이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힌 강 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궁(驕矜)에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銘)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꺽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꺽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져 꺽여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올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는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이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 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
내맘에 맞는 이 - 정지용
당신은 내맘에 꼭 맞는이.
잘난 남보다 조그만치만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사람 처럼 사람좋게 웃어좀 보시오,
이리좀 돌고 저리좀 돌아 보시오,
코 쥐고 뺑뺑이 치다 절 한 번만 합쇼.
호. 호. 호. 호. 내맘에 꼭 맞는이.
큰말 타신 당신이
쌍무지개 홍예문 틀어 세운 벌로
내달리시면
나는 산날맹이 잔디밭에 앉어
기를 부르지요.
앞으로-가. 요.
뒤로-가. 요.
키는 후리후리. 어깨는 산ㅅ고개 같어요.
호. 호. 호. 호. 내맘에 맞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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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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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조절충(樽俎折衝)
樽:술통 준. 俎:도마 조. 折:꺾을 절. 衝:충돌할 충.
[유사어] 준조지사(樽俎之師). [출전]《晏子春秋》〈內篇〉
‘술자리[樽俎(間)]에서 유연한 담소(談笑)로 적의 창끝을 꺾어 막는다[折衝]는 뜻으로, 외교를 비롯하여 그 밖의 교섭에서 유리하게 담판하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이 신하인 최저에게 시해되자 동생이 뒤를 잇고 경공(景公)이라 일컬었다. 경공은 최저를 좌상(左相)에 임명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는 죽이기로 맹세까지 했다. 이어 모든 신하가 맹세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영(晏子)만은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좋으련만.’
이윽고 최저가 살해되자 경공은 안영을 상국(相國)에 임명했다. 안영은 온후박식(溫厚博識)한 인물로서 ‘한 벌의 호구(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으로 만든 갖옷)를 30년이나 입었을정도로 검소한 청백리이기도 했다. 한 번은 경공이 큰 식읍(食邑)을 하사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욕심이 충족되면 망할 날이 가까워지나이다.”
당시 중국에는 대국만 해도 12개국이나 있었고 소국까지 세면 100개국이 넘었다. 안영은 이들 나라를 상대로 빈틈없이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제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영의 외교 수완에 대해 그의 언행을 수록한《안자 춘추(晏子春秋)》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술통과 도마 사이[樽俎間:술자리]를 나가지 아니하고 1000리(里) 밖에서 절충한다 함은, 그것은 안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 준조 사이 : ‘술통과 도마 사이’란 뜻으로, 술자리(연회석)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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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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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8. 여태후의 비수
유방은 심기가 불편했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내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황제 유방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초조해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바로 그럴 때에 낭관 전수가 들어와 유방한테 귀띔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번쾌에게 연왕 노관을 응징하러 군사를 주어 보내셨지만 번쾌는 황후의 여동생 여수의 남편이니 결국 여씨 일당이라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그래서?"
"폐하께서 붕어하시는 날 번쾌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와 조왕 여의와 척부인을 살해할 것입니다."
"아아, 그사실을 내가 왜 몰랐을까! 즉시 진평과 주발을 불러라!"
뜻밖에도 유방은 전수의 귀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멋모르고 진평과 주발이 불려왔다. 유방은 우선 진평에게 말했다.
"그대는 즉시 장군 주발을 데리고 가서 번쾌와 장군직을 교체시키시오!"
"아니, 폐하! 갑자기 무엇 때문에 장군 교체를 하명하십니까!"
"설명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 진중에 닿거든 즉시 번쾌의 목을 베어버리란 말이오!"
별 수없이 진평과 주발은 그대로 물러 나왔다. 난감했다. 주발이 물었다.
"폐하의 엄명이 서슬퍼렇긴 하지만 번쾌를 비호하고 있는 여황후의 세력도 두렵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지만 번쾌를 살려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오."
"이렇게 처리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번쾌를 체포한 뒤 수레에 실어 장안으로 데리고 오지요."
"오, 그거 기막힌 묘안이오! 우리가 그를 처치하지 않고 폐하께서 직접 번쾌를 처리하시도록 하자는 얘기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번쾌를 목베는 시간을 끌다 보면 그가 살아날 방법도 생기겠지요."
"그렇게 합시다!"
진평과 주발은 그렇게 약속한 뒤 번쾌가 있는 진중을 향해 느릿느릿 수레를 몰았다. 한편 황제 유방이 실성한 상태에서 일처리를 하듯하는 사정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신하가 있었다. 옥새를 담당하는 부새어사 조요라는 인물이었다. 조요는 젊지만 영리했다. 혼자 중얼거리며 투덜대는 유방에게 조용히 말했다.
"폐하께서 요즘 많이 불편해 하시는 이유를 소신은 알 것 같습니다."
"무어라고?"
"조왕 여의께선 연소하시고 여황후와 척부인께서는 사이가 좋지 않으시지요."
뜻밖의 조요의 말에 유방은 깜짝 놀랐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폐하께서 아무리 근심하셔도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실은 그렇다. 그래서 짐은 그 때문에 몹시 고통스럽구나."
"그렇지만 조왕 여의와 척부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가 있지요."
유방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법이 있다고?"
"폐하의 신하들 중에서 재상이든 대신이든 장군들이든 모두가 어려워하는 신하가 대체 누구지요?"
"글세?"
"딱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바로 어사대부 주창입니다."
"그렇지."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주창에게 어린 조왕 여의를 부탁하지 않습니까."
유방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감돌았다.
"아아, 짐이 왜 그걸 몰랐을까!"
형양에서 유방이 전날 항우한테 포위당해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유방은 형양성을 탈출하면서 주가를 시켜 대신 성을 굳게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주가의 능력으로는 형양성을 지킬 수가 없었다. 결국 항우에게 성을 함락 당하고 말았다. 항우는 주가의 인물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초나라 장군으로 삼으려했다. 그때 주가는 소리쳤다.
"나더러 항복을 해서 네 밑으로 들어오라고? 네놈이야말로 얼른 한왕 유방한테로 달려가 항복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곧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놈아!"
격노한 항우는 주가를 삶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방은 몹시 슬퍼했다. 그래서 주가의 아우인 주창을 어사대부로 삼아 주가의 충성심에 보답했다. 주창도 그 사람됨이 형처럼 기개가 있었다. 누구에게든 거침없이 직언했다. 그런 탓으로 소하. 조참등도 주창 앞에서는 어려워했다. 그런데 주창은 말더듬이였다. 아무리 강경발언을 해도 그가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대충 웃고 넘어가곤 했다. 그날도 유방은 태자를 폐하고 척희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새우려는 안건을 조정에서 거론하고 있었다.
"아아아 아니 됩니다. 저저저는 말을 못해도 기기기필코 옳지 않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시려 해도 저는 기기기필코 바바반대합니다."
엄숙한 제안이었으나 주창의 말더듬 때문에 유방은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황후가 정전의 동실에서 주창이 주장하는 소리를 엿들었다. 퇴청하는 주창을 기다렸다가 여황후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태자인 내 아들은 폐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창은 정색을 하고는 대꾸했다.
"처처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그그렇더라도 저는 황후를 위하여 폐폐폐하께 그런 직언을 올린 것은 아아아니었습니다.!"
적후의 아들 여의는 겨우 열 살이었다. 유방은 자신의 서거 후에 여의가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조요가 주창에게 여의를 맡기라는 방법을 제시하자 유방은 뛸 듯이 기뻤다.
"어서 주창을 불러오너라!"
전날 방여공이 어사대부 주창에게 조요를 추천할 때 이렇게 말했다.
"아직 어리지만 대단히 영리한 인물입니다. 우대해 쓰시면 그대를 배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창이 조요를 평가하는 기준을 따로 있었다.
"죽간에 글이나 새기는 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소."
그러나 방여공의 추천을 받아들여 조요를 제밑에 두었다. 주창이 황제 유방한테 가만히 불려왔다.
"부탁이오. 조왕 여의한테로 가서 재상이 되어주시오!"
주창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내색않고 생각을 가다듬은 후에 조용히 대답했다.
"싫습니다."
"매우 어려운 부탁이라는 사실인 것도 짐도 잘아오. 물론 지위로는 좌천이 분명하오. 그러나 여의를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소."
"그렇지만 폐하께서 붕어하신 뒤에는 저 역시 죽습니다. "
"그래도 어쩔 수가 없소. 억지로라도 가 주시오."
유방은 눈물까지 흘렸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는데야 주창도 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창은 조나라로 떠났다. 유방은 주창을 귀띔해 준 조요가 고마웠다. 조정에서의 조회때 짐짓 후임 어사대부 자리를 거론했다.
"누가 알맞겠소."
이미 황제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던 대신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요가 좋겠지."
역시 대꾸하는 신하가 없었다.
"조요를 어사대부에 임명하오!"
유방은 단언했다. 한편 번쾌가 자신을 응징하러 떠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던 노관은 장성 아래에 머물며, 황제의 병이 나으면 죽을 각오로 들어가 사죄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황제 유방이 갑자기 장락궁에서 붕어했다. 그러나 여황후는 나흘동안이나 붕어를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황후는 심이기를 불렀다.
"여러 장수들은 황제와 함께 서민에서 일었으나 폐하만이 황제가 되고 그들은 신하가 되있소. 그래서 저들은 평소에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들이 어린 군주를 섬겨야하는데 과연 저들이 새 황제의 말을 들을 것 같소?"
"그래서 황후께서는 어떤 조처를 취했으면 좋겠습니까?"
"차제에 여러 장수들과 그 일족을 몰살시켜 천하를 편안케 하는 게 어떻겠소."
"글쎄요."
심이기는 여황후의 의견에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둘이 나눈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갔다. 그 소문은 곧장 역상의 귀로 들어갔다. 놀란 역상이 심이기한테로 달려갔다.
"여보시오. 황제께서 붕어하고 나흘이나 지났는데도 이를 발표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뭐요."
"여황후께옵서...."
"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들을 죄 없이 주살하려고 까지 한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
심이기는 난감한 표정만 지은 채 대꾸를 못했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참으로 위태롭소. 지금 진평과 관영은 10만 병력으로 형양을 지키고 있고 번쾌와 주발 역시 20만 병력을 기지고 연나라 대나라를 평정 중이오 그들의 귀에 황제께서 붕어하고 또한 모든 장수들은 모조리 주살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시오. 과연 그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것 같소."
"글세 말이오."
"지체 없이 군사를 이끌고 관중으로 치고 들어올 것이오. 뿐만 아니라 대신들은 안에서 등돌릴 것이고 제후들은 밖에서 배반할 것이오. 이쯤되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하루 아침의 일이 될 것이오. 그래도 여황후의 계책에 동의 할 참이오?"
듣고보니 심이기도 역상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궁을 달려들어가 여황후에게 역상의 말을 자세히 전했다. 여황후는 불만스럽다는 기색을 얼굴 가득히 담고 있더니 마지못한 듯 내뱉았다.
"알겠소. 장군들의 제거 문제는 없었던 일로 합시다. 곧 발상하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겠소."
고조 유방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관은 사죄의 기회가 없어지자 여황후의 보복이 두려워 흉조로 도망치고 말았다.
한편 번쾌는 자신의 죄질도 모른 채 죄인을 태우는 수레인 함거에 실려 장안으로 오고 있었다. 번쾌의 아내인 여수가 언니인 여황후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언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진평 따위가 뭔데 내 남편을 폐하께 음해해서 목을 베도록 한답니까! 진평을 목베게 해주세요!"
여황후는 번쾌가 묶이게 된 사정을 어렴풋이는 짐작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평에게 직접적인 음모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궁리한 뒤에 여수에게 대답했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벨 때가 아니다."
진평은 장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풀어놓았던 첩자로부터 고조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여황후가 자신을 응징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어떻게 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비상시국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지? 내용도 모른채 분격한 여황후가 여수가 나를 참소할 생각만 하고 있을터인데!' 한동안 진평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드디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다! 번쾌를 태운 함거보다 앞서 장안으로 달려가 폐하의 영구 앞에서 조명을 받는 형식을 취하자!' 그런데 진평이 역전거를 바삐몰아 달리다가 도중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았다.
ㅡ 진평은 관영과 함께 형양성으로 가서 거기에 주둔하라.
진평은 사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폐하께서 붕어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떠났소?"
사자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래서 진평은 재빨리 말했다.
"옥새가 찍혔으니 폐하께서 내리신 칙서인 것만은 분명하오. 그러나 국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장안으로 아니갈 수는 없소. 일단 이 칙서는 접수한 것으로 하겠으니 그대의 임무는 끝난 것이오." 진평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전거를 더욱 바삐 몰아 장안으로 내달렸다. 장락궁으로 달려들어간 진평은 유방의 시신 앞에서 다짜고짜 대성통곡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말릴 틈새도 주지 않고 영구 앞에서 조명을 받는 형식을 취하면서 갔다온 경과를 상주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황후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럼 번쾌장군의 목은 베지 않았단 말이오?"
진평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여황후에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번쾌는 신하로서 공로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폐하의 친구였습니다. 친족관계에 있어서도 신분이 고귀합니다. 폐하께서 일시적으로 분노하시어 그를 베고자 하셨으나 아마도 후회하실 게 틀림없겠다 싶어 베지 않고 함거에 실어 장안으로 오던 중에 저는 폐하의 붕어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황후는 안심했다는 듯 숨을 길게 내수었다. "정말 잘 하셨소. 그대는 피로해 있으니 퇴청하여 쉬도록 하오."
"아니 됩니다. 굳이 청원하오니 궁중에서 숙위하도록 황후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 폐하를 받들어 모시던 그 모질고 숱한 날들을 생각하면 저로선 이대로 돌아가 쉴 수가 없습니다!"
여황후는 드디어 감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대를 당장 낭중령에 임명하겠소. 뿐만 아니라 사부가 되 새 황제도 잘 가르쳐주시오. 숭중의 숙위도 허락하겠소."
진평은 속으로 외쳤다. '난 살아남았다! 이렇게 되면 여수의 참소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지!' 태자 효혜가 유방의 뒤를 이어 새 황제로 즉위하자 여황후는 유방의 죽음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척부인을 사로잡아 영항(죄진 궁녀를 가두는 곳)에다 가두었다. '요년, 이젠 죽어봐라!' 척부인이란 존재가 여황후로서는 견딜 수 없는 여인이었다. 미색이 시든 자신에 비해 총애를 독차지한데다 틈만 나면 효혜를 폐하고 제가 낳은 여의를 새 태자로 책봉할 것을 눈물로 애소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태후가 된 여황후는 즉시 조왕 여의에게 입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조나라 재상 주창은 여태후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받들 수 없는 명령이오. 선제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조왕 여의는 아직 어리니 그대가 잘 지켜주라'하셨소. 소문에는 태후께서 척부인을 몹시 미워하시어 영항에다 가둔데다 또 어린 조왕까지 끌어내어 함께 참수하실 작정이라 하는데, 이를 뻔히 알고서야 어떻게 조왕을 보내드리겠소. 그냥 돌아가시오. 더구나 사실 지금은 조왕께서도 병이 나시어 거동하실 수가 없소."
사자의 전언을 들은 여태후는 격노했다.
"그래! 그렇다면 주창 그자가 대신 출두하라고 하라!"
별 수 없었다. 주창은 얼마만큼 미적거리다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장안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여태후의 계략은 주창도 모르고 있었다. 주창이 장안으로 올라온 사이에 조나라로 사람을 보냈다.
"왕께서는 이제 안심하시고 장안으로 올라오시랍니다. 주창승상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 조왕 여의였지만 부친같은 주창의 친서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는 다짐을 받고 있던 터였으므로 여태후의 사자에게 여의는 의연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주승상의 허락 없이는 한나라로 입궐하지 않겠소이다."
그러자 여태후의 사자는 재빨리 한 통의 편지를 품속에서 꺼내놓았다.
"그러실 줄 알고 이렇게 서신을 간직해 왔습니다."
"누구의 편지란 말이오?"
"읽어보십시오. 주창승상의 서신이옵니다."
ㅡ기왕에 걱정했던 대왕의 신변에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새 황제폐하께서 대왕을 보호하시겠다는 확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급히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대왕의 모치께옵서 신병이 나서 내일을 모르는 처지에 계십니다. 안심하고 상경하셔서 언제 돌아가시게 될지 모르는 모친에게 효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의는 여태후 앞에서 만든 가짜 편지인 줄도 모르고 신하들에게 즉시 명령을 내렸다.
"모친이 위독하시다는 승상의 서신이 왔소. 떠날 준비를 해주길 바라오."
한편 장안에 도착한 주창은 여태후를 만나기 전에 새 황제 효혜에게 먼저 면회를 신청했다. 황제 알현 허락은 금새 이루어져 주창은 곧바로 궁으로 들어갔다.
"폐하, 소신 주창은 태후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곧 주살될지도 모릅니다."
효혜는 깜짝 놀랐다.
"아니, 주승상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더구나 짐의 허락도 없이 태후한테 주살당한단 말씀이오!" "선제께옵서 소신을 조나라로 보내실 때의 엄명은 '어린 조왕의 목숨을 잘 지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후께옵서는 조왕의 모후 척부인을 미워하시어 기회만 있으면 조왕까지 해칠 생각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그런 위험에서 소신이 조왕을 지키기 위해서 태후의 엄명을 받들어 조왕 대신 장안으로 상경했으니 소신이 죽을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효혜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굳어졌던 얼굴을 풀었다.
"짐의 생각으로는 그 정도 일로 주승상을 주살할 것으로는 생각지 않소."
"실상은 제가 주살되는 것쯤은 걱정거리도 안 됩니다. 조왕께서 결국 은해를 입지 않으실까 그것만이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주승상께서는, 짐의 아우이기도 하며 선제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조왕 여의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짐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오?"
황제 효혜가 직접 물었으므로 주창은 이토록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후께옵서 폐하의 거짓 조서를 보내어서라도 조왕 여의를 불러 올리지 않으실까 그게 걱정입니다."
"설사 태후께서 불러 올리시더라도 짐이 여의를 보호하면 그뿐 아니겠소."
"폐하께서는 조왕을 어떤 식으로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짐과 더불어 기거를 같이 하겠소. 그쯤이면 아무도 조왕을 해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소신의 능력으로서는 조왕을 지키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 폐하께서 부디 사랑하는 이복동생을 지켜주소서!"
주창은 여태후를 이튿날 만나 뵙기로 작정하고 곧장 객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마악 잠자리에 들려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조나라 재상 주창을 뵈러 왔소이다."
'나를? 이 밤중에 누가 나를 만나러 왔단 말인가! 내가 이곳에 묵고 있는 것을 누가 또 안단 말인가?' 옷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은 주창은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찾는 사람을 바라보니 여태였다. 태후의 죽은 큰오빠 여택의 아들이었다. '저자가 무슨 일로?' 주창이 여태 앞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문득 그의 허리춤에서 불빛에 반짝 하는 것이 보였다. 단검이 분명했다. 주창이 도망칠 곳을 찾고 있는데 어둠 속으로부터 또 다른 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창은 이곳에 묵고있는가. 친구 관영이 찾아왔네. 이 사람아, 먼 조나라 한단으로부터 왔으면 친구부터 찾았어야지!"
주창은 반가웠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어떻게 날 찾아냈는가!"
"자네는 내가 고조황제를 모실 때부터 비밀 별동부대의 책임자였던 사실을 알잖는가. 그래서 자네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지. 그런데?"
관영이 여태의 눈과 마주쳤다. 여태는 뜻밖의 장소에서 관영을 만나자 흠칫했다.
"아, 역후(여태)가 아니시오. 여긴 웬일이시오?"
"드릴 말씀이 있어 잠깐 주승상을 뵈러 왔습니다만, 친구분이 오셨으니 저는 그만 돌아갈까 합니다." 여태는 미처 밀도 끝내기 전에 어둠속으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자네, 봤지?"
관영이 말하자 주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죽일 작정이었던 것 같애."
"그 때문에 내가 뒤쫓아온 걸세. 물론 폐하께서 자네의 신변에 유념하라 하셨기에 달려온 거지만." "그런데 태후는 왜 나까지 죽이려 하는 것일까?"
주창의 물음에 관영은 얼마만큼 난감한 표정을 짓고나서 대답했다.
"그대가 있음으로써 여러 모로 방해가 되겠기에 그렇겠지."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단 말인가?"
"돌아가게, 어서 한단으로."
"그건 누구의 뜻인가?"
"나의 충고이네."
"내가 이곳에 온 건 조왕을 안전하게 뫼시기 위해서네."
"바보같은 소리! 자네가 있음으로써 조왕은 위태하네."
"그건 무슨 소린가?"
"자네같은 인물이 조왕을 지킴으로써 조왕의 존재가 크게 보이네."
"내 없어지면 조왕께서 안전하실까?"
"폐하의 그늘 밑에서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을 테니 그런 애송이한테 태후께서 무슨 적개심을 가지시겠나."
"그럴듯하이."
관영의 설득은 충분히 이유 있다고 생각한 주창은 그 길로 조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황제 효혜는 비밀리에 첩자를 풀어 조왕 여의가 과연 장안으로 출발했는가를 살펴보도록 엄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던 얼마 뒤였다. 첩자가 황급히 돌아왔다.
"드디어 조나라 왕께서 한단을 떠나 장안으로 들어오시는 중입니다."
"패상으로 조왕을 마중하러 가겠다."
태후는 그날 이후로 조왕 여의를 죽일 기회가 없었다. 황제 효혜가 여의와 함께 기거를 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해 겨울이었다. 효혜는 겨울 사냥을 나가기 위해 새벽같이 여의를 깨웠다. 그러자 여의는 몸이 불편했는지 동행을 거절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효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조심해라. 아무래도 태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거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게."
일단 주의룰 준 효혜는 다른 신하들과 함께 사냥길로 나섰다. '설마 그새 변이야 있을라고!' 저녁때가 되었다. 효혜는 그제서야 여의가 걱정되었다.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자!"
효혜는 신하들을 독려하며 수레를 전력 질주해 달렸다. 궁으로 돌아온 효혜는 어린 여의가 새벽에 누워있던 침실 쪽으로 먼저 뛰었다. 그러나 어린 조왕 여의는 이미 침실에 있지 않았다.
"여봐라! 이라 오너라! 누구 거기 없느냐?"
황제 효혜가 소리지르자 환관 하나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조왕은 어디 계시냐?"
"서궁으로 가셨습니다."
"무어라고?"
"척후께서 계시는 서궁에서 사람이 왔기에 조왕께서는 아침부터 그쪽으로 납시었습니다."
"아아, 결국은 이런 일이 미리 너희들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일러두었을 것을! 어서 수레를 놓아라!" 효혜는 서궁으로 수레를 몰아갔다. 그러나 서궁에는 조왕 여의는커녕 여의의 모친인 척후도 보이지 않았다. 궁녀들 몇 명이 머리를 숙이고 서 있기에 효혜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조왕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냐?"
궁녀 하나가 대답했다.
"이곳으로 오신 적이 없습니다."
"무어? 그럼 척후께서는?"
궁녀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지금 영항에 계십니다."
"무어라고? 영항이라면 여관들의 감옥이 아니더냐!"
"여태후께옵서 척후를 거기에다 가두신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습니다."
"무어야! 짐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냐!"
소리만 지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효혜는 다시 수레를 몰아 여태후가 있는 미앙궁으로 달렸다. 효혜는 친모 여태후를 보자마자 소리질렀다.
"조왕 여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태후는 효혜의 고함소리에 잠깐 흠칫하더니 곧 시퍼렇게 표정을 바꾸면서 맞받아 소리쳤다.
"아아니, 폐하, 아무리 여의가 폐하한테는 귀하신 손님인지는 모르지만 그래 모처럼 친 어미인 태후를 찾아왔으면 먼저 안부라도 묻는 게 순서가 아니겠소!"
효혜는 내친김에 더욱 소리질렀다.
"어찌되었건 여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겠소이다. 이곳으로는 오지 않았으니까 모르긴 해도 제 어미한테로 갔겠지요."
"그러시다면 척후께선 지금 어디 계십니까?"
"나도 모릅니다."
"태후께서 척후를 영항에다 가두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소이다. 폐하께서 직접 찾아보시지요."
효혜는 모친 여태후와 다투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황제 효혜가 허둥거리며 되돌아 나오는데 미앙궁에서 근무하는 환관 주손이 쪼르르 효혜를 뒤쫓아 나왔다.
"폐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냐?"
효혜는 험악한 얼굴로 주손을 되돌아보았다.
"태후의 명령으로 소신이 장락궁으로 가서 조왕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래, 지금 조왕은 어디 계시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서거하셨습니다."
"아아!"
효혜는 체신불구하고 섬돌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구의 짓이더냐!"
"태후께옵서...."
"아아!"
"조왕께 짐독을 억지로 마시게 했습니다."
효혜의 정신이 반쯤이나마 돌아온 것은 한참 후였다.
"시신은?"
"미앙궁 뒤뜰 매화나무 밑에다 묻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구나!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효혜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궁전 뜰을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폐하."
주손이 효혜를 뒤따르며 불렀다. 그러나 효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폐하!"
"시끄럽다! 다 듣고싶지 않다!"
결국 효혜는 주손이 더 하고자 했던 말을 듣지 못했다. 한편 여태후는 효혜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헤어지고 나서도 분을 풀지 못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은 상대가 누구이든 제거해야겠다!"
급히 주손을 찾았다. 주손은 태후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덜컥 겁이 났다. 여의의 피살 경위를 황제에게 일러바친 일이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했다. '옳지! 바로 그사실을 여태후에게 일러바쳐야 되겠구나!"
"그대는 내 가까이 있지 않고 어디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는가!"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태후께옵서는 조왕 여의의 자리를 굳게 안정시키려던 계략을 누가 세운 줄 아십니까."
태후는 어리둥절해졌다.
"그야 선제께서 주창과 짜고 한 일이 아닌가?"
"아닙니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습니다."
"범인?"
"범인이라면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조왕의 권력을 안정시키려고 계략을 세운 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인가?"
환관 주손의 대답에 여태후는 서슬 퍼렇게 물었다. '조요입니다."
"조요라면 지금 어사대부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자를 당장 불러들여라!"
"태후께옵서는 어사대부라는 자리가 막중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함부로 그를 해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조요를 죄 주려해도 선제께서 판단하시고 조요의 계략을 받아들인 것이니 섣부른 호출은 자칫 엉뚱한 화를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어사대부라지만 제깐 게 태후인 나한테 감히 어쩔 것인가! 그렇지만 그대의 의견에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자를 그 자리에 둘 수는 없지. 그대는 조요에게 어떤 죄목을 씌우는 게 좋겠느냐?"
"조왕을 잘 보필하라며 주창을 선제께 추천한 자가 조요이나, 조왕이 지금 죽은 마당에 주창을 잘못 천거한 조요에게 죄가 있다면 있는 것이 되지요."
"오오, 그대는 나의 충신이오!"
여태후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렇다면 차기 어사대부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도 미리 고려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태후는 그 순간 임오를 떠올렸다. 임오는 전날 패땅의 옥리였다. 유방과도 무척 친한 사이였다. 유방이 죄를 짓고 도망쳐버리자 관가에서는 유방 대신 유방의 처 여안(여태후)을 옥에 가두었다. 그 때 여안을 담당한 옥리가 그녀를 몹시 거칠게 다루었다. 임오는 그게 싫었다.
"가만히 다루게."
"무엇 때문에?"
"글세, 그렇게 하라니까. 유방이 문제이지 그자의 부인이 무슨 죄가 있나."
"여안이 유방의 소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럴 리가, 설사 안다 해도 그러는 법이 아닐세, 알았나?"
"싫어, 나한테 몸이라도 바치면 혹시 모를까."
"이 자식이!"
"뭐야?"
임오는 동료 옥리를 실컷 패주었다. 그런 다음 도망쳐서 숨어버렸다. 즈음에 유방이 봉기했고 임오는 유방을 추종하다가 어사가 되어 풍(가소성)땅을 지켰다. 나중에는 상당(산서성)의 군수로 있었고, 진희가 모반했을 때에도 상당을 견고하게 지켰으므로 그 공으로 봉을 받아 후가 되어 있었다. 여태후는 젊은 시절 결국 임오한테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주손에게 슬쩍 내비쳤다.
"임오를 어사대부에 천거하고 싶다. 폐하께서도 임오를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태후가 환관 주손을 찾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죽은 조왕 여의의 모친 척부인의 근황을 알고싶어서였다. 주손이 불려왔다.
"요즘 척부인은 어떻게 지내고 있더냐?"
주손은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궁리한 뒤에 입을 열었다.
"여항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태후의 조처를 원망하면서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복수를?"
"척후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요."
"그년이 나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년에게 응분의 벌을 내리겠다. 전날 폐하께서 생존해 계실 때 내가 그 년한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이가 갈린다. 어서 여항의 옥리를 불러라!"
며칠 후였다. 모처럼 황제 효혜가 여태후를 문안하러 왔다.
"폐하, 마침 잘 오셨소. 꼭 보여드릴게 있어서 그렇소."
"보여주실 게 있다고요? 대체 무엇이기에 모후께서는 그토록 유쾌한 표정을 지으시며 저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까?"
"사람같기도 하고 귀신같기도 한 짐승이 있기에 폐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소이다."
여태후의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황제 효혜는 멋모르고 여태후를 따라갔다.
"여기는 여항의 측간이 아닙니까."
"하도 괴상망칙한 괴물이라 마땅히 가두어둘 곳이 없기로 이곳에서 키우고 있소이다."
분뇨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에 효혜는 코를 막으며 태후가 가리키는 짐승을 이맛살을 찌푸린 채 찬찬히 살펴보았다.
"참으로 괴상한 짐승입니다. 이런 동물은 생전 처음 보는데 대체 이짐승을 어떻게 부릅니까?"
"인저라 부르오."
"사람돼지란 뜻입니까?"
여태후는 눈 한번 깜짝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사람돼지지요."
"희구한 동물이라면 마땅히 깨끗한 장소에다 가두어 키울 것이지 하필 측간에서 키웁니까?"
"폐하의 눈에는 혹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실은 사람같기도 합니다."
"잘 보셨소이다. 원래 이년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성이 워낙 짐승처럼 욕심이 많고 또한 악독하기로, 아예 짐승으로 만들어버렸소이다."
"원래는 인간이었다고 하셨습니까?"
"멀쩡한 인간을 우선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빼내어 장님으로 만들고 귀를 지저서 귀머거리로 만들고, 음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뒤 뒷간에 처넣자 저토록 꿀꿀거리기만 하니 흡사 사람돼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효혜는 그것이 원래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전신이 떨려왔다.
"저 인간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토록 악독한 형벌을 내리셨습니까?"
여태후의 입가에는 다시 잔인한 냉소가 흘러갔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요! 이 첩년은 한 남자의 총애를 독점해 조강지처를 원수로 삼았으며, 그나마도 부족해 조강지처의 적자를 떠밀어내고 제년의 아들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온갖 음모를 다 꾸몄던 년이올시다. 그런 악독한 년에게 어떻게 사람 대접을 하겠습니까!"
효혜는 그제서야 얼른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이분이 척후가 아닙니까!"
"잘 보셨소이다."
"아아! 어떻게 선제의 부인에게 이토록 악독한 일을!"
그런 뒤 효혜는 충격으로 잠시 실신했다. 얼마 후 다시 깨어난 효혜는 한바탕 대성통곡한 다음 친모인 여태후를 증오심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조왕 여의를 모후께서 죽이시더니 또한 그의 어미까지 이런 잔인한 복수를 하십니까!"
"복수가 아니오. 저년은 자기가 저지른 죄값을 달게 받을 뿐이오."
"모후께서 선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공로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어짐과 덕을 만민에게 베풀어 천하의 인심을 얻어야 하거늘 선제께서 붕어 하시자마자 이런 모진 짓으로 실덕을 자행하고 계시니 이일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겁니까!"
"나로선 반성할 일이 하등 없소. 폐하께서도 이 어미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 자리에 계시지도 않소!" 여태후가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자 황제 효혜는 더욱 독이 올랐다.
"좋습니다. 이런 참혹한 짓은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일을 저지른 태후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효혜는 그 날로 몸져 누웠다. 병상에 누워 어떻게든 모후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애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황제 노릇하면 무엇하나. 이 더러운 세상을 하루 빨리 하직하는 게 내게 있어서는 최선이다!"
가까스로 일어나 효혜는 그 날부터 주연을 베풀며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날마다 후궁을 바꿔가며 음락에 빠져들었다. 병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나라 왕 도혜가 입조했다. 도혜(유비)는 효혜의 이복형이었다. 조왕 여의가 피살된 후 깊은 외로움에 빠져있던 효혜로서는 도혜의 입궐이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시오! 우리끼리 황제니 왕이니 그따위 허울은 모두 걷어치우고 호형호제하며 서민의 예의로 놉시다. 형님, 잔치 상이 준비된 곳으로 가시지요."
그런 소식은 곧장 여태후의 귀로 들어갔다.
"무어라고? 황제께서 일개 제후 왕과 호형호제하며 놀고 계신다고?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소리친 여태후는 다시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렇구나! 효혜는 내가 미운김에 아예 죽을 작정을 하고 있구나! 그럼으로써 내 몸에서 태어난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이복형인 도혜에게 제위를 넘기려하는 구나. 이건 위험하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야 없지!"
이튿날이었다. 태후궁에서 연락이 왔다. 도혜왕의 내조를 환영하는 잔치를 베푼다는 내용이었다. 효혜와 도혜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태후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태후는 효혜와 도혜 앞에 궁녀를 시켜 각각의 잔을 놓도록 했다. 그런 다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나라 도혜왕은 들으시오.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도혜왕을 서민의 예로 형님 대접하여 상좌에 앉혔지만 그래도 아우님은 황제인 거요1"
도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잔을 그 앞에 놓았으니 사과하는 의미에서라도 술을 따라 황제에게 축수 하시오. 그것이 신하된 자의 예의인 듯하오."
"지당하신 분부이십니다."
여태후의 명령에 따라 제나라왕 도혜는 두 개의 잔에다 술을 가득 따른 뒤 황제 효혜에게 장수를 축원하는 건배를 요청했다. 그런데 한편 효혜는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말고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태후의 태도가 수상쩍다! 도혜를 죽이려 하는구나! 차라리 내가 마셔버리는 게 낫겠다!' 효혜는 벌떡 일어나 도혜 앞에 놓인 술잔을 얼른 집어들었다.
"제나라 도혜왕의 축수를 받겠소. 건배합시다."
당황한 쪽은 여태후였다. 이미 도혜의 술잔 속에는 짐독이 발라져 있었는데 그 잔을 황제가 집어들었으니 여태후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나도 폐하께 축수하겠소!"
황급하게 뛰쳐나오던 여태후는 실수하는 척 효혜의 술잔을 쳐서 떨어뜨렸다. 술은 속절없이 쏟아졌다. 도혜는 그 때까지만 해도 태후의 실수인 것으로만 이해했다. 효혜의 술잔은 다시 날라져 왔고 술은 다시 부어졌다. 건배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얼마후였다. 태후궁에서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가 쪼르르 걸어나오더니 효혜가 엎질러놓은 바닥의 술을 핥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양이의 행동에 우연히 도혜의 눈길이 갔다.
"앗! 바닥을 핥던 고양이가 갑자기 부들부들 떨더니 넘어졌습니다!"
모두의 눈길이 이미 죽어버린 고양이 쪽으로 쏠렸다. 효혜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으며 여태후는 모른 척 얼굴을 돌려버렸고 전후사정을 계산해 보던 도혜의 얼굴은 갑자기 사색이 되었다. 잔치에 흥이 날 리가 없었다. 도혜 살해에 실패한 여태후호 태도가 시들해졌다.
"오늘 잔치는 이것으로 그치겠소!"
태후가 서둘러 내전으로 들어 가버리자 주연은 곧 끝나버렸고 초대된 손님들도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한편 도혜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내가 이대로 무사히 장안을 빠져나갈 수가 있을까`! 숙사로 돌아온 도혜가 걱정으로 한숨만 토하고 있는데 제나라에서 올 때 수행자로 따라온 내사인 서사가 먼저 계략을 꺼내는 것이었다.
"왕께선 그토록 근심하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태후만 달래놓으면 만사 해결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슨 살아날 묘책이라도 있다는 얘기요?"
제나라 왕 도혜의 되물음에 서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왕께서 땅을 아까워하지만 않으신다면 살아서 무사히 제나라로 회귀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요?"
"태후한테는 오로지 효혜황제와 노원공주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대왕께서는 제나라 70여 개 성시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나라 땅을 베어주라고?"
"장안을 무사히 벗어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음, 그 방법밖에 없다? 얼마나 베어주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소?"
"공주의 탕목음(목욕 비용에 충당하는 땅)으로 사용하라며 일개 군을 태후께 헌상하시면 태후께서는 반드시 기뻐하시며 대왕을 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혜는 한동안 궁리한 뒤에 말했다.
"살아서 돌아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겠소. 그렇다면 성양에 있는 1군을 헌상하면서 공주를 왕태후로 높여 부르면 태후는 더욱 좋아하시겠지. 그대가 즉시 태후한테 다녀오시오."
서사가 태후궁인 미앙궁으로 달려갔다가 얼마 후에 돌아왔다.
"됐습니다! 태후께서 몹시 기뻐하시며 저택(한제에서는 수도에 각각의 제후들 저택이 있었음)에서 매일 주연을 베풀며 즐겁게 노시다가 귀국 하라십니다!"
도혜는 그제서야 떨리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어쨌건 조정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태후와 사이가 나빠진 황제 효혜는 자포자기가 되어 정사에서 손을 떼어버리자 여태후가 서서히 정권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제실인 유씨가 위태로워지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여씨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우승상 진평 역시 그런 사태를 우려했으나 여씨 일족과 다툴 힘이 미약하다고 판단되어 몸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언제나 조용히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육가가 진평을 찾아왔다. 진평은 무슨 문제를 두고 심사숙고하고 있던 중인지 육가가 앞좌석에 앉아 있는데도 진평은 여전히 육가의 출현을 모르고 있었다.
"뭘 그토록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오?"
그제서야 진평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언제 오셨소?"
"한참 전이오. 난 승상의 그런 태도를 보면서 승상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는가를 계산해 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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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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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6
불행하게도 우리의 인생은 환불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이 원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모든 쾌락과 행복이 소극적인 것이라면 고통은 적극적이다. 우리는 쾌락을 즐기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는 있지만 끊임없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몸 어느 한 곳에 상처가 나면 우리는 다른 시체 부분은 건강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상처의 고통이 언제나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삶에 대한 다른 행복이나 즐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7
지금 추진하는 중요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더라도 다른 사소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갈등과 고통을 느낀다. 삶에 있어서 그 일은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큰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시름에 잠기는 것이다.
8
삶을 좀먹는 것은 행복에 대한 비천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의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 버릴 수 있는 사람, 필요 이상의 행복을 탐내지 않는 사람만이 인생의 난국을 헤치고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쾌락, 돈, 영화, 명예, 지위 등에 대한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이다. 큰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행복과 쾌락을 얻기 위한 지나친 노력에서 비롯된다.
9
인생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마라. 약간의 기대는 도움이 되지만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독이 된다. 기대감이 작다면 어떤 불행이 찾아와도 흥분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것을 잃어 버려도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위의 모습을 세상의 참모습으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맡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대의 모습을 돌아보아라.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대의 모습을 돌아보아라. 인생의 밑바닥에 가득 찬 고통과 갈등이 다가오는 모습을.
10
행복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용기는 지혜 다음으로 중요하다. 물론 용기나 지혜가 저절로 커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어머니로부터, 용기는 아버지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타고난 지혜와 용기는 노력과 훈련에 의해 증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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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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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귀중한 장서들을 계획적으로 약탈한 가와이
엣부터 귀중한 서적은 다른 여러 분야의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에 1차적으로 치명적인 약탈을 당했다. 나머지의 대다수도 그때 건물과 함께 왜병들에 의 해 불질러졌다. 이홍직 교수는 (임진란과 고전유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왜병)은 조선 팔도에서 마음껏 그 흉악상을 발휘하여 잔학한 살육은 물론, 사찰·관아·궁궐을 방화·파괴하여 역로의 유형적 무물은 거의 다 형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보물과 귀중한 문화재를 계획적 혹은 충동적으로 약탈하였다. 당시 왜장 우키다가 조선에서 약탈한 수십 궤짝의 서적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서에게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식자 있는 중들을 등용하여 계획적으로 관아·구가의 장서를 샅샅이 탐색하여 약탈해 갔다.
그것은 실로 놀라울 만한 수량에 달하여 조선에서는 임진 전 간행의 전적은 거의 씨를 말릴 지경이 되었다."(한국고문화론고, 1954년)
구한말과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통감.총독에서부터 여러 계층으로 무법의 약탈 및 불법반출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두 번째로 당하는 치명적인 전적의 수난이었다. 1908년(융희 2년) 12월 29일, 경기도관찰사는 강화군수로부터 대략 다음과 같은 '정족산성 사고'의 중대사를 김급 보고받았다.
"한 일본인이 일본 헌병 2명과 헌병 보조원 5명의 호위를 받으며 전등사(당시 사고의 수호사)에 찾아와서 사고 안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 문을 열라고 강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드디어는 도끼로 사고의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 두세 시간이나 내부를 뒤진 뒤 21권의 서책을 가지고 갔음. 그 사실을 전등사 주지로부터 보고받은 즉시 강화군 헌병 분견소에 물어 그런 불법행위를 감행한 일본인이 대체 누구인가를 규명하여 본즉, 서울의 동양협회 전문학교(당시 일본의 동양전문학교 경성분교) 간사로 있는 가와이(하불홍, 하합홍민의 잘못 표기)란 자로서 통감부 헌병대장 아카이시 소장의 소개가 있어 그의 신분을 보호해주었다 함."
일본인들이 감히 사고에까지 침입하여 문짝을 부수고 사책을 훔쳐갔다는 중대한 사건은 경기관찰사로부터 다시 서울의 내각으로 즉각 보고되었다. 그러나 경찰 치안권을 포함한 모든 주권을 이미 일제 통감부와 헌병대에 빼앗기고 있던 허수아비의 대한제국 내각은 총리대신(당시 이완용)의 명의로 사건의 진상을 더 자세히 알아보되 강화도의 일본 헌병 분견소 소장과 책을 가져갔다는 일본인 가와이에게 조회하여 그 책들을 도로 갖다놓게 하라는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지시를 경기관찰사 경유 강화군수에게 내렸을 뿐이었다. 모든 범죄 수사권을 일본 헌병과 경찰이 완전 장악하고 있던 터에 명목뿐이던 지방의 일개 군수가 무슨 힘이 있었으랴. 기왕에 체결된 협약과 조약에 따라 한국인 행정책임자를 강력히 보필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일본 경찰도 헌병의 횡포엔 맥을 못 추고 있던 때였다. 1909년 3월 11일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일본인)은 통감부 경찰국장에게 그동안의 가건 경위를 조사·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을 빼고 있다.
"인천 경찰서장으로부터 하등의 보고가 없으나 사건이 헌병대에 관련된 것이므로 본건 조사로 인하여 혹시 헌병과 충돌이 일으킬 염려도 있어 경찰에서는 일부로 조사를 단념하였기 내보하는 바임."(국사편찬위원회 보관문서)
결국 통감부 시절에 서울에 와 있던, 책을 알던 일본인 악당 가와이는 이론 헌병대의 무법의 세력을 업고 강화도의 사고본을 계획적으로 약탈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의 불법행위가 중앙에까지 보고됐었음에도 불사하고 헌병대의 비호로 버젓이 버틸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가와이는 그런 악질적인 수법으로 귀중한 한국의 고서들을 마음껏 약탈 혹은 수집하여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현재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가와이문고' 가 바로 그것들이다.
일본에 유출된 서적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학계엔 조선 연구의 열기가 높았다. 동경제국대학의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관계 연구학자들이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움직여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질과 기타 귀중한 사책 전부를 실어 갔던 처사는, 그러한 열기와 대륙으로 눈을 돌리던 일제 야욕의 일단이었다. 당시 침략적인 대륙진출의 연구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의 이른바 '백산흑수문고'(우리의 오대산 사고본도 이 속에 들어갔었다)의 '백산흑수' 는 '백두산-흑룡강' 쪽을 목표로 한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일본 학계의 조선 연구열은 구한말 이후 일제세력에 편승하여 이 땅에 건너왔던 안목 있는 일본인 무법자들로 하여금 각처의 귀중한 고서와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 혹은 수집케 하였고, 그 대다수는 조만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약탈자들 가운데는 통감부와 헌병의 권력을 등에 지고 무법을 자행한 자가 많았다. 헌병을 앞세우고 간화 사고본을 백주에 약탈해 간 가와이는 그런 악질 중의 하나였다.
통감부 시절에 통역관으로 와 있던 마에나도 일제 권력을 배경으로 한국의 옛 책을 무수히 수집·반출해 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수집이ㅣ 모두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는 통감부 재직시에 강화도에서 실어 왔던 '정족산성 사고본' 을 비롯하여 곳곳의 전적 문화재를 매만지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적당히 귀중본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빼앗음으로써 막대한 분량의 한적 컬렉션을 향유할 수 있었다. 뒤에 '마에마 장서' 로 통하게 된 이 한국 책들은 현재 도쿄의 '동양문고'(일본 국회도서관 산하)에 대부분 들어가 있다. 수집가 자신이 비망록처럼 해제한 (고선책보) 3책이 1934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간행됐는데 그 내용은 놀랄 만큼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구한국 학부의 고문으로 왔던 헤이하라도 상당 분량의 한국 책을 수집해 간 일본인의 한 사람이었다. (조선법제사고)라는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땄던 아사미의 방대한 한국 책은 일본의 미쓰이 재벌로 넘어가 '미쓰이문고' 로 보관되다가 2차대전 후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팔려 갔다. '탁족문고' 로 알려졌던 가네자와의 한국 책들은 2차대전 중 미군 공습으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밖에 일제 때 서울의 (경성일보) 주필로 있었던 도쿠도미의 '성기당문고' 와 오사카 시립도서관의 한국 책. 그리고 (삼국유사)(안정복의 수택본)를 포함하여 숱한 귀중본을 수집한 이마니시의 장서 등이 모두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 땅에서 마구 약탈당했거나 휴지처럼 헐값으로 팔려 간 것들이다. 총독부 초기부터 고적조사위원을 역임했고,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조선사 전문학자인 이마니시는 훗날 (삼국유사)를 입수할 때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정 5년(1916년)에 경성의 한 책장수(조선인이었던 듯)가 (삼국유사) 1부를 제공하기에 꿈 같은 심정으로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 그것을 구입했다. 책은 실로 안순암의 수택본으로서 곳곳에 그의 자필지어가 있고, 더구나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완본인 '신전본'·'덕천본'에 탈루돼 있는 일곱 장을 완비한데다가 그 일곱 장에는 대단히 중요한 기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전본'·'덕천본' 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한적의 일본 안에서의 전래문고를 말한다. 이마니시는 또 미국으로 팔려 갔다는 '미쓰이문고' 의 수집가인 아사미가 한국 최고의 승전인 (해동고승전)(고려 고종 때인 1215년에 간행)의 유일한 낙질 2권을 입수해 간 것도 서울에서였다고 그의 (고려사연구)에 적고 있다. 모두 지난날의 부끄러운 기록들인데, 1913년 2월의 (매일신보) 사설이 당시의 딱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몰지각한 부류들은 선조 및 고철의 영묵잔편을 진개처럼 여기고, 혹 몇 푼의 동전에 매각불석하니 인문의 쇠퇴가 어찌 이리 심하뇨. 가련하도다." (사설 제목은 (고서적의 필보호) )
팔만대장경 도난사건
"해인사에 보존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 "팔만대장경판" 중 10여 장이 분실되어 있었다."
1969년 10월에 서울과 지방의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중대한 뉴스였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를 위촉받았던 서수생 교수와 조명기 박사가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 을 54년 만에 처음으로 낱낱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것이었는데, 그 내막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관리당국과 학계는 미처 알지도 못했던 사실에 모두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된 분실 경판은 18장이었다. 그러나 이 분실 숫자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또한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도둑을 맞었는지 정확한 내막은 이미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과거의 총독부 기록 하나가 뒤에 색출되었다. 1937년 12월 20일, 당시 해인사 주지 장제월이 미나미 총독에게 (국보 및 사찰재산 도난 보고의 건)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면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년 8월 28일, 당사가 안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목 전부를 만주국 정부의 의뢰로 탑탁(인출)함에 있어 허가를 상신했던바, 본년 9월 11일부로 본부(총독부)의 인가가 내렸기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다카하시 박사와 지휘 밑에 인경공사를 실시할 제, 당사 소유 국보 고려대장경 판목 및 당사 소유재산 귀중품이 도난되었음을 발견하였음. 도난당한 날짜는 미상임."
그리고 뒤에 도난당한 경판명을 적고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 1장, '대장엄경론' 1장, '대장경목록' 1장, '석교분기원통초' 1장으로 돼 있다. 앞의 도난보고를 받은 총독부에서는 다음해인 1938년 2월 25일부로 경남 도지사에게 "해인사 대장경판(당시 보물 제111호)과 기타 귀중품 도난의 전말을 상세하게, 그리고 시급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 뒷조사 보고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으나 그때 도난당한 경판 4장이 되돌아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에 획인된 '18장' 의 분실 경판은 그 4장을 포함한 숫자로 생각되는데 나머지는 그 뒤에, 아니면 같은 무렵에 모두 도난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937년의 '팔만대장경' 인경 때엔 두 벌을 떠서 한 벌은 평북 영변의 보현사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때의 대대적인 작업장(경판고) 경비책임자는 해인사 지구 경찰관 파출소였다. 이 파출소의 주임은 전부터 악질 순사부장으로 유명한 일본인이었다. 과거의 총독부 고적조사 서류철에 입각하여 현지에서 청취된 증언은 1937년의 경판 및 귀중품 도둑이 바로 그 자였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인경 현장을 보호·경비한다고 칼자루를 휘두르며 얼씬대던 순사부장이란 자가 그 경판들이 보통 보물이 아닌 것을 알자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8천 장도 넘는 산더미 같은 경판들 속에서 4장쯤 슬쩍 빼 가진들 누가 알랴 싶었는지도 모른다. 뒷날 누군가가 그 자의 집에서 목격한 바로는, 훔쳐 온 4장의 대장경판을 일본식 4각화로(소위 이로리)의 외곽으로 붙여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것이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도 없다(또 다른 증언을 빌리면 그때의 범행자가 가야면의 다른 순사부장이었다고는 한다). 돌어켜보면 1915년에 총독부에서 오다 등 7명이 해인사에 파견되어 '팔만대장경판' 에 대한 첫 조사를 했을 때 결판이 18장이었고, 뒤에 그것을 보각하여 채운 것으로 돼 있으나, 그것들도 그전에 일본인 무법자들이 훔쳐 갔었는지도 모른다.
불상, 탑, 동종 할 것 없이 사찰문화재가 일본인 악당들에게 닥치는 대로 약탈되던 한일합방 전후의 무법시대에 해인사의 대장경을 노린 자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의 '팔만대장경판' 을 최고의 보물로 일본인 사회에 알린 조사보고가 1910년에 이미 간행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더욱 짙다. 무라야마라는 일본인이 경위를 알 수 없는 (해인사대장경 조사보고)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낙랑고분의 대난굴시대
1970년대 초에 중국 대륙의 호남성 장사시 교외의 한 고분에서 약 2,100년 전의 한나라 문물이 쏟아져 나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이 발견은 1968년에 하북성의 만성에서 발굴된 유승묘(B.C. 2세기말의 서한시대)의 경이로운 금루옥의 등에 이어서 한문화의 전모를 재확인시킨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출토유물은 1909년 이후 북한의 평양 근교 대동군 댜동강면을 중심을 발굴된 낙랑고분에서 나온 것들어었다.
낙랑은 전한의 무제가 B.C. 108년에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의 하나였던관계로 그 옛터의 고분 출토유물은 한문화 것이 중심이었다. 그것들을 일본인 전문가들이 한반도 침략과 더불어 처음으로 조사·발굴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눈부신 유물 내용은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그러자 예외없이 그곳에 나타난 것이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 무법자들이었다.
1909년 10월, 일제의 강청에 따른 한국정부의 위촉으로 두 번째 고적조사를 착수하게 되었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는 다니, 구리야마라는 두 조수를 대동하고 평양에 이르렀다. 그때 그들은 (평양일보)의 일본인 사장이었던 사라카와로부터 대동강 남안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숱하게 군집해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세키노 일행은 일정을 변경하고 즉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아주 오래된 고분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그중의 2기를 골라잡고 내부를 알아보려고 당장 시굴에 들어갔다.
막연한 기대를 갖고 고분의 시굴을 지휘하던 세키노는 전(벽돌)으로 현실을 꾸민 속에 한나라 문화의 거울을 비롯해서 무기며 토기 등이 부장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약 2천 년 전에 아주 놀라운 문화를 누리고 있던 한민족이 이주해 살았던 낙랑시대의 고분 유적지,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한분화의 지하보고, 그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뒤에 가서 밝혀지지만 평양 근교와 황해도 쪽에 걸치는 낙랑고분은 수천 기에 이르고 있었다.
세키노의 조사팀은 다음해 가을에도 2기의 낙랑고분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출토시켰고, 1911년 10월에는 세 번째의 조사발굴이 사리원 근처에서 실시되었다.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과 당토성으로 불리던 곳에서 대방군의 치지로 생각되는 토성이 이때에 발견되었다. 그들은 또 1913년 9월에 가서 진남포 부근과 봉산군의 유적 및 고분을 조사.발굴하여 한대의 와당·복식품·동기·도기·칠기·옥석기·무기 등 풍부한 부장품을 획들했다. 그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출토품들을 모조리 일본으로 실어 갔다.
1912년 4월, 동경제국대학 공학부에서는 건축학과가 마련한 한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다. 제3실의 (조선지부)에 처음으로 진열·공개된 낙랑고분 출토유물이 주목의 초점이었다. 다음은 당시 일본의 고고학 잡지가 소개하고 있는 그때의 전시유물이 내용과 명확한 반출경위이다.
"세키노 조교수와 다니, 구리야마 일행이 조선에서 3회에 걸쳐 가져온 것으로 너무도 풍부하여 일일이 매거하기가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지적하면 낙랑시대의 고분지역인 대동강면 상오리 석암동 발견의 한경, 오주전, 증(시루), 당토성 발견의 전, 봉산군 미산면 오상동 발견의 '사군대방태수장무이' 란 명이 있는 묘전. 안학궁지 발견의 고와, 강동 한왕묘 발견 유물 등이다."
1912년의 동경제국대학의 공대의 조선 고대유물 전시장에는 낙랑고분과 유적지에서 출토해 반출해 간 유물들 외에도 경북 고령의 대가야 왕궁지와 고분에서 학술조사를 빙자하여 세키노 등이 파 간 기왓장과 토기들, 진주에서 발굴한 고분 부장유물, 경주 부근의 서악동에서 발견했다는 돌베개, 작은 신라 불상 6점, 신라 고와전 500장, 강화에서 도굴된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고려 중엽의 유명한 문신이었던 이공수의 무덤을 도굴해서 꺼낸 석관, 묘지, 동경, 나전공예품 등이 진열돼 있었다. 이 유물들은 지금도 동경대학 공대에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 권1에서 그때의 불법적인 반출유물인 동경, 무기, 팔지, 반지, 오주전, 옹기, 주발, 전(대동강면 석암동의 낙랑고분 출토품) 등 일부를 사진 도판으로 확인할 뿐이다. 이 도판 유물들은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으로 소개될 때 벌써 동경제국대학 공대 소장품이라고 기정사실화시키고 있다. 세키노는 1909년의 고적조사(낙랑고분 기타)가 한국정부의 위촉에 의한 것이었다고 마치 순수한 요청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뒷날의 조사보고서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형식에 불과했다. 그때는 이미 일제세력이 한국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고적조사를 위촉하여 필요하면 마음대로 고분도 파고 유물도 일본으로 실어갈 수 있게 자유를 부여한 것은 소위 통감부의 정략의 하나였다. 그에게 절차상 합법적인 유적 파괴와 유물 약탈 및 불법반출을 허가한 한국정부의 명목상의 부서는 탁지부였다. 그러나 당시 탁지부의 사실상의 실권자는 아라이라는 일본인 차관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경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에게 한국 전역의 사적을 조사케 하자는 입체적인 침략 계획의 하나를 기안한 자가 바로 그 아라이 차관이었다. 다음해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로는 물론 저들 마음대로였다.
세키노가 인솔하는 정식 발굴대가 평양 근교의 대동강 남쪽(대동강면)에서 낙랑고분 10기를 발굴하여 예기치 못했던 굉장한 유물들과 이루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장품들을 출토시킨 것은 1916년 10월의 일이었다. 이때 발굴된 10기의 고분에는 제1호에서 제10호까지 번호가 붙여졌는데 현재 국보 제89호의 '금제교구'(국립중아박물관 소장)는 그때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섬세한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이 교구는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센세이셔널한 발견은 동시에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 는 소문을 낳게 했고, 이어서 무법자들의 도굴행위가 걷잡을 수 없이 성해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대동강면 일대의 낙랑고분을 "지하의 정창원(일본의 유명한 고대 동양미술품 보고)" 이라고 부르며 너도 나도 그 속의 '임자 없는' 보물을 꺼내 가지려고 덤볐다. 한 일본인이 뒷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6년에 세키노 박사 일행이 대동강면의 낙랑고분을 발굴하여 수백점의 귀중한 부장품을 출토시킨 후로 낙랑유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민간에도 퍼져 1922년쯤에는 개성 부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무리들이 낙랑고분에 눈을 돌려 도굴을 일삼더니 1924∼1925년에 이르러서는 최악의 난굴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의 얘기다. 세키노가 낙랑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하던 즈음에 평양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도굴과 약탈은 이미 시작됐었다. 세키노의 조사보고에 그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그는 조사 초기에 이미 야마다라는 평양 거주의 일본인이 수집하고 있던 도굴품들을 보았고, 얼마 후에는 그가 낙랑군지라고 추정한 지점에서 " '낙랑태수장', '정감장인' 같은 글자가 새겨진 귀중한 봉니가 발견(도굴)되었다" 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또 그 무렵에 평양의 복심원 검사장이었던 세키구치란 일본인도 '조선우위' 라고 새겨진 봉니를 토성리에서 입수해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인 무법자와 악질 수집가들이 직간접으로 도굴하고 혹은 뒤에서 조종했던 낙랑고분의 상상을 넘은 대난굴시대는 1923년께부터 4∼5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한 일본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에서 우리는 그때의 놀라운 내막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대난굴시대가 전개되는 바람에 평양(일본인사회)엔 별안간 낙랑열이 전염병처럼 만연되면서 낙랑의 명성을 천하에 울리게 되었다. 그 무렵 당국의 취체는 오늘(1934년 현재)과 같이 엄중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관계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고분에서의 출토품(도굴품)을 일반인에 앞서 다투어가며 점유하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꿈 같은 시대로서, 대정 13∼14년(1924∼1925년)께엔 평양 시민(물론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말)으로서 낙랑고분의 출토품에 1∼2원을 주고 고경 1장이나 토기 항아리 1개쯤 사 갖고 있지 못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있다."
앞의 증언자는 또 계속해서 당시의 구체적인 싱태를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심한 경우는 관립학교이 선생이 백주에 당당하게 수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구분의 봉분 한복판을 위로부터 파들어가서 눈부신 부장품들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일품들이 자연 민간수집가 손에 들었갔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도굴자들이 평양의 수집가에게만 팔다가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어디를 어떤 경로로 연락했는지 경성·교토 방면의 호사가(수집가)들과 줄을 대고는 도굴품 중 일품은 그쪽으로 몰래 빼돌려 평양의 수집가에게서보다 두세 배의 보수를 받았다."(팔전창명, (낙랑과 전설의 평양), 1934년)
일본인 중간상인과 교사자에게 매우 혹은 유혹되었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조선사람은 그들의 불법적인 도굴행위가 경찰에 적발이라도 되는 날엔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호되게 곤욕을 당하곤 했다. 반면 배후의 일본인인 붙잡혀 처벌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실태는 1926년 8월 2일에 열렸던 총독부 고적도사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도굴하도록 유인하고, 그 짓을 사주하는 자를 엄벌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직접 발굴한 소민을 처벌해야 한다. 발굴한 소민만 벌함으로써 그 범죄주인 자가 오히려 벌을 면하는 것 같은 사례가 만일 사실이라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방과 중앙(서울)의 권력층 수집가들과 항상 접선하고 있던 악질적인 배후의 일본인 범죄주들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도굴행위와 자금 조달은 1천 수백 기의 낙랑고분에서 부장품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대규모의 유물 약탈이었다.
뒷날의 한 조사보고는 "약 1,400기의 낙랑고분 가운데 도굴을 면한 것은 약 140기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처참한 대난굴시대에 얼마나 많은 귀중한 유물과 국보급 문화재들이 출토돼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쾌한 수수께끼이다. 다만 다편적으로 당시의 몇몇 중요한 도굴품이 기록과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하나는 세키노가 1923년에 소개하고 있는 전한시대의 유물인 '영광 3년명'(B.C 41년)의 동종(동체의 지름은 약 40cm)이다. 당시의 소장자는 평양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도리카이였다.
1922년 10월 중순에 평양 근교의 대동강 건너편인 선교리(낙랑고분 지역)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인부가 출토시킨 것을 공사 감독이었던 하시모토라는 일본인이 가로채 가졌다가 자기 아들이 다니고 있던 평양중학교 교장인 도리카이에게 가져왔다는 경위였다. 그러나 세키노는 그 얘기를 액면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 동종의 발견자인 중국인 인부가 뒤에 또 동종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깨진 거울을 도리카이 교장에게 갖고 왔다고 하여 역시 중학교에 진열하고 있었으나 과연 어느 곳에서 동시에 발견된 것들인지 알 수 없다."(전한 영광의 3년의 동종, 1923년) B.C. 41년에 주조된 전한시대의 진귀한 보물이었던 '영광 3년명 동종'의 입수 소장자 도리카이는 당시 일본인 자제들만 다니던 평양중학교의 일본인 교장이었다. 이 중학교에는 교장 외에도 낙랑고분의 출토품들을 탐욕스럽게 취득하여 도굴을 조장시킨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기타무라라는 자였다. 그는 한때 평양의 일본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도굴품 장물아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랑고분의 부장품이 바닥이 난 193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계획절으로 수집 혹은 직접 도굴했던 천금의 장물 컬렉션 보따리를 안고 유유히 평양을 떠나갔다.
일본인 가운데 교육자라는 자가 이 판이었다. 그가 바로 야다(팔전창명)가 (낙랑과 전설의 평양)에서 증언하고 있는 구체적인 도굴 일화의 하나인 "백주에 당당하게 인부를 데리고 가서 고분 속의 눈부신 부장품들을 약탈하곤 했던 관립학교 선생", 그 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못된 일본인 교사는 비단 기타무라만이 아니었다. 야다는 또 그의 회고기에서 낙랑고분 대난굴시대의 평양의 일본인 수집가(사실은 장물아비들)였던 도미다, 모로카, 하시도, 나카무라, 오무라, 오노, 나카니시, 오카모도, 야마다, 세키구치 등의 대표적인 명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밖에 1934년 현재 수집품을 몽땅 감추어 갖고 깨꿋이 평양을 떠나버린 자로서 앞의 평양중학교 교사 기타무라와 평양여학교 교장이었던 시라카미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야다는 도 평양고등학교의 교장 얘기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조선인 자제를 수용하는 중학교였으나 교장은 역시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인 교장도 낙랑고분의 한대 유물들이 마구 도굴되어 나올 무렵에 이른바 수집가들 사이에서 자그마치 1만 원이라는 거액을 호가한 '거섭 원년명 화문경' 을 단돈 1원에 입수했다.
그밖에도 그는 B.C. 3세기에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진나라 때의 무기인 과(창)와 한대의 '녹유박산향로', '녹유항아리' 등 고고학적으로 너무나 귀중한 도굴품들을 입수하고 있었다. '거섭 원년'은 서기 5년에 해당된다. 1925년 가을에 후지다 등이 총독부의 발굴·조사 계획에 따라 평양 근교에서 2∼3기의 낙랑고분을 학술적으로 조사·발굴할 때에 연호명이 있는 칠기가 발견되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관계전문가들을 흥분시켰는데, 그중의 하나는 '거섭 3년명'(서기 8년)의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고분에서 화문경 하나도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명문은 없었다. 따라서 평양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입수해 갖고 있던 도굴품 '거섭 원년명'의 화문경은 그만큼 최고의 고고학적 가치를 갖는 유일한 유물이었다.
그 존재가 알려지자 수집가 사이에서 1만 원을 호가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한 평가가 아니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우매하고 가난했던 발견자(현지 주민이 우연히 출토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런 일이 흔히 있었다)는 그런 것을 가져오도록 유인했을 일본인 고등보통학교 교장에게 갖고 가서 단돈 1원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모든 도굴품은 필연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점거되던 시대였다. 세키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작년(1925년) 이후 도굴이 성한 결과, 다수의 무기·동기·도기류가 발견되어 대부분은 평양에 거주하는 일본인 호사가의 손에 들어갔다."
세키노는 그중 중요한 것의 하나로 평양의 아무개가 소유하고 있던 서기 9년명의 칠기 파편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재명칠기의 최신의 것"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당시의 불법적인 도굴품 범람과 뒷거래의 실정을 알려주고 있다.
"토민들의 도굴품으르 일본인 호사가들이 다투어 매수하는 바람에 갈수록 도굴은 장려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평양에 갔을 때 그런 출토유물(도굴품)을 보았는데, 그 수량이 굉장할 뿐 아니라 그중에 진기한 것이 적지 않음에 놀랐다."( (낙랑시대의 고분), 1926년)
낙랑고분(귀틀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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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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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그럼 총리의 특명을 묵살하란 말이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만간 조사가 끝나면 총리께 과히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그 문제는 아우님한테 맡길 테니, 총리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조사를 서둘토록 하시오."
장도영하고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태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대검찰청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장도영은 육군본부로 돌아가지 않고, 미 8군 사령부로 사령관 매그루더를 찾아갔다. 이 무렵에는 매그루더 역시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을때였다. 물론 이 음모에는 장도영도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 또한 입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정보를 한국군 육군 있었던 것은 장본인인 장도영이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그루더로서는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며칠을 두고 고뇌하고 있었는데 장도영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좀 미리 귀띔해 둘 일이 있기에 찾아뵈었습니다."
"귀띔해 둘 일이라니요?"
"지금 한국 사회에는 군 내부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루머가 끈질기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줍잖게도 본인이 그 쿠데타 음모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장군께 호소 겸 귀띔해 두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그 말을 들은 매그루더는 장도영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장도영도 눈치챘는가?
"장군, 절대로 그런 뜬소문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쿠데타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군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장도영이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매그루더는 일체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다는 장본인이 일부러 찾아과서 해명을 하는데야 뭐라 의사표시를 하겠는가?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한국 사회도 이제 안정을 되찾은 것 같소. 한국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바랄 뿐이오."
김덕승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월 10일이었다. 이날 전화 연락을 받은 오인환은 홍경한과 남산동에 있는 김덕승의 집을 방문했다.
"홍 선생,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혼자 김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덕승의 집 앞에서 오인환은 홍경한을 밖에 세워두고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을 동반할 것 같으면 김덕승이 경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부탁한 돈은 마련했소?"
김덕승은 오인환과 마주앉아 돈 문제부터
"아,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어떻게 마련해 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만 아직......."
오인환은 무척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오. 오늘이 며칠인데 아직껏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거요?"
김덕승은 얼굴빛이 싸악 변하며 채권자처럼 노기를 띠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박 장군이 12일쯤 서울로 올라오겠다 했단 말이오, 돈을 가지러!"
그렇게 덧붙이는 김덕승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지기조차 했다. 누가 말하기를 얼굴 모습은 직업에 따라 변한다던가. 관동군 첩자였던 김덕승은 그랬는지 첩자 때의 얼굴 모습이 별반 변해져 있지 않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인환은 못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진 김덕승의 험상궂은 얼굴을 지그시 살펴보며 말했다.
"실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 끝에 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제 친구가 그런 뜻있는 일이라면 자기가 돈을 대겠다고 해서요."
"친구가?"
"예."
"어떤 사이인 친구요?"
"죽마고웁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오? 아닙니까? 믿지 못할 친구 같으면 아무리 친구라 한들 이런 중대 문제를 까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제야 김덕승의 험악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한가닥 경계하는 마음만은 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인환은 밖에 세워둔 홍경한을 불렀다. 수인사가 끝나자 홍경한은 자못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김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이 장군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사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저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이 친구와 함께 김 선생을 돕고자 단단히 작심했습니다."
홍경한이 김덕승을 한껏 치켜세우자 허허...... 하고 오만하게 웃음까지 터뜨리는 것이었다. 홍경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김 선생님, 이런 대사는 대사를 추진하는 사람이야 응당 결사적이겠지만 뒤에서 자금을 대는 사람도 결사적인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그러자면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확신을 갖자면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확신을 갖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선생이 확신을 갖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모조리 털어놓겠소."
꼬치꼬치 묻는 홍경한의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해 주었다. 김덕승은 달변이었다. 쿠데타 음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홍경한은 단정했다.
"선생님께서는 쿠데타의 자금 조달책이신 모양인데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그런 위험한 일이란 어지간한 용기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는 감격한 듯이 한껏 김덕승을 치켜세웠다. 김덕승은 자못 의기양양해 졌다.
"이제 두고 보십시오. 이 쿠데타는 기필코 성사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땐 선생한테도 상당한 보상이 있을 줄로 압니다."
같은 말투를 거침없이 내뱉았다. 홍경한은 더욱 감격했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자금을......."
김덕승은 돈을 가져왔으면 어서 내놓으라고 독촉을 했다.
"사실은 좀더 확실한 내용을 알고 나서 제공해 드리려고 오늘은 그냥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언제쯤이나?"
"모레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이란 비밀을 요하는 일인만큼 모레 아침 7시쯤 요 앞 남산길에서 만납시다. 그래야 남의 눈도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홍경한은 5월 13일 오전 7시 남산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하고 오인환과 두 사람이 물러가자, 김덕승은 즉시 대구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물론 박정희한테였다.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경으로 돌아오자 홍경한은 즉시 부국장실로 가서 김덕호에게 김덕승을 만난 사실을 보고했다. 홍경한의 보고를 받은 김덕호는 대검찰청으로 달려갔다. 이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네, 총장님."
이태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무는 것이었다.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소?"
이태희는 아무래도 장도영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장 장군이 관련됐다 안 됐다 제가 이 자리에서 뭐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김덕승인가 김용천인가 하는 자가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의 영도자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더랍니다."
김덕호는 이태희의 반문을 이런 식으로 회피했다. 이태희는 이번에는 자기 나름으로 추리를 해보는 것이었다.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는 무리들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물귀신작전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도영 장군이 장면 정권 요인들하고 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점도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한 급이라도 직급이 높은 사람한테는 더없는 외경심을 품고 있는 것이 공권력 기관 사람들이다. 김덕호는 이태희의 비위를 거슬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총장님, 김덕승인가 하는 자가 요구한 군자금을 모레 아침 7시에 만나서 건네주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김덕승인가 하는 놈을 아예 그때 덮쳐 버릴까 합니다만?"
"김흥수 부장검사와 상의해서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경찰이 검찰의 하부기관인 것만은 어김이 있으니만큼 쿠데타 음모에 대한 수사를 경찰한테만 맡겨 놓기엔 이태희는 조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같았다.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는 제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5월 12일이었다. 그는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김덕승에게 전화를 걸어 상경했음을 알려주었다. 한데, 이런 경우를 두고 천려일실이라고나 할까? 쿠데타를 저지가 아니라 아예 박살내버릴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었다. 이날 서울로 올라온 박정희는 오후 2시경, 506방첩대장 이희영과 두 사람은 각기 별도로 박정희의 신당동 댁을 방문했다. 그들이 응접실로 드러서자 5,6명의 장교들이 먼저 와서 박정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예비역 해군 소장 김동하(金東河)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박정희는 김동하를 소개했다. 그리고는 진행중이었던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버마의 네윈식 쿠데타라야 합니다."
힐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버마의 네윈식 쿠데타?)
506방첩대장 이희영은 벌써 두번째 듣는 얘기였다. 박정희 등의 담론의 내용으로 보아 이들이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는 것만은 동지도 아니고 도리어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 있는 이희영이나 방자명을 불러놓고 쿠데타에 대한 담론을 들려준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있는 이희영이나 방자명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떠보자 해서였을까? 아니면, 나는 너희들을 동지로 믿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거사를 눈감아라 하는 뜻에서였을까? 어쨌거나 박정희를 비롯해서 김동하 등 그 자리에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은 쿠데타에 대한 구체적 의논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희영이나 방자명은 아예 처음부터 쿠데타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박살내 버릴 조치를 취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사람이 쿠데타 그룹을 박살내 버리고자 기도했다 하더라도 장도영이 그들을 감싸주고 있는 이상엔 그 어떤 손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어찌됐거나 이쯤되면 5.16 쿠데타 그룹은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진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우리는 쿠데타를 진행중에 있다. 어디 너희놈들 우리 쿠데타를 막아 보려거든 해봐!> 박정희는 이렇게 공언하면서 쿠데타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5월 13일 아침, 날이 훤히 밝을 무렵 5명을 지금의 남산에 있는 케이블카 발착지점 밑에 매복시켜 놓았다. 김덕승과 만나기로 한 7시 훨씬 전이었다. 그는 약속 장소에 이르자 마치 아침 공기를 마시러 나온 산책객인 양 팔다리 운동을 하는가 하면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기도 하는 등 시간을 재촉했다. 정각 7시가 되자, 검은 지프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지프는 물론 김덕승이 서성거리고 있는 곁에서 멈추었다. 차가 서자 내린 사람은 홍경한이었다. 그는 돈뭉치를 싼 듯한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홍경한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김덕승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홍경한의 오른손을 힘껏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홍경한이 들고 있는 꾸러미를 받으려는 듯 왼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그의 왼손에 철거덕 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과연 민완형사들이었다. 어느사이에 기척도 없이 두 사람한테 다가섰는지 홍경한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꾸러미를 들고 있는 홍경한의 오른손에도 철거덕 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이 채워지자, 김덕승은 무척이나 당황하는 것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 누구요?"
"잔말 말어, 가 보면 알아."
한 형사가 김덕승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다물라고 소리쳤다. 홍경한도 조금 연극을 했다.
"죄목이 뭐요, 죄목이?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영장도 없이 수갑을 채우는 거요?"
형사들한테 대드는 거이었다.
"김덕승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김덕승을 체포했다는 보고는 서울시 경찰국장 이귀영(李貴英)을 통해서 즉시 보고되었다. 김덕승 체포 보고를 받자 그제야 장면은 장도영에게 하명했던 일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즉시 장도영을 다시 또 불러들였다.
"내가 장 장군한테 지시한 일 어찌되었소? 며칠이 지났는데도 감감소식이기만 하니?"
"죄송합니다. 각하, 군 수사기관에서..."
장도영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잘도 거짓말을 주워 삼켰다. 평소 감정의 변화를 잘 나타내지 않는 장면도 이때만은 버럭 화를 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다는 거요? 경찰에서 김덕승인가 하는 사람을 체포까지 했다는데? 그래, 쿠데타 문제에 대해선 참모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한테 보고해야 할 성질의 사건인데 거꾸로 내가 참모총장한테 지시를 하고 있으니 이래도 되는 거요?"
무안을 느꼈는가? 그제야 장도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박정흰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한 지가 언제요? 벌써 열흘이 다 됐잖소? 그런데도 아직도 조사를..."
장면은 <내가 어떻게 이런 자를 믿고 참모총장에 기용했던가?> 하고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장도영이 도 변명을 늘어놓았다.
"각하, 사실은 군 수사기관에서 박정희 장군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였습니다."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였다고?"
"네, 각하."
"그렇다면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은 거요? 가타부타 뭐라 보고가 있어야 했을 거 아니오?"
"아닙니다, 각하.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데 어째서 박 장군이 쿠데타를 있는지 재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던 참입니다."
거짓말도 이쯤 술술 예사롭게 잘하게 되면 가히 국제 챔피언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도영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명령를 수행하려 하기는커녕, 어떻게 해야 자신의 동조설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데만 급급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장면이 다시 또 장도영을 불러 보고가 없다고 호통만을 치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 장면을 동정해야 할지 힐난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게 된다.
"장 장군이 군무에 바쁘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지만 내가 지시한 것도 서둘러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예, 각하."
해야 한시바삐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것만 궁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장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물러가겠습니다. 각하."
한마디를 던지고는 휑하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장도영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던 장면은 입맛이 쓴 듯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김덕승은 체포되자 곧 서울시 경찰국 뒤에 있는 태평(太平) 호텔로 호송되어졌다. 말이 호텔이지 여관 크기의 5.16 군사 쿠데타로 그가 석방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취조관들이 나를 홀랑 발가벗기고 구타를 했는가 하면 고춧가루 고문에다가 8시간 동안에 물을 세 초롱이나 먹이고 고문을 했다."
석방되자 그는 허풍을 떨었다. 여기에 대해서 수사를 지휘했던 검찰관 김흥수의 증언은 사뭇 천양지차였다. 필자가 1967년 5월 TBC(동양방송)에 <5.16혁명비화>라는 타이틀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을 때 김흥수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가 김흥수를 만난 것은 종로 1가에 있는 조그마한 다방에서였다. 그는 김덕승이 고문을 당했다고 떠벌이고 있는
"고문을 했다구요? 그런 터무늬없는 수작을 함부로 지껄여도 되는 겁니까? 그 자를 고문했다면 그 자를 체포해서 취조를 한 나나, 수사관들이 무사했을 성싶습니까?"
김흥수는 이렇게 전제하고 자못 흥분하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고문은커녕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습니다. 최대한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해줘 가면서 취조를 했단 말입니다."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자와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다고 펄쩍 뛰는 이 양자 중 어느 쪽 말을 믿어야 할까? 물론 필자는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김흥수의 주장을 믿기로 했다. 그가 부장검사를 역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 김흥수나 취조관들이 절대로 무사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김덕승은 엉터리 수작을 떠벌리며 다녔던 것일까? 이 대목에 대해서 필자는 나름대로의 추리를 해서 방송을 했었다. <군사 쿠데타는 성공을 했다. 그런데 김덕승은 박정희가 요구한 자금을 마련해 주기는 커녕, 체포당하자 끝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음모 전모에 대해서 불어버렸었다. 일이 이쯤 돼버렸으니 쿠데타의 공로자 대열에 끼지 못하게 되자 한탄하기 시작했을 게 아니겠는가? 쿠데타의 공로자 대열에 끼어 한몫 차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체포당해서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함으로써 박정희의 것뿐이었으리라.> 필자의 이 추리는 물론 전파를 탔다. 당시 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쿠데타 주체자들 거의가 들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필자의 추리가 지나쳤다면 김덕승 당사자든 또 쿠데타 그룹의 누구든 엄중 항의를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언반구의 항의를 받은 바도 없었다. 털끝만큼도 고문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 김흥수의 증언은 그의 육성 그대로 삽입해서 전파를 탔었다. 고문한 일이 없다고 증언한 김흥수의 육성 녹음, 여기에 필자의 추리가 어우러져 전파를 탔는데도 김덕승을 위시해서 그 누구도 일언반구의 항의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태평호텔의 한 구석진 방에서 김덕승에 대한 취조는 잠시 틈도 주지 않고 계속되었다.
"자, 김 선생, 이제 버틸 만큼 버텨봤으니 그만 불어버리시죠?"
"쿠데타를 주동하고 있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이오?"
취조관들의 심문에 김덕승은 처음부터 일관해서 딱 잡아떼기만 할 뿐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누가 감히 꾸민단 말씀입니까? 저는 다만 쿠데타를 구실로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이 대목은 수사관들의 증언과 일치했다. 그는 완강히 부인하며 마냥 버티었던 것이다. 고춧가루 고문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면 정권하의 경찰은 4.19라는 격동을 겪은 지 겨우 1년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더구나 쿠데타설은 분분했었고 그래서 꽤나 몸조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김덕승을 고문하지 않았던 이유는 경찰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데에도 있었다. 취조관들은 도리 없이 홍경한하고 대질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홍경한이 김덕승과 대질할 때도 피고인으로서의 신분으로 위장하고서였다.
"김 선생, 모든 것이 탄로난 이상에 이제 버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김 선생한테 들었던 얘기를 모두 불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김 선생도 더 이상 버티려 들지 말고 자백해 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오."
홍경한은 자백해 버리라고 권고했다. 그제야 김덕승이 체념하고 술술 불어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장군들과 영관급 장교들 모두의 이름을 불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5월 15일 한나절이었다. 김덕승은 체포당한 지 사흘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던 것이다. 5월 13일 토요일. 이날 필자는 국무총리 장면의 수석 공보비서관인 송원영과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지기로 되어 있는 고려대학교 팀과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팀의 축구 경기를 구경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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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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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재위: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티베리우스와 유대인
티베리우스는 유대 민족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를 계속 중용한 것도, 그리고 예루살렘의 유대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타협책을 취한 것도 그가 유대인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유대인을 이해했기 때문에, 특수한 유대 민족이 보편을 지향하는 로마 제국에 가져올 위험도 잘 알고 있었다. 신의 율법에만 따르는 사람들과 인간의 법에 따라 다스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치하면 위험해질 뿐이다. 오리엔트에서는 연중행사처럼 일어나는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다신교 민족일 뿐 아니라 '법'은 인간이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로마인과 가깝고, 무엇보다 로마인과의 동화에 별다른 저항감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티베리우스 앞에는 다음과 같은 현실이 놓여 있었다. 총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알렉산드리아의 주민은 5개 지구에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3개 지구에는 그리스계 주민이 살고 나머지 2개 지구에는 유대계 주민이 살고 있었다. 로마가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가 남아 있지 않아서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 수는 최소한 40만 명은 넘었을게 분명하다. 역시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한편 로마에서는 14개 나뉜 행정구 가운데 1개 지구에만 유대인 거주가 허용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로 이주한 유대인 자체가 적었다. '돈냄새'가 나기 시작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에 살았던 유대인 수는 2만 명 안팎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추산이다. 100만 명 가운데 40만 명과 100만 명 가운데 2만 명, 특수를 허용하면서 보편을 관찰하는 해결책은 바로 여기에 숨어 있을 터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 허용한 사법권을 동방의 여러 도시에 있는 유대인 사회에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사형집행만은 로마인 총독이나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동방의 유대인들은 신의 율법에 따라 재판받는 것이 허용되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갖고 싶다는 유대인의 요망도 인정해주었다. 이것도 영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휴일은 신에게 바치는 축제일로서, 평소에 하던 일을 쉬고 종교 의식에 참석하거나 신에게 바쳐진 경기대회와 연극 따위를 구경하는 날이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유대인의 휴일이 그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대인으로서는 모세의 십계 제4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신의 징벌이 내린다. 토요일에도 일하는 지배자 로마인은 토요일이 올 때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관습을 인정해주었다. 유대인 수가 100만 명 가운데 40만 명이라는 기정 사실이 동방의 유대인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대책을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유대계 주민의 비율이 100만 명 가운데 2만 명에 불과한 서방에서는 그 비율이 무시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되기 전에 예방책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 이주를 제한하거나 금지한 것은 아니다. 이주하는 것은 자유지만, 서방에서는 동방과 달리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도록 했다. 토요일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모세의 십계에도 나와 있기 때문에 인정했다. 하지만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유대법에 따라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이주한다면, 유대교도라도 로마법에 철저히 따르도록 했다. 100만 명 가운데 2만 명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방과 서방을 불문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모든 도시의 유대인 사회에 강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종교의 자유도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고, 유대교 특유의 관습도 모두 인정하지만, 로마에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이것이 로마의 방침이라는 것을 로마 세계에 사는 유대인은 잊어서는 안되었다. 서기 19년, 유대에서는 퀴리누스 총독의 유연한 유대인 대책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티베리우스는 사회 불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일시적으로나마 로마에 사는 유대인을 모조리 이탈리아에서 추방했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로마의 이교도 정책은 티베리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티베리우스는 특히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동방에서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실행해온 노선을 계승했다. 그것은 역사를 비롯한 각종 요인으로 말미암아 자칫하면 격렬해지는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대립에 대해 로마는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두 민족의 중재자 역할을 맡는다는 전략이다. 어쨌든 제국의 동방은 그리스인과 유대인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로마인과 동화하는 그리스인과 달리 동화하지 않는 유대인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다국적 기업의 '현지법인'이다. '현지법인'을 경영하는 일은 현지인 '사장'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책이다. 그것은 티베리우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적임자가 없었다. 적임자 후보였던 헤롯 왕의 손자 헤롯 아그리파는 유능하긴 하지만 책임감이 모자란다는게 티베리우스의 평가였다. 따라서 시리아 총독의 지휘를 받는 '장관'을 통해 유대에 대한 직할 통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가 죽을 때까지 로마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위와 같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가 로마 제정을 그렇게까지 칭찬한 것(티베리우스를 다룬 222쪽 참조)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로 이어진 한 세기 동안의 로마 통치가 제국 안에 사는 유대인의 처지에서도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칼리굴라도 이 정책을 물려받았다. 아니,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칼리굴라라면 당연히 종래의 정책을 계승해줄 거라고 필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칼리굴라와 유대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다소는 인종차별의 감정이 숨어 있다. 이 감정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사이일 것, 둘째, 그러면서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사이일 것. 오리엔트에 사는 유대인과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던 민족은 로마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었다. 민족으로서는 대단히 우수한 유대인과 그리스인은 우수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이해가 대립되었다. 경제적 능력은 물론 학문의 세계에서도 그들은 경쟁관계에 있었다. 경쟁관계가 아니었던 유일한 분야는 해운업이 아니었을까. 배를 부리는 그리스인의 재능은 다른 민족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시작된 300년의 헬레니즘 시대는 이 두민족의 처지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놓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형태가 오히려 두 민족간의 균형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그리스인의 마지막 보루가 로마의 손에 들어간 기원전 30년부터 두 민족은 이제 유일한 지배자가 된 로마인의 밑에서 동등한 피지배자의 처지로 '동거'하는 꼴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늘 이해가 대립해온 두 민족 사이에 오랫동안 쌓인 대립 감정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패권자인 로마 밑에서 이 두 민족의 선택은 양극단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달랐다. 로마인에 동화하는 길을 택한 그리스인과 동화를 거부한 유대인. 그래도 패자까지 자신들과 동화시키는 보기 드문 성향을 갖고 있었던 로마인은 이질분자인 유대인의 특수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로마 지배체제에 편입시켰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로 이어진 한 세기가 유대인에게는 과거의 그리스인 지배 시대와 비교하면 훨씬 살기 좋은 시대가 아니었을까. 유대인들이 칼리굴라의 등장을 그렇게 환영한 것도 로마 제정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로마 황제가 '무관의 제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들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왕들을 넘어서려면 '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유대인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리자 유대인들은 제물까지 바치며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칼리굴라를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된다. 반대로 그리스인은 다신교 민족이니까, 신이 하나쯤 늘어난다 해도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신이라고 공언하기 시작한 칼리굴라에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대립 감정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대립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발한 것은, 제국 동방에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리스인 사회와 유대인 사회의 세력이 백중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가 즉위한 지 1년 뒤인 서기 38년에 불을 뿜은 알렉산드리아 폭동은, 그 과정을 추적해보면 그리스인들이 칼리굴라의 이름을 빌려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폭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그리스인 쪽이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유대인 소유의 배는 모조리 불태워졌다. 유대인 거주지역의 집들도 불타고 약탈당했다. 유대인이 집단 거주지역 밖으로 나오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살해되었다. 그리스계 주민은유대교 예배당인 시나고그 안에까지 칼리굴라의 상을 가지고 들어가,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는 신에게 벌을 받는다고 두려워하는 유대인을 비웃었다.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을 수습하는 일은 황제 대리로 이집트에 온 장관의 임무다. 이 시기의 장관은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플라쿠스였는데,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던 그가 종래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나섰다. 중재자가 아니라 그리스인 편에 선 것이다. 즉위한 지 1년밖에 안된 칼리굴라는 아직 젊으니까 오랫동안 황제 자리를 지킬게 분명하고, '신'을 자처하는 칼리굴라의 언동이 널리 알려진 이상, 그것을 기치로 내세운 그리스인의 폭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관 자신이 앞장섰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폭동은 이 도시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확대되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인정해주는 규정은 폐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제까지 5개 지구 가운데 2개 지구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구역에 살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1개 지구에만 몰아넣기로 결정했다. 유대인을 쫓아낸 지구에서는 400채나 되는 저택이 불타고, 시나고그도 불타고, 36명의 제사장들은 경기장으로 끌려가 그리스계 주민의 조롱을 받으며 채찍질을 당했다.
유대인이 경영하는 공장들도 폐쇄되고, 무역도 정지되었다. 일용품가게조차 그리스인의 습격을 두려워하며 문을 닫아걸었다. 동방에서 제일이라는 알렉산드리아 경제는 거의 절반이 마비상태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 사회로서는 로마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의 직소는 로마법으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는 그 권리를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유대인들도 23년 동안이나 변함이 없었던 티베리우스의 유대 정책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신을 자처하고 있기는 하지만, 칼리굴라도 제국 통치의 최고책임자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중재자 역할을 상기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로마로 떠나는 사절단의 단장은 '유대의 플라톤'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학식이 풍부하고 유대인 사회에서 인망이 높았던 필로로 결정되었다. 이제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이 인물이 가장 적임자로 여겨진 것은 진지한 유대교도이면서도 그리스-로마 문명의 우수한 요소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고, 로마 제정 치하에서 유대 민족이 존속할 가능성을 믿고 있는 도시형의 온건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유복했기 때문에, 사절단 전원의 파견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필로가 갖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점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정 환경이 로마측의 호감을 얻을 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친동생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유복한 금융업자였는데, 이름으로도 알수 있듯이 로마 시민이 되어 칼리굴라의 할머니인 안토니아의 재산을 맡아서 운용해주고 있었다. 안토니아의 유산은 대부분 칼리굴라의 상속했기 때문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오리엔트에 있는 황제 사유재산을 운용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또 다른 친척도 로마시민이 되어 마르쿠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로 이름을 바꾸고, 경제계의 중진이 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유대 왕인 아그리파 1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고, 이 결혼으로 칼리굴라의 친구인 유대 왕자 헤롯 아그리파와는 인척관계가 되었다. 또한 필로의 아들 가운데 하나도 로마 시민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군인이 되어, 아버지가 사절단장으로 로마에 간 해에는 로마 군단 대대장이 되어 있었다. 이 유대계 로마인은 그후 눈부시게 출세하여 클라디우스 황제 시대에는 유대 장관을 지냈고, 네로 황제 시대에는 이집트 장관이 되었으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근위대장으로 승진했다. 로마인에 동화한 유대인도 소수이긴 했지만 존재했다.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유대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서기 38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만나줄 줄 알았던 칼리굴라한테서는 좀처럼 알현을 허락하는 통지가 오지 않는다. 당시 로마에 있던 헤롯 아그리파를 통해 부탁해보았지만, 황제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그리스 사절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겨울 항해는 피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황제에게 호소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리스인들은 출발을 늦추었다. 가을에 출항하지 못하면 이듬해 봄에야 출항하게 된다. 그리스 사절단은 이듬해 봄에나 도착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 사회에서도 로마에 파견할 사절단 단장으로 학자를 선택했다. 아피온이라는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신랄한 인물평으로도 유명했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말을 빌리면 '말만 번지르르한 학자'였다. 필로는 아피온의 언변에는 두려움을 품지 않았지만, 로마에서 오래 기다리는 동안, 중재자 역할을 맡아주어야 할 칼리굴라에게 불안을 품게 되었다.
드디어 그리스 사절단도 도착하여, 칼리굴라 황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유대측과 그리스측이 함께 초대된 접견장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황제의 사저였다. 이 저택은 '마이케나스의 정원'이라는 통칭을 갖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왼팔'이었던 마이케나스는 전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남겼기 때문에, 로마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전망좋은 땅은 황제의 사유지가 되어 있었다. 칼리굴라는 로마 상류층 시민들을 초대하여 거기서 연극을 상연할 계획이었다. 그 준비 상황을 점검하러 '마이케나스의 정원'에 간 김에 그리스와 유대 사절단을 부른 것이다. 따라서 황제 접견의 자초지종은 필로의 기록을 번역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이때 칼리굴라는 27세도 채 안된 나이였다.
"황제 앞으로 안내된 우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경애하는 황제 폐하'하고 불렀다. 그러자 그는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신을 미워한다는 게 바로 너희들이냐? 다른민족은 모두 나를 신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너희들만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누군가를 믿고 있다는 이유로 나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로군."
이렇게 말한 뒤, 칼리굴라는 하늘을 쳐다보고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신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그것은 우리 유대교도에게는 듣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신성모독적인 언사였다. 우리에 대한 이런 태도와는 반대로, 그리스 사절단에 대해서는 우리한테 보란 듯이 친절하게 굴었다. 그리스인들이 우쭐해서, 과장된 몸짓으로 구역질이 날 만큼 알랑거리는 말을 늘어놓았다. 사절단원인 이시드로스는 이런 말까지 했다.
"주인님, 여기 와 있는 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어떠했는지를 주인님께 아신다면, 여기 있는 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강해질 게 분명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주인님을 덮친 병이 하루라도 빨리 낫기를 기원하며 제물을 바쳤지만, 유대계 주민만은 그런 건 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유대측은 일제히 큰 소리로 반박했다. '훌륭하신 가이우스(칼리굴라의 본명)여, 이시드로스의 비난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것도 놈들처럼 몇 마리가 아니라 100마리나 되는 가축을 제물로 바치고 기도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방법도 격식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대개는 제단 앞에서 제물을 죽여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서 요리해 먹지만, 우리는 가축을 죽인 뒤 완전히 구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정식 의식을 치렀습니다. 게다가 한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 2년 동안 세 번이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첫 번째는 폐하께서 제국을 물려받으셨을 때, 두 번째는 폐하께서 병으로 쓰러져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폐하와 함께 병에 걸린 것처럼 우울해 있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폐하께서 게르마니아로 출정하셨을 때 폐하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물을 바쳤습니다.'
우리의 열띤 반론에 칼리굴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물을 바친 건 사실이라고 하자. 하지만 제물은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너희가 믿는 종교에서는 신이 하나라고 하다. 너희는 그 유일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또 다른 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원했더라? 이렇게 말하면서도 칼리굴라는 정원 곳곳에 마련된 가설 파빌리온(관람석)을 점검하러 다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용과 여자용 파빌리온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아래층과 위층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미흡한 곳을 지적하며 고치라고 명령했다. 그가 고치라고 명령한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위층으로 올라가거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리스 사절들은 거리낌 없이 우리에게 비난과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이따금 칼리굴라가 던지는 질문에 그들이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제와 그리스인들 사이에도 대화는 성립되지 않았다. 칼리굴라는 느닷없이 우리 쪽으로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왜 너희는 돼지고기를 안 먹느냐?" 이 질문은 또다시 그리스인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민족마다 제각기 다른 법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법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금지 조항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산양은 수가 많아서 값싸게 구할 수 있는데도, 그들은 산양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자 칼리굴라는 큰 소리로 웃은 뒤에 말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 황제와의 면담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칼리굴라는 그래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유대인 사회가 갖고 있고 현재 행사하고 있는 정치적 권한은 무엇인가?' 우리가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는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우리의 설명이 가장 중요한 대목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발도 정원 한복판에 있는 널찍한 파빌리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칼리굴라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기서 사방에 늘어서 있는 창문을 유리와 비슷한 흰색의 얇은 귀석으로 덮으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하면 햇빛은 들어오지만, 바람이나 지나치게 강한 햇살로부터 관객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명령한 뒤에 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우리는 도중에 끊긴 설명을 다시 시작했지만, 칼리굴라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음 파빌리온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다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파빌리온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를 다른 것으로 바꾸라는 명령이었다. 그 명령을 끝낸 그는 비로소 우리한테도 정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너희 유대인은 그리스인이 말하는 것만큼 악질적인 민족은 아닌 것 같구나. 하지만 불행하고 어리석은 민족은 것은 확실해. 내가 신의 본질을 상속한 것을 믿지 않는다니 말이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가버렸다. 우리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칼리굴라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 유대인이 묘사한 칼리굴라는 로마인 역사가들이 묘사한 칼리굴라보다도, 또한 후세 작가들이 묘사한 칼리굴라보다도 훨씬 실상에 가까운 묘사인 듯싶다. 2천 년이나 지난 뒤 알베르 카뮈가 희곡 "칼리굴라"에서 묘사한 칼리굴라, 또는 1980년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잇달아 제작된 "칼리굴라"라는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의 괴물로 묘사된 칼리굴라는 그의 시대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뒤에 항간에 떠도는 풍문을 주워 모아서 쓴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서 소재를 얻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괴물은 아니었다.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불행, 아니 제국의 불행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젊은이가 정치를 할 수밖에없는 지위에 앉아버린 데 있다. 사물의 옳고 그름이나 선악따위를 판단하는 안목은 그에게도 있었다. 애마인 인키타투스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할까 하고 농담을 할 만큼 원로원의 통치 능력이 쇠퇴한 것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농담이 후세에 전해지면, 말을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는 따위의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왜곡되어버린다.
그렇긴 하지만 비판과 실천은 다르다. 뉴스가 없으면 정치가 잘 되어가고 있는 증거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정치의 실천은 수수하고, 그러면서도 일관성이 요구되는 책무다. 임기응변은 좋지만, 단순한 변덕은 정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제 무덤을 파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필로가 단장을 맡은 유대인 사절단의 성과는 실패인 동시에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불리한 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는점에서는 실패였지만, 칼리굴라가 새로 임명한 장관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이 더 이상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로마 제국의 동방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나란히 경제의 핵이다. 그런 알렉산드리아가 '시티'로서 기능을 발휘하려면 유대계 주민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했다. 필로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직후, 칼리굴라는 속주로 떠났다. 라인 강 연안과 도버 해협에 가까운 갈리아에서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후 로마로 돌아와, 약식이긴 했지만 개선식도 거행했다. 하지만 그동안 칼리굴라의 눈을 다시 유대인한테로 돌린 사건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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