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4호 - 2024.01.03. 수요일(음력 : 11. 22.)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너무 열렬한 사람은 언제나 남들에게는 성가신 존재. ― 올번 구디어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내일러
요즘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을 즐긴다. 걷기 여행, 자전거 여행, 자동차 여행, 기차 여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들어 기차 여행을 즐기는 젊은 사람이 부쩍 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내일러’라 한다. ‘내일러’는 ‘내일로’를 이용하여 기차 여행을 하는 젊은 사람을 가리킨다.
‘내일로’는 한국철도공사에서 2007년부터 만 28세 이하의 젊은 사람에게 판매하기 시작한 패스형 기차 여행 상품이다. 고속열차(KTX)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열차를 일정 기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인데, 5일권과 7일권이 각각 56,500원과 62,700원으로 아주 저렴하다. 이로 인해 젊은 사람도 경제적 부담 없이 맘껏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내일로’의 이름 짓기 방식이 특이하다. ‘내일로’는 ‘기차’를 뜻하는 영어 ‘레일(rail)’에, ‘길’의 뜻을 더하는 한자어계 접미사 ‘-로(路)’를 결합하여 만든 말인데, 소리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레일’을 우리말의 ‘내일(다가올 앞날)’과 바꿔치기하였다. 독창적인 이름 짓기 방식이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내일로’는 ‘앞으로’를 뜻하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내일러’ 또한 아주 특이하게 만들어진 말이다. 이 말은 ‘내일로’에, ‘어떤 일에 관계하는 사람’을 뜻하는 영어의 접미사 ‘-er’를 결합하여 만든 말이다. 그러나 ‘내일로’에 영어의 접미사 ‘-er’를 결합하여 새말을 만드는 것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그 도를 크게 넘은 일로 봐야 한다. 우리말에서 ‘-er’와 같은 영어의 접미사를 가져다가 새말을 만드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럽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귀차니스트’의 ‘-ist’도 마찬가지이다. 정말이지 우리의 영어 사랑이 넘쳐도 너무 넘친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있다가, 이따가
요즘 약속은 대부분 문자로 이뤄진다. “그래, 그럼 이따가 거기서 만나.”라고 문자메시지를 친구에게 보낼 때 고개를 갸웃거린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있다가’라고 써야 하나, ‘이따가’라고 써야 하나?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있다가’가 맞고, 소리 나는 대로 쓴 ‘이따가’는 틀린 표기일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있다가’와 ‘이따가’는 둘 다 맞는 표기다. 다만 뜻과 쓰임새가 다르므로 잘 구분해서 써야 한다.
‘있다가’는 ‘있다’의 어간 ‘있-’에 ‘먹다가, 자다가, 가다가’ 할 때의 ‘-다가’가 붙어서 된 말이다. ‘-다가’는 어떤 동작이나 상태가 지속되지 못하고 바뀌게 되는 상황에 쓰이는 연결어미다. 따라서 동사나 형용사 어간에 ‘-다가’가 붙으면 앞의 동작이나 상황이 달라짐을 나타내는 다른 서술어가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먹다가’가 쓰이면 ‘먹다가 잠이 들었다’든가 ‘먹다가 말았다’처럼 먹던 상황이 지속되지 못하고 장면이 달라지는 상황을 나타내는 서술어가 뒤따르게 된다. 따라서 ‘있다가’는 ‘어떤 장소에 머무르거나 존재하다가’ 또는 ‘어떤 상태를 계속 유지하다가’ 등의 뜻을 나타내며 뒤에 장면의 전환을 나타내는 다른 서술어와 연결이 된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든가 ‘음식을 삼키지 않고 입에 물고 있다가 뱉었다.’같이 쓰인다.
‘이따가’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를 뜻하는 부사이다. 어원적으로는 ‘있다가’로부터 나왔지만, 본뜻인 ‘존재하다’로부터 뜻이 상당히 멀어졌다고 판단하여 소리 나는 대로 적도록 하고 있다. ‘이따가 만나자’거나 ‘잠시 쉬었다가 이따가 다시 할게.’에서처럼 ‘잠시 후에’의 뜻을 나타낼 때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1. 귀천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만족 - 한용운
세상에 만족이 있느냐, 인생의 만족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만족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거리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속력은 사람의 걸음과 비례가 된다.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
만족은 우자(禹者)나 성자(聖者)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면 약자의 기대뿐이다.
만족은 언제든지 인생의 수적평행(竪的平行)이다.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만족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아지랑이 같은 꿈과 금(金)실 같은 환상이
님 계신 꽃동산에 들릴 때에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
산엣 색시 들녘 사내 - 정지용
산엣 새는 산으로,
들녁 새는 들로.
산엣 색시 잡으러
산에 가세.
작은 재를 넘어 서서,
큰 봉엘 올라 서서,
호-이
호-이
산엣 색시 날래기가
표범 같다.
치달려 달어나는
산엣 색시,
활을 쏘아 잡았읍나?
아아니다,
들녘 사내 잡은 손은
차마 못 놓더라.
산엣 색시,
들녘 쌀을 먹였더니
산엣 말을 잊었음네.
들녘 마당에
밤이 들어,
활 활 타오르는 화투불 너머로
너머다 보며-
들녘 사내 선웃음 소리
산엣 색시
얼골 와락 붉었더라.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죽마고우(竹馬故友)
竹:대나무 죽. 馬:말 마. 故:예/연고 고. 友:벗 우.
[동의어] 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 기죽지교(騎竹之交), 죽마지호(竹馬之好).
[출전]《世說新語》〈品藻篇〉,《晉書》〈殷浩專〉
어릴 때 같이 죽마(대말)를 타고 놀던 벗이란 뜻. 곧
① 어렸을 때의 벗. 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의 오랜 친구.
진(晉: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사기 3
3권
7. 불신
"그러니까 왕릉도 진평도 상국으로서는 부적당하다는 말씀입니까?"
여후가 묻자 유방은 가타부타없이 하던 말만 계속했다.
"주발역시 중후하긴 하지만 문제가 없소. 그런데 유씨를 안태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주발일 것이오. 태위에는 그를 앉혀야 될 거요."
여후는 끈질겼다.
"그런데 그들 말고는 상국의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이 또 없겠습니까?"
그제서야 유방은 화를 냈다.
"그다음에는 당신도 알 바 아니잖소!" 여후 역시 찔끔해서 물러가버렸다.
"마차를 놓아라! 갑자기 딸아이가 보고싶다. 이대로 누워 있자니 상처의 통증이 더욱 심하구나!"
유방은 벌떡 병석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유방이 말하는 딸아이란 노원공주를 말함이었다. 노원은 장오에게 시집가 있었다. 유방은 전날 장이를 조나라 왕으로 봉했으나 이태 후에 죽었으므로 아들 장오에게 왕위를 잇게 했고 또한 노원까지 장오에게 주었던 것이다. 유방은 조나라 왕이며 사위인 장오의 궁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장오는 황제이며 장인인 유방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장오는 왕이면서도 아침저녁으로 몸소 소매를 걷어붙이고 식사를 거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유방은 반찬 투정에다 밥상 위에 두다리를 올려놓기도 하고 조나라 신하들 보는 앞에서 사정없이 사위를 꾸짓고 모욕주기 일쑤였다. 아무리 사위라지만 유방의 행동은 지나치기 그지없는 행패였다. 조나라 재상은 관고였다. 조오등과 함께 선왕 장이의 빈객이었으며 평소에도 기개가 있던 육순의 노인이었다. 유방의 태도를 본 그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도 너무한다! 아무리 제 사위라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이 아닌가. 신하들 앞에서 그런 모욕을 주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우리 왕께서 너무 비굴하시지. 황제를 대접할 신하들이 수두룩한데 아무리 장인에 대한 사위의 대접이라지만 저토록 저자세일 것은 또 무언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왕의 신하로서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 저 오망방자한 유방을 죽이자!"
"좋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되어 신하들은 조왕 장오한테 몰려갔다. 조오가 대표로 말했다.
"대왕, 아직은 천하의 호걸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가지고 황제가 되겠다며 봉기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무엇이 부족해 저토록 오만불손한 폐하를 그토록 공손하게 섬기는 것입니까!"
조오의 말을 듣고난 조왕 장오는 깜짝 놀랐다. "그대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쉽게 물러설 조오가 아니었다.
"분하고 원통해서 신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데 왕을 대신하여 황제 유방을 죽이겠으니 굽어 살펴주소서!"
장오는 더욱 대경실색했다. 곧장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보이면서 소리질렀다.
"공들은 무슨 그런 그릇된 말씀을 하시는 거요!"
"어디 저희들 말이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잘 들으시오! 선왕(장이)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적에는 폐하의 힘을 입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소이다. 그 덕은 후손에까지 미쳐 오늘날까지 이토록 영광스럽지 않았겠소. 사실 말해서 이 모든 것이 폐하의 은공을 입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소이다. 나 또한 사위로서 장인어른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것이어늘 어찌 그까짓걸 가지고 그토록 고깝게 생각한단 말이도. 그러하니 원컨대 공들께서는 디시는 이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지금 올린 귀공들의 건의는 전연 없었던 일로 덮어두겠소!" 어전을 물러나온 조나라 대신들은 관고의 집으로 다시 모였다. 관고가 말했다.
"우리가 왕께 아뢴 것 자체가 잘못이오. 덕이 있는 우리 왕께서 남의 은덕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점이 우리의 불찰이란 얘기요."
조오가 반박했다.
"그러나 우리의 임금이 모욕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 바도 바로 의인 것이오."
장연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결론은 하나요! 유방을 죽입시다. 일이 성공되면 그 공을 왕께 돌리고 실패하면 그 죄를 우리가 뒤집어쓰면 되는 거요. 됐소?"
"이의없소!"
이듬해 유방이 동원땅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조나라로 들린다는 연락이 왔다. 그동안 조나라 대신들은 유방을 죽이기 위한 완벽한 준비를 이미 끝내놓고 있었다. 유방은 박인(하북성)에서 묵기로 돼 있었다. 숙소의 이중벽 속에는 일당백의 칼잡이들을 숨겨놓고 유방의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편 유방은 박인이 가까워지면서부터 어쩐 일인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랜 여행의 피로 때문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수행자들을 돌아보며 무심코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박인이란 곳입니다."
어사 하나가 막연히 대답했다.
"무어 박인? 박인이라면 사람에게서 핍박받는다는 뜻이 아닌가!"
유방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지르자 어사도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불길하다. 박인에서는 묵지 않겠다. 그냥 지나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유방을 기다리던 관고 일당 앞으로 가신 하나가 달려들어왔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조장이 변절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조장이 누구냐?"
실은 재상 관고로서도 가신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나라의 양곡을 이유없이 축내었다 해서 전날 재상께옵서 그를 옥에 가두고 매질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양심을 품고 폐하께 기왕의 음모를 일러바친 듯합니다."
"무엇이라고! 모의가 들통났다고!"
대신들 모두가 똑같이 소리질렀다.
"아마 폐하의 호위군사들이 머잖아 이리로 들이 닥칠 것 같습니다."
관고는 그래도 침착했다.
"나 일찍이 남에게 억울한 해를 한번도 가한 적이 없거늘 그런데도 의로운 거사를 모의한 나를 두고 방해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첫째 내 부덕의 소치이며 또한 하늘이 우리의 거사에 동의하지 않는 바라고 짐작된다!"
대신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모두들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장연이 불쑥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길은 단 하나요"
왕께서 해를 당하시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목숨을 끊어버림으로써 이음모의 근거를 없애버립시다!"
"좋소! 우리 모두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해 버립시다!"
조오의 동의에 관고가 얼른 말렸다.
"아니되오! 대체 누가 애초에 이런 음모를 꾸몄소. 우리들 자신이 아니오. 왕께서는 지금까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실 게 아니겠소. 우리 모두가 죽어버린다면 누가 왕의 무고함을 증명한단 말이오!"
조오가 반발했다.
"그건 하나의 허망한 기대에 지나지 않소. 우리가 깨끗이 사라짐으로써 왕께서는 혐의가 풀릴 것이오!"
말을 마치고 노오가 단검으로 제 목을 찌르자 장연이 그 뒤를 따랐고 음모에 연루되었던 대신들 모두가 앞을 다투어 죽고 말았다. 재상 관고만 죽어 넘어지는 여러 대신들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한마디 내뱉고 있을 때 황제 유방의 호위군사들이 관고의 집으로 몰려들어 왔다. 관고는 조왕 장오와 함께 죄수 수송 수레에 실려 장안으로 끌려갔다. 특히 관고에 대한 옥관의 문초는 지독했다. 곤장을 쳤다가 쇠꼬챙이로 살을 찔러댔으며 뼈를 부수고 거꾸로 매달아 물동이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관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희들끼리만 한 짓입니다. 정말입니다. 저의 왕께서는 까마득히 모르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조왕 장오의 대답도 한결같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가 폐하를 모해하려 했다고 그러시오! 우리는 전연 그런 모의를 한 적이 없단 말이오!"
"그렇다면 박인의 이중벽 속에 숨겨두었던 칼잡이들은 누구요! 자객들을 폐하의 숙소에 숨긴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이오!"
장오로서는 정작 알 길이 없었다.
"속절없구려! 그러나 우리는 폐하를 해칠 이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음모를 꾸민 적이 결코없소!"
유방의 부인 여후가 그 소식을 들었다. 사위가 고문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후에게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곧장 유방한테로 달려갔다.
"폐하. 어째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하십니까! 도대체 천하에 장인에게 반기를 드는 사위가 어디에 있답디까!"
"그 모르는 소리 마오! 그대는 자기 딸 귀한 줄은 알지만 만일 장오 저자가 천하를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해 보시오. 그대 딸을 거들떠나 볼 것 같소! 듣기 싫으니 어서 나가시오!"
유방은 여후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관고에 대한 문초 결과서장이 올라왔다. 유방은 고개를 갸웃했다. '스무장의 보고서 내용이 한결같다? 그토록 얻어맞고서도 혐의를 부인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더구나 육순의 노인이 천하장사도 아니면서 그토록 끈질기게 버티는 걸 보니 필시 이번 모의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데가 있겠다?"
어전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유방은 대신들을 굽어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혹시 누가 관고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소? 물론 사적인 일로 물어보는 것이오."
뜻밖에도 중대부 설공이 앞으로 나섰다.
"소신이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신과 어려서부터 동향이기 때문에 너무나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유방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를 잘 안다고?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오?"
유방의 물음에 설공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관고는 조나라를 몹시 사랑하며 본래부터 의를 매우 중하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또한 남에게 모욕당하는 일을 몹시 부끄럽게 여기는 성격이며 무엇보다 신의를 무겁게 간직해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던질 만한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대가 그토록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는 있으나 너무나 막연하기만 하오. 그대가 관고와 친하다고 하니까 하는 얘긴데 친구로서 옥중의 관고를 한 번 방문해 주겠소?"
"기꺼이 다녀오겠습니다."
설공은 그날 저녁 절(군령을 받드는 표지)은 받았지만 짐짓 뒤로 감춘 채 관고를 만나러 갔다. 관고는 온몸이 고문에 일그러져서 옥사 바닥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아, 여보게. 날세. 설공이네. 자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는가!"
"그대가 설공인가? 반가우이.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만나러 왔는가?"
설공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왔노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상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던 끝에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세상 소문으로는 자네가 폐하를 죽이기 위해 조왕 장오와 함께 사전 모의한 것으로 돼 있네. 우정으로 묻겠네만 진짜 내용은 어떤 것인가?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 주게나."
"옥관한테는 수십 차례 진실을 밝혔지만 한 번도 믿어주지 않았네. 내일 고문을 다시 계속될 테지만 그 대답은 똑같다네. 우리는 조왕과 더불어 음모를 꾸민 적은 없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옥관은 왜 자네 말을 믿지 않지?"
"믿지 않는 걸 난들 어쩌겠나. 내가 이대로 죽더라도 자네만은 내 말을 진실로 믿어주길 바라네. 그런데 사실 말이지만 인간의 정으로 자기 부모처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 지금 삼족이 멸하는 선고를 받고 있는 몸으로서 아무리 충성을 다하는 마음이 있다한들 육친과는 바꿀 수야 없겠지. 그래서 역모는 왕이 꾸몄고 나는 전연 모른다는 한 마디면 나와 가족은 풀려나 버리네. 그토록 간단하고 쉽게 사는 길을 난들 어찌 선택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네. 다시 말하거니와 음모는 우리들끼리 꾸몄고 조왕께선 도무지 모르시는 일이네."
그런 다음 관고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역모가 들통나게 된 과정과 조왕이 역모사건을 모를 수밖에 없게 된 배경 따위를 걸공에게 샅샅이 얘기해 주었다.
"아하,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구나!"
친구 관고의 말에 감동한 설공은 궁으로 서둘러 들어가 황제 유방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보고했다.
"무어라고? 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예에, 폐하. 관고는 그런 인물입니다."
"기특하다! 짐의 판단도 그러하오. 관고는 사람됨이 정작 신의를 무겁게 지키는 인품이구려. 그런 인물은 죽여서는 안 되오. 그를 풀어주겠소. 더불어 조왕 장오도 혐의를 벗었구려."
"감사합니다!"
설공은 대신 절했다. 퇴청해서는 옥으로 쏜살같이 수레를 몰았다.
"관고, 기뻐하게! 드디어 자네는 용서받았네!"
"용서라니? 무엇 때문에 내가 용서를 받는가?"
"자네의 인품이 스스로를 살린 걸세."
"내가 바라는 건 조왕의 무혐의란 말일세."
"조왕은 이미 석방되셨네."
"정말인가? 우리 왕이 확실히 석방되셨단 말인가?"
"확실히. 말했듯이 그것 역시 자네의 소행이 훌륭하여 그대와 그대의 왕까지 풀린 걸세."
설공은 관고가 전연 기뻐하는 기색이 없다는 사실을 괴이쩍게 생각했다.
"자네 왜 그러나? 기뻐하는 기색이 도무지 없으니?"
관고는 씁쓰레한 웃음을 입가로 떠올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내 몸이 성한 데라곤 한군데도 없을 정도로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아직도 죽지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아닐쎄. 그것은 오로지 우리 왕의 무혐의를 입증하려는 일념 때문이네."
"무슨 뜻인가?"
"내 숨은 이미 끊어졌네. 그래도 살아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생명이 아니라 나의 혼일세. 알겠나. 이제사 왕의 혐의가 풀렸으니 내 책임은 끝났네."
"책임이 끝났다는 뜻은?"
"죽어도 한이 없다는 뜻일세. 신하들 모두가 왕의 무혐의를 증명하려고 줄줄이 목에 칼을 대었지만 끝까지 내가 살아 있었던 건 왕께서 혐의를 완전히 벗는 걸 보고나서 벗들에게 돌아가 그런 사실을 전하려고 이제까지 참았던 것일세."
"이제는 모든 진실이 밝혀졌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폐하에 대한 시해자란 오명을 남겼으니 우리 왕을 섬기는 면목도 없어졌네. 폐하께서 나를 죽이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내 마음은 부끄러운 법일세."
그런 후 관고는 제 머리를 옥사의 벽에 부딪쳐 죽고 말았다. 그런후 관고의 명성은 천하에 떨쳐졌다.
연왕 노관은 머리를 굴린 뒤 신하 장승을 불렀다.
"진희가 대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소.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한단으로 진희를 치러 나가셨소. 우리 역시 대땅의 동북쪽을 치고 있지만 진희의 군세가 자못 강하기에 승패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소. 그런데 문제는 진희가 흉노와 친하다는 사실이오. 만일 진희가 흉노에게 구원을 청해 군사라도 빌려오게 되면 그 군대는 더욱 막강하게 된단 말이오." 장승 역시 잔머리를 굴린 뒤 책략을 아뢰었다.
"그렇다면 소신이 흉노로 가서 진희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거요! 그런데 흉노가 진희를 도우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책략을 써야 할지 그게 아직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오."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흉노의 구원병 도착을 늦출 수 있게만 해도 진희에게는 타격이 되겠지요. 그동안 한나라와 연나라가 힘을 합해 구원병 없는 진희를 토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흉노의 구원병 도착을 늦추려면 어떤 식으로 일을 꾸며야 되겠소?"
"소신이 흉노로 가서'진희는 이미 격파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흉노도 그걸 확인하느라 시일을 늦추게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책이구려. 어서 흉노로 가시오."
한편 실제로 다급해진 진희는 부하 왕황을 흉노로 보내 흉노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장승이 사신으로 흉노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직 흉노의 왕을 만나기 전이었다. 객사에 머물고 있는데 뜻밖에도 전날의 연왕 장도의 아들 장연이 찾아들었다.
"아니, 당신이 어쩐 일이오?"
"저는 당신이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슨 일'이라는 게 위험천만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뜻이오?"
"전날의 연왕인 제 아버지 장도께서 모반하셨다가 고조에 의해 정벌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 때 태위로 있던 지금의 연왕 노관을 왕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어서 핵심을 말하시오."
"왕은 계속 바뀌었지만 당신이 여전히 연나라에서 중용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장승은 장연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얘기인지 짐작도 못하겠소."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당신께서 오랑캐 사정에 밝다는 그 쓸모 때문에 왕이 바뀌어도 계속 연나라에서 중용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장승은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연나라가 그나마도 오래 존속되는 까닭은 제후들이 수시로 반란해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연나라를 위하여 진희를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글세?"
"진희가 멸망했다고 칩시다. 그 다음에는 연나라라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연나라가 망하면 당신도 끝장입니다. 나라가 없어졌으니 중용은 커녕 한나라 포로가 되었다가 주살되겠지요."
장승이 곰곰 계산해 보자 장연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됐다. 그러자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옳겠소?"
"연왕 노관에게 진언하시오."
"어떻게?"
"진희의 공격 속도를 짐짓 늦추고 흉노와 화친하는 뒷거래를 하시오."
"이건 내가 사신으로 온 목적과는 완전히 상치되는 얘긴데. 그런데 말이오. 그런 진언을 연왕 노관께서 들을 것 같소?"
"설득해야지요."
"어떤 식으로?"
"연왕의 지위를 더욱 오래 보전하려면 이런 사태 역시 오래 끌수록 유리하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자신이 서지 않아 한숨만 쉬고 앉아 있자 장연이 덧붙여 말했다.
"더구나 한나라에서 급변이라도 생겼다고 가정해 보시오. 또한 그럴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고요. 그로 인해 연나라는 더욱 편안해지는 뜻밖의 소득도 얻게 되지요."
장승은 기어코 설득되고 말았다.
"당신 말대로 하는 게 오히려 연나라에 충성하는 길인 것 같소. 차라리 계략을 바꾸어 흉노로 하여금 진희를 도와 연나라를 슬쩍 치게 하겠소"
한편 연왕 노관은 사신 장승은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진희가 흉노와 합세해 연나라를 공격해 오자 장승이 분명히 배반했다고 판단했다. 노관은 서둘러 유방에게 상서했다.
ㅡ장승은 오랑캐와 공모해 연과 한을 배반하였습니다. 그자의 일족을 멸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유방의 칙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장승이 돌아왔다.
"네, 이놈. 배반하더니 뻔뻔하게도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왔느냐!"
노관은 호령부터 했다. 그러자 장승은 일의 자초지종과 자신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대 말은 그럴듯하오. 하지만 폐하께 그대를 이미 논죄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실상 논죄의 근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노관이나 장승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노관 역시 그런 배경 설명을 유방한테 귀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친 걸음에 밀고 나갈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기왕 일이 이렇게 벌어진 이상 저의 가족과 함께 흉노로 탈출해 아예 흉노의 간첩이 되는 것이."
"그 좋겠소. 그렇게 하시오. 한편으로 나는 범제를 진희에게 몰래 보내 우리끼리 싸우는 척하면서 전쟁의 승패는 결정짓지 말자는 약속까지 해두겠소."
그러나 세상 일이란 노관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유방은 동쪽으로 가서 경포부터 쳤고 번쾌를 시켜서 대땅의 진희를 잡아오도록 보낸 것이다. 그 때 진희의 부장 범보가 번쾌에게 투항하면서 이렇게 실토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연왕 노관은 범제를 진희에게 보내어 싸우는 척하면서 승패는 결정짓지 말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번쾌는 곧장 유방에게 그런 사실을 보고했다. '아니다! 노관이 그럴 리가 없다. 일찍이 노관은 나와 같은 마을에서 같은 날에 태어나 정답게 함께 자랐다. 그로 인해 부친끼리도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던가. 더구나 노관은 나의 침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신하일 만큼 신임을 준 인물이 아닌가.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배신한단 말인가!" 유방은 노관의 배반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를 왕으로 삼을 때만 해도 그랬다. 천하를 평정한 후 제후들 중에서 왕위에 오른 자는 일곱 명이었다. 노관 역시 왕으로 삼고 싶었지만 유방은 군신들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노관을 왕으로 삼는다는 불평을 할까보아 감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노관은 연왕 장도를 잡았으며, 유방은 후임 연왕으로 추천할 만한 인물을 찾아보도록 재상, 열후, 장군들에게 조칙을 내렸었다. 신하들은 유방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노관은 폐하께서 천하를 평정하실 때 가장 측근에서 모셨습니다. 연왕으로 추천하기에는 노관의 공로가 가장 큽니다."
유방이 그토록 애틋한 정을 쏟아부은 노관이었다. 그런 노관이 배반을 했을 것이라고는 꿈에서라도 상상하기 싫었다. 그런데 노관하고 내통한 진희는 어떤 자인가. 완구(산동성)사람인데, 한왕 신을 치러 나갔던 유방이 마침 조나라 재상으로 있던 진희를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와 대땅 변경의 군사를 감독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동쪽 변경 군사들 모두가 진희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 조나라 재상은 주창이었다. 마침 진희가 조나라에 들렀다. 부하 하나가 헐레벌떡이며 재상 관저로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승상, 아뢰옵니다. 진희의 행차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빈객들의 수레가 천여 대를 넘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얘기냐?"
"그로 인해 수도 한단의 숙사가 동이 나버렸으니 하는 말입니다. 객관까지 만원이 돼버린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변경을 지키는 일개 군사 감독관의 행차가 그토록 호사스럽다는 사실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주창은 진희가 묵고있는 숙사로 변장한 채 살피러 나갔다.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의 숫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호화스럽기 또한 그지없습니다.' 유방도 덜컥 의심이 생겼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오?"
"외지에서 오로지 홀로 병권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위세가 대단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시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몰래 사람을 보내어 진희의 비위사실을 조사케 하겠소. 축재과정을 탐문해 보면 틀림없이 법에 저촉되는 일이 발견될 거요."
은밀히 자신의 비위사실을 캐고 있다는 소문이 진희의 귀에도 들어갔다. '무어! 아예 나를 잡을 작정을 세웠구나! 그렇다면 나도 대비책을 세워두어야 되겠지!' 진희는 왕황과 만구신에게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내통해 두었다. 유방은 마침 부친 태상황이 별세했으므로 그것을 구실로 진희를 입조토로 했다. 그러자 진희는 역시 병을 핑계대고는 내조하지 않았다.
"이런 발칙한 놈이 있나!"
유방이 화를 내면서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동안 진희는 벌써 한나라에 대한 배반을 확실히 선언했다. 왕황과 만구신을 거느리고 나가 조나라와 대나라 땅을 빼앗고는 스스로 대왕이라 칭했다.
"무엇이라고! 진희가 기어코 반란을 일으켰단 말이지!"
분노한 유방은 친정길에 나섰다. 한단에 이르자 반란에 가담했던 조나라, 대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유방 앞으로 끌려나왔다.
"너희들은 본심에는 없으면서도 진희가 협박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넘어갔던 거지."
진희에 가담했던 자들은 유방의 뜻밖의 심문에 옳지 됐구나 하고 대답했다.
"실상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용서해 주겠다."
유방의 결단에 신하들이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터무니없는 용서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이를 눈치챘다.
"진희가 오래 못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이유는 나라 남쪽인 장수에 의존하지도 않고 수도인 북쪽 한단도 지키지 않았으니까 말이오. 이로 미루어 그가 대단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지."
주창이 곁에 있다가 간했다.
"그렇지만 상산(하북성)군수와 군위만큼은 처단하셔야합니다."
"그건 왜 그렇소?"
"상산의 25개 성읍 중에서 20개 성읍을 진희가 모반하자마자 그들이 그냥 주어버리듯이 빼앗겼습니다."
"그렇지만 애초부터 군수와 군위가 진희의 모반에 가담한 것은 아니잖소."
"그야 그렇지요."
"그렇다면 진희보다 힘이 모자라 성읍을 빼앗긴 게 틀림없소. 용서할테니 그대로 직위를 유지하오!" 일단 말을 막은 유방은 주창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우리에게 협조한 조나라 장사들 중에서 장군으로 삼을 만한 인물들이 혹시 없겠소?"
"있긴 있습니다만 위인이 그토록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일단 데려오시오."
주창은 네 명의 허술한 인물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유방은 약간 깔보는 태도로 물었다.
"너희들 같은 인간들이 감히 장군이 되겠다고?"
놀란 그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멋모르고 폐하 앞으로 끌려나왔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네 명의 조나라 사람들이 벌벌 떨고 서있자 유방은 다시 재촉했다.
"짐의 말은 장군직을 주면 잘해 보겠느냐고 묻는 거다."
한 자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신명을 바칠 뿐입니다."
"좋다. 각각 천호에 봉하고 장군으로 삼겠다."
유방의 전격적이며 터무니없는 인사조치에 좌우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폐하, 폐하를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촉땅과 한중까지 들어갔던 신하도, 초나라 정벌에 천신만고를 겪었던 신하들도 아직 논공행상을 못받은 숫자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아무 공로도 없는 이자들에게 봉읍도 주고 장군까지 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들이 모르면 가만 있기라도 하오! 진희가 모반하자 한단 이북은 모조리 진희의 땅이 되었소. 짐이 천하에 격문을 띄워 병사를 요청했건만 아직까지 달려온 자는 아무도 없었소. 심지어 믿었던 노관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소. 차제에 짐이 지금 무구를 믿고 안 믿고 하겠소. 그래도 달려온 병사들은 일단 진희에게 넘어갔던 한단 성중의 병사들뿐이었지 않았나 말이오. 이런 판국에 지금 짐이 4천 호를 아껴 무엇에 쓰겠소. 네사람을 후하게 봉한 것은 조나라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 아니었겠소!"
그제서야 신하들은 감탄하는 표정들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을 얼마만큼 삭인 유방은 다시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 진희밑에있는 장수들은 어떤 자들이오?"
"와황과 만구신입니다."
"아, 짐도 그자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오. 예전에는 모두 장사꾼들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런 자들을 대하는 방법을 짐은 잘 알지. 그자들의 목에 천금이 상을 걸겠소. 즉시 격문을 붙여라!"유방이 드디어 공격개시를 하자 한군은 곡역(하북성) 부근에서 진희의 장수 후창의 목을 베며 승기를 잡았다. 요성(산동성)에서는 장군 장춘을 격파했다. 주발이 대나라로 쳐들어가 평정하자 진희의 군대는 궤멸상태였다. 아니나다를까 천 금의 상금이 탐이 난 왕황과 만구신의 부하들이 그들의 장군들을 사로잡아 묶어 왔다. 번쾌가 진희를 끝까지 추격해 가서 영구(산동성)에서 베어 죽였다.
즈음에 노관은 유방이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걱정에 몸을 떨고 있었다. 연왕 노관은 유방으로부터 소환장을 받고는 더욱 겁을 내어 숨어 버렸다. '가는 날이 죽는 날이다! 나는 가지 않겠다!' 얼마쯤 끙끙 앓고만 있는데 한나라로부터 사자가 왔다는 기별이 왔다.
"벽양후 심이기와 어사대부 조요 께서 대왕을 만나뵈러 오셨습니다."
노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엇이! 폐하의 사자가 왔다고! 죄송하지만 병이 깊어 만날 수가 없다고 전해라!"
노관은 더욱 두려워져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버렸다. 그는 어둔 골방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는 나와 장사왕(오예)뿐이지 않는가. 그렇기에 나도 지금 위태롭단 말이다. 지난해에는 한신을 멸족시키고 여름에는 팽월을 베어 죽였지. 지금 폐하께서는 병이 들어 모든 정사를 여후에게 맡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사태는 여후의 계략 때문에 일어난 게다. 그 잔인한 여자는 성이 다른 왕과 공신들을 하나씩 하나씩 죽이고 있지. 그러니 내가 왜 그 여자 손에 죽으러 스스로 찾아갈 것인가!"
그런데 심이기와 조요가 화를 내면서 한나라로 돌아가자 노관의 좌우에 있던 신하들까지 나중에 심문 당하지 않으려고 벼슬자리를 팽개친 채 도망쳐버렸다.
한편 한나라로 돌아간 심이기와 조요는 유방에게 연나라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고했다. "그렇지만 그가 아직 배반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않소. 정작 중병이 들어 누워있는지도 모르고."
심이기가 대답했다.
"그렇게 노관의 배반을 믿고싶지 않으시다면 흉노에서 항복해 온 자가 하나 있는데 그자를 폐하께서 직접 심문해 보시지요."
"그런 자가 있다고? 어서 내 앞으로 대령시키라 하오!"
흉노인이 끌려왔다.
"사실대로 말해다오. 네가 진실을 말해다면 큰 상을 주겠다. 노관이 과연 배반을 했더냐?" 흉노인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사실을 말씀드리지요. 장승이 연나라로 부터 도망해 흉노에 와 있는데 실상은 대접 받으며 사신 신분으로 있습니다. 이는 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흉노의 도움을 받기 위한 뒷거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노관의 배반은 확실하구나!"
유방의 충격은 컸다. 탄식하면서 병석에 눕고 말았다. 번쾌는 노관을 응징하러 연나라로 떠났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1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2
모든 계획은 실천을 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한 다음 처리하라. 우리의 지혜는 언제나 부족하며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생각을 하더라도 삶 속에는 우리가 탐지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숨어 있다. 저울의 한쪽 끝에는 희망을 다른 한쪽 끝에는 경계심을 메달아 놓아야 한다.
3
어떤 일을 처리하고 나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의 일을 예측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두려운 생각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라.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했다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4
건물을 세우는 일에 고용된 인부들은 건물이 어떤 의도로 어떻게 설계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건물의 설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소중한 인생의 하루나 한 시간을 그대로 흘려 보내는 것, 그것은 인생 전체의 설계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끔씩 인생의 설계도를 그려보는 것이 좋다. 그것은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러나 인생의 설계도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나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근본적인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동시에 삶에 대한 분명한 의지다 필요하다.
5
인생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가장 큰 슬픔은 상실이나 불행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국보 해제당한 가짜 상원사동종
1906년 11월에 서울 남산의 북쪽 기슭, 지금의 대한적십자사 건물 위쪽에 일제침략의 일익으로 종교적인 거점을 확보한 일본의 불교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동본원사(본시는 일본 교토에 있었다)의 경성 별원. 1년 전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미 국권을 빼앗겼던 고종황제가 황태자(뒤의 순종)와 함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의 강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내놓은 하사금으로 지은 법당이었다고 한다. 이 침략의 신축 사원에서는 옛날부터 일본인들이 항상 탐냈던 신비로운 음색과 아름다운 형태의 한국종 명품을 어디서라도 찾아내 가져올 흉계를 꾸몄다. 그러자 그 전부터 이미 한국의 유적지와 사찰지역을 유린하며 일확천금의 보화와 유물 약탈을 일삼고 있던 일본인 무뢰한 하나가 탐낼 만한 정보를 갖고 와서 흥정을 했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쪽에 있는 작은 절터에, 순금을 3할 이상이나 함유하고 있는 종소리는 실로 신묘한 아주 오래된 대종 하나가 있다"
는 것이었다. 일본인끼리의 거리낌없는 동종 반출음모가 즉각 착수되었다. 졍보를 제공하고 즉석에서 거액의 판로를 확보한 야마구치라는 무뢰한이 용문산의 상원사로 달려갔다. 이 상원사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끝까지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던 의병들을 잔학하게 추격했던 일본군대에 의해 불질러진 후로 종각 하나만을 남기고 있었다. 야마구치는 초토화된 깊은 산 속의 절터에 움막 같은 임시 법당을 꾸미고 있던 정화삼이란 중과 불법적인 범종 매매계약을 성립시켰다.
당시의 남산 본원사측 기록을 보면 그때 야마구치를 통해 종값으로 지불된 돈은 800원이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런 큰돈이 상원사 중에게 수교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때 상원사를 지키고 있던 중이 적잖은 돈을 받고 범종을 판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주민들의 증언을 빌리면 그후 그 중은 일본인에게 범종을 판 돈으로 전답을 샀었다고 한다. 한심스런 중이었다. 1908년 4월 하순(7월 설도 있다). 서울의 일본절에는 드디어 대종이 도착했다. 약 1.5m의 높이에 구경이 약 1m, 그리고 무게가 400관이나 되는 육중한 대형 동종이었다. 일본인 중들은 감동하고 만족해 했다. 그들은 종값 800원에 운반비 515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반면 그 범종이 이상한 외모나 그것이 서울에서 160리 거리인 양평 용문산 상원사에서 서울로 운반되는 동안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중간상인 야마구치의 어딘가 의심쩍은 이야기에 선뜻 의심을 품은 사람은 그때도 그후에도 없었다. 1931년에 간행된 (남산 본원사소사)에도 이렇게 씌여 있을 뿐이다.
"서울 동대문 밖에서 '폭도'(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던 한국인들을 지칭한 일본인들의 표현)들에게 방해를 당해 세 번이나 운반이 중단되다가 일본 헌병의 다대한 협조로 한강 수로를 돈 후 용산에서 남산 본원사로 옮겼다."
'폭도'들의 방해를 이유로 동대문 밖에서 여러 날을 지체한 점, 한강을 통해 용산에 도착한 배에서 범종이 인양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범종에 대해서도 뒤에 여러 권위 있는 일본인 전문가들조차 '조선종'으로 여기기를 꺼리고 언급을 기피하거나 일본종 비슷한 괴상한 양식이라고 말한 점 등이 모두 어딘가 석연치 않았건만 깊이 조사·분석한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총독부는 그것을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의 유물' 이라는 막연한 결론을 내려 보물로 지정하기까지 했었다. 8·15해방 후 남산 본원사가 갖고 있던 '전 상원사 범종' 은 조계(서울 종로구 수송동)로 옮겨져 갔다. 그리고 과거 일제 때의 평가가 그대로 존중되어 국보 제367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는 전문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1962년 12월 12일, 문교부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 18차 회의는, '그 종은 결코 한국 것이 아니며 오랜 작품도 아니다. 일본인 무뢰한들이 계획적으로 일본에서 급조한 것을 배로 싣고 와서 한강에서 진짜 상원사종과 감쪽같이 바꿔치기한 가짜 상원사종으로 추리된다' 는 황수영 위원의 그 동안의 입체적인 조사 결론에 따라 정식으로 국보 해제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때 한강에서 일본으로 직행했을 진짜 상원사종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갈 뻔한 보신각종
태평양전쟁을 도발시켰다가 미.영 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마침내 자멸위기에 몰리게 된 일본 국군주의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총후의 정신협력' 이라는 발악적인 전쟁 수행의 한 수단으로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선포했다. 일반 가정의 놋쇠로 된 숟가락·젓가락·밥그릇으로부터 사찰과 교회의 동종, 청동 혹은 철불, 기타 모든 종류의 금속 기물을 자진해서 헌납하라는 것이었고, 나중엔 강제로 빼앗아 갔다. 강화도의 전등사에서 전래의 동종과 불기들을 강제로 공출당한 것도 그때였다. 경찰을 앞세운 협박적인 집행이었다. 완전히 공포 분위기의 악몽기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는 종로의 보신각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앞잡이들이 그것을 지목했던 것이다. 1944년 8월 12일, 총독부의 앞잡이 단체였던 소위 국민 총력 경성연맹 회장이 전체 조선연맹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이 독촉·상신하고 있다.
"결전하, 금속 회수의 강화 철저의 건:결전하, 금속류 회수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차제에 일반대중은 정신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가의 보신각 대종, 총독부 청사 내의 동상(초기 총독상 2점이 있었다) 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져 있음은 당국의 진두수범상 일고를 요함. 기타 부내(서울 시내)에 있어서도 사원·교회 등 각 방면에 존재하는 금속류가 아직도 상당한 것으로 믿어지는바, 그것들을 즉각 공출·처치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보신각종의 위기일발. 그러나 이 종은 총독부가 1934년 8월에 보물로 지정하였던 어찌할 할 수 없는 문화재였다. 따라서 총독부도 그것만은 건드릴 수 없었다. 또 서울의 민족적인 민심을 크게 자극할 역효과를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보신각종은 병기창에 끌려가는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면한 채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오늘날엔 보물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 종로 네거리의 보신각종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처음 주조됐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에 의해 불질러져 녹아 없어졌다. 현재의 종은 세조 13년(1468)에 주조되어 돈의문(서대문) 안의 정릉사와 원각사에 걸려 있다가 임진왜란 후 종각만 재건된 현위치로 옮겨져 보신각종이 됐던 것인데, 과거의 왜병들의 후예에 의해 또다시 불 속의 죽음을 당할 뻔했으니 지금의 보신각엔 왜적에 대한 한스러움이 사무쳐 있을 것이다. 한편 강화도의 전등사종은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당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해방 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중국 북송 때의 귀중한 종이 하나 굴러 들어왔다. 해방이 되자마자 전등사 주지는 일제에게 빼앗겼던 종이 혹시 인천 항구의 어디쯤에 버려져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 나섰다가 부평의 조병창 자리 뒷마당에 큰 동종이 하나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전등사에서 가져온 종은 아니고, 그보다 더 큰 대종이었다. 여하간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종이니 이거라도 대신 운반해 가자 해서 얻은 것이 지금 전등사에 걸려 있는 높이 1.63m의 중국종으로, 1037년에 중국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했다는 명문이 들어 있다. 1963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문화재임이 조사·확인되어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전등사의 중국종이 해방 직후에 부평 조병창에 버려져 있게된 경위에 대해서는 역시 일제 말기에 중국 점령지역에서 배로 반출돼 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강화군의 강화면 관청리에는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돼 온 또 하나의 큰 동종이 있는데(현재 보물 제11호, 1711년에 주조), 이 종은 또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서울 근처까지 접근해 왔던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이 저희 나라로 실어 가려고 강화읍 서문 밖 토끼다리까지 굴려 갔다가 너무 무겁고 운반하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는 비화를 갖고 있다.
식민지 연구자료로 이용된 규장각 장서
한일합방과 함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재산 중의 가장 귀중한 문화재는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방대한 분량의 고서와 지방의 사고본들이었다. 당시 규장각은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맞은편인 지금의 국군통합병원 자리에 있었다. 경복궁 안의 집옥재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전적 문화재들은 외세 침입과 매국정객들의 창궐로 국력과 조정의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지던 19세기말 이후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먼지와 습기 속에 방치된 상태였다.
대한제국 정체의 여러 분야의 무력과 마비상태는 이 땅의 완전식민지화와 국토 병합을 음모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고마운 정황이었다. 한일합방에 앞서 소위 통감부가 속셈을 감추며 행정력을 발휘한 것의 하나가 먼지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규장각 장서의 정리 및 보존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 통감부는 일본인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국내 학자의 협력을 받아 규장각의 네 서고에 가득히 쌓여 있던 옛 책들을 전부 밖으로 꺼내면서 먼지도 털고 일광소독도 시켰는데, 그때 처음으로 파악된 장서 내용은 뒤에 (규장각 폭서목록)이라는 책자로 간행되었다. 그 무렵 통감부는 창덕궁에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창설한 것처럼 또 이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을 설치시켜 준다고 통감부 아래 임시 취조국을 두고 여러 곳의 옛 책들을 낱낱이 조사하게 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규장각 장서 중에 (제실도서지장)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들이 있는데, 곧 일제 통감부 시절의 경위를 말해주는 증거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과거의 한국 왕실을 총독부 산하의 이왕직 관리기관 속에 봉쇄시켰고, 또 과거의 한국정부 재산과 왕실의 개인적인 재산을 분리시키면서 규장각 장서들을 총독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다 1931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시켜 일본인 교수들의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했었는데, 해방 후 자동적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관이 되었다.
규장각을 비롯한 각처의 장서들을 모조리 접수한 총독부는, 이왕가에게는 그전까지 건재했던 지방의 4대 사고의 하나인 전북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을 인수하도록 생색을 냈다. 주객이 뒤바뀌어 나라를 빼앗긴 이왕가는 침략자로부터, 5백 년 사직이 소중히 물려주고 있던 막대한 수량의 온갖 귀중한 사책들 가운데 (이조실록) 1질이 포함된 지방 사고의 장서 한 벌을 배정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조선총독부기증' 이란 도장까지 찍히면서였으니 모두 망국으로 인한 모멸이었다.
지금의 창덕궁 장서각은 그때 이왕가가 무주에서 올려온 '적상산성 사고본' 을 중심으로 발족한 것인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친일 매국배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경기의 풍성하고 어수룩한 재정 밑에서, 이왕직이 일본인 고관 퇴물들의 사복을 채워 줘 가면서 이왕가를 위하는 체 생색을 낸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창덕궁에 들여보낸 (이조실록)과 기타 사고본에 '무주 적상산성 사고본, 조선총독부 기증' 이란 도장을 찍은 자는 뒤에 가서 총독부 도서관장을 지낸 하기야마였다. 그는 장서각 발족 당시 한동안 실무 책임자로 있었다.
통감부가 빼돌린 구한국의 고서
규장각의 장서들은 통감부가 고스란히 접수·정리하여 잘 간수하다가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으로 이관시킨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규장각 장서도 사실은 통감부 시절이거나 그 이전에 벌써 상당수의 귀중본이 일제의 침입자들에 의해 유린돼 있었다. 약 60년 후인 1965년에 와서야 그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무뢰한은 다름아닌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 확실한 기록을 과거의 총독부 서류철에서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은 당시 규장각 도서들을 관리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백린 열람과장이었다. 과거의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다가 그는 1911년의 총독부 취조국 서류철 하나를 발견했다. 규장각 장서를 접수할 때의 관계 서류철이었다. 그 속에 그때까지 관계 학계를 포함하여 누구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내막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골라잡은 후 일본에 빼돌렸던 귀중본의 목록이었다. 1911년 5월 15일자로 일본정부의 궁내부대신 와타나베가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골자의 조회공문을 보내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사항의 조사를 목적으로 일본에 가져온 조선의 서적들이 있는바, 이토가 죽은 후로 그책들은 궁내성 도서료에 보관되고 있음. 이는 일본 왕족 및 공족의 실록편수에 참고로서 필요하며, 또 이 조선책들은 일본의 제실도 서관에는 없는 것들이니 아주 양도되기를 원함."
내역은 정치·역사·인물에 관한 책과 소수의 문지 및 읍지들로서 모두 33부 563책이었다. 과거의 장서각 장서목록과 대조시켜 본 결과 백린은 읍지를 제외한 모두가 원래부터 규장각 도서였음을 확인했다. 읍지 74책도 영조 연간에 홍문관에서 작성한 고본들로서 고종 32년(1895년)에 홍문관이 폐쇄되면서 규장각으로 이관됐던 것들이었다 이 규장각 장서들은 이토가 정확히 언제 어떤 수법으로 일본에 반출해 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백린은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직후인 1904년 3월과 다음과 11월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에 이토가 특사로 왔었던 사실을 들어 그때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검토를 빌리면 그때 이토가 반출한 도서 등에 현재 국내에 없는 유일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에 낙질로 돼 있는 귀중본은 (조감) 4권, (국조통기), (삼충록), (영남인물고) 13책, (반양일기), (동사보유), (기재답기) 등이다(백린, (서지학) 창간호 (윤승전문에 대출된 규장각 도서에 대하여), 1968년).
약 60년 전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 근방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난굴한 고려자기들을 무더기로 입수해서 일본으로 실어내 간 사실은 이미 앞에서 상세히 언급했지만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책까지 공공연히 반출해 갔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한번 아연하게 만든다. 그 책들은 한일합방 직후 일본 궁내부대신과 조선총독 데라우티사이에, 그러니까 침략자인 저들끼리의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양도되어 현재 도쿄 궁내청 서릉료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66년의 문화재반환협정 때에는 한 권도 되찾아 오지 못했다.
사전에 벌써 규장각 귀중본에 손을 대고 그중에서 한국침략에 도움이 될 책들을 골라 일본으로 불법반출했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는 드디어 초대 통감이 된 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접수 혹은 수집한 무수한 옛 책과 문헌들을 통감부 이름으로 일본에 빼돌렸다. 그 일부가 역시 도쿄의 궁내성 서릉료에 소장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엔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가 반출한 책들도 들어가 있었다. 이른바 '통감부 장서' 와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으로 총 163부 852책인데, 다행히 이것만은 1966년에 반환문화재로 돌아왔다.
4대 사고의 기구한 종말
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의 역대 장서는 서울의 규장각본 외에도 한일합방 당시까지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 네 곳에 소개되어 엄중히 보관돼 있던 엄청난 분량의 사고본이 있었다. 나라를 잃은 후 창덕궁에 연금당하게 된 이왕기가 총독부로부터 기증이라는 모멸스런 형식으로 인수한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은 별도로 치고, 강화도의 '정족산성 사고본' 과 강원도 '오대산 사고본', 그리고 경북 봉화의 '태백산 사고본' 이 그것이었다. 이 지방 4대 사고에는 가장 귀중한 (이조실록)이 각각 1질씩 간직돼 있었다.
정족산과 태백산의 사고본들이 통감부 때부터 이미 서울로 운반되기 시작하여 지금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종친부 건물의 임시 규장각 분실에 전부 모여진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0∼1912년의 일이었다. 정족산 사고본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상륙하여 관청리의 동종(현재 보물 제11호)을 약탈해 가려고 했던 프랑스 함대의 수병들에 의해 이미 상당수가 탈취됐었다고 하나(이홍직 편, (국사대사전) ) 1937년에 경기도가 조사.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고적)(일문)에는 그런 설명을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있다.
"삼랑성(정족산) 안의 사고는 건립(1660년) 이래 완전히 보호되어 왔다. 프랑스 병사들의 내습도 동문 밖에서 격퇴되었기 때문에 약탈당할 틈이 없었고,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가져갔다고 전해지는 것은 강화 읍내에 있었던 규장외각의 장서들이었다."
여하간 (이조실록) 같은 귀중본만은 잘 보조시켰던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그런대로 수습이 잘되어 규장각 장서들과 함께 전체가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돼 있지만, 총독부가 저들 마음대로 본국의 동경제국대학 부설도서관에 실어 보내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 했던 오대산 사고본은 10년 후에 가서 기구한 종말을 고했다.오대산 사고본이 총독부의 양도로 몽땅 동경제국대학으로 실려 간 것은 1914년 3월의 일이었다. 총독부는 사고의 보호를 맡고 있던 월경사의 인근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동해안의 주문진 선착장까지 등짐과 달구지로 운반한 뒤 배로 실어 갔다. 그때의 상황이 (월정사 사적기)끝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본사(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반출돼 간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벌을 포함한 사책들은 데라우치 총독의 한일합방 선물로서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에 도쿄 일원을 불바다로 만든 관동대지진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책은 교수들이 밖으로 대출해 갔던 20여 책에 불과했다.
다른 사고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오대산 사고도 내부의 장서를 몽땅 일제에게 빼앗긴 뒤로 빈 건물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가 그조차 주저앉아 없어지고 지금은 겨우 그 터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만, 가장 귀중한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유서깊은 곳이어서 사적 제37호로 지정돼 있다. 다른 사고들 역시 한 채의 건물도 보호되지 못했다. 무주 '적상산성 사고' 의 경우는 산성 안의 수호사였던 안국사에서 사고 건물 하나를 헐어다가 명부전을 삼고 있으나 원형을 상실하고 있다. 또 언제 그렇게 뜯어 옮겨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적성지)에는 (이조실록)을 보장하던 선원각이 6간, 그외 사고 12간과 수사당 6간이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장서가 이왕가의 장서각으로 옮겨져 가던 한일합방 직후까지는 그 건물들이 모두 건재했었음을 당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장면이 물었다.
"이 총장, 군사 쿠데타설이 분분한데 이총장께서도 소문 들은 일이 있으시오?"
"예, 그런 풍설은 벌써부터 듣고 있습니다. 3,4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을 때 벌써 퍼져 있던 풍설입니다."
이태희는 <뭐 그까짓 풍설 같은 것을 가지고 마음을 쓰느냐?> 하는 그런...
"아니 풍설이 아니고 이번엔 구체적인 제보가 있어서요. 2군 부사령관인가 하는 박정희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 있는 모양이오."
장면의 입에서 <박정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되자 이태희는 긴장했다.
"2군 부사령관이라구요?"
"그렇소."
"그렇다면 장도영 장군한테 명령하실 일아닙니까? 군부의 장성에 대해선 검찰에서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말씀입니다."
"아니, 장 장군한테는 벌써 지시를 했소. 박정희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서 보고하라고. 검찰에선 김덕승인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김덕승이라니요? 처음 듣는 ..."
"김덕승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여기 앉아 있는 오 사장이 익히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오 사장한테 듣고 그 사람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켜 주시오."
"알겠습니다."
오인환은 김덕승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박정희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이태희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다음날인 5월 7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대검찰청 총장실에는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세 사람이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있었다.대검찰청 총장 이태희, 부장검사 김홍수(金洪洙).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김덕호(金德鎬) 등이었다. 어제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수사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고자 두 사람을 불러들여 연 구수회의였다. 한데, 대검찰 총장인 이태희는 어제 오인환한테 들은 얘기를 두 사람한테 되새겨 들려주고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엔 말이외다. 암만 생각해 봐도 이번 정보는 군사 쿠데타를 빙자한 사기 사건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오. 어제 총리실에서 만난 그 정보 제공자인 오인환이란 사람도 말합니다만,"
적어도 엄청난 국가예산을 쓰고 있는 군의 장성이 단돈 5백만 환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그 김덕승인가 김용천인가 하는 사람한테 5백만 환의 군자금을 조달해 달라고 기가 막힐 노릇이 또 한 번 벌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이 자리는 총리의 명을 받아 군사 쿠데타 정보를 어떤 방법으로 수사해서 처리할 것이냐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런 자리였고보면 이태희는 마땅히 심각하게 이 문제와 씨름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흐려놓는 발언을 했느냔 말이다. 아마도 이태희는 장도영이 군사 쿠데타의 영도자로 추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미지근하게 수사를 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태희와 장도영은 사돈(査頓)간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말이다. 철두철미한 법률가였다. 법률가가 인정에 끌려서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려 들었을 리는 없다. 하여간에 결과론이지만이태희가 좀더 적극성을 띠고 수사에 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김덕호가 묘안을 내놓았다.
"저쪽에다 프락치를 넣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프락치라니?"
"이쪽 사람을 저쪽 사람한테 접근시키도록 한단 말씀입니다."
김덕호가 내놓은 묘안에 따라 군사 쿠데타 그룹에 프락치를 넣오 보기로 이날 세 사람 사이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프락치로서는 김덕호의 친구인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보는 또 다른 루트를 통해서 장면에게 제공되었다. 이 정보는 송우범(宋宇範)이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鮮宇宗原)을 통해 장면에게 제공되었다. 송우범은 경찰출신으로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때 자유당 공천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에서 입후보해서 당선됐던 인물이다. 그는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국방분과위원으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군부 사정에 꽤 밝은 편이었다. 그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박정희가 주동이 돼서 계획, 추진되고 있는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여간에 그는 꽤 소상하게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었다. 주동자가 것, 여기에 과도정부 때 예편당한 해병소장 김동하(金東河)도 가담돼 있다는 것, 그리고 영관급 장교들의 이름과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도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선우종원에게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송우범은 이 정보를 선우종원에게 제공할 때 그냥 구도로 전하거나 메모지에 간단하게 적어서 제공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친절하게도 쿠데타 주동자들의 인맥을 도표로 그려서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평양(平壤) 태생인 선우종원은 1942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 다음해인 1943년에는 고등문관(高等文官:지금의 고등고시) 시험 사법과에 합격, 해방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장면이 대통령중심제하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던 때로 이때 선우종원은 장면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므로 선우종원은 장면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장도영이 그자가 쿠데타에 동조를 해?"
선우종원의 놀라움은 컸다. 분노도 컸다. 그는 송우범이 제공해 준 쿠데타 주동자들에 관한 인맥도표를 장면한테 가지고 갔다.
"장도영이란 자를 즉시 파면하고 군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쿠데타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엄중 문초하도록 하십시오."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에 동조를 하고 있어?"
장면은 이때에도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미 오인환을 통해서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는 제보를 받지 않았던가? 장도영이 쿠데타에 동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쿠데타 그룹에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장면은 송우범이 제공해 준 정보 중에서도 장도영에게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5. 장도영, 박정희를 감싸고 돌다
국방장관 현석호(玄錫虎), 제3대 국회 때는 자유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상북도 예천(禮川)에서 당선됐었고 제4대 때는 민주당으로 변신, 민주당 공천을 받아 역시 예천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었다. 그가 다시 국회에 들어온 것은 4.19 뒤 과도정권에서 치른 7.29 총선 때였다. 그러니까 그는 재선의원이었다. 일본의 경우 같으면 2선 정도로 내각에 입각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내각책임제로 정권이 바뀐 이상에는 다선(多選) 위주로 조각을 해야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뒤에 장면 정권에 대한 얘기를 소개할 때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장면이 다선 위주로 조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재선인 현석호를 처음엔 국방장관으로 입각시켰다가 2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다시 또 2개월 뒤에는 국방장관으로, 마치 데리고 들어온 자식 끼고 돌듯이 계속해서 내각에 머물게 했던 것은 현석호란 한 정치인이 너무나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5월 8일 월요일. 이날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이 아침 일찍 국방장관실로 현석호를 찾아왔다. 적어도 육군의 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을 찾아갈 일이 있으면 사전 양해를 얻는 것이 예의요, 없이 불쑥 찾아왔던 것이다. 현석호가 의아했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현석호는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사나이의 행동이 꽤나 못마땅한 모양인지 묻는 목소리가 좀 퉁명스러웠다.
"예. 장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장도영도 아차 하고 예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던가? 잠시 머뭇거렸다.
"앉으시오."
현석호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도영에게 눈으로 쇼파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하자 장도영은 앉았다. 군인답게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바로하고 앉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이틀 전, 장면에게 불려가 박정희에 대한 조사를 명령받은 장도영은 육군본부로 돌아오자 전화로 박정희에게 조심할 것을 귀띔해 주고 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불안한 마음만 일었다. (어떻게 기어오른 참모총장 자리인데? 결코 이 자리에서 밀려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만은 차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 쿠데타 계획이 누설됐으니?) 장도영은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만 불안해졌다.
인정에 끌려서 박정희를 잡아넣으라 못하겠거든 전격적으로 예편조치를 취하기라도 했으면 될 게 아니겠는가. 그런 다음 영관급 쿠데타 주동자들을 일망타진해 버렸으면 그것으로 족했을 게 아니겠느냔 말이다. 한데, 장도영 이 사나이는 그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 해야만 육군 참모총장직을 고수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월요일이 되자 불쑥 현석호를 찾아갔던 것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현석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마음 속으로 멋진 연기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던 장도영은 표정을 지었다.
"장관님, 군 일부에서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장관님께서도 아시고 계십니까?"
"그렇소, 들어서 알고 있소."
물론 현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문은 소문대로 들어서 알고 있었고 장면한테는 구체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모의를 하고 있는 자가 어떤 자들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쿠데타 계획에는 장 총장 당신도 가담돼 있다는 정보던데?>하고 덧붙이려다가 그 말을 목구멍에서 눌러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 자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일었기 때문이었다. 현석호는 장도영의 가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반문했다.
"장관님, 군부의 군사 쿠데타 음모에는 저도 거기에 가담되어 있다고 모략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고자 해서 찾아 뵈었습니다."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도영의 얼굴엔 어느 사이엔가 슬픈 그림자가 자욱히 어려 있었다. (이 자도 그 소문은 들은 모양이군. 그래서 변명을 해둬야 되겠다 그거지?) 현석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장도영의 감정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도영이 말을 이었다.
"장관님, 제가 누구와 손을 자고 그런 무근입니다. 군부에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을 뿐더러 이 장도영이나 박정희 부사령관도 그런 일을 꾸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 아시고 믿어 주십시오."
"믿어 달라고?"
"예, 장관님."
장도영은 더욱 슬픈 빛을 띠며 말을 계속했다.
"알고 보면 모측에서 참모총장인 저와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장군을 모해하려는 계획적인 조작입니다. 장관님은 절대로 현혹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읍소(泣訴)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줄로 안다. 장도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지는 않았지만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의 표정을 짓고 애원어린 목소리로 선질(善質)의 인간은 결코 남을 의심할 줄을 모른다.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어느 구석인가에 조금이라도 악질(惡質)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석호는 철저하다고 할 정도로 선질의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장도영의 읍소를 듣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의 마음에는 측은해하는 동정심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 장군이라는 세평을 받고 있는 인물인 만큼 모해하려 드는 자도 있겠지.) 현석호는 이렇게 장도영의 읍소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도영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이끈 것이 바로 현석호 자신이었다. 자기가 밀어서 육군 참모총장에 앉혀 놓은 사람을 흔들어대는 격이나 다를 것이 없다. 현석호는 그래서 장도영의 말을 믿기로 했던 것이다. (모측이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인가?) 현석호의 마음 한구석에 털끝만한 악질이 깃들여져 있었더라도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장도영의 연기는 폭로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석호는 모해하고 있는 모측이 누굴 가리켜 한 말이냐고 묻지를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또 현석호는 군사 쿠데타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장도영의 읍소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손바닥에선 조금씩 선혈이 배어 나오기 움직이려면 미군의 동의가 필요하고, 설혹 또 동의 없이 병력을 움직인다 해도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군 수뇌부가 반란행위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이래서 현석호는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단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현석호를 만나고 있는 그 시각.
"뭐야?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어?"
서울 육군 제15범죄수사대 대장 육군 중령 방자명(方滋明)은 범정과장(犯情課長)육군 대위 오기수(吳箕洙)로부터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받자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기수는 구두로 정보를 보고한 것만이 자들의 이름을 도표로 그려가지고 와서 방자명 앞에 내밀기까지 했다. 그 도표에는 별 세 개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별 두 개를 그린 다음 박정희의 이름 석 자가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별 세 개 밑에는 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고 동그라미만 세 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이름 밑에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오치성(吳致成) 등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소문대로가 아냐?) 방자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문대로란 무슨 뜻인가? 그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일어난 뒤, 그들이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하극상 사건을 일으켰던 김종필, 김형욱 동기생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들이 동기생이라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군 내부의 사상적인 문제라든가 쿠데타 같은 반란행위는 방첩대 소관이지 파렴치한 범죄를 다루는 범죄수사대의 소관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별 셋이 누굴까?) 방자명은 박정희의 이름 위에 그려져 있는 별 세 개의 주인공은 누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당시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현역 장군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제1군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제2군 사령관 최경록(崔景錄), 육군 참모차장 김종오(金鐘五) 등이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이 다섯 장군 중의 한 사람을 업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과연 이 다섯 장군 가운데 박정희가 업고 있는 장군은 누구일까? 최경록?) 방자명의 마음에 제일 먼저 짚인 장군은 최경록이었다. 다른 어느 장군보다도 최경록이라면 쿠데타를 음모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심증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대장님, 이 정보는 정확한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위에 보고해야 옳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오.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일단 입수된 정보니 위에 보고해 두도록 하세."
방자명은 즉시 오기수가 제출한 보고서를 가지고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曺興萬)을 찾아가 보고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날 밤 이 보고서를 가지고 참모총장 공관으로 장도영을 찾아갔다. 불행하게도 장도영은 부재중이었다. 방자명은 총장 보좌관 육군 소령 김동수(金東洙)에게 <총장 각하께 꼭보여드려라> 하고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자명은 평안북도 자성(慈成) 출신으로 이때 나이 서른일곱 살, 별 세 개를 단 장도영보다는 한 살 아래였다. 그는 명문인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징병 1기로 끌려나가 일본군에 입대했던 군 경력의 소유자였다. 해방으로 귀국한 그가 만일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더라면 아마 이때쯤에는 아무리 진급이 늦었더라도 별 두 개는 달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도 평안북도 태생이라 이를테면 장도영의 심복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유대관계로 해서 그는 오기수가 올린 정보보고서를 가지고 일부러 총장 공관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이틀 후였던가? 아니면 사흘 후쯤의 일이다. 그러니까 5월 10일이나 11일쯤의 일이다. 이때 방자명은 다른 문제로 장도영을 만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방자명이 물었다.
"박 장군이 업고 있는 별 셋이 누굽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장도영은 단 한마디로 잘랐다.
"그런 보고는 정보 가치가 없어. 쓸데없는 소리야."
방자명이 올린 보고가 정보 가치가 없다는데 그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도 오기수가 입수한 정보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캐물으려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장도영이 육군본부로 돌아오자, 부관이 검찰총장 이태희가 아침부터 찾고 있다고 전해 주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미처 자리에 앉을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방을 뛰쳐 나갔다. 대검찰청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장도영은 검찰총장실로 들어서면서 인사를 겸해서 그렇게 말했다. 사돈관계 같이 어려운 사이도 없다. 그런데도 장도영과 이태희는 호형호제하며 지내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두 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지내는 것이 속편했을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장도형은 거침없이 쇼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총리께서 나한테 특명을 내리셨소. 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수사하라고."
내각책임제하에서는 통치권자인 국무총리의 특명은 검찰에서도 군까지도 수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하여간에 이태희는 장도영에게 총리의 특명사항을 털어놨다. 그 말을 듣자, 장도영이 펄쩍 뛰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군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는데 저를 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명예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죠."
명예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은 군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중지해 달라는 뜻이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이태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반문했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재위: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로마인과 유대인
고대 로마의 유대 문제에 대한 고찰은 근대와 현대에는 특히 유대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유를 존중하는 유대 민족이 지배자인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한 역사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 가설을 채택한다면, 유대 민족 이외의 다른 민족은 왜 지배자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인이나 갈리아인, 에스파냐인, 브리타니아인, 그리고 오리엔트의 여러 민족도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처럼 끈질기지는 않았는데, 왜 유대인만이 유독 '끈질기게' 저항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지 않는 한, 이 가설은 성립될 수 없다. 다른 민족들은 자유를 존중하는 마음이 약했고 유대인은 그것이 강했는가. 아니면 로마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이 생각하는 자유와 유대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로마인들이 다른 민족을 지배할 때의 기본 정신은, 제정 로마 시대에 태어난 그리스 사람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듯이,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데 있었다. 패배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 승자인 로마인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족과의 동화도 거부한 것이 유대 민족이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의 헌법인 모세의 '십계'를 보면, 유대인이 범해서는 안될 첫 번째 계명이 '너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되어 있다. 일신교인 이상, 그 신은 너그럽지 못한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유대교의 신을 제외한 다른 신은 인정하면 안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신교가 지배적인 시대에 살면서 이런 사고방식을 지키려면, 그것도 약자의 처지에서 지켜내려면 "우리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다"라는 선민 사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유대 민족의 이런 생활 방식은 그들이 바빌로니아나 이집트로 잡혀가 노예 신세가 된 시대에는 구세주(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비참한 현실을 살아나가는 데 꼭 필요한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고대의 유대인은 그리스인에 버금간다고 여겨질 만큼 이산 경향이 강해서 웬만한 도시에는 반드시 유대인 공동체가 있을 정도였지만,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유대인만은 다른 거주자와 동화하지 않았다. 교류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도시에 사는 유대인 중에는 금융업이나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의 교류는 활발했다. 유대인들은 특히 금융업이나 장사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다만 교류가 그 이상으로 진척되어, 동화나 융합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다른 민족한테는 다른 신이 있다. 그 신까지 인정하면 다신교가 되니까, 유대인이 믿는 일신교와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오리엔트를 지배한 그리스인과 그 뒤를 이은 로마인은 다른 민족의 신들도 인정해주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다신교 민족이었다. 다신교 세계였던 고대에는 별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유대 민족이 산간벽지에서 양이나 치면서 고립된 생활을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들에게는 도시에 거주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재물은 도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과 유대인은 법률에 대한 사고방식도 달랐다. 유대인에게 '법'이란 모세의 십계처럼 신이 내려준 것을 인간이 지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모세가 그저 돌조각에 새긴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것이 신의 뜻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신이 내린 것으로 되어 있는 이상 인간이 감히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로마인이 생각하는 '법'은 인간이 생각한 것이고, 그것을 법률로 만들 것인지 어떤지도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인간이 결정한다. 따라서 현실에 맞지 않게 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로마에도 '십계'와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기원전 449년에 발표된 '십이동판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12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로마에서 '십이동판법'이 유명무실해지는 데에는 200년도 걸리지 않았다. 현실에 맞도록 고쳐가다 보니, 원래의 법이 어떠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로마인은 인간에게 법률을 맞추고, 유대인은 법률에 인간을 맞춘다고 말해도 좋을 지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의 '법'은 유대인 사이에서만 통용되었지만, 로마인의 '법'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통용되었고, 그후에도 법에 대한 사고방식으로서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법'은 종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가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리고 시대가 달라져도 적용할 수 있는 기본 사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이것을 후세는 '로마법의 정신'이라고 부르게 된다. 로마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로마인과 동화시키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방책은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이었지만, 속주세 면제라는 현실적 이익이 있는데도 로마 시민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고대에는 '특수'의 전형이었던 유대 민족이었다. 카이사르가 정한 법에 따라 의사와 교사는 민족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군을 얻을 수 있었고, 제정 시대가 진행되면서 이 제도는 제국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었지만, 유대인은 우수한 민족이라서 의사와 교사를 많이 배출했는데도 이 특전을 활용한 사람은 놀랄 만큼 적다. 로마인이 되어버리면 로마법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로마 군단에 지원하는 유대인도 극히 적었다. 로마 병사가 되면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하지만 유대교도가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은 그들의 신뿐이고, 이 계율을 어기면 신의 엄벌이 내린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로마도 이 '특수 사정'을 인정하고, 유대인에 대해서만은 병역을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유대인이 로마 세계에 동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가장 체계적으로 로마 시민을 생산한 것은 로마 군단이다. 로마 군단에 보조병으로 25년 동안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단순히 계산해도 25년마다 15만 명의 로마 시민이 탄생하게 된다. 유대인은 이 로마 시민 생산 체제에서도 이질적인 분자였다. 유대인은 로마 세계의 이방인이 되는 쪽을 택했다. 지배자인 로마인이 강요한 게 아니라, 유대인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래 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지중해 세계를 헬레니즘화한 이후 2급 민족이 된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지배자는 그리스인에서 로마인으로 바뀌었지만, 유대인의 지위는 그대로였다. 자신만이 아니라 남까지도 지켜주어야만 비로소 1급 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책무를 거부하면, 유대민족처럼 우수해도 2급의 지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예외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은 도시에 사는 유대인, 그 중에서도 특히 지능이 높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도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다.
'보편'과 '특수'로 바꿔 말할 수도 있는 로마인과 유대인이 직접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였다. 폰토스 왕 미트라다테스를 격파하고, 파르티아 왕국의 움직임은 평화조약으로 억제하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멸망시켜 헬레니즘 시대의 막을 내린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온 유대가 독립국으로 존속하는 조건으로 유대교 제사장들에게 정교일치의 통치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유대 민족은 그것을 거부한다. 폼페우스는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 자신이 지휘를 맡지 않고 병력의 일부만 보내 공격한 탓도 있어서 당장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석 달 뒤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승리자인 폼페이우스는 혼자 신전에 들어갔다. 승리를 과시한다기보다는 유대교 신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는 유대교 신전에는 성소 안에도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신전에서 나온 폼페이우스의 감상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악의로 한 말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이 흥분했다. 예루살렘 신전에는 유대교도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하물며 성소는 1년에 딱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신성한 곳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유대교 신전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고, 게다가 병사도 거느리지 않고 무기도 휴대하지 않고 들어갔으니까 예의는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이 보기에 그는 신을 모독한 자였다. 그러나 '보편'은 그것을 강요하기보다 '특수'를 허용해야만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법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다. 로마인은 이 점에서도 훌륭한 전문가였다.
기원전 48년,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동안 그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을 만났고, 이듬해인 기원전 47년에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파르나케스와 싸우러 가는 길에 들른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는 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을 만나서, 지배자인 로마인과 피지배자인 유대 민족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일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 여담이지만, 파르나케스와의 싸움은 결국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로 끝나게 되었다. 카이사르와 유대인의 협정은 구체적으로는 2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유대인의 요망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첫 번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리엔트를 정복한 이래 300년 동안 그리스인은 동방세계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유대 민족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이 유대 민족에게 경제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주었다. 두 번째는 '공무 면제'라고 불러도 좋은 '특전'으로, 군무를 포함한 모든 공직에 유대교도가 종사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 로마인을 제외하면 유대인들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슬퍼한 것도 지배자로는 처음으로 그들의 처지를 인정해준 보호자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카이사르에게 부탁하여 자신들의 특수성을 공인받은 순간, 보편화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얼마 후 로마 제국에서는 갈리아인이나 에스파냐인이 원로원 의원이나 속주 총독이 되고, 그리스인이나 이집트인도 원로원 의원을 배출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황제가 된 사람까지 나왔지만, 유대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 '특수'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보편'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차단해버렸다는 뜻이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유대 민족에 대한 대책에서도 카이사르가 깔아놓은 노선을 계승했지만, 제국 통치상 필요할 때는 현실적인 로마인답게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다. 여기에는 그의 현실적인 성향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지를 시찰하면서 유대인의 실상을 자세히 파악한 아그리파의 조언도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아그리파는 또한 건전한 상식인이기도 했다. 유대 왕족에 아그리파라는 이름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에 대한 유대인의 감사와 경의의 표시였다. 또한 로마의 현실주의 노선이 30년 동안이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 쪽에서도 현실 정치의 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유대인도 아닌데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유대의 주권을 장악한 헤롯 왕은 대왕이라고 불리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폼페이우스가 승리자인 동안은 폼페이우스 편에 붙고, 폼페이우스를 이긴 카이사르가 유대 왕국을 재건하자 당장 카이사르에게 달려가 율리우스라는 가문 이름을 받고 카이사르의 '부하'로 변신한다. 그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동방에서는 브루투스 일파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편에 붙는다. 다만 카이사르파인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본명)가 반 카이사르파인 그 두 사람과 필리피 회전에서 대결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을 정도의 냉철함은 갖고 있었다. 뒤이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권력투쟁을 벌였을 때는 또다시 동방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안토니우스 편에 붙는다. 이를 고맙게 여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아무리 간청해도 유대 왕국만은 여왕에게 선물로 주지 않았을 정도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패하자마자,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로 이름을 바꾼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서둘러 로마를 방문한 헤룻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동맹자로 삼고, 유대 왕위를 인정했다. 약소국의 주권자로서 상황 변화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바꾼 헤롯은 그야말로 연명책의 표본 같은 존재다. 또한 헤롯은 카이사레아(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고, 두 아들을 로마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가 헤롯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도 그의 이같은 친로마 정책이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이용가치를 냉철하게 파악한 뒤에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정책이었다.
첫째, 헤롯은 완전한 전제군주였다. 유대에서 전제군주라는 것은 유대교 제사장들이 국정엔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로마인은 독립된 사제계급을 두지 않았던 만큼, 종교의 정치 개입에는 항상 불신을 품고 있었다. 둘째, 헤롯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오리엔트에 주둔하는 로마 군단의 후원이 필요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리엔트 일대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로마의 직할령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선상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가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피차 냉철하지 않으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호혜관계'가 성립한 것이다. 셋째, 현대식으로 말하면 다국적 기업의 본사 회장인 아우구스투스는 특수한 사정이 많은 유대 현지법인의 사장에는 현지인을 앉히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헤롯은 헬레니즘적인 동방인, 즉 서방적인 동방인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넷째, 아우구스투스는 오리엔트 일대에 널리 퍼져 살면서 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 민족을 다스리려면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예루살렘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대교도는 어디에 살든, 예루살렘 신전에 일정한 헌금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예루살렘 신전에 돈이 모인다는 것은 그 돈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제사장들의 권력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민족주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유대교 제사장들을 강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예루살렘만 안정되면, 오리엔트 일대의 유대인 사회도 안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로마는 유대인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 이 특수한 민족을 제국 내부에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원전 4년에 헤롯 왕이 죽자, 이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헤롯 왕은 유대 왕국을 삼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왕국의 북부는 필리포스에게, 남부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는 아르켈라오스에게 남겨준 것이다. 북부와 남부의 통치권은 두 왕자가 별문제 없이 계승했지만, 문제는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의 신권 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이들은 우선 헤롯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면직하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그들이 보기에는 불순물에 불과한 비유대교도들을 그들의 '성도'에서 추방하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성도는 피바다로 변했고, 젊고 미숙한 아르켈라오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게 군대 출동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시리아 총독은 5년 뒤 게르마니아 숲에서 3개 군단과 함께 목숨을 잃은 바루스였다. 바루스총독은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는 강경책을 취하지 않고, 봉기한 급진파 유대인의 대표가 로마로 가서 왕정을 폐지하고 제사장의 신권통치를 부활시키고 싶다는 뜻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50명의 대표가 황제에게 호소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이탈리아까지는 바닷길이다. 왕복하는 데 걸리는 기간과 로마에 체류하는 기간을 합하면 반 년은 걸린다. 급진파는 이 기간을 얌전히 기다리지 않았다. 자기네 요구를 기정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게 되는 광신의 숙명인지, 예루살렘의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충독은 더욱 격렬해졌다. 마침내 바루스도 시리아 주둔 4개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는 강경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헤롯 왕의 상투 수단이었던 단호한 무력 행사만이 예루살렘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로마에서는 66세의 아우구스투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서 있는 아폴로 신전 앞에서 유대인 대표들을 만났다. 황제는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계단 밑에 늘어선 50명의 유대인들이 저마다 호소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이들 50명의 대표 뒤에는,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받고 테베레 강 건너편 제14구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8천 명이나 몰려와 있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도 중대사는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새삼 인식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황제는 유대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헤롯 왕의 유언을 존중하는 것이 왕의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된 자신의 책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참뜻이 신권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왕정을 폐지해달라는 요구는 거부했지만, 그 대신 조세 경감을 약속했다. 헤롯 시대에는 세율이 너무 높았다. 이 회답을 가지고 귀국한 대표들은 경과를 설명했지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폭동이 다시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도 수습 능력이 없는 젊은 왕 아르켈라오스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소원을 이루었다. 왕정이 폐지된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유대교 제사장들에게 통치를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로마는 헤롯 왕이 아르켈라오스에게 준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행정은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장로회의에 맡겼다. 내정의 자치권은 유대인들에게 남겨준 것이다.
이리하여 서기 6년부터 예루살렘과 유대 정부는 로마의 속주로 바뀌었다. 하지만 속주로는 B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관(프로쿠라토르)으로 파견된 사람은 로마의 제2계급인 '기사계급'출신이고, 직속상관도 다른 속주 총독처럼 황제가 아니라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된 셈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중부를 B급 속주로 만든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이 지역을 경시했기 때문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도, 그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도 적당한 후계자가 없을 때는 일단 속주로 만들어놓고, 다음 후계자가 자라기를 기다리곤 했다. 일단 본사에서 책임자를 보내놓고, 현지인 가운데 적임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업무를 인계하는 느낌이다. 유대 통치는 유대인에게 맡긴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유대 담당 장관의 관저도 예루살렘에 두지 않고, 그리스계 주민이 많은 교역도시 카이사레아에 두었다. 이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도 온건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는 군사력도 3천 명 정도밖에 주둔시키지 않았다. 그것도 로마 시민인 군단병이 아니라, 시리아에서 모집한 그리스계 지원병이어서,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이 많은 유대인과 접촉할 때도 의사소통에는 장애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유대인을 자극하기 않기 위한 배려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지역을 속주화하면, 로마인은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인구나 재산을 조사한다. 이런 일을 하는 관습이 없는 유대인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그런 조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속주세를 내야 한다는 것도 유대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왕에게 세금을 낸다면 모르지만, 멀리 있는 황제에게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다른 민족의 안전까지 지켜주기 위해 돈을 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왜 우리 유대인이 로마인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유대교 신전에 내는 돈 이외에 로마에도 돈을 내야 하느냐는 뜻이다. 종교가 안전 보장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대인이 얼마나 적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속주화가 진해오디는 이 어려운 시기에 봉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로마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 유대 민족은 바윗돌처럼 단단히 단결되어 있지 않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항구도시의 유대인과 농민이나 예루살렘 하층민으로 구성된 급진적인 유대교도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에 속하는 유대인은 대부분 공업이나 금융이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로마의 직할 통치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또한 인구조사와 속주세의 필요성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유대를 속주화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등용한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온건파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항구도시의 자치권을 재확인한다. 이리하여 유대 중부에서는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내정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우선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로마의 통치 좌우명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예루살렘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급진파와 온건파를 분리하는 것이 이 정책의 목적이었다.
퀴리누스 총독은 예루살렘의 특수성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권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인이 사법에까지 개입하는 데 있다. 신이 내려준 율법에 따라 인간이 재판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로마는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는 제사장들이 사법을 맡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물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로마법에 따를 의무가 있고, 죄를 지은 경우에도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로마 시민권을 갖지 않은 유대교도는 유대법을 따르고, 죄를 지은 경우에도 유대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했다. 모세의 십계도 그 절반은 살인, 간음, 절도, 위증, 가택침입을 금지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로마법에서도 금지되어 있으니까, 유대법에 맡겨도 아무문제가 없었다. 다만 사형 판결이 난 경우에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대 주재 '장관'이 허가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을 받고, 당시 유대 장관인 본디오 빌라도가 집행을 허락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한 빌라도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보이면서, 너희(유대측)가 결정한 일이니까 나(로마측)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예수의 처형을 허락했다. 만약 빌라도가 유대측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가 구현하고 있는 로마법에 따라 행동했다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의 이름을 간단히 입에 올리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극형을 당해 마땅한 죄지만, 많은 신을 섬기는 로마에서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도, 실제로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라면 로마법에서는 추방으로 끝날 문제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 못박혀 죽지 않고 흑해 같은 곳으로 추방되었다면, 나중에 기독교 확대의 발단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빌라도는 조국 로마에 해를 끼쳤다.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는 빌라도가 유대 장관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대인 대책은 유대인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로마의 보편성도 지키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금화와 은화 주조권은 황제에게 있었지만,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동전 주조권은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도시가 갖고 있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자유도시'도 동전 주조권을 가졌고,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도 동전 주조권만은 원로원에 속해 있었다. 다만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는 속주에는 동전 주조권이 없었다. 속주에서 쓰이는 금화와 은화 및 동전은 모두 로마 통화였다. 따라서 거의 모든 돈에는 당연히 황제의 옆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속주가 된 이상, 유대에서도 헤롯 시대처럼 왕이 주조하는 통화가 아니라 로마에서 주조된 통화가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 모세의 십계에도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퀴리누스 총독은, 유대 속주에서는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동전에 한하여 황제의 옆얼굴이 새겨지지 않은 통화를 만들게 했다. 금화나 은화는 일반 서민이 만져볼 기회도 드물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퀴리누스는 유대교도가 비유대교도의 예루살렘 신전 참배를 금하고 있는 것도 존중하여, 이것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오리엔트의 모든 종교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예루살렘 신전에만은 아내 리비아와 함께 봉납품을 바쳤다.
속주민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인을 자극할 수도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지배자 로마를 상징하는 군사력인데, 그 병력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카이사레아에 주둔시켰다. 카이사레아에 기지를 둔 로마군 병사가 예루살렘으로 출동해야 할 경우에도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군기는 카이사레아 기지에 놓아두고 출동하도록 규정했다.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가 진두지휘하여 실시한 아우구스투스의 유대대책은 티베리우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아니,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더욱 철저하게 실시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황제가 티베리우스로 바뀐 뒤에도 퀴리누스는 여전히 시리아 총독 자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예루살렘 신전에 바쳐진 로마의 봉납품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것조차도 신격이 된 선황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카이사레아의 신전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예루살렘 신전이 비유대교도의 봉납품으로 더럽혀졌다고 유대교도가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또한 유대교 대제사장이 의식을 치를 때 입는 제의는 로마측이 예루살렘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유대측에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때까지는 종교 의식을 치를 때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의를 빌려와야 했고, 이교도인 로마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 더러움을 없애기 위한 일주일의 '정화'기간을 두어야 했다.
유대를 속주화하는 어려운 작업을 무사히 끝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가 서기 21년에 죽었을 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조국에 대한 공헌이 컸다는 이유로 국장을 치러주었다. 퀴리누스는 계급도 낮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군단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집정관까지 지냈으며, 게르마니아와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고, 죽은 뒤에는 국장의 예우를 받았다. 이것은 출신 계급을 중시한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시대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카이사르가 시작하고,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하고, 티베리우스가 반석처럼 튼튼하게 만든 제정이 불리한 조건을 짊어지고 태어난 우수한 인재한테는 오히려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퀴리누스가 죽은 뒤에도, 티베리우스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은 탓도 있어서 유대 민족에 대한 통치는 대체로 무사히 진행되었다. '대체로'라고 말한 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인과 직접 접촉한 유대 장관들 중에는 유대 민족의 특수성에 무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린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티베리우스에게 알려지면 당장 해임될 뿐아니라, 본국으로 소호나되어 재판까지 받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서기 26년부터 10년 동안이나 유대 장관을 지낸 본디오 빌라도(라틴어로는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좋은 예다. 그가 해임된 첫 번째 이유는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난 주민의 소요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불만 원인이 반드시 로마측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항상 약자의 처지에 있었던 민족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의지할 거라고는 피해의식밖에 없기 때문에 강자에 대해서는 과민 반응을 보이기 쉽다. 다른 속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끝날 일도 유대인과의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곤 했다.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유대 민족 대책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더욱 철저히 시행했다고 말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유대 민족 대책을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의 유대인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 전체로 확대하여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히 확대한 것이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환경 차이를 고려하여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처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는 '분할하여 통치하라'와 더불어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의 기본 방침이었다. 또한 이 두 가지 방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대책을 티베리우스가 좀더 철저하게 실시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철저한 실시를 게을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티베리우스의 치세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직면하지 않아도 되었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율법에만 따르는 유대 민족의 특수성과 아울러, 유대인이 지닌 또 하나의 특수성에 원인이 있었다.
그리스인과 유대인
그리스에서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오늘날에는 오로지 유대인만의 특유한 현상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바빌로니아 이집트로 강제 이주당한 것은 별문제로 하고,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일에서는 그리스 민족이 선배였다. 로마인들도 '콜로니아'라고 불리는 식민도시를 각지에 건설했지만, 그것은 정략적인 이주였고, 사람들의 자발적인 이주에 따른 현상은 아니다. 자발적인 이주라면 그리스인이 선구자였고, 그 다음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의 이주와 유대인의 이주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한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이나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1천 년에 시작된 그리스 민족의 이주로 지중해 세계에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곳곳에 그리스인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유대인이 건설한 도시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다. 유대 민족은 돈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는 이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도 지중해 세계의 동방에 있는 여러 도시에는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로마를 비롯한 서방도시에는 동방만큼 규모가 큰 유대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패권국 로마의 수도가 있는 곳인데도 서방에서는 '돈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의 확립과 사회간접자본의 보급은 서방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때까지는 불균형했던 동방과 서방의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지배자인 로마로 부가 집중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다. 로마 제정 시대, 제국의 3대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인데, 이들 가운데 서방에 속하는 것은 로마뿐이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동방에 속한다. 지배자인 로마인 자신이 제국 전역의 부의 흐름은 중요시했지만, 로마에만 부가 집중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속주세도 피지배자가 지배자 로마에 바치는 상납금이 아니라, 그들의 거주지역을 포함한 제국 전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비였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방의 경제력 향상은 유대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유대 민족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서방에도 갖추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황제에 즉위한 사람이 티베리우스였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