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2호 - 2023.12.30. 토요일(음력 : 11. 18.)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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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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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때문에 바보짓을 삼갈 따름인데, 신중하다거나 얌전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많다.
― J.B.프리스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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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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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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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참석해 주신 내외빈께”
“바쁘신 와중에도 참석해 주신 내외빈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며칠 전 참석한 행사에서 사회자가 한 말이다. 흠 잡을 데 없는 인사말 같지만 두 군데나 잘못이 있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무작정 따라 하다 보니 잘못된 표현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다.
‘와중’의 ‘와(渦)’는 ‘소용돌이’를 뜻한다. 소용돌이는 물이 빙빙 돌면서 흐르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비유적으로는 힘이나 사상, 감정 따위가 요란스럽게 뒤엉킨 상황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온 ‘와중에’라는 말은 일이나 사건 따위가 복잡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할 때 쓴다. 국어사전에는 ‘많은 사람이 전란의 와중에 가족을 잃었다.’는 문장이 전형적인 용례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와중에’라는 말은 전란이나 산불, 홍수 같이 큰일이 나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뒤엉킨 상황에 적합한 말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분주한 상황에서는 ‘와중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위의 인사말은 그냥 ‘바쁘신 중에’라고만 해도 충분하다.
‘내외빈’도 한자를 잘못 유추해서 만들어 낸 말이다. 안팎에서 오신 손님들을 아울러 이르는 ‘내외빈’이란 단어는 우리말에 없다. ‘내빈’은 ‘모임에 공식적으로 초대 받아 온 손님’을 뜻하는 말로, 한자로는 ‘올 래(來)’ 자를 쓴다. 이것을 ‘안 내(內)’ 자로 오해해서 ‘내외빈’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외빈’이란 말은 있지만 이것은 외부에서 온 손님, 특히 외국에서 온 손님을 특별히 이르는 말이다. 손님은 대개 외부에서 오게 마련이므로 내부 손님만을 따로 가리키는 ‘내빈’이라는 말은 없다. 오신 손님들을 모두 아우르는 ‘내빈(來賓)’을 사용해서 ‘내빈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하면 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이고세’와 ‘푸르지오’
우리 집 근처엔 ‘이고세’라는 음식점과 ‘푸르지오’라는 아파트가 있다. 이들은 각각 상호와 상품명에 우리말을 활용한 것으로서 아주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둘 다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이고세’는 ‘이 곳에’를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을 상호로 쓴 것이다.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말을 한글 맞춤법에 따르지 않고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그 둘 간에는 출발 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빠르게 적기 위해서 그런 데 반해, ‘이고세’는 외국어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견과류 관련 상품을 제조, 판매하는 ‘머거본’이라는 상호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어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먹어 본’을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머거본’을 그 상호로 쓴 것이다.
다음으로 ‘푸르지오’는 한글 표기상으론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푸르지오’의 영문 표기가 ‘Prugio’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또한 얼마간 문제가 있다. ‘푸르지오’가 우리말의 형용사 ‘푸르-’를 활용한 것이라면 그 영문 표기는 ‘Pureujio’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ureujio’라 하지 않고 ‘Prugio’라 한 것은 군말할 필요도 없이 외국어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상호, 상품명 등에 우리말을 활용하는 것은 크게 환영 받을 만한 일이다. 현재보다 훨씬 더 우리말을 활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 상호, 상품명 등의 대부분이 외국어로 도배돼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이고세’, ‘푸르지오’ 등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들 또한 외국어로 가장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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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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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막걸리 - 천상병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 (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
금강산 - 한용운
만 이천 봉! 무양(無恙)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
너의 님은 너 때문에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온갖 종교.
철학.명예.재산, 그 외에도 있으면 있는 대로 태워버리는 줄을 너는 모르리라.
너는 꽃이 붉은 것이 너냐
너는 잎이 푸른 것이 너냐
너는 단풍에 취한 것이 너냐
너는 백설(白雪)에 깨인 것이 너냐.
나는 너의 침묵을 잘 안다.
너는 철모르는 아이들에게 종작 없는 찬미를 받으면서
시쁜 웃음을 참고 고요히 있는 줄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너는 천당이나 지옥이나 하나만 가지고 있으려무나,
꿈 없는 잠처럼 깨끗하고 단순하란 말이다.
나도 짧은 갈고리로 강 건너의 꽃을 꺽는다고 큰 말하는 미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침착하고 단순하려고 한다.
나는 너의 입김에 불려오는 조각 구름에 키스한다.
만 이천 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
∼∼∼∼∼∼∼∼∼∼∼∼∼∼∼∼∼∼∼∼∼∼∼∼∼∼∼∼∼∼∼∼~~~~∼∼
기차(汽車) - 정지용
할머니
무엇이 그리 슬어 우십나?
울며 울며
녹아도(鹿兒島)로 간다.
해여진 왜포 수건에
눈물이 함촉,
영 ! 눈에 어른거려
기대도 기대도
내 잠못들겠소.
내도 이가 아퍼서
고향 찾어 가오.
배추꽃 노란 사월 바람을
기차는 간다고
악 물며 악물며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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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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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시리(朝名市利)
朝:아침/조정 조. 名:이름/이름날 명. 市:저자 시. 利:이로울 리.
[유사어] 적시적지(適時適地). [참조] 일거양득(一擧兩得).
[출전]《戰國策》〈秦策〉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市場]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 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는 어전에서 ‘촉(蜀)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재상 장의(張儀)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위(魏),초(楚)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한(韓)나라의 삼천(三川)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주(周)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는 스스로 구정[九鼎: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이 패업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피폐(疲弊)케 할 뿐 무슨 명리(名利)가 있겠나이까?
신(臣)이 듣기로는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朝名市利]’고 하옵니다. 지금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옵고 주나라 황실(皇室)은 천하의 조정이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촉을 다투려 하시옵니다. 혹, 패업을 멀리하시려는 것은 아니옵나이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 장의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위(魏)나라 사람.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됨. 소진이 제(齊)나라에서 살해되자(B.C. 317) 6국을 순방, 유세(遊說)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連◈策)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함.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客死)함. (?~B.C.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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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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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5. 토사구팽 (2/2)
한편 팽월은 궁녀들을 끼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부하 장수 호첩이 급히 뵈러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어야? 하필 이런 잔치판에 달려 들어와 무엇을 간청하겠다고?"
"태도로 보아선 몹시 화급한 보고인 듯합니다."
별수 없었다. 팽월은 여자들을 떨치며 미적미적 일어났다. 유방은 항우가 죽고난 뒤 팽월의 초나라 토벌의 공적을 인정해 양왕으로 세운 뒤 정도(산동성)에다 도읍하게 했다. 한신에게는 초나라 땅을 주게 하고 팽월에게 진땅 우편 동해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주게 한 것은 장량이었다. 그들에게 그런 이익을 주어 초나라 토벌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던 그 사실 때문에 천하 평정 이후에도 떨떠름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던 유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진희가 대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즉시 팽월에게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징발하려 했다.
"에잇 참! 천하가 평정된 지금까지도 황제란 인간은 나를 참 귀찮게하네!"
팽월은 어쩌랴 판단하고 호첩에게 형식적으로 군사 1천을 주어 대땅으로 가게 했던 것이다.
"폐하의 진노가 몹시 크십니다!"
호첩은 돌아와 팽월을 보자마자 말했다.
"글세, 그대가 폐하께 잘 말씀드리지 그래. 내가 병이 깊어 친히 출병하지 못했었노라고."
"물론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그렇지만 대왕에 대한 감정은 풀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팽월은 술이 확 깼다.
"생각해 보니 걱정스럽구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으니 내 몸소 폐하께 나아가 사죄하리다."
그러자 뜻밖에도 호첩은 두 손을 완강하게 내저었다.
"아니 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가지 말라니?"
"대왕께서는 애초에 가지 않으셨다가 문책을 받고서야 가시려 합니까!"
"그래도 가는 게 옳지 않겠소?"
"가셔서 사로 잡혀 목숨을 잃는다 해도 괜찮으시겠다면 가십시오."
"무어? 목숨!"
"절대로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뭐!"
"능력있는 대왕께서 무엇이 두려워 겁을 내십니까!"
"능력이 나보다 갑절인 한신도 사로잡혔소!"
"그야 어리석게도 전날의 공로만 믿고 혈혈단신 폐하를 뵈러 갔으니 붙잡히지요. 대왕 역시 그런 식으로 묶이겠습니까?"
팽월은 난감했다. 호첩의 권고를 받아들이자니 자신이 없었고 가서 유방에게 사죄하려니 그 결과가 두려웠다. '어떻게 한다? 병들었다는 구실만 계속 대면서 미적미적 세월만 끌어?' 즈음이었다. 팽월의 신하 중에 태복벼슬에 있던 자가 있었다. 궁녀 중에 팽월에 눈에 든 미녀가 있었는데 태복이 그녀를 유혹해 도망을 쳐버렸다.
"그 년놈들을 당장 잡아오너라!"
군사를 풀어 태복을 잡기 위해 이잡듯이 수색을 하고 있었다. 수색망이 숨어있던 동굴 근처까지 조여오자 태복은 태복대로 겁이 덜컥났다. "어떡한다? 잡히면 우리 둘 모두가 참수될 텐데!"
궁녀가 대답했다.
"왜 그 방법을 취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방법?"
"지금 폐하께옵서는 양왕(팽월)을 의심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진희 반란 때 병사를 징발했는데도 양왕은 병을 핑계로 기껏 호첩 따위에게 군사 몇 주어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때부터 폐하께서는 양왕을 언짢게 보기 시작했지요."
"양왕을 무고하란 얘기요?"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무슨 수인들 못쓰겠습니까!"
"그렇군! 그렇지. 우리가 참수당하는 것보단 낫지."
태복은 궁녀를 데리고 유방한테로 달려갔다.
"폐하, 양왕의 신하로서 태복 벼슬에 있는 미미한 자입니다. 그런데 양왕이 호첩과 짜고 모반하려 하고 있기로 이를 폐하께 알려드려야 하겠기에 이토록 달려왔습니다."
"팽월이 모반을? 어떻게?"
"호첩이 충동질하였습니다. 양왕이 죄 입기를 두려워하고 있자 호첩이 그렇게 건의했던 것입니다." "그대는 양왕과 호첩의 모반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가?"
"소신의 애인이 궁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엄청난 사실을 엿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을 잡는 식으로 했다가는 팽월은 미리 알고 크게 모반을 하든가 아니면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양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급습을 하셔야 합니다."
유방은 태복을 내보낸 뒤 낭중령 장보를 우두머리로 하여 백여명의 시위군과 함께 조서를 들고 팽월을 잡아오게 했다. 팽월이 있는 정도에 도착한 장보는 팽월에게 조서를 당당하게 내보인 뒤 소리쳤다.
"황제폐하께서 대왕을 압송하라십니다."
"나를!"
팽월은 깜짝 놀랐다.
"무엇 때문에?" 팽월이 되묻자 장보가 대답했다.
"폐하께 모반하셨다는 정보가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모반을?"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팽월은 모반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결코 모반한 일이 없소. 그래도 압송당해야 하오?"
"깨끗하시다면 가시지요."
전날 호첩의 꼬드김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의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갑시다!"
"고맙습니다. 그 대신 대왕을 포박하지는 않겠습니다."
낙양으로 압송된 팽월은 일단 옥에 갇혔다. 진실이 밝혀져 곧 석방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팽월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팽월 몰래 호첩을 잡아와 닥달하자 호첩은 그만 그런저런 논의가 있었노라는 식으로 불어버렸다. 보고를 받은 유방은 중얼거렸다.
"결국 모반의 조짐이 있었군. 조짐만으로도 의법처단해야 옳겠으나 이제까지의 팽월 전공을 생각하면 차마 참수까지야 할 수 없지 않은가. 일단 서민으로 강등시켜 역마로 압송해 청의현(사천성)으로 귀양보내는 정도로 해야겠지."
여전히 장보가 압송했으므로 팽월은 묶이지 않고 수레에 앉아 귀양처로 가고 있었다. 그런대 정(섬서성)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마침 장안으로 들어오던 여후 일행과 마주쳤다.
"아아니 , 팽장군이 이게 웬일이시오!"
낙심하고 있던 팽월에게는 여후를 만난 사실이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묶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팽월은 압송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땅에 꿇어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억울하게 귀양은 가고 있습니다만 지금 촉땅으로 가게 되면 언제 다시 돌아와 폐하를 뵙게 될지 그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모쪼록 황후께옵서 폐하께 말씀드려 촉땅이 아닌 제 고향 땅 창읍에서만이라도 살도록 해주십시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여후는 흔연히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갑시다!"
"예에?"
"제가 폐하께 말씀드리지요. 어떻게 팽장군 같은 분을 귀양 보내시다니! 말도 아니되오. 나와 함께 낙양으로 되돌아갑시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 사면되도록 해드리겠소."
팽월은 그렇게 되어 낙양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로 돌아온 여후는 유방을 보자마자 화부터 냈다.
"폐하, 어떻게 일 처리를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무슨 얘기요?"
"제가 귀양가는 팽월장군을 중간에서 만나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뭐요?"
"그를 지금 촉땅으로 귀양 보내셨는데 그런 처사는 스스로 환란거리를 만드는 짓입니다. 팽월은 공신이면서도 천하의 맹장입니다. 그런 그를 살려두시다니요!"
"무슨 뜻이오?"
"차제에 그를 더욱 높여 쓰시든가 아니면...."
여후는 말끝을 흐렸다.
"그자는 모반자요. 목을 벨 수가 없기로 일단 귀양보냈던거요."
"아니되십니다. 팽월은 멀리 보낼수록 위험합니다. 복직은 시키지 않더라도 폐하 가까이 두십시오."
유방은 난감했다. 그러나 여후가 새파랗게 대들었으므로 팽월을 다시 귀양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팽월을 낙양에 묶어 두겠소."
한편 여후는 오라버니 여택을 불렀다.
"오라버니는 가서 정위 왕염개를 삶으시오. 팽월을 그냥 살려두었다간 큰일 나오. 팽월의 모반 혐의가 확실하다고 폐하께 주청하도록 하란 말이오!"
여택은 왕염개를 찾아갔다.
"이건 여후의 명령이오 어떤 방법으로든 팽월을 죽여야 하니까 왕정위께선 알아서 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을 땐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거요!"
놀란 왕염개는 옥에 갇혀있던 호첩을 기억했다. 왕염개로서는 팽월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날조된 공술서를 만들었다.
ㅡ신 호첩은 양왕 팽월과 함께 모반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에 혐의를 입고 신은 옥에 갇히고 팽월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팽월이 두 번씩이나 신이 있는 옥중으로 찿아와 전날의 모의 사실이 들통날까봐 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팽월의 모반 모의는 확실합니다. 그를 그냐 두었다가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서둘러 처리하십시오.
호첩의 진술을 날조해 만든 왕염개는 황제에게 상소했다.
"역시 팽월의 모반 혐의가 확실하단 말이지! 미천한 몸으로 일어나 천리의 땅을 석권하면서 날로 명예로워지던 그 명성이 애석하구나! 그러나 반여자는 어쩔 수가 없다. 그를 처치하라!"
경포는 마음이 심란했다. 작년에는 회음후 한신이 주살되고 얼마 전에는 양왕 팽월도 주살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 차례란 말인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에잇, 사냥이나 하러 나가자!" 회남왕 경포는 사냥놀이로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호위군사 수십 명을 데리고 궁궐 밖으로 나섰다. 바로 그 때였다.
"한나라 조정에서 회남왕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접견하신 후 되돌려 보내라는 폐하의 분부이십니다."
경포는 말에 오르려다 말고 한나라 조정에서 보낸 사자들과 마주쳤다.
"무어요. 선물? 한데 보낸 선물을 보기만 하고 되돌려 보내라는건 또 뭐요?"
"어서 접견이나 하십시오."
"어디 봅시다."
사자는 보자기에 싼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안에 무엇이 들었소?"
"몸소 보자기를 풀어보십시오."
보자기를 풀어 상자 뚜껑을 열어본 경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앗, 이게 뭐요! 팽월의 머리 아니오!"
"소금에 절였으니 쉬이 썩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자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건 무슨 뜻이오?"
"뜻은 모르겠습니다. 접견하셨으면 다시 돌아갈까 합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이번에는 내 차례란 말인가! 팽월의 머리를 보여주는 게 바로 그런 경고의 뜻이 아닌가!' 사냥갈 생각이 싹 없어졌다. 한나라 사자들이 돌아간 후 경포는 즉시 군막 쪽으로 말을 몰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만히 군사를 재배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올 테면 오라! 유방 그 늙은이는 이제 기력이 다해 싸울 능력도 없어. 그러니 보내더라도 보잘것없는 장수를 보낼 거야. 그까짓 것들 쯤이야. 사실 말이지만 내가 걱정한 건 한신과 팽월이 아니었겠나.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이제 죽었으니 나와 맞설 만한 인물이 천하에는 없지!' 그런데 경포에게는 몹시 사랑하는 총희 애희가 있었다. 애희는 몸이 자주 아파 의원한테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 의원의 저택은 중대부 비혁의 저택과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혁은 애희가 의원을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옳지! 애희한테 접근해 잘 구슬리면 내가 더욱 빠르게 출세하겠지!" 한때 비혁이 경포의 시중으로 있었기 때문에 실상 애희와는 안면이 있었다. 비혁은 그런 사실을 십분 이용하기로 했다. 비혁은 일단 의원과 친해둔 후에 애희가 찾아올 때마다 슬쩍 연락이 되도록 해두었다. 어느 날 애희가 왔다는 연락이 의원으로부터 왔다. 비혁은 준비해둔 패물들을 들고 애희 앞에 나타났다.
"중대부로 자리를 옮긴 이후로는 왕후를 뵙는 일이 드물게 되었습니다."
애희는 보석을 좋아했다. 의원으로 갈 때마다 비혁이 패물들을 가져다주었으므로 애희는 비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대부님을 뵙기 위해서라도 의원을 자주 찾아야 되겠습니다." 애희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로부터 비혁은 의원 댁에서 애희와 자주 어울렸다. 술도 마시며 함께 밤을 샐 정도로 가까워졌다. 애희는 어느 날 밤 경포에게 슬며시 말을 꺼냈다. "대왕, 중대부 비혁이 있지 않습니까. 의원으로 갔을 때 거기서 만나 가만히 살펴보았는데 역시 그 인물됨이 관인장자인 듯했습니다. 높이 써 주시지요."
기회가 아주 좋지 않았다. 팽월의 잘린 머리를 본 후로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경포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엇이! 너 그자를 어떻게 그토록 잘 아느냐!"
"잘 안다기 보다.... 비혁님은 전날 대왕의 시중으로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부터 눈여겨 보아온 바로는...."
"그자가 중대부 벼슬자리로 옮겨 앉은 이후로 어떻게 친하게 되었느냐고 묻고 있는 중이다!"
"비혁님은 의원 댁의 앞집에 삽니다. 제가 우연히 만나게 된 바도 의원 댁 앞에서 였으며 그 때부터 종종 얼굴을 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만 있자! 너 그렇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 부려가며 자주 의원으로 드나든 이유가 그놈을 만나기 위해서였지!"
"대왕께선 무슨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흘려들은 얘기도 있다. 요즘 너의 행동에 수상한 데가 있다고!"
"비혁님을 중용하지 않으면 그뿐이지 왜 저한테까지 그분과 결부시켜 저를 난처하게 만드십니까!" "시끄럽다! 네가 아무리 잡아떼도 틀림없이 비혁이 그놈과 네년이 간통이라도 한게 분명해!"
"무엇이라구요!"
"두고 보라고. 그자를 잡아들여 거꾸로 매달아 곤장 몇 대만 때리면 네년과의 간통사실을 불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비혁이 벌받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애희는 이튿날 새벽같이 간밤에 있었던 사실을 사람을 시켜 비혁에게 알렸다. 비혁은 덜컥 겁이 났다. '어떻게 하나! 경포는 나를 보는 순간 잡아 묶고 매질을 할 텐데!' 그 때부터 비혁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경포의 분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럴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혁의 생각은 완전한 오산이었다. 비혁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경포는 더욱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음, 그렇다면 그자의 밀통 사실은 더욱 확실하다! 가서 비혁을 당장 체포해 오도록 하라!"
혹시나 해서 비혁은 보따리를 싸놓고 있는데 쾅쾅 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문 열어라!"
'이크! 드디어 나를 잡으러 왔구나!' 비혁은 뒷문으로 해서 미리 준비해둔 말을 타고 멀찍이 도망쳐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갈 곳이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결국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주인을 잡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비혁은 장안으로 향해 말을 몰았다.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비혁은 상주문을 써서 궁으로 넣었다.
ㅡ경포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큰일이 터지기 전에 붙잡아 주멸하십시오. 상주문을 읽은 유방은 상국 소하를 불러 물었다.
"정말 뜻밖이오. 이걸 읽어보오."
비혁의 상주문을 읽은 소하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글쎄요. 경포가 모반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선 그럴 이유가 도무지 없거든요."
"그렇지만 팽월의 목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도 그렇게 될 줄 알고 정작 모반을 계획했을지도 모르지 않소."
"하오나 그 점은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단은 경포에게 원한을 품은 비혁의 터무니없는 무고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비혁을 가두어놓고 노골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해 경포의 행적을 조사해 보도록 하지요."
"그게 좋겠소."
한편 경포는 얼마 있지 않아 한나라의 조사단이 와서 모반을 수사한다고 하자 더럭 겁이 났다. '비혁이 도망쳐서 반란을 상주한 게 틀림없다! 더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군사를 재배치했던 사실까지도 일러바쳤겠지! 그렇다면 길은 단하나. 더 머뭇거릴 수가 없다!' 경포는 우선 비혁의 일족을 붙잡아 몰살해 버렸다. 한나라의 수사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스럽다는 표시였다. 수사대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즉시 장안으로 보고서를 올렸다.
ㅡ틀림없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경포가 모반한 점은 사실입니다. 고조 유방은 즉시 여러 장수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혈기왕성한 장수들이라 대답은 한결같았다.
"총공격해서 그놈을 붙잡아 묻어 죽일 뿐입니다! 제깐게 일을 벌인들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후영은 침착했다.
"폐하, 경포는 그토록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선 그의 반역 이유를 자세히 안 뒤에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전날 초나라 영윤으로 있던 설공이 마침 식객으로 집에 와 있는데 불러서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소. 어서 불러오시오."
설공이 입궐했다. 하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경포의 반란은 어찌된 셈이오?"
"경포의 반란은 당연한 것이지요."
"아니, 당연하다니요? 폐하께서는 경포에게 땅을 크게 갈라 옹으로 삼았으며 작위를 나누어 존귀한 직위에 있게 했는데 무엇이 부족해 느닷없이 반란을 일으킨단 말이오?"
"폐하께서는 작년에 팽월을 죽였고, 재작년에는 한신을 죽였습니다. 경포는 그들과 똑같은 대공을 세운 장수입니다. 이번에는 자기가 죽게되는 차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느니 차라리 모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오, 그렇게 되는 것이구려. 그러면 경포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반란을 획책할 것 같소?"
유방의 질문에 설공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세 가지 계략중의 하나를 쓸 것입니다."
"세 가지 계략?"
"경포가 만일 상계를 쓴다면 산동(여섯 나라의 옛땅)땅은 이미 그의 것이 됩니다."
"그 상계라는 게 어떤 거요?"
"경포가 동쪽으로 나가 오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돌아 초를 점령하고 제나라를 병합한 뒤 노를 간단히 수중에 넣고 연과 조에 격문을 보낸 다음 자기 영토를 고수하면 산동의 땅은 한나라의 소유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그 묘하군! 중계는 뭐요?"
"만일 경포가 중계를 쓴다면 싸움의 승패는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동쪽으로 나아가 오를 공략하고 서쪽으로 돌아 초를 점령한 뒤 한을 병합하고 위를 점령해 오창의 곡창을 끼고 성고의 입구를 막아버리면 승패의 운수를 헤아리기 어렵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방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렇다면 하계는 어떤 거요?"
설공은 유방의 기분 따위는 모른 척하고 대답했다.
"만일 경포가 하계를 쓴다면 폐하께서는 베게를 높이 베고 편히 쉬실수가 있습니다. 즉 동쪽으로 나가 오를 공략한 뒤 서쪽으로 진출해 하채를 점령해 중추적인 방위부대를 월(절강성)로 돌리고 자신은 장사로 돌아간다면 폐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자는 삼계중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하계를 씁니다."
"아니, 상계 중계 모두 버리고 하필 하계를 선택한단 말이오?"
"그자의 취향이며 능력의 한계지요. 경포는 원래 여산의 형도 출신입니다. 자신이 만승대국의 군주가 되긴 했으나 처음부터 백성 만대를 위해 거병한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개인을 위해서 이룬 공적일 뿐입니다. 그런 인품이라 하계를 쓸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럴 듯하다! 그대의 현명한 판단도 큰 공적이 되오. 천호후에 봉하겠소."
유방은 황자 유장을 짐짓 회남왕으로 삼은 뒤 몸소 군사를 이끌고 경포를 치러 나갔다.
한편 몸소 유방이 원정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경포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유방 그 늙은이는 이젠 아무것 아니다! 단번에 때려부셔 놓겠다!"
경포는 자신있었다. 그래서 우선 동쪽으로 나가 유가가 왕으로 있는 형(오)땅을 쳐서 패주하는 유가를 부릉(안휘성)까지 쫓아가 죽였다.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설공이 예언했던 대로 하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포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경포는 형땅 군사를 모조리 탈취해 회수를 건너 이번에는 과연 초땅을 공략했다. 그런데 초의 장군 주길은 경포의 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세쪽으로 나누어 포진했다. 걱정이 된 부관은 주길에게 말했다.
"경포는 본래 용병에 밝아 그의 이름만 들어도 군사들이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손자의 구지편에 보면 산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병사들이 자기 고향에서 싸우면 고향에 미련을 두어 사방으로 흩어져 패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처지에 우리 군대가 셋으로 나눠졌으니 한쪽만 격파되어도 두 편대의 군사들은 도망하기 십상입니다. 결코 서로를 구원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길을 발칵 화를 냈다.
"네놈이 무얼 안다고 병법을 지껄여! 이겨보일테니 앉아서 구경이나해!"
주길은 부관의 권고를 듣지 않고 경포군과 맞닥뜨렸다. 경포는 과연 세 쪽으로 분산된 군대 중에서 무작위로 1개 군단 쪽으로 휘몰아쳐왔다. 그랬더니 다른2개 군단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산했다. 경포는 승승장구했다.
"이 여세를 몰아 유방의 군사까지 때려 엎는다!"
드디어 회추(안휘성)에서 유방의 군사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유방 쪽에서 바라보니 경포의 군사는 매우 정예로워 보였다. 용성으로 진지를 옮긴 뒤 누벽을 쌓고나서 다시 경포의 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렇지! 항우가 즐겨 쓰던 진법으로 바꾸었구나. 그게 네놈의 한계지. 이제 너는 죽었다!' 유방은 경포를 우대했던 그만큼 경포의 반란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 바라보면서 경포에게 소리질렀다.
"무엇이 부족해 그래 모반까지 했느냐!"
경포는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
"왕노릇은 해봤으니, 이제는 황제가 되고싶어서 그랬다!"
"아무나 황제가 되는 줄 아느냐."
"너같은 자도 황제가 되는데 나라고 해서 못할 건 또 무언가."
"무엇이!" 그것을 신호로 유방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나갔다. 경포의 군사는 쉽게 무너졌다. 회수를 건너와 경포의 독려로 몇 차례 유방한테 도전했지만 번번히 패하고는 도망쳤다.
"안 되겠다. 일단 피했다가 다시 와서 도전하겠다!"
경포는 백여 명의 군사만 거느리고 강남으로 달아났다. 경포는 원래 파양의 성주 오예의 딸과 결혼했었다. 장사왕으로 있는 오예의 아들 오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쪽으로 달려갔던 셈이다. 오신은 난처했다. 결코 경포가 반가운 손님일 턱이 없었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그를 박대할 수는 없었다.
"유방이 들이닥치면 우리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월나라 쪽으로 도망쳤다가 사태가 진정될 때를 기다려 뒷일을 다시 도모합시다."
오신은 경포를 꾀어 파양으로 데려갔다. 경포는 그를 믿고 멋모르고 따라간 것이다. 경포는 자향의 시골 농가에 신분을 숨기고 숨어 지냈다. 그런데 한 때 경포 밑에서 종군한 적이 있는 농부 하나가 경포를 알아보았다.
"여러분, 저자가 바로 경포요. 폐하의 군대가 이쪽으로 들이닥치면 그를 숨겨준 우리까지 피해를 보게 되오. 그러니 우리 고향 사람들이 의논해 경포를 처리해야 할 거요!"
그날 따라 경포는 기분이 울적했다. 마을에서 외진 주막으로 나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썩 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오신이었다. 오신의 등 뒤로 몇 개의 그림자가 일렁거렸지만 오신의 호위병이겠거니 하고 경포는 개의치 않았다.
"벌써 많이 드셨군요."
"괜찮소. 그런데 오늘따라 기분이 유난히 뒤숭숭하구려."
"그야 쫓겨 오신 몸이니 평온할리야 있겠습니까. 하오나 유방의 군사가 이쪽의 싸움을 포기하고 회군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재기의 기회가 올 듯도 싶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제 아들 유장을 데리고 와서 회남왕으로 삼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까짓 애송이는 대왕께서 한번만 밀어부치면 털썩 무너질 텐데요."
경포가 갑자기 비감스러워 하는 것을 오신은 눈치 챘지만 짐짓 모른척했다.
"그렇습니다. 몸에 형벌을 받으시고도 시골에서 일어나시어 그토록 왕의 지위라는 갑작스런 성공을 하신 것만 보아도 말씀대로 다사다난하셨습니다."
"또 있소. 항우가 구덩이에 묻어죽인 사람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소. 그럴 때마다 항상 선두에서 그일을 해치운 사람이 바로 나요."
"그렇게 하셨기에 왕이 되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경포는 술이 너무 취했는지 앉은 자리에서 스르르 넘어졌다. 오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토록 악한 일을 많이 했으니 그대 자신도 온전하게 죽지 못하는 게 아닌가! 또한 화근은 총희인 애희한테서 일어났고 질투는 우환을 낳았으며 끝내 그대는 나라까지 잃고 말았어!" 오신은 주막을 나서며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함께 온 자객들이 우루루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자객들은 자향의 농부들이었다. 얼마 후 목이 잘린 경포의 시체가 실려 나왔다.
"됐다. 이자를 들고 폐하 앞으로 가도록 하자."
경포의 목을 확인한 유방은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돌려버렸다. 유방은 다시 황자 유장이 회남의 왕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비혁을 들어 기사후에 봉했다. 또한 공적으로 봉을 받은 장수들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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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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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46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말을 정말로 믿는 듯한 태도를 보여라. 그 사람은 열에 들떠서 마구 떠벌리다가 결국 허위의 껍질을 저절로 드러내게 된다. 그 사람이 실수로 자신의 비밀 한 자락을 말한다면 이끌려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될 것이다.
47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반박하지 마라. 그 사람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바꾸는 일은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하더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리석음의 강에서 헤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그것이 호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거라고 해도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쉽지만, 잘못을 시정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48
그대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흥분하지 마라. 지성의 본질은 냉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되면 상대방은 그것을 과장이나 허위라고 생각할 것이다.
49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신임하는 것은 주로 태만과 허영과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자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태만이다. 다른 사람을 신임함으로써 자신이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허영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신임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잘못된 일이다.
50
이 세상은 한 편의 연극이나 엉성한 영화에 불과하다. 철학 강좌는 진리의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그곳에서도 진정한 진리를 찾을 수는 없다. 진정한 진리의 발견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교회의 종소리와 법당의 풍경 소리 역시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알맹이가 없는 껍질일 뿐이다. 진리는 영혼의 장막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진리가 그 껍질 속에 들어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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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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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총독부의 가공할 사적파괴령 비밀문서
처음엔 석탑 자체에만 눈독을 들여 어떠한 어려운 운반조건도 무릅썼던 일본인 무법자들은 차차 탑 속에 들어 있는 사리장치 유물만 꺼내는 새로운 범행을 병행시키게 되었다. 이 새로운 목표물은 무거운 큰 덩어리의 탑재들을 많은 인원과 시간을 동원하여 불법반출하는 모험에 비하면 훨씬 손쉽게 성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탑이 깨져 나가거나 말거나 밀어서 무너뜨리고, 혹은 사리장치가 있음직한 부분의 탑재 사이에 지렛대를 넣어 들어올린 후 유물만 꺼내는 일은 몇이서 하룻밤 사이에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데다가 잘 걸리면 작은 순금불 같은 굉장하고 진귀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악당들의 목표물은 더욱 다양해졌다. 석탑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노리는 범행은 1920년대에 급격히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바람에 반출당하는 화를 면했던 탑들도 성한 것이 없게 되었다. 탑의 생명으로서의 비장품인 사리장치 유물, 곧 삼국시대 이후의 금·은 혹은 금동제의 작은 불상·보탑·합 기타 사리병과 그 외함들을 약탈당하고 시신처럼 기울거나 파괴되어 균형을 잃은 탑들이 곳곳에서 일제 아래의 비운을 통곡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엽의 일이었다. 개성 시외에 있는 고려시대의 현화사칠층석탑 속의 사리장치를 노린 악당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고 무섭게 천둥이 치는 밤중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 탑신을 폭파했다. 가까운 주민들은 그 소리를 번갯불 천둥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날이 밝은 후에야 석탑의 처참한 수난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탑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상처투성이나마 제자리에 서 있는 기적이었다. 범인들은 얼마 후 경찰에 잡혔으나 그들이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사리장치의 금제유물은 벌써 금은방에 가서 두드려 짓이겨진 뒤였다. 1934년 11월 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당시 보물 제15호의 지정문화재였던 '고달사터 부도'(현재 국보 제4호)의 내부 유물에 손을 댄 자가 있었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피해보고가 기록돼 있다.
"부도 전방 약 10m 거리에 있는 장군석을 들어다 부도의 기단 옆으로 기대놓고, 기계를 사용하여 연대(앙련이 조각된 상대석)를 한쪽에서 들어 올린 다음, 그 짬에 작은 돌들을 끼워 간격을 고정시킨 후, 내부를 뒤진 흔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기단 속에 고물(금속유물)을 넣었을 장치(사리장치)가 없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취당한 것으로 인정됨."
무엇보다도 일제의 발악적인 석조문화재 파괴와 무자비한 유린은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각 도경찰부장에게 지시·명령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던 일제가 미·영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패색에 휩싸이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애려고 든 것이다. 가령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를 비로해서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남쪽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 땅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을 새긴 비석 같은 것들을 남김없이 말살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의 격파기념비 목록을 다음과 같다.
1. 고양 행주전승비 2.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3. 공주 명람방위종덕비 4. 공주 명위관임제비 5. 공주 망일사은비 6. 아산 이순신신도비 7. 운봉 황산대첩비 8. 여수 타루비 9.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10.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현재 보물 제503호) 11.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12.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13.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14.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 15.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16.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17. 연안 연성대첩비 18. 경흥 전보파호비 19. 회령 고충사타 20. 진주 촉석정충단비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시국적인 고적은 소관 도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실제 내용은 파괴)시켜도 좋다고 결정했을 때의 가공할 비밀문서의 내용이다. 1943년 11월 24일 기초된 이 문서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경부국장에게 넘겨준 후 각 도경찰부장에게 비밀지령으로 하달되었다.
"수제: 철거할 물건중 '황상대첩비' 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 방법을 강구할 것. 참조: '황산대첩비' 는 보존령(총독부 고적 및 유물 보존령)에 따라 지정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 존재는 당시 일본인 해외 발전의 사적의 증징이기도 하고, 그 비석의 형식은 미술상·학술상 시대의 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지에서 보존시킴이 이상적이겠으나 그 존재가 치안상 철거해야겠다는 관할 경찰당국의 의견은 현시국에 부득이한 것으로 간주됨.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당국에 일임하는 바임."
이 비밀문서 뒤에, 앞에서 소개한 파괴 대상의 비석 목록이 첨가되었는데, 제목은 '황산대첩비' 를 예로 든 (현존 유사품 일람표)였다.이후 각도에서는 일제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이땅의 역사적 민족적 항일기념유적들이 모조리 파괴당하는 통분스런 일을 겪게 되었다. 1380년 9월에 당시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이지란 장군관 함께 지리산 근방에 침입한 왜적 아지부대를 크게 무찌른 승리의 사실이 새겨져 있던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의 '황산대첩비' 가 맨 먼저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었다. 총독부의 승인을 받은 전북 경찰부장은 1577년에 건립되어 400년 가까이 민족의 한 수호비로 살아 있던 '황산대첩비' 를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무자비한 발악의 상징이었다. 대첩비가 섰던 자리엔 지금 한두 조각의 비편만이 남아 일제 치하의 잊을수 없는 굴욕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고, 사적 제104호로 지정돼 있다.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황산대첩비' 가 세워졌다.
합천 해인사에 세원져 있던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인 승병장이자 고승이었던 사명대사의 '석장비' 는 경남도 경찰부장의 지시·명령에 따라 1943년 12월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의 건봉사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사명대사의 기적비도 같은 때에 같은 운명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최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 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혹은 왜군 격파기념비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도록 비밀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주민들은 그것들이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드디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했고 이 땅엔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해남과 여수의 지방유지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일제에게 빼앗겼던 이충무공 대첩비들의 안전 여부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그럽게도, 그것들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으나, 파괴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후 지방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져 갔다. '명량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땅속의 쇠솥에서 나온 형제불
1907년 어느날,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사람 하나가 땅을 파다가 우연히 뚜껑이 덮인 옛날 쇠솥 하나를 발견했다. 솥 안에는 금빛도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둘이나 들어 있었다. 선량한 발견자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마을에 알렸다. 그러자 당시 부여 지구에 파견돼 있던 이른바 통감부 소속의 일제 헌병대가 알고 압수의 손길을 뻗쳤다. 주인이 나타날때까지 유실물로서 보관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난리때, 어느 절의 중들이 부처님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땅속 깊이 안전하게 묻어놓았다가 다시 캐서 절로 모셔갈 기회를 갖지 못하든 바람에 영원히 잊혀져버렸으리라 추측되는 그 작은 금동불들을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관한다던 일제 헌병대는 1년 후에 가서 결국 '임자 없는 물건' 이라 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경매에 붙였다. 저들 멋대로의 압수와 처분이었다. 불상의 낙찰자는 니와세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크기는 약간 다르나 백제 시대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인 금동관음보살입상 둘을 독차지한 것인데, 겉으로는 경매입찰이었으나 내막은 헌병대를 통한 단독 점유였을 가능성이 짙다.
니와세는 1922년에 그가 갖고 있던 두 개의 백제 금동불 중 하나를 대구의 이치다(1930년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을 불법적으로 입수하려고 했던 자)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15년 전에 땅속의 한 솥에서 나왔던 형제불은 그후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크기가 약간 작아 동생뻘이었던 것(높이 약 22.8cm)은 해방 후 서울에서 압수, 귀속재산으로 국립박물관에 들어갔으나 대구로 가 있던 형뻘 되는 불상(높이 약 28cm)은 소장자였던 이치다가 해방후 일본으로 숨겨 갖고 간 듯, 아주 사라져버렸다.
고려자기나 석탑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제 때의 고적 혹은 고미술 관계서적이나 도록에 무수히 소개돼 있는 일본인 소장의 귀중한 불상들이 오늘에 와서 거의가 행방불명이며 국내에서는 완전히 찾을 수가 없다. 그 태반이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일제 초기부터 일본인들은 석탑류에서처럼 이 땅의 대소 불상 유물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날뛰던 일부 악질 일본인들은 곳곳의 폐사지에서 석탑과 함께 석불도 걸리는 대로 불법반출하여 돈 있는 일본인 사회에 팔아 넘겼고, 순금 혹은 금동제의 작고 값나가는 불상을 약탈하기 위해서 시대가 오랜 석탑이나 부도를 무너뜨리고 그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훔쳤다. 그런가 하면 살아 있는 사암에서 약탈하거나 매수하는 방법도 썼다. 그들의 악랄한 약탈품 가운데 국보적인 가치를 갖는 어떤 불상은 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으로도 비싼 가격으로 팔려 들어갔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 이 땅의 각종 불상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고조시킨 것은 고려자기나 석탑류의 경우처럼 역시 일본인 전문가들의 고적조사 보고와 강연회였다. 한 일본인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1915년 5월이었다고 생각된다. 세키노 박사가 서울 남산여학교 강당에서 고적조사의 보고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치(일본 본토)와 계열을 같이 하는 불상이 조선에 많이 있을 걸로 생각하고 많은 사원을 조사해 봤으나 비교적 적었다. 어디선가 나타날 거라고 주의해 보았더니 근자에 와서 여러 곳의 절터, 산속의 동굴, 경작지 같은 데서 하나둘씩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왕가박물관의 많은 불상은 그런 경위로 모여진 것들이다.' 사실 그후에도 삼국시대와 신라의 불상들이 무수히 출토되고 있다. 박사의 강연이 있은 후, 어떤 사람(물론 일본인)이 높이가 약 23cm쯤 되는 금동불상 하나를 들고 가서 박사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강원도 산 속에서 나왔다는 그 불상을 본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 '이건 굉장한 삼국시대 불상이다. 이런 것이 민간에 나돈다는건 곤란한 일이다' 고 주의를 시키는 것이었다."(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
삼국시대 최대의 걸작 금동반가사유상
앞에서 세키노 박사의 불상 관계 강연과 당시 어떤 일본인이 입수해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귀중한 금동불상에 대해 언급한 아사가와는 또 이런말을 쓰고 있다.
"흠명천황 때(일본 역사의 6세기 중엽)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일본으로 '도래'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의 옛 땅인 부여지방에서 아스카(일본 역사의 6∼7세기 문화)식의 불상을 찾아 구해 봤더니 과연 그런 것들이 출토되는 것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이 백제의 불상을 찾아 헤매던 때의 짤막한 증언인데, 그렇다고 그들의 발길이 부여 쪽으로만 향했던 것은 물론 아니고, 경주의 신라 유적지와 기타 모든 지역의 절터. 혹은 살아 있는 사찰에도 거침없이 그들의 검은 손길은 뻗쳐나가고 있었다. 역시 한일합방 이전부터였다. 두 패의 일본인 악당들이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정확히 어느 지역의 어떤 절에서 약탈해 온 것인지 일체의 경위를 흐린 채 서울로 불법반출해 온 삼국시대의 최대의 걸작 불상 2구가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보 중의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구가 그것이다. 학계가 아직 원위치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이 두 반가상 중이 하나는 1912년 2월 21일에 이왕가박물관이 2,600원이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서울에서 사들였는데, 그때 그것을 판 자는 무법의 약탈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거나 그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던 고물상인 가지야마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정말 일확천금을 한 운수 좋았던 악당이었다. 총독부는 그의 불법적인 행위를 모른 체하였고, 결국 범인은 누구한테도 그 반가상의 반출지를 추궁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위의 개인적인 질문에도 원위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한 다른 지역을 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것은 악당들의 고의적인 증거인멸 술책이었다. 이후 전문가들은 뚜렷한 증거나 자료가 없이 범인들이 작전상 퍼뜨린 것으로 믿어지는 풍문을 따라 불확실한 위치를 말하게 되었는데, 세키노도 "이 반가상은 경주 남쪽 오릉 부근의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 1933년에 발표한 논문 (조선 삼국시대의 조각)에 쓰고 있다. 이왕가박물관이 그것을 입수할 때에도 반출지는 경주지방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아사가와는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놀라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의 광채로 모셔지기까지에는 당시 관장이었던 스에마쓰의 고심이 많았는데, 그에게 들은 바로는 출현지로 믿어지는 경주로부터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는 표면을 두터운 호분으로 칠하고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눈꼬리가 처지고 꼬불꼬불한 수염에 까만 눈동자 그리고 입술은 빨갛게 칠해져 고색은 커녕 더럽혀진 흰벽과 같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더운 물로 닦아내고, 금빛을 안정시키기 위해 젖은 거적으로 싸고 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볼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사가와의 회고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앞의 반가상이 세키노가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출현'(발견), 곧 어느 살아 있는 사암에 엄연히 전해되던 것을 몰래 약탈, 아니면 협박 혹은 매수하여 서울로 반출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세키노의 '경주지역 출토설' 인용을 신뢰성 없는 말로 만들고 있는 것은 1915년에 이네다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있어서의 불교예술 연구)라는 글에서 이왕가박물관의 반가상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다.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는데 삼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며 세키노 박사도 삼탄하였고, 또 독일의 박물관 기사도 와 보고는 십만 금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라고 하였다."
이네다는 한일합방 전에 한국에 건너와 충남 계룡산에 머물면서 한국의 불교문화와 유물을 조사·연구했던 일본인이었다. 그는 한국말도 꽤 잘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이왕가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에 언급하여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 단정적으로 쓴 데는 그만한 확실한 정보와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 그것이 서울로 올라간 해가 정확히 1910년이었다는 대목도 신빙성 있는 증언이다. 그렇다면 그 반가상은 서울로 불법반출된 후, 2년 동안 몇 다리를 건넜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가지야마라는 일본인 악당이 감추어 갖고 있다가 이왕가박물관의 스에마쓰 관장과 은밀히 접촉한 끝에 2,600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무사히 팔아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사가와가, "그것을 박물관이 입수하기까지에는 스에마쓰 관장의 고심이 많았다"고 쓴 회고담은 그때 가지야마가 값을 워낙 호되게 불렀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3,000∼4,000원쯤 내라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반가상은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 는 이네다의 기록은 세키노의 자신 없는 '경주지역 폐사지 출토설' 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만일 경주가 아니라 충남의 어느 벽촌이 정확한 반출지였다면 그 반가상은 신라가 아니라 백제불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가정이 성립된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도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 고 회의를 표했었지만 가장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전문가는 황수영 교수였다. 황교수는 1960년의 (역사학보) 13집에 발표한 (백제 반가사유석상 소고)에서 이네다의 증언기록에 주목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논급하고 있다.
"이네다 역시 정확한 지명이나 전세, 출토의 구별이 없이 충청도 벽촌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벽촌에 있던 이름없는 사암 같은 곳에서 발견, 반출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키노 박사가 만약 '충청도 벽온으로부터의 출래설' 을 전문의 '경주지역 출토설' 과 함께 기록하였던들 이 유상(반가상)은 신라설에 앞서, 또는 동시에 백제의 것으로도 추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충청·백제설' 은 전혀 표면화되지 못하고 오직 '경주·고신라설' 만이 유독 신봉되고 고수되면서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 거기에 의문을 제게한 사람이 없었다."
이왕가박물관이 문제의 반가상을 입수하던 1912년에 형태와 크기가 거의 같은 또 하나의 걸작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이 어디선가 불법반출되어 서울에서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아 데라우치 총독 관저에 기증형식으로 들어갔는데, 세키노 박사의 기록을 빌리면 그때의 기증자는 후치가미란 자였다. 그의 정체도 가지야마와 같은 일당의 장물아비였거나 고물(문화재) 약탈의 배후의 조종자였던 것 같다. 총독 관저에 들어간 반가상에 대해서도 세키노 박사는 "액석하게도 출처가 명백하지 못하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발견된 것인 듯하다" 고 자신 없는 추측에 그친다.
모두가 일본인 무법자들이 유물의 불법적인 반출지나 출토지를 전혀 말하려 하지 않아꼬, 또 반출 혹은 약탈경위와 증거를 완전히 인멸시킨 때문에 생긴 학계의 안타까운 수수께끼들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인 무법자들로부터 기증받아 개인 소유로 총독 관저에 갖고 있던 반가상은 그가 총리대신으로 승격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던 때인 1916년 4월 18일, 총독부박물관(1915년 발족)에 기증되었다. 학계가 알고 있는 걸작 불상을 차마 도쿄로 실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912년에, 하나는 이왕가박물관에 그리고 또 하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됐다가 총독부박물관에 들어온 원위치 불명의 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은 현재 모두 세계적인 명품이며, 국보 제83호와 제7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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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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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족청계 쿠데타설의 소문을 들은 김윤옥은 어느 날 밤, 신당동에 살고 있는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도 장면과 이범석은 절친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였다. 이러한 사이를 잘 알고 있던 김윤옥은 호소를 겸해서 진상이나 알아보려고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한데, 이범석은 김윤옥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벌컥 화부터 내며 쏘아붙였다.
"지금 세상에 족청계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네들 이젠 정권을 잡으니 족청의 망령까지도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족청의 망령까지도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라니요?"
김윤옥도 발끈해졌다.
"나는 혹시 이런 소문 때문에 장군님한테 행여 해가 돌아갈까, 걱정이 돼서 전화를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냐구요? 그래 장군님의 인격이라는 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돼요?"
"뭐 인격? 아니 이 여편네가......."
"뭐 여편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남과 여, 그것도 육순이 훨씬 넘은 노인네들이 전화통에 대고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쓴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광경이라 할 수 없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은 이런 일화까지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희영은 족청계 쿠데타의 진상을 가려내고자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중시킨 결과 그에 따른 보상이 있었다. 3월 중순이었던가?
"청요리집에서 박정희 장군이 박병권 소장하고 밀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는 정보가 날아들어 왔다.
"박정희 장군이 박병권 소장하고?"
이희영의 촉각이 곤두설 만한 정보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그가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확신을 품고 있던 인물, 그런 인물이 지금 박병권(朴炳權)과 만나고 있다면 <뭔가가 있다> 하고 촉각을 세울 만한 일이었다. 박병권이란 어떤 인물이었던가? 그는 충청남도 논산 태생이었다. 1920년생이니까 박정희보다는 세 살 아래였다. 그러니까 1961년 당시 마흔한 살, 해방 전 해인 1944년 봄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했다.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에 시초였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그는 민족청년단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를 민족청년단 출신이 아니니까 족청계라 할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그를 족청계 취급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내용을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었다. 민족청년단을 만든 이범석이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자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서 초대 국모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발탁됐는데, 이때 박병권이 이범석의 국방장관직 부관으로 기용됐던 것이다. 박병권이 족청계로 몰리게 됐던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 터에 그가 장군으로 승진을 하자, 민족청년단 출신 장교들이 의식적으로 상관없이 족청계로 낙인찍히고 말았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라."
이희영은 지시와 함께 이 방면에 능통한 요원을 즉시 관해관으로 밀파했다. 이 무렵에 도청기가 발명돼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군 수사기관에 그런 문명의 이기가 마련되어 있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단 말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요원이 청요리집 보이로 가장해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는 방에 들락날락하면서 도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방법이야 요원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하여간에 이희영은 사계의 전문요원들을 관해관으로 급파했다. 나누었던가?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박병권이 먼저 박정희에게 <장군, 두 그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쿠데타 계획을 합칩시다>고 제의했던 바, <이미 모든 계획이 완성돼 있는 마당에 두 그룹을 합치게 되면 오히려 혼선을 빚어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박정희가 박병권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박정희가 박병권에게 <소문에 듣자하니 장군께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계획하고 추진중에 있는 것과 합치는 것이 어떻소?> 하고 제의했던 바, 박병권이 <쿠데타라니요? 나는 그런 것을 계획한 일도 없고 상상조차 해본 일도 없소. 군인은 군인의 길이 따로 있는데 무엇 뛰어들려 한단 말이오?> 하고 쿠데타 계획그 자체를 부인했다는 설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설을 놓고 볼 때, 아무래도 후자의 설이 옳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박정희 쿠데타 정권하에서 박병권의 언어 행동, 또 그가 정치하고는 전혀 담을 쌓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후자 쪽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야 어찌됐든, 이희영이 이렇게 쿠데타에 대한 정보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리다시피 되어 있을 때에 장세현이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신고하겠다고 하면서 찾아왔던 것이다.
"장 중령, 좀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만......."
장세현의 고발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오늘 아침이란 1961년 4월 21일 월요일 아침을 말한다. 장세현의 집은 인천(仁川)이었다. 그가 아침에 육군본부의 출퇴근용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 버스가 인천역 앞에 정거했을 때였다. 그곳에 같은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육군 대령 이종태9李鐘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합승택시를 타려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래서 이 버스를 타라고 손짓을 보자 그제야 이 버스가 육군본부 출퇴근용 버스라는 것을 알아챘던 모양이었다. 그는 버스에 올라오자 장세현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입니까, 인천엔?"
"내 집이 인천 아니오. 어제가일요일이기에 집에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오."
이종태는 육군본부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근길의 무료함을 메꾸기 위해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소문으로 나돌고 있는 군부 쿠데타설에도 화제가 미쳤다.
"이 대령님은 쿠데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요하겠지요."
"긍정적이란 말씀이군요?"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가자고 데모를 하는가 하면 정치가 이처럼 무질서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런 것도 필요치 않겠소?"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봄직한 일이오만."
이종태는 덧붙였다. 한데, 바로 이 덧붙인 대목에 대해서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리게 된다. 이종태는,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봄직한 일이오만> 하고 말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서, 장세현은 이종태가 <그래서 지금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해서 젊은 장교들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 두 사람의 주장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종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장세현이 별것도 아닌 그 말 한마디만을 가지고 일부러 506방첩대까지 찾아가서 <쿠데타 정보가 있다> 운운하며 신고를 했을까? 이 대목에 관한 한 이종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설을 했기 때문에 장세현이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소공동에 있는 506방첩대로 일부러 찾아가 신고를 하게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심증이 가게 된다. 장세현의 신고가 있자, 이희영은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즉시 이종태를 호출했다.
"506방첩대로 나오라."
여기에 대해서도 이희영과 이종태의 신고가 있자 즉시 이종태를 호출햇다고 하고, 이종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진해서 506방첩대로 출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종태의 주장을 그가 남긴 기록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그의 수기임을 밝혀둔다.
4월 21일 아침 나는 출근하기 위해 인천역에 갔다(20일은 일요일). 아차 하는 사이에 1, 2분 늦게 도착해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열차를 타면 출근이 늦어진다. 합승 택시를 타려고 역전을 서성이고 있는데 군용버스가 왔다. 육본 출퇴근용 버스였다. 나는 그때까지 인천과 육본 사이에 출퇴근 버스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사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이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장세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신문에 보도된 군부 쿠데타설이 화제에 올랐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장세현의 질문에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자고 데모하고 정치가 이처럼 무질서하게 위험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런 것도 필요치 않을까,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생각해 봄직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였다. 또 시중에 나도는 이야기에 불과했고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장교라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로서는 장세현을 동조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한 첫 시도이기도 했다.되지 않아 오치성이 찾아왔다. 큰일났다며, 그는 장세현이 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방첩대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또 혁명 운운했다는데 혹시 무슨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안부대에 있는 동지로부터 연락받은 사항이라며 많은 동지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쁜 놈>이란 소리가 저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초조하고 걱정스럽게 서 있는 오치성에게 "우리와는 아무 관게 없는 말이니 걱정할 것 없다. 개인적인 생각만 이야기했을 뿐이니 추호도 걱정할 것 없고 만약 문제가 된다면 내가 혼자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치성은 "최악의 경우 고문을 대령의 사상이 의심스럽고 혁명을 해야한다고 하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니 주의하고 그리고 서울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 총장의 심복이니 최악의 경우 장 장군을 물고 들어가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내 스스로 이희영을 찾아가서 해명하면 어떨까? 나는 장세현에게 별로 한 말이 없는데, 장세현이 말을 만들어 했을 수도 있고....... 나를 잡으러 오기 전에 내가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 질문에 오치성은 "그건 알아서 하시오"
하면서 자리를 떴다. 나는 이것 저것을 생각했다. 정보계통에 근무한 적이 있는 나는 아무래도 잡혀가는 것보다는 내 발로 걸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희영은 나를 보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한번 부르려고 했는데 잘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종태가 제발로 걸어서 506방첩대로 찾아갔다는 데 대해서 이희영은 일소에 붙였다.
"장세현의 고발이 있자, 즉시 이종태를 불렀다. 어떤 혐의를 받고 있다 해서 제발로 찾아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 방첩대인데, 설혹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해도 누구를 붙들고 무엇이라고 변명할 수있겠느냐?"
이희영의 증언이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만약 이종태가 제발로 걸어들어 왔다면 얘긴데, 그렇다면 이종태의 변명을 듣기 이전에 비밀을 누설시킨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자체 내의 조사부터 시작했어야 마땅했을 게 아니냐?"
그건 그렇다. 장세현의 신고를 공개했을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육군 소위에서 육군 대령에 진급하기까지 줄곧 방첩대에서만 근무해 온 이희영이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아무한테나 흘렸을 리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종태를 찾아온 오치성이<이것은 보안부대에 있는 동지로부터 연락받은 사항>이라고 운운했다고 했다. 506방첩대에도 쿠데타 그룹에 포섭되어 있었던 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포섭된 자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희영이 혼자서 알아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해명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요는 이종태가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 그 전모를 털어놨느냐, 아니면 비밀은 비밀대로 지켰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이종태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장세현의 고발로 부르려 했다는 것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이미 나의 사상과 경력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말했다. 여러 조사 결과는 사상적으로 의심할 이유가 없으나 고발이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는 것은 자기 책무라면서 이해를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이 대령이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무슨 계획이나 생각이 있어서 한 말입니까?"
"그런 말이야 했지요. 그렇지만 최근 시중에서 떠돌아다니고 신문에 보도된 이야기에 불과한데, 그런 얘기도 못합니까?"
"아무 의미 없이 혁명 운운했을 리는 없고 무슨 계획이나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혁명을 하려는 계획이나 조직이 있으면 뭐하러 그런 얘기를 하겠소. 그런게 없으니까 누군가 나서야 되지 않을까 해서 한 소립니다."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꼬투리가 수도 없다. 문득 오치성의 충고가 생각났다. 마침 이희영이 물었다.
"그러면 혹시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한다는 소문은 못 들었습니까?"
"사실인즉, 참모총장이 혁명을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총장을 지지하겠다는 말을 장 중령에게 말했습니다. 다른 소문은 모르겠소."
이 대목에 대한 이희영의 증언은 엇갈린다. 이종태는 방첩대에 불려오자, 처음에는 횡설수설로 일관하려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이 자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얼핏 묘안이 떠올랐다.
"다 알고 있소. 쿠데타는 장 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에 있는데 뭐가 두려워 그러시오?"
그러자 이종태는 술술 전모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종태, 그는 경상남도 남해 태생이다. 1927년생이니까 1961년 현재의 나이는 34살. 육사 4기 출신이다. 그의 수기에 따르면 그는 1958년도부터 박정희와 쿠데타 모의를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구체적인 진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모의 정도는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박정희는 1951년 이래 오매불망 쿠데타에 대한 꿈을 이종태는 벌써 그때부터 박정희와 쿠데타를 모의해 온 사람이니까 김종필 외에는 5.16 쿠데타 그룹 중 누구보다도 박정희와 밀착돼 있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하여간에 이종태는 이희영이 <쿠데타는 참모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이라고 하자, 쿠데타의 내용을 모두 불었다고 했다. 그는 쿠데타 그룹에 가담해 있는 인물, 그 인물들이 맡고 있는 임무 등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진술했다고 했다. "혁명공약도 내가 이미 초안을 잡아두었다." 털어놓더라고 했다. 이희영은 이종태의 진술을 토대로 해서 도표를 작성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는 장군과 장교들 이름 그들의 소속 부대명과 직책, 동원부대, 거사일자 등. 거사일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른바 D데이, 거사일자는 5월 12일로 되어 있었다. 뒤에안 일이지만 쿠데타 그룹은 이종태 누설사건이 벌어지자 5월 16일로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희영은 또 그동안 입수한 족청계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도 도표로 작성했다. 그런 다음 이것을 가지고 먼저 방첩부대장 이철희를 찾아갔다. 그에게 두 계열의 쿠데타 음모를 브리핑해 주고,
"각하, 쿠데타 음모에 대한 브리핑을 해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희영은 들고 간 보따리를 끄르려 했다.
"이미 내용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설명할 것도 없어."
천만 뜻밖이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누군가가 이미 보고를 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종태가 쿠데타 음모내용에 대해서 자백을 한 것은 오늘인데, 그 말고 누가 브리핑을 했기에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철희가 전화로? 그럴 리가 없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도 아닌데 전화보고를 할 리가 있는가. 더구나 이철희에게 브리핑을 끝내고 나서 <지금 육본으로 가서 생각입니다>라고 하자, 그렇게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젠장, 뭐가 어찌된 거야?) 이희영은 꼭 여우한테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육군의 총수가 이미 알고 있다는데야 뭐라 하겠는가. 그래서 무슨 조치에 대한 지시가 있을까 해서 부동자세를 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각하."
이희영은 조용히 장도영을 불렀다. 힐끗 시선을 이희영한테로 던진 장도영은 가볍게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희영이 물러가겠다고 (그게 아닌데?) 이희영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쿠데타 음모에 대해선 이 대령 혼자만 알고 있어.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갑자기 정도영이 입막음을 하는 것이었다.
"각하, 즉각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줄로 압니다만?"
"조치?"
"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간접표현이었다. (내 직책이 뭔가? 그런 군의 불순분자들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아닌가.)하고 여전히 선 채로 버텼다.
"이 대령, 내가 뭐라고 했어? 쿠데타 음모 문제는 이 대령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그만 물러가!"
이희영은 참으로 이상한 양반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참모총장실을 물러나왔다. 문득, 그가 오늘 이종태를 심문하면서 했던 말이 상기되었다. <쿠데타는 장 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에 있는데.......> 그가 이종태에게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그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한 임기응면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그럼 사실에 있어서는 그게 진실이었단 말인가? 받아들여야 할지 꼭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 되새겨졌다. 장도영이 2군 사령관직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된 것이 1961년 2월 중순이었다. 그런데 후임 2군 사령관은 장도영이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새로 발령이 났었다. 장도영은 번거로우나 다시 또 대구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신구 사령관이 이.취임식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구로 내려온 장도영이 영접차 나간 이희영에게 한 말이었다.
"이상 없지?"
이상 없느냐는 것은 군부의 동향에 이상이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공군 쿠데타설은 이미 장도영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희영의 대답을 듣자 <그래?> 하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지? 이희영은 그때의 장도영의 미소하고 지금 입막음을 엄명한 것과를 연관시켜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이 콱 막히는 듯한 답답증이 일었다. (장 장군이 박정희 장군하고 손을 잡은 게 틀림없어!) 이희영은 하늘이 노랗게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종태 쿠데타 음모누설 사건>이 있은 지 꼭 보름 만인 5월 6일, 이날 아침 11시경이다. 경상남도 거제 출신 민주당 소속 민의원 윤병한(尹炳漢)이 한 낯선 신사를 거느리고 국무총리 공보비서실로 들어섰다. 당시 국무총리 공보비서실은 중앙청 별관 1층에 자리해 있었다. 비서실로 들어선 윤병한은 공보비서관 송원영(宋元英) 곁으로 다가갔다.
"총리를 좀 뵈어야겠소. 송 비서관이 주선 좀 해주이소."
총리하고의 면담 주선을 요청했다. 무엇 때문에 만나고자 한다는 이유나 설명도 없었다. 수석비서관이자 장면 내각의 대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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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재위: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신으로
서기 37년 겨울부터 38년 초여름까지 7개월 동안이 젊은 최고권력자가 가장 권력에 도취 할 수 있었던 시기였으리라. 그런데 25세의 칼리굴라가 생각한 '권력'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가 생각한 '권력', 다시 말해서 로마적인 권력이 아니라, 소싯적의 학우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오리엔트 왕자들이 가르쳐준 동양적인 권력이었다. 오리엔트 전제군주의 아들인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면, 그 머리 위에는 왕 관이 빛난다. 왕으로 불리고, 신민들도 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데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왕위에 앉히느냐 마느냐의 열쇠를 쥐고 있는 칼리굴라는 '무관'이다.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병사들뿐이고, 일반 시민들조차도 '제일인자'라고밖에 불러주지 않는다. 하물며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것 따위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무관의 제왕'은 아우구스투스가 전제군주제에 친숙한 오리엔트(동방)와는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오키덴트(서방)를 고려하여 창설한 '로마 특유의 황제' 형태다. '무관'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관'의 왕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칼리굴라는 '관'이 있고 없음의 차이에만 불만을 품었다.
이 차이-칼리굴라의 생각으로는 불공평-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왕보다 위에 있는 신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로마적인 다신교 신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게 아니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에서는 신들에게 계급이 있어서, 최고신 유피테르(그리스의 제우스)와 바다의 신 넵투누스(포세이돈), 그리고 여신인 유노(헤라)와 메네르바(아테네)와 베누스(아프로디테), 남신인 마르스(아레스)와 아폴로(아폴론)가 일급 신으로 되어 있다. 죽은 뒤에 신격화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신으로서는 2급 내지 3급의 지위를 감수해야 한다. 칼리굴라는 자기한테는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역시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3급 신으로 참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신교의 신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칼리굴라도 그리스-로마 문명의 아들이었다. 그가 바란 것은 최고신 유피테르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들을 조각할 때는 벌거벗은 상반신에 맨발을 드러낸 모습으로 표현한다. 실존 인물도 신격화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을 때나 죽은 뒤에 제작된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는 벌거벗은 상반신에 맨발을 드러낸 모습으로 표현하거나, 유명한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처럼 갑옷을 입은 차림이라도 맨발로 표현한다. 칼리굴라는 신격화되지도 않았고 아직 살아 있는데도,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벌거벗은 상반신과 맨발에다 제우스를 흉내내어 머리와 수염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모습으로 원로원에 나타난 칼리굴라를 아연실색한 의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때로는 투니카 위에 오리엔트식으로 보석을 수놓은 망토를 걸치고 대중 앞에 나타난다. 제우스 신의 상징인 황금 번개를 손에 들고 등장할 때도 있었고, 포세이돈을 흉내내어 삼지창을 든 모습으로 나타난 적도 있었다. 현대의 우리는 대중스타나 그들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의 기발한 차림에 익숙해져 있어서 놀라지는 않지만, 로마 지도자의 이상적인 모습은 '실질강건'이었고 행동거지도 신중해야 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연실색했지만, 일반 시민들도 깜짝 놀랐다. 중병으로 머리까지 이상해진 게 아닐까 하고 의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당초에는 세간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젊은이나 서민들은 "재미있잖아"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칼리굴라는 젊은이나 서민들과 취향도 비슷했다.
쾌락
칼리굴라가 해금한 오락을 대표하는 것은 검투사 시합과 전차경주다. 둘 다 서민들이 열광하는 경기였다. 프로 검투사 중에는 노예 출신도 있었다. 이들이 1대 1로 겨루는 검투사 시합은 에트루리아 민족의 스포츠였다지만, 에트루리아가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온 이후 이 경기도 로마에 수입되었다. 검투사 시합은 어느 한쪽의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스포츠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는 세 분류로 나눌 수 있다. (1) 잔혹해서 싫다. (2)잔혹함보다 검투사의 기량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3) 잔혹하기 때문에 좋다. 개인적인 기호와는 관계없이 민심을 잡기 위한 수단, 즉 인기를 얻기 위한 방책으로 검투사 시합을 활용한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는 제쳐놓고, (1)의 대표적인 예는 티베리우스, (2)에 속하는 사람은 키케로나 세네카나 소 플리니우스 같은 지식인, 로마의 서민들과 칼리굴라는 (3)이었다.
칼리굴라의 발안으로 프로 검투사의 1대 1시합이 프로 검투사와 아마추어인 중죄인의 대결로 바뀌었다. 칼싸움 기술을 전혀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시합에 나서면 경기는 더욱 잔혹해진다. 서민들이 여기에 열광한 것은 당연했고, 그 경기의 후원자는 칼리굴라였다. 전차경주는 네 필의 말이 끄는 화려한 전차를 누가 빨리 모느냐를 겨루는 경기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비용이 들 뿐 아니라, 네 필의 말을 한꺼번에 다루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부유층에 속하고 말을 모는 데에도 익숙한 사람이나 팀을 짜서 영업하는 사람들이 이 경주에 참가했다.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경주의 '포뮬러 원' 경기와 비슷하다. 영업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자금을 대는 '오너', 전차나 말을 정비하는 사람들, 전차를 몰고 직접 경기에 출전하는 마부가 한 팀을 이룬다. 팀은 4개가 있어서, 각기 초록색과 파란색, 흰색, 빨간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칼리굴라는 '초록' 팀의 열렬한 팬으로서, 시합이 끝난 뒤 경기장 안의 마구간에서 열리는 '쫑파티'에도 으레 참석하곤 했다. '초록' 팀이 우승했을 때는 마부에게 2백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축하금을 하사한 적도 있다. 황제이면서 전차경주 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는 것이 서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페라리'를 소유하고 있으면 자기도 직접 몰아보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시절의 티베리우스처럼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열리는 경기대회에 참가하여 본바닥에서 기량을 겨룰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훗날 기독교 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지는 바티카누스(오늘날의 바티칸)땅에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로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개인용 경기장을 지었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테베레 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서 개인용 경기장을 짓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전차 경주용 경기장(키르쿠스)과 운동경기용 경기장(스타디움)은 네 모서리를 둥글게 한 직사각형의 모양 자체는 다르지 않다. 다만 그리스식으로 한 변의 길이가 1스타디온(185미터)으로 정해져 있는 '스타디움'보다는 '키르쿠스'가 훨씬 길다. 다시 말해서 대형이다.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대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칼리굴라의 '키르쿠스'도 길이가 500미터였다. 지금 그 땅에 서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뒷벽에서부터 성 베드로 광장 끝에 이르는 길이다. '키르쿠스'와 '스타디움'의 두 번째 차이는 중앙부에 띠 모양의 지대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었다. '키르쿠스'는 전차가 그 주위를 몇 바퀴나 돌기 때문에 중앙부에 띠 모양의 지대가 필요했다.
기원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트를 가져와 '대경기장' 한복판에 세웠다. 칼리굴라도 개인용이긴 하지만 '키르쿠스'를 짓는 것이므로 그 중앙부에 있는 띠 모양의 지대 끝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운반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만들어,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오벨리스크를 가져왔다. 칼리굴라가 하는 일은 모두 돈이 드는 일뿐이었다.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이 오벨리스크는 지금도 100미터쯤 이동하여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서있다.
칼리굴라 시대에는 이처럼 티베리우스 시대와는 전혀 달리 각종 오락 스포츠가 성행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빵과 서커스'라는 이유로 악평을 받게 된다. '빵'이란 공화정 시대부터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소맥법'에 따라 주식인 밀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체제였고, 나는 이것을 사회복지 정책으로 생각한다. 덕분에 굶어 죽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시대가 수백 년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정치, 특히 제정 로마의 정치는 결코 약자를 잘라버리는 정치가 아니었다. 영어의 '서커스'는 라틴어의 '키르쿠스'에서 나온 말인데, 오늘날의 이탈리아에서 정부가 축구시합을 금지하면 그 정부가 아무리 선정을 베풀어도 전복될 게 뻔하다. 따라서 문제는 황제가 '서커스'의 스폰서가 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있을 뿐이지만, 일종의 포퓰리즘(인민전체의 이익 증진을 지향하는 정치철학)으로 여겨지는 로마 제정 치하에서는 민중이 황제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그 증거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던 티베리우스는 민중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때 만약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면 낙선했을 게 뻔하다. 따라서 문제는 '빵'과 마찬가지로 '서커스'도 국가 재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 머무르느냐의 여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칼리굴라 시대의 전반에는 티베리우스가 남겨준 흑자가 있어서, 이 문제는 절실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칼리굴라가 제공하는 오락을 만끽하기만 하면 되었다. 만족한 사람들은 칼리굴라가 무슨 짓을 하든 너그럽게 용납해주었다. 칼리굴라는 얼마 전에 타계한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주기로 결정하고, 원로원의 승인도 얻었다. 이 존칭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미망인인 리비아에게 주어진 전례밖에 없다. 안토니아는 어머니가 유배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춘기 시절의 칼리굴라를 맡아서 키워준 사람이다. 칼리굴라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겠지만, 안토니아는 외국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와 손잡고 로마에 도전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이다.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뒤,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아가 적의 딸이라는 사실보다 누나인 옥타비아의 딸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가족으로 대우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자의 존칭인 '아우구스타'는 남자의 존칭인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한 것과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주는 것은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별개 문제였다. 아우구스투스였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티베리우스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고 싶으니까 준다는 식의 개인 감정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 체제와 관련된 문제다.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로 의역한다면, '아우구스타'는 황후가 되기 때문이다.
무슨 일에나 한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칼리굴라에게는 이제 그 한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칼리굴라도 유배지에서 죽은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까지는 하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의 고발장을 불태워버릴 수는 있어도, 원로원이 내린 유죄 판결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명에 죽은 어머니와 두 형의 유해를 '황제묘'에 매장해주는 것뿐이었다. 25세의 칼리굴라에게는 22세인 아그리피나, 20세인 드루실라, 19세인 율리아 리비아라는 세 누이 동생이 있었다. 셋 다 티베리우스가 만년에 골라준 명문 출신 남자들과 결혼했다. 칼리굴라가 한 일은 황제인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자기 이름 뒤에 세 누이동생의 이름도 덧붙이게 한 것이었다. 로마에는 여자에게 공적인 지위를 주지 않는 전통이 있다. 아우구스투스도 오랫동안 같이 산 아내 리비아에게 유언으로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주었을 뿐이다. 칼리굴라는 이 전통을 깨뜨린 것이다. 그때까지는 최고권력자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아무리 강대한 권력을 휘둘러도 사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여자들이 칼리굴라 덕에 공적인 지위까지 누리게 되었다.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는 소심한 경우가 많다. 소심한 사람은 남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편이 확실한 사람들로 주위를 에워싸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자기편으로 생각하는 것은 같은 핏줄로 이어진 혈연이라는 게 특징이다. 누이동생들을 우대한 칼리굴라는 아내가 된 여자들한테는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칼리굴라는 21세부터 27세까지 6년 동안 무려 네 여자와 결혼했다. 하나는 죽었고, 둘은 이혼했고, 28세에 죽음을 맞이한 그와 운명을 같이한 것은 네 번째 아내인 카이소니아였다. 칼리굴아의 생애에는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의 그림자는 비쳐도 아내들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는다. 대개 황제의 옆얼굴을 새기는 화폐에 등장할 만큼 후한 대우를 받고, 황제의 아내들보다 더욱 로마의 '퍼스트 레이디' 같았던 칼리굴라의 세 누이동생을 성격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아그리피나는 오기가 많아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미인인데다 머리도 좋은 야심가다. 드루실라는 고전적인 미모를 가졌고, 성격은 상냥하고 섬세하다. 율리아 리비아는 수수하고 얌전한 성격이다. 오빠의 애정을 한몸에 받은 것은 다섯 살 아래인 드루실라였다. 자신을 신으로 여긴 칼리굴라인 만큼, 인간 세계인 로마에서는 오빠가 누이를 사랑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도 신의 세계에서는 허용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파라오를 신의 화신으로 여기는 이집트 왕가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경우처럼 누나와 남동생이, 또는 오빠와 누이 동생이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드루실라가 서기 38년 초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죽는 사람은 누구나 애처롭지만, 칼리굴라에게는 통렬한 타격이었던 모양이다. 모든 것을 내팽개친 황제는 몇몇 호위병만 거느린 채 말을 타고 수도를 떠났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행선지가 왜 시칠리아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정신없이 말을 달리다 보니 자연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칠리아에 도착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생 처음 메시나 해협과 그 끝에 떠 있는 시칠리아 섬은 칼리굴라가 침착성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 모양이다. 다만 되찾은 것은 침착성뿐이었고, 드루실라의 죽음은 칼리굴라를 조금도 바꾸어놓지 못했다. 로마로 돌아온 칼리굴라가 한 일은 드루실라의 신격화였다. 죽은 뒤에 신격화의 영예를 받은 것은 지금가지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뿐이었지만, 이제 21세의 젊은 여인이 거기에 끼게 되었다.
이런 칼리굴라를 시민들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키투스가 지은 "연대기"에서도 칼리굴라를 다룬 부분만은 중세를 거치는 동안 몽땅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의 서술에서 확실한 것만 주워모아 보아도,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싹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시민들의 인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 칼리굴라는 처음 즉위했을 때와 다름없이 검투사 시합이나 전차경주를 후원하고, 다른 유력자들한테도 그런 오락을 시민들에게 제공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칼리굴라는 공공사업, 특히 요즘 말로 하면 사회간접 자본 정비와 관련된 건설사업이 일반 시민들의 호의를 얻는 데에는 오락 스포츠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미 일곱 개의 수도가 물을 공급하고 있는 수도 로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다. 세계의 수도가 된 지 반세기, 인구도 늘어나 있었다. 또한 풍부한 물 공급은 전염병 발생을 막는 방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수도 건설 계획은 기존의 수도와 비교해보아도 참으로 야심적인 토목사업이었다. 어쨌든 수원지에 로마까지의 70미터 가운데 10킬로미터가 넘는 구간을 고가수도로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공사는 서기 38년에 착공되어 52년에 끝나지만, 완공자의 이름을 따서 '아쿠아 클라우디아'(클라우디우스 수도)라고 불리게 되는 이 수도와 역시 칼리굴라가 착공한 '아쿠아 노부스'를 합하면 모두 아홉 개 의 수도가 로마 주민에게 일인당 하루 900리터의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천 년 뒤인 오늘날, 로마 주민에 대한 물 공급량을 그 절반이나 3분의 1에 불과하다. 칼리굴라는 또한 식량의 자급자족 노선을 버린 지 오래인 본국 이탈리아에 '식'을 보장하는 것이 일반 시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서울시장'도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역시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식량청 장관'도 유능했기 때문에, 밀이 부족하거나 밀값이 폭등했다는 불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하고 싶었던 칼리굴라는 시칠리아에 갔을 때 깨달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밀 생산지인 이집트에서 로마로 곡물을 운송할 때 지나가야 하는 메시나 해협에 피난항을 건설하는 일이다.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을 갈라 놓고 있는 메시나 해협은 조류가 빠른 탓도 있어서 항해하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밀을 가득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나도 조난을 쉽게 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피난항의 건설공사의 목적이었다.
사회간접자본을 충실하게 하려는 이런 공공사업은 로마인들이 그 중요성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신규 고용 창출로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한테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인프라 정비'는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라서, 착공할 때와 완공할 때 외에는 황제가 나설 일이 없는 수수한 작업의 연속이다. 다시 말해서 화제성이 부족하다. 칼리굴라는 이것이 불만이었다. 그럴 때인 서기 38년 10월, 수도 로마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사료는 이때 피해를 입은 지역이 어디였는지는 밝혀주지 않는다. 어쨌든 당시 로마에서 화재가 드물지 않았던 것은 로마의 건축물이 지니고 있는 약점에 원인이 있었다. 벽이나 기둥은 석조라도, 천장과 지붕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한 것을 안 칼리굴라가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26세니까 체력도 있었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칼리굴라는 화재로 인한 피해는 전액 국가가 보상해주기로 결정했다. 물론 시민들은 대환영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곧 찾아올 국가 재정 파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칼리굴라의 인기 정책은 전대미문의 일을 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는 소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폼페이가 나오지만, 서쪽으로 가면 무역항 포추올리에서 시작하여 군항 미세노에 이르는 해변이 이어져 있다. 이곳에는 로마 상류층의 별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기후가 온난하고 온천도 솟고 경관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 일대에 해변 별장을 갖는 것은 로마 상류층에 속한다는 증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포추올리는 무역항이라서 그 일대는 늘 활기에 넘쳐 있었지만, 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바이아는 포추올리와는 전혀 달리 우아한 고급 별장 지대가 되어 있다. 칼리굴라는 말을 타고 포추올리와 바이아를 잇는 해상을 횡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거리는 요즘 단위로 치면 5.4킬로미터, 칼리굴라는 징발한 수많은 선박을 옆으로 잇대어 포추올리에서 바이아까지 늘어놓고, 돛대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널빤지를 걸쳐놓은 다음, 그 위를 흙으로 포장하여 평탄한 도로로 바꾸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모여든 사람들로 포추올리와 바이아의 선착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구경꾼들이 탄 작은 배들로 주변 바다까지 가득 메워졌다.
칼리굴라는 배를 잇대어 만든 해상 5킬로미터의 길을 왕복했다. 그것도 머리에는 산뜻한 초록색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시민관'-팍스 로마나를 구현한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군대에서는 동료를 구출한 병사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시민관'-을 쓰고, 황금으로 수놓은 망토를 걸치고, 왼손에는 기병이 사용하는 작은 방패를 들고 오른손만으로 말을 몬다. 바이아로 건너갈 때는 우선 기병 스타일이다. 돌아올 때의 연출도 구경꾼들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황금 갑옷을 몸에 걸치고,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두 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탔다.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격파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파르티아 왕가가 로마에 볼모로 보내온 왕자까지 동원했다. 이 왕자를 전차에 태워 앞장세우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분장한 칼리굴라가 전차를 타고 그 뒤를 추격하는 공들인 연출이다. 갈 때도 돌아올 때도, 바다 위를 달려가는 칼리굴라의 뒤에는 그의 놀이 친구인 젊은이들과 근위대 기병들이 붉은색 망토를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리고 관중이 지르는 환호성이 그 뒤를 따랐다. 끝나고 보면 화제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사람도, 보지 않고 이야기만 전해들은 사람도 자기네 황제의 젊음과 로마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화려한 꽃불에 감탄하듯 오랫동안 좋은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바로 이것이 칼리굴라의 목적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이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자기는 무관이라도 유관의 왕들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항상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겹쳐서, 전대미문의 일에 대한 칼리굴라의 관심은 시들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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