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9호 - 2023.12.22. 금요일(음력 : 11. 10.)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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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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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갈 어머니가 있는 한, 결코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 ―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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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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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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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휴대전화는 예전엔 안 하던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유선전화는 누구 전화인지 알고 싶으면 무조건 받아야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액정화면에 ‘아는 사람’과 ‘모르는 번호’를 또렷이 구분해 보여준다. 모르는 번호면, 모르는 사람일 텐데…. 받을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대부분 보험 가입을 권하는 광고전화. 목화솜이불을 닮은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해 계속 들어주다 미안함만 쌓인다.
그렇긴 하지만,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광고전화라는 걸 언제 아는가? 생각보다 빠르다. 딱 첫마디! 두번째도 아닌 첫번째.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 광고전화는 “여보세요?”라는 말에 “반갑습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 고객님 맞으신가요?”라고 말한다. 처음 통화하는 사람이 주고받으며 채워나가는 대화의 쌍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광고전화라는 걸 쉽게 들킨다.
우리는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십중팔구 “여보세요?”라고 대답한다. 첫마디가 뭐냐에 따라 내 답이 달라진다. 전화받는 사람이 “네, ○○부 홍길동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도 “네, 저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자기 이름만 말했지만, 나도 내 이름을 밝히게 된다. 자기 이름을 밝히는 건 전화 건 사람도 이름을 밝혀달라는 메시지이다. 전화받는 사람이 “네, ○○부입니다”라고만 말하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 않다.
비록 전화를 통해서지만, 우리는 대화를 하지 대본을 읽는 게 아니다. 말의 질서는 무척 섬세하고 교묘하다. 빈자리를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우리의 대화는 암묵적이면서도 명시적이다. 아는 형이 전화해 “저녁에 뭐 해?”라고 묻는다면 이유는 뻔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시키다’
얼마 전 한 홈쇼핑 방송에서 진행자가 “오늘은 ○○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소개시키다’는 평소 자주 듣던 말이다. 그런데 홈쇼핑 방송 진행자가 직접 어떤 상품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므로, ‘소개시키다’는 부적절한 사동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남에게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게 하는 일을 ‘사동’이라 한다. 즉 ‘사동’이란 남에게 어떤 일이나 행동을 ‘시킴’을 나타낸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다”나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게 하다”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게 함을 뜻하므로 이들은 사동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예는 ‘먹-’에 결합된 ‘-이-’에 의해, 뒤의 예는 ‘-게 하다’에 의해 사동을 나타낸다. 그 밖에 ‘-시키다’에 의해 사동을 나타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쉬운 설명으로 학생에게 어려운 수학을 잘 이해시키다”에서는 ‘이해’에 결합된 ‘-시키다’에 의해 사동을 나타낸다.
그런데 최근 ‘-시키다’의 사용이 남용 수준에 이르렀다. 사동의 의미가 없는데도 빈번히 ‘-시키다’를 쓰고 있다. ‘소개시키다’, ‘접수시키다’, ‘교육시키다’ 등이 그렇다. 남에게 소개ㆍ접수ㆍ교육하게 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말의 사용은 부적절하다. ‘소개시키다’ 등이 ‘소개하다’ 등을 강조한 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초ㆍ중ㆍ고등학교 학생이었을 적,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이 ‘거짓말시키다’를 쓸 때마다 그것이 ‘거짓말하다’의 잘못임을 지적해 주시곤 했다. 그땐 선생님께서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괜히 꼰대질(?)을 한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선생이 되어 그런 꼰대질(?)을 계속하고 있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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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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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광화문 근처의 행복 - 천상병
광화문에,
옛 이승만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 주는데
나는 그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 원 끄집어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 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
어느 것이 참이냐 - 한용운
엷은 사(紗)의 장막(帳幕)이 작은 바람에 휘돌려서
처녀의 꿈을 휩싸듯이 자취도 없는 당신의
사랑은 나의 청춘을 휘감습니다.
발딱거리는 어린 피는 고요하고 맑은 천국(天國)의 음악에
춤을 추고 헐떡이는 작은 영(靈)은
소리없이 떨어지는 천화(千花)의 그늘에 잠이 듭니다.
가는 봄비가 드리운 버들에 둘러서 푸른 연기가 되듯이, 끝도
없는 당신의 정(情)실이 나의 잠을 얽습니다.
바람을 따라가려는 짧은 꿈은 이불 안에서 몸부림치고,
강 건너 사람을 부르는 바쁜 잠꼬대는 목 안에서 그네를 뜁니다.
비낀 달빛이 이슬에 젖은 꽃수풀을 싸라기처럼 부시듯이
당신의 떠난 한은 드는 칼이 되어서
나의 애를 도막도막 끊어 놓았습니다.
문 밖의 시냇물은 물결을 보내려고
나의 눈물을 받으면서 흐르지 않습니다.
봄동산의 미친 바람은 꽃 떨어뜨리는 힘을 더하려고
나의 한숨을 기다리고 섰습니다.
∼∼∼∼∼∼∼∼∼∼∼∼∼∼∼∼∼∼∼∼∼∼∼∼∼∼∼∼∼∼∼∼~~~~∼∼
산에서 온 새 - 정지용
새삼나무 싹이 튼 담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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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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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轉禍爲福)
轉:구를 전. 禍:재화 화. 爲:할/위할 위. 福:복 복.
[대응어]~인패위공(因敗爲功). [동의어] 인화위복(因禍爲福).
[유사어] 새옹지마(塞翁之馬). [출전]《戰國策》〈燕策〉
① 화(禍)를 바꾸어 오히려 복(福)이 되게 함.
②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 곧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의 재상을 겸임했던 종횡가(縱橫家:모사) 소진(蘇秦)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功)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 소진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주(周)나라의 도읍 낙양[洛陽:산서성(山西省) 내]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제반 지식에 통달한 인물로서 종횡설을 논한《귀곡자(鬼谷子)》3권을 지었다고 함]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B.C. 309)와는 동문이 되는 셈. 제(齊)나라에서 살해됨.(?~B.C.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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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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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4. 새로운 태양
유방은 수도 낙양의 남궁에서 여러 신하와 장수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천하 평정을 자축하는 자리인 셈이었다. 유방은 이미 황제위에 올라 있었다. 재상과 제후들과 장군들이 모두 유방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대왕께서는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포악 무도한 자를 주멸한 뒤 천하를 평정하셨습니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땅을 갈라 왕으로 봉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제호를 칭하지 않고 대왕이나 신하들 모두가 왕으로 호칭된다면 상하의 존비나 차별이 명백해지지 못하는 불편이 있습니다."
그래도 유방은 딱 잡아뗐다.
"과인이 듣기로는 제위라는 것은 현명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소. 또 실이 없는 공허한 칭호만으로는 그것이 유지될 턱도 없소. 나같은 위인에게 제위란 당치도 않소."
그러자 군신들이 아우성쳤다.
"신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청원만큼은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세 번씩이나 사양한 후 유방도 못이기는 체하고 대답했다.
"과인이 제호를 칭하는 것이 제군들에게 편리하다고 생각된다면 국가에도 반드시 편리한 것이 되오?"
"그렇습니다!"
그래서 2월 갑오일에 사수(산동성) 북쪽에서 황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유방은 남궁의 연회장에서 적당히 술기운이 올랐을 때 신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짐에게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짐이 천하를 보유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또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인 것 같소?"
고기가 나섰다.
"폐하께서는 오만하시어 사람을 업수이 여기십니다. 항우는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부하들에게 성을 공격하게 하고 땅을 공략하게 해서는 그곳을 항복시킨 자에게 그것을 주어 바로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명한 자를 질투하고 유능한 자를 미워하며 공있는 자에게 오히려 해를 주고 현명한 자를 의심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남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고 땅을 점령하더라도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항우는 천하를 잃게 된 것입니다."
고기의 말을 듣고 난 유방은 빙긋 웃고난 뒤에 한 마디 덧붙였다.
"귀공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짐이 분석한 바로는 조금 다르오."
"무엇이 다르다는 겁니까?"
유방이 이의를 달자 고지는 곧장 되물었다.
"대체로 본진의 군막 가운데서 작전을 세워 천 리 밖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게 하는 데 있어서는 짐은 장량만 못하며,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공급하고 양도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데에서 짐은 소하만 못하며, 백만 군사를 이끌어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약취하는 데에는 짐은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인물 모두가 걸출하오. 짐은 이 세 인물을 쓸 수가 있었소. 이것이 짐이 천하를 얻을 수있게 된 이유요. 그런데 항우 밑에는 단 하나의 걸출한 인물 범증이 있었지만 그나마도 쓰지를 못했소. 이것이 그가 짐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일 거요."
그러자 신하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대부분이 승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방은 모른 척하고 장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책략을 군막 가운데서 수립하고 승리를 천리 밖에서 얻게 했으니 그 공로로 제나라 땅 3만 호를 내리겠소."
그 말을 들은 장량은 술잔을 들고 있다 벌떡 일어섰다.
"저는 처음 하비에서 일어나 폐하를 유에서 만났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저를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다행히도 폐하께서는 저의 계략을 채용해 주셨고 또한 시기에 적중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공로가 감히 3만 호에 해당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하오니 유에 봉해주십시오. 그것이라면 크게 만족하겠습니다."
유방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장량의 태도가 하도 완강했으므로 할수 없이 유후에 봉하는 것으로 끝냈다. 다음은 소하의 공적을 칭찬한 뒤 식읍 8천 호에 찬(호북성)후로 봉한다고 했다. 그러자 공신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번쾌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저희들은 몸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많은 자는 백여 회전, 적은 자는 수십 회전을 싸웠으며,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해 그 공로의 크고 작음에는 각각 정도 차이는 있으나 그 어려움에는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하는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말에 땀나게 한 공로는 없이 문필만 가지고 편안하게 논의했을 뿐인데 어찌하여 소하가 저희들보다 상이 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번쾌의 말에 유방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사냥을 아오?"
"물론 알고 있지요."
"사냥개도 아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사냥할 때 짐승을 잡는 것은 개요. 개를 풀어놓아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오. 지금 그대는 다만 달리는 짐승을 능히 잡을 수 있었을 뿐이니 그 공로는 개에 해당할 뿐이오. 그러나 소하는 개를 놓아 지시했으니 그 공로는 사람에 해당하오. 어찌 개와 사람의 공로가 같을 수가 있겠소!"
"하오나....!"
"게다가 그대들은 다만 자기 혼자서만 짐을 따랐으며 혹시 많은 경우래야 두서너명에 지나지 않았잖느냐 말이오. 그러나 소하는 그의 친척중 성인 남자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전쟁터로 모두 내보냈소. 어째 그의 공로가 남보다 덜 하겠소!"
"하오나 위계의 순서로 치면 조참이 제일 위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몸에 70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한 공로가 제일 크기 때문입니다."
참다 못한 악천추가 벌떡 일어났다.
"군신들의 논의 모두가 그릇된 것입니다. 조참은 야전략지의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는 초군과 공방전을 벌인 것이 어언 5년, 그동안 군사를 잃고 무리와 헤어져 몸을 날려 도주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소하는 관중에서 언제나 군사를 모아 결원을 보충해 보냈습니다. 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소집한 것이 아닌데도 폐하께서 위급하실 때마다 소하는 군사를 쓸 수 있도록 파견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맞소! 잘 말했소!"
유방은 맞장구를 쳤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에서 공방전을 되풀이하고 있던 수년 동안 아군에게 군량미가 떨어지면 소하는 관중에서 육로와 수로를 통해 부족함이 없도록 어김없이 보내주었습니다. 폐하께서 산동쪽의 땅을 잃었을 적에도 소하는 관중의 땅을 잘 보전하면서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만세의 공로입니다. 지금 조참 같은 인물 백 명을 잃는다 해도 한나라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또 백 명을 얻는다해도 만전하다고 할 구 없습니다. 그런 일시적인 공을 가지고 어떻게 소하의 만세의 공에 비유하려 합니까!"
악천추의 달변에 유방은 신이 났다.
"정말 그렇소! 공로에 있어서 소하가 제일 위이고 조참이 그다음이오!"
유방은 소하에게 그제서야 말했다.
"소하 승상은 검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전상을 오르도록 하시오. 조정에 들어가서는 종종걸음을 치지 않아도 되는 특전도 누리시오."
그런 다음 유방은 악천추를 돌아보았다.
"짐이 듣기로는 현인을 추천하면 상을 받는다고 했는데 비록 소하의 공로가 높다고는 하나 악천추가 그것을 밝히지 않았으면 소하의 공로가 드러났을 턱이 없소. 그럼으로 악천추는 본래 받았던 관내후의 식읍은 그대로 가지고 상으로 안평(산동성)군에 봉하겠소."
그런 식으로 공신들에게 상을 내린 유방은 드디어 한신에게 눈길이 갔다. 전쟁터에서는 한신이야말로 최고의 공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웠다. "한신은 믿을 수가 없다. 더구나 물산이 풍부한 제나라 70여 성의 주인으로 앉혀 놓으면 그 부유함을 믿고 생각을 달리 먹을지도 모른다! 불안해진 유방은 한신을 처리하는 방법을 궁리한 뒤에 말했다.
"이제 전쟁은 끝났소. 그렇기에 대장군 직위와 병사들은 짐에게 돌려주시오. 그대신 그대를 하비(강소성)로 옮겨 초왕으로 삼겠소."
한신을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폐하, 갑자기 소신에게 초나라로 가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초나라가 어떻기에 그렇소?"
"기왕에 소신을 제나라 왕으로 봉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초나라로 옮기라 하시니 영문을 알 수 없어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지난날 장군을 제나라 왕에 봉한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그대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천하가 통일되었단 말이오. 더구나 그대는 회음 태생이 아니오. 또한 초나라를 평정한 사람도 그대가 아니겠소. 그래서 그대를 초나라로 보내는 것이오. 더구나 그대야말로 초왕이 되어 하비로 떠나니 말대로 금의 환향이 되는 것이오."
한신은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대놓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투덜거리면서 뒤로 물러나왔다. 유방은 머리가 아팠다. 대공신 20여 명은 봉했지만 나머지는 서로 공적을 다투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의 복도로 나가 멀리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러 장군들이 모래사장에 모여 무언가를 따지느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방은 뒤따라 나오던 장량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들은 뭐요? 무엇 때문에 수군거리고 있는 거요?"
"모반을 계획 중입니다."
"무어, 모반!"
장량의 말에 유방은 화들짝 놀랐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제 와서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모반을 하겠다는 거요?"
"폐하께서는 무위무관의 서민에서 일어나시어 저 무리들과 함께 천하를 얻으셨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황제가 되셨고 소하, 조참등 전부터 친애하던 인물들에게만 봉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들의 면면을 보니 상이 아니라 벌을 내려야 될 얼굴들 뿐이오!"
"지금 군리가 공적을 계산하고 있습니다만 천하가 아무리 넓더라도 저들을 모조리 봉할 수는 없습니다. 저들 또한 폐하께서 모두를 봉할 수 없으시다는 걸 알고 있으며 봉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주살될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과실이 두려워 차라리 모반을 계획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모두를 봉할 수도 없고, 벌을 주자니 그 또한 너무 심한 것 같소. 무슨 묘책이 없겠소?"
"한 가지 묘안이 있긴 있습니다. 폐하께서 평소에 가장 미워하시던 인물이 누구입니까. 물론 군신들 모두가 폐하한테서 가장 미움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들 중에서는 옹치요. 짐하고는 숙원관계요. 저자는 짐을 여러 번 욕되게 한데다 또한 괴롭히기까지 했소. 짐이 저자를 진작에 죽이려 했으나 다소의 공로가 있기로 아직까지 꾹 참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됐습니다. 지금 당장 옹치부터 봉하십시오." "무어요!" "옹치가 봉을 받아야 저자들이 진정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소."
"'폐하의 원수같은 옹치도 후가 되었는데 우리들이사 무슨 걱정이 있겠나. 천천히 기다리기나 하지'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힌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듣던 유방은 갑자기 무릎을 쳤다.
"그 참 묘책이오!"
유방이 즉시 옹치를 불러 십방후로 삼았다는 소문이 나자 장군들은 모반을 포기하고 희희낙낙하면서 돌아갔다. 이튿날이었다. 누경이 궁으로 들어와 유방을 배알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읍지에 관해서입니다."
누경이 내용을 말하기도 전에 유방은 발칵 화를 냈다.
"낙양이 도읍지로는 부적당하다는 또 그 얘기요?"
유방이 화를 내는데도 누경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관중에다 도읍하십시오."
유방은 여전히 그 문제로 두통을 앓고 있었다. 대부분이 산동 출신인 좌우의 근신과 대신들이 이렇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다 도읍하셔야 합니다. 낙양은 성고(하남성)라는 험한 요새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효산과 면지가 있어 황하를 등지면서 이수와 낙수까지 앞에다 두고 있습니다. 그 지세의 견고함은 믿을 만합니다."
누경이 처음에 유방을 만난 것은 농서지방으로 수비병이 되어 가면서였다. 누경은 짐수레를 끌다 말고 뛰쳐나와 소리쳤다.
"폐하를 뵙게 해줍쇼!"
우장군이 그를 막았다. 양피옷을 입은 거의 거지꼴이었기 때문이었다.
"폐하를 만나뵈려면 체면치레는 하게."
"의복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비단옷이면 어떻고 갈포면 어떻습니까."
우장군은 누경의 대꾸가 기특하다고 생각되어 유방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런데 유방은 유방대로 기분이 나뻐 우장군에게 따졌다.
"저런 거지를 왜 짐한테 소개시키시오?"
"그래도 정신은 있는 듯하니 한 마디만 듣는 척하십시오."
그래서 유방은 식사를 하는 척하면서 몇 시간씩 미적미적 미루다가 누경을 불러들였다. 그때 누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방에게 다짜고짜 소리쳤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낙양에다 도읍하시려는 이유가 주왕실을 염두에 두고 그 융성함을 다투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까?"
유방은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그래서!"
"그렇지만 한제국은 주왕실의 입장과는 처지가 완전히 다릅니다."
"뭐가 다른가?"
유방은 별 수없이 누경이 유도하는 대화에 말려들고 말았다.
"주의 선조는 후직입니다. 그는 요임금으로부터 태땅(섬서성)에 봉함을 받고 그러고도 그곳에서 덕을 쌓으며 선정을 베풀기를 10여 대가 넘도록 했습니다. 고유 때에는 하의 걸왕을 피해 빈(섬서성)땅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태왕(고공단보) 때에는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빈을 떠나 말채찍을 지팡이 살아 기산(섬서성)으로 이주했는데 백성들은 앞다투어 그를 따랐습니다."
유방은 누경의 말을 잘랐다.
"어서 핵심을 이야기하게."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서백 문왕은 우,예 두나라의 송사를 잘 조정하여 비로소 천명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태공망 여상이나 백이와 같은 현자가 동방의 해안지방으로부터 찾아와 그에게 귀속했습니다. 또 주나라 무왕 때에는 은의 주왕을 치자는 기약도 하지 않았는데 8백여 명의 제후들이 맹진(하남성)가로 모두 모여 주왕을 쳐서 없애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은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단등의 현인들이 그를 보좌한 사실은 짐도 알고 있다."
"그 때 낙양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라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공했으며 노역을 제공하는 데에도 그 거리가 알맞아 덕이있는 사람이면 쉽게 왕노릇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덕이 없는 자라면 패망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기도 하지요."
유방은 다시 부아가 났다.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짐을 일컬어 덕이 없다는 식으로 비꼬는 것 같은데!"
그래도 누경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무릇 낙양을 수도로 정한 것은 주나라에서는 왕자가 덕으로써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힘쓰고 또 그렇게 노력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며, 험준한 지형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한 군주가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발상에서였습니다."
"결국 그대는 짐을 아직도 비방하고 있는가!"
"주나라가 융성할 시절에는 천하가 화합해 사방의 오랑캐들도 그 교화에 이끌려 의를 사모하고 덕을 기리어 모반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명의 수비병이 없고도 팔방의 오랑캐가 싸움을 걸어오기는커녕 오히려 조공과 노역을 제공치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주나라는 쇠잔해져 동서로 분열되었고 천하에 입조하는 제후가 없어졌는데도 그를 꾸짖고 호령할 능력이 없으니 결국 주나라는 패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때때 유방은 누경의 달변에 끌리기도 했다.
"주왕조의 덕이 희박해졌다고 보기보다는 도성의 지형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폐하께서는 풍과 패에서 봉기하시어 3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서쪽으로 진격해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유방은 누경의 말을 재촉할 정도가 되었다.
"촉과 한을 석권하고 삼진을 평정했으며 형양에서 항우를 쳐부수느라 대혈전도 벌였지요. 또 성고의 입구를 장악하기 위해 대회전 70차례 소전투 40회를 치르며 천하 백성들의 간과 뇌수를 으깨 그 땅을 적시게 했고 부자의 해골이 동시에 들판에 질펀히 뒹굴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통곡소리는 아직도 들리며 부상자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폐하께선 마치 한나라가 주나라 최융성기인 성왕. 강왕시대인 것처럼 꿈꾸듯 착각하시며 낙양에다 도읍하려 하시니 너무나 답답해서 귀찮도록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낙양은 그 때와 지금의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대가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도 대부분의 대신들이 도읍지로는 낙양이 최선이라고들 믿고 있으니 짐도 어쩔 수가 없네. 오늘은 머리가 아프니 그만하고 물러가게. 다음에 다시 그것을 의논할 기회가 있을 걸세."
누경은 물러갔다. 그 이후 그러니까 누경이 천도 문제를 들고 찾아온 것은 두 번째인 셈이었다.
"그대의 끈질김에 짐은 두 손 모두 들었다. 어차피 관중으로 천도하라는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오늘은 그대의 웅변을 마저 듣기로 하겠다. 짐을 설득시켜 보라."
"우선 저 진나라 땅을 보십시오. 산으로 싸여 있고 황하를 끼고 있습니다. 즉 사면이 자연으로 막혀 있는 요새란 뜻이지요. 게다가 동쪽의 함곡관, 남쪽의 무관, 서쪽의 대산관, 북쪽의 숙관이라는 네 개의 관새까지 견고하게 서 있어 아무리 위급할 경우라도 적은 군사만 동원해도 적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중으로 천도하라고?"
"그곳의 비옥한 땅을 활용하는 바는 천연의 부고를 껴안는다는 뜻이 됩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시어 그곳에다 도읍하신다면 혹시 산동(함곡관)이 어지러워져도 최소한 진나라 옛 땅만이라도 안전하게 보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까?"
| "사람이 서로 싸움을 할 경우에도 멱살을 잡아쥐거나 등판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하시어 진의 옛땅을 장악하시면 그것이 곧바로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시는 일이 됩니다."
"음, 일리는 있다. 한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떻소?"
유방은 뭇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왕릉이 나서서 대답했다.
"주왕조는 수백 년 계속되었고 진나라는 단 2대에 끝장이 났습니다. 누경의 주장은 그래서 허망스럽습니다. 어찌 최선의 도읍지가 관중이겠습니까, 여전히 낙양이 옳습니다."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유방은 갑자기 무릎을 쳤다. '옳지! 이런 문제는 장량과 의논해야지. 어째 그 생각을 미쳐 못했을까!' 장량이 얼마 있지 않아 궁으로 불려왔다.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관중이오 낙양이오?"
"낙양에 그런 견고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가 수백 리밖에 되지 않을 만큼 협소하다는 결점이 있습니다. 또한 전지는 박토이고 사면에서 적의 공격에 노출돼 있어 작전상 유리한 용무 지지는 못됩니다."
"결국은 낙양이 도읍지로선 부적당하다는 얘기구려."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효산과 함곡관을 왼편에 두고 농산에서 남쪽 촉에 이르기까지 연결된 산악지대를 오른편에 두고 있으며, 기름진 땅이 천 리이고, 남쪽에는 또한 풍부한 물산이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호지와 접경하고 있어 목축을 할 수 있다는 이익이 있고 남.북.서 삼면은 천험이 있어 제후들을 제어하기에는 제격인 곳입니다."
"그대의 의견이 옳은 것 같소. 그러니까 제후의 나라들이 안정돼 있을 땐 황하나 위수를 통해 천하의 물산을 서쪽의 수로로 수송할 수가 있고 제후의 나라에 변고가 있다면 하수를 따라 내려가면서 물자 수송도 할 수 있겠고."
"그러니 관중이야말로 금성(견고한 성) 천 리이며 하늘이 쌓아올린 부고입니다. 누경의 주장이 옳습니다."
"됐소! 결정했소!"
그런 후 유방은 다시 누경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대는 진의 옛 땅에 도읍하자고 주장한 공로가 있소. 봉춘군이라 호하고 낭중에 임명하겠소. 그리고 누는 유와 통하오. 짐의 성씨인 유씨 성을 하사할 테니 앞으로는 유경이라 부르시오."
그런 다음 이튿날로 관중에 도읍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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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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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31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단지 고통의 형태를 약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본질적인 고통은 본래 궁핍한 삶과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만약 고통을 추방할 수 있다고해도 그 고통은 즉시 다른 형태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다.
32
어리석은 사람은 하찮은 경험이나 대화, 약간의 독서로 얻은 지식을 마치 자기의 생각인 것처럼 자랑하면서 떠벌린다. 그러나 사색의 깊이가 없는 지식은 향기를 지니지 못하고 금방 그 정체를 드러낸다.
33
진리를 발견하는 일에 가장 커다란 방해가 되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다. 선입관이나 편견은 육지로 향하던 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밀어 버리는 사나운 태풍이다.
34
어떤 사물을 오랫동안 주시하고 있으면 차츰차츰 눈이 둔감해지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지식도 역시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사상을 오랫동안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상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사상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사상에 관한 명백한 윤곽을 파악한 후에 그 사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라. 우리는 지성이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휴식을 취하고 나면 현실의 사물들을 더욱 새롭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물들의 관계와 의미를 더욱 순수하고 심오한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35
지혜와 빛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풍경이 빛에 따라 무수하고 다양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처럼 지혜도 인생을 다양한 각도로 분석하면서 교훈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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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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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석굴암의 감불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작고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증발하던 무렵에 석굴암은 또 다른 석조물을 도난당했다. 굴대 주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에 하나씩 안치돼 있었던 작은 석상들 가운데 2점을 훔쳐간 자가 있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의 소행이었다. 석굴암이 일본인들에게 주목되기는 1907∼1908년의 일이었다. 어떤 일본인의 기록을 빌리면, "1907년께에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 는 말이 누가 발설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일본인 사이에 퍼졌었다"고 한다. 다른 어떤 증언은 그때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석굴암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우연히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던 우편배달부였다고 한다. 당시 우편국장은 일본인이었다. 그즈음의 석굴암은 석축의 둥근 천장 일부와 전실부가 무참히 허물어져 석굴 전체가 온통 파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중들은 의병 난리 이후 산 밑으로 모두 피신하여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 틈을 타서, 일본에 실어가면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이 땅의 문화재를 찾아 안 가는 데 없이 헤매던 일본인 무법자들이 옳다구나 하고 침입했던 것이다. 그들은 석굴암에서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던 작은 감불좌상 둘만 훔친 것은 아니었다. 석굴 본존의 뒤켠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는데, 혹시 그 속에 복장유물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이때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불국사에서도 석조물을 약탈했다. 다보탑의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놓여져 있던 작은 돌사자상 넷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나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들고 달아났던 것이다. 당시 불국사엔 몇 명 안되는 중들이 있었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들을 위협하고 몇 푼의 돈을 집어주고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소위 통감부 시기에 한국에 건너와서 경주군 주석서기로 있으면서 소네 통감의 불국사 및 석굴암 관람을 안내했던 기무라가 뒷날 이런 말을 쓰고 있다.
"나의 (경주군) 부임을 전후해서,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 주고 빼앗았다는 뜻)되어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돼 있는 석굴 불상(석굴암 감불) 2구와 불국사의 다보탑 사자 1대(2구, 정확히 3구)와 등롱(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다."( (조선에서 늙으며), 1924년)
이 글로 미루어 기무라도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귀중한 유물을 약탈해 간 일본인 소행에 매우 분개하고, 그 행선지를 알아내려고 애쓴 것 같으나 소네 통감이 불법반출한 석굴암 오층소탑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반면 기무라는 또 하나의 비화를 적고 있는데, 석굴암이 하마터면 모조리 해체되어 서울로 운반될 뻔했다는 얘기다. 소네 통감이 불편과 험난을 무릅쓰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의 놀라운 구조와 감동적인 불상조각들을 구경하고 오층소탑까지 빼돌린 후, 세키노가 현지를 학술적으로 조사하여 그 역사적ㆍ예술적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자, 통감부는 보수 및 보호방법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결론이 석굴암의 불상 전부와 불국사의 철불을 서울로 운반하자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즉각 경상관찰사를 통해 그 계획을 현지 군수에게 알리고, 소요경비의 견적서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아 흐지부지 취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계획으로는, 해체한 석굴암의 석불과 기타 모든 석재를 토함산에서 약 40리 내려온 동해안의 감포를 통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의 일이었다.
요릿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불국사 사리탑
1902년 8월 어느날, 경주의 불국사를 찾아온 일본인 고적전문가가 있었다. 당시 동격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였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이 땅의 옛 건물(고건축물)과 고적의 실태를 조사한다고 하였으나 실제 내막은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한반도 침략 계획에 필요한 입체적인 정보수집을 위해 일방작으로 강청한 각 분야 시찰ㆍ조사의 일환이었다. 행동과 예산에서 특권이 보장되었던 세키노는 그때 한국의 주요 고적지와 옛 건물을 매우 정확하게 조사ㆍ파악하고 돌아갔다. 개성 근처의 폐사지에서,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는 경천사 십층석탑을 처음으로 조사ㆍ평가한 것도 그때였다. 세키노의 발길이 처음으로 경주에 닿았을 때의 불국사는 말할 수 없이 황폐된 상태였다. 지키는 중도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절안의 유물을 훔쳐다 파는 무뢰한은 한국인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던 시절이라, 비록 무너지고 깨지고 했을망정 신라 이후의 걸작 석조물들과 불상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키노는 그것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는 이때의 조사정보를 2년 후인 1904년에 일본에서 발표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당시 한국에 건너와 있던 한 일본인 무법자가 불국사 쪽으로 당장 약탈의 손을 뻗쳤다. 다음은 현재 불국사 대웅전 뒤쪽 비로전 앞의 자그마한 보호각 속에 들어 있는 사리탑(보물 제61호)이 그때 당했던 수난의 내력이다. 1902년에 한국의 고적과 고건축물을 처음으로 조사하러 왔을 때, 세키노는 그때 벌써 개성에 정착하고 있던 그의 동족인 한 일본인으로부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신세를 생각해서 세키노는 일본에서 출판한 그의 (한국건축조사보고) 한 권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선물은 결과적으로 개성의 그 자에게 한국에서 약탈할 만한 중요한 문화재의 정보를 제공한 격이 되고 말았다.
1906년의 일이었다. 세키노가 알려준 정보를 갖고 경주로 내려간 개성의 일본인은 불국사에 이르러 몇 명 되지도 않았던 사승들을 위협하고 약간의 돈을 집어준 후, 섬세하게 조각된 사리탑 하나를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즈음 도쿄에 있던 세키노는 우에노 공원께의 '정양헌'이란 요릿집 정원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도 일본인이었다. 같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약탈해 온 불국사 사리탑의 불법적인 처사를 고발하기는커녕 (국화)라는 잡지의 요청으로 해설을 썼다. 물론 배후의 범죄 행위엔 입을 다물고 있었다. 1909년 이후, 세키노는 재차 한국에 와서 고적조사를 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의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불국사에서 일본으로 반출해 간 사리탑을 되찾아다가 원위치에 놓도록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그 사리탑은 도쿄의 요릿집에서 이미 딴 데로 팔려나간 후,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몹시 마음에 걸렸었는지 그후 세키노는 사리탑의 행선지를 계속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20년. 드디어 그는 도쿄의 나가오라는 제약회사 사장집 정원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1933년 5월 말의 일이었다. 몇 다리를 거친 소유자였던 나가오가 그때 세키노에게 어떻게 설복당했는지, 7월 말에 가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불국사의 원위치로 사리탑을 깨끗이 반환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한편 불국사의 다보탑 돌사자를 약탈해 간 자도 사리탑의 범행자인 개성의 그 일본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대해선 세키노도 별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1902년에 조사할 때엔 4구가 다 있었는데 1909년에 다시 와 보니 비교적 완전한 2구가 반출돼 있었다고 언급했을 뿐이었다( (조선의 석탑파), 1912∼1913년). 그렇다면 그 뒤에 다른 일본인이 남은 2구 중의 하나를 또 약탈해 간 것이 된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다보탑에서 잃은 3구의 돌사자는 석굴암의 오층소탑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일본 안의 행선지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불법반출되어 돌아오지 않는 석물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불법적으로 약탈하고 혹은 협박과 돈으로 매수해서 일본으로 실어 간 문화재에 대해서는 종류와 수량을 불문하고 기정사실로 삼아 뒤를 묻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소유권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면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파괴가 심한 일부 중요한 고적을 대대적인 전시효과를 노려 보수하는 척 함으로써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의 이중의 기만적인 침략정책을 수행했다. 총독부의 특례적인 반환 노력과 일부 양식 있는 일본인 학자의 협력으로 일본에서 되돌아온 것은 일제 36년을 통해 앞에서 소개한 '경천사 십층 석탑'(국보 제86호)과 '불국사 사리탑'(보물 제61호)뿐이었다. 이흥직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간 대소 무수의 석물에 비하면 구우의 일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국 총독부는 일단 저들의 본토로 실어 간 문화재에 대해선 그 경위를 일절 추궁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세키노의 증언기록을 빌리면 불국사 사리탑의 경우, 개성에 있던 일본인이 도쿄로 불법반출한 후 요릿집 정원에서 자랑스레 공개되어 잡지에 사진과 해설까지 실렸다는 것이니 그런 사례가 당시 일본 안에서 얼마나 많았을까. 다행이 그때의 사리탑은 20년 후의 소유자에 의해 기적적으로 반환이 되었지만 오늘날 석굴암과 불국사의 다보탑을 병신으로 만들고 있는 소탑과 감불과 돌사자상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그 한스러움을 이홍직 교수는 작고하기 전에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석굴암의 소탑과 감불의 행방을 추궁하여 그것을 원상복귀할 것을 전 국민의 염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석굴암에서 없어진 것뿐이랴. 일제 때 일본인들이 약탈하고 불법 반출해 간 무수한 한국문화재의 대다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 안의 여러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서 한일합방 전후 혹은 그 이후에 이 땅에서 반출해 간 부지기수의 각종 문화재의 일부가 목격 또는 확인되고 있지만 이미 반환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게 돼 있지가 않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과거의 불법적인 반출문화재 반환 요구와 제한된 실현은 1965년의 반환목록으로 일단 끝나 있다. 그렇다고 아직도 무수하게 일본에 남아 있는 것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눈에 자연스럽게 보여질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개성지역에서의 도굴품으로서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보물급)로 지정돼 있는 '고려청자음각정병' 의 소장처인 도쿄의 네즈미술관 입구와 정원에는 물을 것도 없이 일제 때 이 땅에서 불법반출해 간 석물들-고려시대의 우아한 '팔각원당형부도' 를 비롯하여 같은 고려유물인 방형탑과 귀부, 조선시대의 석등과 문무석인, 석양, 동불, 동종 등-이 버젓이 놓여 있어 오늘날 그곳을 찾는 한국인의 심회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
약 10년 전에 그곳을 방문했던 한 국내 전문가가 미술과 책임자에게 그것들을 소장하게 된 유래를 물었더니, "일제시대에 고물상에서 구입했다" 고만 말할 뿐, 아무런 기록자료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들이 반출당한 국내의 원위치나 절터, 그리고 탑비명 같은 것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불법반출 석물들은 네즈미술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고 있다. 도쿄의 '오구라집고관' 에는 율리사터에서 실어간 팔각석탑이 있고, 오사카미술관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리탑과 비석, 그외 고려시대 것으로 믿어지는 좌불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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