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30년 - 이영신
제 1 부 쿠데타의 새벽 (1)
1. H아워에 출동하라!
오후 6시경. H아워 4시간 전이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제6관구 사령부. 이 제6관구 사령부는 쿠데타의 H아워 총지휘부로 변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 제6관구 사령부 사령관은 육군 소장 서종철(徐鐘哲), 그는 물론 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H아워와 함께 제6관구 사령부가 쿠데타의 총지휘부로 둔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의 사령부가 쿠데타의 지휘본부라니?)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어이없어하는 서종철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김재춘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날 서종철은 퇴근시간보다 조금 일찍 사령부를 떠났다. 김재춘은 사령관이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당직사령(當直司令)인 육군 중령 하종구(河鐘九)를 참모장실로 불렀다. 그가
"귀관, 긴급한 일로 대구에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 "대구에요?"
하종구는 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일과중에 출장 명령을 내리지 않고, 왜 하필 퇴근시간에 명령을 내리느냐 해서였을 것이다.
"대구, 어디로 출장가야 합니까?"
"2군 사령부야,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한테 서류를 전해주고 오면 돼."
서류 하나 전하기 위해서 고급장교를 출장 보내다니? 하종구는 더욱 더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김재춘은 그러한 하종구의 감정을 읽었다.
"이 서류는 1급 비밀이오. 너무나 중요한 서류가 돼서 그러니 실수가 없어야 할 거요."
그는 일침을 놓았다.
"전 오늘 당직사령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겠습니까?"
"이 서류는 1급 비밀이라 하잖았소! 이런 중요한 일은 사령관 각하의 신임이 두터운 하 중령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래요."
하종구는 서종철의 심복이었다. 그 심복이 오늘 밤 당직사령인 것이다. 그래서 김재춘은 당직사령을 바꿀 생각에서 하종구에게 출장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 곧 떠나게. 당직사령은 내가 이경화 중령더러 대신 맡으라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종구가 참모장실에서 물러가자, 대신 당직사령을 맡도록 명령했다. 장교들이 모두 퇴근해 버린 제6관구 사령부. 이 시간, 제6관구 사령부의 표정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안이나 밖이나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D데이를 맞았고 H아워가 다가오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조용하기만 한 것이 쿠데타 그룹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에 이 시간,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金在春)은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나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朴元彬)을 은밀히 참모장실로 불렀다.
"조금 전에 출동부대에 대한 체크를 전부 H아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나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어. 시내 동정이 어떤지 좀 살펴봐야겠어. 내가 없는 동안 박 중령이 사령부를 장악해 주게."
"알겠습니다. 염려마시구 다녀오십시오."
작전참모 박원빈은 계급은 김재춘보다 한 계급 아래였으나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함경북도 청진(淸津) 태생인 박원빈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군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계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밥그릇으로 따지는 것이 군대사회, 거기에 박원빈은 김재춘과 쿠데타 동지로서 결속되어 있었다. 군말이나 반감이 있을 수 없었다. 박원빈은 호기있게 명령을 수행했다.
서울 종로 2가 교동국민학교(校洞國民學校) 뒷골목에 은성(銀星)이라는 조용한 한식집이 있었다. 낮에는 점심을 팔고 밤에는 술을 팔았다. 간판이 붙어 있으니 은근짜집은 아니었다. 점심 한 끼를 때우는 데는 5인 가족 1주일 생활비에 해당하는 값을 받고 있었으니 한식집치고는 엄청나게 고급 요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점심을 먹든 술을 먹든 아리따운아가씨가 곁에 붙어 앉아 시중을 들어주는 요정이었으니, 비싼 값을 치러야 할 밖에. 그녀들을 일컬어 접대부라고 했다. 옛날의 기생(妓生)이 변신한 접대부였다. 옛날의 이르기까지 교육이 엄격했으나, 해방 이후의 이른바 접대부 아가씨들은 기생 앉았던 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예의범절, 풍류, 정조관념에 이르기까지 그들 접대부들은 기생하고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접대부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아가씨들도 있어 정치인, 고급관리, 군부의 장성, 사장 족속등이 이런 요정을 즐겨 드나들고 있었다. 저녁 7시. 육군 참모총장 육군 중장 장도영(張都暎)이 그의 막료인 정보참모부장 육군 소장 김용배(金容培)와둘이서, 이 은성 대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이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자는 구실로 장도영은 김용배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두 사람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특별한 손님만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 별실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장도영은 참모차장 육군 중장 장창국(張昌國)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아, 여보 장 차장. 나요, 지금 뭘 하고 있소?"
"예, 지금 막 미군 장성들하고 골프를 끝내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샤워를 하고 있다면 벌거벗은 채로 전화를 받고 있다는 얘기인가?) 장도영은 잠시 장창국의 벌거벗은 알몸을 망막 속에 그려보고는 아마터면 풀썩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여보 장 차장, 우리 지금 은성에 와 오시오. 그래야 우리도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예, 알겠습니다."
육군 참모차장 장창국은 장도영과 계급이 같은 육군 중장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의 직책이 한급 위였다. 몸이 고단하다는 이유로 초청을 사양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평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땅거미가 깔리고 제30사단 사단본부가 자리잡고 있는 영내는 점차 고요에 묻혀 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향긋한 아카시아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만 같앗다. 어쩌면 그 향기는 신록의 내음인지도 모른다. 의자에 무료하게 앉아 어둠이 깃드는연병장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단장 육군 준장 이상국(李相國)은 문득 생각난 듯이 팔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수색에서 서울 무교동까지 약속시간에 닿을 수 있을지 시간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늘 육군본부의 김판규와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40분이면 충분하겠지."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문이 열리며 사단장실로 들어선 사람은 부사단장 박상훈과 참모장 이갑영이었다.
"웬일이오?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었소?"
박상훈은 좀 머뭇거리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이승만(李承晩)이 통치하던 자유당 시절, 사단의 부사단장은 거의가 육군 대령이었다. 당시 준장 계급 이상자에 대해서는 으레 <각하(閣下)>라는 경칭을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부사단장은 계급에 있어서는 <장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는 대령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단장 유고시에는 사단당 직무를 대리하는 것이 부사단장이라 해서 부하 사병들은 부사단장을 부를 때도 <부각하(副閣下)>라는 경칭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대통령 이외에는 각하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군대에서만은 별을 단 장군한테는 여전히 각하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다.
"어떻소? 중대한 문제가 아니면 시내에 나가려던 참인데 내일 얘기하면 안 되겠소?"
이상국은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내일? 내일이면 천지개벽이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이런 중대한 문제를 내일로 미룰 수 있단 말인가?) 부사단장 박상훈은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각하, 부대가 오늘 밤에 출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홍두깨 같은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오, 그게? 오늘 밤에 부대가 출동하다니, 뭣때문에 출동한단 밀이오?"
이상국은 꼭 여우에게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박상훈은 금방 뭐라 대꾸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을 던졌으면, 뭐라 대꾸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박상훈이 대꾸도 않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상국은 역정이 일었다.
"말을 해봐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부대출동이라는 게? 사단장도 모르는 부대출동도 있단 말이오?"
그러자 참모장 이갑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각하, 나가서 저녁식사나 하면서
"밖에 나가서?"
"예."
이상국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받고 그냥 흘려버릴 수도 없은 일이었다. 김판규와의 약속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약속 장소로 가는 차에서 수수께끼 같은 얘기를 들으리라 마음 속으로 셈을 했다.
"그럼 그러지."
이상국이 앞장서 나갔다.
"부사단장은 내 차에 오르시오. 가면서 얘기합시다."
이상국의 지시에 박상훈은 사단장 전용 지프에 올라탔다. 핸들은 이상국이 직접 잡았다. 참모장 이갑영도 운전병을 뒤를 따랐다. 두 대의 지프가 제30사단 연병장 정문을 나서는 그 무렵, 국무총리 장면은 숙소인 반도호텔(지금의 을지로 1가 롯데호텔 자리) 809호실에서 아내 김윤옥(金允玉)이 집에서 차려 온 저녁상을 막 물리고 있었다. 참으로 정성이 지극한 장면의 아내였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집에서 마련해 가지고 와서 남편을 대접했다. 점심 요기의 경우에는 운전수를 시켜 국무총리 집무실로 들여보냈다. 장면은 아내의 정성이 언제나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했다. 그래서 호텔 주방에서 차려 주겠다는 식사를 사양하고 아내의 정성을 행여 밥을 남기기라도 하면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 해서 아내가 걱정을 할세라 식욕이 부진할 때도 밥그릇 비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보."
"네."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 주겠소?"
"왜 무슨 일이 있으세요?"
"8시부터 국무회의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돌아갈께요."
김윤옥은 차려 왔던 밥그릇, 찬그릇을 챙겨 바구니에 담았다.
"여보, 나이를 생각하셔야 돼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당부를 이 밤에도 하고 다소곳이 방을 나섰다.
"나한테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요, 부사단장?"
사단장 이상국은 앞만 주시하면서 하고자 하려던 얘기가 무엇인지 어서 해보라고 채근을 했다. 어지간한 얘기면 시내에 나가는 사이에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에 쿠데타가 벌어집니다."
박상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뭐라구? 쿠데타?"
이상국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다.
"좀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쿠데타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오?"
쿠데타가 모의되어 왔으며 그 지도자는 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라는 것과 몇 번인가 D데이와 H아워를 변경한 끝에 마침내 오늘 H아워에 거사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오늘 밤의 거사에는 우리 부대를 비롯해서 해병대, 공수단 등이 출동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도 이 문제에 신중히 대처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런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그런 엄청난 비밀을 H아워 몇 시간 전에 나한테 얘기한단 말야?) 이상국은 오장육부가 뒤집혀 버릴 것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별을 단 사단장 체면에 길길이 뛰면서 악을 쓸 수도 없는 일, 그는 녹번리 사거리에 이르자,
"부사단장, 참모장하고 차를 바꾸어 타 주시오."
박상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 이갑영이 차에 올랐다. 이상국은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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