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4호 2023.2.11 토요일 (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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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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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을 잃은 사람은 많이 잃은 것이고,
친구를 잃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며,
용기를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 세르반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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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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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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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시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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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 - 힌용운
당신은 해당화가 피기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랬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 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 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는 꽃을 주워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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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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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7. 하늘이 내린 명의(편작, 창공)
1)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편작) 1/2
비방을 전수받다
편작은 발해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진이고 이름은 월인이었다. 편작이라는 이름은 후에 그가 유명해졌을 때 사람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편작은 젊어서 어느 고관의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장상군이라는 손님이 그 집에 찾아왔는데, 그냥 보기에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상군은 그 뒤로도 자주 그 집을 찾아왔으며, 편작은 늘 그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장상군이 찾아 오더니 편작을 불러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의 만병을 치료하는 비방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이 없지. 그래서 그대에게 비방을 전수하려 하네. 다만 결코 남에게 알려서는 안되네."
편작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장상군은 품 속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면서,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이 약과 함께 한 달간 먹어 보게, 그러면 무엇이든 볼 수 있을 것일세."
라고 말했다. 또 비방이 씌어 있는 책들을 모두 편작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편작은 그가 일러준 대로 한달간 약을 복용하였다. 그랬더니 담장너머의 사람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병자들의 내장 속 종기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그저 맥을 짚어서 알 수 있노라고 말할 뿐이었다. 편작의 명성은 순식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흘 안에 깨어나리라
당시 진나라의 세도가였던 조간자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그러더니 5일이 되어도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대신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편작을 부르기로 했다. 이윽고 편작이 도착해 진찰을 해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 걱정할 것이 없소. 옛날 목공도 똑같은 증세가 나타났었는데 일주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때 목공이 깨어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천제가 있는 곳에 갔는데, 매우 즐거웠소. 천제는 이웃 진나라가 머지 않아 큰 혼란에 빠져 5대에 걸쳐 어지러우나 그 뒤에 천하의 패자가 될 인물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빨리 죽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으면 풍속이 문란해진다고 말씀하셨소.' 과연 목공의 말대로 진나라는 헌공 때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문공이 나타나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양공은 한때 목공의 군대를 효산에서 격파했으나, 그 뒤 숱한 난행을 범했지요. 지금 조간자 대감의 증세도 목공과 똑같으므로 사흘 안에 반드시 깨어나실 것이요. 그리고 깨어나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이틀 반 만에 조간자는 깨어났다 그리고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천제가 계신 곳에서 즐겁게 지냈소. 약사들이 쭉 늘어 앉아서 흥겨운 음악들을 연주했고 또 여러 가지 진기한 무용도 감상했소. 그런데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에게 덤비지 않겠소. 내가 급히 활을 쏘니 곰은 쓰러졌소. 그러자 더 큰 곰이 또 나타났소. 이번에도 활을 쏘니 그 곰 역시 쓰러졌다오. 그대 문득 천제 계신 쪽을 보니 내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면서 천제는, '이 아들이 크거든 이 개를 주어라'고 말씀하시면서 책 땅의 개를 내게 주시었소.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소. '진나라는 머지 않아 쇠약해져서 멸망하지만, 너희 조씨 가문은 점점 번성하리라. 다만 그곳을 언제까지 지킬 수는 없구나.'"
그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편작이 예측한 것과 똑같아 매우 놀라워하였다. 이때 조간자는 편작이 자기가 깨어날 것을 진단했다는 얘기를 듣고 편작에게 논밭을 많이 하사하였다.
"건강한 사람을 환자 취급하다니"
그 뒤 편작이 제나라를 방문하는 길에 환공을 만나게 되었다. 환공을 만나자 편작이 신중하게 말했다.
"지금 귀공께서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다행히도 아직은 피부에 머물러 있는 정도이니, 쉽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놔두시면 악화될 뿐입니다."
그러자 환공이 크게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처럼 건강한 사람을 병자 취급하는 거요?"
그러면서 편작이 물러나가자 신하들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의사라는 사람이 자기 돈벌 생각만 하는군."
닷새 후에 편작은 다시 환공을 찾아왔다.
"귀공의 병환이 이제 혈맥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놔두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나 환공은,
"난 별로 이상이 없소. 생사람 잡지 마시오!"
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닷새 후, 편작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 병환이 위장까지 이르렀습니다.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환공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편작이 물러가자 환공은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또 닷새가 지났다. 이번에도 편작이 찾아왔지만 먼 곳에서 인사만 한 채 그대로 물러갔다. 그랬더니 환공은 이상하다고 느껴 신하를 시켜 그 이유를 묻게 했다. 이에 편작이 말했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에는 탕약과 고약으로도 고칠 수 있소. 혈맥까지 진행되어도 침으로 고치지요. 또 위장까지 들어간다면 약을 복용해서 나을 수 있소. 그러나 병이 골수에까지 미치게 되면 생명을 다룬다는 신이 내려와도 손 쓸 수가 없는 것이오. 지금 환공의 병은 이미 골수에 비치고 있소. 그래서 치료를 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과연 닷새 만에 환공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리고 급히 편작을 불렀으나, 편작은 이미 국외로 떠난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공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
언젠가 편작은 괵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알아보니 태자가 금방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편작이 궁궐 앞에 가서 의관을 만났다.
"태자는 무슨 병이었습니까?"
그러자 의관이 대답했다.
"태자의 병은 피의 순환이 불순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기가 나쁜 기운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기는 완만해지고 음기가 치솟아 죽은 것입니다."
"죽은 시간은 언제입니까?"
"날이 밝을 무렵이었지요."
"입관은 했습니까?"
"아직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입관은 하지 않았습니다."
편작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편작이라는 사람이온데, 지금까지 태자를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태자를 다시 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말에 의관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미 죽은 태자를 어떻게 살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옛날 유부라는 명의는 아무런 것도 쓰지 않고 잠깐 환부를 보고 그 징후를 살피며 동쪽의 맥을 짚어 보고는 살을 가르며, 힘줄은 잇고, 뇌수를 누르며, 위장을 씻고, 마음을 다스려 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선생의 의술이 이와 같다면 혹시 살려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한데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삼척동자도 웃을 노릇입니다."
그러자 편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당신의 의술은 대나무통으로 하늘을 보고 틈 사이로 모양을 들여다 보는 것이므로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안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면 병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의 바깥쪽을 듣고 속을 알며, 속을 듣고 바깥쪽을 압니다. 병의 증세는 밖으로 나타나는 거이니 천리 밖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아도 다만 증세를 듣는 것만으로 병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덮어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말을 정 믿지 못하시면 당신이 들어가서 태자를 살펴 보십시오. 귀가 울고 코가 팽팽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허벅다리는 아직도 따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의관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궁궐로 들어가 이 사실을 괵나라 군주에게 보고했다. 군주는 즉시 편작을 불러 들였다.
"선생의 명성은 저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나라에 오셔서 태자를 염려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정말 제 아들을 살리실 수 있으신지요?"
군주는 그러면서 흐느껴 울었다.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이 눈썹 가득 고였으며, 급기야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편작은 말했다.
"태자의 병은 이른바 시궐이라는 것입니다. 양기가 음기 속으로 흘러 들고 그것이 위를 움직이며 혈맥에 엉겨 붙었다가 다시 갈라져 방광까지 내려갑니다. 말하자면 음기는 위로 올라가고, 체내를 돌아 아래로 내려온 양기는 위로 오를 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음양의 조화가 무너져 얼굴빛이 파리해지고 몸은 움직이지 못해 죽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지탱하면 살고, 음기가 양기 속으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런 일은 대개 몸 속에서 오장의 기운이 치솟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편작은 제자에게 침을 갈게 하고 태자의 몸 바깥쪽에 있는 삼양과 오회에 침을 놓았다. 그랬더니 조금 뒤에 태자가 깨어났다. 그 뒤 편작은 5푼의 고약을 만들고 팔푼의 약을 섞어서 달인 다음, 이것을 양 겨드랑이 밑에 발라 따뜻하게 찜질을 했다. 그러자 태자가 일어나 앉았다. 다시 음양의 기를 조절하고 20일 동안 탕약을 먹이니 태자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편작은,
"내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것이 아니라, 다만 당연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고 말했다.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
편작의 이름은 갈수록 드높아졌다. 그래도 편작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손수 치료에 나서고 있었다. 조나라에서는 주로 부인병 치료를 하게 되었고, 주나라에 가서는 노인병 치료에 주력했다. 또 진나라에서는 주로 어린이들을 치료하였다. 이렇듯 편작은 가는 곳마다 그곳 사정에 따라 치료를 했던 것이다. 편작은 의술을 발전시키고 집대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점쟁이나 주술에 의한 병의 치료에 강력히 반대했다.
"의약을 믿지 않고 점쟁이나 주술만 따른다면 나을 병이 없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무당이나 주술사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재능없는 의관들도 그의 높은 의술을 질투하였다. 그가 진나라에 있을 때 그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왕이 치료를 부탁했다. 이때 진나라의 시종의로 있었던 이혜는 편작을 크게 질투하여 그를 없애려고 하였다. 드디어 이혜는 자객을 보내 편작을 죽였다. 그렇게 편작은 죽었지만 그의 의학 이론과 기술은 중국 의학계의 귀중한 보고가 되었다. 그의 의학 이론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난경"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었으며, 사람들은 편작을 추모하여 약왕이라 부르고 중국 의학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얼굴이 곱든 밉든 궁중에 있으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는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조정에 있으면 의심을 받는다. 편작은 그 신기 때문에 결국 화를 입어야만 했다. 노자는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편작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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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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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
不:아니 불. 惑:미혹할 혹.
[동의어] 불혹지년(不惑之年).[출전]《論語》〈爲政篇〉
미혹(迷惑)하지 아니함. 나이 마흔 살의 일컬음.
공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논어》〈위정편(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志學]
서른 살 때 입신했다.
[三十而立(삼십이입)-而立]
마흔 살 때는 미혹하지 않고
[四十不惑(사십불혹)-不惑]
쉰 살 때 하늘의 명을 알았다.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知命]
예순 살 때는 귀에 따랐고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從心]
[주] 20세 : 약관(弱冠),《예기(禮記)》에서 온 말. 60세 : 환갑(還甲). 70세 : 고희(古稀), 두보의 시 ‘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 77세 : 희수(喜壽), ‘喜’의 초서체(草書體)는 七七이라 읽을 수 있음. 88세 : 미수(米壽), ‘米’자를 분해하면 八十八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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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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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우리 엄마 누가 좀 말려줘요
저는 빛고을 광주에 사는 김용석이라고 합니다. 8남매 중의 막내가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중간에 휴학을 한번. 그래서 결국 지난 2월 10일 서른 넷의 나이게 졸업을 한 노총각입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홀로 계신 어머니께 불효막심한 막내자식이 되었고 혼자 사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가끔 저에게 전화를 하곤 하십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무렵의 일입니다. 그 무렵엔 졸업논문 준비로 자정을 넘겨서 들어오는 경우도 많고 해서 자동응답기를 설치해 놓았지요. 어느 날 저녁 늦게 우중충하고 총각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 들어오니 자동응답기에 누군가 메시지를 남겨 놓았더군요. 그래서 응답기의 메시지를 들어보던 저는 그만 까무러칠 뻔하고 말았습니다. 이유인즉, 저희 어머니는 제게 전화를 하셨는데 생전에 자동응답기를 사용해 보신 적이 없으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그날은 더욱이 마을 잔칫집에서 약주까지 한잔 하신 상태로 전화를 하셨던 모양인지, 온통 욕으로 도배를 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하신 얘기는 이랬습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전화받는 소리가 들리고, 제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자동응답기 인사말에)예... 들꽃나라입니다. 저는 지금 외출 중이오니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용석아! 엄마다."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어머니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말만 계속하더라는 겁니다.
"용석아 엄마당께... 왜 니 말만 혀...?"
그래도 제가 계속 제 말만 하더니 삐 소리가 나고 아무말도 없더랍니다. '이 녀석이 다른 일을 하던 중이었나보다...'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제가 아무 소리가 없자 답답해지셨답니다.
"용석아... 엄마여... 엄마당께. 왜 말을 허다 말어... (조금 소리를 높여서) 나여, 엄마여... 엄마당께... 아, 우리 막둥이 아녀? 문딩이... 썩을 놈... 어째서 말을 안혀... 아, 막둥아! 왜 말을 허다가 끊어부러.... '삐'가 머시여... 먼 소린지 알아듣도 못허것고 죽것구만... 얼렁 대답 안혀...? 망할 것... 인자 대답도 안허네... 냅둬부러. 문딩아, 인자 니한테는 전화도 안 할랑께."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신 것이었습니다.
동네 분들과 약주를 조금 하신 후에 막내아들이 생각나셨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통화를 성공하셨는데 자동응답기가 받은 후 아무말도 없으니 화가 나실 만도 하지요. 그런데 또 이 여러 번의 시도란 무엇이냐?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드셔서 눈도 어두워지신 데다가 약주까지 한 잔 하셨기 때문에 큰 글자로 적어드린 전화번호를 보고 다이얼을 늦게 누르시기 일쑤였습니다. 전화번호를 잘 못 누르면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오니...'하면서 안내말이 나오지요. 어머니는 분명히 한자 한자 확인하고 거신다고 거셨는데 그 소리가 나오니 어이가 없고 황당하셨겠지요. 첫 실수 때는 이랬습니다.
"문딩이 가시네. 우리 막둥이 집 걸었는디, 무엇이 없는 번호여..."
두 번째 실수에는 이랬답니다.
"아 우리 용석이 집에 전화혔는디, 어째 니가 나와서 그려... 처녀가 우리 막둥이 애인이여?"
"뚜- 뚜- 뚜-."
"여보쇼... 거그 우리 용식이 집 아니여?"
"뚜- 뚜- 뚜-."
"음마, 전화가 염병 허든갑네. 어쩌이려 전화가?"
어머니와 관련된 사건은 이 것 만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4년 전. 저는 이 곳 광주에 있는 극단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연극을 한다니까 둘째 형님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연극관람을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골에서 '굿'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오셨는데, 이 연극이라는 것이 조명은 괜히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거니와 당신이 낳으시고 키우신 제가 연기라는 것을 하고 있으니 도무지 시큰둥해져서 흥미가 일어나지 않으신거지요. 그래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 키우는 개 밥도 주고, TV 연속극이나 보는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서울이나 어디 멀리 출타를 하시게 되면 그 개밥 때문에 어서 돌아가시지 못해 안달을 하신답니다. (이건 비밀인데,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기르신 개이면서도 여름에는 멍멍탕을 무지 즐기시거든요...) 아무튼 공연 중 흥미를 높이기 위해 중간에 장터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객석까지 드나들며 엿이며 전통과자를 팔기도 하고, 무대 위 주막에서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막걸리도 한 잔씩 팔기도 했는데, 평소에 막걸리하면 주무시다가도 일어나실 정도인 어머니께서는 '이게 왠 술이냐'하시며 막걸리를 맛있게 드신 것입니다. 장터 장면은 끝나고 다시 연극은 시작되고 무대의 조명은 어두워지고 모두 숨을 죽이고 집중하고 있는데 아니 이게 왠 일입니까? 갑자기 무대와 객석이 환해진 것입니다. 무대 뒤에 있던 나머지 배우와 스탭들은 화재가 났다며 온통 비상이 걸렸습니다. 조명실에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는가 하면 소화기를 가지러 가는 등 야단이 났습니다. 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오, 하늘이시여!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엄마가 세상에 울 엄마가... 장터 장면에서 막걸리를 한잔 드신데다 지루하기도 해서 담배가 한 대 생각이 간절하시던 차에, 극중에 배우들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자 당신께서도 '옳지... 담배를 태워도 돠는구나'하시며 한 대 태우실 양으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신 거지요. 우째 이런 일이... 곁에 앉아 있던 형님께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시고 황급히 담배를 빼앗아 껐지만, 장내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연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전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하는 장난은 그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겨우 분위기가 수습되고 공연이 다시 무르익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던 다섯 살 조카녀석이 갑지기 오줌이 마려워진 것입니다.
"할머니, 오줌 마려워요..."
"곧, 끝난께 조깨만 참그라..."
"할머니 오줌이 막 나오려고 그래 못 참겠어요."
"그럼 오줌 나오지 말라고 꼬추 끝터리를 꼭 잡고 있어부러라."
하셨으니 어찌 되었겠습니까? 곁에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고 만 것입니다. 물론 공연이 끝나갈 무렵이기는 했지만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산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연극은 제가 맡은 역할이 죽음으로써 끝나는데 제가 연기가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어요?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도 모르고 그냥 빨리 시간이 자나기만을 바랄 수 밖에요. 마지막 죽는 연기도 평소에 누워서 죽다가 그 날은 엎드려서 죽어야 했다는 거 아닙니까? 저희 어머니 정말 별난 분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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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어령편"(1934~2022)
평론가. 수필가.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및 대학원 졸업. 여러 신문의 논설 위원과 이화 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 역임. 사변 이후의 비평계에 이론적 기수로 등장하여 김동리와 '실존성의 논쟁'을, 조연현과 '전통론의 논쟁'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그 후 칼럼니스트로 에세이스트로 맹렬히 활약하면서 신화, 전설, 풍속 기타 다방면의 재료를 토대로 한국인의 사고 방식을 해부하였다. 장편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30만부 매진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지게
지게는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이다. 우리 겨레의 정이 배고 피가 도는 물건이다. 그것에는 운반 수단 이상의 의미가 깃들여 있다. 우선 지게의 모양을 보라. 그것을 져 온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마음씨처럼 순박하기만 하다. 쇠못 하나 박은 흔적이 없다. 솜씨를 부린 데도 없다. 애초부터 지게 모양의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대강 다듬고, 몇 군데 구멍을 뚫었을 뿐이다. 나는 이 순박을 사랑한다. 지게에는 노래가 있다. 지게꾼들은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치며 그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외로운 숲길, 한적한 논두렁에서 그것은 다시 없는 위안이다. 악보를 보며 배운 노래가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득한 할아버지 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노랫가락이다.
지게에는 평화로운 휴식이 있다. 나무 그늘에 지게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잠든 농부의 얼굴들. 안락 의자에 잠든 어느 신사의 얼굴이 이보다 평화로우랴! 지게에는 또 고운 마음이 있다. 나무꾼의 지게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여름이면 산딸기가, 가을이면 들국화와 단풍이 꽂힌다. 무엇을 생각하며 꽃을, 열매를, 잎을 꽂을 것일까?...그것은 우리의 멋이요 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지게를 볼 때마다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먼저 한숨이 흘러나오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게는 어깨에 멜빵을 걸어 지는 1인용 운반 수단이다. 어깨에 걸어 지기 때문에 지게는 괴로운 것이다. 짐의 무게를 온통 몸으로 지탱해야 한다. 물보다 어렵다는 구절양장을, 짓누르는 짐을 지고 올라가 보라, 내려가 보라. 숨이 차다. 무릎 마디가 아프다. 뿐만 아니라 지게는 한 사람의 몸으로 지탱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짐을 운반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로운 걸음을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야 한다. 수레를 이용했던들 그런 괴로움은 쉽게 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 그 어느 세상에서도 운반 수단은 필요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들은 하필 이 괴로운 지게를 만들었던 것일까? 하기는 수레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너무 적었다. 아니, 많았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수레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없었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들은 힘들여서 넓은 길을 닦지 않았다. 다니다 보니 저절로 생겨난 그 비탈길, 그 오솔길, 그 논두렁길... 그러나, 날라야 할 짐은 많았다. 지게는 어디나 갈 수 있다. 사람이 갈 만한 길이면 어디나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지게이리라. 왜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려 하지 않았을까? 외 굴이라도 뚫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게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나'를 위하여 환경을 개선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나'를 맞추려 했던 데서 지게가 생겨난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게의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게를 사랑한다. 그러나, 지게를 벗어 던질 수 있는 넓고 곧은 길을 더욱 사랑한다. 시원스럽게 뚫린 길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그리고 나라에서 나라로 길이 하나 생길 때마다 우리의 삶도 그만큼 넓어진다. 길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천 년 동안이나 져 온 그 괴로운 지게에서 벗어나, 새롭고 넓은 세계를 향해 우리는 마음껏 달려갈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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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운명 빅뱅과 그 이후 - 트린 후안 투안
제1장 세계관 (2/2)
행성은 왜 떨어지지 않는가?
네덜한드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1601)는 당시로서는 매우 정밀하게 천문현상들을 관측해, 코페르니쿠스 대혁명의 다음 단계를 예고했다. 1572년 브라헤는 카시오페이아 자리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 그 별은 아주 밝아 낮에도 한 달 동안이나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행성과 달리 그 별은 먼 곳에 있는 다른 별들과 비료해도 위치가 변하지 않으므로, 브라헤는 그것이 행성 구 바깥의 아주 먼 곳에 있는 별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하늘에서 나타난 이 변화는, 별들은 완전하고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뿌리채 흔들어 좋았다. 사실 그 '새 별'은 초신성으로, 거대한 별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에 태양의 수십억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내며 폭발하는 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천구는 1577년 대혜성의 출현으로 다시 흔들렸다. 당시에는 혜성이 무지개처럼 지구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브라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혜성은 먼 곳의 별들을 기준으로 볼 때 그 위치가 변하기 때문에 초신성보다 훨씬 지구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달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달의 바깥쪽의 천체가 틀림없었다. 브라헤는 혜성이 행성의 구들이 있는 영역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브라헤는 혜성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이라는 것을 계산해 냈다. (이는 모든 천체가 완전한 원을 그리며 운동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타원 궤도는 혜성이 행성들의 투명한 구를 부수며 움직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런 타원형 구가 실제고 있다고 가정하면 이는 논리적인 모순이었다. 브라헤는 그것이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라는 압력을 받아야 했다. 만일 행성들이 단단한 고체의 구에 붙어있지 않다면, 생성들은 왜 떨어지지 않는가? 무엇이 행성들을 하늘에 붙어 있게 한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통일한 갈릴레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와 천체의 현상은 각기 다른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물체가 지구에서는 직선운동을 하고 하늘에서는 원운동을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수학지이자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그런 생각을 무너뜨렸다. 그는 지구상의 영역과 천상의 영역이 같다는 주장을 폈다. 모든 만물은 똑같은 자연법칙-인간의 끈질긴 관찰을 통해 밝혀진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1609∼1610년 갈릴레이는 최초로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다. 그리고 천구의 '불완정성'에 대한 새 증거들을 제시했다. 달 표면에는 산이 있고, 태양 표면은 흑점으로 얼룩져 있었다. 또한 그는 목성의 네 위성을 발견하여 만물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주장을 더욱 신뢰할 수 없게 했다. 1632년 갈릴레이는《두 개의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에서 공개적으로 태양 중심설을 지지했다. 이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쳤고, 분노한 교회는 갈릴레이를 1642년까지자택에 연금했다. 갈릴레이의 저서는 1835년까지 출판을 금지당했고, 그 판결은 1992년에야 번복되었다. 작금에서야 과학과 종교의 분리가 완결된 것이다.
- 튀코 브라헤 / 1546년 12월 14일 / 스웨덴 크눗스토르프
천체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케플러와 뉴턴
행성운동에 대한 티코 브라헤의 정확한 위치 측정 자료는 그의 조수 겸 후임자로 프라하에 있던 요하에스 케플러(1571∼1630, 독일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에게 정말 소중했다. 1606년 케플러는 그 자료를 이용해 천체운동의 케플러는 그 자료를 이용해 천체운동의 비밀을 풀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행성의 궤도가 완벽한 원이 아니라 타원이며, 행성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행성은 태양에 가까울수록 빠르게 움직이며,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천천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성의 운동을 설명한 케플러의 수학적인 법칙도 앞서 브라헤가 행성을 붙들고 있는 단단한 구를 없앴을 때 직면했던 문제를 풀지 못했다. 행성들을 궤도에 붙잡아두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행성들은 태양 쪽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천사들이 밀어주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태양 주위에서 행성들을 돌게 하는가? 1666년 아이작 뉴턴(1642∼1727)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늘과 땅 이분법을 과감히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영국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뉴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운동과 달이 지구 둘레를 도는 운동을 만유인력이라는 동일한 힘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떨어지는 사과는 자연스럽게 공간에서 곡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달도 더 이상 그 궤도를 도는 데 초자연적인 힘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불필요한 신의 가설
뉴턴에 따르면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 우주는 그 크기가 무한했다. 우주가 유한하다면 중력은 만물을 우주의 중심부에 있는 한 점으로 집중시켜 우주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생각은 우주의 관찰 결과와 맞지 않는다.) 뉴턴의 우주는 시계바늘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이를 결정론적 우주라 하는데, 이런 우주에서는 모든 사물이 정밀한 법칙을 따라 정확히 통제된다. 따라서 인간의 일데 관여하는 신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신은 우주를 만들었지만, 이제 멀찌감치 서서 우주를 바라복 뿐이다. 18c가 되자, 프랑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피에르 시몽드 라플라스(1749∼1872)는 신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라플라스의《천체 쳑학에 관한 논문》 증정본을 보고, 라플라스가 창조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라플라스는 "나는 그런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차갑게 응수했다.
19세기 서구인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무한성에 밀려 위축되고, 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졌으며, 기계적인 우주관과 결정론적인 우주관에 압도당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조상은 "지상의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고" 신이 특별히 창조한 아담과 이브로 이어져 있다는 편리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다.
1859년 찰스 다윈(1809∼1882)는 《종의 기원》을 출판해 그러한 마지막 환성마저 산산이 깨버렸다. 이 영국의 박물학자는 우리의 시조는 생각보다 훨씬 비천한 존재였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원시 세포, 어류, 파충류를 거쳐 진호한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케플러와 뉴턴의 계산으로는 우주의 나이는 6000년이지만, 지질학적인 증거들은 생물의 진화가 그보다 훨씬 이전인 수십억 년 전부터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는 이미 공간적으로 확장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시간의 확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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