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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2호 2022.12.4 일요일 (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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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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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감정의 속기법(速記法) ―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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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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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꽃들아, 미안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부디 잘 가라”
‘삼가 고인들게 명복을 빕니다. 지금 가는 길 부디 행복하세요. 죄송합니다.’
노파는 포스트잇을 벽에 붙였다. “할머니, 그렇게 뭐라도 적어 붙이면 마음이 어떠세요?” “잉, 편안혀.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니 맴이 편안혀, 에휴.”
이태원 10·29 참사 현장, 사람들은 말없이 서성인다. 말을 하는 건 벽에 붙은 포스트잇. 사람들은 포스트잇이 하는 말을 듣는다. ‘친구들아, 언니야, 오빠야, 동생아, 자식들아, 꽃들아’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 죄송하다, 괴롭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부디 잘 가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죄책감, 무력감, 우울감, 분노가 뒤엉킨 말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쌓고 있었다. 기어코 이어붙이고 있었다. 옆으로 앞뒤로 위아래로, 같은 말을 겹겹이 쌓아나가고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꾸역꾸역 적었다. 명령과 지침과 해명과 그럴듯한 논리로 무장한 권력자들에 비하면, 헛되고 부질없는 말들. 이 무력한 말들로 뭘 하려고. 얕은 바람에도 떨어져 나뒹구는 이 말들로 뭘 하려고.
어리석은 우리는 매번 사회적 참사(죽음들)를 맞닥뜨리고 나서야 권력자들이 구사하는 ‘통치’의 민낯을 본다. 치밀하되 졸렬하고, 뻣뻣하되 두려움에 싸인. 사람을 타락시키는 건 두려움이다. 권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아웅산 수치). 두려움에 싸여 타락하고 있는 권력 앞에 사람들은 ‘통치되지 않는 말’을 쌓고 있었다. 무심히 흩날리는 포스트잇에서 ‘통치될 수 없는 것들’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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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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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 김수영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廢墟)에 廢墟에 눈이 내릴까
<1966.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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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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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외시(度外視)
度:법도 도. 外:바깥 외. 視:볼 시.
[유사어] 치지도외(置之度外). [반의어] 문제시(問題視).
[참조] 오합지중(烏合之衆), 정중지와(井中之蛙).
[출전]《後漢書》〈光武記〉
①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② 문제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후한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때의 일이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한(漢:前漢)나라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현(劉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
대사마(大司馬)가 된 유수는 그 후 동마(銅馬), 적미(赤眉)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 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齊) 땅과 강회(江淮) 땅이 평정되자 중원(中原)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진(秦) 땅에 웅거하는 외효와 역시 산간오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 거점을 둔 공손술(公孫述)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
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진언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평정(平定)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
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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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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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라 - 로버트 뮬러 박사 전 UN 사무총장
최소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겠노라고 결심하라.
여러 개가 아니라 딱 한가지만.
매일 아침 주님께 말하고 요청하라.
"제가 오늘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은 당신에게 대답하고, 당신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의 요청은 그분에게 생명을 드릴 것이다.
주님은 요청받지 않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주님은 당신 생명의 진정한 인도자인 당신이 영혼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에게 요청하라, 주님에게 말하라, 주님과 대화하라.
그러면 당신은 수많은 기적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당신은 주변에서 기적을 만들리라.
당신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최소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선행이 쌓일지 생각하라!
지구상의 수억만이 하루에 한 가지씩 한다면, 우리의 지구는 어떻게 될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삶에 연연하는 자는 그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명분으로 그것을 내버리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다. - 셀리아 그레함
어느 선량하고 신심이 강한 남자가 재정적인 위기를 여러 번 겪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자신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날 밤, 절망에 빠진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저는 파산했습니다. 제발 복권이 당첨되게 해주십시오, 빠른 시일 내로요!"
다음 주가 되자, 그는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로 낙천적으로 되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푼도 생기지 않았고 그에 비례하여 그는 믿음이 약해졌다. 연말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주님, 정말 그곳에 계십니까? 저는 당신이 도와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도록 당신께서는 제 기도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어두운 구름이 사라지고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추며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 말을 듣고 있다.... 듣고 있다. 사실, 나는 네 기도를 모두 들었노라. 하지만 나에게 힘을 발휘할 기도를 주어라. 최소한 너는 복권을 사야잖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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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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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0장 교만해지는 제환공
5. 백리해, 언제 때를 만나랴
건숙과의 만남
백리해는 원래 우나라 태생으로서 자(字)를 백년(伯年)이라고 했다. 그는 나이 30세에야 겨우 두씨(杜氏)란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 아들 하나가 태어났다. 그런데 백리해는 집안이 원래부터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천하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출세할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어서 항상 주저했다. 어느 날 두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천하에 뜻을 뒀으면 한참 나이에 벼슬길을 찾아야 할 것이어늘 구구히 처자만 지키고 앉았어야 쓰겠습니까. 첩이 혼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테니 당신은 조금도 염려 마시고 떠나십시오."
이 때 집안엔 암탉 한 마리가 있었다. 두씨는 그 암탉을 아낌없이 잡았다. 부엌에 들어갔으나 땔감 나무가 없었다. 두씨는 쓰러져가는 문빗장을 쪼개서 닭을 삶았다. 그리고 방아질을 해서 좁쌀밥 한 그릇을 정성들여 지었다. 백리해는 아내가 정성껏 장만하여 가지고 들어온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그가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집을 떠나는데 두씨는 한손에 어린 아들을 안고 따라나섰다. 두씨가 다른 한손으로 떠나는 남편의 소매를 부여잡고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훗날 부귀(富貴) 공명하시거든 우리 모자를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백리해는 머리를 끄덕이고 처량한 심사로 아내와 헤어져 벼슬길을 찾아 떠났다. 백리해는 우선 제(齊)나라로 갔다. 그 때는 제희공이 죽고 세자 제야가 군위를 이었을 무렵이었다. 그는 제양공(齊襄公) 밑에서 벼슬을 살아보려고 작정하여 각방으로 애를 썼으나 아무도 그를 유력자에게 천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곤궁과 탄식과 슬픔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제나라 질 땅에서 마침내 문전 걸식을 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 그 질 땅에 건숙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 건숙은 자기 집 문 앞에 와서 밥을 비는 한 거지를 보았다. 그 거지의 얼굴이 매우 비범했다.
"그대는 결코 밥을 빌어먹을 사람이 아닌데, 성명을 뭐라고 하시오."
"백리해라고 합니다. 팔자가 기박해서 이러고 다닙니다."
건숙은 그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담론했다. 백리해의 말은 청산에 흐르는 물처럼 거침이 없고 조리가 정연했다. 건숙은 그의 지견이 출중함을 보고 탄식했다.
"그대의 재주로도 이렇듯 몰락했다니, 이거야말로 운수구려. 앞으로 우리 집에서 함께 삽시다."
이리하여 그들은 의형제(義兄弟)를 맺었다. 건숙이 백리해보다 한 살 위였으므로 그는 건숙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건숙의 집도 가난했다. 백리해는 동네 소를 길러 주며 약간의 식량을 얻어와 건숙의 부담을 덜어 줬다. 이 때 제나라는 공자 무지가 제양공을 죽이고 새로 군위에 올랐던 시기 였다. 군위에 오른 무지는 널리 어진 인재를 뽑는다는 방을 제나라 각 고을에 내걸었다. 백리해는 그 방을 보자 한번 응모해 보고 싶었다. 건숙이 조용히 타일렀다.
"죽은 제양공의 동생들이 지금 타국에 있는데 무지가 주공을 죽이고 군위를 뺏었으니 이러고야 어찌 앞날이 평탄할 수 있으리오. 더욱이 무지는 불평이 많고 행동거지가 바르지 않다고 소문이 자자한 고약한 사람이라 그 밑에서 벼슬을 살 것이 아니오."
건숙의 말을 듣고 백리해는 제나라 서울로 가려던 생각을 그만 두었다. 그 뒤, 백리해는 다음과 같은 소문을 들었다.
"주(周)나라 왕자 퇴는 소를 매우 좋아한다고 하오. 그래서 소를 잘 기르는 사람에겐 후한 대접을 해 준답니다."
이 소문을 듣고서 그는 주나라의 왕자 퇴에게 가보기로 작정했다. 또 건숙이 마땅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대장부는 경솔히 사람에게 몸을 맡기면 못 쓰오. 벼슬을 살다가 그 임금을 버리면 불충한 자가 되며, 못난 임금과 함께 고생을 끝까지 한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라. 아우는 이번에 갈지라도 조심하고 조심하오. 집안 일을 대충 처리하고 나도 아우의 뒤를 따라 주나라로 가겠으니, 그 때 우리가 함께 왕자 퇴의 인품을 보고서 앞일을 작정하기로 하면 어떻겠소."
이에 백리해는 건숙의 집을 떠나 주로 갔다. 주나라에 당도한 백리해는 즉시 왕자 퇴를 뵈옵고 소 기르는 법을 설명했다. 왕자 퇴는 크게 기뻐하고 장차 백리해를 높은 자리에 등용하려고 했다. 이 때, 건숙이 질 땅에서 주나라로 왔다. 그는 백리해와 함께 왕자 퇴를 만나보았다. 건숙이 궁에서 물러나오며 간곡히 말했다.
"퇴는 뜻은 있지만 재주가 없는 사람이오. 그는 아첨하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또 쓸데없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성격인지라, 내가 보기엔 그의 앞날이 좋을 것 같지 않소. 그러니 주나라를 떠납시다."
그러나 백리해는 다시 건숙을 따라가서 신세를 지기도 곤란했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백리해가 건숙에게 말했다.
"집을 떠난 지 하도 오래 되어서 아내와 자식이 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고향인 우나라로 돌아갈까 합니다. 형님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건숙이 대답했다.
"지금 우나라에 어진 신하가 있는데 이름을 궁지기라고 하오. 나와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지. 서로 못 본 지도 오래 되었으니 동생이 만일 우나라로 돌아가겠다면 나도 동생과 함께 가서 오랜만에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소."
이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우나라로 갔다. 백리해에겐 그간 그립고 그리웠던, 정말로 오랜만의 고국 산천이었다. 귀국하는 즉시 백리해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곳은 집도 없고 빈터만 남아 있었다. 그간 두씨(杜氏)는 먹고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떠났던 것이다. 이웃 사람에게 돌아가며 물어봤으나 간 곳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백리해는 하늘을 우러러 길이 슬퍼했다. 한편 건숙은 궁지기와 만나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백리해가 비범한 인물이란 걸 말했다. 궁지기는 쾌히 그를 우공에게 천거했다. 이에 우공은 백리해에게 벼슬을 줬다. 그런데 백리해가 벼슬을 받는 날 건숙이 우공을 보게 되었다. 건숙이 말했다.
"내 동생을 추천하기는 했소만 오늘에서야 우공을 보니 사람이 잘고 변변치 못함이라. 앞으로 동생에게 유망한 주인이 될 것 같지 않소."
백리해가 호소하듯 대답했다.
"이 동생은 너무나 가난하고 신세가 곤궁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땅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형편으로는 만사 제쳐놓고 우선 한 모금의 물이라도 얻어 마셔야 살겠습니다."
건숙이 위로하듯 대답했다.
"동생이 가난해서 벼슬을 살겠다면 내 굳이 말리진 않겠소. 다음날에 만일 나를 만나고 싶거든 송나라의 명록촌(鳴鹿村)으로 오게. 그 곳은 깊숙하고 아름답고 고요한 시골 마을이오. 나는 앞으로 그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살 생각이오. 동생은 몸성히 계시게."
건숙은 백리해를 남겨 두고 떠났다. 백리해는 형을 전송하고 우나라에 머물렀다. 이 때가 제나라에서는 무지가 죽고 제환공이 군위에 올라 관중을 정승으로 영입하여 한창 새로운 정책을 펴고 경제 개혁을 시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얼마가 지나자 제나라가 크게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관중이라는 인물이 소금 증산과 국제 교역, 그리고 유통 및 물자 보관의 혁신을 일으켜 경제 정책이 크게 성공하였으므로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놀랍도록 윤택해졌다는 것이었다. 백리해는 제나라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속으로 처음부터 제나라에서 벼슬을 살고 싶어한 만큼 자신의 벼슬 복없음을 탄식했다. '모든 것이 팔자 소관이구나.' 그 후 우나라가 진나라에게 망하자 백리해는 말했다.
"내 지난날 지혜가 없어 건숙 형님의 말을 듣지 않고 우공을 섬겼거늘 이제 와서 충성심마저 없다면 어찌 인간이라 할 것이냐. 모든 정성을 다 바쳐 우공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손가."
그리고는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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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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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슬픈 기도
- `삼풍` 사고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 지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처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시신을 찾아냈다는
차디찬 죽음의 뉴스를 들어야 하는
이 우울한 여름의 슬픈 기도는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일 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의 한숨일 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어서도 아니 될
이 엄청난 희생과 슬픔은
멈추지 않는 원망과 분노의 파도로
밤에도 우리를 덮쳐 와 휴식을 잃습니다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기엔
너무 깊고 큰 이 아픔은
흉하게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보다
더 괴롭고 무겁게 우리를 내리누릅니다
어둠에서 빠져나온 기적의 사람들을 반기느라
우리는 잠시 슬픔을 잊기도 했지만
아직도 따뜻한 웃음이 눈에 선한
우리의 수많은 그리운 얼굴
사랑스런 아들, 딸, 언니, 오빠
해와 달처럼 집 안을 비춰 주던
소중한 엄마, 아빠, 다정한 연인들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돌려 받을 기적은 없는 것입니까?
꿈에라도 보고 싶은 그리운 이들
흔적이라도 만지고 싶어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애타는 기다림
목쉰 통곡소리를 들으십니까?
정말 잘못했다고
이젠 잘해 보겠다고
항상 늦게야 가슴을 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돌덩이처럼 무디어진 우리의 양심
오만한 이기심과 눈먼 욕심
서두르지 못한 게으름과
깨어 있지 못한 안일함으로
가까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부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기엔
너무 염치가 없으니 용서하지 마소서
차라리 두려운 침묵으로 벌하여 주소서
괴롭게 신음하다 죽어 갔을 영혼들
부디 밝은 곳에 편히 눕게 해주시고
상처 받은 이들 낫게 하시며
평생 뽑히지 않을 슬픔의 못이 박힌
유족들의 마음에 함께하소서
힘든 중에서 생업을 포기하고
구조와 봉사로 땀 흘렸던
사랑의 이웃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가 서로의 지친 손 마주잡으며
슬픔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소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 남은 이들은 이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다시 책임지는 법을 배우며
이 아픔을 조금씩 견뎌내게 하소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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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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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동리편"
김동리(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흰나비
어느 날 대낮에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뜰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 박꽃이 번져 나가듯 뜰 안을 펄펄펄 날아다녔다. 그 때 집 안은 절간 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금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뜰에는 이미 녹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풀을 좋아하여 내가 집을 가진다면, 한 백 평 가량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지게 하려고 생각하여 왔다. 위는 나뭇잎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리고, 아래는 찔레와 칡덩굴이 엉켜서, 그 속이 천고의 비밀을 감춘 듯한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다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그렇게 유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뜰을 장만하고 집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풀을 가진 집이라고는 여지껏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있대도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 가지기란 수십 년의 적공을 요할 터인데, 50이 가깝도록 이 모양인 나에게 그러한 꿈이 실현되기란, 참으로 너무나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나는 아직도 그러한 나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나에게는 이밖에도 이러한 꿈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엉뚱하고 데퉁스럽게 낙천적인 나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이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과 자신과 자부가 넘치고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과 자신들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나는 우연히 그러한 나의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한 집을 하나 얻어들게 되었다. 앞뜰이 넓은데다 나무가 꽤 많다. 가위 거목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은행나무가 네 그루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잣나무와 그보다는 좀 작으나 정원목으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큰 편인 단풍나무가 네댓, 그리고 역시 그러한 라일락이 몇 그루, 이 밖에 소나무. 향나무. 밤나무. 매화나무, 등나무, 포도, 찔레, 개나리들도 의외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 나무들이 모두 그렇게 화려한 꽃을 달지는 못하지만, 잎들은 심히 무성하여 그 푸르름이 바야흐로 성하 염천을 물리치리만큼 뜰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오랫동안 수풀에 주려 온 나의 두 눈에 싱그러운 기쁨과 위안을 던져 주었다.
나는 온종일 대청에 나와 앉아 뜰을 내다보고 있다. 대낮은 고요하다. 복중이 돼서 그런지 숨이 막힐 듯한 고요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나무 그늘은 더욱 짙다.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이 햇빛을 전부 강물로 만든다. 나는 끄덕끄덕 졸면서도 그냥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을 안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어느 순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날아든 것은... 뜰에 가득 찬 녹음이요, 숨막힐 듯한 고요 속이었기 때문에 흰나비의 흰 빛깔은 더욱 눈에 띄었고,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에 도전하는 상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
이것은 내가 20여 년 전에 쓴 "표박 행로음"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가장 순수한(혹은 내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가장 희다고 느낀 것은, 이 시구의 그 '독수리 날개를 꺾은' 햇빛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부터 '도의 광휘'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거니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태고로부터 흰 빛깔을 숭상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옷 빛깔을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의 양복은 외래복이니까 별도지만, 우리의 재래복은 신통하리만큼 일색으로 희다. 무색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그 밖에 특수한 경우에만 착용되는 것이고, 정상 상태는 언제나 흰 빛깔이다. 여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최초에 흰 빛깔을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째서 흰 빛깔이 택해졌는가? 흰 빛깔엔 어떠한 뜻이 있는가? 흰 빛깔이 우연히 택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연히 택해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오랫동안 지지되고 계승된 데는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남선 씨의 "고사통"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백'민. 아득한 옛날에 대륙의 극오부를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일 집단이 있으니, 그의 향하는 바는 일출처의 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네는 스스로 '붉은'이라 하니 신명의 자손이란 의미요, 후에 한자로 '붉'을 '백'이라 쓰고 백을 다시 '맥', 또 '맥'으로 고쳤다. 백민은 천을 신계로 하고, 태양을 천주로 숭배하고, 대산을 인간과 천상과의 교통로로 생각하고, 천주는 하계를 감시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그 아드님을 강림시키는 것을 믿는 백성이었다. 동으로 전진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천산 또 신산을 정하고 한참씩 머무르다가 마지막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곳에 있는 거룩한 대산에 이르러 천주의 신도가 여기 있다 하고서 그 주변에 안주할 땅을 이룩하고, 여기저기'불'이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불'은 한편 '부유' 또 '부여'라고도 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서 질서 있게 사는 바닥을 일컫는 말이었다. '불'의 큰 것에는 '나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초의 흰 빛깔을 택한 것은 어느 개인이기보다 '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단은 '태양을 천주로 숭배했다'고 하니 광명을 신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 빛깔은 신명의 빛깔이요, 도의 빛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지하기 어려운 흰 빛깔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며 계승되어 온 소이인 것이다. 흰 빛깔이 밝음을 뜻한다면 검정 빛깔은 어둠을 뜻한다. 어둠과 밝음이 상극적인 것처럼 흰빛과 검은빛도 빛깔의 양극이다. 흰 빛깔이 모든 빛깔의 바탕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말살을 뜻한다. 흰빛이 모든 빛깔의 모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죽음을 가리킨다. 흰 빛깔이 삶이라면 검정빛은 죽음이요, 흰 빛깔이 희망이라면 검정빛은 절망이요, 흰 빛깔이 순결이라면 검정빛은 오탁의 극이다.
우리 조상은 왜 '붉은'에서 신을 발견하고'도'를 느꼈을까? 이것은 그 성격이요 생리요 운명이었으리라. '붉은'은 '도'의 이름이요, '백'은 그 빛깔이다. 따라서 흰 빛깔을 숭상하는 한민족은, 그 성격과 그 생리와 그 운명에 있어, 광명의 민족이요, 순결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요, 명랑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막연한 희망과 자신에 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내 핏줄 속에 조상의 '붉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저 뜰에 박꽃이 번져 나가듯 펄펄펄 날고 있는 흰나비야말로 내 젊은 날의 시구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의 '흰 햇빛'의 한 조각 또는 그 '독수리 날개'의 한 부스러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바도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이 처음으로 외치던 '붉은'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뜰에는 강물을 퍼붓듯한 눈부신 햇빛과 푸른 나무 그늘이 대낮의 고요를 겨루고 있다.
흰나비, 나의 손님이여! 너를 맞이하는 나의 미소 속에 너는 마음껏 나의 뜰에서 날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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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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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살아있는 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란 무엇인가
시라고 말하는 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일하는 동안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감동)을 싱싱한 우리말로 나타낸 글이다. 이렇게 시의 뜻을 밝혀 놓고 볼 때, 시가 되는 조건을 세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살아간다 는 것이고, 둘째는 감동 이고, 셋째는 싱싱한 우리말 이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첫째는 무엇을 썼는가 하는 글감(소재)의 문제가 되고, 둘째는 시의 알맹이가 되고, 셋째는 시의 형식, 또는 시가 담겨 있는 그릇 아니면 시가 입고 있는 옷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둘째에 들어가 있는 감동 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렇다고 여길 것이다. 시가 감동이 없이 쓰일 수 없고, 감동이 시의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첫째(삶)와 셋째(말)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감동 은 삶 과 말 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저절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제목에서 삶 이란 말을 넣지 않은 까닭은 말 의 문제가 그대로 삶 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에서 삶이 빠지면
삶, 곧 살아간다(생활한다)는 것은 넓게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동안에 하는 모든 행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일하거나 길을 걸어가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싸우거나 먹거나 무슨 흉내를 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잠자고 꿈꾸는 것도 삶이고, 방안에 앉아 공상을 하는 것도, 미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 것도 다 삶이다. 이렇게 보면 무엇을 쓰든지 삶 아닌 것이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글에는 삶이 없다 고 할 때 그 삶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삶이 아니고, 적어도 시의 알맹이가 생겨날 만한 삶이다. 병들지 않은 삶이요, 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남을 따라가기만 하는 삶이 아닌 삶,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을 말한다.
바윗돌 위에서나 콘크리트 바닥에서, 또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는 씨앗이 싹터날 도리가 없다. 잡초가 나 있더라도 적어도 흙이 있고 햇빛이 죄는 땅이라야 씨앗이 싹틀 수 있으니까. 그럼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 미친 짓을 하거나 잠꼬대를 하겠는가?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겠는데, 내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다. 미치거나 잠꼬대를 한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대체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이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볼 수 없다. 시인들이 써 놓은 시를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겠다.
사람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고 다 병든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어느 땅에서고 진리다. 아이들도 일을 하면서 배워야 (일하는 것이 그대로 배움이 되어야) 참 배움이 된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고 쓰고 외우는 공부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그래서 그런 공부만 해야 할 대 사람의 성격은 병들고 비뚤어져 버린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는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이 열 배 백 배 낫다. 사람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글을 쓰는 것도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방안에 혼자 앉아서 생각만 하거나, 글만 쓴다면 그런 삶도 좋지 않다. 일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게 되면 그 생각이 병든다. 일을 하는 것이 없는데 글만 자꾸 쓴다면 그 글이 제대로 쓰일 수가 없다. 그래도 시인과 소설가들은 글만 잘 쓰고 있더라. 그렇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글만 쓰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다. 나는 글만 쓰고 있는 이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일제시대고 오늘날이고 많은 문인들이 글만 써 왔는데, 그래도 지난날에는 그 폐단이 좀 덜했지만 오늘날에는 글만 쓰고 있는 사람들이 글의 공해, 문학의 공해를 아주 크게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지난날에 폐단이 덜했다는 것은, 일제시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시인들이 글만 쓰기는 했지만 그들이 자라난 과정에서는 삶이 있었고, 대체로 일을 하면서 자라났기에 시가 될 만한 땅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물론 지난날에는 삶이 있었더라도 지금 삶에서 떠나 있으면 제대로 쓰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가 아주 병들 정도로까지는 되지 않을 바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자연과 일하는 삶을 떠나서 방안에 앉아 책만 읽으면서 자라나 어른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또 방안에 앉아 생각만 하고 시만 쓰고 있으니, 이런 시가 어떤 알맹이를 담고 어떤 말고 되어 있을 것인가는 그것을 바로 읽어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의심할 만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를 검토하기에 앞서 일제시대부터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시인들의 시를 몇 편 들어서 시와 삶의 문제, 시와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른바 명시를 모아 놓은 책들의 맨 앞머리에는 흔히 새로운 우리 시의 첫 작품이라고 해서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가 실려 있는데, 그 첫 연이 이렇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1908년에 나온 소년 창간호에 실린 이 시를 두고 오늘날까지 우리 문단에서는 새로운 시의 역사를 열어 놓은 시라고 하고, 또 너무 생각을 드려내려고 한 까닭으로 현대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해 왔는데, 그런 면도 있겠지만 나는 달리 본다. 무엇보다도 이 시를 보면 말이 깨끗하다. 살아 있는 우리말로 되어 있다. 오늘날 많이 시인들이 써 놓은 시와 견주어 보면 이 시가 얼마나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로 쓰여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아주 잘못되었다. 해에게서.. 가 뭔가? 해 란 하늘의 해가 아니고 한문글자인 바다 해 자의 해 다. 그 무렵에는 한문글자를 섞어서 쓸 때라, 요즘 같이 한글만으로 쓰는 시대에 와서는 마땅히 바다에게서.. 로 바꾸어서(번역해서) 써야 하는데, 모든 책에서 이렇게 해에게서.. 라 써 놓았다. 사실은 이렇게 바꿔서 쓰기조차 어럽게 되어 있다. 아직도 신문이고 잡지고 광고들이고 해에게서 꼴로 쓰고 있는 글이 얼마나 많은가! 또 바다에게서.. 라고 써 보았자 우리말이 안 된다. 바다에게서 소년에게 란 우리말은 그때고 지금이고 없다. 바다가 소년에게 라 해야 말이 되지. 시의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는가? 이 시의 제목만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시의 제목을 이렇게 우리말일 수 없는 괴상한 말로 붙였다.(물론 소설도 그랬다.) 일본글을 그대로 직역해 놓은 꼴로 쓴 것이다. 이것은 시인들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일본 학교에서 일본글로 공부를 하고, 우리 글로 시를 썼지만 언제나 일본말로 된 책만 읽고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일을 하면서 살았더라면 결코 이런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지난날의 시인들은 어렸을 때 삶이 있었고, 그 삶 속에서 제대로 우리말을 익혔기에 시를 쓸 때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었는데, 시의 제목에서는 병든 지식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다듬어 썼다는 정지용 시인의 시 제목은, 한문글자로 쓸 수 없는 바다 별 달 나무 같은 말만 한글로 쓰고, 그밖에 한문글자로 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한문글자로 썼다. 심지어 유리창 기차 까지 한문으로 써 놓았다. 또 우리말로 쓰면 될 것을 일부러 한문으로 써서, 배 멀미 라 할 것을 선취 라 쓰고, 봄눈 이라면 될 것을 춘설 이라 했다. 그리고 보통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한문글자를 시의 제목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마구잡이로 섰다. 우리말을 그렇게 구슬같이 다듬어 썼다는 시인이 어째서 이토록 우리말일 수 없고 우리 글일 수가 없는 글로 시를 썼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용 시의 이 모순된 비밀은 시인의 삶과 말의 관계를 생각할 때 쉽게 풀어진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삶이 없이 시만 썼던 식민지 시인의 비극이었으니, 어찌 정지용 시인뿐이겠는가. 이들은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제 겨레의 말로 쓸 수밖에 없었고 우리말로 버리지 못하고,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을 쓰지만,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로 쓰지만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문글자를 섞어서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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