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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3호 2022.10.28 (음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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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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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 ― 아나톨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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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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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은 나의 힘
미식가는 오감으로 음식을 만끽한다. 먹기 전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말은 화폐처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것이지만, 가끔 머릿속 식탁 위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훑어보면 헛헛한 세상살이에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나에겐 ‘환멸’이란 말이 뒷맛이 달다. 사전엔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가졌던 꿈이나 기대가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이라 나온다. 하지만 꿈이나 기대의 깨어짐은 실망, 낭패, 좌절감에 가깝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가 깨어지면 배신감만 들 뿐.
환멸은 기대의 깨어짐보다는 진실의 발견에 가깝다. 뻔뻔하고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부조리를 알아챘을 때 느끼는 역겨움 같은 것. 가까운 일상에서 힘과 욕망이 행사되고 실현되는 방식을 목격하면 불현듯 다가온다. 한번 느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감정은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주로 발생한다. 도시생활에, 직장생활에, 누군가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다. 퇴행이나 반동보다는 오히려 머뭇거리지 않는 돌진을 보면서 더 느낀다. 돌진하는 자는 자기 이익과 안위가 목표이고, 집요함, 안면몰수, 타인에 대한 무감각이 무기다.
하지만 거듭 곱씹는다. ‘환(幻)-멸(滅)’, 환상을 멸하다. 헛것이 사라지다. 뜻이 좋구나. 환상이나 기대는 없을수록 좋지. 현실을 가감 없이 바라보게 된다니 권할 만하다. 현실에 매몰되지도,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 것이니 모순을 발견하기에도 최적이다. 환상을 깨고 기대를 접고 자기 할 일만 하다 보면 적멸(寂滅)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오늘도 되뇐다, ‘환멸은 나의 힘!’
영어는 멋있다?
찔린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는 멋있지만 ‘국립추모공원’은 멋없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단계적 일상회복’보다 ‘위드 코로나’가 더 친숙하다던 자니 이 발언도 찬성하겠군. 뭐라 지껄이나 보자!”고 할 독자들이 있겠다 싶었다.
그의 발언에 건질 게 아주 없진 않다. 그는 역대 권력자 가운데 처음으로 우리가 동일 언어, 동일 문화, 동일 감각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줬다. 권력자는 단일 언어체계에 의한 지배를 꿈꾸기 마련인데, 현 대통령은 다언어, 다문화, 다감각의 공생사회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영어가 멋있다는 감각은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영어를 향한 무한욕망과 동떨어진 게 아니다. 한국어가 멋없다는 감각 자체는 후지지만, 다양한 필요와 이유로 영어를 선망하는 현실도 부인할 수 없다. 영어에 대한 그의 감각은 사회적 무의식의 흔적이다.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발언은 사소하다.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정책처럼 ‘있다, 꽃’을 소리 나는 대로 ‘잇다, 꼿’으로 적자는 것도 아니다. 경제성·효율성이란 잣대로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것도 아니다. 기껏 썩은 땅에 들어설 공원 이름에 대한 취향이 튀어나온 거다(영어로 이름을 달아도 한국어는 꿋꿋하게 이어진다). 이름짓기가 그의 업무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소함에 대한 처방도 개인을 향할 수밖에 없다. 속내를 물색없이 말로 드러내는 게 늘 좋은 건 아니다. 입에도 괄약근이 필요하다.
이런 언어 감각이 권력을 등에 업고 남발되지 않길 바란다. 그의 손에 쥐여 준 힘이 언빌리버블하게 막강하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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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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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 김수영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
우리의 歷史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환희(歡喜)를
풀 속에서는 노란 꽃이 지고 바람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서걱거린다-우리는 그것을 永遠의
소리라고 부른다
해는 청교도가 대륙 동부에 상륙한 날보다 밝다
우리의 재(灰), 우리의 서걱거리는 말이여
人生과 말의 간결-우리는 그것을 전투의
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은 人生을 거꾸로 걷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
三十대보다는 약간 젊어졌다 六十이 넘으면 좀더
젊어질까 기관포나 뗏목처럼 人生도 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빈궁(貧窮)의
소리라고 부른다
오오 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약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 사기꾼도 도적놈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 예술파시인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人生도 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196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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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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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囊中之錐)
囊:주머니 낭.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錐:송곳 추.
[동의어] 추처낭중(錐處囊中). [출전]《史記》〈平原君列傳〉
-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균(平原君:趙勝)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 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건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柄]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 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디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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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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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전국에 요청하라
뛰어난 캐나다 육상 선수 테리 폭스는 프로 스포츠계의 데뷔를 앞두고 오른쪽 다리에 이상을 느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거치는 동안 테리의 다리에서 암 세포가 발견되었다. 담당 의사는 그에게 통보했다.
"테리,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네. 하지만 자네는 오른쪽 다리에 암이 넓게 퍼졌기 때문에 부득이 절단 수술을 해야 하네. 오늘 당장 수술할 생각이네. 자네는 21살이 넘었으니, 다리 절단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 주게나."
테리는 의연하게 시련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수술을 받은 후 어느 날 오후, 그는 고등학교 육상코치의 말을 떠올렸다.
"테리야, 온 마음을 다하여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단다."
그는 캐나다 대륙을 횡단하여 10만 달러를 모금하고, 그 돈으로 더 이상 그처럼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암 연구에 바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위족을 달고 절름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굳센 용기와 힘을 불러 일으켰다. 테리는 그 구상을 '테리 폭스의 희망의 마라톤'이라 이름을 붙이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두 분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얘야,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구나. 하지만 우리 집은 꽤 넉넉하니, 네가 그런 뜬구름 잡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대학으로 돌아가서 진짜 사람 구실을 했으면 좋겠구나."
학교로 가는 길에 테리는 암 센터에 들러 그의 의도를 밝혔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당신 생각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각이니, 나중에 다시 와 주십시오."
그는 대학의 룸메이트를 설득하여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캐나다의 동부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테리는 목발을 대서양에 던져 버리고 당장 캐나다 횡단 마라톤을 시작했다. 영어권 캐나다를 거의 횡단했을 무렵, 테리는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한몸에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그의 의족을 댄 다리에서 피가 철철 넘쳐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이빨을 꽉 깨물고 계속 달렸던 그 모습을 기억하시리라. 그는 수상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약속 당일, 수상은 테리의 약력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실례하네, 그런데 자네는 누구인가?"
테리는 대답했다.
"희망의 마라톤을 전개하고 있는 테리 폭스라고 합니다. 제 목표는 십만 달러를 모금하는 것이었고, 어제 일자로 그 액수를 채웠습니다. 이제 수상 각하가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백만 달러를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날 처음으로 테리는 미국의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정한 사람들' 프로그램 팀이 캐나다로 와서 그의 모습을 찍어갔다. 그리고 미국 언론의 대대적인 취재 및 홍보와 더불어 돈도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보스턴 마라톤 코스보다 더 긴 50킬로미터를 하루도 빠짐없이 달렸다. 온타리오의 썬더베이에 도착할 즈음, 그의 몸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다.다음 도시에서 주치의가 말했다.
"테리, 자네는 마라톤을 그만 둬야 하네."
이에 테리가 말했다.
"선생님은 지금 대화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처음에 우리 부모님은 저에게 미쳤다고 하시더군요. 주 정부에서는 제 마라톤이 고속도로의 운행을 방해하고 있으니, 당장 집어치우라고 했습니다. 암 협회도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십만 달러를 달성하겠노라고 결심했고, 그 뜻을 이뤘습니다. 저는 목표를 백만 달러로 늘여서 잡았고, 그 또한 사흘 전에 다 채웠습니다. 저는 이제 이 방을 나가서 모든 캐나다 국민에게 단 일 달러씩, 총 이천 사백 십만 달러를 모금할 겁니다."
의사가 말했다.
"이보게, 나는 자네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를 원하네. 하지만 암이 자네의 가슴에 퍼졌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밖에 살지 못할 거야. 온 국민이 자네를 성원하고 있고, 지금 밖에는 공군 비행기가 준비되어 있네. 자네 덕분에 우리의 하잘것 없는 언어 및 지역 감정의 골이 메워졌어. 자네는 전국적인 영웅이 되었다네. 자, 브리티쉬 콜럼비아로 돌아가세나. 자네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야."
그날 밤 뉴TM에 테리가 응급실로 실려 가는 모습이 생중계 되었다. 한 기자가 카메라 담당자와 함께 테리의 침상 머리에 붙어 수술실로 따라가며 한 마디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는 뭘 하실 겁니까, 테리 씨?"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프로다운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여러분들이 내 마라톤을 끝내 주시겠습니까?"
그 직후, 그는 세상을 떴다. 그해 12월 24일, 캐나다 온 국민이 1달러씩 기부한 것과 똑같은 금액인 2,410만 달러가 모금되었다. 테리 폭스의 꿈은 실현된 것이다. 이제 여러분 중에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야? 나는 너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인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하지만 주님은 더 나은 자신을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러분이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 한다면,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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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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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0장 교만해지는 제환공
2. 주양왕의 즉위
제환공의 사치와 교만
제나라로 돌아간 제환공은 이후 자기 공로가 천하 제일이란 자부심만 늘어, 제나라 궁실을 대규모로 개축하여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심지어 제환공이 타는 수레라든가 복장이나 시위하는 자들의 제도까지 주나라 왕과 견줄 정도로 화려하게 바꾸어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니 제나라 백성 사이에서는 자기 나라 임금이 마치 주나라 천자처럼 행세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누어져 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다. 또 관중의 분부로 정승의 부중(府中)에 거대한 3층대가 높이 솟아, 이름을 삼귀지대(三歸之臺)라 했다. 그것은 백성이 귀순하고, 모든 나라 제후가 귀순하고, 사방 오랑캐들이 귀순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술을 서로 마신 후 술잔을 올려놓고 반점을 설치하고 열국의 사신을 인견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천자만이 하는 것이지 제후의 신분으로는 사실상 월권이었다. 포숙아는 주공도 그런데다가 이제는 관중마저 이런 사치스런 짓을 권하면서 시설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어느 날 그는 관중의 부중으로 찾아가 관중에게 물었다.
"주공이 사치하면 개인적으로야 그만이겠지만 멀리 보면 천자를 무시하는 태도요. 이러고도 정승인 자네가 주공을 보필하는데 옳은 짓을 한다고 변명할 수 있소?"
관중이 대답했다.
"주공은 지금까지 갖은 고난을 다 겪고 애써서 공업(功業)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또한 한때의 쾌락을 도모하려는 것뿐이네. 만일 이 때 내가 예법으로써 주공을 구속하면 주공은 모든 것이 귀찮다면서 매사에 게을러지고 타락하고 마네. 이제 내가 주공의 월권을 도우며 도리에 어긋난 시설을 하는 것은 주공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 비방을 주공 혼자만이 받을 것이 아니라, 나도 그 비방의 대상이 됨으로써 주공을 지켜 드리려는 것이네."
포숙아는 관중의 변명을 듣고서 한참 망설이다가 입으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대답했으나 마음으론 이 친구가 크게 생각을 잘못한다고 탄식했다.
'누구나 오랜 세월 참으면서 공적을 쌓고나면 사치와 부귀를 탐하게 되는 것인가....... 그래도 관중만은 인물됨이 커 욕망을 참고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줄 알았거늘. 나의 지나친 기대였을까?'
관중의 부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포숙아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한편 주나라 주공 공은 규구(葵邱) 땅 맹회(盟會)에 참석하고 왕성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우연히 진나라 진헌공(晋獻公)의 행차와 만났다. 진헌공은 규구 땅 맹회에 참석하려고 급히 서둘러 가는 길이었다. 주공 공이 말했다.
"회(會)는 무사히 끝나고 모든 제후도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갔소이다."
진헌공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규구의 맹회에 참석 못한 걸 참으로 애석해 하며 탄식했다.
"이번에 제나라 관정승의 초대를 받았음에도 과인의 나라가 규구 땅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처럼 성대한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니 과인과 맹회는 정말 인연이 없군요."
주공 공이 태연히 대답했다.
"군후는 그렇게 원통해 하실 것까지는 없소. 이번에 보니 제후가 자기 공이 크다 하여 교만함이 대단합디다. 대저 달도 둥글면 이지러지고 물도 가득차면 넘치나니, 제나라도 오래지 않아 그 세가 기울 것이오. 그러니 군후는 이번 규구 회에 참석 못한 것을 그렇게까지 크게 상심할 것까진 없을 것 같소."
진헌공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수레를 서쪽으로 돌려 진나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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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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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강으로 살아 흐르는 시인이여 - 시성 타고르에게
인도의 강가에서 태어나
강과 같은 시를 쓰고
인도인과 세계인의 가슴속에
아름답고 따뜻한 강으로
살아 흐르는 시인이여
인간은 흐르기를 그치지 않는
하나의 강이라고 말했던 시인이여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면서도 늘 새로우며
극히 평범한 것에도
늘 감동을 받는다던 당신은
신과 인간, 자연과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한 시인이었으며
진리를 위해 고뇌한 구도자,
철학자, 사상가, 작곡가, 화가,
연극인이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에 태어난 저는
소녀 시절 처음으로 `기탄잘리`
`원정` `초승달`을 읽고
시인과 구도자의 삶을 꿈꾸었으며
`내 마음이여, 고요해 다오
이 커다란 나무들은 기도인 것을`
`별들은 자기네가 반딧불로 잘못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하진 않는다`는
당신의 말을 늘 짧은 기도처럼
외우며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태어난 생가에서
당신의 숨결을 느껴 보고
당신이 세우신 숲속의 대학
나무 그늘에서
당신의 시를 큰소리로 외우는
나무 같은 학생들을 만나며
당신의 푸른 미소를 봅니다.
`기탄질리`를 쓰셨던 아담한 집
마루 끝에 앉아 보고
연극할 때 입으시던 낡은 옷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만져 보며
깊고 어진 눈빛의 당신이
제 옆에서 기침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머니, 꽃은 땅속의 학교에
다니지요. 꽃은 문을 닫고
수업을 받는 거지요.`
당신이 산책을 했을 정원에서
`꽃의 정원`을 외워 보고
아름다운 바닷가를 거닐며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당신의 시 속에서 뛰어 놉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어린이들의 커다란 모임이 있다"는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급변하는 현대의 물질문명에
사람들 마음이 미혹당해
선과 평화와 사랑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고 괴로워했던 당신
위대한 일을 하면서도
숨고 싶어하며
일상의 작은 의무에 대한 충실성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끊임없이 예찬하고 동경했던 당신
비난과 오해의 폭풍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고독의 강이었던 시인이여
이제 당신은
겸허하고, 거룩한 목소리로
이 땅의 모든 시인을 부르십니다.
항상 깨어 있는 정신으로
매일의 삶 자체를 사랑과
기도의 시가 되게 했던 당신은
우리도 강이 되라 하십니다.
세계와 인류를 향해
사랑과 평화의 흐름을 멈추지 않는
길고 긴 시의 강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살아 있는 강이 되라 하십니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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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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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정비석편"
정비석(1911~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일본 니혼 대학 문과 중퇴. 통속적인 신문 소설로 대중의 인기를 끈 바 있는 정비석은 흔히 예정 소설만 쓴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 문장의 점착력이나 심리, 상황의 뛰어난 묘사는 그를 수필 문학에 있어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게 하였다. "산정 무한"은 금강산 기행문의 일부인데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나의 참회록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어느 잡지사에서 나에게 '선생님이 만약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에는 어떤 직업을 택하시겠습니까?'하고 질문해 온 일이 있기에 나는 서슴지 않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살게 되더라도 나는 역시 소설가가 되겠소.'하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나의 생각에는 별로 변함이 없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들은 문학에 대한 나의 정열을 높이 평가해 주실지 모르겠으나 사실대로 밝히고 보면 별로 그렇지도 못했다. 나는 60평생을 소설 쓰는 일로만 살아 온 관계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너무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재생하더라도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극히 타당적인 심리에서 그런 대답을 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중학생이던 열네 살 때에 문학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60을 넘어선 오늘까지 문학 이외의 길에는 별로 발을 들여놓아 본 일이 없었다. 굳이 있었다고 하면 해방 직전에 5년 가량 신문 기자 생활을 한 일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대학 강사로 이태 가량 재직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도 타의에 의한 임시 방편이었을 뿐이지, 나 자신의 의사로서 그런 일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년 시절에 문학에 한번 뜻을 둔 이후로 60이 넘는 오늘날까지 문학의 길만을 외곬으로 걸어왔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까지 별로 신통한 작품을 남겨놓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나를 소설가로 취급해 주는 것은 그만큼 연공을 쌓아 온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업적이나 성실성 같은 것은 반드시 시간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두고 한 가지 일에만 종사해 왔다 하더라도 그 행위에 정열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낭비해 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문학을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온갖 정열을 기울여 창작을 성실하게 꾸려나간다 하더라도 작품 하나를 제대로 남겨놓기가 어려운 판인데, 하물며 특출한 재능도 없는 사람이 문학을 합네 하고 엄벙덤벙 세월만 보냈다면 그야말로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까지 40년간이나 문학을 해 온 나 자신의 작가적인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는 문학을 합네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문학을 항상 배신하면서 살아 왔다. 8.15해방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하룻밤 사이에 예수를 배반한 일이 세 번이나 있은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거니와, 나는 한평생 문학에 집착해 오면서도 8.15에서 6.25를 거쳐 4.19에 이르는 15년 사이에 문학을 세 번씩이나 포기하려고 했었으니,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문학에 대한 나의 성실성이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디 나는 생활의 방편으로서 문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38이북이 고향인 관계로 모든 재산을 공산도배들에게 빼앗겨 버려서 지금은 알거지가 되었지만, 8.15이전에는 먹고 살아가는 데는 별로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취미로 시작하였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는 간악한 일제가 우리네의 글과 말을 말살시키려고 했기에, 나는 그에 대한 심리적인 반발이 느껴져서 굳이 문학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8.15해방 후에 세상이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다가, 얼마 후에는 38선이라는 것이 생기며 모든 재산을 일조일석에 빼앗기게 되고 보니, 그때에는 문학에 대한 애착보다는 당장 처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일이 큰 걱정이었다. 지금 40 미만의 젊은이들은 8.15 직후의 우리네 사회의 혼란상 같은 것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리라. 그 당시는 신문이라는 것이 겨우 타블로이드판으로 4면이었고, 잡지 같은 것은 제대로 나오는 것조차 없었으니, 글을 써서 밥을 먹어 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생활의 방도를 다른 데로 택해야 할 판인데, 나는 웬일인지 월급쟁이 같은 것은 생리적으로 싫었다. 그야 물론 학교 선생이나 신문 기자 같은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먹고 살아가기 위해 이왕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나설 바에는 돈을 벌기 위해 장사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장사를 하자면 밑천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장사 밑천을 마련해 보려고 한동안 동분서주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장사 밑천을 대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을 포기한 채 한동안 장사꾼이 되려고 미쳐 돌아가다가 때마침 모 고등 학교와 모 대학에서 전임 강사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생리에 맞지 않는 학교 선생님 생활을 2, 3년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몇 해 후인 6.25 직전에 사회가 다소 안정되어 문필 생활이 가능하게 되자, 나는 일단 배반했던 문학의 길로 다시 돌아왔었다. 그것이 문학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배반이었다. 문학을 두 번째 배반하게 된 것은 6.25사변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의 한복판인, 수하동에 살고 있었는데, 1.4후퇴를 하게 되자 주위의 사람들은 저마다 남부여대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가건만, 나만은 돈이 한푼도 없으니 엄동설한에 어린 자식들을 다섯이나 데리고 어디고 떠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중공군과 인민군이 물밀듯 몰려올 서울 한복판에 그냥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9.28 수복 이후에 국군이 북진하는 바람에 나는 소위 종군 작가로서 50여일 간을 일선으로만 뛰어다니다가 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사정이 그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은 한강 건너 상도동 일가집에 피신을 시키기로 하고 나 혼자만 피난길에 올랐다. 말이 피난이지 가족을 그냥 남겨 두고 피난길에 오르는 나는, 살려고 떠나는 길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아 나서는 심정이었다.
혼자서 피난길에 오르자니 가슴이 찢어지게 괴로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처자식을 그 꼴로 만들게 된 것도 역시 문학에 집착했기 때문이라 싶어서, 나는 금후에 다시 평화의 날이 오더라도 문학만은 완전히 포기해 버릴 결심이었다. 그러기에 평소에 애용했던 '파카'와 '워타만' 두 자루의 만년필조차 의식적으로 내버리고 떠났다. 그런 마물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는 언제 또 문학의 길에 되돌아오게 될지 모르리라 싶어서 문학과는 영영 인연을 끊으려고 만년필조차 내버린 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기괴한 운명인지, 대구까지 피난을 내려가 직장을 구하려고 하니 나를 채용해 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에, 신문, 잡지사에서는 소설을 써 달라고 성화같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얼마 후에는 가족까지 대구에서 합류하게 되고 보니 나는 당장 쌀 한 봉지를 사기 위해서도 그처럼 굳게 배신했던 문학의 길을 다시 걸어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문학을 세 번째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은 4.19 직후의 일이었다. 4.19 직후에 나는 한국 일보에 (혁명 전후)라는 연재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1천 6백여 명의 연세 대학 학생들에 의하여 소위'데모'라는 것을 당하였다. 나는 4.19학생 혁명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고 내가 목격한 그 당시의 생생한 사실들을 소설 속에 그대로 기록하여 후일에 역사적인 재료로 제공하려 했건만, 워낙 극도로 흥분한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의 오해로서 나는 본의 아닌 핍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때만은 문학을 단연코 포기해 버릴 생각에서 "이조 실록" 전질을 비롯하여 책을 모조리 팔아 가지고 외국 여행을 한 번 다녀온 뒤에, 모 신문에 "문학과 이별한다"는 선언문까지 발표해 버리고 다른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외우 송지영 형이 세계적인 광고 대리점인 일본의 '덴스' 한국 대리점을 맡기로 되어 있었기에 나도 송 형과 함께 그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국제 광고를 국내에 유치해 오자면 국내 신문들과 미리 배면 계약이 있어야 하므로, 나는 국내의 10여 신문사와 계약까지 맺었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척되어 전망은 매우 밝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나의 운명의 탓이었는지, 사업 기반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뜻하지 못했던 5.16군사 혁명이 터졌다. 그래서 모처럼의 공들인 탑이 일조일석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혁명 정부는 외국의 광고 대리점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그 사업의 총책임자였던 송지영 형이 다른 사건으로 형무소에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사업도 송두리째 거덜이 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사회적인 변혁이 있을 때마다 문학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였고, 더구나 세 번째는 '문학과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고 만천하에 선언까지 해놓았건만 5.16후에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문학과 나와는 영원히 끊지 못할 악인연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생계를 수월하게 꾸려나갈 다른 방도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문학을 포기해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잘 쓰거나 못 쓰거나 간에 나를 용납해 줄 세계가 문학 이외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돌이켜보면 서글프기 짝이 없는 방황하는 일생이었다. 문학이 나에게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인 줄 진작 깨달았던들, 나는 모든 정열을 문학 하나에만 기울여서 지금쯤은 제법 대작가가 될 수 있었으련만, 60평생을 문학의 아마추어로만 살아 왔으니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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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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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논설문 쓰기 -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2/4)
말을 책에서 배우지 말고
- 타의가 아닌 자의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타의 자의 -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말이 다 문제가 된다. 타의 는 남의 뜻 이나 남의 생각 이라 해야 되고, 자의 는 제 뜻 이나 제생각 이라고 하면 된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는 했는데도 라고 써야 한다. 이 -도 불구하고 란 말이 아주 좋지 않은 글말이다. 입으로 하지 않는 괴상한 말을 유식하게 보인다고 글에다가 자꾸 써서 퍼뜨리는 것은 우리말을 죽이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는 짓이다. 그런데도 하면 될 것을 외국글에 병든 학자나 문인들을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쓰는 병신 노릇을 우리 학생들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
- 이유
이 말은 까닭 이라고 써야 한다. 중국글자말 가운데도 홀소리를 셋이나 잇따라 내어야 하는 이런 괴상한 말을 우리말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소리내기가 힘들고 알아듣기가 거북한 중국글자말은 이 밖에도 의의 (뜻), 의외 (뜻밖), 의아스럽다 (이상스럽다) 따위 아주 많다.
- 농약을 하고
이것은 농약을 치고 나 농약을 뿌리고 라야 옳다.
-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
육체에는 보다 몸은 하든지 사람의 몸뚱이는 이라고 쓰면 더 좋다.
- 가중하여
이것은 더하여 이다.
- 자신의 능력에 맞춰
이 글에서는 자신의 가 아니고 학생들의 라고 써야 된다.
- 하는 바램이다.
이것은 하고 바란다 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 아니면 좋겠다 고 쓰든지.
- 이런 원인을 접어 두고
여기서는 원인을 보아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알맞은 말이 된다.
- 살인적인 심야학습이
이것은 사람잡은 한밤중 공부가 라고 쓰면 된다. 여기도 -적 이 나왔다.
- 현행대로 하면
이것은 지금대로 하면 이라 쓰는 것이 좋다.
- 정상화되었으면
이 말의 짜임을 보면 정상 화 되었으면 이란 세 가지 말이 하나로 되어 있다. 정상 은 자로 란 말이다. 화 는 된다 는 듯을 지닌 중국 글자말인데, 그 다음에 또 되었으면 이란 말이 붙어 있으니 겹말이 되 셈이다. 그러니 화 와 되었으면 이 두 가지 말에서 한 가지만 써야 한다. 만약 화 를 쓴다면 -화하였으면 이라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글자말을 쓸 필요가 없으니 화 는 마땅히 없애야 한다. 그래서 이 정상화되었으면 은 바로 되었으면 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 어른들이 잘못 쓰고 있는 요란한 중국글자말 문체로 된 글에는 무슨 -적 하는 말과, 무슨 -화된다 는 말이 아주 많은데, 중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어설픈 글말은 아주 사람의 몸을 망치는 병균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여 딱 잘라 거절해서 안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화된다 의 보기를 더 들면 교육이 민주화되기를 자유화되는 교복의 문제 기독교가 토착화되기 위하여 .. 이렇게 수없이 쓰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우 교육이 민주로 되기를 자유로 되는 교복의 문제 (또는 자유로와지는 교복의 문제 )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위하여 이렇게 써야 할 말들이다. 지금까지 다듬어 놓은 말을 대강 그대로 해서, 앞에서 든 글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본디 쓴 글과 견주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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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면 광주의 많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보충, 자율학습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학교의 보충수업 실태는 잘 모르지만, 우리학교 보충수업의 실태를 보면, 선생님들의 열성에 견주어 수강하는 학생들의 태도는 겨우 따라가는 형편이다. 처음 출발이 남의 생각이 아니고 제 생각으로 했는데도 점점 학습 태도가 나빠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미경,정숙)이 함께 생각해 보면 첫째, 농촌의 특수성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집에 가면 들에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어떤 남학생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농약을 치고 온다고 들었다. 사람의 몸뚱이는 한계가 있는 법, 피로가 겹친다. 이에 더하여 보충수업 한시간씩을 받으려니 정말 잠이 올 수밖에.. 의욕 상실증 환자 같다. 둘째로는, 능력별 보충수업이 아니라서 정숙이는 잘 따라가지만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만약에 2학기에 보충수업을 한다고 하면 학생들의 능력에 맞춰 반을 편성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접어두고 보충수업 자체를 놓고 생각하면, 학교에서 하는 수업만 가지고도 대학을 들어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업 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보충수업까지 괴롭히니 보충수업이 아니라 이중 짐지우기 수업 이다. 그래도 우리는 밤 10시까지 하는, 사람잡은 한 밤중 공부가 없으니 참 좋다. 하기야 농촌에서는 할 수도 없지만. 보충수업은 지금대로 하면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하루빨리 바로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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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분들은 아마도 어이구, 이렇게 쉽게 쓰는 게 더 어렵겠는데 할 것 같다. 그렇다.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이 쉽고, 쉽게 쓰기가 도리어 어렵다. 이것이 거꾸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말을 책에서 배우지 말고 삶에서 배워야 하고, 유식한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에게,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말이 말로 되어야 글도 되는 것이니까. 우리말 공부를 할 때는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잘못 쓰는 자기의 말버릇 가운데서 한두 가지 말부터 먼저 고쳐 나가도록 하면 된다. 그 한두 가지를 바로 잡아 놓으면 그 다음에는 자신이 생겨서 더 많은 말들을 더 쉽게 고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여남은 가지 말을 지적했지만, 그 가운데서 -을 통해서 비하여 -도 불구하고 -화된다 -적 이렇게 다섯가지 말이 가장 널리 잘못 쓰는 말이고, 이런 말부터 고쳐나가야 된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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