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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4호 2022.9.15 (음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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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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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지 못한 성공은 양념을 하지 않은 요리와 같은 것. 그건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지만 맛은 없을 것이다. ― 조 파테어노(美 풋볼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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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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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제주어
‘육지’와 멀리 떨어진 게 고유성을 지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4·3사건으로 섬사람들은 고립되고 실어증에 걸린다. 제주어는 반란의 언어, 금지된 말. 참상에 대한 증언은 고사하고 제주 사람 티가 나는 말을 쓰는 것조차 꺼렸다. 육지에 나갈 때, 섬말은 바다에 내던져졌다.
2010년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사라져 가는 언어’ 5단계 중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로 등록했다. 4단계는 소멸 직전의 언어로, 노인들만 뜨문뜨문 쓴다는 뜻이다. 말의 표준화와 미디어의 전국화는 지역어의 위기와 소멸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제주에는 제주어를 기록, 보존, 활성화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자긍심은 제주어를 기록하기 위한 별도의 ‘제주어 표기법’을 갖고 있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육지에서는 진작에 버린 ‘아래아’(ㆍ)도 포함되어 있다. ‘아래아’는 만들어지고 얼마 안 지나 소릿값이 바뀌기 시작한 글자다. 단어의 첫소리에서는 주로 ‘ㅏ’로 바뀌고(ㄴㆍㅁ→남), 첫소리 아닌 자리에서는 ‘ㅡ, ㅓ, ㅜ’로 변했다(하ㄴㆍㄹ→하늘, 다ㅅㆍㅅ→다섯, ㄴㆍㄹㆍ→나루). 단어마다 달라지는 발음을 어떻게 표시할지가 숙제이지만, 제주어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제주어에 ‘아래아’ 발음이 살아 있으며, 이것이 제주어의 독특함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제주어가 복권되길 바란다. 딴 지역보다 조건이 좋다. 자율성을 갖춘 자치도이기도 하고, 제주어 복권을 위해 애써온 사람들이 도도하게 버티고 있다. 집과 학교에서, 말로도 글로도 끈질기게 써서 제주어가 하나의 ‘언어’로 활짝 피어나길 빈다. 제주어 만세!
허버허버
“반대말이 없는 단어를 찾고 있어.” 아는 시인이 말했다. 기발하고 ‘기특한’ 상상이다. 나는 그를 ‘기특하다’고 했는데, 아마 당신은 그가 나보다 어린가 보다고 짐작할 것이다(실은 한참 위). 반대로 한 학생이 나를 ‘똑똑하다’라고 평하는 걸 보고, 맞는 말인데도(!) 기분은 상했었다. 밴댕이 소갈머리 선생은 ‘맹랑한 녀석’이라며 찡얼댔다. 어디에도 안 나오지만 안다. ‘표독스럽다’, ‘교태를 부리다’, ‘꼬리를 치다’가 누구를 향하는지 다 안다.
허버허버. “‘남자’가 음식을 급하게 먹을 때 내는 소리나 그 모양”을 뜻하는 새말. ‘남자’만을 지목하기 때문에 남성혐오라는 항의가 잇달았다. 무심코 이 말을 쓴 유명 ‘남성’ 유튜버는 ‘저는 절대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며 고해성사를 하고, 카카오톡에서는 이 말이 들어간 이모티콘을 판매 중지하면서 남성혐오 의도가 없다는 해명을 했다.
이 말의 기원이 ‘남자’만을 지목할지는 몰라도, 계속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다른 흉내말을 봐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깔짝깔짝, 깨지락깨지락, 꼭꼭, 오물오물, 우걱우걱, 질겅질겅, 쩝쩝, 후루룩’(‘냠냠’ 정도가 ‘아이’를 가리킨다).
사람이 미우면 뭘 먹을 때가 제일 얄밉다. 게다가 ‘허버허버’ 먹는다면 더 얄밉다. ‘기분 나쁘니 쓰지 말라’는 건 손쉬운 반응이긴 한데 문화적이진 않다. 반대말을 만들거나 새 의미를 덧붙여서 그 표현이 갖는 효력을 회수하는 방식이 좀 더 ‘기특한’ 방식이 아닐지.
그래도 말에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남성이 늘어난다는 건, 멀리 보았을 때는 좋은 징후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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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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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白紙)에서부터 - 김수영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할만큼 밝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四月의 햇빛이 떨어졌다
이런때면 매년 이맘때쯤 듣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소리를 혼동한다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老朽의 美德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울과 개울 사이에
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시간이 내려앉는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頭痛의 美德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바다와 바다 사이에
지금의 三月의 구름이 내려앉듯
眞實이 내려앉는다
하얀 종이가 분홍으로 분홍 하늘이
녹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변할만큼 밝다
―그러나 混色은 黑色이라는 걸 경고해준 것은
小學校때 선생님……
<196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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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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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지언(一家之言)
學者들 가운데는 누가 보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이룬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말은《史記》의 太史公自序(저자인 史馬遷이 쓴 序文)에 나온다. '略以拾遺補藝 成一家之言'(빠진 것을 모으고 보충해 간략하게 만들어 일가의 학설을 이루었다). 宮刑을 당한 치욕을 참고 空前의 傑作인《史記》를 남긴 그로서는 당연한 自負心이다. 역시 유명한 史書인《漢書》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고금의 변화에 통달해 일가를 이루었다). 따지고 보면 著者가 한 사람인 책을 읽는 것은 모두 '一家之言'을 따르는 셈이다.각자가 一家를 이루는 一家見을 갖도록 열심히 노력하되 학문적 맹종(盲從)은 '學說의 對立'을 가져온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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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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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2.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
거절은 성공의 씨앗 - 배리 J 피버, <자갈 속의 다이아몬드>의 저자
내 첫 번째 작품 <판매 기술>은 26개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끝에야 겨우 팔렸다. 그러니 나만큼 거절에 도통한 사람도 없으리라. 이제 나는 재능있는 수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출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안다. 그런 종류의 거절을 연거푸 당하면, 그들의 자신감과 인내심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첫 번째 거절을 당한 후에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망연자실해져서 손놓고 앉아 있지 않았다. 계속 시도했다. 그리고 다섯, 여섯 번째 거절을 당한 후에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대리인에게 전화해서 내 책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말이, 시중에 내 것과 유사한 책이 너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출판업자가 출간을 망설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경쟁이 치열한 그 분야에서 튈 수 있는 신선한 접근과 중요한 아이디어를 작품에 담았노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또 거절을 당하자, 나는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서 내 작품이 빛을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 책에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가? 출판업자의 인정을 받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나는 다음 거절에도 비슷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그렇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이 제안한 변화를 작품에 시도했다. 이제 나는 거절을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출판업자들은 모르는 사이에 내 작품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그때, 나는 거절은 실패가 아니라는 교훈을 배웠다. 마침내 27번째 출판업자가 내 책의 판권을 샀을 때, 그는 26번이나 거절당한 원고가 아니라 26명의 유능한 프로의 충고가 담긴 것을 손에 넣었다. 거절은 한 사람의 의견에 불과하다. 당신이 거절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당신의 자신감을 짓밟고 앞으로 전진하기 못하게 한다.
거절이 없으면 성공도 있기 마련 - 릭 겔리니스, 델피 재단의 이사이자 수백만 달러를 모금한 장본인
우선 '성공적인 요청'의 의미를 확실하게 분간하라. 베이브 루스는 1330번이나 삼진을 당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홈런왕'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714개의 홈런을 때렸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것 자체가 전광판으로 가는 한 걸음이요, 언젠가 때리게 될 홈런에의 접근이다.
팀 피어링
예전에 부동산 일을 할 때, 나는 그것이 숫자 게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밖으로 나가서 계속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야 한다는 테이프를 봤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밖에는 수천 가구의 주택이 있고, 나는 끊이지 않고 매매 주문을 받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뿌리고, 그들의 현관에 얼굴을 내밀고, 할로윈 호박을 나눠주었다. 곧,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찾게 되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사람들에게 계속 얼굴을 보인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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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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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4. 북방 원정에 나서다
연나라를 구원하다
마침내 제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제환공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제수(濟水)를 건넜다. 제수 건너편 언덕에는 노장공이 영접차 나와 있었다. 제환공은 노장공에게 산융을 토벌하러 북방 원정을 간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노장공이 청했다.
"군후(君侯)께선 앞으로 표랑(豹狼) 같은 오랑캐를 무찌르고 북방을 평정할 것인즉, 우리 나라도 연나라처럼 군후의 은혜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니 과인도 이번에 국력을 기울여 병사를 이끌고 군후를 따라 종군하겠습니다."
제환공이 대답했다.
"북방은 멀고도 험한 곳이오. 과인은 군후에게 이 어려운 고생을 시킬 순 없구려. 만일 이번 거사가 성공하면 이는 군후가 염려해 주신 덕택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뜻대로 북방 정벌의 일이 되지 않으면 그 때 가서 다시 군후께 군사를 청하겠으니 물리치지 마시고 과인을 도와 줘도 결코 늦지 않으리이다."
노장공은 허리를 굽히며 만일 기별만 하면 언제든지 가서 도와 드리겠다고 쾌락했다. 이에 제환공은 노장공과 작별하고 서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한편 오랑캐 두목은 그 이름이 밀로(密盧)였다. 그가 연나라 경계를 유린한 지도 이미 두 달이 지났다. 그가 연나라 사람과 여자를 약탈한 것만 해도 일일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산융은 제군이 구원왔다는 걸 알자 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제환공이 계문관에 이르렀을 때다. 연장공(燕莊公)이 영접을 나왔다.
"먼 이 곳까지 친히 병사를 이끌고 구원와 주셔서 그 은혜가 참으로 망극합니다."
곁에서 관중이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산융이 지금까지 득의하고 달아났으니, 아직 그들의 병력에 손상이 없을 것인즉, 우리가 물러가면 그들은 반드시 또 연나라를 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그들을 무찔러 북쪽 우환을 아주 덜어 버리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제환공은 즉시 쾌락하고 산융의 본거지를 치기로 작정했다. 이에 연장공이 청했다.
"원컨대 본국군이 전대(前隊)가 되어 앞길을 열겠습니다."
제환공이 은근히 대답했다.
"귀국은 지금까지 오랑캐와 싸우기에 피곤하였을 터인즉, 어찌 또 앞장을 설 수 있으리오. 군후는 후군이 되시오. 과인의 군사만으로도 족할 줄 아오."
그러자 연장공이 천거했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80리를 가면 무종(無終)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산융처럼 오랑캐 족속이기는 하지만 뜻이 산융과 맞지 않습니다. 그들을 초청해서 길 안내를 받는다면 좋을까 합니다."
연장공의 말에 제환공은 공손 습붕에게 많은 황금과 비단을 주어 그들을 청해 오라 일렀다. 이리하여 무종에선 대장 호아반(虎兒班)이 기병 2천을 이끌고 오니, 제환공은 크게 기뻐하며 많은 물품을 하사하고 그들을 전대(前隊)로 삼았다. 대군은 열을 지어 전진했다. 그들이 2백 리쯤 갔을 때 갑자기 길은 좁아지고 산이 첩첩으로 치솟은 험한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제환공이 연장공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이 곳은 규자(葵玆)란 곳입니다. 바로 북융으로 드나드는 길입니다."
관중과 상의한 제환공은 물자와 군량 저장소를 규자에 두기로 하고 나무를 베고 흙을 쌓아 관(關)을 만들었다. 포숙아(鮑叔牙)가 이 곳을 맡아 경비를 하는 동시에 필요에 따라 물자와 군량을 보급하기로 했다. 3일 동안 군사들을 쉬게 한 제환공은 약하고 병든 군사를 골라 이 곳에 남기고는 대열을 정비해 다시 전진했다.
밀로의 도주
한편 밀로는 제군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장수 속매(速買)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니 속매가 아뢰었다.
"제나라 군은 멀리 오느라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그들이 병영을 세우고 안정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습 공격을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속매의 말을 들은 밀로는 3천 기를 속매에게 내주니 속매는 산속 여기저기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제나라 군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길 안내를 맡은 제군의 전대(前隊) 호아반은 앞장서 갔다. 속매는 이를 보자 즉시 1백여 기를 거느리고 전대로 오는 호아반에게 달려들었다. 호아반은 적을 보자 공을 세우고자 용기 분발하여 자루가 달린 철조추를 높이 들어 속매의 머리를 내리쳤다. 속매는 말고삐를 젖히며 재빨리 몸을 피한 후 긴 장검을 빼어 들고 달려들었다. 그들이 어우러져 몇 합을 싸웠을 때였다. 속매는 거짓 패한 척하고 호아반을 숲속으로 유인했다. 호아반은 급히 속매를 추격했다. 그러자 속매는 슬쩍 손을 들어 신호했다. 그러자 사방 곳곳에서 산융의 매복병들이 쏟아져 나와 호아반을 앞뒤에서 공격했다. 호아반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말이 화살에 맞아 뛰지를 못하는 바람에 차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호아반은 죽기를 각오하고 몰려오는 적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이미 패배는 확실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였던 것이었다. 그 때였다. 관중이 이끄는 본대가 당도했다. 이에 왕자 성부(成父)는 크게 신용(神勇)을 발휘하여 속매의 군사를 무찌르고 선발대인 호아반을 구출했다. 속매는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많은 군사를 잃은 호아반은 관중 앞에 와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관중은 부드러이 웃으며 말하고 도리어 그에게 준마(駿馬)까지 선물했다.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오. 장군은 너무 개의치 마시오."
호아반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다시 제나라 대군은 동으로 30리를 갔다. 그 곳 지명은 복룡산(伏龍山)이었다. 제환공은 연장공에게 청하여 함께 산 위에 하채했다. 왕자 성부와 빈수무는 산 밑에 하채했다. 그리고 큰 수레를 서로 연결시켜 성 모양으로 주위에 둘러 놓고, 군사들은 순시하면서 경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이튿날이었다. 영지의 밀로는 친히 속매를 대동하고 기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싸움을 걸었다. 그들은 거듭거듭 제영(齊營)을 쳤다. 그러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수레를 뚫고 쳐들어가진 못했다. 이러는 동안에 어느덧 오후가 됐다. 관중은 산 위로 올라가 사방을 굽어봤다. 웬일인지 산융군은 점점 그 수가 줄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드러누워 제군 진영을 향하여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관중이 호아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이야말로 장군이 설치(雪恥)할 때요."
호아반은 즉시 응낙하고 수레로 둘러놓은 성을 열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나는 듯이 나갔다. 이를 보자 습붕이 크게 놀라 관중에게 물었다.
"적의 계책에 빠져드는 것이나 아닙니까?"
"나에게 이미 요량하는 바가 있소."
관중은 웃으며 말하고는 곧 왕자 성부를 불러 일지군을 거느리고 왼편으로 나아가라 명하고, 또 빈수무를 불러 역시 일지군을 거느리고 오른편으로 나아가 서로 접응하도록 명령했다.
"혹 적의 복병이 있거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오라."
원래 산융이 전문으로 하는 계책이란 군사를 매복시키고 적군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융은 제군이 굳게 지킬 뿐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산골에다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나머지 몇몇 군사만 있는 것처럼 꾸미고는 말에서 내려 갖은 욕설을 퍼부어 제군을 영채에서 끌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호아반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선두로 달려오는 걸 보자 이젠 계략대로 됐다 생각하고는 모두 말을 버리고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호아반은 즉시 군사를 독려해 달아나는 산융의 뒤를 쫓아가 무찌르려 하는데, 바로 이 때 문득 대채에서 회군하라는 금(金) 소리가 일어났다. 호아반은 하는 수 없이 추격을 단념하고 말고삐를 돌려 본채로 돌아갔다. 밀로는 호아반이 더 뒤쫓아오지 않고 자기 영채로 돌아가는 걸 보고서 곧 기(旗)를 휘둘러 산골짜기에 매복시켜 둔 복병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복병들은 왕자 성부와 빈수무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해서 흩어져 달아나기 바쁜 지경이었으니 밀로의 명령은 하등 소용없게 되었다. 마침내 산융은 많은 군마를 잃고 대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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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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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시골
우거진 여름 나무 그림자가 아니라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이 앙상하게 남은 겨울 나무의 그림자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듯하다. 우거진 나무 그림자라는 것은 으슥한 낮잠의 터는 되어도 겨울 나무 그림자의 외롭고 아름다움은 없다. 겨울 나무가 푸른 그림자를 처녀설의 흰 막 위에 던지고 있는 그림은 쓸쓸하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나는 겨울에 함경선을 지난 때에 가장 흔히 본다. 과수원이나 혹은 낙엽송림에 눈이 쌓여 아직 밟히지 않은 그 백지 위에 나뭇가지 혹은 수풀의 그림자가 푸른 목판화같이 또렷하게 밝혀져 있는 풍경은 아무리 상 주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나가는 그 한 폭을 아깝게 여기며 다음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다. 조촐하면서도 쓸쓸한 나무 그림자를 볼 때 나는 시골의 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차가 한적한 역에 머물러 눈에 싸인 마을을 바라보면서 고요한 길을 걷노라면 대체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없는가 그 속에도 생활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별것 아니라 나무 그림자 같은 생활이 그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상한 것은 그런 생활에 곧 또 익어져 감이다. 화려한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쓸쓸한 곳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이요, 살라는 마련인 듯하다.
무료한 속에서 나는 C의원을 찾는 날이 많았다. 응접실에서 난로를 쪼이면서 한가할 때의 닥터 B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지운다. 밤이면 나로가 달아서 한구석이 과실같이 새빨갛게 익은 것을 둘러싸고 앨범을 뒤적거리고 '우울한 일요일'의 레코드를 듣다가 이웃방에 준비되어 있는 늦은 만찬을 시작한다. 식탁의 진미는 인읍에서 주인이 손수 사 온 도미, 굴과 식혜, 수정과, 부인이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 더운 온돌방에서는 이 이상의 선미는 없다. 식사가 끝나면 윷놀이를 하고 상품을 나눈다. 그러나, 시골의 살림은 나무 그림자같이도 호적하고 쓸쓸하다. 난로를 끼고 창으로 눈을 내다보고--너무도 단조하면 젊은 B박사는 인읍으로 영화 구경을 종용한다. 30 몇 년 형인지의 조금 낡은 자가용 차를 손수 운전해 가지고 집 앞까지 맞으러 온다. 같이 타고 몇 마일권 채 못 가서 발동이 머물고 속력이 없어진다.
간신히 몰아 가지고 온 길을 되돌아 어디로 가는가 하고 의아해하노라면 차는 도로 병원으로 들어가 차고 앞에 선다. 여러 날 쓰지 않았던 차에 물을 넣은 지가 오래 된 까닭에 어느 결엔지 얼어 버려서 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굳은 눈이 구두 밑에서 빠작빠작 울리는 밤거리를 걸어가서 차부에서 버스를 타면 아무래도 인읍까지는 10분이 넘어 걸린다. 늦은 영화관에 들어가면 이어 케이블과 콜베엘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시작된다. 낡고 망측한 토키를 끝까지 듣고 나면 골이 띵하다.
거리의 찻집 '동'에서 이것도 망측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쯤 쉬다가 이번에는 택시를 세내서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한낮은 되어서 B씨를 찾으면 그는 조반이 끝났다고 하면서 피곤의 빛을 띠고 나타난다. 들어 보면 놀라운 곡절이다. 새벽 네 시는 되어서 초에서 난산의 급한 환자가 있다고 사람이 뛰어온 까닭에 십리나 되는 원수대까지 차를 몰고 가, 사경의 산부를 수술하고 태아를 조각 조각 오려서 낸 후 집에 와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늦은 조반을 먹고 나니 그 때라는 것이다. 아무렇거나 간에 단조를 깨뜨린 셈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병원의 흥분은 지나쳐 처참하다. 중요한 것은 산부의 뒷소식인데 며칠 후에 들으니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18세의 애잔한 소부가 마을의 젊은이와 눈이 맞아 만주에까지 뛰었다가 다시 마을에 돌아와 살림을 시작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나서 그가 위독할 때에 누구 한 사람 위문 오는 사람도 없고 수술을 시작할 때에는 물 끓여 부는 사람조차 아쉬워서 곤란이었다는 것이다.
말하는 B씨의 낯에도 피곤의 빛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쓸쓸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참한 이야기다. 시골의 생활이 겨울 나무 그림자같이 적적하고 외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나무 그림자의 푸르고 아름다운 점만은 이 산부의 이야기와 인연을 붙여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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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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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튤립꽃 같은 친구
멀리 떨어져 살고, 한동안 소식이 뜸하더라도 어릴 적의 친구는 늘 따뜻한 아름다움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살아온다. 어린 시절에도 빨간 스커트에 샛노란 스웨터를 즐겨 입던 나의 친구는 나이 쉰이 된 지금에도 빨간 원피스와 빨간 코트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으나 조금도 어색한 구석이 없고 오히려 멋져 보였다.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빛깔이 화려하고 선명한 한 송이 튤립을 떠올리곤 했다. 편지를 쓸 때면 서두에 `좁은 문의 벗에게` `나의 그립고 사랑스런 벗에게`라고 즐겨 쓰며 끝에는 `나의 예쁜 벗에게, 꼬마 친구가`라고 쓰는 친구. "이 나이가 되어서도 네겐 예쁘다는 말밖엔 달리 할 수가 없구나"라고 되풀이하는 내 어릴 적의 친구. 바로 옆에서 소곤대는 것처럼 다정한 마음과 따스한 웃음이 넘쳐나는 그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문득 먼데 있는 그가 보고 싶어진다. 현재 캐나다에 살고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벗 현숙이가 퍽도 오랜만에 나와 연락이 된 후 보내 온 첫 편지의 몇 구절을 다시 읽어 본다.
`...그리운 친구야. 반가운 손님이 집에 오면 맨발로 달려나가서 춤추고 싶은 심정처럼 이 편지도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의 너를 반기는 나의 춤이란다. 초등학교 때, 너의 집에 가면 너의 어머님이 고추에 밀가루를 입혀서 찐 반찬과 감자를 주셨던 생각이 난단다. 그리고 네가 나한테 예쁜 조가비를 비단 헝겊에 싸서 준 생각도 나는데 그 귀한 조가비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예쁜 새들이 앞뜰에 와서 노래할 때마다 먼 곳에 있는 친구를 생각하게 됨은 언젠가 우리 둘도 정답게 앉아서 새들처럼 속삭이고 싶어서일 거라고 생각한단다. 정말 보고 싶구나. 네가 이곳에 올 기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의 시들이 내 마음에 닿으면 때로는 눈물이 되고, 때로는 사랑이 되고, 때로는 환희가 됨을 느낀다. 네가 옛날에 내게 써준 한 구절을 늘 기억하며 너를 그리워한단다. 너는 잊었을지도 몰라. `간밤에 별이 곱다고 주고받던 이야기, 깨고 나니 꿈이었구나`하는 구절을 말이야. ...나에겐 주은(June)이라는 키가 크고 예쁜 딸이 하나 있단다. 마음이 아주 착해. 그애가 영어로 쓴 시를 너도 한번 읽어 볼래?....`
앤(Anne)이라는 세례명을 지닌 내 친구 현숙이는 내가 창경 초등학교 5학년 때 강원도 원주에서 전학을 왔고, 6학년때도 한 반이었는데 환히 웃는 그의 하얀 얼굴과 귀여운 보조개가 인상적이었고, 늘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구김살없는 밝은 성격이 내 마음에 들었다. 명랑하고 솔직한 그애에 비해 난 왠지 새침하고, 우울하고, 답답한 편이어서 더욱 그에게 매력을 느끼며 가까이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도 난 다른 친구들을 제쳐두고 오직 현숙이하고만 학교 근방의 원남동, 동숭동 거리를 쏘다니며 졸업 후의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서로 다른 여학교에 들어가서도 우린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각자 새로 사귄 친구들을 소개해서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한 번은 어떤 사소한 일로 현숙이가 나 때문에 몹시 화가 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그애의 이사간 집을 찾아 헤매다 눈물이 날 만큼 혼난 일도 있었는데, 일부러 화해의 먼 길을 달려온 나를 친구는 퍽도 감격하며 맞아들이던 생각이 난다. 친구가 대학을 졸업하고 혼담이 오갈 무렵 나는 이미 수녀로서 처음으로 서원을 한 후 서울에서 첫 소임을 하고 있었는데, 이름난 꽃꽂이 연구가인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연구소에서 있었던 몇 번의 만남을 끝으로 친구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나는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다. 외국에서도 서로 한두 번 편지를 주고받긴 했으나 연락이 끊어졌다가 거의 20년 만에 다시 연결이 되어 편지를 주고받은 뒤 6년 동안은 또 무소식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1993년 5월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친구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내 연락처를 알아냈다며 국제전화를 걸어 외동딸 주은이가 미스코리아 캐나다 대표로 한국에 가게 되어 동행을 하니 잠깐이라도 꼭 만나자는 것이었다. 친구가 늘 모범 남편이라고 자랑하던 과학자인 강 선생도 우리가 25년 만에 만나 서로 어린애처럼 얼싸안는 모습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 우리 수녀원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친구는 내내 감동으로 목이 메인다면서 눈시울을 적셨고, 해인이란 이름에선 바다내음이 나지만 내 어릴 적의 이름 명숙이가 더 정겹다고 했다. 내겐 필요도 없는 알록달록한 팔찌를 풀어서 정표로 받으라던 친구는 예쁜 편지지와 카드도 선물로 잔뜩 놓고 갔다. 뜻밖에도 자기 딸 주은이가 잠시 한국에 와서 어떤 배우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들의 사랑이 하도 아름다워 자신의 모습도 한 번씩 돌아보게 된다던 친구. 그 사랑을 꼭 축복해 주고, 언젠가는 축시도 보내 달라며 내게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열심히 적어 보내던 친구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더 가까워 보이면 아직도 묘하게 질투심이 싹튼다고 고백하는 나의 `튤립꽃` 친구는 어제도 팩스로 편지를 보내 왔다. 열두 살에 만났던 친구이니 열두 살이 된 것 같은 마음으로 그의 편지를 읽으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너를 안 지도 벌써 거의 40년이 되었지 않니? 반평생인 셈이야. 주님께서 맺어 주신 참으로 고운 인연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사위를 맞고 이런 저런 복잡한 일들도 많았단다. 봄 숨결 속에 피어난 예쁜 꽃들이 여러 빛깔로 뒤뜰을 장식하고 있는데 왜 나의 마음엔 예쁜 꽃이 피지 않는 것인지.... 현실에서의 도피가 아니고 부산, 너 있는 곳에 뛰어가 옛 친구, 꼬마 때 친구와 그리운 우리들의 작은 동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야. 네가 여길 다녀간 지도 두 해가 지났구나.`
친구의 딸 주은이가 약혼하기 두 달 전쯤, 나는 수녀원에 관계된 일로 2주 정도 캐나다에서 머물게 되었고, 특별 허락을 받아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은 일이라며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뻐하던 친구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꽃들이 많은 그의 정원에서 둘이 손을 잡고 사진도 여러 장 찍었는데, 친구는 그의 빼어난 미적 감각으로 실내장식이며 정원을 무척 아름답게 꾸며 놓아 시에서 주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상`도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아 더욱 인기인이 된 사위 민수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 주은을 위해 친구는 너더러 "나는 그들의 인간 엄마이니, 너는 천사 엄마의 몫을 맡을래?"라고 물어 왔다. 엄마는 너무 힘들고 이모 정도는 하겠다고 했더니 주은이는 이제 마음놓고 나를 이모라고 부른다.
친구는 요즘, 꽃잎을 안으로 오므린 튤립같이 사람들도 별로 만나지 않고 자신을 쓸쓸히 오므리고 사나 보다. 하나뿐인 딸이 결혼해서 한국으로 훌쩍 떠나고 나니 가슴속엔 슬픈 거미줄이 쳐 있는 것 같다고 시무룩해 한다. 내가 가끔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멜라니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며 오늘도 기도를 부탁해 오는 나의 벗 현숙에게 나는 바쁘더라도 종종 동심으로 돌아가 새처럼 즐겁게 편지를 써야겠다.
`...동무야, 잘 있었니? 내가 슬프고 우울할 때 가장 환한 기쁨과 웃음의 불을 켜서 당겨 주던 꽃. 튤립을 닮은 나의 동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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