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06호
2022.7.13 (음 6.15)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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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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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알면 더 많이 용서하는 법. ― 캐서린 大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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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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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동물, 언어
‘애’라는 말은 나이 어린 사람을 뜻하는 ‘아이’의 준말이다. 그러니 ‘애들’이라 하면 당연히 아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말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다른 단어와 복합이 되기도 하면서 그 뜻이 변하기도 한다. 말의 변화와 발전도 일어난다.
다른 나라 국민을 속되게 표현하고플 때는 종종 ‘미국 애들은’ 하는 식으로 말한다. 버젓한 성인인 경우에도 친숙하면서 약간 가볍게 표현하는 말이다. 반대로 특정 국민을 정중하게 말할 때는 ‘분들’이란 말을 많이 쓴다. 종종 재외 교민들이 한국에서 간 사람들을 일컬어 ‘한국 분들’이라고 쑥스러운 표현을 해줄 때가 많다.
생태계를 관찰한 영상물을 보면 그 해설 과정에 ‘녀석’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마치 동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라도 된 것 같다. ‘녀석’은 원래 의존명사이면서 간혹 대명사처럼도 사용된다. “녀석이 또 왔다”며 ‘남자’를 주로 가리킨다. 그러나 동물을 가리킬 때는 암수가 뚜렷하지 않다. 한편 반려견의 견주들은 반려견을 ‘애기’라고 의인화하고 있고, 수의사들은 견주들을 마치 부모 대하듯 부른다.
문법 교과서에서는 뻔한 대명사들로 우리의 ‘인칭’을 논하지만 언어 현장에서는 무언가 좀 색다른 ‘현상’들이 생기고 있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도 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표현도 더 다양해졌고 뜻빛깔의 미세한 변화도 눈에 뜨인다. 우리가 우리 언어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언어 현상에 대한 섬세한 감성도 잘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말을 발전시키는 주도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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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인권
인권 개념은 처음에는 신앙의 자유나 투표권 같은 개인의 사회적 권리에서 출발하여 점점 교육, 노동 등에 대한 폭넓은 권리로 관심사를 넓혀 왔다. 최근에는 더 고도의 포괄적 가치인 난민의 생존, 성적인 취향, 동물의 권리 등을 통해 과거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또 ‘언어’에 대한 인권 문제도 거론된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언어인 ‘모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는 대략 6천~7천 종의 언어들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1억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겨우 여덟 종이고, 천여 종의 언어는 그 사용자 수가 겨우 100명 미만이다. 그나마 20년 전 통계이니 지금쯤 사라졌을 수도 있다. 옛날에는 전쟁과 식민화로 사멸했지만 요즘은 이주와 혼혈 때문에 ‘스스로’ 언어가 사라지기도 한다.
언어는 전 인류의 공유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환경과 마찬가지로 함께 보호해야 할 의미가 있다. 한국도 근간에 입국한 결혼이주 여성들의 경우 자칫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상실하기 쉽다. 그들이 아무런 도움 없이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지구상의 다양한 언어 자원을 보호하는 데 동참할 수 있게 우리도 ‘언어 인권’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우리가 식민지 시절 말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듯이 이제는 우리의 새 이웃이 자기 모어를 지킬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가 아닌가 한다. 한국이 다른 ‘제국들’처럼 ‘언어의 공동묘지’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할 때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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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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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가 - 김수영
아가야 아가야
열발구락이 다 나와있네
엄마가
만들어준 빨간 양말에서
아가야 아가야
기저귀 위에는 나이롱종이가지 감겨져 있네
엄마는 바지가 젖는 것이 무서웁단다
아가야 아가야
돌도 아니된 너는 머리도 한 번 깎지를 않고
엄마는
너를 보고 되놈이라고 부르지
아가야 아가야
네 모양이 우스워서 노래르 부르자니
엄마는 하필 국민학교놈의 국어공책을 집어주지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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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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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망치한(脣亡齒寒)
//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① 가까운 사이의 이웃 나라 중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온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出典》'春秋左氏傳' 僖公五年條
춘추시대 말엽(BC 655),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 (獻公)이 괵, 우(虞) 두 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진나라와 괵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우(虞)나라의 우공(虞公)에게 길을 빌려 주면 많은 재보(財寶)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宮之奇)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 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 준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리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周皇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同宗)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害)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情理)를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宗親)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초(楚)나라 장공(莊公)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동의어】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유사어】조지양익(鳥之兩翼), 거지양륜(車之兩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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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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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진실되고, 뚜렷한 인간적인 힘은 특징상 신묘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공자는 일찍이 간파했으며, 그것에 대한 주의를 우리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미 너무나 친숙하고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사실 공자의 과제였다고 하겠다. 이런 경우에 필요한 것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이런 <자명한>면을 새로운 각도와 올바른 방법으로 만나는 일이다. 이러한 친숙한 영역으로 통하는, 즉 우리에게 새롭고 계시적인 시각을 마련해 주는 그러한 새로운 길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공자가 찾았던 길은 바로 예라는 통로였다. 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힘든 공을 들여야 한다.
예의 의미는 어원상<거룩한 예식>(holy ritual), <신성스런 의식>과 가깝다. 공자 가르침의 특징은예식을 올릴 때 쓰이는 말과 이미지들을 매개로 하여 그 안에서 인간 습속,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 사회의 참된 전통과 합당한 관습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과 예에 복종하는 의지가 바로 인간을 인간이게 할 수 있는 완전하고도 특유한 인간의 덕 또는 힘이라고 공자는 가르쳤다. 여기서 공자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전통과 관습이라는 전체에 주목을 하게 하며, 또한 신성한 예식, 거룩한 의식의 형상 등을 통하여 이런 모든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게끔 한다.
'정신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조야한 인품을 사회적 형식인 예와 잘 융화시켜서 이 둘을 덕, 말하자면 인간의 가치를 뚜렷이 나타낼 수 있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연금술(또는 도덕 연마)에 많은 공을 드린 사람을 말한다. 덕은 인간 상호간의 하나의 전형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들 속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전형들은 모든 예에 공통되는 일정한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전형이 되는) 행동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다움>, 즉 인간들 상호간의 성실성과 존중을 참되게 나타내 주는 모든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 행위들은 또한 특징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망인에 대한 애도, 결혼, 결투, 군사, 아버지, 아들 등등이 되는 인간적인 전형으로 세분화되어 문명된 행위를 구성하는 예식 진행의 절차를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여하간, 인간이란 어떤 우주적 또는 사회 법칙에 의해 규정된 상투적 행위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단순히 표준 규격화된 단위로만은 결코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은 사회 계약에 (능동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기 충족적이고 개별적인 (즉 원자적으로 완결되고 독립된) 인격체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조야한 충동이 예에 의해 도야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는 인간적 충동의 완성, 즉 충동의 문명적 표현이지, 결코 형식주의적인 비인간화가 아니다. 예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생동적으로 살려 내기 위한 인간 고유의 형식인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다만 <거룩한 예식>, <신성스런 의식>이라는 그저 일상적인 의미였던 것을 바로 인간 고유의 자기 계시적인 이미지로서, 말하자면 전통과 관습을 배워 익힌 인간 고유의 존재적 측면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한 것은 공자의 훌륭하고도 창조적인 통찰력 덕분이라고 하겠다.
능숙하게 익힌 의식을 몸소 행하면서, 각자는 전형적 행위에 따라 해내야만 되는 것으로 상정되는 바로 그 행위를 하게 된다. 나의 몸짓은-우리들 중에 아무도 억지를 쓰거나 밀어 부치거나 요구하거나 힘으로 해결을 보려고 했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조작>해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저절로 상대방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우리의 몸짓은 그때그때 적절하게 아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참여자들의 몸짓과 어울리는 것이다. 모두가 <예에 숙달되어> 있다면, 적절한 예식의 맥락 속에서-사실 글자 그대로-예에 맞는 몸짓을 해내면 될 뿐인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일어날 뿐인 것>이다. 순임금이 무엇을 하였는가? <자기를 받드는 마음으로 남을 대했을 뿐이로다!> 우리는 다음에서 신성한 예의 이런 자기 계발적인 이미지가 강조하는 행위의 분명한 특징들을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억지 없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기계적> 또는 <자동적>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식을 올리는 행위가 만약 자동적, 기계적이라면, 공자가 누차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예식은 빈약하고 공허하며 죽은 것이다. 그 속에는 혼이 없다. 에식의 참된 <모습>에는 일종의 자연스런 자발성이 있다. 예식을 올리는 개개인들의 진지하고 성실하게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예식에는 생명력이 있다. 정말 진짜 예식이 되게 하려면 누구나 <제사에 몸소 참여>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제사를 전혀 드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를 잘못 집행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는 것이다. 숙련된 세련미 부족으로 예식이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진행되거나, 예식이 겉으로 보아서는 매끄럽지만 진지한 목적 의식과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어딘가 기계적이며 맥이 빠져 보이는 경우이다.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에식은 숙련된 예식의 세련미와 혼용하는 집행인의 <현장성>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상적 융합이 바로 신성한 예식이라는 의미의 진정한 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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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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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4장
3. 노나라의 세 가지 수치
관중의 폭로 작전
제양공은 팽생을 죽임으로써 세상에 자기 죄상을 모두 폭로한 셈이 되었다. -여동생과 관계를 맺고, 매부를 죽인 놈. 백성들은 손가락질하며 은밀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포숙아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 제양공의 시대도 얼마 남지 않았도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 있었다. 어떻게 하여 노나라에서 공자 팽생의 비밀을 그렇게 빨리 알아낼 수 있었느냐는 점이었다. '누군가 귀뜸해 주었음이 틀림없다.' 포숙아는 이렇게 단정했다. '누굴까? 팽생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인물이.......' 관중을 만났을 때 포숙아는 이 궁금증부터 풀고자 했다.
"자네도 아다시피 팽생을 죽인 자는 제후이지만, 누군가 노나라에 귀뜸해 주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자넨 어떤가?"
관중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듯하군. 아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지."
포숙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 생각도 그렇다면...... 누구 심중에 잡히는 인물이 있지 않겠는가?"
"제양공을 임금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사람 가운데 하나겠지 누구겠나?"
관중의 말에 포숙아는 잠시 말이 막혔다. 순간 포숙아의 뇌리에 번개처럼 반짝하고 스쳐가는 하나의 예감이 있었다.
"혹시 자네가......."
관중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 신수의 집에 내 먼 친척되시는 어른이 가신으로 있네. 그분에게 부탁했었네."
포숙아는 밝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제후가 무도하다는 걸 여실히 밝힌 쾌거일세."
관중은 고개를 흔들었다.
"약간의 상처 정도를 낸 셈이지. 생각보다는 효과가 크지 못하단 말일세. 노나라 쪽에서도 팽생을 죽인 것으로 더 이상의 문제를 삼지 않으려는 듯하고, 주왕실이나 다른 나라 군후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거든."
"아닐세. 지금 백성들 사이에서는 제양공을 배척하는 흐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네."
"그런 정도로는 강태공 이래 13대가 계속되어 온 제나라 군위(君位)가 흔들리지는 않지. 그동안 역대 군후들이 쌓아온 적공(積功)이 그 얼마인가!"
"노나라가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을까?"
포숙아의 물음에 관중이 대답했다.
"새로 군위에 오른 노장공은 문강의 아들인데, 이복형이 있고 해서 나라 안이 그렇게 안정되어 있지는 않다네. 그리고 그는 모친에 대한 효도가 깊다고 하더군. 그래서 문강도 귀국조차 않고 있는 거라네. 제양공과 문강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 정도에서 두 나라 사이의 일이 매듭지어질 것 같네."
수치를 면하는 방법
사실 관중의 추측처럼 노나라에서는 새로 신하들의 벼슬을 정하고, 서출의 공자 경부와 노장공의 친동생 계우(季友) 등이 국정에 참여하는 등 공자들을 발탁하는 내정 쇄신(內政刷新)으로 난국을 돌파하고자 했다. 새로 신하들의 벼슬을 정하는 등 조정의 기강을 세운 노장공이 신하들과 상의했다.
"제양공은 장차 왕희(王姬)와 결혼한다. 우리는 그 혼사를 주관하려다 선군을 잃게 되었다. 그러니 제양공과 왕희의 혼사를 돌봐 줄 수도 없고, 또 모른 척하는 것도 주왕실의 권위를 생각할 때 곤란하다. 어찌하면 좋겠소?"
시백이 아뢰었다.
"우리 노나라에 세 가지 수치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를 아시나이까?"
노장공이 의아해서 물었다.
"세 가지 수치라니...... 그게 뭐란 말이오?"
시백이 차근차근 아뢰었다.
"선군이 비록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난 날에 형님을 죽이고 군위에 올랐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좋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수치입니다. 다음은 지금 선군(先君) 부인께서 국모(國母)이신데 귀국하지 않으시고 제나라에 머물고 계십니다. 주공의 입장에서는 모친이 외국땅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수치입니다. 이제 제나라 양공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주공께서 상주의 몸으로 그의 혼사를 돌봐 주어야 합니다. 모른 척하면 왕명을 거역하는 게 되고 왕명에 따르면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수치입니다."
노장공이 놀라 앞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 세 가지 수치를 어찌하면 면할 수 있겠는가? 계책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시백이 아뢰었다.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아름다운 일을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면 반드시 자기 자신부터 스스로 믿어야 합니다. 선군께서는 군위에 계시는 동안 천자의 인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주공께서는 왕에게 청하여 선군의 군위를 정식으로 인정받으십시오. 그러면 한 가지 수치가 덜어집니다. 다음은 지금 제나라에 계신 국모를 모셔오는데 사람을 보내어 국모에 대한 예의를 다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시면 두 번째 수치가 덜어집니다. 그 후에 왕희의 혼사를 주관하는 일인데 먼저 왕희를 위해 관사를 지으십시오. 그리고 주나라에 가서 왕희를 출행(出行)시켜 그 곳으로 모신 후 그 다음에 제나라로 전송해 보내십시오. 주공께서는 상주의 몸이라 바깥 출입을 못하는 중이라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 됩니다. 결코 예의에 어긋나지 않고 세상의 비웃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노장공이 크게 찬탄했다.
"과연 그대의 지혜는 무궁무진이로다."
마침내 노장공은 시백이 시킨 그대로 했다. 우선 노나라 사자는 주나라에 가서 주장왕을 뵙고 왕희를 모시러 왔다고 하고는 겸해서 청했다.
"세상을 떠난 저희 선군께서 저 세상에서나마 영화롭도록 제후의 복식과 비품을 내려 주소서."
주장왕은 이를 허락하고 죽은 노환공을 제후로 추증해 주는 한편 노장공을 정식으로 제후의 반열에 임명해 준 후 왕희를 내줬다. 노나라 사신은 백배 사은하고 나서, 왕희를 모시고 우선 노나라 행관으로 와서는 일박한 후 제나라까지 바래다 줬다. 그는 제나라에서 선군의 부인 문강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와야 할 사명까지 띠고 있었다. 마침내 제양공은 왕희와 혼례를 치뤘다. 그런데도 제양공은 문강을 곁에 두고 싶었다. 문강도 마찬가지로 제나라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공론(公論)이 무서웠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문강을 실은 수레가 제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문강은 아직도 제양공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남편마저 없는 과부 처지이니 더욱 그랬다. 그리고 노나라로 돌아가 자식을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자신이 음탕하여 남편을 죽게했다는 자책도 마음 한편에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쉴 줄 모르고 달리기만 하는 수레가 문강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어느덧 수레가 작 땅에 이르렀다. 문강은 수레 밖을 내다보다가 길가에 서 있는 한 깨끗한 행관(行館)을 보고 달리는 수레를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수행원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돌아가 노후에게 전하거라. 이 미망인은 이 곳에서 살다가 죽으련다. 여기는 노나라도 아니고 제나라도 아니니 바로 내가 살 곳이다."
사신은 그대로 돌아가 노장공에게 문강의 말을 전했다. 노장공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올 면목이 없어 그러는 줄 눈치채고 축구(祝邱) 땅에다 좋은 저택을 짓고, 문강을 영접하여 그 곳에서 살도록 했다. 이에 문강은 제나라와 노나라를 왕래하며 그 곳에서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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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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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내 고향 광주
내 고향 광주. 내가 살던 그 무렵에는 광주광역시가 아니라 전라남도 광주시였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계림동으로 그곳에서 고등학교 일학년 때까지 살았는데, 어린 시절에는 근처에 역이 있었으므로 기찻길을 벗삼아 놀았다. 기차가 지나가기 바로 전에 못이나 핀 같은 것들을 선로 위에 놓아두고 귀를 꼭 막고 숨어 있다가 기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간 뒤 달려가 보면 못이나 핀 같은 것들이 기차 바퀴에 눌려 납작해진 것을 보고 신기해했으며, 뜨거워진 선로에 귀를 대로 아득히 멀어져 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막연한 그리움에 젖기도 했다. 그 무렵, 우리 앞집 초가지붕에 불이 붙은 것을 동생 향이가 발견하여 온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와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 불길을 잡았던 기억도 새롭다. 이제는 그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비누방울같은 그리움으로 솟아오른다. 그 친구들 중에는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쭈욱 함께 다녔던 친구들도 많다. 거의 십삼 년 동안이나 함께 지냈던 친구들인데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덧 그 모습들이 희미하게 퇴색해 버렸지만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들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우선 감꽃이 하얗게 깔려있던 미원이네 집이 떠오른다. 미원이는 교대부속초등학교 시절의 친구인데 철길 건너편 동네에 살았다. 미원이네는 일본식 집이어서 다다미방이 있었다. 거기 놓여있던 앙증맞은 앉은뱅이 책상이 생각난다. 그 책상 밑에 감을 감추어두고 오빠에게 "책상 밑에 감 없어" 했다며 웃던 미원이. 감꽃이 하얗게 깔린 마당에서 감꽃을 주워 먹으며, 감꽃 목걸이를 만들던 추억이 아름답다. 잠시 헤어졌던 미원이와는 전남여중 입학식 때 다시 만났는데, 미원이가 다가와 웃었을 때 내가 몹시 쑥스러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에도 나는 퍽 낯가림이 심했다. 초등학교 때 늘 반장을 했던 순석이 생각도 난다. 야무지고 피아노를 잘 치던 순석이와도 여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다. 음악에 소질이 있던 순석이와는 두 해쯤 전에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성모병원 인턴과정에 있는 남동생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 그때 전화번호라도 알아두어야 했는데 하며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플라타너스가 아름드리 우거진 내 여학교 시절, 그 푸르고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가만가만 불러본다. 중학교 일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로 전학을 간 순옥이, 나주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던 영란이, 애교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덕자, 다리가 길던 종미,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던 영희, 그리고 고등학교 일학년 때 짝이던 경옥이와는 철없는 문학소녀시절을 함께 했다. 하교 길에 시장 어귀에서 국수를 사 먹으며 나누던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그리움의 실타래를 풀어헤친다. 경옥이를 만나지 못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경옥이가 보고 싶다. 그 애는 유난히 외로움의 그늘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쌍둥이 엄마가 된 순환이, 울산에서 알뜰살뜰 살고 있다는 묘남이, 광주에서 살구 있는 눈이 맑은 만금이가 떠오른다. 퍽 소중하고 그리운 친구들이다. 함께 은주네 농장에 놀러갔던 생각이 난다. 왜 그랬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뜨거운 아스팔트를 맨발로 걸어 은주네 농장에 가서, 손톱만한 밭딸기를 따먹으며 즐거워했다. 그 푸르고 햇살 쨍쨍한 날의 기억들, 그 속에는 보랏빛 등꽃이 소담스레 피어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난 지 어느새 이십 년이 넘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그리워진다는 말은 정말 옳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떠나왔지만 아직도 친척들이 살고 있고, 결혼한 동생 하나가 광주에 살고 있으므로 일년에 두어 번은 광주를 찾는다. 내가 살던 무렵보다 훨씬 크고 변화된 모습의 광주한복판에 서면 슬그머니 눈물 한 방울이 비어져 나온다. 흰 칼라의 교복이 눈부신 여학교 시절의 내 모습, 아버지의 손을 잡고 충장로를 걷던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사정없이 내 가슴을 헤집으며 되살아난다. 행복한 어린 시절, 눈물 많던 사춘기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의 좋은 친구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내 고향 광주. 참으로 정겹고 따스한 이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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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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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culpture at the entrance to the palace of Versailles, "La Paix" (Peace), by Jean-Baptiste Tuby. ]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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