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여백
3. 시지푸스의 행복
관용
모든 동물은 주어진 여건에 맞추어 적응할 때만 생존할 수 있다. 새는 날 수 있어야 살고, 고기는 헤엄을 칠 수 있어야 생존한다. 인간은 언어를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고 첨단 과학 시대에는 기술을 갖추어야 번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의 철칙이다. 적응에 필요한 능력이 자질이다. 동물에 필요한 자질을 본능이라 부르고 인간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덕목이라 호칭한다.
본능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데 반해 덕목은 인간 자신의 지혜와 의지에 의존한다. 동물의 본능이 자연적 산물이지만 인간의 덕목은 문화적 산물이다. 동물의 운명이 자연에 예속되어 있는 데 반해 인간의 운명은 자신의 자율적 결정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동물의 본능은 타고 나지만 인간의 덕목은 교육을 통해서 습득되고 개발된다. 동물의 본능이 불변한 데 비해 인간의 덕목은 변한다. 긴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인간의 생물학적 여건 그리고 그에 따른 생존 조건 및 근본적 욕망에는 큰 변화가 없다. 따라서 시대나 장소를 떠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조된 덕목들은 보편적 성격을 띤다. 유교의 인의예지의 개념들이나 고대 그리스의 용기, 진실성, 절제 그리고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란 개념들로 표현되는 덕목들은 다 같이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든 핵심적 덕목이다. 그럼에도 동물과는 달리 문화적 동물인 인간의 삶의 여건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소 가변적이며, 아울러 강조되는 덕목도 그만큼 상대적으로 달라진다. 원시 시대에 힘과 수렵 기술이 강조되어야 했다면 부단한 전쟁을 치러야 했던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는 충성심과 용맹성 등의 기사적 덕목이 높게 여겨졌다. 오늘날 급속히 변하는 무한 경쟁의 산업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력, 상인적 꾀 그리고 굽히지 않는 경쟁적 투지가 보다 값진 덕목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처럼 주어진 삶의 상황에 따라 덕목의 성격이 달라지지만 삶의 객관적 여건은 그 구성원이 어떤 가치, 어떤 도덕적 덕목을 선택하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크게 결정된다. 자비나 사랑의 덕목이 지배하는 사회적 삶의 여건은 경쟁과 패권의 덕목에 가치를 두는 사회적 삶의 여건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한 개인 혹은 사회의 가치관, 성격, 행동, 문화를 관찰하면 그 개인이나 그 사회가 귀중히 여기는 덕목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삶의 객관적 여건과 개인이나 집단이 갖고 있는 덕목의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 한 사회의 도덕적 상황은 그 인간의 생리적 조건이나 그 사회의 외적 여건으로만 설명할 수 없고 그 인간이나 그 사회 구성원 전체가 선택한 도덕적 가치, 즉 덕목의 선택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지금 전세계가 개인적, 집단적,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민족적 차원에서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은 어느 지역보다도 무자비하다 할 만큼 격렬하다. 개인적으로 보다 높은 경제적, 사회적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쟁에 들어가고 있고, 집단간에는 각자 집단적 이익을 위해 지역간에는 각 지역적 욕망을 위한 싸움으로 심한 갈등과 혼란을 낳고 있다. 국제적으로 치열한 경제 무역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자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남과의 대립을 면할 수 없다. 남을 정복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덧 이기주의자로 변했고, 어떤 양보도 마다하는 배타적인 거친 투쟁 정신이 귀중한 덕목으로 굳어가고 있다. 오늘날 개인적으로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삭막한 인심, 개인적 인간관계, 사회적으로는 오랫동안 겪고 있는 경제적 발전으로 가속화된 사회 및 정치적 혼탁과 혼란, 그리고 민족적으로는 반세기를 끌고 온 남북 분열이 가져오는 긴장과 고통, 우리는 바로 이런 와중에 살고 있다.
물론 우리는 민족적으로 개인적으로 생존만을 위해서도 투쟁해야 했고 현재도 그렇다. 민족의 자주성, 우리의 언어, 우리의 이름, 우리의 자존심, 우리 민족의 생존만을 위해서라도 일제와 반세기 동안의 투쟁을 해야 했다. 우리는 6·25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지난 30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민족적 저력을 분출시키면서 경제 전쟁에서 승리하여 폐허가 됐던 땅을 현대적으로 재건해야 했다. 민주화를 위해 그리고 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젊은이들과 아울러 국내적으로 투쟁해야 했다. 4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빈곤했던 우리는 이제 경제적, 문화적 선진국의 문턱에 서서 오랫동안 짓밟혔던 민족적 그리고 인간적 자존심을 크게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성취이다.
만약 우리가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투쟁하지 않았던들 이러한 결과는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점에서 투쟁은 미덕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만큼 우리의 삶은 정신적으로 삭막하게 비어가고 있다. 경쟁과 투쟁을 거듭하고 나의, 우리의 승리만을 고집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인간 관계는 그만큼 거칠고 험악해졌다. 그렇다면 물질만이 아닌 정신적 가치가 새삼 의식되어야 하며 갈등이나 투쟁이 아니라 평화와 협동의 인간 관계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사회적으로는 보다 민주적이고 정의롭고 평등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고 구체적으로는 첨단 기술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개방시대에 현명하게 대처할 시점에 놓여 있다. 남북간의 민족적 통일을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더 엄숙한 과업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는 맹목적 전투 정신으로만 풀릴 수 없다. 시대와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물질적 가치만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이며, 배타적 자기 주장만이 아니라 평화적 대화의 마음가짐이며, 폐쇄적이 아니라 개방적 태도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관용의 정신이다. 관용은 남의 존재를 나의 존재와 더불어 인정하고 포섭할 수 있는 심성이다. 그것은 남의 입장을 개방적으로 존중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편협한 고정의 울타리를 넘어 개방적으로 남에게 열려 있는 아량이다. 관용의 미덕을 가장 중요시한 이는 아마도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적 문필가 몽테뉴를 빼고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쩌면 관용의 덕목은 현실적으로 볼 때 몽테뉴가 살고 있던 16세기 유럽만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 오늘의 세계 전체, 어쩌면 언제 어디서고 가장 귀중한 덕목이어야 한다.
그 두 가지 철학적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흔히 믿고 있는 바와는 달리 혼자 존재하는 인간은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나'는 오직 남들과의 사회적 연관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부모를 떠나 생리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고, '내'가 어떤 인간인가는, 즉 '나'의 정체는 나의 가족, 이웃, 그 밖의 무수한 남들과의 부단한 관계 속에서만 결정된다. 그렇다면 남들은 갈등적 경쟁에서 나로부터 내제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부로서 포섭되어야 할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남에 대해 관용해야 함을 뜻한다. 둘째, 어떤 인간의 신념도 독선적일 수 없다. 아무도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근거가 없다. 신념의 상대성을 인정할 때 나는 남의 신념을 배제할 근거를 잃는다. 비록 나의 신념과 갈등할 경우에도 남의 신념은 나의 신념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남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내가 남에 대해 관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특히 지난 반세기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너무 개인적이었고 배타적이었으며, 폐쇄적이었고 독선적으로 되어왔다. 경쟁력, 투쟁 능력, 남 위에 승리자로서 설 수 있는 자질에 의해 나와 남들을 평가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없으며 우리가 남을 대하는 태도가 관용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세계가 결코 인간적일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거기에는 인간다운 삶이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이 땅에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느끼는 수많은 상처와 고통과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개인적, 사회적 문제의 근원적 원인은 바로 위와 같은 사실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관용의 덕목이다. 선진 문화인, 선진 문화 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다.
관용의 덕목의 가치는 위와 같이 도구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구적 의미를 떠나서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귀중하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꽃이기 때문이다. 어떤 꽃이건 아름다운 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그 자체로서 고귀하다. 그렇다면 삶의 궁극적 의미는 아름다운 꽃을 피운 데서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용의 덕목은 그러한 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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