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실 → 수필
|
|
|
철학의 여백
죽음으로 본 삶의 의미
인간의 일상적 삶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활동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생각하기 전에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배설하기에 바쁘며,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취직하고, 돈을 벌고, 지적 혹은 사회적 욕망을 충족하기에 여념이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철학적이기 전에 생물학적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가 있어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다.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우선 생물학적으로 존재한 뒤에만 생긴다.
그러나 인간은 역시 생각하는 갈대이며 생각하는 소이며 생각하는 돼지이다. 우선 생존하고 연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한 생존과 연명의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적어도 어느 순간 잠시나마 일상적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그 의미를 찾지 않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갈대나 소나 돼지와 다르다. 비록 영원히 살 수 있다 해도 의미가 정말 없다면 인간의 삶은 너무나 허망하고 공허하다. 그렇다면 일상적 삶을 뒤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을 있을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삶의 의미를 정말 절실하게 사색하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근본적 사건으로서 나의 죽음은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끝이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끝난다. 맛있는 것을 먹지도 못하고,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도 없으며, 아름다운 생각도 해볼 수 없다. 죽으면 땅에 묻혀 썩어 흙이 되거나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린다.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자식을 매장하면서, 친구가 누워 있는 관 앞에 분향을 하면서 느끼는 처절한 슬픔은 죽음이 모든 것을 박탈하는 한 생명의 궁극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죽음은 TV 스크린에 단 한 번 잠깐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닌가. TV의 뒤를 보거나 속을 뜯어봐도 그들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듯이 일단 세상을 떠난 부모, 자식, 친구를 다시는 볼 수 없다. 언젠가는 TV 스크린을 지나가는 영상처럼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허상이고 스크린 뒤에 영원히 꺼진 영상이 진짜 현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의 세계"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장해서 생식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의 고리 속에서 죽고 마는 모든 동물들의 운명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면 인간의 운명은 동물들의 운명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고, 동물의 삶이 허무하다면 인간의 삶도 다를 까닭이 없다. 언젠가는 죽어서 뼈도 남지 않고 이 세상에서 없어질 수밖에 없다면 생각할수록 고달프기만 하고 영원히 반복되는 인생은 무엇을 뜻하는가? 잔인한 하이에나에게 잡혀 뜯어먹히는 새끼를 바라보며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어미 가젤들은 무한한 무력감과 생명의 공허함을 느끼지만 자신만은 살아남으려고 목숨을 걸고 도망친다. 숨을 거두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무한히 슬픈 인간의 한계와 인생의 허무함을 새삼 의식하면서 나만은 하루라도 더 잘살아 남으려 하고, 어머니를 매장하고 돌아와 세수를 하고, 저녁을 먹고 보약을 마셔야 하며,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 나는 어미 가젤과 똑같이 이기적이다. 부끄러워도 그것은 우주의 한 질서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갈대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생의 의미가 있든 없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그만큼 인간다운 삶을 뜻한다. 가끔은 엄숙한 반성이 필요하다. 죽음은 그러한 기회를 준다. 어쩌면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삶과 죽음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신비롭고 숭고한 하나의 존재인 것 같다. 그런데 눈앞의 쾌락만 좇고 겉모양만 따르는 우리의 눈은 근시안적이고, 우리의 삶은 경박하고 피상적이다.
|
|
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
|
|
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3장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백다섯번째 이야기 - 탕과 재료
옛날에 한 국왕이 주방장에게 명하여 맛있는 탕을 끓이게 했다. 주방장은 물, 고기, 파, 생강, 콩 그리고 찹쌀 등의 재료를 솥에 넣고 정성들여 탕을 끓였다. 탕이 다 끓었는데 왕이 주방장에게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네가 끓인 탕에 재료를 넣은 순서대로 먼저 물맛을 보고 다음에는 고기, 그리고 파, 생강, 콩 마지막으로 찹쌀의 맛을 각기 따로 맛보고 싶다."
그러자 주방장이 국왕에게 말했다.
"탕은 이미 다 끓어서 여러 가지 맛이 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 각각의 맛을 대왕께서 음미할 수 있게 하겠습니까?"
그제서야 국왕은 이제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여러 가지 맛이 탕 속에서 섞이면 일일이 구별할 수 없는 법이로구나!"
<나선비구경>
백여섯번째 이야기 - 불씨
옛날에 한 바라문이 산속에서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시동에게 말했다.
"볼일이 있어 며칠 동안 마을에 다녀오려고 한다. 너는 집 안에 있는 불을 잘 단속해서 꺼지지않게 해라. 만일 불이 꺼지면 나무를 문질러 다시 불을 피워놓도록 해라."
바라문은 이렇게 지시한 후일을 보러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이 시동은 천성이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바라문이 있을 때에는 야단맞을까봐 두려워서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바라문이 하산하자 그 아이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는 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그만 불을 지키라는 바라문의 지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놀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와보니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아이는 얼른 땅에 엎드려 타다 남은 재를 힘껏 불어보았지만 한 점의 불씨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불이 다시 일어날 리 없었다. 아이는 도끼로 장작을 패면 불을 피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장작을 잘게 썰어 절구통에 넣고 절굿공이로 찧기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불씨는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후 바라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시동에게 물었다.
"집을 나설 때 불을 잘 단속하라고 일렀는데 불씨는 꺼뜨리지 않았겠지?"
"주인님이 나가신 후 제가 밖에 나가서 노는 바람에 그만 불을 꺼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불을 다시 피울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했습니다. 저는 불이 나무 끝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예전에 보았기에 도끼로 나무 끝을 패보았지만 불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잘게 썰어 절구통에 넣고 찧어도 보았지만 역시 불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시동의 이야기를 들은 바라문은 송곳을 꺼내 나무 끝 부분에 구멍을 뚫은 후 작은 나뭇가지를 넣고 힘차게 비빈 다음 연기가 일어나자 그 위에 건초를 쌓아 불을 피웠다. 그리고 시동에게 말했다.
"불을 피우려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법이지, 그저 장작을 두들겨 패고 찧는다고 해서 불씨가 생기지는 않느니라."
<장아함경>
|
|
글나눔 → 이글저글
|
|
|
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소진의 친척
동주 사람 소진은 고향을 떠나 유학하면서 돈을 벌지 못해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이 때 형제, 형수, 누이 등은 그의 무능함을 비웃으며 그를 ‘과천나무장수 나무라듯이’ 박대하였다. 그는 그럴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후에 그는 천하를 돌면서 여섯 나라의 합종의 맹약을 성사시켜 이들 연합국의 수상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주나라로 돌아왔고, 자신의 명망과 위세에 눌린 주나라 임금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금의환향한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만찬 식사를 할 때의 일이었다. 소진의 형제와 형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척하면서 곁눈으로 서로 볼 뿐,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진은 웃으면서 “전에는 그토록 나를 ‘쥘 데 없는 똥바가지’같이 대하시다가, 지금은 이토록 공손히 조아리시니 웬일들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소진의 형수가 지난날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린 채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솔직히 말했다. “계자의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계자는 소진의 자였다. 소진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부귀하면 상감마마 모시듯 하고 빈천하면 발꿈치의 때만도 여기지 않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구나....“라며 장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발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이 있지 못할 것이다!”하고는 가족들에게 많은 돈을 나누어 주었다.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운다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친구이며 위급할 때 서로 돕는 것이 형제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가난하면 피를 나눈 형제에게도 업신여깁을 받는데 어찌 부자인들 멀리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자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시인 토마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애송이들아, 돈은 꿀보다 달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우지!’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운다.
혁명에 대하여
혁명은 장미향수 같은 감상적이고 미적지근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명은 이상이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The French Revolution)
1789년 프랑스 의회는 국왕 루이 16세에게 의회에 출두하여 서정쇄신에 대한 공약을 하라고 촉구하였으나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는 1791년 9월 의회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하여, 봉건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였으나, 실질적인 개혁에 비협조적이고 오히려 의회 내의 왕정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누적된 사회문제, 부정부패, 국제적 전쟁 떼문에 도탄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1793년 의회는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기 위하여 공화정을 선포하고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아네트를 길로틴이라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고,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길로틴과 로베스피에르 단두대인 길로틴은 프랑스 사람 길로틴이 사람의 목을 빠른 시간 내에 자를 수 있게 고안한 것으로, 그는 기계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자신도 길로틴에 의해 목이 잘리는 운명에 처했다고 한다. 하여간 누적된 부정과 부패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방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한다는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권력을 잡자 서정쇄신이라는 명목으로 수천 명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철권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정치행위는 더욱 큰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와 민심의 이반을 일으켰고, 그 역시 1794년에 길로틴에 목이 잘렸다.
길로틴에 목을 대고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천명의 생명을 무참하게 죽인 자신의 잘못을 신에게 용서를 구하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행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고 지금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되새겼을까? 프랑스는 그가 처형되고 난 후 일종의 회복기에 들어갔지만 그가 남긴 악의 씨앗은 향후 25년간 치료할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가 죽고 난 후 프랑스 정치는 음모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며 더욱 부패되어 갔고 날마다 팽창하는 통화는 누구도 억제하지 못했다.
|
|
글나눔 → 읽어둘문학
|
|
|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6교시 : 직유법과 은유법은 글맛을 돋운다.
-'무엇은 무엇과 같다' '무엇은 무엇이다'의 묘미
1. 무심히 던졌던 한 마디
강도 푸르고
산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길섶의 풀잎도 푸르다.
이러한 문장이 하나 있다고 하자. 얼핏보면 매우 잘 쓴 문장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문장은 뜻이 아주 애매모호하다. 이 문장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드높은 성벽이 가로막혀 있는 느낌이. 그렇다면 그 성벽이란 어떤 것일까? 중학교 2학년때, 나는 아주 절친한 친구와 짝이 되어 무척 기뻤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 친구와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사이가 나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들어온 친구는 운동장에서 느꼈던 신나는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한창 들 떠 있었다. 그는 여느때 처럼 내 자리로 와서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나에게 실없이 장난을 걸었다. 옆구리에 간지럼을 먹이기도 하고, 뒤통수를 슬쩍 때리며 킥킥 거리기도 하고 ...... 하지만 나는 그 장난을 받아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 전날 저녁, 평소에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학원비가 든 지갑까지 잃어 버린채 맥이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뒈지지 않으려면 건드리지 마"하고 거칠게 말을 뱉아 버렸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나의 어깨를 흔들면서, "무슨일 있었어?"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생겼으면 위로를 해 주겠다는 뜻인 듯.
"이 자식아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잖아? 너 정말 죽을래?" 나는 친구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소리치고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야아, 왜 그러니? 말좀 해봐"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구"
친구는 자신의 위로와 친절이 순식간에 거부당한 것이 분하고 억울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새삼스럽게 따지고 들었다.
"야, 뒈지지 않으려면 건드리지 말라고? ... 아니, 이제보니까, 너 사람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구나." 그제야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표정을 부르럽게 바꾸면서 "아무것도 아니니까 상관하지 마"하고 말했다. 그것은 '네가 상관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모른 체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아무것도 아니라니?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내가 싫으면 솔직하게 싫다고 그래 그래 정 싫으면 선생님한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할 테니까"하고 토라져 버렸다.
"아니라니까"
나는 다시 강하게 부인했다. 그것은 '절대로 너와 짝이 된 걸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렇게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는 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너는 '아니라니까'라는 말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니? 말끝마다 '아니라니까, 아니라니까......' 나는 네가 '아니라니까'라고 할 때마다 속이 상해 죽겠어"하고 말했다. 나는 이제 어떤 말을 하더라도 토라진 친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렇듯 절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슬프고 쓸쓸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혼자서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날 밤 내내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왜 '뒈지지 않으려면'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했는지, 또 '건드리지 마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아니라니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했는지에 대해 누누이 설명했다. 그런데 그러한 설명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의 구구한 설명을 친구가 오해할까 두려워 졌다. 이제 한 마디 한 마디의 말 그 모든 것이 무서워 졌다. 나는 친구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만한 말에 대해 또 설명하고, 그 설명 가운데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도다시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소 보니 공책 9쪽을 빽빽하게 메워 놓았다. 그 때 무심히 던졌던 '뒈지지 않으려면 건드리지 마라'는 한 마디가 나와 친구사이의 감정을 이토록 복잡하게 비틀어 놓은 것이다.
이렇듯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내 뜻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해 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전해질 필요가 없는 뜻까지 전해져서 감정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글을 길게 써 보아도 내가 말하려는 내용이나 감정, 기분이 읽는 이에게 쉽게 전달되지 않을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비유를 사용한다.
2. 무엇은 무엇과 같다.
이글의 앞머리에 인용한 문장은 '푸르다'란 말을 생각 없이 너무 함부로 써 버렸다. 낱말은 쓴다고 해서 그 뜻이 오롯이 다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푸르다'는 말은 어떤 부분에서는 그 느낌을 온전히 전해 주지만,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때, 글쓴이가 자신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비유이다. 강, 산, 하늘, 풀잎이 똑같이 푸르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쓴 사람은 '푸르다'라는 낱말 하나로 일관하고 있으니 아주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 '푸르다'라는 낱말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비유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수단이자 장치이다.
(1) 옥색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강
(2) 진한 쑥물을 부려 놓은 듯한 산
(3) 쪽물을 들여 놓은 듯싶은 하늘
(4) 늦은 가을 아스팔트 바닥에는 은행잎들이 노랑나비들의 시체처럼 퍼덕이고 있었다.
(5) 함박꽃 마냥 탐스런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
(6)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 모래톱을 들이받고 있었다.
(7) 직유법은 안내원이나 누님처럼 다정다감한 비유법이다.
(8)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받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9) 넓바우 연안에서 잎에 잔등 위로 펼쳐진 하늘에 민들레 꽃가루 같은 별들이 달려 있었다. 가득 밀려 오른 바닷물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원시 양서류 처럼 넘실거리면서, 잠든 사람의 숨길 처럼 불규칙적으로 게으르게 모래톱을 핥고 있었다. 그 물결에서 별들이 덩어리지기라도 하고 더욱 잘게 깨어지기도 하였다 - 한승원의<아리랑별곡> 중에서
위의 물장들은 직유법이 잘 드러나 있는 예들이다. 직유법은 비유법 가운데서 가장 소박하고 친근한 비유이다. 고급스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렵거나 까다롭지도 않다. 딱 보면 그 느낌이 그대로 와 닿으므로 부담스럽지 않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을 손잡아 안내해 주는 예쁜 안내원이나 누님처럼 다정다감한 비유법이다. 그만큼 호소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비유법이기도 하다. 직유법은 표현 하고자 하는 대상, 즉 '원래의 생각(원관념)'에다가 '비유가 동원된 생각(보조관념)'을 고리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손을 잡아 안내해 주는 고리들은 '~처럼','~듯이','~같이','~듯싶다','~마냥','~인 양' 등이 쓰인다. 그래서 직유법은 '무엇은 무엇과 같다'의 형태를 띤다. 하나의 문장 속에 '원래의 생각'과 '비유가 동원된 생각'이 어우러져 그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이 때, 이 둘 사이에는 반드시 같거나 비슷한 점이 있어야 한다.
(6)의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 모래톱을 들이 받고 있었다'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파도 = 원래의 생각
. 황소 = 비유가 동원된 생각
. 같이 = 위의 두 개념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여기서 '원래의 생각'과 '비유가 동원된 생각'은 '크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이싿. 이번에는 독자들이 보내 온 글들 중에서 직유법이 잘 쓰인 문장 하나를 인용해 보겠다. 어미새가 알을 보호하듯(이) 조심스럽게 내 맘에 품어둔 꿈이 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어떤 것이 '원래의 생각'이고, 어떤 것이 '비유가 동원된 생각'이며, 또 어떤 것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지 각자 생각해 보자.
3 무엇은 무엇이다.
글을 쓰는데 있어 비유법은 싸움터에 나간 장수가 비밀스럽게 숨겨 가지고 있다.가, 문득 꺼내 휘두르는 칼과 같다. 그러므로 비유법을 적절하게 잘 쓰는 사람일수록 글을 잘 쓴다고 할 수 있다. 비유법 중에서 직유법 보다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은유법이다. 은유법은 직유법에서 사용하던 연결고리를 생략한 모양새이다. 그래서 은유법은 '무엇은 무엇이다'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라는 말은 은유법으로 바꾸려면 '같이'를 생략하면 된다. 즉'파도는 황소이다'가 그것이다. 그러면 밑줄친 부분에 유의하면서, 아해의 예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낙엽은 폴랑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 처럼 풀어져
일광의 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김광균의 <추일서정>중에서
(2)고독은 나의 광장
나의 침실
나의 우주
나의 초원
-조병화의 <고독> 중에서
(3)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고야 더욱 청량하다. 싱싱한 가을 아침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 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래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 말로 보는 이의 눈만 부실 뿐이다. -이희승의 <청추수제> 중에서
(4)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포장한 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피천득의 <수필> 중에서
이제 은유법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어느정도 개념이 잡혔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앞에서 직유법의 예로 들었던 문장을 모두 은유법으로 바꾸어 보도록 하자 .옥색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강 - 강은 옥색 비단이다.
.진한 쑥물을 부려 놓은 듯 한 산 - 산은 진한 쑥물이다.
.쪽물을 들여놓은 듯싶은 하늘 - 하늘은 쪽물이다.
.늦은가을 아스팔트 바닥에는 은행잎들이 노랑나비들의 시체처럼 퍼덕이고 있었다. - 은행잎들은 노랑나비들의 시체이다.
.함박꽃마냥 탐스러운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눈송이는 함박꽃이다.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 모래톱을 들이받고 있었다.-파도는 황소이다.
.직유법은 안내원이나 누님처럼 다정다감한 비유법이다. - 직유법은 안내원이나 누님이다.
4. 직유법이나 은유법이 잘 드러난 글
이번에는 독자들이 보내 온 글들 중에서 비유법을 한번 훑어보도록 하자. 아래 문장은 직유법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잘못된 장래의 희망을)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얼음이 녹고 눈이 녹듯이 서서히 녹여서 저 수평선 너머의 바다로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있다. 다음과 같이 고쳐 보자.
(잘못된 장래의 희망을) 겨울이 지나 따스한 봄이 왔을 때 햇살이 얼음을 녹이고 눈을 녹이듯이 서서히 녹여서 저 수평선 너머의 바다로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고쳐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쓸모 없이 지내고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내 마음속 어느 깊숙한 곳에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위의 문장에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를 직유법으로 바꾸어 보는건 어떨까? 내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문장도 다음과 같이 고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쳤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이렇게 쓸모 없이 지내고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는 생각이, 내 마음속 어느 깊숙한 곳에서 뒤통수를 내리쳤다.
다음 문장도 직유법을 잘 쓰고 있다.
나의 미래는 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을 은유법으로 바꾸어 보도록 하자.
나의 미래는 뿌연 안개이다.
5. 비유는 글쓴이의 개성에 따라 다르다. 직유법과 은유법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직유법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어 친근하고 소탈한 반면, '같이','처럼','듯이','마냥' 등의 연결고리를 붙이기 때문에 조금은 너덜너덜해 보인다. 이에 비해 은유법은 그 연결 고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그런만큼 은유법은 좀 거만해 보이고 쌀쌀해 보인다고 할까. 하지만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훌륭하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니까. 글을 쓰면서 직유법으로 쓸 것인가, 은유법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다를 뿐이다.
생각해 봅시다.
1. 비유법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단순한 것은 직유법이다. 이 직유법에는 반드시 연결 고리가 사용된다. 그렇다면 그 문장이 직유법을 쓰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수 있는 그 연결고리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아는대로 적어보자.
2. '내 마음은 호수요'나,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등은 은유법의 대표적인 예 들이다. 이 문장을 직유법으로 바꾸어 보고 은유법과 직유법은 djEJs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 보자.
|
|